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6-04-18(토)
 
  • 말하기를 말하기-김하나 저자(글), 콜라주 · 2020년. 절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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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게 읽었다. 자신의 신변잡기를 쓴 책이지만 공감하는 부분들이 많았다. 자신의 삶을 열어보여준 작가가 고맙다. 그런데 절판됐다. 관심이 있으면 도서관에서 대출해 읽으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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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멈춤의 기술

2000년에 대기업 계열사인 광고회사에 입사했다. 회사에서 받은 내 인생 첫 명함에는 '카피라이터'라고 적혀 있었다. 그 말이 참 멋있게 느껴졌다. 나는 평생 카피라이터 해야지. 머리가 하얗게 세어서도 카피라이터 김하나라고 나를 소개할 수 있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직장생활이란 막연히 상상하던 것과는 달랐다. 내가 일을 그다지 잘하는 것 같지도 않았고 함께 일하는 사람들한테서 받는 스트레스도 심했다. 많은 사람들과 거리낌없이 어울리지 못하는 나였기에 더더욱 대기업 문화에 적응하기(p. 32)힘들었는지도 모른다. 게다가 당시 몇 가지 일을 겪으며 광고라는 것의 윤리적 문제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평생을 바칠 만큼 좋은 일은 아닌 것 같았다.

일한 지 3년 가까이 되었을 무렵의 어느 날이었다. 곧 그만두겠다는 결심을 굳혔을 때였다. 광고를 만들면 성우와 자주 일을 하게 되는데 그날은 '특A급'으로 분류되는 중년여성 성우를 처음 만난 날이었다. 따뜻하면서도 지적이고 신뢰감을 주는 멋진 목소리의 소유자였다. 명함을 건네며 "안녕하세요, 카피라이터 김하납니다" 했더니 그분이 나를 빤히 보더니 대뜸 이런 말을 했다. "목소리가 참 좋으시네. 성우를 한번 해봐요. 카피라이터도 좋은 직업이지만, 성우도 정말 좋은 직업이에요." 일단 칭찬이니 기분이 좋았고, 유명한 성우시니 만나는 사람도 무척 많을 텐데 아무에게나 이런 말을 건네지는 않으리라 싶어서 한동안 마음에 남았다. 그것도 이미 번듯하게 들리는 직업이 있는 사람에게 해준 말이니 말이다. 그러잖아도 그 무렵 나는 성우라는 직업이 꽤 매력적이라고 느끼던 중이었다. 같은 카피라도 누가 읽느냐에 따라(p. 33)

그 힘은 천차만별이었다. 어떤 목소리는 마치 잘 부푼 커피 원두에 천천히 물을 부었을 때 다양하고 매력적인 향기가 뿜어나오듯 문장에 담긴 감성을 풍부하게 끌어올려 표현해주었다. 어떤 목소리는 단 한 문장만 읽어도 냉철하고 정연한 지성을 느끼게 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다. 하지만 성우라는 직업에 매력을 느낀다고 해서 '나도 한번 도전해볼까' 하고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성우는 태생적으로 남들과 다른 사람들일 거라고 여겼으니까. 그런데 그분의 말씀이 자꾸만 맴돌았다. 어쩌면 내게도 계발되지 않은 목소리의 자질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회사를 그만둔 뒤 나는 '해보기나 하자'는 마음으로 정말 성우 수업을 들었다. 방송사 아카데미에 성우반이 있었다. 발성의 원리를 익히고 발성 연습, 낭독, 연기, 더빙 연 습 등을 했다. 몇 달 과정의 수업이 끝나고 나서는 수강생들 몇몇을 따라 성우 공채를 준비하는 스터디 그룹에 합류 했다. 극단 단원들처럼 소극장 같은 곳에서 아침 일찍 모여 신체 단련으로 시작을 했다. 신체 단련을 하고 나면 발성 연습을 정석대로 했다. 가! 갸! 거! 겨! 고! 교! 규!(p. 34)나! 냐! 너! 녀!…." 등의 루틴을 여럿이서 단전에 힘을 주고 쩌렁쩌렁 울리도록 연습하는 것이다. 애니메이션이나 영화의 대본을 가지고 연기하는 걸 녹음해서 들어보고 합 평을 하기도 했다. 나는 특히 내레이션 연습을 좋아했다. 내 목소리가 내레이션에 어울린다는 얘기를 자주 들었고 나 스스로도 내레이션에 매력을 느꼈다. 나는 항상 감정을 잘 표현하는 예쁜 목소리보다 건조하고 지적인 목소리에 끌렸다. 그러면서 성우 공부의 재미에 흠뻑 빠져버렸다. 나도 그럴 줄 몰랐다. 배우고 훈련하면 할수록 재미가 있었다. 1년 정도를 꽤 몰입해서 했다. 학창시절에 공부에도 그렇게 매진한 적이 없었다. 심지어 고3 때도 그랬다. 시험을 잘 봐야 하니까 어쩔 수 없이 바짝 벼락치기를 하는 식이었지, 평소에는 공부에 별로 에너지를 쏟지 않았다. 그런데 성우 공부는 달랐다. 늘 좀더 잘하고 싶고, 몸을 단련하고 기술을 연마해 더 나은 단계로 끌어올리고 싶다는 열망을 느꼈다. 살면서 그렇게까지 열심히 뭔가를 이루려고 노력해본 적이 없었다. 여기서 '이룬다'는 말은 '공채 성우가(p. 35)된다'는 종류를 뜻하지 않았다. 비유를 하자면 전장에 나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과녁을 정확히 맞히려고 매일 활쏘기를 하는 사람의 마음과도 비슷했다. 내친김에 방송사 공채 시험도 보았지만 보기 좋게 떨어졌다. 그래도 나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게 열심히 했고 내가 발전하는 것을 느꼈기 때문에 성우 공부에 매진한 기간을 두고 후회는 하지 않았다. 성우 공부를 하면서 배운 것들 가운데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포즈pause' 즉 잠깐 멈춤의 중요성이었다. 말의 매력과 집중도를 높이는 것은 이 '잠깐 멈춤'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달려 있었다. 이것은 너무도 중요한 기술이라 이 책을 읽는 여러분도 그에 대해 생각을 해보셨으면 좋겠다. 말을 매력적으로, 힘있게 하는 사람들이 어디서 말을 끊고 다시 이어가는지를 관찰해보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 다. 특히 법정 드라마의 변론 등을 유심히 들어보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최근에 나는 봉준호 감독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수상 소감을 말할 때 샤론 최의 동시통역과 함께 두 언어의 호흡을 어떻게 끊고 이어가는지를 관찰하며(p. 36)또 많이 배웠다. 이 기술을 잘 사용하려면 기본적으로 문장 구조를 잘 이해해야 하고 본능적인 타이밍 감각도 필요 하다. 그렇지만 분명 의식적인 노력을 통해 나아질 수 있는 기술이다.

돈이 다 떨어진 나는 마침 운좋게도 내게 오라고 손짓 해준 두번째 광고회사에 들어갔다. 그곳은 첫번째 회사의 4분의 1 정도 규모였고 단체활동이 적었으며 팀 단위의 게릴라 조직처럼 움직여서 나 같은 성격의 사람이 일하기에 훨씬 나았다. 그리고 광고의 윤리 문제에 대해서도 회사를 떠나 있던 기간 동안 질문하고 숙고한 끝에 나름의 답과 신념을 갖게 되었다. 두번째 회사에서 나는 회의를 할 때나 발표를 할 때 목소리에 집중시키는 힘이 있다거나 말을 잘한다는 얘기를 곧잘 들었다. 이 회사에서 나는 제법 일 잘하는 카피라이터가 되었고, 이후로 오래 프리랜서 카피라이터로 살아갈 발판을 마련했다. 세월이 흘러 지금 내겐 명함이 없다. 다양한 일을 하고 있어 명함에 뭐라고 적어야 할지 모르겠어서다. 대충 '읽고 쓰고 듣고 말하는 사람'이라고 소개하곤 한다. 내가 하(p. 37)고 있는 여러 일들 중에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팟캐스터'로서의 일이다. 2000년에 내가 처음 '카피라이터'로서 명함을 받았을 때, 세상에 팟캐스트라는 것은 존재하지도 않았다. 머리가 하얗게 될 때까지 카피라이터로 일하고 싶었던 당시의 나는 앞으로 세상이 어떻게 변해갈지 전혀 짐작하지 못했을 것이다. 나의 직업 인생은 꽤 흥미롭게 흘러가고 있다. 뜬금없이 성우 공부를 했던 1년은 내 직업 인생에서 '잠깐 멈춤'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남들이 보기엔 곁길로 샌 것 같았겠지만 내겐 무척 중요한 1년이었다. 처음 만난 내게 대뜸 성우가 되어보라고 권했던 옛날의 그분께 문득 고마운 마음이 든다. 그분이 툭 건넨 말 한마디가 씨앗이 되어 내 안으로 들어오는 바람에 나는 이제 말하기 책을 쓰는 사람까지 되었으니까. 말의 힘이 이토록 크다(p. 38).

 

그 무렵 혼자 남미로 여행을 떠났다. 떠나기 전 수첩에 호기롭게 이렇게 썼다. 먼저 말을 거는 사람이 되자! 여행에서 만날 낯선 사람과 새로운 경험에 열린 적극적인 마음을 가져야겠다고 다짐했다. 그 옛날 중학교 안에서는 활발하지만 학교를 나서면 다시 쭈그러들었던 나처 럼, 지금 나의 태도가 이 좋은 사람들의 모임 안에서만 유지될지 아니면 전혀 다른 상황, 심지어 다른 나라 사람들 사이에서도 유지될 수 있을지 궁금했다.

첫 기착지였던 홍콩에서 여섯 시간을 머물러야 했다. 공항 안에서만 머물기엔 어중간한 시간이라 관광안내소에 조언을 구한 뒤 침사추이로 가는 버스를 탔다. 2층 버스의 위층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제일 앞자리에 앉아서 가는데 중간의 정류장에서 인도인처럼 보이는 한 남자가 타더니 내 옆에 앉았다. 다른 자리도 텅텅 비어 있는데 하(p. 52)필 왜 내 옆자리에·•••·•? 처음엔 좀 의아하고 무섭기도 했다. 하지만 내가 먼저 말을 걸었다. 애기를 나눠보니 그 사 람은 인도에서 홍콩을 자주 오가는 비즈니스맨이었다. 그는 2층 버스의 맨 앞자리야말로 홍콩 관광의 백미라고 했다. 과연 거기 앉아서 보니 한자와 영어가 뒤섞인 홍콩의 이국적인 네온사인이 눈높이에서 양쪽으로 흘러가는 모습이 장관이었다. 그가 굳이 내 옆자리에 앉은 이유였다. 그는 내게 침사추이에서 자기가 좋아하는 곳들을 알려주었다. 그리고 자신이 내릴 정류장보다 한 정류장 더 가서 나와 함께 내려 다시 한번 친절하게 곳곳의 위치를 알려준 뒤 뒤돌아 자신의 숙소를 향해 걸어갔다. 여행의 시작에서 있었던 이 경험은 나에게 열린 마음의 중요성을 멋지게 일깨워주었다. 내가 말을 걸지 않았다면 나는 이 친절한 아저씨를 불편하고 찜찜하게만 생각하고 말았을 것이다. 이것은 중요한 경험이었다. 그리고 여행 내내 반복된 경험이었다. 내가 먼저 상대에게 마음을 열고 매너를 갖추어 말을 걸면 상대 또한 잠시나마 자신의 세계를 내게 보(p. 53)여주었다. 나는 그로부터 반년 동안 아르헨티나, 칠레, 페루, 볼리비아, 브라질, 모로코, 스페인을 거쳤다. 인도인 비즈니스맨 아저씨를 필두로 수없이 많은 사람에게 말을 걸었다. 이때 언어가 통하느냐 아니냐는 부차적인 문제다. 중요한 것은 상대에게 마음을 열려는 태도다. 미리 재단하려는 마음 없이. 여기서 세계를 파악하는 두 태도의 차이를 읽을 수 있다. 즉 세계를 화분들의 집합으로 파악하느냐, 아니면 하나의 거대한 숲으로 이해하느냐. 좁은 화분을 벗어나 울창한 숲속으로 나아가려면 우선 내 마음이라는 화분부터 깨버려야 할 것이다. 먼저 말을 거는 사람이 된다는 건 내게 그런 의미였다(p. 56).

 

좋은 걸 좋다고 말하기

카피라이터가 하는 일의 본질은 칭찬거리 찾기다. 내가 광고할 브랜드나 제품이 다른 브랜드나 제품과 어느 면에서 다르고 더 나은가를 찾아내어 알리는 일이다. 모든 면에서 칭찬거리가 많은 품목도 있겠으나 선뜻 칭찬거리를 찾기 힘들 때도 있다. 그래도 세상 모든 제품은, 하다못해 엇비슷한 생수 한 병이라 하더라도 성분이나 가격, 접근성, 패키지 디자인 등에서 단 하나라도 강점이 있다. 어떤 제품은 품질이 뛰어나고 어떤 제품은 값이 싸다. 어떤 제품은 손쉽게 구할 수 있어 편리하고 어떤 제품은 손쉽게 구(p. 128)할 수 없어 독특하다. 같은 요소라도 카피라이터가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칭찬거리가 될 수 있다.

광고 교과서에 실리곤 하는 사례 하나를 소개할까 한다. 1959년 독일 자동차 폭스바겐 비틀이 미국 시장에 진출할 때의 일이다. 당시 미국에서는 큼지막하고 과시적인 디자인의 자동차가 인기였다. 거기에 조그맣고 실용적인 '딱정벌레차' 비틀이 등장하며 내걸었던 캠페인 슬로건은 Think small(작게 생각하라)이었다. 거리의 빌보드 광고판이나 신문광고에서도 여백을 텅 비운 채 안 그래도 작은 차를 딱정벌레처럼 더 조그마하게 보여주고 작은 차의 칭찬거리를 강조하는 캠페인을 펼쳤다. 광고의 고전으로 불리는 이 시리즈는 오랫동안 이어지며 자동차에 대한 미국인들의 생각을 바꿔놓았고 크게 히트했다. 그중에는 웃음이 터지는 이런 헤드라인도 있었다. 'It makes your house look bigger(이 차는 당신의 집을 더 커 보이게 합니다)' 이 조그만 차를 집 앞에 세워놓으면 상대적으로 집이 커 보이는 효과가 있다니, 정말이지 생각도 못한 칭찬거리다. 유명한 카피라이터 데이비드 오길비는 이런 말을 했(p. 129)다. "재미없는 제품은 없다. 재미없는 카피라이터가 있을 뿐이다." 카피라이터로 오래 일한 나는 브랜드나 제품뿐 아니라 책이나 사람에게서도 칭찬거리를 잘 찾아낸다. 아니, 오히려 카피라이터로 오랜 기간 즐겁게 일할 수 있었던 데는 숨은 칭찬거리를 발굴해내기를 좋아하는 천성이 작용했는지도 모르겠다. 팟캐스트를 통해 작가 인터뷰를 하면서 나도 모르게 책과 작가의 남다른 장점을 찾아내 칭찬을 많이 했는데, 그러다보니 어느새 '칭찬폭격기'라는 별명이 내게 붙어 있었다. 작가가 미처 겸양을 차릴 새도 없이 면전에서 칭찬을 퍼부어 '초토화(?)'해버린다는 의미다. 작가님들은 곧잘 말씀하기를, 자신이 책을 쓸 때 알아봐 주길 바라며 공들였던 부분을 내가 정확하게 끄집어내 칭찬해줘서 놀랐고 고맙다고 한다. 나는 그럴 때가 참 즐겁다. 좋은 것을 좋다고 말하는 데 에너지를 쓸 때가. 사람들이 지나치기 쉬운 부분에 조명을 비추어 아름다움이 환하게 드러나 보이도록 하는 게 카피라이터 출신인 나의 소임이라고 생각한다. 칭찬거리를 구체적으로 찾아내 정확하게 칭찬하는 일. 어떤 청취자들은 이미 읽은 책인데도 팟캐스(p. 130)트를 듣고 나면 그런 포인트가 있었구나 싶어 새로운 눈으로 다시 보게 된다고 말한다.

마인드맵 워크숍을 할 때면 '자신의 신체적 단점에서 장점 찾기'를 마인드맵으로 작성해보라고 한다. 생각 못한 답들이 많이 나온다. '시력이 안 좋다'는 단점에는 '지저분한 게 눈에 덜 띄어 세상이 더 아름답게 보인다' '안경의 변화로 다양한 인상을 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키가 작다'는 단점에는 '연애할 때 품에 쏙 안긴다' '술 취하면 친구들이 들어서 옮기기 쉽다'는 장점이 있다. '하체가 굵다'는 단점에는 '다리가 튼튼해 산행에서 지치지 않는다' '버스가 흔들려도 안정적으로 서 있는다'는 장점이 있다. 이렇듯 세상 모든 것들은 어떤 프레임으로 바라보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나는 무언가를 기존과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는 일이 창의성의 영역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나 남이 지닌 장점에서조차 기어이 단점을 찾아내 미워하곤 한다.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나는 되도록 내가 지닌 창의성을 칭찬거리를 발견해내는 데 쓰고 싶다. 세상사에서 좋은 점을 발견하려고 노력하는 일은 결국(p. 131) 본인의 환경을 더 나은 것으로 여기게끔 한다. 또 주변의 좋은 것을 찾아내 칭찬하는 일을 계속하면 좋은 것이 무럭 무럭 자라날 테니 실제로도 나를 둘러싼 세상이 더 나아 질 것이다. 좋은 환경 속에 나를 놓아두면 나는 거기서 에너지를 얻어 좋은 것을 더 많이 발견하고 칭찬하게 되므로 선순환이 일어난다. 내가 다니는 길가에 꽃씨를 뿌리고 비료를 주는 것과 같다. 그건 결국 나를 위한 일이 아닐까? 칭찬폭격기라는 별명이 썩 마음에 든다. 칭찬폭격은 무얼 파괴하기보다는 좋은 것을 북돋우는 일이니, 세상의 폭격이란 폭격 중에 가장 좋은 축에 들 것이다(p. 132).

 

설득은 매혹을 이기지 못한다

TV에서 '아이들이 책을 읽게 하려면 부모가 먼저 책 읽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같은 얘기가 나오면 엄마는 "저거 다 거짓말이다"라고 한다. 내가 어릴 적부터 나의 부모님은 주구장창 책을 읽어왔다. 아빠는 문학 선생님이었고 아빠보다 더 다독가인 엄마는 아이 둘을 낳고도 깨알 같은 세로쓰기로 된 세계문학전집을 읽어댔다. TV에서 말하는 이론에 따르면 자식들은 자연스레 책에 흥미를 보여야 하나 나와 오빠는 책에 대한 태도가 전혀 달랐다고 한다. 나는 책을 꽤나 좋아하는 편이었는데 오빠는 그렇지가 않(p. 176)았다. 책에 좀 흥미를 붙여주려고 흥미진진한 추리소설 같은 걸 사주면 어린 내가 먼저 열광하며 읽고는 범인을 말하고 싶어 안달인 반면 오빠는 별반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걸 보며 엄마는 책을 좋아하는 취향 같은 것은 누가 본을 보이건 말건 간에 타고나는 게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세월이 흐르자 오빠의 취향은 책이 아니라 영화와 여행으로 드러났다. 40대 중반의 직장인이며 아이 둘의 아빠인 오빠는 걸핏하면 온 가족을 싣고 전국 방방곡곡으로 여행을 다닌다. 주말이면 조조영화부터 하루에 두 번씩도 극장에 가고 자신만의 DVD 컬렉션을 쌓아가는 사람이 되었다. 그런 오빠를 흥미롭게 관찰하며 엄마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그래, 세상을 이해하는 도구는 사람마다 다른 것 같아. 그게 꼭 책일 필요는 없지." 내가 어릴 적부터 책을 좋아하게 된 또 한 가지 중요한 요인은 아무도 내게 책을 읽으라고 강요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부모님은 내가 책을 읽거나 말거나 별로 신경쓰(p. 177)지 않으셨다. 친구네 집에 가면 번듯한 명작 동화 전집들이 꽂혀 있곤 했는데 나는 신이 나서 이것저것 꺼내서 읽었지만 정작 그 친구들은 몇 권 빼고는 손도 안 대는 경우가 많았다. 우리집에는 동화 전집 같은 게 없었고 엄마 아빠가 보는 어른용 책들만 많았다. 나는 읽었던 책을 읽고 또 읽으며 시간을 보냈다. 그래도 재미있었다. 책을 읽으라고 강요하는 분위기는커녕 책 읽기를 칭찬하는 분위기도 전혀 아니었기 때문에 나는 책을 숙제 같은 것이 아닌 친구처럼 여길 수 있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어릴 적 나는 더더욱 시키면 안 하는 스타일이었다. 초등학생 시절 6년 내내 숙제를 한 번도 안 해가서 선생님한테 혼나곤 했다. 당시엔 체벌이 있어서 손바닥에 멍이 들 정도로 맞기도 했건만 그런데도 왜 숙제를 안 했는지는 지금도 잘 이해가 안 간다. 누구에게나 조금씩은 그런 성향이 있을 것이다. 방 꼴이 엉망이라 더 이상은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막 방 청소를 시작하려다 가도 마침 그때 문을 연 엄마나 아빠가 "너 방 꼴이 이게 뭐야! 청소 좀 해라!" 하고 잔소리를 하면 딱 하기 싫어지(p. 178)는 것. 그렇지 않은가? 누구나 시키는 일은 하기 싫어지는 법이다.

광고와 브랜딩을 하면서 얻은 큰 깨달음 중 하나는 '설득은 매혹을 이기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그것이 옳다고 이성적으로 설득되어서 움직이기보다는 일단 매혹된 것에 이성적인 듯한 이유를 갖다붙이려는 심리가 있다. 이런 심리 작용이 드러난 에피소드가 마크 트웨인의 『톰 소여의 모험』 중 페인트칠 이야기일 것이다. 화창한 날 친구들이 놀러가는 동안 톰 소여는 벌로 담장에 페인트칠을 해야 했다. 약올리려는 친구 벤 앞에서 톰은 페인트칠이 너무 재미있어서 심취한 듯한 제스처를 취한다. "나 한 번만 칠해볼게"라는 벤에게 안 된다고 거절하기까지 한다. 점점 '정말인가?' 싶어진 벤은 결국 뇌물로 사과까지 바치면서 페인트칠을 자청해서 하게 된다. 나중에는 친구들이 여럿 와서 뇌물을 줘가며 너도나도 신이 나서 페인트칠을 하는 통에 톰 소여는 담장을 여러 번 덧칠까지 해서 임무를 완수하게 된다. 만약 여기서 톰이 벤에게 "너도 페인트 한 번 칠해봐! 정말 재미있을걸?"이라고 먼저 제안했다면 벤(p. 179)은 콧방귀도 뀌지 않았을 것이다. 여기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은 1. 사람들은 재미있어 보이는 것에는 사례를 지불해 가면서까지 하려고 든다. 2. 누가 시키면 하기 싫지만 같은 일도 자발적으로는 기꺼이 한다.

다독가 중의 다독가이자 평생을 도서관지기로 살았던 아르헨티나의 위대한 작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즐거움을 위해서 책을 읽어야 해요." 『개인주의자 선언』 『미스 함무라비』의 저자 문유석 작가님이 《책읽아웃>에 나오셨을 때 이야기 나눈 신간의 제목은 『쾌락독서』였다. 문유석 작가님이 평생 즐거움을 위해 읽어온 책들을 다른 책이었다. 엄마는 이 책이 나왔을 때 제목을 보고는 내게 "하나야, 이게 바로 우리가 평생 해 온 얘기 아이가?"라고 했다. 그렇다. 우리는 즐거움을 위해 책을 읽어야 한다. 그래서 나는 도서 팟캐스트를 진행하면서 절대 하지 않는 말이 있다. 그건 바로 책 읽으라는 잔소리다. '여러분 책을 많이 읽어야 합니다. 베스트셀러 말고 고전을 읽으(p. 180)세요 책을 많이 읽으면 길이 보입니다' 같은 관습적인 말은 오히려 책을 숙제처럼 여기게 하는 잔소리들이다. 나의 오빠가 애호하는 영화와 비교해보자. '여러분 영화를 많이 봐야 합니다' '지금 흥행하는 영화들 말고 고전 영화를 보세요' '영화를 많이 보면 길이 보입니다'.... 영화 전공 학생이 아니고서야 이런 말을 자주 듣지는 않는다. 하지만 사람들은 다양한 영화들을 자발적으로 즐긴다. 오빠가 주 말 아침 일찍 일어나 조조 영화를 보러 가게 하는 힘은 그런 잔소리에서 나오지 않는다. 나는 책 읽기 자체를 교양의 척도로 삼고 관습적으로 남에게 책 읽기를 권하는 말들이 정작 사람들을 책에서 멀어지게 하는 잔소리라고 생각한다. '책책책 책을 읽읍시다!' 같은 말들 말이다. 세상에는 위대한 책도 있고 안 읽는 게 차라리 나은 책도 있다. 고상한 책도, 지적인 책도 있겠으나 책을 읽는 행위 자체는 고상할 것도 지적일 것도 없다. 내게 책 읽기는 어디까지나 즐거운 취미이고 엔터테인먼트다. 어렵고 두꺼운 책을 읽어나가는 것도 암벽등반 같은 재미를 준다. 암벽등반이 누가 시켜서 하는 고행이 아니듯, 책 읽기도 스스로가(p. 181) 재미있어서 하는 것이다

책 읽으라는 잔소리를 일절 하지 않지만 놀랍게도 〈책 읽아웃〉의 '영업력'은 엄청나다. 박서련 작가님은 어느 날 본인의 저서인 『체공녀 강주룡』의 판매 지수가 솟구친 것을 보고 이게 무슨 일인가 했더니, 전날 '삼천포책방'에서 이 책을 재미있게 소개했기 때문이더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책읽아웃: 김하나의 측면돌파〉 85-2 도덕과 노동과 운동 편). '삼천포책방'에서 우리는 그저 각자 재미있게 읽은 책을 가지고 와서 마치 어제 본 드라마 얘기하듯 신나게 책 수다를 떨 뿐이다(아무도 드라마를 많이 보라고 권하지 않아도 사람들은 드라마를 열심히 본다). 우리의 목표는 책 판매고를 올리는 것도 아니고, 독서를 권장하는 것도 아니다. 우리끼리 책 놓고 떠드는 수다가 이렇게나 재미있다는 걸 보여줄 뿐이다. 그런데 청취자들은 왠지 모르게 우리의 책 수다를 들으면 나도 얼른 그 책을 읽고 이 수다에 동참해야겠다는 욕구가 들끓는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 '영업력'의 비밀이다. 잔소리는 할 필요가 없다. 마치 톰 소여의 페인트칠처럼. 설득은 매혹을 이기지 못한다(p. 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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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321】 다른 사람의 일상, 에세이 읽기는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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