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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대식 목사 칼럼14】 두려움의 이유 (딤후 1:7)
두려움의 이유 (딤후 1:7) 인간은 누구나 두려움이 있습니다. 두려움의 많고 적음의 차이뿐입니다. 죄가 들어온 후, 두려움이 생겼습니다. 죄를 지으면 두려움이 있고, 의인은 담대합니다. 디모데후서 1:7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 두려움은 하나님이 주는 것이 아니고 사탄이 줍니다. 두려움의 이유가 너무나 많습니다. 건강 검진하고 결과를 기다릴 때 두렵습니다. 건강 검진 결과를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두려워한다고 건강 검진 결과가 달라지지 않습니다. 두려움이 있으면 건강 검진하기 싫어하는데 두려워서 건강 검진 안 하면 병을 키우게 됩니다. 담대히, 자연스럽게 건강 검진해야 합니다. 담대함을 훈련해야 합니다. 과거의 고난과 어려운 시험이 있었던 트라우마가 큰 자가 두려워합니다. 지나간 과거에 매이지 말고 현재에 감사해야 합니다. 누군가가 만나서 무슨 이야기 하겠다고 말하면 신경 쓰이고 두렵습니다. 막상 만나보면 큰 일이 아니고 습관적으로 만나자고 하는 자도 있기에 만남을 자연스럽게 담대히 해야 합니다. 누군가가 무슨 말을 해도 담대하고 성령님의 도움을 구해야 합니다. 만나서 대화하면 풀리고, 유익한 만남이기도 합니다. 만남을 스트레스로 여기지 말고 즐겨야 합니다. 실수하고 약점이 잡히면 두려움이 있습니다. 가능하면 약점을 잡히지 않도록 언행심사를 조심해야 합니다. 실수 없는 자는 없습니다. 실수를 통해 배워야 합니다. 미래의 일 때문에 두려워합니다. 내일은 나의 시간이 아니고, 인간은 미래를 알지 못합니다. 미래를 두려워하는 것은 쓸데없는 두려움입니다. 쓸데없는 염려와 두려움이 큽니다. 마음이 소심하고 좁은 자, 예민한 자가 두려워합니다. 마음을 넓혀야 하고, 지나치게 예민하지 말고, 여유를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모든 일이 진행됩니다. '실패할까, 관계가 깨질까' 하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실패 없는 인생은 없고, 온전한 관계는 없습니다. 실패하면 교훈 삼고 관계 깨지면 조심하고 고치면 됩니다. 관계 깨지지 않은 인생은 없습니다. 더 좋은 관계 위해 노력하고 최선 다하면 됩니다. 시기, 질투, 미움이 있을 때 두렵습니다. 사랑이 두려움을 이깁니다. 사랑은 성령의 열매입니다. 두려움은 스스로 속는 것입니다. 실패의 이유는 두려움 때문입니다. 두려워서 해야 할 말을 못하면 오해가 커지고 문제가 커집니다. 담대함과 용기가 성공의 비결입니다. 잠언 29:25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게 되거니와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안전 하리라 성령 받지 못하면 두렵습니다. 성령 받으면 담대해집니다. 날마다 성령의 충만을 구해야 합니다. 두려울 때 두려워하지 말라, 담대하라는 말씀을 붙잡아야 합니다. 이사야 43:1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요한복음 16:33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두려움은 문제를 만들고, 담대함은 문제를 해결합니다. 사탄은 두려워하게 하고, 성령님은 담대함을 줍니다. 믿음은 담대함입니다. 도전하지 못하는 이유는 두려움 때문입니다. 누군가가 오해하고 잘못 말해서 선동하면 사람을 두려워말고 담대히 말을 해야 합니다. 대화에도 담대함이 있어야 합니다. 두려움이 있으면 말문이 막히게 됩니다. 두려움이 실패와 멸망의 이유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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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대식 목사 칼럼13】 최고의 절대 명언
최고의 절대 명언 세상에는 유명하다는 사람들의 명언이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명언은 참고가 되고 유익하나 진리는 아닙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면서 최고 절대 진리의 명언입니다. 성경의 절대 명언을 읽고 묵상하고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성경의 명언은 그대로 이루어지고 변하지 않는 명언입니다. 성경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명언입니다. 최고 지혜의 명언입니다. 예수님의 절대 진리 명언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태복음 6:25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마태복음 5:3-12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사도바울의 명언이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로마서 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사도 요한의 명언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한1서 4:7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성경이 절대 진리의 명언임을 기억하고 읽고 묵상하고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성경의 명언은 우리에게 큰 힘과 격려가 됩니다. 성경의 명언은 생명의 명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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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대식 목사 칼럼12】 글쓰기의 중요성에 관계된 성경 구절
글쓰기의 중요성에 관계된 성경 구절 말하는 것이 중요하나, 글을 쓰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말하면 사라지고 기억에 남지 못하나 글을 쓰면 작품을 남기게 되어 두고두고 읽고, 감동을 받게 됩니다. 글을 통해 소통하고, 선한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글을 쓸 때, 진실하게 써야 합니다. 나쁜 글을 쓰면 나쁜 영향을 끼치고 문제가 생기기에 조심해야 합니다. 성경의 저자들이 글을 써서 성경을 남긴 것입니다. 성경은 최고의 글입니다. 글쓰기의 중요성에 관계된 성경 구절을 살펴보겠습니다. 하박국 2:2 여호와께서 내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 묵시를 기록하여 판에 명백히 새기되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라 요한복음 8:8-9 다시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양심에 가책을 느껴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데살로니가전서 1:1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에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디모데전서 1:2 믿음 안에서 참 아들된 디모데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 골로새서 1:2 골로새에 있는 성도들 곧 그리스도 안에서 신실한 형제들에게 편지하노니 우리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디모데후서 3: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요한1서 5:13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쓰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누가복음 24:44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부지런함과 인내가 있어야 글을 쓰게 됩니다. 글을 쓸 때 기도하고 성령의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영감을 글로 써야 합니다. 글을 쓰는 것은 훈련과 연습, 경건 훈련입니다. 글 쓰는 영을 하나님께 구해야 합니다. 글을 쓰는데 도전해야 합니다. 글쓰기가 힘이 드나, 글을 쓰는 것은 유익이 많습니다. 글을 써서 자료를 남기고 책으로 출판해야 합니다. 글을 써서 나누는 것이 문서 선교입니다. 글을 쓰면서 트라우마가 사라지고, 고독을 이기고, 마음의 병이 치유됩니다. 근심이 떠나기도 합니다. 메모하는 습관, 글을 쓰는 습관을 가져야 합니다. 종교개혁자들은 글을 남겨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설교자는 설교집을, 시인은 시를 남겨야 합니다. 누구나 글을 쓸 수 있습니다. 글을 쓰는 것이 힘들다는 마음을 버려야 합니다. 모세는 모세오경, 사도 바울은 글을 써서 서신서 13권을 남겼습니다. 솔로몬은 잠언과 전도서를 글로 남겨 우리가 읽고 큰 은혜를 받게 됩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이 글을 써서 남겼습니다. 성경은 글을 써서 남긴 최고의 작품입니다. 성경이 없으면 구원에 대해, 하나님에 대해 알 수 없습니다. 글을 쓰면서 자신의 삶이 치유되기도 합니다. 가장 보람된 것 중의 하나가 글을 써서 기록으로 남기고, 책을 출판하는 것입니다. 글을 쓰고 나면 출판 비용도 하나님이 공급하십니다. 글을 남겨야 합니다. 유명한 소설도 글을 써서 남긴 작품입니다. 글을 쓰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글을 쓸 때, 하나님께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글쓰기의 유익이 너무 많습니다. 글을 쓰면서 성장하고, 성숙해지며, 문제가 해결되기도 합니다. 글과 펜의 힘이 큽니다. 글을 써서 작품을 남길 때 흐뭇해지고, 보람을 느끼게 됩니다. 설교자는 설교의 내용을 글로 남겨야 하고, 강의나 특강의 내용을 글로 써서 자료를 남겨야 합니다. 글을 써서 자료를 남기는 것이 큰 재산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고, 사람들이 읽고 도전받고, 은혜받는 좋은 글을 많이 남겨야 합니다. 글을 쓸 때마다 성령님의 도움을 구해야 하고, 글의 제목을 쓸 때도 성령님의 도움이 있어야 합니다. 남의 글을 베끼거나 카피하려는 유혹을 버리고 자신의 글을 써야 합니다. 자신의 글을 써야 힘이 있게 됩니다. 마음으로 글을 쓰고 영감을 받아 글을 써야 합니다. 펜은 칼보다 강하다는 말이 있는데, 글쓰기의 중요성을 가르쳐주는 말입니다. 영어로는 'The pen is mightier than the sword'입니다. 글의 힘이 어떤 것보다 크다는 의미입니다. 글쓰기는 여러 가지로 유익한데, 생각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표현을 명확히 하게 되고, 감정을 표현합니다. 아이디어를 다른 사람과 공유하고, 소통을 확장할 수 있고, 글을 기록으로 남기면 시간이 지나도 다시 볼 수 있습니다. 창의력, 논리력, 집중력을 길러주기 때문에 글쓰기의 유익이 많습니다. 글을 반드시 남겨야 합니다. 글을 써서 책으로 출판되면 마음이 기쁘고 흐뭇해집니다.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 되어진 최고의 문서 선교입니다. 문서 선교의 효과가 큽니다. 글 쓰는 일에 두려워하지 말고 도전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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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대식 목사 칼럼11】 인내와 인간관계
인내와 인간관계 인간관계의 깨어짐은 아픔과 상처입니다. 인내하지 못해 함부로 말하고, 행동하다가 관계가 깨집니다. 인내는 관계의 열쇠입니다. 히브리서 10:36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하신 것을 받기 위함이라 인내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인내는 하나님의 성품이고, 성령의 열매입니다. 인내가 부족하고, 조급하여 실수하게 되고, 관계가 깨지게 됩니다. 인내가 부족해서 관계가 깨졌다면 회개하고, 인내의 삶이 되어야 합니다. 자신에게 유익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인내하지 못하고 조급하면 관계가 깨집니다. 인간관계를 멀리 내다보고 행동해야 합니다. 관계는 아슬아슬하고, 순간 깨지게 됩니다. 나쁜 행동 하나 때문에 수십 년의 관계가 깨지기도 합니다. 관계를 위해 투자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잘되어야 인간관계가 잘됩니다. 좋은 관계는 행복과 성공의 열쇠입니다. 사탄은 관계를 깨뜨리고, 성령은 하나 되게 하십니다. 사탄에 의해 관계의 시험에 들지 않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인내와 여유를 가지고 하나님만 의지하고, 인간에 대해 기대를 버리고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인간에 대해 기대한 만큼 실망하게 됩니다. 인간의 죄성과 본질을 이해하는 넓은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인간은 사랑해 주어야 할 대상입니다. 인간을 두려워하지 말고 담대히 관계 맺어야 합니다. 인간과의 오랫동안의 관계에는 인내가 필수입니다. 인간에 대해 참아주는 견딤과 인내가 있어야 합니다. 인간관계의 성공이 삶의 성공입니다. 관계를 위해 좋은 씨를 뿌리고, 투자해야 합니다. 인간관계가 깨질 때, 자신을 돌아보고, '무엇이 문제인가?' 고치고 해결해야 합니다. 관계가 전부이고, 나머지는 사소합니다. 인간관계의 문제는 서로의 문제입니다. 인간관계의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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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원 목사 선교5】 와서 도우라
선교사가 선교해야 하는 나라를 정할 때에는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다. 내가 몽골 선교사로 나가기 전에 천산중앙교회에서 부목사로 사역을 하면서 외국인 노동자들을 7년간 섬겼다. 필리핀, 페루, 몽골인 들을 섬겼다. 그런데 1997년에 10월에 몽골에 선교지 탐방을 가게 되었다. 선교지 탐방을 가기 전날에 사건이 발생했다. 교회에 출석하던 몽골인 노동자가 병원에 입원했다는 연락을 받았다. 교회 근처에 있는 작은 의원에 입원했다. 그 사람은 몽골에서 육군사관학교를 나온 장교출신인데 한국에 돈 벌기 위해서 노동자로 와서 일을 했고 그 부인은 몽골의 영어 선생님 출신인데 부부가 한국에 돈을 벌기 위해 와서 일을 하고 있었다. 그 남편이 병원에 입원했는데 큰 일이 났다고 부인이 나에게 달려왔다. 그 남편이 병원에 입원했는데 입에서 피를 토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달려 가 보니 정말 입에서 피를 토하고 누워 있었다. 작은 의원이라 의사도 당황하고 그냥 바라보고만 있었다. 내가 가서 보니 그냥 두면 생명에 위험이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의사에게 빨리 큰 병원으로 옮겨야 하겠다고 말했다. 그랬더니 그 의사가 “이 사람을 움직이다가 사망하면 책임을 질 것이냐?”고 물었다. 나는 “책임지겠다”라고 말하고 택시를 불러대학병원으로 환자를 업고 달려갔다. 대학병원에 도착 하니 의사들이 회진을 하고 있는 상태였다. 급히 의사들이 응급실로 모여들고 진찰을 하니 위에서 구멍이 나 출혈을 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급히 마취를 하고 수술을 했다. 그 때에 나는 그 사람이 마취하는 것부터 수술을 하는 자리까지 옆에서 지켜보고 있었고, 수술을 잘 마쳐서 생명을 살리게 되었다. 그 다음날 몽골에 갔다. 공항에 도착을 하니 세단 승용차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집안이 고위급 집안이기에 자기의 아들을 고쳐준 고마운 분이 왔다고 고급 승용차로 픽업을 하고 내가 몽골에 있는 동안 선교 답사해야 하는 곳을 안내해 주었다. 같이 다니던 가족도 집으로 초대해서 식사를 마치고 복음을 전했다. 몽골에 선교 답사를 가야 하는 전날에 생명이 위독한 몽골인을 구하는 자리에 있게 하시고 몽골에 가서 그 가족에게 복음을 전하면서 하나님께서 몽골로 나를 부르고 계시다는 손길을 확실하게 보았다. “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이르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 행 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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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원 목사 선교4】 선교의 A.B.C
선교의 기초는 선교사가 선교지에 가면 2년은 선교사가 사역하지 않고 선교지의 언어와 문화를 배우는 것이다. 그래야 장기적으로 선교사역을 효과적으로 감당할 수 있게 된다. 선교사들이 문화와 언어를 배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며 이때 겸손과 인내를 배우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선교의 기초가 무너져 버린 경우가 생겼다. 한국에서 만났던 성도들이 선교사에게 찾아옴으로 인해서 발생했다. 선교지에 도착하니까 한국에서 만났던 성도들이 인사차 찾아왔다. 혼자 온 것이 아니라 가족들과 함께 왔다. 반갑게 맞이했다. 그런데 이들이 한국에서처럼 주일에 예배드려야 하는데 아직 예배당은 마련되지 않은 상태였다. 이들을 위해서 친구인 한국 선교사가 섬기고 있는 교회로 인도했다. 우리도 함께 친구 선교사가 사역하는 교회에 출석했다. 그런데 이들이 이 교회에 참석한 이후에 그다음에는 이 교회에 나올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한국에서는 목사님이 인도했는데 왜 지금은 자신들을 인도하면서 예배를 드리지 않는가?”하고 질문했다. 그래서 “목사님이 인도하시는 교회가 아니면 교회에 출석을 하지 않겠다.”라고 했다. 하나님께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 기도하는 가운데 이들이 교회에 계속해서 출석을 하게 하려고 교회를 개척할 수밖에 없었다. 언어를 배운 다음에 교회를 개척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먼저 시작하면서 언어를 배우는 과정을 갖게 되었다. 가정에서 한국에서 돌아온 성도들이 모여서 매 주일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본인들만 아니라 본인의 가족들도 함께 교회에 나와서 금방 우리 집에 많은 성도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그래서 빠른 시간에 교회가 개척되었다. 나보다 6개월 이후에 오신 조유상 선교사님은 한국에서 몽골인들을 서울에서 섬기셨기 때문에 빠른 시간에 500여 명의 성도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그래서 빠른 시간에 울란바타르 시내의 중앙에 큰 건물로 십자가를 높인 단 교회가 세워지게 되었다. 이 교회가 최근에 상영된 영화인 『신의 악단』 촬영 장소인 선교교회이다. 이렇게 한국에서의 이주민들을 섬기는 선교는 선교의 기초를 넘어서게 하였다. 언어를 배우고 문화를 배우는 기초과정을 거치지 않고 바로 이들을 위한 교회를 건축하게 했다. 물론 모든 선교사의 경우가 같지는 않지만, 일반적으로 한국에서 만났던 성도들을 본국에서 만나서 교회를 세우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 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 이니라” 사 55: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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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대식 목사 칼럼14】 두려움의 이유 (딤후 1:7)
- 두려움의 이유 (딤후 1:7) 인간은 누구나 두려움이 있습니다. 두려움의 많고 적음의 차이뿐입니다. 죄가 들어온 후, 두려움이 생겼습니다. 죄를 지으면 두려움이 있고, 의인은 담대합니다. 디모데후서 1:7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 두려움은 하나님이 주는 것이 아니고 사탄이 줍니다. 두려움의 이유가 너무나 많습니다. 건강 검진하고 결과를 기다릴 때 두렵습니다. 건강 검진 결과를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두려워한다고 건강 검진 결과가 달라지지 않습니다. 두려움이 있으면 건강 검진하기 싫어하는데 두려워서 건강 검진 안 하면 병을 키우게 됩니다. 담대히, 자연스럽게 건강 검진해야 합니다. 담대함을 훈련해야 합니다. 과거의 고난과 어려운 시험이 있었던 트라우마가 큰 자가 두려워합니다. 지나간 과거에 매이지 말고 현재에 감사해야 합니다. 누군가가 만나서 무슨 이야기 하겠다고 말하면 신경 쓰이고 두렵습니다. 막상 만나보면 큰 일이 아니고 습관적으로 만나자고 하는 자도 있기에 만남을 자연스럽게 담대히 해야 합니다. 누군가가 무슨 말을 해도 담대하고 성령님의 도움을 구해야 합니다. 만나서 대화하면 풀리고, 유익한 만남이기도 합니다. 만남을 스트레스로 여기지 말고 즐겨야 합니다. 실수하고 약점이 잡히면 두려움이 있습니다. 가능하면 약점을 잡히지 않도록 언행심사를 조심해야 합니다. 실수 없는 자는 없습니다. 실수를 통해 배워야 합니다. 미래의 일 때문에 두려워합니다. 내일은 나의 시간이 아니고, 인간은 미래를 알지 못합니다. 미래를 두려워하는 것은 쓸데없는 두려움입니다. 쓸데없는 염려와 두려움이 큽니다. 마음이 소심하고 좁은 자, 예민한 자가 두려워합니다. 마음을 넓혀야 하고, 지나치게 예민하지 말고, 여유를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모든 일이 진행됩니다. '실패할까, 관계가 깨질까' 하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실패 없는 인생은 없고, 온전한 관계는 없습니다. 실패하면 교훈 삼고 관계 깨지면 조심하고 고치면 됩니다. 관계 깨지지 않은 인생은 없습니다. 더 좋은 관계 위해 노력하고 최선 다하면 됩니다. 시기, 질투, 미움이 있을 때 두렵습니다. 사랑이 두려움을 이깁니다. 사랑은 성령의 열매입니다. 두려움은 스스로 속는 것입니다. 실패의 이유는 두려움 때문입니다. 두려워서 해야 할 말을 못하면 오해가 커지고 문제가 커집니다. 담대함과 용기가 성공의 비결입니다. 잠언 29:25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게 되거니와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안전 하리라 성령 받지 못하면 두렵습니다. 성령 받으면 담대해집니다. 날마다 성령의 충만을 구해야 합니다. 두려울 때 두려워하지 말라, 담대하라는 말씀을 붙잡아야 합니다. 이사야 43:1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요한복음 16:33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두려움은 문제를 만들고, 담대함은 문제를 해결합니다. 사탄은 두려워하게 하고, 성령님은 담대함을 줍니다. 믿음은 담대함입니다. 도전하지 못하는 이유는 두려움 때문입니다. 누군가가 오해하고 잘못 말해서 선동하면 사람을 두려워말고 담대히 말을 해야 합니다. 대화에도 담대함이 있어야 합니다. 두려움이 있으면 말문이 막히게 됩니다. 두려움이 실패와 멸망의 이유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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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대식 목사 칼럼14】 두려움의 이유 (딤후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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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대식 목사 칼럼13】 최고의 절대 명언
- 최고의 절대 명언 세상에는 유명하다는 사람들의 명언이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명언은 참고가 되고 유익하나 진리는 아닙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면서 최고 절대 진리의 명언입니다. 성경의 절대 명언을 읽고 묵상하고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성경의 명언은 그대로 이루어지고 변하지 않는 명언입니다. 성경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명언입니다. 최고 지혜의 명언입니다. 예수님의 절대 진리 명언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태복음 6:25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마태복음 5:3-12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사도바울의 명언이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로마서 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사도 요한의 명언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한1서 4:7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성경이 절대 진리의 명언임을 기억하고 읽고 묵상하고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성경의 명언은 우리에게 큰 힘과 격려가 됩니다. 성경의 명언은 생명의 명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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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대식 목사 칼럼12】 글쓰기의 중요성에 관계된 성경 구절
- 글쓰기의 중요성에 관계된 성경 구절 말하는 것이 중요하나, 글을 쓰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말하면 사라지고 기억에 남지 못하나 글을 쓰면 작품을 남기게 되어 두고두고 읽고, 감동을 받게 됩니다. 글을 통해 소통하고, 선한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글을 쓸 때, 진실하게 써야 합니다. 나쁜 글을 쓰면 나쁜 영향을 끼치고 문제가 생기기에 조심해야 합니다. 성경의 저자들이 글을 써서 성경을 남긴 것입니다. 성경은 최고의 글입니다. 글쓰기의 중요성에 관계된 성경 구절을 살펴보겠습니다. 하박국 2:2 여호와께서 내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 묵시를 기록하여 판에 명백히 새기되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라 요한복음 8:8-9 다시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양심에 가책을 느껴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데살로니가전서 1:1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에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디모데전서 1:2 믿음 안에서 참 아들된 디모데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 골로새서 1:2 골로새에 있는 성도들 곧 그리스도 안에서 신실한 형제들에게 편지하노니 우리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디모데후서 3: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요한1서 5:13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쓰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누가복음 24:44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부지런함과 인내가 있어야 글을 쓰게 됩니다. 글을 쓸 때 기도하고 성령의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영감을 글로 써야 합니다. 글을 쓰는 것은 훈련과 연습, 경건 훈련입니다. 글 쓰는 영을 하나님께 구해야 합니다. 글을 쓰는데 도전해야 합니다. 글쓰기가 힘이 드나, 글을 쓰는 것은 유익이 많습니다. 글을 써서 자료를 남기고 책으로 출판해야 합니다. 글을 써서 나누는 것이 문서 선교입니다. 글을 쓰면서 트라우마가 사라지고, 고독을 이기고, 마음의 병이 치유됩니다. 근심이 떠나기도 합니다. 메모하는 습관, 글을 쓰는 습관을 가져야 합니다. 종교개혁자들은 글을 남겨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설교자는 설교집을, 시인은 시를 남겨야 합니다. 누구나 글을 쓸 수 있습니다. 글을 쓰는 것이 힘들다는 마음을 버려야 합니다. 모세는 모세오경, 사도 바울은 글을 써서 서신서 13권을 남겼습니다. 솔로몬은 잠언과 전도서를 글로 남겨 우리가 읽고 큰 은혜를 받게 됩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이 글을 써서 남겼습니다. 성경은 글을 써서 남긴 최고의 작품입니다. 성경이 없으면 구원에 대해, 하나님에 대해 알 수 없습니다. 글을 쓰면서 자신의 삶이 치유되기도 합니다. 가장 보람된 것 중의 하나가 글을 써서 기록으로 남기고, 책을 출판하는 것입니다. 글을 쓰고 나면 출판 비용도 하나님이 공급하십니다. 글을 남겨야 합니다. 유명한 소설도 글을 써서 남긴 작품입니다. 글을 쓰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글을 쓸 때, 하나님께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글쓰기의 유익이 너무 많습니다. 글을 쓰면서 성장하고, 성숙해지며, 문제가 해결되기도 합니다. 글과 펜의 힘이 큽니다. 글을 써서 작품을 남길 때 흐뭇해지고, 보람을 느끼게 됩니다. 설교자는 설교의 내용을 글로 남겨야 하고, 강의나 특강의 내용을 글로 써서 자료를 남겨야 합니다. 글을 써서 자료를 남기는 것이 큰 재산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고, 사람들이 읽고 도전받고, 은혜받는 좋은 글을 많이 남겨야 합니다. 글을 쓸 때마다 성령님의 도움을 구해야 하고, 글의 제목을 쓸 때도 성령님의 도움이 있어야 합니다. 남의 글을 베끼거나 카피하려는 유혹을 버리고 자신의 글을 써야 합니다. 자신의 글을 써야 힘이 있게 됩니다. 마음으로 글을 쓰고 영감을 받아 글을 써야 합니다. 펜은 칼보다 강하다는 말이 있는데, 글쓰기의 중요성을 가르쳐주는 말입니다. 영어로는 'The pen is mightier than the sword'입니다. 글의 힘이 어떤 것보다 크다는 의미입니다. 글쓰기는 여러 가지로 유익한데, 생각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표현을 명확히 하게 되고, 감정을 표현합니다. 아이디어를 다른 사람과 공유하고, 소통을 확장할 수 있고, 글을 기록으로 남기면 시간이 지나도 다시 볼 수 있습니다. 창의력, 논리력, 집중력을 길러주기 때문에 글쓰기의 유익이 많습니다. 글을 반드시 남겨야 합니다. 글을 써서 책으로 출판되면 마음이 기쁘고 흐뭇해집니다.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 되어진 최고의 문서 선교입니다. 문서 선교의 효과가 큽니다. 글 쓰는 일에 두려워하지 말고 도전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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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대식 목사 칼럼12】 글쓰기의 중요성에 관계된 성경 구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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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대식 목사 칼럼11】 인내와 인간관계
- 인내와 인간관계 인간관계의 깨어짐은 아픔과 상처입니다. 인내하지 못해 함부로 말하고, 행동하다가 관계가 깨집니다. 인내는 관계의 열쇠입니다. 히브리서 10:36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하신 것을 받기 위함이라 인내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인내는 하나님의 성품이고, 성령의 열매입니다. 인내가 부족하고, 조급하여 실수하게 되고, 관계가 깨지게 됩니다. 인내가 부족해서 관계가 깨졌다면 회개하고, 인내의 삶이 되어야 합니다. 자신에게 유익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인내하지 못하고 조급하면 관계가 깨집니다. 인간관계를 멀리 내다보고 행동해야 합니다. 관계는 아슬아슬하고, 순간 깨지게 됩니다. 나쁜 행동 하나 때문에 수십 년의 관계가 깨지기도 합니다. 관계를 위해 투자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잘되어야 인간관계가 잘됩니다. 좋은 관계는 행복과 성공의 열쇠입니다. 사탄은 관계를 깨뜨리고, 성령은 하나 되게 하십니다. 사탄에 의해 관계의 시험에 들지 않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인내와 여유를 가지고 하나님만 의지하고, 인간에 대해 기대를 버리고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인간에 대해 기대한 만큼 실망하게 됩니다. 인간의 죄성과 본질을 이해하는 넓은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인간은 사랑해 주어야 할 대상입니다. 인간을 두려워하지 말고 담대히 관계 맺어야 합니다. 인간과의 오랫동안의 관계에는 인내가 필수입니다. 인간에 대해 참아주는 견딤과 인내가 있어야 합니다. 인간관계의 성공이 삶의 성공입니다. 관계를 위해 좋은 씨를 뿌리고, 투자해야 합니다. 인간관계가 깨질 때, 자신을 돌아보고, '무엇이 문제인가?' 고치고 해결해야 합니다. 관계가 전부이고, 나머지는 사소합니다. 인간관계의 문제는 서로의 문제입니다. 인간관계의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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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대식 목사 칼럼11】 인내와 인간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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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원 목사 선교5】 와서 도우라
- 선교사가 선교해야 하는 나라를 정할 때에는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다. 내가 몽골 선교사로 나가기 전에 천산중앙교회에서 부목사로 사역을 하면서 외국인 노동자들을 7년간 섬겼다. 필리핀, 페루, 몽골인 들을 섬겼다. 그런데 1997년에 10월에 몽골에 선교지 탐방을 가게 되었다. 선교지 탐방을 가기 전날에 사건이 발생했다. 교회에 출석하던 몽골인 노동자가 병원에 입원했다는 연락을 받았다. 교회 근처에 있는 작은 의원에 입원했다. 그 사람은 몽골에서 육군사관학교를 나온 장교출신인데 한국에 돈 벌기 위해서 노동자로 와서 일을 했고 그 부인은 몽골의 영어 선생님 출신인데 부부가 한국에 돈을 벌기 위해 와서 일을 하고 있었다. 그 남편이 병원에 입원했는데 큰 일이 났다고 부인이 나에게 달려왔다. 그 남편이 병원에 입원했는데 입에서 피를 토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달려 가 보니 정말 입에서 피를 토하고 누워 있었다. 작은 의원이라 의사도 당황하고 그냥 바라보고만 있었다. 내가 가서 보니 그냥 두면 생명에 위험이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의사에게 빨리 큰 병원으로 옮겨야 하겠다고 말했다. 그랬더니 그 의사가 “이 사람을 움직이다가 사망하면 책임을 질 것이냐?”고 물었다. 나는 “책임지겠다”라고 말하고 택시를 불러대학병원으로 환자를 업고 달려갔다. 대학병원에 도착 하니 의사들이 회진을 하고 있는 상태였다. 급히 의사들이 응급실로 모여들고 진찰을 하니 위에서 구멍이 나 출혈을 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급히 마취를 하고 수술을 했다. 그 때에 나는 그 사람이 마취하는 것부터 수술을 하는 자리까지 옆에서 지켜보고 있었고, 수술을 잘 마쳐서 생명을 살리게 되었다. 그 다음날 몽골에 갔다. 공항에 도착을 하니 세단 승용차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집안이 고위급 집안이기에 자기의 아들을 고쳐준 고마운 분이 왔다고 고급 승용차로 픽업을 하고 내가 몽골에 있는 동안 선교 답사해야 하는 곳을 안내해 주었다. 같이 다니던 가족도 집으로 초대해서 식사를 마치고 복음을 전했다. 몽골에 선교 답사를 가야 하는 전날에 생명이 위독한 몽골인을 구하는 자리에 있게 하시고 몽골에 가서 그 가족에게 복음을 전하면서 하나님께서 몽골로 나를 부르고 계시다는 손길을 확실하게 보았다. “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이르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 행 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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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원 목사 선교5】 와서 도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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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원 목사 선교4】 선교의 A.B.C
- 선교의 기초는 선교사가 선교지에 가면 2년은 선교사가 사역하지 않고 선교지의 언어와 문화를 배우는 것이다. 그래야 장기적으로 선교사역을 효과적으로 감당할 수 있게 된다. 선교사들이 문화와 언어를 배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며 이때 겸손과 인내를 배우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선교의 기초가 무너져 버린 경우가 생겼다. 한국에서 만났던 성도들이 선교사에게 찾아옴으로 인해서 발생했다. 선교지에 도착하니까 한국에서 만났던 성도들이 인사차 찾아왔다. 혼자 온 것이 아니라 가족들과 함께 왔다. 반갑게 맞이했다. 그런데 이들이 한국에서처럼 주일에 예배드려야 하는데 아직 예배당은 마련되지 않은 상태였다. 이들을 위해서 친구인 한국 선교사가 섬기고 있는 교회로 인도했다. 우리도 함께 친구 선교사가 사역하는 교회에 출석했다. 그런데 이들이 이 교회에 참석한 이후에 그다음에는 이 교회에 나올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한국에서는 목사님이 인도했는데 왜 지금은 자신들을 인도하면서 예배를 드리지 않는가?”하고 질문했다. 그래서 “목사님이 인도하시는 교회가 아니면 교회에 출석을 하지 않겠다.”라고 했다. 하나님께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 기도하는 가운데 이들이 교회에 계속해서 출석을 하게 하려고 교회를 개척할 수밖에 없었다. 언어를 배운 다음에 교회를 개척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먼저 시작하면서 언어를 배우는 과정을 갖게 되었다. 가정에서 한국에서 돌아온 성도들이 모여서 매 주일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본인들만 아니라 본인의 가족들도 함께 교회에 나와서 금방 우리 집에 많은 성도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그래서 빠른 시간에 교회가 개척되었다. 나보다 6개월 이후에 오신 조유상 선교사님은 한국에서 몽골인들을 서울에서 섬기셨기 때문에 빠른 시간에 500여 명의 성도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그래서 빠른 시간에 울란바타르 시내의 중앙에 큰 건물로 십자가를 높인 단 교회가 세워지게 되었다. 이 교회가 최근에 상영된 영화인 『신의 악단』 촬영 장소인 선교교회이다. 이렇게 한국에서의 이주민들을 섬기는 선교는 선교의 기초를 넘어서게 하였다. 언어를 배우고 문화를 배우는 기초과정을 거치지 않고 바로 이들을 위한 교회를 건축하게 했다. 물론 모든 선교사의 경우가 같지는 않지만, 일반적으로 한국에서 만났던 성도들을 본국에서 만나서 교회를 세우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 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 이니라” 사 55: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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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원 목사 선교4】 선교의 A.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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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
- 어제 아침, 교회에 가니 택배 상자가 있었다. 택배 온다는 말도 없었는데 주소를 확인하니 내게 온 게 맞았다. 군용 건빵이었다. 그것도 무려 7종류의 건빵이었다. “21곡물 가득 참깨 건빵”, “땅콩건빵”, “참깨건빵”, “야채건빵”, “검은깨건빵”, “쌀건빵”, “건빵”. 총회 군선교사회에서 보낸 거였다. 보암직 스럽고, 먹음직스러운 건빵들이 수두룩하다. 하지만 내 손이 간 곳은 아무 수식어도 없는 ‘건빵’ 봉지를 집고서 뜯었다. 건빵 2개에 별사탕 1개를 입 안에 넣고 어저께 산 ‘구쯔 커피’를 내려 한 모금을 마셨다. 환상적이다. 카페에서 달달한 빵과 먹는 것보다 이게 훨씬 맛있다. 한 모금씩 홀짝홀짝 마시는데 자꾸 옛 생각이 난다. 서울 올림픽이 열리던 해 2월, 매서운 추위가 채 가시기 전 나는 나라의 부름을 받고 경기도 양주 가래비에서 훈련받았다. 따뜻한 경상도 사람이 전방에 가니 너무 추웠고, 배고픔에다가교육사단이라 훈련도 빡세고, 행군도 3번에 걸쳐 총 160km를 걸었으니 하루하루가 견디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서도 웃을 수 있었던 것은 전우들 때문이었다. 내 훈련번호는 67번이었고, 앞 66번은 착하고 순한 포항 출신 ‘양0원’이가 뒤 68번은 사회에서 유흥업소에서 지루박, 탱고 등 각종 춤과 여자를 일찍이 마스터한 ‘이0출’이란 친구가 배치되었다. ‘이0출’은 훈련하다가 휴식 시간이 되면 남들은 담배 한 개를 장전할 때 조교의 부름을 받아 앞에 나가 어김없이 멋진 춤사위를 벌였다. 그는 묻지도 않았는데도 사회에서 자신이 경험한 것을 영웅담 삼아 내게 곧잘 이야기해 주었다. ‘이0출’의 영웅담은 교회에서 율동할 때 외에는 여자의 손을 잡아본 적 없는 순둥이 청년인 내게는 신세계였다. 그렇게 종일 훈련을 마치고 저녁 먹고 10시 취침에 들면 배고픔은 극에 달했다. 좌우에 누운 66번과 68번 그놈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때 얼굴이 검고 담배를 많이 피워 검붉은 입술을 가진 우리 소대 선임하사인 그놈이 훈련병 누군가를 깨웠다. 그리곤 페치카 옆에서 단둘이 ‘아작아작 ’소리 내며 뭔가를 먹는 게 아닌가? ‘건빵’이었다. 그 소리가 왜 그렇게 부러운지 밖에서는 쳐다보지 않았던 건빵이 너무 먹고 싶어 눈물이 찔끔거렸다. 나중에 보니 둘은 고등학교 동창이었다. 우리는 그 소리를 들으면서 허기진 배를 움켜잡고 잠자리에 들어야만 했다. 지난달 초에 동기 임 목사님에게서 전화가 왔다. 받아보니 좀 도와달라는 거였다. 임 목사님은 우리 교단 군선교사회 회장이다. 임 목사님을 비롯한 여러 민간인 목사님들이 자비량으로 군선교사로 활동하시는데 2월말, 1박 2일로 전략 캠프 수련회를 준비하는 중에 후원을 부탁하는 전화였다. 임목사님은 10년 넘게 군선교사로 활동하지만 단한번도 도와달라고 전화하지 않았던 분이다. 오죽했으면 전화까지 했을까 싶어 집에 있는 돈을 싹 끌어모아 보내드렸다. 그랬더니 편지와 함께 건빵을 보내 감사를 표했던 거였다. 요즘 군인들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100만원 넘는 월급에 이렇게 맛난 건빵까지 마음껏 먹으니 말이다. 하지만 부럽지는 않다. 우리에겐 배부른 요즘애들이 가질수 없는 건빵 추억이 있으니 말이다. 그 건빵 추억이 오늘 이렇게 글감이 되어 내 인생 여정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게 된다. 건빵 다 먹었다. 은근히 배부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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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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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부재 1년
- 벌써 1년이다. 어머니가 천국으로 이사 가신지. 시골집은 별반 달라진 게 없다. 낡은 대문, 현관 경사로, 가지런하게 놓여 있는 장독대, 집안에 가재도구 등...단지 어머니만 계시지 않을 뿐이다. 하지만 어머니는 마치 계신 것처럼 구석구석 흔적은 여전히 묻어있다. 어저께 오전, 온 형제들이 시골집에 모여 어머니 1주기 추도예배를 드렸다. 그리고 점심을 같이 먹었다. 누나들이 끓어 놓은 청도추어탕이 밥상에 올라왔다. 내게 청도추어탕은 어머니 냄새다. 맑은 추어탕에 제피가루 듬뿍 넣어 먹는 맛은 시골 가야만 가능했다. 하지만 어머니가 천국 가시기 몇 해 전부터는 청도추어탕을 맛볼 수 없었다. 그 맛이 너무 그리웠다. 혹시 수도권에 청도 추어탕집이 있나 검색해 봐도 없었다. 청도 역전에 있는 추어탕 집에 전화해서 가격도 물어봤다. 점심을 맛있게 먹고 누나들은 아재 밭에서 냉이를 캐고, 나는 잠깐 동네 산책을 했다. 봄이 오는 길목이라 따뜻했지만 간간이 불어오는 바람은 여전히 추위를 느낄 정도였다. 인적이 예전만 못한 동네를 돌아다니며 사진도 몇 장 찍었다. 빈집도 더러 보인다. 집은 곳곳이 무너졌고, 잡초가 무성하다. 그 옛날 반들거리던 마당에서 구슬치기하며 놀았던 어린 시절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마을 맨 위에 사시는 아재 집에 가면서 빈집을 가리키며 형에게 물어봤다. “이 집이 누구 집인교?” “내 친구 00집이다” 그 집 앞 담벼락에는 깨진 벽들이 두 개씩 겹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지난 설에 보니 양지바른 그곳은 ‘미륵땡~’이라고 불리는 그 동네 아지매들이 겹쳐진 벽돌 위에 앉아 도란도란 담소 나누던 아지트였다. 아재를 뵙고 내려오면서 보니 옛 점빵도 보인다. 요즘으론 미니슈퍼다. 역시 텅텅 비어있다. 하지만 옛날에는 라면부터 새우깡, 맛동산, 초코파이 등이 없는 것이 없었다. 밤마다 용띠 형들에 이어 양띠인 우리까지 뻔질나게 찾아가 내 친구 상이 어무이를 깨우며 많이들 외상으로 사 먹었다. 외상값은 다 갚았는지 모르겠다. 동네 냇가도 잡초가 무성하다. 예전에는 물도 많았고 피레미, 버들치, 중태기 등 물고기들도 많았다. 초여름부터 우리들이 뻔질나게 멱감았던 추억의 공간이기도 하다. 고향 생각날 때마다 보려고 몇 장 더 찍었다. 목회자로 살아가는 내게 토요일을 바쁜 날이라 서둘러 떠날 채비를 했다. 누나들이 어머니가 담은 마지막 된장이라 하면서 담아준다. 간수를 뺀 소금 자루도 있어 챙겼다. 어머니를 만난 듯 기뻤다. 시골집을 떠나면서 수건 하나를 챙겼다. 수건이 없어서 챙긴 게 아니다. 집에는 삶아 뽀송뽀송한 깨끗한 수건이 많다. 하지만 시골집 수건이 좋다. 그 수건에는 고향 집 특유의 향이 나기 때문이다. 그 향은 내게 어머니 향이다. 어머니가 그리울 때다 그 향을 맡고 싶다. 그날 하루 왕복 8시간 운전했다. 설교 준비하고 늦은 밤에 잠자리에 누웠는데 곧바로 꿈이 꾸였다. 꿈에 어머니가 옛날처럼 이것저것 챙겨주셨다. 꿈결에 어머니 소리마저 들렸다. 너무 생생했다. 기분이 좋았다. 어머니가 천국에서 잠깐 내 곁에 내려와 그토록 사랑했던 막내아들을 토닥여주고 간 것 같았다. 감사함이 넘치는 고향 나들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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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부재 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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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불출 목사의 아내 자랑-한 상담사의 탄생
- 3년 전,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코로나가 창궐했을 때 우리는 당황했다. 무엇을 할지, 어떻게 할지 아는 게 없었다. 교회도 마찬가지였다. 그때 아내가 말했다. “여보, 나 공부 할래요” “무슨 공부?” “상담공부요.” 아내는 그렇게 집에서 가까운 서울여자대학교 휴먼서비스대학원 가족상담학 석사과정에 입학했다. 대학 졸업 후 30년 만에 시작된 공부는 만만치 않았다. 컴퓨터도 자유롭게 다루지 못했고, 눈도 침침해 돋보기를 껴야만 책을 읽을 수 있어 공부하기엔 늦은 나이였지만 아내는 최선을 다했다. 평소 코를 전혀 골지 않았는데 공부 시작하면서부터는 매일 코를 골았다. 이해가 되지 않는 것들은 교수에게 계속 질문하였고, 배운 내용은 끊임없이 내게 말하면서 익혔다. 덕분에 내가 야매로 상담 공부한 셈이다. 무엇보다 교수들이 추천한 전공서적은 모두 사서 줄을 치면서 읽고 또 읽었다. 솔직히 나도 학위공부 했지만 아내처럼 그렇게 전공서적을 열심히 읽으면서 하지는 못했다. 예전에 내가 공부할 때 아내가 최선을 다해 도왔듯이 이제는 내가 도울 일을 찾았다. 감사하게도 코로나 기간이라 시간적 여유로움이 생겨 도울 수 있었다. 라면과 김치찌개 정도 끓일 줄 알았는데, 유트뷰 선생들의 친절한 설명을 보면서 이것저것 요리를 해 보니 재미있었다. 요리가 별것 없었다. 짠맛과 단맛의 적절한 조화와 그 맛을 내는 재료를 무엇으로 쓸 것인지만 고민하면 되었다. 공부할수록 컴퓨터 다루는 실력이 늘어가는 아내의 손놀림과 요리할수록 양파, 대파, 마늘 등을 다루는 실력이 늘어나는 나의 손놀림은 비례하였다. 집에 있는 세 여자는 모두 공부한다고 머리를 싸매고 있을 때 유일한 남자인 나는 어설픈 칼질을 하면서 저들의 허기진 배를 채워주는 역할의 역전이 코로나 기간 우리 가정의 모습이었다. 아내는 공부를 곧잘했다. 첫 학기부터 성적이 좋더니 꾸준하였다. 하지만 4학기 째 논문과목은 너무 힘들어했고, 몸도 마음도 지쳐가고 있었다. 도와주지 않을 수 없었다. 논문은 내가 가장 잘 하는 분야다. 국제신대원에서 논문 지도한 경험을 살려 아내를 도와주니 다시 힘을 얻는 것 같았다. 무사히 그 과목도 좋은 성적을 받았다. 4-5학기 때가 되니 상담인턴 과정까지 겹쳐 아내는 정말 바빴다. 놀이치료를 통한 아이와 부모 상담, 게다가 교회 등록한 새 가족들 상담 등 아내의 일은 점점 더 늘어갔다. 그렇게 치열하게 공부하더니 무사히 모든 학위과정을 마쳤다. 며칠 전 대학원 교학과에서 전화가 왔다. 아내가 모든 과목에서 에이 플러스 받아 석사과정 전체에서 수석 했다고 하면서 졸업식 날 석사학위증을 대표로 받아야 한다고. 오늘 아내는 길고 길었던 학위과정을 마치고 졸업했다. 3년 만에 대강당에서 행해지는 서울여대 졸업식은 찬양과 기도와 축복이 어우러진 은혜롭고 아름다운 예식이었다. 두 딸과 함께 가서 마음껏 축하해 주었다. 최선을 다한 아내가 멋있었고 아름다웠다. 앞으로의 아내의 사역도 많아질 것 같다. 이전보다 깨어진 영혼들이 더 많은 시대다. 이런저런 일로 마음을 다쳐 아파 고통스러워하는 영혼들의 울음소리가 곳곳에서 들린다. 그들을 위해 하나님께서 아내를 준비시키고 있는 것 같다. 그녀와 28년을 함께 살아온 나는 아내를 믿는다. 아내는 가슴이 따뜻하면서도 지혜로운 여인이다. 그러기에 내담자의 영혼을 어루만질 수 있고, 그들이 자신의 문제가 뭔지 알고 스스로 해결점을 찾아갈 수 있도록 안내하는 좋은 상담사가 될 거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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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불출 목사의 아내 자랑-한 상담사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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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기총 이야기① “사람은 믿어도 목사는 믿지 말라”
- 법원에 의해 한기총 대표회장직을 2년 넘게 수행하고 있는 김현성 변호사가 최근 『한국기독교이야기』를 발간했다. 대표회장직을 수행하면서 경험하고 느낀 바를 적은 것이다. 그 중에 일부를 발제, 연제하여 일반인의 시각에서 본 기독교의 민낯을 보고자한다. "사람은 믿어도 목사는 믿지 말라" 필자는 시간이 허락하는 한 면담을 요청해온 목사들을 모두 만나 경청하기로 하고 일단 많은 목사들과 면담했다. 예상했던대로 백가쟁명(百家爭鳴)이었다. 목사들은 각자 당신의 입장에서 한기총의 현황을 설명했고, 당신의 입장에서 문제 제기와 해법을 제시하였다. 비슷한 특징도 발견할 수 있었다. 한기총 목사들은 서로가 서로를 불신하고 있었고, 자신 또는 자신을 포함한 몇몇 사람만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적임자라고 자처하기도 하였다. "사람은 믿어도 목사는 믿지 말라"는 목사도 있었다. 성경 어디에도 목사를 믿으라는 말은 없다고 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인간을 창조하였느니 오히려 인간을 믿는 것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믿는 것과 연결될 수는 있으나 목사를 믿는다는 것은 이단이라는 것이다. 당시에 박장대소(拍掌大笑)했지만 뼈있는 말이었다. 어떤 목사는 한기총에는 "영(靈)적인 사람은 아무도 없고 모두 육(肉)적인 사람밖에 없다"고 했다. 한기총에서 반드시 없어져야 할 '뱀 같은 존재'들이 똬리를 틀고 있다며 이름을 일일이 거명 하기도 하였다. '먹사', '개독교'라는 말까지 서슴없이 써가며 자신을 포함한 목사들을 싸잡아 스스로 비판하는 목사도 있었다. 증경대표회장 중 한 분은 당신이 한기총의 역사 그 자체이며 누구보다도 현황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라고 했다. 필자에게 '어중이떠중이(?)' 다른 사람들을 모두 만날 필요가 없으며 당신말만 듣고 그대로 행하면 칭송받을 것이라며 다른 목사들과 필자의 만남을 경계하기도 하였다. 한편, 이단 논란이 있는 목사에 대해 이단 해제 명목으로 부동산이나 거액의 금품이 오고 갔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실제로 수년 전 이단 해제에 도움을 주겠다는 명목으로 수억을 수수하여 현재 형사재판 중인 사람도 있었다. 가장 신성해야 할 신학 문제에 금품이라니? 충격이었다. 게다가 대표회장 선거에 천문학적 선거비용이 들어 모두가 금권선거라고 개탄하면서도 헤어 나오지 못하는 것 같았다. 충격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공금횡령으로 형사 고발된 한기총 목사들이 적지 않았다. 주로 모금한 각종 성금이나 헌금, 연회비 등을 횡령한 사건들이었고, 실제로 통장의 공금을 횡령한 것이 발각되어 필자가 해임한 목사도 있었다. 지도자급 목사들이 모인 한기총에서 성금 횡령이라니, 상상도 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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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기총 이야기① “사람은 믿어도 목사는 믿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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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ll Dying(good life, good death) 16 - 죽음에 대한 다양한 관점 연구(6)
- Well Dying(good life, good death) 16 - 죽음에 대한 다양한 관점 연구(6) 1. 죽음에 대한 종교적 관점 우리 인간의 가장 큰 특징 중에 하나는 자연이나 현실에 그대로 순응하지 않고 도전한다는 사실이다. 인간의 불굴의 정신이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많은 문명을 이루고 기술과 과학을 발달시킨 원동력이 되었다. 아울러 이러한 사람들의 도전 정신은 죽음 앞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그래서 인류는 여전히 죽음을 넘어서기 위해서 수많은 노력을 경주하고 있다. 특히 인간은 죽음의 불안 속에서 언젠가 이르게 될 끝에서 자신이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한 삶의 의미와 목적을 찾는 존재이다. 이러한 노력 중에 하나가 죽음은 끝이 아니라 죽음 이후에 또 다른 생명이 있다는 종교적 성찰을 들 수 있다. 대부분의 인간 종교에는 사람의 생명은 육체의 죽음을 넘어 영원하다는 믿음과 내세관을 갖고 있다. 종교는 오죠 라즈니쉬가 말하는 것처럼 “죽음과 삶의 의미를 물으면서 불안에 떨고 있는 인간의 불안을 해소하고 참된 인간으로서의 삶을 실현하기 위해서 삶과 죽음에 대해서 여러 성찰과 해석을 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곧 종교의 역할은 살아가는 과정에서 입을 상처를 위로하며 삶에 대한 용기와 희망을 갖도록 한다. 아울러 죽음의 절망 앞에서 연원한 삶에 대한 희망을 주어서 이 땅에서부터 마음의 안정과 평화를 얻도록 하는 역할을 한다. 세계의 많은 종교 중에서도 우리 한국에 전래되어 토착화 된 종교들, 즉 유교, 불교, 도교, 무속종교의 삶과 죽음에 대한 이해는 우리 기독교인들에게도 큰 영향을 끼치고 있는 매우 중요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곧 우리 한국에는 역사 이래로 우리 한민족의 심성에 깊이 뿌리를 내린 무속종교의 기반 위에 유교·불교·도교와 여러 종류의 종교가 공존하고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한국에서 수 백 년 혹은 수 천 년 동안 이어져 오는 가장 대표적인 종교라고 할 수 있는 유교, 불교, 도교, 그리고 무속종교의 죽음관에 대해서 살펴봄으로 목회자들이 목회현장에서 봉착하는 실천신학적 문제들과 아울러 목회자들이 죽음과 사후에 대해서 목회적으로 어떻게 사역할 것인가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하는 것이다. 1.1. 유교적 관점 중국 역사상 가장 혼란기였던 춘추전국시대에 공자를 비롯한 유학자들의 사상을 그 배경으로 하며,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공자에 의해 시작되었다고 믿고 있다. 인본주의 사상을 배경으로 하는 유교는 현재 우리 한국사회를 지탱하는 매우 중요한 가치관의 기초가 된다고 할 수 있다. 유교는 그 특징이 삶에 대해 적극적인 자세를 갖게 하고 내세 지향적이라기보다는 현세 지향적인 성격이 강하다. 곧 유교의 주된 관심사에 대해서 유학주임교수실 편에 보면 “어떻게 하면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가며 인간다운 공동체를 이룰 것인가에 대한 현실적이고 실천적인 제시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유명한 유교의 인(仁)의 원리이다”라고 말한다. 좀 더 구체적으로 유교는 현재까지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가장 크게 영향을 끼치고 있는 종교적인 요소로서, 이러한 유교의 영향력에 대해 곽혜원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한다. "유교는 불교를 국교로 숭상했던 고려를 멸망시키고 새로운 나라인 조선을 건국한 이성개를 비롯한 개국파의 정치적 기조에 따라서 조선왕조 500여 년(1392-1910) 동안 국가 종교의 자리에서 양반들과 정치인들을 중심으로 종교처럼 숭배되어진 사상이다. 곧 유교는 나라를 통치하기 위한 중요한 수단으로서 받아들여졌기 때문에 가난하고 약한 일반 대중의 종교가 아니라 지배 계층의 종교이며 철학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유교는 사상을 넘어 정치적인 필요와 힘에 의해 종교처럼 되었기 때문에 우리 한국인들의 사고방식, 사회구조, 생활양식, 각종의례와 예의범절을 총망라하는 조선시대의 세계관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그러므로 그 영향력이 오늘까지 강하게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죽음관과 관련하여 상장례와 조상제례에 미친 유교의 영향력은 거의 절대적이어서, 조상제례는 조선 후기 이래 마치 국교와도 같이 신봉되었다. 그 이유는 단순히 부모에게 효도를 하는 차원을 넘어서 국가 체제를 유지하고 지배 계층의 권력을 강화하는 정치적 성격을 가졌기 때문이다" 이처럼 조선시대 지배계층은 인(仁)을 주요 사상의 원리로 주장하는 유교를 부모의 죽음 이후에 조상제례를 통해 부모를 늘 기억하게 함과 동시에 국가와 지배계층은 어버이와 같으므로 그렇게 부모를 섬기듯이 최고의 충성을 끝까지 바쳐야 할 것을 주입하는 정치 도구로 사용한 것이다. 이런 맥락을 따라서 조상제례를 중심으로 하는 한국적 유교는 조선시대에는 국교와 같은 자리를 차지하게 되고, 우리 한민족의 사고와 삶에 깊숙이 자리를 잡게 된 것이다. 유교에서 생각하는 죽음관의 기초가 되는 사상을 살펴보면, 첫째, 정영희는 “유교에서는 생과 사의 문제가 천명(天命)에 달려 있다고 보고 삶에 있어서나 죽음에 있어서나 하늘에 맡기는 순천명(順天命)이 자세를 보인다”고 말한다. 이렇게 한 이유는 유교는 현재적 도덕적 질서를 세우는데 우선했기 때문이다. 둘째, 한국종교학회의 연구에서는 “유교는 기철학을 인간 생명에 대한 사상의 기초로 하고 있기 때문에 인간의 영혼불멸설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유교의 죽음관과 내세관의 기초이다”라고 말한다. 유교에서는 인간은 기(氣)와 정선된 물질적인 힘이 결합된 결과로 보아 천지음양의 기가 뭉치면 사람이 되고 흩어지면 귀(鬼)가 된다고 본다. 곧 인간은 정(精), 기(氣), 신(神)의 결합체인 혼백으로 일정 기간 존속하다가 그 기운이 다하면 혼은 양(陽)으로 하늘로 돌아가고 백은 음(陰)으로 돌아가게 되는데, 이것이 곧 죽음이라고 주장한다. 이처럼 유교에서 죽음은 자연 현상의 일부이며, 인생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모든 것이 하늘에 달려 있다는 자연 순응적 태도를 보인다. 그러므로 유교에 대해서 최영갑은 “종교라기보다는 철저하게 현실의 삶을 중요하게 여기며 삶에서의 윤리와 도리를 중요시하는 철학"이라고 주장한다. 계속적으로 "유교에서는 다른 종교와 달리 분명한 내세관이 없으며, 죽음 이후에 대한 깊은 성찰이나 해답을 제시하지 못한다. 그래서 유교에서는 죽음 이후의 혼백의 존재를 믿는 믿음, 특히 조상의 혼백을 믿는 믿음으로 이 땅에서 마땅히 해야 할 효의 연장 선장에서 철저하게 제사를 지내는 의식을 준행할 뿐이다”라고 말한다. 곧 유교에서는 삶 속에 죽음의 자리를 마련해 놓아 제사를 통해 죽은 자가 살아 있는 사람들(후손)의 세계로 돌아와 만나게 된다는 신념을 따르고 있다. 이는 유교에서는 생활 공동체를 살아 있는 사람들만의 것으로 여기지 않고 죽은 자와 더불어 이루는 공동체로 여기는 태도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특별히 제사를 절대적인 사회 규범으로 하는 것은 삶의 공동체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유교의 이러한 제사 문제는 죽음을 소멸이라고 여기지 않는 유교의 특징이 나타난 것으로 우리 한국인들에게는 매우 중요한 문제라는 것은 모두가 주지하는 바와 같다. 이런 현상은 기독교의 추도 예배 등을 통해서 발견하는 것처럼, 여전히 성도들도 조상에 대한 생각과 숭배의 마음, 그리고 제사에 대한 미련이 남아 있다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목회자들은 이 부분에 대해서 분명하게 성경적으로 성도들을 잘 목양해야 할 부분이라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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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ll Dying(good life, good death) 16 - 죽음에 대한 다양한 관점 연구(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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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ll Dying(good life, good death) 15 - 죽음에 대한 다양한 관점 연구(5)
- Well Dying(good life, good death) 15 - 죽음에 대한 다양한 관점 연구(5) 1. 죽음에 대한 다학제적 관점 1.5. 과학적 관점, 신(新)기계론적 인간관 - 셸리 케이건의 책, 를 중심으로 과학이 죽음을 정의하는 것에 근거를 둔 죽음에 대한 이해에 대해서 최윤배는 철학이나 종교와는 달리 과학이나 의학적 관점에서 죽음에 대한 정의는 아주 단순하며, ‘세속적 죽음 이해’ 혹은 ‘비종교인의 죽음 이해’라고 정의한다. 곧 과학에 있어서 죽음이란 유기체적 생명의 끝, 곧 삶의 끝이다. 그러므로 세속적 죽음 이해에서 죽음이란, 인간은 물질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인격과 개체성의 소멸이다. 이러한 과학적 죽음의 이해, 곧 세속적 죽음의 이해는 자연주의적이며 유물론적인 세계관을 갖고 있는 것이 그 특징이다. 그리고 그 철학적 배경에는 데카르트의 이원론을 따르는 합리주의와 계몽주의의 사상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이것에 대해서 김영규는 자신의 책 <철학판타지, 알도와 떠도는 사원>에서 자세히 기술하고 있는데 그 내용을 요약해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한다. 17세기부터 서양 사람들은 ‘모든 실체는 정신과 물질, 몸과 마음으로 양분 된다’는 데카르트의 이원론을 따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발 더 나아가 인간의 이성을 신과 같이 생각하기 시작했다. 인간의 이성이 신의 창조의 법칙을 찾아냈기 때문에 신이 하던 일도 대신 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곧 중세 천 년 동안 서양 사람들은 신중심주의 속에서 살았는데 과학혁명과 함께 합리주의가 등장하면서 신이 했던 모든 일을 인간 이성이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인간중심주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이런 생각들을 생산주의 혹은 구성주의라고 하며, 세계는 전체가 나라의 기계와 같다는 기계론적 세계관과 따라서 인간이 그것들을 분해하고 조립할 수 도 있다는 환원주의, 그리고 같은 이유에서 인간이 세계의 모든 것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는 생산주의 또는 구성주위가 근대라고 불리는 지난 300여 년 동안 서양을 지배해온 사상이었다. 아울러 사람들은 우리가 사는 이 사회도 이제 이성으로 만들어보자는 생각을 하게 되고, 인간이 신과 같은 이성을 가졌기 때문에 땅 위에 천국을 만들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게 된 것으로 이것이 바로 계몽주의 시작인 것이다. 곧 계몽주의는 이성이라는 빛으로 중세 천 년 동안 신도 만들어주지 못했던 자유, 평등, 박애가 넘치는 새로운 사회를 만들고자 한 것이다. 그리고 그 출발은 매우 성공적으로 나타났다. 1688년에 일어난 영국의 명예혁명과 1776년에 선포된 미국 버지니아 인권선언과 독립선언, 1789년에 일어난 프랑스 대혁명 등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우리가 이미 주지하고 있는 바와 같이 이와 같은 서구의 합리주의와 계몽주의 영향을 따라서 과학적 죽음관은 유물론적이며 자연주의적인 세계관에 기초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과학적 죽음관은 신이나 영혼을 인정하지 않으며, 오직 육체적으로 지금 이 땅에서 살고 있는 인간(육체)만 중요하게 다룬다는 것이 그 특징이다. 이러한 유물론적이며 자연주의적인 지식의 기초 위에서 인간의 과학적 죽음관을 주장하는 대표적인 사람이 현재 예일대의 교수로 있으며 (2013)를 쓴 셸리 케이건이다. 죽음에 대한 접근법에서부터 그 동안의 방법과 다르게 논리와 이성으로 접근하여 설명을 하는 케이건의 죽음 이해는 이원론과 일원론으로 나누고 있는 것 같으나 결국에는 일원론을 주장한다. 이 책의 핵심 주제는, 신(新)기계론적 인간관 및 세계관에 입각한 죽음 이해를 전개하고 있다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신기계론에 영향을 받은 철학적 사고를 통해 인간을 철두철미하게 기계로 간주하고 있다. 곧 이 책은 인간은 우주의 한 부분에 불과한 존재이며, 우주에는 물질이라는 하나의 실재만 있기 때문에 인간도 하나의 물질에 불과할 뿐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최윤배는 “그는 일원론을 다시 물리주의(physicalism)와 유심론(idealism)으로 나누었다. 그러나 그가 주장하는 일원론은 영혼 없는 육체나 또는 육체 없는 영혼을 가졌다고 주장하지만 결국에는 신기계론적 사상을 따라서 인간은 영혼이 없는 육체만의 존재라는 것을 더욱 강조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고 말한다. 과학주의에서 주장하는 인간의 죽음에 대한 이해에 대해서 김균진은 “결국 인간에 대한 이해, 곧 인간관에 의존하는 것이다. 인간을 어떻게 이해하는가에 따라 죽음에 대한 이해가 결정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케이건은 인간에 대해 영어 단어에 기계를 의미하는 ‘machine’을 사용하는데, 정확하게는 “인간은 자유의지를 지닌, 곧 단지 로봇보다는 좀 더 나은 기계에 불과한 존재로 설명한다. 본래 기계와 자유의지는 양립할 수 없는 개념이지만, 인간은 어떤 계기를 통해 자유의지라는 놀라운 능력을 지니게 된 기계”라는 것이다. 이러한 케이건이 이해하는 죽음의 본질과 철학적 배경의 핵심 내용에 대해서 곽혜원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인간을 기계로 바라보는 케이건은 죽음을 점점 낡아져 부품을 교체하다가 결국 고장이 나서 아무 쓸모가 없어진 상태, 모든 기능이 마비되어 버린 상태, 그의 적나라한 표현대로 하자면 결국 컴퓨터가 고장이 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현상으로 인식한다.” 곧 케이건은 이렇게 주장한다. “인간의 육체는 살아서 움직이다가 파괴된다. 결국 이것이 죽음에 관한 전부다.” 그러므로 과학적 죽음 이해는 결국 인간의 인격과 개체성의 소멸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죽음을 신비로 보지 않고 과학으로 보는 것이 과학적 죽음 이해의 가장 큰 특징이다. 결국 이런 사상은 신의 존재마저도 부정하는 결과를 초해하는 것이다. 곧 케이건의 과학주의적인 죽음관에 의하면 신이란 결국 인간의 투사물에 불과할 뿐인 것이다. 아울러 케이건은 인류 최대의 미스터리이자 심오한 철학적 수수께끼로 남아 있는 질문, 곧 ‘사후의 삶은 존재하는가?’는 완전히 말도 안 되는 자기 모순적인 질문이며 착각에 불과한 질문이라고 강조하면서 대답은 ‘아니오’라고 분명하게 말한다. 다르게 표현하면 ‘죽음으로부터 살아남을 수 있는가? 죽고 나서 여전히 생존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도 역시 ‘아니오’라고 대답한다. 곧 죽은 다음에 살아간다는 것은 철저히 자기모순이므로 삶이 끝난 상태에서 삶이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처럼 그는 육체적 죽음 이후에 계속해서 남아 있는 영혼이라는 또 다른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이와 함께 악령의 존재도 인정하지 않는다. 이처럼 영혼과 사후의 삶, 부활을 부정하는 유물론적 죽음 이해를 일관되게 강조하면서 케이건은 죽음이 모든 것이 끝이라고 다음에 인용하는 여러 말을 통해서 확실하게 결론짓는다. "나는 죽음이 나의 진정한 종말이라고 생각한다. 죽음은 나의 끝이자 내 인격의 끝이다. 이는 지극히 단순한 사실이다. 죽음은 그야말로 모든 것의 끝이다”(케이건. p 245). “인간의 육체는 살아서 움직이다가 파괴된다. 결국 이것이 죽음에 관한 전부다”(케이건, 266). “내가 알고 있는 한 내 육체가 죽으면 그걸로 끝이다”(케이건, 294). “내가 죽으면 더 이상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케이건, 295).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케이건과 그의 저서가 지닌 치명적인 문제는 인간의 정신과 영혼을 부정하면서 인간의 정신적이고 영적인 가치 추구를 배격한다는 점이다. 특히 신계론적 생명 이해의 패러다임 속에서 여러 형태의 유전자 조작이 시도되는 사회 분위기가 형성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므로 인간을 기계로 바라보는 신기계론적 인간 이해가 일반인들의 의식 세계에 영향을 미치면 사람들은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잃어버려 영혼과 정신에 대해 무관심하게 되고, 결국 인간만이 지닌 고유한 영성을 상실함으로써 더욱더 물질적인 가치만 지향하는 존재가 될 것이다. 오늘날 배아 복제 및 줄기세포연구, 유전자 조작이 지지를 받는 배경은 신기계죽의적 인간관의 세력 확장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과학에 기반을 둔 세속적 죽음 이해의 관점에서 본다면 영혼이 없는 인간에게 구원의 길이란 전혀 없다고 할 수 있다. 기계와 같은 물리적인 육체만 갖고 있는 인간이 죽음 이후에는 기계가 폐기되듯이 모든 것이 다 폐기되고 남은 것은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죽음 이후에는 남는 것이 전혀 없는 상태, 곧 죽음은 존재의 소멸이기 때문에 구원이나 영생 그리고 부활과 같은 이야기를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과학적 죽음관을 따른다면 모든 인간들은 오직 이 땅에서만 과학과 물질의 혜택을 누리면서 각자의 삶을 성공적으로 살면 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과학주의적 인간 이해와 죽음 이해는 인간의 가치가 오직 물질적인 것에만 부여됨으로 인해서 인간의 정신적이고 영적인 가치 추구는 배격되고 결국에는 인간의 고유한 존엄성마저 파괴될 수 있는 위험이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케이건이 영혼의 존재와 사후의 삶, 부활 신앙을 부정함으로써 많은 그리스도인을 혼란스럽게 할 우려가 매우 크다고 할 것이다. 죽음에 대한 올바른 생각과 태도는 삶에 대해서도 올바른 생각과 태도를 형성하게 한다. 이처럼 죽음에 대한 생각과 태도는 삶에 대한 생각과 태도와 직결되므로 죽음에 대해 바른 이해가 형성되도록 교회와 목회자들이 사회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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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ll Dying(good life, good death) 15 - 죽음에 대한 다양한 관점 연구(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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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ll Dying(good life, good death) 14 - 죽음에 대한 다양한 관점 연구(4)
- Well Dying(good life, good death) 14 - 죽음에 대한 다양한 관점 연구(4) 1. 죽음에 대한 다학제적 관점 1.4. 법학적 관점 죽어 가는 사람이, 곧 죽음 앞에 홀로 선 고독한 당사자가 자신의 운명을 결정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을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병원에서 호스피스 사역과 많은 임종에 처한 환자들을 돌보면서 경험한 사실은 죽어가는 환자 본인이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 최종적 결정을 한다는 것이 그리 쉬운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마지막에 심폐소생술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 진통제는 얼마나 사용할 것인가? 가족들과 함께 있는 시간을 얼마나 가질 것인가? 등등 환자 본인이 결정할 수 없는 많은 문제들이 있다. 죽음에 처한 자신의 운명을 자신 결정 할 수 없다는 사실로 인해서 죽음 앞에 선 환자들은 더욱 고독하고 육체적 고통과 함께 정신적 고통까지 겪어야 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환자의 사망과 관련하여 그 전후의 전 과정에서 가족 간에 불화하는 일도 많고, 법학적으로도 많은 논란과 문제가 발생할 소지가 충분히 있는 것이다. 아울러 현대의 과학과 의료기술은 이전 시대에는 분명히 죽었을 사람들, 곧 자력으로 호흡을 할 수 없는 사람, 심한 뇌 손상을 입은 사람, 인공호흡기나 인공급식튜브의 도움으로 생명을 유지하는 사람, 장기와 조직의 이식, 그리고 그밖에 다양한 의술을 통해 사람들의 생명을 연장시켰다. 그러나 이이정의 말처럼 “이런 기술들은 인간의 삶은 연장시켰지만 때때로 죽음의 과정에서의 고통의 깊이나 그 정도를 증가시킨 부분이 분명히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어떤 사람에게는 이런 현대 의학과 기술을 이용한 생명의 연장이 정신적·육체적·사회적·경제적으로 더욱 큰 고통만 가중시키는 결과를 가져온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이런 의학과 과학의 발달은 질병 치료와 생명 연장이라는 긍정적인 측면과 함께 분명하게 환자의 의견이나 여러 형편을 고려하지 않은 가운데 단순히 생명 연장으로 이어짐으로 인해 발생하는 법적·도덕적 문제들을 안게 된 것이다. 그 문제에 대해서 죽음에 대해서 일찍부터 연구한 김균진은 “현대의 병원은 환자들에 대한 의무를 수행한다는 이유로 인해서 어쩔 수 없이 환자를 비인격화시키고, 임종에 임박해서도 개인들의 모든 특성과 의지를 무시하며 탈사회화 혹은 탈문화와의 과정에 복종시키는 경향을 가지는 것”이라고 말한다. 곧 현대 의학과 병원의 구조는 죽어가는 사람이 자신의 죽음과 관련된 의료적이며 법적인 어떤 결정을 스스로 할 수 없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병원에서 환자 치료를 위한 최선의 방법이라고는 하지만, 그 모든 과정을 통해서 일어나는 환자의 비인격화, 특히 임종의 과정에서의 비인격화에 대해서 김균진은 다음과 같은 것이 있음을 서술한다.: ①환자는 임종이 다가올수록 평소 자신이 살고 있던 삶의 환경에서 신체적으로 격리된다. ②환자는 평소에 관계를 맺고 있던 사람들과 사회적 관계에서 병실(중환자실 등)로 격리된다. ③환자는 사회적으로 어떤 지위와 위치에 있었든지 간에 임종이 다가올수록 의료진에 의해서 모든 행동과 신체적 활동이 사회적으로 격리된다. ④환자는 인격적으로 오직 임종이 다가온 환자로만 대접 받으며, 모든 인격적 대우를 포기하고 병원의 규칙과 모든 의료적 과정으로 격리 된다. 그리고 임종을 맞이하는 환자 한 사람과 관련된 이런 문제들은 임종에 직면한 환자에게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가족과 사회 공동체 전체의 문제가 될 수 있다. 가족들은 사랑하는 가족의 임종과 관련하여 병원과 의료진의 의사를 거의 따라야 하는 상황으로 내몰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한 사람의 임종과 관련된 현대의 문제는 결국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 전체와 관련된 문제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법학적으로 한 사람의 죽음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갖게 되고 정의를 내리게 된 것은 아무래도 장기 이식과 관련하여 뇌사에 대한 판정의 범위와 시기에 관한 문제가 가장 중요한 문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심장과 폐의 기능이 완전히 멈춘 상태, 그리하여 이미 몸의 많은 세포와 장기가 그 기능을 완전히 멈춘 상태를 죽음의 상태로 인정할 때에는 법률적으로 그렇게 많이 논란이 될 소지가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뇌사의 문제는 신원하가 신학자로서 지적하는 것처럼 “뇌기능은 정지 되었으나 심장이나 폐는 계속 뛰고 있고 다른 장기들도 살아서 활동하고 있는 상태가 지속될 수 있기 때문에 법률적으로 중요한 문제를 많이 포함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문제는 영적인 일을 담당하는 목회자들도 목회상담적 입장에서 좀 더 구체적으로 알고 있어야 할 의학적·법률적 상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1983년 ‘대학의학협회’에 구성된 ‘죽음의정의특별위원회’가 발표한 ‘죽음의정의및뇌사판정기준’을 통해 죽음을 심장 및 호흡 기능과 뇌반사의 불가역적 정지 또는 소실을 의미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후 대한의학협회의 ‘뇌사판정기준’을 더욱 많이 인정하여 1993년에 개정한 ‘뇌사판정기준’이 거의 그대로 장기 이식에 관한 법에서 받아들여졌다. 그리고 1999년에 장기 등 이식에 관한 법률이 제정됨에 따라 심장사와 함께 뇌사 상태를 법률적으로 죽음으로 인정하게 되었다. 뇌사를 검사하기 위해서는 하버드 의과대학의 특별위원회의 보고서에 기초한 하버드 기준이 가장 널리 사용되고 있으며, 대한의사협회(1998, 10)에서 그것을 그대로 인용하며 발표한 뇌사판정 기준은 다음과 같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빛 소리 접촉 윤리적으로 허용되는 한 가장 아픈 자극 등 외부 자극에 대한 무반응 ② 자발적 근육 운동의 부재, 자발적인 호흡의 부재(적어도 한 시간 동안), 인공호흡기를 사용하는 환자는 호흡기를 끈 후 적어도 3분 동안 스스로 호흡할 수 없어야 한다. ③ 빛에 대한 눈동자의 수축의 부재, 눈 깜짝임의 부재, 귓속에 얼음물을 부었을 때 눈의 움직임의 부재, 가볍게 두드렸을 때 근육수축의 부재, 하품이나 말을 할 수 없는 등 뇌 반사와 척추 반사를 포함한 모든 반사의 부재. ④ 적어도 10분 이상 평탄한 뇌파 ⑤ 위의 모든 항목을 24시간 후에 반복 검사해도 같은 결과를 나타낼 것 ⑥ 환자가 저체온증(32.2이하)이 아니고 중추신경계에 영향을 미치는 진정제의 영향하에 있지 않을 것 등이다. 그리고 현재 우리나라에서 법적으로 인정하는 죽음의 확증의 기준 및 확인의 기준은 6세 이상인 자에 대한 뇌사 판정 기준인 「장기이식등에관한법률」의 별표 뇌사판정기준(제16조 제2항 관련)에 따르고 있다. 그 내용과 절차 등은 다음과 같다. ① 선행조건: 원인질환이 확실하고 치료 가능성이 없는 기질적인 뇌병변이 있고, 깊은 혼수상태로서 자발적인 호흡이 없고 인공호흡기로 호흡이 유지되며, 약물 중독(마취제, 수면제, 근육이완제 등에 의한 중독)이나 대사성 또는 내분비성 장애(간성혼수, 요독성 혼수, 저혈당성 뇌증) 등의 가능성이 없어야 하며, 저체온이나 쇼크 상태가 아니어야 한다. ② 뇌사 판정 기준과 판정 절차: 이것은 모두 현대 의학의 발달에 의해 이루어진 것으로 현대 의학적으로 「장기 등 이식에 관한 법률」에 따라서 다음과 같은 증상이 있을 때에 뇌사로 인정을 한다. “외부 자극에 전혀 반응이 없는 깊은 혼수상태, 자발적 호흡이 되살아날 수 없는 상태까지 소실된 상태, 두 눈의 동공이 확대되어 고정되었으며, 뇌간반사가 완전히 소실되어 있는 상태, 자발적 운동 현상이나 경련 등이 나타나지 않는 상태, 무호흡검사 결과 자발 호흡이 유발되지 않으며 자발 호흡이 되살아날 수 없다고 판단된 상태, 이런 모든 판정 결과를 6시간 후에 재인확인 하여도 그 결과가 동일할 때, 재확인 후 뇌파건사를 실시하여 평탄 뇌파가 30분 이상 지속될 때, 그리고 마지막으로 기타 필요하다고 인정되는 대통령령이 정하는 검사에 적합할 때이다.”(장기이식에 관한 법률 뇌사판정기준, 제16조 2항). 이상과 같은 의학적 판단이 이루어졌을 때에 전문 의사 2명 이상과 비 의료인 1명 이상을 포함한 뇌사판정위원회의 과반수의 출석과 출석위원 전원의 찬성으로 뇌사 판정이 확정된다. 그러나 법률적으로 아직 우리나라에서는 뇌사가 죽음으로 완전히 인정된 것은 아니다. 장기 기증자에 한해서 뇌사가 죽음으로 인정된 것일 뿐이며, 뇌사자라 할지라도 장기 기증을 하지 않으면 심장이 완전히 멈출 때까지 인공호흡기를 임의로 떼면 불법이 된다. 우리나라에서는 신원하의 말처럼 “아직까지 뇌사를 장기 이식을 위한 의학적 목적을 제외하고 형법에서는 살인죄의 적용 여부, 민법상 권리 능력 상실 시기의 기점, 부검과 장례 등의 시점과 관련하여 일관되게 심장사를 죽음으로 인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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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ll Dying(good life, good death) 14 - 죽음에 대한 다양한 관점 연구(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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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ll Dying(good life, good death) 13- 죽음에 대한 다양한 관점 연구(3)
- Well Dying(good life, good death) 13- 죽음에 대한 다양한 관점 연구(3) 1. 죽음에 대한 다학제적 관점 1.3. 의학적 관점 현대는 말 그대로 첨단과학과 첨단의학이 사람들의 삶에 큰 영향을 끼치는 시대라고 할 수 있으며, 이와 같은 의학의 발달은 죽음에 대해서 많은 새로운 경험과 이해의 측면에 변화를 가져왔다. 곧 질병 치료의 현저한 진전이 있는 오늘날, 죽음은 통제될 수 있는 것만이 아니라 정복될 수 있고 지배될 뿐만 아니라 제거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현대 의학적 관점에서 본다면 죽음에 대해서 종교적인 관점에서 설명은 피상적이고 비과학적인 것으로 간주되어 그렇게 설명할 필요나 도움을 받을 필요가 없어졌다고 보게 되는 것이다. 더 나아가 죽음의 과학 기술과 의학의 실패로까지 받아들여지는 상황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죽음에 대한 의학적 관점은 무엇인가? 일반적으로 의학에서는 죽음을 생물학적 사건으로 이해하며, 이는 비인격적이고 기술적인 문제로 인식한다고 이야기 할 수 있다. 황기석이 자신의 책 <의학윤리>에서 정의하는 의학의 죽음은 다음과 같다. “의학에서는 생체액 유동 기능의 불가역적 정지(심장과 폐혈관의 기능 정지), 육체로부터 영혼의 불가역적 이탈(호흡 기능의 정지), 신체적 통합 능력의 불가역적 정지(뇌 기능의 정지), 사회적 상호작용 능력의 불가역적 정지(뇌피질사) 등이 나타날 때 한 생물체를 죽었다고 간주한다.” 그러므로 현대는 의학의 발달과 함께 죽음의 의미와 가치의 궁극적 문제는 다루지 않고 객관적이고 가치중립적인 과학적 탐구에 더욱 매진하게 된 것이다. 곧 과학을 믿고 따르는 의사들은 기계화된 기술을 통한 간접적인 대화를 더 가치 있고 정확한 것으로 간주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은 주지하는 바와 같이 인공호흡기를 비롯한 생명체의 호흡을 인공적으로 유지시켜 줄 수 있는 기계 장치들이 개발되었다. 더 나아가서 장기 이식 수술을 비롯한 이전에는 생각도 할 수 없었던 첨단 치료법이 개발되어서 한 생명체의 죽음을 정의하는 의학적 기준에도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곧 의학적으로 이전에 행하던 것처럼 단순히 심장이 정지하고 호흡을 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른 것이 사망 판단의 기준으로서 가치가 떨어지게 된 것이다. 이제는 보건복지부와 국립암센터(2009)에서 공통적으로 말하는 것처럼 “이런 의학적 발전을 따라서 뇌 기능의 영구적 정지를 인간 죽음의 최종적 판단 기준으로 보는 뇌사설을 주장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현대 사회에 첨예한 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안락사문제, 장기이식 문제, 인간답게 죽을 권리의 문제, 장기 복제나 생명체 복제의 문제들이 사회적 쟁점으로 부가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지금 의학계, 법률계, 그리고 종교계를 중심으로 인간의 죽음에 대한 정의에 대해서 많은 부분에서 첨예한 대립과 함께 많은 논의가 진행 중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의사로서 특히 호스피스 말기 암 환자를 돌보며 의료의 한계와 범위 그리고 역할에 대해서 많은 고민을 하는 윤영호는 의학적 관점의 죽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의견을 덧붙인다. "의학적 죽음은 그 판정 기준과 판정 시기가 문제가 될 수 있는 많은 과제들을 안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 이 문제에 대해서는 의학적, 법률적, 종교적으로 더 많은 논의와 연구가 필요한 분야하고 할 수 있다. 곧 생사를 가르는 결정을 하게 되는 의사들은 윤리의식을 일반인들보다 더 올바르게 나타내야 한다. 특히 죽음과 관련된 의료 현장에서 죽음에 대한 판단을 위해서는 의료윤리의 기본적인 개념을 이해하고 이를 실제적으로 적용할 수 있어야 한다." 무엇보다도 목회자는 목회적 입장에서 의학적 치료와 도움을 받는 것에 대해서 지켜주어야 할 경계선에 대해서 분명한 가치관을 갖고 있어야 한다. 인간의 생명은 단지 분자들의 집합이며, 진화의 과정에서 나타난 우연한 산물은 아니기 때문이다. 곧 목회자들은 우리 인간의 삶을 지켜주어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의학적인 부분에 대해서 모든 부분을 찬성할 수도 없는 입장에 있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죽음의 문제에 직면해 있는 사람들에게 죽음으로 인해 단절되지 않으며 파괴될 수 없는 생명에 대한 절대적인 가치를 발견하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곧 목회자들의 수고와 연구를 통해서 죽음에 대한 의학적 인식의 재구성과 재해석을 통해서 기독교 생명 윤리에 입각한 가치관 정립이 목회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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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ll Dying(good life, good death) 13- 죽음에 대한 다양한 관점 연구(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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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ll Dying(good life, good death) 12 --- 죽음에 대한 다양한 관점 연구(2)
- Well Dying(good life, good death) 12 - 죽음에 대한 다양한 관점 연구(2) 1. 죽음에 대한 다학제적 관점 1.2. 심리학적 관점 심리학이 현대인들에게 미치고 있는 영향력에 대해서 박노권은 브라우닝(Browning)의 말을 인용하여 “리프(Philip Rieff)는 프로이드의 심리학적 인간과 칼빈의 종교적 인간 사이의 싸움에서 프로이드가 승리했다고 말하면서 현대 사회의 사람들은 더 이상 종교적 상징에 의해서가 아니라 심리학적 이미지를 갖고서 세상을 구성하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이처럼 현대인들에게 심리학은 성경보다 더 인간의 삶에 도움을 주는 지식으로 인식되고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심리학적 죽음 이해에 대해서 알아보는 것은 현대인들이 가진 죽음에 대한 인식을 이해하기 위해서 매우 중요한 요소라고 할 것이다. 심리학적 죽음 이해는 자신의 인생을 수용하고 죽음을 두려움 없이 직면하여 자아 통합을 이루고 죽음 불안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하는 데 초점이 있다고 정의하면서 이이정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한다. "1950년대까지 죽음은 심리학을 비롯한 거의 모든 분야의 연구로부터 배제 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 이유는 그 이전까지는 행동에 대한 실험적이고 객관적인 연구와 논리적 실증 철학이 심리학의 과학적인 연구들을 주도해 왔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실은 1950년대를 전후로 파이펠을 중심으로 변화되었다. 파이펠을 중심으로 한 일련의 학자들은 죽음이 단순한 생물학적 사건이 아닌 심리적 사회적 측면을 가진다는 점에 주목하였고, 철학·생리학·의학·정신의학· 정신분석·종교·문학 등의 지식을 심리학에 도입하여 다양한 각도에서 죽음을 연구하는 경향을 낳게 되었다. 곧 심리학 분야에서는 죽음을 현재를 살아가는 인간의 삶에 대한 중대한 위협, 위기상황, 스트레스의 원천으로 간주하고 이에 어떻게 적응하고 대처하는가를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다." 이러한 심리학적 죽음의 이해 연구를 위해서 대표적인 심리학자 몇 사람의 주장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심리학적 죽음 이해의 시작으로 프로이트(S. Freud)의 이론을 소개한 김대동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프로이트는 인간의 본능을 리비도(Libido) 라고 부르는 삶의 본능과 싸나토스(Thanatos)라고 하는 죽음의 본능으로 보았다. 그리고 프로이트는 죽음을 최종적인 것이며 유기체의 완전한 소멸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봤다.” 곧 프로이드는 죽음을 도덕적이고 종교적이고 철학적인 문제에서 과학적 탐구의 대상으로 변화시켰고, 생물학적이고 심리학적인 실재로서 죽음을 묘사한 것이다. 아울러 프로이드의 죽음에 대한 이론에 대해서 김선숙은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프로이트는 죽음의 본능을 삶의 본능보다 더 근원적인 것으로 보았으며, 인간의 죽음은 최종적인 것이며, 모든 유기체의 완전한 소멸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곧 인간의 삶의 원초로부터 이미 죽음이라는 것이 어떤 통일된 방식으로 존재하고 있어서 삶의 존재를 무생물의 상태로 충동질하여 끌고 가기 때문에 결국 죽음에 이른다는 의미에서 죽음을 삶의 목적이 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처럼 프로이드는 인간의 삶은 두 본능 사이의 투쟁인데 삶의 원초로부터 이미 죽음이라는 것이 어떤 통일된 방식으로 존재하고 있어 결국 죽음에 이른다고 본 것이다." 그래서 배형기는 “프로이트에 의하면 인간의 생명의 역사란 죽음을 향해서 진행되는 역사가 되고 마는 것이며, 결국은 모든 것이 원점으로 돌아가고 만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프로이트에 따르면 죽음이란 최종적인 것이며 해당하는 유기체의 완전한 소멸을 의미하는 것이 되고 마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곧 프로이트는 죽음은 무기체적인 생명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보며, 기독교에서 말하는 죽음 이후 천국에서 주어지는 삶의 보상에 대한 환상은 가치 없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프로이트가 불신앙과 무종교로 돌아가서 기독교의 권위를 없애려고 했지만, 프로이트의 후학이었던 융(Jung)은 신앙에 대해 관심을 갖고 “인간의 출생이 의미가 있듯이 죽음도 분명한 의미가 있다”고 보았다. 자기실현이 이루어지면 그것이 바로 자신의 죽음으로서 죽음은 자기실현을 의미한다고 하였다. 융의 죽음에 대한 주장에 대해서 조계화외 2인은 “융에 의하면 인간의 삶은 어떤 궁극적 목적을 향한 준비로써 보통 인간은 인생의 상승기를 거쳐 정상에 이르면 거기에 멈추어 서게 되고, 그렇게 하여 자기실현이 이루어지면 그것이 바로 죽음이며, 따라서 죽음은 결국 한 사람의 자기실현을 의미한다는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그렇지만 융은 결국 프로이트가 했던 것처럼 죽음을 도덕적 중립적인 것으로 취급하려고 시도했으며, 결국 죽음은 순수하게 과학적이고 가치중립적인 경험으로 환원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죽음학의 의미와 가치에 있어서 더욱 현대적 의미로 심리학화 하는데 큰 기여를 한 사람은 유명한 정신분석학자 퀴블러-로스(Kübler-Ross. E)이다. 그녀는 “인간을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존재로 이해하면서 죽음을 완성을 향한 하나의 과정이라고 주장하며 개인의 성취를 증대시키기 위해서 죽음을 수용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고 말한다. 곧 그는 죽음이란 삶의 최종적인 것이며, 완성의 순간으로 들어가는 변화의 과정이기 때문에 죽음은 두려워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아름다운 체험이 될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좀 더 그가 말하는 죽음에 대해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죽음은 아기가 태어나는 것처럼, 인간의 존재, 성장과 발달의 자연스러운 한 부분이다. 우리는 죽음을 슬프거나 놀랄만한 일로, 또 병적이거나 두렵거나 참극이거나 파괴적인 것으로 볼 필요가 없다. 그러므로 죽음은 의학에서 말하듯이 정복되어야 할 적이 아니라 우리의 삶의 여행길을 함께 하는 친구이다.” 그리고 의미요법의 창시자 빅터 프랭클은 “죽음은 인간 존재에게 의미를 부여한다”고 말한다. 인간은 스스로 유한성을 인정하고 언제나 의식적으로 죽음이 온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하며, 죽음에 대한 회피는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프랭클은 인간은 불멸하는 존재가 아닌 유한한 존재이기 때문에 지금 우리가 살아가면서 행하는 모든 것들은 특별한 의미를 지니는 것이라는 것을 강조하면서 인생에서 의미를 갖는 것의 중요함을 주장하는 것이다. 이처럼 심리학적 관점에서 죽음의 이해는 인간이 죽음을 어떻게 보고 이해하고 받아들이는가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주제로 다루어지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인간이 처음과 끝이 있는 인간으로서 갖는 근본적 유한성을 깨닫고 죽음에 대한 회피가 아니라, 인간은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더욱 오늘이라고 하는 현실이 가치 있는 것을 알고 살아가야 하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죽음은 생물학적, 심리학적 소멸을 가져오는 것이지만, 그러나 삶은 그런 소멸보다 앞서는 것이므로 오늘 우리 인간에게 주어진 삶을 역사와 문화와 인간관계 등과 연계하여 더욱 잘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할 때에 죽음은 결코 우리 인간의 적으로만 인식 될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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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ll Dying(good life, good death) 12 --- 죽음에 대한 다양한 관점 연구(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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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ll Dying(good life, good death) 11 - 죽음에 대한 다양한 관점 연구
- Well Dying(good life, good death) 11 - 죽음에 대한 다양한 관점 연구 붉은 단풍이 한창이던 11월 중순부터 가을을 타는지, 울적한 마음에 한 동안 쉬었던 Well Dying(good life, good death)에 대한 글을 다시 시작한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12월에는 우리 인간의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치고 있는 철학, 심리학, 그리고 각 종교의 죽음에 대한 관점을 살펴보려고 한다. 그리고 죽음에 대한 성경적 관점을 알아보고, 다음으로 나의 신학적 배경에 근거하여 성경적 관점에서 죽음에 대한 정의를 소개하고자 한다. 역사 이래 사람들은 어떻게든지 죽음을 극복해 보려고 노력하고 있으며, 그 일차적인 모습이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성경 히브리서에서 말씀하는 것처럼 사람에게 한 번 죽은 것은 정한 이치이다. 곧 삶과 마찬가지로 죽음은 인간의 삶을 구성하는 필수 단계이다. 그러므로 단순히 죽음을 부정하고 인간의 힘으로 극복하려고만 할 것이 아니라, 죽음에 대한 분명한 인식과 믿음을 통해서 죽음으로 인한 불안을 떨쳐버리고 영원에 대한 분명한 소망으로 죽음에 응전해야 할 것이다. 모든 인간은 필연적으로 죽음과 대면해야 할 존재이므로 보다 나은 삶을 위해서는 마음속에 죽음에 대한 준비 및 생사관을 정립해야 할 필요가 있다. 생사관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요시노리는 "우주나 생명 전체의 큰 흐름 속에서 자신의 삶과 죽음이 어떤 위치에 있고 또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가에 대한 이해나 생각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죽음에 중점을 두고 현재의 삶의 방식을 생각해 보는 철학적 관점"이라고 이야기 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실제 죽음을 받아들이고 죽어가는 과정에서 각자가 가진 인생관과 죽음관에 따라서 다른 방식으로 죽음을 맞이한다. 그러므로 인간의 삶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며 아주 다양한 영향을 미치는 죽음의 문제는 철학·심리학·의학·종교 등 다양한 학문 분야에서 관심을 갖고 다루고 있는 주제이며, 각 학문 분야의 체계 내에서 고유한 관점에 따라 정의되고 있다. 1. 죽음에 대한 다학제적 관점 인간의 삶에 다양한 의미를 갖고 복잡한 영향을 미치는 죽음의 문제는 철학, 심리학, 종교학, 의학 등 인간의 문제를 다루는 각 학문 분야에서 관심을 갖고 다루는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그리고 각 학문 분야에서 다루는 죽음이 특징에 대해 이이정은 “각 학문 체계 내에서 통용되는 독특한 사고 유형과 접근 방식에 따라 각각 정의되며, 아울러 해석도 각각 다르게 나타난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우리 목회자들이 교회 내에서 죽음에 대한 사역을 위해서 꼭 알고 있으면 매우 유용하게 사용 할 수 있는 철학, 심리학, 그리고 의학 분야에서 죽음을 바라보는 관점에 대한 소개를 하고자 한다. 1.1. 철학적 관점 철학적 관점에서 바라본 죽음은 곧 현재의 삶을 향해서 삶과 죽음의 의미를 질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고대로부터 죽음은 철학자들의 주요한 주제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 누구도 죽음에 대한 명쾌한 정의를 내리고, 사람들에게 분명한 대답을 제시하지는 못했다는 한계를 갖고 있다. 이런 현상에 대해서 정달용은 “오히려 의학에서 죽음을 부정하는 것과 같이 철학과 형이상학에서도 이 죽음의 문제를 주제화 하는 것을 소홀히 하거나 회피해 온 것이 사실이다”라고 이야기한다. 그렇지만 우리가 주지하는 바와 같이 서양 철학에 있어서 인간의 죽음의 문제는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철학의 주요 주제로 논의 되어 왔다. 중요한 것만 간략하게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쾌락주의’라고 알려진 고대 헬라의 에피쿠로스학파의 죽음관에 대해서 정달용은 “죽음은 모든 것의 끝이고 감각도 고통도 없으며 영혼의 원자도 모두 분해되기 때문에 이후의 세계를 무라고 단정한다. 그래서 죽음은 우리가 생존하는 한 우리와 함께 하지 않고, 죽음이 우리에게 다가오는 순간 우리는 이미 존재하지 않는다”고 정의한다. 아울러 강동효는 “에피쿠로스학파에서는 영혼에 대한 형이상학적 사변을 버리고 오직 현재의 삶에만 충실할 것을 당부하면서 죽음을 문제로 삼는 것조차 회피하고자 했다”고 말한다. 둘째, 소크라테스나 플라톤과 같은 고전 형이상학파들은 물질 혹은 신체와 대비되는 영혼, 혹은 물질과 대비되는 정신이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그들은 죽음 후에도 우리 인간의 정신은 다른 형태의 삶이 계속된다는 불멸성의 개념을 주장하였다. 곧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죽음관에 대해서 김귀룡은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소크라테스에게 있어서 죽음이란 육신의 속박과 고통으로부터 정신의 해방과 치유로 보았고, 플라톤은 죽음을 영혼이 신체로부터 불사의 세계로 옮겨가는 일이라고 보았다.” 곧 고전 형이상학파에서는 인간을 정신적 존재로 규정하고 영혼은 육체와 달리 영원하다는 불멸성을 강조하였으며, 당연한 귀결로서 죽음은 그리 대수롭지 않은 문제로 취급하였다. 이와 같은 고전형이상학파의 죽음과은 소크라테스의 죽음에서 확연히 드러났다고 할 수 있다. 셋째, 중세 시대에는 대표적으로 어거스틴과 아퀴나스 등이 기독교적 관점에서 죽음에 대해 성찰하였다. 중세철학의 특징에 대해서 김정우는 영혼이 신과 인간을 이어 주는 중간 매개체가 되고, 이 세상의 육체적 삶이 끝난 후에도 영혼은 지속된다고 믿었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한다. “중세시대에 죽음은 이 세상에서는 불가능한 다른 존재로의 비약과 영생을 가능하게 하는 것으로 두렵기보다는 긍정적인 것으로 간주되었고, 죽음을 준비하는 삶이 바람직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넷째, 근대에 들어 유신론적 세계관이 붕괴되면서 감각적으로 확인되지 않거나, 이성적이고 논리적으로 납득되지 않는 세계를 거부하는 경향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김열규는 “근대철학부터는 내세나 초월계 보다는 자신의 현실적 삶이나 내면적 확신에 바탕을 둔 철학적 작업을 중시하게 되었다. 그리고 동시에 죽음을 철학적 문제에서 배제하려는 경향을 보이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이처럼 근대철학에서는 경험적으로 입증될 수 없는 모든 것은 무의미한 것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죽음은 육체적 영역에 한정되는 생물체의 생물학적 종말이라는 개념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근대철학에서 죽음의 문제를 철학적 관심의 영역에서 배제하고자 하는 이유는 죽음, 특히 ‘나의 죽음’이 검증 가능한 경험의 대상이 되지 못하는데 있다. 우리가 경험하는 것은 다른 사람의 죽음의 외적인 현상, 밖으로부터 이루어진 간접적인 경험일 뿐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외적이고 간접적인 경험은 확실성과 논리의 필연성을 기반으로 하는 철학적 지식의 원천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다섯째, 19세기 실존 철학과 실존주의의 등장과 더불어 죽음의 문제는 다시 철학적 관심의 전면에 등장하게 되었다. 특히 제1,2차 세계 대전을 전후한 암울했던 시대적 상황은 삶의 의미와 더불어 죽음의 문제를 부각시키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전쟁과 급속한 변화의 시대에 살았던 실존주의 철학의 죽음관의 특징에 대해서 최재락은 “실존주의 철학자들은 인간 이해에 있어서 의미있고 중요한 것을 발견 했는데, 한 개인의 삶은 특별한 것이며 따라서 개인의 죽음도 특수하다는 것이다. 곧 죽음은 모든 인간이 죽는다는 점에서는 보편적인 사건이지만, 한 개인이 경험하는 죽음은 특수한 사건인 것이다”라고 말한다. 곧 인간에게 중요한 것은 관찰 가능한 객관적 사실로서의 죽음의 의미가 아니라 삶의 종말로서 죽음이 개인의 현실적인 삶에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가에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진홍은 “실존주의 철학자들은 인간이란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 충분히 관심을 갖지 않으면 자신의 삶을 제대로 살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즉 실존적으로 볼 때 삶과 죽음 사이에는 큰 괴리가 없다는 것”이라고 말한다. 아울러 실존주의에서는 사람들이 추구해야 할 죽음에 대한 철학적 관심의 대상은 외부로부터 관찰되는 죽음이 아니라, 우리가 자신의 죽음과 맺게 되는 관계와 그 관계가 우리의 삶에 미치는 영향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정달용은 “실존주의에서 죽음은 우리가 도달할 종착역이 아니라 우리가 실존으로서의 자기를 자각하는 적극적 계기로서의 의미를 갖게 되므로 인간은 신의 존재와 내세의 존재를 가정하지 않더라도 죽음을 직시함으로써 삶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실존주의를 대표하는 철학자 하이데거는 인간 존재 자체가 죽음을 향한 존재로 보았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상에서 살펴 본 것처럼 철학에서는 죽음을 죽음이 가져다 주는 정서적 불안과 공포를 합리적인 사고를 통해 극복하려는 입장에서 죽음을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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