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11(토)
 
  • 상담받은 것이 내게 큰 유익이었다. 심리, 상담 관련책을 읽는 것과는 다른 차원이다

“혹시 이전에 교통사고를 당한 적이 있나요?” 정신과 의사가 내게 물었다. 1992년 말이거나 1993년 초 나는 정신과를 찾아갔다. 그 당시 살던 집은 양쪽 4차선 도로 옆이었는데 어느날부터 갑자기 차 소음이 너무나 크게 들렸다. 그동안 그 집에 여러해 살면서 그런적이 없었다. 그래서 이상하다싶어 우선 정신과를 찾았던 것이다. 마땅한 진료 과목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정신과 의사는 그 질문 외에도 “혹시 가족 중에 교통사고를 당한 적이 있느냐?”는 것도 물었지만 1983년 아버지가 크게 교통사고를 당하시기도 했지만 그것은 이미 10년 전 일이었다. 결국 별다른 이유를 찾을 수 없어 간단한 약 처방을 받았지만 먹지는 않았다.

 

하긴 나는 소음에 예민한 편이다. 그래서 기계식 손목시계도 잘 때는 초침 소리가 들리지 않도록 멀리 두고 잤다. 벽시계도 다 무소음으로 구입했다. 그런데 아마도 1993년 4월 군목을 위한 입대를 앞두고 알게모르게 신경이 쓰여 평상시와 같은 집 옆 도로 소음이 더 크게 들렸는지 모르겠다. 이후 군입대해 경북 영천에서 3개월간 군사훈련 받을 때 조용해서 오히려 좋아했던 경험이 있었다.

 

우리는 흔히 정신과는 “미친”사람이 간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몸이 아프면 병원에 가는 것이 당연하듯 마음과 정신이 아프면 정신과에 가서 상담도 받고 필요하면 약물 처방도 받아야한다.

 

대학 때 상담과 심리에 관련된 책을 많이 봤다. 그리고 한때 상담학을 전공할려고도 했다. 왜 그랬을까? 내게 풀어야할 숙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아버지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내가 어렸을 때 아버지는 술을 드시면 어머니와 싸우는 주사를 부렸다. 4남매 앞에서도 주사를 부렸다. 그래서 아버지가 술을 드시고 오시는 날엔 집안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때로 그냥 주무시기도 했지만 대부분 애끚은 어머니에게 트집을 잡아 험악한 말과 행동을 하셨다. 이때 큰 누나는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편이었고 나는 무서워 도망갔다. 이것이 지금의 내 “회피성향”을 만들었는지 모른다. 내가 3년전 교회 문제로 교인들과 갈등할 때 옳고 그름을 떠나 7개월만에 관둔 이유도 이 내 성향 때문이다. 내가 관둔다고 했을 때 주변 사람들은 잘못한 것이 없으니 끝까지 싸우라고 했다. 아마 내가 적극적이고 과감했다면 반대편 교인들을 다 내쫓고라도 지금도 목회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내 성향이 아니다. 그래서 내가 포기 했을 때 나와 함께 반대편 교인들과 싸웠던 한 권사는 크게 실망해 나를 외면했다. 지금도 그 권사를 생각하면 미안하고 마음이 아린다.

 

나는 지금도 어느 싸늘한 밤 부모님의 부부싸움을 피해 도망갔던 동네 놀이터의 그 서늘함을 잊지 못한다. 그것은 자주 내 기억의 수면위로 떠오른다. 결코 치유될 수 없는 마음의 큰 상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은 목회를 그만두고 3년전부터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다. 그러면 아버지와의 사이는 어떻게 되었을까? 진작에 아버지를 용서했다. 신대원 이후인지, 결혼해서 인지 어느때부터 아버지를 이해하고 용서했다.

 

아버지는 아버지(내게 친할아버지)의 얼굴을 모른다. 태어나신 후 1년도 안되어 할아버지께서 병으로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아버지께는 위로 형과 누나가 한분씩 계셨다. 경기도 광주에서 태어나 생활하셨는데 청상과부가 된 할머니는 억척같이 일하셔서 땅과 소들을 갖고 계셨다. 그런데 어려운 때 간신히 속성으로 초등학교를 졸업한 아버지가 중학교를 보내달라고 하셨는데 할머니는 친척 오빠의 말을 듣고 “땅 파먹고 살면 되지 공부가 무슨 소용 있느냐?”며 중학교를 보내지 않으셨다. 이후 20살에 아버지는 형과 크게 다툰 후 무작정 서울로 상경하셨다고 들었다. 그리고 곧 중매로 결혼해 4남매를 낳으셨다. 할머니께 아들 가르칠 필요가 없다고 하신 친척은 자기 자식들은 다 교육을 시켰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그 친척 어른을 원망한다. 사람이 사람 구실 할려면 배워야하는데 왜 할머니께 아들을 교육 시키라는 말을 하지 않았던가? 그랬다면 할머니는 아버지를 교육시키셨을 것이다. 그러면서 왜 자기는 자기 자식들은 가르쳤는가?

 

이후 아버지의 삶은 파란만장했다. 세상 물정 모르고 할머니 땅 팔아 사업을 하면서 여러번 망해먹었다. 그럴 때 마다 할머니께도 주사를 부렸다. 머리를 방 벽에 부딪히며 “내 눈을 빼달라”고 할머니에게 소리를 질렀다. 참으로 할머니 입장에서도 기막힌 일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아버지는 배우지 못한 설음을 갖고 사셨다. 그당시 관공서에 가면 대부분이 한자인데 그것을 읽을 수 없어 어려움을 당하셨다. 그래서 결혼하시면서 어머니께 ‘아들을 낳으면 대학까지 공부를 시키고, 딸을 낳으면 고등학교까지 교육을 시키자’고 다짐하셨다. 그래서 그 다짐대로 나와 내 남동생은 대학을 나왔고, 누나들은 고등학교까지 가르쳤다. 어느날부터 나는 이에 대해 아버지께 감사하고 있다. 그런 다짐으로 나를 가르쳐 주셨기에 내가 지금 이렇게 내 역할을 하며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주사부리는 아버지가 싫었다. 그래서 초등학교 때는 아버지가 빨리 죽거나, 어머니가 아버지와 이혼하셨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사춘기가 돼서는 아버지와 목욕을 가지 않았다. 이후 아버지가 큰 교통사고를 당하셔서 1년이 넘게 병원에 계셨지만 병문안도 제대로 가지 않았다. 이 문제로 큰 누나와 싸우기도 했다.

 

생각해 보면 참으로 안타깝다. 아들에게 있어 아버지는 영웅이고 모델이다. 그런데 내 아버지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그래서 원망했지만 세월이 흐르니 어려서 아버지를 잃은 아버지를 이해하고 용서하게 됐다. 그리고 비록 어머니에게는 주사를 부렸지만 4남매에게는 손찌검 한번 안하신 것도 감사하고, 다짐대로 대학까지 보내주신 것도 감사했다. 그리고 초등학교 때 육성회비를 제때 못내는 아이들은 집으로 돌려보내거나 교실 앞뒤로 보내 벌을 주었는데 빌려서라도 주셔서 절대 그런 일을 당하지 않도록 해주셨던 것도 감사했다.

 

부목사 때 아내가 먼저 시작한 「치유상담연구원」을 다니면서 상담을 더 공부하며 더 아버지를 용서하게 됐다. 집단상담 치료과정에서 어려서 아버지를 피해 한밤에 놀이터에서 떨고 있을 때 멀리서 주님이 나를 보고 계셨다는 것을 깨닫고 나는 눈물이 났고, 지금 이 대목을 쓰면서도 뜨거운 눈물이 흐른다. 그렇다. 그당시 나는 교회를 다니고 있지 않았지만 주님은 한밤에 추위에 떨고 있던 나를 바라보고 계셨던 것이다. 그래서 초등학교 때 잠시 다니던 교회를 안 다니고 중학교 때 다시 다니면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이 너무나 좋았다. 육신의 아버지는 싫었지만 하나님 아버지는 너무나 좋았다. 그래서 그 "하늘" 아버지가 좋아 고1때 목사가 되겠다고 서원했는지도 모른다.

 

나는 나이를 먹어가며 또 상담과 심리에 대한 책의 도움으로 아버지를 이해하고 용서하게 됐지만 그래도 집단상담을 통해 큰 도움을 받았다. 상담치유기법에 의해 내 어린 시절로 다시 돌아가 상황을 보고, 또 아버지 입장에서 그 상황을 보면서 책에서 본 것과는 비교되지 않는 치유경험을 했다.

 

나처럼 “역기능가정”에서 성장하지 않았다면 축복이다. 자신 안에 “성인아이”가 없다면 다행이다. 그러나 세상에 완벽한 가정, 부모가 어디 있겠는가? 우리 몸도 완전히 100% 건강할 수 없듯 마음과 정신도 완벽히 건강하지 못하다. 그렇게 자부하는 사람이 더 위험하다고 본다.

 

취재가서 모처럼 한성렬 교수님의 강의를 들었다. 「치유상담연구원」에서, 또 한 교수님이 운영하는 「예상」에서 많은 유익을 얻었다. 특별히 한 교수는 목회자 가정에서 성장한 장로로서 목사들의 상황을 잘 이해하고 있다. 요즘같이 목회가 어려운 때 목회자는 번아웃되어 목회를 제대로 감당하기가 어렵다. 또한 원가족에서 생긴 문제로 인해 목회와 가정에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한 교수는 목사들도 상담받아야 한다고 외치는 것이다. 그런데 여전히 기도만하면, 성령충만만 받으면 모든 게 해결된다고 하는 “신령파”도 많이 있다. 그러나 배고프면 음식을 먹어야 배부르듯이 마음의 문제, 심리의 문제 등은 기도와 아울러 상담이 필요하다.

 

과거에 한번 정신과를 간 이후 나는 정신과를 간 적이 없다. 그러나 나중에 필요하면 정신과를 갈 수도 있고, 앞으로도 필요하면 더 나은 삶을 위해 상담도 받고 싶다. 상담의 유익함을 경험한 자로서 그렇다. 그러나 상담 비용은 매우 비싸다. 요즘 뜨고있는 오은영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에게 상담 받을려면 엄청난 비용을 지불해야하는데도 예약자가 차고 넘친다고 한다. 이것은 정신과를 찾고 상담 받는 것에 대한 오해와 거부감이 많이 사라졌다는 것이며, 한편으로는 그만큼 삶에 치여 마음에 상처 받은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다. 목회자도 예외일수는 없다.

 

내가 굳이 내 이야기를 쓰는 이유는 경험자로서 상담받는 것이 유익하다는 것과 목회자도 인간인 이상 완전하지 않기에 상담을 받아야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말해주기 위해서이다. 주변에 보면 상담이 필요한 목사들이 많이 보인다. 그런데 정작 당사자는 그 사실을 모르고 있다. 나는 여전히 다양한 책을 통해 내 자신의 마음을 알아가고 치유하며 성숙해가는 과정을 밟고 있다. 더 온전해지고 행복해지기 위해서이다. 그 길에 상담을 받았던 것이 크게 유익했다는 것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싶다. 당신에게도 상담이 필요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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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이야기】 나는 왜 정신과를 찾아 갔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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