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7(토)
 
  • 김성은 목사(안양 샘병원 원목, 총신 목회상담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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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ll Dying(good life, good death) 10 - 죽음의 의미

일반적으로 죽음은 객관적으로 모든 신체적·정신적 기능이 회복될 수 없는 정지를 의미하며, 이것은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사실일 때 인정된다. 그러나 죽음에는 이러한 객관적인 의미뿐만 아니라 각 개인마다 다르게 느끼는 주관적인 의미들이 존재한다. 그러므로 죽음이 갖는 의미에 대해서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그 중요한 죽음의 의미에 대해서 우리는 김명숙의 다음과 같은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삶은 죽음으로 종결되기 때문에 더욱 고귀하며, 생명은 죽음에 의해 사라지기 때문에 더욱 존엄하다. 누구든지 자신의 죽음을 직접 경험할 수는 없지만 아주 가까운 사람의 죽음 등을 통해 죽음과 상실을 경험하게 된다. 죽음에 대한 자각이 깊으면 깊을수록 현실의 삶의 뜻을 반성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 삶의 목적을 주체적으로 다시 묻게 된다. 따라서 죽음을 염두에 둔 생명의 각성은 오히려 사람들을 세속의 속박에서 벗어나 보다 진실한 마음으로 삶에 다가설 수 있게 만든다. 곧 죽음에 대해 가지는 개인의 인식은 세상을 살아가는 가치관의 문제로 정신적 생활의 질과 삶의 태도를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이기도 하다.?

죽음의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의미는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사실과는 다르게 다양한 배경과 맥락을 가진 개인들에 의해 구성되는 것이다. 이런 개인마다 의미를 달리하여 구성된 죽음에 대해서 이이정은 “한 사람의 생각과 감정과 행동에 영향을 미치고, 살아가는 방식과 죽음을 준비하고 맞이하는 방식에도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런 개인적이면서도 다차원적인 죽음의 의미에 대해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의미로서의 죽음

모든 생명체는 반드시 죽는 존재이다. 이것은 피할 수 없는 진실이다. 그러므로 죽음은 우리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명체의 삶을 일시적인 것으로 만들고 영원한 삶의 가능성을 허락하지 않기 때문에 삶에 대한 의미조차도 유한으로 제한한다는 특징이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죽음이 인간의 모든 삶의 의미를 제거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에 대해서 스티븐 케이브는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의 “죽음이 없었더라면 역사도 문화도 그리고 인류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라는 말을 인용하면서, 그러므로 죽음에 맞서는 이야기들의 관점은 인간의 문명을 이해하기에 충분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반드시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의미요법의 창시자 프랭클은 자신이 독일 나치의 수용소에서 겪은 실제 경험을 통해 “의미가 분명한 사람은 히틀러의 수용소 안에서도 살아가는 삶의 모습이 다르고, 죽음에 응대하는 모습도 분명히 달랐다고 이야기 한다. 곧 수용소에 갇힌 사람들이 비록 평범한 사람들이었지만 그 중에서도 의미를 발견한 사람들은 시련을 가치 있는 것으로 만들어갔다”고 말한다. 이처럼 사람은 인격체이기 때문에 죽음 앞에 섰을 때에라도 인생을 의미를 갖고 목적 속에서 살아왔다면 그 죽음조차도 뛰어 넘을 수 있는 진정한 의미의 세계로 나아가게 될 것이다. 곧 인생이 유한하다는 것을 분명하게 인식하게 되면 살아 있는 동안에 죽음 그 너머를 생각하며 더욱 인생을 아름답게 살 것이라는 것이다. 

 

2. 소멸로서의 죽음

많은 사람들이 죽음은 모든 것의 끝, 곧 사람은 한 번 죽으면 모든 것이 소멸된다고 생각한다. 곧 캐이건이 주장하는 것처럼 “사람들은 죽음을 모든 의식 혹은 자기다움의 완전한 정지라고 믿으며, 죽음은 무(無)에로의 소멸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죽음에 대한 이런 생각을 하는 것에 대해서 이이정은 “자신의 눈으로 확인할 수 있고 이성적 논리로 합리성을 확보할 수 있는 실증적 가치만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가진 가치관이다. 곧 이러한 가치관은 인간에 대해서 오관을 통한 체험에 기초를 둔 육체적 물질적 존재로만 전제하고, 죽음을 생물학적 사실로만 인정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죽음을 육체적 물리적 기능의 정지로만 보기 때문에 인간이 죽은 후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 자아의 소멸, 곧 무의 상태가 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소멸로서의 죽음관을 가진 사람들은 죽음의 과정에서 사랑하는 사람, 육체, 재산과 명예, 그리고 지식까지 인생을 살면서 땀 흘려 추구했던 모든 것을 잃고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것으로 인식한다. 캐이건은 그의 책 에서 소멸로서의 죽음의 특징에 대해서 정의하고 있는데, 그 내용을 요약하여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실제적으로 죽음은 사랑하는 사람과 완전히 이별하는 것이다. 죽음은 이승과의 단절이며 이승에서 맺었던 모든 관계와의 단절을 의미한다. 

둘째, 죽음은 한 사람이 일생을 통해 쌓은 모든 경험을 상실하게 한다. 한 사람이 학문적 연구나 배움이 아닌 삶을 통해 실제적으로 체득한 모든 지혜가 죽음으로써 완전히 단절되는 것이다. 여기에는 쌓아놓은 명예나 지식까지 포함되는 것이다. 

셋째, 죽음으로써 그 동안 쌓은 모든 물질적 재산을 상실하게 된다. 한 사람이 이 땅에 살면서 물질적인 부를 위해서 그토록 열심히 살았던 모든 것이 하루아침에 무로 돌아가는 것이다. 

넷째, 모든 꿈과의 단절이다. 사람은 꿈을 먹고 사는 존재이다. 꿈을 상실한 삶은 인생의 의미를 찾을 수 없다. 그런데 죽음은 한 사람이 가졌던 모든 꿈을 다 상실하게 한다.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는 것은 곧 미래가 사라진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꿈을 꾸거나 그것을 실현할 기회조차도 상실한 것이다. 

다섯 째, 모든 시간을 상실하여 원래 인간이 가진 유한한 존재의 본질로 돌아가는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출생과 함께 유한한 시간을 부여 받아서 일생을 살아간다. 그런데 죽음이 찾아오는 순간 그 동안 누렸던 모든 시간은 끝이 나는 것이다. 

이처럼 죽음을 사람의 오관에만 의지하여 이 땅에서 보이는 것만으로 문제를 삼을 때에 모든 것의 끝이며, 그러므로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3. 변화로서의 죽음

죽음에 대한 이러한 관점은 소멸로서의 죽음관과 완전히 배치되는 것으로서 죽은 후에도 내가 계속 존재할 것이란 믿음을 전제한다. 그러므로 장결철이 말하는 것처럼 “변화로서의 죽음이란 이 세상과는 다른 형태의 존재로의 변화의 과정”이라고 보는 것이다. 곧 변화로서의 죽음관은 인간은 필연적으로 영혼이 있다고 믿는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죽음을 변화의 과정으로 보는 것은 개인이나 사회를 발전시킬 수 있는 역설이 담겨 있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로서의 죽음에 대한 인식의 배경에는 사람의 존재를 육체와 영혼의 결합체로 전제하는 것이다. 곧 육체가 죽음과 더불어 소멸하더라도 영혼은 다른 존재로 불멸한다는 것을 주장하는 견해이다. 2015년 11월 27일자 조선일보 기사에 따르면 지구상의 70억 인구 중에서 ‘영혼’의 존재를 믿는 사람이 약 93퍼센트다. 곧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간의 고귀한 정신 작용은 물리학 법칙으로 환원될 수 없으며 생물학적인 원리로는 설명되기 어렵다고 믿는다. 이것에 대해서 캐이브는 “미국인들 71%가 영혼이 있다고 믿으며, 영국과 독일의 사람들은 60% 정도의 사람들이 영혼의 존재를 믿는다고 나타난다. 그리고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경우는 거의 100%의 사람들이 영혼의 존재를 믿고 있다”고 말한다. 이처럼 영혼의 존재를 믿는 사람들은 죽음에 대해서 변화로의 죽음이라는 견해를 가지며, 곧 변화로서의 죽음관은 종교에서 말하는 천국이나 지옥, 환생 등 죽은 후에도 내세가 존재한다고 믿는 것이라고 말한다. 곧 변화로서의 죽음을 믿는 사람들은 죽음을 다음 단계의 삶을 위해 통과해야 할 관문으로 보기 때문에 죽음은 다음 단계의 삶으로 들어가는 변화의 과정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실제로 병원 사역을 통해 경험하는 것은 죽음을 목전에 둔 말기 환자가 어느 날 의식이 또렷해지면서 가족들을 모두 불러 모으는 경우가 있다. 그리고 가족들을 바라보며 이제 자신은 며칠 후면 주님께서 기다리시고 준비해 두신 천국 본향으로 돌아갈 것이니 나의 죽음 후에도 슬퍼하지 말고 가족 간에 더욱 사랑하며 주님을 잘 믿으면 살 것을 유언으로 남기는 것이다. 이런 모습은 우리가 직접 경험 할 수 없고 이성적으로 다 설명할 수 없는 한계를 갖고 있다. 하지만 분명하게 구주 되신 주님을 만나고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종종 이런 모습을 보이는데, 결국 우리 사람에게는 육체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영혼이 함께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삶은 죽음으로 끝이 나는 것이 아니라, 육체의 죽음을 통해 새로운 생명의 세계 곧 영원한 세계로 들어가는 변화의 과정임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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