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타자의 추방 - 한병철 저자(글) · 이재영 번역, 문학과지성사 · 2017년
사람(人)은 서로 기대며 살아야 한다. 그런데 타자를 배척하고 자기애에 빠져 산다. 그것은 결국 자신과 사회를 불행하게 만든다. 타자에 대한 혐오가 확산되는 이 세상에 이 책은 경종을 울리고 있다. 그런데 철학책이라 읽기 쉽지 않다.
세계적인 것의 폭력은 실제의 세계 전쟁처럼 사망자들과 난민들을 만들어낸다. 상업정신이 강요하는 평화는 한시적일 뿐만 아니라 공간적으로도 제한되어 있다. 반옵티콘으로서의 복지 지역 혹은 복지의 섬은 경계를 표시하는 울타리들과 난민수용소와 전쟁터로 둘러싸여 있다. 칸트는 분명 상업정신의 악마성을, 나아가 그 무이성성을 몰랐다. 그의 판단은 관대했다. 그는 상업정신이 "긴" 평화를 낳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이 평화는 그저 가상일 뿐이다. 상업정신은 오로지 계산하는 오성만을 부여받(p. 30)았다. 거기에는 아무런 이성도 없다. 그러므로 오로지 상업정신에 의해, 돈의 권력에 의해 지배되는 시스템 자체에도 이성은 없다. 오늘날의 난민 위기는 유럽연합이 이기적 목적을 좇는 경제적 상업연합에 지나지 않음을 폭로한다. 유럽의 자유 상업지역, 개별 국가의 이익을 추구하는 정부들 사이의 계약 공동체로서의 유럽연합을 칸트는 이성적 구성물로, 이성에 의해 인도되는 "국가연맹"으로 보지 않았을 것이다. 인권과 같은 보편적 가치를 추구하는 헌법공동체만이 이성에 의해 인도되는 공동체로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다. 이성에 의해 세워진 영구 평화에 대한 칸트의 관념은 무조건적인 "환대"에 대한 요구에서 정점에 도달한다. 이에 따르면 모든 이방인은 다른 나라에서 체류할 권리를 지닌 다. 그는 "자신의 자리에서 평화로운 태도를 유지하는 한" 적대적으로 취급받지 않고 머무를 수 있다. 칸트에 따르면 어느 누구도 "지구상의 어떤 장소에 있을 권리를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갖고 있지 않다." 환대는 유토피아적 표상이 아니라 이성이 강요하는 관념이다. "앞선 조항에서와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우리는 인간애가 아니라 권리에 대해(p. 31) 말하고 있다. 그리고 환대(손님으로 머무를 권리)는 이방인이 타지 사람의 땅에 도착했다는 이유로 타지 사람에 의해 적대적으로 취급받지 않을 권리를 말한다." 환대는 "법에 대한 공상적이거나 과장된 표상 방식이 아니라, 공적인 인권 자체를 위해, 따라서 영구 평화를 위해 국내법과 국제법의 성문화되지 않은 법전을 보충하는 데 반드시 필요하다. 이런 조건을 충족시킬 때만 우리는 영구 평화를 향해 지속적으로 접근해가고 있다고 자부할 수 있을 것이다." 환대는 자기 자신에 도달한 보편적 이성의 가장 높은 표현이다. 이성은 동질화하는 힘을 행사하지 않는다. 이성은 친절함을 통해 타자를 그 타자성 안에서 인정하고 환영할 수 있게 된다. 친절함은 자유를 의미한다. 환대의 관념은 이성을 넘어서서 보편적인 무언가를 제시한다. 니체는 환대가 너무나 풍요로운 영혼의 표현이라고 했다. 이런 영혼은 모든 단독적인 것들을 자신 안에 머물게 할 수 있다. "그리고 모든 생성 중인 것, 떠도는 것, 추구하는 것, 덧없는 것을 나는 여기서 환 영한다! 이제 환대는 나의 유일한 친교관계다. 환대는 화해를 약속한다. 미적으로 그것은 아름다움으로 나타난(p. 32)다. "결국 우리는 언제나 낯선 것에 대한 우리의 선의와 인내심과 공평함과 온유함에 대한 보상을 받게 된다. 이 보상은 낯선 것이 천천히 자신의 베일을 벗고, 새롭고 형언 할 수 없는 아름다움으로 자신을 드러냄으로써 이루어진다 이것이 우리의 환대에 대한 그의 감사다." 아름다움의 정치는 환대의 정치다. 이방인에 대한 적대성은 증오이며 추하다. 이 적대성은 보편적 이성의 결여를, 사회가 여전히 화해되지 않은 상태에 있음을 보여주는 징후다. 한 사회의 문명화 정도를 보여주는 척도는 바로 이 사회의 환대. 나아가 친절함이다. 화해는 친절함을 뜻한다(p. 33).
셀카 중독도 자기애와는 별로 상관이 없다. 셀카 중독은 고립된 나르시시즘적 자아의 공회전일 뿐이다. 내면의 공허에 직면하여 사람들은 자신을 생산하려고 헛되이 노력한다. 그러나 공허만 재생산된다. 셀카는 공허한 형태의 자아다. 셀카 중독은 공허감을 강화한다. 자기애가 아니라 나르시시즘적인 자기관계가 셀카 중독을 낳는다. 셀카는 텅 빈, 불안한 자아의 매끄러운 표면이다. 고통스런 공허(p. 42)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사람들은 오늘날 면도날을 들거나 스마트폰을 쥔다. 셀카는 공허한 자아를 잠시 동안 은폐하는 매끄러운 표면이다. 그러나 셀카를 뒤집으면 피가 흐르는 상처들로 가득한 뒷면을 보게 된다. 셀카의 뒷면은 상처들이다(p. 43).
삶으로부터 모든 부정성을 추방하고자 애쓰는 오늘날에는 죽음 또한 침묵한다. 죽음은 더 이상 말하지 않는다. 죽음은 모든 언어를 잃는다. 죽음은 더 이상 "존재하기의 한 가지 방식"이 아니라,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뒤로 미루어야 할, 삶의 종말에 지나지 않는다. 죽음은 그저 탈생산,(p. 48) 즉 생산의 끝을 의미할 뿐이다. 오늘날 생산은 유일한 삶의 형태로 전체화되었다. 건강 히스테리는 궁극적으로 생산의 히스테리다. 그러나 건강 히스테리는 진정한 활력을 파괴한다. 건강한 것의 창궐은 비만한 몸의 창궐처럼 외설적이다. 그것은 병이다. 그것에는 병적인 것이 내재한다. 삶을 위해 죽음을 부정하면, 삶 자체가 파괴적인 것으로 바뀐다. 삶은 자기파괴적으로 된다. 여기서도 폭력의 변증법이 확인된다. 활력을 부여해주는 것은 바로 부정성이다. 부정성은 정신의 삶에 영양을 공급해준다. 정신은 절대적인 분열 속에서 자신을 발견할 때 비로소 자신의 진실을 획득한다. 균열과 고통의 부정성만이 정신을 생생하게 유지해준다. 정신은 "부정적인 것을 외면하는 긍정적인 것"으로서의 "힘" 이 아니다. 정신은 "부정적인 것을 똑바로 쳐다보고, 부정적인 것의 곁에 머무를 때만 이 힘"이 될 수 있다. 오늘날 우리는 부정적인 것 곁에 머무르는 대신 그것을 피하려고 안간힘을 쓴다. 그러나 긍정적인 것을 고수하면 같은 것만 재생산된다. 부정성의 지옥만 있는 것이 아니라 긍정성의 지옥도 있다. 부정적인 것뿐만 아니라 긍정적인 것도(p. 49) 테러를 낳는다.
익숙한 세계의 붕괴가 일으키는 두려움은 깊은 두려움이다. 이 두려움은 깊은 권태와 비슷하다. 얕은 권태는 불안하게 "바깥을 향해 안달한다. 깊은 권태에 빠질 때는 현 존재가 모조리 우리로부터 분리된다. 그러나 하이데거에 따르면 이 "불능" 속에는 현존재에게 "여기 이곳에 서 행동할 것"을 결단하라고 호소하는 "통지"와 "호출"이 들어 있다. 깊은 권태는 지금은 나는 권태를 느낀다는 상태 속에 방치되고 있지만 현존재를 움켜잡을 수도 있는 저 행동의 가능성을 열어준다. 깊은 권태는 가장 고유한 존재 가능성을 움켜잡으라고, 다시 말해 행동하라고 현존재에게 요구 한다. 깊은 권태에는 요구하는 성질이 있다. 그것은 말한다. 그것은 목소리가 있다. 과잉활동에 수반되는 오늘날의 권태에는 언어가 없다. 이 권태는 침묵한다. 그리고 이 권태는 이후의 활동을 통해 제거된다. 그러나 활동한다고 해서 이미 행동하는 것은 아니다. 후기 하이데거는 두려움이 존재론적 차이. 즉 존재와 존재자 사이의 차이에서 비롯된다고 말한다. "아직 미답의(p. 50)공간"에 들어서려면 사유는 헤아릴 수 없는 존재자 없는 존재를 견뎌내야 한다. 일정한 측면에서 존재는 존재자에 선행하고, 각각의 존재자를 특정한 목소리를 지닌 빛 속에서 나타나게 한다. 사유는 "심연"을 "사랑한다." 사유에는 "근본적인 두려움을 향한 명료한 용기"가 내재한다. 이 두려움이 없으면 같은 것이 계속된다. 사유는 "심연의 끔찍함 속에서 소리를 질러대는" "무음의 목소리"에 자신을 노출시킨다. 경악은 사유를 존재자에 사로잡힘으로부터, 나아가 같은 것에 사로잡힘으로부터 해방시킨다. 경악은 "익숙한 것에 대한 존재자의 근본적인 다름을 폭로하는 고통"과 비슷하다(p. 51).
하이데거가 말하는, 가장 고유한 존재 가능성과 고유한 자기존재를 택할 결단을 내린 현존재는 외부가 아니라 내부를 지향한다. 이 현존재는 내부에 중심을 지니고 있으며, 가장 고유한 존재 가능성을 강하게 지향하는 자이로컴퍼스와 유사하다. 이 점에서 이 현존재는 바깥을 지향하면서 자신을 잃어버리는, 분산된 레이더 인간과 대립한다. 내부 지향은 타인과의 영구적인 비교를 필요 없게 만든다. 이에 반해 외부 지향적인 인간은 이런 비교를 강요받는다.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실패와 좌절과 배척에 대한 두려움, 실수를 하거나 잘못된 결정을 할지 모른다는 두려움, 자신의 기준을 충족시키지 못하리라는 두려움 등 여러 막연한 두려움에 고통받고 있다. 이 두려움은 타인들과의 지속적인 비교로 인해 강화된다. 이 두려움은 전적인 타자, 섬뜩한 것, 무 앞에서 느끼게 되는 수직적인 두려움과(p. 53) 반대로 수평적인 두려움이다. 오늘날 우리는 생산성을 제고하기 위해 시간의 안정적인 구조를 철거하고, 삶의 시간을 파편화하고, 연결과 결속을 허무는 신자유주의 시스템 속에서 살고 있다. 이 신자유주의적인 시간 정책은 두려움과 불안을 낳는다. 그리고 신자유주의는 인간을 홀로 고립된 자기 자신의 경영자들로 개별화한다. 탈연대화와 전면적인 경쟁이 초래하는 개별화는 두려움을 낳는다. 신자유주의의 기만적인 논리는 이렇게 주장한다. 두려움이 생산성을 높인다(p. 54).
새로운 생산 형태로서의 디지털 소통은 자신을 가속화하기 위해 모든 거리를 철저히 제거한다. 이로 인해 우리를 보호해주는 모든 거리가 사라진다. 과잉소통 속에서 모든 것이 모든 것과 뒤섞인다. 내부와 외부 사이의 경계도 갈수록 통과하기 쉬워진다. 오늘날 우리는 "모든 네트워크가 비추는 광선들"에 노출된 "순수한 표면"으로 완전히 외화(p. 56)된다. 투명성의 강제는 모든 시각적 빈틈과 정보의 빈틈을 제거하고, 모든 것을 전면적인 가시성에 내놓는다. 그리고 후퇴와 보호의 공간들을 모조리 제거한다. 그 결과, 모든 것들이 우리에게 위협적일 만큼 가깝게 다가온다. 우리를 차단해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제는 우리 자신이 세계적인 네트워크 안에 있는 통로에 지나지 않는다. 투명성과 과잉소통은 우리를 보호해주는 모든 내면성을 앗아간다. 실로 우리는 이 내면성을 자발적으로 양도하고 우리 자신을 디지털 네트워크에 내던진다. 그리고 이 네트워크는 우리를 관통하고, 투광하고, 우리에게 구멍을 숭숭 뚫어 놓는다. 디지털 과잉조명과 노출은 타자의 부정성이 아니라 긍정성의 과도함으로 인한 잠재적인 두려움을 낳는다. 같은 것의 투명한 지옥은 두려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계속 강화되어가는 같은 것의 소음은 두려움을 안겨주기 때문이다(p. 57).
오늘날 우리는 탈마르크스주의 시대에 살고 있다. 신자유주의의 지배하에서 착취는 더 이상 소외나 자기 탈현실화가 아니라 자유와 자기실현, 자기최적화로 진행된다. 여기에는 나에게 노동을 강요하고, 나를 나 자신으로부터 소(p. 61)외시키는 착취자로서의 타인이 없다. 오히려 나는 나를 실현한다는 믿음 속에서 자발적으로 나 스스로를 착취한다. 이것이 신자유주의의 비열한 논리다. 소진Burn-out에 대한 열광의 첫번째 단계가 그러하다. 나는 열광적으로 노동 속으로 뛰어들어 결국 쓰러진다. 나는 죽음에 이르도록 나를 실현한다. 나는 죽음에 이르도록 나를 최적화한다. 신자유주의의 지배는 망상적인 자유 뒤에 숨어 있다. 지배는 자유와 일치하는 순간, 완성된다. 이 체감상의 자유는 모든 저항, 모든 혁명을 불가능하게 한다는 점에서 치명적이다. 무엇에 맞서서 저항해야 한다는 말인가? 억압을 행사하는 타인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데 말이다. "내가 원하는 것으로부터 나를 보호하라"라는 제니 홀저의 유명한 말이 이러한 패러다임의 전환을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다. 오늘날에는 새로운 형태의 소외가 생기고 있다. 그것은 더 이상 세계나 노동으로부터의 소외가 아니라, 파괴적인 자기소외, 즉 자신으로부터의 소외다. 이 자기소외는 다름 아닌 자기최적화 및 자기실현과 더불어 생겨난다. 성과주체가 자신을, 예컨대 자신의 몸을 최적화해야 할 기능적 객채로 지각하는 순간. 이 주체는 자신으로부터 서서히 소외(p. 62)된다. 부정성이 없기 때문에 이 자기소외는 의식되지도 않은 채 진행된다. 자기착취뿐만 아니라 신체도식의 장애로 나타나는 자기소외도 자기파괴적으로 작용한다. 거식증, 폭식증, 대식증 등은 심각해져가는 자기소외의 증상들이다. 결국 우리는 자신의 몸을 더 이상 감지할 수 없게 된다(p. 63).
레비나스에 따르면 한 인간을 만난다는 것은 "하나의 수수께끼에 의해 깨어 있게 되는 것"을 말한다. 오늘날 우리는 수수께끼 혹은 비밀로서의 타자에 대한 경험을 잃어 버렸다. 타자는 이제 유용성의 목적론에, 경제적 계산과 가치평가의 목적론에 완전히 예속되어 있다. 타자는 투명 해진다. 타자는 경제적 객체로 강등된다. 이에 반해 수수께끼로서의 타자는 전혀 가치평가를 할 수 없는 것이다. 사랑은 언제나 다름을 전제로 한다. 타자의 다름뿐만 아니라 나 자신의 다름도 사랑의 전제다. 사람의 이원성은 자신에 대한 사랑에 필수적이다. "다른 한 사람이 우리와 다른, 우리와 대립되는 방식으로 살고 활동하고 느낀다는 것을 이해하고 그것에 대해 기뻐하는 것 말고 무엇이 사랑이겠는가? 대립하는 것들을 기쁨으로 연결하려면 사랑은 이 대립하는 것들을 제거해서도, 부정해서도 안 된다. 심지어 자기애도 한 사람 속에 있는, 서로 뒤섞을 수 없는 이 원성(혹은 다원성)을 전제로 한다." 모든 이원성이 사라질 때, 우리는 우리 자신 안에서 익사한다. 이원성이 모두 사라진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과 융(p. 106)합되어버릴 것이다. 이 나르시시즘적인 핵융합은 치명적이다. 알랭 바디우도 사랑을 "둘의 무대"라고 부른다. 사랑은 세상을 타자의 시선으로 새롭게 창조하고 익숙한 것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준다. 사랑은 전적으로 다른 것이 시작되게 하는 사건이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하나의 무대에서 살고 있다. 신자유주의적 생산관계가 의도적으로 사육하여 생산성을 증대시키기 위해 착취하는 에고는 병적으로 비대해져 있다. 그래서 우리는 삶을 다시 타자로부터, 타자에 대한 관계로부터 새롭게 보고, 타자에게 윤리적인 우선권을 인정해주어야 한다. 나아가 타자를 경청하고 타자에게 대답하는 책임의 언어를 다시 배워야 한다. 레비나스는 "말하기"로서의 언어를 다름 아닌 "한 사람의 다른 사람에 대한 책임"이라고 보았다. 오늘날에는 타자의 언어로서의 저 "가장 근원적인 언어"가 과잉소통의 소음에 파묻히고 있다(p. 107).
미래에는 경청자라는 직업이 생길지도 모르겠다. 그는 돈을 받고 타인의 말을 들어준다. 타인의 말을 들어주는 사람이 거의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경청자에게 간다. 오늘날 우리는 경청하는 능력을 갈수록 잃어가고 있다. 무엇보다도 점점 더 에고에 집중하는 것이, 사회가 나르시시즘에 빠지는 것이 경청을 어렵게 한다. 나르시스는 요정 에코의 애정이 담긴 음성에, 실로 타자의 음성이라고 해야 할 이 음성에 대답하지 않는다. 그래서 에코의 음성은 자기 음성의 반복으로 전락한다. 경청은 수동적 행동이 아니다. 특별한 능동성이 경청의(p. 108) 특징이다. 나는 우선 타자를 환영해야 한다. 다시 말해 타자의 다름을 긍정해야 한다. 그러고나서 나는 그를 경청 한다. 경청은 선사하는 것, 주는 것, 선물이다. 경청은 타자가 비로소 말을 시작하도록 돕는다. 경청은 타자의 말을 수동적으로 좇아가지 않는다. 어떤 면에서 경청은 말하기 에 선행한다. 경청은 타자로 하여금 비로소 말을 하게 한다. 나는 타자가 말을 하기 전에 이미 경청한다. 혹은 나는 타자가 말을 하도록 하기 위해서 경청한다. 경청은 타자를 말하기로 초대하고, 타자가 그의 다름을 드러내도록 풀어 준다. 경청은 타자가 자유롭게 말하는 공명의 공간이다. 그래서 경청은 치유할 수 있다(p. 109).
페이스북에서는 우리 모두와 상관이 있고, 우리 모두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문제들이 거론되지 않는다. 여기서 전송되는 것은 무엇보다 광고들이다. 어떤 토론도 필요로 하지 않으며 오로지 송신자를 알리는 데만 기여할 뿐인 광고들 말이다. 타인에게 걱정과 고통이 있으리라는 생각은 떠오르지 않는다. 좋아요의 공동체 속에서 우리는 오로지 우리 자신이나 우리와 같은 사람들만 만난다. 여기서는 어떠한 담론도 가능하지 않다. 정치적 공간이란 그 안에서 내 가 타인들을 만나고, 타인들과 이야기하고, 타인들을 경청하는 공간이다. 경청에는 정치적 차원이 있다. 경청은 타인들의 현존재에 대한, 그들의 고통에 대한 행동이자 적극적인 참여다. 경청은 사람들을 연결하고 매개하여 비로소 공동체를 만들어낸다. 오늘날 우리는 많은 것을 듣지만, 타인들을 경청하고 그들의 언어와 고통에 귀를 기울이는 능력은 갈수록(p. 115) 잃어버리고 있다. 오늘날에는 각자가 자기 자신. 자신의 고통, 자신의 두려움과 함께 어떤 식으로든 혼자 남아 있다. 고통은 사유화되고 개인화된다. 그래서 고통은 자격도 없이 자아와 자아의 심리를 고치겠다고나서는 치료의 대상이 된다. 누구나 자신의 약점과 부족함을 부끄러워하고, 오로지 자신에게만 책임을 떠넘긴다. 나의 고통과 너의 고통 사이에 어떠한 연결도 생성되지 않는다. 그래서 고통의 사회성이 간과되고 만다. 오늘날의 지배 전략은 고통을 사유화하고, 그럼으로써 고통의 사회성을 은폐하여 고통의 사회화와 정치화를 가로 막는 것에 주력한다. 정치화는 사적인 것을 공적인 것으로 번역하는 것을 뜻한다. 오늘날에는 오히려 공적인 것이 사적인 것으로 해체된다. 공공성은 사적 공간들로 분해된다. 공적 공간과 경청자들의 공동체, 그리고 정치적 경청자 집단을 만들어내려는 정치적 의지는 근본적으로 사라지고 있다. 디지털 네트워크화는 이러한 과정을 촉진시킨다. 인터넷은 오늘날 공동의 소통 행위 공간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인터넷은 오히려 자아의 전시 공간들로 해체되고, 이(p. 116) 공간들 안에서 사람들은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광고한다. 오늘날 인터넷은 고립화된 자아의 공명 공간일 뿐이다. 광고는 어떠한 경우에도 경청하지 않는다(p. 117).
옮긴이 후기
'독일 철학의 새로운 스타' '추종자들을 거느리고 있는 철학의 팝스타'로 불리는 한병철은 독일에서 한국인으로서는 실로 보기 드문 철학적 성공을 거두었다. 그의 이런 성공은 신자유주의가 지배하는 세계에 대한 어둡고 부정적인 평가가 큰 공감을 불러일으켰기 때문만은 아니다. 경구처럼 짧고 함축적이면서도 명쾌하며, 대구와 은유, 역설과 어원학에 기초한 언어유희로 점철되어 독특한 사운드를 연출하는 문장들 또한 많은 독자들을 획득하는 데 크게 기여한 것으로 보인다. 이 책에서 한병철은 기존의 저서들에서 천착해온 주제들을 한층 더 첨예한 문장들로 펼쳐놓는다. 그의 부정적인(p. 128) 시대 진단은 신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적 평가에 기반하고 있다. 자본의 이윤을 극대화하는 것을 유일한 목적으로 삼는 신자유주의는 세상의 모든 것을 생산의 도구로 획일화 한다. 모든 것이 장부상의 숫자로 치환될 수 있는 것으로 간주되며, 따라서 하나의 척도에 따라 서로 비교되고 교환 될 수 있는 것들로 획일화된다. 자본의 순환을 방해하는 사물들 사이의 질적 차이는 지워진다. "타자가 존재하던 시대는 지나갔다." 그 결과, 돈의 권력만이 지배하는 이 세계는 "같은 것의 지옥"으로 전락한다. 사르트르는 "타인은 지옥이다"라고 말했지만, 현재 세계에서는 같은 것이 지옥이다. 이 지옥은 과거와 다른 방식으로 지배된다. 과거에는 인간을 생산 수단으로 만들어 착취하기 위해 억압과 금지와 부정이 행사되었던 반면, 지금은 자유와 허용과 긍정이 인간을 자기착취로 이끈다. 같은 존재들로 획일화된 인간은 타인과의 영구적인 비교와 경쟁에 내던져지며, 타인 속에서도 언제나 자신과 똑같은 존재만을 확인할 뿐이다. 타인에게서 거울에 비친 자신의 영상을 볼 뿐인 나르시시즘적 인간은 자신 안에 갇힌 채 세계에 대한 진정한 경험도, 인(p. 129)식도 할 수 없고, 그 결과 자신과 세계에 대한 성찰 능력도 상실한다. 의미에 대한 성찰이 사라진 진공 속에서 인간은 같은 존재들 사이의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자신을 생산에 최적화하려고 애쓸 뿐이다. 뒤처질 위험에 대한 상시적 불안에 지배되는 인간이 자신을 착취할수록, 자본의 이윤은 극대화된다. "두려움이 생산성을 높인다." 저자에 따르면 불안은 혐오를 낳는다. 모든 낯선 것에 대한 적대적 태도를 유발하는 불안은 공격적인 테러리즘과 방어적인 민족주의의 동일한 근원이다. 우리 사회를 휩쓸고 있는 다양한 혐오 현상들도 불안으로부터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스웨덴의 사회학자 노라 레첼은 '반항적 자기굴복'이라는 개념을 사용한다. 사회적 배제와 불 만스런 상태에 대한 저항이 그 상태의 진정한 원인이 아니라 문제와 상관없는 타자인 제3자를 희생양 삼아 공격하는 것을 말한다. 이는 반항자가 기존 상태는 그대로 둔채 흔히 사회적 약자 혹은 소수자인 제3자를 배척하는 데 힘을 쏟는다는 점에서 일종의 대체행동이다. 그 결과 반항자는 실제로는 스스로를 무력화하게 되고, 자신들이 맞서 싸워야 할 상황에 스스로 굴복하고 만다. 우리 사회의 온갖 혐(p. 130)오 현상들도 기본적으로 이러한 반항적 자기굴복에 해당한 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같은 것의 창궐, 같은 것의 테러 속에서도 인간은 기만적인 자유의식, 허구적인 해방의식에 사로잡힌다. 독특한 개성을 추구하고 자아실현을 꿈꾸지만, 실은 자본이 제공한 상품들에 갇혀 있고, 자본이 설정해놓은 인간상에 갇혀 있다. 획일화된 인간의 개인성에 대한 욕망은 인간을 개별화, 고립화하여 연대를 막으려는 자본의 전략에 이용될 뿐이다.
같은 것의 감옥으로부터의 구원은 타자로부터 온다는 것이 저자의 인식이다. 타자만이 우리 자신과 세계에 대한 인식과 성찰을 가능하게 해주고, 의미를 복원하며, 우리로 하여금 고립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게 한다. 우리는 이러한 타자를 배척하고 혐오할 것이 아니라, 환대로서 맞아야 한다. 저자에 따르면 한 문명의 발전 정도를 측정하게 해주는 기준이 바로 환대다. 그리고 우리는 타인의 음성을 경청해야 한다. 그럴 때만 우리는 타자를 인식하고, 그럼으로써 우리 자신을 인식하며, 나아가 우리를 구속하는 체제의 틀 자체를 인식하여 같은 것의 지옥을 (p. 131) 벗어날 수 있다.
저자는 타자에 대한 인식의 매체로서 예술과 철학에 희망을 건다. 예술은 세상을 낯선 것, 나와 다른 것으로 인식하고 서술한다. "부정적 긴장은 예술에 본질적이다." 철학 또한 세상을 낯선 것으로 대한다. 이는 예술과 철학이 세상을 인지하는 지배적이고 익숙한 틀을 벗어나기 때문이다. 이로써 예술과 철학은 세상을 다르게 보고, 그 결과 다른 관점으로 세상을 평가하고 비판할 수 있게 된다. 이 책은 신자유주의와 세계화가 지배하는 우리 시대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을 담고 있다. 때로 한병철의 당대 분석이 어둡고 부정적인 쪽으로만 치우쳐 있다는 비판이 제기되기도 한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을 저항이 불가능한 존재들,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조종되는 꼭두각시들'로만 보는 것은 부당하다는 것이다. 실로 신자유주의 체제는 수많은 비판을 낳고 있으며, 대중이 현실 속에서 체감하는 불행은 불안과 체제에 대한 저항으로도 이어진다. 하지만 저자는 이러한 저항들이 진정한 저항인가에 대해 깊은 회의를 품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우리 시대를 지(p. 132)배하는 가치들을 내면화한 사람들의 저항은 규칙의 가혹함을 규탄할 수는 있지만, 규칙 자체를 전복할 수는 없다는 것이 저자의 생각인 듯하다. 저자는 핵심을 찌르는 도발적인 문장들을 통해 우리의 성찰을 자극한다. 이 책은 흔히 간과되거나 의식조차 되지 못하는 우리 시대의 결정적인 부정적 단면들을 예리한 관찰과 근원을 파고드는 비타협적인 비판의식으로 조명하는데 성공하고 있으며, 이 책의 가치는 이런 점에 있을 것이다(p. 13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