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6-04-18(토)
 
  • 이완용 평전 - 김윤희 저자(글), 한겨레출판사 · 202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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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매국노’ 이완용에 대한 일대기를 읽을줄은 몰랐다. 어떤 책을 보다 흥미가 생겨 읽었다. 이 책의 저자는 이완용에 대해 “명분, 대의, 정의보다는 실리를 추구하는 근대 실용주의적 사고를 갖고 있었다”고 평하며 이것이 그로 하여금 매국의 길을 걷게 했다고 했다. 12.3 계엄사태 때 관료들의 행태가 바로 그러했다. 그런면에서 이완용은 여전히 우리 곁에 살아있다. 이처럼 역사는 반복되기에 이 세상에는 궁극적인 소망이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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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신정변으로 청과 일본 사이에 톈진조약이 체결되었고, 임오군란 때 조선으로 왔던 청나라 군대는 철수했다. 대신 청나라는 1885년 위안스카이를 파견하여 조선에 대한 내정간섭을 강화했다. 위안스카이의 위세는 대단했다. 그는 20대의 젊은 나이에 버젓이 궁궐 안에서도 가마를 타고 다녔고, 고종을 대면할 때도 거만하고 위압적인 행동거지를 서슴지 않았다. 위안스카이가 조선 내정에까지 간섭하자 고종은 청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적극적으로 서양 열강을 끌어들이기 시작한다. 1886년 두 차례에 걸친 조선과 러시아 간의 밀약 사건은 청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려는 고종의 노력을 보여준다. 한편 조선에 있던 다른 나라 공사들은 위안스카이에게 불만을 갖고 있었다. 푸트(Lucius Harwood Foote)를 대신해 미국대리공사로 임명된 29살의 해군 중위 포크(George Clayion Foulk), 그리고 묄렌도르프(Paul Grorge von Mullendort)의 후임으로 온 외교고문 데니(Owen N. Deny) 등은 위안스카이의 노골적인 조선 간섭에 불만을 표했다. 위안스카이는 포크와 데니의 이러한 행동에 격분하여 1884년 12월 4일(p. 39)에서 7일까지 갑신정변에 대해 보도했던 영자 신문 『노스 차이나 데일리 뉴스 North China Daily News』의 기사를 문제 삼아 포크를 조선에서 축출하려 했다. 포크를 비롯한 미국공사관 측이 갑신정변의 사전 모의에 참여했다는 내용의 기사를 문제 삼은 것이었다. 갑신정변 처리 문제를 매듭짓지 못한 상황에서 미국공사관 직원이 갑신정변에 관여했다는 기사는 조선의 정계를 다시 한 번 들끓게 했다. 위안스카이의 입장을 지지했던 리홍장은 미국 정부와 교섭 하여 포크의 소환 약속을 받아냈다. 포크는 미국공사관의 무관직에서 파면되었고, 1886년 6월 30일 조선을 떠났다. 위안스카이의 독주를 막기 위해 데니는 1886년 9월 톈진에 있는 리홍장을 찾아가서 위안스카이를 교체해줄 것을 요청하기도 했다. 하지만 청은 조미통상조약 체결 당시 미국 대표였던 슈펠트(Robert W. Shufeldt)를 초청하자는 데니의 요청에 반대했다(p. 40).

 

왕권 회복의 발판을 마련한 고종과 중전은 8월 22일 농민전쟁의 원흉으로 지목되어 유배형에 처해졌던 민영준을 비롯한 민씨 척족들을 사면했다. 그리고 이틀 후 김홍집을 다시 총리대신에 임명한다. 김홍집의 재입각은 7월 23일 서울에 재부임한 이노우에의 입김이 작용한 것이었다. 이노우에는 일본의 영향력을 회복하기 위해 고종에게 300만 원의 기부금을 미끼로 던진 후 친일파를 입각시키고자 했다. 이미 내각을 장악할 정도로 권력 기반을 확보했다고 판단한 고종과 중전은 이 제의를 받아들여 김홍집을 다시 총리대신에 임명한다. 그러나 김홍집파는 이미 정치적 영향력을 상실한 뒤였기 때문에 정동파를 견제할 수 없었다. 1895년 8월 24일 김홍집 내각이 조직되었다. 박정양이 내부대신, 이범진(1852~1910)은 궁내부협판 겸 서리대신이 되었고, 이완용은 학부대신을 유임했다. 사실상 정동파 내각이라고 불릴 만할 정도로 이들의 입지는 크게 강화되었다. 또한 러시아 세력이 확장되면서 친러파인 이범진이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그는 당시 러시아 공사 및 미국공사와 친밀한 관계를 맺고 손탁호텔을 자주 왕래하면서 이완용 등의 친미파와 친분을 쌓은 정동파의 일원이기도 했다. 친러파의 대표격인 이범진과 친미파의 대표격인 이완용은 정동파라는 하나의 정치 세력으로서 강력한 반일 정책을 표방하면서 김홍집 내각을 압박했다(p. 73). 한편 김홍집 내각의 배후 세력이었던 이노우에 공사가 약속한 300만 원의 기부금 조달은 일본 내각의 반려로 무산되었고, 결국 이노우에는 9월 17일 조선을 떠난다. 이후 군인 출신인 48세의 비교적 젊은 미우라 고로가 신임 공사로 부임한다. 정치 경험이 많고 외교에 능했던 이노우에에 비해 군인 출신인 미우라는 공명심이 많은 인물이었다. 그는 조선 정부에 대한 반감을 표출하기 시작했고, 고종과 중전의 반일 감정은 더욱 커져만 갔다. 내각을 장악한 정동파 역시 고종과 중전의 의중에 부합하여 더욱 강하게 반일 정책을 추진했다. 이범진은 이완용 등과 함께 일본의 내정간섭 종식과 고종의 재집 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1895년 9월 4일 503회 개국 기원절을 제정했다. 또한 관료의 복식을 구제도로 환원시키는 상징성 있는 조치를 단행하고 일본의 강압에 의해 추진되었던 내정 개혁 중 일부를 무효화시켰다. 그리고 10월 2일에는 남아 있는 친일파를 제거하기 위한 인사이동을 단행했다. 이때 유길준은 내부협판에서 의주부 관찰사로 좌천되었다. 또한 상당수의 친일 세력이 자리 잡고 있었던 훈련대를 해산시키고 시위대만을 존속시켜 일시적으로 궁궐 수비에 공백이 생겼다. 정동파를 비롯하여 고종과 중전이 일본의 정치적 영향력을 배제하기 위해 강력한 반일 정책을 취하자 미우라 공사의 반감도 크게 고조되었다. 이에 미우라 공사는 일본의 영향력을 만회하기 위해 10월 8일 궁궐 수비의 공백을 틈타 중전을 살해하는 만행을 저지른다. 그리고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대원군을 입궐시킨 후 그가 중전을 살해했다(p. 74)고 사건을 조작했다. 경복궁이 아수라장이 되자 내각을 장악하고 있던 이완용 등의 정동파는 각각 미국공사관과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했다. 이렇게 해서 정동파 내각은 사실상 실각한다. 그리고 그 공백을 다시 김홍집파가 장악하면서 친일 내각이 수립되었다(p. 75).

 

독립협회는 1898년 2월 27일 회칙을 개정하고 임원진을 개편했다. 부회장이었던 이완용이 회장으로, 서기였던 윤치호가 부회장에, 그리고 남궁억이 서기로 선출되었다. 이완용은 회장으로 선출되면서 명실상부하게 독립협회의 반러운동을 실질적으로 주도하기 시작 한다. 이날 독립협회는 정교(1856~1925)의 제의로 러시아의 절영도 조차를 비판하는 공문을 외부대신에게 보낼 것을 결정했고, 다음 날 이상재, 정교, 조한우를 총대위원으로 한 공문이 외부대신서리 민종묵(1835~1916)에게 발송되었다. 이처럼 독립협회의 강력한 반러운동이 시작되자, 내각에서 친러파로부터 소외당하고 있던 내부대신 남정철(1840~1916)은 내각회의조차 거치지 않은 채 절영도 조차를 허가한 공문을 보낸 민종묵의 독단을 비판하면서 사직상소를 올렸고, 외부 관리들도 이에 동조하여 공무 처리를 거부했다. 사실 절영도 조차의 배후에는 러시아의 강압을 이기지 못한 고종이 있었다. 그러나 고종이 외교적 갈등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면서 자신의 의중을 관철시키기 위해 늘 그러했듯, 이번에는 외부대신서리 민종묵에게 은밀히 조차 허가를 지시했던 것이었다. 왕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당시의 사회적 통념 속에서 절영도 조차에 대한 모든 책임은 민종묵이 져야 했다. 그는 독립협회에 사과하는 답변서를 보내고 사직상소를 제출한 후 스스로 물러났다(p. 138).

 

친미 세력의 수장 이완용이 관직을 거절하고 고종의 계획이 답보에 빠진 상황에서, 1901년 3월 민경식이 고종에게 김영준의 모든 음모를 발설했다. 친일 세력을 제거하려 했던 고종은 민경식의 발고를 계기로 김영준을 체포했고, 곧바로 사형에 처했다. 한때 고종의 총애를 받고 정계의 주도권을 쥐었지만, 자신의 입지를 위해 고종의(p. 163) 뜻에 어긋나는 행동을 했던 김영준은 결국 죽음을 면치 못했다. 이처럼 대한제국 정계에서는 고종의 총애를 다투는 정치 세력간의 암투가 끊이질 않았다. 그 원인은 왕권 강화를 위해 외세와 정치 세력을 상호 견제시키는 고종의 국정 운영 방식 때문이었다. 미천한 가문 출신으로 오로지 고종의 총애를 얻는 것만이 출세할 수 있는 방법이었던 측근 세력들은 고종에게 자신의 인생을 걸고 있었다. 고 종 역시 정치적 기반을 갖고 있으면서 말이 많은 양반 대신들과 달리 황제의 일거수일투족에 신경 쓰면서 자신의 말 한마디에 생사를 거는 그들을 통해 권력을 강화해가고 있었다. 반면에 이완용은 고종의 총애를 받기 위해 염치도 모른 채 물불 가리지 않고 음모를 꾸미는 그들의 정치판에 끼어들고 싶어하지 않았다. 더구나 언제 바뀔지 모르는 고종의 마음만 보고 나서기에는 이미 오래전부터 이완용은 경험과 연륜을 겸비한 정치인이 되어 있었다(p. 164).

 

반면에 이제까지 이완용의 후원 세력이었던 미국공사 알렌의 정치적 영향력은 크게 축소되어 있었다. 고종과의 친분으로 조선 정계에 깊게 개입했던 알렌은 이미 미국 국무부로부터 대한제국의 정치 문제에 개입하지 말라는 경고를 여러 차례 받은 적이 있었다. 더구나 미국이 만주의 이권을 확보하기 위해 일본을 지원하는 쪽으로 노선을 바꾸고 있었기 때문에 미국공사였던 알렌이 고종의 반일 노선을 지지하기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1904년 1월에 러일전쟁으로 일본군이 서울을 점령할 것이라고 예상한 고종이 미국공사관으로 피(p. 178)신하고 싶다는 의사를 전달해왔을 때, 알렌은 그 요구를 강력히 거절한 적도 있었다. 대한제국의 정치 문제에 개입하지 않겠다는 미국의 정책 기조로 인해 고종과 이완용의 강력한 후원자였던 알렌은 더 이상 힘을 쓰지 못하고 있었다(p. 179).

 

국내외에서 벌어지는 예측 불가능한 상황은 1894년에서 1896년 사이의 상황과 매우 흡사해보였다. 표면적으로 유사한 상황의 재현 속에서 이완용은 새로운 가능성을 보았을 것이다. 미국의 거부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미국을 짝사랑하던 고종은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러시아를 끌어들이려 했다. 친러파 세력이 크지 않은 대한제국 정계에서 러시아 세력의 확장이 친미 세력의 확장과 연결된다는 점을 이완용은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그가 보기에는 아관파천 때와 같은 기회가 다시 찾아올 가능성이 컸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가능성은 그가 학부대신이 된 이후 빠르게 사라져 갔다. 1905년 9월 5일, 한국에서 일본의 우월권을 승인하는 조항이 들어 있는 포츠머스조약에 러시아가 합의하면서 전쟁이 재발할 가능성은 사라졌다. 또한 9월 27일, 영국은 일본의 한국 지배를 용인 한다는 내용의 제2차 영일동맹을 공개했다. 이로써 일본을 견제할 현실적 가능성은 사라졌다. 갑오•을미년의 위기를 아관파천으로 극복할 수 있었던 것과 같은 기대가 완전히 사라져버리는 순간이었다. 이때 고종은 측근 세력을 동원하여 미국 등에 지원을 호소할 방안(p. 180)을 고심하고 있었지만, 내각원 중 어느 누구도 이러한 고종의 계획 에 함께하지 않았다. 고종 측근들은 내각 대신을 친일 세력으로 몰아가고 있었지만, 내각 대신들은 일본의 영향력을 견제할 가능성이 사라진 이상 고종의 계획에 가담하지 않았다. 이완용 역시 아관파천 때와 같이 고종을 위해 어떠한 계획도 도모하지 않았다. 자신이 보았던 가능성이 불가능성으로 바뀐 이상 국제 정세는 10년 전처럼 되풀이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일본공사가 사실상 내각을 장악한 가운데 1905년 11월 이토 히로부미가 내한한다는 소문이 떠돌기 시작했다. 고종과 내각 대신들은 한일 관계에 중대한 변화가 있을 것이라고 직감했으며, 『황성신문』을 비롯한 언론도 일본이 조만간 한국을 보호국화할 것 이라며 우려를 표명했다. 한일 관계의 중대한 변화가 예감되는 가운데 이토 히로부미가 11월 10일 한국에 도착했다. 그는 고종에게 을사조약의 체결을 받아낼 생각이었다(p. 181).

 

을사조약 체결을 거절할 명분으로 외교 절차의 준수 이외에 고종이 내건 '대신과 인민의 의향을 묻는다'라는 것은 당시 대한제국의 정치체제상 단순한 핑계에 지나지 않았다. 전제 국가인 대한제국의 운명을 결정할 사람은 황제인 고종 한 사람뿐이었다(p. 190). 1897년 대한제국 선포와 1899년 대한제국 국제의 선포 이래로 대한제국은 조선의 통치 체제를 그대로 계승한 전제 왕국이었다. 갑오개혁 이후 입헌군주제 수립을 위해 개화파 등이 정치체제 개혁을 추진하려 했지만, 고종은 이를 철저하게 탄압해왔다. 고종이 개인적으로 아무리 인민의 뜻을 존중한다 하더라도 인민의 의견이 수렴될 제도적 장치는 전혀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 그런데 국가의 존망을 결정하는 순간 고종과 권중현 등의 대신들은 단지 황제의 자문 기구에 지나지 않았던 중추원을 마치 의회인 것처럼 말하면서 여론을 수렴해야 한다고 핑계를 대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처럼 국가의 중대한 외교 사안에 대해 국회의 동의를 받는 절차가 제도화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독립국가의 결정 과정을 존중해야 할 외교 상대국 일본이 고종이 주장했던 절차 중 '인민의 의향 을 묻는 과정'은 인정할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이토와 하야시는 대한제국 정치체제를 분명하게 지적하여 고종과 대신들의 말이 어불성설임을 비난했다. 이토는 고종과 대신들이 말하는 외교적 절차, 즉 일본이 외부에 조약안을 보내고 외부가 의정부에 보고하면 의정부에서 논의하고 고종이 협상에 임할지 말지를 결정하며, 만약 임한다면 전권공사를 임명할지 말지를 결정하는 절차를 거치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외부에 을사조약 초안을 보낸 후 의정부 회의가 열리기 전에 내각 대신들에게 동의를 끌어내어 책임을 회피하려는 고종을 압박하려 했던 것이다. 물론 그 절차도 일본의 강압에 의해 고종이 전권공사를 임명하지(p. 191) 않음으로써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절차상 하자가 있는 조약, 그리고 최종 결정권자인 고종이 조약문을 검토하고 가부를 결정했는지 여부가 분명치 않은 조악이었기 때문에 국제법상 허용되지 않는 것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동시에 이 조약을 막아낼 수 있는 절차상의 강력한 힘, 가령 의회제 같은 것을 갖고 있지 못했던 대한제국 정치체제의 문제 또한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국가의 운명을 결정할 권한이 황제 개인에게 주어져 있었다는 점은 독립 주권의 허약함 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상황을 만든 장본인이 고종이었다는 점 또한 부인하기 어렵다. 일본의 강압으로 궁지에 몰린 고종이 스스로 목숨을 내놓고 거부하지 않는 이상 조약을 회피할 다른 수단이 없는 상황이 빚어지고 있었다(p. 192).

 

신중한 개혁 노선의 표방, 그리고 제국의 분열

이완용이 내각 총리대신으로 확정된 후 이토는 1907년 5월 30일 대신들을 모아놓고 "한국의 존립에 있어서 가장 적절하고 긴요한 방침은 성실히 일본과 친목하여 일본과 존망을 함께하는 데 있다"라고 이야기했고, 이에 대해 이완용은 국가로서 독립할 실력이 없이 독립을 바라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일본과 제휴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화답했다. 그는 대한제국이 문명국으로 나아가는 데 일본이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라고 하면서, 일본이 힘으로 대한제국을 병탄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대한제국의 독립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며 친일을 통한 실력 양성을 주장했다. 이완용의 이러한 인식은 당시의 대한제국 지식인들 사이에 널리 공유된 것이었다. 1905년 11월 20일 「시일야방성대곡」을 실어 이토의 동양 평화 주장이 허구였다고 비판해 정간당했던 『황성신문』은 1906년 2월 12일에 복간된 후 일본의 보호국 체제를 인정하고 일본의 보호 아래에서 정부를 개혁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계몽운동 단체였던 대한자강회 등도 기관지를 통해 서양 국가들의 국가 연합 형태를 설명하면서 보호국이 식민지와는 다르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그리고 을사조약 전문에 명시되어 있는 "한국이 부강을 인할 시"에 보호를 철회하겠다는 내용을 들어, 일본의 보호 아래 정부를 개혁하고 실력을 양성하면 대한제국이 독립국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을사조약 체결 당시 '국망'을 외쳤던 언론 매체들은 점차 일(p. 220)본의 보호 아래 대한제국이 부강을 이루어야 한다는 실력 양성론으로 급격히 경도되어갔다. 물론 이들은 을사조약 체결 이후 일본의 대한 정책이 양국 관계를 더욱 갈라놓는다고 비판했지만, 동양의 안정과 평화를 위해 대한제국이 발전해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일 본의 보호가 필요하다는 점을 전면적으로 부정하진 못하고 있었다. 이들은 농업•상업•공업 등의 경제 발전 방안, 교육•출판의 확대 방안, 정부 개혁론 등을 제시하면서 무력 투쟁보다는 성실하고 근면한 생활 태도로 실력을 기르는 데 온 힘을 바쳐야 한다고 대한제국민들을 독려했다. 실력 양성과 계몽에 대한 열망이 어느 때보다 강력하게 표출된 것도 바로 이때였다(p. 221).

 

다른 한편 이완용이 매국 행위의 정점에 자리하게 된 배후에는 철저한 현실주의와 실용주의적인 인생철학이 있었다. 그는 유교 교육을 통해 의리와 명분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지만, 현실과 개인의 관계에 있어서는 매우 실용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다. 처음 관료가 되어 고종과의 경연에서 조괄을 등용한 조나라 왕의 선택에 대해 어쩔 수 없는 것이었음을 피력했던 점, 그리고 을사조약과 한일병합조약 체결 때 대세를 어찌할 수 없다는 발언을 했던 점 등을 미루어볼 때 그는 역시 철저한 현실주의자였다. 그러면서 그는 그 현실 가운데서 모든 것을 포기하기보다는 최대한 또는 최소한 얻을 수 있는 것을 생각하는 실용주의적 면모를 갖고 있었다. 을사조약을 맺을 것이라(p. 258)면 수정할 수 있는 것을 요구해야 하고, 한일병합조약을 체결할 것 이라면 얻을 수 있는 것을 얻어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그는 한일병합조약에 조인하면서 데라우치에게 세 가지 조건을 내걸었다. 첫째로 민심이 불복하지 않도록 인민의 생활 방도에 힘쓸 것, 둘째로 황실에 대한 대우가 민심을 움직이는 변수가 되므로 이들을 후하게 대우할 것, 셋째로 조선인이 일본인에 비해 열등한 지위에 떨어지지 않도록 교육에 관한 행정기관을 설치하여 일본인과 동일한 교육을 실시할 것 등이었다. 병합 조건으로 내건 세 가지는 평소 그가 나라의 발전을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교육과 경제 문제였다. 그는 주권이 없더라도 황실과 대한제국민이 편안하다면 그것이 더 나은 선택이라고 보았다. 명분, 대의, 정의보다는 실리를 추구하는 근대 실용주의적 사고를 갖고 있었다(p. 259).

 

격렬한 저항 운동의 발발, 내선용화의 논리가 강고해지다

1905년 을사조약과 1910년 한일병합조약 체결을 주도하면서 이완용은 독립협회 시절 문명화된 독립국을 만들자는 꿈을 포기한다. 일본의 제국주의적 성장과 대비해볼 때 대한제국은 스스로의 힘으로 문명국이 되기 위한 개혁을 성공시킬 수 없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이완용은 대한제국의 주권을 포기하는 대신 조선 인민이 문명화된 사회에 살게 된다면 그것이 실리를 얻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한일병합 이후 그가 농업 개량과 개간 사업을 진작하기 위해 노력한 것을 보면, 이러한 생각은 단지 자신이 누리는 영화를 합리화하기 위한 논리라고 보기 어렵다. 그러나 식민지 조선의 상황은 그의 생각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그는 총독부가 시행한 농업 개량, 도로 정비, 교육 시설 확대 등의 정책에 대해서는 조선인의 실력을 양성하는 것이라고 보았고, 그래서 이들 시책을 선전하는 데 적극 앞장섰다. 그러나 조선에 거주하는 일본인이 조선인을 차별하고 무시하는 언행을 일삼는 것은 몹시 싫어했다. 한 예로 3•1운동 기간에 부임한 3대 총독 사이토에게 이완용은 "조선인이 비록 문명인은 아니지만, 미국인은 그런 조선인을 마음속으로 개나 돼지처럼 생각하더라도 겉으로는 친절하게 대하는 데 일본인은 조선인을 직접적으로 멸시한다. 조선인이 일본인을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일본인이 조선인을 무시하는데 어떻게 진정한 내선융화가 이루어질 수 있겠는가"라고 말했다. 주미공사로 재임했(p. 275)을 때의 경험을 들어 일본인보다 문명인인 미국인도 겉으로는 조선인을 무시하지 않는데 하물며 일본인이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은 참을 수 없는 일이라고 비난한 것이다(p. 276).

 

'매국노'라는 말이 널리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1907년 고종의 양위 무렵으로 보인다. 고종의 선위를 주장하는 통감부와 친일파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대한매일신보』는 "일본 관리와 제 몸을 일본에 파는 매국적 수중의 계심이라"라고 하며 그들을 비판했다. 이후 매국적은 그 명명만으로도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 수치심 가득한 말로 그려졌다. 한일병합 이후에도 '매국'이라는 명명이 붙으면 조선인에게 인간 취급을 받을 수 없었다. 그래서 매국의 표상이었던 이완용의 죽음은 숙연해지는 인간의 죽음이 될 수 없었다. 그의 죽음과 함께 저주와 조롱이 난무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매국노'란 개념에 내포된 인간성의 상실 때문이었다. 이러한 저주는 인간성을 상실한 사람이 현실에서 부귀영화를 누리는 식민지 현실의 부조리에 대한 출구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완용이 매국노라는 오명을 쓴 것은 인간성을 상실한 그의 탐욕 때문이 아니라 현실을 인정한 가운데서 나름대로 '합리적인(p. 298)실리'를 추구했던 그의 사고 때문이었다. 무모하게 분개하거나 실리 없는 의리만을 고집하는 태도를 버리고,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최 대한 얻을 수 있는 이익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더 중시했던 그는 100년 전 다른 양반 관료들과 달리 선진적이고 합리적이며 실용적인 사고를 지닌 인물이었다. 그래서 그는 망국의 현장을 떠날 수 없었다. 마찬가지로 3·1운동으로 민족의 분노가 표출되었을 때도 그는 일본의 식민 지배에 분노하는 군중의 모습을 안타까워했다. 차별, 불평등, 억압에 분노하기보다는 그 현실을 받아들이고, 그 속에서 실리를 추구했던 그의 태도 가운데서 우리는 부조리한 현실 속에서 최대한의 이익을 얻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 선택이라고 믿는 현대인의 태도를 발견하게 된다(p. 2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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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305】 이완용은 죽지 않았다...이 시대의 이완용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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