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인주의자 선언 - 문유석 저자(글), 문학동네 · 2022년

판사 생활을 하면 세상의 온갖 죄악들을 접할 수 있을 것 같다. 그 가운데 전직판사인 이 작가는 말의 중요성과 문학의 필요성을 말했다. 그럴 수 있다는 큰 공감을 했다. 남을 통해서 좋은 교훈을 받으니 좋다.

독자님들은 이제부터 어쩌면 낡은 일기장을 꺼내 읽어볼 때 처럼 거칠고 두서없는 느낌이나 생각들과 마주치게 될지도 모르겠지만, 이거 하나만큼은 미리 말씀드리고 싶다. 사회에 나와 지금까지 겪어온 사람들의 모습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누구나 자기 몫의 아픔은 안고 살고 있더라는 거다. 굳이 구체적으로 이야기하지는 않겠지만 나 자신의 몫도 포함해서 하는 말이다. 직업병 때문일까. 어떤 때는 다른 것은 몰라도 고통만큼은 평등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부자도 권력자도 스타도 화려한 겉껍질 속에는 곪을 대로 곪은 상처가 가득했다. 건강 때문에 가족 때문에 자식 때문에 때로는 자기 자신 때문에 남모를 고통에 시달리는 경우가 허다했다. 하물며 돈도 권력도 없는 평범한 사람들은 어떻겠는가. 그 흔하디흔해 보이는, 건강하게 자라서 사랑하는 이를 만나 아이를 갖고 키우며 사는 일들이 실은 얼마나 전쟁같이 힘든 일인지......
지금 힘들어하는 모든 이들에게 드리고 싶은 한상궁 마마님(p. 13)의 말씀이 있다.
장금아. 사람들이 너를 오해하는 게 있다. 네 능력은 뛰어난 것에 있는 게 아니다. 쉬지 않고 가는 데 있어. 모두가 그만두는 때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다시 시작하는 것. 너는 얼음 속에 던져져 있어도 꽃을 피우는 꽃씨야. 그러니, 얼마나 힘이 들겠어....
"네 능력은 뛰어난 것에 있는 게 아니다. 쉬지 않고 가는 데 있어"라고 격려해주면서도, 끝에는 "그러니 얼마나 힘이 들겠어'"라며 알아주는 마음. 우리 서로에게 이것이 필요한 시대가 아닐까(p. 14).
'갑질'의 심리 역시 수직적 가치관의 사회에서 쥐꼬리만한 권력이라도 있으면 그걸 이용해 상대에 대한 자신의 우위를 확인하려는 수컷 동물 사이의 우세경쟁 같은 것이라 볼 수 있다. "내가 누군지 알아?"가 이렇게 자주 튀어나오는 사회가 있을까. 이런 사회에서 받는 스트레스는 타인에 대한 관용 부족으로 이어져 약자 혐오와 위악적인 공격성을 낳는다. 약자는 자기보다 더 약자를 찾아내기 위해 필사적이다. 남들 눈에 비치는 내 모습에 집착하는 문화, 집단 내에서의 평가에 개인의 자존감이 좌우되는 문화 아래서 성형 중독, 사교육 중독, 학력 위조, 분수에 안 맞는 호화 결혼식 등의 강박적 인정투쟁이 벌어진다. 사실 이건 모두 같은 현상이다. '남부럽지 않게' 살고 싶다는 집착 때문에 인생을 낭비하는 이들을 접할 때마다 드는 생각이 있다. 그냥 남을 안 부러워하면 안 되나. 남들로부터 자유로워지면 안 되는 건가. 배가 몇 겹씩 접혀도 남들 신경 안 쓴 채 비키니 입고 제멋으로 즐기는 문화와 충분히 날씬한데도 아주 조금의 군살이라도 남들에게 지적당할까(p. 32)봐 밥을 굶고 지방흡입을 하는 문화 사이에 어느 쪽이 더 개인의 행복에 유리할까. 우리가 더 불행한 이유는 결국 우리 스스로 자승자박하고 있기 때문 아닐까(p. 33).
타인과의 비교에 대한 집착이 무한경쟁을 낳는다. 잘나가는 집단의 일원이 되어야 비로소 안도하지만, 그다음부터는 탈락의 공포에 시달린다. 결국 자존감 결핍으로 인한 집단의존증은 집단의 뒤에 숨은 무책임한 이기주의와 쉽게 결합한다. 한 개인으로는 위축되어 있으면서도 익명의 가면을 쓰면 뻔뻔스러워지고 무리를 지으면 잔혹해진다. 고도성장기의 신화가 끝난 저성장시대, 강자와 약자의 격차는 넘을 수 없게 크고, 약자는 위는 넘볼 수 없으니 어떻게든 무리를 지어 더 약한 자와 구분하려든다. 가진 것은 이 나라 국적뿐인 이들이 이주민들을 멸시하고, 성기 하나가 마지막 자존심인 남성들이 여성을 증오한다. 반면 합리적 개인주의는 공동체에 대한 배려, 사회적 연대와 공존한다. 자신의 자유를 존중받으려면 타인의 자유도 존중해야 하기 때문이다. 톨레랑스, 즉 차이에 대한 용인, 소수자 보호, 다양성의 존중은 보다 많은 개인들이 주눅들지 않고 행복할 수 있게 하는 힘이다(p. 37).
인정투쟁의 소용돌이, SNS
남들에게 인정받고자 치열한 인정투쟁을 벌이는 와중에 자신을 잃어가는 아수라장을 쉽게 관찰할 수 있는 곳이 SNS 공간이라고 하면 지나친 말일까. 페이스북을 하면서 느낀 건 이 공간 역시 오프라인 세상이 빠져 있는 강박증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이었다. 페이스북은 참 묘한 매체다. 독백체로 글을 써도 사실 그 글은 자신에게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페친들에게 건네는 말이다. 방자와 향단이를 통해 대화를 주고받는 이몽룡과 춘향이 같다. '어쩐지 우울한 날이다'라고 쓰면 저커버그 씨가 열심히 이집 저집 다니며 "OO님이 외롭다셔요. 놀아주세요" 또는 "OO님이 섬세한 감정도 있는 사람이라는 걸 알아달라셔요"라며 말을 전한다. 똑똑똑. 똑똑똑. 방문을 두들기며. 돈 버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바쁜 전갈들이 오가며 점점 상승작용이 일어난다. 전하는 목소리들은 실제보다 더 비장하기도 하고, 더 화사하기도 하다. 아,(p. 39) 내 삶은 너무 완벽해요. 행복해죽겠어요. 저 너무 예쁘지 않아요? 아무것도 모르는 것들이 깝죽거리는구나(나는 이렇게 아는 게 많은데 알아주지 않고), 세상은 썩어 문드러졌고 분노하지 않는 자들은 쳐죽일 비겁자들이다. 나는 이렇게 세상에 대해 고뇌하는 지식인이다 등등.
인정투쟁의 소용돌이. 결국 독백은 외침이 된다. 형식과 실질의 괴리 때문에 더 그로테스크하기도 하다. 읽는 이들의 반응을 의식하면 할수록 실제 자신으로부터 더 많이 이탈해 온라인상의 페르소나가 되어간다. 나중에는 그게 진짜 자신인 것처럼 혼동하기조차 한다. 일베 회원들의 이른바 폭식투쟁이 충격적이었던 것은 익명성 뒤에 숨어 유희하던 페르소나들이 뭔가 착각하고는 현실 세계로 튀어나왔기 때문이다. 유감스럽게도 현실은 우디 앨런의 영화 〈카이로의 붉은 장미〉에서 스크린 밖으로 걸어나온 영화 캐릭터와는 달랐다. 그저 평범하고 비루한 실체를 확인했을 뿐이다. 재미조차 없었다. 그런 모습들을 보며 나 자신도 돌아보았다. 그럼 나는 왜 페이스북에 글을 쓰는 걸까. 좋은 사람, 훌륭한 사람으로 보이고 싶어서? 오 노! 그런 족쇄를 감수할 만큼 나의 인정욕구는 치열하지 못하다. 나는 본질적으로 개인주의자에 쾌락주의자이고 대중의 잔인성에 대한 공포를 가지고 있다. 세상을 바꾸고 싶어서? 생각을 공유하는 연쇄의 힘은 믿지만 그렇다고 글 몇 줄로 세상이 손(p. 40)쉽게 바뀔 거라고 믿을 만큼 순진한 나이도 지났다. 내 책 많이 팔고 싶어서? 이게 그나마 현실적인 생각이었는데 사양산업인 출판 현실을 곧 깨닫고는 기대를 접었다. 글 써서 돈을 번다는 건 망상일 거다. 애들 학원비라도 보태면 다행이다. 결국 재미있어서 쓰는 것 같다. 아마 나와 같은 이유로 트위터나 페이스북에 글을 쓰기 시작한 이들이 많을 것 같다. 특히 내 경우에는 나 자신의 생각을 관찰하는 데서 큰 재미를 느낀다. MRI 같은 거다. 외부에서 주어진 자극(소재)에 대해 내 뇌가 어떻게 반응하는지는 글을 써봐야 생생하게 알 수 있다. 돌아서면 잊어버리기 때문에 적어둔 글을 나중에 읽는 재미가 있다. 다른 이들의 반응이 더해지면 더 재미있다. '유체이탈' 증세가 선천적으로 극심한 편이라 어느새 다른 이들과 같은 쪽에 서서 내 글을 관찰하기도 한다. 이건 재밌고 이건 지루하군. 글이란 묘해서 어떤 목적이 앞서거나 읽는 이에게 어떻게 보이고 싶은 욕구가 앞서는 듯 보이는 글은 감흥을 주기 어렵다. 진짜가 아니기 때문이다. 내 MRI에 '뽀샵'을 하고 싶은 욕구가 앞설 때쯤이 글쓰기를 집어치워야 할 시기일 듯하다(p. 41).
성취, 성공에의 열망은 마약처럼 중독성이 있어서 사람을 파멸로 몰고 간다(p. 44). 그런 점에서 이 영화를 '나는 저만큼 충분히 노력하고 있는 걸까? 미치지 않고는 미치지 못한다는데...'라는 식의 자기계발 강박증으로 소비하는 것은 위험하고 유해한 감상법이라고 본다. 이 영화에 대한 감상글을 몇 가지 검색해보니 젊은 관객들이 이런 식으로 영화를 받아들이는 경우가 꽤 있다는 걸 알게 됐다. 물론 노력은 소중하고 필요한 것이지만 맹목적인 노력만이 가치의 척도는 아니다. 무엇을 위해 노력하는지 성찰이 먼저 필요하고, 노력이 정당하게 보상받지 못하는 구조에 대한 분노도 필요하다. 가장 위험하고도 어리석은 건 '노력해야 성공한다'를 넘어서 '성공한 이들은 다 처절하게 노력했기에 그 자리에 오른 것이다' '그만큼 노력하여 성공한 이들이니까 괴팍하고 못되게 굴 만하다' "강한 것은 아름답다' 등으로 끊임없이 가지를 치는 스톡홀름증후군이다. 스티브 잡스가 매혹적이라 하여 그의 괴팍함과 못된 점조차 찬양할 필요는 없다. 훌륭한 점과 비판받아야 할 점은 냉정하게 분리해 평가해야 한다. 그리고 대체로 성공에는 재능과 노력이 필요한 건 사실이지만, 유감스럽게도 현실사회에는 그저 우연히 부모 잘 만나서 과분한 기회를 누리며 사는 이들도 많다(p. 45).
말이 흉기다
사람이 사람을 살해하는 주된 동기는 과연 무엇일까. 재판 경험에 비춰보면 의외로 '자존심'이 원인인 경우가 많다. 건설 현장에서 숙식하는 노동자가 자고 있는 동료를 칼로 찔러 살해한 사건이 있었다. 살해 동기는 말 한마디였다. 저녁 때 소주를 마시다가 피해자가 피고인에게 특정 지역 출신 촌놈이라고 놀렸다. 다 같이 힘든 삶을 사는 처지면서 좀더 가난한 지역 출신이라고 놀린 것이다. 그만두라고 해도 반복적으로 놀리자 모욕감에 시달리다 일을 저질렀다
40년 해로하던 노부부가 있었다. 평소 유순하고 소심하던 남편이 아내를 살해했다. 이유는 사소한 말다툼 중 '개눈깔'이라고 내뱉은 아내의 말 때문이다. 어린 시절 사고로 눈 한쪽을 잃고 모진 놀림에 시달렸던 그에게 그 한마디는 흉기였다. 이처럼 누구에게나 자기만의 급소가 있다. 그리고 그것을 찌르는 흉기는 바로 '말'이다. 특히 인터넷은 그 흉기를 죄의식 없이 휘둘러대는 전쟁터다(p. 135).
단지 주목받고 싶다는 이유만으로 고통받는 이들에게 심각한 상처를 줄 수 있는 모욕을 가하는 일들이 연이어 벌어지고 있다. 미국인들은 소수자, 사회적 약자에 대한 증오 발언에 대해 사회적 제재를 가한다. 한 NBA 구단주는 여자친구에게 전화로 "흑인과 함께 내 경기장에 오지 마라"고 말한 사실이 알려져 영구퇴출당하고 구단을 매각했다. 표현의 자유에도 한계가 있는 것이다. 법관들도 말에 대해 주의하고 반성하기 위해 전문가의 강의를 듣는다. 그때 배운 것이 있다. 데이의 「세 황금문」이다. 누구나 말하기 전에 세 문을 거쳐야 한다. '그것이 참말인가?' '그것이 필요한 말인가?' '그것이 친절한 말인가?' 흔히들 첫번째 질문만 생각한다. 살집이 좀 있는 사람에게 '뚱뚱하다'고 말하는 것은 거짓이 아니다. 그러나 참말이기는 하지만 굳이 입 밖에 낼 필요는 없는 말이다. 사실 필요한 말이 아니면 하지 말라는 두번째 문만 잘 지켜도 대부분의 잘못은 막을 수 있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필요 없는 말로 남에게 상처를 주며 살아가고 있는지...... 더 나아가 진심으로 친구의 비만을 걱정해 충고하고 싶다면 말을 잘 골라서 '친절하게' 해야 한다. 옳은 총고도 '싸가지 없이' 하면 상대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다. 진심이 담긴 필요한 말이라고 해도 배려심 없이 내뱉으면 그것이 진실이기 때문에 더 상대에게 깊은 상처를 줄 수도 있다(p. 136).
법조인들의 말은 더더욱 무서운 흉기가 될 수 있다. 검찰에서 강도 높은 조사를 받고 귀가한 후 굴욕감에 자살하는 비극적인 사례가 여러 번 발생했다. 최종심판자인 법관의 말은 더 무섭다. "늙으면 죽어야지" 등의 막말만 문제가 아니다. 피고인 앞에서 재판 기록을 뒤적거리며 무심코 하는 혼잣말 한마디도 피고인에게는 청천벽력이다. 그래서 법정에서는 불필요한 말은 단 한마디도 금물이다. 요즘은 동료 법관의 재판을 서로 교대로 방청하며 자신의 재판을 돌아보게 하는 법정 모니터링 기회가 많다. 다른 판사의 재판을 방청석에서 지켜보니 나조차도 높은 법대 위에 앉은 판사의 표정 하나에도 위축되는 느낌이었다. 한번은 판사가 "주소 보정 아직도 안 하셨네요. 일부러 안 하시는 건가요?"라고 내뱉으면서 신경질적으로 서류를 휙휙 넘기자 당사자가 어쩔 줄 몰라 하며 연신 몇 번이나 죄송하다고 하는 모습을 보았다. 판사는 일 이 많다보니 순간 짜증 섞인 말을 한 것에 불과하더라도, 법대 밑에서 이를 듣는 당사자에게는 판사에게 밉보여서 불이익을 받을 것 같은 공포심을 충분히 줄 수 있음을 새삼 느꼈다. 절차적으로 필요한 말을 할 때도 표정이나 말투를 더 부드럽게, 친절하게 해야겠다는 다짐을 하는 계기가 되었다. 우리가 서로에게 '말'이라는 무시무시한 흉기를 무신경하게 휘둘러대는 대신 조금만 더 자제하고 조금만 더 친절할 수만 있다면, 세상은 훨씬 평화로운 곳이 될 것이다(p. 137).
문학의 힘
순문학 작품들은 장르소설 같은 즉각적인 몰입이나 인문학, 사회과학 서적처럼 직접적인 정보를 제공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나이 먹어가며 점점 순문학에서 멀어진 느낌이다. 그건 마음의 여유가 없어졌다는 말일지 모르겠다. 책 읽는 시간도 한정된 자원이라고 생각하여 책을 통해 세상에 대한 새로운 지식을 빠르게 얻거나 아니면 즉각적인 재미를 얻길 원하는 거다. 온통 문학에만 탐닉했던 소년 시절에는 그런 조바심 따위 없었는데. 긴 겨울밤이 이어지던 날, 서가 구석구석에 처박혀 있던 소설들을 넘겨보았다. 뭐랄까, '문학 근육'이 쇠약해져 있음을 느낀다. 장편이 잘 읽히지 않는다. 주변적인 사색이나 묘사가 이어지는 도입부는 어느 정도 탁월하지 않은 이상 남의 일기장 보는 느낌이 들어 흥미를 잃는다. 그러던 중 선물받은 계간지 『문학동네』 2014 년 겨울호에 실런 단편소설들을 읽었다. 다 좋은 작품들이었지만(p. 152) 특히 김영하 「아이를 찾습니다」, 김훈 「영자」, 천명관 「퇴근」, 성석제 「블랙박스」가 좋았다. 그중에서도 김영하 작품의 올림이 컸다. 마트에서 잃어버린 아들을 찾느라 지옥 같은 11년을 보낸 젊은 부부의 삶에 갑자기 아들이 돌아온다. 그리고 비로소 이야기가 시작된다. 아이를 잃어 버린 부모라는 소재는 그리 드문 게 아니다. 그런데 사라졌던 아이가 긴 시간이 흐른 후 돌아온 상황을 구체적으로 상상해본 사람은 별로 없을 듯하다. 그건 결코 해피엔딩이 아니라 새로운 지옥의 시작일 수도 있는 거다. 이미 자아 형성 과정에서 아이는 다른 사람의 아이가 되어버렸고, 자식과 함께할 유소년기의 소중한 시간은 소실되었다. 결말이 작위적이라는 비판도 있을 수 있겠지만, 난 좋았다. 숨쉴 공간을 남겨주어서 말이다. 김훈 작품은 고시텔에서 동거하는 노량진 9급 공무원시험 준비생들의 이야기인데, 김훈의 기자 시절 글이 연상되었다. 황량한 고시촌의 풍경과 고시생들의 내면 묘사가 뛰어나다. 대충 지나가지 않고 최대한 구체적으로 묘사하되 군더더기나 감상은 배제한 단문들이 이어진다. 서사보다 묘사가 오히려 더 몰입도가 높았다. 묘사가 이 정도로 수준 높다면 장르소설의 서사 이상으로 몰입이 된다. 좋은 단편을 찾아 읽는 것은 쇠약해진 '문학 근육' 단련에 좋은 듯하다. 문학적 감수성은 누구에게나 필요하지만 법관에게는(p. 153) 더더욱 필요하다. 심리학이든 다른 어떤 학문이든 결국 인간의 여러 특성 중 범주화할 수 있는 보편성을 추출해서 보여준다. 문학은 그보다 훨씬 풍부하게 인간의 개별성, 예외성, 비합리성을 체험하게 해준다. 후자에 대한 이해 내지 상상력 없이 이루어지는 재판은 침대 길이에 맞춰 인간의 신체를 절단하는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로 전락할 수 있다.
문학은 겉으로 드러나는 세계에 머물지 않고 인간의 숨기고 싶은 속내 깊숙한 곳을 파헤쳐 보여주곤 한다. 문학이 보여주는 인간 세상의 민낯은 전형적이지 않다. 작가들은 뻔하고 예측가능 한 것에 관심이 없다. 그들은 충동적이고, 불가해하고, 모순 덩어리인 인간 마음의 꿈틀거림을 묘사하는 것에 몰두한다. 그리고 그 관찰의 주된 재료는 작가 자신의 내면일 것이다. 어린 시절부터 자신의 마음을 스쳐갔던 온갖 미묘한 감정과 충동들, 질투, 선망, 욕정, 열등감, 우월감, 증오, 살의.... 자신을 주어로 하여 털어놓기는 어려운 날것의 내면적 충동들을 재료로 상상력을 가미하고 증폭, 변형하여 등장인물들의 내면을 창조해낸다. 인간 행위를 기술하는 방식에는 문학 이외에 육하원칙이 지배하는 신문기사가 있다. 두 방식에는 큰 차이가 있다. 인간이 저지르는 사건은 결국 인간 내면의 작용인데, 기자들은 주로 외형적 행위와 그 결과에만 치중하고 내면의 동기는 돈, 욕정, 복수심 등으로 간명하게 유형화하곤 한다. 사람들은 복잡한 사건을 쉽(p. 154)게 이해하길 원하고, 누가 나쁜 놈이고 누가 착한 놈인지 누구에게 분노하면 되는지 결론부터 알려주기를 성마르게 재촉하기 때문이다. 대중의 분노는 즉각적이고 선명한 정의를 요구한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법관으로 일해온 경험에 비춰보면 실제 인간 세계에서 벌어지는 일들 중 상당수는 인과관계도, 동기도, 선악 구분도 명확하지 않다. 신문기사처럼 몇 문장으로 쉽게 설명하기 어려운 일이 참으로 많다. 그래서 흔히들 생각하는 것과 달리 냉정 한 '팩트' 집합으로 보이는 신문기사보다 주관적인 내면고백 덩어리로 보이는 문학이 실제 인간이 저지르는 일들을 더 잘 설명해 줄 때가 많다. 작가는 최소한 자기 자신이라는 한 인간의 심층적인 내면세계를 관찰해서 쓰기 때문이다. 물론, 좋은 작가일 경우의 이야기지만 말이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옴진리교 사린가스 살포 사건에 관한 르포 『언더그라운드』를 쓰며 피해자는 물론 가해자인 옴진리교 신자들도 인터뷰했다. 예상 밖으로 신자 중에 명문대 출신의 연구원 등 이공계 출신이 많았다. 소설가여서일지는 모르지만 하루키는 '픽션'을 읽어본 경험의 부재가 엘리트 과학도를 광신도로 만들었다고 분석했다. 검증된 법칙과 데이터의 세계에서만 살던 이가 아사하라 쇼코(옴진리교 교주)처럼 통상적인 사고의 범주를 넘어선 예외적 인간의 극단적인 상상력과 조우했을 때 오히려 쉽게 무너질 수 있는 것이다. 협소한 상식에만 갇혀 있는 인간은 비상식의(p. 155) 세계를 이해하지 못하기에 인간과 세상을 깊이 이해하는 데 실패 하기 십상이다. 아무리 첨단 과학이 발달해도 여전히 더 많은 문학이 필요한 이유다(p. 15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