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6-04-18(토)
 
  • 인간폐지 - C. S. 루이스 저자(글) · 이종태 번역, 홍성사 · 201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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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스의 책을 처음 읽은 것이 대학에선지 신대원에선지 잘 모르겠다. 하나 분명한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그의 책은 쉽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 많은 세월 동안 나의 지적 능력은 그리 성장하지 않은 것인가하는 자괴감에 빠진다. 할 수 없다. 이것이 내 사고구조의 한계일수도 있다. 예를 들어 철학은 관심이 많았지만 이해하기 쉽지 않았던 것과 같다. 결국 책 뒤에 있는 해설을 통해 이 책에 대한 이해도를 높일 수 있었다. 이 책에서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상대주의 등 절대적인 것을 버리고 다른 것을 추구하고 따를 때 결국 인간은 폐지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이미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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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이들은 제가 그 조작자들에 대해 인위적인 난제를 일부러 꾸며 대는 것처럼 볼 수도 있겠고, 생각이 더 단순한 이들이라면 이렇게 비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아니, 왜 당신은 그들을 그렇게 나쁜 사람들로 가정합니까?" 그러나 정말이지 저는 그들을 나쁜 사람들로 가정하고 있지 않습니다. 나쁜 사람들이라기보다는, 그들은 (옛 의미에서 볼 때) 아예 사람이 아닙니다. 달리 표현하자면, 그들은 앞으로 '인간성'이 어떤 의미여야 하는지를 결정하는 일에 헌신하기 위해 전통적인 의미의 인간이기를 스스로 포기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는 '선'이니 '악'이니 하는 것은 무의미한 말에 지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단어들의 내용을 이제는 그들 자신이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또 그들의 난제 역시 인위적인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결국 우리들 대부분이 원하는 것은 동일합니다. 먹을 것과 마실 것, 섹스, 오락, 예술, 과학 그리고 개인과 종의 가능한 최대의 수명 등. 간단히 말해서, 이런 것들이 우리가 좋아하는 것이고, 그 조작자들은 그런 것들을 가장 잘 만들어 낼 수 있도록 사람을 조건화한다는 것인데 문제될 게 뭡니까?"(p. 76).

그러나 이는 답이 못 됩니다. 우선, 우리가 모두 동일한 것을 원한다는 말 자체가 거짓입니다. 설령 원한다 치더라도, 대체 어떤 동기로 그 조작자들이 후손이 원하는 것을 갖게 하기 위해 자신들의 쾌락은 포기하고 힘들여 일하겠습니까? 의무 때문에? 그러나 의무라는 것은 '도'이며, 그들이 임의대로 우리에게 '도'를 부과 할 수는 있어도 그들 자신에게는 구속력을 갖지 못합니다. 만일 그들이 그 '도'를 받아들인다면 그들은 양심의 제작자가 아니라 종속자라는 말이고, 이는 그들의 최종적 자연 정복이 실제로는 아직 완결되지 않았다는 말이 됩니다. 종의 보존을 위해서? 그러나 도대체 종이 보존되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후손들에 대한 이 러한 느낌-만들어 내는 법을 그들이 잘 알고 있는-이 계속되게 만들어야 할지 여부 역시 그들 앞에 놓인 질문 중의 하나일 뿐입니다. 제아무리 뒤로, 아래로 가 보아도 그들이 발 딛고 설 근거를 발견할 수 없습니다. 자신들의 행동 동기라고 제시하는 것은 모두 논점회피일 뿐입니다. 그들은 나쁜 사람인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아예 사람이 아닙니다. '도' 바깥으로 나갈 때 그들은 허공 속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그들의 지배를 받는 이들이 꼭 불행한 사람인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아예 사람이 아닙니다. 그것은 제품일 뿐입니다. 이렇게 인간의 최종 정복은 결국 인간의 폐지 abolition of Man를 의미합니다(p. 77).

 

해설

상대주의 문명에 던지는 반성적 통찰 - 박성일

C. S. 루이스를 낭만주의자라고 부른다. 어떤 이들은 그를 좀더 균형 있게 평가하려고 고민하며, 모순 같으나 그에게 낭만주의적 이성주의자 Romantic Rationalist라는 이중적인 정체성을 부여하기도 한다. 어쨌든 그가 낭만주의적 성향을 갖고 있다는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낭만주의라 하면, 18세기 말에 유럽을 휩쓸었던 철학 운동으로, 차갑고 축소주의적인 이성의 역할보다는 시적인 창의력 • 직감 • 감정 주관적 경험에 더 많은 강조를 두는 경향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루이스를 비롯하여 20세기 중반 옥스퍼드를 중심으로 형성된 기독교 낭만주의자들은 초월적이며 객관적인 절대자에 대한(p. 115) 신앙 중심으로 사고의 틀을 구성하고 있었다. 그들을 낭만주의라 함은, 초월적 절대 가치가 인간에게 드러나는 과정이 이성reason 뿐 아니라 창의력imagination 이라는 도구를 통하여 감정과 경험을 통해 전달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절대적 미학 또는 윤리적 가치가 인간에게 보편적으로 증거되어 있음을 강조했던 것이다.

루이스는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1년에 BBC 방송을 통하여 절대적인 가치 기준의 실재에 대하여 자신의 견해를 분명하게 드러냈다. 이 내용이 나중에 《순전한 기독교》의 제1장을 형성 하게 되었는데, 전쟁 중에 절대적 가치 기준을 논한다는 것은 그 나름대로 중요한 상황적 의미가 있다.

선과 악의 구분이 불가능하다면, 전쟁이 오직 개인이나 국가의 생존에 대한 의미만을 내포하고 있다면, 생명을 바치며 적과 싸운다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 과연 나치 정권의 군사주의나 아리안 혈통의 우월주의는 나의 생명을 던져서라도 막아야 하는 악의 세력인가? 서구의 문명사회를 하루아침에 혼란으로 몰고 간 히틀러의 광적인 야망이나, 극동의 힘의 균형을 깨고 침략과 문화적 탄압으로 태평양 연안을 피비린내 나는 전장으로 몰고 간 일본의 제국주의가 선과 악의 틀로는 도저히 규명할 수 없는 중립적인 것이라면 왜 저들과 맞서서 싸워야 하는 것인가?(p. 116).

21세기에 이르러서, 이와 같은 가치관의 질문 자체가 세련되어 보이지 않는 까닭은 후기 현대주의적 상대주의 또는 다원주의가 오늘의 문화에 깊이 침투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다원주의는 나치의 침략이나 일본 제국주의의 만행을 악으로 규정하는 것 역시 비(非)다원주의적 발상이라고 비난하겠지만 아울러 그것을 적극적으로 대항할 만한 근거 제공도 하지 못한다. 싸울 이유는 한쪽 뿐 아니라 양쪽 다 없다는 논리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절대적인 가치 기준을 의심하는 가운데서도 오직 허용이라는 가치만은 유일하게 애써 지켜야 할 절대 가치가 되었으니 이것도 모순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상대주의는 이미 루이스 시대에 유럽에 범람하고 있었다. 1942년에 루이스가 《인간 폐지》라는 책을 착상하게 된 동기는 바로, 그런 사고가 어린 학생들을 위한 교육 커리큘럼에 등장한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두 권의 영어 교과서가 그 중심에 있었다. 하나는 《언어의 통제 The Control of Language》 (1940)로 알렉스 킹과 마틴 케틀리라는 오스트레일리아 사람들이 저술한 것이고, 또 다른 한 권은 《영어 강독과 작문 The Reading and Writing of English》(1936)으로 E. G. 비아기니가 저자였다. 《인간 폐지》에서는 킹과 케틀리를 가이우스와 티티우스라는 가명으로 불렀고 책 이름을 《녹색책 The Green Book》이라고 칭했다. 비아기니는 오르(p. 117)빌리우스로 바꿔 불렀다. 루이스는 이 책들의 내용이 영어를 가르치는 것 외에 일정한 철학적 사상을 파급하여, 지각이 형성돼 가는 과정 중에 있는 학생들에게 치명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리라는 점에서 경악을 감추지 못했다.

1943년 2월에 루이스는 더럼 대학에서 리델 기념 강연의 강사로 초대되어 세 번의 강연을 하게 되었다. 이 기회에 그는 위에 언급한 두 책에 대한 비평을 시발점으로 하여 상대주의를 비판하고 참교육의 기초가 절대적인 가치 기준의 인정으로 시작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게 되었다. 그 강좌의 내용이 곧 “Reflections on Education with Special Reference to the Teaching of English in the Upper Forms of Schools”라는 긴 부제가 달린 책, 즉 《인간 폐지》로 출판되었던 것이다. 루이스에게 그토록 충격이 되었던 교과서의 내용이 무엇이었는 지는 이 책의 첫 장을 열면 자세하게 알 수 있다. 요약해서 말하자면, 사람이 어떠한 사물을 보고 느끼는 감정은 사물 그 자체의 본질에 대한 설명이라기보다는 그것을 보는 사람의 내면적 감정을 표현하는 것일 뿐이라는 주장이다. 이는 주관주의•상대주의의 극단적인 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다.

루이스는 이에 대한 반박으로 절대적 가치관이 인간 본연의 모(p. 118)습 안에 드러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자연의 법칙 the Natural Law이란 것이 단지 물리적 원칙만이 아니고 도덕적 법칙으로 편만하게 드러나 있다는 것이다. 루이스는 이러한 자연적 도덕률을 '도'라는 동양의 함축적인 단어를 동원하여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도' 라는 단어를 쓰는 것일까? 아마도 루이스는 이 절대적인 가치 기준이 기독교 문화를 배경으로 하는 서구에서만 주창된 것이 아니고 그것과 맞상대가 될 만한 중국을 중심으로 한 동양 사상에 도리어 뚜렷하게 나타나 있다는 점을 강조하려고 했던 것 같다. 사실 루이스는 이 책의 부록에 세계 여러 종교 와 문명을 대표하는 문서에서 발견되는 도덕률을 대조하는 장황한 근거 자료를 제시하고 있다. 결국 그의 주장에 의하면 가치관은 시대에 따라, 또는 여러 문화에 따라 제각기 다르게 생성되는 것이 아니며 모든 시대와 민족과 문화를 초월하여 공통적 • 보편적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는 객관적인 실재라는 것이다.

루이스는 인간이 더 이상 인간이 아닌 짐승이 되는 경우는 바로 이러한 절대적인 가치 기준을 망각하거나 또는 더 이상 그것에 대한 복종 의지가 상실되는 경우라고 말한다. 머리가 이해understanding와 사고력thinking을 뜻한다면 배는 본능 instinct과 충동 impulses 이라는 상징적인 표현을 쓰면서 머리와 배 사이에 있는 기관, 즉 가슴이 있어야만 인간이 인간으로서의 조건이 충족된(p. 119)다고 주장한다. 가슴이란 정착된 가치관의 형성과 그 가치관에 따 라 훈련된 감정 trained emotion을 뜻한다. 이 가치관은 사람마다 다른 기준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악한 것은 악으로, 선한 것은 선으로 인정하고 반응할 수 있는 보편적인 도덕의식에 바탕을 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훈련된 감정은 곧 살아 있는 양심으로 이해될 수도 있을 것이다. 배를 따라 행동하기보다는 머리에 따라 행동할 수 있도록 힘을 받쳐 주는 기관이 바로 가슴이다. 아울러 배를 지배하고 다스리는 것 또한 가슴이 하는 일이다. 그래서 무 서운 도전 앞에서도 담대할 수 있고, 견디기 어려운 상황에서도 인내할 수 있고, 나의 권리와 이익을 떠나 상대를 배려하는 여유를 가질 수도 있는 것이다.

가슴이 없는 사람은 생각은 생각대로 하지만 행동은 본능에 따라 움직이게 된다. 소위 신앙인이라 하더라도 훈련된 감정과 의지력이 결여 된다면 신앙은 머리에서 맴돌고 행동은 여전히 본능적이며 충동적인 상태를 면하지 못할 것이다.

상대주의적 교육이 무서운 것은 가슴이 없는 인간을 만들어 낸다는 점이다. 건전한 가치관을 상실하게 하고서, 건강한 사람들로 형성된 건강한 사회를 기대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이는 심장을 빼내어 버리고서 달려 보라고 명령하는 것이나, 꽃을 떼어 버리고서 열매를 맺으라고 하는 것과 같다. 루이스의 말대로 현대(p. 120)인은 신의에 대하여는 웃어넘기면서 자신들 안에 배반자가 있다는 사실에는 놀라는 모순을 범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마지막으로 '도'에 대한 신학적 평가가 필요할 것 같다.

혹자는 루이스의 시도가 마치 비교종교학 같이 보인다고 우려할 수도 있고, 마치 모든 종교가 결국은 같은 진리를 말한다고 주장하는 종교 다원주의적 발상이 아닌가 하고 의문시할지도 모르겠다. 오늘날 한국 교회의 상황을 기준으로 할 때 루이스가 결코 보수주의자가 아닌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마치 루이스를 보수주의자로 또는 복음주의자로 규정하기 위해 그를 방어하려는 노력은 그리 희망적이지 않다. 그러나 반면 그가 당시 신학적 자유주의, 즉 복음을 윤리적 교훈으로 축소시킨다든지, 자연주의적 전제에 빠져 기적을 한사코 부인하거나 이에 따라 성경을 비신화화demythologizing한다든지 하는 시도에 대해서는 과격할 정도로 정면 비판하고 나섰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루이스의 신학에는 인간은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은혜로만 구원받을 수 있고 삶의 가치를 회복할 수 있으며 영원한 천국을 사모하며 살 수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므로 루이스가 '도'를 논하는 의미를 종교 다원주의로 몰아서는 안 된다. 다만 루이스는, 하나님의 절대적 선이 모든 인간의 마음에 그림자처럼 드리워져 있다는 것을 확고하(p. 121)게 인식하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자체가 복음은 아니지만 복음으로 이끄는 중요한 첫 단추가 된다고 인정하는 것이다. 이는 초대 교회의 사도로 로마서의 저자인 바울이 선과 악의 판단이 모세의 율법을 소유한 유대인들뿐 아니라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송사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낸다"고 말한 것을 반영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루이스는 이러한 도덕률이 구원을 이루지 못한다는 사실을 《순전한 기독교》에서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인간이 갖고 있는 내면적 갈등은 무엇이 옳고 그른 것인지 의식하면서도 결국 일관성 있게 옳은 것을 택하지 못하며 끊임없이 악을 반복하고 있다는 것이다. 결국 구원의 문제는 '가슴' 만으로 해결될 수 있는 것은 아님을 루이스는 인정하고 있다. 더 깊은 곳에 있는 심령의 변화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야 말로 기적 중에 기적 이라는 것을 루이스는 알고 있었다. 일반은총과 특별은총 모두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혜임에 틀림없지만 두 가지가 동일하지 않으며 혼동될 수 없음을 그는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인간 폐지》는 현대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이(p. 122) 깊이 생각해 봐야 할 인류 공동체적 문제임이 분명하다. 도덕률 없이는 사회의 악이 억제되거나 순화되지 못하고, 악에서 악으로 치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바른 의식을 상실한 충동적 인간으로 이루어진 욕구 만족형 사회는 루이스의 다른 책에서 그토록 의미 심장하게 그려내고 있는 지옥 그 자체인 것이다(p. 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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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331】 절대적 기준이 사라질 때 인간은 폐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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