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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356】 글쓰기를 통한 상처의 치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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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왜 글을 쓰고, 말을 하는가? 자신의 상처를 드러내 자가치료 하려는 본능이다. 다른 글보다 자신을 많이 노출하는 타인의 글을 읽고 공감하면서 우리도 치유를 경험한다. 이것이 에세이를 쓰고 읽어야 하는 한 가지 이유이다.
정신의학과를 찾은 것은 사건이 일어나고 10여 년이 지나서였다. 처음 내원한 이유는 신체형장애 somatoform disorder 때문이었다. 내과적 이상이 없는데도 나는 수년째 다양한 신체 증상에 시달리고 있었다. 병원을 찾기 직전에는 간헐적이고 갑작스러운 복부통증, 식사가 어려울 정도의 소화불량, 혀가 불타는 듯한 구강작열감증후군, 수면중 다리가 제멋대로 움직이는 하지불안증후군, 그 밖에도 불면증과 공황발작을 겪고 있었다. 여러 병원을 전전한 끝에 내과 의사들의 권유에 따라 정신의학과 진료를 받았다. 1년이 지난 뒤 내가 받은 추정 진단명은 외상후스트레스장애post traumatie stress disorder, PTSD와 2형양극성장애bipolar II disorder였다. 정신의학과에 다니게 된 표면적 이유는 신체형장애였지만 실은 내밀한 동기도 있었다. 그것은 내가 글을 쓰기 시작한 이유와도 같았다. 나를 이해하기, 그리하여 나를 벗어나기. 치료가 그저 의사에게 의존하거나 처방받은 약을 복용하는 데 그치지 않기를 바랐다. 스스로를 이해하고 벗어난다는 것은 힘(p. 21)을 지니는 일이었다. 힘은 단순한 능력이나 역량이 아니며, 건강한 신체와 정신을 소유한 자들의 전유물도 아니다. 여성이, 특히 외상기억을 가진 여성이 힘을 얻으려면 언제까지나 머무르고 싶은 안온한 세계를 스스로 부수어야 한다. 타자가 파괴한 자신을 복구하고, 식민화된 몸과 정신으로부터 탈주해야 한다. 어쩌면 그것은 버지니아 울프의 말처럼 "헐벗은 땅에 헐벗은 벽을 세워 올리는" 일인지 모른다. 나에게 그 길을 알려준 여성의 이름은 안나 오다. 나는 이 이름을 장마르탱 샤르코, 피에르 자네, 요제프 브로이어, 지크문트 프로이트처럼 현대 심리치료의 근간을 만든 위대한 아버지들 사이에서 발견했다. 그는 브로이어의 이름 없는 환자로 팔다리의 마비, 시각장애, 청각• 언어 장애, 환각, 의식상실 등 스트레스로 인한 다양한 전환장애conversion disorder를 겪고 있었다(p. 22).
내 나이 열세 살, 남자 동급생들은 여자아이들의 치마를 들쳐 속옷을 보곤 한다. 여자아이들이 모두 바지를 입자 이번에는 하의를 끌어내리기 시작한다. 나는 허리가 딱 맞는 청바지를 입고 주변을 경계하며 희생자가 되지 않으려고 조심한다. 하지만 체육 수업이 시작되기 전, 방심한 채 운동장에 서 있다가 장*혁과 김*현에게 속수무책으로 그 짓을 당하고 만다. 헐렁한 고무줄로 만든 체육복은 벗겨지기 쉬운 옷이라 주의가 필요한데도, 다른 여자아이들은 수치 스러운 일을 당할까봐 무리를 지어 있었는데도, 나만 외따로 서서 딴생각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멀리서 달려온 장*혁과 김*현이 내 체육복 바지의 허리춤을 움켜쥔 뒤 끌어내린다. 이때 장*혁의 손이 팬티를 함께 잡아당기는 바람에 나는 햇볕이 쨍쨍한 운동장에 아랫도리를 드러낸 채 서 있게 된다. 허벅지에 걸쳐진 바지를 황급히 추켜올리지만 몇몇 아이가 나의 그곳을 봤을 것 같다. 체육시간이 끝나(p. 113)고 여자아이들이 교사에게 이 일을 알린다. 교사가 나에게 말한다. "*혁이와 *현이가 너를 좋아하나보다." 학기가 끝나갈 무렵 남자아이들 사이에서는 또다른 '놀이'가 유행한다. 여자아이의 엉덩이를 움켜쥐었다가 도망가는 것이다. 두세 번 그런 일을 당한 뒤 나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버릇이 생긴다. 나와 함께 하교하는 *미는 2년 전이던 열한 살 때 월경을 시작했고 가슴이 여자 어른처럼 불룩하다. *미가 나에게 자신의 아래쪽이 털로 수북하다고 말한 다음부터 나는 그 아이가 낯설게 느껴진다. 어느 하굣길, 한 무리의 남자아이들이 우리를 향해 돌진한다. 한 아이가 *미의 가슴을 만지는 동시에 다른 아이가 *미의 사타구니를 움켜쥔다. 그 자리에 주저앉은 *미를 일으켜세우면서 나는 두려움을 느 낀다. 남자아이들이 돌아와 나에게도 같은 짓을 할 까봐 겁이 난다. 더는 *미와 함께 다니고 싶지 않다. 열다섯 살, 우리는 발육 상태와 무관하게 브래지어를 착용하라고 강요받는다. 이 규칙을 열렬히 수호하는 사람은 젊은 남자인 과학 교사다. 그는 지휘봉을 들고 교정을 돌아다니다가 아무 학생이나 불러(p. 114) 세워 지휘봉 끝을 학생의 등에 대고 천천히 위에서 아래로 훑는다. 지휘봉에 브래지어끈이 걸리면 그냥 지나가지만 걸리지 않으면 한참 동안 꾸짖는다. 가끔 그는 여학생의 팔 안쪽에 손을 넣어 겨드랑이와 가까운 부위를 꼬집듯이 주무른다. 아이들 사이에서 는 그 부위의 살이 가장 연하다는 말이 나돈다. 열일곱 살, 밤늦게 학원이 끝나고 버스를 탄다. 귀가하는 학생과 퇴근하는 직장인으로 버스는 만원이다. 나는 뒷문 근처에 서서 창밖을 바라보다가 교복 치마 뒤쪽이 스르르 올라가는 느낌에 화들짝 놀란다. 사람들이 많아서 옷이 쓸려 올라갔겠거니 생각하며 치마를 끌어내린다. 잠시 후 다시 치마가 올라 간다. 뜨끈하고 축축한 손바닥이 내 허벅지 안쪽을 더듬거린다. 소리도 지르지 못한 채 뒤를 힐끔거리다가 웬 남자와 눈이 마주친다. 마침 버스가 정류장에 도착하고 그 남자는 재빨리 뒷문으로 내린다.
열여덟 살, 이른 등굣길에 삐삐 메시지를 확인하려고 한적한 골목의 공중전화 부스에 들른다. 학교에 하나뿐인 공중전화는 늘 아이들로 북새통이기 때문이다. 내 앞에는 젊은 남자가 전화기를 붙들고 있다. 술냄새가 끼친다. 그는 수화기 너머의 여자에(p. 115)게 애원하다가 고함을 지르고, 징징거리다가 화를 낸다. 그러다 내가 거기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다. 나를 향해 소리친다. "씨발년아, 꺼져!" 열아홉 살, 친구와 식당에 갔다가 가게 바깥에 있는 공중화장실에 간다. 변기에 앉으려고 옷을 내리는데 이상한 느낌이 든다. 고개를 들어 칸막이 위를 올려다본다. 거기, 남자의 얼굴이 있다. 눈만 내놓고,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 나는 비명을 지르면서 화장실을 뛰쳐나온다. 식당으로 달려가 방금 있었던 일을 주인에게 말하고 그와 함께 다시 화장실에 간다. 옆 칸의 변기는 뚜껑이 닫혀 있고 그 위에는 신발자국이 찍혀 있다. 주인이 근처를 둘러보지만 남자는 보이지 않는다. 우리가 식당으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한 남자가 들어와 일행이 있는 테이블로 간다. 눈이 마주친 순간, 나는 그를 알아본다. 하지만 끝내 그가 범인이라고 말하지 못한다. 이것은 나의 청소년기, 이차성징이 나타난 뒤부터 성인 여성이 되기 전까지 대략 6~7년 동안 벌어(p. 116)진 일의 '목록'이다.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 일이 더 많다는 점에서 불완전한 목록이고, 세부적인 사항을 묘파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불만족스러운 목록이며, 내가 느낀 감정을 표현할 언어가 없다는 점에서 불가능한 목록이다. 또한 성인 여성이 된 이후에 벌어질 사건에 비하면 너무나도 사소해서 본격적인 폭력의 예고편처럼 느껴지는 목록이다.
어릴 때부터 겪은 일상적인 성차별과 성폭력은 나에게 자기 의심의 씨앗을 심었다. 불쾌한 일이 생기면 나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그를 오해하게 만들었는가? 나를 헤프게 여길 여지를 주었는가? 너무 예민하게 받아들이는가? 그에게 나쁜 의도가 있었는가? 이 질문은 나의 목소리이자 타인의 목소리였다. 누군가에게 털어놓으면 의구심 섞인 다그침이 돌아올 것 같았다. '확실해? 네 잘못은 없어? 상황을 부풀려서 말하는 건 아니야?' 나는 증언하기도 전에 상상 속 목소리에게 추궁당했다. (하지만 이 목소리가 정말 상상 속에만 존재할까?) 왜 당신에게 그런 일이 일어났느냐고 묻는다면 이렇게 답할 수밖에 없다. 내가 여자이기 때문에. 왜 오랫동안 그 일들에 관해 말하지 않았느냐고 묻는(p. 117)다면 이렇게 답할 수밖에 없다. 평범한 일인 줄 알았기 때문에. 이야깃거리조차 되지 않는다고 여겼던 일에 관해 목록을 만든 것은 로라 베이츠의 『목록』을 읽고 나서였다. 베이츠는 서문에서 자신을 향한 농담, 장난, 놀이, 평가, 혐오, 차별, 희롱, 추행의 역사를 열 페이지 가까이 열거한 뒤 말한다. 이 일은 모두 연관되어 있다고(p. 118).
장례식장에서의 마지막 기억은 이것이다. 피피는 몇 개의 뼛조각이 되어 소각로를 나왔고, 직원은 그것을 수습해 구석의 탁자로 걸어갔다. 탁자 위에는 믹서기가 놓여 있었다. 말릴 틈도 없이 그는 뼛조각을 믹서기에 넣고 전원을 눌렀다. '눈을 의심한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처음으로 정확히 이해했다. 피피가 믹서기 안에서 갈리고 있었다. 지금도 내가 본 장면을 의심한다. 정말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났을까? 그날의 모든 일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산소방, 빨리 가세요, 분홍색 수의, 고급형 유골함, 믹서기.
그날 이후에도 종종 그런 순간이 있었다. 이를테면 피피의 옷과 장난감을 깨끗이 빨아 상자에 넣으며 나는 생각했다. '필요할 테니까.' 그리고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곧 깨달았다. '피피가 돌아오면, 필요할 테니까' 소각로에 불이 켜지던 순간, 내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은 지금까지 사라지지 않는다. '내가 그 아이를 산 채로 불태웠어.' 이 생각이 나에게는 전혀 비논리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그 문(p. 140)장은 피피가 소각로 안에서 고통스러워하는 이미지로 이어지고, 이미지는 다시 문장을 강화한다. '내가 그 아이를 산 채로 불태웠어.' 반면 사람들은 나에게 현실을 상기시키려 안달이 난 듯했다. 그때마다 화가 났다. 피피가 세상을 떠나고 처음 교회에 나간 날, 목사님은 이렇게 설교했다. "동물은 사람과 달리 영혼이 없습니다. 영혼이 없기 때문에 천국에 갈 수도 없습니다. 죽으면 사라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영혼을 부여하고 천국을 허락한 존재는 인간뿐입니다." 목사님은 내 시어머니이기도 했다. 피피가 천국에 가기를 매일 기도했던 나는 분노했다. 그리운 존재를 다시 만날 수 없는 곳이면, 천국이 무슨 소용이지?(p. 141).
'솔직한 글'이라는 말에는 때로 환상이 덧씌워 있다. 독자는 에세이를 읽으면서 타인의 벌거벗은 자아와 마주한다고 느낄 수 있고, 실제로 어느 정도는 그렇다. 그러나 에세이는 '나의 아픔을 솔직하게 재현하는 장르'라기보다 '솔직하고 싶은 욕망과 솔직할 수 없는 한계 사이에서 머뭇거리는 글쓰기'에 가깝다. 때로 글을 쓰는 이는 에세이라는 영토에서 자기 고통의 경계를 넘어 타인의 고통을 말하는 위치에 놓인다. 전자가 머뭇거리는 글쓰기라면, 후자는 정 치적이거나 윤리적인 판단이 요청되는 복잡한 자리다. 고통의 재현은 객관적 사실의 전달이 아니라 특정한 해석에 의한 구성이다. 아픔은 그 자체로 중립적 경험이 아니며, '어떻게 말하느냐'에 따라 해석하는 주체(누가 말하는가?)와 해석되는 대상(누구의 고통 인가?) 사이에 권력 구도가 형성되기도 한다. 이 같은 맥락을 고려하면 에세이는 '솔직함'을 명목으로 자신(그리고 연루된 타인)에 대해 모든 것을 발설하는 장르가 아니라, '정직함'을 윤리의 기준으(p. 214)로 삼는 장르여야 하는지 모른다. 솔직함이 말해지지 않아야 할 것까지 말해버리고 싶은 충동에 자주 굴복한다면, 정직함은 무엇을 감추고 무엇을 남길지 스스로를 집요하게 추궁한 끝에 도달하는 지점이다. 이는 나의 고백에 연루된 타인의 비밀을 동의 없이 공개하는 것이나, 누군가의 '기억되지 않을 권리'를 침해하는 것만을 뜻하지 않는다. 감정이 여전히 해석되지 않는 무엇일 때 '아직은' 말하지 않는 것, 유보한 채 기다리는 것도 정직함의 한 방식일 것이다. 고통에 관한 증언이 폭력이나 분출이 되지 않도록 '말함'과 '말하지 않음'의 경계에서 타인을 상상하는 일, 에세이의 균형은 솔직함이 아니라 그 상상력에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p.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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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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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신대학 신학과 총동창회 정기총회, 신점일목사 회장 선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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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신대학교(총장 박성규 박사) 신학과 총동창회 제3회 정기총회가 2월 23일 오후 5시 총신대학교 종합관 2층 주기철기념홀에서 열려 신점일 목사를 회장으로 선출하고 회무를 처리했다.
황석형 직전회장이 “동창회를 섬기는 것이 너무 기쁘기에 임기 후에도 계속해서 섬길려고 한다.”라고 인사말했다.
신점일 신임회장이 “기수별, 지역별 동창회를 활성화 해볼려고 한다. 지역별 책임 맡은 동문들이 활성화를 위해 수고해 주시기 바란다.”라고 인사말했다. 다음은 인사말 전문이다.
오늘 동창회 총회에 참석한 동문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학창시절 은사이신 박희석 교수님, 대선배이시면서도 애정으로 후배들을 돌봐주시는 나성균 선배님께도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동창회가 출범해서 2년이 지났는데 그 동안 물심양면으로 협조를 아끼지 않고 모든 동문들에게도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동창회가 아직 부족한 부분이 많고 방향성도 조금은 희미한 부분도 있지만 임원 여러분들이 열심으로 헌신했기에 그래도 이만큼 발전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초대 회장 정귀석 목사님, 2대 회장 황석형 목사님, 감사하고 지난 2년 동안 내 교회를 섬기듯 선후배의 깊은 사랑으로 잘 섬겨준 임원 한 분 한 분에게도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동창회는 재학생들에게 든든한 버팀목이 되고 동문들에게는 친교뿐 아니라 동문들과 동문들의 교회에 유익이 되도록 힘쓰겠습니다. 선배던 후배던, 교회 규모가 크던 작던, 교회가 어디에 위치해 있던 모든 동문들이 함께 어울리며 위로받고 힘을 얻어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동역할 수 있는 동창회가 되도록 하겠습니다. 또한 목회를 하지 않는 동문들에게도 따뜻하게 다가가도록 하겠습니다. 동창회가 동문들이 마음껏 뛰어놀 수 있는 놀이터가 되고 각 학번의 동기회와 지역동창회가 활성화되기를 기대합니다. 동창회를 많이 사랑해주시고 동창회를 많이 이용해주시기 바랍니다. 많은 관심과 협조 바랍니다. 참석해주셔서 감사합니다.
1부 예배는 서기 김양천 목사의 인도로 부회장 신점일 목사가 기도, 회장 황석형 목사가 왕상 21:16-19을 본문으로 ‘하나님의 가치, 세상의 가치’란 제목으로 “우리 안에 아합의 마음이 있을 수 있다. 욕망의 선악과가 우리 안에 있다. 교인들의 장례를 집례하면서 나의 죽음을 생각하는데 그러면서도 욕심이 생기는 것을 보게 된다. 무엇을 세상에 남길지 고민하는 우리 동문이 되기를 바란다.”라고 설교 후 나성균 목사의 축도로 예배를 마쳤다.
총신대학 박성규 총장이 “동문들로 인해 학교가 더 좋아져서 감사드린다. 올해 대학 신입생들이 많이 지원했고, 기숙사는 올해 8월에 착공해 내년 8월에 완공할 계획이다. 5월 14일에 개교 125주년을 맞아 총신대학교에서 ‘총동문 한마음 잔치’를 하는데 많은 참여 부탁드린다. 또한 나성균 목사님은 은퇴 후에도 계속 기숙사를 위해 헌금해 주셔서 감사하다.”라고 인사말, 이국진 목사(총신대학교 총동창회 후원회장)가 “3회 총회로 모여 감사하다. 나무 뿌리가 옆으로 뻗어 다른 나무의 뿌리와 엉켜 있으면 쓰러지지 않고 든든히 선다. 저도 유학시절 동문들이 많이 도와주셔서 지금까지 견뎌온 것 같다. 서로 힘과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라고 축사했다.
2부 총회는 회장 황석형 목사의 사회로 박희석 교수가 개회 기도, 총무 손정욱 목사가 사업 보고, 회계 서상배 목사가 회계 보고, 회칙 수정, 임원 선출, 임원 교체, 신임회장이 전임회장에게 공로패 및 꽃다발 증정 후 폐회하고 전병철 목사가 식사기도한 후 애찬을 나누며 친교했다.
학번별 인사
* 광고
1. 제3회 신학과 동창회 총회를 할 수 있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예배와 총회를 위해 순서를 맡아주신 총장님을 비롯한 모든 분들과 참석하신 모든 동문들께도 감사드립니다.
2. 식사 제공/ 총회 후 1층 식당에 도시락이 준비돼 있습니다.
3. 동기회 및 지역 모임 활성화/ 학번별 동기회와 지역별 모임도 활성화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참여해주시기 바랍니다.
4. 카카오톡 단체방/ 동문들의 경조사와 사역, 기도제목을 나누고 함께 축하하고 위로하며 사랑으로 소통하는 교제의 장으로입니다. 올라오는 글에 관심 가져 주시고, 좋은 말씀으로 화답해 주시기 바랍니다. 정치적인 소견이나 사적인 글, 퍼다 옮기는 글, 광고, 신문기사 등은 게시하지 말아주시기 바랍니다.
5. 회비/ 연회비(1년)는 10만 원이며, 매월 납부 시 월 1만 원입니다.
- 회비 계좌: 신한은행(서상배: 신학과 동창회 회비통장), 110-594-875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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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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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신대, 사범학부 최우수 A등급·군종후보생 최다합격 쾌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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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는 젊은 지성”을 추구하는 총신대학교(총장 박성규 박사)가 괄목할 만한 성과를 냈다.
사범학부(기독교교육과·영어교육과·역사교육과·유아교육과)가 6주기 교원양성기관 역량진단에서 최우수 A등급을 획득해 교육부장관 표창을 받았다. 아울러 군종사관후보생 선발시험에서 3년 연속(2023년 - 2025년) 최다합격자를 배출했다. 그리고 2026년도 교사 임용시험에서 유아 10명, 중등(영어) 9명, 중등(역사) 10명이 합격했다.
박성규 총장은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올려 드린다. 이 모든 결과는 총회와 교회, 교인들의 기도와 후원으로 이루어진 것이기에 감사드린다.”라며 “올해 예정인 기숙사 건축의 모든 과정이 잘 진행될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시기 바란다.”라고 부탁했다.
총신대학은 "개혁신학은 존 칼빈 중심의 종교개혁 신학에 기초해 성경의 최고 권위, 오직 은혜로 얻는 구원, 하나님의 통치와 문화 변혁을 강조한다."는 개혁신학의 기치 아래 한국 교회와 사회의 리더를 양성하는 일에 늘 최선을 다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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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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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355】 세계의 장례 방식은 다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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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미국 여자 장의사가 세계를 돌면서 장례문화를 살펴보고 쓴 책이다. 태어난 사람들은 언젠가 죽는다. 많은 국가와 문명이 다양한 장례예식을 갖고 있다. 우리의 장례문화도 바뀌고 있다. 앞으로 더 바뀔 것이다.
폴저스 커피통에 담길 만한 양의 유해만 남기는 전형적인 상업적 화장에 비하면 이 잿더미에 쌓인 재가 확연히 더 많았다. 캘리포니아주에서 우리는 이 뼈를 '분쇄기'라 불리는 은색 기계에 넣고 갈아서 "알아볼 수 없는 뼛가루가 되게 해달라."는 요청을 받곤 한다. 캘리포니아주는 유가족에게 좀 더 크고 알아볼 수 있는 뼈를 돌려주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긴다. 로라의 친구 몇몇이 재의 일부를 갖고 싶어 했고, 남는 재가 있다면 장작 주위의 언덕이나 산속 깊은 곳에 뿌리게 되어 있었다. "엄마는 그걸 좋아하셨을 거예요." 제이슨이 말했다. "이제 엄마는 세상 어디에나 계셔요." 나는 어제 화장 후 뭔가 달라진 게 있느냐고 제이슨에게 물었다. "지난번 여기를 방문했을 때는 엄마가 장작불을 보여주려고 저를 데려오신 거였어요. 전 혼란스러웠죠. 내가 나중에 저기(p. 46) 저 벤치에 앉아서 우리 엄마를 혼자서 화장하겠구나 생각했어 요. 너무나 병적으로 보였어요. 사흘 전,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하러 크레스톤에 가고 있나 생각하니 끔찍하더군요. 하지만 엄마는 말씀하셨어요. '네가 오든 안 오든, 이게 내가 내 몸을 위해 선택 한 거란다.'" 제이슨이 어머니 시신을 밤새 지키기 위해 집에 도착한 순간부터 뭔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화장할 때가 되자 그는 공동체 구성원 모두가 곁에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들은 이야기하고 노래하며, 어머니를 사랑했던 모두가 그를 기꺼이 지탱해주었다. "그게 내 맘을 움직였어요. 그게 바로 달라진 점이죠." 잿더미 위에 구부정히 몸을 굽힌 채로 맥그리거가 로라의 아들 제이슨에게 그들이 지금 무엇을 보고 있는지를 설명해주었다. 그는 열을 가한 다음에 뼈가 얼마나 부서지기 쉬운지, 작은 뼛조 각을 손으로 직접 부수면서 보여주었다. "이게 뭐죠?" 제이슨이 잿더미에서 작은 금속 조각을 끄집어 내며 물었다. 그건 로라의 시신을 장작더미 위로 가져왔을 때 로라가 차고 있던 스와치 시계의 반짝이는 앞면이었다. 장작불의 열 때문에 구부러져 무지갯빛을 띤 시계는 오전 7시 16분에 영원히 멈춰 있었다. 장작불이 로라를 집어삼킨 바로 그 순간이었다(p. 47).
스페인은 사후에 대한 개념을 거의 친환경적으로 구성하는 데 능하다. 우리는 묘지를 한 바퀴 둘러보는 중에 숲을 지나쳤다. 물론 지중해와 이 지역에 자생하는 나무로 이뤄진 숲이다. 로케스 블란케스에서는 나무 한 그루를 심고 그 주위에 가족들의 재 다섯 함을 묻어, 그야말로 그 나무를 '가족 나무'로 만든다. 그들은 스페인 최초로 이런 선택권을 주는 묘지이다. 로케스 블란케스의 가족 나무는 바르셀로나에 있는 한 디자인 회사가 만들어 널리 인기를 얻은 생물 분해성 유골 단지 '바이오스 언'과 비슷하다. 여러분은 아마 SNS에 이 유골 단지의 광고가 떠다니는 것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바이오스 언은 커다란 맥도널드 컵처럼 생겼는데, 그 안에는 흙과 나무씨가 들어 있고 화장한 유해가 들어갈 자리가 있다. 바이오스 언에 관한 가장 인 기 있는 기사 중 하나는 "이 놀라운 유골 단지로 말미암아, 당신은 죽어서 나무 한 그루가 될 것입니다!"이다. 참 좋은 생각이고, 실제로 제공된 흙에서 나무가 자랄 수도 있지만, 섭씨 980도가 넘는 화장 과정을 마치고 남은 뼈들은 무기물인 단순 탄소가 되어버린다. 유기적인 모든 것이(DNA 포함) 타버려 미생물이 남아 있지 않은 재는 이미 식물이나 나무에 아(p. 146)무런 쓸모가 없다. 물론 영양소가 약간 남아 있기는 하지만, 그 배합은 식물에 전혀 적합하지 않고, 생태적 순환에도 기여할 수 없다. 바이오스 언 회사는 유골 단지 하나에 145달러를 받는다. 바이오스 언이 가지는 상징성은 참 아름답다. 하지만 상징적이라 하여 사람이 나무의 일부가 되는 것은 아니다(p. 147).
폰타넬레를 묘지라 부르는 것은 실망스러운 일이었다. 실제로는 하얗고 널찍한 지하 동굴, 정확히 말해 응회암 채석장보다(p. 200) 조금 나은 정도였으니 말이다. 여러 세기 동안 이 응회암 동굴은 17세기의 흑사병 희생자부터 1800년대 중반에 콜레라로 사망한 사람까지, 나폴리의 가난하고 이름 없는 망자를 묻는 무덤으로 사용되었다. 1872년에 가에타노 바르바티 신부는 폰타넬레 묘지에 쌓인 뼈들을 정리하고 순서대로 모으고 분류하고 목록을 작성하는 것을 자신의 사명으로 삼았다. 나폴리시에서 자원봉사자들이 이 일을 도우러 왔다. 그들은 한쪽 벽에 두개골을, 다른 한쪽 벽에는 골반뼈를 쌓는 일을 하면서 착한 천주교도들이 으레 그렇듯, 이름 없는 망자를 위해 기도했다. 문제는 두개골을 놓고 기도하는 사람들이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는 것이다. 자발적으로 이름 없는 두개골을 둘러싸고 헌신적인 숭배가 일어났다. 이 지역 사람들은 그들의 '페젠텔레', 즉 '가엾은 사람들'을 찾아 폰타넬레 묘지에 오곤 했다. 그들은 몇몇 두개골들을 '골라' 깨끗이 닦고 그들을 숭배하는 사당을 세우고 봉헌물을 갖다 놓고 잘되게 해달라고 빌곤 했다. 새 이름을 갖게 된 두개골은 주인의 꿈속에 나타나곤 했다. 가톨릭교회는 이런 현상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1969년에는 나폴리 대주교가 망자 숭배는 '이단'이며 '미신'이라는 칙령을 내리고 이 묘지를 폐쇄하기까지 했다. 교회에 의하면, 연옥에 갇힌 영혼들(이곳에 있는 이름 없는 망자들 같은)을 위해 기도할 수는 있지만, 이름 없는 망자들이 산 자에게 호의를 베풀 만한 특별하고 초자연적인 힘을 가진 것은 전혀 아니었다. 산 자들은 자신의 삶이(p. 201) 달라지길 바라며 간청했다.
학자 엘리자베스 하퍼는 망자를 숭배하는 움직임이 사회적 갈등의 시기에, 특히 질병이나 자연재해나 전쟁에서 주로 피해자가 되는 여성들 사이에서 가장 강력하고 눈에 띄게 크게 생겨난다고 지적했다. 가장 중요한 요인은 이 여성들이 "가톨릭교회 내에서 권력과 자원에 접근할 수 없는 사람들"이라는 점이다. (이와 똑같은 생각을 한 사람이 바로 안드레스 베도야였다. 그는 미국에서 1만 461킬로미터나 떨어진 라파스에 살면서, 나티타가 "남성들의 가톨릭교회를 통해서는 저 너머의 세계와 연결이 제대로 되지 않았던 여성들에게 특히 영험이 있다."고 묘사한 예술가였다.) 가톨릭교회가 2010년에 폰타넬레 묘지를 다시 연 뒤로 경계를 늦추지 않고 살피기는 했지만, 망자 숭배는 사라지지 않았다. 백골의 바다 속에서 여러 가지 색채가 뿜어져 나왔다. 형광 플라스틱 묵주, 붉은 유리 양초, 갓 주조한 황금색 동전들, 기도문 카드, 플라스틱 예수상, 심지어 복권까지도 다 이 폐허에 뿌려졌던 것이다. 망자 숭배를 하는 새로운 세대는 여기서 가장 강력한 '페젠텔레'를 발견했다(p. 202).
내가 여행했던 모든 곳에서 나는 이런 '죽음을 위한 공간'이 제 역할을 다하고 있는 것을 보았고, 주변의 지지를 받는다는 게 무슨 뜻인지 느꼈다. 일본의 루리덴 납골당에서는 연청색과 자주 색으로 빛나는 불상 영역이 나를 지지해주었다. 멕시코의 묘지에 서는 수만 개의 깜박이는 호박색 촛불이 밝히는 쇠 울타리가 나를 떠받쳐주었다. 콜로라도주의 불타는 장작에서는 높이 치솟는 불길에도 조문객들을 안전하게 보호하는 멋진 대나무 울타리 속에서 힘을 받았다. 이런 곳 하나하나에는 마법이 깃들어 있었다. 그건 슬픔이었다. 상상할 수도 없는 슬픔 말이다. 하지만 그 슬픔 속에는 한 점의 부끄러움도 없었다. 이런 곳에서 우리는 절망을 똑바로 마주하고 이렇게 말할 수 있었다. "나는 네가 보여. 저 멀리서 날 기다리고 있구나. 너를 강하게 느낄 수 있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네가 날 무너뜨리게 하지 않을 거야." 서양 문화에서 슬픔에 잠긴 사람은 어디서 지지와 위로를 받는가? 종교가 있는 사람들은 성당, 절 같은 종교적인 공간에서 위로와 지지를 받는다. 하지만 종교가 없는 이들 입장에서 일생에서 가장 취약한 시기는 넘기 힘든 장애물로부터 도전장을 받았을 때이다. 이런 곳으로 우선 병원이 있다. 사람들은 종종 병원을 차갑(p. 226)고 살균된 호러 쇼가 펼쳐지는 공간으로 여긴다. 최근 만나본 나의 오랜 지인 역시 병원에서 위로받지 못하고 도리어 큰 상처를 받았다고 했다. 그녀는 그간 내게 소식을 전하지 못했다며 사과했는데, 얼마 전에 그녀의 모친이 로스앤젤레스 병원에서 돌아가셨던 것이었다. 병환이 길어지자, 지인의 어머니는 오랫동안 몸을 움직이지 못할 때 생기는 욕창을 막기 위해 특별히 설계된 공기주입식 매트리스에 누워서 마지막 몇 주를 보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그녀의 슬픔에 공감하던 간호사들이 내 지인에게 어머니 시신 옆에 좀 더 있어도 된다고 말해주었다. 그런데 몇 분 후 의사 한 사람이 방으로 급히 들어왔다. 일면식도 없는 의사였는데, 그는 자기소개도 하지 않고 들어와 어머니의 진료기록부를 잠깐 읽더니, 몸을 숙이고는 공기주입식 매트리스의 플러그를 잡아 빼버렸다. 돌아가신 어머니의 시신은 위로 튀어올랐다가, 매트리스에서 공기가 슉 하고 빠지자 좀비처럼 이쪽저쪽으로 거칠게 움직였다. 의사는 한 마디 말도 없이 유유히 병실 밖으로 나갔다. 유가족을 위한 지지나 배려와는 거리가 먼 경험이었다. 어머니가 세상에서 마지막 숨을 쉬자마자 가족들은 밖으로 내쳐진 것이다. 두 번째로는 장의사가 있다. 미국에서 가장 큰 장례업체인 서비스 코퍼레이션 인터내셔널의 한 간부는 "미국의 장례업계는 정말이지 관 판매에 혈안이 되어 있다."라고 최근 인정했다. 인위적으로 꾸며진 어머니 시체를 7000달러짜리 관에 넣는 것을 가치 있게 여기는 이들은 점점 줄어들고 사람들이 단순 화장 쪽으로 돌아서면서, 업계는 살아남기 위해 새로운 방도를 찾아야 했다(p. 227). '장례 서비스'를 판매하던 것에서, '다감각 체험실'에서의 '모임'을 판매하는 것으로 말이다. 최근 《월스트리트저널》 기사에서는 이렇게 설명한다. "시청 각 도구를 사용한 체험실에서는 새로 깎은 싱그러운 잔디 냄새를 포함해, 골프 코스 같은 분위기를 만들어 그 안에서 골프 애호가였던 고인을 추모할 수 있다. 골프장뿐만 아니라 바다나 산, 축구 경기장을 떠올리게 할 수도 있다." 아마 가짜 '다감각' 골프 코스에서 장례를 거행하는 데 수천 달러를 지불하면, 유가족은 당장은 슬픔을 위로받는 듯한 느낌이 들지도 모르지만, 나는 의구심이 든다. 내 어머니는 최근 70세가 되셨다. 어느 날 오후, 나는 연습 삼아 미라가 된 어머니의 시체를 인도네시아의 타나토라자 사람들이 하듯이 무덤에서 꺼내는 상상을 해보았다. 상상 속에서 나는 어머니의 유해를 끌어안고 일으켜세운 뒤, 죽은 지 수년이 지난 어머니의 눈을 바라본다. 이런 생각을 해도 더 이상 놀랍지 않다. 이제 내가 이런 식으로 과업을 처리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의례에서 위로받을 수 있을 거라고 믿기 때문이다. 유가족을 위한 공간을 만드는 것은 그들을 슬픔 속에 가둬 두겠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가족들에게 의미 있는 일을 할 기회를 준다는 뜻이다. 젓가락으로 뼈 하나하나를 정성껏 집어 유골함에 담는 의식부터, 제단을 만들고 1년에 한 번 혼령을 부르는 의식이나 심지어 무덤에서 시체를 꺼내 깨끗이 해서 다시 세우는 일까지, 이런 활동은 유가족에게 목적의식을 부여한다. 이(p. 228)는 유가족이 슬퍼하는 데 도움이 되고, 슬퍼하는 것은 치유를 시작하는 데 도움이 된다.
현장에 나타나지 않으면 의례를 온전히 느낄 수 없다. 먼저 참석하라. 그러면 의례의 의미가 다가올 것이다. 화장을 참관하겠다고 고집하고, 매장을 보러 가겠다고 고집하라. 설령 관에 누 운 어머니의 머리를 빗겨드리는 것이 고작일지라도, 함께 참여하겠다고 하라. 어머니가 좋아하던 색깔의 립스틱을 발라드리겠다고 주장하라. 그걸 바르지 않고 무덤에 들어가는 건 꿈도 못 꿀 정도로 어머니가 좋아하던 그 립스틱 말이다. 어머니의 머리카락을 조금 잘라서 목걸이나 반지에 넣겠다고 하라.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 이런 것들은 다 인간적이고도 용감한 행동이다. 죽음과 상실 앞에서 사랑을 보여주는 행동이니까. 나는 안다. 내가 어머니의 시신 앞에서 마음이 편안할 거라는 사실을, 그것은 바로 내가 주위 사람들로부터 지지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의례란 쥐 죽은 듯 고요한 야밤에 몰래 묘지에 슬쩍 들어가서 미라가 된 시체를 엿보는 것이 아니다. 의례란 내가 사랑하던 누군가를, 그로 인한 나의 슬픔을 환한 대낮에 꺼내놓는 것이다. 이웃과 가족이 함께, 공동체가 곁에서 지지해주는 가운데 어머니를 향해 인사하는 것이다. 햇빛은 모든 것을 소독해준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그 대가가 무엇이든 간에, 죽음을 둘러싼 우리의 두려움, 수치심, 슬픔을 소독할 수 있도록 햇빛 속으로 끌고 나오는 어려운 작업은 이제 막 시작되었다(p. 229).
옮긴이의 말
살다가 죽는 것은 누구에게나 중요한 문제이다. 그런데 죽음을 대하는 태도는 나라마다 문화마다 천차만별이다. 저마다 몸담고 사는 그 지방, 그 나라의 고유문화가 있을 것이다. 각자가 속한 문화권 안에서는 자신의 장례 문화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기 쉽다. 세계에서 미국인이 번역서를 제일 안 본다는 말도 있는데, 그만큼 자국 중심적인 사고가 강한 미국인들은 자신들의 죽음 문화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태도를 보인다. 케이틀린 도티의 행보가 각별한 것은, 죽음을 부정하는 미국의 문화를 비판적으로 돌아보며 대안을 찾아 나선다는 데 있다. 전 세계를 돌면서 다른 나라, 다른 지방에서는 죽음을 어떻게 대하는지 하던 일을 놓고 길을 떠난 저자는 미국인으로서 예외적이고 열린 존재라고 아니 할 수 없다. 저자가 이토록 죽음에 천착하는 것은 역설적으로 삶에 대한 애정이 그만큼 깊기 때문이다. "삶에 대한 애정이 도티의 유(p. 232)머와 섞여 지금의 미국 문화가 죽음을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를 다시 생각해보게 한다"라는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의 서명 기사가 이 책을 잘 요약하는 것 같다. 젊은 여성으로서 시체를 화장하는 장의사로 여러 해 일한 경험을 1권 『잘해봐야 시체가 되겠지만』에서 적나라하게 때론 유머러스하게까지 쏟아낸 그녀는, 2권 『좋은 시체가 되고 싶어」에서는 시신을 대하는 색다른 방식을 보기 위해 각 대륙의 여러 나라를 직접 돌아보며 그 예를 열거한다. 여기서 본보기 겸 대안으로 제시된 것이 미국 콜로라도주의 야외 화장, 인도네시아 타나토라자의 마네네 의식, 멕시코의 망자의 날 행사,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의 인간 부패 연구소, 스페인의 장의사, 일본의 죽음 관련 풍습, 볼리비아의 냐티타 축제이다. 종착지는 다시 미국 캘리포니아이다. 원점으로 돌아가 고인을 사막 한복판에 흔적 없이 묻는 것이다. 인적 없는 사막 지대에 파묻혀 자취조차 남지 않는 장례를 치른다. 그리고 파르시교도의 독수리 장례와 티베트의 천장을 얘기한다. 에필로그에서는 오스트리아의 묘지를 방문했던 일과 그때 느낀 점이 언급된다. 이 책이 의미를 갖는 지점은 단지 텍스트를 통해 죽음을 연구한 것이 아니라, 직접 그 나라에 찾아가서 일면식도 없는 사람의 장례에 참여하며 그 의례를 직접 체험했다는 데 있다. 이를 통해 내가 속한 문화의 죽음 의례 또한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얼마든지 변화 가능한 것임을 깨닫게 한다. 죽음을 대하는 한국의 문화 역시 지난 수십 년간 많이 변화 하였다. 지금은 집에서 장례를 치르는 경우가 거의 없다. 가까운(p. 233) 과거와 비교할 때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미국은 어떠한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확실한 것은, 자기가 평소 눕던 침대에 누워 가족들 사이에서 죽음을 맞는 경우란 흔치 않다는 것이다. 집과 병원, 어디서 죽음을 맞는가, 어디서 죽음이 처리되는 가에 꼭 정답이 있는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변화는 자연스러운 것이기도 하므로 우리가 이제 와서 없던 관습을 새삼 지어내어 인도네시아의 타나토라자 사람들처럼 할 수는 없다. 다만 생자와 망자의 경계를 느슨하게 만들 수는 있다. 생자가 망자 옆에서 머물며 충분히 위로의 시간을 가질 수도 있다(p. 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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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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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회이만교회운동본부, 제8차 교회개척비전세미나 개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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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회이만교회운동본부(본부장 전승덕 목사)가 주최한 제8차 총신·칼빈·대신·광신신대원 교회개척비전세미나가 2월 23일 오전 10시 30분 천호동원교회(배진호 목사 시무)에서 열렸다.
다음은 세미나 책자에 있는 본부장 전승덕 목사의 인사말 전문이다.
"제8차 총신•칼빈•대신•광신신대원 교회개척비전 세미나에 오신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추운 날씨 가운데에서도 하나님이 충만한 은혜를 부어 주시는 2월, 하나님이 주신 귀한 목회자의 소명을 감당 하고자 이곳에 오신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이만교회운동본부는 교회개척과 전도와 성장에 관심이 있고 어려운 여건 가운데에서도 하나님의 도우심을 의지하여 최선을 다해 복음전도의 사명을 감당하고자 하는 신대원 전도사님들에게 도움을 주고자 세미나를 준비하였습니다. 그동안 이만교회운동본부가 2005년도에 교회개척세미나를 진행해 온 지도 어느덧 21년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많은 개척교회를 돕는 손길로 이만 교회운동본부를 사용해 주셨음을 늘 믿고 감사를 드립니다. 여러분들이 신대원을 졸업하고 교회를 개척하는 것에 이만교회가 주는 도움은 아주 작은 도움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오병이어의 기적처럼 작은 관심과 사랑이 놀라 운 하나님의 부흥의 역사로 이어지길 소망하며 저희 이만교회운동본부는 여러분을 최선을 다해 돕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또한 이 시간을 빌어 감사드리는 것은 시간 시간 신대원 전도사님들을 위해 기도와 말씀과 물질로써 섬겨주신 강사분들에게 감사드리며, 특별히 이 아름다운 장소를 허락해 주신 천호동원교회 당회와 성도님, 그리고 주차부터 식사와 간식 등등 세심하게 섬겨주시는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교회의 부흥은 우리가 원하는 것 이상으로 하나님이 원하신다는 것을 잊지 마시고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세상적인 방법을 의지하기보다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섭리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늘 기대하며 하나님의 놀라우신 손길을 체험하는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예배는 사무총장 임은진 목사의 인도로 회계 조형국 장로가 기도, 서기 전광수 목사가 고전 9:24-27을 봉독했다.
증경본부장 배재군 목사가 ‘꿈을 이루는 사람들’이란 제목으로 “목회는 다른 일반 직업들보다 쉽고 편한 것이다. 운동 선수도 이기기 위해서 절제한다. 목사들도 목회를 위해서는 이들보다 더 나아야 한다. 상을 바라보며 이겨내고 견뎌내야 한다. 이것이 ‘역경지수’이다. 사명 잘 감당해 모두 상 받기를 바란다.”라고 설교 후 부본부장 하재삼 목사의 축도로 예배를 마쳤다.
제1강의는 부본부장 강문구 목사의 사회로 부본부장 박영수 장로가 기도 후 천안아산주님의교회 최윤석 목사가 ‘교회 개척 어떻게 할 것인가?’란 제목으로 “개척을 위해서는 첫째,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교회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 한다. 둘째, 교회를 개척하는 분명한 이유와 교회가 나아가야 할 분명한 목적이 있어야 한다. 셋째, 그리스도 중심의 설교에 대한 준비가 필요하다. 넷째, 전도와 제자화 사역에 대한 준비가 필요하다. 다섯째, 성경적인 건강한 리더십이 있어야 한다.”라고 강의했다.
제2강의는 부본부장 김영구 장로의 사회로 총무 이창원 장로가 기도 후 대한교회 윤영민 목사가 ‘개척교회를 위한 쉽고 강한 설교 이렇게 하라’는 제목으로 “목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설교이기에 쉽고 강한 설교가 필요하다. 새신자가 듣기 쉬운 설교를 해야 한다. 그러면서도 주제가 분명해야 하며 들리는 설교를 해야 한다. 소통하는 설교를 해야하며 설교가 강론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설교는 글이 아니라 말이기에 설교 원고도 말하듯이 써야 한다. 본문에서 빅 아이디어를 찾고, 구조를 짠 후 대화식으로 설교해야 한다. 설교자의 주요 업무는 설교이기에 설교에 대한 분명한 생각을 가져야 한다.”라고 강의했다.
제3강의는 사무총장 임은진 목사의 사회로 부본부장 신수희 장로가 기도 후 총신 신대원 양현표 교수가 ‘교회 개척자가 되기 위한 준비’란 제목으로 “신학적으로 무장하라. 지금부터 준비하라. 생존의 방법을 마련하라. 교회개척을 창조적으로 접근하라. 자기답게 목회하라. 현장을 존중하라. 출구전략을 갖고 시작하라.”라고 강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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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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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354】 죽음의 단계에서 생겨나는 신체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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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 후반의 부모님을 모시고 사는 입장에서 죽음에 대해 많이 생각한다. 언젠가 부모님의 마지막이 다가오면 얼마나 당황스러울까? 그래서 틈틈이 임종에 대한 책을 통해 지식을 얻고 있다. 볼수록 사람이 죽는다는 것이 힘든 과정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99세까지 잘 사시다가 고통없이 가시기를 바랄 뿐이다. 도서관에서 대출해 읽었는데 현재 이 책은 절판됐다.
병원에서라면 조금 더 오래 살 수 있다?
의료진이 가까이 있으면 안심이 될 테지요. 그래서 임종기를 병원에서 보내는 이들이 많습니다. 특히 환자 상태가 나빠지면 걱정이 되면서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병원에 가면 나아지지 않을까?" "병원이라면 덜 고통받지 않을까?" 병원은 병을 낫게 해줍니다. 그러나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에게 편안한 간호를 제공하지는 않습니다. 임종기 간호는 달라야 합니다. 임종기가 되어 신체 기능이 현저히 약해지면 통상적인 치료여도 환자는 고통(p. 13)을 크게 받습니다. 대표적으로 '여명이 별로 길지 않다고 예측될 때 놓는 링거 주사'가 있습니다. 여명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는 혈관 내 수분을 유지하는 데 도움을 주는 단백질(알부민) 수치가 매우 낮습니다. 그래서 링거로 수분을 보급해도 혈관 내에 수분이 유지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환자의 발이 붓거나 가래 분비가 늘어서 고통만 받게 됩니다(p. 14).
암의 경우 추정되는 여명과 그 증상
① 짧은 주 단위 여명(여명 1~3주 이내)
• 동통 이외에 고통 증상 악화가 판단된다. 전신 권태감이 특히 강해진다. 이들 고통 증상은 스테로이드 투여로도 그다지 개선되지 않는다.
• ADL(일상생활능력: 식사, 배설, 바른 자세, 이동, 입욕 등 생활을 영위하기 위한 기본 동작) 장애가 눈에 띈다. 화장실에 가는 데 어려움을 느낀다.
• 대부분의 시간을 침대에 누워 보낸다.
• 성대가 야위어 생기는 사성(쉰 목소리)이나 이관 조절 기능 저하에 의한 귀의 이화감, 이음 의 청취, 체력 저하에 따른 시력 저하(흐려짐, 침침해짐 등의 표현을 함) 등이 출현한다.
•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소재식 장애(자신이 처한 상황을 정확하게 인식하지 못하는 상태)가 출현한다. 섬망이나 혼란을 겪는 환자도 있다.
• 최저한으로 움직인다면 아직 못다 한 일을 할 수 있는 한계선이다(p. 25). 외출 및 외박이 어떻게든 가능하며 자택 이동, 병원 교체, 일시 퇴원이 불가능하지는 않으나 아슬아슬한 시기이다.
② 일 단위 여명(여명 여러 날 이내)
• 고통 증상이 가장 강하다. 특히 전신 권태감이 강해서 '몸을 가누기도 힘들다.'라는 표현을 하는 사람이 많다. 고통을 호소하지만 그 부위가 뚜렷하지 않고, 몸을 가누기 힘들어서 아프다고 표현하는 일이 많다. 이러한 고통 증상은 스테로이드 투여로도 완화되지 않는다.
• 여명 24시간 전쯤 되면 고통이 최대로 커져서 진정요법을 (최저한 이며 간헐적이더라도) 고려하게 된다. 몸을 조급하게 움직이거나 다리가 무겁게 느껴져서 간병인에게 대신 움직여달라고 부탁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 ADL 장애가 현저하게 나타난다. 침대 위에서 움직이는 것도 어렵다. 화장실에 가려고 무리하게 시도하다 힘들어하기도 한다.
• 미간에 주름이 생길 정도로 괴로운 표정을 자주 보인다.
• 수면 상태, 몸도 가누기 힘든 고통, 전신 권태감 등의 상태를 오가며 괴로워한다.
• 의사소통이 곤란하다. 섬망과 혼란이 나타나는 빈도가 잦아진다.
• 상태가 급변하므로 임종을 지키고 싶은 가족은 되도록 옆에 머무르는 편이 좋다(p. 26).
③ 시간 단위 여명(여명 1일 이내, 몇 시간 정도로 소위 말하는 '시간 문제')
• 의식 상태가 저하되어 고통 증상을 호소하지 않는다.
• 뒤척임(자다가 몸을 뒤척이는 등 몸을 움직이는 것)이 없어진다.
• 괴로운 표정이 풀리고 미간에서 주름이 사라진다.
• 무의식 발성(강하게 숨쉴 때 아아 등 간헐적 발성이 동반되는 것)이 생긴다. 괴로워서 내는 소리가 아니므로 그 사실을 가족에게 전달해 둘 필요가 있다.
• 죽음 전 천명(미, 후두부의 골골대는 소리)이 들린다. 무의식 발성과 마찬가지로 의식이 저하된 환자는 괴롭지 않다.
• 요골동맥(손목)이나 상완동맥(팔꿈치 안쪽)을 만져도 박동을 느낄 수 없다.
• 소변 유출이 멈추거나 상당히 저하된다.
• 임종을 지키고 싶은 가족은 되도록 옆에 머무르는 편이 좋다.
• 호흡은 얕고 빠르다. 하악호흡(턱을 아래위로 움직이며 쉬는 호흡-옮긴이)이 되고 1분당 호흡 횟수가 두서너 번 정도로 적어지면 여명은 분 단위이다(p. 27).
마지막 시기에는 입으로 뭔가를 먹거나 마시기 어렵습니다. 그 결과 "마지막 시기 중후반여명 주-일 단위)에 발생하는 탈수 상태는 뇌 내 마약이라고 할 수 있는 B엔도르핀과 케톤체를 증가시켜 환자에게 진정 효과가 있다."고 합니다. 일반적으로 약 20~30% 암환자에게 '진정요법'(꾸벅꾸벅 졸게하여 고통을 제거하는 방법)을 지속적으로 행해야 한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진정요법을 행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의식이 저하되어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찌 되었든 가장 괴로운 시기는 역시 숨을 거두기 전 마지막 24시간 전후입니다. 딱 잘라 말하자면 죽기 전날입니다. 살면서 임종자가 사망하기 몇 시간 전부터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옆에서 지켜보는 일을 직접 경험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몇 시간 이내에 사망하게 될 사람의 상태를 상상하기는 더욱이 어려울 것입니다. 여명이 시간 단위가 되면 환자의 표정은 평온해집니다. 그런데 호흡이 빠르거나 가래가 끼는 등의 증상으로 괴로워하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릅니다. 특히 쭉 병간호를 해왔다면 환자가 죽기 직전에 심신의 피로가 극에 달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환자가 약간만 변화를 보여도 금방 괴로워 보인다고 판단해버립니다.
고통의 판단 기준 두 가지
명확하게 고통의 증거라고 볼 수 있는 증상 두 가지를 알려드리겠습(p. 44)니다. 바로 '괴로운 표정'과 '많은 뒤척임'입니다. 특히 암환자의 임종기에는 개인차가 있겠지만 여명 24시간 전후 부터(또는 여러 날 전부터) 몸을 가누기 힘든 괴로움을 표현합니다. '몸을 가누기 힘든 괴로움'을 말로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옆에서 관찰해보고 가늠하건데 서지도 않지도 못하는 상태인 듯합니다. 어떻게 괴로운지 물어보았을 때 "표현할 수 없다"고 답했으며, "몸이 무거우신가요?"라고 물어보았을 때 "무겁다"고 답했습니다. 즉 '전신이 서지도 않지도 못할 정도로 무겁고 그야 말로 몸을 가누기 힘든 괴로움'이라고 추측해봅니다. 그러한 시기에 '괴로운 표정과 많은 뒤척임'이 보입니다. 우선 '괴로운 표정'이란 말 그대로 괴로운 얼굴입니다. 미간을 찌푸리며 괴로운 듯한 표정을 짓는 것이 특징입니다. 내내 미간에 주름 짓는 정도부터 신체를 움직일 때 잠깐 인상을 쓰는 정도까지 차이가 있습니다. 전자 쪽이 더 괴롭다고 판단하면 됩니다. 뒤척임은 신체를 움직이는 증상입니다. 몸을 가눌 수 없기 때문에 신체를 이쪽저쪽으로 움직이며 조금이라도 편한 자세를 잡으려고 뒤척입니다. 이 또한 계속 움직이는 환자부터 가끔 움직이는 환자까지 정도 차이가 있습니다. 전자 쪽이 더 강한 고통에 시달린다고 판단하면 됩니다. 괴로운 표정과 많은 뒤척임은 주로 함께 나타나지만 한쪽만 두드러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그런 증상이 존재한다면 고통이 있으며 의식이 완전히 저하되지 않았다는 의미입니다. 완전히 고통에서 해방되지 못한 것이지요. 그래서 괴로운 것입니다(p. 45).
암 환자의 여명이 여러 날 이내라고 판단되고 상시 괴로운 표정이나 많은 뒤척임이 관찰된다면, 진정요법이라는 처치로 고통을 줄여줄 필요가 있습니다. 진정요법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알아보겠습니다. 다만 진정요법이 수명을 단축시키지 않는다는 점을 미리 알려드립니다. 몸을 가누기 힘든 증상은 이외에도 다양하게 표현됩니다. 다리가 무겁다며 빈번하게 발의 위치를 바꾸거나 간병인에게 다리를 옮겨달라고 부탁하는 걸 보면 다리가 납처럼 무겁게 느껴지는 듯합니다. 같은 이유로 다리에 덮인 모포를 걷어차거나 양발 위에 이불을 덮는 것을 싫어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렇게 조금이라도 편해지려고 다리의 위치를 바꾸는 행동도 '많은 뒤척임'에 해당합니다. 다리가 극도로 무겁게 느껴지는 증상이 계속 이어져서 뚜렷하게 괴로움이 드러난다면 진정요법을 처방하는 쪽이 좋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무겁고 나른함이 다리에 한정되어 나타난다면 족욕을 하거나 가볍게 마사지를 하며 살짝 문질러주는 것이 효과적일 때도 있습니다. 이외에도 몸을 가누기 힘든 증상 중 하나로 '전신의 고통'을 호소하기도 합니다. 이 고통은 여명 여러 날 이상일 때 느끼는 고통과 달리 어디가 아픈지 확실히 전달하지 못합니다. 대답할 수 있더라도 "어디인지 모르겠어." "아무튼 온몸이 아파'"라고 표현할 때가 많습니다. 제가 "어디가 아프신지 손가락으로 가리켜주실 수 있나요?"라고 물어봐도 짚어 내지 못하고 "아프다, 아파"라는 말만 반복했습니다. 이러한 고통에는 그전까지 효과가 있던 의료용 마약 등 통상적인 진정제가 전혀 듣지 않습니다. "투여하던 의료용 마약을 늘렸지만 좋아(p. 46)지지 않았다."라는 말이 들리는 게 막연한 전신 고통의 특징입니다. 대부분 전신과 함께 몸이 무겁다고 느낍니다. 전신 고통이 강하다면 진정 요법을 고려해야 합니다. "몸이 무거워서 도무지 힘이 들어가지 않아." "손발에 전혀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라는 표현을 자주 합니다.
임종기 환자에게는 섬망 상태, 즉 의식이 변화하고 정상적으로 주변 상황을 인지할 수 없는 상태에 빠지는 증상도 자주 일어납니다(치매 악화는 아님). 임종기의 섬망은 대부분 개선되지 않으며 몸을 가누기 힘든 괴로움처럼 자주 몸을 뒤척입니다. 섬망 상태가 두드러지게 나타나면 진정요법을 고려해야 합니다. '막연한 전신 고통'이나 '섬망 상태'에도 '괴로운 표정'이나 '많은 뒤척임'을 동반합니다. 정리하자면 마지막 시기에 '몸을 가누기 힘든 괴로움'은 무거운 몸, 진통제가 듣지 않는 고통, 섬망 등이 원인이며, 공통적으로 '괴로운 얼굴'과 '많은 뒤척임'을 표현합니다. 이런 증상이 강하게 나타나면 진정요법을 고려해야 합니다
그러나 진정요법 외에도 가능한 일이 있습니다. 이러한 고통은 말하자면 '마지막 고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시간대를 넘기면 자연스럽게 평온한 얼굴이 되고 잠든 듯한 상태로 바뀌는 일이 많기 때문입니다. 의사, 간호사, 간병인, 가족이 가장 힘들어하는 시기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시기는 길어도 며칠입니다. 일주일까지 이어지는 일은 드뭅니다. 그 시간 동안 각각 자기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해두는 것이 중요합니다(p. 47).
하악호흡 자체는 모두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지만 그 모습에는 개(p. 52)인차가 있습니다. 1000여 건 넘게 죽음을 지켜본 제 경험으로는 대부분 하학호흡이 된 후 10분 이내에 마지막 호흡을 맞이했습니다. 제일 긴 환자로는 간경변증을 앓던 환자로 2시간 가까이 하악호흡을 했습니다. 하지만 이는 예외적인 일이며 대부분 수분 정도입니다. 괴로운 얼굴과 뒤척임이 나타나는 시기는 지나갔고 의식도 저하되어 있어서, 이런 호흡이나 상태 때문에 환자가 고통을 느끼지는 않습니다. 호흡 정지가 일어나면 대략 수분 이내에 심정지가 발생합니다. 일반적으로 이때 동공산대와 빛 반사 소실(대광반사 소실)이 있으므로, 호흡 정지가 일어난 환자의 심정지를 확인하면 사람이 진단상 '사망'하게 됩니다. 사망의 세 가지 징후인 심정지, 호흡 정지, 동공반응 정지(동공산대•대광반사 소실)가 갖춰지기 때문입니다(p. 53).
저는 임종기 환자의 상황이 졸음이 쏟아져서 비몽사몽인 상태와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선잠이 들었을 때 멀리서부터 목소리가 들리는 듯한 경험을 한 적이 있을 것입니다. 임종기 환자와 마지막 말을 전할 때는 떨어진 거리에서 큰 목소리로 외치는 것보다 귓가에서 천천히 차 분한 목소리로 말하는 것이 좋습니다. 난폭하게 의식을 깨우기보다 의식에 살며시 닿을 듯이 말하는 자세가 최선입니다. 안타깝지만 의료인조차도 '마지막까지 듣고 있을 가능성‘에 무심합 니다. 방에 의료인만 남으면 아무렇지도 않게 "위험하네.", "이제 얼마 안 남았어.", "혈압이 떨어졌네" 등의 말을 주고받습니다. 때로는 의식이 없는 듯이 보이는 환자 옆에서 사망이 가까워졌다는 사실을 말하기도 합니다. 이런 행동은 이제 그만두어야 합니다. 필요한 내용이 있다 면 병실을 벗어난 후에 전하세요. 환자의 반응이 없으면 가족들은 "이제 듣지 못하는구나.", "내 말 들려요?" 하며 슬퍼합니다. 이때 의사나 간호사는 환자의 청력이 살아 있다는 점을 이야기해주어야 합니다. 듣지 못한다고 생각하고 환자 옆에(p. 57)서 유산 분배, 장례 준비 등 환자 본인이 듣지 않는 편이 좋은 내용에 대해 이야기할 수도 있으니까요. 언뜻 보기에 반응이 없는 것 같지만 어쩔 때 보면 마치 가족의 목소리를 듣고 있는 것처럼 평온한 표정을 짓거나 수긍하는 듯한 숨소리를 냅니다. 기분 탓이든 실제로 그렇든, 여명이 수 시간 단위인 임종기 환자를 대할 때는 목소리가 전해진다고 전제하세요. 그리고 가족이나 옆에서 지켜보는 사람들은 마지막까지 환자에게 다정한 말을 건네세요. 환자의 청각은 남아 있을 테니까요(p. 58).
괴로운 얼굴이나 뒤척임이 수반되지 않는 무의식 발성 쪽이, 괴로운 얼굴이나 뒤척임을 수반하여 고통이 있다고 판단되는 무의식 발성보다 훨씬 많습니다. 반복해서 말하지만 무의식 발성은 임종기 환자보다 가족이나 지켜보는 사람 쪽이 괴로워하는 증상입니다. 물론 진정요법을 쓰면 잦아들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괴로워서 목소리를 높이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알아두세요(p. 62).
임종기의 '마중 체험'
여명 수일 단위가 되면 환자가 주변 사람을 인식하지 못합니다. 이 시기에 환자를 돌보는 사람들이 가장 힘든 경험을 합니다. 예를 들어 사랑하는 아내가 자신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일 등이 일어납니다. 본인도 암투병을 했던 고 오카베 켄은 소속한 그룹에서 마중 체험(임종기 환자가 타인에게 보이지 않는 존재나 풍경에 대해 말하는 증상)을 연구했습니다. 여명 수일 단위가 되면 환자는 마중 체험처럼 본래 보일 리가 없는 것을 보기도 합니다. 이 현상 때문에 돌보는 사람들이 충격을 받기도 합니다. 환자가 감각을 잃어가는 순서는 갓난아이가 능력을 획득하는 순서(p. 65)와 대칭형입니다. 갓난아이는 청각이 시각보다 먼저 발달하는데 마지막 시기의 환자도 청각이 시각보다 오래 유지됩니다. 또한 유아는 태어나서 반년 정도까지 엉뚱한 방향을 보고 미소를 짓는 등의 행동을 합니다. 마치 뭔가 우리에게 보이지 않는 존재를 보는 것처럼 말이지요. 임종기 환자도 마찬가지일지도 모릅니다. 다만 마중 체험에서 보이는 사람이나 물건은 불쾌한 대상이 아닙니다. 오히려 양친이나 그리운 풍경이 보여서 죽은 다음 느낄 고독을 다독여주는 것처럼 보입니다. 시력 자체는 떨어졌지만 여명 수일 단위가 되면 이런저런 '마음 따뜻한 물건'이 보이면서 안정을 찾습니다. 결코 공포영화처럼 불길한 존재나 사신이 보이는 것은 아닌 듯하니 안심하세요. 환자가 마중 체험과 비슷한 상황에 처한다고 하더라도 부정하지 말고, "보이는군요" 하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주세요. 그게 가장 좋은 대응입니다. 또한 어느 정도 시야가 흐려져서 그러한 증상이 일어나는 것이므로 환자가 잘 볼 수 있도록 환자 가까이에 다가가세요. 사람을 착각하는 현상은 빈번하게 일어나는 일이니 되도록 충격을 받지 말고, 강하게 정정하지 마세요. 예컨대 부인에게 "아버지!"라는 말을 들어도 "아니, 남편인 000야."라고 차분하게 말하세요. 그래도 "아버지!"라고 부른다면 그대로 중립적인(아버지인 척하지 말고, 부정도 정정도 하지 않고 평소대로) 대화를 하는 것이 좋습니다. 임종기 환자는 애초에 잘 보이지 않는 상태이기 때문에, 물리적으로 거리가 멀어서 착각할 때도 많다는 점을 알아두세요. 물론 잘 보이지(p. 66)않아 흐릿한 것은 사람뿐만 아니라 물건도 마찬가지이므로 자주 사용하는 물건은 가까이 두는 등의 배려가 필요합니다(p. 67).
제 경험상 주로 임종기에 골골거리는 소리가 들릴 때는 의식이 저하 되어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때마다 '환자는 괴롭지 않다.'라고 판단했습니다. 다만 지켜보는 사람들은 괴로워 보인다고 인식하는 일이 많았습니다. 앞서 언급한 판단 기준을 참고하여 의식이 있고 괴로운 듯하다면 가래를 제거하고, 의식이 저하되어 괴로워 보이지 않는다면(고통이나 태동이 눈에 띄지 않으면) 가래 제거를 삼가세요. 의식 여부로 괴로운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것은 호흡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명 수일 단위에 빠른 호흡을 할 때도 대부분 의식이 저하되어 있어 괴롭지 않습니다. 잠들었거나 의식이 저하되어 있을 때는 무호흡과 빠른 호흡을 반복하더라도 거의 괴로움을 호소하지 않습니다. 여명 수 분 단위에 출현하는 하악호흡도 의식이 저하된 상태라 괴롭지 않은 증상입니다(p. 88).
떠나보내는 장소는 따뜻하고 포근하게 하라
사망자를 떠나보내는 공간은 가능한 한 평온하고 따뜻한 곳이 좋습니다. 환자가 안심하고 죽을 수 있을 것 같은 장소를 제공하고 싶겠지요. 안타깝게도 일반 병원이나 대형 병원은 개인실이라 하더라도 그다지 평온한 공간을 제공하는 단계에 도달하지 못했습니다. 물론 시설이 좋고 의료진이 훌륭하여 충분한 자질을 갖춘 공간도 있지만 전체적으로 충분히 훌륭하다고 말하기 힘든 상황입니다. 호스피스나 완화치료 병동은 평온한 공간을 제공합니다. 암으로 입원하여 마지막 시기를 보내려고 생각하는 장소로는 적절한 선택지입니다. 다만 저는 역시 집, 오래 생활해온 노인센터, 간호시설 등이 생활공간에 가장 가까우며 마지막 장소라 하기에 적합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곳에는 익히 봐온 친한 사람이 있고, 친숙한 물건이 있으며, 익숙한 소리가 들리고, 낯은 공기가 흘러옵니다. 이는 다른 곳과 비교가 안 되는 장점입니다. 집에서 사망한 한 환자의 방에서는 그가 사랑한 클래식 음악이 조용하게 흘러나왔습니다. 그야말로 시간이 멈춘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그는 가족에게 둘러싸인 채, 그 이상은 없다고 할 정도로 평온한 얼굴로 숨을 거뒀습니다. 이처럼 집이라면 음악을 켜둘 수도 있습니다. 그의 만족스러운 표정에서 죽음이 인생의 완결임을 다시금 실감했습니다. 큰 병원 병실에서는 느끼기 힘든 흡족한 임종이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p. 158). 사망 징후가 확인됐다고 죽음인 것은 아닙니다. 죽음이란 무엇보다도 가장 의미가 풍요롭습니다. 죽음이 마냥 불행한 것만은 아닙니다. 간호한 사람이나 유족 등 환자의 죽음을 받아들인 사람에게 새로운 세상을 사는 힘을 선사합니다(p. 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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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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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353】 생일 때 죽음을 생각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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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 〈오싱〉이란 책에 대해 얼핏 본 기억이 있다. 이 책은 그 저자가 노년에 연명 치료 없이 죽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쓴 책이다. 저자는 2차대전을 겪으며 이미 죽음에 대해 숱하게 경험했기에 노년에 이르러 죽음에 대해 담담할 수 있었다. 나도 죽음에 대해 이전보다 더 많이 생각한다. 잘 죽기를 바라면서. 현재 이 책은 품절됐고 전자책으로 읽을 수 있다.
추천의 글, 하나
존엄한 죽음을 위한 한 걸음
죽음은 우리 주변을 늘 맴돌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죽음에 대해 생각하기 싫어하고, 만나기를 두려워하고, 회피하려 할 뿐이다. 이는 청춘과 노년을 막론하고 생명체의 본능이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안락사로 죽여주세요!"라고 용감하게 외치는 하시다 스가코를 만날 수 있다. 하시다는 나이 든 이들이라면 한 번쯤은 들어보았을 〈오싱〉이라는 일본 드라마의 각본가다. 일본에서 영향력 있는 작가가 왜 죽음이라는 두렵기만 한 낱말을 넘어 안락사라는, 어찌 보면 사회적 금기를 공공연히 입에 올리고 법제화(p. 5)를 외치는지 알아볼 필요가 있다.
이는 아마도 현대 과학과 함께 발달한 의료의 발전으로 이전 세대가 생각지도 못했던 문제가 죽음의 패러다임을 바꿨기 때문일 것이다. 복잡한 현대사회에서도 사람의 생명과 관련된 문제는 매우 민감하다. 현대 의학은 중환자의료(intensive care 또는 critical care)라는 분야를 발전시키면서 예전 같으면 사망했을 치명적인 상황에 빠진 환자를 많이 살려냈다. 또 한편 중환자 의료에도 소생하지 못하고 삶과 죽음 사이의 경계, 즉 회색지대(gray zone)에 놓인 환자들이 많아서 논란을 불러일으킨다.
이 책에 따르면, 일본의 후생노동성은 2007년에 회색지대에 놓인 환자들에 대한 규범적 가이드라인인 '종말기 의료의 결정 과정에 관한 가이드라인'을 제정 발표했으며, 2015년에 이를 '인생의 최종 단계에서의 의료 결정 과정에 관한 가이드라인'으로 개정했다. 하시다는 이에 대해 존엄성에 신경을 썼다고 말하기는 어렵다는 투로 평가한다. 사실 우리나라는 오랫동안 중환자 의료 중지에 관한 절차와 시기가 명확하지 않아 많은 사회적 갈등을 겪었고(p. 6) 일본보다 10년 이상 늦은 2018년 2월경에야 '호스피스 • 완화 의료 및 임종 과정에 있는 환자의 연명의료 결정에 관한 법률'이라는 매우 길고 복잡한 이름의 법이 시행되었다.
이 책에서 언급한 안락사, 존엄사, 소극적 • 적극적 안락사 등의 용어에 대한 하시다의 의견은 일본에서 커다란 파장을 일으켰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본격적인 논쟁조차 시도된 바 없다. 따라서 책을 읽기 전 이들 용어에 대해서 한 번쯤 고심해봐야 한다. 자칫 인터넷 정보에 의지해 용어를 정의한다면 혼란과 논란을 부추길 수 있다.
의학적으로 허용되는 범위의 '안락사'는 자발적 안락사, (의사) 조력사망, 연명의료 결정, 이 세 가지로 나뉜다. 안락사(euthanasia)란 사실 오래전부터 쓰였지만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용어이다. 안락사(安樂死)의 한자어를 해석하자면 편안하고 즐거운 죽음이란 뜻이다. 또 그리스어 에우타나시아(euthanasia)를 해석하자면, '에우(eu)'는 '좋은' 또는 '편안한'이라는 뜻이며 '타나시아(thanasia)'는 죽음이란 뜻이니 안락사란 적절한 번역이다. 그러나 안락사라는 용어가 우리에게 왠지 불쾌감을 주는 이유는 2차대전 때 독일(p. 7) 나치가 유대인, 집시 및 장애인을 대량 학살했기 때문일 것 이다. 또한 이 책에서도 기술한 안락사가 '사회에 도움이 안 되는 사람은 죽어야 한다'라는 사고방식으로 연결될 거라는 우려도 한몫한다. 다만 이 책에서도 서술한 네덜란드, 벨기에, 룩셈부르크를 포함한 선진국에서는 회복할 수 없는 중병에 걸린 환자에게 자발적이며 적극적인 안락사(volunatary active euthanasia)를 허용한다. 한편 존엄사(detah with dignity)라는 용어는 보다 복잡한 의미가 담겨 있다. 우리나라에서 존엄사라는 용어가 대중에게 각인된 것은 2009년 2월 16일 가톨릭의 김수환 추기경께서 선종하신 날 이후일 것이다. 당시 김수환 추기경은 "무리하게 생명을 연장하지 말라"고 당부하여 인공호흡기를 사용하는 등의 연명 치료를 거부하였고 사후에 장기를 기증하였다. 언론은 이를 존엄사라는 용어로 서술하였으나 당시 가톨릭계에서는 김수환 추기경의 죽음을 존엄사로 표현하는 데 극력 반대하였다. 김수환 추기경의 "더 이상 회피할 수 없는 죽음이 다가오는 것에 대해 겸손하게 순응하였습니다"라는 말은 가톨릭교리 문답서(p. 8)에 있는 내용이다. 이는 미국의 오리건주에서 1997년 실시한, 자발적 · 적극적 안락사를 허용하는 존엄사법(Death with Dignity Act)에 나오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의미의 존엄사'와 다르다는 것이다. 결국 우리는 존엄사라는 용어를 두 가지 의미로 풀이할 수 있다. 인간이 존엄하게 죽을 수 있다는 인권 측면의 의미와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는 '자살'이라는 부정적인 의미로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고통스럽게 죽고 싶지 않고 스스로 죽음의 방식을 결정하고 싶어 하는 지은이의 소망 은 결국 존엄사의 부정적 의미인 자살을 넘어선, 인간의 존엄성을 위한 자기 결정권의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더 나아가 지은이는 구체적으로 의사 조력 자살(Physician Assisted Suicide, PAS)과 앞서 언급한 적극적 안락사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의사 조력 자살이란 네덜란드, 벨기에, 스위스 캐나다 및 미국의 오리건주, 워싱턴주, 버몬트주 등이 허용하고 있는 방법으로 회생 불가능한 중병에 걸린 환자에게 스스로 목숨을 끊는 방법을 제시하는 것이다. 적극적 안락사와 다른 점은, 스스로 죽음을 결행하는 게 아니라(p. 9) 자신이 방법을 선택한 후 의사 등이 실행한다는 것이다. 이 책에서 언급되었듯이 의사 조력 자살과 적극적 안락 사는 진보적 국가에서도 첨예한 논쟁거리이다. 영국에서는 2000년대 초 조력사망 법안을 네 차례나 상정하였으나 의회에서 통과되지 않았으며, 2010년대에도 82퍼센트의 찬성(여론조사)을 얻어서 조력사망 법안을 제출했으나 부결되었다. 미국에서도 진보적인 것으로 알려진 메릴랜드주의 상원에서 결의한 조력사망 법안이 하원에서 부결될 정도로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일본의 경우 국민 70퍼센트가 존엄사를 찬성(「아사히신문」 조사)하고 있으며 우리나라에서는 국민 90퍼센트 정도가 존엄사를 찬성(2008년 국립암센터 조사)했다는 점에서 이 책의 내용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 책에서는 회복할 수 없는 질병으로 고통받고 있는 환자 스스로 죽음의 방법을 선택할 필요성이 있음을 차분히 설득하고 있다. 지은이 하시다는 그동안 일본 사회에서 문제가 되었던 의료 시스템을 꼬집으며 왜 안락사 또는 조력 자살이 필요한지 서술하고 있다. 특히 복수의 의사와 간호사, 심리상담사, 사회복지사, 변호사로 구성된 팀이 적극적(p. 10) 안락사를 판단하게 하자는 제안은 하시다가 이 문제를 오랫동안 숙고해왔음을 방증한다. 현대 사회에서 죽음의 과정은 보통 사람들과 격리되어 의료진의 몫이 된 지 오래이다. 환자가 가족에게 둘러싸여 죽음을 맞이하던 시절에는 의사가 가족과 마지막을 함께하고 인간의 존엄성을 지킬 수 있었다. 최근에는 의학기술의 발달로 건강하게 장수하는 삶이 강조되면서 죽음의 과정, 삶의 마지막을 어떻게 준비할 것인가에 관련한 문제를 애써 외면하고 있다. 더욱이 환자가 최신 의학 장비에 둘러싸여 사망하게 되면서 고인의 의지 및 마지막으로 남기려 한 바가 무엇인지를 알기가 매우 힘들어졌다. 이 책에서는 이러한 현대사회의 문제점을 통렬히 비판하면서도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하였다. 우리 사회에서도 이러한 통찰력을 가진 사람이 필요하다. 한편 의사로서 '살리기만 하는' 의료에서 '선택지를 부여하는' 의료라는 하시다의 주장에 적극 동의한다. 우리나라 의과대학에서도 최근 죽음을 맞이하는 환자와 관련해 소통과 윤리적 대응을 배우고 있으나 보다 적극적인 선택(p. 11)지를 부여하는 문제에 대한 논의와 교육이 필요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스무 살 생일에 죽음에 관해 생각하자'라는 제안은 참으로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우리 주변을 보면 모두 다 천년만년 살 것처럼 행동하지만 누구나, 언제든 죽음을 맞닥뜨릴 수 있다. 스무 살 생일에 죽음에 관해 생각하는 것은, 삶을 보다 가치 있게 만들고 삶에 대한 의지를 북돋우는 방법이며, 동시에 우리가 고통스럽지 않고 편안하면서 담담하게 죽음을 맞이할 수 있는 한 가지 방안이다. 유성호 서울대 법의학과 교수(p. 12)
추천의 글, 둘
삶은 선물, 죽음은 선택
"삶에 더는 미련이 없다. 이제는 기꺼이 죽고 싶다"고 말하는 노인이 있다. 무슨 말씀이신지는 알겠습니다만, 선뜻 그렇게 하시라는 말은 나오지 않는다. 힘껏 말리지 않는 것만으로도, 왠지 죽음을 방조하거나 부추기는 느낌이 든다. 생판 남이라도 이럴진대, 지인이거나 가족이라면 제발 그런 생각일랑 멈추라며 눈물을 쏟을지도 모른다. 만약 그 노인이 나라면 어떨까. 작가 하시다 스가코는 어린 시절부터 스무 살까지의 청춘을 2차대전의 포화 속에서 보냈다. 군수 공장 배전반의(p. 13) 나사를 조이고, 또래 자살 특공대원에게 기차표를 건네며 '인간은 왜 태어난 걸까'를 수없이 되뇌던 시절을 거쳐 전쟁이 끝난 후 영화사 '쇼치쿠'의 첫 여성 각본가로 입문해 훗날 일본의 국민 드라마 작가가 된다. 그녀의 대표작인 NHK 아침 드라마 〈오싱〉에서, 오싱의 장남은 전쟁터에서 죽고 남편 또한 전쟁의 부채감에 시달리다 자결한다. 하시다는 평범한 인물들도 어떤 이유와 상황에서든 전쟁에 협력했기에 이에 대한 벌을 내려야만 했다고 고백한다. 전쟁의 책임은 지도자뿐 아니라, 소녀였던 자신을 포함한 모든 일본인에게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자신의 삶 역시 철저히 부정당했을지언정, 그녀는 타인의 존엄을 잊지 않고 반성 하는 삶을 살아왔다. 그런 하시다가 나이 여든이 되고부터 유언장을 쓰기 시작하고, 여든아홉이 되면서 본격적인 종활(죽음을 준비 하는 활동)에 들어갔다. 각본 쓰는 일에서 은퇴하고, 지금까지 집필해온 원고와 소장한 비디오테이프, 주고받은 편지 모두 정리하고 책도 기증했다. 모아온 핸드백들도 팔아버리고, 하루도 빼놓지 않았던 일기 쓰기 역시 그만둔다. 옛(p. 14) 문서들을 꺼내 줄 것과 버릴 것을 구분하고, 버릴 때는 파쇄기까지 구입해 끝장을 낸다. 그렇게 정리를 시작하고 완성 하는 데 무려 2년이 걸렸다. 자못 처량하게 느껴질 법도 한데, 체력이 충분할 때 시작하라고 말하는 그녀의 태도는 도리어 꼿꼿하기까지 하다. 그녀는 이제 텔레비전 출연을 사양하고, 주변의 장례식과 모임에도 참석하지 않는다. 하시다가 2016년, 「분게이 슌주」에 '나는 안락사로 죽고 싶다'라는 글을 싣자마자 수많은 독자의 동의가 뒤따르며 전국적으로 안락사 논쟁이 일었다. 그녀는 그제야 정색하며 "나는 누구에게도 이런 생각을 요구받은 적이 없으며, 주변 사람이나 사회 역시 절대 이런 입장을 강요해선 안 된다"라고 말한다. 안락사는 고려장이 아니다. 인공 호흡기에 의존할지라도 끝까지 숨을 붙여주기를 바라는 사람이 있다면 그의 뜻을 존중한다. 다만 그런 것을 바라지 않는 사람의 입장도 있고 이를 고민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미 종활에 들어간 그녀에겐 법안 통과를 위해 앞장설 여력도 없다. 다만 자신이 갑자기 쓰러진다면 응급차를 부르지 말아달라, 혹시나 음식물을 섭취하지 못할 경우 위에 관을 삽(p. 15)입하지 말아달라, 불필요한 연명 조치 대신 가능하다면 잠 들듯이 떠날 수 있게 도와달라는 등의 부탁을 할 뿐이다. 유언장에는 자신이 죽더라도 주변에 알리지 말라고 적었다. 장례식과 주도회는커녕, 혹시 각본을 쓴 드라마가 재방송되어 사람들에게 회자되는 것조차 싫다는 마음은, 나로서는 아직 가늠할 도리가 없다. 하지만 인생의 마지막 소원이라는데, 말리는 것은 오히려 내 마음 편하자는 행동이 아닌가.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온갖 사람들이며 물건들을 붙잡고, 아픈 몸을 이끌고 치료를 다녀야만 하는가. 세상에 나를 인정하고 사랑해달라며 끝없이 외치는 삶이 진정 존엄한 것인가. 자존심이 센 그녀는 이미 30여 년 전 죽은 남편 곁이 아닌 곳에, 자신이 묻힐 자리도 따로 마련해두었다. 우리는 언젠가 이별이 온다는 사실을 줄곧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결국 때가 오면 참을 수 없이 괴로워하면서도. 하지만 가족도, 친척도 없는 그녀에겐 그런 상상조차 사치일 뿐이다. 이러다 치매라도 걸린다면, 연고도 없는 누군가에게 병수발을 부탁해야 한다. 스스로 끝을 낼 수조차 없게 되어버린다(p. 16).
책에는 이런 그녀가 매년 종합건강검진을 받고, 혈당이나 콜레스테롤을 낮추는 약을 복용하며 매일 200그램의 고기를 챙겨 먹는다는 사실이 쓰여 있다. 폐활량을 늘리기 위해 수영을 즐기고, 일주일에 사흘 트레이닝으로 근력과 유연성을 유지하는 일면 모순된 노력들을 보고 있자면 정말 생에 미련이 없는 사람인가? 싶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가 생각하는 삶의 존업성을 지키기란 이렇게 힘이 든다. 사는 날까지 건강하고 행복하게 사는 것이 중요할 뿐, 끝을 늘리는 것이 해답이 아니다. 이미 심각한 고령화 사회에 진입한 일본에서, 매년 노인 대상 의료 서비스가 폭증하고 복지 분야 재화와 일손 부족이 심화되며 연금 고갈의 두려움에 떨게 하는 인류의 장수가 과연 축복이냐고 묻는다. 현재 전 세계적으로 안락사 허용 국가는 스위스와 네덜란드, 벨기에, 미국의 캘리포니아와 워싱턴 등 몇 곳에 불과 하며, 미국의 나머지 주와 유럽, 아시아 일부 국가에서는 제한적 존엄사만을 허용한다. 일본의 경우 안락사는 허용하지 않지만 존엄사를 허용하며, 한국에서도 일명 웰다잉법, '연명의료결정법'이 올해 2월부터 시행되고 있다. 여러 절(p. 17)차를 거치긴 하지만, 임종기 환자가 연명 의료 중단을 원할 경우 이를 법적으로 인정하는 길이 열렸다. 이제 시작에 불과하다는 의견도 있지만, 존엄사와 적극적 안락사의 간격 역시 크다. 적극적 안락사 허용이 장애인과 난치병 환자 등에게 삶을 포기할 것을 직간접으로 강요하게 될 거라는 우려도 남아 있다. 죽음을 고민하는 이들 가운데, 하시다와 같이 사회적 • 경제적으로 삶의 결정권을 온전히 소유한 사람이 몇이나 될까. 앞서 먼 이야기로 느껴진다 했지만, 죽음이 병자 또는 나이 든 사람에게만 찾아오는 것이 아님은 알고 있다. 언제든 찾아올 수 있는 삶의 마지막 단계에서, 어떤 모습이든 간에 이를 연장하는 것만이 유일한 선택지인가. 작가는 결국 자신에게 안락사 기회는 주어지지 않을 것이라며, 일본의 법제화를 기다리기 전에 스위스로 떠날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막상 선택의 때가 오면 실행할 수 있을지, 역시나 죽음은 쉽지 않은 일이라는 말을 덧붙인다. 안락사가 합법적 자살을 늘릴 것이라는 주장에, 그녀는 미국 오리건주에서 스스로 안락사 약을 받은 사람의 40퍼센트가 결국은 약을 복(p. 18)용하지 않았다는 점을 들어 반박한다. 살아 있는 동안 제대로 살고, 죽는 순간까지 스스로 책임 질 수 있도록, 부디 배려해주길 바란다고 말하는 노인이 여기 있다. 그녀를 도와야 할까 여전히 주저하게 되지만 한 가지 사실만은 분명하다. 결국 마지막 순간까지 삶은 자기 자신의 선택이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죽음 또한, 그 삶의 일부다. 김소영 당인리책발전소 대표(p. 19).
전쟁의 기억
내 생사관의 밑바탕에는 전쟁 경험이 자리 잡고 있다. 나는 당연히 전쟁에서 승리하리라 생각했더랬다. 일본은 강해, 특별하고 위대한 나라야, 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기 때문이다. 요즘 뉴스를 보면서 생각하건대, 지금의 북한 주민들도 그런 식으로 생각하고 있지 않을까 싶다. 그 시절의 우리와 마찬가지로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고 세뇌당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나는 1925년 5월 10일에 당시 한국의 경성(현재의 서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경성에서 '조선물산'이라는 토산품(p. 31) 가게를 운영하셨다. 스가코라는 이름은 아버지가 경성에 있던 조선 신궁에 가서 받아 오신 것이다. 그렇게 경성에서 살다가 교육은 역시 일본에서 받는 편이 좋겠다는 이유로 초등학교 3학년 때 어머니와 둘이서 귀국해 오사카의 사카이에서 살았고, 1943년에 오사카 부립 사카이 고등 여학교를 나와 도쿄의 일본여자대학교에 진학했다. 그런데 이 무렵부터 학생도 전쟁에 동원되어, 나는 수업을 받는 대신 전투기의 배전반을 조립하는 군수 공장에서 배전반의 나사를 조이는 일을 하게 되었다. 나는 매일 아침 볶은 콩과 볶은 쌀을 챙겨 들고 방공 두건에 작업용 바지 차림으로 공장에 출근했다. 배는 항상 고팠지만, 일이 끝나면 '오늘 하루도 조국을 위해 열심히 일했구나' 하는 만족감으로 가득했다. 참으로 장한 군국 소녀라 스스로를 여겼던 것이다(p. 32).
아아, 어머니, 차라리 잘 돌아가셨어요
그때 나는 '아아, 어머니, 차라리 잘 돌아가셨어요'라고 생각했다. 전쟁을 경험한 적이 없는 사람은 이런 심경이 이해가 안 될지도 모르지만, 살아 있다 한들 나을 것이 없었다. 내일에 대한 희망 따위는 가질 수도 없는 세상이었다. 매일 같이 공습을 피해 도망 다녀야 했다. 이대로는 어차피 조만간 죽을 것이다, 나 또한 틀림없이 죽는다, 그런 상황이다 보니 '어머니, 일찍 돌아가셔서, 일찍 편해지셔서 다행이에요'라는 심정이었다. 더는 도망 다니지 않아도 되니까. 그런데 일주일 정도 지났을 때 오사카 교외에 사는 큰어(p. 37)머니에게 전화가 왔다. 어머니가 무사하다는 것이었다. 연락이 안 되었던 이유는 연기가 눈에 들어가는 바람에 잠시 앞을 보지 못하게 되어 구호소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머니는 이내 큰어머니를 찾아갔다고 한다. 그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뭐야, 살아 계셨어?'라며 실망했다. 이른바 생사관이 지금하고는 전혀 달랐다. 어제까지 살아 있었던 사람이 오늘 죽더라도 전혀 놀랍지 않았다. 죽는 것이 당연하고 살아 있는 것이 오히려 기적 같은 시대였다. 당시의 일본인이 전부 그러진 않았지만, 나는 정말 죽을 각오를 하고 있었다. 내 머릿속은 전쟁의 승패보다도 죽음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했다. 적어도 젊은 여자들은 모두 같은 기분이었을지 모른다. 미군이 상륙하면 치욕을 당하기 전에 기필코 죽는다, 그 동안 훈련한 대로 죽창을 휘두른 다음 자신의 목을 찌르든 목을 매든 어떻게 해서라도 죽겠다고 각오하고 있었다. 절대 치욕을 당하지 않으려고 단노우라에서 함께 바다에 뛰어들었던 헤이케 가문의 여성들처럼. 그것이 일본인의 운명이라고 생각했다(p. 38)
청춘이 없던 청춘 시절
사실 그때 해군 경리부에서 어떤 서류를 태워버렸는지 나도 모른다. 해군 경리부에는 민간 은행이나 대기업의 경리부에서 일하다 군인이 된 사람이 많아서 군대 분위기가 강하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멋진 사람들로 가득했고, 개중에는 이사생으로 일하던 여학생과 결혼한 사람도 있었다. 나는 전혀 관심을 받지 못했지만. 나와 같은 세대의 수많은 남자들이 전쟁터에서 목숨을 잃었다. 살아 돌아온 남자들은 자신보다 어린 여성과 결혼 했다. 우리는 외면받은 세대였다. 남자 한 명당 여자 한 트(p. 42)럭이라는 말도 있었을 정도다. 일본여자대학교 동창 중 절 반은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 무서운 이야기다. 전쟁은 내가 여학교 4학년일 때 시작되어 여대 3학년일 때 끝났다. 그렇다 보니 내 삶에 청춘은 없었다. 열대여섯 살부터 스무 살까지 낭만적이거나 아름다운 기억은 전혀 없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먹고살기 급급해서 연애 같은 것 을 할 여유가 없었다. 돈 많은 남자 있으면 시집이나 가버릴까 하는 생각도 없지는 않았지만.... 전쟁이 한창일 때는 어떤 역경도 두렵지 않았다. 심지어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나와 같은 세대 사람들이 대체로 건강한 이유는 어쩌면 소박한 식생활을 한 덕인지도 모른다. 우리 어렸을 때는 햄버거나 콜라는 꿈도 못 꾸고 채소와 감자, 고구마 따위만 먹으며 자랐던 것이다. 행복의 의미도 달랐다. 그때는 돈이 없어도, 배불리 먹지 못해도 상관없었다. 죽어라 일해서 빵 하나를 샀을 때 느끼는 행복감은 지금 호화로운 3만 엔짜리 코스 요리를 먹을 때보다 더 컸다. 기차도 지금은 쾌적한 신칸센을 탈 수 있지(p. 43)만 당시에는 차창으로 연기가 꾸역꾸역 들어오는 콩나물시루 같은 3등석을 이용했다. 그래도 감사했고 소박한 행복을 느낄 수 있었다(p. 44).
인절미가 가르쳐준 삶의 고마움
이윽고 우리는 야마가타의 아테라자와에 도착했다. 10월 말 야마가타 분지는 눈 닿는 곳 어디나 황금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폐허가 된 도쿄와 달리 벼들이 온통 황금빛으로 물결치는 모습은 장관이었다. '세상에, 저게 다 쌀이야!' 하며 감동했던 기억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일본은 전쟁에서 패했다. 하지만 풍요로운 정경은 여전했다. 두보의 시 한 구절처럼 "나라가 망했어도 산천은 변함이 없구나"였다. 나는 야마가타의 경치를 보고 비로소 '이 나라는 아직 끝나지 않았구나. 어쩌면 나도 계속 살아(p. 47) 갈 수 있을지 모르겠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큰어머니는 목재상의 헛간을 빌려서 살고 계셨다. 목재상 아주머니는 우리에게 차와 인절미를 내주셨다. 대체 몇 년 만에 제대로 달인 차를 맛보는지, 또 이렇게 고물을 듬뿍 묻힌 인절미를 먹는지 알 수 없었다. 너무 맛있어서 정신없이 입안에 집어넣고 있는데 아주머니께서 야마가타 사투리로 뭐라고 말씀하셨다. 아무래도 너무 많이 먹지 말라고 꾸짖는 것 같았다. '그렇구나. 여기도 물자가 부족할 텐데, 생각 없이 너무 많이 먹었어' 하고 반성하고 있는데, 얼마 후 콩가루에 깨, 호두, 풋콩을 으깬 것을 비롯해 일곱 종류나 되는 인절미가 나왔다. 아까 아주머니께서는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아직 나올 게 많은데 벌써 그렇게 많이 먹으면 어떡하니?" 야마가타는 내게 구원의 땅이었다. 매일 곁에 바싹 다가온 죽음을 느끼며 내일은 기필코 나라와 함께 죽겠노라 각오한 만큼 심리적으로 벼랑 끝에 몰려 있던 내게 삶과 희망, 미래를 꿈꾸게 했다. 그런 의미에서 생각하면 전쟁이 불행만 안겨준 것은 아니었다. 이후의 생명, 이후의 인생은 선(p. 48)물이라고 생각했다. '새로 받은 인생을 아무렇게나 살 수 는 없지. 최선을 다해 살아야 해', 이렇게 생각하며 살아왔기에 힘들어도 고생으로 느낀 적이 없다. 일용할 양식만 있으면 된다. 돈이 없어도 전혀 괴롭지 않다. 전쟁 중에는 먹을거리를 구할 수만 있으면 충분히 만족할 수 있었다. 줄곧 이런 마음가짐으로 '새로 받은 생명', '새로 받은 인생'을 살아왔다. 전쟁에서 패했기 때문에 욕심 내지 않는 법을 배울 수 있었다(p. 50).
제발 장례식은 사절!
젊었을 때부터 나는 죽었을 때 장례식을 열지 않기를 바랐다. 누군가의 결혼식에 가기도 싫어하지만 장례식에 가기도 싫어한다. 일본여자대학교에 다닐 때부터 장례식은 번거롭고 낡은 계급 제도의 상징으로 치부했다. 화족의 장례식은 그야말로 호화로웠다. 가족 말고는 두세 명만이 찾은 쓸쓸한 장례식에도 가봤다. 그러는 가운데 '장례식에 무슨 의미가 있는 걸까? 왜 이런 차별의 상징 같은 행위를 하는 걸까?'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애초에 세상을 뜬 당사자는 알지도 못하는데 다들 무엇(p. 69)을 위해 모이는 걸까? '이 장례식에 가면 아무개와 아무개 를 만날 수 있으니 가볼까?' 하고 이해타산을 따져 많은 사람이 모인 장례식도 가봤다. 유명인이 죽으면 커다란 장례식장에서 성대한 장례식이 열리거나 일류 호텔에서 고별식이나 추도회가 열려 많은 사람이 모이는데, 그중에 정말 고인을 그리워하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물론 자식이나 친척이 많으면 장례식은 그들을 위한 행사이다. 제대로 치르지 않으면 "유족들은 대체 생각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라는 말을 듣게 된다. 하지만 내게는 육친이 없다. 개중에는 생전 장례식에 많은 사람을 초대해서 지인들과 떠들썩하게 이별을 고하고 싶어 하는 사람도 있다. 하기야 열 사람 다 다른 법이니 놀랄 일도 아니다.
나는 장례식도 회상 모임도 원하지 않는다. 의미 없는 사교의 빌미로 이용되고 싶지 않다. 게다가 내 장례식을 치른다 해도 어차피 의리상 찾는 사람밖에 없을 터이니 굳이 발걸음을 하게 만들기가 미안하다. 의리 때문이라면 굳이 안 와도 된다. 그냥 화장해서 무덤에 넣어주면 그걸로 족하다. 내 무덤은 이미 아버지의 고향인 에히메현 이마바리시(p. 70)에 만들어놓았다. 28년 전에 죽은 남편의 무덤은 시즈오카에 있으니 또 한 번 이별하는 셈이다. 마마보이였던 남편은 어머니와 함께 있고 싶다고 했는데 이 묘소에는 남편의 부모님과 아주버님 부부도 함께 있다. 남편이 죽기 전에, 아주버님은 내게 "미안하지만 제수씨는 우리 묘에 들어올 수 없어요"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속으로 '이렇게 고마울 수가....' 하고 기뻐하면서 이유 따위 묻지 않고 "네, 알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시어머니 문제로 꽤나 고생했기 때문에 죽어서도 함께 사는 것은 이쪽도 사양이다(p. 71).
〈오싱〉의 경우 어디를 가든 안 보는 사람이 없었고 나를 떠받드는 사람까지 있었다. 소설은 안 읽는 할머니들도 〈오싱〉을 즐겨 보신다는 사실을 알고는 '아아, 각본가가 되기를 잘했어. 지금까지 살아온 의미가 있었어' 하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 목숨을 소중히 여기며 모두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드라마, 좋은 글을 더 많이 쓰겠노라고 맹세했다. 이렇게 바쁘게 일하는 동안은 죽음에 관한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건강하게 살아야만 모두에게 즐거움을 안겨 주는 각본을 쓸 수 있다'고 생각했기에 건강에도 신경을 썼다. 그런데 지금은 각본을 써달라는 요청이 들어오지 않는다. 이제 끝났다. 필요 없는 인생이 된 것이다. 당연히 '슬슬 죽을 생각을 해야겠구나'라는 심정이 들었다(p. 86).
결혼하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든 이유는 일을 할 때 싸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전에는 프로듀서나 감독이 수정을 요구하면 부당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따를 수밖에 없었다. 괜히 반항했다가는 잘려서 생계에 지장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게 싫어서 각본가를 그만두고 결혼이라는 평생직장을 구했던 것이다. 결혼한 뒤로는 남편의 월급이 있는 이상 먹고살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도저히 수긍할 수 없으면 "그만두겠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재미있게 도, 내가 쓰고 싶은 글만 썼더니 오히려 더 좋은 평가를 받았다(p. 108).
스무 살 생일에 죽음에 관해 생각하자
시중에서 판매되고 있는 '엔딩 노트'를 나도 지인에게 선물 받았다. 정해진 항목에 적어 넣기만 하면 되도록 만들어져 있다. 처음에는 참 편리한 물건이라고 감탄했는데, 잘 들여다보니 무슨 일이 생겼을 때 누구에게 알리고 무엇을 남기는지 적게 돼 있다. 친척이나 친구의 연락처와 메시지도 적어야 했다. 나처럼 친척이 없는 외톨이는 사용하기 어려운 물건이었다. 적을 것이 없으니 말이다. 그래서 이런 복잡한 물건이 아니라 보통 공책에 필요한 항목을 최소한도로 메모하고 있다(p. 223). 나는 아흔 살을 목전에 두고 이걸 시작했지만, 좀 더 일찍 시작하면 더 좋다. 젊었을 때부터 '안락사가 좋다'라든가 '숨만 쉬고 있다면 의식이 없더라도 계속 살고 싶다' 같은 생각을 하고 매년 글로 남기면 좋을 것이다. 자신이 어떻게 죽을지를 생각하면 어떻게 살지를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된다. 우리는 언제 어떤 재난에 휘말릴지 알 수 없다. 그럴 때 바로 죽는다면 그보다 행복한 일은 없을 것이다. 생일에 적어놓았던 의사 표시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어지고, 안락사를 걱정할 필요도 없어진다. 그러나 젊은 나이에 뇌경색에 걸리는 사람도 있다. 산책을 하다가 난폭 운전을 하던 자동차에 치여 반신불수가 되는 사태가 발생할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생일이 올 때마다 지나온 삶의 의미와 기쁨을 곱씹으면서 죽음과 마주하는 것이 좋다. 자신이 태어난 날에 죽음에 관해 생각한다니, 이 얼마나 멋진 습관이란 말인가. 이것이 싫은 사람은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평범하게 죽으면 된다. 성인이 되었을 때를 계기로 삼아 자신이 어떻게 죽고 싶은지, 장기 기증을 할지 말(p. 224)지 등을 정리해두면 좋을 것이다. 애초에 죽음을 기피해야 할 대상으로 여기고 스스럼없이 이야기하는 것을 금기시하는 풍조가 문제다. 사람은 누구나 죽는데 말이다. 죽음과 마주하는 의사가 나오지 않고, 죽음에 관한 법률과 의료가 불협화음을 일으키는데 역시 이런 풍조 탓일 것이다. 우리는 죽음을 좀 더 진지하게 공부해야 한다. 죽음을 생각하며 살면 인생이 더욱 풍요로워질 것이다(p. 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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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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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회기도와전도운동본부, 인천부천지역교회 연합기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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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회 기도와전도운동본부(본부장 박기준 목사)가 주최하고 한남노회·인천노회·동인천노회·서인천노회·경인노회·부천노회가 주관한 인천부천지역교회 연합기도회가 2월 22일 오후 4시 인천 은석교회(김종석 목사 시무)에서 모여 뜨겁게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다.
1부 예배는 은석교회 유초등부 찬양팀이 예배전 찬양 후 본부장 오현석 목사(한남노회, 부노회장)의 인도로 기도와 전도운동본부 소개, 최광영 목사(종회 본부 서기)가 개회 선언, 부본부장 김종엽 목사(동인천노회, 부노회장)가 기도, 은석교회 다음세대 연합 찬양대가 찬양, 부위원장 심종천 목사(인천노회, 서기)가 시 95:4-5을 봉독했다.
부총회장 정영교 목사가 ‘그 분이 나의 하나님’이란 제목으로 “건축가가 아름다운 건축물을 만들 듯이 하나님께서 아름다운 세상을 만드셨다. 이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이시다. 그런데도 우리는 염려 가운데 살아간다. 하나님을 믿으면 걱정 근심이 없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고자 할 때 하나님께서 그 삶을 이끌어 가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기 위해 첫째, 기도의 무릎을 꿇어야 한다. 둘째,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위대한 일을 기대하고 시도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전하자.”라고 설교했다.
기도회
다음세대 안수기도
2부 기도회는 총무 김창현 목사(한남노회)의 인도로 합심기도 후 안해선 목사(한남노회장)가 “1. 회개와 회복을 위한 기도 • 주님보다 세상을 더 사랑했던 나의 불신앙을 회개합니다. • 알면서도 순종하지 않았던 불순종을 회개합니다. • 맡겨 주신 지분과 사명에 최선을 다하지 못했던 것을 회개합니다.”라고, 우충희 목사가 “2. 총회와 노회 그리고 대한민국을 위한 기도 • 총회의 모든 계획과 결정이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이루게 하옵소서. • 노회가 평안하게 서게 하시고 속한 모든 교회들이 더욱 든든히 서게 하옵소서. • 이 나라가 하나님의 공의와 전시로 세워지게 하시고, 지도자들에게 바른 판단과 지혜를 주옵소서”라고, 한상경 목사(경인노회 증경노회장)가 “3. 성령충만과 문제해결, 치유를 위한 기도 • 이 자리에 모인 우리 모두에게 성령의 중만한 은혜를 부어주옵소서. • 모든 환경과 문제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열리고 해결되게 하옵소서. • 이 시간 영과 육의 질병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치유되고 새 힘을 얻게 하옵소서.”라고, 정택열 목사(동인천노회 노회장)가 “4. 인천•부천지역 복음화와 다음세대를 위한 기도 • 우리 교회가 사랑과 기도로 더욱 하나 되게 하옵소서. • 서로를 품고 세워 주는 은혜의 공동제가 되게 하옵소서. • 다음 세대가 믿음의 세대가 되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세대로 자리가게 하옵소서.”라고 기도 후 사무총장 김종석 목사(인천노회)의 인도로 다음세대를 위한 안수기도를 했다. 이 시간에 기도회에 참석한 모든 목사들이 은석교회 유아부부터 청년부까지 다음세대를 위해 간절히 안수기도했다.
회계 심재기 장로(한남노회, 증경부노회장)가 봉헌기도, 기쁜소리글로리아(염광교회)가 찬양 후 고문 이두형 목사(한남노회, 증경노회장)가 축도했다.
김성찬 목사가 “기도와 전도운동본부는 제110회 총회 '함께하는 정책총회'의 비전에 따라 함께 기도하고 함께 전도하며 특히 다음 세대의 회복과 부흥을 위해 최선을 다한 것을 선포합니다.”라고 비전 선포 후 홍대중 목사(전남지역 본부장)에게 깃발을 전달하고, 부본부장 박석진 목사(경인노회, 서기)가 광고 후 모든 순서를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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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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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352】 자살한 중년의 엄마에 대한 딸의 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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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과정과 남편과의 원만치 못한 결혼생활로 우울증을 앓던 50대의 중년 여성이 자살했다. 이 책은 큰 딸이 엄마를 회상하는 책이다. 읽으면서 참으로 먹먹했다. 한쪽 귀가 잘 들리지 않는 장애 여성으로 살면서 가정이 제대로 뭔지 모르는 남자와 만나 결혼생활을 하면서 얼마나 힘들었으면 자살을 했을까? 삶이 참 힘들다.
아빠에 대한 억눌린 무기
엄마의 첫 생신제가 다가오고 있다. 그래서일까. 요즘은 어디론가 떠났다 집으로 다시 돌아온 엄마의 꿈을 자주 꾼다. 오늘 꿈에선 자다 일어나 보니 엄마가 우리 집 주방에서 보글보글 찌개를 끓이고 있었다. 나는 놀랍고 기뻐 엄마의 폭신폭신한 허리를 끌어안았다. 엄마는 흡사 솜사탕 같았다. 달콤한데 금방 녹아버릴까 걱정이었다.
"엄마, 어디 다녀오셨어요? 다녀온 곳은 어땠어? 좋았어?" 엄마는 무언가 말하려다간 입을 다물었다. 혼자 다녀온 곳에 대해서는 굳이 얘기하고 싶지 않다는 듯이••• 더 이상 물을 수 없었던 나는 엄마가 끓인 찌개가 너무 맛있겠다고(p. 54) 춤을 췄다. 애호박이 들어가 달큼하고 시원해 보였다. 엄마랑 놀고 있는데 아빠가 어디선가 맥주 두 병을 가지고 왔다. 아빠를 보니 갑자기 화가 나서 볼멘소리가 절로 나왔다. "잘하는 짓이다! 이런 날까지 술을 가지고 들어와야겠어?" 내가 아빠를 비꼰 게 좀 심하긴 했다. 이상한 억하심정이 꼬일 대로 꼬여 그렇게 표현된 듯했다. "애 말좀 들어요." 엄마가 말하는 순간, 아빠는 갑자기 분노 조절에 실패하고 들고 있던 맥주병으로 엄마의 머리를 가격했다. 나는 너무도 놀라 숨이 멎는 것 같았다. 쓰러진 엄마를 부여잡고 "엄마, 엄마" 외쳤다. 그리고 나는 무엇인가 결심한 사람처럼 눈이 뒤집어져 아빠가 들고 있던 또 다른 맥주 한 병으로 뒤돌아선 아빠의 머리를 내리쳤다. 언제까지고 계속. 이 잔인한 꿈에 소리를 지르며 일어나 남편을 껴안았다. 남편은 본인도 악몽을 꾸고 있던 중이었다고 했다. 우리는 서로를 끌어안고 토닥였다. 남편에게 악몽 이야기를 해보라고 했다. 나는 그 꿈 이야(p. 55)기를 들으며 다시 잠에 빠졌다. 이번 꿈은 몹시도 잔혹했지만 이상하게 소설적인 데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꿈속에서 엄마가 요리를 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 마음이 아프다. 꿈속에서라도 엄마가 집안일에서 해방되었으면 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나의 꿈의 본질 같았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건 엄마가 꿈에 나왔다는 사실이다. 오늘도 엄마를 볼 수 있어 참으로 기뻤다(p. 56).
밤을 걷고 엄마를 보다
〈밤을 걷다〉는 〈최악의 하루〉로 유명한 김종관 감독의 작품이다. 아이유에 대한 네 편의 옴니버스 단편영화를 묶은 〈페르소나>가 나온다고 했을 때, 가장 기대한 작품이었다. 영화에서 지은은 남자친구의 꿈속에 등장한다. 실제의 지은은 자살했고, 남자친구는 그 이유를 모른다. 장례식에서 눈물 한 방울 내비치지 않았던 남자친구는 지은을 만난 꿈속에서 어깨를 떨며 오열한다. 꿈이 깨면 모든 게 사라질 테니 남자친구는 "난 기억할 거야. 기억해야 해"라고 끊임 없이 되새긴다. 그러나 지은은 "꿈도 죽음도 정처가 없네. 가는 데 없이 잊혀질 거야"라고 말하며 남자친구의 얼굴을 감싼다(p. 62). 사라짐, 꿈과 죽음은 그 속성이 비슷하다. 극 중 지은의 말대로 정처 없고 가는 데 없이 잊힐 뿐이다. 한 편의 시 같은 이 영화를 보며 하릴없이 나의 엄마의 죽음을 떠올렸다. 잠에서 깨어나는 순간, 내가 아득한 것은 곧 휘발될 꿈의 기억과 그 기억의 끄트머리를 붙잡고서라도 돌아가신 엄마 곁에 머물고 싶은 나의 마음 때문이다. 꿈속에서 엄마와 함께 마주하는 공간은 〈밤을 걷다〉의 공간처럼 내가 가봤던 곳 같은, 내 기억 속에 있는 것 같은 곳들이다. 꿈 가장자리에서 그 공간들을 서성이며 나는 현실과 꿈의 경계를 만지작거린다. 지은처럼 스스로 목숨을 끊은 엄마. 엄마는 그 흔한 유서 한 장조차 남기지 않았다. 남자친구가 지은이 스스로 죽음을 택한 이유를 알지 못하듯 내게도 엄마가 왜 스스로 죽음을 택했는지는 영원히 미지수로 남을 테다. 아스라한 꿈 저편에서 엄마에 대한 기억의 조각들은 오늘도 흩어졌다 모일 뿐이다. 그리고 나는 여전히 지은의 남자친구처럼 밤을 걸으며 밤의 장막이 걷히길••• 엄마를 기억하려고 애쓰며, 부유하는 엄마와의 추억들을 볼 것이다. 아마도 나의 평생에 걸쳐 매일을 오늘처럼(p. 63).
나의 고통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사람들은 너무나도 쉽게 시간이 지났으니 이제 내가 고통에서 헤어났으리라 짐작하곤 한다. 하지만 우리 가족은 아직도 깊은 터널 속에 있다. 그 터널의 어두움은 터널에 있어 본 이들만이 알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쉽게 다른 사람의 고통을, 상실을 이해한다고 말하는 이들이 무섭다. 나는 이제 다시는 누구의 고통도 섣불리 재단할 수 없을 것 같기 때문이다(p. 71).
어쩐지 엄마가 보고 싶은 밤
내가 기억하는 한 우리 엄마는 늘 아팠다. 그래도 엄마는 나와 동생을 키워냈다. 젊은 엄마는 여러 일을 했다. 엄마가 어판장에 앉아 성게알을 보석처럼 빼낼 때마다 어린 나는 입을 벌렸다. 엄마가 성게 까는 일을 했던 곳도 그대로 있었다. 그건 사진처럼 장면으로 기억날 뿐이거나 또는 아예 실제로 보지 못한 일일 수도 있지만, 엄마가 그물에서 생선을 꺼낼 때마다 햇볕이 생선 등에 튀기는 걸 놀라듯이 바라본 것 같다. 아빠 친구들 배는 모두 신식으로 바뀌어 있어서 바닷가 그 자리에 있었던 것 말고는 그저 낯설었다. 그래도 엄마 손 잡고 시장을 다녀오던 길목이나 독사진을 찍고 싶다는 동생 뒤에서 입을 크게 벌린 채 장난을 쳤던(p. 88) 골목의 풍경은 내게 크게 다가왔다.
내가 초등학교 1학년이거나 2학년일 무렵 엄마는 학교 옆 냉면집에서 서빙을 했다. 매번 홀로 가는 하굣길을 엄마와 함께 가려고 나는 학교가 파하면 쪼르르 냉면집을 찾아 갔다. 일하는 엄마가 신기했고 엄마 손 잡고 집 가는 길이 그렇게 따뜻할 수가 없었다. 한번은 엄마와 아빠가 부부싸움을 크게 한 적이 있었다. 아빠가 발로 차서 집 안의 유리문이 깨졌다. 아빠 발등에서 피가 철철 흘렀지만 나는 무서워서 아무 소리도 못 냈다. 엄마는 아마 심하게 맞고 난 뒤였을 것이다. 엄마는 집을 떠났고 나는 울면서 엄마를 따라갔다. 엄마는 혼자서도 사는 법 을 배워야 한다고 말했다. 그로부터 3일 정도 엄마는 진짜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대신 매일매일 전화를 해 주었다. 그러고는 다시 돌아왔다. 할머니가 고아원에 나랑 동생을 맡기고 가 버리라고 막말을 했지만 엄마는 끝끝내 우리를 버리지 않았다. 어릴 적의 몇 년은 성인 시절의 몇 년보다 더 크게 영향을 미치는 것 같기도 하다. 엄마는 내게 한 번도 화를 낸 적이 없었다. 뭐든지 스스로 고르게 했고 그렇게 고른 것은 아(p. 89)무리 형편이 어려워도 꼭 사 주었다. 내 물건을 마음대로 처리한 적도 없어서 모든 결정의 처음부터 끝을 모두 내가 하게 했다. 막내삼촌은 여러 가지 부침 속에서도 내가 이렇게 잘 자란 게 신기하다고 했지만 삼촌이 모르는 게 하나 있다. 엄마의 온전한 지지와 양육이 없었다면 나는 결코 지금의 내가 될 수 없었음을.... 어쩐지 엄마가 보고 싶은 밤이다(p. 90).
엄마는 아닌 것에 있어서는 아니라고 말해야 한다는 것도 행동으로 보여줬다. 초등학교 1학년 때 나는 반에서 성(p. 98)적으로 1등이었고, 부반장이었는데 담임선생님은 이상하게 나를 좋아하지 않는 것 같았다. 늘 빨간 립스틱을 바르고 모피를 두르던 그 할머니 담임선생님이 나는 무서웠다. 선생님이 불러서 학교에 간 엄마는 담임선생님이 의뭉스럽고 교묘하게 촌지를 요구하는 걸 파악했다. 그러나 엄마는 촌지를 건네지 않았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학교에 실험 관찰책을 가져가는 걸 깜빡했다. 담임선생님은 내게 앉았다 일어났다를 100번 하라고 말했다. 그때 당시 통지표에 늘 '영양실조'라고 적혀 있던 키만 크고 깡마른 나는 담임선생님이 말 한대로 딱 100번, 성실하게 앉았다 일어났다를 하고 5일 동안 걷질 못했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촌지를 주지 않아서였을까? 그러나 화난 엄마가 전화를 걸자 담임선생님은 나한테 앉았다 일어나기를 시킨 적이 없고, 죄책감에 시달린 내가 스스로 앉았다 일어났다를 100번 이나 한 거라고 뻔뻔한 거짓말을 했다. 엄마는 우리 애는 거짓말을 하는 애가 아니라고 담임선생님에게 맞섰다. 5일 뒤 학교에 간 나는 더 이상 담임선생님이 무섭지 않았다. 선생님이 아주아주 잘 사는 집 애들만을 예뻐한다는 걸 나는 알았다. 그러나 그런 건 이제 내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나는 내 할 일을 했다. 열심히 공부해서 기말고사(p. 99)에선 전 과목 백점을 받았다. 그렇게 나는 내게 중요하지 않은 사람에 대해선 신경 쓰지 않는 법을 배웠다.
내가 학교에 가기 싫다고 하면 엄마는 아무렇지 않게 담임선생님들께 전화를 해주었다. 하루 정도 학교를 나가지 않는 건 아무 문제가 아니라는 듯이... 중학교에 다닐 때 담임선생님이 내가 화장을 하고 다닌 다고 엄마에게 전화를 건 적이 있다. 나는 누차 선크림을 바른 거라고 담임선생님에게 말했지만 믿어주질 않았다. 때로는 내가 지각을 한다고 엄마에게 전화를 건 적도 있었다. 담임선생님 말만 듣고 나를 윽박지를 법도 한데 엄마는 선생님이 잘못 안 거라고, 우리 애는 화장 따윈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선크림을 바르고 가는 걸 엄마가 똑똑히 봤다는 거다. 갑자기 학교에서 먼 곳으로 이사를 해서 피곤하다 보니 종종 지각을 할 때도 있지만 그건 선생님이 이해해달라고 말해주었다.
나는 선천적으로 몸이 약했다. 엄마는 내가 다니고 싶다는 학원만을 다니게 했고, 내가 읽고 싶은 책들은 아빠에게 얻어맞는 일이 있어도 사 주었다(내가 책을 사는 걸 아빠가 왜 그리 싫어했는지는 모르겠다. 아빠한테 물어보니 본인은 그런 적이 없다고 한다. 누구 말이 사실일까?)(p. 100). 경제적으로 그리 넉넉지 않았던 나의 유년 시절은 엄마로 인해 풍족하게 채워졌다. 나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는 친구들은 우리 집이 부자라고 생각했다. 그만큼 나는 구김 없는 어린 시절을 보냈다. 이 모든 것이 나의 엄마 덕분이었다. 어제 꿈에 엄마가 캣우먼이 되어 나타났다. 타이트한 가죽 코스튬을 입은 엄마의 뒷모습이 당당하고 멋졌다. "엄마!" 하고 부르자 엄마는 윙크를 하며 뒤를 돌아봤다. 역시 엄마는 영원한 나의 히어로였다(p. 101).
삶이라는 무서운 경기에 내던져진 엄마는 자신의 아이 또한 이 불안의 링에서 살게 해야 한다는 게 죄스러웠지만, 꼬물 꼬물한 아이의 손을 잡을 때마다 이 아이만이 엄마의 유일한 구원이라는 걸, 그래서 아이의 손을 놓으면 안 된다는 걸, 아니, 자신은 이 아이의 작은 손을 놓을 수 없다는 걸, 아이의 손을 잡고 있으면 아주 어쩌면 팽팽 도는 이 세상의 팽이를 멈출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에, "최 여사! 밤이 어두워도 다음 날에는 늘 아름다운 해가 뜨는 거 알죠?" 라고 말해주던 아이의 희망찬 입술을 믿었기에 자신이 살면서 유일하게 잘한 일은 이 아이를 세상에 내어놓은 것이고, 자신이 살면서 저지른 가장 최악의 일도 이 아이를 세상에 내어 보인 것이라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p. 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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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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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351】 시신 부검에 대한 인식이 많이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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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한국 부검의 선구자인 문국진 교수가 부검에 관련된 문제를 언급한 책이다. 지금이야 부검이 많이 진행되고 받아들여지지만 과거 우리나라에서는 그렇지 못했다. 이처럼 사람들의 인식은 서서히 변화한다. 그러는 가운데 억울한 피해자들도 많이 있었을 것이다. 이 책은 현재 품절됐다.
유럽의 관법에 의한 검시
당시 유럽에 있어서의 검시는 관법에 의해 이루어 진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범죄로 사망한 사건의 경우 범인이라고 추정되는 용의자를 살해된 시체의 옆에 데리고 가 손을 대게 하면 시체의 상처에서 출혈이 야기된다는 것이다. 심한 경우에는 범인이 옆에만(p. 25) 와도 출혈이 생긴다고 믿었기 때문에 이것을 범행의 증거로 하는 검시가 성행하던 때가 있었다.
독일(1660)에서는 살해된 시체가 발견되면 엄지손가락을 잘라 보관 했다. 후일 용의자가 체포되면 그것이 10일이나 15일이 경과되었다 할지라도 용의자가 있는 방에 절단된 엄지손가락을 넣어 놓고 출혈의 유무를 관찰했다. 만일 출혈이 야기되면 그 용의자는 진범이므로 순순히 자백하지 않으면 고문해서라도 범행을 자백 받았다고 한다. 관법에 대해서는 갑론을박의 상태로 약 50년이 지속됐다. 결국 진범이라면 자신이 가해한 피해 시체를 보거나 접촉하는 순간 얼굴의 표정이나 몸의 거동이 달라지기 때문에 이를 관찰해 변화가 심하면 진범이라는 단서로 이용(1726) 했다고 한다(p. 26).
사인구명에 대한 인식과 문제점
아직도 두벌주검이 문제인가
다른 나라에는 없고 우리나라에만 있는 말 중에 '두벌주검'이라는 용어가 있다. 한글사전에서는 '해부한 송장을 일컬음'이라고 하였는데 시신에 칼을 대어 부검하면 두 번 죽는 것이라고 믿는 데서 나온 말인 것 같다. 예부터 우리 조상들의 뇌리에는 사람이 한 번 죽는 것도 억울 한데 왜 한 번 더 죽어야 하나 라는 생각이 뿌리 깊게 박혀 있다. 이런 연유로 유족들은 부검 자체를 부정적으로 보고 완강히 거부해왔다. 우리나라의 부검률이 외국에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낮은 것도 이러한 인식이 크게 영향을 미친 것으로 해석된다. 환자가 생존 시에 앓고 있 던 병에 대한 진단이 과연 정확하였는지, 그 질병에 사용된 약물이 어느 정도로 효과적이었는지 등은 사후의 부검을 통해서만 정확히 확인 할 수 있다. 그리고 부검결과에 의한 의료행위의 비판과 반성, 이에 따르는 시정이 반복되는 가운데 의학은 발전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의(p. 53) 경우는 부검이 여의치 못해 남의 나라의 통계를 이용하고 있는 실정이다. 의학발전을 위한 부검은 고사하고 사회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사법 부검의 경우마저 두벌주검이라는 인식 때문에 부검을 거부하기 일쑤다. 법의학을 전공한 사람의 입장에서 볼 때, 우리 사회가 두벌주검이라는 인식으로 끝끝내 부검을 거부하는 것이라면 법의학의 앞날은 뻔하다. 내가 법의학을 공부하기 시작하면서 가장 큰 고민에 빠졌던 것도 바로 이 두벌주검의 문제이다. 그래서 법의학을 포기하려는 생각도 해보았다. 다음은 고질적인 두벌주검의 인식과 시체를 무서워하다 야기된 사건의 뒷이야기이다
사례 1 : 부검하면 정말로 두 번 죽는가
서양 특히 미국 사회에서는 부검에 대한 인식이 우리나라와는 대조적이다. 나는 한때 뉴욕대학에서 연구를 하며 법의부검의 일을 한 적이 있었는데 이때 경험한 일이다. 하루는 로스앤젤레스에서 장거리 전화가 걸려왔다. 내용인 즉 자신은 그곳에서 내과를 개업한 의사인데 아버지가 뉴욕에서 살다가 오늘 아침에 돌아가셨다는 통보를 받았다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생존 시에 위암과 같은 증상을 보였으므로 아버지를 부검 해 정말 위암이었는지를 확인하고, 자신과 자식들은 이에 대비해야겠으니 그 결과를 알려달라는 부탁이었다. 그리고는 자신의 전화번호와 아버지의 뉴욕 주소를 알려 주었다(p. 54). 우리 식으로만 생각하자면 정말 고약한 사람이라 할 만하다. 아버지가 죽었는데 자식이 당장 달려오지도 않고 게다가 아버지의 시체를 째서 위암 여부를 가려 만일 위암이었다면 자신과 자식들은 유전적인 것을 고려해 이에 대비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는 어처구니 없는 사람으로 말이다. 미국 사람이라고 해서 모두가 이런 식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이 전화를 받은 나는 한참 동안 깊은 생각에 빠졌다. 한국에서 겪었던 너무나 대조적인 사건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p. 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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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2-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