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단정한 기억 - 유성호 저자(글), 교유서가 · 2019년

이 책은 깊은 깨달음을 담은 에세이라 좋다. 에세이는 누구나 쓸 수 있다. 각자의 삶을 통해 독자에게 가볍게 때로는 묵직하게 공감을 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에세이를 자주 찾아 읽는지도 모른다.

한 시절을 함께 견딘 사람, 스승
지금도 스승의 날만 되면 학교 현장에서 불리곤 하는 강소천 작시의 〈스승의 노래〉는, 듣는 스승들의 입장을 난처하게 하고 급기야는 모골을 송연하게 한다. "스승의 은혜는 하늘 같아서" 라는 최고 예우의 비유로 시작하는 이 노래 1절은 "참되거라 바르거라 가르쳐주신" 스승을 "마음의 어버이'로 칭송함으로 써 마무리된다. 전인격적 스승의 역할을 양도한 채 얼마간 기능적 전문직에 기울어진 길을 걷고 있는 대학교수들에게, 이 노랫말은 적지 않은 자괴감과 민망함과 당혹감을 던져준다. 물론 어떤 날을 기념하는 노래들이 나름대로 대상에 대한 송가의 속성을 띤다는 걸 모르지는 않지만, 그럼에도〈스승의 노래〉는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 뉘시며" 같은 구체성 있는 언어로 우리를 감읍케 했던 양주동 작시의 〈어머니날 노래〉(물론p. 34 지금은 '어버이날'이다. 한때 우리는 어머니께만 카네이션을 달아드렸던 '어머니날'을 기념한 바 있다)에 비해서도 훨씬 추상적 과장과 미화가 심하다. 아닌 게 아니라 하늘같은 은혜는 고사하고, 나는 '참되거라 바르거라' 하고 가르친 적이 도대체 없다. 어떤 인문학자가 그렇게 명료하고도 단선적인 '참됨'과 '바름'을 학생들에게 권면 할 수 있겠는가. 나는 오히려 '참됨'과 '바름'의 자명함을 의심하면서 그런 윤리적 가치나 지표들이 구성되는 사회적 합의 방식 혹은 체계들을 비판적으로 읽을 것을 주문해오지 않았던가. 지금도 나는, 스승의 언어는 상류에서 하류로 흘러내려가는 순리의 언어가 아니라, 때로는 솟구치기도 하고 소용돌이도 치는 역리의 언어라고 생각하는 편이다. 서구 계몽주의자 가운데 한 사람은 학교 하나를 지으면 감옥 하나를 부수는 것과 같다고 말한 적이 있다. 한 사회의 야만 상태를 문명 상태로 끌어올리는 학교의 긍정적 기능에 대한 신뢰를 근거로 한 발언일 것이다. 하지만 근대 사회는 학교 하나를 늘리면 고스란히 감옥 하나가 늘어나는 아이러니를 보이는 방향으로 흘렀다. 학교가 곧 창살 없는 감옥이 되어버렸으니 말이다. 우리 기억 속에서 학교는 가고 싶었던 곳이 아니라, 제도적 강제로 주어진 타율적 집합소 같은 곳이었지 않은가. 그래서인지 교육사상가 이반 일리치는 『탈학교화 사회Deschooling p. 35 Society』라는 책에서 아예 학교에 대한 급진적 비판에 나서기도 하였다. 이렇듯 학교에 대한 전폭적 신뢰와 급진적 비판이 공존 하는 현상은, 학교가 사회 체제에 의해 견고하게 결속된 기구이면서 동시에 그 견고함을 깨뜨릴 수 있는 창조적 균열들이 다양하게 존재하는 장소임을 알려준다. 학교의 구성원인 스승과 제자는 이러한 결속과 균열을 함께 지고 있는 양대 축인데,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는 그야말로 좋은 스승과 제자에 대해 생각하게끔 하는 힘을 지금도 가지고 있는 드문 사례일 것이다. 모교에 새로 부임한 키팅 선생은 자신을 선장 captain 이라고 부르라면서 첫 시간부터 파격적 방식으로 제자들을 대한다. 그의 교육 방법은, 죽어 있는 지식을 전수하기보다는 살아 있는 경험을 제자들과 공유하는 데 집중된다. 어느 날 그가 죽은 시인의 사회라는 모임 이야기를 전해주었을 때, 제자들 몇몇이 그 모임을 이어가기로 작정하면서 영화는 진경으로 나아간다. 이들은 학교 뒷산에 있는 동굴에서 시를 낭송한다든가 연극을 준비하면서 자신들이 그동안 발견하지 못했던 매혹적 자아상 을 구축해간다. 하지만 연극에 대한 열정을 불태우던 학생 하나가 아버지의 반대에 부딪혀 끝내 권총으로 자살하게 되면서, 학교측에서는 이런 불온사상을 유포한 당사자로 키팅을 지목하 고 그를 파면하려 한다. 학교를 떠나는 스승 앞에서 몇몇 제자들이 책상 위로 올라가 "Captain, my captain!"을 외치는 마지(p. 36)막 장면은 이 영화의 압권이다. 자신들의 삶에 새로운 결속과 창조적 균열을 선사해주었던 스승께 파격적이고 전폭적인 헌사를 보내는 이 장면은, 키팅의 교육적 퍼포먼스가 감동적 동의agreement를 이끌어내는 풍경을 담고 있다. 진정성 있는 스승의 가르침이 수용자들의 폭넓은 동의를 얻어내는 과정을 이 영화는 감동 깊게 보여준다. 그렇다면 왜 이 영화는 우리의 기억 속에 마치 '대안 교육'의 전범 같은 잔상을 남기고 있는 것일까. 키팅의 교육이 여타의 것들을 압도하는 최량의 것이었기 때문일까. 아닐 것이다. 우스 갯소리로, 키팅이 우리나라에서 그리했다면 벌써 인터넷 게시판에 난리가 나고 퇴출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오히려 몇몇 제자들이 보여준 마지막 동의의 결단은, 키팅에 의해 전달된 그 무엇 때문이 아니라, 제자들에게 삶과 언어의 매혹을 경험하게 하려 했던 키팅의 의도가 발견된 순간에 이루어졌다고 보아야 옳을 것이다. 일방적으로 전달되지 않고 매혹적으로 발견되는 것이 가장 멋진 스승임을, 그리고 좋은 스승good leader 만큼 좋은 수용자good follower가 중요함을 이 영화는 새삼 깨우쳐준다.
옛말에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아니한다'고 했던가. 스승에 대한 배타적 외경을 담은 표현일 것이다. 그런가 하면 공자는 "三人行 必有我師"라고 함으로써, 어디든 있는 잠재적 스승들에게 마음을 열라고 주문하였다. 스승이란 성역에 있는 존재가 아니(p. 37)라 새롭게 구성되어가는 존재임을 말한 것일 터이다. 나는 대학에서의 진정한 스승이란, 자신의 그림자도 나누어 가지면서 제자들에게 자신의 생각과 언어에 대한 동의를 얻어가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자신의 열정과 능력이, 좋은 수용자들에게 발견되기를 희구하는 사람일 것이다. 그래서 궁극적으로 고단한 대학 구성원으로서의 공동 운명을 나누면서 한 시절을 제자들과 함께 견딘 사람일 것이다.
도종환 시인은 "저희가 더더욱 아이들을 사랑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라고 썼지만, 제자들을 사랑하기에는 너무도 분주하고 무력하기만 한 지식인으로서의 교수는, 함께 견딤의 윤리와 열정을 통해 새로운 결속과 균열의 힘으로 '스승' 역할을 힘겹게 해나갈 뿐이다. 그때 비로소 하늘 같은 은혜는 아닐지라도 마음의 어버이 같은 스승의 쓸쓸한 그림자가 비치지 않겠는가. 그리고 제자들은 그 '그림자'를 같이 밟으면서, 스승의 뒷모습을 발견해주지 않겠는가(p. 38).
가을에 읽는 책 - 늦은 나이란 없다
가을은 만물이 소멸하는 계절이다. 나무들은 저마다 자신의 몸을 감싸고 있던 잎사귀들을 떨구어 뿌리로 돌려보내고, 들녘은 가을걷이 후의 허허로움과 적막감으로 가득하다. 하지만 가 을은 만물이 결실하는 계절이기도 하다. 봄의 희망과 여름의 시련을 거친 후의 가을 풍경은 수확 뒤 기뻐하는 농부의 얼굴을 닮았다. 시인 릴케도 "최후의 단맛을 포도송이에 저며넣"( 「가을날」)고 있는 가을의 풍요를 노래한 바 있지 않은가. 그만큼 가을은 소멸과 결실의 모순된 얼굴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인지 가을은 인생의 중년과 꽤 흡사하다. 모든 것이 안정되어가면서도 마음 한구석에서는 청년기의 열정을 잃어버린 허전함이 있는 나이, 생의 여유로 인한 넉넉함과 노년기로 나아가는 두려움이 공존하는 나이, 그것이 바로 인생의 중년이니 가을은 여러모로(p. 74) 중년과 닮아 있다.
이 가을에 우리가 가장 먼저 할 일을 들라면 많은 이들은 흔쾌히 '독서'를 꼽는다.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라는 익숙한 표어가 곧바로 연상되는 까닭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아침저녁으로 서늘해진 기온이 책을 읽기에 퍽 적합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만큼 가을은 그동안 분주하게 살아왔던 시간들을 성찰하고 사색하는 데 알맞은 계절이다. 그러나 정작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은 책 읽기에 그리 우호적이지 않다. 다양해진 매체 환경이 우리의 시선을 책이 아닌 다른 곳으로 온통 쏠리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든 정보와 지식이 특정한 사람들에게 집중되지 않고 많은 이들에게 공유되는 시대를 살고 있다. 나아가 우리 시대는 다양한 매체가 한꺼번에 공존하면서 서로 경합하는 다매 체적 성격을 띠기도 한다. 이러한 '정보화 사회'는 우리에게 여러 가지 변화를 가져다준다. 이를테면 사람들은 '책'보다는 '영상' 쪽으로, 깊은 '생각'보다는 가벼운 '유희' 쪽으로, 지속적인 '지성'보다는 일회적인 '감각' 쪽으로 무게중심을 현저하게 이동하게 된다. 따라서 독서보다는 스포츠나 여행, 영화 관람 등이 대부분의 여가 시간을 점령하게 된다. 이러한 환경에서 '책'이 가지는 문화적 위상은 지난 시대에 비해 매우 왜소해질 수밖에 없다(p. 75).
일찍이 프랑스 사상가 몽테뉴는 인간을 변화시키는 세 가지 교제가 있다고 말한 바 있다. 그 하나가 동성 간의 우정이요, 둘이 이성 간의 연애요. 셋이 책과의 교제인 독서다. 내일을 위 해 사과나무 한 그루를 심는 것처럼, 독서는 자신의 미래를 위해 활자와 사귀는 일종의 교제다. 따라서 책을 읽는다는 것은 자신의 과거와 미래를 함께 만나는 일이다. 법정 스님의 책 『무소유』에도 이런 구절이 나온다. "읽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다른 목소리를 통해 나 자신의 근원적인 음성을 듣는 일이 아닐까"(「그 여름에 읽은 책」) 이 또한 독서를 통해 우리가 망각했던 자신의 근원적인 모습과 만나야 한다는 목소리일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이 가을에 독서를 통해 얻어야 하는 것은, 현란한 광고로 치장된 처세술이나 효율성으로 무장한 경영 전략이 아니라, 자신의 지난날과 다시 만나는 바로 그 순간일 것이다. 그러려면 예전에 읽었던 책을 다시 읽는 것도 좋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잊힌 자신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고, 독서의 대상이 활자 자체가 아니라 그 뒤에 숨어 있는 자신임을 알게 된다. 지금 도심 대형 서점은 책으로 넘쳐난다. 넘친다고는 하지만 정작 좋은 책을 고르기란 쉽지 않다. 홍수 때 먹을 물이 귀하다고 하지 않는가. 이 가을엔 좋은 책을 손에 쥐자. 자신을 찾아 나서는 오랜 여행을 떠나자. 그 대상이 두툼한 볼륨에 정장을(p. 76)한 양장본일 수도 있고 얄팍한 두께에 무선제책을 한 문고본일 수도 있다. 눈물 글썽이게 하는 비극적 이야기를 담은 소설도 좋고, 온갖 난관을 뚫고 위대한 성취를 이룬 인간의 의지를 담은 논픽션도 좋다. 1년 가야 한 번 떠들어볼까 말까한 고급 도록이나 화첩이면 어떤가. 가을은 중년의 계절이다. 분주함을 잠시 멈추고 자기 자신에 대해 사색하는 시간이다. 소멸의 안타까움과 결실의 즐거움이 공존하는 이 쓸쓸하고도 아름다운 계절에 자신을 들여다보게 해주는 책을 잡자. 늦었다고 생각할수록 더욱 그리하자. 책을 읽는 데 늦은 나이란 없다(p. 77).
선택에 대한 긍정과 사랑
다음 시편은 나의 기억 속에 오래도록 웅크리고 있다. 가끔씩 생의 어떤 분기점에 이를 때마다 불쑥불쑥 솟아나 너그러운 자긍과 겸손의 마음을 환기해주는 작품이다. 한번 읽어보자. 원 문을 소개하기는 어려운 터라 피천득 선생 번역으로 소개한다. 개인적으로는 고등학교 국어교과서에서 이 번역시편을 처음 접했다.
가지 않은 길
노란 숲 속에 길이 두 갈래로 났었습니다.
나는 두 길을 다 가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면서, 오랫동안 서서 한 길이 굽어 꺾여 내려간 데까지(p. 156)
바라다볼 수 있는 데까지 멀리 바라다보았습니다.
그리고, 똑같이 아름다운 다른 길을 택했습니다.
그 길에는 풀이 더 있고 사람이 걸은 자취가 적어, 아마 더 걸어야 될 길이라고 나는 생각했었던 게지요.
그 길을 걸으므로, 그 길도 거의 같아질 것이지만.
그 날 아침 두 길에는 낙엽을 밟은 자취는 없었습니다.
아, 나는 다음 날을 위하여 한 길은 남겨 두었습니다.
길은 길에 연하여 끝없으므로 내가 다시 돌아올 것을 의심하면서...
훗날에 훗날에 나는 어디선가 한숨을 쉬며 이야기할 것입니다.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다고, 나는 사람이 적게 간 길을 택하였다고, 그리고 그것 때문에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몇몇 '길'의 이미지가 있다. 페데리코 펠리니의 아름다운 영화 〈길〉, 프랭크 시내트라의 장중한 노래 〈마이 웨이〉 등은 '길'(p. 157)을 상징의 차원으로까지 각인한 명품들이다. 그 가운데서도 로버트 프로스트의 명편 「가지 않은 길」은 가장 선명한 기억의 '길'을 뚜렷한 심상으로 선사한 바 있다. 시의 화자는 어느 가을날 숲에서 두 갈래 길을 만난다. 얼마나 망설일 것인가. 그래서 그는 "두 길을 다 가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중에서 사람이 걸은 자취가 적게 보이는 길을 선택한다. 도전과 개척의 의미를 품은 이 선택은, 다른 한 길에 대해서는 "다음 날을 위하여" 남겨두는 것을 수반하게 된다. 물론 이 갈림길에 다시 돌아올 수 있을까를 의심하면서 말이다. 결국 그는 자신의 노경에 이르러 자신이 선택한 길 때문에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회상하게 된다. 흔히 우리 삶의 과정은 '길'에 비유되곤 한다. 그 길은 삶의 과정을 가장 적절하게 은유하면서 순간순간 우리에게 여러 갈래의 선택지로 다가온다. 만약 우리에게 하나의 길만 주어지고 그저 우리는 그 길을 걷기만 하면 된다면, 우리 삶은 얼마나 평화롭고 단조로울 것인가. 하지만 우리의 삶은 선택의 연속 속에서 특유의 긴장과 활력을 가지는 법이다. 그런데 '선택'이 다른 것들의 '배제'나 '포기'를 뜻한다는 점에서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중요한 고비마다 다른 것들을 배제하거나 포기하면서 '길'을 선택해간다. 하지만 그 선택에 자긍과(p. 158) 겸손을 가지고 살아간다고 해도, 어찌 '가지 않은 길'에 대한 미련과 아쉬움이 없을 것인가. 나는 이 시편에 담긴 시인의 삶의 여정, 곧 망설이고 아쉬워 하면서도 중국에는 자신의 삶을 긍정하고 사랑하는 마음의 흐름이야말로 우리 삶에서 가장 아름답고도 불가피한 선택의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는 그 가지 않은 길을 상상적으로 그리워하면서 자신이 선택한 '길'을 오늘도 걷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가끔씩 그 선택에 회한과 아쉬움을 느끼면서, 더없는 감사를 드리면서 말이다(p. 159).
섭리와 운명 사이의 생성적 지혜
30여 년 전에 개봉된 밀로스 포먼 감독의 영화 〈아마데우스〉는 천재 음악가를 질투했던 한 궁정음악가의 생애를 다루어 우리에게 깊은 기억을 안겨준 바 있다. 왕실의 궁정음악가 살리에리는 천재 작곡가로 소문이 난 모차르트의 연주를 듣고는 그가 천재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아챈다. 하지만 그 천재는 참으로 오만방자했고 여성들을 희롱하거나 비속어를 남발하는 등 한마디로 미성숙한 철부지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 철부지가 천부적인 음악적 소질을 가졌다는 사실을 한눈에 알아본 살리에리는, 정작 자신에게는 그러한 재능을 주지 않은 신에 대한 항의와 절망으로 모차르트에 대한 한없는 적대감을 키워 간다. 그 결과 살리에리가 의도적으로 모차르트를 파멸시켜간다는 것이 영화의 대체적인 줄거리이다. 이때 살리에리가 외친,(p. 225) "신이시여, 주께선 제게 갈망만 주시고 절 벙어리로 만드셨으니. 말씀해주십시오. 만약 제가 음악으로 찬미하길 원하지 않으신 다면 왜 그런 갈망은 심어주셨습니까? 갈망을 심으시곤 왜 재능을 주지 않으셨습니까?" 하는 마지막 대사는, 자신의 재능에 온전히 만족하지 못하는 모든 예술가들의 공통적 외침이 되기에 족한 것이었을 게다. 재능에 대한 감별력은 주었지만 정작 그것을 펼칠 능력은 주지 않은 신의 처사에 대한 항변은, 그것이 섭리이든 운명이든 예술가가 견지하는 욕망과 재능 사이의 관계와 함께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천분의 불가항력성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끔 해준다.
이와 함께 떠오르는 소설이 최인훈의 단편 「라울전」이다. 최인훈은 「광장」이라는 작품을 통해 본격적인 분단소설의 출발을 알린 우리나라의 대표 작가이다. 「광장」에서 작가는 북쪽 사회가 가지는 폐쇄성과 집단의식의 강제성을 비판하고 동시에 남쪽의 사회적 불균형과 자유방임에 가까운 개인주의를 고발 하였다. 그런 최인훈이 「광장」 한 해 전인 1959년에 발표한 소설이 「라울전」이다. 주인공인 라울과 사울은 석학의 문하에서 함께 공부하여 랍비가 된 동급생 친구이다. 라울이 학구파이고 신중한 사람이라면, 사울은 성깔 있는 한량에 가까운 편이었다. 라울은 나사렛 예수의 소문을 듣고서 그가 메시아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품어보지만, 사울은 바로 예수를 탄압하기 시작(p. 226)한다. 그런데 정작 부활한 예수는 라울이 아니라 사울을 찾아가 그를 회심시킴으로써 사도로 삼는다. 이때 라울은 "신은, 왜 골라서, 사울 같은 불성실한 그리고 전혀 엉뚱한 자에게 나타났느냐? 이 물음을 뒤집어놓으면, 신은 왜 나에게, 주를 스스로의 힘으로 적어도 절반은 인식했던! 나에게, 나타나지를 아니하였는가?"라는 말로 항변한다. 이는 그대로 궁정예술사 살리에리의 외침을 닮았다. 이때 사울은 성경의 비유를 들어 "옹기가 옹기장이더러 나는 왜 이렇게 못나게 빚었느냐고 불평을 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옹기장이는 자기가 좋아서 못생긴 옹기도 만들고 잘생긴 옹기도 빚는 것이니"라고 일갈함으로써 신의 의지에 따른 섭리의 전권을 다시금 설파하게 된다.
이 두 편의 예술적• 종교적 서사 앞에서 우리는 다시 한번 신의 섭리와 인간의 운명 같은 불가항력적인 힘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살리에리와 라울의 운명과 항의 속에서 인간의 한계와 고뇌에 대해 생각하게 되기도 한다. 이처럼 섭리와 운명 사이에서 자신의 존재방식을 상상하는 모든 이들에게 백석 시편 「흰 바람벽이 있어」의 마지막 구절은 매우 융융한 시사를 던져준다.
백석은 이 아름다운 작품에서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라고 노래하였다. 섭리이든 운명이든 가장 귀한(p. 227) 존재에게 주어지는 것이 '사랑=슬픔'의 힘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자신보다 더 큰 재능을 가진 이들에 대한 질투보다는, 자신에게 주어진 사랑과 슬픔의 생성적 지혜를 발견하면서 섭리나 운명의 속뜻을 헤아려가야 한다는 것, 이것이 바로 살리에리와 라울의 불행을 넘어서는 존재론적 발견이 아닐까, 잠깐, 생각해본다(p. 2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