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3(화)
 
  • 김남준, 생명의말씀사, 29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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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준 목사는 여러 베스트셀러 책을 쓴 작가로, 이 책은 팔복에 대한 설교문이다. 가볍게 읽어볼만한 책이다. 하드 카바로 만들어 가격이 비싸지고, 여백 많은 편집으로 인해 페이지가 늘어났다. 맘 먹고 읽으면 몇 시간 만에 읽을 수 있는 분량이다. 팔복에 대한 설교 자료로 사용할 수 있을 것 같다. 목회자들이 자기의 설교를 준비할 때 출판을 염두에 두고 준비한다면 더 열심히 준비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해본다. 들을만한 설교, 내용있는 설교를 위해서는 많이 준비해야 할 것이다.

 

제9장 박해받는 자(p 219-236)

들어가는 말

죄가 들어온 후 평화가 사라졌습니다. 세상에는 다툼이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반목과 갈등, 분노와 억압은 일상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과의 화목이 깨지자 평화롭게 살 수 없게 되었습니다. 자연 만물도 함께 고통을 받게 되었습니다(롬 8:22). 진정한 평화는 하나님과의 화목을 통해서 옵니다. 이 일을 위해 그리스도께서 오셨습니다. 첫걸음은 복음을 믿는 것입니다. 거기서부터 평화가 시작되기 때문에,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딤후 4:2). 복음은 세상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입니다. 그러나 세상 권세를 잡은 마귀에게는 나쁜 소식입니다.

하나님 나라와 세상 나라의 백성들은 서로 다른 질서 속에서 살아 갑니다. 두 질서가 충돌하는 지점에서 박해가 일어납니다. 박해란 무엇인가? 국어사전적으로 박해란 '약한 처지의 개인이나 세력을 억누르거나 괴롭혀 해를 끼침'을 뜻합니다. 우리말 성경에 '박해받는 자'라고 번역된 단어는 '믿음이나 신념을 이유로 누군가를 괴롭히다.'라는 뜻을 가진 헬라어 동사 디오코에서 온것입니다. 신자의 부도덕한 행실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교회가 불법을 저질러 법정에서 심판을 받기도 합니다. 이것은 박해받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죄 때문에 고통받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아무 보상이 없습니다.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벧전 2:20). 진정한 의미의 박해는 하나님 나라의 의(義) 때문에 받는 고난을 가리킵니다."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마 5:10). 의는 하나님의 뜻에 부합한 상태입니다. 이때 의는 다음과 같이 정의됩니다. "인간의 의란 하나님의 성품의 반영으로서, 사람의 내면 세계와 외면 생활이 하나님의 뜻에 완벽히 합치된 상태다." 박해받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의를 위해서입니다. 자신뿐 아니라 이웃과 사회가 하나님의 뜻에 합치되기를 힘쓰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애쓰기에 핍박을 받습니다. 이것은 먼저 신자 안에서 경험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할 때, 두 개의 자아가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육체를 따라 살고자 하는 욕망과 성령을 따라 살고자 하는 의지가 대립하기 때문입니다. 은혜가 충만할 때는 죄가 없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하지만 은혜가 사라질 때는 욕망이 뚜렷이 느껴집니다. 둘은 한 마음 안에서 서로 싸움질하며 고통을 줍니다. “여호와여 주의 은혜로 나를 산같이 굳게 세우셨더니 주의 얼굴을 가리시매 내가 근심하였나이다"(시 30:7).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롬7:23). 의를 위한 고통은 마음의 갈등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거스르는 세상 사람들 때문에 고통을 겪습니다. 흔히 예수 믿으면 세상만사가 다 잘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신자도 많은 시련을 겪습니다. 어떤 고통은 원인을 설명할 수도 없습니다. 진정한 만족은 세상 것들을 누리는 데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이 행복의 근원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안에서 사람들과 올바른 관계를 가져야 합니다. 그 관계는 하나님 사랑의 질서를 따릅니다. 신자의 마음은 진리와 성령으로 변화됩니다. 구원과 함께, 삶에는 새로운 질서가 도입 됩니다. 세상과는 전혀 다른 질서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질서입니다. 그것이 세상 나라의 질서와 충돌하면 저항합니다. 그래서 세상의 미움을 받습니다.

박해는 세상 사람들과는 다른 존재로서, 다른 방식의 삶을 살기 때문에 당하는 것입니다. 집단에서 따돌림을 당하거나, 사회적으로 불이익을 받거나, 심지어 형벌에 처해지기도 합니다. 이로써 신자는 자신이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님을 깨닫게 됩니다. 믿음이 없다면 박해에 굴복할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산다면 굴복하지 않을 것입니다. 세상 나라가 낯설게 느껴질수록 하늘나라에 친숙해질 것입니다. 박해받을수록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갈망은 커질 것입니다. 의를 위해 박해를 받을 때, 그것은 하나님 나라와 관련됩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이 추구하던 것이 그 나라의 의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따라 살기에 고난을 받는 것입니다.핍박받아 흘린 눈물은 세상 사랑으로 얼룩진 마음의 창을 깨끗이 닦아 줍니다. 맑은 마음으로 천국을 소망하게 만들어 줍니다. 그의 울음 속에 하나님이 함께해 위로해 주십니다. 마태복음에서 박해라는 주제는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당시 초기 교회 공동체가 현재적으로 받고 있던 고난을 반영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그들은 동족인 유대인들에게 고난을 받으면서, 그런 현실에 대한 설명을 듣고 싶었을 것입니다. 박해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지도 알고 싶었을 것입니다.

 

신자를 박해하는 세상

세상이 그리스도를 박해했으니, 신자도 핍박받지 않겠습니까? 희생과 고난 없이 예수를 따를 수 없지 않겠습니까?(눅 9:23-24) 핍박을 피할 수 없음을 강조하셨습니다. 기독교 역사를 돌아보십시오. 박해의 피로 쓰여진 역사입니다. 원래 성경책의 모서리가 붉은색으로 칠해졌던 이유입니다. 믿음으로 산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를 위해 박해받았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로 일자리를 빼앗겼고, 삶의 터전에서 쫓겨났습니다. 세례 요한을 보십시오. 헤롯이 동생의 아내 헤로디아를 취한 일의 불의함을 지적하였습니다(마 14:3-4). 그는 감옥에 갇혔습니다. 헤롯의 생일날, 헤로디아의 딸은 춤을 추었습니다. 헤롯은 그 아이에게 무엇이든지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아이는 어미의 지시를 따라 세례 요한의 목을 소반에 얹어 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마 14:8). 세례 요한은 목베임을 당했습니다. 요한은 헤롯의 정적()이 아니었습니다. 다만 헤롯의 불의를 꾸짖었을 뿐입니다. 그냥 선지자로서 할 말을 했을 뿐입니다. 그러나 헤롯은 그를 죽였습니다. 우리가 의를 추구하며 살아갈 때 세상은 싫어합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은 세상과의 갈등을 의미합니다(히 11:36-38). 세상 사람들과 다른 부르심이 있어야 합니다. 자기를 희생할 대의(大)를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중국에서 한 노(老)목회자를 만났습니다. 그는 젊은 시절 그리스도를 만나 목회에 헌신하였습니다. 문화 대혁명이 일어났습니다. 신자에 대한 대대적인 박해가 시작되었고 목회자들은 가혹한 고문 끝에 강제 노동 수용소로 보내졌습니다. 사랑하는 아내와 어린 두 아들을 남긴 채, 이 목회자는 약 15년 동안 수용소에서 죽음 같은 세월을 이어 갔습니다. 그동안 가족들과 단한 번도 면회는 물론 서신 왕래도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만기 출소한 후 고향집에 돌아왔습니다. 교회는 이미 없어졌고 성도들은 뿔뿔이 흩어진 지 오래였습니다. 정든 집은 거의 폐허 상태였습니다. 큰아들은 마약 중독자가 되어 있었고 둘째 아들은 공산당원이 되어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아내는 화병으로 오래전에 세상을 떠난 뒤였습니다. 동네 주민으로부터 그간의 이야기들을 전해 듣고, 목회자는 마당에 주저앉아 통곡하며 울었습니다. 그때 선명한 주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얘야. 그래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는 더욱 목 놓아 통곡하며 대답했습니다. "예, 주님. 그래도 제가 주님을 사랑하나이다." 그 이야기를 듣고 숙소로 돌아와서 나도 모르게 한참 동안 흐느꼈습니다. 스스로 떠올린 주님의 물음이 귓가를 맴돌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얘야, 너도 그렇게 나를 사랑하느냐?" 바울의 평생 소원은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었습니다. 이전에 유익하던 것을 다 해로 여겼습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였기 때문입니다(빌 3:8).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은 다음의 두 가지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첫째로, 그리스도의 부활의 권능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둘째로,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함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입니다(빌 3:10-11). 순교의 종소리가 들려오는 인생 황혼의 때였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알기 위해서는 고난에 참여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고난에 참여함으로써 그리스도를 본받고자 했습니다(고전 11:1). 바울의 생애는 박해의 연대기였습니다. 유대인들에게 40에서 하나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습니다.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했습니다. 일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습니다. 여러번 여행하였습니다. 강물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을 겪었습니다. 또한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을 경험했습니다.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감수해야 했습니다.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했습니다.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번 굶고 춥고 헐벗어야 했습니다(고후 11:24-27). 신자는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며 살도록 부름받았습니다(마 6:33). 소명을 따라 살 때 세상으로부터 박해받습니다. 그때 두 가지를 깨닫게 됩니다. 첫째로, 자신이 그리스도를 따르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사도들은 박해를 받을 때 기뻐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들이 인정받았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행 5:41). 박해받는 것을 특권처럼 여겼습니다.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자기들이 그리스도 가신 길을 따라가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세상이 본향이 아님을 깨닫습니다. 박해받을 때 자기가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단지 나그네요, 이방인임을 확인합니다. 하늘 본향을 더욱 사모하게 됩니다(히 11:16).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 사랑은 영혼과 정신에서, 육체와 생활에서 크고 작은 섭리로 나타납니다(약 1:17). 우리가 지금 누리는 모든 것들, 의복과 음식뿐만 아니라 친구와 가족들까지도 모두 하나님이 주신 것들입니다. 그것들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됩니다. 그렇지만 신자는 이것들만으로는 살 수 없습니다. 모든 소망이 단지 세상에 있다면 어찌 인생이 허무하지 않겠습니까? 변하는 세상에 대한 사랑은 불멸할 영혼을 땅에 묶어 버립니다. 그리하여 날지 못하는 새가 되게 하니, 거기 무슨 자유가 있겠습니까? 자유가 없는데 무슨 행복이 있겠습니까? 행복과 불행은 모두 사랑에서 옵니다. 행복은 악한 것을 올바르게 미워한 것이고, 불행은 선한 것을 그릇되게 사랑한 것입니다. 만약 선한 것이 늘 아름답고 악한 것이 항상 추루하게 보였다면, 아무도 불행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 오류에 빠질 수 있기에, 박해는 우리를 깨어 정신 차리게 해줍니다(살전 5:6). 박해를 견딜 때, 자신이 그리스도의 길을 가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쏟는 눈물에 세상 사랑은 씻겨 나가고, 흘리는 핏물에 사랑은 깊어져 갑니다. 세상에 살고 있으나 하늘에 속한 사람임을 확신하게 됩니다.

 

박해받는 자의 행복

심령이 가난해집니다. 애통하는 자가 됩니다. 온유한 자가 됩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됩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가 됩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가 됩니다. 평화를 만드는 자가 됩니다. 그럴수록 세상으로부터 박해를 받습니다. 불의한 세상이기에 의를 위해 사는 사람이 박해를 받습니다. 그러나 그는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죄와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는 어린 양처럼 애통하였으나 박해를 받을 때는 사자처럼 담대합니다. 무엇 때문일까요?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마 5:10). 박해를 받는 자와 심령이 가난한 자가 받는 복이 동일합니다. 이는 우연이 아닙니다. 둘 모두 같은 선언으로 끝납니다.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마 5:3).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마 5:10).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이 말씀을 팔복이 아니라 칠복(福)이라고 봅니다. 왜냐하면 심령이 가난한 자의 복과 핍박받는 자의 복이 별개가 아니라 서로를 포함하는 동일한 복이라고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행복의 조건으로는 여덟 개지만, 행복의 선언으로는 일곱 개라고 보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행복의 종류와 관련해서 보면 칠복입니다. 천국이 그들의 것이라는 행복의 선언이 첫 번째와 여덟 번째에 동일하게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복이 있나니"라고 하신 조건으로 본다면 여덟 개이기 때문에 팔복이라고 부릅니다. 두 가지 복됨에 관해 동일한 선언, 곧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로 시작하고 끝을 내는 것은 일종의 문학적 장치입니다. 첫 번째 복이 존재의 변화를 말해 준다면, 여덟 번째 복은 변화된 존재가 세상에서 무엇을 겪게 되는지를 보여줍니다. 가난한 심령으로 하나님을 찾는 것은 천국을 누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하나님의 백성답게 사는 것도 이미 천국을 누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전자는 하나님 나라가 찾아오는 모습이고, 후자는 세상나라로 나아가는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식으로 천국을 누리게 하실까요? 천국을 두 국면에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첫째로, 지상적이고 현재적인 국면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이미 임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오심과 함께 하나님의 통치는 시작되었습니다(마 12:18). 신자는 거기서 하나님과의 평화를 누립니다. 박해받는 자는 고통을 겪습니다. 그러나 그는 다른 사람들이 알 수 없는 위로를 받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누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령한 방식으로 기쁨을 주십니다. 육체로는 박해를 받지만 영혼으로는 자유를 누리게 하십니다. 둘째로, 천상적이고 미래적인 국면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임했으나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습니다. 세상에는 여전히 하나님의 통치에 반항하는 권세들이 있습니다(엡 6:12). 이러한 반역은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날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그러나 마침내 세상 나라의 질서는 파괴되고 하늘나라의 질서는 완전하게 될 것입니다. 완전한 사랑 속에 정의로운 나라가 될 것입니다. 박해받는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을 것입니다. 또한 상속받을 나라를 현재적으로 누리며 살아갑니다. 그 나라에는 모든 것이 풍족합니다. 완전한 평화와 행복의 나라입니다. 영혼과 육체에 모자라는 것이 없을 것입니다. 신앙에는 두 가지가 함께 있어야 합니다. 초월성과 역사성입니다. 하나는 초월성입니다. 그것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신령한 은혜에 관한 것입니다. 십자가 사랑, 영적인 은혜 같은 것입니다. 신앙이 가진 이런 초월적인 은혜의 성격 때문에 한 인간으로서, 신자로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살아갈 힘을 얻습니다. 이것이 신앙의 초월성입니다. 또 하나는 역사성입니다. 그것은 신앙에 있어서 시간과 공간 안에 있는 시대적 상황에 관한 것입니다. 자기 시대의 역사 발전에 이바지해야 합니다. 사랑과 정의를 위해 살아야 합니다. 선을 행하고 불의에 항거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인정하는 문화 발전에 이바지해야 합니다. 세상의 땅끝까지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도록 살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신앙의 역사성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에 계실 때 박해를 받으셨습니다. 비난과 멸시, 조롱과 고난을 한 몸에 받으셨습니다. 세상을 사랑하셨기에 모든 삶으로 하나님 나라를 보여주셨습니다. 고난을 이기는 강인함과 세상에 굴복하지 않는 꿋꿋함이 어디서 나왔을까요?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하시도다 나는 항상 그가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요 8:29).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아버지와 함께하셨기에 모든 것을 견디고 이기실 수 있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시며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 28:20). 박해를 받으면서도 믿음으로 사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핍박 속에서도 믿음을 따라 살아갈 힘이 어디에서 나옵니까?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데서 나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고자 하는 열정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마 음이 변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이름을 위해 살고 싶어하는 마음도, 세상 욕심을 버리고 싶은 마음도 항상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지 않으신다면 곧 사라져 버립니다. 하나님 사랑 안에 있을 때만 정의롭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박해가 아무리 거칠고 강해도 하나님은 이겨 낼 힘을 주십니다. 의지하는 자를 더욱 강하게 하십니다. 신령한 은혜와 거룩한 능력을 주십니다. 매일 부어 주시는 은혜가 필요 합니다. 그래야 박해에 굴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박해의 크기가 아닙니다. 세상으로부터 미움받는 크기가 아닙니다.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생명이 충만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핍박을 받을 때 비겁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십시오. 박해를 견딜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영원한 하늘나라에서뿐만 아니라 잠시 머물 세상에서도 행복을 누리게 하십니다. 박해를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이 겪었습니다. 사랑의 기쁨으로 이기며 사십시오.

 

맺는말

하나님은 우리를 선택하셨습니다. 남이 알지 못한 복음을 들려주셨습니다. 믿음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이는 세상에서 소금과 빛으로 살게 하시기 위함입니다(마 5:13-14). 소금이 그 맛을 잃어버리면 아무 쓸모 없어집니다. 밖에 버려지고 사람들에게 밟히게 됩니다(마 5:13). 하나님을 누림으로 박해를 견뎌야 합니다. 의를 위한 삶을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십시오. 정의로운 삶을 사십시오. 박해를 견디십시오. 우리는 세상 사람들에게 없는 하나님 나라를 누리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에게는 그들이 알 수 없는 신령한 은혜가 있습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하나님을 두려워합니다(마10:28). 그 믿음으로 박해를 견딥니다. 그들이 욕하면 우리는 모욕받을 것이고, 때리면 맞을 것이며, 죽이면 죽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배신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박해받는 자에게는 그들이 모르는 행복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팔복의 사람으로 부르십니다. 이 부르심에 응답하시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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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일지〗 「깊이 읽는 여덟가지 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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