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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토크383】 전 법관의 ‘왜 책을 읽어야 하는가?’
    나의 일상을 풍요롭게 채우는 건 어떤 의미인가, 다른 사람의 삶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가, 사람과 사회는 바뀔 수 있는가. 자작나무에서 지리산으로, 도스토옙스키에서 몽테스키외로, 일상에서 재판까지. 호의는 사람을, 세상을 어떻게 바꾸는가. 받은 것을 사회에 되돌려주라던 김장하 선생과의 추억, 법을 몰라 손해 보는 이들을 헤아리는 마음, ‘자살’을 시도했던 재소자가 ‘살자’는 다짐을 하게 만든 선물, 사랑하는 이를 그리워하며 속절없이 흘리는 눈물, 그리고 건강한 법원과 사회를 향한 진심 어린 조언…교보문고 계엄을 도모했던 윤석열을 단죄한 문형배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이 쓴 책으로 가볍게 읽을만하다. 착한 사람을 위한 법 2001. 4. 22. 법 없이 살 사람 착한 사람을 일컬어 '법 없이 살 사람'이라고들 한다. 법의 강제 없이도 타인에게 폐를 끼치지 않을 사람이란 뜻이리라. 과연 착한 사람에게 법은 필요 없는 것일까? 법 없이 살 수 없는 사람 나는 법이 어떠하다고 정의할 만큼 경력도 풍부하지도 않고 타고난 재주도 없지만, 1983년 법학을 전공한 이래 지금까지 18년을 법과 함께 살아온 경험에 비추어 (그런 점에서 나는 법 없이 살 수 없는 사람이다) 착한 사람일수록 법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p. 19). 종종 초등학교 동창 모임에 나가곤 하는데, 거기서 늘 하는 말이 있다. "사건이 터지고 나서 나에게 힘써달라고 전화해봐야 아무 소용 없다. 사건이 터지기 전에 나에게 법을 물어보라." 도대체, 전 재산과 다름없는 300만 원을 전세금으로 걸면서 그 집이 경매 중인 사실도 확인하지 않고 계약하는 사람을 누가 구제해줄 수 있겠는가? 그런 사람들은 대개 사건이 터지고 난 뒤에야, 집주인을 사기죄로 고소했으니 수사 기관에 힘 좀 써서 집주인을 즉시 구속시켜 달라고 법조인에게 전화를 한다. 법에는 두 가지 기능이 있다. 하나는 보장적 기능이다. 일정한 행위를 금지하고 거기에 저촉되지 않으면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게 해주는 측면이다. 여기서 '법 없이 살 사람'이 빛을 발한다. 다른 하나는 보호적 기능이다. 그러나 법의 이러한 보호적 기능도 경매 절차에서 배당 요구를 하는 임차인이나 노동자에게만 위력을 발휘한다는 사실에 유의하여야 한다. 여기서 '법 없이 살 사람'은 초라하기만 하다. 착한 사람부터 법을 알자 판사로서 사건을 처리하다 보면 '착한 사람은 법을 모르(p. 20)고, 법을 아는 사람은 착하지 않은 경우'를 종종 본다. 그런 사건일수록 해결이 어렵고, 착한 사람을 보호하고자 궁리를 해보나 한계가 있게 마련이다. 착한 사람에게 적용되는 법 따로 있고 착하지 않은 사람에게 적용되는 법 따로 있을 수는 없으니까. 그렇다면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하여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법을 아는 사람에게 착하기를 요구할 것 인가? 불가능은 아니나 어려운 과정을 거쳐야 할 것이다. 남는 방법은 착한 사람이 법을 아는 것이다. 그 길만이 법이 나쁜 사람을 지켜주는 도구 역할을 하지 못하게 하는 지름길이다(p. 21). 형사 재판 잘 받는 방법들 중 2006. 12. 19. 진술 거부권 행사 자기에게 불이익한 사실에 대하여 진술을 거부하는 것은 헌법 및 형사 소송법에서 보장된 피고인 및 피의자의 권리입니다. 따라서 법정에서 판사로부터 불이익한 사항에 대하여 질문을 받을 때 진술을 거부하면 되겠습니다. 괘씸죄가 걱정된다면 기억이 나지 않는다거나 잘 모르겠다고 대답하면 되겠습니다. 이것이 모순되거나 불합리한 답변을 하는 것보다 유리합니다. 답변 방식 법정에서 판사의 질문에 대하여 답변을 할 때는 결론을(p. 45) 먼저 말하고 이유를 나중에 설명하는 것이 효과적인 경우가 많습니다. 판사는 질문을 통하여 사건의 윤곽을 파악 하려고 하므로, 판사에게 결론을 먼저 말함으로써 판사가 설명이 더 필요한 부분인가를 쉽게 판단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좋습니다. 판사는 여러 각도에서 사건을 살피기 위하여 다양한 질문을 하는 것이므로, 설령 질문이 자신에게 불리한 내용 일지라도, 판사가 상대방의 편을 든다고 섣불리 생각하지 말고 정중하게 답변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한 과정을 통하여 판사는 피고인의 진심을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p. 46). 민사 재판 잘 받는 법 2007. 5. 17. 오늘 재판을 하면서 느낀 점을 토대로 민사 재판 잘 받는 방법을 적어보았습니다. 변호사를 선임하는 것이 유리합니다 소송을 하려면 어려운 일이 많으므로 형편이 허락한다면 변호사를 선임하는 것이 좋습니다. 변호사를 선임하였다고 해서 변호사에게 모든 것을 맡길 것이 아니라 수시로 소송 진행 정도를 확인하고 대응 방안을 함께 의논하는 것이 중요합니다(p. 61). 준비 서면을 간단명료하게 작성하는 것이 좋습니다. 변호사를 선임하지 못할 경우 법무사의 도움을 받거나 본인이 직접 준비 서면을 작성해야 할 터인데, 이때 주의할 점은 다음과 같습니다. 준비 서면이라는 것은 당사자의 주장에 불과하므로 아무리 유리한 내용을 적어놓더라도 증거가 없으면 인정받기가 어려운 반면, 불리한 내용은 별도의 증거가 없더라도 본인에게 불리하게 작용합니다. 따라서 준비 서면은 간단하게 작성하는 것이 좋습니다. 증거가 뒷받침되는 내용일 경우 명료하게 주장을 펼치는 것이 좋습니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준비 서면에 상대방을 비난하는 내용을 적을 경우 이익이 없을 뿐만 아니라 때로는 해롭다는 것입니다. 재판이라는 것이 당사자의 도덕성에 대한 심판이 아니라는 점에서 그렇고, 뚜렷한 증거 없이 상대 방을 비난할 때 판사에게 좋은 인상을 주기 어렵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준비 서면에 똑같은 내용을 되풀이하여 적어내는 것도 피해야 합니다. 재판부는 많은 사건을 처리하고 있으므로 그들의 노고를 덜어주는 것도 좋은 인상을 심어주는 방법이 될 수 있습니다(p. 62). 소송의 승패는 증거에 달려 있습니다 민사 소송에서 이기고 지는 것은 증거가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따라서 흥분할 필요 없이 차분하게 증거를 수집하여 제출하는 사람이 이길 수밖에 없습니다. 증거로는 애초 사건이 있었을 때 작성된 서류, 특히 상대방이 서명 또는 날인한 서류가 가장 효력이 강하고, 그 다음으로 제3자가 작성한 서류가 효력이 강합니다. 증인의 증언은 상황에 따라 다릅니다. 법정에서는 결론부터 먼저 이야기하는 것이 좋습니다 아직도 법정에서는 많은 사건을 처리하는 실정이므로 법정에서 판사로부터 질문을 받았을 때는 결론을 먼저 이야기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다음에 그 이유를 간단하게 설명하는 것이 좋습니다. 조정 또는 화해를 권유받았을 때는 존중하는 것이 좋습니다 재판을 하다 보면 어느 당사자의 주장이, 설득력은 있으나 증거로 뒷받침 되지 않는 경우가 제법 있습니다. 법적 관점으로만 해결할 경우 어느 당사자에게 더 가혹하기도(p. 63)합니다. 이길 승산이 있어 보이나 시간과 비용이 상당히 많이 드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럴 때 법원은 당사자에게 조정 또는 화해를 권고하는 데, 긍정적으로 검토해보는 것이 좋습니다. 특히 조정 또는 화해 절차에서는 집행에 관한 내용을 반영할 수도 있으므로 이러한 점에서도 조정 또는 화해의 효용은 높습니다. 증인 신문을 할 때는 불쾌한 감정을 드러내기보다는 허점을 짚어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법정에 출석한 증인을 상대로 질문을 할 경우 "거짓말쟁이다" "양심도 없느냐"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아무런 도움이 안 됩니다. 차분하게 증언의 허점을 짚어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려면 상대방이 질문하는 내용을 (미리 받을 수 있습니다) 검토하여 허점을 정리했다가 법정에서 질문 하는 것이 좋습니다. 바람 턱없이 부족한 내용일 것입니다. 이것저것 물어보고 소송을 잘해서 이길 사람이 이기는 재판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p. 64). 문제가 터지고 나서 소송을 잘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 은 문제가 터지기 전 검토를 충분히 하는 것입니다. 몇 천 만 원이 오고가는 계약을 체결할 때 변호사나 법을 잘 아는 사람에게 비용을 들여서라도 상담을 받아보는 것이 길게 볼 때 비용이 더 적게 듭니다(p. 65). 책을 읽는 이유 세 가지 2010. 2. 16. 책을 많이 읽는 이유가 뭐냐는 질문을 받는다. 무지를 극복하기 위해서다 지방에서 고등학교를 다닐 때까지 고전을 읽은 적이 없었다. 서울에 있는 대학교에 들어가 보니 문화 충격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사투리는 말을 안 하는 것으로 감출 수 있었지만 무지는 감출 방법이 없었다. '장 발장'이 《레미제라블》의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그때부터 닥치는 대로 읽었다(p. 108). 무경험을 극복하기 위해서다 판사가 되고 보니 사건을 이해하기엔 내 경험이 너무 좁고 얕다는 생각이 자주 들었다. 도대체 계약서도 작성하지 않고 거액의 거래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잡히면 처벌받을 게 뻔한 일을 왜 되풀이하는지, 궁금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래서 경험을 늘리려고 해보니 이 또한 걸리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당장 법관 윤리가 문제였다. 그래서 생각해본 것이 두 가지다. 지금은 언론사 사장이 된 어떤 분이 사법연수생이었던 나에게, 법조인이 되면 초등학교 동창생과 꾸준히 만나라고 당부했던 기억이 떠올라 초등학교 동창생을 만나기로 결심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18년 동안 1년에 몇 회는 초등학교 동창생을 (때로는 부부 동반으로) 만났으니 어느 정도는 실천한 셈이다. 두 번째가 책을 읽는 것이었다. 장르를 구분하지 말고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읽어보자 하였던 결심이 여기까지 나를 데려왔다. 무소신을 극복하기 위해서다 어릴 때부터 내성적이었다. 남녀 공학 중학교 시절 소풍(p. 109)을 가서 선생님의 권유에 노래를 불렀는데 가사를 까먹어 끝을 맺지 못할 정도로. 그때 불렀던 노래가 남진의 〈님과 함께〉였다. 고등학교 때는 교복이 중고라서 반장을 하지 못했다. 대학교 가서는 사투리 때문에 남 앞에 나서지 못했다. 이런저런 이유로 무슨 결정을 하려면 무척 어려웠다. 결정을 하고 나면 곧 후회를 하게 되고. 어느 날, 내성적인 이유가 소신이 없기 때문은 아닐까 생각했다. 군대에서 정훈장교를 하게 되었고 정훈장교 하는 일이 장병 교육이다 보니 남 앞에 서는 것에 대한 두려움도 어느 정도 해소된 뒤라서 그런 결론을 더욱 쉽게 내릴 수 있었다. 앞서간 사람들의 생각을 알고 그들의 생각과 내 생각을 서로 맞추어보는 과정을 통해 생각이 단단해져 소신을 갖출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사회 비판적인 내용을 포함해 많은 책을 읽게 되었다. 사족 "그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려면 그 사람이 누구와 만나고 무슨 책을 읽는지 말해달라." 책에서 읽은 기억이 난다(p. 110). 혼돈의 시기에 그나마 생존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 친구와 책 덕분이라 생각하니 이 글을 쓰는 감회가 남다르다. 모든 분들에게 책을 한번 읽어보시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다(p. 111). 책을 고르는 기준 2010.6.26. 책을 어떻게 고르냐는 질문을 종종 받는다. 저자를 보고 고른다 어떤 책을 읽고 감동을 받으면 그 저자가 쓴 책은 눈에 띄는 대로 사서 읽는 버릇이 있다. 예를 들면 고 장영희 교수의 《내 생애 단 한 번》을 읽고 《축복》 《살아온 기적 살아 갈 기적》 《문학의 숲을 거닐다》를 읽는 식이다. 여기에 해당하는 저자는 다음과 같다. 신영복 교수, 정 민 교수, 유시민 전 장관, 소설가 김 훈, 오지 탐험가 한비야,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 《열하일기》 전문가 고미숙 박사(p. 124). 주제어를 보고 고른다 제목이나 문장을 검색하여 관심 있는 주제어가 들어간 책을 고른다. 요즘 즐겨 찾는 주제어는 다음과 같다. 정의, 소통, 성찰, 역사, 철학, 인생, 여행, 행복. 이런 기준으로 고른 책은 다음과 같다. 《정의란 무엇인가》 《서양철학사》 《인도 여행》 《행복의 정복》 《무지개 원리》 《인생이란 무엇인가》 등등. 책 선택에 실패한 적은? 이런 기준으로 책을 골라 읽으면서 후회할 때가 제법 있다. 그러나 산 책은 다 읽는다. 재미가 없거나 이해가 되지 않는 책에 대하여는 독후감을 쓰지 않음으로써 복수를 한다. 블로그에 올린 책은 이중으로 검증을 거쳤다고 보면 된다. 지금껏 읽은 책은, 세어보지는 않았지만, 1천 권 정도 될 것 같다. 책을 고르는 장소는? 인터넷 서점에서 검색하여 고르는 경우가 많고 가끔 서점에 가서 고른다. 베스트셀러 항목과 새로 나온 책 항목을 많이 참조한다(p. 125). 블로그에 독후감을 쓰는 이유는? 독후감을 쓰다 보면 책 내용을 정리하는 효과가 있고, 글쓰기 훈련이 되며, 블로그에 저장해놓으면 다른 글을 쓸 때 인용하기 쉽기 때문이다. 나쁜 사람은 있어도 나쁜 책은 없다. 어떤 책에서도 스승 또는 반면교사를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여러분께 독서를 권한다. 책이 여러분을 끌어올려줄 것이다(p. 126). 왕후박나무 2011.4.1 남해군법원 다녀오는 길에 경남 남해군 창선면 왕후박 나무를 만났습니다. 500년 이상 되었다고 합니다. 둘레에는 동백나무가 꽃을 피우고 있었습니다. 후박나무는 녹나무과에 속합니다. 주로 방풍용으로 많이 심는다고 합니다. 남해군 창선면에 있는 왕후박나무는 천연기념물 제299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왕후박나무는 높이 솟구치지 않고 옆으로 퍼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람 부는 바닷가에서도 500년을 버틴 게 아닐까 생각해봤습니다. 그렇다면 이 나무는 알고 있는 것 같습니다. 자신을 낮추는 것이 자신을 높이는 가장 쉬운 방법이라는 것을 말입니다(p. 140). 조영남의 노래가 있죠. 〈겸손은 힘들어〉. 그렇죠. 겸손은 힘듭니다. 공자 이래 2천 년 동안 성현들은 겸손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겸손한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적습니다(p. 141). 조정에 임하는 자세 2013.4.28. 조정이란 조정은 법률 분쟁이 생겼을 때 판사의 판결이 아니라 당사자 간 타협을 통하여 분쟁을 해결하는 절차를 말한다. 실제로 미국에서는 법원에 접수된 사건 중 판결까지 가는 사건은 10퍼센트가 되지 않고 대개는 조정을 포함한 여러 가지 간이한 방법을 통하여 사건을 처리한다고 한다. 어떤 의미에서 조정은 이길 사람에게 양보를 요구하는 것이니 불합리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길 사람이라는 건 미리 정해진 것은 아니고 재판 절차를 통하여 증거를 대고 법리를 세워야 하고 그것으로 판사를 설득해야 하며 최종적으로 대법원까지 가봐야 아는 것이다(p. 188). 그리고 1천만 원을 받기 위하여 소송 비용으로 500만 원을 들여야 한다면, 700만 원을 받고 소송 비용을 100만 원 선에서 지출하는 것이 합리적일 수도 있다. 사건에 관하여 가장 절실한 이해관계자는 판사도 아니 고, 변호사도 아니며, 결국 당사자다. 사건을 주도적으로 해결해야 할 사람도 당사자일 수밖에 없으므로, 당사자의 주도권이 가장 잘 보장되는 조정 절차가 불합리하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조정에 임하는 자세 양보해야 한다. 조정은 당사자 간의 타협을 통하여 분쟁을 해결하는 것이고 대체로 당사자는 서로 이해관계가 상반되므로 양보를 해야 조정이 성공한다. 본인이 참석해야 한다. 변호사에게 소송을 위임한 경우라도 조정 절차에는 본인이 참석하는 것이 좋다. 판사의 설명을 들을 수 있고, 상대방의 입장을 직접 들을 수 있으며, 최종 결정을 내려야 하기 때문이다. 상생하는 방법도 있다. 본인에게 크게 불리하지 않으면서 상대방을 크게 배려하는 방법도 있다. 상대방이 특히 중요하게 생각하는 쟁점에 관하여 양보하더라도 본인에(p. 189)게 크게 불리하지 않은 경우도 있으므로, 상생하는 방법을 찾아본다. 집행 문제도 고려해야 한다. 소송을 하는 종국적 목적은 대체로 승소 판결을 받기 위함이 아니라 돈을 받아내기 위함이다. 법원에서 승소 판결을 받더라도 집행 절차에서 돈을 받아내는 비율은 생각보다 낮다. 조정 절차에서는 돈을 받아내는 방법도 협상 테이블에 올릴 수 있으므로 유리하다. 원고는 5천만 원을 고수하고 피고는 3천만 원을 고집할 경우 4천만 원 선에서 타협하는 것도 한 방법이지만 때로는 5천만 원으로 정하되 3개월 내에 3천만 원을 가져오면 나머지 2천만 원을 포기하는 방법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싸우는 것은 금물. 간혹 조정실에서 상대방과 말이나 몸으로 싸우는 사람이 있다. 사연이 있겠지만 판사 입장에서는 어리석은 행동이다. 자신의 문제를 효과적으로 풀 수 있는 자리를 어렵게 마련했는데 불만을 터트리는 자리로 만들어버리는 것은 불합리한 처사다. 그 사건이 해결 되지 않을 경우 가장 손해를 보는 사람은 판사도 아니요 변호사도 아니요 바로 당사자이기 때문이다. 판사의 설명에 귀 기울인다. 법원이 조정 절차를 주도하(p. 190)는 경우 판사로부터 사건 전반에 관한 설명을 듣게 된다. 판사는 내가 불리한 점, 내가 유리한 점을 나누어 설명할 것이다. 잘 들으면 판사가 생각하는 바를 엿볼 수 있다. 특히 2심이라면 사건 처리 방향이 대부분 결정되었다고 보면 된다. 민사 사건의 경우 대법원에 상고를 해서 2심 판결이 깨지는 비율이 10퍼센트가 안 된다는 점, 사실 인정은 원칙적으로 2심에서 하게 되어 있는 점을 고려할 때, 2심 재판부의 결론은 존중해야 한다. 그 바탕 위에서 내 입장을 최대한 반영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를 고민하는 것이 좋다. 마무리(롯데자이언츠의 마무리는?) 집안에 송사가 있으면 마음이 불편하다. 적당한 선에서 털고 나오는 것도 마음의 평화를 찾는 좋은 방법이다. '조금 손해 본 것은 다른 일을 해서 보충하면 된다.' 이런 생각으로 조정에 임할 수는 없을까요?(p. 191). 재판 속의 문학 내가 현실에서 맡은 재판은 그렇게 감동적이지 않았다(p. 304).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문학이 재판에서 많은 것을 차용하지만 재판은 문학에서 차용하지 않고 순수함을 고수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본 적이 있다. 판사는 많은 경험을 해야 하지만 여러 사정으로 제한적인 경험을 할 수밖에 없다. 문학이 그 대안이 될 수 있다. 문학은 보편적 진실을 추구하는 것이고, 재판은 구체적 진실을 추구하는 것이며, 양자는 서로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판사들이 다 가난했던 경험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김훈의 《흑산》을 읽고 나면 가난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가령, 배고픔을 면하자면 오직 먹어야 하는데 많은 끼니 중에서도 지금 당장 먹는 밥만이 배를 채운다는 내용이 그렇다. "아침에 먹은 밥이 저녁의 허기를 달래줄 수 없으며, 오늘 먹는 밥이 내일의 요기가 될 수 없음은 사농공상과 금수축생이 다 마찬가지다." 내가 10년 전 처리한 사건 중 20대 청년이 공무집행 방해죄로 구속 기소된 사건이 있었다. 생모라고 밝힌 사람이 탄원서를 보냈다. 오래전에 헤어진 아들이 재판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며 자신이 책임지고 선도를 할 테니 선처를 바란다는 내용이었다(p. 305). 재판을 하며 방청객을 둘러보니 유난히 눈에 띄는 분이 있었다. 피고인석 옆에 앉아 대화를 하게 하였더니 피고인을 껴안으면서 "이제 괜찮아, 엄마가 있잖아"라고 말했다. 피고인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생모와 시선도 마주치지 못하였다. 생모를 만났으니 이제 마음을 잡지 않겠는가 생각하고 집행 유예 판결을 선고했고, 피고인에게 책을 선물하면서 그 책 한 쪽을 읽어주었다. 알프레드 디 수자의 시 〈사랑하라.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이다. 내가 10년 전에 처리한 사건 중에 피고인이 자살을 하려고 여관에 불을 질러 기소된 사건이 있었다. 다행히 불은 크게 번지지는 않았고 다친 사람도 없었다. 선고하는 당일 피고인에게 자살을 열 번 외치게 하였다. "자살자살자살자살.... 이렇게 열 번 하면 본인은 '자살' 이라고 말하지만 듣는 사람에게는 '살자'로 들립니다. 생각하기 나름입니다. 실패라고 다 나쁜 것은 아닙니다. 자살에 실패해서 살았지 않았습니까?" 그러고서 피고인에게 《살아 있는 동안 해야 할 49가지》란 책을 선물했다. 나는 이런 재판을 하게 된 배경 중 8할이 문학 덕분이라고 생각한다(p. 306).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는 이렇게 시작한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모습이 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모두 제 각각의 불행을 안고 있다." 어쩌면 좋은 문학과 좋은 재판은 그 모습이 모두 비슷할지 모른다. 철저한 조사를 바탕으로, 공동체의 보편적 가치를 질문할 때, 주제와 이야기가 딱 들어맞을 때 독자들은 감동한다. 판사들이여! 《유토피아》를 쓴 토마스 모어가 영국의 대법관이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작가들이여! 긴장하시라. 대한민국의 판사도 또 다른 '유토피아'를 쓸지 누가 알겠는가?(p. 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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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소개
    2026-04-16
  • 【북토크382】 죽음을 늘 준비하며 살자
    KBS 《아침마당》, 《강연100℃》 등에 출연해 전국의 시청자들에게 위로와 공감, 희망의 메시지를 전해준 호스피스 의사 김여환의 에세이 《내일은 못 볼지도 몰라요》. 극심한 암성 통증으로 고통 받는 환자들과 함께 지내면서 누구보다도 안타까운 마음으로 임종 선언을 했던 저자 김여환. 숨기려야 숨길 수 없는 삶의 마지막 순간을 꼼꼼히 기록한 이 책은, 삶이 완성되는 마지막 순간을 위해 더없이 소중한 오늘을 ‘있는 힘껏’ 아름답고 행복하게 살아내야 한다는 인생의 진리를 전하고 있다-교보문고. 이 책은 호스피스 의사가 수많은 죽음을 보고 삶과 죽음에 대해 느낀 것을 쓴 것이다. 많이 유익했는데 현재 절판됐다. 사람의 일생 중 가장 힘든 시기는 보증을 잘못서서 거액의 부도를 냈을 때나 남편이 바람을 펴서 이혼할까 말까 망설일 때가 아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인생의 반전 같은 일말의 빛조차 기대할 수 없는 시간들, 즉 죽음을 맞이하기 직전까지의 '짧은 삶'이다. 그 시기를 잘 보내야만 지금까지 살아온 세월을 온전한 나의 인생으로 만들 수 있다. 그래야만 남겨진 사람들의 인생도 편안해질 수 있다(p. 8). 그렇다. 나는 이 세상에 남들보다 조금 먼저 작별 인사를 건넨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이토록 자명한 삶의 진리를 힘겹게 깨달았다. 만약 우리에게 내일이 오지 않을 것임을 안다면, 오늘 우리의 삶은 결코 평범하지 않을 것이다. 또한 만약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과 내일 다시 못 볼지도 모른다는 것을 안다면, 한 번 더 사랑한다 말하고, 한 번 더 안아주어야 하며, 오늘 깃든 행복을 있는 힘을 다해 누려야 한다. 이렇게 수많은 '오늘의 삶'이 모일 때 삶의 아름다운 결과물은 비로소 완성 된다. 그러므로 "내일은 못 볼지도 몰라요."라는 말에 숨어 있는 참된 의미는 오지도 않은 내일에 대한 불안과 분노, 두려움과 슬픔에 오늘의 행복을 양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오늘 더 사랑하고, 오늘 더 행복해야만 한다(p. 10). "2012년 8월 21일 12시 42분, 신복연 할머니는 사망하셨습니다." 나는 할머니가 더 이상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니란 사실을 말했다. 그리고 통증 없이 편안히 좋은 곳으로 떠나셨다는 위로의 말도 빼놓지 않았다. 짤막한 사망 선언 뒤에는 언제나 그 마지막 순간을 지키고 있던 가족의 대성통곡으로 이어진다. 그런데 오늘은 조용했다(p. 22). 할머니의 둘째 딸이 낮은 목소리로 차분하게 말을 꺼냈다. "우리 엄마가 평소에 유언을 했어요. 내가 떠나면, 울지 말라고. 자식들이 우는 소리가 들리면 뒤 돌아보느라 떠나는 것이 힘드니, 울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어요." "아...하여간 대단하세요. 입원 내내 웃지 않으신 날이 없었는데, 그런 아름다운 유언까지 하신 줄은 몰랐어요. 제가 들어본 유언 중에 가장 훌륭한 유언인 것 같아요." "과장님, 그렇죠! 우리 엄마가 암에 걸렸다고 하니까, 동네 사람들이 이제 꽃 한 송이가 지는구나, 했다니까요." 곱게 아껴두었던 꽃분홍색 한복으로 갈아입고, 흰 양말까지 정갈하게 신은 신복연 할머니의 마지막 모습은 살아 있는 그 누구보다도 따뜻해 보였다(p. 23). 짧은 글 한 편을 쓸 때에도 마지막에 무슨 말을 쓸까를 생각하면서 쓰면 글의 흐름이 매끄러워지듯이, 인생도 자신의 마지막 순간을 생각하고 살다 보면 들쭉날쭉한 인생이 일관성 있게 변한다. 타인과의 소통도 중요하지만 그전에 자기 자신과 먼저 소통해야 한다. 자신의 마지막 순간과 소통하면 인생의 해답을 얻을 수 있다(p. 25). 자신과 만나려면 가장 낮은 곳으로 가야 한다. 그러므로 임종실은 부끄럽지만 가장 볼품없고 꾸밈없는 자신의 민낯이 있는 곳이었다. 그래서 나는 자신 있게 말한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만남은 바로 '나의 마지막'이라고(p. 26). "호호호, 난 아직 여기 입원할 단계는 아닌 걸요." "아직은 마약성 진통제를 쓸 만큼 아프지는 않아요." "며칠 전에도 산에 다녀올 만큼 괜찮았어요." 이렇게 말하면서 멀쩡하게 걸어 들어오는 말기 암 환자가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까? 나는 겉으로 보기에는 건강해 보이는 말기 암 환자들이 한두 달 뒤에는 누런 황달이 오거나 폐렴이 와서 황망히 떠나버린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남겨진 시간에 대해 불안해하거나 초조해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고 있는 그 짧은 시간에 환자에게 해 줄 수 있는 일에 집중한다. 칠순 잔치를 하든지, 마지막 콘서트를 하든지, 이혼한 뒤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아들을 찾아주는 일들 말이다. 그래도 나도 한 번쯤은 환자를 살려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모두가 죽는다고 포기했던 말기 암 환자가 완치되는 일이 우리 병동에서 일어나기를 기대했다. 환자들은 입원해서 퇴원(p. 45) 할 때까지 평균 27일을 살았다. 호스피스 경험이 쌓이면 쌓일수록 역시 기적이란 부질없는 비현실적인 희망이라는 것을 확신 하게 됐다. 일어날 수 없는 일을 가슴 저리게 갈구하기도 하고 신에게 떼를 쓰며 의지하기도 하는 것이 오히려 인간적이겠지만, 우리에게 남아 있는 시간이 별로 없다는 것이 훤히 보이는 나로서는 그렇게만 하다가 환자를 보낼 수는 없었다. 그런 애절한 생각을 할 시간이 있으면 조금밖에 남지 않은 삶에 집중해야 한다는 것이 오랜 경험을 통해 내린 슬픈 결론이었다. 사람이 좀 민민하고 삭막하게는 되었지만 현실적으로는 이것이 옳았다(p. 46). 말기 암 환자가 되면 환자와 가족은 육체와 정신적으로 이제까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상황과 맞닥뜨린다. 푸시시한 구차한 모습으로 마지막을 보낼 때쯤이면 원치 않았던 현재 시간이 살다 남은 찌꺼기 삶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약한 정신 때문이 아니라 몸이 약해지기 때문에 마음까지 통째로 흔들린다. 심지어 어떤 환자는 "잠자듯이 가는 그런 약 있잖아."라고 노골적으로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모든 말기 암 환자가 안락사를 원하는 것은 아니었다(p. 56). 비참한 마지막은 말기 암에 걸린 몸이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살다 남은 삶이라고 쓰러져버리는 마음이 만드는 것이다. 떠날 사람은 남아 있을 이를 위해 조금 남은 삶을 성실히 살아가고, 남아 있을 사람은 떠날 이가 세상에서 사랑받다가 가는구나 하는 느낌이 들도록 노력하면 서로 덜 힘들다. 처음과 마지막까지, 모두가 촘촘히 내 인생이기 때문이다(p. 58). 세상은 가벼움과 무거움이 서로 경계를 불분명하게 가른 채 섞여 있다. 어떤 부분은 내가 그보다 가볍고, 어떤 부분은 내가 그보다 무겁다. 그렇게 어우러져서 세상은 좀 더 좋게 변한다. 그러나 '죽음이 다가오는 것'과 같은 결정적인 순간이 다가오면 사람들은 가벼움과 무거움의 경계선을 남김없이 드러낸다. 고함을 지르고 입원실 바닥에 소변을 보는 한 할아버지 때문에 사흘 밤낮 동안 시달린 환자들이 하소연을 했다. 할아버지를 간병하던 할머니는 "환자가 병원에 자러 왔나요?"라며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그러면서 진정제도 못쓰게 하고 1인실로 가지도 않았다. 그런가 하면 뇌종양에 걸린 12살짜리 소녀는 과자를 들고 병실을 누비며 "아저씨, 빨리 나으세요."라고 하면서 환자들에게 나눠주었다. 한 신문 기자가 말기 폐암 환자에게 물었다(p. 67). "인생의 선배로서 우리에게 해주실 말씀이 없으신지요!" 후덕하게 생긴 환자는 가지고 있던 옷가지며 살림살이를 싹 정리할 정도로 죽음을 잘 받아들었다. 하지만 그는 기자의 질문에 대해 쓸쓸하게 대답했다. "저는....그런 것은 선배가 되고 싶진 않은데요." 그렇다. 죽음이란 일평생을 별 탈 없이 살다가 90살이 되어 마음 독하게 먹고 미리 준비해도 어려운 것이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맞닥뜨리는 죽음은 아무리 노력해도 익숙해지지 않는 법이다. 죽어가는 사람을 많이 돌본 의사로서 한 가지 분명히 말하고 싶은 것은, 어쩔 수 없이 먼저 떠나야 하는 사람들이 남은 사람들 걱정을 많이 했다는 것이다. 나 때문에 끼니를 거를까 봐, 나를 잃은 슬픔으로 행여 병이라도 생길까 봐, 경제적으로 힘들까 봐 등등.... 그들은 사소한 걱정을 몰래 했다. 남은 사람들은 그 마음을 알까? 임종실은 섞일 수 없는 삶과 죽음이 뒤엉켜 있고, 살아남은 이들이 비통함에 눈물을 흘리는 작은 방이다. 그러나 그곳을 거(p. 68)쳐 간 사람들은 한결같이 말한다. 존재란 그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죽어서도 사랑하는 이의 마음속에 영원히 살아 있는 것이라고(p. 69). 예전에 나는 보기조차 딱할 만큼 남을 부러워했다. 뚱뚱할 때는 날씬한 사람을, 늦게 시작한 의사 생활이 비참하다고 느껴질 때는 처음부터 순탄하게 직장 생활을 하는 동료를 얄밉도록 부러워했다. 누군가는 잘된 사람을 부러워하면서 인생의 꿈도 생기고 삶을 개척할 의지도 생긴다고 하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그 부러움이 오늘날의 나를 있게 한 계기는 되었을지라도 그 과정은 결코 행복하지 못했다. 이제 내가 진실로 부러워하는 사람은 돈이 많거나, 아이들이 좋은 대학에 입학했거나, 예쁘고 날씬하고 건강한 사람이 아니다. 그저 어떤 삶이 자신에게 다(p. 92)가오더라도 묵묵히 잘 받아들이고,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지 않으며, 자신의 삶을 그 자체로 당당하게 살아내는 사람이다. 우리는 저마다 지닌 인생의 향기가 따로 있다. 그러니까 이제는 그 누구도 부러워하지 말자. 인생의 마지막에는 행복했던 자신의 과거조차도 부러워하지 말아야 한다. 그 시간에는 그 시간에만 누릴 수 있는 나만의 행복이 따로 있는 것이다. 이렇게 마지막이 온 것도 견딜 수 없을 만큼 아쉬운데, 여러 가지 잣대로 부러워하면 병들어 있는 자신이 너무 불쌍하지 않은가. 부러워하지 말자, 그대여! 인생이 아파도 마지막까지 이 세상을 그 누구보다 당당하게 살아내야 한다(p. 93). 불행히도 호스피스에는 죽음을 편안하게 수용할 수 있는 묘약 따위는 없다. 그래도 사람들은 안고 갈 수밖에 없는 속사정을 들어주면 조금은 가벼워졌고, 끝까지 끈을 놓지 않고 가는(p. 108) 사람이 생각보다 많다는 평범한 사실에 평안을 찾아갔다. 대식 씨의 어머니처럼 때로는 버리는 것보다 안고 가는 것이 더 홀가분한 인생도 있다. 그러니까 결국 안고 가는 사람, 버리고 가는 사람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닌 셈이다(p. 109). 잘 죽어가기 위해 우리가 정말 배웠어야 할 것은 죽음의 5단계를 외우거나 혼자서 관 속에 들어가 보는 체험을 하는 것이(p. 112) 아니다. "저는요, 이미 죽음을 다 받아들였어요."라고 말하면서 의젓하게 지내다가 진짜 마지막이 다가오면 불안에 떠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죽음은 삶의 완성이라기보다는 결과물이다. 삶이란 누구에게나 신산스럽고, 일상은 상처와 갈등의 연속이다. 나에게 주어진 삶을 얼마만큼 잘 녹여내느냐에 따라서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있을 마지막 날은 달라진다(p. 113). 어쩌면 인생은 쓰고 싶은 대로가 아니라 저절로 쓰이는 소설책인지도 모른다. 때로는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지만 어떻게든 끝까지 살아내야 한다. 죽을 만큼 괴로워도 직접 해봐야 삶에 대한 사랑이 깊어진다. 사람들은 인생이 힘들어지면 앞으로 남은 여정이 얼마나 끔찍해질지 더 두려워한다. 남은 인생이 지금보다 더 불편해지더라도 초조해하거나 원통해하지 말자.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그대의 삶이 다른 누군가의 목숨을 구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으면 좋겠다. 자살이라는 '고의로 스스로를 죽이는 행위'를 생각할 만큼 견딜 수 없이 힘들다면 적극적으로 주변에 도움을 요청해야 한다. 아무 상관도 능력도 없는 사람에게조차 알려야 한다. 마음의 피눈물은 말하지 않으면 보이지 않고, 드러나지 않는 상처는 치유될 수 없다. 애써 고통을 삼키지 말자. 누구라도 도와줄 사(p. 120)람을 찾아다녀라. 자존심 따위 내세울 때가 아니다(p. 121). 치통이 아무리 심해도 한꺼번에 진통제를 다섯 알씩 먹지는 않는다. 통증을 잡으려다 사람을 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약국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타이레놀도 하루에 여섯 알을 초과하면 진통의 효과는 증가하지 않고 간에 부담만 준다. 이렇게 일반 진통제는 일반적으로 정해져 있는 용량을 초과하면 통증에 대한 효과보다는 약물에 대한 부작용이 심해지기 때문에 쓸 수 있는 용량의 한계가 있다. 이것을 약의 천장 효과(ceiling effect)라고 한다. 그런데 이런 천장 효과가 없는 약이 있다. 호스피스 병동에서 많이 쓰이는 마약성 진통제이다. 그것은 일반 진통제와 달리 많이 쓰면 쓸수록 통증이 잘 조절된다. 더군다나 날록손 (naloxone)이라는 해독제까지 있으니 '모르핀'이야말로 신이 세상을 떠날 때만은 아프지 말라고 인간에게 특별히 내려준 '마지막 선물'이다. 사망 원인 1위인 암은 사람이 떠날 무렵에 부쩍 커진다. 암(p. 129)덩어리가 커지면 정상 조직을 파괴하는 묵직한 암성 통증도 당연히 심해진다. 그래서 사람들은 너무 일찍부터 진통제를 쓰기 시작하면 통증이 가장 극심한 마지막 순간에는 정작 쓸 수 있는 약이 없을까 봐 전전긍긍한다. 모르핀을 최후의 약으로 넘겨 두었으면 하고 부탁까지 한다. 그러나 통증에 관한 한 모르핀은 쓰면 쓸수록 효과가 있는 약이다. 이러한 마약성 진통제의 비밀을 알려주면 누구나 "진짜 그런 약이 있나요?" 하고 물으며 신기해한다. 환자나 보호자는 어차피 살릴 수 없다면 고통 없이 떠날 수 있다는 확신만으로 가느다란 희망을 갖는다. 모르핀은 우리를 죽음의 공포보다 더 끔찍한 암성 통증에서 해방시켜주는 이로운 약제이다. 우리는 지금보다 좀 더 정확하게 모르핀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 아직도 말기 암 환자임에도 불구하고 환자, 보호자, 의료진의 모르핀에 대한 오해와 두려움으로 마약성 진통제를 거부하면서 의미 없는 통증에 시달리다가 마지막 순간을 맞이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나는 인생의 마지막 의사로서 당부한다. 언젠가 당신에게 그때가 오면 신이 내린 선물, 모르핀을 거절(p. 130)하지 말고 받아들이라고. 통증이 없으면 죽음의 맨 얼굴을 똑바로 응시할 수 있고, 고통 없는 죽음은 결코 폭력적이지 않을 것이다(p. 131). 내일 도사리고 있는 재앙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살아감 속에 죽어감의 흔적을 묻히는 것이다. 내일이라는 것이 그 누구에게도 완벽하게 보장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알면, 오늘 그대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무심코 거칠게 한 말이 마지막일 수도 있다는 것을 절대로 잊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오지도 않을 비겁한 내일을 위해 오늘의 행복을 너무 많이는 양보하지 말자(p. 163). 말기 암 환자가 되면 환자와 가족은 육체와 정신적으로 이제까지는 경험하지 못한 일을 경험하게 된다. 가족 간의 갈등이 있었다면, 분명히 그 갈등은 확대된다. 문제의 중심은 늘 '사랑과 돈'이다. 거기에 종교적인 문제가 곁들여지면 사태는 더욱 심각해진다(p. 174). 살다 보면 마음 내키지 않는 일을 해야 할 때가 있다. 하고 싶은 일만 해도 짧은 인생인데 굳이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면 큰 손해를 볼 것만 같다. 젊은 시절에는 내가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이 뭔지도 모를 때가 많다는 것을 기억하라. 그러나 매 순간 저마다 해야 할 일은 누구나 알고 있다. 해야 할 일을 하다 보면 진짜 하고 싶은 일이 훤히 보이고 그때 용기 내어 그 일을 하면 진정한 행복에 도달할 것이다. 인생은 생각보다 길기도, 또 속절없이 짧기도 하다. 그러기에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을 실수 없이 하려면 마음에 내키지 않더라도 '해야 하는 일'을 먼저 하면서 견뎌보는 것쯤은 각오해야 한다(p. 187). 웰다잉(well dying)은 삶의 완성이 아니라 삶의 결과물이다. 누구나 손쉽게 받을 수 있는 선물은 더군다나 아니다. 저마다 주어진 힘든 삶을 잘 살아내야만 누릴 수 있는 삶의 마지막 축 복인 것이다(p. 203). 죽음을 깊숙하게 연구하고 싶어서라든지 내 성격이 원래 우울해서 호스피스 의사가 된 건 아니다. 나는 호스피스 일을 해오는 동안 '죽음을 준비해야 하는 사람도 죽음에 이르기 직 전까지는 살아 있다'는 자명한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 누구도 아프지 않게 하루를 지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고 보면 나는 거창한 죽음의 여의사가 아니라 그저 생명의 에너지가 다 할 때까지 불편함 없이 살아갈 수 있게 해주는 의사로서 당연한 일을 하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이름이 주는 거부감 때문에 국내 암 환자의 마약성 진통제 사용률은 그리 높지 않다. 세계보건기구에 따르면, 국내 사용량은 모르핀으로 환산했을 때 환자 1인당 연간 45mg에 불과하다. 미국 693.44mg, 영국 334.52mg은 물론 세계 평균 58.00mg보다도 낮다. 통증을 효과적으로 다스릴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도 안 쓰는 것이다. 아직도 대한민국 사람들은 아프면서 죽어간다. 의사 입장에서 보면 죽음이 삶의 종착역인지 따위는 일단 환자의 통증을 덜어준다음에 생각할 일이다. 암 환자의 통증은 당사자가 아니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심하다. 출산의 고통이 10점 만점에 7~8점이라면 암 환자의 통증은 10점 이상도 간다.암성 통증은 암이 진행되는 생명의 마지막에는 더 심해지고, 그(p. 215) 끝을 알 수 없기 때문에 환자와 가족을 더더욱 애타게 한다(p. 216). 인생을 산다는 것은 세상에 놓인 하나의 다리를 건너는 것이다. 하지만 그저 다리를 건너는 일에만 집중한다면 세상의 아름다움은커녕 다리를 뒤흔들 고통과 혼돈의 시간이 다가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없다. 뜨거운 마음으로 용기를 내어 자기 삶의 아웃사이더가 되어보기를. 삶이 끝난 뒤에 죽음이 오는 것이 아니라 삶 속에 죽음이 있음을 알아차리기를, 그래서 지금 이 순간이 가장 행복하다고 느끼면서 아름다운 마무리를 하게 되기를 바란다(p. 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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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소개
    2026-04-13
  • 【북토크381】 삶의 찌질함과 누추함에 대하여
    산문집 《연중무휴의 사랑》과 《헤아림의 조각들》(2023년 문학나눔 선정도서)로 2030 독자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던 임지은이 신작 《이유 없이 싫어하는 것들에 대하여》를 출간했다. 전작에서 냉철하고, 때론 따뜻한 연민과 너른 헤아림을 보여줬다면 이번 산문집에서는 작가 자신의 깊은 내면에 숨겨진 질투와 열등감, 욕망과 좌절, 위선 등의 감정을 진솔하게 마주해본다. 누구나 한번쯤 특별한 이유 없이 무언가를 미워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이 ‘싫음’이라는 감정은 과연 무엇일까. 숨기고만 싶은 이 복잡 미묘한 감정을 들여다볼수록 작가는 거기에 어떤 선망이나 외로움, 부끄러움 같은 것들이 들어 있다는 걸 깨달았다. 한편으론 자기가 가진 것 중 가장 소중한 것을 돋보이게 하려는, 서툰 사랑의 마음이기도 했다. 작가는 슬픔과 기쁨과 외로움이 버무려진 이 “혼탕과 같은 삶”에 깊게 몸 담그며, 미움과 사랑 사이의 낙차를 발견한다. 엄마를 통해 흉보는 마음과 사랑이 때론 붙어 있음을 알게 되었고, 온 세상과 자기 자신을 고루고루 아낌없이 사랑한다는 사람들 옆에서 홀로 투덜거리며 자신의 ‘싫음’을 통해 타인의 ‘싫음’ 또한 이해하게 되는 세계를 경험한다. 좋은 것은 당연하게 제 것이라 누리는 동거인에게 꼬인 마음이 드는 자신을 들여다보며 좋은 것을 좋은 것이라 수긍하기까지의 내면의 갈등과 고통을 인정하기도 한다. 이처럼 작가는 무언가를 좋아한다는 건 그것대로 멋진 일이지만, 무언가를 미워한다는 것 또한 때로는 좋은 일이라고 말한다. 작가의 시선을 따라 ‘이유 없이 싫어하는 것들’을 톺다 보면 이 책을 추천한 오은 시인의 말처럼, “곡절 없이 좋아하는 것들을 몇 곱절 더 소중하게 만들어주는” 생경한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곧 있으면 닥쳐올 매서운 겨울바람에도 직진하는 용기가 느껴지는 책이다.-교보문고 자신의 찌질함(?)을 드러내는 글을 보며 저자의 용기를 본다. 만족스럽지 않은 환경 가운데서도 살아볼려고 하는 저자의 몸부림(?)에 박수를 보낸다. 이토록 많은 말이 오가는 세상에 말 한마디가 그토록 크게 사람을 흔들 수 있다는 걸 생각하면 놀라고야 만다. 누군가의 말 한마디에 버티고 또 흔들릴 만큼 나는 취약 했다. 그러나 누군가를 흔드는 게 무작정 나쁘다거나, 사주는 믿을 만하지 않다는 주장을 하려는 건 아니다. 나를 흔들던 말 또한 나를 이쪽으로 데려왔음을, 내가 무언가를 그 안에서 발견했다는 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그 밤 안도 속에서 깨달은 건 나를 격려해주는 이가 없어도, 심지어 누가 나를 흔들어놓고 수면 아래로 밀어 넣는다 해도, 나는 내가 원하는 걸 쉽사리 포기하지 못하는 사람이란 사실이었다. 그로 인해 생겨난 불안과 슬픔과 무력감, 또 그에 따른 오기와 반발심을 동력 삼으며, 나는 내 안에서 끝내 살아남은 무언가를 마주했다. 어쩌면 그(p. 25)것이 그리도 중요했기 때문에 내가 그렇게나 흔들렸다는 사실 또한. 그러므로 물음에 대한 답은 추가되고 갱신된다. 어쩌다 작가가 되었을까? 나는 끝내 작가가 되고 싶었다(p. 26). 오늘날에는 자신을 돌보는 법에 대한 정보가 넘쳐난다. 그런 정보의 과잉은 때론 상처도 불행도 없어야 한다는 강박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어떤 건 꼭 완두콩 한 알 만큼의 불편도 용인하지 않기 위해 고안된 듯 보이니까. 혹시 사람들은 자신에게 좋은 것만 주어야 한다는 강박을 갖고 있는 걸까? 그렇게 해야만 제대로 된 사회 구성원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그건 좀.. 부자연스럽지 않나? 그래도 그런 정보들을 일찌감치 알았다면, 그래서 내 부모가 조금 더 자신을 돌보았다면 그들에게도 내게도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럼 내 부모도 조금은 덜 힘들었을 텐데. 나도, 조금 덜 우는 사람이었거나 조금 더 마음 놓고 우는 사람으로 자랐을 텐데. 어쩌다 한 번 하는 우리의 외식도 지금보다는 더 편안할 텐데(p. 103). 뒤늦게나마 나는 내게 좋은 것을 주는 법을 배우고 또 연습한다. 가능한 선에서 질 좋은 걸 산다. 누가 뭘 해주면 사양하지 않고 받는다. 목돈을 모아 요가를 등록하고 되도록 병원을 제때 간다. 때론 근사한 데서 밥을 먹기도 한다. 부모로선 잘 모를 좋은 걸 누려도, 스스로를 이기적이라 느끼지 않으려 이를 악문다. 동거인이 놀리는 걸 보면 갈 길이 먼 것 같지만, 나는 나를 보살피는 훈련을 거듭한다. 그래야 부모를 포함해 그 누구라도, 나를 챙기느라 그 자신을 뒷전으로 두지 않을 수 있다. 그래야 나에게 최선을 다해준 사람들을, 원망하지 않고 끝까지 이해할 수 있다. 동거인의 캠핑을 따라가는 건 훈련의 일환이다. 캠핑을 가면 동거인이 거의 대부분의 일을 도맡아 해주기 때문이다. 그동안 나는 뻔뻔하게 앉아서 쉰다. 겨울에는 가끔 엄마의 개도 캠핑에 데리고 간다. 텐트 안에서 개는 한 뼘의 볕이 있는 자리에 자기 몸을 두기도 하고, 난로 앞 조금 더 따뜻한 곳에 자리를 잡고 웅크리기도 한다. 주어진 데서 기어이 제 몸만큼의 좋음을 찾아내는 것이다. '너는 바로 아는구나'(p. 104). 내가 오래 걸려 배운 걸 개는 그냥 해낸다. 기특하고 근사한 개 같으니. 몇 년 전가지만 해도 그런 광경, 자신이 괜찮아지는 위치를 미리 알아두고 스스로를 거기 놓는 존재 앞에서는 마음이 볼썽 사납게 흐트러지곤 했다. 그러나 이제는.... 웅크린 개를 빤히 바라본다. 걷는 법을 모르고도 걸었고 숨 쉬는 법을 모르고도 숨 쉬었다. 사랑 하는 법을 모르고도 사랑했고 사는 법을 모르고도 살았다. 나를 키워낸 내 부모처럼, 언제나 모르면 모르는 대로 해내는 것들이 있다. 하지만 배우면 배우는 대로 더 해내게 된다. 그걸 안 뒤로 나는 배우고 싶은 모든 걸 조금 더 오래 본다. 그럼 볕을 받아 털끝 하나하나가 빛나는 작은 개의 부드러운 몸이 조금씩 솟았다 가라앉길 반복하듯 감탄과 슬픔이 내 몸을 고요히 오르내린다. 어떤 자연스러움은 누군가에게 훈련의 영역에 있지. 그런 게 언제나 조금씩 나를 상하게 만든다고, 개를 쓰다듬으며 생각한다. 아무 불편도 모르는 얼굴, 그래야 한다고 주장하는 멸균된 얼굴은 역시 내 것이 아니다. 훈련 해봤자 조금 상한 얼굴을 더 자연스럽게 여기는 내 관점은 아무래도 끝내 바뀌지 않을 모양이다. 그래선지 어떨 땐 사람들의 얼굴이 다 조금씩 상한 것처럼 보이곤 한다(p. 105). 대중교통을 오가며 힐끗힐끗 사람들을 본다. 사람들이 상처 입거나 불행하지 않길 바라면서. 그러나 나는 어쩐지 그들 각자의 상처나 불행이 없어지길 곧장 바라지는 않는다. 거기서 오는 고통과 모순 같은 것들은 한 사람을 감싸는 오래된 맥락이므로. 나로선 그 안에 새겨진 것들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싶다. 그들의 완두콩들을 헤아려 보고 싶다. 그런 건 사람이 상처와 불행 속에서도 그럭저 럭 버티며 살아갈 수 있는 존재임을 알려준다. 다만 그 사실을 증명하겠다고 나를 몰아세우는 건 그만두었다. 스스로를 보살피는 게 죄가 아니라는 걸 개조차 그냥 안다. 나는 개처럼 살아서 숨쉰다. 개에게 배운 바, 그건 머무르는 자리에서 언제나 한 뼘의 볕을 찾아내야만 한다는 뜻이다(p. 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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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4-13
  • 【북토크380】 여전히 흥미로운 주제, 죽음
    대한민국이 OECD 자살률 1위라는 아픈 현실을 몇 년째 마주하고 있다. “죽으면 모든 게 끝날 거야”라는 절망 속에서 위태롭게 흔들리는 젊은이들에게, 우리 사회는 어떤 대답을 들려주어야 할까? 이 무거운 질문에 답하기 위해, 평생을 의학계에 몸담았고 ‘죽음학 전도사’라 불리는 서울대 의대 명예교수와 그의 아내가 함께 펜을 들었다. 바로 신간 『죽음, 삶의 끝에서 만나는 질문 』의 저자 정현채, 이현숙 부부의 이야기다-교보문고. 의사가 하는 죽음에 대한 이야기이다. (1) 근사체험 (2) 사후통신 (3) 삶의 종말체험 (4) 사망 시 물리적 현상 (4) 영매 (5) 어린아이들과 관련된 환생 연구이다. 나는 근사체험만 인정한다. 죽음은 이 땅에서의 마지막이기에 나이가 들수록 더 많은 관심을 갖고 책을 찾아 읽게 된다. 읽은 책들이 죽어갈 때 도움이 되기를 바라면서..... 정현채 서울대학교 의대 명예교수 1980년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동 대학 내과학(소화기학) 교수로 재직했고, 현재 서울대 의대 명예교수로 있다. 지금까지 240여 편의 의과학 논문을 SCI 국제학술지에 발표했으며 위염이나 위궤양 등을 유발하는 헬리코박터 파일로리 연구의 권위자로 대한소화기학회 이사장, 대한헬리코박터및상부위장관 연구학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저명한 의학 저널 『랜싯』을 포함해 전문 학술지에 게재된 죽음에 관한 과학적 연구 성과를 공부하면서 2007년부터 대중을 상대로 죽음학 강의를 시작했다. 중학생부터 80대까지 다양한 계층을 상대로 800여 회 넘게 강의를 해 '죽음학 전도사'라는 별명을 얻었다. 한국죽음학회 이사로서 '한국인의 웰다잉 가이드라인' 제정위원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죽음에 대해 생각할수록 비관적이 되거나 자살 충동이 커지는 게 아니냐고 우려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오히려 정반대예요. 제가 산증인이죠. 인간의 죽음 전후로 일어나는 영적인 현상에 대 해 알면 알수록, 왜 자살하면 안 되는지 그 이유를 이해하게 되고,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의 의미를 깨달아 더욱 밀도 있고 충만 하게 살아가게 되거든요. '내 목숨 내 마음대로 하겠다는데, 웬 참견이냐?'고 할지 모르지만, 실상을 알고 나면 그런 말을 하기가 어려워져요. 우리는 모두 서로 촘촘하게 연결되어 있고, 모르고 지나치는 존재들조차도 서로 영향을 주고받아요. 가족과 친구는 더 말할 나위 없죠. 우리는 모두 이번 생에서 다뤄야 할 저마다의 과제를 갖고 태어나는데, 자살을 한다는 건 그 과제를 너무 빨리 내팽개쳐버리는 거예요. 도망친다고 그 과제에서 벗어나게 될까요? 그렇지 않아요. 그 과제를 잘 다루게 될 때까지 형태만 바뀐 채 계속 마주 치게 돼요. 죽음은 소멸이 아니라 다른 차원으로 옮겨가는 것이니까요. 그런데 살면서도 그런 걸 경험하지 않나요? 해결하지 못 한 채 외면하거나 회피했던 문제가 사라지지 않고 어느 순간 눈 앞에 떡하니 버티고 서 있는 경험을요(p. 19). 자살은 남겨진 가족들과 친구들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안겨주고, 이 상처는 수십 년이 지나도록 잘 아물지 않아요. 한 사람이 자살하면 주위 사람 다섯 명 내지 열 명이 자살 충동을 갖게 된다고 해요. 우리나라에서는 하루 평균 마흔 명 가까이 자살한다고 하니, 매일 200명 내지 400명 넘는 사람들이 지인의 자살로 인해 부정적인 영향을 받게 되는 거죠. 죽음은 누구에게나 찾아와요. 서둘러 스스로 생을 마감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사고로, 질병으로, 노화로 언젠가 다 죽어요. 그러니 그 전까지는, 자신의 삶은 물론 사랑하는 사람들의 삶까지 송두리째 무너뜨리는 선택만은 하지 않아야 해요. 저는 4년 전 침윤성 방광암 진단을 받고, 방광 전체와 그 옆에 인접해 있는 전립선까지 제거하는 큰 수술을 받았어요. 소장 60센티미터를 잘라내고 만들어 넣은 인공방광에는 괄약근이 없어서 자율적인 배뇨 조절이 안 돼요. 일정한 간격으로 화장실에 가야 해서 밤잠도 세 시간씩 끊어서 자요. 그러나 이것 때문에 비관하지는 않아요. 30년 전만 해도 방광 절제 수술을 받고 나면 비닐 소변주머니를 밖에서 연결해 부착하고 지내야 했는데, 수술법이 향상되면서 삶의 질이 높아졌어요. 그것만으로도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요. 가만히 주변을 둘러보면 감사할 일이 참 많아요(p. 23). 자살하는 순간 후회하지만 자살을 시도했는데 살아난 사람들은 이후 신체적인 고통을 겪더라도 살아 있다는 사실만으로 감격스러워하며 살아간다고 해요. 그리고 대다수의 사람이 더 이상 자살을 시도하지 않았다고 해요. 2013년 EBS 「다큐프라임」 '33분마다 떠나는 사람들. 당신은 혼자가 아닙니다'에서는, 미국 샌프란시스코 골든게이트교(금문교)에서 투신했다가 극적으로 살아남은 2퍼센트의 사람들을 다뤘어요. 미국 플로리다대학의 토머스 조이너 교수가 그 사람들과 면담한 결과, 투신해서 수면에 떨어지기까지 4초밖에 안 되는 짧은 시간 동안 그들은 한결같이 자신이 한 행동을 후회했다고 해요. "뛰어내린 순간 나는 인생에서 해결할 수 없는 일은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방금 다리에서 뛰어내렸다는 사실 만 빼고"(p. 38). "뛰어내리고 처음 떠오른 생각은 '방금 무슨 짓을 한 거지?' 였다. 나는 죽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떨어진 곳이 강이였으니 그나마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질 수 있었던 것이고, 고층 빌딩이었다면 떨어지는 순간 후회한다고 해도 돌이키기 힘들죠. 경북 영주에 사는 한 중학생의 경우가 바로 그랬어요. 같은 반 학생들의 괴롭힘을 이기지 못해, 아파트 20층 계단 창문을 열고 뛰어내리려다가 갑자기 마음을 바꿔 창문틀을 붙잡고 도와달라고 요청했어요. 때마침 20층에 사는 주민이 이 소리를 듣고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하러 갔지만, 이 학생은 팔에 힘이 빠져 결국 추락했다고해요.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에요. 이처럼 자살을 시도하는 사람들의 마음 한편에는 살고 싶은 의지가 강하게 있는 것 같아요. 다음에 소개하는 사례에서도 확인할 수 있어요. 우울증을 앓고 있던 한 여성이 오피스텔에서 자살하려고 목을 맸는데,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이웃의 신고로 경찰이 출동했어요. 잠긴 문을 따고 들어가보니 이 여성은 이미 사망한 것처럼 보였어요. 호흡도 없고 얼굴이 잿빛으로 변해 있었죠. 그런데 출동한 경찰관 중 한 명이 혹시 모르니 응급조치를 해보자며 심폐소생술을 시작했고, 얼마 뒤 이 여성은 "컥!? 하는 소리와 함께 숨을 쉬며 살아났어요. 그리(p. 39)고 살아나서 한 말이, 경찰이 들어왔을 때 자신은 여전히 의식이 있었는데 다른 경찰관이 "시신에 손대지 말고 현장을 보존하자"고 했을 때 속상했다는 거였어요(p. 40). 죽는 것 외에는 거기서 벗어날 방법이 없다고 자꾸 생각하게 만드는 상황에 있다면, 가족이나 상담사에게 솔직하게 털어놓고 그곳에서 벗어나기 위한 현실적인 방법을 찾으세요. 익숙한 곳을 벗어나는 걸 겁내지 마세요. 죽는 길밖에 없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지금 그곳보다 더 나쁜 곳은 이 세상에 없으니까요. 하나의 문이 닫히면 다른 문이 열려요. 70년을 살아보니 정말 그렇더라구요(p. 42). 케네스 링과 친절 바이러스 근사체험 연구에서 케네스 링 교수를 빼놓을 수 없죠. 미국 코네티컷대학 심리학과 교수로서 30년 넘게 학생들에게 근사체험에 대해 가르쳤어요. 강의를 들은 학생들은 직접 체험하지 않았는데도 근사 체험자에게 일어나는 삶의 변화를 마찬가지로 겪었죠.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삶의 의미를 찾게 되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감소한 거예요. 케네스 링 교수는 근사체험을 '친절 바이러스Benign Virus'라고 불러요. 왜냐하면, 이를 알게 된 사람은 근사체험을 직접 하지 않았어도 마치 바이러스에 감염된 것처럼 체험자와 비슷한 긍정적인 영향을 받기 때문이에요. 그런 변화를 저나 주변 사람들한테서도 발견해요. 한 중견기업의 대표는 평소 까칠한 편이었다는데, 죽음학 강의를 들으며 펑펑 울고 난 뒤로는 직원들을 대하는 태도가 한결 부드러워지고 자상해졌다고 했어요(p. 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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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4-08
  • 【북토크379】 만화가 주는 즐거움과 편안함
    “<을지로 순환선>의 만화가 최호철과 만화평론가 박인하가 함께한 여행기『펜 끝 기행』. 같은 학교 교수로 만나 떠난 제주도 교직원 연수에서 결성된 두 만화쟁이 '펜 끝 듀오'의 여행은 이후 일본, 이탈리아, 스위스, 중국을 거쳐 다시 우리 땅 울릉도와 독도에서 마무리된다. 화가였다가 만화를 선택한 최호철과 글쟁이였다가 만화를 선택한 박인하. 만화에 붙들린 두 사람은 세계를 바라볼 때 만화적으로 본다. 최호철은 여행지마다 그림을 그렸고, 박인하는 최호철의 크로키 북을 보며 농담을 던졌다. 이 책은 그들이 그렇게 함께한 여행의 추억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만화를 좋아했다. 초등학교때부터 대학때까지 만화를 봤다. 지금은 잘 안 보지만 그래도 만화가 좋다. 앞으로도 기회가 되면 이런 책들을 찾아 읽을려고 한다. 일본다운, 너무나 일본다운 규슈 한 일 두 나라는 모두 벚꽃을 좋아하고, 벚꽃 구경 하기를 즐긴다. 그래서 봄이면 어김없이 벚꽃 축제가 벌어지는데, 가만 보면 두 나라 사람들은 각각 다른 벚꽃을 즐긴다. 우리나라에서 즐기는 벚꽃은 봉오리가 오르기 시작해 화려하게 피어오르는 상태이다. 그래서 벚꽃 축제를 구경하기 위해 일기 예보에 민감하다. 바람이 불거나 비가 와 꽃잎이 떨어지면 꽝이 되어버리기 때문. 반면, 일본 사람들은 화려하게 만개한 뒤 흩날리는 벚꽃을 즐긴다. 만개한 벚꽃이 바람에 떨어지는 모습을 좋아하는 것이다. 비슷하지만 다른 이웃. 결국 이런 미세한 차이가 모여 문화의 차이가 되고, 문화의 차이는 풍경의 차이를 만들어낸다. '일본 미학'이라는 말이 있다. 다양한 논의가 있고, 학자마다 여러 설명을 더하지만 이방인인 우리의 눈으로 볼 때 일본의 모습 자체가 그대로 일본 미학이다. 가을이 서서히 겨울로 넘어가던 날, 두 만화쟁이는 학생들과 함께 후쿠오카를 찾았다. 후쿠오카를 여행지로 결정한 것은 순전히 우리나라에서 가까웠기 때문. 특별히 우리를 끌어당기는 매력이나 꼭 가야 할 곳을 생 각해놓지 않은 상태에서 기대 없이 찾은 곳이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만난 활화산 아소 산. 그 웅장한 모습은 대단했다. 아소 산은 해발 1000미터가 넘는 다섯 개의 산봉우리를 통틀어 부르는 이름으로 정식 명칭은 아소고다케인데, 다섯 개의 분화구마다 사실 다른 이름, 다카다케(1592미터), 나카다케(1506미터), 에보시 다케(1337미터), 기지마다케(1326미터), 네코다케(1433미터)로 부른다. 버스로 전망대 인근까지 올라가 케이블카를 타면 쉴 새 없이 하얀 연기를 내뿜는 분화구를 볼 수 있다. 은근하게 풍겨나는 유황 냄새, 곳곳에 자리 잡은 대피소, 은근히 겁을 주는 가이드의 말이 어우러지(p. 243)면 현재 진행형 활화산의 다이내믹함을 느낄 수 있다. 멀리 피어오르는 활화산의 기운을 바라보니, 주군을 위해 목숨을 거는 사무라이, 흩날리는 벚꽃처럼 배를 가르는 영화의 장면이 떠올랐다. 아소 산을 뒤로하고 찾은 곳은 구마모토 성. 구마모토 성은 약 400년 전, 전국 시대의 무장 가토 기요마사가 구마모토를 통치하기 위해 축성한 성이다. 가토 기요마사라고 하면 낯설지만, 한자음 그대로 '가등청정'이라고 읽으면 익숙하다. 바로 임진왜란 때 조선을 침략했다가 깨진 바로 그 장군. 적의 공격에 대비한 120개의 우물과 조선 성의 장점을 차용한 축조술이 인상적이었지만, 그보다는 거대함 속에 정교하게 쌓아 올린 구마모토 성의 모습 그 자체가 일본, 사무라이를 느낄 수 있는 너무나 일본적인 풍경이었다. 그러나 사실 가장 일본적인 풍경은 활활 불타오르는 아소 산과 전국 시대 의 칼바람이 담겨 있는 구마모토 성이 아니라 그 살벌함과 함께 일상을 살았을 일본 사람들의 모습이었다. 지금도 언제 터질지 모르는 아소 산 자락 아래에서 평화롭게 농사를 짓고 소를 키우는 바로 그들의 모습이 가장 일본다운, 너무나 일본다운 모습이었다(p. 244). 이 책을 쓰고 그리게 된 계기에 대해 말하자면(p. 276) 최호철 선생과 나는 같은 직장(청강문화산업대학)에 다닌다. 둘 다 만화창작과 선생이다. 사람들을 만나 "학교에서 만화를 가르치고 있습니다"라고 말하면 꽤나 흥미로운 눈으로 바라본다. 마치 황제펭귄처럼. 낯설지는 않으나 내 주변에서 마주칠 때 경험하는 신기한 느낌이 드는 모양이다. 어쨌든 우리는 5월마다 찾아오는 불량 만화 화형식의 주홍글씨를 가슴에 새기지 않은 만화인들이다. 최호철 선생은 화가였다가 만화를 붙들었고, 나는 글쟁이였다가 만화를 붙들었다. 더 정확히 우리 둘은 모두 만화에 붙들린 사람들이다. 만화에 붙들린 사람들은 세계를 바라볼 때 만화적으로 본다. 일단 빈 종이가 있으면 무조건 그리고, 조금이라도 분위기가 추락하면 농담을 날리고 싶다. 전자가 최호철 선생. 후자가 나다. 하지만 둘 다 천성이 숫기가 많은 사람들은 아니다. 은근 부끄럼쟁이들. 그래서 낯선 이들하고 떠들고 노는 것보다, 친한 이들과 수다 떠는 것이 좋다. 그래서인지 청강문화산업대학 만화창작과 선생들은 보통 직장인들과 달리 사우나 아줌마 분위기를 풍긴다. 그 때문에 여행에 대한 기억이 꽤 많다. 최호철 선생은 여행지마다 그림을 그렸고, 난 최호철 선생의 화집을 뒤적이며 농담을 던진다. 그러던 어느 날. 학교에서 월간 무가지 〈백도씨〉를 기획할 때였다. "우리 여행 간 거 내가 글 쓰고, 선생님이 그림 그려보세요." "만화? 나 마감 잘 못하는 거 알잖아?" 일단, 방어막을 친다. 역시, 공력이 대단하다. "그냥 한 쪽짜리 그림을 그리자고요. 한 쪽짜리 만화, 그게 최호철 스타일이 잖아!" 나도 다시 공격한다. 왠지 느낌이 낚은 것 같다(p. 277). "한 페이지..." "한 페이지에 되도록 많은 이야기를 담는 게 최호철 스타일 아닌가?" 낚았다. 파닥파닥! 그렇게 해서 〈백도씨〉에 '두 만화쟁이의 여행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연재를 시작했다. 내가 낚은 죄로 글을 썼고, 최호철 선생의 애간장 다 태우는 마감에 동참했다. 몇 번 빼먹은 적도 있지만, 한 스무 번쯤 마감을 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났다. 우리가 한때 사슴굴이라고 불렀던 최호철 선생의 개성 넘치는 연구실 소파에 앉아 뒹굴면서 이야기를 하다 한번 책으로 묶어보자는 생각이 번득였다. 최호철 선생은 낙서라고 하지만, 그냥 묵히기 아까운 그림이 많은 그의 크로키 북이 생각났다. "〈백도씨〉에 연재한 만화하고, 그와 연관된 크로키를 모아서 책으로 묶어봅 시다." "재미있을까?" "재미없으면 사람들이 만날 선생님 크로키 북 달라고 해서 보겠어요." "너무 성의 없게 그렸잖아." "성의 있게 그리면 마감 못하잖아요." "..." "또 그냥 그 시간에, 여행지에서 그린 그림이 난 좋던데." "그럽시다." 그렇게 시작된 작업이다. 그림을 모으고, 글을 고쳐 썼다. 최대한 여행지의 느낌을 사람들이 느껴주길 원했다. 여행에는 휴식과 수다가 공존한다. 혼자 가는 여행을 좋아하는 이들도 있지만, 난 함께 수다 떨 수 있는 사람과 가는 여행이 좋다. 서로 말도 안 되는 지식을 공유하고, 느낌을 나누는 여(p. 278)행이 좋다. 이 만화는 그런 여행의 기록이다. 글과 함께 그림도 읽어주었으면 좋겠다. 최호철의 그림은 읽히는 그림이다. 그림으로 이야기를 하기 때문이다. 어느 순간, 크로키 북에 그린 사람이 아주 구체적인 당신의 모습이기도 하고, 당신이 바라본 그의 모습이기도 하다. 그림을 읽으며 우리의 여행에 동행하면 어떨까? 같이 수다 떨고, 맛있는 것도 먹고, 바보 같은 개그도 하면서 말이다. 남자들이라면 더더욱, 수다가 주는 세계 평화를 함께 누려보자(p. 2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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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4-08
  • 【북토크378】 짐승보다 못한 인간의 잔혹함
    〈무시무시한 처형대 세계사〉는 야욕과 애증, 배반과 음모로 뒤엉킨 잔혹한 처형의 역사를 들려주는 책이다. 「알고보면 무시무시한 그림동화」를 통해 그림 동화 신드롬을 일으킨 작가 기류 미사오가 이번에는 무시무시한 역사 속 처형의 현장으로 안내한다. 고대 로마 시대부터 근대 유럽까지 '인간'이라는 존재에 의해 자행된 처참하고 잔혹한 처형의 역사를 생생하게 복원하였다. 이 책은 역사 속 처형장을 통해 인간 내면세계에 깃들어 있는 광기의 역사를 살펴본다. 저자는 '인간은 과연 어디까지 잔인해질 수 있을까'라는 결코 가볍지 않은 물음을 던지면서, 다양한 이유 때문에 엄청난 피를 흘려 왔던 인류의 역사를 되짚어보고 있다. 그리고 황제들을 비롯한 수많은 권력자들과 신의 이름을 내건 종교인들이 역사 속에서 저지른 처형의 만행과 광기의 현장을 낱낱이 고발한다-교보문고. 흥미롭게 읽었는데 품절됐다. 이 저자의 책들이 재미있어 열심히 읽고 있는데 「알고보면 무시무시한 그림동화」도 대출했다. 이처럼 맹수를 이용한 처형 방법은 그리스도교가 보급되기 훨씬 전에 시작되어 5세기까지 계속되었다. 처음에는 죄수의 팔다리를 묶어 자유를 구속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죄수의 몸을 묶지 않고 자유로운 상태에서 간단한 무기도 사용하게 함으로써 관중들에게 더 큰 즐거움을 안겨 주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목숨을 잃기 전에 맹수를 한두 마리쯤 해치우는 강한 죄수도 나타났다. 어쨌든 죄수와 맹수의 싸움은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긴장감으로 관중들에게 꽤 인기를 끌었다. 좀 더 시간이 흐르면서 죄수의 처형은 일종의 연극으로 연출되었다. 예를 들면, 죄수를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프로메테우스로 분장시켜 쇠사슬로 바위에 묶은 다음 대머리 독수리에게 간을 쪼이게 한다거나, 헤라클레스로 분장한 죄수가 곤봉을 들고 나와 황소와 싸우다가 클라이맥스에서 황소가 죄수를 허공으로 던져 버리는 식이었다. 그리고 여자 죄수가 생겨나면서 연극 마지막 부분에 음탕함의 상징으로 알려져 있는 곰이나 당나귀의 습격을 받는다는 설정도 선보였다고 한다(p. 23). 콜로세움에서 펼쳐진 다양한 잔혹극 역대 황제들의 입장에서 볼 때, 검투사 경기는 범죄자나 반역자의 잔혹한 죽음을 선보이는 것으로써 황제의 권력을 뒤흔들려 하는 자는 결코 용서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서민들에게 확실히 보여 주는 기회이기도 했다. 로마 콜로세움 안에는 지금도 십자가가 서 있다. 일찍이 이곳에서 수많은 잔혹한 방법으로 목숨을 잃은 그리스도교도들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함이다. 그들은 타르에 적신 셔츠를 입은 채 콜로세움으로 끌려가 화형에 처해졌다. 또는, 팔다리가 묶인 채 커다란 솥 안에서 끓는 기름에 튀겨지거나 끓는 물에 삶아지기도 했다. 성 로렌스(Sento Rorense)는 석쇠 위에서 불에 구워졌고, 성 포류카르프는 화형대 기둥에 묶인 채 불에 타 죽었다. 성 폰시아노(Sento Pontianus)는 쓰러질 때까지 벌겋게 달구어진 석쇠 위를 걸어야 했고, 성 아르테 미오(Artemius)는 맷돌에 몸이 으깨져 죽었다. 손발이 잘려 나가거나 내 장이 몸 밖으로 드러난 채 매달린 자들도 있었다. 또, 살가죽이 벗겨진 채 유리 조각 위에서 끌려 다닌 자도 있었다. 콜로세움에서 남녀 수십 명이 한꺼번에 기둥에 묶여 처형된 적도 있는데, 그 광경이 마치 나무들이 줄지어 늘어선 숲처럼 보였다고도 한다. 관중들은 그 중에서 누가 가장 먼저 숨이 끊어질지를 놓고 내기를 하기도 했다(p. 24). 당연히, 역대 황제들도 콜로세움에서 펼쳐지는 잔혹한 피의 향연을 더할 나위 없는 즐거움으로 여겼다. 예를 들어 카이사르(Caesar)는 기원 전 65년 안찰관이었을 때 검투사들을 320쌍이나 동원해 성대한 검투사 경기를 개최했으며, 아우구스투스(Augusus) 황제도 검투사를 1 만 명 정도 동원해 검투사 경기를 여덟 차례, 맹수 3,500마리를 이용해 맹수 사냥을 스물여섯 차례나 개최했다. 클라우디우스 1세(Claudius I) 황제 시대에는 한 경기장에서 검투사 500쌍이 동시에 겨루는 일도 흔했다. 잔혹한 취미가 있었던 클라우디우스 1세는 목이 잘린 검투사의 얼굴을 자세히 볼 수 있도록 일부러 죽은 자의 투구를 벗기게 했다고 한다. 칼리굴라 황제 시대의 검투사 경기는 잔혹한 취미를 끝없이 만족시키기 위한 절호의 수단이었다. 맹수 사냥에서는 범죄자를 짐승의 먹이로 던져 주었고, 검투사 경기에 출전해야 한다는 선고를 받은 죄수가 필사적으로 자비를 호소하면 그 혀를 잡아 빼라고 명령한 다음에 온몸의 상처가 곪아 악취를 견딜 수 없을 때까지 채찍으로 때리게 했다. 그리스도교도 박해로 유명한 폭군 네로도 30일에 걸쳐 잇따라 경기를 열었다. 그는 맹수를 풀어놓아 어린이를 포함한 5,000명을 물어 죽이게 했다. 새로운 것을 좋아한 도미티아누스(Domitianus) 황제는 로마 제국 안에 존재하는 난쟁이들을 모조리 모아 검투사 집단을 만들게 했다. 그리고 미녀들로 이루어진 검투사 집단도 만들게 해서 경기장에서 난쟁이와 미녀를 싸우게 한 뒤 그것을 최고의 유흥으로 삼았다고 한다. 코모두스(p. 25)(Comedits) 황제에 이르러서는 아예 정치를 총애하는 신하에게 맡겨 버리고 검투사 경기에만 열중, 자기 자신도 검투사로 자주 경기에 출전했다. 그런 그가 음모를 품은 검투사 한 명에게 침실에서 암살당한 것은 운명의 장난이었을까?(p. 26). 사실은 이랬다. 불길이 번지는 상황에서 수상쩍은 남자 몇 명이 술에 취한 척 비틀거리면서 '어떤 자는 이쪽, 어떤 자는 저쪽' 하는 식으로 햇불을 이용해 불을 붙이는 모습이 목격되었던 것이다. 로마 시대의 전기 작가인 수에토니우스(Gaius Suetonius Tranquillus)에 따르면, 이 수상쩍은 무리가 네로의 노예들이었기 때문에 집정관도 제지할 수 없었다고 한다. 폭력의 피해자 어쨌든, '네로가 방화를 명령했다'라는 소문이 흘러나오면서 민중들 사이에서는 당장에라도 폭동이 일어날 듯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그러자 네로는 소문을 불식시키려고 방화범을 만들어 내기로 했다. 그리고 그 제물이 된 것이 바로 그리스도교도들이었다. 당시 그리스도교도들은 이단시되어 마법을 부리고 유아를 살해하고 인육을 먹는다는 식으로 중상모략을 당하고 있었다. 아무리 엄격한 금지 정책을 펴도 계속 증가하는 그리스도교도 때문에 고민하고 있던 터라 네로는 이번 화재를 구실로 그들을 철저하게 탄압하려고 마음먹었던 것이다. 먼저 신앙을 고백한 자들이 심문을 당했고, 이어서 그들의 고백을 토(p. 67)대로 수많은 사람들이 방화죄 혐의를 받았다. 순교자들 중에는 사도 바울로와 12사도인 베드로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들은 놀림감이 되었으며, 상상을 초월하는 잔혹한 방법으로 살해당했다. 어떤 이는 짐승의 가죽을 덮어쓴 채 개 떼에게 내던져져 물려 죽었고, 어떤 이는 원형 경기장에 맹수의 먹이로 던져지기도 했다. 또 어떤 이는 온몸에 타르가 발라진 상태에서 기둥에 묶여 날이 어두워진 뒤 등불 대신 불을 밝히게끔 했다. 네로는 처형 장면을 구경하라며 바티카누스 (vaticanus) 왕실 정원을 제공해 전차 경기까지 개최하면서 흥을 돋우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처럼 이단자들을 처형한다는 명분도 네로의 인기를 돌이킬 수는 없었다. 특히 귀족들이 불만을 품은 것은 노예에서 해방된 자들이 점차 제국의 요직을 독점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었다. 화재 뒤처리 등으로 인해 그 해의 국고는 막대한 재정 부담을 안게 되었고 그 결과 재산 몰수라는 극단적 상황에 의지할 수밖 에 없었다. 때문에 다시 막을 연 반역죄 재판의 판결은 모두 유형이나 사형이었다(p. 68). 14~17세기 유럽에서는 마녀로 여겨지는 사람들을 끊임없이 체포해 가혹한 고문을 한 뒤 화형에 처했다. 이러한 마녀 재판의 폭풍은 약 300년 동안 이어지면서 유럽 전역에서 맹위를 떨쳤다. 그 기간 동안 목숨을 잃은 사람들이 수십만에 이른다는 설도 있고, 수백만이라는 설도 있다. 정확한 수는 알 수 없지만, 마녀로 지목되어 화형을 당한 희생자에 대한 기록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 프랑스 로렌(Lorraine)에서 1576~1606년 동안 2000~3000명. 보르도에서 1577년에만 400명. • 독일 트리에르(Trier)에서 1587~1593년 동안 368명. 뷔르츠부르(p. 121)크에서 1623~1631년 사이에 900명. 밤베르크에서 1623~1633 년 사이에 600명. 이것만 보아도 마녀 재판의 희생자가 엄청난 숫자라는 사실을 짐작 할 수 있다. 유럽 전체에서는 15세기 말부터 18세기 초까지 약 30만 명(900만 명이라는 설도 있다)이 화형을 당했다는 기록이 있다(p. 122). 마녀를 불태우는 검은 연기가 유럽 하늘을 끊임없이 뒤덮고 있었던 것이다.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등골이 오싹해지는 이야기다. 당시, 불안감을 해소하는 돌파구로 선택된 것이 '마녀'였다. 사람들은 이 세상의 모든 불행과 해악을 마녀 탓으로 돌려 잔혹하게 처형했다. 마녀 사냥이 무서운 것은 증거 없이 소문과 풍문만으로도 마녀로 몰릴 수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마녀 재판이 성행했던 원인으로는 첫째, 당시의 사회 불안을 꼽을 수 있다. 당시, 유럽인들은 예전에는 겪지 못했던 혹독한 상황에 빠져 있었다. 유럽 인구의 30퍼센트 정도를 앗아간 페스트의 유행, 극단적인 인플레이션, 종교 개혁 운동 등, 격동의 상황에서 민중들의 불안감은 날이 갈수록 심화되고 있었다. 답답하기만 한 그런 현실의 불안감을 해소하는 창구로 선택된 것이 바로 '마녀'였다. 마녀는 마력을 써서 날씨를 나쁘게 만들고, 밭농사의 수학물을 줄이고, 태아를 유산시키고, 남자를 성불구로 만들고, 갓난아기를 잡아먹고, 악마에게 살아 있는 제물을 바친다..... 이런 식으로 세상의 모든 불행과 해악을 마녀 탓으로 돌렸다. 유럽에 휘몰아친 종교 개혁 운동에 대해 로마 교황은 수도회를 결성해 이단 탄압에 나섰다. 마녀 재판의 전신은 13세기 로마 교황 그레고리우스 9세가 탄생시켰다. 이른바 '이단 심문' 제도다. 이단 심문관은 교황의 보호 아래 사교나 관헌을 능가하는 권한을 가지고 오로지 그리스도교 국가 전역에서 이단을 박멸하는 사명을 맡았다(p. 123). 그리고 잔혹하기로 유명했던 요한 22세가 내린 1318년 2월 27일 교서에서 '마녀'의 비참한 운명이 결정되었다. 프랑스 고위 성직자 앞으로 보낸 이 교서에는 이러한 내용이 쓰여 있었다. '언제 어디서든 마녀 재판을 시작하고 지속하여 판결을 내릴 수 있는 완전한 권한을 부여한다.' 이 마녀 재판 해금 명령에 박차를 가하듯, 교황 요한 22세는 1323년, 1326년, 1327년, 1330년, 1331년에 계속 마녀 재판 강화 명령을 발표 했다. 이 강화 명령에 따라 이단 심문관의 마녀 사냥이 급격하게 기세를 떨치기 시작했다(p. 124). 마녀 재판 그 자체도, 심문, 자백의 공술(고문을 통한 자백도 포함해서), 단죄 선고, 그리고 처형(대부분이 화형)이라는 식으로 공식화되어 있었다. 중요한 것은 피고를 한시라도 빨리 죽여 그 재산을 몰수하는 것이었다. 마녀에게서 몰수한 재산은 모두 교회 소유가 되었고, 마녀 재판에 들어가는 비용 전부를 여기에서 조달했다. 간수의 식대, 처형 담당자의 술값, 교살을 할 때 들어가는 밧줄 대금, 화형을 할 때 쓰는 장작과 기름값 등, 모든 비용을 여기에서 인출해 썼던 것이다(p. 165). 기요틴에 광란하는 사람들 로베스피에르를 처형하는 것으로 공포 정치가 막을 내리자, 국내의 무거운 공기는 사라지고 단번에 향락적인 분위기가 퍼지게 되었다. 사람들은 다양한 장소에 모여 오직 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추었다. 피비린내 나는 과거를 잊고 희망 없는 미래에서 눈을 돌리기 위해. 거리 도처에서 무도회가 열렸는데, 특히 인기를 모았던 것은 회원이 한정되어 있는 '희생자들의 무도회'였다. 가까운 친척이 기요틴에 처형을 당한 사람들만 이 모임에 참가할 수 있었다. 이 무도회에 참가하려고 일부러 큰돈을 주고 근친자가 기요틴에 처형되었다는 증명서를 위조하는 사람들도 속출했다고 한다. 모임에서 여자들은 머리카락을 틀어 올리고 훤히 드러난 목 주위에 칼자국을 모방한 빨간 리본을 묶었다. 남자들도 머리카락을 짧게 깎고 마찬가지로 빨간 리본을 목에 둘렀다. 그 모습을 보고 사람들은 눈살을 찌푸렸지만 그들 입장에서 보면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현실을 받아들여 슬픔을 이겨내고 살아가려면 이런 식으로 불행을 패러디하는 수밖에 없었는지도 모른다(p. 298). 마지막 공개 처형 프랑스에서 기요틴을 이용한 처형은 오랜 세월 동안 일반에게 공개 되었다. 그때마다 형장에는 프랑스 각지의 수많은 구경꾼들이 모여들었다. 그들 입장에서 볼 때 처형은 최고의 스트레스 해소 방법이었다. 1889년의 파리 만국 박람회 때에는 기요틴에 처형을 당한 사람이, 당시에 신축된 에펠탑보다 더 화제가 되었다고 한다. 피와 잔혹함에 대한 인간의 열광은 그 뿌리가 무척 강한 듯싶다. 프랑스에서의 마지막 기요틴 공개 처형은 1939년 와이트만이라는 살 인범의 처형이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축제 소동이 벌어지자 정부는 두 번 다시 같은 일을 되풀이하지 않겠다고 결의했다고 한다. 처형 전날 밤, 형장이 될 베르사유 감옥 앞 광장에는 엄청난 군중들이 모여들었다. 기요틴 처형을 한 번이라도 직접 구경하려고 나무와 가로등에 매달린 사람들, 건물 창문에 바짝 얼굴을 들이대고 있는 사람... 사람들은 마치 축제라도 즐기는 듯한 기분으로 술잔을 기울이고 음악에 맞추어 노래를 부르거나 춤을 추면서 소란스럽게 전야제를 보냈다. 가끔씩 말 잘하는 사람이 농담을 던지면 사람들이 웃음을 터뜨렸는데, 그 소리가 감방 안에 있는 사형수의 귀에도 들렸다니 정말 잔혹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그러자 정부도 더 이상은 간과할 수 없어 그 뒤로는 기요틴 공개 처형을 금지했다. 이후의 처형은 각각의 감옥이 위치한 안마당에서 이루어(p. 300)졌으며, 처형에 참가할 수 있는 사람은 관료 아홉 명뿐이었다. 잔혹함의 상징인 기요틴 처형대는 감옥의 담장 안으로 모습을 감추었고, 두 번 다시 사람들에게 공개되지 않았다(p. 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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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토크373】 각자에게 있는 삶의 틀을 벗어나야 한다
    이 책은 저자가 2002년에 쓴 장편소설이다. 지금부터 24년 전이다. 긴 세월의 간극이다. 그럼에도 흥미로웠다. 석고 작업을 하는 주인공이 만난 두 여자를 통해 삶의 틀, 아픔의 틀을 깨야 하는 것에 대해 말한다. 이야기를 풀어가는 소설가들의 역량은 역시 대단하다. 한강 작가의 책을 부지런히 읽어야겠다. "나, 앞으로 여기 안 와요." 그것은 조금 아까 그녀가 했던 말이었다. 이번에는 좀더 결의가 들어간 말씨라는 점만 달랐다. "이제부터 다이어트할 거예요. 휴학하구, 다음 학기에 놀랄 만한 모습으로 그 사람 앞에 나타날 거예요. 그 사람 눈빛두 그때쯤은 달라져 있겠죠." L의 얼굴은 진지했고, 차라리 결연했다. 그녀가 그토록 확신에 차 있는 모습을 나는 처음 보았다. 이 아이에게 이런 결단력이, 강(p. 121)한 의지가 있었나. "아저씨가 그랬죠. 내가 예쁘다구. 살이 찐 다음부터, 난 한 번도 내가 예쁠 수 있을 거란 생각을 못 해봤어요. 그런데 아저씨한테 예쁘다는 말을 들으니까 행복했어요. 믿어지지 않을 만큼요. 나도 모르게 자신감두 생겼구요. 하지만 이제는 달라요. 내 욕심이 지나친 건 아니겠죠. 그 사람 말예요. 그 사람이 나한테 예쁘다구 말해 주면, 그날 죽어도 좋을 것 같아요." "그렇구나." 짐짓 실연당한 사내의 쓸쓸한 얼굴을 지으며 나는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녀는 스물한 살이었다. 커다란 몸에 가냘픈 마음을 가진 소녀였다. 그녀의 사랑이란 건 뭘까. 자신을 향해 혐오의 눈길을 쏘아 보냈던 남자애, 그 소년의 껍데기를 사랑하는가. 잠시 후 그녀의 거대한 몸이 떠나가자, 작업실은 예전보다 넓고 헐겁게 느껴졌다. 나는 그녀를 위해 문을 열어주었을 뿐, 더 이상 배웅하지 않았다. 그녀가 얼른 나에게서 벗어나고 싶어한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 짧은 헤어짐의 절차조차 그녀에게는 지루하고 갑갑했던 것이다. 다음날 새벽 3시쯤 나는 목이 말라 잠에서 깨었다. 불을 켜고 찬 물 한 잔을 마신 뒤. 나는 뜻 없이 작업실을 서성거렸다. 그러다가 문득, 언젠가 농담 삼아 말했던 대로, 고개를 웅크리고 L의 틀집 속으로 들어갔다. 나는 그녀가 잡았던 포즈대로 다리를 뻗고 앉았다. 틀집은 안락 하였다. 누군가 틀집의 앞면을 끌어다 붙여주기만 하면 관(棺)은 완성될 것이다. 어쩐지 편안한 마음이 되어, 나는 그녀의 등이 닿(p. 122)았던 실팍한 곡선 위로 몸을 기댔다. 잠을 청하듯 눈을 감았다. 그러자 내 감은 눈 위로 겹쳐진 것은 L의 눈이었다. 언제나 젖어 있는 것 같던 그녀의 말간 두 눈이 어룽어룽 내 이마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얼마 뒤 조심스럽게 틀집 밖으로 나오고 나자 나는 이상한 홀가분함을 느꼈다. 누구든, 자신의 관 속에 미리 들어가본 사람이라면 비슷한 기분을 느낄 것이다. 낡은 일인용 소파에 몸을 파묻은 채, 나는 눈을 감고 묵묵히 아침을 기다렸다. 지난 몇 개월 동안 나의 공간에 버티고 있었던 L의 육중한 양감이 떠나갔음을, 나는 담담한 마음으로 받아들이려 애썼다. 염려했던 환멸은 없었다. 그것이 나에게는 가장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물론, 3년이 지난 뒤 그녀를 우연히, 그렇듯 예상치 못한 모습으로 다시 만나게 되리라고는 결코 짐작하지 못한 채였다(p. 123). 나는 문득 그녀의 왼손이 자신의 허리 뒤로 숨겨져 있는 것을 알았다. 내가 손을 뻗어 그녀의 왼손을 잡자 그녀는 소스라쳤다. 저항하는 그녀의 손을 끌어다 내 무릎 위에 놓았다. 그 왼주먹은 몇(p. 312) 시간 전에 석고를 바르려 할 때 그랬던 것처럼 안간힘을 다해 쥐어져 있었다. 나는 구역질을 느꼈다. 내 인생을 관통해온 그 쓸쓸한 미식거림을, 시큼한 침이 고여오는 혀뿌리 아래로 눌렀다. 삶의 껍데기 위에서, 심연의 껍데기 위에서 우리들은 곡예하듯 탈을 쓰고 살아간다. 때로 증오하고 분노하며 사랑하고 울부짖는다. 이 모든 것이 곡예이며, 우리는 다만 병들어가고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잊은 채(p. 313). 작가의 말 새벽녘에 꾸었던 꿈, 낯선 사람이 던지고 간 말 한마디, 무심코 펼쳐든 신문에서 발견한 글귀, 불쑥 튀어나온 먼 기억의 한 조각들 까지 모두 계시처럼 느껴지는 때가 있다. 바로 그런 순간들이, 내가 소설을 쓸 때 가장 사랑하는 순간들이다. 여느 때와 같은 일상 이지만 전혀 새로운 감각으로 부딪쳐오는 숱한 의문들, 짧고 강렬한 각성, 깊숙이 찌르는 느낌 속에서 나는 일종의 자유를 느낀다. 이 소설은 3년 전에 초를 잡아놓고 서랍 속에 넣어뒀다가, 지난 해 2월에 꺼내 쓰기 시작했다. 소설과 함께 열두 달을 순회하는 동안 나에게 시간은 다른 속력으로 흘렀다. 언제나 그랬듯이. 내 몸에 머물렀던 소설은 가장 먼저 내 존재를 변화시킨다. 눈과 귀를 바꾸고, 당신을 사랑하는 방법을 바꾸고, 아직 걸어보지 못했던 곳으로 내 영혼을 말없이 옮겨다 놓는다. 직접 이름을 밝히기보다는 마음으로 인사드려야 할, 많은 영감과 도움을 주었던 분들에게 감사한다. 책을 만드느라 애써주신 문(p. 328)학과지성사의 여러분께도 감사드린다. 이렇게 쓸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살아 있다는 것에 나는 감사한다. 2002년 1월 韓江 (p. 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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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3-30
  • 【북토크372】 인간이 죽지 않고 계속 복제된다면?
    이 책은 봉준호 감독의 영화 ‘미키17’의 원작 소설이다. 나는 재미있게 봤는데 이 영화는 흥행에 성공하지 못했다. 영화가 재밌었기에 원작 소설을 보고 싶어 읽게 됐다. 영화와는 많이 달랐다. 봉 감독이 책의 주요 모티브만 사용하고 나머지는 창작한 것이다. 이 책에 있듯이 사람이 죽지 않고 계속 복제 된다면 어떤 세상이 펼쳐질까? 소설과 영화다운 상상이고 그 안에 삶의 본질에 대한 질문이 내재되어 있다. 흥미로웠다. 사실 내가 미드가르드에서 겪고 있던 그 문제는 미드가르드를 떠날 때도 불거졌다. 나는 과학자가 아니었다. 엔지니어도 아니었다. 예술이나 오락, 글쓰기에도 재능이 없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도 나는 이전 시대에 태어났다면 별 볼 일 없는 학문이나 연구하고 있었을 사람이었다. 이름 모를 도서관에서 찾은 별 의미도 없는 책을 뒤적이며 아무도 읽지 않을 연구 논문을 썼을 것이다. 그보다 이전에 태어났다면 공장이나 광산, 군대에 일생을 바쳤을 것이다. 하지만 미드가르드에는 별 볼 일 없는 학문조차 존재하지 않았다. 그웬이 아주 친절하게 지적했듯 역사를 공부하려고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큘러를 한 번 깜박이면, 또는 태블릿을 몇 번만 두드리면 필요한 정보는 무엇이든 알 수 있었다. 물론 그런 수고를 들이는 사람도 없기는 했다(p. 43). 당연히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이나 광산, 군대에 가는 사람도 없었다. 내게 주어지는 생활비는 먹고 살기에 충분했지만,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그런 삶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답을 찾을 수 없었다. 어느 날 아침, 문득 내가 발코니 밖으로 몸을 던진들 아무것도 달라지는 게 없을 텐데. 이런 이유로 예나 지금이나 무료한 청춘들이 으레 그래 왔듯, 나 역시 틈만 나면 사고 칠 궁리를 하며 허송세월을 보내고 있었다(p. 44). 나는 맛없는 아침 식사에서 눈을 떼고 고개를 들었다. "왜 그래?" 나사는 고개를 저었다. "나한테는 좀 힘들어. 그리고 네가 죽을 때마다 매번 더 힘들어져. 지난밤에는 정말 괴로웠어. 식 스가 죽었을 때보다도, 파이브한테 일이 생겼을 때보다도 더 힘들었어. 종료하겠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서도 나는 네가 마음을 바꾸길 바라면서 계속 통신 가능한 거리에서 비행하고 있었어. 결국 포기하고 돔 격납고로 돌아온 다음에도 조종석에 앉아서 한 시간을 어린아이처럼 울었어. 하지만 지금 네가 여기에 있고, 네 이야기처럼 내가 만약 어젯밤에 너를 구했다면 지금의 너는 여기 없을 거야.... 그래서 나는 지금 어떤 감정을 느껴야 하는지 모르겠어. "그래, 불멸이란 참 이해하기가 어려워, 그렇지?"(p. 83). 유니언에 속한 세계 수백 개 중에서 인류와 토착 생명체가 공생하는 장소는 딱 하나뿐이다. 이 행성은 은하계 나선형 팔의 거의 끝에 있는 M형 항성을 홀로 공전하는 작은 왜성으로 가장 가까운 개척지와 20광년 떨어져 있다. 인류가 가장 먼 곳 까지 나가 개척지 건설에 성공한 사례였다. 정착민들은 자신들의 행성을 롱샷이라 불렀다. 이 개척지의 성공 뒤에는 사연이 숨어 있다. 애초에 롱샷 행성에는 나무에 서식하는 두족류가 살고 있었다. 나는 이들이 가지에서 가지로 이동하는 영상을 본 적이 있는데, 숲 지붕 색에 맞춰 색을 바꾸기 때문에 적외선 카메(p. 371)라 없이는 이들을 볼 수 없었다. 이들은 행성에 하나뿐인 대륙의 중앙 고원에 모여 살았다. 처음 개척민들이 착륙했을 때 이들은 과학 기술이나 문화 면에서 미개하지는 않았지만, 그것을 실제로 활용하는 능력은 농업이 발달하기 이전의 인류보다 크게 앞서지 못한 상태였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추측이 있었다. 내가 본 가장 그럴듯한 설명은 원래 인간이 무기와 거주지, 플리터와 우주선을 발전시키게 된 이유가 생태계의 일원으로 살아가는 데 너무 서툴렀기 때문이라는 설명이었다. 롱샷의 토착 생물들은 생태계의 일원이 되는 데 서툴지 않았다. 그들은 총 없이도 환경에 완벽히 적응했다. 개척민들이 착륙했을 때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왜냐하면 상륙거점은 해안에 있었고 해안은 그들이 서식하는 산지에서 수백 킬로미터 떨어져 있었다. 개척민들도 토착 생물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는데, 그들이 낯을 가리고 일부 지역에서만 사는 데다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서 착륙 후 20년이 흐르도록 그들이 어디 있는지조차 몰랐기 때문이다. 이들의 만남이 왜 다른 거점과는 달랐는지까지 역사책에서 설명해 주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런 가설은 세워 볼 수 있다. 서로 만나게 되었을 때 개척민들은 끊임없이 두려워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행성에 단단한 뿌리를 내리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시간. 시간이 열쇠다. 우리에게는 시간이 필요한 것뿐이다(p. 3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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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소개
    2026-03-30
  • 【북토크371】 조력 사망에 대하여
    이 책은 미국의 조력 사망에 대한 것이다. 미국에서도 조력 사망이 합법화된 주는 별로 없다. 태어난 사람은 모두 죽어야 하는데 아직도 죽음의 방법에 대한 논의는 멀기만하다. 과연 어떻게 생을 마감해야 하는가? 흥미롭게 읽었다. "나는 평생 살아남으려고 노력했어요. 항상 더 좋은 집에서 더 좋은 옷을 입고 더 좋은 음식을 먹으려고, 더 좋은 자동차를 타고 더 좋은 영화를 보려고 애썼죠. 늘 스스로 발전하고 더 나은 삶을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갑자기 그런게 완전히 무의미해진 거예요.” 켄이 멈칫하더니 기침하기 시작했다. 그는 가래를 뱉어내고 숨을 골랐다. "현대 의학이 아니었다면 이곳의 늙다리들은 한참 전에 사라졌겠죠." 그는 다른 아파트와 연결된 복도를 고개로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다들 엄청난 가치라도 있는 것처럼 목숨에 매달려요. 정말 그렇게 매달릴 만한 가치는 없는데."(p. 25). 의료 조력 사망은 정신이 온전한 성인 말기 환자가 의사에게 처방받은 치사 약물을 섭취해 합법적으로 생을 마감할 경로이다. 미국에서 진행성 치매 같은 중증 인지장애 환자는 시한부 진단을 받았어도 조력 사망법을 이용할 수 없다. 또한 조력 사망법은 환자가 스스로 치사 약물을 섭취할 수 있어야 한다고 명시한다. 의사가 치사 약물을 투여해 환자의 생명을 끝내는 안락사는 절대 금지다(p. 38). 조력 사망을 원하는 환자 중 상당수는 다른 모든 걱정, 심지어 물리적 통증에 관한 걱정보다 더 극심한 실존의 고통에 시달린다. 자신이 누구이고 왜 세상에 존재하는지 알 수 없다는 사실은 벌어진 상처만큼 아프고 쓰라릴 수 있다. 죽어가는 환자가 더 살아야 할 목적과 의미를 알지 못할 때, 앞으로 비참한 날들만 남았을 때는 죽음 자체보다 살아간다는 것이 더 벅차게 느껴질 수 있다(p. 91). 조력 사망 자격 심사를 통과한 환자 중 일부는 결국 치사 약물을 사용하지 못한다. 약을 섭취하기 전에 사망하거나 신체적 또는 정신적으로 약을 섭취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서다. 마음을 바꾸는 경우도 있다. 오리건주 존엄사법이 통과된 후 23년 동안 2,895명이 법에 따라 처방전을 받았고 그중 1,905명이 치사 약물로 사망했다. 조력 사망을 신청한 환자 중 3분의 1이 끝까지 약을 섭취하지 않았다는 얘기다(p. 236). 조처럼 질병으로 만신창이가 된 상황에서 죽음의 방식과 시기를 결정할 수 있다면 큰 안도감을 느낄 것이다. 그러나 조력 사망법을 이용하는 모든 환자가 안도감을 느끼려고 무조건 약물을 복용해야 한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병세가 악화할 경우 대안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느끼는 환자들도 있다. 은퇴한 종양 전문의로 엔드 오브 라이프 초이스 오리건에서 자원봉사를 하는 마크 래릭은 처방전을 받는 것이 미래의 돌연한 악화 가능성에 따른 보험이나 보증처럼 작용한다고 확신 한다. 그가 약을 처방해준 많은 환자가 실제로 복용하고 싶어질 경우를 대비해 약을 받아갔으나 끝내 복용하지 않았다(p. 246). 시간과 장소를 미리 정한 죽음이라 해도 유족에게는 죽음 자체가 충격으로 다가올 수 있다. 하지만 조력 사망은 가정에서의 호스피스 임종보다 더 명확한 측면이 있다. 캘리포니아 북부 의 호스피스 기관 베이헬스Bayhealth는 3년에 걸쳐 의료 조력 사망과 전통 호스피스 임종에 따른 애도 경험을 비교 연구했다. 연구 결과 조력 사망 환자의 유족은 호스피스 임종에 입회한 유족보다 미련이 덜 남았고, 임종 과정을 통제할 수 있다는 느낌이 훨씬 더 컸다고 답했다. 조력 사망 환자의 유족이 착잡함과 비탄을 호소한 사례는 두 가지뿐이었다. 마지막까지 환자의 결정에 반대한 유족과, 치사 약물을 복용할 계획이었으나 그러기(p. 279) 전에 사망한 환자의 유족이었다. 후자의 경우 사랑하는 사람이 원하는 죽음을 맞게 해주지 못했다는 좌절감을 느껴 회한에 빠진 것으로 나타났다(p. 280). 환자가 죽기까지 시간이 남았다고 생각하는 가족은 난감한 화해의 과업을 회피하곤 한다. 심지어 호스피스 임종의 경우에도 환자가 언제쯤 사망할지 예측하기 어려울 수 있다. 반면(p. 281) 조력 사망은 앞으로 일어날 일을 부정할 수 없다. 임종을 앞두고 모든 것을 해결할 수는 없겠지만, 사랑하는 사람이 죽을 날을 알면 과거의 잘못을 바로잡고 서로 용서하고 용서받을 기회를 얻는다. 많은 유족이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돕는 과정에서 위로와 힘을 얻는 게 사실이긴 해도, 사회적으로는 사별 이후가 고통스러울 수 있다. 스스로 삶을 마쳤다는 데 대한 사회적 낙인 탓에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솔직히 털어놓지 못하기도 한다. 고인이 조력 사망을 실행하도록 허락했다는 이유로 친척, 친구, 동료에게 비난받을까 봐 두려워하는 유족이 많다. 사별 전문가들은 이처럼 사회에서 제대로 인정하지 않거나 심지어 허용 하지 않는 경우를 숨겨진 애도, 즉 '박탈당한 애도'라고 부른다. 이는 다른 죽음에 비해 애도할 가치가 없다고 여겨지는 상황(자살, 약물 과다 복용, 유산 등)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낸 유족은 고통을 드러내지 못하고 억누른다. 유족이 타인에게 받는 비난은 매우 미묘할 수 있다. 그런 비난은 사람들의 무심한 언행, 움칫하는 몸짓, 어떤 단어의 억양 등 말해지지 않는 것들의 침묵 속에 담겨 있을지도 모른다(p. 282). 삶의 마지막을 다소나마 통제하길 원하는 환자의 선택지를 개선하는 데 어떤 과제가 남아 있을까? 최우선 과제는 50개 주 모두에서 조력 사망법이 통과되는 것이다. 이 글을 쓰는 현재 미국인의 80퍼센트가 합법적으로 조력 사망을 시도할 수 없는 주에 살고 있다. 이들이 삶의 마지막에 심각한 고통을 피하려면 은밀하고 위험할 수 있는 자력 구제에 의존해 죽음을 앞당 기거나, 음식물 섭취를 자발적으로 중단하거나, 아니면 스위스까지 가서 죽어야 한다. 우리는 이미 아픈 사람들과 조만간 아플 사람들을 위해 더욱 노력해야 한다. 두 번째 중요한 과제는 조력 사망을 음지에서 공론의 장으로 끌어내는 것이 아닐까 싶다. 조력 사망을 '자살'로 칭하기를 그만두고 의료 행위로 인정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수 있다. 조력 사망은 그 자체로 고유한 도덕적 • 법적 범주를 이루므로 이제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에도 그 사실을 반영해야 한다. 또(p. 302) 다른 방법도 생각해볼 수 있다. 임종 돌봄을 의과대학 교육 과정에 필수 과목으로 포함하고, 조력 사망 신청에 관심 있는 임상의에게 대응 방법을 교육하며, 조력 사망에 반대하는 의료인을 위한 보편적 위탁 조항을 도입하는 것이다. 또 하나의 과제는 임종 환자 돌봄 인력 양성과 관리에 크게 기여할 호스피스나 완화 의료 기관과의 협력을 강화하는 일이다. 이미 일부 진전이 있었다. 호스피스에서 조력 사망 환자의 자문 의사 역할을 맡는 의사들이 나타났고, 캘리포니아와 오리건과 워싱턴의 일부 호스피스는 조력 사망을 원하는 환자를 지원하는 정책을 명시했다. 버클리에서 임종 과학을 개척하는 데 기여한 의사 로니 샤벨슨은 결국에는 호스피스에서 조력 사망을 삶의 마지막 선택지 중 하나이자 치료의 일부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한다(p. 303). 궁극적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는 우리 사회가 죽음을 끈질기게 부정한다는 점이다. 죽음을 적으로 여기면 죽음에 패배할 수밖에 없다. 모두가 죽음을 회피하려 할 경우 그 불가피성을 직면하기가 지독하게 고통스러워진다. 죽음을 향한 침묵과 회피를 깨뜨리려면 나이를 떠나 모든 사람에게 삶의 마지막을 받아들이는 다양한 방법을 가르쳐야 한다. 죽음의 두려움으로부터 그들을 보호할 것이 아니라 스스로 죽음과의 관계를 탐구할 공간과 수단을 제공해야 한다. 일찍부터 삶의 마지막을 두고 대화를 시작하면 죽음에 관한 사회적 지식을 되찾을 수 있다. 그리하여 삶의 무상함을 깊이 인식하고 애도 상담부터 호스피스 치료에 이르기까지 죽음과 관련된 모든 문제를 개선할 수 있다(p. 306). '웰다잉' 욕구는 의료와 장례 영역에서 삶의 마지막에 관한 통제권을 찾으려는 사회적 움직임의 일환이다. 관습에 얽매이기를 거부하는 밀레니얼 세대와 베이비붐 세대가 이런 노력을 주도하고 있다. 이들은 자연장, 가정에서의 임종 돌봄, 수분해당, 시신 퇴비화, 수목장 등의 선택지를 조사한다. 자신의 추모사와 부고장을 작성하고, 생전에 작별 인사를 나누며, 자기 장례식 배경음악 목록을 만들거나 관을 직접 디자인하기도 한다. 죽음에 관한 논의를 정상화하려는 '죽음 긍정death-positive' 운동 (최근 급성장 중이다)에서 영감을 얻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좋은 죽음good death'이 현대인의 또 다른 의무('생산적 삶과 성공적 죽음')로 둔갑하지 않도록 유념해야 한다. 웰다잉이 여력 있고 선택받은 소수의 사람들만 누릴 수 있는 사치가 되어서도 안 된다. 성급한 우리 문화는 모든 종류의 인간적 고통에 간편하고 기계적인 해결책을 요구하기 쉽다. 조력 사망은 어디까지나 중증 환자의 요구에 따라 이루어져야 하며, 인간적이고 존엄하게 죽을 수 있는 유일한 선택지여서는 안 된다(p. 307). 이 책은 단기간의 관찰 결과다. 내가 이 책을 쓰기 시작한 이후 치사 약물 조합이 일부 바뀌었고 부분적이나마 법안 개정도 추진 중이다. 그렇지만 미국에서의 조력 사망 경험은 전반적 으로 변한 것이 없다. 조력 사망 자격은 여전히 획득하기 어렵다. 병세가 지나치게 악화했거나 반대로 처방전을 받을 만큼 심각하지 않은 환자들은 여전히 법조문에 구속받는다. 그리고 환자들이 삶의 마지막에 겪는 고통을 덜어주려 헌신해온 의사들은 의심과 비난에 시달린다. 우리 사회는 더 나아질 수 있고 더 나아져야 마땅하다. 세계적 팬데믹의 여파와 씨름하면서, 우리는 죽음이라는 관념이 개인에게 더 밀접하게 다가오는 중대한 전환점에 이르렀다. 바로 지금이 만사를 다르게 처리하고 더욱 온정적인 방향으로 나아갈 기회다. 결국에는 이 모든 게 끝날 테니까. 그리고 그때가 되면 어떻게 떠날지 선택권이 주어지는 것이 좋지 않을까(p. 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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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3-30
  • 【북토크370】 영화를 통한 심리치료
    영화든 드라마든 소설책이든 심리치료의 도구는 다양하다. 이 책은 정신과의사의 관점으로 영화를 분석한 것이다. 흥미롭게 봤다. 한 편의 영화를 통해 마음의 치유가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은 귀한 경험이다. 그것이 좋은 영화를 봐야할 이유이다. 극단적인 트라우마로 고통을 받는 사람들에게는 섣불리 고통의 현실을 직면하라고 요구하는 원칙론적인 접근보다 먼저 그들이 한숨을 돌리고 심리적 안정을 찾도록 도와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마음의 안정을 느끼지 못한 상태에서 트라우마에 직면하는 것은 피해자 대부분을 고통스럽게 하는 불필요한 자극이 되기 쉽습니다. 트라우마의 희생자들은 자신들의 정서적 고통을 진심으로 이해하고 자신들의 부적응적인 행동까지도 포용해줄 수 있는 사람이 하나라도 있을 때 비로소 안정감과 연결감을 느낄 수 있게 된다고 합니다. 이런 안정감과 연결감(p. 28)을 느낄 수가 있어야 비로소 트라우마를 이야기할 수 있다고 합니다(p. 29). 트라우마는 일반적인 스트레스와는 아주 다릅니다. 트라우마는 기본적으로 1) 미리 예측할 수 없고, 2) 미리 대비할 수도 없으며, 3) 또한 도망가거나 회피할 수도 없다는 특성을 갖고 있습니다. 외부에서 오는 위협에 대항을 해볼 수도 없고 도망을 갈 수도 없다면 어떻게 될까요? 가장 기본적인 자기 방어 수단이 불가능할 때 우리는 강렬한 두려움, 공포, 무력감, 불안감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렇듯 '너무나 무섭고 두려운데 피할 수도 없고 대처할 수도 없이 꼼짝없이 당하게 되는 압도적인 상황의 경험'이 바로 트라우마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압도적인 트라우마를 경험하게 되면 우리의 뇌에서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냥 내버려 두고 잊어버리려는 노력을 한다고 이러한 변화가 다시 원래의 자리로 쉽게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트라우마는 우리 인간의 뇌의 신경회로를 압도적으로 무너뜨리는 사건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뇌는 피부의 상처가 저절로 아물듯이, 마음의 상처도 저절로 치유될 수 있는 메커니즘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트라우마는 개인의 노력 여하에 따라 그 치유가 가능하다고 하겠습니다. 상처의 깊이와 무게에 따라 치유(p. 46)의 방법과 시간에 큰 차이를 보이겠지만 어쨌든 불가항력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을 인식하는 것만으로도 트라우마의 치료는 큰 진전을 보이는 것입니다(p. 47). 트라우마의 피해자들은 감정을 마비시컴으로써 자신들의 삶을 한없이 단조롭고 무미건조하게 만듭니다. 자극이 될지 모를 상황을 피하기 위해 자신의 삶을 철저히 제한하고 똑같은 일상을 반복합니다. 극단적으로 수동적이 되는 것이지요. 미래에 대한 계획이나 삶에서의 주도권을 포기하고 아무 생각 없는 사람처럼 세상을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러한 수동적이고 무미건조한 삶의 지루한 반복이 결코 그들의 삶을 만족스럽게, 즐겁게, 행복하게 해주지는 못할 겁니다. 아무런 의미를 찾을 수 없고 아무런 행복도 느낄 수 없는 답답한 자신의 삶에 대한 염증도 느 끼게 될 것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기서 벗어나지 못하는 자신의 수동성에 대한 혐오감도 점차 더해질 테니까요. 무미건조한 삶은 트라우마에 대한 해결책이 될 수 없습니다. 트라우 마의 영향력을 완화시켜줄 수 있는 긍정적인 경험의 기회, 삶의 새로운 즐거움 • 기쁨• 성취감의 기회를 제한시키기 때문이지요. 다양한 긍정적인 경험들이야말로 트라우마의 진정한 해결책입니다. '감정의 마비' 라는 방어기전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겪는 환자에게 일시적인 안 정감은 줄 수 있지만 그만큼 트라우마의 영향력을 더 길게 지속시킨다는 점에서 '양날의 칼' 인 셈입니다. 2008년 우리나라 여성부 실태 조사에 의하면 성폭력 피해자들의 신고율은 고작 2.3%라고 합니다. 여전히 성폭력의 피해자인 여성이나 아동들은 자신들이 받은 트라우마를 다른 사람에게 알려 도움을 받고(p. 140) 이러한 피해자들이 결국 받아들여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한참 전에 벌어진 일을 잊고 이제 현재 자신의 삶에 집중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대부분의 트라우마 피해자들의 내면에는 가해자에 의해 황폐 해져버린 삶에 대한 분노와 원망이 남아 있기 때문에 이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습니다. 자신에게 일어난 고통스러운 변화와 상실을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지요. 아무리 회복된다고 하더라도 트라우마를 경험하기 이전의 상태나 모습으로 완벽하게 돌아가는 게 불가능하다는 사실이 그들에게는 너무나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잃어버린 시간을 되돌릴 수도 없고, 죽은 사람이 살아 돌아올 수도 없고, 잃어버린 다리가 다시 생겨날 수도 없고, 보이지 않게 된 눈이 다시 보이게 될 수도 없는 것이니까요. 원하지 않은 변화와 상실을 겪게 만든 가해자에 대한 미움과 복수심이 충분히 표현되어 어느 정도 가라앉는 과정이 필요한지도 모르겠습니다. 꿈속에서나 상상 속에서라도 가해자들에게 화를 표현하고 그들로부터 진심 어린 사과를 받아내야 피해자들의 마음이 가라앉을 것입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트라우마로 인한 상실과 분노가 더 이상 그들(p. 151)의 삶의 중심에 있지 않게 될 때 피해자들은 비로소 트라우마 이전의 자신과 트라우마 이후의 자신을 통합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지나간 일인데 어쩌겠어? 이제부터의 삶이 중요하잖아" 라는 말보다는 "그 분하고 억울한 마음을 어떻게 풀어볼까?" 하는 말이야말로 이런 피해자들에게 먼저 필요한 위로의 말일 것입니다(p. 152).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사고의 전환 "나는 하느님이 주신 세 가지 은혜 덕분에 크게 성공할 수 있었다. 첫째, 집이 몹시 가난해 어릴 적부터 구두닦이, 신문팔이 같은 고생을 통해 세상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많은 경험을 쌓을 수 있었고, 둘째, 태어났을 때부터 몸이 몹시 약해 항상 운동에 힘써왔기 때문에 건강을 유지할 수 있었으며, 셋째, 나는 초등학교도 못 다녔기 때문에 모든 사람을 다 나의 스승으로 여기고 누구에게나 물어가며 배우는 일에 게을리 하지 않았다."(마쓰시타 고노스케) 우리나라 기업인들에게 가장 많은 영항을 미친 경영자는 '경영의 신'이라고 불리는 마쓰시타 고노스케(1894~1989)일 겁니다. 잘 알려진 대로 마쓰시타는 파나소닉이라는 브랜드로 유명한 마쓰 시타전기산업의 창업자입니다. 일본의 전자 산업하면 우리들은 소니를 떠올리지요. 소니는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지만 일본 내에서의 평판이나 인기는 마쓰시타를 따라잡지 못했습니다. 사람을 한번 고용하면 평생 같이 가는 가족적인 일본식 기업 문화는 그로부터 시작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초등학교 중퇴자였지만 그는 콤플렉스를 동기 부여로 바꿔 성공한 사람입니다. "나는 가난 덕(p. 236)분에 열심히 일해서 부자가 될 수 있었다, 나는 배우지 못한 덕분에 평생 공부할 수 있었다”는 것이지요. 그가 성공할 수 있었던 비결은 바로 '사고의 전환' 이었습니다. 즉 매사 '때문에'가 아니라 '덕분에'로 임한 결과 인생의 장애물을 인생 도약의 뜀틀로 바꿀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마쓰시타는 콤플렉스를 부정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을 발전시킬 수 있는 원동력으로 삼은 것이지요. 긍정적 사고와 희망의 중요성을 말해주는 사례인데,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데에도 긍정적 사고와 희망 이상의 치유책은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p. 237). 가족을 잃은 상실감은 말할 수 없이 큰 슬픔이자 고통입니다. 그래서 트라우마를 겪은 많은 사람들은 트라우마로 인한 상실을 받아들이고 슬퍼하는 것을 피하려 합니다. 트라우마의 기억을 피하려 하듯이 상실감도 회피하고 외면하려고만 하는 것이죠. 그리고 조반니처럼 "내가 그때 그런 실수만 하지 않았다면”이라는 자책감에 오랫동안 머물러 있으려 합니다. 어쩌면 상실감을 인정하는 것보다 자책을 하는 것이 덜 괴롭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현실을 외면하는 태도일 뿐입니다. 현실을 받아들이고 현실에 적응하는 것을 늦추기만 할 뿐이지요. 상실감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되돌릴 수 없는 현실에 직면하고 상실에 대해 충분히 슬퍼하고 아파해야 합니다. 이것을 적응적인 애도 반응adaptive grieving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애도 반응이 언제 끝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언제쯤 끝나야 한다는 원칙도 없습니다. 얼마든지 슬퍼하고 원망하고 애통해해도 됩니다. 다만 그런 과정을 통해 서서히 상실로 인한 슬픔과 아픔이 인생의 중심에서 멀어져가면 됩니다. 이렇게 상실감을 받아들이는 것은 누가 뭐래도 살아남은 자의 몫입니다(p. 271). 험난한 이 세상, 너무나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 속에서 커다란 풍랑에 휩싸이지 않고 별 기복 없이 순탄하게 살기가 참 쉽지 않습니다. 우리는 언제든 뜻하지 않게 큰 사고를 당해 목숨이 위태로울 수 있기 때문이지요. 또한 한순간에 누군가에게 배신당할 수도 있고, 협박당할 수 도 있고, 버림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트라우마는 누구에게나 바로 옆에 있는 것입니다. 통계에 따르면 두 명 중 한 명은 일생에서 트라우마에 해당되는 사건을 경험하게 된다고 합니다. 정면으로 트라우마와 맞부딪치게 되었을 때 그 충격과 후유증의 흔적이 얼마나 깊게 남을 것이냐 하는 데 가장 중요한 영향을 끼치는 것 중 하나가 가장 가까운 사람, 즉 가족 • 친구 • 연인 • 배우자의 태도입(p. 277)니다. 가장 가까운 사람의 이해와 지지 그리고 함께 아파해주는 공감은 고통스러운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데 가장 커다란 자원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반대로 가장 가까운 사람으로부터 이해와 지지, 공감을 받지 못할 경우 트라우마의 상처는 오히려 점점 더 깊어지게 됩니다. 특히 어머니라는 절대적 존재로부터의 공감의 결여는 그 자체만으로도 또 다른 제 2의 트라우마가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p. 2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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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3-30
  • 【신간】 GMS 이사장 양대식 목사, 『리더와 문제해결』 출간
    리더와 문제해결에 대한 책이 출판되어 화제다. GMS 이사장이며 진주성남교회를 담임하는 양대식 목사가 35번째 신간 『리더와 문제해결』을 발표했다. 이 책은 ‘수많은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가?’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는 지혜가 담겨있다. 리더라면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다. 저자를 강사로 모셔 강의를 듣고 집회강사로 청하면 큰 유익이 있을 것이다. 저자인 양대식 목사는 리더십과 관계 전공자요 실천신학자로서 지금까지 수많은 책을 저술했다. 저자의 연락 전화는 010-4944-9434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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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3-27
  • 【북토크369】 자신을 잘 관리하고 있는 배우, 하정우
    배우, 화가 하정우가 쓴 두 번째 책을 먼저 읽고 흥미로워 이전에 쓴 책을 찾아 읽었다. 이 책은 현재 일시품절 되었다. 이 책에서 그는 화려한 배우가 아닌 일상의 삶을 사는 생활인임을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지금까지 별 스켄들 없이 배우, 감독, 화가로서의 길을 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각자 자기 인생을 잘 관리하는 것이 필요하다. 종종 성적이 아주 좋았던 야구 선수가 자유계약선수가 되어서 억대의 계약금을 받자마자 바닥을 치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러면 사람들은 돈 때문에 정신을 못 차려서 그렇다고 쉽게 비난하곤 한다. 나 역시 사람들의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하면 정말 무서운 일이다. 그의 원래 꿈은 돈이 아니었을 테니 말이다. 중요한 순간에 한 방 터뜨려주는 홈런 타자, 제로에 가까운 방어율을 자랑하는 완벽한 투수, 그런 것이 그의 꿈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돈이 생기자마자 그는 꿈을 잊는다. 이제 자신의 꿈이 무엇이었는지 까맣게 잊은 채 더 높은 연봉이 새로운 꿈이 되어버린다(p. 26). 하지만 돈이나 명예는 꿈이 아니라 수단일 것이다. 꿈을 향해 걸어 갈 때 덜 고통스럽도록 도와주는 조건. 남의 시선에 현혹되어 이것을 꿈이라고 착각할 때 사람들은 추락한다. 진짜 꿈을 꾸는 법을 잊고 헤매기 시작한다. 나는 이것이 정말 두렵다. 그래서 나는 언제나 꿈을 꾸는 사람이고 싶다. 그래서 지금 내 꿈은 바로 그림을 그리는 사람, 그림을 그리며 살고 싶다는 것(p. 27). "프로처럼 하시네요." ""아, 프로처럼요?" "네, 프로처럼 작업하고 계세요. 혹시 팔레트도 볼 수 있을까요?" 프로처럼, 그 말이 위축되어 있던 내게 커다란 자신감을 주었다. 그리고 그 말에 용기를 얻어 2010년 3월 첫 전시회를 열기에 이른다. 그냥 시작한 그림이었는데 전시회까지 하게 되었다. 그제야 '그냥'이라는 말에 어떤 의미가 담겨 있었는지 깨달았다. 왜 그토록 그림을 그리고 싶었는지도. 영화에서 배우는 순수한 창조자가 될 수 없다. 영화는 감독의 창작물이기 때문이다. 배우는 감독의 오브제일 뿐이다. 물론 연기는 내게 충분히 매력적인 일이다. 감독의 의도를 읽고 그의 머릿속에 있는 것(p. 32)을 구체적으로 만들어내는 일은 힘들지만 희열감을 준다. 그러나 내가 가진 창조력을 마음껏 발휘할 수는 없다. 더군다나 내게 연기란 넘치는 감정이 아니라 차가운 머리로 하는 일이다. 연기란 감정의 몰입이 아니라 감정의 배분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곧 어느 감정에 몰두하는 것보다 그 감정을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여줄 것이냐를 고민하는 것이 내 방식이다. 다양한 가능성을 머릿속으로 생각하고 그대로 재현하는 것, 그것은 엄격한 논리에 의해 이루어진다(「제가 무당입니까?•••••」, 88쪽). 그러므로 연기를 하면 할수록 마음의 덩어리는 더욱 커져만 간다. 어떻게든 쏟아내면 좋겠는데.... 그런 자세로 촬영에 임하면 절대 좋은 연기가 나올 수 없다. 그래서 나는 그 마음을 더 다스린다. 덩어리가 꿈틀거릴수록 더 냉정해지고 엄격해지고자 애쓴다. 그렇게 집으로 돌아오면 가슴이 뻐근하고 답답했다. 자는 내내 물로는 해갈되지 않는 심한 갈증이 났다. 이유는 깨닫지 못했다. 그러다 문득 그림이 그리고 싶어졌다. 내게 무언가를 풀어내고 싶은 욕망이 있으니 그림으로 해소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붓을 잡은 것은 아니다. '그냥' 그리고 싶었다. 잘 그리지도 못하고 배운 적도 없는 그림이지만 그리고 싶었다.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자 가슴속의 덩어리가 쑥 빠져나가는 것처럼 몸이 가벼워지고 또 개운해졌다. 그때 알게 된 것이다. 내가 어째서 그림을 시작하게 되었는지 말이다. 그림으로 나는 억눌렀던 감정을 자유롭게 풀어놓는다. 이해해야 할 시나리오도, 조율해야 할 의견도 없다(p. 34). 그저 마음대로 움직이기만 하면 된다. 오로지 내 것인 창작물이 생기는 기분 또한 짜릿하다. 거실에 완성한 그림들을 늘어놓으면 나만의 세계 속에 들어와 있는 것 같아서 편안한 기분이 든다. 누구도 이 세계는 침범하지 못한다. 이제 나는 그림과 연기를 두 바퀴로 삼아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이 되었다. 연기를 하고 돌아오면 팽팽해진 신경과 굳어진 이성 때문에 그림을 그리지 않을 수 없다. 억눌렀던 감정과 창작욕을 그림을 통해 발산하고 나면 연기를 할 수 있는 텅 빈 상태가 만들어진다. 연기가 그림을 부르고 그림이 연기를 가능케 하는 에너지가 되어주는 것이다. 이렇게 그림과 연기는 상호작용을 하며 내 세계를 더욱 넓고 깊게 만들고 있다. 아버지는 바쁜데 어떻게 그림까지 그리느냐며 놀라워하신다. 하지만 이제 그리지 않는 삶을 상상하기란 불가능할 만큼 그림은 내 생활의 일부가 되었다. 연기를 하지 않는 하정우를 생각할 수 없듯이 말이다. 그러니 내가 지금처럼 계속 그림을 그리면서 살아갈 수 있기를 희 망한다. 그 꿈을 꾸는 동안 나는 추락하지 않고, 연기하는 삶을 이어갈 수 있을 테니(p. 35). 영화 〈황해〉를 보면 사람들에게 쫓기던 구남이 우는 장면이 있다. 1분 30초밖에 되지 않아서 쉽게 찍은 것처럼 보인다. 카메라가 돌아가고 구남이 울면 끝. 짧으면 10분, 엔지가 나서 시간이 더 걸렸다고 해도 20분, 아마도 그렇게 생각하실 것이다. 하지만 그 짧은 장면을 찍는 데 꼬박 하루가 걸렸다고 하면 믿으실까. 우선 스태프들이 새벽 4시에 일어나 촬영지로 간다. 도착해서 카메라와 조명을 설치하는 데에만 네 시간, 분장하는 데 두 시간, 그러고는 리허설에 들어간다. 내가 어떻게 연기할지 설명하면 그 동선에 따라 카메라의 위치와 앵글을 예상해보는 과정이다. 새벽부터 준비했으나 한낮이 되어서야 비로소 촬영이 시작된다(p. 48). 보통 두 대의 카메라가 돌아간다. 하나는 멀리서 전경을 잡고 다른 하나는 그보다 타이트하게 잡는다. 일단 신의 처음부터 끝까지 한 번에 연기한다. 그리고 카메라와 조명의 위치를 조금씩 옮겨가면서 네 번 정도 찍는다. 이때 위치를 옮기는 데만 30~40분씩 걸린다. 배우는 감정을 유지하며 기다리다가 위치가 확정되면 다시 찍는다. 위치 바꾸고 찍고, 위치 바꾸고 찍고, 위치 바꾸고 찍고. 다음으로 타이트하게 찍는 작업에 들어간다. 전경을 찍을 때와 마찬가지로 위치 바꾸고 찍고, 위치 바꾸고 찍고, 위치 바꾸고 찍고. 하지만 이게 다가 아니다. 인서트라고 해서 특정 부분만 찍는 작업도 거쳐야 한다. 양말, 발, 상처난 부위 등을 찍는 것이다. 빨리 찍으면 30분. 더 걸리면 한 시간. 지금 이것은 〈황해〉 전체가 아니라 딱 1분 30초짜리 장면을 찍는 과정을 설명한 것이다. 감독, 스태프, 배우 누구라고 할 것 없이 영화를 찍는 일이 이렇게 고되다. 그래서 나는 배우가 결코 우아한 직업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비유가 아니라 연기는 진짜 '노동'이다(p. 49). 운명을 믿지 않는다. 다만 열심히 꿈을 꾸면 언젠가 그 꿈이 내 곁으로 오는 것일 뿐이다. 하지만 멀리서 삶을 바라보면 모든 삶의 과정이 마치 누군가의 시험, 또 은총처럼 생각될 때가 있다. 동생의 전화를 받고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언젠가 영화를 찍으러 뉴욕에 다시 오리라 다짐했을 때는 미처 몰랐다. 정말 내가 뉴욕에 영화를 찍으러 가게 될 줄은. 하지만 2006년 〈두번째 사랑〉을 찍으러 뉴욕에 가게 되었다. 열심히 꿈을 꾸었고 그래서 그 꿈이 내게 와준 것이다(p. 168). 촬영장에서 쓰던 합판을 잘라 그 위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합판은 새로운 질감을 시도하기에 안성맞춤이었고 영화 촬영중에 그런 그림이라는 현장성도 살릴 수 있어서 마음에 꼭 들었다. 나무 위로 쏟아지는 화려한 별빛들. 그 그림을 그리면서 행복했다. 곤두서 있던 신경이 가라앉았고 다시 새로운 에너지가 마음속 깊은 곳에서 차오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림을 완성하고 나서 20년 뒤, 30년 뒤의 내 모습을 떠올려보았다. 나는 찰리 채플린 같은 배우가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의 코미디도 좋아하지만 무엇보다 그가 영화의 모든 부분을 장악하고 있다는 점이 부러웠다. 채플린은 연기뿐만 아니라 각본, 연출 그리고 음악까지(p. 215) 직접 담당했다. 그리고 놀라운 점은 시간이 훌쩍 흐른 지금까지도 그의 영화가 대중에 통한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타고난 듯 보이는 재능과 감각 뒤에는 얼마나 많은 노력과 고민이 숨어 있겠는가. 그래서 채플린이 더욱 크게 다가온다. 그렇다고 내가 그처럼 되지 못할까봐 초조하지는 않다. 꿈을 꾸는 것만으로 마음이 풍요로워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꿈을 꾸는 순간에 당장 새롭게 해야 할 일들이 생긴다. 가끔 젊은 나이에 보여줄 수 있는 모든 매력과 재능을 소진하고 일찍 시들어버리는 이들을 보면 아깝고 아쉽다는 생각이 든다. 젊음은 완성된 상태가 아니다. 매 순간 사람은 끊임없이 배우고 채워 나가는 과정중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히려 한 인간이 가장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시기는 노년이 아닐까. 노인이 되었을 때 그에게는 삶에서 체득한 많은 장점이 차곡차곡 쌓여 있을 것이다. 나이 들어가는 것이 하나도 두렵지 않다. 지금보다 나는 더 성장해 있을 것이고 더 화려한 꽃을 피울 수 있을 테니까. 그런 점에서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내가 생각하는 아름다운 노년의 모습을 보여주는 배우이다. 연기만을 해오던 그는 1971년. 우리 나이로 마흔두 살이 되던 해에 〈어둠 속에 벨이 울릴 때〉를 연출하여 호평을 받는다. 그리고 여든두 살인 지금까지도 비평가와 대중을 놀라게 하는 작품들을 끊임없이 발표하고 있다(p. 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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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3-05
  • 【북토크368】 희귀 질병에 걸린 여성 청년
    중3때 희귀 질병에 걸린 여학생이 쓴 글을 모든 책이다. 질병이 한 사람을 어떻게 어렵게 하는가를 보여주지만 그 가운데서도 필자는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 사지육신 멀쩡하게 살아가는 일상에 감사하며 이러한 삶을 누리지 못하는 자들에 대해 생각하는 기회를 가졌다. 세 번째 자기소개 때 나는 마스크를 벗고, 나의 다른 특징들을 소개하듯이,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하고 웹툰을 즐겨 본다는 것을 말하듯이, 나에게 병이 있다는 사실을 '오픈'했다. "나는 책 읽는 걸 좋아해. 음악은 시끄럽지 않은 걸 좋아하고, 그림을 좋아하고, 병이 있어?" 이때 상황을 마주한 나의 심리는 한껏 불었던 풍선에서 바람이 '푸시시' 하고 빠지는 것과 같았다. 새 친구들은 "힘 내!" 등의 반응을 보였다. 하긴 더 무슨 반응을 할 수 있을까? 갑자기 너의 아픔을 이해한다며 다가와도 당황스러울 것이 빤했다. 잘 알지 못하는 아이들에게 무언가 극적인 반응을 기대한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상상보다 평범하고 무난한 반응에 묘한 허탈감이 들었다. 어떤 공격이 들어올지 몰라 잔뜩 몸을 부풀린 채 경계 태세를 취하다가, 사실 그것이 지나가는 사람의 무해한 그림자에 불과했다는 걸 알아버린 길고양이가 된 기분. 병을 진단받고 가장 걱정했던 것이 혹시라도 사람들이 '아픈 사람' 이미지에 가려서 내가 정말 어떤 사람인지 봐주지 않으면 어떡하지, 하는 것이었다. 어쩌면 나를 '환자'라는 말에 가두고 나의 온갖 무궁한 가능성을 가장 먼저 재단해버린 게 나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p. 41). 시험 점수는 우리의 지극히 일부만을 담고 비춘다. 우리는 그것으로 전체가 평가되기에는 아주 무한한 가능성을 품고 커다란 미래를 꿈꾸는 존재다. 물론 등급으로 나누는 것처럼 동일하고 협소한 잣대로 평가를 마치면 편리하다. 한 아이가 걸어온 시간을 깊게 생각하지 않더라도 숫자만 보고 판단을 끝낼 수 있다. 하지만 동시에 오류를 범하기 쉽고, 잔인하며, 폭력적이다. 아이들의 시선을 한곳에 고정하고 다른 길은 없다고 귓가에 대고 끊임없이 속삭이는 거다. 좌절을 맛본 뒤(p. 50) 딛고 성장하는 것이 어려워지도록. 나 역시 병에 걸리고, 그간 쌓아온 공든 탑이 무너졌다며 절망해서 다시 일어나기까지 아주 오래 걸렸을 수도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아찔해진다(p. 51). 병 때문에 인생 망했다고? 나에 대해 잘 모르는 다른 반 친구들과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다. 친구들끼리 수다가 으레 그렇듯 대화는 종잡을 수 없이 흘렀고 '존엄사'에 대해 이야기하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 허용된 존엄사의 범위, 존엄사를 선택하는 이유 등. 주로 삶에 대한 희망이 없거나 더는 살고 싶지 않은 마음에서 하는 거겠지. 한 친구가 말했다. "나는 큰 병에 걸리면 힘들게 치료받으면서까지 살고 싶지 않을 것 같아?" 헉, 그렇구나. 그렇게 생각하는구나. 크다면 큰 병을 안고(p. 86)서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잠시 말문이 막혔다. 하지만 이 친구는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잘 모르니까. 불과 지난해까지는 나도 '큰 병' 하면 말기암을 생각했고, '난치병' 하면 백혈병을 떠올렸다. 내가 어디 심각하게 아픈 것 일지 모른다고 생각할 때도 저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내가 본 TV 프로나 웹툰, 소설 등에서 병 하면 가장 흔하게 쓰이던 소재였기 때문이다. 세상엔 수많은 병이 있고, 큰 병을 앓는다고 반드시 일상을 영위하지 못하는 건 아니며, 치료제를 찾을 길 없는 희귀 난치병에 걸렸다고 365일 매일 24시간 동안 절망의 쓴맛만 느끼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몰랐다. 1년 전 나처럼 생각했을 것으로 짐작되는 그 친구는 내가 큰 병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제대로 알았다면 그런 말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몰랐던 사람이 실수하는 것에 상처받을 필요는 없다. 실수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알고도 깊이 생각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 지난해 병을 진단받은 직후, 왜 이렇게 오랫동안 학교에 나오지 않았냐고 묻는 아이가 있었다. 고등학교 입시 철이었기에 특목고나 예술고를 지원하는 친구들의 자리가 많이 비어 있었다. 아마 입원하느라 장기간 결석한 나에(p. 87) 대해서도 비슷한 맥락으로 유추했을 것이다. 간단히 알려줬다. 내가 희귀 난치병에 걸려 일원해야 했다고. 그 애 입에서 나온 맡은, "뭐? 그럼 네 인생 망했네?“였다. 아직도 그 장난스러운 어투와 올라간 입꼬리, 가벼운 태도가 뚜렷하게 기억 난다. 나는 앞뒤 생각할 겨를 없이 그 애의 정강이를 발로 찼고, 키가 큰 그 애가 정강이를 감싸 쥐느라 허리를 숙이자 눈 높이로 내려온 멱살을 잡고 할 수 있는 온갖 욕을 퍼부었다. 저속하고 폭력적이게 대응함으로써 같은 사람이 된 것 아니냐고 물으면 할 말은 없지만, 속은 시원했다. 그 애의 행동은 무엇보다 망하지 않았고 포기할 이유도 없는 내 인생에 대한 큰 무례였기 때문이다. 내가 아프지 않았더라면, 그 애가 병이 아니라 다른 것(예를 들어 시험을 망친 일)이 내 인생을 망쳤다고 말했더라면, 그냥 웃고 넘겼을 것이다. 하지만 그 애가 내 병 때문에 내 인생이 망했다고 말한 순간 이 말을 용납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 밖에 없었다. 포기하지 말고 희망을 가지라는 말을 들을 때도 내가 한 줄기 희망을 놓지 말아야 할 만큼 절망적인 상황에 놓인 건가? 그 정도로 심각하고 불행한 상황인가? 그렇게 느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어 기분이 묘해지는데, 멋대로(p. 88) 내 운명을, 그것도 부정적인 방향으로 판단해버리다니. 남의 인생을 놓고 왈가왈부하는 건, 아무리 긍정적 방향이라도 조심해야 하는 영역이라고 생각한다. 다른 사람의 상황을 모르고 말하는 것은 '그럴 수도 있지' 하고 넘어갈 수도 있다. 하지만 알면서도 가볍게 입에 올리는 태도는 나에겐 투쟁의 대상이다. 누구든 내 인생을 함부로 판단하면 자신이 얼마나 가당치 않은 소리를 했는지 알려줄 생각이다(p. 89). 내가 제일 좋아하는 사진은 특별히 여행 갔거나 자랑스러워할 만한 일이 있었을 때 찍힌 사진은 아닌 것 같다. 만약 그랬다면 어떤 연유로 그렇게 즐거웠는지 기억에 남았을 거다. 일상에서도 그렇게 웃긴 표정으로 웃을 수 있다면, 그 순간의 사진을 보면서 또 재미있게 보낼 수 있다면 충분한 것 아닐까. 나는 병과 함께 살고 있다. '병에 걸렸음에도 웃음을 잃지 않는 모습'을 간직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병이 망칠 수 없는 내 일상의 웃음이 있음을 알아두고 싶은 것이다(p. 136). 민들레 씨앗 부는 것을 좋아한다. 언니와 함께 민들레 씨앗 중에서도 줄기를 중심으로 동그랗게 온전한 형태가 남아 있(p. 223)는 것은 '완들레', 반만 있는 것은 '반들레', 바람에 모두 날아가 하얀 줄기만 남은 것은 '간(가버린)들레'라고 불렀다. 짙은 초록색의 잔디밭 사이사이에, 아스팔트 틈새에 싹튼 민들레는 질기게도 자란다. 노란 꽃을 점점이 피워내다가 씨앗을 세상으로 날려 보낸다. 번식을 위해 제 일부분을 강하게 내보내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마침내 한 뿌리에서 나온 두 씨앗이 만나면 어떻게 될지 생각해봤다. 막연하게도 서로를 알아볼 거라는 생각부터 든다. 처음과 끝을 설명할 필요가 없는 두 씨앗이 만나서, 어떤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지 기쁘게 나눌 것 같다. 어디서 왜 출발했는지를 구태여 설명할 필요가 없다는 것만으로도 대화에는 이미 유대감이 싹터 있기 마련이니까 말이다. 병에 그렇게 큰 자리를 내주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내 인생이 이미 병이 있기 전과 후로 명료히 나뉘는 것 같다. 병을 앓는 일이 나에게 거대한 성장 기회가 됐다고 해도 많은 것을 잃게 했고 처음부터 알아가야 한다는 절망을 때때로 느끼게 했다. 병에 걸린 뒤 새로운 나를 다시금 설명하는 일이 곤혹스럽기만 한 것은 아니다. 나를 알려주는 과정에서 다른(p. 224) 사람들에 대해서도 많은 것을 들을 수 있으니까. 특히 그 사람들의 연약한 부분, 차마 내보이지 못했던 아픔에 대해 병을 않기 전보다 후에 훨씬 쉬이 들을 수 있었다. 그런 이야기를 들었을 때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도 진심으로 고민하게 됐다. 그러나 아픔의 처음을 설명할 필요가 없는, 가족이 아닌 사람들을 만나서 일상의 틈새 민들레처럼 산뜻하고 새로운 이야기를 듣는 건 정말 오랜만에 느끼는 노란빛 전율이었다(p. 225). 4학년 때는 매일매일, 단 하루도 빼놓지 않고 일기를 썼다. '매일매일 일기를 썼다'라는 타이틀이 탐났다. 무엇보다 칭찬을 듣고 싶었다. 어려울 것 같지도 않았다. 책을 읽을 때마다 내 입맛에 맞는 문장으로 다시 써보고, 이야기를 새로 만들어 보고, 인물을 상상해봤다. 그러니 일기를 쓰는 것도 쉬울 것 같았다. 하지만 글을 쓸 때 가장 어려운 건 지속적으로 쓰는 거라 는 사실을 몰랐다. 박지원이 재물을 샘에 비유한 것처럼, 글도 비슷한 것 같다. 많이 쓰면 고갈되는 것이 아니라 새로 솟는다. 쓰지 않으면 고여버린다. 내 글은 그때가 가장 맑고 신선했던 것 같다. 맑은 물을 마시듯 글을 썼었다. 중학교 동안은 읽기와 쓰기를 거의 손에서 놓았었다. 아무도 내게 일기를 매일 쓰라고 하지 않았다. 중학교 들어서 새로 생긴 휴대폰 속에도 텍스트는 있었다. 종이로 된 두꺼운 책보(p. 256)다 훨씬 쉽게 읽히기도 했다. 책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무엇보다 책을 읽으며 보내는 시간이 죄스러웠다. 수학 문제를 풀고, 노트 필기를 외우는 것만이 공부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내가 읽어왔던 책들이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러다가 중학교 3학년이 되었을 때 수행평가로 자서전 쓰기가 있었다. 굴곡 없는 삶이라서 쓸 일이 없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때는 고작 한 달 뒤에 희귀 난치병을 진단받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 하던 때였다). 매일매일 뭘 쓸지 생각했다. 어렵고, 생각이 막힌 것 같아 힘들었다. 하지만 동시에 흥분되었다. 재미있었다. 행복했다. 자기 전에 무슨 말로 글의 서두를 뗄지, 할아버지와 있었던 나의 첫 기억을 무슨 단어로 쓸지 고민하는 것이 너무 즐거웠다. 가장 정확한 글을 쓰고 싶었다. 기억은 원석이었고, 나는 끌과 망치를 가지고 원석을 어르고 달래서 세공하는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마침내 글을 완성해서 냈을 때, 국어 선생님이 나를 교탁 앞으로 부르셨다. "너처럼 글을 잘 쓰는 애를 오랜만에 본 것 같아. 앞으로 뭘 쓸지 기대된다?" 나는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다. 다시 매일매일 글을 썼다. 생각나는 모든 것들을 썼다. 내가 생각하는 모든 문장은 글(p. 257)이 되고, 마치 그러기 위해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나에게 글 쓰는 일은 환희다. 아주 고통스럽고 뜨거운 환희. 그리고 비로소 나는 한 번도 글을 쓰지 않는 삶을 상상해본 적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p. 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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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소개
    2026-03-03
  • 【북토크367】 역사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증거한다
    역사 가운데 인간들은 다양한 시대와 국가에서 어리석은 일들을 반복했다. 지금보면 얼마나 어이없는 일이던가. 지금 나름 현명하다고 자부하며 하는 일들이 이후에 보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 되겠는가? 인간의 어리석음은 계속해서 반복된다. 재미있게 읽었는데 나온지 20년이 되다보니 현재는 절판되었다. 미라 제조법 고대 이집트인들은 죽은 자의 영혼이 몸으로 다시 돌아온다고 믿었기에 시체를 원래대로 잘 보존하려고 했다. 미라 제조는 그런 필요성에 의해서 생겨난 것이다. 기원전 5세기의 역사가 헤로도토스는 당시의 미라 제조법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천연 소금인 나트론을 사용해 시체를 건조시켰다. 나트론은 수분을 흡수하고, 시체의 지방을 녹이며, 피부의 탄력성을 유지시키기 때문이다. 미라를 완성하는 데는 보통 70일이 걸리는데, 그 중 40일을 시체 건조작업에 할애한다. 미라를 제조할 때 우선 뇌부터 제거한다. 미라 제조인은 끝이 구부러진 갈고리를 콧구멍에 집어넣어 뇌를 끄집어낸다. 오늘날까지 잘 보존된(p. 119) 미라를 살펴보면, 대부분 코뼈에 구멍이 뚫려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 구멍으로 갈고리를 넣어 두개골 속의 뇌를 휘저은 뒤 액체상태가 된 뇌를 콧구멍으로 배출시키는 것이다. 그런 다음 나뭇진을 액체상태로 만들어 빈 두개골에 채워 넣는다. 그 다음에는 내장을 제거하기 위해 시체의 왼쪽 옆구리를 절개한다. 약 10-15센티미터쯤 절개하는데, 숙련자라면 그 절개 부위에 손을 넣어 위와 창자와 허파를 쉽게 꺼낼 수 있다. 하지만 심장은 반드시 몸 안에 남겨두어야 한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심장을 생명 그 자체로 여겼기 때문이다. 저승에 가서 오시리스 신에게 심판받을 때 진실의 저울에 그 심장을 올려놓는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 외에 신장, 간장, 방광, 자궁 등 도 그대로 남겨두었다. 그런 다음 다시 옆구리를 꿰매고 시체를 물로 닦은 뒤 나트론으로 덮어 수분을 제거한다. 시체가 건조되면 피부의 탄력을 되살리기 위해 밀기름과 밀랍, 나트론, 껌의 혼합물로 몸을 문지른다. 그리고 체내에 모래와 아마포와 톱밥 등을 채워 넣어 모양을 다듬는다. 이제는 붕대로 시체를 감을 차례다. 이때 사용되는 붕대는 나뭇진이 스며든 아마포로, 그 길이만 해도 수백 미터나 된다. 붕대를 감는 방법은 시대마다 조금씩 다른데, 그것을 바탕으로 미라가 살았던 시대를 추측할 수 있다. 처음에는 대부분 수의로 미라를 감싼다. 그 다음에 손가락과 발가락을(p. 114) 하나씩 감는다. 사지까지 따로따로 감고 나면 커다란 옷으로 감싸고 폭 넓은 붕대로 고정시킨다. 붕대를 감으면서 간간히 부적을 집어넣는다. 투당카엔의 미라에서는 부적이 143장이나 발견되었다. 신분이 낮은 귀족들도 보통 40장쯤 들어 있다. 붕대를 감는 일은 2주일이나 걸리는 고된 작업이다. 붕대를 갉아먹으며 미라 안으로 들어갔던 쥐가 계속 붕대를 감는 바람에 밖으로 빠져나오지 못하고 3천 년 뒤에 뼈로 발견된 적도 있다(p. 115). 채찍질하는 고행자 유럽에서 흑사병이 맹위를 떨치던 1349년, 독일과 플랑드르, 네덜란드, 스위스 등지에 기이한 차림으로 거리를 돌아다니는 순례단이 등장했다. 하얀 천으로 몸을 감싸고 십자가가 달린 모자를 쓴 그들은 참회의 목소리를 높이며 자신들의 몸을 가죽 끈으로 채찍질하면서 각 지역을 돌아 다녔다. 가죽 끈에는 단단한 매듭이 있었는데, 그 안에 바늘처럼 날카로 운 쇠못이 들어 있었다. 그 때문에 몸에 채찍질을 할 때마다 살갗이 찢어지고 피가 흘러나왔다. 그들 주변에 몰려들어 끔찍한 그 광경을 지켜보던 사람들도 어느새 그들에게 흘린 듯 옷을 벗어던지고 스스로 자신의 몸에 채찍질을 하기 시작했다(p. 120) 그들은 마을 광장이나 교회에 도착하면 옷을 벗어던지고 알몸으로 땅 바닥에 엎드리거나, 혹은 빙 둘러앉은 뒤 한가운데에 아이의 시체를 높히고는 부활을 기원하는 노래를 부르며 자신의 몸을 채찍질했다. 그들의 피가 땅바닥을 적시거나 교회 벽에 튀면, 그 광경을 지켜보던 사람들도 어느새 흥분하여 그 분위기에 휘말리고 말았다. 그것은 흑사병 때문에 끝없는 공포에 휩싸인 군중들이 자신을 죄인으로 여기고 자학하면서 신의 분노를 달래려 한 집단 히스테리였다(p. 121). 성유물에 열광하는 사람들 중세 유럽에서는 성인을 숭배하는 풍습이 크게 유행했다. 기적을 일으 킨 사람이나 위업을 달성한 사람을 성인으로 숭배하곤 했다. 그러자 성인과 관련된 물건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기 시작했다. 성인의 신체 일부나 생전에 성인이 애용하던 물건을 흔히 성유물이라고 하는 데, 당시 사람들은 특히 성인의 시신을 선호했다. 그 때문에 성인들은 묘지에 안치된 뒤에도 수난을 당해야 했다. 옷을 찢어가거나 머리카락을 뽑는 것은 물론이며, 심지어 머리와 팔과 다리까지 잘라가기도 했다. 시신의 일부라도 수중에 넣어 그 성인의 공덕을 물려받으려 했던 것이다. 가령 13세기에 유명했던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가 죽었을 때는 제자들이 그의 몸통과 머리를 잘라 냄비에 부글부글 삶았다고 한다. 시체를(p. 122) 균등하게 나누기 위해서였다. 원래 교회나 수도원은 성유물을 바탕으로 성립된 것이다. 성 O0 교회, 성 OO 수도원이라는 이름은 모두 그 성인의 유물을 소유하고 있는 데서 비롯되었다. 그러므로 진짜 성유물을 구하기란 쉽지 않다. 아무리 시체를 잘게 토막낸다 해도 그 수는 한정되어 있게 마련이다. 성유물 붐은 점차 일반 대중들에게까지 확산되었다. 하지만 이제 성유 물을 구하려면 그리스도교의 성지인 예루살렘까지 직접 찾아갈 수밖에 없었다. 마침 예루살렘에서는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박힌 골고다 언덕과 그 시신을 매장한 동굴이 발견되었다. 그리스도가 부활했다는 장소에 교회도 세워졌다. 그러자 성지순례 같은 여행 코스가 만들어져 유럽 각지에서 관광객들이 몰려들었다. 관광객들은 그리스도가 갇혀 있던 감옥이나 최후의 만찬이 행해졌던 집을 돌아보고, 성지의 흙으로 만들었다는 요상한 선물을 사들고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돌아갔다고 한다. '성유물 붐'과 '예루살렘 순례 붐'이 절정에 달했을 즈음, 십자군 전쟁이 시작되었다. 유럽에서는 대중들이 성유물을 차지하기 힘든 만큼, 성유물만 손에 넣을 수 있다면 기꺼이 전쟁터에 가겠다는 자들이 들끓었다. 상황이 여의치 않아 십자군 원정에 참가하지 못한 사람은 연고가 있는 십자군 병사에게 성유물을 부탁하기도 했다. 그리하여 십자군을 통해 동방에서 수많은 성유물이 유입되었다. 그리(p. 123)스도의 십자가 조각이라는 등, 그리스도가 땀을 닦은 수건이라는 둥, 최후의 만찬에 사용한 테이블 조각이라는 둥, 그 진위를 확인할 수 없는 물건들이 유럽 곳곳에서 등장했다. 사실 그리스도가 죽은 지 천 년이 넘었으니, 진짜 성유물이 그렇게 많이 남아 있을 리 만무하다. 하지만 당시 사람들은 동방에 진짜 성유물이 많이 남아 있으리라고 믿었다. 그 당시 콘스탄티노플의 상인들은 가짜 성유물을 만들어 십자군 병사에게 비싸게 팔아넘겼다고 한다(p. 124). 사후에 신이 되는 황제 로마제국에는 죽은 황제를 신으로 받드는 관습이 있었다. 그들은 죽은 황제를 위해 훌륭한 신전을 세우고 제사장과 신관까지 임명했다. 황제가 죽으면 원로원은 그 황제의 업적을 먼저 체크했다. 그리고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판단되면 국가의 신으로 제정했다. 원로원은 황제가 신으로 적당치 않다는 판정을 내리기도 하는데, 간혹 범죄자로 낙인찍히는 황제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황제가 생전에 이룬 업적은 모두 무효가 되어 모든 서류에서 황제의 이름이 말소된다. 실제로 그렇게 이름이 삭제된 황제의 비문이 지금까지 남아 있다. 황제를 신격화하던 기원전 1세기에는 장례식 때 황제가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목격했다는 증인까지 등장했다. 2세기가 되자 황제의 신격화(p. 129) 의식은 한층 더 화려해졌다. 황제가 죽으면 우선 일반적인 방법으로 매장한 뒤 황제와 닮은 밀랍인형을 만들어 상아 침대에 눕힌다. 그러면 엄숙한 장례행렬이 그 밀랍인형을 운반해 가서는 거대한 화장대에 올려놓는다. 기마병과 전차병이 그 주위를 행진하다가 마지막에 횃불로 화장대에 불을 붙인다. 어느 정도 불길이 커지면 화장대에서 독수리가 튀어나와 불꽃과 함께 하늘로 날아오른다. 장례식이 끝나면 축성(consecratio)이라는 문구와 함께 화장대와 독수리가 새겨진 기념 코인이 발행되었다. 보통 사람의 화장이라면 재와 함께 유골이 남을 테지만 밀랍인형은 불에 녹아버려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그것이야말로 황제가 지상에서 천상으로 올라가 신이 되었다는 확실 한 증거였던 셈이다. 유머감각이 뛰어난 베스파시아누스 황제는 임종할 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아아, 유감천만한 일이로다. 짐도 결국 신이 되는 건가....."(p. 130). 흡혈귀 전설의 진상 죽은 자가 환생하는 이야기라면 흡혈귀가 먼저 떠오른다. 그리고 흡혈귀의 대명사는 영화나 소설로 익숙해진 드라큘라 백작일 것이다. 싸늘한 기운이 감도는 짙은 안개로 뒤덮인 숲속. 언덕 위의 고성에 검은 망토를 걸치고 서 있는 섬뜩한 사내. 낮에는 어스름한 관 속에 누워 있지만 밤이 되면 묵직한 관 뚜껑을 열고 벌떡 일어나 사냥감을 찾아다닌다. 그는 박쥐로 변신해 하늘을 날기도 하고, 안개나 먼지가 되어 문이나 창문 틈새로 스며들기도 하며, 도마 뱀붙이처럼 절벽을 기어오르기도 한다. 그리고 사냥감을 발견하면 일단 무서운 기세로 상대를 제압한 뒤 늑대처럼 날카로운 어금니로 목을 문다. 그는 사람의 피를 흡수해 자신의 생명을 연장시킨다. 뿐만 아니라 점(p. 138)점더 젊어지기까지 한다. 흡혈귀가 크게 활동한 것은 18세기의 발간 지방이다. 트란실바니아 산맥으로 이어진 그 지방은 흡혈귀 전설의 본거지가 된 뒤로 갖가지 흡혈귀 출물사건이 일어났었다. 하지만 죽은 자가 밤마다 되살아나 피를 빨아먹 는다는 전설은 발칸 지방뿐만 아니라 러시아, 폴란드, 그리스, 터키,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스칸디나비아, 그리고 인도와 아라비아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퍼져 있다. 흡혈귀 전설이 그렇게 널리 퍼진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성급한 매장' 이다. 당시 유럽에서는 가사상태로 매장된 사람이 다(p. 139)시 살아나 묘지에서 기어나오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런 사람을 흡혈귀와 동일시한 것은 아닐까 싶다. 앞서 기술한 유럽의 흑사병도 그 원인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당시에는 아직 페스트 치료법이 발견되지 않았으므로 전염을 막으려면 환자를 격리하거나 매장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생매장을 당한 환자가 가까스로 땅 속에서 기어나와도 사람들에게 환영받기는커녕 두려움의 대상이 될 뿐이었다. 묘지에서 되살아난 사람은 필사적으로 관 뚜껑을 열고 나와, 수의를 걸친 섬뜩한 모습으로 달빛을 받으며 집으로 돌아간다. 며칠 동안 아무 것도 먹지 못해 볼은 홀쭉해져 있고 움푹 들어간 눈에서는 기이한 빛이 번득인다. 수염과 손톱도 길게 자라나 있다. 관 뚜껑을 열고 밖으로 기어 나오면서 여기저기에 상처를 입어 손과 얼굴에는 핏자국이 선연하다. 그런 모습으로 신음소리를 내며 밤길을 비틀비틀 걸어갔을 것이다. 그러니 길에서 우연히 '부활한 사자(死者)'를 만난 사람들이 두려움에 떨며 '환생한 흡혈귀' 로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으리라. 그래서 발칸 지방이나 동유럽에서는 시체가 되살아나지 못하도록 아예 목을 자르거나 화장하기도 했다. 독일의 바이에른 주에서는 일단 사람이 죽으면 시체를 '죽음의 움막'에 안치시켜 정말 죽었는지 확인한 뒤에 매장했다고 한다(p. 140). 사후에 대한 집착 사후세계를 믿었던 고대인들은 죽은 자가 되살아나 자신들의 생활을 위협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가능한 한 멀리 떨어진 곳에 매장하려 했다. 12표법(로마의 가장 오래된 성문법)에서는 도시 안에 시체를 매장하는 것을 금하고 있다. 로마의 아피아가도처럼 도로변에서 고대의 묘가 많이 발견되는 것은 그 때문이다. 하지만 그리스도교가 탄생하면서 성인, 즉 순교자 곁에 매장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당시에 사람들은 묘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마지막 심판의 날에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순교자 곁에 매장되어 마지막 심판의 날까지 영혼과 육신을 잘 보존하고 싶어했던 것이다(p. 158).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성스러운 12사도 교회의 입구에 매장될 수 있도록 교회로부터 허가를 받아냈다. 이를 계기로 일반인들도 앞다투어 교회 안에 매장되려 했다. 그때부터 귀족이나 성직자나 부자들은 교회에 매장 되는 것을 당연한 권리로 생각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들은 점차 교회 입구 쪽에 만족하지 못하고 안쪽에 매장되기를 원했다. 다급해진 교회는 원래대로 되돌리려 했지만 돌이킬 수 없었다. 교회 안에 시체가 넘치면서 위생상의 문제가 발생하자 교회측은 주교와 수도원장과 1등급 평신도만이 교회 안에 매장될 수 있다는 내용을 담은 포고문을 발표했다. 1등급에 대한 기준은 대개 교회에 기부한 액수로 좌우되었다. 사람들은 교회에 기부한 거액의 돈은 자신의 시신이 교회에 매장되어 여러 사람들에게 오래 기억되고 소중하게 받들어지기 위한 대가라고 생각했다. 좀더 부유한 사람은 기부금으로 교회 안에 예배당을 짓기도 했다. 성직자들은 정기적으로 그 예배당에서 기부자의 영혼을 위해 기도하고 미사를 올렸다. 교회 안에 매장되기 어려운 사람들은 교회의 묘지에라도 매장되고 싶어했다. 그곳도 죽은 자의 사회적 지위에 따라 자리가 정해졌다. 가장 인기있는 자리는 건물 동쪽에 위치한 제단의 벽에서 가까운 곳이었다. 마지막 심판의 날에 가장 먼저 해가 뜨는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에(p. 160)반해 북쪽이나 구석진 곳은 악마의 영역으로 여겨져 죽은 태아나 사생아, 자살자 등이 묻혔다. 19세기에 프랑스 브르타뉴에는 자살자 전용 묘지가 있었는데, 자살자의 관은 출입구가 없는 벽 아래로 내던져졌다고 한다. 그런 불명예스러운 일을 당하지 않으려고 자살자의 가족들은 어떻게든 속죄하고 사면을 받으려고 했다. 중세의 어느 파문당한 수도승은 납으로 된 관에 안치되어 성에 맡겨졌는데, 그가 묘지에 매장될 권리를 얻기까지 무려 80년이나 걸렸다고 한다(p. 161). 화장 일반적으로 시체를 처리하는 방법에는 매장과 화장이 있다. 이미 알려진 바와 같이 유럽에서는 오래 전부터 주로 매장을 했는데, 사후에도 사람들에게 오래도록 기억되고 싶은 마음의 표현일 것이다. 그에 반해 오늘날 영국에서는 시신을 완전히 소멸시키는 화장을 선호하고 있다. 시신이 추하게 부패되는 것을 꺼리기 때문이다. 고대 그리스는 기원전 10세기경에 매장에서 화장으로 바꾸었다. 먼 전쟁터에서 죽은 병사들의 시신을 화장해 재로 만들면 고향으로 돌려보내기 용이했기 때문이다. 고대 로마에서도 2세기경까지는 귀족들 사이에서 화장이 일반적이었다. 더 나아가 매장과 화장을 혼합한 형태도 있었다. 죽은 자의 손가락을 잘라 매장하고 나머지 부분은 화장하는 식이었다(p. 164). 화장하고 남은 재는 납골단지에 넣어 콜롬바리움(고대 로마의 지하 납골당)에 안치했다. 그리스도 교도는 화장을 사교의 풍습이라며 기피했다. 그 때문에 유럽에 그리스도교가 보급되면서 매장이 압도적으로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특히 카를루스 대제는 789년에 화장을 행한 자는 사형에 처한다는 칙령까지 내렸다. 하지만 19세기경부터 묘지의 과밀화와 위생상의 문제로 다시 화장이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화장을 주장한 빅토리아 여왕의 외과의사 톰프슨은 1874년에 뜻이 맞는 사람들과 함께 잉글랜드 화장협회를 결성했다. 그들은 정부와 지역주민의 맹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1878년에 브룩우드 묘지 근처에 최초의 화장터를 짓고 화로를 설치했다. 하지만 내무장관의 허가를 받지 못해 화로는 무용지물이 되었다. 그런데 1883년에 웨일스의 한 성직자가 죽은 자신의 아이를 화장한 사건이 발생했다. 아이를 등유 나무통에 넣고 장작에 불을 붙인 것이다. 그는 주민들의 신고로 경찰에 체포되었다가 곧바로 방면되었다. 그로부터 2년 뒤인 1885년 3월에 비로소 공식적으로 화장장이 가동되었다. 처음 화장된 이는 기관지 폐렴과 천식으로 사망한 일흔한 살의 여성이었다고 한다(p. 165). 유언장 예전에는 유언도 상당히 중요한 의식이었다. 유언은 일종의 성스러운 의식으로서 그 의식을 치르지 않으면 파문당하기도 했다. 또한 유언장을 남기지 않고 죽은 자는 교회 묘지에도 매장될 수 없었다. 유언장을 작성하고 보관하는 것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공증인과 주임사제가 담당했다. 유언장의 내용 중 가장 중요한 항목은 신앙을 위한 기부와 유산 분배 였다. 교회나 자선단체에 기부하는 것은 현세의 재산을 천국과 연결시키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이른바 천국으로 가는 패스포트인 셈이다. 요컨대 생전에 어떤 비열한 방법으로 돈을 모았든 임종 때 그것을 교회나 자선단체에 기부하면 모든 죄를 용서받았던 것이다. 중세 사람들은 지옥이 존재한다고 믿고 있었기에 병원이나 가난한 자,(p. 169) 자선단체 등에 거액을 기부했다. 또한 교회에 거액을 기부하면서 영혼의 평안을 위한 미사를 청하기도 했다. 유언장은 대부분 그런 내용들로 체워졌다. 그것이 14세기의 귀족들을 경제적으로 궁핍하게 만든 직접적인 원인이라는 주장도 있다. 그런데 아무리 꼼꼼히 유언장을 작성했더라도 환자 입장에서는 자신의 유언이 제대로 지켜질지, 성직자들이 의무를 제대로 수행할지 불안해지게 마련이다. 그래서 동판에 자신의 이름과 지위, 생년월일, 심지어는 미사의 종류와 횟수까지 새겨넣어 교회에 맡기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기부와 더불어 중요했던 것은 사후의 영혼을 달래주는 미사였다. 그 중에 는 이같은 유언장도 전해지고 있다. "그녀가 죽음의 고통에 빠져들면 가르멜 수도회의 신부가 30회,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의 신부가 30회,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수도사가 30회, 도미니크 수도회의 수도사가 30회 미사를 치러줄 것." 하지만 18세기경부터 유언장의 내용이 크게 바뀌었다. 자선단체에 기부하거나 미사를 위탁하는 내용은 거의 사라졌고, 대부분 재산분배에 관 한 내용들로 채워졌다. 계몽주의의 확산으로 종교에 무관심해졌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머리맡에 모인 가족에게 직접 사랑과 신앙심을 전하게 되면서 유언장에 대한 필요성이 사라졌다는 주장도 있다(p. 170). 자살 클럽 파리, 런던, 빈의 자살 클럽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걸쳐 파리, 런던, 빈 등지에 '자살 클럽' 이 등장했다. 자살하고 싶은데 방법을 모르겠다거나 혹은 마음을 결정하기 어려워하는 회원들의 자살을 도와주는 클럽이다. 1831년 5월 17일자 신문에 슈워츠라는 여성이 경찰에 한 자살 클럽의 실태를 폭로한 기사가 실리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 클럽은 일요일 밤이면 멤버 전원이 건강이 좋지 않은 회원의 집에 모였다. 그리고 4시간 동안 그 사람이 회복되기를 기원하며 기도한다. 그래도 회복될 기미가 보이지 않으면 그 사람의 자살이 결정된다. 지난 일요일에는 슈워(p. 203)츠라는 여성의 오빠 집에 멤버 전원이 모였다. 오빠가 중병에 걸려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기도해도 상태가 호전되지 않자 그녀의 오빠는 이튿날 권총으로 자살했다. 이같은 자살사건이 스무 건쯤 일어난 뒤에야 그 클럽은 경찰에 의해 해산되었다. 헝가리 청년의 자살 사건 1930년 유고슬라비아의 사라예보 경찰이 한 자살 클럽을 적발했다. 그 클럽에서는 자살을 희망하는 회원들이 제비뽑기로 자살자를 지명했다. 밤마다 50명쯤 되는 자살 희망자가 모여 제비뽑기를 했다. 52장의 카드 속에 해골이 그려진 카드를 집어넣고, 그것을 뽑은 회원이 그날 자살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 클럽의 회원이었던 헝가리 청년은 한 여성과 사랑에 빠져 약혼했 다. 말하자면 자살할 상황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는 탈퇴하겠다고 했지만 클럽에서는 조건을 달았다. 탈퇴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바카라 게임을 해서 만약 해골을 뽑으면 자살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청년의 심정이 어땠을까. 어쨌든 그날이 되어 청년은 자신이 받은 카드 두 장을 천천히(p. 204) 뒤집었다. 한 장은 사랑의 성취를 나타내는 하트 에이스였고, 다른 한 장은..., , 해골이었다. 청년은 그 자리에서 말없이 권총을 집어들어 머리에 방아쇠를 당겼다. 그러자 슬픔에 잠긴 그의 연인이 그 클럽을 경찰에 신고했던 것이다(p. 205). 사티 풍습 인도에는 19세기 초까지 사티라는 끔찍한 풍습이 존재했다. 남편이 사망하면 아내도 장작불에 몸을 던져 남편을 뒤따르는 순장제도다. 1829년 영국에 의해 겨우 금지되었지만, 지금도 곳곳에서 그 흔적이 발견되고 있다. 그 풍습을 전해주는 비석이 인도 전역에 퍼져 있는데, 가장 오래된 비석에는 서기 510년이라고 적혀 있다. 사티 풍습은 주로 갠지스 강 유역과 편잡 지방, 남인도에서 전해지고 있었다. 산 제물로 희생되는 여성은 한 번에 한두 명이 보통이지만, 1780년에 조드푸르의 영주가 죽었을 때는 64명의 여성이, 남인도의 영주가 죽었을 때는 만 천 명의 여성이 순장했다고 한다. 그 방법도 무척 다양하다. 남편의 시신에 묶여 장작 위에 올려진 아내(p. 211)도 있고, 남편의 시신을 무릎에 올려놓고 스스로 불을 붙인 아내도 있다. 이때 아내가 고통스럽게 신음하는 것을 불길하게 여겨 그곳에 모인 군중들은 그 신음소리를 듣지 않으려고 큰 소리로 불경을 외워댄다. 때로는 멀리 떠난 남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아내가 스스로 장작불에 뛰어들기도 했는데, 나중에 남편이 무사히 돌아왔다는 어이없는 일도 벌어졌다. 하지만 그렇게 순종적인 아내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당연한 일이지만 아무리 설득해도 끝내 거부하는 아내도 있었다. 1796년 캘커타 근교에서 있었던 일이다. 한 아내가 사티 풍습에 따라 장작 위에 묶여 있다가 어두운 밤이 되자 밧줄을 풀고 도망쳤다. 당황한 가족들이 주변을 샅샅이 뒤져 마침내 그녀를 찾아냈다. 그녀가 사티 풍습을 따르지 않으면 일가의 명예가 실추되기 때문에 어떻게든 그녀를 찾아내야만 했던 것이다. 아들은 어머니에게 장작 위로 돌아가든지 익사하든지 목을 매든지 하라고 했다. 그녀는 아들에게 살려달라고 애원했지만 아들은 다른 식구들과 함께 그녀, 즉 자신의 어머니의 손발을 묶어 장작불에 던져 버렸다. 간혹 저항이 너무 심한 경우에는 다량의 마약을 먹인 뒤 가사상태에서 불길 속에 던지기도 했다. 그런 사티 풍습이 오래도록 이어진 것은 어머니가 죽으면 자식의 경제적 부담이 줄어든다는 실질적인 이유 때문이었(p. 212)다. 하지만 표면적으로는 남편이 없는 세상에서 비참하게 사느니 그 뒤를 따르는 편이 행복하기 때문이라느니, 남편이 내세에서도 반려자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라느니 하는 그럴듯한 이유를 내세우고 있다. 1829년에 마침내 인도를 점령한 영국은 사티 풍습을 용납할 수 없는 살인행위로 규정해서 법률로 금지시켰다(p. 213). "슬픈 소식입니다. 장군님이 차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전쟁이 끝난 뒤 운전사의 고백에 따르면, 롬멜을 태운 차는 집에서 수 백 미터 떨어진 곳에 멈추었다. 동행한 사람들은 그를 남겨두고 차에서 내렸다. 몇 분 뒤에 다시 차로 돌아가보니, 독약을 마신 롬멜이 좌석에 쓰러져 있었다고 한다. 나중에 병원에서 남편의 시신을 본 부인은 이렇게 말했다. "남편은 마치 누군가를 멸시하는 듯한 표정이었습니다. 생전에는 한 번도 그런 표정을 본 적이 없습니다." 사실은 암살음모자들이 고문받을 때 롬멜의 이름을 거론했던 것이다. 그들은 히틀러를 암살하고 롬멜 장군을 대통령으로 옹립할 계획이었다(p. 260). 영웅적인 군인인 데다 인간성도 고결했던 롬멜은 패배한 독일을 구원할 구세주로 여겨질 만큼 절대적인 신뢰를 얻고 있었다. 전부터 롬멜 장군의 인기를 시기하던 히틀러는 그의 이름이 거론되자 크게 격분했다. 하지만 그를 처형시키면 사람들의 반감을 살 우려가 있었으므로 교묘한 방법을 생각해냈다. 그에게 자살을 강요하고, 공식적으로는 전쟁터에서 입은 머리 부상으로 사망했다고 발표했던 것이다. 장례식은 성대하게 치러졌다. 히틀러는 전 국민에게 상복을 입으라고 명했고, 롬멜 부인에게는 장군의 서거에 깊은 애도의 뜻을 표한다는 전보를 보냈다. 군악대가 연주하는 바그너의 〈신들의 황혼〉이 울려퍼지는 가운데, 롬멜 장군의 시신은 포차에 실려 화장터로 향했다. 그의 시신을 화장하기로 한 것은 훗날 시신이 발굴되어도 음독자살한 증거가 남지 않기 때문이었다. 나치스 독일이 붕괴한 것은 그로부터 불과 반 년 뒤의 일이다(p. 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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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3-02
  • 【북토크366】 하정우, 멋지군!
    우연히 알게 되어 읽은 책이다. 배우 하정우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 그런데 책을 보니 건전하게 배우, 화가의 길을 성실하게 가는 ‘생활인’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나보다 젊은 사람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다. 끝까지 롱런 하기를 응원한다. 사람들은 인생살이에서 어떤 기대와 꿈을 품고 살아간다. 나중에는 형편이 나아지겠지, 세월이 지나면 다 괜찮아 지겠지, 지금 이 순간을 견디면 지금보다 나은 존재가 되어 있겠지... 어릴 때는 이런 희망과 꿈이 생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굉장히 높지만, 나이들수록 그 폭은 조금씩 줄어든다. 그리고 어느 순간 다 부질없는 생각이었다고 뉘우치며 포기하는 단계까지 간다(p. 25). 많은 사람들이 길 끝에 이르면 뭔가 대단한 것이 있을 거라 기대한다. 나 역시 그랬다. 그러나 농담처럼 시작된 국토 대장정은 걷기에 대한 나의 생각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우리가 길 끝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은 그리 대단한 것들이 아니었다. 내 몸의 땀냄새, 가까이 있는 사람들의 꿉꿉한 체취, 왁자한 소리들, 먼지와 피로, 상처와 통증.... 오히려 조금은 피곤하고 지루하고 아픈 것들일지 모른다. 그러나 이 별것 아닌 순간과 기억들이 결국 우리를 만든다(p. 26). 만약 나쁜 기분에 사로잡혀서 지금 당장 아무런 일도 할 수 없을 것 같은 상태라면 그저 나가서 슬슬 걸어보자. 골백번 생각하며 고민의 무게를 늘리고 나쁜 기분의 밀도를 높이는(p. 32) 대신에 그냥 나가서 삼십 분이라도 걷고 들어오는 거다. 그러면 거짓말처럼 기분 모드가 바뀌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나는 나의 기분에 지지 않는다. 나의 기분을 컨트롤할 수 있다는 믿음, 나의 기분으로 인해 누군가를 힘들지 않게 하겠다는 다짐. 걷기는 내가 나 자신과 타인에게 하는 약속이다(p. 34). 만약 누가 하루 만 보를 걸으면 무조건 만 원을 주고 1보 당 1원씩 적립해서 환전해준다고 하면 어떨까, 하는 엉뚱한 공상을 해본 적이 있다. 걷기야 팔다리를 움직이기만 하면 되는 쉬운 일이니 그것만으로도 돈이 생긴다면 사람들은 악착같이 걸을 것 같다. 그런데 나중에 나이들고 아픈 다음에 병원비를 왕창 들일 생각을 하면, 지금 우리가 걷는 만 보는 억만금의 가치가 있다는 게 내 생각이다. 오늘 우리가 고단함과 귀찮음을 툭툭 털고서 내딛는 한 걸음에는 돈으로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가치가 있다. 나의(p. 67) 오늘을 위로하고 다가올 내일엔 체력이 달리지 않도록 미리 기름 치고 돌보는 일. 나에게 걷기는 나 자신을 아끼고 관리하는 최고의 투자다(p. 69). 하와이에 왔으니 10만 보 걷기에 도전해보자며 다 함께 목표를 설정한 것 아닌가? 그런데 왜 걷고 있는 도중(p. 78)에 갑자기 그 '의미'란 걸 찾으면서 포기하려고 했을까? 어쩌면 고통의 한복판에 서 있던 그때, 우리가 어렴풋하게 찾아헤맨 건 이 길의 '의미'가 아니라 그냥 포기해도 되는 '이유'가 아니었을까? 애초부터 모든 것이 잘못되어 있었다고, 이 길은 본래 내 것이 아니었다고, 그렇게 스스로 세운 목표를 부정하며 '포기할 만하니까 포기하는 것'이라고 합리화하고 싶었던 거다. 이것은 꼭 걷기에 관한 얘기만은 아닐지도 모르겠다. 살면서 유난히 힘든 날이 오면 우리는 갑자기 거창한 의미를 찾아내려 애쓰고, 그것을 발견하지 못하면 '의미 없다' '사실 처음부터 다 잘못됐던 것이다'라고 변명한다. 이런 머나먼 여정에서 길을 잃었을 때는 최초의 선택과 결심을 등대 삼아 일단 계속 가보아야 하는데, 대뜸 멈춰버리는 것이다(p. 79). 영화의 흥행 실패는 배우에게 뼈아픈 일이다. 어떤 이들은 내게 '하는 일마다 다 잘돼서 좋겠다'고 말하지만, 나의 필모그래피에는 기대했던 만큼 흥행을 하지 못한 작품도 꽤 있다. 윤종빈 감독과 함께한 영화 〈군도〉도 470만 이상의 관객이 들었지만, 당초의 목표는 훨씬 더 컸기 때문에 내가 왜 좀더 잘하지 못했을까 자책했다. 천만 영화나 기적 같은 성공을 거두는 영화들에는 어느 정도 '운'도 작용하지만, 나는 그 운 역시 관객을 끌어모으는 결정적인 한 방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라고 보는 편이다. 반대로 반드시 성공하리라 믿었던 영화가 관객들의 선(p. 111)택을 받지 못했을 때, 나는 아무리 내가 최선을 다했더라도 더 시도해볼 만한 건 정녕 없었을까 복기한다. 이것은 고통스럽지만 꼭 필요한 과정이다(p. 112). 술이나 약물에 흠뻑 중독돼 흐트러진 자세, 충동적인 일탈과 자유분방함, 무절제와 탕진하는 습관, 감정 기복, 우울증과 예민함, 그리고 그 불행과 절망을 딛고 태어나는 훌륭한 예술작품들..... 사람들이 흔히 상상하는 예술가의 이미지는 대체로 이런 쪽으로 귀결되는 것 같다. 성실하고 규칙적으로, 평범한 직장인처럼 살아가는 예술가의 삶은 상상하기 힘들어한다. 내가 배우이자 감독이면서 동시에 그림까지 그리고 있기 때문인지 가끔 ‘예술가로서의 자의식'이 충만한 하정우를 상상했다가 나에게 몹시 실망(?)하는 듯한 사람들도 만(p. 117)나게 된다. "하정우씨는 의외로 바른 생활을 하는 분 같네요?" 이런 말을 들은 적도 있다. 혹은 지금 눈앞의 모습 뒤에 숨겨진 다른 모습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며 이렇게 에둘러 질문하는 사람도 있었다. "좋은 작품은 예술가가 안정적이고 반듯한 길에서 벗어나서 일탈하거나 방황할 때 나오지 않나요?" 사람들이 던지는 이런 질문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안다. 좋은 예술과 안정적인 삶은 양립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단호하게 말할 수 있다. 내가 아는 한 좋 은 작품은 좋은 삶에서 나온다. 그렇다고 내가 지금 좋은 삶을 살고 있다고 자신하지는 않는다. 좋은 작품을 만들기가 쉽지 않은 만큼 좋은 삶을 살기도 쉽지 않다. 나는 다만 좋은 작품을 만들기 위해 건강한 삶을 살려고 노력중이다. 물론 역사 속 일부 예술가들의 삶을 보면 예술성과 일상의 안정은 양손에 쥐기 힘든 것처럼 보인다. 어떤 천재적인 예술가들은 불행의 극단이나 모험과 일탈의 순간으로 스스로를 몰아가서 작품을 완성한다. 그들이 왜 그렇게 하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바로 그럴 때 생각과 행동이 과감해지기 때문이다. 평소와 다르게 자유로워진 기분이 들면서(p. 118) 금기와 편견을 넘어 거침없이 표현할 수 있을 것 같기 때문 이다. 예술이 지금 여기에 발붙이고 있는 나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이라면, 일탈과 충동은 스스로를 완전히 넘어 섰다는 착각을 불러온다. 물론 이런 과정에서 한두 번쯤 마음에 드는 결과물이 나올 수도 있다. 대중이 열광하고 추앙하는 작품이 우연히 나와서 인기와 명예까지 얻다보면, 이제는 행복과 안정을 향한 길로 돌아가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든다. 그래서 평범하지 않은 상태에 더욱 집착하게 된다. 번쩍, 하는 충동의 순간에만 좋은 작품이 나올 수 있다고 굳게 믿어버리는 것이다. 그렇게 강도를 점점 높여가다보면 어느 순간 그의 삶은 완전히 망가져버린다. 우리는 바로 그런 것을 예술가의 운명이라 여긴다. 하지만 착각이다. 삶을 올바로 지탱하는 법을 알았더라면 더 오랫동안 좋은 작품을 만들 수 있었을 텐데. 자신의 삶을 망가뜨리며 고통받다가 너무도 빨리 사라져버린 뛰어난 예술가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 한낱 연약한 인간으로서 그 고통의 무게를 견디기가 얼마나 어려웠을까. 그 누구도 이런 삶을 오랫동안 유지하고 감당할 수는 없다(p. 119). 배우라는 직업의 특이점은 또 있다. 연예인들은 늘 대중의 시선과 평가를 받으며 살다보니 정신적 면역력이 떨어 지기 쉬운 것 같다. 자신감이 소진돼 외부에서 오는 자극에 마음이 요동치고, 아무 이유 없이 불안해지기도 한다. 내가 그간 이뤄놓은 것들이 모래성처럼 와르르 허물어질 것 같고, 일상적으로 해왔던 일들이 갑자기 너무도 어렵게 느껴져 꼼짝할 수 없을 때도 있다. 사실 이런 증상은 연예인들만이 아니라 과잉업무와 감정노동에 시달리는 많은 현대인들이 함께 겪고 있는 문제다. 흔히 '번아웃' 혹은 스트레스증후군으로 불리는 이런 상태에 빠지면 당장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를 단순한 육체 피로로 여기고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누워서 쉬려고 한다. 극단적으로 지쳤을 때, 의외로 많은 이들이 계속 먹거나 종일 자거나 멍하니 텔레비전을 보거나 하는 식으로 '몸을 움직이지 않는 방법'을 택한다. 하지(p. 162)만 이러면 분명 쉬긴 쉬었는데도, 통 나아지는 게 없다는 느낌이 든다. 일상으로 복귀해야 하는 날이 닥쳤는데도 도망 치고 싶다는 생각만 든다. 왜 푹 쉬었는데도 여전히 피곤할 까의아해 하면서 말이다. 물론 육체 피로는 몸을 움직이지 않고 내버려두면 어느 정도 회복된다. 격하게 움직인 부위의 근육을 잠시 쉬어주면 이내 활동 가능한 상태로 돌아온다. 하지만 정신적 에너지가 고갈되면 이런 방식으로는 절대 회복되지 않는다. 단언컨대 무작정 가만히 누워 있는 것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 물론 나 역시도 '꼼짝도 안 한 채 이불 둘러쓰고 싶은 순간'이 없는 건 아니다. 이렇게 힘든데 뭘 더 어떻게 움직여?' 의구심부터 든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나는 힘들 때마다 속으로 이렇게 되뇌게 되었다. "아, 힘들다....걸어야겠다." 나는 힘들수록 주저앉거나 눕기보다는 일단 일어나려 애쓴다. 몸과 마음이 완전히 고갈되었다는 느낌이 들 때 오히려 운동화를 신고 밖으로 나간다. 팔과 다리를 힘차게 흔들면서 온몸에 먼지처럼 달라붙은 귀찮음을 탁탁 털어내본(p. 163)다. 그렇게 걷다보면 녹슬어서 삐걱거리던 몸과 마음에 윤기가 돈다(p. 164). 가끔 도심에서 인파를 뚫고 지나가야 할 때가 있다. 이때 내 몸이 사람들 사이를 스치는 순간은 짧지만, 무리 지어 가던 사람들이 나누는 대화가 귓속으로 쑥 파고들 때가 있다. 그렇게 맥락 없이 우연히 들은 말에 붙들리면, 나는 여러 가지 공상을 하게 된다. 어떤 상황이라서 그런 말을 한 것일까 생각해보기도 하고, 그 말을 한 사람의 독특한 억양이나 말투, 또 흔히 쓰지 않는 단어 같은 것들을 곱씹어보기도 한다. 나는 평소에도 사람들을 관찰하는 것을 좋아한다. 누군가 한 인상적인 말들이 잘 떠나지 않고 머리를 맴도는 것도, 이렇게 사람의 표정과 언행을 유심히 관찰하고 되새겨보는(p. 185) 나의 버릇 때문인지 모르겠다. 그런데 가끔은 당장 집에 가서 귀를 씻고 싶은 기분이 들 정도로 거친 욕설을 침 뱉듯 뇌까리는 사람들을 만난다. 나를 향해 한 말이 아닌데도 듣는 순간 기분이 좋지 않다. 잘 살펴보면 그들이 정말로 화가 나서 그런 욕설이나 비속어를 쓰는 것도 아니다. 그냥 자신의 힘을 과시하고 싶어서 말끝 마다 욕설을 섞어 쓰는 것이다. 하지만 설령 그게 그냥 말버릇이라 해도 나는 도무지 견디기가 힘들다. 극중에서 욕을 찰지게 쓰는 역할을 종종 맡다보니, 내가 일상에서도 욕과 비속어를 적절히 섞어 쓸 거라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런 나에게 의외라고들 말한다. 하지만 나는 별 뜻 없이 한 말도, 일 단 입 밖에 흘러나오면 별 뜻이 생긴다고 믿는 편이다. 말에는 힘이 있다. 이는 혼잣말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듣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 같지만 결국 내 귀로 다시 들어온다. 세상에 아무도 듣지 않는 말은 없다. 말로 내뱉어져 공중에 퍼지는 순간 그 말은 영향력을 발휘한다. 비난에는 다른 사람을 찌르는 힘이, 칭찬에는 누군가를 일으키는 힘이 있다. 그러므로 상대방에게 불필요한 오해를 불러일으키지 않도록 말을 최대한 세심하게 골라서 진실하고 성실하게 내보내야 한다. 입버릇처럼 쓰는 욕이나 자신의 힘을 과시(p. 186)하기 위한 날선 언어를 내가 두려워하는 이유다(p. 187). 무슨 일이 생기면 무조건 남 탓을 하는 사람들을 볼 때가 있다. 물론 그간 쏟아부은 노력을 인정받고 싶은 마음은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내가 그렇다면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오로지 나만이 노력하고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너무나 작고 얕은 마음 같다. 주변 사람들에게 불만을 가지고 책임을 밖으로 돌릴수록 나에게 남는 것은 화나고 억울한 마음뿐이다. 그 상태는 스스로를 고립시킨다. 그러니까 남 탓은 나를 더욱 외롭고 쓸쓸하게 만든다. 일의 결과에 상관없이 내 곁에 있는 사람들이 진심으로 감사하게 느껴지는 순간, 나는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보이지 않던 연결에 대한 감각이 살아나는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과 상황에 내가 연결돼 있고, 그 덕분에 지금(p. 192)의 나라는 사람이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렇게 감사는 고립된 상태에서 벗어나 나를 충만하고 풍요로운 상태로 이끈다. 어쩌면 감사도 연습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크고 작은 연결고리들을 떠올리면서 나는 사람을 만나면 '감사합니다' 라는 말을 '안녕하세요'라는 인사처럼 쓴다. 거기 당신, 늘 그 자리에 있어주어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p. 194). 우리는 실패한다. 넘어지고 쓰러지고 타인의 평가가 내 기대에 털끝만큼도 못 미쳐 어리둥절해한다. 그러나 그때마다 나는 생각한다. '어차피 길게 갈 일'이라고. 그리고 끝내 어떤 식으로든 잘될 것이라고. 나는 아직 감독의 삶이라는 긴 도정의 초입에 서 있다. 중간 지점에서 성공하거나 실패하거나 넘어지거나 꽃다발을 받거나 하는 일들은 어쩌면 크게 중요한 게 아닐지 모른다. 일희일비 전전긍긍하며 휘둘리기보다는 우직하게 걸어서 끝끝내 내가 닿고자 하는 지점에 가는 것, 그것이 내겐 소중 하다(p. 231). 배우의 삶은 정말이지 녹록지 않다. 물리적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해지면서 자신을 지탱해주고 있던 일상이 사라지는 경험은 의지로 간단히 극복되는 것이 아니다. 이전에는 아무렇지 않게 걷던 길, 나를 편안하게 대하고 내가 거리낌없이 대하던 모든 사람들, 내 집처럼 드나들던 가게, 아지트 그 모든 것들이 싹 바뀐다. 모든 것이 불편해지고 어색해 지고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상태가 된다. 그 속에서 연약한 개인이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그동안 살아온 삶의 판이 한순간에 뒤집히는 경험은 혼자 극복할 수 있는 일이 결코 아니다. 흔히 개인의 의지나 노력으로 어떤 일이든 이겨낼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은 일도 많다. 흔히 초심을 잃지 않겠다고 말하는데, 이는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시간은 계속 흐르고 나를 둘러싼 상황은 끊임없이 달라지는데, 어떻게 처음의 마음을 그대로 기억하고 간직할 수 있을까? 이건 의지만으로 되는 일은 아닌 것 같다. 배우의 삶에 슬럼프는 꽤 자주 찾아온다. 슬럼프에 익숙(p. 275) 해져야 한다. 여러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넘어지고 좌절하는 날들에 무너지지 말아야 한다. 한 살이라도 어릴 때 이러한 슬럼프를 많이 겪어보는 것은, 실패가 아니라 경험일지도 모른다. 나이를 먹을수록 이러한 슬럼프들은 나를 더 휘청거리게 하고, 다시 일어서는데 더 오랜 시간을 소모하게 한다. 내가 아직 견디고 배울 힘이 남아 있을 때 찾아온 슬럼프는 실패가 아니라 나를 숙련시켜주는 선생님이다. 곧바로 현장에 나가 일을 시작하고 남들보다 빨리 거창한 성과를 내는 건 중요하지 않다. 충분히 담금질할 시간이 필요하다. 그 담금질의 시간은 내게 슬럼프란 녀석이 방문 했을 때, 비로소 황금의 시간으로 변할 것이다. 각자가 겪을 슬럼프의 시기와 양상은 저마다 다를 테지만, 우리 모두에게 슬럼프는 언제든 찾아온다. 슬럼프란 불운한 누군가에게 느닷없이 떨어지는 재앙이 아니라, 해가 나면 그림자가 드리우는 것처럼 인생의 또다른 측면일 뿐이다. 슬럼프란 선생님은 평생에 걸쳐 계속 나를 찾아올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그 선생님과 친하게 지내고 싶다. 나에게 슬럼프는 인생길의 장애물이 아니라 나를 겸허하게 만들어 주는 스승이다(p. 276). 경부고속도로를 지나다가 이런 문장을 보았다. "기도할 수 있는데 왜 걱정하십니까?" 그동안 이 길을 여러 번 오갔으니 아마 몇 번은 보았을 텐데, 어느 날 갑자기 눈에 밟힌 이 문장이 두고두고 마음에 남았다. 삶에서 내가 어떤 시련을 만난다 하더라도, 그래, 내가 기도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 이미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기독교인이다. 일요일 아침마다 교회에 나가기도 하고, 자기 전에 기도하고, 촬영장에 가기 전에 기도하고, 순간순간 사람들을 만나고 돌아올 때 기도한다. 나에겐 기(p. 288)도란 먹고 숨쉬고 걷는 것과 다름없는 일상이다. 하지만 다른 종교를 믿더라도 혹은 아예 종교가 없더라도 기도는 누구나 할 수 있다. 가끔 내가 살아온 과거를 돌아보면 덜컥 무서워질 때가 있다. 나는 정말 아무것도 아닌데, 어떤 힘이 이끌어 내가 여기까지 큰 탈 없이 오게 되었을까? 이름 앞에 붙는 수식어들이 감사한 만큼이나 때로는 겁이 난다. 그동안 단지 운이 좋았던 것만 같아서, 그런데 앞으로도 그럴 수 있을까 싶어서...... 물론 허투루 살아온 것은 아니다. 언제나 좋은 배우가 되기 위해, 또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려고 노력해왔다. 그러나 그런 노력이 온전히 결과에까지 이어지지 않는 경우도 있다는 것을 점점 받아들이고 있다. 너무도 보잘것없는 나라는 사람. 그런 내가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또 수많은 우연들을 경험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그 수많은 관계 속에서 나의 노력이란 지극히 일부이고 또 결정적이진 않다는 것이 나는 더이상 놀랍지 않다. 가끔은 어떤 결과가 내가 열심히 해서 이루어낸 성과이고 노력에 대한 보상이라고 착각할 때도 있었지만 이제는 분명히 안다. 나의 미약한 힘이 미치는 범위란 형편없이 좁다는 것을(p. 289). 이 사실을 깨달으면서 나는 의식적으로 기도를 더 열심히 하게 되었다. 돌아보고 싶었고, 겸허해지고 싶었고, 솔직해지고 싶었다. 비단 신을 믿지는 않더라도 삶에 큰 영향을 미치는 우연이나 예상치 못한 변수 등 외부에서 오는 절대적인 힘을 경험한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아마 내 마음을 이해할 것이다.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자 나에게 남은 것은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일과 기도뿐이라는 사실을(p. 290). 하지만 언젠가부터 내 기도의 내용이 조금 바뀌었다. 요즘 나는 기도할 때 내 소원을 열거하지 않는다. 그저 신이 내게 맡긴 길을 굳건히 걸어갈 수 있도록 두 다리의 힘만 갖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삶은 그냥 살아나가는 것이다. 건강하게, 열심히 걸어나가는 것이 우리가 삶에서 해볼 수 있는 전부일지도 모른다. 내가 아무리 고민하고 머리를 굴려봤자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에는 분명 한계가 있다. 이렇게 기도한 이후로 이상하게 조금 더 마음이 편해졌다. 무슨 일에든 더 담대해질 수 있었다. 내가 아무리 발버둥쳐도 어찌해볼 수 없는 일들이 있다는 명백한 사실은, 내게 포기나 체념이 아니라 일종의 무모함을 선물해주었다. 나는 나에게 주어진 길을 그저 부지런하게 갈 뿐이다. 살면서 불행한 일을 맞지 않는 사람은 없다. 나 또한 마찬 가지일 것이다. 인생이란 어쩌면 누구나 겪는 불행하고 고통스러운 일에서 누가 얼마큼 빨리 벗어나느냐의 싸움일지도 모른다. 누구나 사고를 당하고 아픔을 겪고 상처받고 슬퍼한다. 이런 일들은 생각보다 자주 우리를 무너뜨린다. 그리고 그 상태에 오래 머물면 어떤 사건이 혹은 어떤 사람이 나를 망가뜨리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 자신을 망가뜨리는(p. 291) 지경에 빠진다. 결국 그 늪에서 얼마큼 빨리 탈출하느냐, 언제 괜찮아지느냐, 과연 회복할 수 있느냐가 인생의 과제일 것이다. 나는 내가 어떤 상황에서든 지속하는 걷기, 직접 요리해서 밥 먹기 같은 일상의 소소한 행위가 나를 이 늪에서 건져내준다고 믿는다. 내게 주어진 재능에 겸손하고, 이뤄낸 성과에 감사하자. 걸으며, 밥을 먹으며, 기도하며 나는 다짐해본다. 티베트어로 '인간'은 '걷는 존재' 혹은 '걸으면서 방황하는 존재'라는 의미라고 한다. 나는 기도한다. 내가 앞으로도 계속 걸어나가는 사람이기를. 어떤 상황에서도 한 발 더 내딛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이기를(p. 2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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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소개
    2026-03-02
  • 【북토크365】 어느날 암에 걸린다면....
    40대 초반의 케리어우먼이 유방암에 걸렸다. 이후 전절제 수술을 받고 회복하는 과정을 기록한 책이다. 우리나라가 고령화 되면서 대부분 암으로 죽는다. 언젠가 암으로 진단 된다면 과연 나는 어떻게 반응을 할 것인가? 질병이든, 사고든, 죽음이든 늘 의식하며 살아야 한다. 프롤로그 삶의 길목에 선 당신에게 활짝 열려 있던 문이 철거덕 하고 닫혔다. 깜깜한 어둠 속에 나는 내던져졌다. ‘도대체 왜 내게?'라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억울한 마음이 가장 컸다. 2019년 12월, 나는 암 진단을 받았다. SNS의 자기소개란에 열정과 긍정이 삶의 모토라고 적곤 했다. '에너자이저'라는 별명을 얻을 만큼 일과 육아에 최선을 다했고 삶을 긍정하며 살아왔다. 그런데 암이라는 질병 앞에선 나 역시 한없이 약해지고 부정적인 생각에 사로잡혀 어쩔 줄 몰라 했다. '잘 치료되지 않으면 어떡하(p. 5)지?, '전이되면 어떡하지?', '죽게 되면 어쩌지?'라는 걱정이 내 목덜미를 붙잡고 놔주지 않았다. 40대 중반에 접어든 내가 그동안 고통이나 위기를 겪지 않은 것도 아니다. 안온하지 않았던 가정환경, 경제적 어려움, 사랑했던 연인이나 친구와의 이별, 허리 디스크와 같은 질병의 고통, 열정을 쏟았던 일의 중단 등 다양한 고통과 위기를 겪었다. 그럴 때마다 죽을 만큼 힘들었지만 죽지는 않았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라는 경구처럼, 어둠의 터널을 지나면 삶의 길목 어딘가에서 기쁨과 행복, 기회의 빛이 나를 비춰주었다. 그래서 대체로 나는 삶이 재밌고 흥미로웠다. 내가 아직도 발견하지 못한 진주가 내 삶 속에 더 있을 것이라는 기대도 있었다. 그러던 찰나 암이 나를 찾아왔다. 처음엔 암이 사형선고처럼 들렸다. 암이 내 삶의 즐거움과 앎의 기쁨을 빼앗고 나는 어둠 속에 갇혀 영영 무채색 같은 삶을 이어갈 줄 알았다. 그러나 그런 내 생각은 완벽하게 틀렸다. 암 진단 이후에도 또 다른 기쁨과 행복과 기회의 빛이 나를 비춰주었다. 여전히 삶은 무지갯빛으로 빛났다. 암 진단을 받으면 인생이 끝장나는 줄 알았는데,(p. 6) 인생은 계속됐다. 암 투병으로 이어지는 삶도 내 인생이었고, 이 시간 또한 내 삶의 일부라는 인식이 생기니 절망과 불안의 구렁텅이에서 헤어날 수 있었다. 살고 싶다는 강한 의지를 갖고 어둠에서 나와보니, 햇살은 눈부시게 아름다웠고 내 뺨을 스치는 바람은 솜사탕처럼 달콤했다. 강물 위의 반짝이는 윤슬을 보면서 자연의 아름다움에 취해 멍하니 강을 바라보는 시간도 늘었다. 암 진단 이전엔 지나치게 자아가 비대해 내가 세운 목표대로 삶을 만들어야 만족했다면, 암 진단 이후 나는 이 광활한 우주의 일부분이고 인생은 내 뜻대로만 되지 않는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됐다. 마음이 훨씬 넓고 깊어진 느낌이라고나 할까. 항암-수술-방사선치료라는 3대 표준치료를 마친 나는 암을 진단받기 전보다 즐겁고 행복한 감정을 더 자주 느낀다. 먹고 싸고 자는 그 평범한 일상이 얼마나 기적과 같은 것인지 알아버렸기에, 맛있게 먹고 화장실에 잘 가고 한밤 중에 여러 번 깨지 않고 잠을 잘 수 있는 상태가 유지만 되어도 저절로 감사한 마음을 느낀다. 몸과 마음이 작동하는 원리에 대해 알아가는 기쁨도 크(p. 7)다. 이토록 복잡하고 정교하며 신비로운 사람의 몸과 마음에 필요한 것은 무엇인지, 또 그동안 내게 부족한 것은 무엇이었는지 알아가는 과정은 소중하다. 나의 내면을 탐색하고 관계를 돌아보며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도 더 깊어졌다. 그렇게 암은 내게 곰국처럼 진한 삶의 즐거움과 앎의 기쁨을 선물해주고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암을 진단받고 처음의 내 모습처럼 두려움과 불안 속에서 벌벌 떠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벼랑 끝에 몰린 것 같은 그 기분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나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가만히 그들을 안아주고 싶다. "괜찮아요. 괜찮아요. 알아요."(p. 8). 밤 9시 반 무렵, 휴대폰 벨 소리가 우렁차게 울렸다. "여보세요. 양선아 씨죠? 저는 청주시 버스운전사인데 버스에 가방을 놓고 내리셨어요. 종점에서 버스 정리하면서 발견했어요. 지갑과 안경이 들어 있는 가방 주인 맞으시죠?" 세상에! 가방이 돌아왔다! 전화를 받는 순간 나는 가슴 깊은 곳에서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뱉으며, 허공에 대고 허리를 숙였다. 오후 2시 반께 버스에서 내렸으니, 가방이 온종일 버스 좌석에 놓여 있었을 텐데 아무도 가방을 가져 가지 않은 것이 신기했다. 또 버스 기사님이 명함을 보고(p. 48) 연락을 해준 것도 감사했다. 감사한 마음이 흘러넘쳐 나는 기사님께 한라봉 한 상자를 보내드렸다. "선배 말이 맞았어요! 가방이 돌아왔어요! 가방도 돌아 오고 상도 받았으니 기쁜 마음으로 내일 항암 받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선배 오늘 너무 감사했어요." 항암 전날 대부분의 환우는 잠을 이루지 못하는데, 하루 동안 급격한 감정의 롤러코스터를 탄 나는 그날 너무 피곤 해 '꿀잠'을 잤다. 버스기사님은 모를 것이다. 자신의 행위가 어떤 나비효과를 발휘했는지. 그날 나는 훈훈한 마음과 함께 친절과 배려, 정직의 미덕을 배웠다(p. 49). 배가 더부룩한 상태에서 방귀가 시도 때도 없이 나오는데 그 냄새는 또 얼마나 지독했는지 모른다. 배에서 무엇인가가 썩고 있는 것이 아닌지 의심될 정도로 지독한 냄새가 났다. 온 식구가 정말 질식사할 정도의 고통을 함께 느꼈다. 그래도 가족이라 그 고통도 웃으면서 넘겼다(p. 65). 그렇게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갑자기 친정어머니가 '변비 특효약'을 떠올리셨다. 바로 키위! "선아야, 예전에 엄마도 수술했을 때 변비 때문에 엄청 고생한 적 있거든, 뭘 먹어도 해결이 안 되는 거야. 그런데 키위 있잖아, 그 키위를 먹고 바로 시원하게 변을 봤어. 밤에 자기 전에 유산균을 먹고, 키위도 좀 먹어보자." 마트로 달려가 당장 골드키위를 샀다. 그리고 바로 키위 두 개를 흡입했다. 저녁에 유산균도 먹었다. 키위를 잔뜩 먹은 다음 날, 정확히 항암 뒤 7일째 되던 날이다. 그날도 아침 식사 뒤 키위를 먹고 있는데 신호가 왔다. 바로 화장실로 달렸다. 뿌지지지직....단단히 막혀 있던 변이 드디어 내 몸을 탈출했다. 쾌변이었다. 송골송골 땀이 맺히고, 마음 깊은 곳에서 뿌듯함과 행복감이 솟았다. 영유아 시기 아이들이 '배변 독립'을 할 때 이런 뿌듯함을 느끼려나. 별생각을 다 한다. 피식. 그 날 이후 내 목소리도 낯빛도 달라졌다. 죽다 살아난 것처럼 몸동작도 날렵해졌다. 하하하하 시종일관 웃고 다녔다. "이제 좀 살겠는갑네. 얼굴 보니까 살아났구만, 살아났어. 완전 다르네~"(p. 66). 남편이 하하하하 웃고 있는 나를 보며 웃었다. 항암 1차 이후 일주일, 똥에 죽고 똥에 산 한 주였다. 그 날 이후로 지금까지 내게 행복이란 특별한 것이 아니다. 그저 '잘 먹고 잘 싸고 잘 자는' 하루라면 행복하다. '잘 먹고 잘 싸고 잘 자는 일'이 결코 평범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나의 행복의 마지노선은 엄청 낮아졌고, 행복을 느끼는 빈도수는 늘었다. 그렇다. 나는 오늘도 행복하다(p. 67). 머리카락 빠지는 문제에 며칠 동안 부대끼면서 인생이 새옹지마라는 걸 새삼스레 느꼈다. 살다 보면 슬프고 힘든 일이 있다가도 또 웃을 일이 생기고 즐거운 일도 생긴다. 그래서 너무 슬퍼할 필요도 또 너무 기뻐할 필요도 없다는 생각이 들다가도, 또 기쁠 땐 제대로 기뻐하고 슬플 땐 제대로 슬퍼하는 게 맞는 것 아닌가라는 생각도 했다. 머리카락이 다 빠지면 그 상실감으로 힘들 것이라고 미리 걱정했는데 의외로 그렇진 않았다. 머리카락이 없으니 아침에 세수하고 머리 감는 시간이 너무 단축돼 편리했다. 머리를 말리거나 헤어스타일 고민할 필요 없이 비니 같은 모자만 쓰면 되니 간편했다. 또 기분 따라 가발로 헤어스타일을 손쉽게 바꿀 수 있어 재밌었다. 원래 나는 모자도 좋아하는데 다양한 색깔의 모자를 써보는 기회도 가질 수(p. 77)있었다. 더운 여름엔 비니만 간편하게 쓰고 시원하게 보내고, 겨울엔 가발로 따뜻하고 다채롭게 보냈다. 다른 사람 시선 신경 쓰지 않고 '이것 또한 내가 누릴 수 있는 특별한 경험'이라고 생각하니 마냥 슬프지만은 않았다. 그렇게 1년을 보내고, 이제는 새롭게 움튼 머리카락을 보며 또 다른 기쁨과 재미를 느낀다. 항암제 공격으로 두피 세포들도 힘들었는지, 머리카락이 꼬불꼬불 자란다. 1년 만에 미용실을 찾아 제멋대로 자란 뒷머리와 옆머리를 다듬었다. 그리고 가발과 모자를 벗어던지고 산책에 나섰다. 상쾌하고 통쾌했다. "겨울을 견디기 위해 잎들을 떨구었던" 나무들이 "더 크고 무성한 훗날의 축복"(이재무, 〈가을 나무로 서서〉, 《몸에 피는 꽃》, 창비, 1996)을 예고하며 내게 반갑게 인사했다. 봄이 오고 있다(p. 78). 본 병원 의사와 면담 시간은 길어봐야 5분이지만 한방 병원에서는 의사 면담을 30분 넘게 한다. 의사는 내가 궁금한 부분에 대해 최대한 자세하게 설명해줬다. 비급여 항목 치료가 많아 치료비가 비싼 만큼 암 치료 전문 한방병원 의사들이 제공하는 서비스의 질은 높은 편이다. 담당 한의사는 상담 중 내가 눈물을 보이자 충분히 울 수 있도록 가만히 기다려주었다. 의사는 또 "지금은 울지만 백혈구 촉진제 맞으면 호중구 수치도 오르고, 언제 그랬냐는 듯이 예쁜 비니 없나 하고 인터넷 검색하는 자신의 모습을 맞이하실 거예요"라고 말해주는가 하면, 격리된 병실에서 후배가 보내준 책을 읽고 있는 내게 "봐요, 이렇게 응원하는 사람들도 많은데 힘내셔야죠"라며 격려해주었다. 환자의 마음에 공감하는 의사가 건네는 따뜻한 말 한마디가 내 게는 '보약'이고 '치료제'였다(p. 84). 무엇 하나 간단한 것이 없었다. 인생길을 걸어가다 보면 예측할 수 없는 일을 만나듯, 항암의 여정 속에서 나는 예측하지 못했던 일을 수시로 만났다. 그때마다 절망하거나 분노하기보다 최대한 감정을 조절하기 위해 노력했다. 내가 조절할 수 없는 것(혈관이 딱딱해지는 현상)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책이나 의사, 환우들에게 객관적인 정보 및 각종 경험담 수집)에 집중했다. 부작용 이야기를 들으니 굳이 무리해서 케모포트를 할 필요가 없다는 판단이 섰다. 의사 의견대로 일단 팔 혈관으로 항암을 계속 진행해보기로 했다(p. 115). 먹는 것이 고역인 암 환자에게 가장 좋은 친구는 '먹방(먹는 방송)'이다. 항암 부작용으로 힘들어 한방병원에 입원하게 되었을 때, 나도 비로소 먹방 월드에 입성했다. 집에서는 친정엄마가 도끼눈을 뜨고 내 앞에 앉아 밥숟가락을 다 뜰 때까지 지켜보고 있어 밥을 먹었다면, 병원에서는 먹방을 틀어놓고 최대한 상상력을 발휘해 숟가락을 들었다. 〈백종원의 골목식당〉, 〈수미네 반찬〉, 〈신상출시 펀스토랑〉(p. 137), 〈맛남의 광장〉 등 먹방은 얼마나 다채롭고 끝이 없던지. 음식을 보며 진심으로 감탄하고 환호하고 맛을 즐기는 텔레비전 속 사람들. 더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먹기 위해 고민하고 이런저런 아이디어를 내는 사람들. 과거엔 그런 사람들을 보며 지나치게 먹는 것에 집착하는 것 아닌가 하는 비판적 생각을 했고, 먹방은 상업적이라고 내 멋대로 재단했다. 그런데 암 진단 뒤 혀의 감각을 잃고 매끼 챙겨 먹는 일이 고역이 된 뒤 먹방을 보며 이런 생각을 했다. '나는 이제껏 저렇게 음식을 보며 감탄하며 먹은 적 있던가? 나는 나의 입과 혀를 즐겁게 하기 위해 저렇게 고민하고 아이디어를 내본 적 있던가?' 그동안 내게 식사 시간은 감탄의 대상은 아니었다. 내가 하고 싶은 일, 해야만 하는 일을 하려면 매 끼니를 빨리 해치워야 했다. 따라서 식사 시간은 내 시간을 빼앗는 무엇이었다. 취재원과 식사를 하는 경우도 많았는데 음식보다는 취재원의 말에 귀를 쫑긋 기울여야 하므로 음식을 먹 는 둥 마는 둥 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러나 식사 시간은 내 일상에서 얼마나 중요한 시간이었던가. 내가 먹는 것들은(p. 138) 내 세포를 만들고 몸 구석구석에 가서 내 몸과 마음이 잘 작동하도록 해주고 각종 질병으로부터 나를 막아주는 병사 역할을 해준다. 그 고마운 음식을 감탄하며 바라보고 매끼 맛을 음미하며 그렇게 하루하루를 살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친정엄마가 정성들여 보내준 음식들을 제대로 챙겨 먹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p. 139). 암 치료 관련 책들을 보면 한결같이 채소를 많이 먹으라고 강조한다. '대사치료'의 대가 나샤 윈터스 박사는 저서 《대사치료, 암을 굶겨 죽이다》(처음북스, 2018)에서 암 치료에 있어 채소 섭취가 중요한 이유는 채소의 식물 영양소가 DNA 손상을 예방하고 결함이 있는 DNA를 복구시켜주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암이라는 질병은 돌연변이 세포가 발생해 통제 불가능하게 분열하고 신체 여러 부위로 퍼져나가는 것이 특징이다. 돌연변이 세포가 생기지 않도록 DNA 손상을 예방해주는 채소를 평소 많이 챙겨 먹는다면 자연스럽게 암을 예방할 수 있다. 윈터스 박사는 특히 십자화과 식물을 추천하는데, 십자화과 식물로는 브로콜리, 양배추, 콜리플라워, 콜라비, 무 등이 있다. 십자화과 식물은 우리 몸에서 잠재적인 발암물질을 제거하고 종양 억제(p. 141)" 유전자의 작용을 강화해준다고 한다(p. 142). 삶은 예측 불가능하다. 불과 2년 전만 해도 나는 내가 암에 걸리고, 항암을 하고, 가슴 한쪽을 잘라낼 것이라고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다. 모든 일은 천둥 치듯 별안간 일어났고, 나는 내 인생에 갑자기 내린 이 소낙비에 내 방식대로 대처해야 했다. 회복 탄력성이 높은 편인 나는 비교적 빨리 암에 걸린 일을 수용했고, 항암치료라는 난관도 무사히 통과했다. 그러나 8번의 항암 끝에 왼쪽 가슴을 전 절제해야 한다는 사실, 그 느닷없는 삶의 '펀치'를 맞고 나는 한동안 공포에 질려 있었다. 공포나 두려움이라는 감정(p. 152)은 삶을 있는 그대로 보는 감각을 마비시켜 비합리적인 사고를 확장시킨다. 내가 생각하지 못한 일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불안감 때문에 내가 현재 갖고 있는 것, 누리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인식하지 못하게 만들어 '지금 삶'마저 엉망으로 만든다(p. 153). 인생은 새옹지마라고 했던가. 항암 8차를 하고 암의 사이즈를 줄여 부분절제를 하기를 원했던 나는 암 크기가 현격하게 줄지 않아 전절제를 해야 했다. 그 독한 항암제를 투입할 때도 씩씩하게 버텨온 나는 전절제 결정에 하늘이 무너질 듯 더 슬퍼했다. 그렇게 애를 쓰고 노력해도 어찌(p. 190)할 수 없는 것이 있다는 사실에 무기력감을 느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런 내 생각은 얼마나 짧은 생각이었던가. 최종 수술 결과를 보니 애초 발견된 암 외에도 그 옆에 제자 리암(암세포가 비정상적인 증식을 일으킨 부위가 상피 내에 국한 된 경우를 말하며 상피내암으로도 불린다)까지 있었다고 하니 전절제는 내게 딱 맞는 결정이었다. 제자리암은 유관이나 소엽의 기저막을 침범하지 않아 덜 위험하다고 하지만, 제자리암이 또다시 암으로 진행될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의사의 잘못된 판단으로 부분절제를 선택했다가 암이 재발해 다시 수술하고 그 힘든 항암을 다시 해야 하는 경우도 봤던 터라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쉴 수 있었다. 유방외과 의사의 전절제 결정은 정확하고 올바른 선택이었고, 그로 인해 나는 의사에 대한 신뢰가 더 깊어질 수 있었다. 그때 경험으로 나는 내게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해 섣불리 좋다 나쁘다 판단 내리지 않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지금 내게 일어나는 일이 좋은 일일지, 나쁜 일일지는 나중에 결정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주변을 둘러봐도 고통스러운 일을 겪고도 그 일로 되레 새로운 삶의 의미를(p. 191) 찾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좋은 일이라 생각했던 일이 나중에 고통의 씨앗이 되는 경우도 보았다(p. 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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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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