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떻게 죽음을 마주할 것인가?-모니카 렌츠 저자(글) · 전진만 번역, 책세상 · 2017년
모두가 죽어야 하는데 경함할 수 없기 때문에 그 실체를 제대로 알 수 없다. 이처럼 죽음은 미지의 세계이다. 단지 현상을 보고 추론해볼 뿐이다. 이 책은 여러 가지로 어려웠다.
우리는 죽음의 문턱을 넘는 전이의 사건을 만족할 만한 수준으로 설명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죽어가는 사람의 말은 언제나 상징적이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죽음의 비밀에 가까이 접근했음에도 불구하고 만족할 만큼 죽음에 대해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죽음에 대한 접근이 이처럼 제자리를 맴도는 이유 중 하나는, 개인의 개별적 경험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죽음은 개별적인 동시에, 최후의 비밀에 가까이 다가서는 고유의 접근 방법만큼이나 다양한 형태를 띠기에 그렇다(p. 38).
원초적 불안과 대상에 대한 경험은 근원적이고 존재를 뒤흔드는 차원에서 일어난다. 이 불안과 경험은 대부분 의식이 있는 현존재가 한계에 다다를 때 순수하게 일어나는 몸의 반응으로 나타난다. 경련, 불안, 가려움, 메스꺼움, 오한, 알레르기 반응, 경직으로 말이다.
우리의 불안은 어디에서 오는가
불안이란 무엇인가? 어떤 사람이 불안을 느끼는가? 인간이 두려워하는 것은 정확히 무엇인가? 나는 경험에서 많은 것을 배운다. 인간은 깊은 내면에서 누미노제의 불안을 느낀다. 드레버만은 신에 대한 원초적 불안을 언급하며, 이 불안에서 인간의 중요한 위기를 관찰한다. 이 위기는 다른 여러 위기들의 근간이 된다고 한다. 하지만 이 불안과 함께 무엇을 이야기해야 하는지 이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p. 91)다. 내가 거리에 나가 아무나 붙잡고 무엇을 두려워하느냐고 묻는다면 사람들은 테러와 전쟁, 집단 괴롭힘이나 따돌림, 전염병과 고통, 마약 중독, 깡패와 폭력에 두려움을 느낀다고, 기차를 놓칠까 봐 불안하다고 대답할 것이다. 혹은 '신 에 대한 두려움'은 모호하다는 다소 엉뚱한 대답도 들을 수 있다. 내가 여기서 예를 든 것처럼 사람들은 사건 그 자체보다는 불안한 사건의 배경 때문에 두려워하고 불안해한다. 그러니까 불안한 일들 뒤에 있는, 그 안에 내재된 원초적 불안 때문에 사람들은 두려움을 느끼고 육체적인 일차적 실존성에 위협을 느낀다. 나를 두렵게 하는 대상이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내고, 그 대상이 무엇인지를 알고 난 다음에야 비로소 원초적 불안을 극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무시무시한 것, 압도적인 것, 탈출구가 없는 것, 그 자체가 이미 우리를 꼼짝 못하게 하는 불안의 대상이다(p. 92).
임종 준비란 죽어가는 사람의 내적 요구를 들어주고 그 이후에 그가 편안히 숨을 거둘 수 있도록 돕는 일이다. 그런데 우리가 죽음의 문턱을 넘는 과정과 인지 감각의 변화에 대해 이해했다고 하더라도 죽어가는 사람을 자극해서는 안 된다. 자극받았던 이전 상태로 복귀시켜서도 안 되고, 그들에게 아름다운 삶을 제공했던 자기중심적인 세계에 계속 머(p. 211)무르라고 말해서도, 강요해서도 안 된다. 왜냐하면 그들은 현세를 떠나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또한 아무리 좋은 의도라고 해도 우리는 그들 내면에서 충돌하는 모순에 개입해서는 안 되며, 과도한 의료 조치로 억지로 목숨을 부지하도록 해서도 안 된다. 그건 무의미한 생명 연장이다. 이와는 반대로 우리는 그들에게 자아 안에 내재된, 곧 있을 결말을 미리 보여주어야 한다. 이런 솔직한 대면을 통해 우리는 고통완화 단계에 대해 다음과 같은 사실을 조심스레 꺼내놓을 수 있을 것 같다. 임종 환자들 가운데 가끔 우리의 보호를 받으면서 한 번 더 '기운을 차리는'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에게 요양원이나 그와 비슷한 시설로 보내라는 의료보험공단의 압박이 있음을 조심히 일러주어야 한다. 이를 전해들은 환자의 의료기에 갑자기 심상치 않은 반응이 나타난다. 잠시 실망과 우울 상태에 접어들었다가 죽고 싶다는 원초적인 욕구와 직면한다. 그러고는 마지막 숨을 거둔다. '그 안에 있던 원초적인 욕구'가 떠나간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원초적인 욕구가 떠나기 전에 숨을 거두는 것 같다. 요약하자면 임종 준비는 죽음에 이르는 과정으로 인도하는 도움의 손길이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경제적인 한계가 종(p. 212)종 죽음의 길로 인도한다(p. 213).
우리가 보는 것보다 더 많은 일들이 생긴다는 것은 인지 전환이 우리에게 보여준 중요한 결과들 중 하나이다. 고통 완화 의사, 간호사, 간병인, 상담사 등의 의료 종사자들과 가족은 임종 환자들이 어느 순간에 그리고 언제든지 내적으로 다른 공간에 가 있다는 것을 귀담아듣는 게 좋을 것 같다. 죽어가는 사람들은 현세도 내세도 아닌 중립적이고 심지어 아름답기까지 한 곳에, 자아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지만 고통과 실신에서 벗어난 다른 공간에 가 있을 수도 있기 때문이 다. 죽음은 고통으로 삶을 채울 수도 있고 삶에 깊은 인상을 남길 수도 있으며 삶 전체의 의미를 다시 규정할 수도 있다. 자신의 죽음을 앞두거나 타인의 임종을 지켜보면서 인 간은 가장 비밀스러운 영역에 발을 들여놓기도 하고, 마음이 움직이기도 하고, 소스라치게 놀라기도 한다. 죽어가는 사람들은 우리에게 인생에 관해, 죽음을 앞둔 현 상태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 많은 것을 가르쳐준다. 비록 보이지 않지만 죽음은 한마디로 강렬하고 극단적인 경험이다. 흔히들 자아의 관점에서 죽음을 생각하고 설명하려 한다. 하지만 이 방식은 오산이다. 여기서 내가 자아 기능과 감각으로 죽음을 바라보는 관점에서 죽음을 설명했다면 나 역(p. 218)시 죽음을 왜곡했을 것이다. 가령 임종 환자를 병문안하러 온 한 방문객이 그의 고통이 안타까워 그 고통을 대신 젊어 진다고 상상해보자. 그러면 방문객은 극심한 고통에 소리 지르고 몸부림치면서, 숨쉬기도 힘겨워하면서 그를 대신해 '고생할 것' 같은가? 전혀 그렇지 않다. 죽어가는 사람들은 실제로 고통에 시달리지만 의식이 없는 상태로 접어드는 시점에서는 고통을 감지하는 감각은 상실된다. 종종 나는 이를 수면, 혼수상태 또는 마취와 비교해본다. 임종 환자들의 고통은 지속적이거나 우발적이지 않고 오히려 삶과의 이별 과정이나 변화를 향한 과정과 연결되어 있다. 의식을 갖고서 자기 몰락을 받아들이는 것인지 또는 무의식적으로 그러는지, 결과적으로 피곤한 상태에서 죽음을 수용하는지는 부차적이다. 중요한 것은 죽어가는 사람들이 고통, 불안과는 무관하게 죽음의 상태 안으로 들어간다는 점이다. 그래서 그들 대부분이 "괜찮아" "....좋아”라고 말한다(p. 219).
죽어가는 사람들의 반응을 통해 우리는 그들이 - 시공간을 넘어 - 좇고 있는 것은 궁극적, 신적인 완성임을 예감 할 수 있고 추측할 수 있다. 그들의 마지막 비전과 반응을 살펴보면 나는 '최후의 것' 그리고 그로 인한 변화에 대한 일정한 앎을 인식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다.
• 시간, 시간성과 현재, 현재성의 차원이 바뀔 것이다: 많은 것들이 동시성과 무시간성(영원)이라는 현존재 양식을 예고할 것이다.
• 공간, 공간성의 차원이 변할 것이다: 많은 것들이 공간적인 무경계를 암시할 것이다.
• 신체, 구체화, 경계 그리고 자기 정체성에 대한 느낌이 바뀔 것이다: 많은 것들이 경계 없는 존재와 관계된 존재를 가리킬 것이다. 이러한 존재를 나는 존재자, 즉 실체와 에너지로서 이해되는 존재자라고 생각한다.
• 중력에 대한 느낌이 변할 것이다: 신체적인 무게감은 와해되는 것처럼 보인다(p. 241).
• 강렬함, 감성도 변할 것이다: 많은 것이 강도를 높인다는 걸 보여주지만, 결국에는 감각을 넘어설 것이다. 그렇다고 감각적인 것이 배제되거나 무시되지는 않는다.
• 좋거나 나쁘다는 식의 평가도, 방식도 사라질 것이다: 많은 것들이 새로운 공존을 모색하게 될 것이다. 여러 부분으로 쪼개지고 분열되었던 것들이 전체로 통합되는 것을 지시한다.
• 의식: 무의식과 더불어 자아와 연결된 의식에서부터 새로운 양식에 이르기까지 의식의 새로운 양식을 '보게 될 것이다.'
• 기운, 분위기가 바뀔 것이다: 떠밀림에서 완성으로, 찾기와 기다림에서 발견으로, 대결에서 평온과 목표로, 불안에서 신뢰로 말이다.
• 공동체: 죽어가는 사람들의 많은 표상들과 유대교, 기독교, 타 종교들에 산재한 텍스트는 분열이 집회, 공동(p. 242)체, 축제라는 새로운 질적인 특성으로 전환될 거라는 점을 암시한다.
죽어가는 사람들의 증언과 이들의 마지막 변화가 내세에 대한 암시인지, 아니면 단지 임사체험을 표현한 것인지에 대한 대답은 여전히 열려 있다. 단지 해석만 있을 뿐이다(p. 24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