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5-03-13(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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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고】 목회 성장과 사회복지 사역의 전망
    목회 성장과 사회복지 사역의 전망 1. 서론: 목회와 사회복지의 연관성 목회는 영적 돌봄과 신앙 공동체의 형성을 주된 사명으로 하며, 사회복지는 개인과 공동체의 삶의 질 향상을 목표로 한다. 이 두 분야는 인간의 내적, 외적 필요를 충족시킨다는 점에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현대 사회에서 교회가 지역사회의 사회복지적 필요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때 목회 성장이 이루어질 가능성이 높아진다. 따라서 목회 성장과 사회복지를 통합적으로 바라보고, 그 전망을 제시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과제이다. 2. 목회 성장의 현황과 과제 (1) 목회의 변화와 성장 동력 현대 목회는 기존의 예배 중심 사역에서 지역사회와의 상호작용, 사회적 책임 수행으로 점점 확대되고 있다. 특히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교회는 온라인 플랫폼을 통해 예배를 드리고, 다양한 사회적 활동에 참여하며 새로운 방식으로 성장 동력을 모색하고 있다. (2) 목회 성장의 주요 과제 ① 세대 간 단절 문제: 젊은 세대의 신앙 참여 감소로 교회의 지속 가능성에 위기가 제기되고 있다. ② 다양한 요구 충족: 교인들이 요구하는 것이 예배와 설교에만 국한되지 않고, 심리적·사회적 지원으로 확장되고 있다. ③ 사회적 신뢰 회복: 일부 부정적 사건으로 인해 교회의 공공성이 약화된 상황에서, 신뢰 회복이 중요한 과제로 부상하고 있다. 3. 사회복지와 교회의 역할 (1) 교회의 사회복지 사역 전통 교회는 오랜 역사를 통해 병원 설립, 빈민구제, 교육 지원 등 다양한 사회복지 활동을 수행해 왔다. 이는 복음의 실천적 표현으로, 교회가 지역사회와 긍정적으로 관계를 맺는 기초가 되었다. (2) 현대 사회복지의 새로운 요구 현대 사회는 고령화, 빈부격차, 정신건강 문제 등 다양한 복지 필요가 증가하고 있다. 교회는 이러한 사회문제에 대응하는 데 있어 전문적이고 체계적인 접근을 요구받고 있다. (3) 사회복지와 목회 간의 상호 보완성 사회복지는 교회의 목회 사역을 보완하며, 교회는 복지 활동을 통해 신앙적 가치를 전달할 수 있다. 이러한 상호 보완성은 교회가 단순한 종교 기관을 넘어 지역사회의 중심지로 자리 잡는 데 기여한다. 4. 목회 성장과 사회복지의 통합적 전망 (1) 목회적 접근에서의 사회복지 통합 목회는 단순히 신앙 교육에 머물지 않고, 교인들과 지역사회 삶의 전반적인 문제를 돌보는 방향으로 확장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교회 내 상담소 설치, 지역 사회를 위한 장학금 지원, 취약 계층을 위한 돌봄 사역 등이 있다. (2) 사회복지적 접근에서의 목회 성장 기회 교회가 사회복지 활동을 적극적으로 수행할 때, 지역사회와의 신뢰를 쌓고 교회의 공공성을 강화할 수 있다. 이는 궁극적으로 교인 수의 증가와 영적 성장으로 이어질 수 있다. (3) 실천 방안 ① 협력적 네트워크 구축: 지역 사회복지 기관과의 협력을 통해 교회의 자원을 최대한 활용한다. ② 교육과 훈련: 목회자와 교인들에게 사회복지 관련 전문 지식을 제공하여 복지 사역의 효과를 높인다. ③ 통합 프로그램 개발: 신앙 교육과 복지 서비스를 통합한 프로그램을 설계하여 다양한 요구를 충족시킨다. 5. 결론: 지속 가능한 목회와 사회복지의 동반 성장 목회 성장과 사회복지는 서로 분리될 수 없는 영역이며, 통합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교회는 지역사회의 필요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복지 사역을 통해 복음의 실천적 면모를 강화할 때 더 큰 성장 가능성을 갖게 된다. 현대 교회는 변화하는 사회적 요구에 부응하여 목회와 복지를 아우르는 새로운 사역 모델을 개발해야 한다. 이는 신앙 공동체와 지역 사회가 함께 성장하는 지속 가능한 미래를 열어가는 길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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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11-18
  • 【기고】 109회 총회는 어디로 와서 어디로 가는가?
    109회 총회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마쳤다. 총회에 대해 총평해 달라는 요청을 받아 몇 자를 남기고자 한다. 금번 109회 총회는 우려 반 기대 반으로 끝났다고 할 수 있다. 먼저 기대 반으로 끝났다는 것은 1) 정년 연장, 여 강도사 인허 문제는 해결이 아닌 해법을 찾아서 결의했다는 점이고, 2) 회의 진행에서 총회장의 의사진행은 그대로 찬성과 반대의 의견을 골고루 들어가며 소통하면서 결의를 꾀하려고 했다. 그래서 찬, 반의 소통을 이루어 갔다. (이전 총회에서는 총회장의 생각과 반대되는 의견은 발언의 기회도 주지 않고 묵살하거나, 결의되었다고 일방적으로 진행했다고 볼 수 있는 여러 사례가 있다) 개혁신학적이어야 하는 우리의 삶에 정처 없음이 만연되고 있는 시점에서 다시 한번 총회의 결의가 우리의 삶과 신앙에 대해 깊은 고뇌를 하게 했다는 점에서 기대를 가지게 했다. 그러나 우려 반은 또 많은 걱정과 염려를 하게 했다. 1) 새로운 정치세력이 등장 하였기에 우려 반이다. 우리 선배들은 오랫동안 주류와 비주류라는 정치세력으로 존재하면서 정치를 했다. 10여 년을 넘게 주류의 정치적 독식은 비주류의 이탈을 낳았고, 우리 총회 안에는 총회를 개혁하고 교회를 새롭게 해야 한다는 기치를 걸고 교갱협이 출현되면서 교갱협 인사의 목사 부총회장 출마가 이루어지고, 교갱협 안에서 단일화를 이루지 못하여 후보가 양립되면서 교회 영성목회의 후보를 내고 결국은 영성목회의 후보가 당선되면서 총회는 금권선거가 만연되기 시작했다. 그 후 이러한 금권선거를 방지하기 위해서 제비뽑기 제도가 도입되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27년 전에 분열되어 나간 비주류가 ‘신학과 신앙이 같으면서도 다른 교단을 형성하였기에 이제는 합병을 하자’고 하여 교회의 역사상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교단 합병을 하였다. 그리고 제비뽑기 방식에서 절충형 제비뽑기 방식으로, 다시 직접선거로 선거방식이 바뀌면서 영성목회에 가입한 분들이 총회장이 되었다. 사실 총회의 개혁을 위해 만들어진 교갱협에 속한 목사가 총회장이 된 것은 108회이다. 내가 알기로는 다른 회기에 교갱협에 속한 목사가 총회장이 되지는 못하였다. 교갱협과 영성목회의 힘겨루기(?)는 109 회기에서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왜냐하면 합동포럼이라는 새로운 단체가 전면으로 부상했기 때문이다. 이 또한 지나갈 것이다. 그래서 우려 반이다. 왜냐하면 그 순간을 즐기려고 하는 사람은 항상 순간이 영원할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권불십년, 화무십일홍임을 잊지 말았으면 한다. 2) 총회의 헌의와 처리에 대한 우려이다. 한쪽에서는 잘 준비된 총회라는 평가를 한다. 그러나 다른 쪽에서는 완전히 기획된 총회라는 평가도 한다. 내가 봤을 때는 총회 자체의 회의와 결의는 대체로 무난하다고 할 수 있다. 점수로 보면 B 학점이나 C 학점 정도는 되는 총회였다. 그러면서도 우려 반이 되는 것은 109회 총회가 한 집단과 단체에 카르텔화 될 소지가 농후해졌기 때문이다. 더욱이 특보체제가 잘 운영되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이지만 특보들이 총회장의 눈과 귀를 막고 자신들이 입이 되어 성경과 헌법에 어긋나는 일들을 말하고 시행하려고 한다면 109회 총회는 세상이라는 바다를 거룩한 교회로 항해하지 못하고, 거룩한 산을 오르겠다고 돛대를 부러뜨려서 등산용 지팡이를 만드는 꼴이 될 수도 있다. 총회장의 지혜가 어느 때보다도 더 필요할 때다. 지혜가 없으면 어떤 지혜도 활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3) 이번 총회는 그 어느 때보다 증경총회장과 부총회장의 발언이 많았다. 원로들의 지혜와 지식이 어려운 문제일수록 필요하지만 그렇지 않은 것에서는 어른들은 발언을 자제하고 또 필요에 따라 요청했을 때와 잘못 결의하여 어려움에 직면하게 될 때 발언하여 후배들에게 깨우침을 주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해서 우려가 된다. 왜냐하면 어른들의 발언은 조언이나 권고이어야 하지 참견이나 관여가 되어서는 안 되는데 계속하여 어른 대접으로 발언을 주어서 결정해야 할 총대들의 발언에는 조금 소홀히 했다. 만일 직무상의 결정에 따른 결의를 다시 묻고 조언을 구한다면 총회는 개혁되지 않고 구태가 만연되게 될까 우려된다. 109회 총회는 기로에 서 있다. 지금까지의 우리의 리추얼이 종말을 고할 것인지, 아니면 개혁되고 갱신되어서 리추얼이 힘을 가지게 될 것인지에 대한 분기점에 있다. 항상 우리의 삶인 리추얼은 관습과 전통이라는 것으로 드러난다. 사실 관습과 전통은 겉으로는 동일하게 보일 때가 많다. 이러한 피상적 유사성은 우리의 인습주의 즉 전통을 해롭게 한다. 전통이 되어버린 관습, 특히 성경의 해석은 진짜인 정통을 죽이고 현실에서 숨통마저 끊어 놓는다. 이렇게 되어 버리면 개혁은 물거품이 되고 만다. 여성 강도권에 대한 허용 결의는 이런 점에서 우리의 전통은 살아 있고 활동적이지만 그 전통 속에 있는 관습은 항상 수동적임을 알 수 있다. 적어도 이제는 관습이 수동적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살아나서 전통을 이해하고 신학적으로 재해석해야 하는 과제를 남겼다. 역사적으로 전통 속에 관습이 되어 버린 전통은 어느 순간 정통의 자리에서 내려와 관습이 되고 별다른 노력 없이도 판에 박힌 체 일상이 되어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된다. 적어도 이런 점에서 제109회 총회는 전통 속에 관습으로서 수동적으로 이해되는 여성의 역할을 신학적으로 재조명하려고 노력하며 고군분투하려는 모습이 총대들의 모습에서 볼 수 있었다. 사실상, 신학의 전통은 정통의 자리에서 관습이 되어 물러서게 될 때는 항상 역사적으로 우리에게 살아가는 법을 가르쳐 주지도 않고 우리의 삶에 대해서 각자가 책임을 지는 방법도 알려주지 않는다. 사실상 지금의 전통이 된 정통은 한때는 분명 혁신이었다. 그런데도 전통이 되어 버린 정통은 혁신을 아니, 개혁을 마귀가 예수님을 싫어하듯 싫어한다. 혁신과 개혁이 정통이 되고 그 정통이 관습이 되면 우리들의 삶은 매너리즘의 늪에 빠지고 결국은 전통과 관습을 지키기 위해 병적인 공동체적 반응을 하며 소통할 수 없는 공동체가 되고 전통파와 개혁파가 대립하며 분열하고 적대시하게 된다. 그리고 어떠한 견해든지 우리들의 삶을 안정화하지 못한다. 금번 제109회 총회는 신학적 진영논리에 빠지지는 아니했지만 결국은 주일성수의 문제와 여 강도사 인허의 문제는 벌써 진영논리로 변질되고 있다. 심지어 장신도 아닌 기장의 신학으로 이야기하는 글들이 나오고 있다. 진영의 신학(조직신학)이 아닌 성경(성경신학)으로 우리는 다시 묻고 다시 답해야 할 때가 되었다. 결국은 진영의 논리로 서로가 무장하게 될 때 우리의 신학과 신앙은 세속화될 뿐 아니라, 세속적인 삶 속에서 의미도 뜻도 모른 체 주술화 되고 마법화 된다. 진영의 논리로 여 강도사 인허의 문제를, 주일성수의 문제를 바라볼 것이 아니라 신학의 문제로 바라보고 신앙적인 답을 찾아가야 한다. 이러한 기로에 놓여 있는 총회가 금번 총회이다. 그래서 우려 반 기대 반이다. 결국 기대도 우려도 다 지나갈 것이지만 그래도 기대도 해보고 우려도 해본다. 대다수의 사람은 자기가 하는 일의 의미나 타당성을 그리고 적합성에 대해서 민감하지 못하고 둔감할 때가 많다. 그래서 깨닫지 못하고 정체성이 변하지 않는다. 제109회 총회에서는 신학적으로 변해서는 안 된다는 우려와 변해야 된다는 기대가 총대들 속에 있음을 감지했다. 기대와 우려를 할 수밖에 없다. 15회 이상을 총대로 참석하면서 느끼고 깨달은 것은 우려도 기대도 다 쓸모가 없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총회가 그리고 그 결의된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주크박스에서 나오는 것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려는 아닌 것 같아서, 기대는 그럴 것 같아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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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10-14
  • 【기고】 정년제, 과연 성경적인가?
    다음은 원 철 목사의 정년제 폐지를 주장하는 기고문이다. 본 기고는 빛과소금뉴스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음을 밝힌다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교단은 성경말씀을 기본바탕으로 세워진 보수교단이며, 개혁주의에 입각하여 세워진 교단이다. 그래서 하나님 말씀대로 살고 있다고 늘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신학을 배우고 하나님의 말씀을 기본 원리로 해서 가르치고 목회를 하고 있다. 그러나 늘 염려하는 것들이 있다. 과연 우리 교단이 하나님의 말씀에 얼마나 충실하고 있는지에 대한 논란이 일고 있다. 헌법이라는 것을 앞세워 정치와 사회라는 관점에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서 빗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 말씀 앞에서는 순종하고 하나님 말씀이 신앙의 기초가 되고 하나님 말씀을 가르치고 하나님 말씀인 성경을 가슴에 품고 살려고 성도들도 몸부림치며, 목사 역시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목회하며 몸부림치고 있다. 그러나 언제부터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사회적인 관점이 우리 교단에 서서히 목소리를 높이더니 이제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것 같아 가슴이 메어지는 것 같고 몹시 아프다. 교회와 기독교를 보는 사회에서의 시선 때문에 정년제를 사수해야 하거나 정년제를 지금보다 5년을 줄여야 한다는 것이다. 세습제도가 마치 죄인인 것처럼 보는 것 역시 사회시선을 의식한 것 같다. 이유는 사회가 어떻게 보느냐하는 것이다. 심지어 정년을 연장하거나 세습을 하면 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난다고 이야기 한다. 뿐만 아니라 사회에서 교회와 기독교를 비난한다고 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천주교는 75세 정년이 있으나 자율에 맡겨서 자신이 원하는 때에 은퇴하도록 되어있다. 그러나 이것 때문에 천주교를 비난하는 사람은 없다. 불교에도 아예 정년이 없는데도 불교를 비난하는 소리나 사람을 본적이 없다. 그런데 유독히 기독교만 정년제를 폐지하면 사회에서 비난할 것이라고 이유를 댄다. 왜 그럴까? 언제부터 사회시선을 의식하고 사람들의 눈치를 보면서 살고 있는지 교단이 부끄럽기만 하다. 우리의 판단의 기준이나 근본을 어디에 두고 있느냐는 것이다. 목회자의 의식에도 문제가 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인본주의(人本主義) 사상으로 물들어가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가라’ 하시면 가고 ‘서라’하는 곳에 서서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명령과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며 살려고 노력해왔다. 그래서 일본 사람들이 신사참배를 강요하며 굴복시키려고 했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순종하기 위하여 목숨을 걸고 신앙을 지켜왔다. 이러한 신앙의 선배들의 숭고한 신앙을 본받아 지금까지 믿음으로 순종하며 살려고 노력해 왔고 신앙의 절개를 지켰던 선배들을 존경하고 있으며 그분들의 영향으로 우리 교단이 보수교단이라는 명분을 이어 가고 있다. 이러한 신앙이 좋아서 합동이라는 교단이 태어났고 이를 선택하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다. 필자가 말하고 싶은 것은 무엇보다도 성경에서는 정년을 어떻게 보고 있느냐하는 것이다. 제108회 총회에서 박00 목사는 정년제 문제를 가지고 나와서 발언하기를 정년제 연장을 해서는 안 되며 40대 50대의 80%의 젊은 목사들이 담임목사 근처도 못 가고 있다며 지금 400~500여명이 담임목사 되기 위하여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는데 “이들은 담임목사도 한번 못하고 은퇴해야할 형편”이라며 “베이비붐 세대는 젊은 세대를 위해 조용히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 발언이 얼마나 위험한 발언인지 모른다. 하나님의 말씀과 보수 신학은 어디로 가고 성경에서 말씀하는 내용은 하나도 없고 인간적인 관점과 사회적인 관점에서만 주장하고 시도하려고 하는가? 우리의 사역과 사명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한 사역인지 아니면 사회의 시선을 의식하여 그들을 기쁘게 하고 젊은 세대들을 기쁘게 하기 위한 것인지 깊이 성찰하여야 할 것이다. 지금의 베이비붐 세대는(Baby Boom Generation :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1946년부터 1964년까지 베이비붐이 일어난 시기에 출생한 세대를 말한다.)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 안수를 받은 후, 기도하면서 뜨거운 사명감을 가지고 “부름받아 나선 이 몸, 어디든지 가오리다” “주여 이 몸 바쳐 주의 일을 하렵니다”라고 찬양하면서 수 많은 목회자들이 빈곤한 살림 가운데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자신의 재산을 털어 지하에 삭월세를 얻고 칸을 막아 살림을 하면서, 밤낮 부르짖어 기도하면서 전도하고 교회를 개척하였다. 이렇게 베이비붐 세대가 하나님께 대한 충성과 헌신이 있었기에 대한민국에 수많은 교회들이 세워졌고, 기독교 부흥이 일어났으며, 오늘에 이르렀다. 그러나 지금 40대, 50대, 80%의 젊은 목사들은, 개척하려는 사람이 거의 없다. 기성세대가 70세가 되어 은퇴하기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선배들이 열심히 사역하여 이루어 놓은 부흥된 교회에 청빙 받아 안전하게 목회하려는 생각들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그 한 예로, 대형교회에 담임목사 청빙광고가 나오면, 100~200여통의 이력서가 접수된다고 한다. 중소교회가 청빙광고 하면, 생활비를 얼마 주느냐? 교인은 몇 명이냐? 사택은 몇 평짜리 아파트를 주느냐? 상여금은 얼마나 주느냐? 자가용은 제공하느냐? 월요일은 쉬느냐? 월요일에 출근하면 출근 수당은 주느냐? 새벽기도회에와 금요기도회를 하면 수당을 얼마나 주느냐? 부터 묻는다고 한다. 반면 시골교회가 청빙광고 하면 아예 이력서도 내지 않는다고 한다. 시골교회와 소형교회는 앞으로 10년 이내에 담임목사를 모시지 못하여 교역자가 없는 교회가 계속 늘어날 것이다. 중소도시에서도 부교역자를 구하지 못하여 힘들다고 한다. 총신대학교 박성규 총장도 이대로 가면 2026년부터 목회자가 모자라는 형상이 뚜렷하게 나타날 것이라고 했다. 서울의 교회들도 교육전도사 구하기가 여간 힘든 것이 아니라고 한다.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에 입학하는 학생은 적은데 베이비붐 세대가 열정적으로 개척하며 교회를 세웠던 분들이 앞으로 10년동안 계속 은퇴하시기 때문이다. 지방도시나 시골에는 부교역자가 없어서 사역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 담임목사 타령이나하고 있는 세대를 볼 때 대단히 심각한 일이다. 왜 이렇게 변하고 있는 것일까? 이것을 박00 목사가 말한 것처럼 기성세대 목회자에게 그 책임을 물어 “베이비붐 세대는 젊은 세대를 위해 조용히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사람들에게 인기를 끌고, 듣기 좋은 말로서 군중들의 인기를 모으는 이야기로 남아서는 안 된다. 그 분은 역사학자로 알고 있는데 미래를 보지 못하는 것 같아 아쉬움이 있다. 우리나라가 경제가 성장하면서 도시교회는 경제적으로 부유해졌다. 유학 가는 신학생들이 부쩍 늘어났으며 유학파들이 40~50대에 주를 이루고 있다. 유학 다녀온 분들 가운데 신학을 더 깊이 연구함으로 하나님을 더욱 뜨겁게 사랑하고 열정적으로 하나님을 위해 복음을 들고 교회를 개척하려는 뜨거운 사명감을 가진 사람들을 찾기가 어렵다.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대도시의 기성교회의 후임자로 가려고만 기회를 기다리고 있다. 복음전파를 위하여 하나님께 부르심으로 소명을 받고 신학교에 가서 성경과 신학을 배우고, 복음을 더 효과적으로 전하기 위하여 더 배워서 하나님께 헌신과 충성하기로 다짐하고, 유학까지 다녀온 사람들이 꼭 큰 교회의 빈자리를 찾아다녀야 하는지 그 이유를 묻고 싶다. 어느 날 갑자기 대형교회 후임자가 되려고 하는 사람은 더 큰 문제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베이비붐 세대가 젊은 세대를 위해 조용히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것이 대안인가? 묻고 싶다. 제104회 총회에서 우리 대전중앙노회가 ‘정년제 연구위원회’를 두어 연구해서 보고하기로 제안하였다. 이를 총회가 받아들였고 결의해 주어 2년동안 정년제연구위원회(위원장 고영기 목사)가 조직되었고 신학자 4분에게 의뢰하여 그분들이 연구한 결과를 발표하는 공청회를 가진 바 있었다. 2020년 4월 21 새에덴교회에서 열린 “정년연구를 위한 공청회”에서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역사신학자 서창원 교수, 실천신학자 양현표 교수, 구약신학자 이희성 교수 3분과 칼빈대학교 총장 김근수 교수가 그동안 연구한 것들을 발표하였다. 4분 중에, 한 분만 조심스럽게 사회의 관점이 있음으로 정년제를 현행대로 유지하거나 73세로 연장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하였고 서창원 교수, 이희성 교수, 김근수 교수는 성경적인 근거와 신학적인 근거를 들어 정년제를 폐지하는 것이 옳다고 주장하였다. 미국의 보수교단들을 조사하여 본 결과 미국교단들도 정년제가 거의 없음을 보고하였다. 제108회기 신학부주최 대전중부지역 ‘교회와 신학세미나’에서 김길성 교수는 정년제에 대하여 ‘교회에는 2가지 직분이 있는데, 하나는 ’항존직‘으로서 영원히 있는 것으로서 목사나 장로가 은퇴하고 사역을 하지 아니할지라도 목사를 목사로 장로를 장로라고 부르는 것이다. 또 하나는 ‘시무’가 있는데 시무는 기간을 정하여 사역을 하는 것으로서 우리 총회에서 시무연한을 정해 놓은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70년 사역을 하고 은퇴해야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질문을 하고 싶다. 시무 연한이 과연 성경적인가? 교회는 그리스도인들이 모여 함께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해 나가는 공동체이다. 70세가 되면 사역을 그만 두어야 하는가? 성경적으로 말해주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바탕으로 보수를 지향하고 있으며 칼빈의 신학사상과 개혁주의를 지향하고 있다. 헌법에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어디로 가고 인간의 사상들이 지배하고 있는가? 헌법이 우선인가? 아니면 성경이 우선인가? 성경이 하라는 대로 하고 하지 말라면 멈추어야 한다. 이것이 우리교단이 지향하는 신학정체성이 아닌가? 신학정체성을 부르짖고는 있으나 과연 신학정체성에 맞는 올바른 길을 걷고 있는지 물어보고 싶다. 왜 장로들은 연합하여 성명서를 발표하면서 정년제 연장은 절대 하면 안 된다고 하는가? 그 이유를 나이가 들면 너무 시대적으로 낡은 생각과 열정이 사라져서 교회 부흥에 도움이 안 되므로 정년제를 65세로 하향해서라도 빨리 젊은 목회자로 담임목사를 교체하여야 교회가 신선해지고 젊어지고 부흥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마저도 성경적이냐 하는 것과는 다른 문제이다. 교회 안에서 목사들이 성경을 올바르게 가르치고 있는가? 장로들이 이런 집단행동을 하는 것은 목사들이 성경말씀을 올바르게 가르치지 않은 결과이므로 먼저 목사들이 회개하여야 한다. 성경에 어디에 70세가 되었으니 은퇴하라는 내용이 있는가? 필자가 제안하는 ‘정년제를 폐지해야 하는 근거’는 다음과 같다. 우리 교단이 세워진 목적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확실하게 믿고자 세워진 교단이다. 신본주의(神本主義)이며 칼빈의 신학사상을 따르고 있으며 개혁주의 노선을 지지하고 있다. 정치 제13장 제3조 장로. 집사 임직서약 1항은 “신구약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요 또한 신앙과 행위에 대하여 정확 무오(正確無誤)한 유일(唯一)의 법칙으로 믿느뇨?” 이다. 구약에 아브라함을 가르켜 선지자라고 했고 모세 역시 선지자라고 했으며 120세 죽을 때까지 자신에게 주어진 사역을 감당하였다. 사무엘선지자 역시 죽기까지 사역을 하였다. 구약의 제사장 예언자 대선지자 소선지자 사사 왕 모두 정년이 없는 종신직이었다. 신약에서도, 예수님의 12제자들에게도 정년이 없었으며 순교할 때까지 사역하였다. 사도행전 7장에 나오는 예루살렘교회 7집사들도 생명을 다하는 날까지 하나님께 충성하다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고린도전서 12장 28절에 은사로 사역을 주실 때 사도 목사 교사들에게도 정년이 없었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에서 감독 장로 집사를 임명할 때에도 정년을 이야기하고 있지 않다. 사도요한은 오히려 밧모섬으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를 받아 계시록을 기록하고 96세에 순교하였다. 모든 직분자들은 하나님의 일을 하도록 직분에 맞게 사역을 하며 하나님께 쓰임 받았다.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리던 사가랴제사장 역시 늙었으나(눅 1:8~9, 18) 하나님께서 맡겨준 성전에서의 사역을 성실하게 이행하였다. 제사장이나 선지자들은 오늘날의 목사와는 사역면에서 일부 차이가 있지만 하나님께 대한 사역은 변함이 없어야 한다. 왜 성경에서는 정년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을까? 그 이유는 하나님께 대하여 충성을 다하고 맡겨진 사역에 대해서는 생명을 다하는 날까지 잘 감당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예수님께서도 요한계시록 2:10절에서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고 말씀하셨다. 사도 바울은, 행 20:24절에서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고 사명을 선언하였다. 성경에 나오는, 모든 사역자들은 구약시대나 신약시대에 정년제를 시행했다는 근거를 찾아볼 수 없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보내는 편지 디모데전서 3장에도 장로와 집사를 선발하는 기준에도 정년 규정이 없다. 항존직이란, 옛 헌법 정치 제4장 제4조 1항에 위임목사는 “한 지교회나 1구역(4지교회까지 좋으나 그 중 조직된 교회가 하나 이상 됨을 요함)의 청빙으로 노회의 위임을 받은 목사이니, 특별한 이유가 없으면 그 담임한 교회를 종신(終身)토록 시무한다.”고 되어 있다. 항존직(恒存職)이라는 말은 자신이 사직하거나 면직되지 않는 한 종신(終身)토록 시무하는 것을 의미한다. 서창원 교수는 정년제법을 ‘제정하는 그 자체가 비성경적이고 비신학적’이라고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실천신학 양현표 교수는 ‘수요와 공급’이라는 주제에서 ‘평균수명이 늘어났으며 저출산 고령화 사회로 가면서 건강지수가 현격히 좋아졌다’고 말하면서 ‘지금의 정년제는 성경과 헌법 정신에 어긋났다’고 지적했다. 지금 현행대로 가면, 2029년부터 목회자의 수가 179명이 모자라며 교회수를 현재대로 유지하고 신학교 지원자들이 감소하는 경우 당장 3년 후인 2027년부터 목사의 수가 140명이 모자라며 2035년에는 무려 2,960명이 모자랄 것이라고 통계를 통하여 전망하였다. 지금도 지방에서는 부교역자를 구하기가 하늘에 별 따기처럼 어려우며 각 노회마다 교회를 폐교하는 청원이 속속 올라오고 있다고 한다. 전국신학대학뿐만 아니라 우리 총신도 2021학년부터 정원미달이 되었으나 박성규총장이 열정적으로 홍보한 결과 미달은 겨우 면하였다. 그러나 앞으로 2029년에는 100명정도 입학할 것이라고 조심스럽게 전망하고 있다. 1990년대 들어서면서 한국 교회는 성장이 퇴보하고 있으며 지금은 매년 3천여개의 교회가 문을 닫고 있으며 교인 수가 감소하는 최악의 상황을 맞이하고 있다. 박성규 총장 역시 신대원 입학생이 점점 줄어드는 시점에서 수요와 공급의 미달로 심각한 현실로 가다오고 있다고 하였으며 유럽의 뒤를 따라 문을 닫는 교회가 점점 많아질 것이라고 전망하였다. 이희성 교수는 우리 교단 헌법에는 1992년 제77회총회에서 정년제를 시행했으나 기독교한국침례회총회에서는 “목회자의 정년을 교단에서 규정하지 않고 개 교회에 일임하여 교회에서 정하는 것으로 한다”고 보고하였다. 대신교단은 현행 정년제가 성경적이 아님으로 성경말씀에 준하여 시행하기로 결의하고 단호하게 정년제를 폐지하였다. 개혁교단에서도 성경을 바탕으로 하는 보수교단으로서 당연하게 정년제가 없어야 한다고 하였다. 개혁, 대신을 비롯한 독립교단들은 일찍이 정년제를 폐지하였다. 이희성 교수와 김근수 교수가 미국장로교 10개 보수교단을 조사한 결과 9개 교단이 정년이 없음을 발표했으며 초창기 미국의 선교사님들이 우리나라에 복음을 들고 들어와 교회들을 세우고, 우리 총회를 세우고 우리 교단 헌법을 만들 때에도 미국교회의 성경적인 헌법을 기준으로 하여 정년이 없도록 만들었다. 이후 우리 총회는 1992년 제77회 총회에서부터 정년제를 시행하였다. 미국 R.C.A.교단 만이 70세 정년이 있지만 “70세가 된 목사나 은퇴한 목사라할지라도 교회와의 계약에 의하여 위임의 형식으로 사역을 지속할 수 있다”라는 단서를 붙였다. 미국 남침례교회는 ‘목회자의 청빙에서 은퇴까지 전적으로 개교회의 특성과 자율성에 일임하기에 교단적으로 목사에 대한 헌법 규정이 없으며 목사 시무정년은 종신토록 시무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정년제 폐지를 반대하는 분들의 의견은 대부분 정년제를 폐지하면 사회적인 관점에서 지탄받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필자가 정치를 잘 하시는 목사님에게 고견을 들으려고 정년제는 성경적이 아님으로 정년제를 폐지해야한다고 이야기 했더니 “목사님은 정치를 모르는구먼” 하면서 “정치적으로 안돼”하는 것이다. CTV에서 2주전에 “목사 장로 정년연장 필요한가?” 제109회 총회 특집 토론에서 함성익 목사와 박창식 목사가 패널로 나와서 토론을 벌인 적이 있다. 이 토론을 보면서 내가 왜 총회에 있어야 하는지, 되돌아보는 기회가 되었다. 왜 이분들은 통계를 중요시하고 사회시선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젊은 목사들이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그들의 이야기는 경청하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야기는 왜 한 마디도 안하는가? 이들이 우리 교단의 대표하는 목사들이 맞는가? 우리 교단의 정체성은 어디에 있는가? 신학정체성을 주장하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허울 좋은 개살구와 같다. 우리가 분명히 해야 할 것은 우리가 믿는 대상은 하나님이고 성경이다. 우리의 헌법을 정치적으로 생각하고 사회적인 것에 기준을 삼으면 안 된다. 지금의 우리 헌법은 성경을 배경으로 만들어진 70세 정년제가 아니다. 정치적으로 현실 상황과 필요에 따라 만든 제도이다. 그렇다고 헌법 정신을 살리기 위하여 만든 제도도 아니다. 정치적인 목적과 바탕으로 헌법을 개정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이 성경말씀에 비추어 문제점이 드러났다면 성경적으로 수정하는 것이 성경적이요 개혁주의 정신에 부합한 것이다. 교회법을 사회의 기준으로 생각하면 하나님과 성경말씀을 믿는 신본주의(神本主義)가 되는 것을 포기하고 스스로 인본주의(人本主義)로 전락하는 것으로서 엄청난 실수를 범하는 것이다. 모세가 성경을 기록했던 5500여년 전이나 사도들과 바울이 성경을 썼던 2000여년 전이나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나 하나님의 말씀은 일점일획도 변해서는 안 된다. 창조시대부터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변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의도와 기준을 따라야지 떠나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정년제는 반드시 폐지되어야 마땅하다. 보수를 지향하는 신본주의 우리 교단이 단호하게 성경말씀으로 돌아가서 한국교회와 세계 교회에 성경적인 모델이 되어야 할 것이다. 본 필자는 우리 교단 목사 장로들이 하나님 나라 갈 때까지 죽도록 충성함으로 하나님 앞에서 “잘하였구나 충성된 종아! 칭찬받으며 하나님께서 배설한 천국잔치에 참석하여 하나님의 즐거움에 참여하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상급받는 신실한 사명자들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바라기는 우리 총회가 한국교회에서 가장 성경적이요, 보수적이며 개혁주의라고 믿고 있다. 그러나 매년 계속되는 정년제 폐지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성경으로 바로 세워지기까지는 계속 문제가 될 것이다. 정년연장이 아니라 폐지하여야 한다. 성경에 기초하지 않는 것은 보수가 아니다. 신본주의도 아니며 칼빈주의도 아니고 보수라는 말과 개혁주의라는 말을 사용해서도 안 된다. 왜 해마다 수백 교회가 우리 교단을 탈퇴하고 떠나는지 생각해보라? 이 문제를 속히 해결해야 한다. 신학대학의 교수들은 왜 눈치만 보고 있는가? 성경적으로 그 답을 확실하게 제시해야 한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소리를 높여야 한다. 그래야 우리 교단이 정체성도 확립되고 세계 교단과 교회의 모델이 될 것이다. 또한 신학교도 본래의 신본주의 모습으로 살아날 것이다. 제109회 총회에서 현명하게 결단해 주기를 바란다.
    • 오피니언
    • 기고
    2024-09-18
  • 【기고】여성 안수 문제,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1. 안타까운 108회 총회의 갈지(之)자 행보 이번 108회 총회에서 여성 사역자 위원회는 여성들에게도 강도사가 될 수 있는 길을 제안하였고, 이를 이의 없이 총회는 받아들였다. 이러한 결정은 우리 총회가 획기적인 방향으로 걸어갈 수 있는 놀라운 진전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는 총회 마지막 날 번복되었다. 없던 일이 되었고, 더 나아가 아예 여성들이 안수에 대해서는 꿈도 꾸지 못하도록 다른 이름의 직책을 만들어주겠다는 것으로 방향을 잡았다. “교육사”, “신학사”라는 이름으로 설교할 수 있게 해주겠다는 것인데, 이는 목사 안수는 아예 가능하지 않도록 못박아 버리는 일로 보여진다. 이러한 갈지자 행보는 더더욱 여성들로 하여금 분노하게 만들고, 교단을 떠나는 일이 가속화될 것이라고 예상된다. 이러한 결정이 아쉬운 것은 여성이 교회에서 잠잠해야 하기 때문에 목사 안수를 줄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도, 정작 “교육사”, “신학사”라는 이름으로 설교할 수 있게 하겠다는 자기모순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2. 교단은 이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구해야 한다 우리 교단의 현행 헌법에서 여성 안수를 허용하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여성 안수에 대해서 논의하는 것은 잘못이 아니다. 종종 여성안수를 주장하려거든 그런 교단으로 떠나가라고 겁박하는 분들이 있다. 그들은 스스로를 칼빈주의자라고 하는데, 칼빈주의의 요체는 무엇보다도 성경이 최고의 기준이며, 그 어느 것도(교단헌법과 교리교과서 등등) 성경과 동등한 권위를 갖지 못하기에, 모든 것이 성경의 판단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칼빈주의자라면 성경의 가르침을 들어서 반박해야지, 교단 헌법으로 겁박한다면 너무 궁색해 보일 뿐이다. 성경만이 우리의 신앙과 행위에 최고의 기준이며, 다른 모든 것은 성경의 판단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 우리 교단의 가장 중요한 원칙이다. 성경 외에는 그 어느 것도 무오(無誤)한 것은 없으며, 실제로 우리 교단의 헌법은 여러 번 수정을 해왔다. 그리고 심지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안에 있는 행위언약이 성경의 가르침에 부합하는지 질문이 들어왔을 때, 왜 신앙고백서를 따르지 않느냐고 정죄하지 않고 성경을 다시 한번 살펴보자고 입장을 정리했다. 여성 안수의 문제는 과연 성경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것이다. 여성에게 안수를 해야 한다는 것은 단순히 시대의 조류를 따르는 것이라고 폄하해 버릴 것이 아니다. 우리가 시대의 조류를 따라서는 안 되고, 성경이 최고의 기준이라고 하는 원칙은 아주 소중하다. 우리는 시대의 조류를 따를 것이 아니라, 성경이 가라고 하는 데까지 가야 하고, 성경이 금한다면 아무리 세상이 바뀌어도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야 한다. 문제는 과연 여성에게 안수하는 문제가 시대 조류에 편승한 것인가이다. 여성에게 안수하자는 주장이 시대의 조류에 편승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사실 과거에는 과거라는 시대의 조류에 따라 여성에게 안수를 하지 않았다는 것을 인정하는 셈이다. 무엇보다도 성경에서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물론 성경은 분명하게 “여성은 교회에서 잠잠하라”(고전 14:34)고 되어 있다. 그렇게 성경이 금하고 있는데, 여성 안수가 어떻게 가능하다는 말인지 쉽게 납득할 수 없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면, 즉 만일 여성이 교회에서 잠잠해야 한다는 이 말씀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분명하게 믿는다면, 지금 당장 여성들이 하고 있는 대부분의 모든 사역들을 교회에서 금지해야 할 것이다. 구역장도 안 되고, 세미나 강사로 세워서도 안되고, 교사도 할 수 없다. 만일 이게 하나님의 뜻이라고 진정으로 믿는다면 말이다. 하지만 이것이 여성으로 하여금 교회 내에서 성직자로 세워질 수 없는 근거 구절로 사용될 수 없다. 왜냐하면 “성경 전체로”(tota scriptura)의 원칙 때문이다. 성경 구절 한두 구절에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 전체의 가르침이 무엇인지를 살펴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성경 전체로의 원칙이 무너지고 성경의 한두 구절에 의존하면, 하나님의 뜻과 위배되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예를 들어,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만을 선택했다고 말하고 있으며, 모압과 암몬 민족은 하나님의 회중에 “영원히” 들어올 수 없다고 되어 있고, 더 나아가 예수님은 오직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에게로만 보냄을 받았다고 말씀하셨다. 이런 말씀들만 보면 이방인들에게 선교를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완전 위배되는 것이 될 것이다. 하지만 성경 전체의 가르침에서 보면 선교가 하나님의 뜻임을 알 수 있다. 심지어 모압 여인인 룻도 하나님의 회중 속으로 들어와 메시야의 조상이 되었다. 그러니까 성경 한두 구절만 보면 안 되는 것이다. 성경 전체의 가르침이 무엇인가를 구해야 하는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신 구속사역이 어떤 변화를 가져왔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그러한 관점 때문에 초대교회 예루살렘 총회는 할례를 이방인들에게 요구할 필요가 없다는 가장 진취적인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이미 하나님은 여성인 드보라와 훌다를 지도자와 선지자로 세웠고, 고린도전서 11장에서는 여성들이 교회내에서 예언(하나님의 뜻을 풀어 가르치는 것)하는 것 자체를 금하지 않고 머리에 두건만 쓴다면 예언할 수 있다고 하였다. 사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구원은 요엘 선지자의 예언을 결국 성취시켰다. 즉 그때가 되면 “내가 내 영을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그들이 예언할 것”이라고 하였는데, 오순절 때 이미 성취되었다. 이제는 여성들도 하나님의 뜻을 풀어 가르칠 수 있게 하신 것이다. 종종 예언과 가르침은 다르다고 반론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고린도전서 14:31에서는 예언의 목적이 가르치고 권면하는 것이라고 분명하게 못박고 있다. “너희는 다 모든 사람으로 ‘배우게’ 하고 모든 사람으로 ‘권면을 받게’ 하기 위하여 하나씩 하나씩 예언할 수 있느니라.” 예수님께서 12제자 중에 여성을 한 명도 세우지 않았다는 사실이 반론의 근거일 수 없다. 물론 예수님께서 여성도 12 제자 가운데 포함시키셨더라면 논란 자체가 정리되었겠지만, 예수님께서 남자들만 제자로 세우셨다는 것이 여성은 안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할 필요가 없다. 사실 따지고 보면 12제자 중에는 사마리아 출신이 한 명도 없고, 더 나아가 이방인도 한 명도 없었다. 그러면 오로지 유대인만 사역자가 될 수 있다는 뜻일까? 한국 사람이 성직자를 하겠다고 하는 것은 잘못이 되는 것일까? 개혁주의의 원조격인 칼뱅도 오로지 남자들만이 사역을 할 수 있다고 보았다는 것도 반론의 근거일 수 없다. 칼뱅은 아주 뛰어난 신학자이지만, 완벽한 사람은 아니었다. 칼뱅의 입장이 모두 다 100% 맞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칼뱅은 성경의 가르침이 비추어보아서 자신의 주장이 잘못되었다면 자신의 주장을 따르지 않아야 한다고까지 말했다. 우리가 칼뱅을 우상화해서는 안 되는 것이고, 항상 성경만이 최종적인 권위가 되어야 한다. 여성 안수를 받아들이면 결국 자유주의를 받아들이게 되지 않을까 우려가 많다. 자유주의를 받아들인 교단들이 주로 여성 안수를 시행하는 것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성 안수를 받아들인 교단이 모두가 다 자유주의화된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미국의 CRC교단, 고신교단의 모교회 격이라고 할 수 있는 화란개혁교회(31조파)도 여성 안수를 수용했다. 또한 한국 내에서도 개혁주의를 표방하는 보수교단인 백석 교단과 여러 개혁 장로교단들도 여성 안수를 받아들이고 있지만, 철저하게 자유주의를 배격하고 있다. 그 동안 이런 식의 반론은 참 많이 있었다. 주5일제 시행하면, CCM 복음송을 받아들이면, 외국과 무역을 하게 되면, 조상제사를 드리지 않으면, 부모님이 주신 머리카락을 자르면, 세상이 망할 것이라는 식의 주장이 많이 있었다. 하지만 찰싹거리는 작은 파도를 보면서, 두려움과 무서움 때문에 한 발자국도 떼지 못하면 결국 도태될 뿐이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과연 무엇이 성경 전체를 통해서 가르쳐주시는 하나님의 뜻인가일 것이다. 물론 우리와 깊은 관계가 있는 미국의 PCA, OPC 교단과 같은 곳에서도 여성 안수는 허용하지 않고 있다. 하지만 PCA, OPC 교단도 머지않은 장래에 여성 안수를 받아들이게 될 것이라고 예상한다. 왜냐하면 모두가 성경의 가르침에 순복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교단이기 때문이다. 성경을 연구하고 또 연구해보면, 여성들에게 잠잠하라고 했던 것이 당시에 있었던 일시적인 명령이었을 뿐이라는 것이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성경을 최고의 권위로 인정하고 받아들인다면, 결국 성경의 가르침을 따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수천 년 동안 여성들이 사역하는 것이 막혀 있었다는 사실도 반론의 근거일 수 없다. 안타깝게도 사람은 객관적 존재가 아니다. 그래서 자신의 환경과 문화의 영향을 받아서 성경을 해석하다 보니, 그 해석이 잘못될 수 있다. 사실 종교개혁자들은 천년이 넘도록 지속되었던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이 잘못된 것이라고 외칠 수 있었다. 아니 그 이전에 이미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중심의 종교가 순 엉터리일 뿐이며 잘못된 것이라고 외치셨다. 역사가 오래 되었다고 항상 옳은 것은 아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의 불변의 원칙은 “개혁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거하여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ecclesia reformata semper reformanda est secundum verbum dei)이다. 항상 하나님의 말씀에 다시 비추어보아서 그동안의 전통이 잘못된 것은 없는지 점검해야 한다. 전통으로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면 안 된다(마 15:3). 사실 초대교회에서도 브리스길라와 같은 여성 사역자가 있었고, 유니아라는 여성(롬 16:7)도 12 사도는 아니었지만 바나바와 같은 또는 비슷한 역할을 했던 사도였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황금의 입이라고 알려진 요한 크리소스톰(350-407)은 유니아에 대해서 “사도가 되는 것은 위대한 일인데, 그 가운데 뛰어난 자였다. 이게 얼마나 놀라운 영예의 노래인가!”라고 했다. 장로나 집사로 세우려면 “한 아내의 남편”이어야 한다는 말은 여성은 안 된다는 뜻으로 보아야 할 필요가 없다. 장로의 자격에 “방탕하다는 비난을 받거나 불순종하는 일이 없는 믿는 자녀를 둔 자라야”한다(딛 1:6)는 구절이 있지만, 결혼하지 않았거나 아직 자녀가 없다고 해서 목사나 장로 임직의 결격 사유로 보지 않는다. 이 표현은 “자녀를 두었을 경우에는”이라는 말이 생략된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 아내의 남편이어야 한다는 말은 “만일 그가 결혼한 남자라면”이라는 전제가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따라서 “한 아내의 남편”이어야 한다는 말을 여성은 안 된다는 뜻으로 확대하는 것은 잘못이다. 이 구절은 결혼 생활에 있어서 성결을 유지해야 한다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아직 교단 내에 여성 안수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다. 초대 교회 할례에 대한 의견이 분분했던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고 하면 그냥 일방적으로 밀어붙일 게 아니라, 서로 겸손하게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구해야 한다. 3. 현행 법으로도 강도사를 줄 수는 있다 부흥하고 성장하는 공동체는 모든 사람이 어떤 방식으로든 더 잘 일할 수 있게 하는 공동체이다. 망할 수밖에 없는 공동체는 대부분의 사람들의 사역을 막고 소수가 가진 그 힘을 행사하는 공동체이다. 광야에서 모세는 이드로의 제안을 받아들여 자신이 가지고 있던 재판권을 천부장, 백부장에게 나누어 주었다. 우리 교단도 여성들이 좀 더 적극적으로 사역에 참여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야 한다. 우선 총회는 여성 사역자들이 강도사 인허를 받을 수 있도록 도우면 좋겠다. 현행 헌법도 여성이 강도사가 되는 것을 명시적으로 금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정치편 제14장에 의하면, 총회가 신학 졸업생을 고시하여 노회가 강도사로 인허하도록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부분은 총회가 결의하고 받아주면 충분히 가능한 것이다. 사실 108회 총회 전에 이에 대한 합의가 어느 정도 이루어졌었다. 108회 총회의 결정이 뒤로 역행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될지 상당히 우려스럽다. 목사 안수의 문제는 총회가 좀 더 심도 있게 성경에 드러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토론해야 한다. 그 옛날 예루살렘 회의를 통해 할례를 시행하지 않아도 된다는 결론을 내렸다. 성경에는 반드시 할례를 시행해야만 한다고 되어 있지만,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이 가져온 관점으로 성경을 이해하면서 할례를 하지 않아도 된다고 결론을 내렸다. 이와 마찬가지로 총회의 역할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토론을 통해 구해야 한다. 현재 우리 교단 내에는 다양한 해석과 의견이 존재한다. 세미나, 토론회, 전문 연구 등을 병행하는 것을 통해, 서로 경청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구해야 한다. 이웃 교단인 백석은 발 빠르게 여성 안수를 허용했고, 엄청난 교단적 발전과 신학교의 발전이 있었다. 사실 많은 여성 사역자들을 이웃 교단에 빼앗긴 것도 사실이다.
    • 오피니언
    • 기고
    2023-10-03
  • 동네작은학교 봄학기를 마치고
    2023년도 다문화 아이들과 함께 하는 동네작은학교 봄학기를 마쳤습니다. 초등부4-6학년 아이들이 한학기 동안 노래 교실에서 배운 노래를 불러주었습니다. 꿈꾸지 않으면 사는게 아니라고 별 헤는 맘으로 없는 길 가려네 사랑하지 않으면 사는게 아니라고 설레는 마음으로 낯선길 가려 하네 아름다운 꿈꾸며 살아가는 우리 아무도 가지 않는 길 가는 우리들 누구도 꿈꾸지 못한 우리들의 세상 만들어 가네 배운다는건 꿈을 꾸는 것 가르친다는건 희망을 노래하는 것 배운다는건 꿈을 꾸는 것 가르친다는건 희망을 노래하는 것 우린 알고 있네 우린 알고 있네 배운다는건 가르친다는건 희망을 노래하는 것 아이들이 꿈을 꾸고 교사인 우리들은 희망을 노래하는 것…그런 학교를 꿈꾸며 한학기를 달려 왔습니다. 아이들이 노래를 부르는데 옆에서 지켜보며 가슴이 벅찼습니다. 먼 타국에서 한국 땅을 향해 온 어머니들이 낳은, 다문화 자녀라 불리우는 이 아이들이 꿈을 노래하는 모습에서 룻도 생각나고 나오미도 생각 났습니다. 바울이 키운 영적 아들 디모데도 떠올랐습니다. 그도 이방 아버지와 유대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다문화 출신이었죠. 이류 취급 받고, 제국에서는 주변인 처럼 살아간 저들이 하나님의 나라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한 학기 동안 꿈을 꾸듯 달려 왔습니다. 살아 있음을 느끼며, 없는 길을 만들며 그렇게 시간을 보냈습니다. 한달의 방학을 보내고 여름학기를 또 시작 합니다. 기도해 주시고, 응원해 주시고, 함께 해 주셔서 감사 드립니다. 이들이 주님의 나라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있을 아이들 입니다. 이 아이들을 위해 계속 기도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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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5-15
  • 아버지 자리
    "어버이날 선물" 어버이날인 오늘 막내딸은 늦었다고 아침에 학교태워달라고 눈치 줘서 엄마가 태워줬고 집으로 올쯤 냉면 먹고 싶다해서 아빠가 삶아 먹게했더니 깜짝 이벤트 해 주었습니다. 역삼동까지 가서 사온 어버이날 맞춤케익이라 하면서요. 노래를 듣는데 저는 자꾸 천국가신 어무이 생각나서 울컥했습니다 “아버지 자리” 1. 나는 가난한 농부의 7남매의 막내로 태어났다. 내가 태어날 때 아버지는 45세였다. 줄줄이 딸만 낳다가 느지막하게 형과 나를 3년 터울로 낳았던 아버지는 그제야 어깨에 힘을 줄 수 있었다. 늦게 낳은 막내아들이 결혼 할 때 아버지는 이미 70대 중반이셨다. 워낙 나이차가 많다보니 내게 아버지는 아버지보다 할아버지 같았다. 그 시대 아버지상은 무뚝뚝하고 엄한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래서 밥상 한번쯤은 마당으로 던졌던 것을 자랑삼아 말하던 시대였다. 우리 아버지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난 아버지에게서 단 한 번도 따뜻함, 다정함을 느끼지 못했다. 도리어 아버지는 가까이 하기에는 늘 먼데 계신 분이셨다. 배운 게 없고, 가진 것이 없던 아버지는 고단한 삶 속에서 종종 인상 쓰셨고, 걱정과 염려를 입에 달고 사셨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1년 전, 오래된 옛 집을 허물고 새 집을 지었다. 물론 농협 대출 받았다. 대출 상품은 20년 동안 원금과 이자를 나눠 갚으면 되는 농민들에게 좋은 거였다. 하지만 아버지는 새 집에 사는 기쁨보다 빚으로 인한 염려가 더 크셨다. 일찍부터 철이 든 나는 아버지를 보면서 부인할 수 없는 진리 하나를 깨달았다. 아버지는 염려가 많으시고, 돈이 없는 분이시다. 그래서 아버지의 속을 꽤나 썩인 형과는 달리 나는 착한 아이 코스프레 길을 선택해 속 썩인 일이 거의 없었다. 덕분에 어릴 때가 가장 많이 들은 소리가 ‘착하다’였다. 그때 형성된 착한 아이 이미지는 보름 전, 40년 만에 만난 중학교 동창들에게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2. 세월이 흘러 나도 아버지가 되었다. 아버지 커리어도 어느 듯 30년이 가까워진다. 어느 날, 대학 다니는 막내딸이 용돈을 좀 달라 했다. 아무 생각 없이 선뜩 지갑에서 돈을 꺼내 주는데, 속 깊은 곳에서 울컥거리며 눈시울이 붉어졌다. 왜냐면 내가 경험하지 못한 아버지 상이 내 모습 속에서 보였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공납금이나 학용품 사기 위해서 아버지에게 용돈을 요구하면 언제나 엄마가 대신하여 옆집으로 달려가 돈을 꿔와 주었다. 그렇게 아버지는 가난했고, 고단한 인생길을 사셨다. 하지만 언제나 정직하셨고 진실하셨다. 경우를 벗어난 행동과 남에게 피해 주는 것을 싫어하셨다. 더군다나 인생 후반에는 믿음에도 큰 진전을 가지면서 새벽을 깨우며 항상 기도하셨다. 지금도 새벽예배 후에 소죽을 쇠면서 콧노래로 흥얼거렸던 찬송의 소리가 들린다. ♪ ‘고요한 바다로 저 천국 향할 때 주 내게 순풍 주시니 참 감사합니다.’ 이 찬송을 부를 때마다 아버지의 모습이 떠오른다. 아버지가 없이 살아 온지도 벌써 21년째다. 누나들은 내가 나이가 먹어갈수록 아버지를 가장 많이 닮았다고 한다. 내가 나를 봐도 얼굴이 길어지면서 아버지를 닮아가는 것 같다. 요즘 아내가 나를 보면서 ‘미’라고 소리 내라고 한다. ‘미’라고 소리 내면 입 꼬리가 살짝 올라가 웃는 상이 되기 때문이다. 인상 쓰신 아버지상보다 웃는 아버지상이 보기 좋다. 3. 언제부턴가 엄혹한 사회의 톱니바퀴에 끼인 채 제자리를 맴돌며 점점 주변을 서성이는 아버지들의 늘어나고 있다. 자식을 끔찍하게 생각하면서도 표현할 줄 몰라 함께 있으면 서먹해지는 아버지, 가족들의 대화에 당최 끼지 못해 가정에서조차도 왕따 되어가는 아버지, 아내 없인 금방 폐인이 되어가는 아버지. 그래서일까? 자식들 입장에서 어머니보다 멀리 계신 분이 아버지다. 5월만 되면 평소보다 더 아버지가 그립다. 나 역시 아버지에게 다정다감하지 못한 못난 아들이었다. 또한 딸들에게도 친근하지 못한 아버지였다. 어제 딸의 손을 잡고 결혼식장에 입장하는 친구 목사를 보면서 아버지의 자리를 생각했다. 멋진 아버지로, 친근하면서 웃는 자랑스러운 아버지로 남은 삶을 살기를 다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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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고
    2023-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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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건빵
    어제 아침, 교회에 가니 택배 상자가 있었다. 택배 온다는 말도 없었는데 주소를 확인하니 내게 온 게 맞았다. 군용 건빵이었다. 그것도 무려 7종류의 건빵이었다. “21곡물 가득 참깨 건빵”, “땅콩건빵”, “참깨건빵”, “야채건빵”, “검은깨건빵”, “쌀건빵”, “건빵”. 총회 군선교사회에서 보낸 거였다. 보암직 스럽고, 먹음직스러운 건빵들이 수두룩하다. 하지만 내 손이 간 곳은 아무 수식어도 없는 ‘건빵’ 봉지를 집고서 뜯었다. 건빵 2개에 별사탕 1개를 입 안에 넣고 어저께 산 ‘구쯔 커피’를 내려 한 모금을 마셨다. 환상적이다. 카페에서 달달한 빵과 먹는 것보다 이게 훨씬 맛있다. 한 모금씩 홀짝홀짝 마시는데 자꾸 옛 생각이 난다. 서울 올림픽이 열리던 해 2월, 매서운 추위가 채 가시기 전 나는 나라의 부름을 받고 경기도 양주 가래비에서 훈련받았다. 따뜻한 경상도 사람이 전방에 가니 너무 추웠고, 배고픔에다가교육사단이라 훈련도 빡세고, 행군도 3번에 걸쳐 총 160km를 걸었으니 하루하루가 견디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서도 웃을 수 있었던 것은 전우들 때문이었다. 내 훈련번호는 67번이었고, 앞 66번은 착하고 순한 포항 출신 ‘양0원’이가 뒤 68번은 사회에서 유흥업소에서 지루박, 탱고 등 각종 춤과 여자를 일찍이 마스터한 ‘이0출’이란 친구가 배치되었다. ‘이0출’은 훈련하다가 휴식 시간이 되면 남들은 담배 한 개를 장전할 때 조교의 부름을 받아 앞에 나가 어김없이 멋진 춤사위를 벌였다. 그는 묻지도 않았는데도 사회에서 자신이 경험한 것을 영웅담 삼아 내게 곧잘 이야기해 주었다. ‘이0출’의 영웅담은 교회에서 율동할 때 외에는 여자의 손을 잡아본 적 없는 순둥이 청년인 내게는 신세계였다. 그렇게 종일 훈련을 마치고 저녁 먹고 10시 취침에 들면 배고픔은 극에 달했다. 좌우에 누운 66번과 68번 그놈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때 얼굴이 검고 담배를 많이 피워 검붉은 입술을 가진 우리 소대 선임하사인 그놈이 훈련병 누군가를 깨웠다. 그리곤 페치카 옆에서 단둘이 ‘아작아작 ’소리 내며 뭔가를 먹는 게 아닌가? ‘건빵’이었다. 그 소리가 왜 그렇게 부러운지 밖에서는 쳐다보지 않았던 건빵이 너무 먹고 싶어 눈물이 찔끔거렸다. 나중에 보니 둘은 고등학교 동창이었다. 우리는 그 소리를 들으면서 허기진 배를 움켜잡고 잠자리에 들어야만 했다. 지난달 초에 동기 임 목사님에게서 전화가 왔다. 받아보니 좀 도와달라는 거였다. 임 목사님은 우리 교단 군선교사회 회장이다. 임 목사님을 비롯한 여러 민간인 목사님들이 자비량으로 군선교사로 활동하시는데 2월말, 1박 2일로 전략 캠프 수련회를 준비하는 중에 후원을 부탁하는 전화였다. 임목사님은 10년 넘게 군선교사로 활동하지만 단한번도 도와달라고 전화하지 않았던 분이다. 오죽했으면 전화까지 했을까 싶어 집에 있는 돈을 싹 끌어모아 보내드렸다. 그랬더니 편지와 함께 건빵을 보내 감사를 표했던 거였다. 요즘 군인들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100만원 넘는 월급에 이렇게 맛난 건빵까지 마음껏 먹으니 말이다. 하지만 부럽지는 않다. 우리에겐 배부른 요즘애들이 가질수 없는 건빵 추억이 있으니 말이다. 그 건빵 추억이 오늘 이렇게 글감이 되어 내 인생 여정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게 된다. 건빵 다 먹었다. 은근히 배부르다.
    • 오피니언
    • 기고
    2023-03-04
  • 어머니 부재 1년
    벌써 1년이다. 어머니가 천국으로 이사 가신지. 시골집은 별반 달라진 게 없다. 낡은 대문, 현관 경사로, 가지런하게 놓여 있는 장독대, 집안에 가재도구 등...단지 어머니만 계시지 않을 뿐이다. 하지만 어머니는 마치 계신 것처럼 구석구석 흔적은 여전히 묻어있다. 어저께 오전, 온 형제들이 시골집에 모여 어머니 1주기 추도예배를 드렸다. 그리고 점심을 같이 먹었다. 누나들이 끓어 놓은 청도추어탕이 밥상에 올라왔다. 내게 청도추어탕은 어머니 냄새다. 맑은 추어탕에 제피가루 듬뿍 넣어 먹는 맛은 시골 가야만 가능했다. 하지만 어머니가 천국 가시기 몇 해 전부터는 청도추어탕을 맛볼 수 없었다. 그 맛이 너무 그리웠다. 혹시 수도권에 청도 추어탕집이 있나 검색해 봐도 없었다. 청도 역전에 있는 추어탕 집에 전화해서 가격도 물어봤다. 점심을 맛있게 먹고 누나들은 아재 밭에서 냉이를 캐고, 나는 잠깐 동네 산책을 했다. 봄이 오는 길목이라 따뜻했지만 간간이 불어오는 바람은 여전히 추위를 느낄 정도였다. 인적이 예전만 못한 동네를 돌아다니며 사진도 몇 장 찍었다. 빈집도 더러 보인다. 집은 곳곳이 무너졌고, 잡초가 무성하다. 그 옛날 반들거리던 마당에서 구슬치기하며 놀았던 어린 시절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마을 맨 위에 사시는 아재 집에 가면서 빈집을 가리키며 형에게 물어봤다. “이 집이 누구 집인교?” “내 친구 00집이다” 그 집 앞 담벼락에는 깨진 벽들이 두 개씩 겹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지난 설에 보니 양지바른 그곳은 ‘미륵땡~’이라고 불리는 그 동네 아지매들이 겹쳐진 벽돌 위에 앉아 도란도란 담소 나누던 아지트였다. 아재를 뵙고 내려오면서 보니 옛 점빵도 보인다. 요즘으론 미니슈퍼다. 역시 텅텅 비어있다. 하지만 옛날에는 라면부터 새우깡, 맛동산, 초코파이 등이 없는 것이 없었다. 밤마다 용띠 형들에 이어 양띠인 우리까지 뻔질나게 찾아가 내 친구 상이 어무이를 깨우며 많이들 외상으로 사 먹었다. 외상값은 다 갚았는지 모르겠다. 동네 냇가도 잡초가 무성하다. 예전에는 물도 많았고 피레미, 버들치, 중태기 등 물고기들도 많았다. 초여름부터 우리들이 뻔질나게 멱감았던 추억의 공간이기도 하다. 고향 생각날 때마다 보려고 몇 장 더 찍었다. 목회자로 살아가는 내게 토요일을 바쁜 날이라 서둘러 떠날 채비를 했다. 누나들이 어머니가 담은 마지막 된장이라 하면서 담아준다. 간수를 뺀 소금 자루도 있어 챙겼다. 어머니를 만난 듯 기뻤다. 시골집을 떠나면서 수건 하나를 챙겼다. 수건이 없어서 챙긴 게 아니다. 집에는 삶아 뽀송뽀송한 깨끗한 수건이 많다. 하지만 시골집 수건이 좋다. 그 수건에는 고향 집 특유의 향이 나기 때문이다. 그 향은 내게 어머니 향이다. 어머니가 그리울 때다 그 향을 맡고 싶다. 그날 하루 왕복 8시간 운전했다. 설교 준비하고 늦은 밤에 잠자리에 누웠는데 곧바로 꿈이 꾸였다. 꿈에 어머니가 옛날처럼 이것저것 챙겨주셨다. 꿈결에 어머니 소리마저 들렸다. 너무 생생했다. 기분이 좋았다. 어머니가 천국에서 잠깐 내 곁에 내려와 그토록 사랑했던 막내아들을 토닥여주고 간 것 같았다. 감사함이 넘치는 고향 나들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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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3-01
  • 팔불출 목사의 아내 자랑-한 상담사의 탄생
    3년 전,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코로나가 창궐했을 때 우리는 당황했다. 무엇을 할지, 어떻게 할지 아는 게 없었다. 교회도 마찬가지였다. 그때 아내가 말했다. “여보, 나 공부 할래요” “무슨 공부?” “상담공부요.” 아내는 그렇게 집에서 가까운 서울여자대학교 휴먼서비스대학원 가족상담학 석사과정에 입학했다. 대학 졸업 후 30년 만에 시작된 공부는 만만치 않았다. 컴퓨터도 자유롭게 다루지 못했고, 눈도 침침해 돋보기를 껴야만 책을 읽을 수 있어 공부하기엔 늦은 나이였지만 아내는 최선을 다했다. 평소 코를 전혀 골지 않았는데 공부 시작하면서부터는 매일 코를 골았다. 이해가 되지 않는 것들은 교수에게 계속 질문하였고, 배운 내용은 끊임없이 내게 말하면서 익혔다. 덕분에 내가 야매로 상담 공부한 셈이다. 무엇보다 교수들이 추천한 전공서적은 모두 사서 줄을 치면서 읽고 또 읽었다. 솔직히 나도 학위공부 했지만 아내처럼 그렇게 전공서적을 열심히 읽으면서 하지는 못했다. 예전에 내가 공부할 때 아내가 최선을 다해 도왔듯이 이제는 내가 도울 일을 찾았다. 감사하게도 코로나 기간이라 시간적 여유로움이 생겨 도울 수 있었다. 라면과 김치찌개 정도 끓일 줄 알았는데, 유트뷰 선생들의 친절한 설명을 보면서 이것저것 요리를 해 보니 재미있었다. 요리가 별것 없었다. 짠맛과 단맛의 적절한 조화와 그 맛을 내는 재료를 무엇으로 쓸 것인지만 고민하면 되었다. 공부할수록 컴퓨터 다루는 실력이 늘어가는 아내의 손놀림과 요리할수록 양파, 대파, 마늘 등을 다루는 실력이 늘어나는 나의 손놀림은 비례하였다. 집에 있는 세 여자는 모두 공부한다고 머리를 싸매고 있을 때 유일한 남자인 나는 어설픈 칼질을 하면서 저들의 허기진 배를 채워주는 역할의 역전이 코로나 기간 우리 가정의 모습이었다. 아내는 공부를 곧잘했다. 첫 학기부터 성적이 좋더니 꾸준하였다. 하지만 4학기 째 논문과목은 너무 힘들어했고, 몸도 마음도 지쳐가고 있었다. 도와주지 않을 수 없었다. 논문은 내가 가장 잘 하는 분야다. 국제신대원에서 논문 지도한 경험을 살려 아내를 도와주니 다시 힘을 얻는 것 같았다. 무사히 그 과목도 좋은 성적을 받았다. 4-5학기 때가 되니 상담인턴 과정까지 겹쳐 아내는 정말 바빴다. 놀이치료를 통한 아이와 부모 상담, 게다가 교회 등록한 새 가족들 상담 등 아내의 일은 점점 더 늘어갔다. 그렇게 치열하게 공부하더니 무사히 모든 학위과정을 마쳤다. 며칠 전 대학원 교학과에서 전화가 왔다. 아내가 모든 과목에서 에이 플러스 받아 석사과정 전체에서 수석 했다고 하면서 졸업식 날 석사학위증을 대표로 받아야 한다고. 오늘 아내는 길고 길었던 학위과정을 마치고 졸업했다. 3년 만에 대강당에서 행해지는 서울여대 졸업식은 찬양과 기도와 축복이 어우러진 은혜롭고 아름다운 예식이었다. 두 딸과 함께 가서 마음껏 축하해 주었다. 최선을 다한 아내가 멋있었고 아름다웠다. 앞으로의 아내의 사역도 많아질 것 같다. 이전보다 깨어진 영혼들이 더 많은 시대다. 이런저런 일로 마음을 다쳐 아파 고통스러워하는 영혼들의 울음소리가 곳곳에서 들린다. 그들을 위해 하나님께서 아내를 준비시키고 있는 것 같다. 그녀와 28년을 함께 살아온 나는 아내를 믿는다. 아내는 가슴이 따뜻하면서도 지혜로운 여인이다. 그러기에 내담자의 영혼을 어루만질 수 있고, 그들이 자신의 문제가 뭔지 알고 스스로 해결점을 찾아갈 수 있도록 안내하는 좋은 상담사가 될 거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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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2-19
  • 한기총 이야기① “사람은 믿어도 목사는 믿지 말라”
    법원에 의해 한기총 대표회장직을 2년 넘게 수행하고 있는 김현성 변호사가 최근 『한국기독교이야기』를 발간했다. 대표회장직을 수행하면서 경험하고 느낀 바를 적은 것이다. 그 중에 일부를 발제, 연제하여 일반인의 시각에서 본 기독교의 민낯을 보고자한다. "사람은 믿어도 목사는 믿지 말라" 필자는 시간이 허락하는 한 면담을 요청해온 목사들을 모두 만나 경청하기로 하고 일단 많은 목사들과 면담했다. 예상했던대로 백가쟁명(百家爭鳴)이었다. 목사들은 각자 당신의 입장에서 한기총의 현황을 설명했고, 당신의 입장에서 문제 제기와 해법을 제시하였다. 비슷한 특징도 발견할 수 있었다. 한기총 목사들은 서로가 서로를 불신하고 있었고, 자신 또는 자신을 포함한 몇몇 사람만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적임자라고 자처하기도 하였다. "사람은 믿어도 목사는 믿지 말라"는 목사도 있었다. 성경 어디에도 목사를 믿으라는 말은 없다고 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인간을 창조하였느니 오히려 인간을 믿는 것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믿는 것과 연결될 수는 있으나 목사를 믿는다는 것은 이단이라는 것이다. 당시에 박장대소(拍掌大笑)했지만 뼈있는 말이었다. 어떤 목사는 한기총에는 "영(靈)적인 사람은 아무도 없고 모두 육(肉)적인 사람밖에 없다"고 했다. 한기총에서 반드시 없어져야 할 '뱀 같은 존재'들이 똬리를 틀고 있다며 이름을 일일이 거명 하기도 하였다. '먹사', '개독교'라는 말까지 서슴없이 써가며 자신을 포함한 목사들을 싸잡아 스스로 비판하는 목사도 있었다. 증경대표회장 중 한 분은 당신이 한기총의 역사 그 자체이며 누구보다도 현황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라고 했다. 필자에게 '어중이떠중이(?)' 다른 사람들을 모두 만날 필요가 없으며 당신말만 듣고 그대로 행하면 칭송받을 것이라며 다른 목사들과 필자의 만남을 경계하기도 하였다. 한편, 이단 논란이 있는 목사에 대해 이단 해제 명목으로 부동산이나 거액의 금품이 오고 갔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실제로 수년 전 이단 해제에 도움을 주겠다는 명목으로 수억을 수수하여 현재 형사재판 중인 사람도 있었다. 가장 신성해야 할 신학 문제에 금품이라니? 충격이었다. 게다가 대표회장 선거에 천문학적 선거비용이 들어 모두가 금권선거라고 개탄하면서도 헤어 나오지 못하는 것 같았다. 충격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공금횡령으로 형사 고발된 한기총 목사들이 적지 않았다. 주로 모금한 각종 성금이나 헌금, 연회비 등을 횡령한 사건들이었고, 실제로 통장의 공금을 횡령한 것이 발각되어 필자가 해임한 목사도 있었다. 지도자급 목사들이 모인 한기총에서 성금 횡령이라니, 상상도 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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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1-30
  • Well Dying(good life, good death) 16 - 죽음에 대한 다양한 관점 연구(6)
    Well Dying(good life, good death) 16 - 죽음에 대한 다양한 관점 연구(6) 1. 죽음에 대한 종교적 관점 우리 인간의 가장 큰 특징 중에 하나는 자연이나 현실에 그대로 순응하지 않고 도전한다는 사실이다. 인간의 불굴의 정신이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많은 문명을 이루고 기술과 과학을 발달시킨 원동력이 되었다. 아울러 이러한 사람들의 도전 정신은 죽음 앞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그래서 인류는 여전히 죽음을 넘어서기 위해서 수많은 노력을 경주하고 있다. 특히 인간은 죽음의 불안 속에서 언젠가 이르게 될 끝에서 자신이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한 삶의 의미와 목적을 찾는 존재이다. 이러한 노력 중에 하나가 죽음은 끝이 아니라 죽음 이후에 또 다른 생명이 있다는 종교적 성찰을 들 수 있다. 대부분의 인간 종교에는 사람의 생명은 육체의 죽음을 넘어 영원하다는 믿음과 내세관을 갖고 있다. 종교는 오죠 라즈니쉬가 말하는 것처럼 “죽음과 삶의 의미를 물으면서 불안에 떨고 있는 인간의 불안을 해소하고 참된 인간으로서의 삶을 실현하기 위해서 삶과 죽음에 대해서 여러 성찰과 해석을 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곧 종교의 역할은 살아가는 과정에서 입을 상처를 위로하며 삶에 대한 용기와 희망을 갖도록 한다. 아울러 죽음의 절망 앞에서 연원한 삶에 대한 희망을 주어서 이 땅에서부터 마음의 안정과 평화를 얻도록 하는 역할을 한다. 세계의 많은 종교 중에서도 우리 한국에 전래되어 토착화 된 종교들, 즉 유교, 불교, 도교, 무속종교의 삶과 죽음에 대한 이해는 우리 기독교인들에게도 큰 영향을 끼치고 있는 매우 중요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곧 우리 한국에는 역사 이래로 우리 한민족의 심성에 깊이 뿌리를 내린 무속종교의 기반 위에 유교·불교·도교와 여러 종류의 종교가 공존하고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한국에서 수 백 년 혹은 수 천 년 동안 이어져 오는 가장 대표적인 종교라고 할 수 있는 유교, 불교, 도교, 그리고 무속종교의 죽음관에 대해서 살펴봄으로 목회자들이 목회현장에서 봉착하는 실천신학적 문제들과 아울러 목회자들이 죽음과 사후에 대해서 목회적으로 어떻게 사역할 것인가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하는 것이다. 1.1. 유교적 관점 중국 역사상 가장 혼란기였던 춘추전국시대에 공자를 비롯한 유학자들의 사상을 그 배경으로 하며,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공자에 의해 시작되었다고 믿고 있다. 인본주의 사상을 배경으로 하는 유교는 현재 우리 한국사회를 지탱하는 매우 중요한 가치관의 기초가 된다고 할 수 있다. 유교는 그 특징이 삶에 대해 적극적인 자세를 갖게 하고 내세 지향적이라기보다는 현세 지향적인 성격이 강하다. 곧 유교의 주된 관심사에 대해서 유학주임교수실 편에 보면 “어떻게 하면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가며 인간다운 공동체를 이룰 것인가에 대한 현실적이고 실천적인 제시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유명한 유교의 인(仁)의 원리이다”라고 말한다. 좀 더 구체적으로 유교는 현재까지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가장 크게 영향을 끼치고 있는 종교적인 요소로서, 이러한 유교의 영향력에 대해 곽혜원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한다. "유교는 불교를 국교로 숭상했던 고려를 멸망시키고 새로운 나라인 조선을 건국한 이성개를 비롯한 개국파의 정치적 기조에 따라서 조선왕조 500여 년(1392-1910) 동안 국가 종교의 자리에서 양반들과 정치인들을 중심으로 종교처럼 숭배되어진 사상이다. 곧 유교는 나라를 통치하기 위한 중요한 수단으로서 받아들여졌기 때문에 가난하고 약한 일반 대중의 종교가 아니라 지배 계층의 종교이며 철학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유교는 사상을 넘어 정치적인 필요와 힘에 의해 종교처럼 되었기 때문에 우리 한국인들의 사고방식, 사회구조, 생활양식, 각종의례와 예의범절을 총망라하는 조선시대의 세계관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그러므로 그 영향력이 오늘까지 강하게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죽음관과 관련하여 상장례와 조상제례에 미친 유교의 영향력은 거의 절대적이어서, 조상제례는 조선 후기 이래 마치 국교와도 같이 신봉되었다. 그 이유는 단순히 부모에게 효도를 하는 차원을 넘어서 국가 체제를 유지하고 지배 계층의 권력을 강화하는 정치적 성격을 가졌기 때문이다" 이처럼 조선시대 지배계층은 인(仁)을 주요 사상의 원리로 주장하는 유교를 부모의 죽음 이후에 조상제례를 통해 부모를 늘 기억하게 함과 동시에 국가와 지배계층은 어버이와 같으므로 그렇게 부모를 섬기듯이 최고의 충성을 끝까지 바쳐야 할 것을 주입하는 정치 도구로 사용한 것이다. 이런 맥락을 따라서 조상제례를 중심으로 하는 한국적 유교는 조선시대에는 국교와 같은 자리를 차지하게 되고, 우리 한민족의 사고와 삶에 깊숙이 자리를 잡게 된 것이다. 유교에서 생각하는 죽음관의 기초가 되는 사상을 살펴보면, 첫째, 정영희는 “유교에서는 생과 사의 문제가 천명(天命)에 달려 있다고 보고 삶에 있어서나 죽음에 있어서나 하늘에 맡기는 순천명(順天命)이 자세를 보인다”고 말한다. 이렇게 한 이유는 유교는 현재적 도덕적 질서를 세우는데 우선했기 때문이다. 둘째, 한국종교학회의 연구에서는 “유교는 기철학을 인간 생명에 대한 사상의 기초로 하고 있기 때문에 인간의 영혼불멸설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유교의 죽음관과 내세관의 기초이다”라고 말한다. 유교에서는 인간은 기(氣)와 정선된 물질적인 힘이 결합된 결과로 보아 천지음양의 기가 뭉치면 사람이 되고 흩어지면 귀(鬼)가 된다고 본다. 곧 인간은 정(精), 기(氣), 신(神)의 결합체인 혼백으로 일정 기간 존속하다가 그 기운이 다하면 혼은 양(陽)으로 하늘로 돌아가고 백은 음(陰)으로 돌아가게 되는데, 이것이 곧 죽음이라고 주장한다. 이처럼 유교에서 죽음은 자연 현상의 일부이며, 인생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모든 것이 하늘에 달려 있다는 자연 순응적 태도를 보인다. 그러므로 유교에 대해서 최영갑은 “종교라기보다는 철저하게 현실의 삶을 중요하게 여기며 삶에서의 윤리와 도리를 중요시하는 철학"이라고 주장한다. 계속적으로 "유교에서는 다른 종교와 달리 분명한 내세관이 없으며, 죽음 이후에 대한 깊은 성찰이나 해답을 제시하지 못한다. 그래서 유교에서는 죽음 이후의 혼백의 존재를 믿는 믿음, 특히 조상의 혼백을 믿는 믿음으로 이 땅에서 마땅히 해야 할 효의 연장 선장에서 철저하게 제사를 지내는 의식을 준행할 뿐이다”라고 말한다. 곧 유교에서는 삶 속에 죽음의 자리를 마련해 놓아 제사를 통해 죽은 자가 살아 있는 사람들(후손)의 세계로 돌아와 만나게 된다는 신념을 따르고 있다. 이는 유교에서는 생활 공동체를 살아 있는 사람들만의 것으로 여기지 않고 죽은 자와 더불어 이루는 공동체로 여기는 태도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특별히 제사를 절대적인 사회 규범으로 하는 것은 삶의 공동체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유교의 이러한 제사 문제는 죽음을 소멸이라고 여기지 않는 유교의 특징이 나타난 것으로 우리 한국인들에게는 매우 중요한 문제라는 것은 모두가 주지하는 바와 같다. 이런 현상은 기독교의 추도 예배 등을 통해서 발견하는 것처럼, 여전히 성도들도 조상에 대한 생각과 숭배의 마음, 그리고 제사에 대한 미련이 남아 있다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목회자들은 이 부분에 대해서 분명하게 성경적으로 성도들을 잘 목양해야 할 부분이라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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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2-23
  • Well Dying(good life, good death) 15 - 죽음에 대한 다양한 관점 연구(5)
    Well Dying(good life, good death) 15 - 죽음에 대한 다양한 관점 연구(5) 1. 죽음에 대한 다학제적 관점 1.5. 과학적 관점, 신(新)기계론적 인간관 - 셸리 케이건의 책, 를 중심으로 과학이 죽음을 정의하는 것에 근거를 둔 죽음에 대한 이해에 대해서 최윤배는 철학이나 종교와는 달리 과학이나 의학적 관점에서 죽음에 대한 정의는 아주 단순하며, ‘세속적 죽음 이해’ 혹은 ‘비종교인의 죽음 이해’라고 정의한다. 곧 과학에 있어서 죽음이란 유기체적 생명의 끝, 곧 삶의 끝이다. 그러므로 세속적 죽음 이해에서 죽음이란, 인간은 물질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인격과 개체성의 소멸이다. 이러한 과학적 죽음의 이해, 곧 세속적 죽음의 이해는 자연주의적이며 유물론적인 세계관을 갖고 있는 것이 그 특징이다. 그리고 그 철학적 배경에는 데카르트의 이원론을 따르는 합리주의와 계몽주의의 사상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이것에 대해서 김영규는 자신의 책 <철학판타지, 알도와 떠도는 사원>에서 자세히 기술하고 있는데 그 내용을 요약해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한다. 17세기부터 서양 사람들은 ‘모든 실체는 정신과 물질, 몸과 마음으로 양분 된다’는 데카르트의 이원론을 따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발 더 나아가 인간의 이성을 신과 같이 생각하기 시작했다. 인간의 이성이 신의 창조의 법칙을 찾아냈기 때문에 신이 하던 일도 대신 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곧 중세 천 년 동안 서양 사람들은 신중심주의 속에서 살았는데 과학혁명과 함께 합리주의가 등장하면서 신이 했던 모든 일을 인간 이성이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인간중심주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이런 생각들을 생산주의 혹은 구성주의라고 하며, 세계는 전체가 나라의 기계와 같다는 기계론적 세계관과 따라서 인간이 그것들을 분해하고 조립할 수 도 있다는 환원주의, 그리고 같은 이유에서 인간이 세계의 모든 것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는 생산주의 또는 구성주위가 근대라고 불리는 지난 300여 년 동안 서양을 지배해온 사상이었다. 아울러 사람들은 우리가 사는 이 사회도 이제 이성으로 만들어보자는 생각을 하게 되고, 인간이 신과 같은 이성을 가졌기 때문에 땅 위에 천국을 만들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게 된 것으로 이것이 바로 계몽주의 시작인 것이다. 곧 계몽주의는 이성이라는 빛으로 중세 천 년 동안 신도 만들어주지 못했던 자유, 평등, 박애가 넘치는 새로운 사회를 만들고자 한 것이다. 그리고 그 출발은 매우 성공적으로 나타났다. 1688년에 일어난 영국의 명예혁명과 1776년에 선포된 미국 버지니아 인권선언과 독립선언, 1789년에 일어난 프랑스 대혁명 등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우리가 이미 주지하고 있는 바와 같이 이와 같은 서구의 합리주의와 계몽주의 영향을 따라서 과학적 죽음관은 유물론적이며 자연주의적인 세계관에 기초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과학적 죽음관은 신이나 영혼을 인정하지 않으며, 오직 육체적으로 지금 이 땅에서 살고 있는 인간(육체)만 중요하게 다룬다는 것이 그 특징이다. 이러한 유물론적이며 자연주의적인 지식의 기초 위에서 인간의 과학적 죽음관을 주장하는 대표적인 사람이 현재 예일대의 교수로 있으며 (2013)를 쓴 셸리 케이건이다. 죽음에 대한 접근법에서부터 그 동안의 방법과 다르게 논리와 이성으로 접근하여 설명을 하는 케이건의 죽음 이해는 이원론과 일원론으로 나누고 있는 것 같으나 결국에는 일원론을 주장한다. 이 책의 핵심 주제는, 신(新)기계론적 인간관 및 세계관에 입각한 죽음 이해를 전개하고 있다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신기계론에 영향을 받은 철학적 사고를 통해 인간을 철두철미하게 기계로 간주하고 있다. 곧 이 책은 인간은 우주의 한 부분에 불과한 존재이며, 우주에는 물질이라는 하나의 실재만 있기 때문에 인간도 하나의 물질에 불과할 뿐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최윤배는 “그는 일원론을 다시 물리주의(physicalism)와 유심론(idealism)으로 나누었다. 그러나 그가 주장하는 일원론은 영혼 없는 육체나 또는 육체 없는 영혼을 가졌다고 주장하지만 결국에는 신기계론적 사상을 따라서 인간은 영혼이 없는 육체만의 존재라는 것을 더욱 강조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고 말한다. 과학주의에서 주장하는 인간의 죽음에 대한 이해에 대해서 김균진은 “결국 인간에 대한 이해, 곧 인간관에 의존하는 것이다. 인간을 어떻게 이해하는가에 따라 죽음에 대한 이해가 결정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케이건은 인간에 대해 영어 단어에 기계를 의미하는 ‘machine’을 사용하는데, 정확하게는 “인간은 자유의지를 지닌, 곧 단지 로봇보다는 좀 더 나은 기계에 불과한 존재로 설명한다. 본래 기계와 자유의지는 양립할 수 없는 개념이지만, 인간은 어떤 계기를 통해 자유의지라는 놀라운 능력을 지니게 된 기계”라는 것이다. 이러한 케이건이 이해하는 죽음의 본질과 철학적 배경의 핵심 내용에 대해서 곽혜원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인간을 기계로 바라보는 케이건은 죽음을 점점 낡아져 부품을 교체하다가 결국 고장이 나서 아무 쓸모가 없어진 상태, 모든 기능이 마비되어 버린 상태, 그의 적나라한 표현대로 하자면 결국 컴퓨터가 고장이 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현상으로 인식한다.” 곧 케이건은 이렇게 주장한다. “인간의 육체는 살아서 움직이다가 파괴된다. 결국 이것이 죽음에 관한 전부다.” 그러므로 과학적 죽음 이해는 결국 인간의 인격과 개체성의 소멸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죽음을 신비로 보지 않고 과학으로 보는 것이 과학적 죽음 이해의 가장 큰 특징이다. 결국 이런 사상은 신의 존재마저도 부정하는 결과를 초해하는 것이다. 곧 케이건의 과학주의적인 죽음관에 의하면 신이란 결국 인간의 투사물에 불과할 뿐인 것이다. 아울러 케이건은 인류 최대의 미스터리이자 심오한 철학적 수수께끼로 남아 있는 질문, 곧 ‘사후의 삶은 존재하는가?’는 완전히 말도 안 되는 자기 모순적인 질문이며 착각에 불과한 질문이라고 강조하면서 대답은 ‘아니오’라고 분명하게 말한다. 다르게 표현하면 ‘죽음으로부터 살아남을 수 있는가? 죽고 나서 여전히 생존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도 역시 ‘아니오’라고 대답한다. 곧 죽은 다음에 살아간다는 것은 철저히 자기모순이므로 삶이 끝난 상태에서 삶이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처럼 그는 육체적 죽음 이후에 계속해서 남아 있는 영혼이라는 또 다른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이와 함께 악령의 존재도 인정하지 않는다. 이처럼 영혼과 사후의 삶, 부활을 부정하는 유물론적 죽음 이해를 일관되게 강조하면서 케이건은 죽음이 모든 것이 끝이라고 다음에 인용하는 여러 말을 통해서 확실하게 결론짓는다. "나는 죽음이 나의 진정한 종말이라고 생각한다. 죽음은 나의 끝이자 내 인격의 끝이다. 이는 지극히 단순한 사실이다. 죽음은 그야말로 모든 것의 끝이다”(케이건. p 245). “인간의 육체는 살아서 움직이다가 파괴된다. 결국 이것이 죽음에 관한 전부다”(케이건, 266). “내가 알고 있는 한 내 육체가 죽으면 그걸로 끝이다”(케이건, 294). “내가 죽으면 더 이상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케이건, 295).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케이건과 그의 저서가 지닌 치명적인 문제는 인간의 정신과 영혼을 부정하면서 인간의 정신적이고 영적인 가치 추구를 배격한다는 점이다. 특히 신계론적 생명 이해의 패러다임 속에서 여러 형태의 유전자 조작이 시도되는 사회 분위기가 형성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므로 인간을 기계로 바라보는 신기계론적 인간 이해가 일반인들의 의식 세계에 영향을 미치면 사람들은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잃어버려 영혼과 정신에 대해 무관심하게 되고, 결국 인간만이 지닌 고유한 영성을 상실함으로써 더욱더 물질적인 가치만 지향하는 존재가 될 것이다. 오늘날 배아 복제 및 줄기세포연구, 유전자 조작이 지지를 받는 배경은 신기계죽의적 인간관의 세력 확장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과학에 기반을 둔 세속적 죽음 이해의 관점에서 본다면 영혼이 없는 인간에게 구원의 길이란 전혀 없다고 할 수 있다. 기계와 같은 물리적인 육체만 갖고 있는 인간이 죽음 이후에는 기계가 폐기되듯이 모든 것이 다 폐기되고 남은 것은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죽음 이후에는 남는 것이 전혀 없는 상태, 곧 죽음은 존재의 소멸이기 때문에 구원이나 영생 그리고 부활과 같은 이야기를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과학적 죽음관을 따른다면 모든 인간들은 오직 이 땅에서만 과학과 물질의 혜택을 누리면서 각자의 삶을 성공적으로 살면 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과학주의적 인간 이해와 죽음 이해는 인간의 가치가 오직 물질적인 것에만 부여됨으로 인해서 인간의 정신적이고 영적인 가치 추구는 배격되고 결국에는 인간의 고유한 존엄성마저 파괴될 수 있는 위험이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케이건이 영혼의 존재와 사후의 삶, 부활 신앙을 부정함으로써 많은 그리스도인을 혼란스럽게 할 우려가 매우 크다고 할 것이다. 죽음에 대한 올바른 생각과 태도는 삶에 대해서도 올바른 생각과 태도를 형성하게 한다. 이처럼 죽음에 대한 생각과 태도는 삶에 대한 생각과 태도와 직결되므로 죽음에 대해 바른 이해가 형성되도록 교회와 목회자들이 사회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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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2-23
  • Well Dying(good life, good death) 14 - 죽음에 대한 다양한 관점 연구(4)
    Well Dying(good life, good death) 14 - 죽음에 대한 다양한 관점 연구(4) 1. 죽음에 대한 다학제적 관점 1.4. 법학적 관점 죽어 가는 사람이, 곧 죽음 앞에 홀로 선 고독한 당사자가 자신의 운명을 결정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을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병원에서 호스피스 사역과 많은 임종에 처한 환자들을 돌보면서 경험한 사실은 죽어가는 환자 본인이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 최종적 결정을 한다는 것이 그리 쉬운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마지막에 심폐소생술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 진통제는 얼마나 사용할 것인가? 가족들과 함께 있는 시간을 얼마나 가질 것인가? 등등 환자 본인이 결정할 수 없는 많은 문제들이 있다. 죽음에 처한 자신의 운명을 자신 결정 할 수 없다는 사실로 인해서 죽음 앞에 선 환자들은 더욱 고독하고 육체적 고통과 함께 정신적 고통까지 겪어야 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환자의 사망과 관련하여 그 전후의 전 과정에서 가족 간에 불화하는 일도 많고, 법학적으로도 많은 논란과 문제가 발생할 소지가 충분히 있는 것이다. 아울러 현대의 과학과 의료기술은 이전 시대에는 분명히 죽었을 사람들, 곧 자력으로 호흡을 할 수 없는 사람, 심한 뇌 손상을 입은 사람, 인공호흡기나 인공급식튜브의 도움으로 생명을 유지하는 사람, 장기와 조직의 이식, 그리고 그밖에 다양한 의술을 통해 사람들의 생명을 연장시켰다. 그러나 이이정의 말처럼 “이런 기술들은 인간의 삶은 연장시켰지만 때때로 죽음의 과정에서의 고통의 깊이나 그 정도를 증가시킨 부분이 분명히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어떤 사람에게는 이런 현대 의학과 기술을 이용한 생명의 연장이 정신적·육체적·사회적·경제적으로 더욱 큰 고통만 가중시키는 결과를 가져온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이런 의학과 과학의 발달은 질병 치료와 생명 연장이라는 긍정적인 측면과 함께 분명하게 환자의 의견이나 여러 형편을 고려하지 않은 가운데 단순히 생명 연장으로 이어짐으로 인해 발생하는 법적·도덕적 문제들을 안게 된 것이다. 그 문제에 대해서 죽음에 대해서 일찍부터 연구한 김균진은 “현대의 병원은 환자들에 대한 의무를 수행한다는 이유로 인해서 어쩔 수 없이 환자를 비인격화시키고, 임종에 임박해서도 개인들의 모든 특성과 의지를 무시하며 탈사회화 혹은 탈문화와의 과정에 복종시키는 경향을 가지는 것”이라고 말한다. 곧 현대 의학과 병원의 구조는 죽어가는 사람이 자신의 죽음과 관련된 의료적이며 법적인 어떤 결정을 스스로 할 수 없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병원에서 환자 치료를 위한 최선의 방법이라고는 하지만, 그 모든 과정을 통해서 일어나는 환자의 비인격화, 특히 임종의 과정에서의 비인격화에 대해서 김균진은 다음과 같은 것이 있음을 서술한다.: ①환자는 임종이 다가올수록 평소 자신이 살고 있던 삶의 환경에서 신체적으로 격리된다. ②환자는 평소에 관계를 맺고 있던 사람들과 사회적 관계에서 병실(중환자실 등)로 격리된다. ③환자는 사회적으로 어떤 지위와 위치에 있었든지 간에 임종이 다가올수록 의료진에 의해서 모든 행동과 신체적 활동이 사회적으로 격리된다. ④환자는 인격적으로 오직 임종이 다가온 환자로만 대접 받으며, 모든 인격적 대우를 포기하고 병원의 규칙과 모든 의료적 과정으로 격리 된다. 그리고 임종을 맞이하는 환자 한 사람과 관련된 이런 문제들은 임종에 직면한 환자에게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가족과 사회 공동체 전체의 문제가 될 수 있다. 가족들은 사랑하는 가족의 임종과 관련하여 병원과 의료진의 의사를 거의 따라야 하는 상황으로 내몰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한 사람의 임종과 관련된 현대의 문제는 결국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 전체와 관련된 문제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법학적으로 한 사람의 죽음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갖게 되고 정의를 내리게 된 것은 아무래도 장기 이식과 관련하여 뇌사에 대한 판정의 범위와 시기에 관한 문제가 가장 중요한 문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심장과 폐의 기능이 완전히 멈춘 상태, 그리하여 이미 몸의 많은 세포와 장기가 그 기능을 완전히 멈춘 상태를 죽음의 상태로 인정할 때에는 법률적으로 그렇게 많이 논란이 될 소지가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뇌사의 문제는 신원하가 신학자로서 지적하는 것처럼 “뇌기능은 정지 되었으나 심장이나 폐는 계속 뛰고 있고 다른 장기들도 살아서 활동하고 있는 상태가 지속될 수 있기 때문에 법률적으로 중요한 문제를 많이 포함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문제는 영적인 일을 담당하는 목회자들도 목회상담적 입장에서 좀 더 구체적으로 알고 있어야 할 의학적·법률적 상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1983년 ‘대학의학협회’에 구성된 ‘죽음의정의특별위원회’가 발표한 ‘죽음의정의및뇌사판정기준’을 통해 죽음을 심장 및 호흡 기능과 뇌반사의 불가역적 정지 또는 소실을 의미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후 대한의학협회의 ‘뇌사판정기준’을 더욱 많이 인정하여 1993년에 개정한 ‘뇌사판정기준’이 거의 그대로 장기 이식에 관한 법에서 받아들여졌다. 그리고 1999년에 장기 등 이식에 관한 법률이 제정됨에 따라 심장사와 함께 뇌사 상태를 법률적으로 죽음으로 인정하게 되었다. 뇌사를 검사하기 위해서는 하버드 의과대학의 특별위원회의 보고서에 기초한 하버드 기준이 가장 널리 사용되고 있으며, 대한의사협회(1998, 10)에서 그것을 그대로 인용하며 발표한 뇌사판정 기준은 다음과 같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빛 소리 접촉 윤리적으로 허용되는 한 가장 아픈 자극 등 외부 자극에 대한 무반응 ② 자발적 근육 운동의 부재, 자발적인 호흡의 부재(적어도 한 시간 동안), 인공호흡기를 사용하는 환자는 호흡기를 끈 후 적어도 3분 동안 스스로 호흡할 수 없어야 한다. ③ 빛에 대한 눈동자의 수축의 부재, 눈 깜짝임의 부재, 귓속에 얼음물을 부었을 때 눈의 움직임의 부재, 가볍게 두드렸을 때 근육수축의 부재, 하품이나 말을 할 수 없는 등 뇌 반사와 척추 반사를 포함한 모든 반사의 부재. ④ 적어도 10분 이상 평탄한 뇌파 ⑤ 위의 모든 항목을 24시간 후에 반복 검사해도 같은 결과를 나타낼 것 ⑥ 환자가 저체온증(32.2이하)이 아니고 중추신경계에 영향을 미치는 진정제의 영향하에 있지 않을 것 등이다. 그리고 현재 우리나라에서 법적으로 인정하는 죽음의 확증의 기준 및 확인의 기준은 6세 이상인 자에 대한 뇌사 판정 기준인 「장기이식등에관한법률」의 별표 뇌사판정기준(제16조 제2항 관련)에 따르고 있다. 그 내용과 절차 등은 다음과 같다. ① 선행조건: 원인질환이 확실하고 치료 가능성이 없는 기질적인 뇌병변이 있고, 깊은 혼수상태로서 자발적인 호흡이 없고 인공호흡기로 호흡이 유지되며, 약물 중독(마취제, 수면제, 근육이완제 등에 의한 중독)이나 대사성 또는 내분비성 장애(간성혼수, 요독성 혼수, 저혈당성 뇌증) 등의 가능성이 없어야 하며, 저체온이나 쇼크 상태가 아니어야 한다. ② 뇌사 판정 기준과 판정 절차: 이것은 모두 현대 의학의 발달에 의해 이루어진 것으로 현대 의학적으로 「장기 등 이식에 관한 법률」에 따라서 다음과 같은 증상이 있을 때에 뇌사로 인정을 한다. “외부 자극에 전혀 반응이 없는 깊은 혼수상태, 자발적 호흡이 되살아날 수 없는 상태까지 소실된 상태, 두 눈의 동공이 확대되어 고정되었으며, 뇌간반사가 완전히 소실되어 있는 상태, 자발적 운동 현상이나 경련 등이 나타나지 않는 상태, 무호흡검사 결과 자발 호흡이 유발되지 않으며 자발 호흡이 되살아날 수 없다고 판단된 상태, 이런 모든 판정 결과를 6시간 후에 재인확인 하여도 그 결과가 동일할 때, 재확인 후 뇌파건사를 실시하여 평탄 뇌파가 30분 이상 지속될 때, 그리고 마지막으로 기타 필요하다고 인정되는 대통령령이 정하는 검사에 적합할 때이다.”(장기이식에 관한 법률 뇌사판정기준, 제16조 2항). 이상과 같은 의학적 판단이 이루어졌을 때에 전문 의사 2명 이상과 비 의료인 1명 이상을 포함한 뇌사판정위원회의 과반수의 출석과 출석위원 전원의 찬성으로 뇌사 판정이 확정된다. 그러나 법률적으로 아직 우리나라에서는 뇌사가 죽음으로 완전히 인정된 것은 아니다. 장기 기증자에 한해서 뇌사가 죽음으로 인정된 것일 뿐이며, 뇌사자라 할지라도 장기 기증을 하지 않으면 심장이 완전히 멈출 때까지 인공호흡기를 임의로 떼면 불법이 된다. 우리나라에서는 신원하의 말처럼 “아직까지 뇌사를 장기 이식을 위한 의학적 목적을 제외하고 형법에서는 살인죄의 적용 여부, 민법상 권리 능력 상실 시기의 기점, 부검과 장례 등의 시점과 관련하여 일관되게 심장사를 죽음으로 인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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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2-20
  • Well Dying(good life, good death) 13- 죽음에 대한 다양한 관점 연구(3)
    Well Dying(good life, good death) 13- 죽음에 대한 다양한 관점 연구(3) 1. 죽음에 대한 다학제적 관점 1.3. 의학적 관점 현대는 말 그대로 첨단과학과 첨단의학이 사람들의 삶에 큰 영향을 끼치는 시대라고 할 수 있으며, 이와 같은 의학의 발달은 죽음에 대해서 많은 새로운 경험과 이해의 측면에 변화를 가져왔다. 곧 질병 치료의 현저한 진전이 있는 오늘날, 죽음은 통제될 수 있는 것만이 아니라 정복될 수 있고 지배될 뿐만 아니라 제거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현대 의학적 관점에서 본다면 죽음에 대해서 종교적인 관점에서 설명은 피상적이고 비과학적인 것으로 간주되어 그렇게 설명할 필요나 도움을 받을 필요가 없어졌다고 보게 되는 것이다. 더 나아가 죽음의 과학 기술과 의학의 실패로까지 받아들여지는 상황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죽음에 대한 의학적 관점은 무엇인가? 일반적으로 의학에서는 죽음을 생물학적 사건으로 이해하며, 이는 비인격적이고 기술적인 문제로 인식한다고 이야기 할 수 있다. 황기석이 자신의 책 <의학윤리>에서 정의하는 의학의 죽음은 다음과 같다. “의학에서는 생체액 유동 기능의 불가역적 정지(심장과 폐혈관의 기능 정지), 육체로부터 영혼의 불가역적 이탈(호흡 기능의 정지), 신체적 통합 능력의 불가역적 정지(뇌 기능의 정지), 사회적 상호작용 능력의 불가역적 정지(뇌피질사) 등이 나타날 때 한 생물체를 죽었다고 간주한다.” 그러므로 현대는 의학의 발달과 함께 죽음의 의미와 가치의 궁극적 문제는 다루지 않고 객관적이고 가치중립적인 과학적 탐구에 더욱 매진하게 된 것이다. 곧 과학을 믿고 따르는 의사들은 기계화된 기술을 통한 간접적인 대화를 더 가치 있고 정확한 것으로 간주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은 주지하는 바와 같이 인공호흡기를 비롯한 생명체의 호흡을 인공적으로 유지시켜 줄 수 있는 기계 장치들이 개발되었다. 더 나아가서 장기 이식 수술을 비롯한 이전에는 생각도 할 수 없었던 첨단 치료법이 개발되어서 한 생명체의 죽음을 정의하는 의학적 기준에도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곧 의학적으로 이전에 행하던 것처럼 단순히 심장이 정지하고 호흡을 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른 것이 사망 판단의 기준으로서 가치가 떨어지게 된 것이다. 이제는 보건복지부와 국립암센터(2009)에서 공통적으로 말하는 것처럼 “이런 의학적 발전을 따라서 뇌 기능의 영구적 정지를 인간 죽음의 최종적 판단 기준으로 보는 뇌사설을 주장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현대 사회에 첨예한 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안락사문제, 장기이식 문제, 인간답게 죽을 권리의 문제, 장기 복제나 생명체 복제의 문제들이 사회적 쟁점으로 부가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지금 의학계, 법률계, 그리고 종교계를 중심으로 인간의 죽음에 대한 정의에 대해서 많은 부분에서 첨예한 대립과 함께 많은 논의가 진행 중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의사로서 특히 호스피스 말기 암 환자를 돌보며 의료의 한계와 범위 그리고 역할에 대해서 많은 고민을 하는 윤영호는 의학적 관점의 죽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의견을 덧붙인다. "의학적 죽음은 그 판정 기준과 판정 시기가 문제가 될 수 있는 많은 과제들을 안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 이 문제에 대해서는 의학적, 법률적, 종교적으로 더 많은 논의와 연구가 필요한 분야하고 할 수 있다. 곧 생사를 가르는 결정을 하게 되는 의사들은 윤리의식을 일반인들보다 더 올바르게 나타내야 한다. 특히 죽음과 관련된 의료 현장에서 죽음에 대한 판단을 위해서는 의료윤리의 기본적인 개념을 이해하고 이를 실제적으로 적용할 수 있어야 한다." 무엇보다도 목회자는 목회적 입장에서 의학적 치료와 도움을 받는 것에 대해서 지켜주어야 할 경계선에 대해서 분명한 가치관을 갖고 있어야 한다. 인간의 생명은 단지 분자들의 집합이며, 진화의 과정에서 나타난 우연한 산물은 아니기 때문이다. 곧 목회자들은 우리 인간의 삶을 지켜주어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의학적인 부분에 대해서 모든 부분을 찬성할 수도 없는 입장에 있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죽음의 문제에 직면해 있는 사람들에게 죽음으로 인해 단절되지 않으며 파괴될 수 없는 생명에 대한 절대적인 가치를 발견하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곧 목회자들의 수고와 연구를 통해서 죽음에 대한 의학적 인식의 재구성과 재해석을 통해서 기독교 생명 윤리에 입각한 가치관 정립이 목회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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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2-20
  • Well Dying(good life, good death) 12 --- 죽음에 대한 다양한 관점 연구(2)
    Well Dying(good life, good death) 12 - 죽음에 대한 다양한 관점 연구(2) 1. 죽음에 대한 다학제적 관점 1.2. 심리학적 관점 심리학이 현대인들에게 미치고 있는 영향력에 대해서 박노권은 브라우닝(Browning)의 말을 인용하여 “리프(Philip Rieff)는 프로이드의 심리학적 인간과 칼빈의 종교적 인간 사이의 싸움에서 프로이드가 승리했다고 말하면서 현대 사회의 사람들은 더 이상 종교적 상징에 의해서가 아니라 심리학적 이미지를 갖고서 세상을 구성하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이처럼 현대인들에게 심리학은 성경보다 더 인간의 삶에 도움을 주는 지식으로 인식되고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심리학적 죽음 이해에 대해서 알아보는 것은 현대인들이 가진 죽음에 대한 인식을 이해하기 위해서 매우 중요한 요소라고 할 것이다. 심리학적 죽음 이해는 자신의 인생을 수용하고 죽음을 두려움 없이 직면하여 자아 통합을 이루고 죽음 불안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하는 데 초점이 있다고 정의하면서 이이정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한다. "1950년대까지 죽음은 심리학을 비롯한 거의 모든 분야의 연구로부터 배제 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 이유는 그 이전까지는 행동에 대한 실험적이고 객관적인 연구와 논리적 실증 철학이 심리학의 과학적인 연구들을 주도해 왔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실은 1950년대를 전후로 파이펠을 중심으로 변화되었다. 파이펠을 중심으로 한 일련의 학자들은 죽음이 단순한 생물학적 사건이 아닌 심리적 사회적 측면을 가진다는 점에 주목하였고, 철학·생리학·의학·정신의학· 정신분석·종교·문학 등의 지식을 심리학에 도입하여 다양한 각도에서 죽음을 연구하는 경향을 낳게 되었다. 곧 심리학 분야에서는 죽음을 현재를 살아가는 인간의 삶에 대한 중대한 위협, 위기상황, 스트레스의 원천으로 간주하고 이에 어떻게 적응하고 대처하는가를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다." 이러한 심리학적 죽음의 이해 연구를 위해서 대표적인 심리학자 몇 사람의 주장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심리학적 죽음 이해의 시작으로 프로이트(S. Freud)의 이론을 소개한 김대동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프로이트는 인간의 본능을 리비도(Libido) 라고 부르는 삶의 본능과 싸나토스(Thanatos)라고 하는 죽음의 본능으로 보았다. 그리고 프로이트는 죽음을 최종적인 것이며 유기체의 완전한 소멸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봤다.” 곧 프로이드는 죽음을 도덕적이고 종교적이고 철학적인 문제에서 과학적 탐구의 대상으로 변화시켰고, 생물학적이고 심리학적인 실재로서 죽음을 묘사한 것이다. 아울러 프로이드의 죽음에 대한 이론에 대해서 김선숙은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프로이트는 죽음의 본능을 삶의 본능보다 더 근원적인 것으로 보았으며, 인간의 죽음은 최종적인 것이며, 모든 유기체의 완전한 소멸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곧 인간의 삶의 원초로부터 이미 죽음이라는 것이 어떤 통일된 방식으로 존재하고 있어서 삶의 존재를 무생물의 상태로 충동질하여 끌고 가기 때문에 결국 죽음에 이른다는 의미에서 죽음을 삶의 목적이 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처럼 프로이드는 인간의 삶은 두 본능 사이의 투쟁인데 삶의 원초로부터 이미 죽음이라는 것이 어떤 통일된 방식으로 존재하고 있어 결국 죽음에 이른다고 본 것이다." 그래서 배형기는 “프로이트에 의하면 인간의 생명의 역사란 죽음을 향해서 진행되는 역사가 되고 마는 것이며, 결국은 모든 것이 원점으로 돌아가고 만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프로이트에 따르면 죽음이란 최종적인 것이며 해당하는 유기체의 완전한 소멸을 의미하는 것이 되고 마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곧 프로이트는 죽음은 무기체적인 생명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보며, 기독교에서 말하는 죽음 이후 천국에서 주어지는 삶의 보상에 대한 환상은 가치 없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프로이트가 불신앙과 무종교로 돌아가서 기독교의 권위를 없애려고 했지만, 프로이트의 후학이었던 융(Jung)은 신앙에 대해 관심을 갖고 “인간의 출생이 의미가 있듯이 죽음도 분명한 의미가 있다”고 보았다. 자기실현이 이루어지면 그것이 바로 자신의 죽음으로서 죽음은 자기실현을 의미한다고 하였다. 융의 죽음에 대한 주장에 대해서 조계화외 2인은 “융에 의하면 인간의 삶은 어떤 궁극적 목적을 향한 준비로써 보통 인간은 인생의 상승기를 거쳐 정상에 이르면 거기에 멈추어 서게 되고, 그렇게 하여 자기실현이 이루어지면 그것이 바로 죽음이며, 따라서 죽음은 결국 한 사람의 자기실현을 의미한다는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그렇지만 융은 결국 프로이트가 했던 것처럼 죽음을 도덕적 중립적인 것으로 취급하려고 시도했으며, 결국 죽음은 순수하게 과학적이고 가치중립적인 경험으로 환원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죽음학의 의미와 가치에 있어서 더욱 현대적 의미로 심리학화 하는데 큰 기여를 한 사람은 유명한 정신분석학자 퀴블러-로스(Kübler-Ross. E)이다. 그녀는 “인간을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존재로 이해하면서 죽음을 완성을 향한 하나의 과정이라고 주장하며 개인의 성취를 증대시키기 위해서 죽음을 수용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고 말한다. 곧 그는 죽음이란 삶의 최종적인 것이며, 완성의 순간으로 들어가는 변화의 과정이기 때문에 죽음은 두려워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아름다운 체험이 될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좀 더 그가 말하는 죽음에 대해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죽음은 아기가 태어나는 것처럼, 인간의 존재, 성장과 발달의 자연스러운 한 부분이다. 우리는 죽음을 슬프거나 놀랄만한 일로, 또 병적이거나 두렵거나 참극이거나 파괴적인 것으로 볼 필요가 없다. 그러므로 죽음은 의학에서 말하듯이 정복되어야 할 적이 아니라 우리의 삶의 여행길을 함께 하는 친구이다.” 그리고 의미요법의 창시자 빅터 프랭클은 “죽음은 인간 존재에게 의미를 부여한다”고 말한다. 인간은 스스로 유한성을 인정하고 언제나 의식적으로 죽음이 온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하며, 죽음에 대한 회피는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프랭클은 인간은 불멸하는 존재가 아닌 유한한 존재이기 때문에 지금 우리가 살아가면서 행하는 모든 것들은 특별한 의미를 지니는 것이라는 것을 강조하면서 인생에서 의미를 갖는 것의 중요함을 주장하는 것이다. 이처럼 심리학적 관점에서 죽음의 이해는 인간이 죽음을 어떻게 보고 이해하고 받아들이는가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주제로 다루어지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인간이 처음과 끝이 있는 인간으로서 갖는 근본적 유한성을 깨닫고 죽음에 대한 회피가 아니라, 인간은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더욱 오늘이라고 하는 현실이 가치 있는 것을 알고 살아가야 하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죽음은 생물학적, 심리학적 소멸을 가져오는 것이지만, 그러나 삶은 그런 소멸보다 앞서는 것이므로 오늘 우리 인간에게 주어진 삶을 역사와 문화와 인간관계 등과 연계하여 더욱 잘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할 때에 죽음은 결코 우리 인간의 적으로만 인식 될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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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2-20
  • Well Dying(good life, good death) 11 - 죽음에 대한 다양한 관점 연구
    Well Dying(good life, good death) 11 - 죽음에 대한 다양한 관점 연구 붉은 단풍이 한창이던 11월 중순부터 가을을 타는지, 울적한 마음에 한 동안 쉬었던 Well Dying(good life, good death)에 대한 글을 다시 시작한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12월에는 우리 인간의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치고 있는 철학, 심리학, 그리고 각 종교의 죽음에 대한 관점을 살펴보려고 한다. 그리고 죽음에 대한 성경적 관점을 알아보고, 다음으로 나의 신학적 배경에 근거하여 성경적 관점에서 죽음에 대한 정의를 소개하고자 한다. 역사 이래 사람들은 어떻게든지 죽음을 극복해 보려고 노력하고 있으며, 그 일차적인 모습이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성경 히브리서에서 말씀하는 것처럼 사람에게 한 번 죽은 것은 정한 이치이다. 곧 삶과 마찬가지로 죽음은 인간의 삶을 구성하는 필수 단계이다. 그러므로 단순히 죽음을 부정하고 인간의 힘으로 극복하려고만 할 것이 아니라, 죽음에 대한 분명한 인식과 믿음을 통해서 죽음으로 인한 불안을 떨쳐버리고 영원에 대한 분명한 소망으로 죽음에 응전해야 할 것이다. 모든 인간은 필연적으로 죽음과 대면해야 할 존재이므로 보다 나은 삶을 위해서는 마음속에 죽음에 대한 준비 및 생사관을 정립해야 할 필요가 있다. 생사관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요시노리는 "우주나 생명 전체의 큰 흐름 속에서 자신의 삶과 죽음이 어떤 위치에 있고 또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가에 대한 이해나 생각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죽음에 중점을 두고 현재의 삶의 방식을 생각해 보는 철학적 관점"이라고 이야기 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실제 죽음을 받아들이고 죽어가는 과정에서 각자가 가진 인생관과 죽음관에 따라서 다른 방식으로 죽음을 맞이한다. 그러므로 인간의 삶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며 아주 다양한 영향을 미치는 죽음의 문제는 철학·심리학·의학·종교 등 다양한 학문 분야에서 관심을 갖고 다루고 있는 주제이며, 각 학문 분야의 체계 내에서 고유한 관점에 따라 정의되고 있다. 1. 죽음에 대한 다학제적 관점 인간의 삶에 다양한 의미를 갖고 복잡한 영향을 미치는 죽음의 문제는 철학, 심리학, 종교학, 의학 등 인간의 문제를 다루는 각 학문 분야에서 관심을 갖고 다루는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그리고 각 학문 분야에서 다루는 죽음이 특징에 대해 이이정은 “각 학문 체계 내에서 통용되는 독특한 사고 유형과 접근 방식에 따라 각각 정의되며, 아울러 해석도 각각 다르게 나타난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우리 목회자들이 교회 내에서 죽음에 대한 사역을 위해서 꼭 알고 있으면 매우 유용하게 사용 할 수 있는 철학, 심리학, 그리고 의학 분야에서 죽음을 바라보는 관점에 대한 소개를 하고자 한다. 1.1. 철학적 관점 철학적 관점에서 바라본 죽음은 곧 현재의 삶을 향해서 삶과 죽음의 의미를 질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고대로부터 죽음은 철학자들의 주요한 주제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 누구도 죽음에 대한 명쾌한 정의를 내리고, 사람들에게 분명한 대답을 제시하지는 못했다는 한계를 갖고 있다. 이런 현상에 대해서 정달용은 “오히려 의학에서 죽음을 부정하는 것과 같이 철학과 형이상학에서도 이 죽음의 문제를 주제화 하는 것을 소홀히 하거나 회피해 온 것이 사실이다”라고 이야기한다. 그렇지만 우리가 주지하는 바와 같이 서양 철학에 있어서 인간의 죽음의 문제는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철학의 주요 주제로 논의 되어 왔다. 중요한 것만 간략하게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쾌락주의’라고 알려진 고대 헬라의 에피쿠로스학파의 죽음관에 대해서 정달용은 “죽음은 모든 것의 끝이고 감각도 고통도 없으며 영혼의 원자도 모두 분해되기 때문에 이후의 세계를 무라고 단정한다. 그래서 죽음은 우리가 생존하는 한 우리와 함께 하지 않고, 죽음이 우리에게 다가오는 순간 우리는 이미 존재하지 않는다”고 정의한다. 아울러 강동효는 “에피쿠로스학파에서는 영혼에 대한 형이상학적 사변을 버리고 오직 현재의 삶에만 충실할 것을 당부하면서 죽음을 문제로 삼는 것조차 회피하고자 했다”고 말한다. 둘째, 소크라테스나 플라톤과 같은 고전 형이상학파들은 물질 혹은 신체와 대비되는 영혼, 혹은 물질과 대비되는 정신이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그들은 죽음 후에도 우리 인간의 정신은 다른 형태의 삶이 계속된다는 불멸성의 개념을 주장하였다. 곧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죽음관에 대해서 김귀룡은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소크라테스에게 있어서 죽음이란 육신의 속박과 고통으로부터 정신의 해방과 치유로 보았고, 플라톤은 죽음을 영혼이 신체로부터 불사의 세계로 옮겨가는 일이라고 보았다.” 곧 고전 형이상학파에서는 인간을 정신적 존재로 규정하고 영혼은 육체와 달리 영원하다는 불멸성을 강조하였으며, 당연한 귀결로서 죽음은 그리 대수롭지 않은 문제로 취급하였다. 이와 같은 고전형이상학파의 죽음과은 소크라테스의 죽음에서 확연히 드러났다고 할 수 있다. 셋째, 중세 시대에는 대표적으로 어거스틴과 아퀴나스 등이 기독교적 관점에서 죽음에 대해 성찰하였다. 중세철학의 특징에 대해서 김정우는 영혼이 신과 인간을 이어 주는 중간 매개체가 되고, 이 세상의 육체적 삶이 끝난 후에도 영혼은 지속된다고 믿었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한다. “중세시대에 죽음은 이 세상에서는 불가능한 다른 존재로의 비약과 영생을 가능하게 하는 것으로 두렵기보다는 긍정적인 것으로 간주되었고, 죽음을 준비하는 삶이 바람직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넷째, 근대에 들어 유신론적 세계관이 붕괴되면서 감각적으로 확인되지 않거나, 이성적이고 논리적으로 납득되지 않는 세계를 거부하는 경향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김열규는 “근대철학부터는 내세나 초월계 보다는 자신의 현실적 삶이나 내면적 확신에 바탕을 둔 철학적 작업을 중시하게 되었다. 그리고 동시에 죽음을 철학적 문제에서 배제하려는 경향을 보이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이처럼 근대철학에서는 경험적으로 입증될 수 없는 모든 것은 무의미한 것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죽음은 육체적 영역에 한정되는 생물체의 생물학적 종말이라는 개념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근대철학에서 죽음의 문제를 철학적 관심의 영역에서 배제하고자 하는 이유는 죽음, 특히 ‘나의 죽음’이 검증 가능한 경험의 대상이 되지 못하는데 있다. 우리가 경험하는 것은 다른 사람의 죽음의 외적인 현상, 밖으로부터 이루어진 간접적인 경험일 뿐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외적이고 간접적인 경험은 확실성과 논리의 필연성을 기반으로 하는 철학적 지식의 원천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다섯째, 19세기 실존 철학과 실존주의의 등장과 더불어 죽음의 문제는 다시 철학적 관심의 전면에 등장하게 되었다. 특히 제1,2차 세계 대전을 전후한 암울했던 시대적 상황은 삶의 의미와 더불어 죽음의 문제를 부각시키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전쟁과 급속한 변화의 시대에 살았던 실존주의 철학의 죽음관의 특징에 대해서 최재락은 “실존주의 철학자들은 인간 이해에 있어서 의미있고 중요한 것을 발견 했는데, 한 개인의 삶은 특별한 것이며 따라서 개인의 죽음도 특수하다는 것이다. 곧 죽음은 모든 인간이 죽는다는 점에서는 보편적인 사건이지만, 한 개인이 경험하는 죽음은 특수한 사건인 것이다”라고 말한다. 곧 인간에게 중요한 것은 관찰 가능한 객관적 사실로서의 죽음의 의미가 아니라 삶의 종말로서 죽음이 개인의 현실적인 삶에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가에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진홍은 “실존주의 철학자들은 인간이란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 충분히 관심을 갖지 않으면 자신의 삶을 제대로 살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즉 실존적으로 볼 때 삶과 죽음 사이에는 큰 괴리가 없다는 것”이라고 말한다. 아울러 실존주의에서는 사람들이 추구해야 할 죽음에 대한 철학적 관심의 대상은 외부로부터 관찰되는 죽음이 아니라, 우리가 자신의 죽음과 맺게 되는 관계와 그 관계가 우리의 삶에 미치는 영향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정달용은 “실존주의에서 죽음은 우리가 도달할 종착역이 아니라 우리가 실존으로서의 자기를 자각하는 적극적 계기로서의 의미를 갖게 되므로 인간은 신의 존재와 내세의 존재를 가정하지 않더라도 죽음을 직시함으로써 삶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실존주의를 대표하는 철학자 하이데거는 인간 존재 자체가 죽음을 향한 존재로 보았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상에서 살펴 본 것처럼 철학에서는 죽음을 죽음이 가져다 주는 정서적 불안과 공포를 합리적인 사고를 통해 극복하려는 입장에서 죽음을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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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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