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15(수)
 
  •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순교로 맞선 주기철 목사
  • 신사참배 정책에 적극 영합해 영화를 누린 김길창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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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청산연구소(소장 양진우 박사)가 주최한 제1차 월례포럼이 『두 갈래 길 순교와 부일협력』이란 제목으로 6월 25일 오후 4시 30분 초이화평교회에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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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말하는 양진우 소장  

양 박사는 “우리는 일제치하에서 독립 후 청산되지 못한 일제의 잔재를 청산하기 위한 운동을 하고 있다. 이 일에 C헤럴드와 오마이뉴스 역사 전문 기자 등이 함께 하고 있다. 오늘 참석해 주셔서 감사하다”고 인사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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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럼 사회하는 김종성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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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하는 김승태 전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장 

김종성 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의 사회로 김승태 전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장이 강의했다. 김 전 소장은 "만약에 그 당시에 목사님들이 1945년 8월 15일에 해방될 거라고 생각했으면, 그걸 기대하고 믿었으면 그렇게까지 하지 않았으리라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일본제국주의가 무너지기를 기대하고 거기에 믿음을 갖는 역사의식이 있었다면, 그렇게까지 노골적으로 친일을 했겠느냐는 언급이다. 

김길창은 일제의 신사참배 요구를 마지못해 받아들이는 정도가 아니라 매우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친일인명사전> 제1권 김길창 편은 "1938년 9월 10일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부회장으로서 각 노회 총대들을 이끌고 평양신사에 참배했다"고 말한다. 신사참배는 일왕(천황)과 그 조상신인 아마테라스 오미카미 등에 대한 종교적 경외감을 표시하는 행위다. 일례로, 이세신궁에 대한 참배는 이곳에서 숭배되는 아마테라스 오미카미에 대한 신앙의 표시다. 일본이 기독교인들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한 것은 '하나님 대신 일왕과 그 조상신을 믿으라'고 요구하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그런 이치를 몰랐을 리 없는 김길창은 1938년에 '신사참배 투어'를 위한 일본 여행까지 조직했다. <친일인명사전>은 "같은 해 12월에는 장로회 총회장 홍택기, 감리교 신구총리사 양주삼과 김종우, 성결교 이명직 목사 등과 함께 일본에 건너가 이세신궁을 비롯한 일본 신궁들을 참배하고 돌아왔다"고 설명한다.

 

김길창이 벌인 일은 그 정도에 그치지 않았다. 김승태 전 소장은 "신사참배 문제가 대두된 이후에는 경남교구장으로서 적극적으로 신사참배를 주창하고 이에 반대하는 목사와 교인들을 일본 경찰과 결탁하여 탄압"하기까지 했다고 설명한다. 일본 국교의 대리인이 되어 신사참배 거부자들을 박해하는 일까지 벌였던 것이다. 김길창은 일제 경찰과도 수시로 접촉했다. 그가 신사참배 거부자들을 밀고했다는 의혹도 있었다. 1949년에 국회 반민특위 증인으로 소환된 일제 형사 장세권은 "김길창은 목사 중에도 제1인자인 거물 목사라, 경찰계에서도 소위 간부들과 연락이 빈번"했다고 증언했다. 그러면서 김길창이 경찰서 별실에서 간부들과 장시간 대화하는 일도 많았다고 진술했다. 그랬던 김길창이 해방 뒤에는 일본인들의 재산인 적산을 거둬들이는 일에 앞장섰다. "해방이 되자마자 그는 적산을 인수하여 교육사업을 확장하는 데 탁월한 재능을 발휘하였다"라고 김승태 전 소장은 말한다.

 

김 전 소장이 소개한 김길창 자서전의 한 대목은 인상적이다. 자서전에서 김길창은 "남들은 들뜬 해방의 기쁨에 도취하고 있을 때 나는 조용히 적산 부지로 된 교회 대지 150평을 평당 2000원으로 불하받기에 바빴다"고 회고했다. 그로 인해 김길창은 해방 뒤 교육계 거물로 거듭났다. 김 전 소장은 "1945년 동아대학교 설립에도 참여하여 이사장을 지내고, 학교법인 남성·대동·훈성·한성 등 4개의 재단을 설립하여 교육사업을 확장하였으며, 1962년에는 부산신학교를 설립하여 교장을 맡기도 하였다"라며 "이러한 재산과 사회적 영향력을 배경으로 교계에서도 수차의 경남노회장, 부산기독교연합회 회장, 한국기독연합회 회장을 지내기도 했다"고 설명한다.

 

반면, 순교자 주기철의 길은 험난했다. 신사참배를 거부한다는 이유로 수차례 구속되고 가족들이 목사 관사에서 쫓겨나는 속에서도 일왕에 대한 믿음의 표시를 끝끝내 거부했다. 일제 경찰이 심한 구타와 발길질을 가했지만, 그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한번은 매질하러 들어온 일제 경찰에게 "당신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이라며 "그때 당신은 이런 것들과 다른 죄들에 대해서 대답해야 할 것"이라고 의연하게 경고해 상대방이 고문을 중단하도록 만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만 47세 된 그의 육체는 가혹행위를 버텨내지 못했다. "1944년 4월 13일 건강이 악화되어 병감으로 이감되었다가 21일 부인 오정모 사모와 마지막 면회를 한 후 그날 밤 숨을 거두었다"고 김승태 전 소장은 말했다.

 

김길창 같은 친일 목사들로 인해 일제강점기 말기에 한국 교회 상당수는 일왕을 믿는 종교로 변질됐다. 이런 한국 기독교가 해방 뒤에 살아난 것은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의 지원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주기철 목사 같은 이들이 제국주의를 거부하는 모범을 남겼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는 한국 기독교가 잘되려면 김길창이 아닌 주기철처럼 살아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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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체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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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갈래 길 순교와 부일협력』, 일제청산연구소 포럼 개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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