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랑과 잔혹의 세계사-기류 미사오 저자(글) · 이선희 번역, 바움 · 2008년
세상에는 별의별 일이 다 있다. 믿거나 말거나 식의 이야기들이다. 재미로 한 번 읽을 만한데 현재 이 책은 품절되었다.
죄를 없애기 위해 죄를 저지르다
고대 그리스에는 인신공양 제도가 있었다. 아테네에서는 남녀 두 명의 부랑자를 1년간 나랏돈으로 먹여 살렸다. 곡식을 수확하기 전 축제가 벌어지면, 사람들은 그들을 무화과 나뭇가지 로 때리며 마을 구석구석으로 끌고 돌아다녔다. 그들의 역할은 마을 사람들의 모든 죄와 더러움을 떠안는 것이었다. 그러고 나면 그들에게는 마을 변두리로 끌려가 절벽 위에서 떨어뜨리 거나 화형을 당하는 가혹한 운명이 기다리고 있다. 그들이 죽으면 사람들은 그 유골을 바다에 버렸다. 제물의 몸이 무로 돌아감으로써 비로소 사람들의 죄도 무로 돌아간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리스의 식민지 마살리아(오늘날의 마르세유_-옮긴이)에서도 마을에 역병이 돌 때마다 신에게 사람을 바치는 제도가 있었다. 그리고 역시 제물이 되는 사람은 나랏돈으로 부양한 부랑자들이었다. 사람들은 제물에게 화관을 씌우고 축제 의상을 입혀서 마을 여기저기(p. 32)로 끌고 다닌다. 길에서 제물을 만난 사람들은 그에게 온갖 욕설과 악담을 퍼부어 자기에게 닥칠 위험과 재앙을 모조리 떠넘긴다. 그렇게 마을을 다 돈 후에는 제물을 인정사정없이 절벽 위에서 떨어뜨렸다. 하지만 이렇게 해서는 사람들의 죄가 없어지기는커녕 더욱 무거워지지 않았을까?(p. 33).
사람 가죽 벗기기
사람 가죽 벗기기, 즉 '생피박리형'은 살아 있는 죄수의 피부를 벗기는 형벌이다. "살아 있는 사람의 가죽을 벗기면 그의 온몸은 피가 뿜어 나오는 상처로 뒤덮인 것과 같다. 햇볕에 고스란히 드러난 몸은 경련을 일으키고, 겉으로 드러난 혈관은 연신 바들바들 떨린다." 듣기만 해도 소름 끼치지 않는가? 고대 페르시아에서는 자기 직무를 태만히 한 판사는 살아 있는 상태에서 가죽을 벗기는 형벌에 처해졌다. 그리고 그 가죽으로 후임자의 의자를 만들었다. 캄비세스Cambyses 왕이 지배하던 시대, 어느 신임 판사는 법정에서 아버지의 가죽으로 만든 의자에 앉기도 했다. 아버지인 시삼네스 Sisamnes 판사가 불공정한 판결을 내려 살아 있는 상태에서 가죽이 벗겨졌기 때문이다(p. 34). 그 당시 페르시아에서는 인간의 피부를 가늘게, 둥글게, 넓적하게 등등 여러 가지 모양으로 벗겨냈다. 때로는 머리에서 몸 쪽을 향해 5~10센터 미터 폭의 가느다란 띠 모양으로 가죽을 벗기기도 했는데, 훗날 순교자 성 바르톨로메오 (예수의 열두 제자 중 한 사람 옮긴이) 도 이 방법으로 살아 있는 상태에서 가죽이 벗겨졌다고 한다(p. 35).
끔찍한 화형 이야기
유럽에 마녀 사냥의 광풍이 일었을 때 자주 사용된 처형법이 바로 화형이었다. 사실 화형에는 여러 가지 종류가 있다. 운이 나쁜 사람은 잔 다르크처럼 살아 있는 상태에서 화형에 처해졌지만, 운이 좋은 사람은 사형집행인에 의해 목이 졸려 목숨이 끊어진 다음에 화형에 처해졌다. 살아 있는 상태에서 화형을 당하는 것은 죽고 나서 화형을 당하는 것과 당연히 고통 면에서 하늘과 땅 차이다. 전자의 경우 살점이 떨어지고 뼈가 문드러져도 의식은 여전히 남아 있어서 일반적으로 목숨이 끊어지기까지 30분 이상 미칠 듯한 고통에 시달려야 했다. 그렇다면 어떤 경우에 살아 있는 상태에서 화형에 처해졌을까? 그것은 자신이 마녀라는 사실을 끝까지 인정하지 않았거나 일단 인정했다 나중에 말을 뒤집는 경우였다. 화형을 하는 도중에 사형수가 괴로움을 견디지 못하고 기절하면 얼굴(p. 53)에 물을 뿌려 정신을 차리게 하거나, 아니면 불에 물을 뿌려 불기운을 약하게 하고 그가 깨어나기를 기다렸다가 다시 불을 지피는 잔혹한 방법도 취해졌다. 그것은 소풍이라도 나온 기분으로 모여 있는 구경꾼들에 대한 서비스가 아니었을까? 화형 방법에도 여러 가지가 있었는데, 그 중 하나는 사형수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장작이나 지푸라기를 높이 쌓아서 불태우는 방법이다. 이것은 사형수가 빠른 시간에 질식사하기 때문에 비교적 온전한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장작을 쌓은 후 사형수를 기둥 높이 묶어 화형에 처하는 방법도 있었다. 이것은 아래부터 시작해서 불길이 천천히 위쪽으로 솟구치는 만큼, 사형수가 오랜 시간에 걸쳐 상상을 초월하는 고통을 맛보게 된다(p. 55).
마녀 사냥이 성행했던 진짜 이유
일단 마녀로 지목되면 빠져나갈 구멍은 전혀 없었다. 그녀에게는 가혹한 고문과 화형만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체포와 심문 그리고 고문에 드는 비용, 감옥에서의 식사비, 몸을 묶는 밧줄비, 화형에 필요한 장작비, 재판관과 관리와 사형집행인의 수당 일체를 본인이 지불해야 했다. 때문에 정부의 관리는 마녀로 지목된 여성을 체포함과 동시에 그녀의 집을 수색해서 모든 것을 압수했다. 동산과 부동산을 몰수함은 물론이고, 그녀가 남에게 돈을 빌려준 경우 상대를 찾아내 원금을 회수하는 것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처형당한 마녀를 대신해서 정부의 관리가 빛을 받으러 다닌 것이다. 사실 당시 마녀 사냥이 횡행한 원인 중 하나는 이런 재산몰수 때문이었다. 신성로마제국에서 마녀의 재산몰수를 금지했던 1630년에서 1631 년까지 마녀 적발이 급격히 감소한 것이 그 증거다(p. 80). 반베르크에서만 해도 1629년까지는 매년 100명 정도의 마녀가 처형 되었는데 1631년에는 단 한 명도 없었다고 하니, 참으로 기가 막힌 노릇이 아닐 수 없다(p. 81).
장미 가시에 찔려 죽다
20세기의 천재 시인인 릴케가 장미 가시에 찔려 죽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는 유달리 장미를 좋아했는데, 그가 만년에 살았다는 론 계곡이 내려다 보이는 오래된 성의 정원에는 지금도 수많은 종류의 장미들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다. 차가운 돌로 지어진 오래된 성에서 수도승처럼 혼자 살며 시를 지었던 릴케. 그는 어느 날 자신을 찾아온 손님을 정원까지 배웅하다 나무 뒤에 피어 있는 장미를 발견한다. 그리고 그 장미 가시에 손가락(p. 159)이 찔리는 바람에 패혈증으로 고생하다 그해 12월 29일에 51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실제 사인이 백혈병임에도 이런 전설이 전해지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아마도 릴케라는 시인의 섬세한 이미지와 함께 생전에 그가 기이할 정도로 장미를 좋아했다는 사실 때문이리라(p. 160).
허니문의 기원
'허니문'은 결혼식을 올린 다음에 떠나는 신혼여행을 이르는 다른 표현이다. 허니문은 결혼식을 마친 부부가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는 의식으로, 원래는 한 달 동안 매일 밤 '봉밀주'를 마시는 관습이었다. 여기에서 허니문이라는 이름이 생겨난 것이다. 허니문에는 재미있는 기원이 있다. 오랜 옛날 결혼이라는 것은 남자가 힘으로 여자의 부모로부터 여자를 훔쳐내는 방법이 일반적이었다. 그때 여자를 되찾으려 쫓아오는 사람들에게서 도망치기 위해 남자는 여자를 데리고 아무도 찾을 수 없는 곳에 틀어박혀 있어야 했다. 이렇게 한동안 두 사람이 숨어 지내던 관습이 오늘날 두 사람만의 허니문으로 변한 것이다(p. 182).
명작동화의 작가는 로리콘
어린 시절에 누구나 한 번쯤 읽어보았을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이 책을 쓴 루이스 캐럴Lewis Carroll은 옥스퍼드 대학교의 수학 교수였다. 사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그가 동료이자 고전학자인 리델의 딸 앨리스를 기쁘게 해주기 위해 쓴 작품이었다. 그는 기이할 정도로 어린 소녀에게 집착했다. 그에게는 사진을 찍는 취미가 있었는데 항상 어린 소녀의 사진만 찍었다. 지금도 그가 찍은 수많은 소녀들의 사진이 남아 있는 데, 그 안에서 고민에 빠진 얼굴로 소파에 누워 있는 소녀, 어른스럽게 다리를 꼬고 의자에 앉아 있는 소녀 등 기묘한 에로티시즘으로 가득 찬 소녀들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p. 239). 루이스 캐럴은 전차에서 만난 소녀에게 마음을 빼앗겨 아무도 몰래 연애편지를 보낸 적도 있었다. 어쨌든 평생 독신으로 살았던 그는 진정 '로리콘'이었다. 심한 경우 소녀유괴나 소녀감금에까지 이르게 되는 롤리타 콤플렉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는 현실이 아닌 동화 속에서 아름다운 소녀들을 정복했다(p. 241).
우발적 연애를 즐긴 사르트르
프랑스의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Jean Paul Sartre는 첫 번째 철학교수 시험에서 보기 좋게 떨어졌다. 그러자 약혼자의 부모는 재빨리 그와의 결혼을 파기해버렸다. 그 후 그는 한동안 술독에 빠져 지냈다. 그러나 사르트르는 이듬해인 1929년에 치른 두 번째 시험에서 놀랍게 도 1등으로 합격했다. 그리고 그때 2등으로 합격한 시몬 드 보부아르 Simone de Beauvoir를 만나게 되는데, 후에 그녀는 그의 평생의 반려자가 된다. 이윽고 사르트르와 보부아르는 지독한 사랑에 빠져 함께 살게 되었다. 하루는 사르트르가 이렇게 말했다. "연애에는 필연적 연애와 우발적 연애가 있다. 양쪽 모두 소중히 여겨야 한다." 그러면서 보부아르에게 '2년 계약 결혼'을 제안했다. 두 사람 모두 다른 이성과 우발적 연애를 즐겨도 좋지만 서로에게 비밀은 없어야 한다는(p. 256) 것이 조건이었다. 순진했던 보부아르는 이 제안에 동의했다. 하지만 계약 결혼 후 우발적 연애를 즐긴 사람은 사르트르뿐이었다. 대신 보부아르는 항상 질투에 몸을 떨어야 했다. 사르트르는 끊임없이 새 애인을 만들어서 보부아르를 고뇌에 빠트렸으며, 40세가 넘어서도 그의 우발적 연애는 끝나지 않았다. 여배우, 유명인의 아내, 제자 등등... 그는 여자들을 교묘하게 '관리'했다. 연애가 끝난 후에도 헤어지지 않고 '보관'하면서 그녀들에게 아낌없이 '재투자'한 것이다. 그는 사랑하는 여자들에게 힘과 재능, 지식 등 모든 것을 아낌없이 주었다. 상대가 여배우라면 희곡을 써주고, 타이피스트라면 자기 소설의 타이핑을 맡겼다. 덕분에 연인 관계가 끊어지고 시간이 흐른 뒤에도 여자들은 그를 '좋은 친구'로 여겼다. 소설가 프랑수아즈 사강 조차 사르트르와 뜨거운 사랑을 나눴다. 진실인지 거짓인지는 모르지만 사강이 무려 20페이지에 이르는 정열적인 러브레터를 사르트르에게 보내 보부아르를 질투에 불타게 만들었다는 이야기도 있다(p. 258).
치열한 음식물 전쟁
파푸아뉴기니의 카라우나 족은 무기가 아니라 음식을 이용해서 적과 싸운다. 어느 쪽이 상대에게 더 많은 음식을 보낼 수 있는지 경쟁하는 것이다. 카라우나 족 남자들은 상대로부터 모욕을 당한 경우 -가령 아내를 빼앗겼다든지-그 즉시 복수에 착수한다. 상대가 갚을 수 없을 만큼 엄청나게 많은 음식을 보내는 것이다. 이 같은 방식은 부족 간에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평소에 밭에서 필요한 것보다 많은 양의 음식을 수확해 보관한다. 물론 태풍이나 기근 등의 재해에 대비하기 위해서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다른 부족과 적대관계가 되었을 때 무기로 삼기 위해서다. 카라우나 족의 유력자가 다른 부족과 적대관계가 되었을 때, 그는 일단 부하에게 감자를 주어 동이 트기 전에 적의 진영으로 보낸다(p. 294). 그것을 받아든 적은 도전에 응한다는 표시로, 한 걸음 앞으로 나아와 사자에게 욕설을 퍼붓는다. "우리가 이것을 갚을 수 없다고 생각하느냐? 우리에게 돼지가 없는 줄 아느냐? 우리가 농사짓는 방법을 모를 줄 아느냐? 어디 두고 보자. 누가 더 맛있는 감자를 가지고 있는지 똑똑히 보여주겠다!" 이렇게 전쟁이 시작되는 것이다. 감자를 보낸 후 카라우나 족은 부족의 창고를 전부 뒤지고 밭을 파내어 찾아낸 음식을 한곳에 모은다. 다음 날 적의 사자에게 내줄 감자와 고구마, 바나나, 돼지 등의 음식을 늘어놓는 것이다. 그러면 다음 날 아침, 적의 사자가 모아둔 음식을 모두 가져간다. 이제는 적들이 음식을 모을 차례다. 하루가 지나 아침이 되면 이번에는 카라우나 족의 사자가 적의 마을에 가서 적이 모아놓은 음식을 가져 온다. 결정적인 순간이다. 만일 적에게서 가져온 음식이 자신들이 보낸 음식 보다 많은 경우, 다시 그보다 많은 음식을 끌어 모아야 한다. 이렇게 전쟁은 계속되는 것이다. 당신은 '이기든 지든 산더미만 한 음식이 남게 되니까 양쪽 모두 큰 손해는 아니다...' 하고 생각할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얄팍한 우리 문명인들의 생각일 뿐이다. 그들이 느끼는 패배에 대한 수치나 승리에 대한 기쁨은 물질로 채울 수 없을 만큼 중요한 것일 테니까(p. 295).
에펠탑보다 인기 있었던 관광코스는?
19세기 에펠탑 관광보다 더 인기가 있었던 것이 바로 단두대 처형 관광이었다. 영국 여행사 토머스 쿡에서는 단두대 처형을 구경할 수 있는 상품을 만들어 대형마차 7대를 준비하는 등 관광객 모집에 열을 올렸다. 당시 단두대 처형은 대개 아침 일찍 이루어졌다. 관광객들은 대부분 전날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느라 상당히 지친 상태였지만, 마차 7대에 마련된 40석의 자리는 언제나 모두 팔려나갔다. 또한 처형장이 보이는 창문과 테라스, 나무 위에는 꼭두새벽부터 나온 구경꾼이 일찌감치 자리를 차지했다. 특히 처형장이 잘 보이는 방은 늘 엄청난 가격으로 몇 달 전에 예약이 끝나 있었다. 처형 당일 단두대 주위에는 피에로나 장사꾼 그리고 구경꾼들로 가득했다. 그들은 술을 마시고 음식을 먹으며 소풍이라도 나온 듯한 기분으로 웃고 떠들고 노래하고 천박한 농담을 주고받았다(p. 314). 처형될 순서를 기다리는 내내 그런 소리를 들어야 했던 죄인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아마 이 세상에 인간보다 더 잔인한 동물은 없으리라(p. 315).
하늘나라로 메시지를 전해드립니다
1982년 4월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에 캘리포니아에 있는 한 회사의 광고가 실렸다. 저세상에 있는 고인에게 메시지를 보내준다는 내용이었다. 메시지 전달자는 불치의 병을 앓고 있는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사람이었다. 고인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싶은 사람이 그 환자에게 전할 내용을 알려주면 그가 메시지를 머릿속에 넣고 저세상으로 가져간다. 요금은 보통편은 100단어에 60달러, 특급편은 50단어에 100달러였고, 과격한 내용이나 지옥으로 가는 메시지는 받지 않았다. 메시지 중에는 가족이나 친지에게 보내는 것뿐만 아니라 존 F. 케네디나 마릴린 먼로, 존 레논에게 보내는 것도 있었다(p. 33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