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8(목)
 
  • 김성은 목사(안양 샘병원 원목, 총신 목회상담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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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은 목사 

Well dying(good life, good death) 6 -- 다양한 죽음의 얼굴과 나의 소망

출생과 죽음은 한 사람의 삶을 구성하는 가장 고귀한 가치를 지닌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출생은 말 그대로 삶의 시작이며, 죽음은 한 사람의 이 땅에서의 삶의 마무리이다. 그러므로 우리 사람들의 출생이 축하와 축복 속에 이루어지는 것처럼, 마지막 인생의 무대를 내려가는 죽음의 자리 또한 축복이 깃든 고귀한 자리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 실제적인 죽음의 모습은 어떤 양상을 띠는가? 

 

1) 현실성과 실제성이 배제된 장례식

모든 사람의 죽음이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10여년 전까지만 해도 우리 한국 사회 안에서 죽음학이나 죽음과 관련된 연구는 매우 미진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최근 10년 어간에 시중에는 죽음과 관련된 책도 많이 출판되었고, 죽음의 담론도 점점 많아지고 있는 추세이다. 그래서 좋은 죽음과 좋은 삶에 대한 담론이 점점 확산되고 있는 일은 매우 고무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신학교와 교회 안에서는 죽음에 대한 깊은 연구와 준비가 매우 미진하다고 할 수 있다. 실제적 죽음의 문제는 당장 목회의 수적 증가를 기대하는 사람들에게는 대중적 인기를 끌 수 없는 관심밖의 문제로 소외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나라 기독교(개신교)내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죽음에 대한 인식과 연구 혹은 신학교나 교회 내에서의 교육은 사회의 다른 영역이나 다른 종교보다 앞서는 체계를 갖추고 있다고 하기에는 부족한 점이 많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대표적으로 병원 장례식장에서 다양한 장례식(기독교, 타종교, 전통적 장례 등)을 경험하게 되는데, 솔직하게 우리 기독교의 장례식이 고인과 가족들에게 가장 큰 위로와 힘이 된다고 하기에는 많은 부분에서 생각할 점이 있음을 인정하게 된다. 

그렇기 실천신학적인 측면에서 우리 한국교회 안에서 죽음에 대한 교육은 매우 미흡한 상황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곧 대부분의 목회자나 성도들의 죽음에 대한 인식은 조직신학 종말론과 인간관을 기초로 한 신학적 담론에 머물러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죽음에 대한 실제적인 이야기는 신학교에서조차 찾아 볼 수 없으며, 교회 제자훈련이나 교육 프로그램 커리큘럼에도 죽음에 관한 것은 거의 다루지 않는 실정이다. 다만 수련회 프로그램에서 관을 이용하거나 유서 쓰기 등을 통해서 소명에 대한 사명감을 강화하는 1회성 이벤트의 도구에 머물러 있는 수준이다. 

교회 안에서는 여전히 죽음에 대해서 터부 하고 금기시 하는 가운데 죽음을 설교하고 성도들로 하여금 철저하게 죽음을 바라보며 살아가도록 하는 목회를 유보하고 있는 실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병원에서 자주 목격하는 것은 많은 목회자들이 당장 환자나 그 가족들과의 어려운 관계를 피하기 위해서 죽음을 미화하고 근거가 매우 인위적인 치유의 희망을 통해 위로하기에만 급급해 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아울러 장례식장에서도 현실성 없는 피상적 천국을 외치는 설교를 들을 때면 너무 마음이 공허해 지는 것을 종종 경험하게 된다. 솔직히 죽음을 경험해 보지도 않았고, 시신을 한 번 제대로 보지도 못한 젊은 목사(부목사)들의 형식적인 30분 미만의 입관, 발인예배 설교와 인도는 죽음의 무게를 넘어서기에는 매우 역부족이라는 생각을 종종하게 되는 것이다. 

 

2) 다양한 죽음의 얼굴

실상 ‘죽음’이라는 단어는 모든 사람들에게 참으로 두려운 단어임에 틀림이 없다. 객관적인 실체로서의 죽음도 그렇지만, 막상 나 자신의 문제로 죽음을 마주할 때는 두려움이 더 크게 다가온다. 정도의 차이야 있지만 기독교 신앙을 가진 사람들도 마찬 가지이다. 죽음의 존재를 일대일로 직면해야 할 때는 구원의 확신이 있는 믿음의 사람도 흔들리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죽음을 자신의 문제로, 곧 현실적으로 받아들이고 준비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지금까지 간접적으로 경험한 죽음의 얼굴은 매우 다양하다고 할 수 있다. 죽음이 주는 의미와 가치, 인생의 성과와 가장 크게 느끼는 슬픔의 무게도 가지각색이다. 지금까지 만난 모든 사람들이 죽음 앞에서는 매우 당황하고 긴장하고 불안해 하고, 슬퍼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90세가 넘은 노년의 자연사 앞에서도, 60세 이전의 질병이나 사고로 인한 죽음 앞에서도, 20세 이하의 죽음이나 자살로 인한 죽음은 말할 것도 없고, 모든 죽음은 본인과 가족과 주변 사람들을 매우 당황하고 불안하게 했던 것이다. 지금까지 경험한 죽음 죽에 어렵지 않은 죽음은 없었다. 그러나 어떤 죽음 앞에서는 그 모든 당황과 불안을 어느 순간에 넘어서는 평강과 은혜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나는 병원에서 사역하는 목사로서 많은 죽음을 본다. 앞에서 말했듯이 목사라는 신분으로 인해서 한 사람의 임종 과정에서 가장 깊고 깊은 마지막까지 동행하게 되는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참 감사하고 영광이라고 할 수 있다. 한 사람의 그 내밀한 마지막을 동행할 수 있는 특권은 아무나 누리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병원에서 사역하면서 죽음의 다양한 면면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볼 수 있었다. 삶의 모습이 다양하듯이 죽음의 모습도 각 사람마다 다르다. 어떤 죽음은 주변 사람을 안타깝게 만든다. 끝내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우나 절망과 분노와 투정으로 삶을 마감하는 경우에 그렇다. 반면, 어떤 죽음은 주변 사람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고 영생과 천국의 소망을 확인시켜 주기도 한다. 호스피스 병동에 입원한 환자가 말기암의 처절한 고통 중에서도 평안과 감사로 웃으면서 가족들에게 ‘그 동안 사랑했어. 정말 사랑해, 그 동안 미안했어. 나를 사랑해 줘서 고마워, 내 딸이고 아들이라 너무 고마워’라는 말을 남기면서 인생의 여정을 마감하는 모습은 참으로 감동스럽다.

 

3) 내가 생각하는 나의 죽음의 모습

사실 처음에는 수많은 타인의 죽음을 직접 목도하면서 가장 먼저 깨달은 것은, 나 자신이 나의 죽음에 대해서는 불확실한 실체로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40대 중반의 나이에 병원 사역을 시작했기 때문에 젊다는 이유로 인해서 죽음에 대한 성찰을 회피함으로 나의 죽음을 부정하고 싶은 마음이었던 것이다. 날마다 보다 나은 삶을 살기 위해서 갑작스럽게 다가올 위기에 대해서 많은 준비를 한다. 그러나 정작 가장 중요한 죽음의 문제는 그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 불안하고 두렵기 때문에 회피하고 거부하고 있었다. 그러나 회피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그러므로 나는 타인의 죽음의 과정에 동참하기 전에 나 자신의 마지막을 정직하게 생각해 보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목사라는 타이틀과 자존심을 접어놓고, 믿음의 사람답게 죽음을 대면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신앙을 근거로 하는 믿음은 죽음의 가능성을 제거하는 힘이 아니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고, 담대하게 나의 죽음을 대면하게 하는 힘이라는 생각에 이르게 된 것이다. 물론 부활의 기적을 일으키신 예수님을 믿는 믿음은 때로 육신으로부터 죽음의 문제를 제거하는 능력이 됨을 확실히 믿는다. 말씀과 기도로 죽을병을 치유 받는 일은 지금도 일어나고 있음을 인정한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렇게 치유를 받은 사람도 결국 언젠가는 죽음을 대면해야 한다는 인간의 유한성에 대한 정직한 직면이다. 아무리 믿음이 좋아도 어느 순간에는 죽음의 문 앞에 서야 한다. 그러므로 나의 죽음이 어떤 모습으로 다가올지 모르겠지만, 가장 좋은 준비는 에녹처럼 늘 주님과 동행하는 것이라 믿는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창 5:24). 

주님과 늘 동행하는 삶을 산다면, 만약에 인생을 살다가 어떤 질병으로 인해서 투병의 과정을 거치게 된다고 할지라도 그 믿음이 그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힘이 되기를 소망한다. 하루하루를 나음에 대한 기대와 현실에 대한 절망과 분노로 채우는 것이 아니라, 질병 가운데서도 영원을 바라보는 소망과 감사로 채우고 싶다. 인생의 마지막 길에 나의 믿음의 확실성이 빛을 발하고, 이 땅에 임한 하나님 나라와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이 능력으로 드러나기를 바란다. 

아울러 주님과 능 동행하는 삶을 산다면 갑작스러운 죽음도 결코 재앙이 될 수 없을 것이다. 물론 사랑 하는 가족들에게는 이별을 준비할 시간이 주어지지 않기 때문에 큰 놀람과 슬픔과 아쉬움이 될 수 있다는 문제가 있을 것이다. 이 지점이 한 인간으로서 큰 숙제이며 아쉬움이 남는 부분이다. 그러나 평상시에 부활과 영생과 죽음과 삶의 문제를 신앙 안에서 잘 조화를 이루며 살아간다면 가족들도 슬픔 속에서 슬픔과 애도의 시간을 좀 더 빨리 정리하고, 회복과 소망의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나의 마지막의 모습은 우리가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직하게 주님과 동행함으로 이 땅에 이미 임한 하나님 나라를 풍성하게 누리는 것으로 자신의 죽음을 준비하며, 가족들과 죽음과 영생과 부활에 대한 솔직한 대화를 나누는 것이 좋을 것이다. 죽음은 이 세상에서 삶을 살아가는 모든 생명이 결코 피할 수 없는 현실적 문제이기 때문에 그 담론을 가정 안에서부터 실제적으로 충분히 나누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특히 부활과 영생을 믿는 믿음의 가정에서는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의 의미를 통해 자주 죽음의 문제를 다루는 지혜로운 삶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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