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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토크】 글을 잘 쓰는 구체적인 방법
    글쓰는 것은 나의 오래된 관심사항이다. 기회 되는대로 글쓰기에 대한 책을 읽는다. 이 책도 그러한 관심에서 봤다. 유익하다. 특별히 이문재 교수는 글쓰기에 대해 매우 잘 설명하고 있어 전문을 게재한다. 잘 읽어보면 많은 유익을 얻을 것이다. 이문재 (시인, 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교수) 정확해야 아름다울 수 있다 왜 저널리즘적 글쓰기인가? 글쓰기의 장르는 매우 다양합니다. 사적인 글쓰기/공적인 글쓰기, 사적인 글쓰기: 일기, (자서전) 편지, 이메일, 공적인 글쓰기: 시와 소설, 희곡, 에세이, 기행문 등 문학적 글쓰기, 기사, 칼럼 등 저널리즘적 글쓰기, 광고 문안, 연설문, 안내문, 보고서, 기획서, 청원서 등등. 글쓰기는 더 이상 문인, 저널리스트 등 몇몇 전문가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미디어 환경이 급속하게 변화하는 것과 아울러, '문자시대는 가고 영상 시대가 도래했다고들 말하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세히 들여다 봅시다. 영상 이미지 역시 최종적으로는 문자 언어로 번역되어야 이해와 소통이 가능합니다. 인터넷과 휴대전화와 같은 뉴 미디어 역시 문자 언어에 상당 부분 빚지고 있습니다. 인간이 언어를 버리지 않는 한 인간이 이야기를 포기하지 않는 한 문자 문화는 영원할 것입니다. 언어는 대중의 합의에 의해 정착되고, 또 동시에 대중에 의해 변화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언어에 일정한 규범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역설적이게도 언어가 대중(언중)에 의해 생성소멸하고 유통되고 기록(저장)되기 때문에 보다 정확한 말하기와 쓰기가 필요한 것입니다. 문자 시대는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문자는 영상 혹은 구술 문화에 의해 위축되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문자 시대를 능동적으로, 그리고 당당하게 영위하는 교양인들은 그리 많지 않아 보입니다. 교양인이라면, 적어도 대학교를 졸업한 교양인이라면 전공을 불문하고 정확한 글쓰기 능력을 보유하고 있어야 합니다. 거듭 강조하지만, 우리의 개별적 삶은 듣고 말하고 읽고 쓰는 행위의 연속입니다. 이 중에서 쓰는 행위가 가장 논리적이고 또 정확해야 합니다. 글쓰기의 일차적 목표는 자신이 생각한 대로 쓰는 것입니다. 하지만 생각한 것을 그대로 쓰기란 거의 불가능합니다(무의식이 개입하기 때문입니다). 우선 생각 자체가 정돈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신의 생각을 정돈하지 않고 글을 쓰는 것은, 설계도도 없이 집을 짓는 경우와 다르지 않습니다. 생각이 잘 정돈되었다 하더라도, 그것을 정확히 표현(건축으로 치면 시공 능력)할 수 없다면 글쓰기는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저널리즘적 글쓰기가 갖고 있는 몇 가지 미덕 우리가 저널리즘적 글쓰기(기사 쓰기)에 관심을 갖는 이유는, 저널리즘적 글쓰기가 정확한 사실에 바탕해, 정확하게 표현하는 글쓰기의 모범이기 때문입니다. 저널리즘적 글쓰기에도 다양한 장르가 있지만, 자기 주장이 강하게 드러나는 칼럼(사설)이든, 쓰는 이의 관점이 가능한 한 배제되는(이른바 '객관적'이라는 스트레이트 기사에 이르기까지 저널리즘적 글쓰기는 무엇보다도 정확성이 강조됩니다. 저널리즘적 글쓰기는 사실을 정확하게 표현하고 전달하는 데 가장 적합한 글쓰기 방법입니다. 저널리즘적 글쓰기에서 아름다움은 미덕이 아닙니다. 미사여구는 정확한 사실을 전달하는 데 있어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화려한 수사는 사실(fact)을 표현하는 데 있어 장애물일 수도 있습니다. 저널리즘적 글쓰기를 주목해야 하는 두 번째 이유는 다른 글쓰기와 달리 취재와 구성이 전제되기 때문입니다. 물론 소설이나 드라마 시나리오를 쓸 때에도 취재 과정이 없지 않습니다. 하지만 저널리즘에서처럼 구체적인 현장(인물)과 정확한 사실이 필요하지는 않습니다. 저널리즘에서 활용하는 다양한 취재기법은 우리가 다른 장르의 글쓰기를 할 때 얼마든지 응용할 수 있습니다. 기획서나 평가 보고서를 작성할 때에도, 홈페이지나 블로그를 꾸밀 때에도 저널리즘의 취재기법을 동원하면 글이 훨씬 입체적이고 풍성해집니다. 셋째, 저널리즘적 글쓰기는 사건이나 사고, 사태나 현상 등 사회적 관심사에 대한 새로운 접근 방법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정확하고 심층적인 보도 못지않게, 남과 다른 시각에서 분석하려는 태도 역시 저널리즘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넷째, 저널리즘적 글쓰기는 독자 대중의 알 권리를 기본으로 하지만, 인물이나 사건 사고, 사태 등에 대한 독자의 기본적 궁금증을 풀어주는 기능을 갖고 있습니다. 저널리즘적 글쓰기는 여론의 흐름에 민감하게 반응하기 때문에, 사회 변화와 그 변화의 방향성을 파악하는 데 시야를 넓히고 시력을 키울 수 있습니다. 다섯째, 저널리즘적 글쓰기는 표현뿐 아니라 전달에 큰 비중을 둡니다. 다시 말해 아무리 새로운 지식과 정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독자(수용자)에게 전달되고 소통(커뮤니케이션)되지 않는다면 저널리즘적 글쓰기는 존재 이유가 사라지고 맙니다. 우리의 일상적 삶은 우리가 저널리스트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끊임없이 정보를 송신하고 수신하는 환경 속에서 진행됩니다. 송신자이면서 수신자인 우리가 소통 능력을 키우지 못한다면, 그 삶은 심리적으로, 그리고 사회적으로 심각한 문제를 야기합니다. 소통 능력이 있는 시민들로 구성된 사회가 건강한 사회입니다. 마지막으로, 미디어 환경이 급변하면서, 우리는 저마다 '1인 미디어'의 주인공이 될 수 있습니다. 블로그에 이어, 사용자 제작 컨텐츠(UCC, User-created content)라는 용어가 일상적으로 쓰이고 있듯이, 우리는 저마다 저널리스트가 될 수 있습니다. 자기 의견과 주장이 분명하다면, 그 사람은 어디에 있든, 그 의견과 주장을 어떤 미디어를 통해 전달하든 이미 저널리스트인것입니다. 지식정보사회를 살아가면서 단순한 지식 정보 소비자에 머물지 않고, 지식과 정보를 주체적으로 해석하고, 동시에 지식과 정보, 의견을 개성적으로 생산하고 소통하기 위해 우리는 저널리즘적 글쓰기에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저널리즘적 글쓰기를 체득하면, 보고서뿐 아니라 한 권의 책을 집필할 때에도 시간과 노력을 효과적으로 운영할 수 있습니다. 한 편의 기사와 한 권의 논픽션의 구조와 글쓰기 방법은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기사, 노력한 만큼 잘 쓸 수 있다. 1. 저널리즘적 글쓰기의 유형: 스트레이트 기사, 인터뷰 기사, 스케치 • 분석 및 해설 기사(feature story), 르포르타쥬, 칼럼, 논설 등 2. 기사를 잘 쓰기 위한 몇 가지 방법: 1) 주제를 분명하게 설정합니다. 주제를 한 문장으로 만들 수 있다면, 절반은 성공한 것입니다. 가령 '누가 한국을 움직이는가'라고 하면 각 분야에서한국을 이끄는 영향력 있는 인물을 선정하는 기획일 것입니다. 기사의 주제는 분명한 계기가 있어야 하며, 독자에게 유익한 정보가 되어야 합니다. 정보성이 부족하다면 흥미를 끌 수 있는 방법을 마련해야 합니다. 2) 주제를 뒷받침할 자료와 전문가, 현장(사례), 관련 기사를 찾습니다. 주제가 정해졌다면 가장 먼저 관련 기사를 검색해야 합니다. 한창 취재하다가 비슷한 기사가 몇 년 전에 나온 사실을 알고 포기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관련 기사를 검토하다 보면, 주제를 바꾸거나, 취재 영역에 변화를 줄 수 있습니다. 3) 구성을 어떻게 할 것인가. ◎역피라미드형: 전문(요약)중요한 사실-흥미 있는 이야기 순으로 구성합니다. 1900년대 초 미국의 AP통신이 개발한 기사 구조로 스트레이트 기사에서 흔히 사용합니다. ◎피라미드형: 도입-중요한 사실-서스펜스 형성-클라이맥스 순입니다. 피라미드형은 피처 기사에서 자주씁니다. 독자의 관심을 계속 끌고 갈 수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문학적이고 연대기적인 서술 방식입니다. ◎혼합형: 클라이맥스(요약)-서론-본론 결론 순. 4) 1), 2), 3)이 충분하게 준비되었다면, 기사 작성에 들어갑니다. • 간결하게 써야 합니다. 국내 신문은 일반적으로 5행 이상(65~75자)을 넘지 않도록 하고 있습니다. 단문을 쓰라는 것입니다. • 가능하면 구어체를 씁니다. 이야기하듯이 쓰라는 것입니다. ·주어와 술어를 분명히 합니다. • 매력적인 언어를 찾습니다. ・쉽게 씁니다. 좋은 기사의 첫째 조건은 쉬운 문장입니다. 이상은 언론학 입문서에서 가장 일반적으로 권장하는 지침입니다. 필자가 경험한 바에 따르면, 기사를 잘 쓰기 위해서는 다음 몇 가지를 유념 해야합니다. 먼저, 앞에서 말한 대로 기사의 주제를 한 문장으로 압축하십시오. 이것이 나중에 기사 제목이 될 수 있을 뿐 아니라, 기획과 취재의 매 단계에서 판단 기준이 됩니다. '민물낚시, 환경오염 주범'이라는 기획 기사를 준비한다면, 바다낚시의 오염 문제에 관한 자료는 읽을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둘째, 기획과 취재 단계에서 기사의 첫 문장, 즉 리드를 구상하십시오. 첫 문장이 결정되지 않으면 기사를 쓰기 어렵습니다. 취재를 충분하게 해놓고서도 첫 문장, 즉 도입부를 어떻게 시작할 것인지 결정하지 못해 전전긍긍하는 기자들이 제법 많습니다. 어디 기사뿐인가요. 모든 종류의 글쓰기가 첫 문장 에서 좌우됩니다. 오죽하면, 작가들이 "첫 문장은 신의 선물이다" 라고 말하겠습니까. 필자는 기자 생활을 하는 동안, 기획이 정해지면 그때부터 제목과 첫 문장을 구상하기 시작했습니다. 짧은 시를 쓸 때에도, 산문이나 논문을 쓸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셋째, 복잡한 사안을 취재할 경우, 취재한 내용을 주위 동료나 가까운 이들에게 이야기하는 것이 좋습니다. 흥미로운 인물을 인터뷰했을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야기를 하는 동안, 취재한 내용을 정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상대방의 반응을 체크할 수 있습니다. 가령 상대방으로부터 더 취재해야 할 부분, 더 강조해야 할 부분 등 의외의 아이디어를 얻을 수도 있습니다. 넷째, 관련 서적을 찾으십시오. 인터넷 검색은 참고자료일 뿐입니다. 가장 새롭고 신뢰할 만한 정보와 자료는 책에 다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십시오. 필자는 특집 기사를 쓸 경우, 기사 검색을 한 다음 대형 서적으로 달려가곤 했습니다. 관련 서적 한두 권만 읽으면, 그 분야의 권위자가 누구인지, 그 분야와 관련된 최신 이론은 무엇인지 장악할 수 있습니다. 열심히 취재해서 기사를 썼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어떤 책에 다 나와 있는 내용인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다섯째, 소설을 많이 읽고 영화, TV 드라마를 자주 보십시오. 소설은 어휘력을 풍부하게 해줄 뿐 아니라, 인간과 사회를 이해하는 시각을 갖게 해줍니다. 문학 분야가 아니더라도 베스트셀러 책은 따라 읽어야 합니다. 관객이 많이 드는 영화와 시청률이 높은 드라마도 놓치지 않아야 합니다. 베스트셀러 책과 영화, 드라마에서 한 줄 인용하면서, 혹은 등장인물을 끌고 들어가면서 기사를 시작하면 독자들의 눈길을 더 많이, 또 오래 붙잡을 수 있습니다. 기사의 궁극 목표는 좀 더 많은 독자들이 읽도록 하는 것입니다. 여섯째, 늘 기사만 생각하십시오. 기자는 늘 기사만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자동차를 운전하거나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 심지어 가족이나 친구와 대화를 나눌 때에도 기사를 생각해야 합니다. 카페 옆자리에서 얻어들은 한 마디가 대형 기사로 발전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찬반양론이 팽팽한 기사일 경우, 가족이나 친구들의 의견을 청취해보면, 취재나 기사 작성에 적지 않은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기사는 혼자 쓰는 것이 아닙니다. 기사가 아니라 다른 장르의 글을 쓸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보고 읽고 느끼고 생각한 만큼 글은 달라집니다. 개성적 글쓰기를 위한 기초체력 다지기 정확한 문장이 관건입니다. 정확하지 않은 문장은 특히 저널리즘에서 문장이 아닙니다. 시나 소설과 같은 문학 작품에서도 정확성이 우선입니다. 아름다운 문장은 그 다음입니다. 정확한 문장을 구사하지 못하는 작가는 아름다운 문장, 개성적인 글을 쓰기 어렵습니다. 정확하고 개성적인 쓰기를 위해서는 '기초체력'이 필요합니다. 글쓰기를 위한 기초체력을 다지는 필자의 체험적 방법론을 소개합니다. 1. '나쁜 버릇'부터 찾는다 어떤 글이든 좋습니다. 자기가 쓴 글을 분석 대상으로 삼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면, 자주 나타나는 단어나 표현이 발견됩니다. 사람마다 특유의 말투(말버릇)나 몸짓이 있듯이 글에도 특유의 '버릇'이 나옵니다. 예컨대, 어떤 사람은 '~것이다'라는 종결어미를 자주 씁니다. '~것이다'는 가능하면 쓰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자신의 글 버릇을 찾아내는 눈을 가지고 있다면 가능성이있습니다. 다음으로, 수식어가 많은 문장, 접속사가 많은 문장, 나열이 많은 문장이 나쁜 문장입니다. 자기 글에서 나쁜 점을 발견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이미 글을 잘 쓰는 사람입니다. 자기 글에서 문제점을 발견할 수 있는 수준까지 빨리 올라가야 합니다. 자기 글의 문제점을 발견할 수 있다면, 그 문제점만 제거해도 글쓰기는 순식간에 한 단계 업그레이드됩니다. 자기 글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 모른다면, 정말 큰 문제입니다. 정신 바짝 차리고, 자기 글을 들여다보십시오. 자기가 쓴 글들을 '원수가 보내온 편지'라고 생각하고 여러 차례 읽어보십시오. 버릇이 발견될 때까지 읽으십시오. 2. 자기가 좋아하는 글을 찾아라 자기가 쓰고 싶은 글을 쓰는 기자나 작가의 글을 집중적으로 읽으십시오. 글쓰기의 모델을 하나 설정하는 것입니다. 가수가 되고 싶어하는 청소년들은 반드시 좋아하는 가수가 있습니다. 운동을 좋아하는 청소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소설가 지망생은 필사하고 싶은 선배 소설가가 한둘은 꼭 있습니다. 좋은 기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글을 그대로 베껴 쓰십시오(필사). 외우면 더 좋습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글을 적극 모방해보십시오. 그 과정에서 글쓰기 수준이 몰라보게 향상됩니다.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알 수 있는 국내 소설가 대부분이 선배 작가의 소설을 필사하면서 습작기를 거쳤습니다. 추천하고 싶은 필자 '모델'은 문인 이외에, 혹은 문인이면서 매체에 자주 기고하는 분들입니다. 제가 추천하고 싶은 분들은 도정일(문학평론가), 김종철(<녹색평론> 발행인), 고종석(소설가 겸 언론인), 김훈(소설가 겸 언론인). 배병삼(정치학 및 동양학), 한형조(동양철학), 송호근(사회학), 고미숙(문학평론가), 정혜신(정신과 전문의) 등입니다. 이외에도 좋은 필자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3. 새롭지 않으면 쓰지 말라 저널리즘의 생명은 새로움입니다. 새롭지 않으면 뉴스가 아닙니다. 저널리즘이 아니라도 그렇습니다. 모든 글쓰기는 새로워야 합니다. 사실이나 의견에서 새로워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표현이라도 새로워야 합니다. 새롭지 않다면 신기하거나(의외성) 흥미로워야 합니다. 새로움, 의외성, 흥미, 이 세가지 중 한 가지도 만족시키지 못한다면 글을 쓸 이유가 없습니다. 4. 자세히 관찰하라 관찰은 모든 글쓰기의 스타트 라인입니다. 사물이든 사건이든 인물이든자 세히 관찰하지 않고서는 정확한 글쓰기가 불가능합니다. 관찰이 부정확하면 사실관계가 흔들립니다. 정확히 보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우리의 오감 가운데, 시각이 특히 부정확합니다. 주변 환경에 따라 착시 현상이 얼마나 자주 일어나는지 상기해보십시오. 관찰은 단지 시각에 한정되지 않습니다. 많이, 그리고 정확히 느끼는 것도 관찰의 범주에 들어갑니다. 책읽기, 영화 감상, 미술 감상 등도 관찰입니다. 관찰은 대상에 대한 집중입니다. 자신을 완전히 비우고(선입견을 버리고, 현상학적으로 말하자면 판단을 중지하고) 대상에 몰입했다가, 다시 대상으로 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상상력은 이 관찰 단계에서 나옵니다. 관찰 훈련의 첫 단계는 자기가 본 것으로 소리 내어 말해보는 것입니다. 관찰 대상이 인물이라면, 머리 모양과 색깔, 길이에서부터 이목구비를 거쳐 구두까지 관찰하면서 하나하나 말해보십시오. 컴퓨터나 텔레비전, 화분, 식탁, 자동차 실내 등 늘 마주치는 대상을 하나 정해서 소리 내어 하나하나 관찰해보십시오. 그동안 전혀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일 것입니다. 그것이 발견입니다. 낯익은 것에서 낯선 것을 찾을 수 있다면, 바로 그것이 최고의 글쓰기 재료입니다. 5. 메모하고, 메모하고 또 메모하라 기억력이 남다르다고 해도, 메모를 따라갈 수는 없습니다. 뛰어난 작가는 물론이고 예술가, 심지어 기업의 CEO들도 메모를 자주 합니다. 뭔가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메모광입니다. 인간이 하루에 접하는 새로운 정보(자극)는 수십만 개가 넘는다고 합니다. 밤에 잠자리에 누워 하루를 돌이켜보십시오. '오늘 내가 새로 느낀 것, 새로 발견한 것'을 떠올려보십시오. 거의 없을 것입니다. 주머니 혹은 핸드백에 작은 수첩과 필기구를 반드시 챙기십시오. 수첩과 필기구를 챙기는 습관이 들었다면, 글쓰기를 위한 가장 필수적인 요건을 갖춘 것입니다. 저는 화장실에도 연필과 포스트잇을 갖다 놓습니다. 주머니에 메모지와 볼펜이 없으면 산책도 하지 못할 만큼 습관이 되어 있습니다. 참신한 아이디어는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하루에도 수천 번 새로운 생각이 떠오릅니다. 하지만 그것이 글쓰기로 이어지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좋은 글은 메모지에서 나옵니다. 메모지가 '상상력 발전소'입니다. 개성적인 글쓰기를 위한 세부 지침 1. 나로부터 시작하라 저널리즘적 글쓰기, 특히 스트레이트 기사에서 '나'는 차가운 전달자입니다. 스트레이트 기사에는 글쓰는 사람의 주관이 개입해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1990년대 이후, 활자매체의 기사는 연성화하고 있습니다. 피처 기사, 칼럼 등은 대단히 주관적이고 개성적인 문체를 구사합니다. 기사작성 연습을 하고 싶다면 굳이 멀리 갈 필요가 없습니다. '나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자서전을 써 보거나, 자기가 자기를 인터뷰하는 것입니다. 가족이나 친구를 소개하는 글도 좋은 훈련이 됩니다. 자기가 사는 마을(아파트)을 취재해 사진과 곁들여 기사를 써보는 것도 훌륭한 저널리즘적 글쓰기입니다. 시나 소설을 쓰기 원한다면 더욱 그렇습니다. '나'의 이야기를 쓰십시오. 문학적 글쓰기를 방해하는 가장 큰 요소 가운데 하나가 글쓰기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그렇다면 자기 자신에서 출발하십시오. 나에 대해, 나의 가족과 친구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은 바로 나입니다. 잘 알고 있는 소재를 글로 쓸 때, 글쓰기에 대한 두려움은 현저하게 줄어듭니다. '나'에 대한 글쓰기는 자기 삶을 성찰하는 진지한 계기를 제공합니다. 내가 어디에서 왔고, 또 어디에 있으며, 어디로 갈 것인가. 이 같은 인문학적 질문을 던지게 하는 것은 글쓰기 말고 거의 없습니다. 2. 반복하지 말라 반복은 강조할 때 말고는 피해야 합니다. 반복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표현의 반복과 내용의 반복이 그것입니다. 같은 단어, 같은 표현을 반복하지 마십시오. 사실을 왜곡하지 않는 범위에서 유의어를 쓰십시오. '그녀는 아름다운 숄을 두르고, 아름다운 가방을 들었으며, 아름다운 마을에 산다. 이 문장에서 '아름다운'은 반복될 뿐만 아니라, 정확하지도 않습니다. 글쓰기의 가장 큰 장애물 가운데 하나가 내용의 반복입니다. 중언부언하지 마십시오. 같은 내용(견해, 정보, 지식......)이 반복되면 독자는 냉정하게, 즉각 눈을 돌립니다. 친구와 이야기할 때를 떠올려보십시오. 어제 한 얘기를 오늘 하면 친구는 즉각 이렇게 나옵니다. "그거, 어제 들은 얘기야." 글쓰기도 마찬가지입니다. 3. 한 문장에는 하나의 정보만 담아라 이것은 문장을 짧게 쓰는 비결이기도 합니다. 한 문장에는 하나의 정보, 한문단에도 하나의 정보군을 담는 것입니다. 한 문장에 두 개 이상의 정보를 담는 순간, 문장은 길어집니다. 한 문단에 두 개 이상의 정보군을 담으면, 복잡해지기 때문에 독자가 이해하기 힘들어집니다. 아침에 집에서 나와 학교, 또는 사무실에 도착하기까지의 과정을 '한 문장, 하나의 정보' 원칙에 따라 글로 써보십시오. 처음에는 대단히 힘들 것입니다. 하지만 몇 번 고쳐 쓰다보면, 문장을 짧게 쓰는 방법을 스스로 터득할수 있을 것입니다. 4. 접속사를 쓰지 말라 통학 또는 통근 과정을 '한 문장, 하나의 정보' 원칙에 따라 쓰다 보면, 수시로 접속사가 끼어들 것입니다. 접속사 없이 쓰려고 애써보십시오. 최근에 읽은 소설 가운데 접속사가 거의 ('전혀' 라고 해도 크게 틀리지 않다) 없는 소설이 있습니다. 김훈의 장편소설 <남한산성>인데, 접속사에 유의하며 읽어보십시오. 매우 흥미로운 글읽기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접속사는 글 쓰는 이의 마음속에 있어야 합니다. 특히 연결형, 나열형 접속사를 피하십시오. 5. 나누고 묶어주어라 기사를 쓸 경우, 다양한 정보를 한꺼번에 제공해야 할 때가 자주 있습니다. 그럴 때는 유사한 것끼리 묶어줘야 독자가 편하게 읽을 수 있습니다. 음식 종류를 소개한다면, 국적별 혹은 재료별, 계절별 등으로 나누어 묶어줍니다. 6. 병치할 때 조심하라 같은 기능을 가진 단어, 구, 절 등이 나란히 놓일 때 자주 오류가 나타납니다. '사과와 큰 배' '철수는 중학생이고 영희는 공부를 잘한다'와 같은 문장이 의외로 많습니다. '사과'라는 단어와 '큰 배'라는 구는 병치하면 안 됩니다. 단어는 단어끼리, 구는 구끼리 병치하십시오. '사과와 배' '작은 사과와 큰 배'가 적확한 표현입니다. 앞의 문장은 '철수는 중학생이고, 영희는 초등학생이다로 써야 합니다. '중학생' (단어)과 '공부를 잘한다' (구)가 나란히 놓이면 대단히 어색합니다. '30-3-30 법칙'을 명심한다 언론인들은 30-3-30 법칙'을 자주 언급합니다. 여기서 30. 3. 30은 각각 30초, 3분, 30분을 일컫습니다. 독자들이 기사를 읽을 때, 처음 30초 동안은 제목이나 부제, 사진, 그래픽 요소, 기사의 도입부 등을 살펴본다는 것입니다. 독자들은 처음 30초 안에 기사를 읽을 것인지 말 것인지를 결정합니다. 만일 읽기로 마음먹었다면 다음 3분 동안 기사의 도입부를 읽습니다. 그리고 도입부가 흥미롭다면 30분 동안 기사를 끝까지 읽는다는 것입니다. 기자와 편집자는 처음 30초를 3분으로 늘리고, 다시 3분을 30분으로 늘리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것입니다. 기사만 그런 것은 아닙니다. 모든 글이 제목과 도입부에서 결정납니다. 시처럼 짧은 글에서도 제목이나 첫 연이 진부하면 독자들은 눈을 돌려버립니다. 소설은 굳이 설명이 필요 없습니다. 보고서나 논문도 마찬가지입니다. '30-3-30 법칙'은 첫 문장에 목숨을 걸라는 저널리즘적 글쓰기의 핵심을 압축하고 있는 법칙입니다. 이문재. 1959년 경기도 김포에서 태어나 경희대에서 국어국문학을 전공하고,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시사저널 취재부장, 문학동네 편집주간을 역임했고, 현재 <시사IN> 편집위원, <문학동네〉 편집위원, 〈녹색평론〉 편집자문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교수로 재직 중이다. 김달진문학상, 시와시학 젊은 시인상, 소월시문학상, 지훈문학상, 노작문학상을 수상하였으며, 시집으로 《내 젖은 구두 벗어 해에게 보여줄 때》, 《산책시편》, 《마음의 오지》, 《제국호텔> 등이 있다(pp.197-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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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03
  • “흥청망청” 108회 선관위... 명분없는 돈 낭비
    본 기사는 교회발전연구소 대표 이능규 목사에게 모 인사가 108회 선관위(위원장 권순웅 목사)에 대해 제보한 내용을 바탕으로 작성한 기사임을 밝힌다. 제보 내용에 따르면 선관위가 불필요한 돈을 낭비하고 있다. 제108회기 선관위는 공정선거감시단 해외 활동에 이미 많은 경비를 집행했다. ▲전국장로회연합회 임역원수련회(일본) : 고정식, 손정호, 김삼주, 신덕수, 한기영(750만원 집행) ▲농어촌교역자부부수양회(다낭) : 권순웅, 신덕수, 지동빈, 임종환, 최병도(613만원 집행) ▲전국교역자하기수양회(필리핀) : 전웅구, 김상원, 유병희, 한기영, 이상돈(599만5천원 예산). 이때 위원장 권순웅 목사와 서기 한기영 목사가 강사를 맡았다고 한다. 현재 바뀐 선거규정에 따라 후보자는 행사에 참석할 수 없다. 그런데 선관위 공정선거감시단은 누구를 감시하기 위해 해외 행사에 동행하는 것인가? 제보자는 “돈**”이라는 격한 표현을 사용했다. 또한 선관위는 민찬기 목사가 제기한 가처분 신청 소송에 대응하기 위해 변호사비로 5천 5백만원을 지출했다. 선관위원들이 1차 투표해 7대7로 나왔다면 의견이 팽팽하다는 것인데 굳이 다시 투표해 7대8로 만든 것이 화근이다. 증경총회장단이나 실행위원회에 넘겨 자문을 구했다면 굳이 총회 돈을 지출할 소송에 휘말리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것이 중론이다. 현재 감사부는 107회기 선거관리위원회(위원장 배광식 목사)에 대해 특별재정감사를 하고 있다. 어제는 서기와 회계를, 오늘은 위원장과 심의분과장을 부른다. 안건은 선관위가 재정을 과잉지출했다는 것이다. 모 선관위원은 자기들은 비용을 아껴서 사용했다고 주장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기에 특별재정감사를 받는 것이다. 앞으로 108회기 선관위도 감사부에 의해 특별재정감사를 받지 말란 법이 어디 있겠는가? 이 악순환을 끊어야한다. 선관위의 근본적인 개혁이 필요한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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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03
  • 【북토크】 가수 장기하의 깨달음
    가수 장기하를 좋아한다. 노래가 재미있기 때문이다. 그의 대중적인 첫 노래 “싸구려 커피”, “달이 떠오른다, 가자” 등은 신선했다. 읽을 책들을 검색하다 보니 그가 몇 년 전에 쓴 것이 있어 대출해서 봤다. 부담없이 재미있게 읽었다. 첫 장인 ‘안경과 왼손’은 주어진 환경을 담담히 받아들이고 돌아본 후 감사하는 내용이다. 읽어볼만해 전문을 소개한다. 안경과 왼손 얼마 전 안경을 잃어버렸다. 매우 아끼는 안경이었다. 아니, 아낀다는 표현으로도 모자란다. 이삼 년 전 그 안경을 산 이후로는 오직 그것만 써왔던 것이다. 그런데 어느날 아침 갑자기 사라져버렸다. 있을 만한 곳을 전부 다 여러 번씩 싹싹 뒤져봤지만 찾지 못했다. 결국 예전에 썼던 다른 안경을 쓰고 집을 나설 수밖에 없었다. 약속 장소로 가는 길, 이삼 일 전에 읽었던 무라카미 하루키 에세이의 한 구절을 떠올렸다. "형체 있는 것은 아무리 애써도 언젠가, 어디선가 사라져 없어지는 법이다. 그것이 사람이건 물건이건." 마음을 털어버렸다. 그래, 그 안경이랑은 여기 까지였나보지 뭐. 나는 국소성 이긴장증이라는 병을 가지고 있다. 해괴해 보이는 이름이지만 의미는 간단하다. '국소성'이란 특정 부위에 나타남을, '이'는 이상함을, '긴장'은 말 그대로 긴장을 뜻한다. 한마디로 특정 부위가 이상하게 긴장된다는 얘기다. 이 병명에서 가장 중요한 글자는 '이'다. '이'자가 들어간 병을 선고받는다는 것은 말하자면 이런 상황이다. 몸이 안 좋다. 병원을 찾아가 묻는다. "선생님, 저 왜 아픈건가요?" 의사가 답한다. "그러게요. 이상하네요." 그렇다. 내 병은 원인도 치료법도 알려지지 않은 희귀병이다. 이 병이 처음 생긴 것은 대략 십오년 전쯤으로, 군악대 시험을 준비하던 시절이었다. 당시 나는 '눈뜨고코베인'이라는 록밴드에서 드러머로 활동하고 있었다. 가수가 되겠다는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저 드럼 하나로 먹고살 수 있을 정도로 연주를 잘하는 사람, 즉 프로 드러머가 되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그 외의 진로는 상상조차 하지 않았다. 학교 공부는 최소한으로 하고 드럼 연습과 밴드 활동 위주로 생활했다. 그러다보니 군복무를 시작도 하지 않은 채 대학 오 년 차를 맞았고, 더이상은 입대를 미룰 수 없게 되었다. 내 선택은 당연히 군악대였다. 군대에 있는 동안 손발이 녹슬면 큰일 아닌가. 일반 부대는 절대로 안 된다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군악대는 록 연주만 잘한다고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클래식 타악, 특히 행진곡풍의 연주에 능통해야 했다. 자신은 있었다. 이미 연습이라면 많이 해온 터였기 때문이다. 좀 다른 장르의 연주라고 해서 못 해낼 것은 없다고 생각했고, 시험을 대비해 맹연습에 돌입했다. 이삼 개월쯤 지났을 때 복병이 나타났다. 연습만 하려고 하면 내 의지와 관계없이 왼손이 꽉 쥐이는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드럼 연주의 기본은 그립이다. 누가 툭 치면 놓쳐버릴 듯 살며시 스틱을 잡고 부드러운 움직임을 만들어야 빠르고 정확한 연주를 할 수 있다. 그런데 자꾸 나도 모르게 스틱을 힘껏 잡게 되고 그것을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이 반복되다보니 미쳐버릴 노릇이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연습하다 너무 답답하고 화가 나서 소리를 지르며 스틱을 집어던진 것도 한두 번이 아니다. 결국 군악대는 포기했다. 치료법도 알 수 없고 상태가 호전될 기미도 보이지 않으니 어쩔 수가 없었다. 더욱 중요한 것은, 프로 드러머의 꿈도 함께 버렸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게 그리 절망스러운 단념은 아니었다. 내 생각의 흐름은 이랬다. '하긴 군악대의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 연주하는 게, 내가 멋있는 음악을 하는 데는 오히려 해가 될지도 몰라. 멋있는 음악이라... 그래, 생각해보면 프로 드러머가 되는 것 자체가 멋있는 음악을 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 수도 있겠네. 연주로 먹고살려면 돈 되는 음악을 해야 하는데, 내가 지금 멋있다고 생각하는 우리나라 음악 중에 돈 되는 게 하나라도 있나? 그리고 나는 우리 밴드 음악이 제일 멋있는데 그걸로 돈을 벌어본 적도 없잖아? 애초에 음악으로 돈을 벌겠다는 생각 자체가 문제였어!' 나는 홀가분한 기분으로 프로 연주자가 아닌, 돈은 안 돼도 '멋있는 음악을 하는 뮤지션이 되겠다고 마음 먹었다. 그리고 일반 부대에 입대했다. 제대한 후 나는 그 '멋있는' 뮤지션이 되는 일을 실행에 옮겼다. 파트타임 일자리를 구한 상태에서, 내가 싱어송라이터로서 이끄는 새 밴드 '장기하와 얼굴들'을 시작한 것이다. 최소한의 돈과 최대한의 시간을 확보해 자유롭게 음악활동을 하겠다는 생각이었다. 곡은 군복무중 짬짬이 만들어뒀었다. 물론 큰 인기를 얻으리라는 기대는 전혀 없이 만든 노래들이었다. 눈앞에 있는 관객들만은 확실히 재밌게 해주겠다는 생각이 다였다. 그런데 터졌다. 소위 '대박'이었다. 활동을 시작하고 일 년이 지나기도 전에 전 국민적 히트곡을 보유한 밴드가 된 것이다. 모든 것이 거짓말처럼 순조로웠다. 한 가지만 빼고 말이다. 왼손에 힘이 들어가는 증상이 기타를 연주할 때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처음에 이 증상이 신기했던 건 유독 드럼 연주를 할 때만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다른 일을 할 때는 아무런 불편이 없었다. 물론 기타 연주를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군복무중에도 생활관에 비치된 통기타를 치며 노래를 만들었고, '장기하와 얼굴들' 첫 싱글을 녹음할 때도 기타는 내가 다쳤으며, 밴드 활동 초기에는 공연을 할 때도 절반 정도의 곡에서는 내가 기타를 잡았다. 그런데 급격하게 치솟는 인기를 실감하며 공연을 이어가던 어느 날, 기타를 연주할 때도 왼손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결국 기타도 포기했다. 이번 단념은 군악대 때와는 달리 좀 절망스러웠다. 공연에서 기타를 연주하지 않기로 했음은 물론이고, 평소에 혼자 치는 것도 거의 못하게 됐다. 늘 자유자재로 하던 기본적인 플레이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게 되니 짜증이 치밀었다. 자연히 심심풀이로 기타를 잡는 일이 점점 줄어들었다. 중학교 때 이후로 그때까지 줄곧 기타는 나의 가장 좋은 취미 중 하나였다. 집에 있을 때면 침대에 누워 기타를 배에 얹고 아무렇게나 퉁겼다. 그러면서 멜로디를 이리저리 흥얼거리다보면 이따금씩 노래가 만들어지곤 했다. 그런 일상이 하루아침에 송두리째 날아가버렸다. 게다가 이번에는 증상이 연주에만 국한돼 나타난 것이 아니라 일상 전반으로 퍼져나갔다. 곧 타자를 치는 것도, 단추를 잠그는 것도, 왼손을 써야 하는 어떠한 일도 예전만큼 쉽게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로부터 십 년이 흘렀다. 그런데 그 십 년을 돌이켜보면, 이 병이 내게 나쁜 일만은 아니었다. 사실 병에게 엎드려 절하고 싶을 지경이다. 프로 드러머의 길을 포기함으로써 결국 '장기하와 얼굴들'을 시작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기타 연주를 포기한 것 역시 내게 두 가지 커다란 선물을 가져다주었기 때문이다. 첫째는 새 기타리스트 하세가와 요헤이 형을 영입한 것, 둘째는 내가 무대에서 악기 없이 자유롭게 퍼포먼스를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두 가지가 없었다면 '장기하와 얼굴들’의 활동이 내게 가져다준 희열은 말도 안 되게 줄어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세월이 지나면서 증상도 아주 조금씩 좋아져 이제는 거의 다 나았다. 지금도 약간의 느낌이 남아 있긴 하지만, 일상에서 그것을 의식하게 되는 일은 드물다. 기타와 드럼도 취미 정도로는 다시 연주할 수 있게 되었다. 그간 연습을 안 했으니 남들 앞에 뽐낼 만한 연주력은 당연히 아니지만, 사실 이제는 그런 능력이 필요하지도 않다. 싱어송라이터로서 좋은 연주자들과 함께할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다. 무엇보다, 증상이 가장 심했을 때를 떠 올리면 집에서 혼자 재밌게 연주할 수 있는 것만 해도 감지덕지다. 지금도 이 병의 원인은 의학적으로 밝혀지지 않은 듯하고, 물론 나도 아직 정확히 어떤 일이 벌어진 것인지 알지 못한다. 다만 이렇게 추측할 뿐이다. 내가 나 스스로에게 과도한 것을 강요했고, 몸이 그만두라는 신호를 보냈다. 나는 그것을 무시하지 않고 충분히 쉬게 해주었으며, 그랬더니 시간을 두고 차츰 회복되었다. "형체 있는 것은 아무리 애써도 언젠가, 어디선가 사라져 없어지는 법이다. 그것이 사람이건 물건이건? 그리고 형체가 없긴 하지만 능력도 마찬가지다. 어제까지 당연히 할 수 있었던 일을 오늘 갑자기 못하게 될 수도 있다. 나는 그럴 때마다 무척 괴롭긴 했지만, 결국 다 순순히 받아들였다. 이 능력은 여기까지인가보다, 하고. 그리고 새로운 상황에 맞춰 새로운 계획을 세웠다. 그러고 나면 그전에는 상상도 못했던 다른 길이 열리곤 했던 것이다. 안경은 며칠 뒤에 소파 밑에서 찾았다. 전날 술에 취해 소파에서 잠들었고, 안경을 아무렇게나 내팽개치는 과정에서 소파 아래로 들어간 모양이었다. 거실에서 잠드는 일이 거의 없다보니 그곳을 찾아볼 생각은 하지 못했던 것이다. 먼지 구덩이 속에 얌전히 놓인 안경을 발견한 순간, 그야말로 날아갈 듯한 기분이었다. 아무리 많이 아끼는 안경이라 해도, 물건 하나로 그렇게까지 기쁠 수 있다싶었다. 모르긴 해도, 깨끗이 포기했었기 때문일 거다(pp.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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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02
  • 【단상】 부총회장 선거, 축제가 싸움판으로
    지난 4월 25일 오전 11시 참좋은교회(이윤찬 목사 시무)에서 대구교직자협의회 제31회 정기총회가 있었다. 이승희 증경총회장의 개회 예배 설교 후 합심기도 시간에 경북교직자협의회 대표회장 강전우 목사가 ‘총회와 영남지역을 위해서’ 기도할 때 부총회장 자격 문제로 소송이 붙은 총회를 염려하며 간절히 기도했다. 소송 관계자인 부총회장 후보 민찬기 목사나 장봉생 목사의 마음은 어떨지 모르나 총회 회관에서 먼 경상도 지역에서도 현 사태를 매우 안타깝게 여기며 탄식으로 기도하고 있다. 아마 이 사태를 지켜보는 대부분의 총대들의 마음도 편치는 않을 것이라고 본다. 한 사람의 부총회장이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과 물질이 필요하다. 노회와 협의회, 총회 등에서 오래 봉사하며 자신을 알려야한다. 이에 많은 시간이 든다. 그리고 물질로도 많이 섬겨야한다. 그래서 아무나 부총회장이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면에서 시간과 물질로 섬겨온 부총회장 후보들은 모두 총회의 귀한 자산이다. 바람직한 것은 단독 후보로 추대되는 것이지만 어쩔 수 없이 경선이 될 수도 있다. 그러다보면 친했던 사이도 서먹해지거나 “원수” 사이가 될 수 있다. 그래서 곽선희 목사는 운동을 할 때 서로 마주보는 것은 하지 않는다고 했다. 탁구나 테니스나 서로 마주보고 하다보면 감정 싸움이 될 수 있기에 자기는 각자 실력으로 승부하는 볼링을 한다고 말한 것을 들은 적이 있다. 일리 있는 말이다. 오래 세월 총회를 섬겨온 민찬기 목사나 장봉생 목사는 현재 서로를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내리 누르고 이겨야할 경쟁 상대로 보지 않겠는가 말이다. 이런 면에서 선거란 참으로 잔인한 것인지도 모른다. 민찬기 목사 소속 임원회가 민찬기 목사의 후보 자격에 대해 물었을 때 장봉생 목사 소속 노회도 임시노회를 열어 부총회장 출마 자격에 대해 선관위에 질의했다. 선관위가 이 문제를 다룰 때 투표에 처음에는 7:7 동수가 나왔다. 이어 재투표하여 7:8로 세 번 출마는 안된다는 결론을 내렸다. 다 지나간 일이지만 의견이 7대 7로 나뉘었다는 것은 선관위원 내에서도 의견이 팽팽했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 문제를 바로 처리할 것이 아니라 좀더 시간 여유를 두고 처리했다면 좋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있다. 증경총회장단의 의견을 듣는다든지, 실행위원회에서 의견을 구했다면 모양세는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속전속결로 재투표해 7:8로 세 번 출마 불가로 정했다. 그러자 민찬기 목사측에서는 이 문제에 대해 소송을 했고, 소속 노회에서 부총회장 후보로 추천을 받았다. 세상 법정이 이 문제를 어떻게 처리할지는 두고보면 된다. 그런데 성경은 교회 문제를 세상 법정에 끌고가는 것을 경고하고 있다. [고전6:1-7] “1 너희 중에 누가 다른 이와 더불어 다툼이 있는데 구태여 불의한 자들 앞에서 고발하고 성도 앞에서 하지 아니하느냐 2 성도가 세상을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세상도 너희에게 판단을 받겠거든 지극히 작은 일 판단하기를 감당하지 못하겠느냐 3 우리가 천사를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그러하거든 하물며 세상 일이랴 4 그런즉 너희가 세상 사건이 있을 때에 교회에서 경히 여김을 받는 자들을 세우느냐 5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 하여 이 말을 하노니 너희 가운데 그 형제간의 일을 판단할 만한 지혜 있는 자가 이같이 하나도 없느냐 6 형제가 형제와 더불어 고발할 뿐더러 믿지 아니하는 자들 앞에서 하느냐 7 너희가 피차 고발함으로 너희 가운데 이미 뚜렷한 허물이 있나니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 새로이 총회를 섬길 일꾼을 뽑는 총회 선거가 축제가 아니라 세상의 조롱거리가 되고, 사법의 판결을 받아야하는 싸움판이 된 것이 참으로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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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논단
    2024-04-26
  • 취재 기자를 내쫓는 노회들...무엇이 두려운가?
    봄 정기노회가 열리는 계절이다. 서울에서 먼 지방의 몇몇 노회를 취재갔다. 그 중 2개 노회에서 “내쫓김”을 당했다. 이리노회는 북일교회 문제로 회원 호명 때부터 시끄러웠다. 결국 노회원들간에 고성이 오갔다. 이런 가운데 취재하고 있는 기자들에게 나가달라고 "거칠게" 요구했다. 결국 쫓겨날 수 밖에 없었다. 충청노회도 전 총신대총장 김영우 목사 피소건에 대해 다루며 기자들에게 나가달라고 “험악하게” 요구했다. 결국 본당 중이층으로 쫓겨갈 수 밖에 없었다. 기자는 사실을 취재하고 알리기 위해 그 현장에 가 있는 것이다. 북일교회 문제는 대부분의 총회원들이 알고 있을만큼 큰 이슈이다. 당연히 기자들이 가서 취재할 수 밖에 없는 사항이다. 기자는 총회원들의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 대신해서 그 현장에 간 것이다. 그런데 무슨 이유로 기자들을 내쫓는 것인가? 그것이 과연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겠는가? 기자가 보면 안될만큼 감춰야할 문제가 있는가? 사실을 사실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문제해결에 도움이 될 수 있다. 문제 없는 노회는 취재간 기자들을 반기며 좋게 기사를 써서 노회를 잘 홍보해 달라고 부탁한다. 기자로서도 기분좋은 일이다. 반면 문제 있는 노회는 기자를 내쫓는다. 마치 잡상인 취급을 한다. 부득이 기자를 내보낼 필요가 있다면 “정중하게” 요청했으면 한다. 같은 합동측 목사한테 그렇게 함부로 해서 되겠는가? 앞으로도 “문제 있는” 이리노회와 충청노회 “사태 추이”에 대해 예의주시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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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2024-04-03
  • 【북토크】 편협한 꼰대가 되지는 말아야 할텐데....
    자기 생각에 갇혀 사는 사람은 편협한 사람이다. 이런 사람하고는 대화도 되지 않는다. 열린 사고가 필요하다. 남과 어울리기 위해서는 개방해야한다. 죽고 사는 진리의 문제가 아니라면 “그럴수도 있구나”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그러나 그것이 그리 쉽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으로 알고 있다. 편협함 공부를 하면서 문득 깨달은 건, 법률 외에 삶의 모든 기준들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시작한다는 것이다. 그 기준들은 절대불변의 진리가 아니어서 주변사람에게 영향을 받아 생성되기도 하고 타인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세워지기도 한다. 또 삶의 경험이 켜켜이 쌓이면서 조금씩 견고해지고 구체적으로 변하기도 한다. 그렇게 여러 기준들을 만들어 옳고 그름을 평가하는 일은 어쨌거나 사람이 하는 것이란 점에서 언제나 주관적이다. 하지만 우리는 종종 너무 쉽게 각자가 세운 판단 기준이 ‘정답’이라고 착각한다. 사람은 쉽게 타성에 젖으니 자신의 판단 기준과 결론이 절대적인 단 하나의 정답이라 믿으며 자기 우물 안에서 살아간다. 하지만 그 기준에 정답이란 없기에 자신이 바르고 타당한 기준을 세워가며 나이 먹고 있다는 생각도 사실 편협한 ‘착각’에 가깝다. 나이를 먹는 일이 무서운 건 나도 모르는 새 나의 판단이 바르고 타당한 정답이라고 생각하게 되기 때문이다. 특히 어떤 조직에 잘 적응한다는 것은 곧 그 곳의 기준을 잘 습득해 체화한다는 것이기도 하다. 공동체에서 튀는 사람이 되기 싫어서 공동체의 평가 기준을 답습하기도 하고, 나는 다르다 여기며 살아도 어느 날 문득 돌아보면 그 밥에 그 나물처럼 사고하게 되는 것이 현실이다. 자신의 존재를 정당화하기 위해 쉼 없이 자신의 옳고 그름을 고집하기도 하고 자신의 결핍된 부분을 숨기기 위해 고집스러운 기준으로 타인을 깎아 내리기도 한다. 입만 열면 세상 곳곳에 대한 불만을 쏟아 내는 투덜이 스머프 같은 사람이 있었다(입만 열면 남의 흉을 보는 사람도 있었는데 그 결이랑은 또 다르다). ‘이건 이래서 구리고, 저건 저래서 구리고’, ‘그런 사고방식이 말이 되느냐. 말은 그렇지만 속내는 이런 것 아니겠느냐’하는 식으로 언제나 자신 밖의 사람과 상황에 대해 평가만 늘어놓는 사람이었다. 초반에는 그가 솔직하고 유쾌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이 어떤 것. 누군가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는 지 밝히는 것은 꽤나 용기가 필요한 일이고 그 취향과 기준을 고백하는 것이 자신의 약점이 될 수도 있는 데 저렇게 쿨하게 늘어놓다니! 성격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대화의 주된 발언이 자기 자신 밖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한 평가이다 보니 들을수록 의아한 지점이 생겼다. 당신에게 평가할 자격이 있는지, 타인이 당신에게 평가 받아야 할 이유가 있는지, 평가할 자유가 있다고 해도 당신의 평가를 궁금해 하는 사람이 있는지 하는 것이었다. 심지어 그의 평가를 들으면 들을수록 그에 대한 인상 또한 '예리하고 유쾌한 사람이다' 라기 보다 ‘어딘가 모르게 편협하다’, ‘편협함을 자랑하는 태도가 참 멍청하다’까지 이어졌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난 뒤 몇몇 단정적인 말들에서 그가 타인에 대한 평가를 거침없이 내뱉을 수 있었던 까닭을 눈치 첼 수 있었다. 그 모든 것은 자신의 말이 정답이라고 여겨서 가능했던 것 이었다. 자기 말이 정답인 사람 곁에 다른 의견들은 오답처리 되기 마련이다. 그리고 자신의 의견이 오답이 되 는 대화를 좋아라할 사람은 없다. 그렇게 그는 자기주장이 뚜렷한 사람에서 편협한 사람으로 점차 다르게 기억 됐다. 중학생 때 유독 적이 없었던 한 친구가 떠오른다. 말수가 적어서, 자기주장이 강하지 않아서, 호불호가 없어서가 아니라 ‘편견’이 없어서 두루두루 모두와 잘 지내는 친구였다. 그는 어떤 친구들에게도 늘 같은 태도로 화답했다. 편견, 그러니까 그 편협함은 끊임없이 나를 위해 타인을 배척하는 수단이 된다. 진정한 세월의 지혜는 오히려 '편견 없음'에 가까울 거라 생각한다. 타인을 판단하는 가장 괜찮은 기준은 포용이 아닐까? 타인과 자신에 대해 사람은 언제나 ‘알 수 없음’ 한 줌은 가지고 사니까. 견고한 기준은 편협한 생각의 방증일지도 모른다(pp. 178-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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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소개
    2024-03-31

실시간 오피니언 기사

  • 【단상】 2023년을 보내며...감사하고 감사하다!
    38년전인 1985년, 총신대 신학과 입학을 위한 면접에서 면접관이 좋아하는 성구를 외워보라고 했다. 그때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6-18)”를 말했던 것이 지금도 기억난다. 아마 면접이라는 떨리는 상황에서 생겨난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 성구는 대부분의 신자들이 좋아하고 암송하는 구절이다. 그때 왜 이 구절이 생각났는지는 모르겠다. 이후 자주 이 구절은 기억 속에 떠 올랐다. 한해를 마무리하는 시점에 또다시 이 구절이 떠오름에 감사하다. 2023년에 다양한 일들이 있었다. 좋았던 일도 있었고 나빴던 일도 있었다. 그러나 그 모든 과정을 거쳐 지금 시간에 이르렀기에 감사하다. 나빴던 일들도 언젠가 협력해 선을 이룰 것이라고 믿기에 그 또한 감사하게 생각한다. 변화를 싫어하고 안정지향적이기에 교회 개척은 생각해 본적도 없이 부목사를 거쳐 담임목회에 나서 15년간 목회를 하다 중단되고 생각지 않은 언론인의 길을 가고 있다. 이 과정에서 목회를 했으면 만나지 않았을 다양한 일들을 경험했다. 때로 힘들고 황당했지만 그래도 결론은 은혜였고 감사였다. 이제 몇시간 남지 않은 올 한해 2023년을 돌아보고 또 은혜와 감사로 마무리 하게 되어 감사하다. 인생에 원치않던 급변침이 있었지만 침몰하지 않고 미지의 길로 가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내년 말에도 또 다시 은혜와 감사의 마무리가 있을 것을 기대해 본다. 아듀 2023년!
    • 오피니언
    • 칼럼
    2023-12-31
  • 【북토크】 배가 고파야 예술 할 수 있나?
    배고파도 예술인은 예술인의 “가오”를 먹고 사는데 최영미는 그렇지 않다. 시인이기 전에 생활인으로서 책을 출간하거나 원고를 기고하거나 강연을 통해 “생활비”를 벌어 먹고 사는 시인의 고단함에 대해 진솔하게 말했다. 혹시 책을 낼 계획이 있다면 참고할 수도 있고, 먹고사는 일의 신산함을 간접적으로 느껴볼 수 있기에 책에 있는 내용을 소개해본다. 성공한 사람만 아니라 실패한 사람에게서도 우리는 무언가 배울 게 있다. 내가 저지른 황당한 실수들을 여러분은 피하시기를 빌며 경험담을 조금 늘어놓겠다. 1994년에 첫 시집을 출간하며 나는 창작과비평사와 계약서를 쓰지 않았다. 당시엔 그런 관행이 아예 없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두 번째 시집 이후에 내가 출간한 책들은 계약서를 썼다. 내 글이 해외에서 번역되거나 노래나 영화로 만들어 질 경우에 이익의 분배비율에 집착해 상대의 감정을 상하게 했던, 나는 바보였다. 6:4를 7:3으로 바꿔달라고 요구해 내 의지를 관철시켰지만 그 과정에서 출판사에 좋은 인상을 주지 못하고 담당자를 피곤하게해 그들의 마음이 내게서 떠나는, 내게 불리한 결과를 낳았다. 나의 충고 1. 계약서를 쓰되 계약서에 너무 얽매이지 마라. 비율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그들이 (출판사 대표나 편집자가) 내 책에 얼마나 공을 들이는가가 더 중요하다. 한국사회에서는 실력보다 인간관계가 성공을 좌우한다. 그들이 나를 좋아하지도 않고 내 작품을 높이 평가하지 않는다면 책은 내주더라도 그 책이 잘 될 리가 없다. 2. 계약서는 계약 당일에 가서 읽지 말고 미리 이메일로 초안을 보내 달라고 하라. 집에서 혼자 천천히 검토하며 금액은 물론 지급시기, 계약 기간 같은 중요한 사항들을 꼼꼼히 챙겨야 한다. 계약 당일에 옷차림은 너무 분방하지 않게 약간 격식을 차려입는 게 좋다. 예술가가 이런 시시콜콜한 것들을 신경 쓰냐고 반문할 수도 있으나 옷차림이 제멋대로이면 행동도 제멋대로인 경우를 여러번 경험했다. 3. 약간의 예외는 있겠지만, 계약 기간은 짧을수록 예술가에게 유리하다. 상대방과 뜻이 맞지 않아 계약을 해지하고 싶은데 계약 기간이 길어 5년 10년 마냥 기다려야 한다면 얼마나 속이 터질 일인가. 출판 계약의 경우, 초판 5년에 이후 5년마다 쌍방의 해지의사 표시가 없으면) 자동으로 연장되는 게 업계의 상식인데, 너무 긴 것 같다. 3년으로 하되 그 뒤 1년마다 해지 가능한 조항을 넣는 게 합리적이지 않나. 보기 싫은 표지를 어떻게 5년을 참나. 4. 큰돈이 걸린 중요한 일이 아니라면 계약서를 생략하고 이메일로 대신해도 된다. 일을 할 때마다 무조건 계약서를 쓰자고 덤비지 마라. 계약서보다 이메일이 열람도 쉽고 관리도 편리하다. 5. 계약서들을 종류별로 수납해 기억하기 쉬운 곳에, 생각나면 꺼내보기 쉬운 곳에 두시길. 6. A라는 거래처와 관계가 좋다고 A만 믿고 따르지 말고 거래처를 다양하게, 적어도 두 곳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시길. 지금 해가 쨍쨍하지만 언제 천둥번개가 칠지 모르니 전속계약이나 너하고만 작업한다는 내용의 배타적인 계약은 하지 마시길. 7. 내가 먼저 아쉬워 계약할 때보다 그들이 내게 먼저 제안할 때 내 몸값을 더 높일 수 있다. 누군가 당신에게 어떤 제안을 한다면 일단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감사해야 한다. 8. 얼마를 줄지를 처음부터 밝히지 않고, 돈 이야기를 하지 않고 작품을 의뢰하거나 강의를 부탁하면 정중히 거절하라. 강연을 요청하며 강연료를 말하지 않는 건 예의가 아니다. 돈 이야기하는걸 두려워 마라. 언젠가 미지급 원고료를 받으려 전화했는데 "시인에게서 이런 (돈 달라는) 전화 받고 싶지 않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시인이 시시하게 돈 이야기하지 않게 당신들이 미리미리 챙겨줘야지! 9. 거절할 때는 부드럽게, 상처받지 않게 거절해야 뒤탈이 없다. 10. 배가 고파야 예술을 한다는 말은 믿지 마라. 배가 고프면 아무 생각이 안 나서 창의력도 감퇴한다. 자신이 원하는 작업을 하며 예술가로 살아가려면 돈이 있든가 후원자가 있어야 한다. 월세를 걱정하며 어떻게 긴 호흡의 장편소설을 쓸 것인가. 계약의 기술 혹은 계약의 예술에 정통해야 예술가로 대접받는다(pp. 156-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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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2-31
  • 【북토크】메신저가 메시지다
    ‘지식 소상인’을 자처하며 활발하게 글쓰기를 하는 작가 유시민이 2015년에 쓴 『유시민의 글쓰기 특강』을 읽으면서 크게 공감한 것 세 가지를 말하고자 한다. 첫째, 왜 우리는 글쓰기를 배워야하는가? 글을 써야하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많은 카톡과 문자를 수시로 주고 받는다. 개인적인 사소한 글이지만 이것도 결국 글쓰기이다. 학창 시절에는 학업을 위해 글쓰기가 필요하고, 사회에 나와서는 직장생활을 위해 글쓰기가 필요하다. 이처럼 글쓰는 것은 삶과 땔 수 없다. 이에 대해 유시민은 이렇게 말한다. 그런데 글쓰기는 두 가지 특별한 점이 있다. 바로 그 특별함 때문에 사람들은 글을 잘 쓰고 싶어 하고, 또 글쓰기를 두려워한다. 첫째, 세상이 글쓰기를 요구한다. 우리는 때때로 쓰기 싫어도 글을 써야만 한다. 학업과 진학, 취업을 위해서다. 직장에서 일을 하면서도 글을 써야 한다. 정보통신혁명으로 인해 인터넷 메신저든 전자우편이든 글로 소통하면서 일상 업무를 처리하는 전문 직종이 계속 늘어나고 있다. 글을 잘 쓰지 못하면 사는 데에도 지장이 많다. 둘째, 사람들은 글 잘 쓰는 이를 부러워하며 심지어는 우러러본다. 글쓰기 실력을 단순한 기능이 아니라 지성의 수준을 보여주는 지표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글이 글쓴이의 지능, 지식, 지성, 가치관, 삶의 태도를 보여준다는 것은 다툴 여지가 없다. 글을 잘 쓰려면 일단 표현할 내면의 가치가 있어야 한다. 아는 게 많아야 한다. 다양한 어휘와 정확한 문장을 구사할 수 있어야 한다(p 258). 둘째, 그런데 글은 글 쓴 사람과 분리할 수 없다. 글이 힘을 갖기 위해서는 자기가 쓴 글처럼 사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래서 설교학에서는 ‘설교자인 메신저와 설교의 내용인 메시지는 분리할 수 없다’, ‘메신저가 메시지’라는 말을 한다. 매국노 이완용이 아무리 애국에 대해 그럴듯한 글을 써도 그 글은 아무 가치가 없는 것과 같다. 유시민이 이것을 언급한 것을 보면서 “큰 깨달음”을 얻었다. 기자가 아무리 그럴듯한 주장의 글을 써도 그의 삶이 그렇지 않으면 외면받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자각했다. 기자가 아무리 좋은 내용의 글을 써도 그 기자가 어떤 사람이라는 것을 아는 독자는 그 글을 외면할 것이다. 내게 있어 이것은 이 책을 읽고 얻은 가장 큰 수확이었다. 이에 대해 유시민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기술은 필요하지만 기술만으로 잘 쓸 수는 없다. 잘 살아야 잘 쓸 수 있다. 살면서 얻는 감정과 생각이 내면에 쌓여 넘쳐흐르면 저절로 글이 된다. 그 감정과 생각이 공감을 얻을 경우 짧은 글로도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세상사에 영향을 줄 수 있다. 기술만으로는 훌륭한 글을 쓰지 못한다. 글 쓰는 방법을 아무리 열심히 공부해도 내면에 표현할 가치가 있는 생각과 감정이 없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훌륭한 생각을 하고 사람다운 감정을 느끼면서 의미 있는 삶을 살아야 그런 삶과 어울리는 글을 쓸 수 있게된다. 논리 글쓰기를 잘하려면 합리적으로 생각하고 떳떳하게 살아야 한다. 무엇이 내게 이로운지 생각하기에 앞서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지 고민해야 한다. 때로는 불이익을 감수하고서라도 스스로 옳다고 생각하는 원칙에 따라 행동할 수 있어야 한다. 기술만으로 쓴 글은 누구의 마음에도 안착하지 못한 채 허공을 떠돌다 사라질 뿐이다(pp. 261-164). 셋째, 글쓰기를 잘 하기 위해서는 결국 노력이 필요하다. 글쓰기를 힘들어 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 사람들에게 유시민은 다음과 같은 방법을 제안한다. 글쓰기에는 철칙(鐵則)이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 많이 읽어야 잘 쓸 수 있다. 책을 많이 읽어도 글을 잘 쓰지 못할 수는 있다. 그러나 많이 읽지 않고도 잘 쓰는 것은 불가능하다. 둘째, 많이 쓸수록 더 잘 쓰게 된다. 축구나 수영이 그런 것처럼 글도 근육이 있어야 쓴다. 글쓰기 근육을 만드는 유일한 방법은 쓰는 것이다. 여기에 예외는 없다. 그래서 철칙이다(p 62). 15년간 담임목회를 하다 “어쩌다 기자”가 된 나로서 다행인 것은 어렸을 때부터 책 읽기를 좋아했다는 것이다. 지금도 꾸준히 다양한 책을 읽고 있다. 이면은 글을 써야하는 기자로서 다행이다. 또한 기자는 글을 쓰는 사람이다. 다행히 목회할 때 주로 원고 설교를 했기에 글쓰는 훈련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전문 기자로서 글을 써야하기에 매일 한 건 이상의 글을 쓰는 것을 목표로 글을 쓰고 있다. 행사가 있다면 취재 기사를 싣겠지만 늘 행사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때는 이처럼 책 읽은 것에 대한 기사를 싣든지 아니면 수필, 개인 생각 등 다양한 글을 쓸려고 노력한다. 이 모든 것이 더 좋은 글을 쓰기 위한 기자의 몸부림이라고 생각하고 어여삐 봐주시기를 바란다. 나는 독서가 취미라 다행이다. 취재 외에 밖으로 나가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그저 집 안에서 이 책 저 책 읽는게 좋고, 또 도서관에서 대출 신청하면 집 근처 수유역까지 배달해 주니 책 사는데 돈 쓸 필요도 없고, 책둘 공간도 없기에 매번 책을 대출해 읽으면서 즐거운 생활을 하고 있다. 이또한 감사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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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소개
    2023-12-30
  • 【단상】 그래도 자살은 안된다!
    배우 이선균 씨가 자살했다. 향년 48세이다. 마약 투약 혐의로 검찰 조사를 받던 중에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이다. 유명 배우였기에 자신의 이름이 뉴스에 언급되고, 검찰 조사 받는 것으로 심적인 고통이 컸었나보다. 그는 유서를 남겨두고 자신의 차에 번개탄을 피워 자살했다. 자살을 시행하면서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절망하며 좌절했을 것이다. 죽음 외에는 고통과 비난을 피할 방법이 없다고 생각해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마지막 순간에 그는 얼마나 고독했을까? 절규하며 생을 마감했을 것 같다. 그래도 자살은 안된다. 살아야한다. 과거 연예인 중에 마약이나 대마초로 비난을 받은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니다. 그럼에도 그들 중 일부는 끝내 재기했고, 나머지는 조용히 다른 삶을 살고 있다. 마약이 죽을 죄는 아니다. 적어도 남을 헤치지는 않기 때문이다. 약물 중독으로 자신의 삶을 파괴할 뿐 강도나 살인처럼 타인에게 해를 주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사회의 건전성을 위해 우리나라는 마약을 금지하고 있다. 그러나 외국에는 마약을 허용하는 경우도 있다. 마약보다 더한 죄를 짓고도 뻔뻔하게 사는 인간이 한둘이 아닌데 고인은 심성이 약했나보다. 그래서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 같다. 그렇다고해도 자살은 해결책이 아니다. 그의 자살로 인해 그의 많은 팬들과 가족들은 평생 가슴에 상처를 안고 살아야 할 것이다. 우리나라의 자살률은 여전히 OECD 1위이다. 10만명 당 24명, 39분마다 한명씩 자살한다. 배우 이선균 씨는 유명인이기에 뉴스로 알려졌을 뿐 오늘 하루도 수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그만큼 세상 살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생명을 주러 오신 주님과 교회가 그들에게 희망이 될 수 없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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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논단
    2023-12-27
  • 【북토크】좋은 문장을 쓰는 요령
    기자가 되어서 지금까지 늘 느끼는 부담감은 기사를 잘 써야한다는 것이다. 행사 기사야 순서대로, 담당자가 말한대로 받아 적으면 된다지만 논설, 단상, 칼럼 등 다양한 형태의 글을 써야한다. 그때마다 글 쓰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절감한다. 그러나 글은 다 쓴 다음에 만족감을 준다. 그래서 계속해서 글을 쓸려고 노력하는지도 모른다. 이전에도 글 쓰는 것에 대한 책을 여러권 읽었는데 전업 기자가 되었으니 더 글쓰는 공부가 필요하다. 쇠를 두둘겨 날카로운 칼을 만드는 대장장이처럼 글의 칼을 갈고 다듬어야하는데 그 길이 멀고도 멀 것이다. 그러나 해볼만하다. 다음은 책에서 건져낸 인용문이다. 좋은 기사를 쓰는 데 도움이 되는 말로 자주 언급되는 내용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가능하면 능동형 동사를 써라 - 독자는 적극적인 글을 좋아한다. 특히 동작이 있는 글이 좋다. 그리고 수동형보다는 능동형이 구문도 더 간결하다 문장을 짧게 써라 - 문장이 길면 당연히 이해도 어렵다. 한 문장 안에 여러 개의 주어가 사용되고 동사와 형용사도 많게 된다. 국어학자 박갑수 교수는 신문 기사는 한 문장에 대략 50자 정도만 쓰도록 하는 편이 바람직하다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일본에서도 45~50자 정도가 적절한 기사 문장의 길이로 통한다고 한다. 또한 미국의 기사 작성 교재들은 기사 문장의 평균 길이는 25단어 정도가 적당하다고한다. 그러나 저명한 언론인들의 글을 보면 대체로 문장이 이러한 교과서들의 권유보다도 짧다. 복문과 중문은 피하고 단문을 써라 - 주어와 동사는 서로 가까이 있어야 좋다. 수식어도 떨어져 있으면 수식의 대상이 불분명해진다. 복문이나 중문 등 전하는 내용이 한 문장 안에 뭉뚱그려 있는 글은 읽어도 그 의미가 명확하게 전달되지 않는다. 글 호흡에 변화를 주라 - 긴 문장을 반드시 써야 할 경우가 있다. 그럴 때는 긴 문장 다음 문장은 최대한 짧게 쓰는 편이 좋다. 그러면 독자는 지루해하지 않는다. 그러나 긴 문장이 계속 같은 수준의 복합적 구조로 되풀이되면 읽는 사람은 싫증을 내게 된다. 전문 용어의 사용을 피하라 - “절대로 외래어 표현이나 학술 용어 또는 특정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만 쓰는 전문 용어를 쓰지 마라. 특히 평범한 일상용어로 표현이 가능한 경우는 더욱 그러하다.” 『1984년Nineteen Eighty-Four』(1949)의 저자 조지 오웰George Orwell의 말이다. 최대한 보통 사람이 쓰는 일상 언어를 사용해 글을 쓰라는 충고다. 그러나 우리가 접하는 신문 기사에는 부담스런 표현들이 빈번하게 등장한다. 시청각 감각을 자극하도록 써라 - 다음은 어니스트 헤밍웨이Ernest Hemingway가 「뉴욕타임스」 신문을 위해 스페인 내전을 취재할 때 송고한 기사의 일부다. There is a rifle fire all night long. The rifles go "tacrong, carong, craang, tacrong", and then a machine gun opens up. It was a bigger caliber and is much louder - "rong, cararing, rong, rong." 다양한 의성어를 사용해서 전쟁터의 분위기를 미국에 있는 독자들에게 생생하게 전하려는 의도가 잘 드러난 기사다. 세부 묘사를 잘하라 - 세부 묘사가 없는 기사는 건조하다. 추상적인 개념들로만 채워진 문장은 독자의 주의를 잡기 어렵다. 기사의 맛은 어떻게 생긴 사람이 어떠한 정황에서 무엇을 어떻게 했는가를 독자가 이해할 수 있도록 전달하는 데 있다. 그러려면 세부 사실에 대한 관찰과 기록은 필수적이다(pp. 78-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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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소개
    2023-12-27
  • 【단상】 총회임원...사소한 직책은 없다
    지난 108회 총회 전 임원선거 정견발표에서 한 후보가 자신의 직책이 영향력이 없음을 공개적으로 토로한 적이 있었다. 그때도 듣기 거북했는데 또 한 임원이 공개적인 자리에서 비슷한 말을 해서 한마디 해야할 것 같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총무 포함 10명의 임원 중 중요하지 않은 임원은 하나도 없다. 물론 총회장이 총회를 대표하고, 어떤 사안을 결정하는데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기는 하나 모두가 다 총회장이 될 수는 없다. 나머지 임원들은 각자에게 주어진 역할을 하면 된다. 어차피 자기가 출마한 임원 자리가 어떤 역할을 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출마한 것이 아닌가? 모르고 출마했다면 말도 안되는 것이다. 수천만원의 총회발전기금을 내고 당선되기 위해 피말리는 선거운동을 하는데 정작 자기가 할 일이 뭔지도 몰랐단 말인가? 그리고 막상 당선된 후 “이럴줄 몰랐다”고 하면 믿고 찍어준 총대들은 뭐가 되는가 말이다. 총회 임원 중 어느 직책도 사소하거나 미미한 것이 없다. 임원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면에서 임원은 정말 선택받은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각자 할 일이 있다. 그 일을 하기 위해 임원이 된 것이고, 그 일을 맡기기 위해 총대들이 뽑아준 것이다. 부임원일 때 열심히 배우고, 정임원이 되면 그 역할을 감당하면 된다. 임원은 정, 부 임원일 때 다양한 소위원회에서 활동을 하고 임원 후에도 선관위를 비롯한 여러 부서에서 활동하게 된다. 비근한 예로 회록서기는 당연직으로 다음 회기에 선관위 심의분과장을 한다. 회록서기를 했기에 그 직책을 맡는 것이다. 그런데 심의분과장으로 인해 현재 총회가 얼마나 시끄러운가 말이다. 이것을 보면서도 자기가 맡은 임원직이 중요하지 않다고 발언할 수 있겠는가? 주님은 뭐라고 하셨는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눅 16:10). 맡은 직분이 사소하다고 말하지 말고 각자 맡은 직분에 더욱 충실한 임원들이 될것을 부탁한다. 계속 지켜볼 것이다.
    • 오피니언
    • 논단
    2023-12-26
  • 【단상】 목회세습...최순실과 정유라가 떠오른다
    과거 박근혜 전 대통령 시절 국정농단의 주범 최순실의 딸 정유라는 모두의 공분을 살만한 글을 썼다. “능력 없으면 니네 부몰 원망해” 목회세습을 볼 때마다 기분 나쁘게 최순실과 정유라가 떠오른다. 어미가 국정을 주무르는 댓가로 주어진 많은 특혜를 누리며 공주처럼 살았던 자가 정유라가 아니던가? 최근 합동 교단내 두 교회가 목회세습에 성공했다. 큰 잡음없이 아버지는 원로가, 아들은 위임목사가 되는 예식을 무사히 치러냈다. 합동 교단에는 세습 금지 규정이 없다. 그래서 암암리에 크고작은 교회들이 세습을 하고 있다. 그렇다고 모두 세습에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목회 말년에 세습에 실패해 교회가 쑥대밭이 되고 목회를 말아먹는 경우도 왕왕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습을 꿈꾸고 감행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속된 말로 남주기 싫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말로는 주님의 은혜로 목회했다고 하지만 자기가 노력해서 이룬 목회지를 남에게 주기 싫어 아들에게, 사위에게 넘겨주는 것이다. 그래서 타교단에서는 3대 세습을 한 교회도 있다. 세습을 감행하기 위해서는 미리 치밀한 계획을 세운다. 교회 재정으로 자식들을 해외유학 보낸다. 그정도 실력이 안되면 아는 선교사가 있는 선교지로 보내 해외 물을 먹게 만든다. 이처럼 교회 돈으로 자기 자식을 최대한 교육 시킨 후 “봐라 이만한 스펙이 있는 목사가 어디 있느냐?”하며 자기 자식과 사위를 후임자로 디민다. 그러면 양같이 순한 교인들은 담임목사가 교회를 개척해서 고생했다는 이유로, 큰 교회로 만들었다는 이유로 그 안을 받아들인다. 그러면 치밀한 세습 계획은 완성이 된다. 종종 취재를 가면서 알게된 부목사들이 있다. 그들 중에는 40대 후반인 경우도 있다. 그들에게 “교회에서 안보는 날이 빨리 와야할텐데”라고 말해준다. 빨리 담임목회하러 나가라는 말이다. 그러면 계면쩍은 웃음을 보인다. 담임으로 나가고 싶어도 갈 교회가 없다는 것이다. 기독신문을 보고 담임지원하는 것도 쉽지 않다. 수십 수백통의 이력서가 쌓이기에 섣부르게 이력서를 지원했다가는 담임목사에게 찍혀 사임 압박을 받을 수 도 있다. 혹시 담임목사가 목회지를 소개해주면 좋은데 그도 여의치가 않다. 이래저래 세월만 가서 어느덧 50줄을 바라보는 부목사들이 하나둘이 아니다. 그러면 교회에서는 슬슬 사임 압박을 한다. 문제는 나이 많은 부목사를 받아줄 교회가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나이든 부목사의 현실인데 세습 시켜주는 아버지를 둔 아들 목사는 얼마나 좋을까? 교회 돈으로 일찍 유학해 스펙을 갖췄으니 경쟁력도 있고, 세습을 반대해 일부 교인들이 떠나도 큰 분란만 없으면 무혈입성을 하니 이 얼마나 편한 일인가? 교회란 무엇인가? 세습한 목사에게 묻고 싶다. 교회는 주님의 것인가? 당신의 것인가? 교회가 주님의 것이라면 어찌 자식에게 세습할 생각을 할 수 있는가? 교인들에게 주어진 새로운 목사를 선택할 권한을 무시한 채 어떻게 세습을 시킬 수 있는가? 세습 목사와 그 아들에게서 최순실과 정유라를 떠 올리는 것은 지나친 비약인가? 피해망상인가?
    • 오피니언
    • 논단
    2023-12-25
  • 【북토크】우리는 조지 오웰을 제대로 알고 있는가?
    조지 오웰은 전세계적으로 그리고 우리나라에도 잘 알려진 1940년대 작가이다. 그의 책 『동물농장』과 『1984』는 여전이 많이 읽히고 있는 그의 대표작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의 책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가? 그에 대해 이 책을 쓴 저자는 머리말에서 『동물농장』의 우리말 번역에 대해 놀라운 이야기를 알려준다. 이 책을 펴든 사람이면 누구나 오웰이 『동물농장』 과 『1984』를 썼다는 것쯤은 알 것이다. 그러나 영어로 쓰여진 『동물농장』이 세계에서 최초로, 다른 외국어가 아닌 우리말로 번역되었다는 사실은 모를 것이다. 그것도 원서가 나온 지 3년 만인 1948년에 우리말로 번역되었고, 1948년에 쓴 『1984』도 그후 곧 번역되었다는 사실은 더욱 모를 것이다. 그래서 오웰은 우리와 특별한 인연을 갖는다. 그러나 그것을 반가워 해야 할까? 아니면 악연이라 해야 할까? 더욱이 미국 해외정보국이 ‘반공 투쟁’의 일환으로 오웰의 작품을 번역 출판하게 하였으며, 이를 위해 미국 정부가 작품의 판권료까지 지불했다는 것은 앞의 사실과 함께 지금까지 우리나라에 전혀 알려진 적이 없다(p. 7). 이처럼 조지 오웰의 책은 처음부터 왜곡된 방향으로 읽혀졌다. 그는 단지 공산주의를 반대한 작가가 아니다. 그는 인간이 인간다움을 누리며 살 수 있는 사회를 꿈꿨던 작가이다. 그래서 국가와 사회가 전체주의, 공산주의, 자본주의 등에 매몰될 때 인간이 어떻게 소외되는가를 작품으로 밝힌 것이다. 이 지구상에는 다양한 국가 형태가 있는데 그 어느 것도 완벽하지 않다. 사회주의, 공산주의, 자본주의 모두 많은 문제를 드러내고 있다. 그런면에서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당연함을 누리는 그 날이 올 때까지 1950년에 세상을 떠난 그의 책은 여전히 읽혀져야할 것이다. 그러나 바르게 읽혀져야한다. 다음은 책 인용문이다. 물론 나는 기본적으로 러시아혁명에 대한 풍자를 의도했다. 그러나 그것이 더욱 큰 교훈 '그런' 종류의 혁명(무의식적으로 권력을 갈망하는 사람들이 지도하는 음모적인 폭력 혁명)은 지배자를 바꿀 뿐이라고 하는 교훈만을 포함하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것에서 끌어내야 할 교훈은, 혁명에 의해 근본적인 개선이 가능해지는 경우는, 대중이 경계심을 갖고 지도자가 그 역할을 다하면 바로 추방하는 방법을 알고 있는 때뿐이라고 생각했다. 이야기의 전환점은 돼지가 우유와 사과를 자신들만의 것으로 삼은 때였다고 생각되리라(크론슈타트 요새의 수병들이 탄압받은 것에 대응된다). 만일 다른 동물들이 그 시기에 확고하게 반대했다면 잘 되었으리라. 내가 현재의 상태를 옹호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것은 그들이 비관적이 되어, 독재나 자유방임적인 자본주의밖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전제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말하고자 한 것은 '스스로 하지 않으면 혁명은 불가능하다는 것, 자비에 가득 찬 독재 체제 따위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pp. 278-279). 오웰은 1950년에 죽었다. 그후 반세기 동안 그에 대해 끝없는 논쟁이 제기되었으나, 그런 논쟁에 무관하게 그의 작품은 여전히 세계적으로 읽혀지고 있다. 우리에게는 비록 미국 정부에 의해 읽기를 강요당한 최초의 쓰라린 역사가 있지만, 그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여전히 읽히고 있다. 우리가 지금까지 보아왔듯이 오웰은 사회주의자이고, 그의 모든 책은 사회주의를 위한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사회주의라고 하는 것은 소련이나 중국 또는 북한 등 이미 존재했거나 아직도 존재하고 있는 사회주의는 아니다. 그는 그 어떤 실존 사회주의에 대해서도 명백히 반대했다. 그것들은 사회주의가 아니라고 하면서. 따라서 그의 작품이, 특히 『동물농장이나 『1984년』이 그런 관점에서 읽혀져야 하나, 더욱 중요한 점은 그가 결코 자본주의에 찬성하지 않았다고 하는 점이다. 그는 단 한 번도 자본주의를 찬양한 적이 없다. 물론 그의 사회주의는 맑스주의에 대응될 정도의 체계적인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인간의 인권이 중시되는 반독재, 반계급, 반차별의 사회를 그가 추구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리고 그는 그러한 악에 대항해서 싸우는 것이 인간의 의무라고 생각했고, 완전한 이상 사회가 아니라 보다 나은 사회를 위해 싸울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여전히 읽히고 있고, 앞으로도 여전히 읽힐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pp. 319-320).
    • 오피니언
    • 책소개
    2023-12-25
  • 【사설】 오광춘 회장의 전장연 미래는 밝을 것이다
    지난 12월 21일 제53회기 첫 전국장로회연합회(회장 오광춘 장로, 이하 전장연) 전국임원회의 및 기도회가 오전 11시 새로남교회(오정호 목사 시무)에서 있었다. 예년과 달리 회의는 오전 예배와 축사 등을 끝내고 중식 후 하는 것으로 했다. 오 회장은 회의를 충분히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회의는 총 30여분간 했다. 첫 회의라 사업계획, 예산 등 민감한 주제를 다뤄야했다. 이때 특별위원장, 부위원장, 역원, 실행위원 선정의 건으로 여러 의견이 오갔다. 인원 구성에 있어 지역 안배를 해야한다는 주장이 있었다. 서로 각자의 지역을 위해 발언하는 것이라 예민할 수 있는데 오 회장은 이 문제를 원만하게 풀어 회원들의 동의를 얻어냈다. 앞서 오 회장은 예전과 다른 여러 사업 계획을 소개하면서 먼저 자신이 그 일을 위해 호주머니를 열 것을 약속했고 자원자들의 헌신으로 감당할 것을 말했다. 이에 회원들은 아낌없는 박수로 호응했다. 결국 아무탈 없이 회의는 마무리 됐다. 그동안 회의를 취재가면서 고성이 오가는 것도 많이 보고, 감정이 격해져 막말을 하는 것도 많이 봤다. 도대체 이 사람들이 목사와 장로가 맞는가하는 의문이 들 때가 많았다. 그래서 영상 취재를 해놓고 남부끄러워 유튜브에 올리지 못하고 버린 것도 많았다. 그런데 이번 전장연 회의는 그렇지 않았다. 그래서 취재하면서도 마음이 편했고 굳이 이에 대한 소감을 밝히는 것이다. 무엇보다 이번 회기 오광춘 회장은 본인이 솔선수범하고 헌신할 것을 다짐했다. 이에 회원들이 지지를 보내는 것이다. 그리고 어떤 안에 대해 이견이 있을 때 자기 주장을 먼저 하지 않고 발언할 기회를 주고 원만하게 결론을 도출하기에 큰 충돌없이 회의가 진행됐다. 이 또한 좋은 모습이다. 그리고 증경회장들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자세로 대하기에 소위 “괘씸죄” 논란을 피해갔다. 앞으로도 이러한 좋은 모습을 보여주어 다른 연합 단체에 본이 되는 전장연이 되기를 기대해 본다.
    • 오피니언
    • 논단
    2023-12-23
  • 【사설】 이이복 장로에게 미안하고 사과한다
    소위 선관위 1000만원 뇌물 수수 사건에 대한 감사부 보고서가 나왔다. 거두절미하고 먼저 이이복 장로에게 미안하고 사과한다. 명색이 기자라는 나도 이이복 장로를 의심했기 때문이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나랴”란 속담처럼 후보 통과를 위해 뇌물을 썼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취재 과정 중에 이이복 장로를 볼 기회가 있을 때 좋게 보지 않았다. “왜 뇌물 사건을 일으켜 총회를 어지럽히는가”하는 생각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감사부 최종 보고서는 나의 이런 생각을 완전히 뒤집었다. 감사부는 “이이복 장로에 대해선 혐의가 없다”고 판단했다. 대신 주홍동 장로에 대해선 이견 없이 선관위 뇌물 사건의 주범으로 지목했다. 기독신문에 의하면, 선관위원이었던 주홍동 장로는 이이복 장로의 후보 확정을 위해 이종철 목사에게 1000만원을 전달해 현역 선관위원이 개입된 초유의 뇌물 사건을 일으켰다. 또한 감사부는 심의분과장 이종철 목사도 선관위 뇌물 사건에 관여했다고 판단했다. 이종철 목사가 이이복 장로에게 소명 기회를 충분히 주지 않은 점, 이이복 장로와 주홍동 장로의 대질심문을 진행하지 않은 점, 이이복 장로에게 후보 탈락 통보를 하지 않은 점 등에 의도성이 있다고 판단했다. 아울러 감사부는 이종철 목사가 주홍동 장로에게 1000만원을 받은 것도 문제 삼았다. 애초에 이종철 목사가 1000만원을 받지 않고 주홍동 장로를 돌려보냈다면, 지금처럼 사건이 확대될 일이 없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이에 따라 감사부는 선관위 뇌물 사건은 이종철 목사와 주홍동 장로, 두 사람 간에 있었던 일로서 이들은 총회에 대한 신뢰를 실추시켰기에 이들에게 상응한 징계를 하는 게 필요하다고 임원회에 보고서를 올렸다. 앞으로 이 소란을 일으킨 이종철 목사와 주홍동 장로에 대해 총회가 어떤 식으로 징계할지를 지켜볼 것이다. 솜방망이 처벌이 아니라 신상필벌, 일벌백계의 강력한 징계가 있어야 총회 기강이 바로 선다. 필요하다면 민형사상의 처벌을 받도록 해야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이복 장로가 무고한 피해를 당했기 때문이다. 이 뇌물 사건으로 인해 이이복 장로는 후보 박탈을 당해 돌이킬 수 없는 명예 실추를 당했다. 또한 그가 속한 노회와 교회 그리고 가정에 큰 어려움이 있었다. 이것을 어떻게 돌이킬 수 있겠는가? 피해자가 당한 것만큼 가해자는 책임을 져야할 것이다. 그래서 민형사상의 처벌도 불사해야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이복 장로가 후보 탈락함으로써 그를 지지했던 총대들은 투표권을 행사하지 못했다. 경선에 나섰다면 당선될 가능성도 있지 않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렇다면 총회는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야하는가? 이이복 장로에게 충분한 보상과 사과를 해야할 것이다. 실추된 명예를 회복시켜야한다. 총회 산하기관인 선관위에서 벌어진 일이기에 연대책임을 피할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109회 장로부총회장으로 나설 수 있는 기회를 주어야 할지도 모른다. 이 사건에는 아직도 많은 의혹이 있다. 이 일에 배후가 있다는 소문이 떠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사건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제 시작이라고 볼 수도 있다. 계속해서 조사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적어도 이이복 장로는 혐의가 없는 것으로 나왔기에 다시 한번 그를 의심한 기자로서 공개적으로 사과한다. “이이복 장로님, 의심해서 죄송합니다”
    • 오피니언
    • 논단
    2023-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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