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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원 목사 선교3】 IMF 풍랑 속에서 선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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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F 풍랑 속에서 선교
1997년에 한국에 IMF의 풍랑의 파도가 덮쳤다. 갑자기 다가오는 풍랑의 파도에 국민 모두가 힘들었다. 이 파도가 교회에도 선교에도 영향을 미쳤다. 특별히 선교사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선교사를 파송하고 후원하는 교회들이 선교사 파송을 포기하거나 미루고 선교사들에게 후원하는 후원금이 줄어들거나 후원을 중단했다.
그러나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 국민들은 허리띠를 졸라매고 힘을 합쳐서 어려움을 극복하기 시작했다. 세계에서 볼 수 없었던 금 모으기 운동으로 어린아이들의 돌잔치에 마련했던 금반지를 비롯한 귀한 것들을 내어 놓으면서 국민들이 힘을 모으면서 경제적인 어려움을 극복해 가는 우리 국민들의 모습은 감동적이었다. 교회들도 일부 교회는 선교사 파송을 미루거나 후원을 중단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많은 교회들은 어려움 속에서도 선교사를 파송하고 후원을 중단하지 않고 우선으로 하는 교회들이 많이 있었다.
나를 파송한 천산중앙교회도 1997년에 몽골에 선교사를 파송하기 위해서 그 해 9월에 답사를 요청하였다. 9월에 몽골에 처음으로 방문하여 몽골의 여러 곳을 방문하고 교회에 보고하여 우리 가정을 몽골의 선교사로 파송하기로 교회가 결정하였다. 우리 가정을 몽골에 선교사로 파송하기로 결정한 그 다음 주에 IMF가 발생하였다. 그 이후 교회에서는 파송을 연기하자는 의견과 파송해야 한다는 의견이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은 우리 가정을 그 다음해인 1998년 2월에 몽골선교사로 파송하였다.
몽골에 선교사로 나아가는 목표는 한국에서 만났던 몽골 성도들이 믿음 안에서 계속해서 신앙생활을 하며 이들로 말미암아 교회가 세워지는 것이었다. 당시에 한국에서 많은 몽골인들이 교회에 출석을 했지만 이들이 본국에 돌아가서 신앙생활을 하지 않으면 한국에서의 교회의 섬김은 물거품이 되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생각은 그 당시에 한국에 출석했던 필리핀 성도들이 필리핀에 돌아간 이후에 이들을 방문해보니 여러 가지 이유로 교회를 출석하지 않고 있는 모습을 발견한 이후에 결심하게 되었다.
" 바람이 거스르므로 제자들이 힘겹게 노 젓는 것을 보시고 밤 사경쯤에 바다 위로 걸어서 그들에게 오사 지나가려고 하시매” 막 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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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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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회교육부 주관, 「e-주일학교」 운영 공청회 개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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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회 교육부(부장 이경조 목사)가 주관한 총회 「e-주일학교」 운영 공청회가 3월 4일 오후 2시 총회회관 5층에서 열려 주일학교 예배가 어려운 교회를 위한 대안을 모색했다. 주일학교 대상 아동은 있으나 인력 부족으로 주일학교 운영이 어려운 교회를 지원하기 위해 교회 중심 e-주일학교의 운영 방향을 공유하고 현장의 의견을 수렴하고자 위함이다.
이경조 교육부장의 환영사 전문은 다음과 같다.
존경하는 총회장님과 총회 임원 여러분, 노회장님들과 교육 관계자 여러분, 그리고 이 자리에 함께해 주신 모든 분들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총회 교육부장으로서 e-주일학교 추진을 위한 뜻깊은 공청회를 섬기게 된 것을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오늘 우리는 단순히 새로운 시스템을 논의하기 위해 모인 것이 아닙니다. 다음세대를 어떻게 말씀 위에 바로 세울 것인가, 그리고 교회의 현실 속에서 어떻게 지속 가능한 구조를 마련할 것인가를 함께 고민하기 위해 모였습니다. 이제 변화는 선택이 아니라 책임입니다. 한국교회는 인력과 재정의 한계, 그리고 급변하는 시대적 환경 속에서 새로운 해법을 요구받고 있습니다. 특히 주일학교 사역의 약화는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e-주일학교는 교회 중심의 예배를 지키면서도 현장을 돕는 실질적인 지원 체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교육부는 이 사역이 이론에 머무르지 않고, 각 교회에서 실제로 적용 가능한 구조로 세워지기를 바랍니다. 플랫폼 구축, 보안 문제, 노회 협력, 현장 지원까지 구체적인 실행 방안이 마련될 때 비로소 다음세대 사역은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공청회를 통해 다양한 의견이 충분히 나누어지고, 총회-노회-개교회가 함께 책임을 나누는 건강한 협력 모델이 정립되기를 기대합니다. 교육부는 이 길을 끝까지 책임 있게 감당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오늘의 논의 위에 지혜를 더하시고, e-주일학교가 우리 교단 다음세대를 세우는 든든한 기초가 되게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감사합니다.
1부 예배는 교육부장 이경조 목사의 인도로 회계 임계빈 목사가 기도, 인도자가 시 78: 70~72을 봉독, 총회장 장봉생 목사가 ‘다윗처럼’이란 제목으로 “다윗처럼 손의 능숙함으로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기 바란다.”라고 설교했다.
축사
총회자립개발원 이사장 박윤성 목사가 “기성세대는 다음세대를 멀리 날아가는 활로 키우는 일을 해야 한다. 우리 기관도 다음세대를 위해 지원하고 있다.”라고, 전국주일학교연합회장 김충길 장로가 “총회가 다음세대를 위해 걱정하고 방법을 찾아주는 것에 감사하다. 주일학교를 살리는 일에 하나님의 은총이 있기를 기원한다.”라고, 총회교육개발원 홍승영 목사가 “총회 하나바이블이 좋은 호평을 받고 있다. 온라인과 잘 연계되기를 바란다.”라고 축사 후 총회장 장봉생 목사의 축도로 예배를 마쳤다.
2부 공청회는 교육부장 이경조 목사의 사회로 발제1은 안기성 교수(총신대학교 일반대학원)가 ‘온라인 주일학교의 실천신학적 의미와 실천방안’이란 제목으로 “사회보다 교회의 고령화 속도가 더 빠르다. 또한 청년들이 교회를 이탈하고 있다. 주일학교의 감소는 교회와 총회를 무너뜨릴 수 있는 위기를 준다. 미자립교회 주일학교를 어떻게 세울 것인가? 주일학생이 한 명이라도 있다면 주일학교가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 현재 우리나라는 저출산으로 인구가 급감하고 있고, 교역자 수급도 쉽지 않다. 총회 차원에서 교회 교육 실태를 조사해야 한다. 총회가 주일학교 콘텐츠를 만들어 제공해야 한다. 노회 차원에서 하는 것은 쉽지 않다. 주일에 사용할 수 있는 주일학교 예배를 총회가 만들어 제공하는 것이 필요하다. 총신대에서도 주일학교 교사를 양성하는 프로그램을 운영하도록 해야한다.”라고 말하고 다음과 같이 제언했다. “첫째, 총회 교육부 내에 ‘미래자립교회 교육지원 상설기구’를 설치하고, 이를 뒷받침할 예산을 최우선순위로 배정해야 한다. 다음 세대 교육은 선택이 아닌 생존의 문제이다. 예산의 우선순위를 재조정하여 죽어가는 주일학교에 산소호흡기를 달아야 하기 때문이다. 둘째, 총신대학교 평생교육원과 연계하여 ‘교회교육 전문 평생교육사’ 자격 과정을 신설하고, 헌법 및 규칙을 개정하여 이들의 사역 범위를 제도적으로 보장해야 한다. 평신도를 깨우지 않고는 미래가 없다. 그들에게 합당한 권한과 책임을 부여하여 동역자로 세워야 한다. 셋째, 전국 노회와 협력하여 주일학교 미운영 교회에 대한 전수 조사를 실시하고, 온라인 교육 송출 시스템을 조속히 가동해야 한다. 데이터 없는 정책은 실패한다. 정확한 실태 파악을 선행하고, 가장 시급한 곳부터 디지털 복 음을 송출해야 한다.”
발제2는 김수환 교수(총신대 기독교 교육•컴퓨터&AI)가 ‘안심하고 맡기는 플랫폼: 데이터 보안과 지교회 보호’란 제목으로 “교회 교육-가정 교육-개인 생활-교회 교육으로 이어지는 교회학교 사이클을 만들어야 한다. 필드의 의견을 반영해 이에 맞는 프로그램을 만들어야 한다. 교육시스템은 AI가 포함된 온라인으로 가고 있다. 인공지능은 지식의 전파속도가 매우 빠르다. 이 시스템을 구축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다. 개인정보 보호 기능이 강화되어 있기에 교회에서 교인들의 개인정보를 사용하는데 매우 조심해야 한다. 교육은 오랜 기간 투자해야 한다. 기술은 도구이며, 본질은 영혼이다. 안전하고 지속 가능한 온라인 주일학교를 통하여 다음세대를 준비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발제3은 김종석 목사(은석교회)가 ‘노회 IT 헬프데스크 운영안 : 큰 교회 청년부와 작은 교회의 영적 연대’란 제목으로 “총회 e-주일학교는 단순한 온라인 교육 프로그램이 아니다. 이는 총회-노회-대형교회-소형 교회가 하나의 몸으로 협력하여 다음세대를 세우는, 주님의 몸된 교회가 시대 속에서 구현해야 할 전우주적 교회의 실천 모델이다. 온라인 플랫폼이라는 기술적 특성 때문에 IT 전문가의 도움이 필수적이며, 이는 총회 차원의 IT 헬프데스크 운영을 통해 해결해야 한다. 동시에 노회 e-주일학교 헬프데스크는 교육적 전문성을 갖춘 관리교사와 수업교사를 확보하고 연결하는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 이 두 가지가 균형을 이루어야 총회 e-주일학교는 안정적으로 정착될 수 있다. 총회 e-주일학교는 소형교회만을 위한 프로그램이 아니다. 대형교회와 소형교회가 서로의 강점을 나누며 영적 연대를 이루는 장이 되어야 한다. 대형교회는 풍부한 인적•물적 자원을 제공하고, 소형교회는 지역사회와의 밀착성을 통해 복음의 현장을 확장한다. 이 과정에서 노회는 두 교회를 연결하는 허브(Hub)가 되어야 하고, 총회는 전체 시스템을 설계하고 유지하는 중심 축이 되어야 한다. 이러한 협력 구조는 교회의 규모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 확장이라는 공동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하나 된 교회의 본질을 드러낸다. 또한 총회 e-주일학교는 단순히 주일교육에 머물지 않고, e-성경학교, 온라인 캠프, 노회대회 준비반, 글로벌 선교 교육 등으로 확장될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녹화 콘텐츠는 온라인 도서관으로 발전하여 교사교육과 장년교육까지 포괄할 수 있으며, 실시간 수업은 국내외 교사와 학생을 연결하는 새로운 교육 패러다임을 제시한다. 이는 한국교회가 가진 교육 역량을 세계 선교의 장으로 확장시키는 중요한 도구가 될 것이다. 총회 e-주일학교는 한국교회가 직면한 다음세대 위기를 해결하기 위한 단기적 대안이 아니라, 한국교회 교육의 미래를 재구성하는 장기적 전략이다. 기술적 기반과 교육적 기반이 균형을 이루고, 총회-노회 교회가 지속적으로 협력할 때, 총회 e-주일학교는 단순한 온라인 교육을 넘어 한국교회의 다음세대를 세우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될 것이다. 결국 총회 e-주일학교의 성공은 시스템의 완성도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총회와 노회의 지속적인 관심과 참여, 대형교회와 소형교회의 상호 협력, 그리고 교사와 간사들의 헌신이 함께 어우러질 때 비로소 총회 e-주일학교는 주의 몸된 교회의 하나 됨을 실천하는 역사적 교육 사역으로 자리매김하게 될 것이다. 이 사역은 단지 한 세대의 교육을 위한 프로그램이 아니라, 한국 교회가 다음세대를 향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미래지향적 모델이며, 교회가 시대 속에서 어떻게 연합하고 협력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하나님 말씀을 근거로한 다음 세대 교육의 실천적 선언이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발제4는 나현규 목사(총회교육전도국장)가 ‘왜 e-주일학교인가? 교단적 명분과 시대적 소명’ 이란 제목으로 “본 연구는 수축사회라는 거시적 위기 속에서 한국 교회 주일학교가 직면한 교육 양극화의 실태를 분석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으로 'e-주일학교' 모델을 제안하였다. 앞서 확인한 통계적 실상은 참담했다. 주일학교 운영이 불가능한 교회가 급증하고 있으며, 현장 목회자의 약 절반(47~51%)이 거점형 교육 위탁 의사를 밝힐 만큼 현장은 절박하다. 지금 현장에 필요한 것은 디지털 기술을 인격적 소외의 도구가 아닌, 신앙 전수의 '매개적·보조적·관계적' 수단으로 재정립하는 블렌디드 러닝(Blended Learning)를 토대로 한 실행 가능한 추진 안이다. 따라서 총회가 콘텐츠를 공급하고 노회가 IT 인프라를 책임지는 '협력적 행정 구조'와 2027년 1월 전면 시행을 향한 구체적인 로드맵을 제시하였다. 이는 단순한 시스템 도입 이 아니라, 교단의 공적 책임을 다하는 '서번트 행정'의 실천적 고백이다. 본 사역이 단기적인 이벤트를 넘어 한국 교회 교육의 근간을 바꾸는 '디지털 공공재'로 자리 잡기 위해 다음과 같은 정책적 제언을 남기고자 한다. 첫째, 노회의 적극적인 참여가 중요하다. e-주일학교의 성패는 하드웨어를 보급하고 현장의 IT 헬프데스크 역할을 수행할 노회의 상황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노회는 지교회의 형편을 살피고 장비 나눔 캠페인을 주도함으로써, 소속 교회들이 교육의 사각지대에 놓이지 않도록 '현장 밀착형 행정'을 실천해야 한다. 둘째, 튜터(교사)를 바라보는 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요하다. 이제 교사는 콘텐츠 제작자가 아니라, 아이들의 영혼을 돌보는 '인격적 조력자(High-Touch)'로 재정의되어야 한다. 총회는 튜터들이 기술적 부담에서 벗어나 아이들의 눈을 맞추고 기도해 줄 수 있는 '시간과 여유'를 제공 하는 일에 모든 행정적 역량을 집중해야 한다. 셋째, 지속 가능한 자원 순환 모델의 정착이다. 예산의 논리를 넘어, 대형 교회의 유휴 자원을 작은 교회로 흘려보내는 '성경적 나눔'이 e-주일학교 플랫폼을 통해 구현되어야 한다. 이는 재정적 격차를 신앙 공동체의 사랑으로 극복하는 한국 교회 교육의 새로운 상생 모델이 될 것이다. 우리에겐 더 이상 머뭇거릴 시간이 없다. 수축사회의 파고는 이미 우리 곁에 와 있으며, 지금 이 순간에도 어느 작은 교회의 주일학교 등불이 꺼져가고 있을지 모른다. e-주일학교는 그 등불이 꺼지지 않도록 총회와 노회가 함께 기름을 붓고 불꽃을 지키는 '거룩한 공조'이다. 디지털이라는 차가운 통로에 우리의 뜨거운 복음과 인격적인 사랑을 실어 보낼 때, 비로소 다음 세대는 하나님의 나라를 꿈꾸는 비전의 세대로 일어날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어 질의응답 및 현장 의견 수렴 시간을 갖고, 종합 정리하고 폐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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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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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기총, 제1회 부부의날(5.21)행사 제1차 준비 기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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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기독교총연합회(이사장 정진희 목사) 제1회 부부의날(5.21)행사 제1차 준비 기도회가 3월 3일 오후 3시 대한교회(윤영민 목사 시무)에서 있었다.
정진희 이사장이 “건강한 가정을 통해 건전한 사회를 만드는 일에 우리가 관심갖고 기도하며 노력하는 것이 필요하다.”라고 인사말했다.
예배는 정진희 목사의 인도로 윤인숙 특임총재가 기도, 김복례 재정이사가 성시낭독, 강영준 목사(월기총 상임총재)가 엡5:31-32을 본문으로 ‘하나님께서 맺어주신 관계’란 제목으로 “살아가면서 관계는 중요하다. 하나님은 인간을 관계적 존재로 만드셨다. 관계는 소중하고 늘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 관계의 문제는 영적인 문제이기에 죄로 인해 관계가 깨졌다. 십자가 복음은 관계의 회복이며 관계를 유지할려면 섬기는 것이 필요하다. 건전한 가정을 통해 자녀가 태어나 국가가 든든해져야 한다. 주님의 뜻을 이루는 부부의 날 행사가 되기를 바란다.”라고 설교했다. 이어 헌금 후 ‘한국교회 가정회복, 저출산 이혼율 감소, 부부세미나 결혼상담 전문가 양성, 6.3 지방선거와 민족복음화 정치안정 경제성장과 평화통일을 위하여’ 합심기도한 후 문여왕 상임이사가 광고하고 최병남 목사가 봉헌 축복 및 축도로 예배를 마쳤다.
정진희 이사장이 세미나 비전 발표 및 월기총 부부행복 결혼상담 매니져 양성 취지에 대하여 “본 세미나의 주제는 부부행복, 결혼상담으로 대표 주제 성구는 창 2:24 이다. 월기총은 행사를 앞두고 매주 준비 기도회를 해왔기에 앞으로 매주 준비 기도회로 모일려고 한다. 세미나를 통해 교회 가정 상담 전문 리더를 양성해 부부 갈등을 예방하고자 한다. 또한 다른 기관, 군소 신학교와 연합해 학술 세미나도 진행하고자 하는 계획도 있다.”라고 말했다.
행사를 앞두고 6월 지방 선거가 있어 세미나 장소와 규모에 대해서는 계속 논의하기로 하고 강영준 목사가 섬기는 석식 애찬을 나누며 친교했다.
광고 및 기도제목
1. 좋은 장소를 제공하신 대한교회 윤영민 목사님과 사모님, 그리고 카페 세미나실 관계자 여러분에게 진실로 감사합니다.
2. 은혜로운 설교를 해주심과 석찬을 대접하실 강영준 목사님과 참석하신 동역자 형제자매 여러분에게 진심으로 감사 드립니다.
3. 예배 후 정진희 이사장님께서 세미나 비전 발표 및 월기총 부부행복 결혼상담 매니져 양성 취지에 대하여 설명해 주시겠습니다.
4. 오는 5월 21일 부부의 날을 기점으로 <월기총 부부행복 결혼상담 축제 세미나> 일정과 매주간 1회 정기 준비 성회는 추후 공지 합니다. 위하여 기도해 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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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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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368】 희귀 질병에 걸린 여성 청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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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3때 희귀 질병에 걸린 여학생이 쓴 글을 모든 책이다. 질병이 한 사람을 어떻게 어렵게 하는가를 보여주지만 그 가운데서도 필자는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 사지육신 멀쩡하게 살아가는 일상에 감사하며 이러한 삶을 누리지 못하는 자들에 대해 생각하는 기회를 가졌다.
세 번째 자기소개 때 나는 마스크를 벗고, 나의 다른 특징들을 소개하듯이,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하고 웹툰을 즐겨 본다는 것을 말하듯이, 나에게 병이 있다는 사실을 '오픈'했다. "나는 책 읽는 걸 좋아해. 음악은 시끄럽지 않은 걸 좋아하고, 그림을 좋아하고, 병이 있어?" 이때 상황을 마주한 나의 심리는 한껏 불었던 풍선에서 바람이 '푸시시' 하고 빠지는 것과 같았다. 새 친구들은 "힘 내!" 등의 반응을 보였다. 하긴 더 무슨 반응을 할 수 있을까? 갑자기 너의 아픔을 이해한다며 다가와도 당황스러울 것이 빤했다. 잘 알지 못하는 아이들에게 무언가 극적인 반응을 기대한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상상보다 평범하고 무난한 반응에 묘한 허탈감이 들었다. 어떤 공격이 들어올지 몰라 잔뜩 몸을 부풀린 채 경계 태세를 취하다가, 사실 그것이 지나가는 사람의 무해한 그림자에 불과했다는 걸 알아버린 길고양이가 된 기분. 병을 진단받고 가장 걱정했던 것이 혹시라도 사람들이 '아픈 사람' 이미지에 가려서 내가 정말 어떤 사람인지 봐주지 않으면 어떡하지, 하는 것이었다. 어쩌면 나를 '환자'라는 말에 가두고 나의 온갖 무궁한 가능성을 가장 먼저 재단해버린 게 나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p. 41).
시험 점수는 우리의 지극히 일부만을 담고 비춘다. 우리는 그것으로 전체가 평가되기에는 아주 무한한 가능성을 품고 커다란 미래를 꿈꾸는 존재다. 물론 등급으로 나누는 것처럼 동일하고 협소한 잣대로 평가를 마치면 편리하다. 한 아이가 걸어온 시간을 깊게 생각하지 않더라도 숫자만 보고 판단을 끝낼 수 있다. 하지만 동시에 오류를 범하기 쉽고, 잔인하며, 폭력적이다. 아이들의 시선을 한곳에 고정하고 다른 길은 없다고 귓가에 대고 끊임없이 속삭이는 거다. 좌절을 맛본 뒤(p. 50) 딛고 성장하는 것이 어려워지도록. 나 역시 병에 걸리고, 그간 쌓아온 공든 탑이 무너졌다며 절망해서 다시 일어나기까지 아주 오래 걸렸을 수도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아찔해진다(p. 51).
병 때문에 인생 망했다고?
나에 대해 잘 모르는 다른 반 친구들과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다. 친구들끼리 수다가 으레 그렇듯 대화는 종잡을 수 없이 흘렀고 '존엄사'에 대해 이야기하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 허용된 존엄사의 범위, 존엄사를 선택하는 이유 등. 주로 삶에 대한 희망이 없거나 더는 살고 싶지 않은 마음에서 하는 거겠지. 한 친구가 말했다. "나는 큰 병에 걸리면 힘들게 치료받으면서까지 살고 싶지 않을 것 같아?" 헉, 그렇구나. 그렇게 생각하는구나. 크다면 큰 병을 안고(p. 86)서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잠시 말문이 막혔다. 하지만 이 친구는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잘 모르니까. 불과 지난해까지는 나도 '큰 병' 하면 말기암을 생각했고, '난치병' 하면 백혈병을 떠올렸다. 내가 어디 심각하게 아픈 것 일지 모른다고 생각할 때도 저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내가 본 TV 프로나 웹툰, 소설 등에서 병 하면 가장 흔하게 쓰이던 소재였기 때문이다. 세상엔 수많은 병이 있고, 큰 병을 앓는다고 반드시 일상을 영위하지 못하는 건 아니며, 치료제를 찾을 길 없는 희귀 난치병에 걸렸다고 365일 매일 24시간 동안 절망의 쓴맛만 느끼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몰랐다. 1년 전 나처럼 생각했을 것으로 짐작되는 그 친구는 내가 큰 병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제대로 알았다면 그런 말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몰랐던 사람이 실수하는 것에 상처받을 필요는 없다. 실수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알고도 깊이 생각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 지난해 병을 진단받은 직후, 왜 이렇게 오랫동안 학교에 나오지 않았냐고 묻는 아이가 있었다. 고등학교 입시 철이었기에 특목고나 예술고를 지원하는 친구들의 자리가 많이 비어 있었다. 아마 입원하느라 장기간 결석한 나에(p. 87) 대해서도 비슷한 맥락으로 유추했을 것이다. 간단히 알려줬다. 내가 희귀 난치병에 걸려 일원해야 했다고. 그 애 입에서 나온 맡은, "뭐? 그럼 네 인생 망했네?“였다. 아직도 그 장난스러운 어투와 올라간 입꼬리, 가벼운 태도가 뚜렷하게 기억 난다. 나는 앞뒤 생각할 겨를 없이 그 애의 정강이를 발로 찼고, 키가 큰 그 애가 정강이를 감싸 쥐느라 허리를 숙이자 눈 높이로 내려온 멱살을 잡고 할 수 있는 온갖 욕을 퍼부었다. 저속하고 폭력적이게 대응함으로써 같은 사람이 된 것 아니냐고 물으면 할 말은 없지만, 속은 시원했다. 그 애의 행동은 무엇보다 망하지 않았고 포기할 이유도 없는 내 인생에 대한 큰 무례였기 때문이다. 내가 아프지 않았더라면, 그 애가 병이 아니라 다른 것(예를 들어 시험을 망친 일)이 내 인생을 망쳤다고 말했더라면, 그냥 웃고 넘겼을 것이다. 하지만 그 애가 내 병 때문에 내 인생이 망했다고 말한 순간 이 말을 용납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 밖에 없었다. 포기하지 말고 희망을 가지라는 말을 들을 때도 내가 한 줄기 희망을 놓지 말아야 할 만큼 절망적인 상황에 놓인 건가? 그 정도로 심각하고 불행한 상황인가? 그렇게 느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어 기분이 묘해지는데, 멋대로(p. 88) 내 운명을, 그것도 부정적인 방향으로 판단해버리다니. 남의 인생을 놓고 왈가왈부하는 건, 아무리 긍정적 방향이라도 조심해야 하는 영역이라고 생각한다. 다른 사람의 상황을 모르고 말하는 것은 '그럴 수도 있지' 하고 넘어갈 수도 있다. 하지만 알면서도 가볍게 입에 올리는 태도는 나에겐 투쟁의 대상이다. 누구든 내 인생을 함부로 판단하면 자신이 얼마나 가당치 않은 소리를 했는지 알려줄 생각이다(p. 89).
내가 제일 좋아하는 사진은 특별히 여행 갔거나 자랑스러워할 만한 일이 있었을 때 찍힌 사진은 아닌 것 같다. 만약 그랬다면 어떤 연유로 그렇게 즐거웠는지 기억에 남았을 거다. 일상에서도 그렇게 웃긴 표정으로 웃을 수 있다면, 그 순간의 사진을 보면서 또 재미있게 보낼 수 있다면 충분한 것 아닐까. 나는 병과 함께 살고 있다. '병에 걸렸음에도 웃음을 잃지 않는 모습'을 간직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병이 망칠 수 없는 내 일상의 웃음이 있음을 알아두고 싶은 것이다(p. 136).
민들레 씨앗 부는 것을 좋아한다. 언니와 함께 민들레 씨앗 중에서도 줄기를 중심으로 동그랗게 온전한 형태가 남아 있(p. 223)는 것은 '완들레', 반만 있는 것은 '반들레', 바람에 모두 날아가 하얀 줄기만 남은 것은 '간(가버린)들레'라고 불렀다. 짙은 초록색의 잔디밭 사이사이에, 아스팔트 틈새에 싹튼 민들레는 질기게도 자란다. 노란 꽃을 점점이 피워내다가 씨앗을 세상으로 날려 보낸다. 번식을 위해 제 일부분을 강하게 내보내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마침내 한 뿌리에서 나온 두 씨앗이 만나면 어떻게 될지 생각해봤다. 막연하게도 서로를 알아볼 거라는 생각부터 든다. 처음과 끝을 설명할 필요가 없는 두 씨앗이 만나서, 어떤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지 기쁘게 나눌 것 같다. 어디서 왜 출발했는지를 구태여 설명할 필요가 없다는 것만으로도 대화에는 이미 유대감이 싹터 있기 마련이니까 말이다. 병에 그렇게 큰 자리를 내주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내 인생이 이미 병이 있기 전과 후로 명료히 나뉘는 것 같다. 병을 앓는 일이 나에게 거대한 성장 기회가 됐다고 해도 많은 것을 잃게 했고 처음부터 알아가야 한다는 절망을 때때로 느끼게 했다. 병에 걸린 뒤 새로운 나를 다시금 설명하는 일이 곤혹스럽기만 한 것은 아니다. 나를 알려주는 과정에서 다른(p. 224) 사람들에 대해서도 많은 것을 들을 수 있으니까. 특히 그 사람들의 연약한 부분, 차마 내보이지 못했던 아픔에 대해 병을 않기 전보다 후에 훨씬 쉬이 들을 수 있었다. 그런 이야기를 들었을 때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도 진심으로 고민하게 됐다. 그러나 아픔의 처음을 설명할 필요가 없는, 가족이 아닌 사람들을 만나서 일상의 틈새 민들레처럼 산뜻하고 새로운 이야기를 듣는 건 정말 오랜만에 느끼는 노란빛 전율이었다(p. 225).
4학년 때는 매일매일, 단 하루도 빼놓지 않고 일기를 썼다. '매일매일 일기를 썼다'라는 타이틀이 탐났다. 무엇보다 칭찬을 듣고 싶었다. 어려울 것 같지도 않았다. 책을 읽을 때마다 내 입맛에 맞는 문장으로 다시 써보고, 이야기를 새로 만들어 보고, 인물을 상상해봤다. 그러니 일기를 쓰는 것도 쉬울 것 같았다. 하지만 글을 쓸 때 가장 어려운 건 지속적으로 쓰는 거라 는 사실을 몰랐다. 박지원이 재물을 샘에 비유한 것처럼, 글도 비슷한 것 같다. 많이 쓰면 고갈되는 것이 아니라 새로 솟는다. 쓰지 않으면 고여버린다. 내 글은 그때가 가장 맑고 신선했던 것 같다. 맑은 물을 마시듯 글을 썼었다. 중학교 동안은 읽기와 쓰기를 거의 손에서 놓았었다. 아무도 내게 일기를 매일 쓰라고 하지 않았다. 중학교 들어서 새로 생긴 휴대폰 속에도 텍스트는 있었다. 종이로 된 두꺼운 책보(p. 256)다 훨씬 쉽게 읽히기도 했다. 책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무엇보다 책을 읽으며 보내는 시간이 죄스러웠다. 수학 문제를 풀고, 노트 필기를 외우는 것만이 공부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내가 읽어왔던 책들이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러다가 중학교 3학년이 되었을 때 수행평가로 자서전 쓰기가 있었다. 굴곡 없는 삶이라서 쓸 일이 없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때는 고작 한 달 뒤에 희귀 난치병을 진단받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 하던 때였다). 매일매일 뭘 쓸지 생각했다. 어렵고, 생각이 막힌 것 같아 힘들었다. 하지만 동시에 흥분되었다. 재미있었다. 행복했다. 자기 전에 무슨 말로 글의 서두를 뗄지, 할아버지와 있었던 나의 첫 기억을 무슨 단어로 쓸지 고민하는 것이 너무 즐거웠다. 가장 정확한 글을 쓰고 싶었다. 기억은 원석이었고, 나는 끌과 망치를 가지고 원석을 어르고 달래서 세공하는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마침내 글을 완성해서 냈을 때, 국어 선생님이 나를 교탁 앞으로 부르셨다. "너처럼 글을 잘 쓰는 애를 오랜만에 본 것 같아. 앞으로 뭘 쓸지 기대된다?" 나는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다. 다시 매일매일 글을 썼다. 생각나는 모든 것들을 썼다. 내가 생각하는 모든 문장은 글(p. 257)이 되고, 마치 그러기 위해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나에게 글 쓰는 일은 환희다. 아주 고통스럽고 뜨거운 환희. 그리고 비로소 나는 한 번도 글을 쓰지 않는 삶을 상상해본 적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p. 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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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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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회 여성사역자위원회, 헌법개정 수의를 위한 서북권역설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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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여성 사역자 위원회가 헌법개정 수의를 위한 서북권역 설명회를 3월 3일 오전 11시 대한교회(윤영민 목사 시무)에서 가졌다. 40여명이 참석했고 대한교회에서 음료와 중식을 제공했다.
1부 예배는 (서기) 피승민 목사의 인도로 (총무) 정판술 목사가 기도, (증경총회장) 김선규 목사가 사사기 4:4-5를 본문으로 ‘여성 사사 드보라’란 제목으로 “사사 드보라는 여성이지만 하나님께 부름받아 귀하게 쓰임 받았다. 여성사역자에 대한 좋은 토론이 있기를 바란다.”라고 설교후 (서북협대표회장) 정영기 목사의 축도로 예배를 마쳤다.
2부 세미나는 (총무) 정판술 목사의 사회로 제1강은 총신신대원 배춘섭 교수가 ‘여성 강도사 헌법개정 수의’란 제목으로 “성경은 여성의 사역에 대해 절대적으로 금지하고 있지는 않다. 고전 14장에서 ‘여성은 잠잠하라’는 것은 질서를 지키라는 것이다. 여성의 절대적 침묵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남편의 머리됨을 인정하라는 것이다. 여성의 강도권은 성경을 위배하는 것이 아니며 헌법을 벗어나는 것도 아니다. 이는 여성 안수로 가는 중간 단계는 아니다. 헌법 개정을 통해 여성 강도권과 강도사 인허 허락을 하자는 것이다.”라고 강의했다.
제2강은 전 헌법개정위원장 이상학 목사가 ‘미래와 복음 확장을 위한 결단’이란 제목으로 “요엘서에서 남종과 여종에게 성령을 부어주신다고 했기에 남녀의 구별이 있을 수 없다. 교단에 남자 교역자 수급률이 낮은데 여성 사역자들은 타교단으로 가고 있다. 총회는 이미 이 문제에 대해 결의했다. 개정은 특정 계층의 유익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영혼구원의 효율을 위한 것이다.”라고 강의했다.
3부 질의 및 응답은 (헌법수의분과장) 조영기 목사의 사회로 헌법개정에 대한 절차 소개 및 질의 응답하는 시간을 가졌다.
* 여성사역자위원회
위원장 : 조승호 목사
부위원장 : 김호겸 목사·김현범 장로
서기 : 피승민 목사
회계 : 김윤호 장로
총무 : 정판술 목사
헌법수의 분과장 : 조영기 목사
처우개선분과장 : 강문구 목사
사역개발분과장 : 윤태호 장로
위원 : 문병관 목사·유흥선 목사·이기영 장로·변충진 목사·한상원 장로·홍순덕 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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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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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선교단, 구약 시가서 1일 통독 모임 가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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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통독과 암송을 통해 건강한 신앙생활을 추구하는 요한선교단이 구약 시가서 1일 통독 모임을 3월 2일 광진구에 소재한 성광교회(천주찬 목사 시무)에서 있었다. 이날 참석자들은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예배, 성경 통독과 암송에 집중하며 은혜 받는 시간을 가졌다.
천귀철 목사가 “요한선교단을 통해 제가 제일 많은 복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저는 성경을 읽고, 암송하고, 순종하고 전하는 것을 통해 목회를 비롯해 큰 은혜를 누렸다. 저 외에도 많은 분들이 성경을 읽고 암송하는 가운데 놀라운 기적을 체험하기도 했다. 그러나 주님을 만나고, 주님의 뜻을 알게 되는 것이 요한선교단의 목적이다.”라고 인사말했다.
시작 예배는 천귀철 목사의 인도로 김중득 목사가 기도, 욥 22:21-22을 합독 후 천귀철 목사가 “요한선교단이 만들어진 목적은 성경을 읽어 복음대로 살고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이며 말씀을 체화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성경 통독, 암송을 통해 변화된 삶을 살고 있다. 주님 오시는 날까지 말씀을 붙들고 예수님을 증거하는 사역을 감당하자.”라고 설교한 후 장상민 목사의 축도로 시작예배를 마쳤다.
이어 순서대로 성경을 연속해서 읽고 암송하는 은혜의 시간을 갖고 교회에서 대접하는 애찬을 나눈 후 계속해서 오후까지 성경을 읽고 암송하는 시간을 갖고 다같이 합심해 기도하고 성경 통독 모임을 마무리했다.
성경 통독, 암송1
성경 통독, 암송2
성경 통독, 암송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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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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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 소위 “스타” 목사 박영선, 김문훈의 몰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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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포교회 박영선 목사, 포도원교회 김문훈 목사가 몰락했다. 한때 한국교회를 들썩였던 스타 목사였다.
박영선 목사는 내가 신학교 시절이던 80년대 신학생들을 매혹했다. 그의 책은 불티나게 팔렸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그는 잊혀졌는데 최근 뜬금없이 개척교회 40억 요구 건으로 언론에 언급되다 결국 문제 많은 아들과 함께 교회를 떠나는 것으로 정리됐다.
김문훈 목사는 교역자에 대한 욕설 녹음이 공개된 후 고신 교단 부총회장직과 담임목사직을 사임했다.
감추었던 그들의 실체는 우리를 경악하게 했다. 한때 그래도 깊은 감동을 받고 영향을 받았었는데 망연자실하다.
목사는 타종교와 달리 쉽게 팬덤이 형성되고 스타 반열에 오른다. 불교, 천주교에서 이들처럼 명성을 떨친 이들이 있었는가? 기독교는 설교 중심이다보니 설교를 잘 하는 자는 주목을 받는다. 과거 전병욱도 그랬다.
스타 목사의 이면과 몰락을 보며 다시한번 다짐한다. “인간에게 소망을 두지 말자.” 인간이란 잘 난 것처럼 보여도 다 그렇고 그러니 너무 높이지 말고 따르지도 말자. 그랬다가 이처럼 뒤통수를 맞을 수 있기 때문이다. 참으로 인간은 기대할 것이 없다. 씁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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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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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회(GMS) 인천선교훈련 3월 12일 개강...훈련생 모집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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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와 구령의 열정으로 교회를 세우는 성도들을 「최고의 전도전문가」로 양성하는 총회(GMS) 인천선교훈련이 3월 12일(목) 개강한다. GMS 인천선교회(이사장 이용범 목사)가 주최하고, 인천선교훈련원이 주관, 계산교회·국제전도훈련원이 협력한다.
영혼 구원에 관심을 가진 성도들은 누구나 환영하며, 현장 참석이 불가능한 분은 온라인(유튜브 접속)으로 참가해 성경과 신학, 전도와 선교를 신학대학원 교수에게 직접 배우는 과정이다.
① 최고수준의 신학대학원 교수진 ② 전도전문가 양성(1년 2학기 24주) ③ 온라인 참가(지방참가자)가 특징이다.
개강: 3월 12일(목) 오후 7:30, 인천 계산교회 교육관 3층(본관 맞은편 건물 뒤)
인천 계양구 계양대로 194번길 2 ☎ 032-541-8981~3 (인천교대역 1번 출구 5분)
훈련일정 및 내용
훈련기간
3월 12일 - 5월 28일(매주 목요일 오후 7:30-9:30)
지원자격
① 일반과정 : 교파, 직분 무관, 고졸 이상 남여, 1955. 1. 1 이후 출생자
② 사역자 과정(전도사역 간사) : 대학 졸업 이상 남녀, 1965. 1. 1 이후 출생자
특전
① 전도와 양육 실습 성적 우수자는 교회 사역 간사로 추천한다.
② 수료자(1년 2학기)는 총회(GMS) 선교사 자격(단기)을 부여한다.
등록비
10만 원(교재비, 전도 실습비 별도) 국민은행 645501-01-314795 인천선교훈련원
등록방법
① 문자등록 : 성명, 출석교회, 직분, 주민번호
• 문자 전송 010-2042-2954 (임정하 간사)
② QR 코드 등록 : 코드 접속 후 신청서 작성
https://forms.gle/gecU6bLbhUERYbkk9 (신청 QR코드 링크)
③ e메일 신청 : joynful323@gmail.com
(성명, 전화번호, 출석교회, 직분, 주민번호)
문의
☎ 010-2042-2954 (임정하 간사)
훈련방법
대면훈련(지방참가자는 유튜브 접속)
비형식 훈련(전도실습, 세미나, 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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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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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 능력주의는 옳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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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력주의’라는 말은 어떤 책을 보다 알게 됐다. 뜻과 달리 부정적인 의미가 있어 혼동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구굴은 능력주의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능력주의(Meritocracy)는 개인의 사회적 지위나 경제적 보상이 세습이나 배경이 아닌, 오직 개인의 능력과 업적에 따라 결정되어야 한다는 신념입니다.
현대 사회에서 '공정'의 기준으로 널리 받아들여지지만, 최근에는 그 한계에 대한 비판도 활발히 논의되고 있습니다.
1. 주요 특징
성취 중심: 부나 계급 대신 지능(IQ)과 노력의 합산으로 성공이 결정된다고 봅니다.
기회의 평등: 누구에게나 동일한 출발선을 보장하고 실력으로 경쟁하는 것을 정의로 여깁니다.
객관적 지표: 한국 사회에서는 특히 '시험'과 같은 정량적 평가를 통해 보상을 나누는 경향이 강합니다.
2. 주요 비판과 쟁점
최근 마이클 샌델 등 석학들은 능력주의가 오히려 사회적 갈등을 키운다고 지적합니다.
승자의 오만과 패자의 굴욕: 성공한 사람은 자신의 노력을 과신하고, 실패한 사람은 자책하며 소외감을 느낍니다.
기회의 불평등: 부모의 경제력이 교육 격차를 만들어 결국 '엘리트 세습'의 수단이 되기도 합니다.
공정의 착각: 성공에는 운이나 사회적 환경의 도움도 크지만, 이를 무시하고 오직 실력의 결과로만 해석하는 오류를 범합니다.
3. 관련 주요 서적
공정하다는 착각 (마이클 샌델): 능력주의가 어떻게 공동선을 해치고 '폭정'이 되는지 분석한 책입니다.
능력주의의 함정 (대니얼 마코비츠): 현대의 능력주의가 불평등을 고착화하는 방식을 고발합니다.
자신의 능력으로 성공하는가? 신자에게는 하나님의 섭리와 은혜가, 비신자에게는 운이라는 것이 있다. 그러므로 나름 성공하더라도 겸손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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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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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367】 역사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증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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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가운데 인간들은 다양한 시대와 국가에서 어리석은 일들을 반복했다. 지금보면 얼마나 어이없는 일이던가. 지금 나름 현명하다고 자부하며 하는 일들이 이후에 보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 되겠는가? 인간의 어리석음은 계속해서 반복된다. 재미있게 읽었는데 나온지 20년이 되다보니 현재는 절판되었다.
미라 제조법
고대 이집트인들은 죽은 자의 영혼이 몸으로 다시 돌아온다고 믿었기에 시체를 원래대로 잘 보존하려고 했다. 미라 제조는 그런 필요성에 의해서 생겨난 것이다. 기원전 5세기의 역사가 헤로도토스는 당시의 미라 제조법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천연 소금인 나트론을 사용해 시체를 건조시켰다. 나트론은 수분을 흡수하고, 시체의 지방을 녹이며, 피부의 탄력성을 유지시키기 때문이다. 미라를 완성하는 데는 보통 70일이 걸리는데, 그 중 40일을 시체 건조작업에 할애한다. 미라를 제조할 때 우선 뇌부터 제거한다. 미라 제조인은 끝이 구부러진 갈고리를 콧구멍에 집어넣어 뇌를 끄집어낸다. 오늘날까지 잘 보존된(p. 119) 미라를 살펴보면, 대부분 코뼈에 구멍이 뚫려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 구멍으로 갈고리를 넣어 두개골 속의 뇌를 휘저은 뒤 액체상태가 된 뇌를 콧구멍으로 배출시키는 것이다. 그런 다음 나뭇진을 액체상태로 만들어 빈 두개골에 채워 넣는다. 그 다음에는 내장을 제거하기 위해 시체의 왼쪽 옆구리를 절개한다. 약 10-15센티미터쯤 절개하는데, 숙련자라면 그 절개 부위에 손을 넣어 위와 창자와 허파를 쉽게 꺼낼 수 있다. 하지만 심장은 반드시 몸 안에 남겨두어야 한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심장을 생명 그 자체로 여겼기 때문이다. 저승에 가서 오시리스 신에게 심판받을 때 진실의 저울에 그 심장을 올려놓는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 외에 신장, 간장, 방광, 자궁 등 도 그대로 남겨두었다. 그런 다음 다시 옆구리를 꿰매고 시체를 물로 닦은 뒤 나트론으로 덮어 수분을 제거한다. 시체가 건조되면 피부의 탄력을 되살리기 위해 밀기름과 밀랍, 나트론, 껌의 혼합물로 몸을 문지른다. 그리고 체내에 모래와 아마포와 톱밥 등을 채워 넣어 모양을 다듬는다. 이제는 붕대로 시체를 감을 차례다. 이때 사용되는 붕대는 나뭇진이 스며든 아마포로, 그 길이만 해도 수백 미터나 된다. 붕대를 감는 방법은 시대마다 조금씩 다른데, 그것을 바탕으로 미라가 살았던 시대를 추측할 수 있다.
처음에는 대부분 수의로 미라를 감싼다. 그 다음에 손가락과 발가락을(p. 114) 하나씩 감는다. 사지까지 따로따로 감고 나면 커다란 옷으로 감싸고 폭 넓은 붕대로 고정시킨다. 붕대를 감으면서 간간히 부적을 집어넣는다. 투당카엔의 미라에서는 부적이 143장이나 발견되었다. 신분이 낮은 귀족들도 보통 40장쯤 들어 있다. 붕대를 감는 일은 2주일이나 걸리는 고된 작업이다. 붕대를 갉아먹으며 미라 안으로 들어갔던 쥐가 계속 붕대를 감는 바람에 밖으로 빠져나오지 못하고 3천 년 뒤에 뼈로 발견된 적도 있다(p. 115).
채찍질하는 고행자
유럽에서 흑사병이 맹위를 떨치던 1349년, 독일과 플랑드르, 네덜란드, 스위스 등지에 기이한 차림으로 거리를 돌아다니는 순례단이 등장했다. 하얀 천으로 몸을 감싸고 십자가가 달린 모자를 쓴 그들은 참회의 목소리를 높이며 자신들의 몸을 가죽 끈으로 채찍질하면서 각 지역을 돌아 다녔다. 가죽 끈에는 단단한 매듭이 있었는데, 그 안에 바늘처럼 날카로 운 쇠못이 들어 있었다. 그 때문에 몸에 채찍질을 할 때마다 살갗이 찢어지고 피가 흘러나왔다. 그들 주변에 몰려들어 끔찍한 그 광경을 지켜보던 사람들도 어느새 그들에게 흘린 듯 옷을 벗어던지고 스스로 자신의 몸에 채찍질을 하기 시작했다(p. 120) 그들은 마을 광장이나 교회에 도착하면 옷을 벗어던지고 알몸으로 땅 바닥에 엎드리거나, 혹은 빙 둘러앉은 뒤 한가운데에 아이의 시체를 높히고는 부활을 기원하는 노래를 부르며 자신의 몸을 채찍질했다. 그들의 피가 땅바닥을 적시거나 교회 벽에 튀면, 그 광경을 지켜보던 사람들도 어느새 흥분하여 그 분위기에 휘말리고 말았다. 그것은 흑사병 때문에 끝없는 공포에 휩싸인 군중들이 자신을 죄인으로 여기고 자학하면서 신의 분노를 달래려 한 집단 히스테리였다(p. 121).
성유물에 열광하는 사람들
중세 유럽에서는 성인을 숭배하는 풍습이 크게 유행했다. 기적을 일으 킨 사람이나 위업을 달성한 사람을 성인으로 숭배하곤 했다. 그러자 성인과 관련된 물건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기 시작했다. 성인의 신체 일부나 생전에 성인이 애용하던 물건을 흔히 성유물이라고 하는 데, 당시 사람들은 특히 성인의 시신을 선호했다. 그 때문에 성인들은 묘지에 안치된 뒤에도 수난을 당해야 했다. 옷을 찢어가거나 머리카락을 뽑는 것은 물론이며, 심지어 머리와 팔과 다리까지 잘라가기도 했다. 시신의 일부라도 수중에 넣어 그 성인의 공덕을 물려받으려 했던 것이다. 가령 13세기에 유명했던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가 죽었을 때는 제자들이 그의 몸통과 머리를 잘라 냄비에 부글부글 삶았다고 한다. 시체를(p. 122) 균등하게 나누기 위해서였다.
원래 교회나 수도원은 성유물을 바탕으로 성립된 것이다. 성 O0 교회, 성 OO 수도원이라는 이름은 모두 그 성인의 유물을 소유하고 있는 데서 비롯되었다. 그러므로 진짜 성유물을 구하기란 쉽지 않다. 아무리 시체를 잘게 토막낸다 해도 그 수는 한정되어 있게 마련이다. 성유물 붐은 점차 일반 대중들에게까지 확산되었다. 하지만 이제 성유 물을 구하려면 그리스도교의 성지인 예루살렘까지 직접 찾아갈 수밖에 없었다. 마침 예루살렘에서는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박힌 골고다 언덕과 그 시신을 매장한 동굴이 발견되었다. 그리스도가 부활했다는 장소에 교회도 세워졌다. 그러자 성지순례 같은 여행 코스가 만들어져 유럽 각지에서 관광객들이 몰려들었다. 관광객들은 그리스도가 갇혀 있던 감옥이나 최후의 만찬이 행해졌던 집을 돌아보고, 성지의 흙으로 만들었다는 요상한 선물을 사들고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돌아갔다고 한다.
'성유물 붐'과 '예루살렘 순례 붐'이 절정에 달했을 즈음, 십자군 전쟁이 시작되었다. 유럽에서는 대중들이 성유물을 차지하기 힘든 만큼, 성유물만 손에 넣을 수 있다면 기꺼이 전쟁터에 가겠다는 자들이 들끓었다. 상황이 여의치 않아 십자군 원정에 참가하지 못한 사람은 연고가 있는 십자군 병사에게 성유물을 부탁하기도 했다. 그리하여 십자군을 통해 동방에서 수많은 성유물이 유입되었다. 그리(p. 123)스도의 십자가 조각이라는 등, 그리스도가 땀을 닦은 수건이라는 둥, 최후의 만찬에 사용한 테이블 조각이라는 둥, 그 진위를 확인할 수 없는 물건들이 유럽 곳곳에서 등장했다. 사실 그리스도가 죽은 지 천 년이 넘었으니, 진짜 성유물이 그렇게 많이 남아 있을 리 만무하다. 하지만 당시 사람들은 동방에 진짜 성유물이 많이 남아 있으리라고 믿었다. 그 당시 콘스탄티노플의 상인들은 가짜 성유물을 만들어 십자군 병사에게 비싸게 팔아넘겼다고 한다(p. 124).
사후에 신이 되는 황제
로마제국에는 죽은 황제를 신으로 받드는 관습이 있었다. 그들은 죽은 황제를 위해 훌륭한 신전을 세우고 제사장과 신관까지 임명했다. 황제가 죽으면 원로원은 그 황제의 업적을 먼저 체크했다. 그리고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판단되면 국가의 신으로 제정했다. 원로원은 황제가 신으로 적당치 않다는 판정을 내리기도 하는데, 간혹 범죄자로 낙인찍히는 황제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황제가 생전에 이룬 업적은 모두 무효가 되어 모든 서류에서 황제의 이름이 말소된다. 실제로 그렇게 이름이 삭제된 황제의 비문이 지금까지 남아 있다. 황제를 신격화하던 기원전 1세기에는 장례식 때 황제가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목격했다는 증인까지 등장했다. 2세기가 되자 황제의 신격화(p. 129) 의식은 한층 더 화려해졌다. 황제가 죽으면 우선 일반적인 방법으로 매장한 뒤 황제와 닮은 밀랍인형을 만들어 상아 침대에 눕힌다. 그러면 엄숙한 장례행렬이 그 밀랍인형을 운반해 가서는 거대한 화장대에 올려놓는다. 기마병과 전차병이 그 주위를 행진하다가 마지막에 횃불로 화장대에 불을 붙인다. 어느 정도 불길이 커지면 화장대에서 독수리가 튀어나와 불꽃과 함께 하늘로 날아오른다. 장례식이 끝나면 축성(consecratio)이라는 문구와 함께 화장대와 독수리가 새겨진 기념 코인이 발행되었다. 보통 사람의 화장이라면 재와 함께 유골이 남을 테지만 밀랍인형은 불에 녹아버려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그것이야말로 황제가 지상에서 천상으로 올라가 신이 되었다는 확실 한 증거였던 셈이다. 유머감각이 뛰어난 베스파시아누스 황제는 임종할 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아아, 유감천만한 일이로다. 짐도 결국 신이 되는 건가....."(p. 130).
흡혈귀 전설의 진상
죽은 자가 환생하는 이야기라면 흡혈귀가 먼저 떠오른다. 그리고 흡혈귀의 대명사는 영화나 소설로 익숙해진 드라큘라 백작일 것이다. 싸늘한 기운이 감도는 짙은 안개로 뒤덮인 숲속. 언덕 위의 고성에 검은 망토를 걸치고 서 있는 섬뜩한 사내. 낮에는 어스름한 관 속에 누워 있지만 밤이 되면 묵직한 관 뚜껑을 열고 벌떡 일어나 사냥감을 찾아다닌다. 그는 박쥐로 변신해 하늘을 날기도 하고, 안개나 먼지가 되어 문이나 창문 틈새로 스며들기도 하며, 도마 뱀붙이처럼 절벽을 기어오르기도 한다. 그리고 사냥감을 발견하면 일단 무서운 기세로 상대를 제압한 뒤 늑대처럼 날카로운 어금니로 목을 문다. 그는 사람의 피를 흡수해 자신의 생명을 연장시킨다. 뿐만 아니라 점(p. 138)점더 젊어지기까지 한다. 흡혈귀가 크게 활동한 것은 18세기의 발간 지방이다. 트란실바니아 산맥으로 이어진 그 지방은 흡혈귀 전설의 본거지가 된 뒤로 갖가지 흡혈귀 출물사건이 일어났었다. 하지만 죽은 자가 밤마다 되살아나 피를 빨아먹 는다는 전설은 발칸 지방뿐만 아니라 러시아, 폴란드, 그리스, 터키,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스칸디나비아, 그리고 인도와 아라비아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퍼져 있다. 흡혈귀 전설이 그렇게 널리 퍼진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성급한 매장' 이다. 당시 유럽에서는 가사상태로 매장된 사람이 다(p. 139)시 살아나 묘지에서 기어나오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런 사람을 흡혈귀와 동일시한 것은 아닐까 싶다. 앞서 기술한 유럽의 흑사병도 그 원인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당시에는 아직 페스트 치료법이 발견되지 않았으므로 전염을 막으려면 환자를 격리하거나 매장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생매장을 당한 환자가 가까스로 땅 속에서 기어나와도 사람들에게 환영받기는커녕 두려움의 대상이 될 뿐이었다. 묘지에서 되살아난 사람은 필사적으로 관 뚜껑을 열고 나와, 수의를 걸친 섬뜩한 모습으로 달빛을 받으며 집으로 돌아간다. 며칠 동안 아무 것도 먹지 못해 볼은 홀쭉해져 있고 움푹 들어간 눈에서는 기이한 빛이 번득인다. 수염과 손톱도 길게 자라나 있다. 관 뚜껑을 열고 밖으로 기어 나오면서 여기저기에 상처를 입어 손과 얼굴에는 핏자국이 선연하다. 그런 모습으로 신음소리를 내며 밤길을 비틀비틀 걸어갔을 것이다. 그러니 길에서 우연히 '부활한 사자(死者)'를 만난 사람들이 두려움에 떨며 '환생한 흡혈귀' 로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으리라. 그래서 발칸 지방이나 동유럽에서는 시체가 되살아나지 못하도록 아예 목을 자르거나 화장하기도 했다. 독일의 바이에른 주에서는 일단 사람이 죽으면 시체를 '죽음의 움막'에 안치시켜 정말 죽었는지 확인한 뒤에 매장했다고 한다(p. 140).
사후에 대한 집착
사후세계를 믿었던 고대인들은 죽은 자가 되살아나 자신들의 생활을 위협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가능한 한 멀리 떨어진 곳에 매장하려 했다. 12표법(로마의 가장 오래된 성문법)에서는 도시 안에 시체를 매장하는 것을 금하고 있다. 로마의 아피아가도처럼 도로변에서 고대의 묘가 많이 발견되는 것은 그 때문이다. 하지만 그리스도교가 탄생하면서 성인, 즉 순교자 곁에 매장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당시에 사람들은 묘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마지막 심판의 날에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순교자 곁에 매장되어 마지막 심판의 날까지 영혼과 육신을 잘 보존하고 싶어했던 것이다(p. 158).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성스러운 12사도 교회의 입구에 매장될 수 있도록 교회로부터 허가를 받아냈다. 이를 계기로 일반인들도 앞다투어 교회 안에 매장되려 했다. 그때부터 귀족이나 성직자나 부자들은 교회에 매장 되는 것을 당연한 권리로 생각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들은 점차 교회 입구 쪽에 만족하지 못하고 안쪽에 매장되기를 원했다. 다급해진 교회는 원래대로 되돌리려 했지만 돌이킬 수 없었다. 교회 안에 시체가 넘치면서 위생상의 문제가 발생하자 교회측은 주교와 수도원장과 1등급 평신도만이 교회 안에 매장될 수 있다는 내용을 담은 포고문을 발표했다. 1등급에 대한 기준은 대개 교회에 기부한 액수로 좌우되었다. 사람들은 교회에 기부한 거액의 돈은 자신의 시신이 교회에 매장되어 여러 사람들에게 오래 기억되고 소중하게 받들어지기 위한 대가라고 생각했다. 좀더 부유한 사람은 기부금으로 교회 안에 예배당을 짓기도 했다. 성직자들은 정기적으로 그 예배당에서 기부자의 영혼을 위해 기도하고 미사를 올렸다. 교회 안에 매장되기 어려운 사람들은 교회의 묘지에라도 매장되고 싶어했다. 그곳도 죽은 자의 사회적 지위에 따라 자리가 정해졌다. 가장 인기있는 자리는 건물 동쪽에 위치한 제단의 벽에서 가까운 곳이었다. 마지막 심판의 날에 가장 먼저 해가 뜨는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에(p. 160)반해 북쪽이나 구석진 곳은 악마의 영역으로 여겨져 죽은 태아나 사생아, 자살자 등이 묻혔다. 19세기에 프랑스 브르타뉴에는 자살자 전용 묘지가 있었는데, 자살자의 관은 출입구가 없는 벽 아래로 내던져졌다고 한다. 그런 불명예스러운 일을 당하지 않으려고 자살자의 가족들은 어떻게든 속죄하고 사면을 받으려고 했다. 중세의 어느 파문당한 수도승은 납으로 된 관에 안치되어 성에 맡겨졌는데, 그가 묘지에 매장될 권리를 얻기까지 무려 80년이나 걸렸다고 한다(p. 161).
화장
일반적으로 시체를 처리하는 방법에는 매장과 화장이 있다. 이미 알려진 바와 같이 유럽에서는 오래 전부터 주로 매장을 했는데, 사후에도 사람들에게 오래도록 기억되고 싶은 마음의 표현일 것이다. 그에 반해 오늘날 영국에서는 시신을 완전히 소멸시키는 화장을 선호하고 있다. 시신이 추하게 부패되는 것을 꺼리기 때문이다. 고대 그리스는 기원전 10세기경에 매장에서 화장으로 바꾸었다. 먼 전쟁터에서 죽은 병사들의 시신을 화장해 재로 만들면 고향으로 돌려보내기 용이했기 때문이다. 고대 로마에서도 2세기경까지는 귀족들 사이에서 화장이 일반적이었다. 더 나아가 매장과 화장을 혼합한 형태도 있었다. 죽은 자의 손가락을 잘라 매장하고 나머지 부분은 화장하는 식이었다(p. 164). 화장하고 남은 재는 납골단지에 넣어 콜롬바리움(고대 로마의 지하 납골당)에 안치했다. 그리스도 교도는 화장을 사교의 풍습이라며 기피했다. 그 때문에 유럽에 그리스도교가 보급되면서 매장이 압도적으로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특히 카를루스 대제는 789년에 화장을 행한 자는 사형에 처한다는 칙령까지 내렸다. 하지만 19세기경부터 묘지의 과밀화와 위생상의 문제로 다시 화장이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화장을 주장한 빅토리아 여왕의 외과의사 톰프슨은 1874년에 뜻이 맞는 사람들과 함께 잉글랜드 화장협회를 결성했다. 그들은 정부와 지역주민의 맹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1878년에 브룩우드 묘지 근처에 최초의 화장터를 짓고 화로를 설치했다. 하지만 내무장관의 허가를 받지 못해 화로는 무용지물이 되었다. 그런데 1883년에 웨일스의 한 성직자가 죽은 자신의 아이를 화장한 사건이 발생했다. 아이를 등유 나무통에 넣고 장작에 불을 붙인 것이다. 그는 주민들의 신고로 경찰에 체포되었다가 곧바로 방면되었다. 그로부터 2년 뒤인 1885년 3월에 비로소 공식적으로 화장장이 가동되었다. 처음 화장된 이는 기관지 폐렴과 천식으로 사망한 일흔한 살의 여성이었다고 한다(p. 165).
유언장
예전에는 유언도 상당히 중요한 의식이었다. 유언은 일종의 성스러운 의식으로서 그 의식을 치르지 않으면 파문당하기도 했다. 또한 유언장을 남기지 않고 죽은 자는 교회 묘지에도 매장될 수 없었다. 유언장을 작성하고 보관하는 것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공증인과 주임사제가 담당했다. 유언장의 내용 중 가장 중요한 항목은 신앙을 위한 기부와 유산 분배 였다. 교회나 자선단체에 기부하는 것은 현세의 재산을 천국과 연결시키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이른바 천국으로 가는 패스포트인 셈이다. 요컨대 생전에 어떤 비열한 방법으로 돈을 모았든 임종 때 그것을 교회나 자선단체에 기부하면 모든 죄를 용서받았던 것이다. 중세 사람들은 지옥이 존재한다고 믿고 있었기에 병원이나 가난한 자,(p. 169) 자선단체 등에 거액을 기부했다. 또한 교회에 거액을 기부하면서 영혼의 평안을 위한 미사를 청하기도 했다. 유언장은 대부분 그런 내용들로 체워졌다. 그것이 14세기의 귀족들을 경제적으로 궁핍하게 만든 직접적인 원인이라는 주장도 있다. 그런데 아무리 꼼꼼히 유언장을 작성했더라도 환자 입장에서는 자신의 유언이 제대로 지켜질지, 성직자들이 의무를 제대로 수행할지 불안해지게 마련이다. 그래서 동판에 자신의 이름과 지위, 생년월일, 심지어는 미사의 종류와 횟수까지 새겨넣어 교회에 맡기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기부와 더불어 중요했던 것은 사후의 영혼을 달래주는 미사였다. 그 중에 는 이같은 유언장도 전해지고 있다. "그녀가 죽음의 고통에 빠져들면 가르멜 수도회의 신부가 30회,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의 신부가 30회,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수도사가 30회, 도미니크 수도회의 수도사가 30회 미사를 치러줄 것." 하지만 18세기경부터 유언장의 내용이 크게 바뀌었다. 자선단체에 기부하거나 미사를 위탁하는 내용은 거의 사라졌고, 대부분 재산분배에 관 한 내용들로 채워졌다. 계몽주의의 확산으로 종교에 무관심해졌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머리맡에 모인 가족에게 직접 사랑과 신앙심을 전하게 되면서 유언장에 대한 필요성이 사라졌다는 주장도 있다(p. 170).
자살 클럽
파리, 런던, 빈의 자살 클럽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걸쳐 파리, 런던, 빈 등지에 '자살 클럽' 이 등장했다. 자살하고 싶은데 방법을 모르겠다거나 혹은 마음을 결정하기 어려워하는 회원들의 자살을 도와주는 클럽이다. 1831년 5월 17일자 신문에 슈워츠라는 여성이 경찰에 한 자살 클럽의 실태를 폭로한 기사가 실리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 클럽은 일요일 밤이면 멤버 전원이 건강이 좋지 않은 회원의 집에 모였다. 그리고 4시간 동안 그 사람이 회복되기를 기원하며 기도한다. 그래도 회복될 기미가 보이지 않으면 그 사람의 자살이 결정된다. 지난 일요일에는 슈워(p. 203)츠라는 여성의 오빠 집에 멤버 전원이 모였다. 오빠가 중병에 걸려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기도해도 상태가 호전되지 않자 그녀의 오빠는 이튿날 권총으로 자살했다. 이같은 자살사건이 스무 건쯤 일어난 뒤에야 그 클럽은 경찰에 의해 해산되었다.
헝가리 청년의 자살 사건
1930년 유고슬라비아의 사라예보 경찰이 한 자살 클럽을 적발했다. 그 클럽에서는 자살을 희망하는 회원들이 제비뽑기로 자살자를 지명했다. 밤마다 50명쯤 되는 자살 희망자가 모여 제비뽑기를 했다. 52장의 카드 속에 해골이 그려진 카드를 집어넣고, 그것을 뽑은 회원이 그날 자살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 클럽의 회원이었던 헝가리 청년은 한 여성과 사랑에 빠져 약혼했 다. 말하자면 자살할 상황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는 탈퇴하겠다고 했지만 클럽에서는 조건을 달았다. 탈퇴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바카라 게임을 해서 만약 해골을 뽑으면 자살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청년의 심정이 어땠을까. 어쨌든 그날이 되어 청년은 자신이 받은 카드 두 장을 천천히(p. 204) 뒤집었다. 한 장은 사랑의 성취를 나타내는 하트 에이스였고, 다른 한 장은..., , 해골이었다. 청년은 그 자리에서 말없이 권총을 집어들어 머리에 방아쇠를 당겼다. 그러자 슬픔에 잠긴 그의 연인이 그 클럽을 경찰에 신고했던 것이다(p. 205).
사티 풍습
인도에는 19세기 초까지 사티라는 끔찍한 풍습이 존재했다. 남편이 사망하면 아내도 장작불에 몸을 던져 남편을 뒤따르는 순장제도다. 1829년 영국에 의해 겨우 금지되었지만, 지금도 곳곳에서 그 흔적이 발견되고 있다. 그 풍습을 전해주는 비석이 인도 전역에 퍼져 있는데, 가장 오래된 비석에는 서기 510년이라고 적혀 있다. 사티 풍습은 주로 갠지스 강 유역과 편잡 지방, 남인도에서 전해지고 있었다. 산 제물로 희생되는 여성은 한 번에 한두 명이 보통이지만, 1780년에 조드푸르의 영주가 죽었을 때는 64명의 여성이, 남인도의 영주가 죽었을 때는 만 천 명의 여성이 순장했다고 한다. 그 방법도 무척 다양하다. 남편의 시신에 묶여 장작 위에 올려진 아내(p. 211)도 있고, 남편의 시신을 무릎에 올려놓고 스스로 불을 붙인 아내도 있다. 이때 아내가 고통스럽게 신음하는 것을 불길하게 여겨 그곳에 모인 군중들은 그 신음소리를 듣지 않으려고 큰 소리로 불경을 외워댄다. 때로는 멀리 떠난 남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아내가 스스로 장작불에 뛰어들기도 했는데, 나중에 남편이 무사히 돌아왔다는 어이없는 일도 벌어졌다. 하지만 그렇게 순종적인 아내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당연한 일이지만 아무리 설득해도 끝내 거부하는 아내도 있었다. 1796년 캘커타 근교에서 있었던 일이다. 한 아내가 사티 풍습에 따라 장작 위에 묶여 있다가 어두운 밤이 되자 밧줄을 풀고 도망쳤다. 당황한 가족들이 주변을 샅샅이 뒤져 마침내 그녀를 찾아냈다. 그녀가 사티 풍습을 따르지 않으면 일가의 명예가 실추되기 때문에 어떻게든 그녀를 찾아내야만 했던 것이다. 아들은 어머니에게 장작 위로 돌아가든지 익사하든지 목을 매든지 하라고 했다. 그녀는 아들에게 살려달라고 애원했지만 아들은 다른 식구들과 함께 그녀, 즉 자신의 어머니의 손발을 묶어 장작불에 던져 버렸다. 간혹 저항이 너무 심한 경우에는 다량의 마약을 먹인 뒤 가사상태에서 불길 속에 던지기도 했다. 그런 사티 풍습이 오래도록 이어진 것은 어머니가 죽으면 자식의 경제적 부담이 줄어든다는 실질적인 이유 때문이었(p. 212)다. 하지만 표면적으로는 남편이 없는 세상에서 비참하게 사느니 그 뒤를 따르는 편이 행복하기 때문이라느니, 남편이 내세에서도 반려자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라느니 하는 그럴듯한 이유를 내세우고 있다. 1829년에 마침내 인도를 점령한 영국은 사티 풍습을 용납할 수 없는 살인행위로 규정해서 법률로 금지시켰다(p. 213).
"슬픈 소식입니다. 장군님이 차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전쟁이 끝난 뒤 운전사의 고백에 따르면, 롬멜을 태운 차는 집에서 수 백 미터 떨어진 곳에 멈추었다. 동행한 사람들은 그를 남겨두고 차에서 내렸다. 몇 분 뒤에 다시 차로 돌아가보니, 독약을 마신 롬멜이 좌석에 쓰러져 있었다고 한다. 나중에 병원에서 남편의 시신을 본 부인은 이렇게 말했다. "남편은 마치 누군가를 멸시하는 듯한 표정이었습니다. 생전에는 한 번도 그런 표정을 본 적이 없습니다." 사실은 암살음모자들이 고문받을 때 롬멜의 이름을 거론했던 것이다. 그들은 히틀러를 암살하고 롬멜 장군을 대통령으로 옹립할 계획이었다(p. 260). 영웅적인 군인인 데다 인간성도 고결했던 롬멜은 패배한 독일을 구원할 구세주로 여겨질 만큼 절대적인 신뢰를 얻고 있었다. 전부터 롬멜 장군의 인기를 시기하던 히틀러는 그의 이름이 거론되자 크게 격분했다. 하지만 그를 처형시키면 사람들의 반감을 살 우려가 있었으므로 교묘한 방법을 생각해냈다. 그에게 자살을 강요하고, 공식적으로는 전쟁터에서 입은 머리 부상으로 사망했다고 발표했던 것이다. 장례식은 성대하게 치러졌다. 히틀러는 전 국민에게 상복을 입으라고 명했고, 롬멜 부인에게는 장군의 서거에 깊은 애도의 뜻을 표한다는 전보를 보냈다. 군악대가 연주하는 바그너의 〈신들의 황혼〉이 울려퍼지는 가운데, 롬멜 장군의 시신은 포차에 실려 화장터로 향했다. 그의 시신을 화장하기로 한 것은 훗날 시신이 발굴되어도 음독자살한 증거가 남지 않기 때문이었다. 나치스 독일이 붕괴한 것은 그로부터 불과 반 년 뒤의 일이다(p. 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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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3-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