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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토크383】 전 법관의 ‘왜 책을 읽어야 하는가?’
    나의 일상을 풍요롭게 채우는 건 어떤 의미인가, 다른 사람의 삶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가, 사람과 사회는 바뀔 수 있는가. 자작나무에서 지리산으로, 도스토옙스키에서 몽테스키외로, 일상에서 재판까지. 호의는 사람을, 세상을 어떻게 바꾸는가. 받은 것을 사회에 되돌려주라던 김장하 선생과의 추억, 법을 몰라 손해 보는 이들을 헤아리는 마음, ‘자살’을 시도했던 재소자가 ‘살자’는 다짐을 하게 만든 선물, 사랑하는 이를 그리워하며 속절없이 흘리는 눈물, 그리고 건강한 법원과 사회를 향한 진심 어린 조언…교보문고 계엄을 도모했던 윤석열을 단죄한 문형배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이 쓴 책으로 가볍게 읽을만하다. 착한 사람을 위한 법 2001. 4. 22. 법 없이 살 사람 착한 사람을 일컬어 '법 없이 살 사람'이라고들 한다. 법의 강제 없이도 타인에게 폐를 끼치지 않을 사람이란 뜻이리라. 과연 착한 사람에게 법은 필요 없는 것일까? 법 없이 살 수 없는 사람 나는 법이 어떠하다고 정의할 만큼 경력도 풍부하지도 않고 타고난 재주도 없지만, 1983년 법학을 전공한 이래 지금까지 18년을 법과 함께 살아온 경험에 비추어 (그런 점에서 나는 법 없이 살 수 없는 사람이다) 착한 사람일수록 법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p. 19). 종종 초등학교 동창 모임에 나가곤 하는데, 거기서 늘 하는 말이 있다. "사건이 터지고 나서 나에게 힘써달라고 전화해봐야 아무 소용 없다. 사건이 터지기 전에 나에게 법을 물어보라." 도대체, 전 재산과 다름없는 300만 원을 전세금으로 걸면서 그 집이 경매 중인 사실도 확인하지 않고 계약하는 사람을 누가 구제해줄 수 있겠는가? 그런 사람들은 대개 사건이 터지고 난 뒤에야, 집주인을 사기죄로 고소했으니 수사 기관에 힘 좀 써서 집주인을 즉시 구속시켜 달라고 법조인에게 전화를 한다. 법에는 두 가지 기능이 있다. 하나는 보장적 기능이다. 일정한 행위를 금지하고 거기에 저촉되지 않으면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게 해주는 측면이다. 여기서 '법 없이 살 사람'이 빛을 발한다. 다른 하나는 보호적 기능이다. 그러나 법의 이러한 보호적 기능도 경매 절차에서 배당 요구를 하는 임차인이나 노동자에게만 위력을 발휘한다는 사실에 유의하여야 한다. 여기서 '법 없이 살 사람'은 초라하기만 하다. 착한 사람부터 법을 알자 판사로서 사건을 처리하다 보면 '착한 사람은 법을 모르(p. 20)고, 법을 아는 사람은 착하지 않은 경우'를 종종 본다. 그런 사건일수록 해결이 어렵고, 착한 사람을 보호하고자 궁리를 해보나 한계가 있게 마련이다. 착한 사람에게 적용되는 법 따로 있고 착하지 않은 사람에게 적용되는 법 따로 있을 수는 없으니까. 그렇다면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하여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법을 아는 사람에게 착하기를 요구할 것 인가? 불가능은 아니나 어려운 과정을 거쳐야 할 것이다. 남는 방법은 착한 사람이 법을 아는 것이다. 그 길만이 법이 나쁜 사람을 지켜주는 도구 역할을 하지 못하게 하는 지름길이다(p. 21). 형사 재판 잘 받는 방법들 중 2006. 12. 19. 진술 거부권 행사 자기에게 불이익한 사실에 대하여 진술을 거부하는 것은 헌법 및 형사 소송법에서 보장된 피고인 및 피의자의 권리입니다. 따라서 법정에서 판사로부터 불이익한 사항에 대하여 질문을 받을 때 진술을 거부하면 되겠습니다. 괘씸죄가 걱정된다면 기억이 나지 않는다거나 잘 모르겠다고 대답하면 되겠습니다. 이것이 모순되거나 불합리한 답변을 하는 것보다 유리합니다. 답변 방식 법정에서 판사의 질문에 대하여 답변을 할 때는 결론을(p. 45) 먼저 말하고 이유를 나중에 설명하는 것이 효과적인 경우가 많습니다. 판사는 질문을 통하여 사건의 윤곽을 파악 하려고 하므로, 판사에게 결론을 먼저 말함으로써 판사가 설명이 더 필요한 부분인가를 쉽게 판단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좋습니다. 판사는 여러 각도에서 사건을 살피기 위하여 다양한 질문을 하는 것이므로, 설령 질문이 자신에게 불리한 내용 일지라도, 판사가 상대방의 편을 든다고 섣불리 생각하지 말고 정중하게 답변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한 과정을 통하여 판사는 피고인의 진심을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p. 46). 민사 재판 잘 받는 법 2007. 5. 17. 오늘 재판을 하면서 느낀 점을 토대로 민사 재판 잘 받는 방법을 적어보았습니다. 변호사를 선임하는 것이 유리합니다 소송을 하려면 어려운 일이 많으므로 형편이 허락한다면 변호사를 선임하는 것이 좋습니다. 변호사를 선임하였다고 해서 변호사에게 모든 것을 맡길 것이 아니라 수시로 소송 진행 정도를 확인하고 대응 방안을 함께 의논하는 것이 중요합니다(p. 61). 준비 서면을 간단명료하게 작성하는 것이 좋습니다. 변호사를 선임하지 못할 경우 법무사의 도움을 받거나 본인이 직접 준비 서면을 작성해야 할 터인데, 이때 주의할 점은 다음과 같습니다. 준비 서면이라는 것은 당사자의 주장에 불과하므로 아무리 유리한 내용을 적어놓더라도 증거가 없으면 인정받기가 어려운 반면, 불리한 내용은 별도의 증거가 없더라도 본인에게 불리하게 작용합니다. 따라서 준비 서면은 간단하게 작성하는 것이 좋습니다. 증거가 뒷받침되는 내용일 경우 명료하게 주장을 펼치는 것이 좋습니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준비 서면에 상대방을 비난하는 내용을 적을 경우 이익이 없을 뿐만 아니라 때로는 해롭다는 것입니다. 재판이라는 것이 당사자의 도덕성에 대한 심판이 아니라는 점에서 그렇고, 뚜렷한 증거 없이 상대 방을 비난할 때 판사에게 좋은 인상을 주기 어렵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준비 서면에 똑같은 내용을 되풀이하여 적어내는 것도 피해야 합니다. 재판부는 많은 사건을 처리하고 있으므로 그들의 노고를 덜어주는 것도 좋은 인상을 심어주는 방법이 될 수 있습니다(p. 62). 소송의 승패는 증거에 달려 있습니다 민사 소송에서 이기고 지는 것은 증거가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따라서 흥분할 필요 없이 차분하게 증거를 수집하여 제출하는 사람이 이길 수밖에 없습니다. 증거로는 애초 사건이 있었을 때 작성된 서류, 특히 상대방이 서명 또는 날인한 서류가 가장 효력이 강하고, 그 다음으로 제3자가 작성한 서류가 효력이 강합니다. 증인의 증언은 상황에 따라 다릅니다. 법정에서는 결론부터 먼저 이야기하는 것이 좋습니다 아직도 법정에서는 많은 사건을 처리하는 실정이므로 법정에서 판사로부터 질문을 받았을 때는 결론을 먼저 이야기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다음에 그 이유를 간단하게 설명하는 것이 좋습니다. 조정 또는 화해를 권유받았을 때는 존중하는 것이 좋습니다 재판을 하다 보면 어느 당사자의 주장이, 설득력은 있으나 증거로 뒷받침 되지 않는 경우가 제법 있습니다. 법적 관점으로만 해결할 경우 어느 당사자에게 더 가혹하기도(p. 63)합니다. 이길 승산이 있어 보이나 시간과 비용이 상당히 많이 드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럴 때 법원은 당사자에게 조정 또는 화해를 권고하는 데, 긍정적으로 검토해보는 것이 좋습니다. 특히 조정 또는 화해 절차에서는 집행에 관한 내용을 반영할 수도 있으므로 이러한 점에서도 조정 또는 화해의 효용은 높습니다. 증인 신문을 할 때는 불쾌한 감정을 드러내기보다는 허점을 짚어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법정에 출석한 증인을 상대로 질문을 할 경우 "거짓말쟁이다" "양심도 없느냐"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아무런 도움이 안 됩니다. 차분하게 증언의 허점을 짚어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려면 상대방이 질문하는 내용을 (미리 받을 수 있습니다) 검토하여 허점을 정리했다가 법정에서 질문 하는 것이 좋습니다. 바람 턱없이 부족한 내용일 것입니다. 이것저것 물어보고 소송을 잘해서 이길 사람이 이기는 재판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p. 64). 문제가 터지고 나서 소송을 잘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 은 문제가 터지기 전 검토를 충분히 하는 것입니다. 몇 천 만 원이 오고가는 계약을 체결할 때 변호사나 법을 잘 아는 사람에게 비용을 들여서라도 상담을 받아보는 것이 길게 볼 때 비용이 더 적게 듭니다(p. 65). 책을 읽는 이유 세 가지 2010. 2. 16. 책을 많이 읽는 이유가 뭐냐는 질문을 받는다. 무지를 극복하기 위해서다 지방에서 고등학교를 다닐 때까지 고전을 읽은 적이 없었다. 서울에 있는 대학교에 들어가 보니 문화 충격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사투리는 말을 안 하는 것으로 감출 수 있었지만 무지는 감출 방법이 없었다. '장 발장'이 《레미제라블》의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그때부터 닥치는 대로 읽었다(p. 108). 무경험을 극복하기 위해서다 판사가 되고 보니 사건을 이해하기엔 내 경험이 너무 좁고 얕다는 생각이 자주 들었다. 도대체 계약서도 작성하지 않고 거액의 거래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잡히면 처벌받을 게 뻔한 일을 왜 되풀이하는지, 궁금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래서 경험을 늘리려고 해보니 이 또한 걸리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당장 법관 윤리가 문제였다. 그래서 생각해본 것이 두 가지다. 지금은 언론사 사장이 된 어떤 분이 사법연수생이었던 나에게, 법조인이 되면 초등학교 동창생과 꾸준히 만나라고 당부했던 기억이 떠올라 초등학교 동창생을 만나기로 결심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18년 동안 1년에 몇 회는 초등학교 동창생을 (때로는 부부 동반으로) 만났으니 어느 정도는 실천한 셈이다. 두 번째가 책을 읽는 것이었다. 장르를 구분하지 말고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읽어보자 하였던 결심이 여기까지 나를 데려왔다. 무소신을 극복하기 위해서다 어릴 때부터 내성적이었다. 남녀 공학 중학교 시절 소풍(p. 109)을 가서 선생님의 권유에 노래를 불렀는데 가사를 까먹어 끝을 맺지 못할 정도로. 그때 불렀던 노래가 남진의 〈님과 함께〉였다. 고등학교 때는 교복이 중고라서 반장을 하지 못했다. 대학교 가서는 사투리 때문에 남 앞에 나서지 못했다. 이런저런 이유로 무슨 결정을 하려면 무척 어려웠다. 결정을 하고 나면 곧 후회를 하게 되고. 어느 날, 내성적인 이유가 소신이 없기 때문은 아닐까 생각했다. 군대에서 정훈장교를 하게 되었고 정훈장교 하는 일이 장병 교육이다 보니 남 앞에 서는 것에 대한 두려움도 어느 정도 해소된 뒤라서 그런 결론을 더욱 쉽게 내릴 수 있었다. 앞서간 사람들의 생각을 알고 그들의 생각과 내 생각을 서로 맞추어보는 과정을 통해 생각이 단단해져 소신을 갖출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사회 비판적인 내용을 포함해 많은 책을 읽게 되었다. 사족 "그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려면 그 사람이 누구와 만나고 무슨 책을 읽는지 말해달라." 책에서 읽은 기억이 난다(p. 110). 혼돈의 시기에 그나마 생존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 친구와 책 덕분이라 생각하니 이 글을 쓰는 감회가 남다르다. 모든 분들에게 책을 한번 읽어보시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다(p. 111). 책을 고르는 기준 2010.6.26. 책을 어떻게 고르냐는 질문을 종종 받는다. 저자를 보고 고른다 어떤 책을 읽고 감동을 받으면 그 저자가 쓴 책은 눈에 띄는 대로 사서 읽는 버릇이 있다. 예를 들면 고 장영희 교수의 《내 생애 단 한 번》을 읽고 《축복》 《살아온 기적 살아 갈 기적》 《문학의 숲을 거닐다》를 읽는 식이다. 여기에 해당하는 저자는 다음과 같다. 신영복 교수, 정 민 교수, 유시민 전 장관, 소설가 김 훈, 오지 탐험가 한비야,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 《열하일기》 전문가 고미숙 박사(p. 124). 주제어를 보고 고른다 제목이나 문장을 검색하여 관심 있는 주제어가 들어간 책을 고른다. 요즘 즐겨 찾는 주제어는 다음과 같다. 정의, 소통, 성찰, 역사, 철학, 인생, 여행, 행복. 이런 기준으로 고른 책은 다음과 같다. 《정의란 무엇인가》 《서양철학사》 《인도 여행》 《행복의 정복》 《무지개 원리》 《인생이란 무엇인가》 등등. 책 선택에 실패한 적은? 이런 기준으로 책을 골라 읽으면서 후회할 때가 제법 있다. 그러나 산 책은 다 읽는다. 재미가 없거나 이해가 되지 않는 책에 대하여는 독후감을 쓰지 않음으로써 복수를 한다. 블로그에 올린 책은 이중으로 검증을 거쳤다고 보면 된다. 지금껏 읽은 책은, 세어보지는 않았지만, 1천 권 정도 될 것 같다. 책을 고르는 장소는? 인터넷 서점에서 검색하여 고르는 경우가 많고 가끔 서점에 가서 고른다. 베스트셀러 항목과 새로 나온 책 항목을 많이 참조한다(p. 125). 블로그에 독후감을 쓰는 이유는? 독후감을 쓰다 보면 책 내용을 정리하는 효과가 있고, 글쓰기 훈련이 되며, 블로그에 저장해놓으면 다른 글을 쓸 때 인용하기 쉽기 때문이다. 나쁜 사람은 있어도 나쁜 책은 없다. 어떤 책에서도 스승 또는 반면교사를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여러분께 독서를 권한다. 책이 여러분을 끌어올려줄 것이다(p. 126). 왕후박나무 2011.4.1 남해군법원 다녀오는 길에 경남 남해군 창선면 왕후박 나무를 만났습니다. 500년 이상 되었다고 합니다. 둘레에는 동백나무가 꽃을 피우고 있었습니다. 후박나무는 녹나무과에 속합니다. 주로 방풍용으로 많이 심는다고 합니다. 남해군 창선면에 있는 왕후박나무는 천연기념물 제299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왕후박나무는 높이 솟구치지 않고 옆으로 퍼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람 부는 바닷가에서도 500년을 버틴 게 아닐까 생각해봤습니다. 그렇다면 이 나무는 알고 있는 것 같습니다. 자신을 낮추는 것이 자신을 높이는 가장 쉬운 방법이라는 것을 말입니다(p. 140). 조영남의 노래가 있죠. 〈겸손은 힘들어〉. 그렇죠. 겸손은 힘듭니다. 공자 이래 2천 년 동안 성현들은 겸손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겸손한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적습니다(p. 141). 조정에 임하는 자세 2013.4.28. 조정이란 조정은 법률 분쟁이 생겼을 때 판사의 판결이 아니라 당사자 간 타협을 통하여 분쟁을 해결하는 절차를 말한다. 실제로 미국에서는 법원에 접수된 사건 중 판결까지 가는 사건은 10퍼센트가 되지 않고 대개는 조정을 포함한 여러 가지 간이한 방법을 통하여 사건을 처리한다고 한다. 어떤 의미에서 조정은 이길 사람에게 양보를 요구하는 것이니 불합리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길 사람이라는 건 미리 정해진 것은 아니고 재판 절차를 통하여 증거를 대고 법리를 세워야 하고 그것으로 판사를 설득해야 하며 최종적으로 대법원까지 가봐야 아는 것이다(p. 188). 그리고 1천만 원을 받기 위하여 소송 비용으로 500만 원을 들여야 한다면, 700만 원을 받고 소송 비용을 100만 원 선에서 지출하는 것이 합리적일 수도 있다. 사건에 관하여 가장 절실한 이해관계자는 판사도 아니 고, 변호사도 아니며, 결국 당사자다. 사건을 주도적으로 해결해야 할 사람도 당사자일 수밖에 없으므로, 당사자의 주도권이 가장 잘 보장되는 조정 절차가 불합리하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조정에 임하는 자세 양보해야 한다. 조정은 당사자 간의 타협을 통하여 분쟁을 해결하는 것이고 대체로 당사자는 서로 이해관계가 상반되므로 양보를 해야 조정이 성공한다. 본인이 참석해야 한다. 변호사에게 소송을 위임한 경우라도 조정 절차에는 본인이 참석하는 것이 좋다. 판사의 설명을 들을 수 있고, 상대방의 입장을 직접 들을 수 있으며, 최종 결정을 내려야 하기 때문이다. 상생하는 방법도 있다. 본인에게 크게 불리하지 않으면서 상대방을 크게 배려하는 방법도 있다. 상대방이 특히 중요하게 생각하는 쟁점에 관하여 양보하더라도 본인에(p. 189)게 크게 불리하지 않은 경우도 있으므로, 상생하는 방법을 찾아본다. 집행 문제도 고려해야 한다. 소송을 하는 종국적 목적은 대체로 승소 판결을 받기 위함이 아니라 돈을 받아내기 위함이다. 법원에서 승소 판결을 받더라도 집행 절차에서 돈을 받아내는 비율은 생각보다 낮다. 조정 절차에서는 돈을 받아내는 방법도 협상 테이블에 올릴 수 있으므로 유리하다. 원고는 5천만 원을 고수하고 피고는 3천만 원을 고집할 경우 4천만 원 선에서 타협하는 것도 한 방법이지만 때로는 5천만 원으로 정하되 3개월 내에 3천만 원을 가져오면 나머지 2천만 원을 포기하는 방법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싸우는 것은 금물. 간혹 조정실에서 상대방과 말이나 몸으로 싸우는 사람이 있다. 사연이 있겠지만 판사 입장에서는 어리석은 행동이다. 자신의 문제를 효과적으로 풀 수 있는 자리를 어렵게 마련했는데 불만을 터트리는 자리로 만들어버리는 것은 불합리한 처사다. 그 사건이 해결 되지 않을 경우 가장 손해를 보는 사람은 판사도 아니요 변호사도 아니요 바로 당사자이기 때문이다. 판사의 설명에 귀 기울인다. 법원이 조정 절차를 주도하(p. 190)는 경우 판사로부터 사건 전반에 관한 설명을 듣게 된다. 판사는 내가 불리한 점, 내가 유리한 점을 나누어 설명할 것이다. 잘 들으면 판사가 생각하는 바를 엿볼 수 있다. 특히 2심이라면 사건 처리 방향이 대부분 결정되었다고 보면 된다. 민사 사건의 경우 대법원에 상고를 해서 2심 판결이 깨지는 비율이 10퍼센트가 안 된다는 점, 사실 인정은 원칙적으로 2심에서 하게 되어 있는 점을 고려할 때, 2심 재판부의 결론은 존중해야 한다. 그 바탕 위에서 내 입장을 최대한 반영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를 고민하는 것이 좋다. 마무리(롯데자이언츠의 마무리는?) 집안에 송사가 있으면 마음이 불편하다. 적당한 선에서 털고 나오는 것도 마음의 평화를 찾는 좋은 방법이다. '조금 손해 본 것은 다른 일을 해서 보충하면 된다.' 이런 생각으로 조정에 임할 수는 없을까요?(p. 191). 재판 속의 문학 내가 현실에서 맡은 재판은 그렇게 감동적이지 않았다(p. 304).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문학이 재판에서 많은 것을 차용하지만 재판은 문학에서 차용하지 않고 순수함을 고수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본 적이 있다. 판사는 많은 경험을 해야 하지만 여러 사정으로 제한적인 경험을 할 수밖에 없다. 문학이 그 대안이 될 수 있다. 문학은 보편적 진실을 추구하는 것이고, 재판은 구체적 진실을 추구하는 것이며, 양자는 서로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판사들이 다 가난했던 경험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김훈의 《흑산》을 읽고 나면 가난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가령, 배고픔을 면하자면 오직 먹어야 하는데 많은 끼니 중에서도 지금 당장 먹는 밥만이 배를 채운다는 내용이 그렇다. "아침에 먹은 밥이 저녁의 허기를 달래줄 수 없으며, 오늘 먹는 밥이 내일의 요기가 될 수 없음은 사농공상과 금수축생이 다 마찬가지다." 내가 10년 전 처리한 사건 중 20대 청년이 공무집행 방해죄로 구속 기소된 사건이 있었다. 생모라고 밝힌 사람이 탄원서를 보냈다. 오래전에 헤어진 아들이 재판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며 자신이 책임지고 선도를 할 테니 선처를 바란다는 내용이었다(p. 305). 재판을 하며 방청객을 둘러보니 유난히 눈에 띄는 분이 있었다. 피고인석 옆에 앉아 대화를 하게 하였더니 피고인을 껴안으면서 "이제 괜찮아, 엄마가 있잖아"라고 말했다. 피고인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생모와 시선도 마주치지 못하였다. 생모를 만났으니 이제 마음을 잡지 않겠는가 생각하고 집행 유예 판결을 선고했고, 피고인에게 책을 선물하면서 그 책 한 쪽을 읽어주었다. 알프레드 디 수자의 시 〈사랑하라.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이다. 내가 10년 전에 처리한 사건 중에 피고인이 자살을 하려고 여관에 불을 질러 기소된 사건이 있었다. 다행히 불은 크게 번지지는 않았고 다친 사람도 없었다. 선고하는 당일 피고인에게 자살을 열 번 외치게 하였다. "자살자살자살자살.... 이렇게 열 번 하면 본인은 '자살' 이라고 말하지만 듣는 사람에게는 '살자'로 들립니다. 생각하기 나름입니다. 실패라고 다 나쁜 것은 아닙니다. 자살에 실패해서 살았지 않았습니까?" 그러고서 피고인에게 《살아 있는 동안 해야 할 49가지》란 책을 선물했다. 나는 이런 재판을 하게 된 배경 중 8할이 문학 덕분이라고 생각한다(p. 306).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는 이렇게 시작한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모습이 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모두 제 각각의 불행을 안고 있다." 어쩌면 좋은 문학과 좋은 재판은 그 모습이 모두 비슷할지 모른다. 철저한 조사를 바탕으로, 공동체의 보편적 가치를 질문할 때, 주제와 이야기가 딱 들어맞을 때 독자들은 감동한다. 판사들이여! 《유토피아》를 쓴 토마스 모어가 영국의 대법관이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작가들이여! 긴장하시라. 대한민국의 판사도 또 다른 '유토피아'를 쓸지 누가 알겠는가?(p. 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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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소개
    2026-04-16
  • 【북토크382】 죽음을 늘 준비하며 살자
    KBS 《아침마당》, 《강연100℃》 등에 출연해 전국의 시청자들에게 위로와 공감, 희망의 메시지를 전해준 호스피스 의사 김여환의 에세이 《내일은 못 볼지도 몰라요》. 극심한 암성 통증으로 고통 받는 환자들과 함께 지내면서 누구보다도 안타까운 마음으로 임종 선언을 했던 저자 김여환. 숨기려야 숨길 수 없는 삶의 마지막 순간을 꼼꼼히 기록한 이 책은, 삶이 완성되는 마지막 순간을 위해 더없이 소중한 오늘을 ‘있는 힘껏’ 아름답고 행복하게 살아내야 한다는 인생의 진리를 전하고 있다-교보문고. 이 책은 호스피스 의사가 수많은 죽음을 보고 삶과 죽음에 대해 느낀 것을 쓴 것이다. 많이 유익했는데 현재 절판됐다. 사람의 일생 중 가장 힘든 시기는 보증을 잘못서서 거액의 부도를 냈을 때나 남편이 바람을 펴서 이혼할까 말까 망설일 때가 아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인생의 반전 같은 일말의 빛조차 기대할 수 없는 시간들, 즉 죽음을 맞이하기 직전까지의 '짧은 삶'이다. 그 시기를 잘 보내야만 지금까지 살아온 세월을 온전한 나의 인생으로 만들 수 있다. 그래야만 남겨진 사람들의 인생도 편안해질 수 있다(p. 8). 그렇다. 나는 이 세상에 남들보다 조금 먼저 작별 인사를 건넨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이토록 자명한 삶의 진리를 힘겹게 깨달았다. 만약 우리에게 내일이 오지 않을 것임을 안다면, 오늘 우리의 삶은 결코 평범하지 않을 것이다. 또한 만약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과 내일 다시 못 볼지도 모른다는 것을 안다면, 한 번 더 사랑한다 말하고, 한 번 더 안아주어야 하며, 오늘 깃든 행복을 있는 힘을 다해 누려야 한다. 이렇게 수많은 '오늘의 삶'이 모일 때 삶의 아름다운 결과물은 비로소 완성 된다. 그러므로 "내일은 못 볼지도 몰라요."라는 말에 숨어 있는 참된 의미는 오지도 않은 내일에 대한 불안과 분노, 두려움과 슬픔에 오늘의 행복을 양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오늘 더 사랑하고, 오늘 더 행복해야만 한다(p. 10). "2012년 8월 21일 12시 42분, 신복연 할머니는 사망하셨습니다." 나는 할머니가 더 이상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니란 사실을 말했다. 그리고 통증 없이 편안히 좋은 곳으로 떠나셨다는 위로의 말도 빼놓지 않았다. 짤막한 사망 선언 뒤에는 언제나 그 마지막 순간을 지키고 있던 가족의 대성통곡으로 이어진다. 그런데 오늘은 조용했다(p. 22). 할머니의 둘째 딸이 낮은 목소리로 차분하게 말을 꺼냈다. "우리 엄마가 평소에 유언을 했어요. 내가 떠나면, 울지 말라고. 자식들이 우는 소리가 들리면 뒤 돌아보느라 떠나는 것이 힘드니, 울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어요." "아...하여간 대단하세요. 입원 내내 웃지 않으신 날이 없었는데, 그런 아름다운 유언까지 하신 줄은 몰랐어요. 제가 들어본 유언 중에 가장 훌륭한 유언인 것 같아요." "과장님, 그렇죠! 우리 엄마가 암에 걸렸다고 하니까, 동네 사람들이 이제 꽃 한 송이가 지는구나, 했다니까요." 곱게 아껴두었던 꽃분홍색 한복으로 갈아입고, 흰 양말까지 정갈하게 신은 신복연 할머니의 마지막 모습은 살아 있는 그 누구보다도 따뜻해 보였다(p. 23). 짧은 글 한 편을 쓸 때에도 마지막에 무슨 말을 쓸까를 생각하면서 쓰면 글의 흐름이 매끄러워지듯이, 인생도 자신의 마지막 순간을 생각하고 살다 보면 들쭉날쭉한 인생이 일관성 있게 변한다. 타인과의 소통도 중요하지만 그전에 자기 자신과 먼저 소통해야 한다. 자신의 마지막 순간과 소통하면 인생의 해답을 얻을 수 있다(p. 25). 자신과 만나려면 가장 낮은 곳으로 가야 한다. 그러므로 임종실은 부끄럽지만 가장 볼품없고 꾸밈없는 자신의 민낯이 있는 곳이었다. 그래서 나는 자신 있게 말한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만남은 바로 '나의 마지막'이라고(p. 26). "호호호, 난 아직 여기 입원할 단계는 아닌 걸요." "아직은 마약성 진통제를 쓸 만큼 아프지는 않아요." "며칠 전에도 산에 다녀올 만큼 괜찮았어요." 이렇게 말하면서 멀쩡하게 걸어 들어오는 말기 암 환자가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까? 나는 겉으로 보기에는 건강해 보이는 말기 암 환자들이 한두 달 뒤에는 누런 황달이 오거나 폐렴이 와서 황망히 떠나버린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남겨진 시간에 대해 불안해하거나 초조해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고 있는 그 짧은 시간에 환자에게 해 줄 수 있는 일에 집중한다. 칠순 잔치를 하든지, 마지막 콘서트를 하든지, 이혼한 뒤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아들을 찾아주는 일들 말이다. 그래도 나도 한 번쯤은 환자를 살려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모두가 죽는다고 포기했던 말기 암 환자가 완치되는 일이 우리 병동에서 일어나기를 기대했다. 환자들은 입원해서 퇴원(p. 45) 할 때까지 평균 27일을 살았다. 호스피스 경험이 쌓이면 쌓일수록 역시 기적이란 부질없는 비현실적인 희망이라는 것을 확신 하게 됐다. 일어날 수 없는 일을 가슴 저리게 갈구하기도 하고 신에게 떼를 쓰며 의지하기도 하는 것이 오히려 인간적이겠지만, 우리에게 남아 있는 시간이 별로 없다는 것이 훤히 보이는 나로서는 그렇게만 하다가 환자를 보낼 수는 없었다. 그런 애절한 생각을 할 시간이 있으면 조금밖에 남지 않은 삶에 집중해야 한다는 것이 오랜 경험을 통해 내린 슬픈 결론이었다. 사람이 좀 민민하고 삭막하게는 되었지만 현실적으로는 이것이 옳았다(p. 46). 말기 암 환자가 되면 환자와 가족은 육체와 정신적으로 이제까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상황과 맞닥뜨린다. 푸시시한 구차한 모습으로 마지막을 보낼 때쯤이면 원치 않았던 현재 시간이 살다 남은 찌꺼기 삶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약한 정신 때문이 아니라 몸이 약해지기 때문에 마음까지 통째로 흔들린다. 심지어 어떤 환자는 "잠자듯이 가는 그런 약 있잖아."라고 노골적으로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모든 말기 암 환자가 안락사를 원하는 것은 아니었다(p. 56). 비참한 마지막은 말기 암에 걸린 몸이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살다 남은 삶이라고 쓰러져버리는 마음이 만드는 것이다. 떠날 사람은 남아 있을 이를 위해 조금 남은 삶을 성실히 살아가고, 남아 있을 사람은 떠날 이가 세상에서 사랑받다가 가는구나 하는 느낌이 들도록 노력하면 서로 덜 힘들다. 처음과 마지막까지, 모두가 촘촘히 내 인생이기 때문이다(p. 58). 세상은 가벼움과 무거움이 서로 경계를 불분명하게 가른 채 섞여 있다. 어떤 부분은 내가 그보다 가볍고, 어떤 부분은 내가 그보다 무겁다. 그렇게 어우러져서 세상은 좀 더 좋게 변한다. 그러나 '죽음이 다가오는 것'과 같은 결정적인 순간이 다가오면 사람들은 가벼움과 무거움의 경계선을 남김없이 드러낸다. 고함을 지르고 입원실 바닥에 소변을 보는 한 할아버지 때문에 사흘 밤낮 동안 시달린 환자들이 하소연을 했다. 할아버지를 간병하던 할머니는 "환자가 병원에 자러 왔나요?"라며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그러면서 진정제도 못쓰게 하고 1인실로 가지도 않았다. 그런가 하면 뇌종양에 걸린 12살짜리 소녀는 과자를 들고 병실을 누비며 "아저씨, 빨리 나으세요."라고 하면서 환자들에게 나눠주었다. 한 신문 기자가 말기 폐암 환자에게 물었다(p. 67). "인생의 선배로서 우리에게 해주실 말씀이 없으신지요!" 후덕하게 생긴 환자는 가지고 있던 옷가지며 살림살이를 싹 정리할 정도로 죽음을 잘 받아들었다. 하지만 그는 기자의 질문에 대해 쓸쓸하게 대답했다. "저는....그런 것은 선배가 되고 싶진 않은데요." 그렇다. 죽음이란 일평생을 별 탈 없이 살다가 90살이 되어 마음 독하게 먹고 미리 준비해도 어려운 것이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맞닥뜨리는 죽음은 아무리 노력해도 익숙해지지 않는 법이다. 죽어가는 사람을 많이 돌본 의사로서 한 가지 분명히 말하고 싶은 것은, 어쩔 수 없이 먼저 떠나야 하는 사람들이 남은 사람들 걱정을 많이 했다는 것이다. 나 때문에 끼니를 거를까 봐, 나를 잃은 슬픔으로 행여 병이라도 생길까 봐, 경제적으로 힘들까 봐 등등.... 그들은 사소한 걱정을 몰래 했다. 남은 사람들은 그 마음을 알까? 임종실은 섞일 수 없는 삶과 죽음이 뒤엉켜 있고, 살아남은 이들이 비통함에 눈물을 흘리는 작은 방이다. 그러나 그곳을 거(p. 68)쳐 간 사람들은 한결같이 말한다. 존재란 그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죽어서도 사랑하는 이의 마음속에 영원히 살아 있는 것이라고(p. 69). 예전에 나는 보기조차 딱할 만큼 남을 부러워했다. 뚱뚱할 때는 날씬한 사람을, 늦게 시작한 의사 생활이 비참하다고 느껴질 때는 처음부터 순탄하게 직장 생활을 하는 동료를 얄밉도록 부러워했다. 누군가는 잘된 사람을 부러워하면서 인생의 꿈도 생기고 삶을 개척할 의지도 생긴다고 하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그 부러움이 오늘날의 나를 있게 한 계기는 되었을지라도 그 과정은 결코 행복하지 못했다. 이제 내가 진실로 부러워하는 사람은 돈이 많거나, 아이들이 좋은 대학에 입학했거나, 예쁘고 날씬하고 건강한 사람이 아니다. 그저 어떤 삶이 자신에게 다(p. 92)가오더라도 묵묵히 잘 받아들이고,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지 않으며, 자신의 삶을 그 자체로 당당하게 살아내는 사람이다. 우리는 저마다 지닌 인생의 향기가 따로 있다. 그러니까 이제는 그 누구도 부러워하지 말자. 인생의 마지막에는 행복했던 자신의 과거조차도 부러워하지 말아야 한다. 그 시간에는 그 시간에만 누릴 수 있는 나만의 행복이 따로 있는 것이다. 이렇게 마지막이 온 것도 견딜 수 없을 만큼 아쉬운데, 여러 가지 잣대로 부러워하면 병들어 있는 자신이 너무 불쌍하지 않은가. 부러워하지 말자, 그대여! 인생이 아파도 마지막까지 이 세상을 그 누구보다 당당하게 살아내야 한다(p. 93). 불행히도 호스피스에는 죽음을 편안하게 수용할 수 있는 묘약 따위는 없다. 그래도 사람들은 안고 갈 수밖에 없는 속사정을 들어주면 조금은 가벼워졌고, 끝까지 끈을 놓지 않고 가는(p. 108) 사람이 생각보다 많다는 평범한 사실에 평안을 찾아갔다. 대식 씨의 어머니처럼 때로는 버리는 것보다 안고 가는 것이 더 홀가분한 인생도 있다. 그러니까 결국 안고 가는 사람, 버리고 가는 사람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닌 셈이다(p. 109). 잘 죽어가기 위해 우리가 정말 배웠어야 할 것은 죽음의 5단계를 외우거나 혼자서 관 속에 들어가 보는 체험을 하는 것이(p. 112) 아니다. "저는요, 이미 죽음을 다 받아들였어요."라고 말하면서 의젓하게 지내다가 진짜 마지막이 다가오면 불안에 떠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죽음은 삶의 완성이라기보다는 결과물이다. 삶이란 누구에게나 신산스럽고, 일상은 상처와 갈등의 연속이다. 나에게 주어진 삶을 얼마만큼 잘 녹여내느냐에 따라서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있을 마지막 날은 달라진다(p. 113). 어쩌면 인생은 쓰고 싶은 대로가 아니라 저절로 쓰이는 소설책인지도 모른다. 때로는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지만 어떻게든 끝까지 살아내야 한다. 죽을 만큼 괴로워도 직접 해봐야 삶에 대한 사랑이 깊어진다. 사람들은 인생이 힘들어지면 앞으로 남은 여정이 얼마나 끔찍해질지 더 두려워한다. 남은 인생이 지금보다 더 불편해지더라도 초조해하거나 원통해하지 말자.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그대의 삶이 다른 누군가의 목숨을 구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으면 좋겠다. 자살이라는 '고의로 스스로를 죽이는 행위'를 생각할 만큼 견딜 수 없이 힘들다면 적극적으로 주변에 도움을 요청해야 한다. 아무 상관도 능력도 없는 사람에게조차 알려야 한다. 마음의 피눈물은 말하지 않으면 보이지 않고, 드러나지 않는 상처는 치유될 수 없다. 애써 고통을 삼키지 말자. 누구라도 도와줄 사(p. 120)람을 찾아다녀라. 자존심 따위 내세울 때가 아니다(p. 121). 치통이 아무리 심해도 한꺼번에 진통제를 다섯 알씩 먹지는 않는다. 통증을 잡으려다 사람을 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약국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타이레놀도 하루에 여섯 알을 초과하면 진통의 효과는 증가하지 않고 간에 부담만 준다. 이렇게 일반 진통제는 일반적으로 정해져 있는 용량을 초과하면 통증에 대한 효과보다는 약물에 대한 부작용이 심해지기 때문에 쓸 수 있는 용량의 한계가 있다. 이것을 약의 천장 효과(ceiling effect)라고 한다. 그런데 이런 천장 효과가 없는 약이 있다. 호스피스 병동에서 많이 쓰이는 마약성 진통제이다. 그것은 일반 진통제와 달리 많이 쓰면 쓸수록 통증이 잘 조절된다. 더군다나 날록손 (naloxone)이라는 해독제까지 있으니 '모르핀'이야말로 신이 세상을 떠날 때만은 아프지 말라고 인간에게 특별히 내려준 '마지막 선물'이다. 사망 원인 1위인 암은 사람이 떠날 무렵에 부쩍 커진다. 암(p. 129)덩어리가 커지면 정상 조직을 파괴하는 묵직한 암성 통증도 당연히 심해진다. 그래서 사람들은 너무 일찍부터 진통제를 쓰기 시작하면 통증이 가장 극심한 마지막 순간에는 정작 쓸 수 있는 약이 없을까 봐 전전긍긍한다. 모르핀을 최후의 약으로 넘겨 두었으면 하고 부탁까지 한다. 그러나 통증에 관한 한 모르핀은 쓰면 쓸수록 효과가 있는 약이다. 이러한 마약성 진통제의 비밀을 알려주면 누구나 "진짜 그런 약이 있나요?" 하고 물으며 신기해한다. 환자나 보호자는 어차피 살릴 수 없다면 고통 없이 떠날 수 있다는 확신만으로 가느다란 희망을 갖는다. 모르핀은 우리를 죽음의 공포보다 더 끔찍한 암성 통증에서 해방시켜주는 이로운 약제이다. 우리는 지금보다 좀 더 정확하게 모르핀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 아직도 말기 암 환자임에도 불구하고 환자, 보호자, 의료진의 모르핀에 대한 오해와 두려움으로 마약성 진통제를 거부하면서 의미 없는 통증에 시달리다가 마지막 순간을 맞이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나는 인생의 마지막 의사로서 당부한다. 언젠가 당신에게 그때가 오면 신이 내린 선물, 모르핀을 거절(p. 130)하지 말고 받아들이라고. 통증이 없으면 죽음의 맨 얼굴을 똑바로 응시할 수 있고, 고통 없는 죽음은 결코 폭력적이지 않을 것이다(p. 131). 내일 도사리고 있는 재앙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살아감 속에 죽어감의 흔적을 묻히는 것이다. 내일이라는 것이 그 누구에게도 완벽하게 보장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알면, 오늘 그대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무심코 거칠게 한 말이 마지막일 수도 있다는 것을 절대로 잊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오지도 않을 비겁한 내일을 위해 오늘의 행복을 너무 많이는 양보하지 말자(p. 163). 말기 암 환자가 되면 환자와 가족은 육체와 정신적으로 이제까지는 경험하지 못한 일을 경험하게 된다. 가족 간의 갈등이 있었다면, 분명히 그 갈등은 확대된다. 문제의 중심은 늘 '사랑과 돈'이다. 거기에 종교적인 문제가 곁들여지면 사태는 더욱 심각해진다(p. 174). 살다 보면 마음 내키지 않는 일을 해야 할 때가 있다. 하고 싶은 일만 해도 짧은 인생인데 굳이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면 큰 손해를 볼 것만 같다. 젊은 시절에는 내가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이 뭔지도 모를 때가 많다는 것을 기억하라. 그러나 매 순간 저마다 해야 할 일은 누구나 알고 있다. 해야 할 일을 하다 보면 진짜 하고 싶은 일이 훤히 보이고 그때 용기 내어 그 일을 하면 진정한 행복에 도달할 것이다. 인생은 생각보다 길기도, 또 속절없이 짧기도 하다. 그러기에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을 실수 없이 하려면 마음에 내키지 않더라도 '해야 하는 일'을 먼저 하면서 견뎌보는 것쯤은 각오해야 한다(p. 187). 웰다잉(well dying)은 삶의 완성이 아니라 삶의 결과물이다. 누구나 손쉽게 받을 수 있는 선물은 더군다나 아니다. 저마다 주어진 힘든 삶을 잘 살아내야만 누릴 수 있는 삶의 마지막 축 복인 것이다(p. 203). 죽음을 깊숙하게 연구하고 싶어서라든지 내 성격이 원래 우울해서 호스피스 의사가 된 건 아니다. 나는 호스피스 일을 해오는 동안 '죽음을 준비해야 하는 사람도 죽음에 이르기 직 전까지는 살아 있다'는 자명한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 누구도 아프지 않게 하루를 지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고 보면 나는 거창한 죽음의 여의사가 아니라 그저 생명의 에너지가 다 할 때까지 불편함 없이 살아갈 수 있게 해주는 의사로서 당연한 일을 하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이름이 주는 거부감 때문에 국내 암 환자의 마약성 진통제 사용률은 그리 높지 않다. 세계보건기구에 따르면, 국내 사용량은 모르핀으로 환산했을 때 환자 1인당 연간 45mg에 불과하다. 미국 693.44mg, 영국 334.52mg은 물론 세계 평균 58.00mg보다도 낮다. 통증을 효과적으로 다스릴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도 안 쓰는 것이다. 아직도 대한민국 사람들은 아프면서 죽어간다. 의사 입장에서 보면 죽음이 삶의 종착역인지 따위는 일단 환자의 통증을 덜어준다음에 생각할 일이다. 암 환자의 통증은 당사자가 아니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심하다. 출산의 고통이 10점 만점에 7~8점이라면 암 환자의 통증은 10점 이상도 간다.암성 통증은 암이 진행되는 생명의 마지막에는 더 심해지고, 그(p. 215) 끝을 알 수 없기 때문에 환자와 가족을 더더욱 애타게 한다(p. 216). 인생을 산다는 것은 세상에 놓인 하나의 다리를 건너는 것이다. 하지만 그저 다리를 건너는 일에만 집중한다면 세상의 아름다움은커녕 다리를 뒤흔들 고통과 혼돈의 시간이 다가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없다. 뜨거운 마음으로 용기를 내어 자기 삶의 아웃사이더가 되어보기를. 삶이 끝난 뒤에 죽음이 오는 것이 아니라 삶 속에 죽음이 있음을 알아차리기를, 그래서 지금 이 순간이 가장 행복하다고 느끼면서 아름다운 마무리를 하게 되기를 바란다(p. 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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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소개
    2026-04-13
  • 【북토크381】 삶의 찌질함과 누추함에 대하여
    산문집 《연중무휴의 사랑》과 《헤아림의 조각들》(2023년 문학나눔 선정도서)로 2030 독자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던 임지은이 신작 《이유 없이 싫어하는 것들에 대하여》를 출간했다. 전작에서 냉철하고, 때론 따뜻한 연민과 너른 헤아림을 보여줬다면 이번 산문집에서는 작가 자신의 깊은 내면에 숨겨진 질투와 열등감, 욕망과 좌절, 위선 등의 감정을 진솔하게 마주해본다. 누구나 한번쯤 특별한 이유 없이 무언가를 미워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이 ‘싫음’이라는 감정은 과연 무엇일까. 숨기고만 싶은 이 복잡 미묘한 감정을 들여다볼수록 작가는 거기에 어떤 선망이나 외로움, 부끄러움 같은 것들이 들어 있다는 걸 깨달았다. 한편으론 자기가 가진 것 중 가장 소중한 것을 돋보이게 하려는, 서툰 사랑의 마음이기도 했다. 작가는 슬픔과 기쁨과 외로움이 버무려진 이 “혼탕과 같은 삶”에 깊게 몸 담그며, 미움과 사랑 사이의 낙차를 발견한다. 엄마를 통해 흉보는 마음과 사랑이 때론 붙어 있음을 알게 되었고, 온 세상과 자기 자신을 고루고루 아낌없이 사랑한다는 사람들 옆에서 홀로 투덜거리며 자신의 ‘싫음’을 통해 타인의 ‘싫음’ 또한 이해하게 되는 세계를 경험한다. 좋은 것은 당연하게 제 것이라 누리는 동거인에게 꼬인 마음이 드는 자신을 들여다보며 좋은 것을 좋은 것이라 수긍하기까지의 내면의 갈등과 고통을 인정하기도 한다. 이처럼 작가는 무언가를 좋아한다는 건 그것대로 멋진 일이지만, 무언가를 미워한다는 것 또한 때로는 좋은 일이라고 말한다. 작가의 시선을 따라 ‘이유 없이 싫어하는 것들’을 톺다 보면 이 책을 추천한 오은 시인의 말처럼, “곡절 없이 좋아하는 것들을 몇 곱절 더 소중하게 만들어주는” 생경한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곧 있으면 닥쳐올 매서운 겨울바람에도 직진하는 용기가 느껴지는 책이다.-교보문고 자신의 찌질함(?)을 드러내는 글을 보며 저자의 용기를 본다. 만족스럽지 않은 환경 가운데서도 살아볼려고 하는 저자의 몸부림(?)에 박수를 보낸다. 이토록 많은 말이 오가는 세상에 말 한마디가 그토록 크게 사람을 흔들 수 있다는 걸 생각하면 놀라고야 만다. 누군가의 말 한마디에 버티고 또 흔들릴 만큼 나는 취약 했다. 그러나 누군가를 흔드는 게 무작정 나쁘다거나, 사주는 믿을 만하지 않다는 주장을 하려는 건 아니다. 나를 흔들던 말 또한 나를 이쪽으로 데려왔음을, 내가 무언가를 그 안에서 발견했다는 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그 밤 안도 속에서 깨달은 건 나를 격려해주는 이가 없어도, 심지어 누가 나를 흔들어놓고 수면 아래로 밀어 넣는다 해도, 나는 내가 원하는 걸 쉽사리 포기하지 못하는 사람이란 사실이었다. 그로 인해 생겨난 불안과 슬픔과 무력감, 또 그에 따른 오기와 반발심을 동력 삼으며, 나는 내 안에서 끝내 살아남은 무언가를 마주했다. 어쩌면 그(p. 25)것이 그리도 중요했기 때문에 내가 그렇게나 흔들렸다는 사실 또한. 그러므로 물음에 대한 답은 추가되고 갱신된다. 어쩌다 작가가 되었을까? 나는 끝내 작가가 되고 싶었다(p. 26). 오늘날에는 자신을 돌보는 법에 대한 정보가 넘쳐난다. 그런 정보의 과잉은 때론 상처도 불행도 없어야 한다는 강박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어떤 건 꼭 완두콩 한 알 만큼의 불편도 용인하지 않기 위해 고안된 듯 보이니까. 혹시 사람들은 자신에게 좋은 것만 주어야 한다는 강박을 갖고 있는 걸까? 그렇게 해야만 제대로 된 사회 구성원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그건 좀.. 부자연스럽지 않나? 그래도 그런 정보들을 일찌감치 알았다면, 그래서 내 부모가 조금 더 자신을 돌보았다면 그들에게도 내게도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럼 내 부모도 조금은 덜 힘들었을 텐데. 나도, 조금 덜 우는 사람이었거나 조금 더 마음 놓고 우는 사람으로 자랐을 텐데. 어쩌다 한 번 하는 우리의 외식도 지금보다는 더 편안할 텐데(p. 103). 뒤늦게나마 나는 내게 좋은 것을 주는 법을 배우고 또 연습한다. 가능한 선에서 질 좋은 걸 산다. 누가 뭘 해주면 사양하지 않고 받는다. 목돈을 모아 요가를 등록하고 되도록 병원을 제때 간다. 때론 근사한 데서 밥을 먹기도 한다. 부모로선 잘 모를 좋은 걸 누려도, 스스로를 이기적이라 느끼지 않으려 이를 악문다. 동거인이 놀리는 걸 보면 갈 길이 먼 것 같지만, 나는 나를 보살피는 훈련을 거듭한다. 그래야 부모를 포함해 그 누구라도, 나를 챙기느라 그 자신을 뒷전으로 두지 않을 수 있다. 그래야 나에게 최선을 다해준 사람들을, 원망하지 않고 끝까지 이해할 수 있다. 동거인의 캠핑을 따라가는 건 훈련의 일환이다. 캠핑을 가면 동거인이 거의 대부분의 일을 도맡아 해주기 때문이다. 그동안 나는 뻔뻔하게 앉아서 쉰다. 겨울에는 가끔 엄마의 개도 캠핑에 데리고 간다. 텐트 안에서 개는 한 뼘의 볕이 있는 자리에 자기 몸을 두기도 하고, 난로 앞 조금 더 따뜻한 곳에 자리를 잡고 웅크리기도 한다. 주어진 데서 기어이 제 몸만큼의 좋음을 찾아내는 것이다. '너는 바로 아는구나'(p. 104). 내가 오래 걸려 배운 걸 개는 그냥 해낸다. 기특하고 근사한 개 같으니. 몇 년 전가지만 해도 그런 광경, 자신이 괜찮아지는 위치를 미리 알아두고 스스로를 거기 놓는 존재 앞에서는 마음이 볼썽 사납게 흐트러지곤 했다. 그러나 이제는.... 웅크린 개를 빤히 바라본다. 걷는 법을 모르고도 걸었고 숨 쉬는 법을 모르고도 숨 쉬었다. 사랑 하는 법을 모르고도 사랑했고 사는 법을 모르고도 살았다. 나를 키워낸 내 부모처럼, 언제나 모르면 모르는 대로 해내는 것들이 있다. 하지만 배우면 배우는 대로 더 해내게 된다. 그걸 안 뒤로 나는 배우고 싶은 모든 걸 조금 더 오래 본다. 그럼 볕을 받아 털끝 하나하나가 빛나는 작은 개의 부드러운 몸이 조금씩 솟았다 가라앉길 반복하듯 감탄과 슬픔이 내 몸을 고요히 오르내린다. 어떤 자연스러움은 누군가에게 훈련의 영역에 있지. 그런 게 언제나 조금씩 나를 상하게 만든다고, 개를 쓰다듬으며 생각한다. 아무 불편도 모르는 얼굴, 그래야 한다고 주장하는 멸균된 얼굴은 역시 내 것이 아니다. 훈련 해봤자 조금 상한 얼굴을 더 자연스럽게 여기는 내 관점은 아무래도 끝내 바뀌지 않을 모양이다. 그래선지 어떨 땐 사람들의 얼굴이 다 조금씩 상한 것처럼 보이곤 한다(p. 105). 대중교통을 오가며 힐끗힐끗 사람들을 본다. 사람들이 상처 입거나 불행하지 않길 바라면서. 그러나 나는 어쩐지 그들 각자의 상처나 불행이 없어지길 곧장 바라지는 않는다. 거기서 오는 고통과 모순 같은 것들은 한 사람을 감싸는 오래된 맥락이므로. 나로선 그 안에 새겨진 것들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싶다. 그들의 완두콩들을 헤아려 보고 싶다. 그런 건 사람이 상처와 불행 속에서도 그럭저 럭 버티며 살아갈 수 있는 존재임을 알려준다. 다만 그 사실을 증명하겠다고 나를 몰아세우는 건 그만두었다. 스스로를 보살피는 게 죄가 아니라는 걸 개조차 그냥 안다. 나는 개처럼 살아서 숨쉰다. 개에게 배운 바, 그건 머무르는 자리에서 언제나 한 뼘의 볕을 찾아내야만 한다는 뜻이다(p. 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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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4-13
  • 【북토크380】 여전히 흥미로운 주제, 죽음
    대한민국이 OECD 자살률 1위라는 아픈 현실을 몇 년째 마주하고 있다. “죽으면 모든 게 끝날 거야”라는 절망 속에서 위태롭게 흔들리는 젊은이들에게, 우리 사회는 어떤 대답을 들려주어야 할까? 이 무거운 질문에 답하기 위해, 평생을 의학계에 몸담았고 ‘죽음학 전도사’라 불리는 서울대 의대 명예교수와 그의 아내가 함께 펜을 들었다. 바로 신간 『죽음, 삶의 끝에서 만나는 질문 』의 저자 정현채, 이현숙 부부의 이야기다-교보문고. 의사가 하는 죽음에 대한 이야기이다. (1) 근사체험 (2) 사후통신 (3) 삶의 종말체험 (4) 사망 시 물리적 현상 (4) 영매 (5) 어린아이들과 관련된 환생 연구이다. 나는 근사체험만 인정한다. 죽음은 이 땅에서의 마지막이기에 나이가 들수록 더 많은 관심을 갖고 책을 찾아 읽게 된다. 읽은 책들이 죽어갈 때 도움이 되기를 바라면서..... 정현채 서울대학교 의대 명예교수 1980년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동 대학 내과학(소화기학) 교수로 재직했고, 현재 서울대 의대 명예교수로 있다. 지금까지 240여 편의 의과학 논문을 SCI 국제학술지에 발표했으며 위염이나 위궤양 등을 유발하는 헬리코박터 파일로리 연구의 권위자로 대한소화기학회 이사장, 대한헬리코박터및상부위장관 연구학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저명한 의학 저널 『랜싯』을 포함해 전문 학술지에 게재된 죽음에 관한 과학적 연구 성과를 공부하면서 2007년부터 대중을 상대로 죽음학 강의를 시작했다. 중학생부터 80대까지 다양한 계층을 상대로 800여 회 넘게 강의를 해 '죽음학 전도사'라는 별명을 얻었다. 한국죽음학회 이사로서 '한국인의 웰다잉 가이드라인' 제정위원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죽음에 대해 생각할수록 비관적이 되거나 자살 충동이 커지는 게 아니냐고 우려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오히려 정반대예요. 제가 산증인이죠. 인간의 죽음 전후로 일어나는 영적인 현상에 대 해 알면 알수록, 왜 자살하면 안 되는지 그 이유를 이해하게 되고,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의 의미를 깨달아 더욱 밀도 있고 충만 하게 살아가게 되거든요. '내 목숨 내 마음대로 하겠다는데, 웬 참견이냐?'고 할지 모르지만, 실상을 알고 나면 그런 말을 하기가 어려워져요. 우리는 모두 서로 촘촘하게 연결되어 있고, 모르고 지나치는 존재들조차도 서로 영향을 주고받아요. 가족과 친구는 더 말할 나위 없죠. 우리는 모두 이번 생에서 다뤄야 할 저마다의 과제를 갖고 태어나는데, 자살을 한다는 건 그 과제를 너무 빨리 내팽개쳐버리는 거예요. 도망친다고 그 과제에서 벗어나게 될까요? 그렇지 않아요. 그 과제를 잘 다루게 될 때까지 형태만 바뀐 채 계속 마주 치게 돼요. 죽음은 소멸이 아니라 다른 차원으로 옮겨가는 것이니까요. 그런데 살면서도 그런 걸 경험하지 않나요? 해결하지 못 한 채 외면하거나 회피했던 문제가 사라지지 않고 어느 순간 눈 앞에 떡하니 버티고 서 있는 경험을요(p. 19). 자살은 남겨진 가족들과 친구들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안겨주고, 이 상처는 수십 년이 지나도록 잘 아물지 않아요. 한 사람이 자살하면 주위 사람 다섯 명 내지 열 명이 자살 충동을 갖게 된다고 해요. 우리나라에서는 하루 평균 마흔 명 가까이 자살한다고 하니, 매일 200명 내지 400명 넘는 사람들이 지인의 자살로 인해 부정적인 영향을 받게 되는 거죠. 죽음은 누구에게나 찾아와요. 서둘러 스스로 생을 마감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사고로, 질병으로, 노화로 언젠가 다 죽어요. 그러니 그 전까지는, 자신의 삶은 물론 사랑하는 사람들의 삶까지 송두리째 무너뜨리는 선택만은 하지 않아야 해요. 저는 4년 전 침윤성 방광암 진단을 받고, 방광 전체와 그 옆에 인접해 있는 전립선까지 제거하는 큰 수술을 받았어요. 소장 60센티미터를 잘라내고 만들어 넣은 인공방광에는 괄약근이 없어서 자율적인 배뇨 조절이 안 돼요. 일정한 간격으로 화장실에 가야 해서 밤잠도 세 시간씩 끊어서 자요. 그러나 이것 때문에 비관하지는 않아요. 30년 전만 해도 방광 절제 수술을 받고 나면 비닐 소변주머니를 밖에서 연결해 부착하고 지내야 했는데, 수술법이 향상되면서 삶의 질이 높아졌어요. 그것만으로도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요. 가만히 주변을 둘러보면 감사할 일이 참 많아요(p. 23). 자살하는 순간 후회하지만 자살을 시도했는데 살아난 사람들은 이후 신체적인 고통을 겪더라도 살아 있다는 사실만으로 감격스러워하며 살아간다고 해요. 그리고 대다수의 사람이 더 이상 자살을 시도하지 않았다고 해요. 2013년 EBS 「다큐프라임」 '33분마다 떠나는 사람들. 당신은 혼자가 아닙니다'에서는, 미국 샌프란시스코 골든게이트교(금문교)에서 투신했다가 극적으로 살아남은 2퍼센트의 사람들을 다뤘어요. 미국 플로리다대학의 토머스 조이너 교수가 그 사람들과 면담한 결과, 투신해서 수면에 떨어지기까지 4초밖에 안 되는 짧은 시간 동안 그들은 한결같이 자신이 한 행동을 후회했다고 해요. "뛰어내린 순간 나는 인생에서 해결할 수 없는 일은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방금 다리에서 뛰어내렸다는 사실 만 빼고"(p. 38). "뛰어내리고 처음 떠오른 생각은 '방금 무슨 짓을 한 거지?' 였다. 나는 죽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떨어진 곳이 강이였으니 그나마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질 수 있었던 것이고, 고층 빌딩이었다면 떨어지는 순간 후회한다고 해도 돌이키기 힘들죠. 경북 영주에 사는 한 중학생의 경우가 바로 그랬어요. 같은 반 학생들의 괴롭힘을 이기지 못해, 아파트 20층 계단 창문을 열고 뛰어내리려다가 갑자기 마음을 바꿔 창문틀을 붙잡고 도와달라고 요청했어요. 때마침 20층에 사는 주민이 이 소리를 듣고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하러 갔지만, 이 학생은 팔에 힘이 빠져 결국 추락했다고해요.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에요. 이처럼 자살을 시도하는 사람들의 마음 한편에는 살고 싶은 의지가 강하게 있는 것 같아요. 다음에 소개하는 사례에서도 확인할 수 있어요. 우울증을 앓고 있던 한 여성이 오피스텔에서 자살하려고 목을 맸는데,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이웃의 신고로 경찰이 출동했어요. 잠긴 문을 따고 들어가보니 이 여성은 이미 사망한 것처럼 보였어요. 호흡도 없고 얼굴이 잿빛으로 변해 있었죠. 그런데 출동한 경찰관 중 한 명이 혹시 모르니 응급조치를 해보자며 심폐소생술을 시작했고, 얼마 뒤 이 여성은 "컥!? 하는 소리와 함께 숨을 쉬며 살아났어요. 그리(p. 39)고 살아나서 한 말이, 경찰이 들어왔을 때 자신은 여전히 의식이 있었는데 다른 경찰관이 "시신에 손대지 말고 현장을 보존하자"고 했을 때 속상했다는 거였어요(p. 40). 죽는 것 외에는 거기서 벗어날 방법이 없다고 자꾸 생각하게 만드는 상황에 있다면, 가족이나 상담사에게 솔직하게 털어놓고 그곳에서 벗어나기 위한 현실적인 방법을 찾으세요. 익숙한 곳을 벗어나는 걸 겁내지 마세요. 죽는 길밖에 없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지금 그곳보다 더 나쁜 곳은 이 세상에 없으니까요. 하나의 문이 닫히면 다른 문이 열려요. 70년을 살아보니 정말 그렇더라구요(p. 42). 케네스 링과 친절 바이러스 근사체험 연구에서 케네스 링 교수를 빼놓을 수 없죠. 미국 코네티컷대학 심리학과 교수로서 30년 넘게 학생들에게 근사체험에 대해 가르쳤어요. 강의를 들은 학생들은 직접 체험하지 않았는데도 근사 체험자에게 일어나는 삶의 변화를 마찬가지로 겪었죠.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삶의 의미를 찾게 되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감소한 거예요. 케네스 링 교수는 근사체험을 '친절 바이러스Benign Virus'라고 불러요. 왜냐하면, 이를 알게 된 사람은 근사체험을 직접 하지 않았어도 마치 바이러스에 감염된 것처럼 체험자와 비슷한 긍정적인 영향을 받기 때문이에요. 그런 변화를 저나 주변 사람들한테서도 발견해요. 한 중견기업의 대표는 평소 까칠한 편이었다는데, 죽음학 강의를 들으며 펑펑 울고 난 뒤로는 직원들을 대하는 태도가 한결 부드러워지고 자상해졌다고 했어요(p. 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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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4-08
  • 【북토크379】 만화가 주는 즐거움과 편안함
    “<을지로 순환선>의 만화가 최호철과 만화평론가 박인하가 함께한 여행기『펜 끝 기행』. 같은 학교 교수로 만나 떠난 제주도 교직원 연수에서 결성된 두 만화쟁이 '펜 끝 듀오'의 여행은 이후 일본, 이탈리아, 스위스, 중국을 거쳐 다시 우리 땅 울릉도와 독도에서 마무리된다. 화가였다가 만화를 선택한 최호철과 글쟁이였다가 만화를 선택한 박인하. 만화에 붙들린 두 사람은 세계를 바라볼 때 만화적으로 본다. 최호철은 여행지마다 그림을 그렸고, 박인하는 최호철의 크로키 북을 보며 농담을 던졌다. 이 책은 그들이 그렇게 함께한 여행의 추억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만화를 좋아했다. 초등학교때부터 대학때까지 만화를 봤다. 지금은 잘 안 보지만 그래도 만화가 좋다. 앞으로도 기회가 되면 이런 책들을 찾아 읽을려고 한다. 일본다운, 너무나 일본다운 규슈 한 일 두 나라는 모두 벚꽃을 좋아하고, 벚꽃 구경 하기를 즐긴다. 그래서 봄이면 어김없이 벚꽃 축제가 벌어지는데, 가만 보면 두 나라 사람들은 각각 다른 벚꽃을 즐긴다. 우리나라에서 즐기는 벚꽃은 봉오리가 오르기 시작해 화려하게 피어오르는 상태이다. 그래서 벚꽃 축제를 구경하기 위해 일기 예보에 민감하다. 바람이 불거나 비가 와 꽃잎이 떨어지면 꽝이 되어버리기 때문. 반면, 일본 사람들은 화려하게 만개한 뒤 흩날리는 벚꽃을 즐긴다. 만개한 벚꽃이 바람에 떨어지는 모습을 좋아하는 것이다. 비슷하지만 다른 이웃. 결국 이런 미세한 차이가 모여 문화의 차이가 되고, 문화의 차이는 풍경의 차이를 만들어낸다. '일본 미학'이라는 말이 있다. 다양한 논의가 있고, 학자마다 여러 설명을 더하지만 이방인인 우리의 눈으로 볼 때 일본의 모습 자체가 그대로 일본 미학이다. 가을이 서서히 겨울로 넘어가던 날, 두 만화쟁이는 학생들과 함께 후쿠오카를 찾았다. 후쿠오카를 여행지로 결정한 것은 순전히 우리나라에서 가까웠기 때문. 특별히 우리를 끌어당기는 매력이나 꼭 가야 할 곳을 생 각해놓지 않은 상태에서 기대 없이 찾은 곳이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만난 활화산 아소 산. 그 웅장한 모습은 대단했다. 아소 산은 해발 1000미터가 넘는 다섯 개의 산봉우리를 통틀어 부르는 이름으로 정식 명칭은 아소고다케인데, 다섯 개의 분화구마다 사실 다른 이름, 다카다케(1592미터), 나카다케(1506미터), 에보시 다케(1337미터), 기지마다케(1326미터), 네코다케(1433미터)로 부른다. 버스로 전망대 인근까지 올라가 케이블카를 타면 쉴 새 없이 하얀 연기를 내뿜는 분화구를 볼 수 있다. 은근하게 풍겨나는 유황 냄새, 곳곳에 자리 잡은 대피소, 은근히 겁을 주는 가이드의 말이 어우러지(p. 243)면 현재 진행형 활화산의 다이내믹함을 느낄 수 있다. 멀리 피어오르는 활화산의 기운을 바라보니, 주군을 위해 목숨을 거는 사무라이, 흩날리는 벚꽃처럼 배를 가르는 영화의 장면이 떠올랐다. 아소 산을 뒤로하고 찾은 곳은 구마모토 성. 구마모토 성은 약 400년 전, 전국 시대의 무장 가토 기요마사가 구마모토를 통치하기 위해 축성한 성이다. 가토 기요마사라고 하면 낯설지만, 한자음 그대로 '가등청정'이라고 읽으면 익숙하다. 바로 임진왜란 때 조선을 침략했다가 깨진 바로 그 장군. 적의 공격에 대비한 120개의 우물과 조선 성의 장점을 차용한 축조술이 인상적이었지만, 그보다는 거대함 속에 정교하게 쌓아 올린 구마모토 성의 모습 그 자체가 일본, 사무라이를 느낄 수 있는 너무나 일본적인 풍경이었다. 그러나 사실 가장 일본적인 풍경은 활활 불타오르는 아소 산과 전국 시대 의 칼바람이 담겨 있는 구마모토 성이 아니라 그 살벌함과 함께 일상을 살았을 일본 사람들의 모습이었다. 지금도 언제 터질지 모르는 아소 산 자락 아래에서 평화롭게 농사를 짓고 소를 키우는 바로 그들의 모습이 가장 일본다운, 너무나 일본다운 모습이었다(p. 244). 이 책을 쓰고 그리게 된 계기에 대해 말하자면(p. 276) 최호철 선생과 나는 같은 직장(청강문화산업대학)에 다닌다. 둘 다 만화창작과 선생이다. 사람들을 만나 "학교에서 만화를 가르치고 있습니다"라고 말하면 꽤나 흥미로운 눈으로 바라본다. 마치 황제펭귄처럼. 낯설지는 않으나 내 주변에서 마주칠 때 경험하는 신기한 느낌이 드는 모양이다. 어쨌든 우리는 5월마다 찾아오는 불량 만화 화형식의 주홍글씨를 가슴에 새기지 않은 만화인들이다. 최호철 선생은 화가였다가 만화를 붙들었고, 나는 글쟁이였다가 만화를 붙들었다. 더 정확히 우리 둘은 모두 만화에 붙들린 사람들이다. 만화에 붙들린 사람들은 세계를 바라볼 때 만화적으로 본다. 일단 빈 종이가 있으면 무조건 그리고, 조금이라도 분위기가 추락하면 농담을 날리고 싶다. 전자가 최호철 선생. 후자가 나다. 하지만 둘 다 천성이 숫기가 많은 사람들은 아니다. 은근 부끄럼쟁이들. 그래서 낯선 이들하고 떠들고 노는 것보다, 친한 이들과 수다 떠는 것이 좋다. 그래서인지 청강문화산업대학 만화창작과 선생들은 보통 직장인들과 달리 사우나 아줌마 분위기를 풍긴다. 그 때문에 여행에 대한 기억이 꽤 많다. 최호철 선생은 여행지마다 그림을 그렸고, 난 최호철 선생의 화집을 뒤적이며 농담을 던진다. 그러던 어느 날. 학교에서 월간 무가지 〈백도씨〉를 기획할 때였다. "우리 여행 간 거 내가 글 쓰고, 선생님이 그림 그려보세요." "만화? 나 마감 잘 못하는 거 알잖아?" 일단, 방어막을 친다. 역시, 공력이 대단하다. "그냥 한 쪽짜리 그림을 그리자고요. 한 쪽짜리 만화, 그게 최호철 스타일이 잖아!" 나도 다시 공격한다. 왠지 느낌이 낚은 것 같다(p. 277). "한 페이지..." "한 페이지에 되도록 많은 이야기를 담는 게 최호철 스타일 아닌가?" 낚았다. 파닥파닥! 그렇게 해서 〈백도씨〉에 '두 만화쟁이의 여행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연재를 시작했다. 내가 낚은 죄로 글을 썼고, 최호철 선생의 애간장 다 태우는 마감에 동참했다. 몇 번 빼먹은 적도 있지만, 한 스무 번쯤 마감을 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났다. 우리가 한때 사슴굴이라고 불렀던 최호철 선생의 개성 넘치는 연구실 소파에 앉아 뒹굴면서 이야기를 하다 한번 책으로 묶어보자는 생각이 번득였다. 최호철 선생은 낙서라고 하지만, 그냥 묵히기 아까운 그림이 많은 그의 크로키 북이 생각났다. "〈백도씨〉에 연재한 만화하고, 그와 연관된 크로키를 모아서 책으로 묶어봅 시다." "재미있을까?" "재미없으면 사람들이 만날 선생님 크로키 북 달라고 해서 보겠어요." "너무 성의 없게 그렸잖아." "성의 있게 그리면 마감 못하잖아요." "..." "또 그냥 그 시간에, 여행지에서 그린 그림이 난 좋던데." "그럽시다." 그렇게 시작된 작업이다. 그림을 모으고, 글을 고쳐 썼다. 최대한 여행지의 느낌을 사람들이 느껴주길 원했다. 여행에는 휴식과 수다가 공존한다. 혼자 가는 여행을 좋아하는 이들도 있지만, 난 함께 수다 떨 수 있는 사람과 가는 여행이 좋다. 서로 말도 안 되는 지식을 공유하고, 느낌을 나누는 여(p. 278)행이 좋다. 이 만화는 그런 여행의 기록이다. 글과 함께 그림도 읽어주었으면 좋겠다. 최호철의 그림은 읽히는 그림이다. 그림으로 이야기를 하기 때문이다. 어느 순간, 크로키 북에 그린 사람이 아주 구체적인 당신의 모습이기도 하고, 당신이 바라본 그의 모습이기도 하다. 그림을 읽으며 우리의 여행에 동행하면 어떨까? 같이 수다 떨고, 맛있는 것도 먹고, 바보 같은 개그도 하면서 말이다. 남자들이라면 더더욱, 수다가 주는 세계 평화를 함께 누려보자(p. 2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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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4-08
  • 【북토크378】 짐승보다 못한 인간의 잔혹함
    〈무시무시한 처형대 세계사〉는 야욕과 애증, 배반과 음모로 뒤엉킨 잔혹한 처형의 역사를 들려주는 책이다. 「알고보면 무시무시한 그림동화」를 통해 그림 동화 신드롬을 일으킨 작가 기류 미사오가 이번에는 무시무시한 역사 속 처형의 현장으로 안내한다. 고대 로마 시대부터 근대 유럽까지 '인간'이라는 존재에 의해 자행된 처참하고 잔혹한 처형의 역사를 생생하게 복원하였다. 이 책은 역사 속 처형장을 통해 인간 내면세계에 깃들어 있는 광기의 역사를 살펴본다. 저자는 '인간은 과연 어디까지 잔인해질 수 있을까'라는 결코 가볍지 않은 물음을 던지면서, 다양한 이유 때문에 엄청난 피를 흘려 왔던 인류의 역사를 되짚어보고 있다. 그리고 황제들을 비롯한 수많은 권력자들과 신의 이름을 내건 종교인들이 역사 속에서 저지른 처형의 만행과 광기의 현장을 낱낱이 고발한다-교보문고. 흥미롭게 읽었는데 품절됐다. 이 저자의 책들이 재미있어 열심히 읽고 있는데 「알고보면 무시무시한 그림동화」도 대출했다. 이처럼 맹수를 이용한 처형 방법은 그리스도교가 보급되기 훨씬 전에 시작되어 5세기까지 계속되었다. 처음에는 죄수의 팔다리를 묶어 자유를 구속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죄수의 몸을 묶지 않고 자유로운 상태에서 간단한 무기도 사용하게 함으로써 관중들에게 더 큰 즐거움을 안겨 주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목숨을 잃기 전에 맹수를 한두 마리쯤 해치우는 강한 죄수도 나타났다. 어쨌든 죄수와 맹수의 싸움은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긴장감으로 관중들에게 꽤 인기를 끌었다. 좀 더 시간이 흐르면서 죄수의 처형은 일종의 연극으로 연출되었다. 예를 들면, 죄수를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프로메테우스로 분장시켜 쇠사슬로 바위에 묶은 다음 대머리 독수리에게 간을 쪼이게 한다거나, 헤라클레스로 분장한 죄수가 곤봉을 들고 나와 황소와 싸우다가 클라이맥스에서 황소가 죄수를 허공으로 던져 버리는 식이었다. 그리고 여자 죄수가 생겨나면서 연극 마지막 부분에 음탕함의 상징으로 알려져 있는 곰이나 당나귀의 습격을 받는다는 설정도 선보였다고 한다(p. 23). 콜로세움에서 펼쳐진 다양한 잔혹극 역대 황제들의 입장에서 볼 때, 검투사 경기는 범죄자나 반역자의 잔혹한 죽음을 선보이는 것으로써 황제의 권력을 뒤흔들려 하는 자는 결코 용서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서민들에게 확실히 보여 주는 기회이기도 했다. 로마 콜로세움 안에는 지금도 십자가가 서 있다. 일찍이 이곳에서 수많은 잔혹한 방법으로 목숨을 잃은 그리스도교도들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함이다. 그들은 타르에 적신 셔츠를 입은 채 콜로세움으로 끌려가 화형에 처해졌다. 또는, 팔다리가 묶인 채 커다란 솥 안에서 끓는 기름에 튀겨지거나 끓는 물에 삶아지기도 했다. 성 로렌스(Sento Rorense)는 석쇠 위에서 불에 구워졌고, 성 포류카르프는 화형대 기둥에 묶인 채 불에 타 죽었다. 성 폰시아노(Sento Pontianus)는 쓰러질 때까지 벌겋게 달구어진 석쇠 위를 걸어야 했고, 성 아르테 미오(Artemius)는 맷돌에 몸이 으깨져 죽었다. 손발이 잘려 나가거나 내 장이 몸 밖으로 드러난 채 매달린 자들도 있었다. 또, 살가죽이 벗겨진 채 유리 조각 위에서 끌려 다닌 자도 있었다. 콜로세움에서 남녀 수십 명이 한꺼번에 기둥에 묶여 처형된 적도 있는데, 그 광경이 마치 나무들이 줄지어 늘어선 숲처럼 보였다고도 한다. 관중들은 그 중에서 누가 가장 먼저 숨이 끊어질지를 놓고 내기를 하기도 했다(p. 24). 당연히, 역대 황제들도 콜로세움에서 펼쳐지는 잔혹한 피의 향연을 더할 나위 없는 즐거움으로 여겼다. 예를 들어 카이사르(Caesar)는 기원 전 65년 안찰관이었을 때 검투사들을 320쌍이나 동원해 성대한 검투사 경기를 개최했으며, 아우구스투스(Augusus) 황제도 검투사를 1 만 명 정도 동원해 검투사 경기를 여덟 차례, 맹수 3,500마리를 이용해 맹수 사냥을 스물여섯 차례나 개최했다. 클라우디우스 1세(Claudius I) 황제 시대에는 한 경기장에서 검투사 500쌍이 동시에 겨루는 일도 흔했다. 잔혹한 취미가 있었던 클라우디우스 1세는 목이 잘린 검투사의 얼굴을 자세히 볼 수 있도록 일부러 죽은 자의 투구를 벗기게 했다고 한다. 칼리굴라 황제 시대의 검투사 경기는 잔혹한 취미를 끝없이 만족시키기 위한 절호의 수단이었다. 맹수 사냥에서는 범죄자를 짐승의 먹이로 던져 주었고, 검투사 경기에 출전해야 한다는 선고를 받은 죄수가 필사적으로 자비를 호소하면 그 혀를 잡아 빼라고 명령한 다음에 온몸의 상처가 곪아 악취를 견딜 수 없을 때까지 채찍으로 때리게 했다. 그리스도교도 박해로 유명한 폭군 네로도 30일에 걸쳐 잇따라 경기를 열었다. 그는 맹수를 풀어놓아 어린이를 포함한 5,000명을 물어 죽이게 했다. 새로운 것을 좋아한 도미티아누스(Domitianus) 황제는 로마 제국 안에 존재하는 난쟁이들을 모조리 모아 검투사 집단을 만들게 했다. 그리고 미녀들로 이루어진 검투사 집단도 만들게 해서 경기장에서 난쟁이와 미녀를 싸우게 한 뒤 그것을 최고의 유흥으로 삼았다고 한다. 코모두스(p. 25)(Comedits) 황제에 이르러서는 아예 정치를 총애하는 신하에게 맡겨 버리고 검투사 경기에만 열중, 자기 자신도 검투사로 자주 경기에 출전했다. 그런 그가 음모를 품은 검투사 한 명에게 침실에서 암살당한 것은 운명의 장난이었을까?(p. 26). 사실은 이랬다. 불길이 번지는 상황에서 수상쩍은 남자 몇 명이 술에 취한 척 비틀거리면서 '어떤 자는 이쪽, 어떤 자는 저쪽' 하는 식으로 햇불을 이용해 불을 붙이는 모습이 목격되었던 것이다. 로마 시대의 전기 작가인 수에토니우스(Gaius Suetonius Tranquillus)에 따르면, 이 수상쩍은 무리가 네로의 노예들이었기 때문에 집정관도 제지할 수 없었다고 한다. 폭력의 피해자 어쨌든, '네로가 방화를 명령했다'라는 소문이 흘러나오면서 민중들 사이에서는 당장에라도 폭동이 일어날 듯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그러자 네로는 소문을 불식시키려고 방화범을 만들어 내기로 했다. 그리고 그 제물이 된 것이 바로 그리스도교도들이었다. 당시 그리스도교도들은 이단시되어 마법을 부리고 유아를 살해하고 인육을 먹는다는 식으로 중상모략을 당하고 있었다. 아무리 엄격한 금지 정책을 펴도 계속 증가하는 그리스도교도 때문에 고민하고 있던 터라 네로는 이번 화재를 구실로 그들을 철저하게 탄압하려고 마음먹었던 것이다. 먼저 신앙을 고백한 자들이 심문을 당했고, 이어서 그들의 고백을 토(p. 67)대로 수많은 사람들이 방화죄 혐의를 받았다. 순교자들 중에는 사도 바울로와 12사도인 베드로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들은 놀림감이 되었으며, 상상을 초월하는 잔혹한 방법으로 살해당했다. 어떤 이는 짐승의 가죽을 덮어쓴 채 개 떼에게 내던져져 물려 죽었고, 어떤 이는 원형 경기장에 맹수의 먹이로 던져지기도 했다. 또 어떤 이는 온몸에 타르가 발라진 상태에서 기둥에 묶여 날이 어두워진 뒤 등불 대신 불을 밝히게끔 했다. 네로는 처형 장면을 구경하라며 바티카누스 (vaticanus) 왕실 정원을 제공해 전차 경기까지 개최하면서 흥을 돋우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처럼 이단자들을 처형한다는 명분도 네로의 인기를 돌이킬 수는 없었다. 특히 귀족들이 불만을 품은 것은 노예에서 해방된 자들이 점차 제국의 요직을 독점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었다. 화재 뒤처리 등으로 인해 그 해의 국고는 막대한 재정 부담을 안게 되었고 그 결과 재산 몰수라는 극단적 상황에 의지할 수밖 에 없었다. 때문에 다시 막을 연 반역죄 재판의 판결은 모두 유형이나 사형이었다(p. 68). 14~17세기 유럽에서는 마녀로 여겨지는 사람들을 끊임없이 체포해 가혹한 고문을 한 뒤 화형에 처했다. 이러한 마녀 재판의 폭풍은 약 300년 동안 이어지면서 유럽 전역에서 맹위를 떨쳤다. 그 기간 동안 목숨을 잃은 사람들이 수십만에 이른다는 설도 있고, 수백만이라는 설도 있다. 정확한 수는 알 수 없지만, 마녀로 지목되어 화형을 당한 희생자에 대한 기록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 프랑스 로렌(Lorraine)에서 1576~1606년 동안 2000~3000명. 보르도에서 1577년에만 400명. • 독일 트리에르(Trier)에서 1587~1593년 동안 368명. 뷔르츠부르(p. 121)크에서 1623~1631년 사이에 900명. 밤베르크에서 1623~1633 년 사이에 600명. 이것만 보아도 마녀 재판의 희생자가 엄청난 숫자라는 사실을 짐작 할 수 있다. 유럽 전체에서는 15세기 말부터 18세기 초까지 약 30만 명(900만 명이라는 설도 있다)이 화형을 당했다는 기록이 있다(p. 122). 마녀를 불태우는 검은 연기가 유럽 하늘을 끊임없이 뒤덮고 있었던 것이다.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등골이 오싹해지는 이야기다. 당시, 불안감을 해소하는 돌파구로 선택된 것이 '마녀'였다. 사람들은 이 세상의 모든 불행과 해악을 마녀 탓으로 돌려 잔혹하게 처형했다. 마녀 사냥이 무서운 것은 증거 없이 소문과 풍문만으로도 마녀로 몰릴 수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마녀 재판이 성행했던 원인으로는 첫째, 당시의 사회 불안을 꼽을 수 있다. 당시, 유럽인들은 예전에는 겪지 못했던 혹독한 상황에 빠져 있었다. 유럽 인구의 30퍼센트 정도를 앗아간 페스트의 유행, 극단적인 인플레이션, 종교 개혁 운동 등, 격동의 상황에서 민중들의 불안감은 날이 갈수록 심화되고 있었다. 답답하기만 한 그런 현실의 불안감을 해소하는 창구로 선택된 것이 바로 '마녀'였다. 마녀는 마력을 써서 날씨를 나쁘게 만들고, 밭농사의 수학물을 줄이고, 태아를 유산시키고, 남자를 성불구로 만들고, 갓난아기를 잡아먹고, 악마에게 살아 있는 제물을 바친다..... 이런 식으로 세상의 모든 불행과 해악을 마녀 탓으로 돌렸다. 유럽에 휘몰아친 종교 개혁 운동에 대해 로마 교황은 수도회를 결성해 이단 탄압에 나섰다. 마녀 재판의 전신은 13세기 로마 교황 그레고리우스 9세가 탄생시켰다. 이른바 '이단 심문' 제도다. 이단 심문관은 교황의 보호 아래 사교나 관헌을 능가하는 권한을 가지고 오로지 그리스도교 국가 전역에서 이단을 박멸하는 사명을 맡았다(p. 123). 그리고 잔혹하기로 유명했던 요한 22세가 내린 1318년 2월 27일 교서에서 '마녀'의 비참한 운명이 결정되었다. 프랑스 고위 성직자 앞으로 보낸 이 교서에는 이러한 내용이 쓰여 있었다. '언제 어디서든 마녀 재판을 시작하고 지속하여 판결을 내릴 수 있는 완전한 권한을 부여한다.' 이 마녀 재판 해금 명령에 박차를 가하듯, 교황 요한 22세는 1323년, 1326년, 1327년, 1330년, 1331년에 계속 마녀 재판 강화 명령을 발표 했다. 이 강화 명령에 따라 이단 심문관의 마녀 사냥이 급격하게 기세를 떨치기 시작했다(p. 124). 마녀 재판 그 자체도, 심문, 자백의 공술(고문을 통한 자백도 포함해서), 단죄 선고, 그리고 처형(대부분이 화형)이라는 식으로 공식화되어 있었다. 중요한 것은 피고를 한시라도 빨리 죽여 그 재산을 몰수하는 것이었다. 마녀에게서 몰수한 재산은 모두 교회 소유가 되었고, 마녀 재판에 들어가는 비용 전부를 여기에서 조달했다. 간수의 식대, 처형 담당자의 술값, 교살을 할 때 들어가는 밧줄 대금, 화형을 할 때 쓰는 장작과 기름값 등, 모든 비용을 여기에서 인출해 썼던 것이다(p. 165). 기요틴에 광란하는 사람들 로베스피에르를 처형하는 것으로 공포 정치가 막을 내리자, 국내의 무거운 공기는 사라지고 단번에 향락적인 분위기가 퍼지게 되었다. 사람들은 다양한 장소에 모여 오직 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추었다. 피비린내 나는 과거를 잊고 희망 없는 미래에서 눈을 돌리기 위해. 거리 도처에서 무도회가 열렸는데, 특히 인기를 모았던 것은 회원이 한정되어 있는 '희생자들의 무도회'였다. 가까운 친척이 기요틴에 처형을 당한 사람들만 이 모임에 참가할 수 있었다. 이 무도회에 참가하려고 일부러 큰돈을 주고 근친자가 기요틴에 처형되었다는 증명서를 위조하는 사람들도 속출했다고 한다. 모임에서 여자들은 머리카락을 틀어 올리고 훤히 드러난 목 주위에 칼자국을 모방한 빨간 리본을 묶었다. 남자들도 머리카락을 짧게 깎고 마찬가지로 빨간 리본을 목에 둘렀다. 그 모습을 보고 사람들은 눈살을 찌푸렸지만 그들 입장에서 보면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현실을 받아들여 슬픔을 이겨내고 살아가려면 이런 식으로 불행을 패러디하는 수밖에 없었는지도 모른다(p. 298). 마지막 공개 처형 프랑스에서 기요틴을 이용한 처형은 오랜 세월 동안 일반에게 공개 되었다. 그때마다 형장에는 프랑스 각지의 수많은 구경꾼들이 모여들었다. 그들 입장에서 볼 때 처형은 최고의 스트레스 해소 방법이었다. 1889년의 파리 만국 박람회 때에는 기요틴에 처형을 당한 사람이, 당시에 신축된 에펠탑보다 더 화제가 되었다고 한다. 피와 잔혹함에 대한 인간의 열광은 그 뿌리가 무척 강한 듯싶다. 프랑스에서의 마지막 기요틴 공개 처형은 1939년 와이트만이라는 살 인범의 처형이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축제 소동이 벌어지자 정부는 두 번 다시 같은 일을 되풀이하지 않겠다고 결의했다고 한다. 처형 전날 밤, 형장이 될 베르사유 감옥 앞 광장에는 엄청난 군중들이 모여들었다. 기요틴 처형을 한 번이라도 직접 구경하려고 나무와 가로등에 매달린 사람들, 건물 창문에 바짝 얼굴을 들이대고 있는 사람... 사람들은 마치 축제라도 즐기는 듯한 기분으로 술잔을 기울이고 음악에 맞추어 노래를 부르거나 춤을 추면서 소란스럽게 전야제를 보냈다. 가끔씩 말 잘하는 사람이 농담을 던지면 사람들이 웃음을 터뜨렸는데, 그 소리가 감방 안에 있는 사형수의 귀에도 들렸다니 정말 잔혹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그러자 정부도 더 이상은 간과할 수 없어 그 뒤로는 기요틴 공개 처형을 금지했다. 이후의 처형은 각각의 감옥이 위치한 안마당에서 이루어(p. 300)졌으며, 처형에 참가할 수 있는 사람은 관료 아홉 명뿐이었다. 잔혹함의 상징인 기요틴 처형대는 감옥의 담장 안으로 모습을 감추었고, 두 번 다시 사람들에게 공개되지 않았다(p. 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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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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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토크333】 애도하는 이 없는 죽음이 늘어간다
    무연고사망자의 장례가 늘어나고 있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한 사람의 인생이 아무도 애도하는 자 없이 소멸된다. 그것을 국가적으로 책임 맡고 있는 사람이 쓴 책이라 흥미롭게 읽었다. 그리고 그것이 남의 일이 아니라는 것을 절감했다. 시대가 변하고 있는 가운데 장례도 변하고 있다. 서울시는 2020년에 665명, 2021년에 856명의 무연고사망자의 장례를 치렀다. 2022년에는 1,000명을 넘겼다. 나눔과나눔은 이 모든 장례를 지원하며 머지않은 미래에 파도가 들이닥칠 것을 예감했다. 파도는 조금씩, 하지만 꾸준하게 몸집을 키우고 있었다. 자연히 소멸될 잠깐의 파문 따위가 아니라 는 듯이(p. 5). 무연고사망자는 누구일까? '무연고사망자'는 대체 어떤 사람일까? 세상에 어떤 사람이 아무런 연고 없이 죽을 수 있을까? 부모 없이 태어나는 사람도 있나? 가족은 그렇다 쳐도, 친구나 지인 없이 평생을 살 수도 있나? 사람들은 무연고사망자라는 단어에 막연한 안타까움을 느끼면서도 그것이 정확히 어떤 뜻을 가졌는지는 잘 모른다. "고독사와 비슷한 것 아닌가요?" 무연고사망자의 장례를 대신 치르는 일을 하며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다. 대부분의 기자들이, 심지어는 논문을 쓰기 위해 나눔과나눔 사무실로 찾아온 학자들조차 무연고사망자에(p. 18) 대한 정확한 정의를 모르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그렇다면 어떤 경우를 무연고사망자로 보는 걸까? '장사 등에 관한 법률'과 보건복지부의 〈장사 업무 안내〉에 따르면 크게 세 가지 경우가 존재한다. 1. 연고자가 없는 경우 2. 연고자를 알 수 없는 경우 3. 연고자가 있으나 시신 인수를 거부 또는 기피하는 경우 '연고자가 없는 경우'나 '연고자를 알 수 없는 경우'는 '장사 등에 관한 법률'에 나와 있으며, '연고자가 있으나 시신 인수를 거부 또는 기피하는 경우'는 보건복지부의 〈장사 업무 안내〉에 명시되어 있다. 그런데 이 세 가지를 한 번에 이해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사례를 통해 한번 살펴보도록 하자. 첫 번째, '연고자가 없는 경우'는 말 그대로 '장례를 치를 수 있는 연고자가 아무도 없는 경우'를 뜻한다. 고인은 가정을 꾸리지 못한 고아일 수도 있고, 북한이탈주민일 수도 있다. 혹은 너무 오래 살았을 수도 있다. 여기서 너무 오래 살았다는 말은, 다시 말해 그 어떤 가족보다 오래 살아서 고인의(p. 19) 장례를 치러 줄 가족이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백세가 넘어 돌아가신 분의 제적동본에 손자와 손녀까지 모두 사망했다고 기록되어 있는 경우, 이분은 무연고사망자에 해당되는 것이다. 두 번째, '연고자를 알 수 없는 경우'는 '고인의 신원을 파악할 수 없는 경우'를 말한다. 백골 상태 혹은 사망한 뒤 너무 늦게 발견되어 시신의 부패 상태가 심하면, 신원 확인이 어렵기에 그 가족 역시 찾을 길이 없다. 세 번째, '연고자가 있으나 시신 인수를 거부 또는 기피하는 경우'는 말 그대로 이해하면 된다. 고인의 장례를 치를 권리와 의무를 가진 연고자가 있음에도, 가족 관계 단절이나 경제적인 어려움 등의 이유로 연고자가 시신처리위임서를 작성해 명시적인 '거부'를 하는 경우이다. 또한 장례 의사 여부를 묻는 공문을 보내고 14일이 지날 때까지 연고자가 답을 하지 않는 경우, 행정주체는 '기피'로 이해하고 시신처리위임서를 받은 것과 동일하게 행정 처리를 할 수 있다. 안타깝게도, 이렇게 연고자가 시신 인수를 거부 또는 기피하는 경우는 전체 무연고사망자 통계의 70퍼센트 이상을 차지한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세상에 가족 없는 사람은 없으니까, 자신을 제외한 모두가 죽었거나, 가족이 누구인지 알 수 없는 경우는 있어도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세상에 혼자 존재하는 사람은 없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그렇다면 앞서 언급 된 '연고자'는 누구를 가리키는 걸까? 이 일을 시작할 때까지만 해도 나는 연고자의 범위를 사촌까지로 생각했다. 사랑하는 사촌 조카를 위해서라면 내 목숨도 내어 줄 수 있기에, 당연히 사촌은 내 연고자의 범위 안에 들어와 있었다. 그런데 법률이 정하는 연고자의 범위는 훨씬 협소하다. 가. 배우자 나. 직계비속 다. 직계존속 라. 자녀를 제외한 직계비속 마. 부모를 제외한 직계존속 바. 형제자매 '장사 등에 관한 법률'에 따르면 조카와 나는 가족이 아니다. 다시 말해 조카는 나의 장례를 치를 수 없는 것이다. 이렇게 나처럼 연고자의 범위를 잘못 알고 있는 사람들은 생각보(p. 21)다 많다. 삼촌이나 이모, 혹은 조카의 장례를 치르려고 할 때 경찰과 장례식장, 지자체에서 "당신은 그럴 권한이 없다."라고 하면서 막았다는 이야기를 심심치 않게 듣고는 하니까 말이다. 이쯤 되자 '장례 치르기 너무 힘든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생각은 '과연 나는 무연고사망자가 안 될 수 있을까?' 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나는 현실적으로 생각해야만 했다. 내 계획은 이렇다. 결혼은 하고 싶지만 자녀를 낳아 양육할 생각은 없다. 삶이 계획대로 흘러가 자녀 없이 혼인관계를 유지한다면 나에게 남은 법률상 가족은 배우자와 동생뿐이다. 만약 그 둘보다 빨리 죽는다고 해도 그들이 내 장례를 치를 수 있을지는 확신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나는 미래의 내 장례를 위해 필요한 것들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기 위해 경우의 수를 따져 봤다. 첫째, 부모님보다 먼저 사망할 경우, 부모님은 나의 장례를 치를 여력이 충분할뿐더러 형제자매도 많기에 모든 절차와 비용을 두 분이서만 책임질 필요가 없다. 둘째, 법률혼 관계의 배우자를 두고 사망할 경우, 만약 평군 수명까지 생존한다면 법률혼 관계의 배우자가 있어야 하고, 배우자보다 빨리 사망해야 한다(p. 22). 셋째, 자녀를 두고 사망할 경우, 배우자가 먼저 사망하더라도 자녀가 남아 있다면 무연고사망자가 되지 않을 수 있다. 넷째, 배우자 또는 자녀가 없거나 모두 사망할 경우, 나는 동생보다 먼저 사망해야 한다. 만약 위 조건들이 충족된다면, 나는 사망 전에 평균 장례 비용에 준하는 돈(2018년 기준 1,380만 원)만 마련해 두면 된다. 단, 사망진단서를 발급받으려면 병원비를 모두 납부해야 하는데, 이때 병원비 정산에 무리가 없도록 최대한 빨리 사망 하거나 보험 적용이 되어야 할 것이다. 물론 이 모든 것은 나의 장례를 치러 줄 만큼 연고자들과 우호적인 관계가 유지되어야 하는 것이 전제된다. 내가 사망할 때까지. 내가 어머니, 아버지보다 오래 살 확률이 높을 것이니, 지금 시점에서만 보면 내 장례를 치를 권리와 의무를 가진 사람은 동생 한 명뿐이다. 앞으로 결혼을 할 수 있을지도 불투명 하고, 결혼을 해도 자녀를 양육할 마음이 없기에 배우자나 동생보다 먼저 사망하지 않는 한 나는 무연고사망자가 된다. 그리고 지금이야 동생과의 관계가 나쁘지 않지만 만약 미래에 어떠한 이유로 우리가 떨어진다면, 나에게 남은 '장사 등에 관한 법률'상 가족은 아무도 없게 된다. 그러나 설령 모든 조건이 맞아떨어져도 돈이 없으면 아무(p. 23)것도 할 수 없다. '아, 지금 내 예금 계좌에 얼마가 있더라?' 정리를 다 하고 보니 머리가 어지러웠다. 무연고사망자의 장례를 치르면서 알게 된 것이 있다. 이 땅에서 잘 살았는지, 못 살았는지의 여부가 삶의 마지막을 결정짓지 않는다는 점이다. 비혼 인구와 자녀를 갖지 않는 딩크족이 점점 늘어나고 있는 추세다. 따라서 제도가 변화되지 않는다면, 즉 장례에 공공성이 담보되지 않는다면 무연고사망자는 지금까지 그래 왔던 것처럼 계속해서 증가할 것이다. 지금의 청년들이 노인이 된다면 사회는 전례 없는 무연고사망자의 숫자를 보게 될 수도 있다. 무연고사망자가 되는 일은 너무 쉽다. 그리고 앞으로는 더욱더 쉬워질 것이다. 지금의 제도와 사회적 편견은 사망자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와 상관없이 그들의 이름 앞에 '무연고'라는 단서를 붙이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무연고사망자는 낡은 '가족주의'와 공공성이 전혀 담보되지 않는 '장례' 라는 영역의 교집합이 만들어 낸 시대의 피해자이다. 고인에게 어떤 인연이 있었는지도 모른 채 죽음 이후(p. 24)에 장례를 치를 가족이 없다는 이유로 "당신은 아무런 연고가 없었다."라고 무심히 낙인을 찍는다. 이것이 우리 사회의 제도라고 하면서. 그 낙인으로 인해 사람들은 오랫동안 무연고 사망자를 애도할 가치가 없다고 여겼다. 하지만 이는 잘못된 인식이다. 무연고사망자는 애도를 받아야 한다. 그리고 이 사실을 말하는 것, 그게 나눔과나눔이 하는 일이다(p. 25). 나는 외부에서 강의를 할 때 마지막으로 이 주제를 꺼낸다. '만약 극악무도한 범죄자의 공영장례의뢰 공문이 접수된 다면, 우리는 그 사람의 장례를 치러야 할까?' 그럴 때 사람들의 의견은 제각각이다. 장례를 해야 한다는 사람도 있고, 하지 말아야 한다는 사람도 있고, 자신은 차(p. 230)마 할 수 없을 것 같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이 책에 언급된 고인들 중 무결한 사람은 없다. 어떤 사람은 범죄자였을 수도 있다. 심지어 극악무도한 범죄자였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나는 그들 모두에게 애도받을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고인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도받을 권리가 있다는 나의 말에 동의하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이 질문은 이 책을 읽는 사람들의 몫으로 남기려고 한다(p. 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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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1-19
  • 【북토크332】 죽으면 어떠한 장례 절차가 이어지는가?
    흥미롭게 읽었다. 많은 것을 새롭게 알게 되었다. 죽음 이후에 여러 단계의 장례 절차가 있다. 거기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한 이야기라 관심있게 읽었다. 좋은 죽음을 원한다. 하지만 어떤 죽음이 올지 모른다. 불확실하기에 바람은 더 간절하다. 그런데 무엇을 좋을 죽음이라 할 수 있을까. 2020년 보건복지부 노인실태조사에 따르면 노인들이 바라는 죽음은 가족이나 지인에게 부담을 주지 않고, 신체적•정신적으로 고통이 없는, 스스로 정리하는, 가족과 함께 맞이하는 죽음이다. 그렇다면 '좋은 죽음' 저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이 바라지(p. 29) 않는 죽음은 이런 것이겠다. 외로운 죽음, 비참한 죽음, 갑작스러운 죽음. 이 세 종류를 피한 죽음을 두고 나이가 제법 있는 사람들은 호상이라고 부른다. 젊은 사람들에겐 여기에 존엄사라는 상상력이 더해진다. 호상(好喪). 천수를 누린 복된 죽음. 살 만큼 살다가 때가 되어 잠을 자듯 맞는 죽음을 뜻하는 이름이다. 그러나 아무리 천수를 누린 이라도, 그의 장례에 가서 함부로 '호상'이라는 말을 쓰지 말라고 했다. 고인 본인에게 좋은 죽음(호상)은 있을지라도, 남겨진 이들에게 좋은 죽음은 없기 때문이다. 곁에서 지켜보는 죽음은 늘 갑작스럽다. 물론 현실은 이리 애틋하지만은 않다. 내가 한때 머물던 지역엔 유명한 요양병원이 있었다. 입소 예약이 줄을 이었다. 시설이나 치료 효과가 좋아서가 아니었다. 어찌 보면 그 반대다. 그 병원에 들어가면 노인들이 오래 살지 못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증명이라도 하듯 병상이 빠르게 비었다. '회전율'이 이토록 좋은데도 예약 대기자가 늘 많아 병실이 금세 채워진다고 했다. 요양병원 입원 비용은 월 200만 원 선, 간병인 하루 비용은 10만 원을 웃돈다. 죽으면 끝이라 하지만, 빚은 대를 이어 남는다. 현실은 현실이다. 오늘날 사람들은 병원이나 시설에서 죽고, 그건 생의 마지막 까지 돈을 쓰다가 간다는 말이기도 했다(p. 30). 비석과 마을 세상의 잔혹함은 곳곳에 있다. 부산의 비석마을도 그중 하나다. 지금은 비석문화마을이라 불리는 이 마을 이야기를 하려면 19세기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개항 직후 조선에 온 일본인들은 가까운 부산에 자리를 잡았다. 일제강점기에 들어서자 이주 규모는 더 커졌다. 일본 정부의 적극적인 이주 권장 정책이 있었다. 화장이 주된 장법인 나라 사람들인지라 일본인들만이 사용하던 화장터도 세워졌다. 처음에는 민간업자들이 작게 운영하던 것을 총독부가 주도해 최신 설비를 갖춘 화장장과 유골 무덤으로 조성한 것은 1928년. 임시 거주가 아니라 대를 이어 일본인들을 조선에 정착시키기 위한 정책이었다. 그렇게 공동묘지와 화장터가 부산 서구 아미동 일대에 세워진다. 아미동은 지대가 높은 언덕에 자리한 마을인데, 공동묘지가 이토록 고지대에 세워진 까닭은 거주민 조선인들의 반발이 있었기 때문이다. 부산 사람들의 주 거주지인 부두와 멀리 떨어진 곳으로 공동묘지가 밀려 올라간 것이다. 1945년 해방이 되고, 일본인들이 자국으로 물러가면서 일본인 묘지에는 잡초가 무성했다. 묘를 쓸 돈이 없는 사람들이 몰래 시신을 놓고 가는 일이 적지 않았다. 몇 년 지나지 않아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부산에 피란민들이 몰린다. 당시 47만여 명이던 인구가 순식간에 84만 명을 넘어섰다고 한다. 곳곳에 피란민들의 임(p. 214)시 거주지가 생기자 부산시는 1953년 도시 정비 계획을 앞세워 빈민촌을 철거하기 시작했다. 부두 주변에 거주했던 이주민들은 터전을 잃고 언덕을 오른다. 오르고 올라 도착한 곳이 아미동 공동묘지 터다. "피란민들이 전부 그쪽으로 와서 기거를 하고 있으니까 시에서 천막을 준 거예요. 그러니까 쪼그마한 천막이 아니고 아주 큰 거를 갖다가 옛날에 거기가 공동묘지 산등성이었잖아요. 근데 글로 올라가서 인제 살아라. 이 천막 세 개를 주고 살아라 하니까 이 사람들이 참 기구하잖아요. 공동묘지에 가서 이거 천막을 그냥 치고 살으라 하니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일본인 무덤 위에 집을 짓기 시작했다. 화강암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무덤은 단단한 벽과 바닥이 되어주었고, 유골함이 자리했던 광중은 아궁이 역할을 했다. 비석이 지천에 널려 있어 자재 걱정이 없었다. 다만 죄책감과 두려움이 따라올 뿐이었다. 비석의 이름을 페인트로 덧칠해 그 흔적을 지워보았지만, 그 이후 수십 년간 아미동에는 기모노를 입은 일본 귀신과 도깨비불 이야기가 전해져 왔다. 죽은 이의 자리에 산 사람의 자리를 만든, 불편하고도 체념적인 공존이 귀신 이야기가 되어 돌아왔다. 대를 잇는 빈곤이야말로 사건•사고를 불러오기 좋은 조건이었는데도, 어떤 집에 우환이 닥치면 마을 사람들은 그 자리가 어느 무덤 자리였는지를 떠올렸다. 1990년대, 아미동 주민들은 남은 묘석들을 모아 5층 석탑을 세우고 천도재를 지낸다. 이후로 사고가 줄었다고 했다. 실제 줄어든 것은 마을 사람들의 불편한 마음일 거라 짐작해본다. 죽은 이의 자리 위에 산 사람 집터를 닦는 일이 흔하진 않지만,(p. 215) 세상은 언제나 그렇듯 죽은 이와 산 사람이 공존하는 공간이다. 작고한 이어령 선생은 이런 말을 했다. "영혼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유리컵 안의 빈 공간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라고 (정확히는, 이어령 선생에게 마지막 수업을 듣겠다고 찾아간 김지수 작가의 입을 빌려 정리 된 문장이다). 선생은 빈 곳을 모른 채 유리컵에 물을 가득 채우겠다고 하는 어리석은 범인들을 안타까워했다. 그렇지만 사람은 유리컵이 넘치도록 찰랑이는 물 때문에 살아간다. 찰랑대는 마음이 없다면 무덤 위에 집을 짓고 생존을 도모할 수 없다. 하지만 그의 말대로 물은 곧잘 넘쳐흘러, 비석마을은 숱한 재개발을 겪으며 옛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비석이 있던 자리에는 아파트가 들어섰다. 나이 든 주민들은 하나둘 떠나 한 집 걸러 빈집이다. 귀신은 그들을 그곳에 살게 했지만, 사람은 그들을 그 곳에 살 수 없게 했다. 물은 언제나 가득 차 찰랑인다. 한편으론, 애초 물이 가득 찬 컵 같은 것은 없다. 가득 채워진 것처럼 보이는 물조차 그 안에서 분자들은 저마다의 거리를 유지하고 있다. 그 틈 사이로 도깨비불 이야기를 전하는 사람들의 두려움이, 광중에 아궁이를 짓고 그 아궁이에 물 한 바가지 올려 조왕신에게 비는 기도가, 비석으로 5층 석탑을 쌓아 올려 한숨 돌리던 얕은 위안이 담긴다. 그저 공존할 뿐이다(p. 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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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1-16
  • 【북토크331】 절대적 기준이 사라질 때 인간은 폐지된다
    루이스의 책을 처음 읽은 것이 대학에선지 신대원에선지 잘 모르겠다. 하나 분명한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그의 책은 쉽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 많은 세월 동안 나의 지적 능력은 그리 성장하지 않은 것인가하는 자괴감에 빠진다. 할 수 없다. 이것이 내 사고구조의 한계일수도 있다. 예를 들어 철학은 관심이 많았지만 이해하기 쉽지 않았던 것과 같다. 결국 책 뒤에 있는 해설을 통해 이 책에 대한 이해도를 높일 수 있었다. 이 책에서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상대주의 등 절대적인 것을 버리고 다른 것을 추구하고 따를 때 결국 인간은 폐지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이미 보고 있다. 어떤 이들은 제가 그 조작자들에 대해 인위적인 난제를 일부러 꾸며 대는 것처럼 볼 수도 있겠고, 생각이 더 단순한 이들이라면 이렇게 비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아니, 왜 당신은 그들을 그렇게 나쁜 사람들로 가정합니까?" 그러나 정말이지 저는 그들을 나쁜 사람들로 가정하고 있지 않습니다. 나쁜 사람들이라기보다는, 그들은 (옛 의미에서 볼 때) 아예 사람이 아닙니다. 달리 표현하자면, 그들은 앞으로 '인간성'이 어떤 의미여야 하는지를 결정하는 일에 헌신하기 위해 전통적인 의미의 인간이기를 스스로 포기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는 '선'이니 '악'이니 하는 것은 무의미한 말에 지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단어들의 내용을 이제는 그들 자신이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또 그들의 난제 역시 인위적인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결국 우리들 대부분이 원하는 것은 동일합니다. 먹을 것과 마실 것, 섹스, 오락, 예술, 과학 그리고 개인과 종의 가능한 최대의 수명 등. 간단히 말해서, 이런 것들이 우리가 좋아하는 것이고, 그 조작자들은 그런 것들을 가장 잘 만들어 낼 수 있도록 사람을 조건화한다는 것인데 문제될 게 뭡니까?"(p. 76). 그러나 이는 답이 못 됩니다. 우선, 우리가 모두 동일한 것을 원한다는 말 자체가 거짓입니다. 설령 원한다 치더라도, 대체 어떤 동기로 그 조작자들이 후손이 원하는 것을 갖게 하기 위해 자신들의 쾌락은 포기하고 힘들여 일하겠습니까? 의무 때문에? 그러나 의무라는 것은 '도'이며, 그들이 임의대로 우리에게 '도'를 부과 할 수는 있어도 그들 자신에게는 구속력을 갖지 못합니다. 만일 그들이 그 '도'를 받아들인다면 그들은 양심의 제작자가 아니라 종속자라는 말이고, 이는 그들의 최종적 자연 정복이 실제로는 아직 완결되지 않았다는 말이 됩니다. 종의 보존을 위해서? 그러나 도대체 종이 보존되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후손들에 대한 이 러한 느낌-만들어 내는 법을 그들이 잘 알고 있는-이 계속되게 만들어야 할지 여부 역시 그들 앞에 놓인 질문 중의 하나일 뿐입니다. 제아무리 뒤로, 아래로 가 보아도 그들이 발 딛고 설 근거를 발견할 수 없습니다. 자신들의 행동 동기라고 제시하는 것은 모두 논점회피일 뿐입니다. 그들은 나쁜 사람인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아예 사람이 아닙니다. '도' 바깥으로 나갈 때 그들은 허공 속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그들의 지배를 받는 이들이 꼭 불행한 사람인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아예 사람이 아닙니다. 그것은 제품일 뿐입니다. 이렇게 인간의 최종 정복은 결국 인간의 폐지 abolition of Man를 의미합니다(p. 77). 해설 상대주의 문명에 던지는 반성적 통찰 - 박성일 C. S. 루이스를 낭만주의자라고 부른다. 어떤 이들은 그를 좀더 균형 있게 평가하려고 고민하며, 모순 같으나 그에게 낭만주의적 이성주의자 Romantic Rationalist라는 이중적인 정체성을 부여하기도 한다. 어쨌든 그가 낭만주의적 성향을 갖고 있다는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낭만주의라 하면, 18세기 말에 유럽을 휩쓸었던 철학 운동으로, 차갑고 축소주의적인 이성의 역할보다는 시적인 창의력 • 직감 • 감정 주관적 경험에 더 많은 강조를 두는 경향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루이스를 비롯하여 20세기 중반 옥스퍼드를 중심으로 형성된 기독교 낭만주의자들은 초월적이며 객관적인 절대자에 대한(p. 115) 신앙 중심으로 사고의 틀을 구성하고 있었다. 그들을 낭만주의라 함은, 초월적 절대 가치가 인간에게 드러나는 과정이 이성reason 뿐 아니라 창의력imagination 이라는 도구를 통하여 감정과 경험을 통해 전달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절대적 미학 또는 윤리적 가치가 인간에게 보편적으로 증거되어 있음을 강조했던 것이다. 루이스는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1년에 BBC 방송을 통하여 절대적인 가치 기준의 실재에 대하여 자신의 견해를 분명하게 드러냈다. 이 내용이 나중에 《순전한 기독교》의 제1장을 형성 하게 되었는데, 전쟁 중에 절대적 가치 기준을 논한다는 것은 그 나름대로 중요한 상황적 의미가 있다. 선과 악의 구분이 불가능하다면, 전쟁이 오직 개인이나 국가의 생존에 대한 의미만을 내포하고 있다면, 생명을 바치며 적과 싸운다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 과연 나치 정권의 군사주의나 아리안 혈통의 우월주의는 나의 생명을 던져서라도 막아야 하는 악의 세력인가? 서구의 문명사회를 하루아침에 혼란으로 몰고 간 히틀러의 광적인 야망이나, 극동의 힘의 균형을 깨고 침략과 문화적 탄압으로 태평양 연안을 피비린내 나는 전장으로 몰고 간 일본의 제국주의가 선과 악의 틀로는 도저히 규명할 수 없는 중립적인 것이라면 왜 저들과 맞서서 싸워야 하는 것인가?(p. 116). 21세기에 이르러서, 이와 같은 가치관의 질문 자체가 세련되어 보이지 않는 까닭은 후기 현대주의적 상대주의 또는 다원주의가 오늘의 문화에 깊이 침투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다원주의는 나치의 침략이나 일본 제국주의의 만행을 악으로 규정하는 것 역시 비(非)다원주의적 발상이라고 비난하겠지만 아울러 그것을 적극적으로 대항할 만한 근거 제공도 하지 못한다. 싸울 이유는 한쪽 뿐 아니라 양쪽 다 없다는 논리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절대적인 가치 기준을 의심하는 가운데서도 오직 허용이라는 가치만은 유일하게 애써 지켜야 할 절대 가치가 되었으니 이것도 모순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상대주의는 이미 루이스 시대에 유럽에 범람하고 있었다. 1942년에 루이스가 《인간 폐지》라는 책을 착상하게 된 동기는 바로, 그런 사고가 어린 학생들을 위한 교육 커리큘럼에 등장한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두 권의 영어 교과서가 그 중심에 있었다. 하나는 《언어의 통제 The Control of Language》 (1940)로 알렉스 킹과 마틴 케틀리라는 오스트레일리아 사람들이 저술한 것이고, 또 다른 한 권은 《영어 강독과 작문 The Reading and Writing of English》(1936)으로 E. G. 비아기니가 저자였다. 《인간 폐지》에서는 킹과 케틀리를 가이우스와 티티우스라는 가명으로 불렀고 책 이름을 《녹색책 The Green Book》이라고 칭했다. 비아기니는 오르(p. 117)빌리우스로 바꿔 불렀다. 루이스는 이 책들의 내용이 영어를 가르치는 것 외에 일정한 철학적 사상을 파급하여, 지각이 형성돼 가는 과정 중에 있는 학생들에게 치명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리라는 점에서 경악을 감추지 못했다. 1943년 2월에 루이스는 더럼 대학에서 리델 기념 강연의 강사로 초대되어 세 번의 강연을 하게 되었다. 이 기회에 그는 위에 언급한 두 책에 대한 비평을 시발점으로 하여 상대주의를 비판하고 참교육의 기초가 절대적인 가치 기준의 인정으로 시작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게 되었다. 그 강좌의 내용이 곧 “Reflections on Education with Special Reference to the Teaching of English in the Upper Forms of Schools”라는 긴 부제가 달린 책, 즉 《인간 폐지》로 출판되었던 것이다. 루이스에게 그토록 충격이 되었던 교과서의 내용이 무엇이었는 지는 이 책의 첫 장을 열면 자세하게 알 수 있다. 요약해서 말하자면, 사람이 어떠한 사물을 보고 느끼는 감정은 사물 그 자체의 본질에 대한 설명이라기보다는 그것을 보는 사람의 내면적 감정을 표현하는 것일 뿐이라는 주장이다. 이는 주관주의•상대주의의 극단적인 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다. 루이스는 이에 대한 반박으로 절대적 가치관이 인간 본연의 모(p. 118)습 안에 드러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자연의 법칙 the Natural Law이란 것이 단지 물리적 원칙만이 아니고 도덕적 법칙으로 편만하게 드러나 있다는 것이다. 루이스는 이러한 자연적 도덕률을 '도'라는 동양의 함축적인 단어를 동원하여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도' 라는 단어를 쓰는 것일까? 아마도 루이스는 이 절대적인 가치 기준이 기독교 문화를 배경으로 하는 서구에서만 주창된 것이 아니고 그것과 맞상대가 될 만한 중국을 중심으로 한 동양 사상에 도리어 뚜렷하게 나타나 있다는 점을 강조하려고 했던 것 같다. 사실 루이스는 이 책의 부록에 세계 여러 종교 와 문명을 대표하는 문서에서 발견되는 도덕률을 대조하는 장황한 근거 자료를 제시하고 있다. 결국 그의 주장에 의하면 가치관은 시대에 따라, 또는 여러 문화에 따라 제각기 다르게 생성되는 것이 아니며 모든 시대와 민족과 문화를 초월하여 공통적 • 보편적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는 객관적인 실재라는 것이다. 루이스는 인간이 더 이상 인간이 아닌 짐승이 되는 경우는 바로 이러한 절대적인 가치 기준을 망각하거나 또는 더 이상 그것에 대한 복종 의지가 상실되는 경우라고 말한다. 머리가 이해understanding와 사고력thinking을 뜻한다면 배는 본능 instinct과 충동 impulses 이라는 상징적인 표현을 쓰면서 머리와 배 사이에 있는 기관, 즉 가슴이 있어야만 인간이 인간으로서의 조건이 충족된(p. 119)다고 주장한다. 가슴이란 정착된 가치관의 형성과 그 가치관에 따 라 훈련된 감정 trained emotion을 뜻한다. 이 가치관은 사람마다 다른 기준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악한 것은 악으로, 선한 것은 선으로 인정하고 반응할 수 있는 보편적인 도덕의식에 바탕을 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훈련된 감정은 곧 살아 있는 양심으로 이해될 수도 있을 것이다. 배를 따라 행동하기보다는 머리에 따라 행동할 수 있도록 힘을 받쳐 주는 기관이 바로 가슴이다. 아울러 배를 지배하고 다스리는 것 또한 가슴이 하는 일이다. 그래서 무 서운 도전 앞에서도 담대할 수 있고, 견디기 어려운 상황에서도 인내할 수 있고, 나의 권리와 이익을 떠나 상대를 배려하는 여유를 가질 수도 있는 것이다. 가슴이 없는 사람은 생각은 생각대로 하지만 행동은 본능에 따라 움직이게 된다. 소위 신앙인이라 하더라도 훈련된 감정과 의지력이 결여 된다면 신앙은 머리에서 맴돌고 행동은 여전히 본능적이며 충동적인 상태를 면하지 못할 것이다. 상대주의적 교육이 무서운 것은 가슴이 없는 인간을 만들어 낸다는 점이다. 건전한 가치관을 상실하게 하고서, 건강한 사람들로 형성된 건강한 사회를 기대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이는 심장을 빼내어 버리고서 달려 보라고 명령하는 것이나, 꽃을 떼어 버리고서 열매를 맺으라고 하는 것과 같다. 루이스의 말대로 현대(p. 120)인은 신의에 대하여는 웃어넘기면서 자신들 안에 배반자가 있다는 사실에는 놀라는 모순을 범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마지막으로 '도'에 대한 신학적 평가가 필요할 것 같다. 혹자는 루이스의 시도가 마치 비교종교학 같이 보인다고 우려할 수도 있고, 마치 모든 종교가 결국은 같은 진리를 말한다고 주장하는 종교 다원주의적 발상이 아닌가 하고 의문시할지도 모르겠다. 오늘날 한국 교회의 상황을 기준으로 할 때 루이스가 결코 보수주의자가 아닌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마치 루이스를 보수주의자로 또는 복음주의자로 규정하기 위해 그를 방어하려는 노력은 그리 희망적이지 않다. 그러나 반면 그가 당시 신학적 자유주의, 즉 복음을 윤리적 교훈으로 축소시킨다든지, 자연주의적 전제에 빠져 기적을 한사코 부인하거나 이에 따라 성경을 비신화화demythologizing한다든지 하는 시도에 대해서는 과격할 정도로 정면 비판하고 나섰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루이스의 신학에는 인간은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은혜로만 구원받을 수 있고 삶의 가치를 회복할 수 있으며 영원한 천국을 사모하며 살 수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므로 루이스가 '도'를 논하는 의미를 종교 다원주의로 몰아서는 안 된다. 다만 루이스는, 하나님의 절대적 선이 모든 인간의 마음에 그림자처럼 드리워져 있다는 것을 확고하(p. 121)게 인식하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자체가 복음은 아니지만 복음으로 이끄는 중요한 첫 단추가 된다고 인정하는 것이다. 이는 초대 교회의 사도로 로마서의 저자인 바울이 선과 악의 판단이 모세의 율법을 소유한 유대인들뿐 아니라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송사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낸다"고 말한 것을 반영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루이스는 이러한 도덕률이 구원을 이루지 못한다는 사실을 《순전한 기독교》에서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인간이 갖고 있는 내면적 갈등은 무엇이 옳고 그른 것인지 의식하면서도 결국 일관성 있게 옳은 것을 택하지 못하며 끊임없이 악을 반복하고 있다는 것이다. 결국 구원의 문제는 '가슴' 만으로 해결될 수 있는 것은 아님을 루이스는 인정하고 있다. 더 깊은 곳에 있는 심령의 변화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야 말로 기적 중에 기적 이라는 것을 루이스는 알고 있었다. 일반은총과 특별은총 모두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혜임에 틀림없지만 두 가지가 동일하지 않으며 혼동될 수 없음을 그는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인간 폐지》는 현대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이(p. 122) 깊이 생각해 봐야 할 인류 공동체적 문제임이 분명하다. 도덕률 없이는 사회의 악이 억제되거나 순화되지 못하고, 악에서 악으로 치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바른 의식을 상실한 충동적 인간으로 이루어진 욕구 만족형 사회는 루이스의 다른 책에서 그토록 의미 심장하게 그려내고 있는 지옥 그 자체인 것이다(p. 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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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1-16
  • 【북토크330】 마음 치유와 영혼에 힘을 주는 어른 위한 동시
    이 책의 저자 성정인 작가는 다재다능하다. 저자의 말에 있는대로 색소폰 연주와 그림 그리기, 시 쓰기와 사진 찍기 그리고 CCM음반 발간까지 “일을 벌이는 은사”가 있다. 덕분에 이 책에는 작가의 글과 그림, 사진이 어우러져 풍성함을 이루고 있다. 저자가 이 책에 대해 “마음 치유와 영혼에 새 힘을 주는 어른들이 읽는 동시”라고 밝힌 것처럼 이 책에 실린 시들은 마음에 치유를 그리고 영혼에 새 힘을 준다. 아마도 작가가 가족 상담학 석사 과정을 전공한 것과 성남제일교회 권사인 것이 영향을 준 것 같다. 많은 사람들이 읽어 치유 받고 새 힘을 얻을 수 있기를 바란다. 구입 문의는 '티샤 다이아몬드'(031-742-4949)로 하시기를. 저자의 말 작가의 이름에도 못 올리는 졸필임에도 용기 있게 시집 1집 『맛있어져라』를 출간했었는데 두루 나눠주신 덕담에 감사함뿐이었습니다. 2집은 시를 숙성시켜서 몇 년 후쯤 출판하려 했으나 신앙 시는 이십년 넘게 사역을 하시다가 은퇴하시는 담임 목사님의 설교를 모티브해서 쓴 시들이라서 목사님의 은퇴 전에 서둘러 묶어보았습니다. 설교를 듣고 시를 쓸 수 있도록 주옥같은 말씀으로 설교해주신 홍정기 목사님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색소폰을 취미로 십년 넘게 불었는데 발이 아파서 서서 부는 것이 쉽지 않아 문외한이었던 그림으로 취미가 바뀌면서 색감에 매력과 결과물에 반해 일 년 가까이 틈만 나면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런데 고등학교 시절에 교내 백일장에서 시가 뽑혀 미술부 친구들이 그림을 그려서 시화 작품을 만들어 전시했던 기억이 떠올라 시화로 15점 가량 준비해서 책에 담아 보았습니다. 기본기가 없는 내게 칭찬과 격려와 도움을 준 임수민 선생님께 감사를 드리고 시를 멋지게 글씨로 써주신 현원숙 은혜선생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취미 부자가 하나를 더 만든다면, 사진 찍기인데 사진이 좋아서 모아 둔 것과, 친구인 태안 신문사 신문 국장이 고향 충청남도 태안의 배경을 담아 신문에 기사로 실었던 사진들을 함께 시집에 담게 되어 기쁘게 생각합니다. 사진들 중에는, 선교지 여행길에서 함께 동행했던 선교사님 사모님께서 스위스 알프스 산맥 융프라우요흐 전망대에서 찍은 사진부터 각 사진들 속에는 추억이 들어 있고 행복이 깃들여져 있어서 오랫동안 쟁여 두었던 터라 한 두어 개는 작가를 모른 채 허락 없이 담을 수 있으니 찍으신 분이 보신다면 용서하시고 양해 부탁드립니다. 마지막으로 일을 벌이는 은사가 있는 아내 때문에 CCM음반도 만들어 주고, 시집을 두 번째까지 만들어주느라 물질뿐만 아니라 마음으로 동참해준 동역자요 동반자인 남편에게, 그간 고마움의 표현을 잘 못했는데 감사의 말을 전합니다. 행복해져라 행복이 멀리 있다고 생각하는 그대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탐하지 말고 족히 여기며 행복해져라 누군가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주길 기다리는 그대 곁에서 행복을 찾고 만들어가며 행복해져라 세상에서 가장 행복해지고 싶은 그대 삶의 모습 그대로 감사로 노래하고 살아내며 행복해져라 행복과 향수 행복은 향수와 같네 나에게 먼저 뿌리지 않고서는 남에게 전할 수가 없네 혀의 불평 강한 이빨에게 씹혀 피 흘리는 혀가 불평을 늘어놓네 '왜 나만 물리기만 하나? 얼마나 아픈지 알아?' 전능자가 말씀하시네 '육십년만 참아라 너를 물던 이빨들은 눈 씻고 찾아도 없을 거야 오래 남는 자가 강자란다' 혀의 불평은 그 후로 사라졌네 그러려니 하고 살자 인생길에 내 마음 꼭 맞는 사람이 어디 있으리 난들 누구 마음에 그리 꼭 맞으리 그러려니 하고 살자 내 귀에 들리는 말들 어찌 다 좋게만 들리랴 내 말도 더러는 남의 귀에 거슬리리니 그러려니 하고 살자 사람이 주는 상처에 마음 쓰고 아파하지 말자 격려하고 세워주는 사람도 있지 않은가 그러려니 하고 살자 사랑하는 사람을 보냈다고 너무 안타까워하거나 슬퍼하지 말자 인생은 결국 가지만 천국이 있으니 그러려니 하고 살자 엄니 가라사대 너무 애쓰지 마라 올 것은 오고 갈 것은 간다 맡겨두면 제가 알아서 흘러간다 너무 조급해 하지 마라 서두른다고 안 될 일이 되고 되는 일이 안 되는 것은 아니다 너무 화내지 마라 살다보면 다른 생각 때문에 화를 내지만 화는 낼수록 아프다 상처 상처는 마음의 땅이 파이는 것 그 안에 물이 들어오면 강이 되고 저수지가 되고 바다가 되어 생명들이 살아가는 삶터가 되네 상처는 마음의 땅이 파이는 것 그 안에 꽃을 심으면 향기를 내고 위로가 되고 환희가 되어 사람들이 머무르는 쉼터가 되네 길(2) 길이 많아도 가지 않으면 내 길이 아니네 길이 없어도 내가 걸어가면 내 길이 되네 어떤 길이 내게 주어져도 가다보면 내 길이 되네 고구마와 엄마 "고구마 캐 가거라" 먹을 게 많아서 찬밥 신세인데 엄마는 혼자서도 고집스럽게 고구마를 심었네 자식들 얼굴 한 번 더 보고 싶어서 고구마는 진작에 캐놓고 목 빼고 기다리고 있네 보물단지 애물단지 자식은 반은 보물단지 조금 못났어도 내 새끼니 가시고기처럼 내 몸 전부를 내어줘도 아깝지 않네 자식은 반은 애물단지 가지 많은 나무 바람 잘날 없듯 이 자식이 형편이 나아지면 저 자식이 아프다고 징징대네 어미는 잘된 자식 보며 겉으로 웃지만 아픈 자식 생각하며 찬바람에 너덜거리는 가슴속에 한숨을 품고 사네 인생 소풍 잠깐 머물다 갈 것을 세상에 목매어 안달하고 동동거리며 살아가네 모두 놓고 갈 것을 손으로 움켜 쥐고 마음으로 끌어 안고 살아가네 많이 쌓아 놓을수록 아쉬움만 더하고 더 좋은 곳을 보지 못하고 살아가네 열심히만 살면 되는 줄 알고 몸은 내팽개친 채 일개미로 살아가네 이제 쉬어도 괜찮아 놀아도 괜찮아 누려도 괜찮아 망각의 덕 금붕어가 작은 어항에서 그럭저럭 살아가는 것은 기억력이 없기 때문이네 다람쥐가 도토리를 땅속에 묻어두고 잊어버려 상수리나무 숲을 이루네 세상살이 기억해야할 것도 많지만 잊어버려야 약이 되는 것도 많네 인생의 무게 삶의 무게가 버겁게 느껴짐은 더 나은 것을 원하는 집착 때문이네 살다보면 다 좋은 일도 다 나쁜 일도 없는 것을 내게 없는 것 내게서 떠나는 것에 미련 두고 목메지 말고 내게 있는 것 내게 다가오는 것을 안아줘야 하네 감사로 안아줘야 하네 별명 친구들이 장난스레 붙여준 별명 뇌 맑음 단순 하다는 걸까 눈치가 없다는 걸까 바보스럽다는 걸까 백조의 고고한 자태 아래 다리의 휘저음을 들키지 않았나보다 멋있어져라 사람은 나이만큼 늙는 게 아니라 생각만큼 늙는 것이네 지나간 날들도 다가올 새날도 아닌 지금이 가장 좋은 나이 내려놓음도 얼추 배우고 너그러움과 배려도 알 수 있는 나이 감사함도 소중함도 알아 빈 마음으로 바라볼 수 있는 나이 마음이 늙지 않게 다듬으면 멋있는 사람이 되고 멋있는 사람은 늙지 않네 성자가 따로 있나 성자가 따로 있나 인생의 온갖 풍상에도 성령님과 함께 살며 기뻐할 수 있으면 성자이지 성자가 따로 있나 세상이 돌을 던져도 예수님짜리 신분을 내 것으로 삼고 살면 성자이지 성자가 따로 있나 악다구니 쓰며 벌어먹지 않고 하늘에 엎드려 빌어먹고 살아가면 성자이지 눈꼴사나운 사람 겉에서 보면 눈 꼴 사나운 사람 안으로 들어와 내 눈 바꾸어 단짝 되니 주님의 핏자국이 보이네 겉에서 보면 이뿐 구석 없는 사람 멀리 영원에서 그분의 형상으로 보니 주님의 피 냄새가 나네 영혼에 새 힘을 주는 시 인생 찬가 빈 그물 같은 인생 책망이 아닌 채움으로 풍성케 하셨네 상처가 별이 된 인생 숯불 피워 조반으로 상처를 치유하셨네 고쳐 쓰기 어려운 인생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시며 회복케 하셨네 질그릇 같은 인생 별같이 빛나지 않아도 끝까지 사랑하시네 회개 마음의 강바닥에 켜켜이 쌓여가는 모난 감정들 날마다 비워내도 나 모르게 부대끼다 내려와 앉아있네 손에 들려진 막대기로 아무리 저어봐도 그냥 그 자리 주님이 지신 십자가로 저어보니 하늘의 물이 흐르네 은혜 이 땅에 가져온 것 없이 지금까지 살았다면 은혜입니다 내가 가진 것 중에 내가 만든 것이 없으면 은혜입니다 내가 누린 것 중에 받지 않은 것이 없다면 은혜입니다 기도하지 않는 것은 너도 나도 기도하지 않는 것은 힘이 없어서가 아니라 자기 힘이 많아서라네 하나님이 함께하면 하나님이 함께하면 가는 거미줄도 두꺼운 방벽이 되고 하나님이 없으면 두꺼운 방벽도 가는 거미줄이 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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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소개
    2026-01-09
  • 【북토크329】 늦깍이 작가 할머니들의 진솔한 시집
    교회에서 운영하는 도서관에 모인 어르신들이 2년 만에 쓴 시들을 모아 아름다운 시집을 만들었다. 살아온 인생이 묻어나는 진솔한 글들에서 마음이 따듯해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김애순 여행 1박 2일 여행을 떠났다. 여수 밤바다. 야간 불꽃 구경을 했다. 참 재미가 있었다. 친구와 함께해서 참 즐거웠다. 그리고 낭만 버스 투어도 했다. 안내원이 설명을 잘 해주어서 구경도 잘했다. 올여름은 참 즐거운 여행이었다. 나는 내가 나를 사랑합니다. 김애순 나는 공부가 하고 싶어도 못 했습니다. 어린 시절에는 산에 가서 나무나 하고 지냈습니다. 부모님이 학교를 보내주지 않으셨다. 뒤늦게 공부를 하려고 해도 잘 안돼요. 그래서 나는 재미가 없어도 해보아야겠지요. 지금에 와서는 엄마가 싫다. 애순아, 참 고생 많았다. 김영자 우리 엄마 손 거북이 등딱지처럼 갈라지고 흉하게 휘어진 못난이 우리 엄마 손 가만히 잡아보면 참 따뜻하다. 마른 장작처럼 가벼운 몸에 푹 꺼진 볼의 우리 엄마 얼굴 가만히 쳐다보면 미소가 참 따뜻하다. 이 세상에 하나뿐인 나의 반쪽 젊은 시절 새마을 교육을 2박 3일 다녀온 당신 그런데 며칠 지나 나에게 편지가 왔다. 남편이 쓴 편지였다 웬 편지야? 하고 물어봤다. 교육감님이 집사람한테 편지를 쓰라고 했다고 말한다. 나는 눈뜬장님이라 읽을 수가 없었다. 그 내용이 정말 궁금하지만 자존심에 물어볼 수가 없었다. 그리고 서랍 속에 곱게 접어 넣어놓고 잊어 세월이 흘러 늦깎이 공부를 시작하면서 30년이 지난 편지를 꺼내 보니 색깔이 누렇게 변해 찢어질까 봐 조심스럽게 펴어 읽어보니 이 편지를 쓰 면서 글 모르는 아내에게 쓴다는 것이 얼마나 마음으로 물면서 썼을까, 그 마음이 느껴집니다. 남보다 한 발 더 앞서가는 사람 남보다 한 발 더 봉사하는 사람 당신께 믿음을 주는 사람 그런 내용이었습니다. 그리고 당신을 사랑하오. 나도 모르게 두 뺨에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여보 답답한 나를 만나 참고 살아줘서 고맙습니다, 미안합니다, 사랑합니다 2025년 6월 1일 일요일 못난 아내 김은자 80넘어 살아보니 별거 없더라 오늘은 마음먹고 밭에 나갔다. 고추도 따고 고구마 줄기도 따고 가지도 몇 개 땄는데 왜 이리 땀은 흐르는지 가슴은 답답해지고 느리기만 하네 고추는 빨갛게 그런대로 생겼구나, 그런데 나는 늙은 호박꽃에 비교할 수 있을까? 애호박도 아니고 늙은 호박꽃인데 뭐가 어때 80 넘어 살아보니 별거 없더라 지금처럼 두 발로 걸어 다닐 때 일주일에 두 번씩 동네 도서관 가서 아우들 하고 공부도 하면서 재미나는 이얘기도 하며 웃고 수다 떨면서 즐겁게 이렇게 살다 갈란다 박명숙 나의 인생길 39살에 혼자되어 자식들 남매를 끌어안고 키우다 보니 세월이 가는 줄도 모르고 살았네요 어느새 세월이 흘러 육십이 되어가고 있네요 험한 고갯길보다, 오솔길을 가고 싶네요 신봉덕 나의 인생살이 1 눈이 펄펄 내리는 동짓달 열아홉 살 때 고무신을 신고 시집을 갔는데 신랑 얼굴도 못 보고 시집가다 스무 살에 큰아들을 낳았는데 쌀이 없어서 시누이가 쌀 한 마대를 줘서 밥을 해서 먹었다 그후로 넷을 더 낳았다 넷을 낳으면서 나는 논 한 마지기로 농사를 하고 남편은 머슴살이를 했다 그렇게 남의 살이를 하면서 가난한 생활을 보냈다 나의 인생살이 2 안양 언니가 내 남편이 아프니 시골에서 안양으로 오라고 했다 올라온 지 일 년도 안 돼서 언니가 죽어서 얼마나 많이 울었는지 모른다 언니가 없어서인지 혼자 도시 생활을 했어야 했고 남편 수술비를 얻기 위해서 이 년을 일하면서 대소변을 받아냈다 그러면서 넷째까지 결혼을 하고 손주들을 보게 되었다 지금은 손주의 자식들을 보면서 행복하게 지내고 있다 특히 선생님과 함께하는 공부하는 것이 제일 행복하며 학교 가는 날이 기다려진다 유현자 그날의 라면 어릴 적 우리 집은 형편이 어려웠다 어머니는 아이스크림 공장에 다니고 아버지는 막노동으로 생계를 이었다 우리 형제는 누나 셋과 나까지 사남매였다 어느 날 누나들과 있는 돈을 다 모아 라면을 사서 끓여 먹기로 했다 우리는 밥 한 그릇과 잘 익은 김치를 밥상에 올려놓고 물이 끓기만 기다렸다 "내가 더 많이 먹을 거야, 달걀도 넣으면 좋은데" 다들 기대에 부풀었다 당시엔 부엌이 밖에 있었다 둘째 누나가 부엌에서 라면을 끓이고 나머지는 방 에서 기다렸다 "라면 다 익었어? 얼른 가져와" "다 됐어. 지금 가지고 갈게" 그 순간 갑자기 밖에서 "앗 뜨거워!!"하는 큰 소리가 들렸다 둘째 누나가 라면을 가져오다 넘어지면서 마당에 그대로 엎어 버린 것이다 우리는 그 상황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한탄했다 둘째 누나는 주저앉아 대성통곡했다 그때 큰누나가 얼른 양푼에 면발을 주워 담았다 그러곤 수돗가에서 깨끗이 헹궜다 큰누나는 면에 고추장을 비벼 우리 앞에 한 그릇씩 놔 주었다 우리는 입가에 묻은 고추장을 보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이순금 작은 것이라도 소중하게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 그립다 말 한마디라도 조심스럽게 하는 보이지 않는 배려도 상대방을 생각하는 작은 것이라도 소중하게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 그립다 서로를 이해하고 서로를 배려할 줄 아는 그런 만남으로 점점 더 깊어 가는 인생길 전차숙 우리 집 백일홍 우리 집 백일홍 넘 아름답다 아침에 현관문을 열면 항상 방긋 웃으면서 나를 반긴다. 백일홍아, 너는 어찌 볼 때마다 웃고 있니? 참 신기하다. 다른 꽃들은 아침에 피고 해가 지면 지는데 너는 한번 피면 백일 동안 나에게 웃음의 선물을 주잖아 그래서 너의 이름이 백일홍인가 봐 백일홍아 아침마다 웃음의 선물을 주렴 최정녀 우리 동네 달맞이꽃 우리 동네 달맞이꽃 한 포기 어디서 날아와서 찻길 가에서 좁은 틈새 인도에서 어떻게 씨 하나가 뿌리를 내려서 컸는지 인도에서 사람들 발에 여러 번 밟혔을 텐데 어떻게 잘 커서 예쁜 꽃이 여러 송이 피었을까 참 노란 꽃이 예쁘구나 내년에는 여러 송이 꽃이 씨앗 되어서 외롭지 않겠구나 나는 너 옆을 지날 때마다 너를 쳐다보면서 즐거움을 느끼면서 지나간단다 고맙고 사랑한다. 관련 기사 링크: 징검다리 작은도서관 할머니들, 작가로 등단하다 http://www.lnsnews.com/news/view.php?no=3004
    • 오피니언
    • 책소개
    2026-01-06
  • 【북토크328】 당찬 아가씨에게서 삶의 지혜를 배우다
    이 책의 저자가 쓴 『효도하며 살 수 있을까』를 우연히 먼저 읽고 이 책을 찾아 읽었다. 책이 재미있고 당찬 느낌이다. 어디에 내놔도 살아갈 것 같은 단단함이 있다. 많은 것을 배웠다. 돈 벌러 사회에 진출해야 할 즈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공부를 들고파든 무슨 기술을 배우든 간에, 그들도 결국 무언가를 팔아서 돈을 버는 것이 아닌가. 회사라는 것도 알고 보면 대단한 비결을 가지고 운영을 하는 것이 아니다. 결국은 뭐든 가져다 팔아서 이익을 남기면 되는 것이었다. 콘텐츠든 재화든 싸게 만들어서 비싸게 많이 팔면 남는 게 아니던가. 변호사와 의사는 자신의 능력을 팔고, 선생님은 배운 걸 팔아 돈을 벌고, 예술가는 작품을 팔고 입장권을 팔아서 먹고산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돌연 삶이 보였다. "삶은 장사다!" 이제 돈 이야기는 어느 정도 자유롭게 하는 것 같다. 애들도 안다. 돈 없으면 서럽다는 것을. 하지만 '장사' 이야기를 하면 여전히 손사래를 치는 사람들이 많다. ."장사? 아무나 하는 것 아니잖아(p. 23)요.?" "나는 평생 회사원 체질인걸요." 이렇게 말하며 꾹 참고 산다. 사는 것이 만족스럽지 않아도. 그런데 사실 우리는 모두 이미 장사를 하고 있다. 내가 가진 것 중 가장 만만한 시간을 팔고 있다. 시간을 팔아서 공부를 하고 기술을 배운 다음, 그걸로 돈을 번다. 회사는 급여로 당신의 시간을 사서 이익을 남긴다. 하지만 팔 줄 아는 것이 시간밖에 없다면, 여유 있는 삶을 즐기는 데 제약이 많아진다. 평생 시간만 팔다가 더 이상 써주는 곳이 없으면 그제야 물건을 팔려고 하니 치킨이, 커피가 잘 팔릴 리가 없다. 한 살이라도 어릴 때 장사를 해보자 지금 내가 시간만 팔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내가 가진 것 중에 다른 팔 것은 없는지 고민해봐야 한다. 그게 외부 강의를 하거나 책을 쓸 수 있을 정도의 능력일 수도 있고, DIY나 수집처럼 취미생활 일 수도 있고, 세상의 흐름을 먼저 읽어 남보다 먼저 아이템을 발굴해내는 안목일 수도 있다. 아무것도 팔 게 없다면 새롭게 전문기술을 습득할 수도 있다. 어떤 것이든 더 이상 내 시간을 팔 수 없을 때 팔 것을 미리 생각해놔야 한다. 그리고 그와 더불어 중요한 것 은 장사에 대한 감을 어릴 때부터 길러두는 것이다(p. 24). 한국에서는 사람을 평가할 때 어떤 차를 타는지 어떤 가방을 메는지를 본다. 특히 창업 강의를 나가면 창업해서 얼마나 돈을 벌었는지를 가늠하기 위해서인지 사람들이 대놓고 내 가방의 상표를 훑는다. 하지만 가방에 투자하는 대신 그 돈을 모으면 훗날 '명품 가방 낳는 황금 오리'를 가질 수 있음을 확신한다. 명품 가방은 나에게 큰돈을 지불할 만한 가치가 있는 대상이 아니기에, 그리고 거품 낀 가격을 지불하면 미소 지을 판매자의 얼굴에 배 아프기에, 나는 2만 원짜리 가방을 들어도 언제나 자신감 넘치고 경쾌하다(p. 35). 나를 일으켜 세운 300권의 책 "초반에 책을 많이 읽어 놓으니 지나가는 바람에 결코 흔들리지 않았다." 책으로 배우는 것보다 실전이 진짜라고 믿는 사람들에게 이야기 해주고 싶다. 무엇이 됐든 이론과 실전이 결합하면 무서운 것이 세상에 없는 거라고. 나는 쇼핑몰을 준비하며 300권의 책을 읽었다. 이렇게 많이 읽은 줄 몰랐는데, 후에 도서관 대출 기록을 세어보니 그만큼이나 되었다. 나는 책에서 끊임없이 동기 부여를 받았고, 책 덕분에 쉼 없이 달렸다. 지금도 나태해질 것 같으면 책을 꺼내든다. 한번이라도 불같이 달려본 적 있는 사람의 이야기를 읽으면 주(p. 163)인공에 몰입해 나를 벌떡벌떡 일으켜 세우게 된다. 쇼핑몰 운영 초반에 내가 감동을 받았던 책들은 단연 쇼핑몰 운영을 성공적으로 했던 선배들의 경험담이었다. 쇼핑몰 기술서들은 한 번 보고 따라 하면 그만이었지만 에피소드와 CEO의 결심이 가득한 이 알토란 같은 책들은 일이 지겹거나 열정이 떨어지려 할 때마다 내가 포기 하지 않고 일을 지탱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책을 읽을 때는 정독 대신 다독을 한다. 좋은 책은 띄엄띄엄 읽으려고 해도 꼼꼼히 다 읽기 마련이고, 어차피 머리에 안 들어오는 부분은 꾸역꾸역 읽어봤자 남지도 않는다. 그래서 필요한 부분만 가려 많이 읽는다. 책 한 권에서 한 구절이라도 내 마음속에 남았으면 그걸로 된 거다. 책 한 권을 집어서 무던히 끝까지 한 번에 보는 일도 거의 없다.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그 자리에서 손에 집히는 수첩, 영수증 조각을 가리지 않고 빼곡히 뭔가를 끄적였고 저자가 툭 뱉고 지나간 한 마디라도 궁금한 것은 인터넷 검색으로 찾고 말았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면 검색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 지식 탐험의 무아지경에 빠지는 일이 비일비재했고, 새로운 사이트라도 알게 되면 당장 컴퓨터를 켜고 들어가서 세세하게 둘러보느라 시간을 한정 없이 지체했다. 도서관에서 빌려 읽은 다음 소장할 가치가 있는 책은 그제야 구매해서 읽고 또 읽는다. 그러면 책값에 대한 부담 때문에 책을 덜(p. 164)보는 일이 없고, 불필요한 책들로 짐을 늘리는 일도 없어진다. 대신 내 마음에 쏙 들고, 나와 통하는 책은 늘 곁에 둔다. 언제 꺼내서 어떤 구절을 않더라도 또 다른 감동을 받고 내게 새로운 동록을 불어넣어준다. 그러니 내가 쉴 수가 없다. 그 많은 위대한 저자들이 젊음을 불태우며 열심히 하라고 말하니, 어찌 시간을 허투루 쓸 수 있겠는가! 한 가지 킥을 만 번 연습한 사람 나는 책벌레다. 언제나 10권 정도의 책을 온 집에 늘어놓고 다닌다. 책을 고루고루 읽기보다는 책 편식이 심한 편이다. 여행에 푹 빠져 있을 때는 여행책을, 글쓰기에 푹 빠져 있을 때에는 글쓰기책에 몰두한다. 1,000만 원의 월 수익이 절실할 때는 빌려온 책이 모두 1,000만 원 수익과 관련된 책이었고, 블로그 마케팅을 해봐야겠다고 마음먹었을 때는 블로그 관련 책을 이 잡듯이 뒤졌다. 이소룡도 만 가지의 킥을 차는 사람은 두렵지 않으나 한 가지 킥을 만 번 연습한 사람은 두렵다고 했다. 이렇게 병적으로 읽었던 책들은 일하는 데 적지 않은 도움이 되었다. 인문학 책을 읽어야 할 텐데 뭘 읽어야 할지 고민하지 않았다(p. 165). 내가 필요하면 나도 모르게 책에 손이 갔다. 중국어를 잊어가고 있는데 HSK 책은 보기 싫었다. 마침 인문학이 유행할 때라 자연스럽게 나와 가장 연관성이 있어 보이는 인문 책인 《손자병법》과 《사기》를 집어 들었다. 그렇지 않고 누구나 다 읽는다니까 펴본 《논어》나 《탈무드》 같은 책은 머릿속에 들어가지 않을뿐더러 연애 소설보다도 남는 것이 없었다. 어릴 때 읽은 책이 평생 자산이 된다는 말은 맞는 말이다. 그때 책을 읽으며 정립된 개념이나 가치관은 커서도 오래오래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새로운 일을 도전하면서 그 일과 관련된 책을 초반에 읽어놓으면 많은 도움이 된다. 전체적인 일의 개념과 그 일에 대한 철학을 세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내 안에 중심이 잡혀 지나가는 바람에도 쉬이 흔들리지 않는다. 자고로 책 안에 답이 있다. 내가 읽은 책에서는 모두 초반에는 돈을 많이 투자하지 말고 시간을 많이 투자할 것, 수익을 꼼꼼하게 따지고 야무지게 돈을 잘 모을 것을 강조했다. 그 가르침이 머릿속에 남아 있었던지 나는 꼭 그대로 따라하고 있다. 하지만 인터넷을 돌아다녀 보거나 사람들을 만나보면 누구는 광고를 얼마 했다더라, 사입을 많이 해서 가격을 낮췄다더라는 자극적인 이야기가 성행한다. 그 누구도 검증해줄 수 없는 이야기들이다. 어느 책에서도 그런 이야기를 본 적이 없다(p. 166). 대한민국 성인 10명 중 3명이 일년에 책 한 권을 읽지 않는다고 한다. 직장인의 일 년 평균 독서 권수도 9.8권밖에 되지 않는다고 한다. 이런 기회가 없다. 모든 사람들이 다 책을 읽고 똑똑해지면 나의 똑똑함은 소용없다. 남들 안 할 때 틈새를 파고들어야 성 공한다. 모든 일에는 지름길을 찾는 대신 기본기를 충실히 하는 자가 오랫동안 살아남는다. 오래된 불변의 진실, 책 속에 길이 있다(p. 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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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1-05
  • 【북토크327】 살인도 부를 수 있는 말, 문학이 필요한 이유
    판사 생활을 하면 세상의 온갖 죄악들을 접할 수 있을 것 같다. 그 가운데 전직판사인 이 작가는 말의 중요성과 문학의 필요성을 말했다. 그럴 수 있다는 큰 공감을 했다. 남을 통해서 좋은 교훈을 받으니 좋다. 독자님들은 이제부터 어쩌면 낡은 일기장을 꺼내 읽어볼 때 처럼 거칠고 두서없는 느낌이나 생각들과 마주치게 될지도 모르겠지만, 이거 하나만큼은 미리 말씀드리고 싶다. 사회에 나와 지금까지 겪어온 사람들의 모습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누구나 자기 몫의 아픔은 안고 살고 있더라는 거다. 굳이 구체적으로 이야기하지는 않겠지만 나 자신의 몫도 포함해서 하는 말이다. 직업병 때문일까. 어떤 때는 다른 것은 몰라도 고통만큼은 평등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부자도 권력자도 스타도 화려한 겉껍질 속에는 곪을 대로 곪은 상처가 가득했다. 건강 때문에 가족 때문에 자식 때문에 때로는 자기 자신 때문에 남모를 고통에 시달리는 경우가 허다했다. 하물며 돈도 권력도 없는 평범한 사람들은 어떻겠는가. 그 흔하디흔해 보이는, 건강하게 자라서 사랑하는 이를 만나 아이를 갖고 키우며 사는 일들이 실은 얼마나 전쟁같이 힘든 일인지...... 지금 힘들어하는 모든 이들에게 드리고 싶은 한상궁 마마님(p. 13)의 말씀이 있다. 장금아. 사람들이 너를 오해하는 게 있다. 네 능력은 뛰어난 것에 있는 게 아니다. 쉬지 않고 가는 데 있어. 모두가 그만두는 때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다시 시작하는 것. 너는 얼음 속에 던져져 있어도 꽃을 피우는 꽃씨야. 그러니, 얼마나 힘이 들겠어.... "네 능력은 뛰어난 것에 있는 게 아니다. 쉬지 않고 가는 데 있어"라고 격려해주면서도, 끝에는 "그러니 얼마나 힘이 들겠어'"라며 알아주는 마음. 우리 서로에게 이것이 필요한 시대가 아닐까(p. 14). '갑질'의 심리 역시 수직적 가치관의 사회에서 쥐꼬리만한 권력이라도 있으면 그걸 이용해 상대에 대한 자신의 우위를 확인하려는 수컷 동물 사이의 우세경쟁 같은 것이라 볼 수 있다. "내가 누군지 알아?"가 이렇게 자주 튀어나오는 사회가 있을까. 이런 사회에서 받는 스트레스는 타인에 대한 관용 부족으로 이어져 약자 혐오와 위악적인 공격성을 낳는다. 약자는 자기보다 더 약자를 찾아내기 위해 필사적이다. 남들 눈에 비치는 내 모습에 집착하는 문화, 집단 내에서의 평가에 개인의 자존감이 좌우되는 문화 아래서 성형 중독, 사교육 중독, 학력 위조, 분수에 안 맞는 호화 결혼식 등의 강박적 인정투쟁이 벌어진다. 사실 이건 모두 같은 현상이다. '남부럽지 않게' 살고 싶다는 집착 때문에 인생을 낭비하는 이들을 접할 때마다 드는 생각이 있다. 그냥 남을 안 부러워하면 안 되나. 남들로부터 자유로워지면 안 되는 건가. 배가 몇 겹씩 접혀도 남들 신경 안 쓴 채 비키니 입고 제멋으로 즐기는 문화와 충분히 날씬한데도 아주 조금의 군살이라도 남들에게 지적당할까(p. 32)봐 밥을 굶고 지방흡입을 하는 문화 사이에 어느 쪽이 더 개인의 행복에 유리할까. 우리가 더 불행한 이유는 결국 우리 스스로 자승자박하고 있기 때문 아닐까(p. 33). 타인과의 비교에 대한 집착이 무한경쟁을 낳는다. 잘나가는 집단의 일원이 되어야 비로소 안도하지만, 그다음부터는 탈락의 공포에 시달린다. 결국 자존감 결핍으로 인한 집단의존증은 집단의 뒤에 숨은 무책임한 이기주의와 쉽게 결합한다. 한 개인으로는 위축되어 있으면서도 익명의 가면을 쓰면 뻔뻔스러워지고 무리를 지으면 잔혹해진다. 고도성장기의 신화가 끝난 저성장시대, 강자와 약자의 격차는 넘을 수 없게 크고, 약자는 위는 넘볼 수 없으니 어떻게든 무리를 지어 더 약한 자와 구분하려든다. 가진 것은 이 나라 국적뿐인 이들이 이주민들을 멸시하고, 성기 하나가 마지막 자존심인 남성들이 여성을 증오한다. 반면 합리적 개인주의는 공동체에 대한 배려, 사회적 연대와 공존한다. 자신의 자유를 존중받으려면 타인의 자유도 존중해야 하기 때문이다. 톨레랑스, 즉 차이에 대한 용인, 소수자 보호, 다양성의 존중은 보다 많은 개인들이 주눅들지 않고 행복할 수 있게 하는 힘이다(p. 37). 인정투쟁의 소용돌이, SNS 남들에게 인정받고자 치열한 인정투쟁을 벌이는 와중에 자신을 잃어가는 아수라장을 쉽게 관찰할 수 있는 곳이 SNS 공간이라고 하면 지나친 말일까. 페이스북을 하면서 느낀 건 이 공간 역시 오프라인 세상이 빠져 있는 강박증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이었다. 페이스북은 참 묘한 매체다. 독백체로 글을 써도 사실 그 글은 자신에게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페친들에게 건네는 말이다. 방자와 향단이를 통해 대화를 주고받는 이몽룡과 춘향이 같다. '어쩐지 우울한 날이다'라고 쓰면 저커버그 씨가 열심히 이집 저집 다니며 "OO님이 외롭다셔요. 놀아주세요" 또는 "OO님이 섬세한 감정도 있는 사람이라는 걸 알아달라셔요"라며 말을 전한다. 똑똑똑. 똑똑똑. 방문을 두들기며. 돈 버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바쁜 전갈들이 오가며 점점 상승작용이 일어난다. 전하는 목소리들은 실제보다 더 비장하기도 하고, 더 화사하기도 하다. 아,(p. 39) 내 삶은 너무 완벽해요. 행복해죽겠어요. 저 너무 예쁘지 않아요? 아무것도 모르는 것들이 깝죽거리는구나(나는 이렇게 아는 게 많은데 알아주지 않고), 세상은 썩어 문드러졌고 분노하지 않는 자들은 쳐죽일 비겁자들이다. 나는 이렇게 세상에 대해 고뇌하는 지식인이다 등등. 인정투쟁의 소용돌이. 결국 독백은 외침이 된다. 형식과 실질의 괴리 때문에 더 그로테스크하기도 하다. 읽는 이들의 반응을 의식하면 할수록 실제 자신으로부터 더 많이 이탈해 온라인상의 페르소나가 되어간다. 나중에는 그게 진짜 자신인 것처럼 혼동하기조차 한다. 일베 회원들의 이른바 폭식투쟁이 충격적이었던 것은 익명성 뒤에 숨어 유희하던 페르소나들이 뭔가 착각하고는 현실 세계로 튀어나왔기 때문이다. 유감스럽게도 현실은 우디 앨런의 영화 〈카이로의 붉은 장미〉에서 스크린 밖으로 걸어나온 영화 캐릭터와는 달랐다. 그저 평범하고 비루한 실체를 확인했을 뿐이다. 재미조차 없었다. 그런 모습들을 보며 나 자신도 돌아보았다. 그럼 나는 왜 페이스북에 글을 쓰는 걸까. 좋은 사람, 훌륭한 사람으로 보이고 싶어서? 오 노! 그런 족쇄를 감수할 만큼 나의 인정욕구는 치열하지 못하다. 나는 본질적으로 개인주의자에 쾌락주의자이고 대중의 잔인성에 대한 공포를 가지고 있다. 세상을 바꾸고 싶어서? 생각을 공유하는 연쇄의 힘은 믿지만 그렇다고 글 몇 줄로 세상이 손(p. 40)쉽게 바뀔 거라고 믿을 만큼 순진한 나이도 지났다. 내 책 많이 팔고 싶어서? 이게 그나마 현실적인 생각이었는데 사양산업인 출판 현실을 곧 깨닫고는 기대를 접었다. 글 써서 돈을 번다는 건 망상일 거다. 애들 학원비라도 보태면 다행이다. 결국 재미있어서 쓰는 것 같다. 아마 나와 같은 이유로 트위터나 페이스북에 글을 쓰기 시작한 이들이 많을 것 같다. 특히 내 경우에는 나 자신의 생각을 관찰하는 데서 큰 재미를 느낀다. MRI 같은 거다. 외부에서 주어진 자극(소재)에 대해 내 뇌가 어떻게 반응하는지는 글을 써봐야 생생하게 알 수 있다. 돌아서면 잊어버리기 때문에 적어둔 글을 나중에 읽는 재미가 있다. 다른 이들의 반응이 더해지면 더 재미있다. '유체이탈' 증세가 선천적으로 극심한 편이라 어느새 다른 이들과 같은 쪽에 서서 내 글을 관찰하기도 한다. 이건 재밌고 이건 지루하군. 글이란 묘해서 어떤 목적이 앞서거나 읽는 이에게 어떻게 보이고 싶은 욕구가 앞서는 듯 보이는 글은 감흥을 주기 어렵다. 진짜가 아니기 때문이다. 내 MRI에 '뽀샵'을 하고 싶은 욕구가 앞설 때쯤이 글쓰기를 집어치워야 할 시기일 듯하다(p. 41). 성취, 성공에의 열망은 마약처럼 중독성이 있어서 사람을 파멸로 몰고 간다(p. 44). 그런 점에서 이 영화를 '나는 저만큼 충분히 노력하고 있는 걸까? 미치지 않고는 미치지 못한다는데...'라는 식의 자기계발 강박증으로 소비하는 것은 위험하고 유해한 감상법이라고 본다. 이 영화에 대한 감상글을 몇 가지 검색해보니 젊은 관객들이 이런 식으로 영화를 받아들이는 경우가 꽤 있다는 걸 알게 됐다. 물론 노력은 소중하고 필요한 것이지만 맹목적인 노력만이 가치의 척도는 아니다. 무엇을 위해 노력하는지 성찰이 먼저 필요하고, 노력이 정당하게 보상받지 못하는 구조에 대한 분노도 필요하다. 가장 위험하고도 어리석은 건 '노력해야 성공한다'를 넘어서 '성공한 이들은 다 처절하게 노력했기에 그 자리에 오른 것이다' '그만큼 노력하여 성공한 이들이니까 괴팍하고 못되게 굴 만하다' "강한 것은 아름답다' 등으로 끊임없이 가지를 치는 스톡홀름증후군이다. 스티브 잡스가 매혹적이라 하여 그의 괴팍함과 못된 점조차 찬양할 필요는 없다. 훌륭한 점과 비판받아야 할 점은 냉정하게 분리해 평가해야 한다. 그리고 대체로 성공에는 재능과 노력이 필요한 건 사실이지만, 유감스럽게도 현실사회에는 그저 우연히 부모 잘 만나서 과분한 기회를 누리며 사는 이들도 많다(p. 45). 말이 흉기다 사람이 사람을 살해하는 주된 동기는 과연 무엇일까. 재판 경험에 비춰보면 의외로 '자존심'이 원인인 경우가 많다. 건설 현장에서 숙식하는 노동자가 자고 있는 동료를 칼로 찔러 살해한 사건이 있었다. 살해 동기는 말 한마디였다. 저녁 때 소주를 마시다가 피해자가 피고인에게 특정 지역 출신 촌놈이라고 놀렸다. 다 같이 힘든 삶을 사는 처지면서 좀더 가난한 지역 출신이라고 놀린 것이다. 그만두라고 해도 반복적으로 놀리자 모욕감에 시달리다 일을 저질렀다 40년 해로하던 노부부가 있었다. 평소 유순하고 소심하던 남편이 아내를 살해했다. 이유는 사소한 말다툼 중 '개눈깔'이라고 내뱉은 아내의 말 때문이다. 어린 시절 사고로 눈 한쪽을 잃고 모진 놀림에 시달렸던 그에게 그 한마디는 흉기였다. 이처럼 누구에게나 자기만의 급소가 있다. 그리고 그것을 찌르는 흉기는 바로 '말'이다. 특히 인터넷은 그 흉기를 죄의식 없이 휘둘러대는 전쟁터다(p. 135). 단지 주목받고 싶다는 이유만으로 고통받는 이들에게 심각한 상처를 줄 수 있는 모욕을 가하는 일들이 연이어 벌어지고 있다. 미국인들은 소수자, 사회적 약자에 대한 증오 발언에 대해 사회적 제재를 가한다. 한 NBA 구단주는 여자친구에게 전화로 "흑인과 함께 내 경기장에 오지 마라"고 말한 사실이 알려져 영구퇴출당하고 구단을 매각했다. 표현의 자유에도 한계가 있는 것이다. 법관들도 말에 대해 주의하고 반성하기 위해 전문가의 강의를 듣는다. 그때 배운 것이 있다. 데이의 「세 황금문」이다. 누구나 말하기 전에 세 문을 거쳐야 한다. '그것이 참말인가?' '그것이 필요한 말인가?' '그것이 친절한 말인가?' 흔히들 첫번째 질문만 생각한다. 살집이 좀 있는 사람에게 '뚱뚱하다'고 말하는 것은 거짓이 아니다. 그러나 참말이기는 하지만 굳이 입 밖에 낼 필요는 없는 말이다. 사실 필요한 말이 아니면 하지 말라는 두번째 문만 잘 지켜도 대부분의 잘못은 막을 수 있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필요 없는 말로 남에게 상처를 주며 살아가고 있는지...... 더 나아가 진심으로 친구의 비만을 걱정해 충고하고 싶다면 말을 잘 골라서 '친절하게' 해야 한다. 옳은 총고도 '싸가지 없이' 하면 상대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다. 진심이 담긴 필요한 말이라고 해도 배려심 없이 내뱉으면 그것이 진실이기 때문에 더 상대에게 깊은 상처를 줄 수도 있다(p. 136). 법조인들의 말은 더더욱 무서운 흉기가 될 수 있다. 검찰에서 강도 높은 조사를 받고 귀가한 후 굴욕감에 자살하는 비극적인 사례가 여러 번 발생했다. 최종심판자인 법관의 말은 더 무섭다. "늙으면 죽어야지" 등의 막말만 문제가 아니다. 피고인 앞에서 재판 기록을 뒤적거리며 무심코 하는 혼잣말 한마디도 피고인에게는 청천벽력이다. 그래서 법정에서는 불필요한 말은 단 한마디도 금물이다. 요즘은 동료 법관의 재판을 서로 교대로 방청하며 자신의 재판을 돌아보게 하는 법정 모니터링 기회가 많다. 다른 판사의 재판을 방청석에서 지켜보니 나조차도 높은 법대 위에 앉은 판사의 표정 하나에도 위축되는 느낌이었다. 한번은 판사가 "주소 보정 아직도 안 하셨네요. 일부러 안 하시는 건가요?"라고 내뱉으면서 신경질적으로 서류를 휙휙 넘기자 당사자가 어쩔 줄 몰라 하며 연신 몇 번이나 죄송하다고 하는 모습을 보았다. 판사는 일 이 많다보니 순간 짜증 섞인 말을 한 것에 불과하더라도, 법대 밑에서 이를 듣는 당사자에게는 판사에게 밉보여서 불이익을 받을 것 같은 공포심을 충분히 줄 수 있음을 새삼 느꼈다. 절차적으로 필요한 말을 할 때도 표정이나 말투를 더 부드럽게, 친절하게 해야겠다는 다짐을 하는 계기가 되었다. 우리가 서로에게 '말'이라는 무시무시한 흉기를 무신경하게 휘둘러대는 대신 조금만 더 자제하고 조금만 더 친절할 수만 있다면, 세상은 훨씬 평화로운 곳이 될 것이다(p. 137). 문학의 힘 순문학 작품들은 장르소설 같은 즉각적인 몰입이나 인문학, 사회과학 서적처럼 직접적인 정보를 제공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나이 먹어가며 점점 순문학에서 멀어진 느낌이다. 그건 마음의 여유가 없어졌다는 말일지 모르겠다. 책 읽는 시간도 한정된 자원이라고 생각하여 책을 통해 세상에 대한 새로운 지식을 빠르게 얻거나 아니면 즉각적인 재미를 얻길 원하는 거다. 온통 문학에만 탐닉했던 소년 시절에는 그런 조바심 따위 없었는데. 긴 겨울밤이 이어지던 날, 서가 구석구석에 처박혀 있던 소설들을 넘겨보았다. 뭐랄까, '문학 근육'이 쇠약해져 있음을 느낀다. 장편이 잘 읽히지 않는다. 주변적인 사색이나 묘사가 이어지는 도입부는 어느 정도 탁월하지 않은 이상 남의 일기장 보는 느낌이 들어 흥미를 잃는다. 그러던 중 선물받은 계간지 『문학동네』 2014 년 겨울호에 실런 단편소설들을 읽었다. 다 좋은 작품들이었지만(p. 152) 특히 김영하 「아이를 찾습니다」, 김훈 「영자」, 천명관 「퇴근」, 성석제 「블랙박스」가 좋았다. 그중에서도 김영하 작품의 올림이 컸다. 마트에서 잃어버린 아들을 찾느라 지옥 같은 11년을 보낸 젊은 부부의 삶에 갑자기 아들이 돌아온다. 그리고 비로소 이야기가 시작된다. 아이를 잃어 버린 부모라는 소재는 그리 드문 게 아니다. 그런데 사라졌던 아이가 긴 시간이 흐른 후 돌아온 상황을 구체적으로 상상해본 사람은 별로 없을 듯하다. 그건 결코 해피엔딩이 아니라 새로운 지옥의 시작일 수도 있는 거다. 이미 자아 형성 과정에서 아이는 다른 사람의 아이가 되어버렸고, 자식과 함께할 유소년기의 소중한 시간은 소실되었다. 결말이 작위적이라는 비판도 있을 수 있겠지만, 난 좋았다. 숨쉴 공간을 남겨주어서 말이다. 김훈 작품은 고시텔에서 동거하는 노량진 9급 공무원시험 준비생들의 이야기인데, 김훈의 기자 시절 글이 연상되었다. 황량한 고시촌의 풍경과 고시생들의 내면 묘사가 뛰어나다. 대충 지나가지 않고 최대한 구체적으로 묘사하되 군더더기나 감상은 배제한 단문들이 이어진다. 서사보다 묘사가 오히려 더 몰입도가 높았다. 묘사가 이 정도로 수준 높다면 장르소설의 서사 이상으로 몰입이 된다. 좋은 단편을 찾아 읽는 것은 쇠약해진 '문학 근육' 단련에 좋은 듯하다. 문학적 감수성은 누구에게나 필요하지만 법관에게는(p. 153) 더더욱 필요하다. 심리학이든 다른 어떤 학문이든 결국 인간의 여러 특성 중 범주화할 수 있는 보편성을 추출해서 보여준다. 문학은 그보다 훨씬 풍부하게 인간의 개별성, 예외성, 비합리성을 체험하게 해준다. 후자에 대한 이해 내지 상상력 없이 이루어지는 재판은 침대 길이에 맞춰 인간의 신체를 절단하는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로 전락할 수 있다. 문학은 겉으로 드러나는 세계에 머물지 않고 인간의 숨기고 싶은 속내 깊숙한 곳을 파헤쳐 보여주곤 한다. 문학이 보여주는 인간 세상의 민낯은 전형적이지 않다. 작가들은 뻔하고 예측가능 한 것에 관심이 없다. 그들은 충동적이고, 불가해하고, 모순 덩어리인 인간 마음의 꿈틀거림을 묘사하는 것에 몰두한다. 그리고 그 관찰의 주된 재료는 작가 자신의 내면일 것이다. 어린 시절부터 자신의 마음을 스쳐갔던 온갖 미묘한 감정과 충동들, 질투, 선망, 욕정, 열등감, 우월감, 증오, 살의.... 자신을 주어로 하여 털어놓기는 어려운 날것의 내면적 충동들을 재료로 상상력을 가미하고 증폭, 변형하여 등장인물들의 내면을 창조해낸다. 인간 행위를 기술하는 방식에는 문학 이외에 육하원칙이 지배하는 신문기사가 있다. 두 방식에는 큰 차이가 있다. 인간이 저지르는 사건은 결국 인간 내면의 작용인데, 기자들은 주로 외형적 행위와 그 결과에만 치중하고 내면의 동기는 돈, 욕정, 복수심 등으로 간명하게 유형화하곤 한다. 사람들은 복잡한 사건을 쉽(p. 154)게 이해하길 원하고, 누가 나쁜 놈이고 누가 착한 놈인지 누구에게 분노하면 되는지 결론부터 알려주기를 성마르게 재촉하기 때문이다. 대중의 분노는 즉각적이고 선명한 정의를 요구한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법관으로 일해온 경험에 비춰보면 실제 인간 세계에서 벌어지는 일들 중 상당수는 인과관계도, 동기도, 선악 구분도 명확하지 않다. 신문기사처럼 몇 문장으로 쉽게 설명하기 어려운 일이 참으로 많다. 그래서 흔히들 생각하는 것과 달리 냉정 한 '팩트' 집합으로 보이는 신문기사보다 주관적인 내면고백 덩어리로 보이는 문학이 실제 인간이 저지르는 일들을 더 잘 설명해 줄 때가 많다. 작가는 최소한 자기 자신이라는 한 인간의 심층적인 내면세계를 관찰해서 쓰기 때문이다. 물론, 좋은 작가일 경우의 이야기지만 말이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옴진리교 사린가스 살포 사건에 관한 르포 『언더그라운드』를 쓰며 피해자는 물론 가해자인 옴진리교 신자들도 인터뷰했다. 예상 밖으로 신자 중에 명문대 출신의 연구원 등 이공계 출신이 많았다. 소설가여서일지는 모르지만 하루키는 '픽션'을 읽어본 경험의 부재가 엘리트 과학도를 광신도로 만들었다고 분석했다. 검증된 법칙과 데이터의 세계에서만 살던 이가 아사하라 쇼코(옴진리교 교주)처럼 통상적인 사고의 범주를 넘어선 예외적 인간의 극단적인 상상력과 조우했을 때 오히려 쉽게 무너질 수 있는 것이다. 협소한 상식에만 갇혀 있는 인간은 비상식의(p. 155) 세계를 이해하지 못하기에 인간과 세상을 깊이 이해하는 데 실패 하기 십상이다. 아무리 첨단 과학이 발달해도 여전히 더 많은 문학이 필요한 이유다(p. 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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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1-05
  • 【북토크326】 판사는 3D 직업인가?
    전직 부장 판사였다가 작가가 된 저자의 책들을 열심히 읽고 있다. 판사라는 직업은 아직도 문과생들이 선호하는 직업이다. 법관은 필요하다. 그러나 그들은 수많은 사건 사고를 읽고 보고 판단해야 한다. 결코 행복한 직업은 아닐 것이다. 물론 사회정의를 구현할 사명자들은 그럼에도 있어야 한다. 법이 최후의 보루인 사람들이 여전히 있기 때문이다(2019년에 개정 증보판이 나왔다.). 엄벌주의 '엄벌주의'는 사실 인간의 본성에는 가장 부합하는 입장일 것입니다. 고대 함무라비 법전이나 구약성서, 고조선의 팔조금법 등 동서양을 막론하고 고대문명의 기본이 되는 형벌 이론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식(p. 74)의 동해보복과 엄벌주의입니다. 살인한 자는 죽이고, 도둑질한 자는 팔을 자르며, 간음한 자는 거세하고, 빛 안 갚는 자는 노비로 삼는다는 식이죠. 현대에도 아랍권, 중국, 북한 등의 형벌은 상당히 엄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문제는 흔히들 생각하는 것처럼 '엄벌주의'가 범죄율을 낮추는 특효약이라는 증거는 없다는 점입니다. 만약 '엄벌주의'로 안전하고 행복한 사회를 건설할 수 있다는 것이 형사정책적으로 입증되었다면 지금도 대다수의 문명국가들에서 빵 하나를 훔쳐도 평생 감옥에 가두는 식의 형벌체계를 유지하고 있겠죠. 하지만 선진국 중 우리나라보다 전반적인 형벌 수준이 높은 나라는 미국과 싱가포르 정도뿐입니다. 특히 엄벌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따라야 할 모범이라고 주장하는 곳이 미국인 것 같습니다. 미국은 확실히 선진국 중 가장 형벌이 엄한 나라 중 하나입니다. 한 연구논문에 따르면 미국의 수감자 수는 200만 명을 넘고 있으며, 1999년을 기준으로 프랑스의 수형자가 평균 8개월 형을 선고받은 데 비해 미국의 수형자는 평균 34개월 형을 선고받았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미국이 프랑스보다 4배 더 형벌이 엄하므로 4배 더 안전한 국가일까요? 거꾸로 4배 더 무거운 형벌이 필요할 정도로 위험 요소가 많은 사회라고 해석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리고 '엄벌'은 공짜가 아닙니다. 우리나라가 미국처럼 평균적인 형벌 수준이 높아 많은 수감자 수를 유지해야 한다면 교도소나 소년원과(p. 75)같은 교정시설을 엄청나게 증설해야 하고, 세금으로 그 많은 수감자들을 먹여 살려야 합니다. 동시에 수감 인원 증가는 사회적으로 노동력 감소를 의미하기도 하죠. 물론 그런 사회적 비용을 투입해야 할 만큼 범죄로 인한 사회적 손실과 위험이 큰 상태라면 이를 감수해야 하겠지만 우리나라는 성범죄 등 일부 분야를 제외하면 비교적 치안이 안전한 나라 중의 하나로 꼽히곤 합니다. 또한 '엄벌' 여부를 판단할 때는 징역을 하루도 받아 본 적 없는 일반 시민들이 막연히 영화에서 본 것만 가지고 추측하는 것과 실제 형을 복역하는 사람들이 복역 기간이나 그 후의 사회생활에서 받게 되는 고통이나 불이익이 다를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해야 합니다(p. 76). 저는 어느 카지노에 가 보고 충격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드라마 「올인」에서 봤던 상류사회 느낌의 카지노 모습, 전혀 아닙니다. 슬롯머신에 눈이 퀭해진 채 꾸깃한 만 원짜리를 끝도 없이 쑤셔 넣고 레버를 당기고 있는 사람들은 초라한 행색의 노인들, 아줌마들, 아저씨들이었습 니다. 화장실에서는 고리대금업자(공지)들이 이런 이들에게 백만 원 단위 돈 묶음을 빌려 주고 있더군요. 카지노 주변에는 숱한 전당포가 그들이 전국에서 타고 온 허름한 차, 결혼반지를 담보로 잡으며 성업 중이었고요. 그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핑크 플로이드의 영화 「더 월』과 같은 영상이 떠오르더이다. 부자의 저금통에 초라한 빈민들이 줄을 서 가며 자(p. 95)발적으로 돈을 넣어 주고 있는 모습, 끝도 없이.... 부자는 자기 저금통에 대신 저금해 주는 바보들의 행렬을 보며 흐뭇해하죠. 사실 사회 여러 부문의 본질은 부자나 승자의 저금통에 어리석은 빈민들이 스스로 자기 푼돈을 넣어 주는 것의 반복일지 모릅니다. 카지노도, 도박도, 복권사업도, 경마, 경륜도, 투기적 주식 투자도, 피라미드도. 이들의 죄는 감히 절대 승산 없는 싸움에서 이겨 부자가, 승자가 될 수 있다고 착각한 죄입니다. 처음부터 패배하게끔 게임의 규칙이 짜인 판에서 50:50의 승률 게임을 하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이죠(p. 96). 저는 이 모든 끔찍함의 배후에는 우리나라 특유의 가부장주의, 남성 우월주의가 괴물처럼 도사리고 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그것은 불행히도 한국의 엄마들이 조장하는 면이 크고요. 아들은 항상 큰 꿈을 꿔야 하고, 마누라를 휘어잡아야 하고, 사내대장부가 소소한 일에 연연해선 안 되고, 사내놈이 욱하는 심정에 실수할 수도 있는 거고, 남의 집 귀한 딸을 강간해 놓고도 판사에게 탄원서를 내서 한다는 소리가 "젊은 혈기에 실수한 건데 앞날이 구만리 같은 청년을 용서해 주세요"라니. 엄마들은 앞날이 구만리 같기는커녕 앞으로 사고 칠 게 구만리 같은 싹수없는 놈을 살려 본다고 빛내고 집 팔아 합의를 보기 위해 쫓아다닙니다. 이건 엄마들의 책임이기도 해요. 일본 부모들처럼 무슨 일이 있어도 남에게 폐 끼치는 짓을 하면 안 된다고 무섭게 가르쳤어야죠. 판사는 3D 직종이랍니다. 이런 사연들만 보면서 살다 보면 인간에 대한 절망과 냉소에 빠지게 돼요. 그래도 인간에 대한 신뢰와 나약함에 대한 따뜻한 시선을 잃지 않아야겠죠. 그래서 답을 찾을 능력도 없는 주제에 구원은 없을까 고민하게 되곤 합니다(p. 99). 욕을 먹더라도 단순무식하게 한번 말해 보겠습니다. 인간 사회가 물질적으로 평등해질 수 있다는 것은 망상이다. 모두가 부자가 될 수는 없다. 빈부 격차가 심화되는 것에 대한 경계와 대책은 필요하지만 빈부 격차 자체를 소멸시킬 수는 없다. 모두가 어느 정도 이상 잘살게 되는 것만을 사회의 목표로 삼게 되면 그 힘든 목표가 도달될 때까지는 대부분의 사람이 불행하다. 빈부 격차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각자가 자신의 현재 상태에서 지금 당장 보다 행복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려면 아귀의 허기처럼 충족될 수 없는 물질적 욕구가 아니라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주어진 다른 행복의 가치를 일깨워야 한다(p. 100). 서울 법대와 하버드 로스쿨. 저는 운좋게도 이 두 학교를 다녀 볼 수 있었는데, 하버드에 오기 전 저 역시 속물적인 여러 가지 궁금증을 품고 있었습니다. 하버드 로스쿨 학생들은 정말 공부벌레들일까? 책이나 영화에서 본 것처럼 살벌하게 공부할까? 뭔가 다른 점이 있을까? 머리들은 얼마나 좋을까? 등등... 한 학기를 보내고 나서 생각해 봅니다. 다를 것이 없는 것 같기도 하고, 다른 것 같기도 합니다(p. 138). 얼마나들 머리가 좋을까? 얼마나들 머리가 좋을까? 이런 객관적 기준이 없는 의문을 갖는 것 자체가 별로 영민하지 않은 것이지만 '피상적인' 답을 말하자면 '별다를 것은 없더라'입니다. 수업을 토론식으로 진행하기 때문에 학생들의 논리 전개 과정과 아이디어를 지켜볼 수 있는데 생각보다 'brilliant'하 다고 할 만한 친구들이 눈에 잘 띄지 않습니다. 거칠게 분류하면 10명이 있으면 똑똑하게 잘하는 학생들 1, 2명, 평범하지만 열심히 하는 학생들 4명, 대충 따라가기만 하는 학생들 4명의 비율 정도? 쥐를 가지고 한 실험이 있습니다. 장애물 건너에 먹이를 두고 쥐들을 키워 보니 아무 생각 없이 굶고 있는 놈들, 머리를 쓰고 용기를 내서 먹이를 구해 오는 놈들, 구해 온 먹이를 뺏어 먹는 놈들 등으로 분류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시 먹이를 구해 온 놈들만으로 집단을 만들어 실험해 보니 그 집단 안에 다시 굶는 놈, 구해 오는 놈, 뺏어 먹는 놈으로 나뉘고 다시 그 비율은 비슷하게 유지되더라는... 인간도 크게 다르지는 않은 듯합니다. 서울 법대도, 사법연수원도, 하버드 로스쿨도 모아 놓고 보면 결국 그 내부에서 항상 잘하는 애, 어중간한 애, 포기하고 노는 애로 갈라지거든요. (그중에 너는 어느 부류였냐라는 태클은 정중히 사양합니다.)(p. 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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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1-04
  • 【단상】 개그맨의 촌철살인
    개그맨, 혹은 코미디언 이경규 씨가 2025 SBS 연예대상에서 공로상을 받았다. 그는 연예대상의 꽃은 공로상이라고 했다. 아무나 타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는 세 가지 조건을 갖춰야 공로상을 받을 수 있다고 했다. “첫째, 40년 이상 활동해야 한다. 둘째, 대상을 받아야 공로상을 받을 수 있다. 셋째, 인성이 좋아야 탈 수 있다. 그래서 내년에는 수상할 인물이 없기에 공로상은 저를 마지막으로 폐지해야 한다”고 했다. 뼈그맨(뼛속까지 개그맨)이라 불리는 유세윤이 2025 MBC 방송연예대상에서 '남자 최우수상'을 수상했다. 그는 “생각은 부정적으로 흐른다. 멘탈이 강해야 억지로 긍정적인 방향으로 끌어 올릴 수 있다. 그래서 대중들은 행복을 위해서 예능 프로를 사랑해 주시고, 개그맨들은 생각있는 웃음을 줘야 한다”라고 수상소감을 말했다. 정말 큰 공감을 했다. 개그맨들이라 웃으면서, 웃자고 한 말이지만 언중유골이고 촌철살인이다. 남을 웃기는 일이 직업인 개그맨들을 낮춰 보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은 직업적으로 남을 웃기는 사람이지 결코 우스운 사람들이 아니다. 남 웃기기가 쉬운가? 그들은 그런면에서 프로이며 전문가로서 존중받아야 할 사람들이다. 이 두 개그맨의 말을 마음에 새겨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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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1-01
  • 【북토크325】 어떤 상황에서도 삶은 선물이다
    이 책은 자신이 아우슈비츠에서 겪은 삶의 이야기, 그리고 이후의 이야기를 장편으로 쓴 《마음 감옥에서 탈출했습니다》(북토크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후 두 번째 책이다. 심리치료자로서 삶에 대한 통찰을 제공하고 있어 흥미로웠다. 모든 것을 선물로 보는 것은 우리의 삶을 새롭게 보게 한다. 나의 심리치료 접근법은 절충적이며 직관적이다. 통찰지향 정신요법과 인지지향정신요법의 이론과 임상이 혼합되어 있다. 나는 이를 '선택 요법choice therapy'이라고 부른다. 자유는 근 본적으로 '선택choice'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고난은 모두가 피할 수 없고 누구나 겪을 수밖에 없지만, 항상 우리는 어떻게 대응할지 선택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내담자가 가진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힘'을 강조하고 이를 이용하려 애쓴다. 내담자의 삶에 긍정적인 변화를 가져오기 위해서다. 나의 심리치료요법은 네 가지의 핵심 심리학 원칙들에 뿌리를 두고 있다. 첫 번째 핵심 심리학 원칙은 마틴 셀리그만과 긍정심리학에서 나온 학습된 무기력learned helplessness 이라는 개념이다. 이 개념은 자신의 삶에 어떠한 효능도 발휘할 수 없다고 믿고, 자신이 하는 어떠한 일도 더 나은 결과를 가져올 수 없다고 믿을 때 가장 고통스럽다는 개념이다. 우리는 '학습된 낙관주의 learned optimism', 즉 자기 삶의 의미와 방향을 자신이 창조하는 능력, 힘, 회복탄력성 등을 동력원으로 이용할 때 잘 살아갈 수 있다. 두 번째 핵심 심리학 원칙은 인지행동치료에 나오는 개념으로 우리의 생각이 우리의 감정과 행동을 생성한다는 개념이다(p. 12). 해롭거나 역기능적이거나 자기파괴적 행동들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자신의 생각을 바꾸어야만 한다. 다시 말해, 부정적인 신념들을 자신의 성장을 도와주고 지지하는 신념들로 대체해 야 한다. 세 번째 핵심 심리학 원칙은 내게 매우 크게 영향을 미친 멘토 중 한 명인 칼 로저스가 제시한 개념으로 긍정적이고 조건 없는 자기 존중 self-regard의 중요성에 관한 개념이다. 우리가 겪는 고통의 많은 부분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동시에 자기 자신의 고유성을 유지할 수는 없다는 오해에서 비롯될 때가 많다. 다시 말해,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수용되고 인정 받으려면 자신의 진짜 자아를 부정하거나 숨겨야 한다는 오해이다. 심리치료를 할 때 나는 내담자들에게 조건 없는 사랑을 베풀려고 분투한다. 그리고 가면을 쓰는 것과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게 할당한 역할과 기대를 충족하려 애쓰는 것을 그만둘 때야만 비로소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도록 안내 한다. 이렇게 해야 우리는 자기 자신을 조건 없이 사랑하기 시작할 수 있다. 마지막 핵심 심리학 원칙은 사랑하는 멘토이자 친구 그리고 아우슈비츠 동료 생존자인 빅터 프랭클과 공유하는 개념이다. 바로 최악의 경험이 오히려 우리에게 가장 좋은 선생님이 되어 줄 수 있고, 뜻밖의 발견을 촉진하고 새로운 가능성과 관점을(p. 13)만날 수 있게 해준다는 개념이다. 치유, 성취, 자유는 삶이 우리에게 가져오는 것들에 대해 어떻게 대응할지 선택하는 능력에 달려 있다. 또한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일(특히 우리가 겪는 고난) 에서 의미를 찾고 목적을 끌어내는 능력에 달려 있다. 자유는 일생에 걸쳐 훈련해야 하는 대상이다. 자유는 우리가 하루하루 다시 또다시 내려야만 하는 선택이다. 궁극적으로, 자유는 희망을 필요로 한다. 나는 희망을 두 가지 방식으로 규정한다. 첫 번째는, 얼마나 끔찍하든 모든 고난은 일시적이라는 사실을 자각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고자 하는 호기심이다. 희망은 우리가 과거 대신 현재에 뿌리내리도록 살게 해주고 우리 마음 감옥의 문을 열어준다(p. 14). 그리고 나는 자유를 향한 길을 걸으려는 여러분에게 세 가지 이정표를 알려주고 싶다. 우리는 준비가 되어야 비로소 변화할 수 있다. 이따금 힘든 상황(가령 이혼, 사고, 질환 혹은 죽음)들이 현재 도움이 되지 않는 것들을 대면하고 다른 방법들을 시도하라고 강요할 수 있다. 때때로 내면의 고통이나 이루지 못한 소망이 매우 소리가 커지고 계속 자리를 떠나지 않아서 더는 그것을 무시할 수 없을 때도 있다. 하지만 준비는 외부로부터 오지 않는다. 또한 재촉될 수도 강요될 수도 없다. 진짜로 준비가 됐을 때는 내면에서 무언가가 움직이고 다음과 같이 결심할 때다. '지금까지 나는 이렇게 했어. 이제 나는 다른 어떤 방법을 실행할 거야.' 변화는 더는 우리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습관과 패턴을 중단하는 것이다. 만약 자신의 삶을 진정으로 바꾸고 싶다면 단지 역기능적인 습관이나 신념을 버리는 것에 그쳐서는 안 된다. 그것들을 건강한 습관이나 신념으로 대체해야 한다. 자신이 무엇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지 선택해야 한다. 자신만의 화살을 찾아 내고 그것을 뒤따라야 한다. 치유의 여정을 시작할 때는, 무엇으(p. 19)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은지뿐만 아니라 자유로이 무엇을 하거나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또한 심사숙고하는 것이 중요하다. 마지막으로, 여러분이 자신의 삶을 변화시킨다는 건 새로운 자신이 되는 것이 아니다. 진짜 자신이 되는 것이다. 세상에 다시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고 결코 그 무엇과도 대체될 수 없는 고유한 다이아몬드가 되는 것이다. 여러분에게 일어난 모든 일, 다시 말해 여러분이 지금까지 내린 모든 선택들, 여러분이 사용하려고 애썼던 모든 방식들. 이 모두는 중요하다. 그리고 이 모두는 유용하다. 여러분은 모든 것을 내다 버리고서 맨땅에서 다시 시작할 필요가 없다. 여러분이 어떤 일을 했든 간에, 그 일은 여러분을 이만큼 멀리, 바로 이 순간으로 데리고 왔다. 자유의 궁극적인 열쇠는 진정한 자기 자신의 모습으로 존재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이다(p. 20). 내 경험상 희생자들은 이렇게 묻는다. "왜 하필 나지?" 하지만 생존자들은 이렇게 묻는다. "이제 뭘 해야 하지?" 고통은 보편적이다. 그렇지만 희생자 의식 victimhood은 선택적이다. 다른 사람들이나 상황들에 의해 상처를 입거나 압박을 받는 것을 피할 방법은 없다. 장담할 수 있는 유일한 한 가지는 우리가 얼마나 친절하든 우리가 얼마나 열심히 노력하든 상관 없이 우리가 언제든 고통을 겪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거의 혹은 전혀 통제할 수 없는, 환경적 요소들과 유전적 요소들에 영향을 받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들 각자는 희생자로 남기로 선택할 수도, 희생자로 남지 않기로 선택할 수도 있다. 우리는 우리에게 어떤 일들이 벌어질지 선택할 수는 없지만, 우리의 경험에 어떻게 대응할지 선택할 수는 있다. 많은 사람들이 희생자 의식의 감옥에 머무르는 이유는 무의식적으로 그곳이 더 안전하다고 느껴지기 때문이다. 우리는 "왜?"라고 반복해서 묻는다. 우리가 이유를 알아낼 수 있기만 하면 고통이 완화되리라고 믿으면서 말이다. 왜 내가 암에 걸(p. 25)렸지? 왜 내가 해고됐지? 왜 내 파트너가 바람을 피웠지? 우리는 대답을 찾아,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 헤맨다. 마치 그러한 일들이 왜 벌어졌는지 설명해주는 논리적인 근거라도 있는 것처럼. 하지만 이유를 물을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을 포함해서 책망할 어떤 사람이나 어떤 것을 찾는 일에 갇히게 된다. 왜 이 일이 내게 벌어졌지? 음, 왜 당신이 아니어야 하는가?(p. 26). 희생자 의식은 마음의 사후경직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과거에 갇혀 있고, 고통 속에 갇혀 있고, 상실과 결핍 - 내가 할 수 없는 것과 내가 가지고 있지 않은 것 -에 갇혀 있는 것이다. '무슨 일이 일어나든 부드럽게 수용하라.' 이것이 희생자 의식에서 벗어나기 위한 첫 번째 방법이다. 우리가 현재 벌어지고 있는 일을 좋아해야만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하지만 우리 가 싸우고 저항하기를 멈출 때, 우리에게는 더 많은 에너지와 상상력이 생기고 '이제 뭘 해야 할지' 알아낼 준비를 갖추게 된다. 꼼짝도 하지 않는 대신 앞으로 나아갈 준비를 하게 된다. 또 한 지금 이 순간에 자신이 무엇을 원하고 필요로 하는지, 그리고 여기로부터 어디로 가고 싶은지 알아낼 준비를 하게 된다. 모든 행동은 어떤 욕구를 충족시킨다. 많은 사람이 희생자로 머물기를 선택하는 이유는 그 상태가 우리에게 자기 자신을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면허권을 주기 때문이다. 자유에는 대가가 따른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행동에 대해 책임을 지라고 추궁당한다. 게다가 우리가 일으키거나 선택하지 않은 상황에서조차 책임질 것을 추궁당한다(p. 27). 우리 자신을 희생자 의식으로부터 놓아주는 건 다른 사람들을 우리가 그들에게 부여한 역할들로부터 놓아주는 것을 의미 하기도 한다(p. 40). 그때 나는 알지 못했다. 아이들에게서 고통을 아예 없애려고 하면 아이들을 망가뜨리는 셈밖에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이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어떤 감정들이 잘못됐거나 무섭다고 가 르친다. 하지만 감정은 오직 감정일 뿐이다. 옳거나 그르거나의 문제가 아니다. 나의 감정과 상대의 감정이 있을 뿐이다. 다른 사람들을 그들의 감정에서 벗어나게 하려고 설득하려 애쓰거나 그들을 유쾌하게 하도록 애쓰는 것은 현명하지 않은 행동이다. 그들의 감정을 허용하고 옆에 있으면서 "더 말해봐요"라고 말하는 편이 더 낫다. 아이들이 놀림을 받았거나 따돌림을 당해서 속상해할 때 나는 "네가 어떻게 느끼는지 알아"라고 말하곤 했지만 이렇게 해서는 안 된다. 이는 새빨간 거짓말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 어떻게 느끼는지 절대 알 수 없다. 그런 일은(p. 56)일어나지 않는다. 공감하고 지지하고 싶다면 다른 사람의 내면 생활이 마치 자기 자신의 내면생활인 것처럼 받아들이지 말아야 한다. 이는 그들에게서 자신의 경험을 박탈하고 그들을 수렁에 빠지게 만드는 또 다른 방법에 불과하다. 나는 내담자들에게 우울depression의 반대는 표현expression 이라는 사실을 자주 상기시킨다. 우리에게서 표출되는 것들은 우리를 아프게 만들지 않는다. 우리 안에 머무는 것들이 우리를 아프게 만든다(p. 57). 우리가 감정들을 회피하는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많이 있다. 불편하게 느껴지는 감정일 수도 있고 우리가 가져서는 안 되는 감정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혹은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입힐까 봐 두려워하는 것일 수도 있고 그 감정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두려워하는 것일 수도 있다. 우리가 이미 내린 선택이나 앞으로 내릴 선택에 대해 무엇을 드러낼지 두려운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감정들을 회피하는 한 현실을 부정할 수밖에 없다. 만약 어떤 것을 차단하고 "그것에 대해 생각하고 싶지 않아"라고 말한다면, 장담컨대 그것에 대한 생각에서 오히려 벗 어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감정을 초대하고 옆에 앉은 후 시간을 함께 보내라. 우리는 연약한 작은 어린아이가 아니다. 모든 현실과 똑바로 마주 보는 것이 좋다. 더는 싸우거나 숨지 말아야 한다. 감정은 감정일 뿐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감정은 우리의 정체성이 아니다(p. 63). 자유롭다는 것은 자신의 진짜 모습으로 존재하는 것에 대해 스스로 책임지는 일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이 욕구를 충족 시키기 위해 과거에 택했던 대응 기제나 행동 패턴을 알아내야 한다. 그리고 자신이 포기해야만 했던 자아의 일부와 다시 연결하고 자신이 되지 못했던 완전한 진짜 모습을 되찾아야만 한다. 자기 자신을 버리고 떠나는 습관을 깨야만 한다. 절대 잊지 말기 바란다. 당신은 다른 누구도 결코 가지지 못할 무언가를 가지고 있다. 당신은 당신 자신을 가지고 있다. 평생 동안 말이다. 이러한 이유로 나는 항상 내 자신에게 말한다. "에디, 넌 특별한 사람이야. 넌 아름다워. 매일 더욱더 에디다워 지길 바랄게."(p. 113). 수치심으로부터 자유로운 삶을 살고 싶다면 다른 사람의 평가가 우리를 규정하게 내버려두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어떻게 말할지 선택할 수 있다. 하루 를 할애해 당신이 자신과 나누는 자기 대화에 귀 기울여보라. 당신이 주의를 기울이고 있는 것에 주의를 기울여보라. 당신이 강화하고 있는 것들이다. 이러한 생각들은 당신이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또한 당신이 느끼는 감정들은 당신에게 어떤 행동을 해야 할지 지시할 것이다. 하지만 당신은 이러한 기준과 메시지에 이끌려 살아야 할 필요가 절대 없다. 당신은 수치심을 안고 태어나지 않았다. 당신의 진짜 자아는 이미 그 자체로 아름답다. 당신은 사랑과 기쁨과 열정을 가지고 태어났고 당신은 내면의 대본을 다시 쓸 수 있고 자신의 결백을 되찾을 수 있다. 당신은 완전한 사람이 될 수 있다(p. 141). 삶이 우리가 원하거나 기대하(p. 153)는 대로 펼쳐지지 않는 것이 얼마나 보편적인 경험인지 말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원하지 않는 어떤 것을 얻거나, 혹은 자신이 가지지 못한 어떤 것을 원할 때 고통받는다. 모든 심리치료는 애도 작업이다. 어떤 것을 기대했는데 다른 것을 얻은 삶, 예상하지 않고 기대하지 않은 것을 가져다준 삶을 직시하는 과정이다(p. 154). 우리에게는 상황을 통제할 수 있는 힘이 없다. 하지만 우리는 그러한 힘을 가지기를 바란다. 슬픔을 해소하는 일은 두 가지가 필요하다. 하나는 자신의 책임이 아닌 일들에 대해 불필요하게 가지는 책임감으로부터 자기 자신을 놓아주는 일이다. 다른 하나는 자신이 내리긴 했지만 돌이킬 수는 없는 선택들을 받아들이는 일이다(p. 158). 만약 우리가 죄책감으로부터 벗어나고 슬픔과 화해할 수 없다면, 이는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해를 입힐 뿐더러 죽은 사람들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죽은 사람은 죽은 대로 내버려두어야 한다. 끊임없이 소환하기를 멈춰야 한다. 그들을 놓아주고 최선을 다해 자신의 삶을 살아야 한다. 그들이 영원한 안식을 얻을 수 있도록 말이다(p. 161). "시간은 모든 상처를 치유해준다"라는 속담이 있다.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시간은 상처를 치유하지 않는다. 우리가 시간을 가지고 무엇을 하느냐가 상처를 치유한다. 때때로 사람들은 모든 것을 똑같이 유지하려고 애쓰는 방법으로 비탄이 일으킨 파동에 대처하려 한다. 직장, 루틴, 인간관계 등을 그대로 유지한 채 제자리에서 답보한다. 그렇지만 커다란 상실을 경험했을 때 더는 아무것도 예전과 같을 수는 없다. 비탄은 자신의 우선순위들을 재점검하고 다시 결정하라는 요청일 수 있다. 자신의 기쁨과 목적의식을 다시 연결하고, 자신이 바로 지금 될 수 있는 최고의 사람이 되겠다고 다시 결심하고, 삶이 새로운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는 사실을 수용하라는 요청일 수 있다(p. 166). 어떤 것들은 결코 이해할 수 없다. 이해하려고 노력도 하지 말라. 왜 그러한가에는 너무 많은 이유가 있다. 왜 이 일이나 저 일이 벌어졌는지 혹은 벌어지지 않았는지, 왜 우리가 현재 있 는 곳에 있는지, 왜 우리가 현재 하고 있는 일을 하는지. 비탄은 무엇이 나의 소관이고, 무엇이 남의 소관인지, 무엇이 신의 소관인지 명확히 알게 해준다(p. 173). 애도 작업은 힘들다. 하지만 만족감을 줄 수도 있다. 우리는 과거를 다시 방문할 수 있다. 우리는 과거를 껴안을 수도 있다. 우리는 과거에 함몰되어 있지 않다. 우리는 '지금 여기'에 있다. 그리고 우리는 강하다. 우리는 과거에 일어난 일 그리고 일어나지 않은 일과 화해 할 수 있다. 과거에 잃어버린 것이 아닌 현재에 남아 있는 것에 집중할 수 있다. 모든 순간을 선물로 여기며 살아가고 현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도록 선택할 수 있다(p. 175). 갈등 상황에서 자신의 자유를 지키는 핵심 열쇠는 자신의 진실을 꽉 쥐고 있되 동시에 힘과 통제에 대한 욕구를 포기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을 우리가 기대하는 모습이 아닌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받아들이는 것 또한 도움이 된다(p. 184). 내 친구의 딸이 매우 마음이 상한 채로 유치원에서 돌아온 적이 있었다. 같은 반 친구들이 '멍청해 보이는 얼굴'이라고 놀렸다는 것이다. 내 친구는 자신의 딸아이가 이 갈등에 어떻게 대처하도록 도와야 하는지 내게 물었다. 우리는 자기 자신을 방어하고 싶은 욕구를 버려야 한다. 만약 누군가가 당신에게 멍청하게 생겼다고 한다면 "나는 멍청하게 생기지 않았어!"라고 말하지 말라. 자신이 저지르지 않은 잘못에 대해 자기 자신을 변호하지 말라. 기싸움으로만 번질 뿐이다. 가해자가 당신에게 밧줄을 던지고 당신은 밧줄의 다른 한쪽 끝을 잡는다. 그러 고 나서 두 사람이 각자 밧줄을 자기 쪽으로 잡아당기다가 결국 둘 다 녹초가 되고 만다. 싸우는 데에는 두 사람이 필요하다. 하지만 싸움을 멈추는 데에는 오직 한 사람만 필요하다. 그(p. 187)러므로 절대 밧줄을 잡지 말기 바란다. 자기 자신에게 말하라. "저 사람이 더 지껄이면 지껄일수록 나는 점점 더 편안해질 거야." 또한 이 일이 자신과 관계된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떠올려라. 누군가가 당신에게 '멍청하게 생겼다고' 한다면 사실 그 사람은 자신이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방식에 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p. 188). 우리는 우리가 가진 두려움들을 사라지게 만들 수는 없다. 하지만 그 두려움들이 우리를 지배하게 내버려두어서도 안 된다. 우리는 방으로 다른 목소리들을 초대하여 대화를 나눌 것이다. 그런 다음 뭔가를 행동으로 실행해야 한다. 우리는 스스로 책임을 져야 한다. 그리고 도움을 요청해야 한다(p. 242). 희망은 정말로 삶과 죽음의 문제다. 아우슈비츠에서 알게 된(p. 278) 한 젊은 여성은 크리스마스 이전에 수용소가 해방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녀는 새로 도착하는 수용자들의 수가 줄어드는 것을 봤고 독일인들이 커다란 군사적 손실을 입고 있다는 루머를 들었고 오직 몇 주만 지나면 우리가 해방되리라고 자신을 납득시켰다. 그러고 나서 크리스마스가 다가왔고 지나갔다. 아무도 수용소를 해방시키기 위해 오지 않았다. 크리스마스 다음 날 내 친구는 세상을 떠났다. 희망은 그녀를 계속 견디게 했다. 그리고 그녀의 희망이 죽자 그녀 또한 죽었다(p. 279). 사람들은 내게 어떻게 나치를 용서할 수 있었느냐고 자주 묻는다. 내게는 어떤 사람의 머리에 성유를 바르고 용서하거나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죄에 대해 가진 죄책감을 씻어줄 신적인 힘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내게는 나 자신을 해방해줄 힘이 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다. 용서는 우리에게 상처를 준 사람을 위하는 일이 아니다. 용서는 우리가 우리 자신을 위해 하는 일이다. 더는 과거에 사로 잡힌 희생자나 죄수가 되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 고통만이 담겨 있는 무거운 짐을 내려놓기 위해서다. 용서에 관한 또 다른 오해는 우리에게 상처를 준 사람과 화해하는 방법이 "난 그 사람과 다 끝냈어요"라고 말하는 것이라는 생각이다. 하지만 이런 방식은 효과가 없다. 그 사람을 잘라 내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이 떠나가도록 그냥 내버려두는 것이다. 자신이 누군가를 용서할 수 없다고 말하는 한, 우리는 에너(p. 301)지를 자기 자신과 자신이 마땅히 누려야 할 삶에 유리하게 사용하는 대신 불리하게 사용하게 된다. 용서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피해를 줘도 좋다고 누군가에게 허락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피해 보는 일은 전혀 괜찮지 않다. 하지만 피해는 이미 이뤄졌다. 그리고 오직 자기 자신만이 그 상처를 치유할 수 있다. 이러한 유형의 해방은 쉽게 찾아오지 않는다. 하룻밤 자고 일어나면 해결되는 그런 일이 아니다. 게다가 많은 것들이 앞을 가로막는다. 정당성, 복수, 사과, 심지어 그저 잘못을 시인하게 만드는 것에 대한 욕구 등이 그것들이다(p. 302). 용서하지 않음에서 벗어나기 위한 핵심 열쇠 • 나는 용서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당신에게 잘못을 저질렀거나 해를 끼친 어떤 사람에 대해 생각해보라. 다음 문장들 중 진실처럼 느껴지는 게 있는가? "그녀가 한 짓은 결코 용서할 수 없는 짓이야." "그는 아직 내게 용서를 받지 못했어." "만약 내가 용서한다면, 나는 그를 곤경에서 모면케 해주는 걸 거야." "만약 내가 용서한다면, 나는 그에게 계속 내게 상처를 줘도 괜 찮다고 허용하는 걸 거야." "나는 공정성, 혹은 사과나 사실의 인정이 있을 때에야 용서할 거야." 만약 당신이 이 문장들 중 하나 혹은 그 이상에 공감한다면, 당신은 누군가에게 대항하는 일에 에너지를 쏟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당신 자신과 당신이 누려야 할 인생에 에너지를 쏟는 대신 말이다. 용서는 당신이 다른 누군가에게 주는 무언가가 아니다. 용서는 당신이 자기 자신 을 해방해주는 방법이다(p. 314). 피할 수 없는 트라우마, 고통, 슬픔, 비참과 함께할 수밖에 없다 해도 '삶은 선물이다 Life is a gift' 우리가 처벌, 실패, 버림받음에 대한 공포 안에, 우리의 인정 욕구 안에, 수치심과 책망 안에, 우월감과 열등감 안에, 권력 욕구와 통제 욕구 안에 우리 자신을 가둘 때, 우리는 이 선물을 파괴하게 된다. 삶이라는 선물을 축하하는 일은 삶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에서 선물을 발견하는 것이다. 심지어 힘겨운 부분에서도, 자신이 견뎌낼 수 있으리라 확신하지 않는 부분에서도 말이다. 삶을 축하하라. 그게 전부다. 기쁨, 사랑, 열정을 가지고 살아 가라. 때때로 우리는 만약 우리가 상실이나 트라우마에서 벗어나 앞으로 나아간다면, 재미있게 놀고 삶을 즐긴다면, 계속해서 성장하고 진화한다면, 우리가 왠지 망자를 욕보이거나 혹은 과거를 욕보이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크게 소리 내어 웃어도 괜찮다! 즐거워해도 괜찮다! 심지어 아우슈비츠에 있을 때에도 우리는 마음속에서 항상 삶을 축하했다. 상상의 연회를 준비하며 최고의 호밀빵에 캐러웨이를 얼마나 넣어야 하는지, 헝가리의 닭고기 요리인 퍼프리카시 치르케에 파프리카를 얼마나 넣어야 하는지에 대해 옥신각신했다. 어느 날 밤에는 최고의 가슴 경연대회까지 열었다! (누가 우승했을까?) 나를 모든 일은 마땅한 이유가 있어서 벌어지는 것이라고,(p. 317) 부당함이나 고난에는 어떤 목적이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하지만 나는 고통, 곤경, 고난이 우리가 성장하고 배우도록 도와주고, 우리가 진정한 자신이 되도록 도와주는 선물이라고 말할 수는 있다(p. 318). 【북토크】 아우슈비츠 생존자가 말하는 인생론-“선택” http://www.lnsnews.com/news/view.php?no=26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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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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