- 외로움의 습격 - 김만권 저자(글), 혜다 · 2023년

외로움이 우파 포퓰리즘에 빠지게 만든다는 분석은 신선했다. 현재 우리나라 상황이 그러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능력주의는 결국 양극화를 만들어 낼 것이라는 분석도 동의한다. 이처럼 정치철학은 기존 철학과 다른 접근 방법과 해결책을 제시한다. 재미있게 읽었다.

prologue
21세기 '우리'의 또 다른 이름, '외로움'
그러니까, 2019년 겨울이었다. 내가 외로움으로 세상을 만나기 시작한 때가. 0O정신분석센터를 개원하신 분과 우연히 인연이 닿게 되어 그곳에서 무료 강의를 열었다. 물론 나는 정신분 석을 공부한 적이 없었기에 외로움을 정신 현상의 측면에서 설명할 순 없었다. 그 대신 철학적으로, 사회 정치적 현상으로 바라본 외로움에 대해 이야기했다. 누군가는 물을 수 있겠다. 왜 하필 '외로움'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됐느냐고. 표면적으론 그해 1월 영국이 세계 최초로 '외로움부 장관'을 임명했다는 보도가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차관급 인사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기사가 주는 충격이 가벼워지진 않았다. '아니, 정부가 특별히 외로움이라는 현(p. 5)상을 전담하는 관료를 임명했다니!' 결국 이 기사는 세계적으로 화제가 되었다. 정작 우리나라에선 홍미로운 해외 토픽들 중 하나로 취급되긴 했지만 말이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겠다. 인간은 원래 외로운 존재 아니냐고. 나도 한때 그렇게 생각했던 적이 있다. 외로움은 인간이 타고나는 감정 중 하나일 뿐이라고. 하지만 정치철학사 상 최초로 외로움을 명백하게 철학적, 정치적 주제의 하나로 다룬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는 이렇게 말했다. "외로움이 이토록 우리 일상을 지배하는 감정이 된 것은 20세기에 들어서다." 놀랍게도 영어권에서는 16세기까지 외롭다는 말이 존재하지 않았다. 달리 말해 외로움이란 그 이전까지는 말로 제대로 표현할 수 없거나 혹은 표현할 필요가 없던 것으로, 이후 사회적 변화와 함께 찾아온 새로운 감정이라고 할 수 있다. 강의를 통해 이러한 사실을 처음으로 알게 된 수강생들은 대부분 놀랍다는 반응을 보였다. 외로움이 학습되는 감정이라니, 그것도 20세기에 들어서야 제대로 이해하게 된 감정이라니. 더 놀라운 건 수강생들이 보인 반응이었다. 그해 00정신분(p. 6)석센터에서 무료로 강의를 한 후 비슷한 강의를 수십 차례 더 했는데, 그때마다 청중들은 '외롭다'는 말에 반응했다. 많은 이들이 이미 외로움에 시달리고 있거나, 서서히 혹은 빠르게 외로워지는 중이었다. 청소년부터 노인까지, 빈자부터 부자까지, 초등생부터 대학생까지, 부모부터 자식까지, 평범한 사람부터 시민사회 활동가와 정치 엘리트 들까지, 모두 외롭다는 말에 반응을 보였다. 그들이 고개를 끄덕일 때마다 진심 어린 감정이 전해졌다(p. 7)
바로 이 '외로움'이 19세기 말 전 세계적으로 제국주의가 부상하는 데 중대한 역할을 했다는 분석이 있어요. 생각해 보세요. 한 나라에 자기가 쓸모없다고 여기는 사람이 넘쳐 나는 상황이라면 분명 사회적 불만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지 않겠어요? 19세기 말 제국주의의 핵심은 바로 이런 사회적 불만 세력을 식민지로 내보내 사회 내 불안을 없애는 것이었어요. 물론 유럽과 다른 지역 사이에 산업화의 격차, 다른 말로는 근대화의 격차가 컸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죠(p. 33). 정리해 보자면, 외로움은 '이 세계에서 타자의 인정을 받으며 살아갈 터전을 잃은 느낌, 더하여 내가 이 세상에 쓸모없어졌다는 느낌, 그래서 결국엔 이 세상에 속할 곳이 없다는 느낌'이에요. 여기서 '느낌'이란 표현을 '상황'으로 대체해도 괜찮을 것 같아요. 느낌이 개인적인 것이라면 상황은 사회적 문제가 일어나는 맥락이란 뜻이니까요. 저는 이걸 한마디로 이렇게 옮기고 싶어요. '어렵고 힘들 때 나를 인정하고 도와줄 사람이 없다는 느낌, 그래서 이 세계에서 버려졌다는 느낌'이라고 말이죠. 이렇게 외로움이란 용어의 기원과 용례를 19세기 유럽의 상황에 대한 아렌트의 분석과 연결해 보면, 외로움은 인간 본연의 감정이라기보다는 산업혁명 이후 인간의 새로운 경험 속에서 학습된 감정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어요(p. 34).
"왜 외로움이 위험한가?"
한나 아렌트에 따르면, '외로움'이 위험한 이유는 '자아 상실'의 문제와 직결되기 때문이에요. 이를 설명하기 위해 아렌트는 외로움을 '고독solitude' 과 구분해요. 앞에서 일본이 2021년에 고독부 장관을 임명했다고 했죠? 이 사례를 보면 동아시아에선 외로움과 고독을 사실상 같은 의미로 쓰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어요. 하지만 서구 사회에서 이 두 용어는 전혀 다른 의미예요. 그(p. 35)래서인지 아렌트도 외로움과 고독을 엄격하게 구분하죠. 고독은 '이 세상에서 버려졌다'는 느낌을 주는 외로움과는 전혀 다른 상태예요. 오히려 고독은 자기반성의 상태라 긍정적인 것이라 할 수 있어요. 아렌트에 따르면 고독은 내가 나 자신과 마주 앉아 대화하는 상태에요. 다시 말해 고독은 "자신과 함께 있을 수 있는" 상태인데, 그 이유는 인간에게 "자신과 대화할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죠. 아렌트는 이를 "하나 안의 둘two-in-one"이라 표현하면서, 이 고독의 상태야말로 "모든 사유"가 이루어지는 기본 조건이라고 규정해요.
아렌트에게 고독이 더 의미있는 이유는 '고독에서 비롯되는 사유'야말로 한 인간이 이 세상과 접촉을 유지하고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에요. 고독이 만드는 사유가 자기반성으로 향한다 면, 이건 결국 사유의 본질인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대답을 스스로 정립해 가는 과정이라 할 수 있어요. 그러니까 한마디로 나의 정제성을찾는 과정이죠. 그런데 이 정체성은 나 스스로 규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에요. 아렌트의 표현을 그대로 빌리자면, "내 정체성의 확인은 전적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의존" 하기 때문이죠. 이런 이유로 사유하는 인간은 늘 "내 동료 인간들 의 세계 the world of my fellow men"와 접촉하고 있어요. 세계 속(p. 36)에서 나는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를 물을 때 그건 동료들과 내가 함께 짓고 있는 세계 속에서 나라는 존재가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묻는 거니까요. 정리하자면, 고독은 한 인간이 자아를 스스로 마주하고, 그 자아를 통해 세계와 접촉하고, 이를 바탕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데 필수적 조건이라 볼 수 있어요. 이런 이유로 세계와 접촉할 수 있는 통로로서 '교우 관계companionship'를 유지하는 일은 매우 중요해요. 개별 인간은 교우 관계를 어떻게 유지하느냐에 따라 자신의 존재 의미에 대한 이중성, 모호함, 의심 등에서 벗어날 수 있어요. 내가 누구인지 정체성의 혼란을 겪을 때 이들이 나의 정체성을 다시 확인시켜 주기 때문이죠. 그래서 아렌트는 이런 교우 관계의 힘을 "되돌려 놓을 수 있는 축복 the redeeming grace" 이라 표현해요(p. 37).
아렌트는 이렇게 자아도, 타자도, 세상도 상실한 인간에게 남겨진 유일한 정신적 능력은 세상의 경험과 분리된 '논리적' 추론이라고 말해요. 경험 속에서 타인과 사회에 대한 신뢰를 상실(p. 40)한 인간에게 믿을 수 있는 것은 자명한 공리뿐이니까요. 아렌트의 표현을 그대로 옮기자면 이래요. "2+2=4라는 자명한 공리는 절대적인 외로움의 조건 아래에서조차 뒤집힐 수 없다." 그렇기에 외로운 사람들은 자명한 공리를 제시하며 구원을 약속하는 이데올로기에 쉽사리 빠져들어요. 외로움 속에서 허우적거리며 이데올로기에만 집착하는 이들에게 현실의 경험은 의미가 없어요. 이들에겐 이데올로기가 현실에 부합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이 이데올로기에 부합해야 하니까요. 이데올로기에 부합하지 않는 경험은 이데올로기를 실현하는 과정에서 생겨나는 예외이거나 불가피한 희생에 불과하죠. 역사의 단계적 발전을 내세우는 공산주의가 그랬고, 인종의 진화를 내세우는 나치즘이 그랬어요. 이것이 바로 아렌트가 나치나 스탈린 체제와 같은 전체주의가 대중의 지지 속에 유지된다고 주장하는 주요한 이유예요. '전체주의는 외로워진 대중의 지지로 유지된다!' 그래서 아렌트의 '외로움'에 대한 경고는 매우 의미심장해요.
비전체주의 세계에서 인간이 전체주의적 지배를 예측하게 하는 것은, 한때는 우리가 노인과 같이 어떤 소외된 사회적 조건에서 겪는 고통이라 보았던 외로움이 우리의 세기에 그 규모가 계속(p. 41) 커지고 있는 대중들의 일상적 경험이 되고 있다는 사실에 있다.
아렌트의 이러한 분석은 21세기 우파 포퓰리즘의 등장과 함께 새롭게 주목받고 있어요. 대표적으로, 노리나 허츠는 《고립의 시대》에서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를 비롯해 전 세계적으로 확산 된 우파 포퓰리즘이 외로움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고 주장해요. 외로움이야말로 "어째서 그렇게 많은 사람이 최근 몇 년간 포퓰리스트 지도자, 특히 우파 포퓰리스트에게 표를 주었는지 설명해 주는 가장 중요하면서도 종종 간과되는 동인"이라고 강조하면서 말이죠. 허츠는 '이웃, 공동체, 친구'를 언급하지 않는 유권자들일수록 트럼프를 지지한다고 답한 비율이 높았음을 지적해요. 그럼 허츠가 근거로 제시한 다양한 통계들을 잠시 함께 살펴볼까요? 2016년 '미국 선거와 민주주의 연구 센터'가 미국인 3,000명에게 육아, 금전적 지원, 관계에 대한 조언, 차 얻어 타기 등 다양한 도움이 필요할 때 누구에게 의지하느냐고 질문했어요. 이에 트럼프에게 투표한 유권자는 힐러리나 샌더스에게 투표한 유권자보다 이웃이나 공동체, 친구 등을 언급하지 않고 그냥 스스로 해결한다고 응답한 비율이 더 높았어요. 실제 트럼프(p 42)의 지지층은 가까운 친구나 지인이 더 적다고 응답하거나 일주일간 그들과 보내는 시간이 더 짧다고 답변했어요. 2016년 공화당 예비선거에서 공공종교연구소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트럼프 지지자는 당시 경쟁 후보인 테드 크루즈의 지지자에 비해 운동 팀, 독서회, 학부모회 등과 같은 공동체 활동에 좀처럼 또는 전혀 참여하지 않는다고 답한 비율이 2배나 높았어요. 미국뿐만이 아니에요. 유럽에서 15년간 17개 국가의 6만 명을 대상으로 한 연구 결과를 봐도 자원 활동을 자주하거나 마을 조합 등을 통해 모임을 갖는 시민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우 파 포퓰리스트 정당에 투표할 가능성이 낮았다고 해요. 라틴아메리카 지역에서도 비슷한 결과가 나왔는데, 공동체와 더 광범위한 관계를 맺고 있을수록, 주변에 의지할 사람이 있다고 느낄수록, 우파 포퓰리스트에 덜 현혹되는 경향을 보였다고 해요.
이런 통계를 기반으로, 허츠는 서로 연관이 있다는 뜻의 '상관관계'가 원인과 결과를 나타내는 '인과관계'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우파 포퓰리즘을 지향하는 정치적 성향과 외로움 사이에 강력한 고리가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라고 주장하죠. 결론적으로 외로움은 한 개인의 삶을 무너뜨릴 뿐만 아니라 공동체의 삶 또한 위협하고 있으며, 실제로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단계에까지 와 있다고 볼 수 있어요(p. 43).
이런 경이적인 발전 속도는 세계적인 석학 제프리 힌턴 박사의 행보에서도 읽을 수 있어요. 토론토대학교 교수인 힌턴 박사는 인공지능 분야에서 전 세계적으로 가장 탁월한 학자 중 한 명으로 꼽히는 인물이에요. 이 힌턴 교수가 개발한 '딥러닝deep learing' 기술이 바로 요즘 화제가 되는 그리고 이 장의 가장 중요한 주제 중 하나인 '대화형' 인공지능의 기반이 되었죠. 그런데 이분이 2023년 4월에 10년 동안 일해 오던 구글을 떠나면서 인공지능 기술의 발전과 관련해 자신이 잘못 예측했다고 고백했어요. 몇몇 사람들이 로봇이 사람보다 똑똑해질 거로 예측했을 때 자신은 그게 앞으로 30년에서 50년 정도 걸릴 거라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이게 잘못된 생각이었다는 거예요. 지난 5년만 돌아봐도 인공지능은 너무 무섭게 발전하고 있다면서요. 이렇게 디지털 기술이 만들어 내는 변화를 그 기술을 만든 사람조차 제대로 예측하지 못하고 있는 게 지금의 상황이에요. 이처럼 디지털 기술이 너무 빠르게 발전하자 이에 대한 우려도 함께 커지고 있어요. 대표적으로 2023년 7월 할리우드 배우와 작가들의 파업은 이런 우려가 반영된 단적인 사건이었어(p. 77)요. 할리우드 배우들은 인공지능으로 만든 얼굴이나 음성으로 배우를 대체하지 않겠다는 보장을 요구했고, 작가들은 GPT와 같은 인공지능의 활용이 저작권과 생계를 침해하지 않게 해 달라고 요구했어요. 인공지능이 가장 대체하기 어려울 것이라 예측되었던 인간의 창의력을 바탕으로 하는 영역이 어떻게 잠식 되고 있는지 명확히 드러낸 파업이었죠. 이처럼 하나의 기술이 어마어마한 속도로 발전한다는 것은 이 속도를 따라잡을 수 있는 사람들이 점점 소수가 된다는 걸 의미해요. 그렇게 되면 당연히 이 기술이 가져올 엄청난 이득도 소수에게만 몰릴 수밖에 없어요. 브린욜프슨과 맥아피의 말처럼 소수의 승자 집단에게만 보상이 집중되는 결과가 나타나게 되는 거죠(p. 78).
이렇게 이용자 수가 많은 플랫폼이 큰 시장가치를 지닌 채 힘을 발휘한다는 건 특정 분야에서 독과점이 형성된다는 뜻이에요. 결국 이용자 수가 많은 몇몇 플랫폼만 이익을 내며 시장에서 버틸 수 있다는 뜻이죠. 이런 독과점은 검색 분야에서 가장 뚜렷이 나타나요. 여러분이 다 아는 구글이 대표적인 예죠. 구글은 우리가 정보를 찾을 때 광고비를 내는 업체의 정보를 가장 먼저 제공하는 방식으로 수익을 내고 있어요. 2022년 기준으로 세계 검색엔진의 92% 를 구글이 점유하고 있는 실정이에요. 엄청나죠? 그러다 보니 소위 구글한다는 뜻의 '구글링'이 '검색한다'는 말과 동의어로 쓰일 정도예요. 몇몇 다른 검색엔진들도 있지만 구글과 비교하면 상대가 되질 않아요. 마이크로소프트가 투자한 생성형 인공지능 챗GPT가 등장하면서 한때 마이크로소프트가 만든 검색엔진 '빙'이 2위를 차지하며 잠시 반짝했지만, 구글이 바드를 출시한 이후 다시 잠잠해진 상태예요. 국내 검색엔진으로 네트워크 효과를 누리고 있는 기업은 네이버예요. 한글이라는 독특한 문자 체계 때문에 구글과 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죠. 그러고 보면 네이버는 정말 세종대왕(p. 82)에게 진심으로 감사해야 해요. 2023년 기준으로 네이버는 한국 시장의 56%를 점유하고 있어요. 구글이 국내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35%이니 네이버가 독과점을 하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죠. 이같은 독과점은 온라인으로 요청하고 오프라인에서 노동력을 공급받는 컨시어지 경제 (운전, 심부름, 택배 등 각종 서비스를 대신해 주는 사업으로 마치 집사concierge처럼 일을 대신해 준다고 해서 붙은 이름)에서도 이뤄지고 있는데, 택시에선 우버가, 숙박에선 에어 비앤비가 지구적 차원에서 독과점 지위를 누리고 있는 대표적인 기업이에요. 비슷한 예로 '배달의 민족'은 한국 시장을 독과점하고 있죠. 이렇게 네트워크 효과가 만들어 내는 독과점으로 인해 소수의 플랫폼, 좀 더 정확히는 이런 플랫폼들을 소유하고 있는 소수에게 부가 집중되는 현상이 나타나요. 이러니 당연히 분배 가 양극화될 수밖에 없는 거죠(p. 83).
디지털 기술에는 부의 양극화를 심화시키는 또 하나의 특징이 있는데, 바로 중간 정도의 숙련이 필요한 일자리를 빼앗아 가고 있다는 거예요. 조귀동이 《세습 중산층 사회》 (2020)에서 설명 하고 있듯, 디지털 기술은 사무자동화에 많은 영향을 끼치기 때문에 반복 수행 비율이 높은 중숙련 일자리를 대체하는 경향이 있어요. 이런 중숙련 일자리가 사라지면 소수의 전문적인 능력을 지닌 집단과 그렇지 못한 다수의 집단으로 노동의 지형이 갈라지게 되고 이로 인해 임금 또한 양극화돼요(p. 84).
문제는 우리 사회에서 노동 문제를 다룰 때 숙련도에 크게 주목한 적이 없다는 데 있어요. 고숙련 노동력은 이미 대기업이 독점하고 있고, 중소기업은 고숙련 노동자들을 육성하는 데 드 는 비용을 감당할 여력이 없기 때문이에요. 상황이 이러니 직업을 전환해야 할 상황에 놓인 대다수 노동자들은 숙련이 무엇인지 개념조차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요. 이 때문에 산업 전반이 디지털 기술을 중심으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중숙련 노동자들은 고숙련 직종으로 넘어가는 데 어려움을 겪게 돼요. 결국 이 문턱을 넘지 못한 많은 이들이 저숙련 노동으로 내몰리면서 임금 또한 점점 더 양극화될 것이라는 분석이 일반적이에요(p. 87).
격차를 더 뚜렷하게 만드는 생성형 인공지능
지금까지 디지털 기술이 어떻게 분배를 양극화하는지 함께 살펴봤어요. 이번에는 새롭게 등장한 생성형 인공지능이 어떻게 이런 격차를 더 심화시킬 수 있는지 살펴보려 해요. 대체 생성형 인공지능은 어떤 방식으로 이 격차를 더 벌려 놓는 걸까요?
우선 챗GPT가 등장한 순간으로 돌아가 볼까요? 2022년 11월 30일은 아마도 역사적인 날로 기록될 것 같아요. 인공지능 스타트 업 오픈에이아이에서 대화형 인공지능 서비스 챗GPT를 처음 선보였기 때문이죠. 공개된 지 2개월 만에 챗GPT 사용자 수는 1억 명을 돌파했어요. 더 놀라운 건 당시 공개된 챗GPT가 3.5버전 이었는데. 기능이 더 향상된 챗GPT4가 2023년 3월 곧바로 출시 되었다는 점이에요(p. 88). 챗GPT가 공개되자 몇 가지 논란이 일었어요. 그중 하나로 챗GPT의 답변에 '오류'라고 볼 수도 없는 지어낸 이야기가 있다는 것이었는데, 사실 이는 매우 중요한 문제예요. 우리 대다수가 인공지능이 잘못된 정보를 제공할 리 없다고 믿거나, 그 정보가 잘못됐다면 데이터 부족이나 오류에서 비롯된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죠. 하지만 챗GPT가 내놓는 답변을 보면 단지 데이터 부족이나 오류 때문이라고 보기 어려운 부분이 있어요. 무엇보다 챗GPT는 여간해선 데이터가 부족해서 모르겠다는 답변을 내놓지 않아요. 그 대신, 인간으로 치자면 아주 천연덕스럽게 거짓말이나 다름없는 답변을 지어내죠. 예를 들어, 챗GPT는 이 책을 쓰고 있는 장본인인 정치철학자 김만권에 대해 《미국 정치사상》, 《한국 정치사상의 전개》 등을 썼고, 유엔 인권고등판무관사무소 자문 위원으로 활동했다고 답해요. 저는 그런 책을 쓴 적도 없고, 그런 일을 해 본 적도 없는데 말이죠. 물론 한국어로 된 데이터가 부족한 탓일 수도 있지만, 이 문제는 데이터 축적만으론 개선될 수 없어요. 그 이유는 GPT의 알고리즘이 정보의 '정답'을 찾는 대신 정보 간의 '관계성'을 분석해 답해 주는 구조이기 때문이에요. 결국 이 알고리즘을 바꾸지 않는 한 생성형 인공지능이 알려 주는 정보에는 상당수 잘못된 내용이 들어갈 수밖에 없는 거죠. 오히려 데이터가 축적돼 챗GPT의 답변이 정교해질수록 챗GPT가 제공하는 정보 중 잘못(p.89)된 부분을 찾는 게 점점 더 어려워질 것이라는 점에서 문제는 더 심각해질 거예요. 우리 대다수가 인간은 거짓말을 해도 인공지능은 그렇지 않다고 믿는 상황에서 인공지능이 제공하는 잘못된 정보는 생각보다 더 큰 파급력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죠. 이 점을 인식한 세계보건기구(WHO)는 2023년 5월 16일 생성형 인공지능의 사용과 관련해 성명을 하나 내놓았는데, 오픈 에이아이의 챗GPT와 구글의 바드 등 생성형 인공지능을 의학적으로 사용할 때 주의가 필요하다고 경고하는 내용이었어요. 생성형 인공지능이 형성한 정보에 오류가 있을 수 있으니 반드시 전문가의 엄격한 검증과 감독을 거쳐 사용해야 한다고 강조 했죠. 이 성명이 보여 주듯 생성형 인공지능의 시대엔 전문적 지식을 가지고 정보의 정확성을 판별할 수 있는 이들이 지금보다 훨씬 더 높은 가치를 인정받게 될 거예요. 쉽게 말하면, 초고숙련 전문가가 더 많은 주목을 받게 될 것이란 뜻이죠. 이걸 분배의 차원에서 보면, 소수의 전문가에게 더 많은 부가 쏠려 그렇지 못한 이들과의 격차가 더 벌어질 수도 있다는 의미예요. 단편적으로만 보면 생성형 인공지능이 모든 사람들에게 지식의 평준화를 가져다줄 거라 생각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생성형 인공지능이 등장한 이후 현실에선 과거보다 훨씬 더 엄격하게 정보의 정확성을 요구하고 있고, 이는 아주 소수의 전문가에게만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은 혜택을 주게 될 거예요(p. 90).
마지막으로 여러분이 오해하지 않도록 당부하고 싶은 게 있어요. 제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인간과 기계가 관계를 맺는 게 나쁘다는 의미가 아니에요. 다만 인간과 기계가 제대로 된 파트 너십을 맺기 위해선 먼저 인간과 인간의 관계 맺기가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죠. 그 이유는 인간이 인간과 관계를 맺을 때 가장 중요한 게 바로 '책임'이기 때문이에요. 타자와 건강한 관계를 맺기 위해선 그 관계가 잘 유지될 수 있도록 책임 있게 행동하는 게 무척 중요해요. 타인과 관계를 맺으며 이런 책임감을 먼저 배우고, 그 관계를 기계로, 비인간으로, 지구로 확장시켜 나가야 하는 거죠. 하지만 순서가 바뀌어 인간이 기계와 먼저 관계를 맺기 시작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아마도 그 관계 안에서 책임 있게 행동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아요. 인간과 기계의 관계란 인간의 의지에 따라 언제든지 마음대로 폐기해 버릴 수 있는 것이니까요. 만약 다른 사람들과 건강한 관계를 왕성하게 맺고 있다면, AI 친구는 좋은 친구 관계가 하나 더 늘어나는 거에 불과할 거예요. 하지만 주변에 친구가 전혀 혹은 거의 없는 상태에서 찾아온 AI는 완전히 다른 의미를 지니게 될 수도 있어요. 이런 이유로 저는 기계, 비인간, 지구 등으로 관계가 확장되는 지금 이 시점이야말로, 인간과 인간이 관계를 맺는 일이 더욱더 중요해졌다고 말하고 싶어요(p. 107).
우리가 사는 세계는 우연성으로 가득 차 있어요. 아무리 논리적인 예측이라도 틀릴 수 있는 게 바로 이 우연성 때문이에요. 《신호와 소음 The Signal and The Noise》 (2021)의 저자 네이트 실버는 삶의 규칙적 패턴이 박탈되면 인간들은 진리에서 멀어지기 마련이라고 지적해요. 규칙적으로 감지해야 할 신호에 소음이 끼어드는 것이죠. 이렇게 이따금씩 삶에 끼어드는 소음은 컴퓨터로도 쉽사리 제거할 수 없어요. 생각해 보면 플라톤이 너무 확고하여 절대 틀릴 수 없는 데이터인 진리를 모방해서 이상 국가를 만들고 싶어 했던 것도 당시 아테네와 그리스의 도시국가에서 일어나고 있던 우연한 사건과 혼란들을 통제하고 싶었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는 세계라는 건 플라톤이 말하는 이상 세계에나 있는 거예요. 동굴 바닥에 발을 붙이고 살아가는 우리의 삶은 변화무쌍하고 우연성으로 가득 차 있기에, 하나의 사건에 대해 내리는 판단 또한 시간이 지나면 달라져요. 그러한 우리의 삶이 담겨 있는 데이터 또한 진리와 수학적 추론 대신 변덕스런 의견과 모순적인 결정들로 가득 차 있죠. 그래서 각기 다른 경험을 쌓아 가는 인간들의 삶을 데이터화할 때, 그 안에서 유효한 패턴을 발견 할 순 있을지 몰라도 모든 걸 수학 공식처럼 짜 맞출 수는 없는 거예요. 결국 우리의 삶 곳곳에 편견이 스며들어 있다면, 우리가 만(p. 159)드는 데이터에도 그런 편견이 고스란히 반영될 수밖에 없어요. 아무리 데이터에서 편견을 제거하는 작업을 계속한다 해도, 삶이 지속되고 새로운 경험이 쌓고 쌓이는 과정에서 새로운 편견은 끊임없이 생겨날 거예요. 그러니 데이터에서 온전히 편견을 제거하는 일은 불가능하다고 봐야 해요. 그래서 저는 또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어요. 빅데이터도 편견을 갖는다(p. 160).
결국 능력주의 사회에서 실패한 사람들은 불평등을 경험하며 좌절에 빠지기 쉬워요. 왜 불평등을 경험하는데 좌절에 빠지냐고요? 보상이 작아서 그러냐고요? 아니, 이건 단지 보상이 충 분한가의 문제가 아니에요. 능력주의 사회에서 보상이 작다는 건 노력하지 않은 자들, 그래서 실패한 자들, 때로는 도움마저 요청할 자격이 없는 게으른 자들로 전락하는 걸 의미하기 때문 이에요. 이런 상황에서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들은 남한테 의존하며 연명하는 기생충 취급을 받죠. 쉽게 말해 실패한 것도 힘겨운데 도덕적으로도 게으른 자가 되고 때로는 사회에 해로운 존재로 낙인찍히고 마는 거예요. 그러니 이런 처지에 있는 대다수(p. 214)의 사람들이 좌절에 빠질 수밖에 없는 거죠. 마이클 영은 이에 대해 이렇게 말해요.
이렇게 능력을 결정적 요소로 보는 만연한 인식 때문에 아무 능력도 없는 다수가 무기력한 나락에 빠진다는 사실을 지적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사회학자로서 사명을 다하지 못하는 셈이다.
이렇게 절망에 빠지는 사람은 사회에 제대로 항의하지도 못하기 때문에 자기 자신에게 분노를 돌리게 되며, 결국 무기력해지면서 더더욱 확실하게 절망에 빠진다(p. 215).
능력주의 사회에서 밀려난 사람들 혹은 그럴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은 '자신은 재능이 없고 노력도 게을리했기 때문'에 실패 했다는 좌절감에 빠지기 쉬워요. 누구나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p. 261)다고 떠들어 대는 세상에서 자신은 아무리 노력해도 능력의 벽을 넘어설 수 없으니 자괴감 혹은 무력감에 빠져드는 거죠. 그렇게 위축된 사람들을 성공한 엘리트들이 오만한 시선으로 내려다 본다면, 수치심은 피할 수 없는 것이 되어 버려요. 샌델은 이들이 겪고 있는 상황을 '굴욕의 정치 politics of humiliation'라고 표현해요. 더하여 트럼프가 이런 굴욕의 정치에 매우 능했다고 말하죠. 그 누구도 밀려난 이들을 모욕하지 못하게 하겠다는 트럼프의 약속은, 실천과 상관없이 오직 약속만으로도 사람들을 끌어 모으는 데 충분했다는 분석이에요.
더 큰 문제는 외로움에 시달리는 바람에 선동 정치에 쉽게 넘어가는 대중들일수록 '혐오hatred' 현상과도 쉽게 결합한다는 거예요. 이를 좀 더 잘 이해하려면 일단 포퓰리즘, 특히 우파 포퓰리즘에 대해 알 필요가 있어요. 앞서 간단히 언급했듯이 포퓰리즘의 기본 논리는 '소수의 엘리트들이 우리 평범한 사람들의 권력을 빼앗아 갔으니, 그 권력을 다시 찾아 돌려주겠다.'는 것이에요. 21세기 좌파 포퓰리즘은 이 논리를 중심으로 충실히 움직이는데, 권력에서 배제된 자라면 누구나 연대해야 하는 존재로 규정되죠. 반면 우파 포퓰리즘은 소수의 엘리트와 평범한 사람들 사이에 제3의 집단을 설정해요. 여기엔 이민자, 외국인 노동자, 난민, 여성 등이 포함되죠. 이런 기본 구도 아래 우파 포퓰리즘은 소수의 엘리트들이 자국 내 다수의 '평범한 사람들' 대(p. 262)신 이들 '제3의 집단에 더 많은 관심을 쏟는다.'고 주장해요. 이들이 평범한 우리 보다 더 많은 권리를 누리는 것은 부당하다는 여론을 조장하여 지지자들의 분노와 혐오를 불러일으킨 후 이들을 세력화하죠. 쉽게 말해 '더 배제된 자'를 이용해 '덜 배제된 자'를 동원하는 방식이에요. 트럼프와 브렉시트가 바로 이런 우파 포퓰리즘의 작동 방식에 기댄 대표적 사례죠(p. 263).
누군가는 "그래서 능력주의가 공정하지 않다는 거냐, 그렇게 결론을 내고 싶은 거냐?"라고 물을 수도 있어요. 저는 누군가 능력주의가 공정하다고 강조하는 걸 부정할 생각은 없어요. 그 건 가치관의 차이일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능력주의가 말하는 공정성은 소수만을 보호할 뿐 평범한 다수를 보호하지 못한다는 사실만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어요. 또한 능력주의적 공정성이 디지털 기술과 결합할 때 더 많은 이들이 경쟁에서 밀려날 것 이란 점만은, 지금보다 더 많은 이들이 아무런 사회적 보호 없이 어떠한 도움도 받지 못한 채 외로움에 시달리게 될 것이란 점만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어요(p. 270).
어떤 인간도 자기 인생을 홀로 책임질 수는 없어요. 사회적 동물인 우리는 살아가며 때때로 다른 사람들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죠. 이 사회가 분업 체계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 자체가 결 국 누구나 다른 이에게 의존하고 있다는 걸 의미하기도 하고요. 따라서 이런 구조에서는 고립되는 사람들이 늘어날수록, 고립될 수 있다는 불안감이 깊어질수록, 사회는 불안정해질 수밖에 없어요. 사실 사람들은 이런 문제에 대해 본능적으로 잘 알고 있는 듯 보여요. 제가 여러분에게 '자기 책임의 윤리에서 벗어나자'고 제안 하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에요. 그리고 이 제안은 자기 인생에 대해 책임을 지지 말자는 뜻이 아니라, 모든 어려움을 나 혼자서 해결해야만 한다는 생각을 버리자는 의미예요. 때로 사회적 도움 없이는 해결이 불가능한 어려움들도 있거든요. 또 생계를 잇는 일, 직업을 구하는 일, 더 나아가 인간답게 사는 일에 도 도움이 필요한 순간이 자주 있어요. 우리가 다른 이나 공동체(p. 284)의 도움이 필요한 순간이 있다는 걸 인정한다면, 타인에게 '어떤 어려움이라도 혼자 감당해야만 한다.'는 자기 책임의 윤리를 무턱대고 강요하진 않을 거예요. 이것이 바로 디지털 시대의 외로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제가 제안하는 첫 번째 대응책이에요(p. 285).
사람들이 고립되고 파편화될수록 고통은 대체로 사유화돼(p. 290)요. 특히 능력주의가 지배하는 각자도생의 세계라면 고통은 철저히 개인이 감당할 몫이 되죠. '내 인생은 내가 책임진다.'는 윤리를 뼈에 새겨 넣은 사람들은 자신의 세계에서 타자를 밀어내요. 그 어느 시대보다 복잡하고 분주한 삶을 사는 우리에겐 타자의 말에 귀 기울일 여유가 없어요. 이런 세계에서 다른 사람이 내게 보여 줄 수 있는 가장 훌륭한 미덕은 내게 고통을 호소하지 않는 것뿐이에요.
이렇게 호소할 수 없는 고통이 계속 쌓여 가면 외로움으로 이어지게 마련이에요. 각자의 입안에 갇힌 고통의 언어들은 우리를 병들게 하죠. 그래서인지 이런 세상에서 내 말에 귀 기울이 는 존재가 있다는 건 그 자체로 엄청난 행운이나 다름없어요. 내 말을 들어 주는 이가 있다는 것만으로 우리는 치유받는 경험을 하죠. 경청의 친절함이 우리를 하나로 묶어 주는 거예요. 이에 대해 한병철은 이렇게 써요. "친근함과 경청이 없으면 공동체도 형성되지 않는다. 공동체는 경청하는 집단이다." 흔히 요즘 시대를 '공동체 없는 공동체의 시대'라고 표현하곤 해요. 이런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가 어떻게 하면 공동체를 다시 형성할 수 있을까요? 경청을 그 시작점으로 삼자는 게 바로 제가 드리는 두 번째 제안이에요. 여러분 생각은 어떠세요?(p. 29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