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15(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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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거운 짐
    신문을 창간하면서 장비를 새로 구입했다 카메라, 플래쉬, 렌즈, 망원렌즈, 미니 노트북 그 무게가 어마어마하다 어깨에 매도, 손으로 들어도 무게를 피할 수 없다 만원 지하철, 앉지 못하고 서서 갈 때 짐을 올려 놓을 수 있는 짐칸이 너무 고맙다 내 인생의 짐도 '누군가'에게 맡기며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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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3-18
  • 정여균 목사, 한국기독교부흥협의회 대표회장 취임
    변권능 목사 부부(좌측), 정여균 목사 부부 (사)한국기독교부흥협의회 제53대 대표회장 이·취임 감사예배가 12월 6일 오전 10시 30분 안양시에 소재한 마벨리에 뷔페에서 있었다. 1부 예배는 황세한 목사(준비위원장)의 인도로 협의회기입장 후 박승주 목사(신학회장)가 기도하고 정금열 목사(섭외회장)가 사도행전 2장 14절부터 21절까지 봉독 후 찬양사역자 이연홍 선교사가 찬양했다. 윤보환 감독(증경대표회장)이 '꿈을 만드는 사람'이란 제목으로 "한국교회의 부흥에 부흥사들이 큰 역할을 했다. 특히 부흥사는 성령 운동에 앞장섰다"며 "부흥사는 신앙을 통한 꿈, 구원의 꿈을 전하는 자들이다. 이 구원의 꿈을 통해 가족 전도, 민족 전도가 이뤄진 것이다"면서 "성령 운동은 교회에 봉사하게 만든다. 부흥사는 자신의 능력을 자랑하지 말고 하나님의 능력을 드러내기 바란다"고 설교했다. 이어 이길윤 목사(총사업본부장)가 광고 후 장대영 목사(증경대표회장)가 축도했다. 취임사하는 정여균 목사 2부 이·취임예식은 이종선 목사(운영회장)의 인도로 직전대표회장 변권능 목사가 "주님이 대표회장 되시는 부흥협의회가 되기를 바란다" 고 이임사했다. 노태철 목사(증경대표회장)가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실 것이라 말했듯이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종들이 되기를 바란다"고 이임자에게 격려사하고, 장희열 목사(증경대표회장)가 "부흥을 이루었던 믿음의 선배들을 기억하며 그 역사를 잘 이어가기 바란다"고 이임자에게 격려사했다. 정여균 대표회장이 "대표회장이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며, 많은 분들의 도움으로 된 것이다. 협력하는 원당소망교회 교우들과 사모에게 감사하다"고 취임사했다. 송일현 목사(이사장)가 "힘내어 대표회장 잘 감당하시라"고 격려사하고, 강풍일 목사(증경대표회장)가 "부흥사가 살아야 교회가 산다. 어려운 이 때 부흥사를 통해 교회를 살리는 역사 감당하기 바란다"고 격려사 후 엄기호 목사(증경대표회장)가 "죽고 사는 것은 주님께 달려있다. 큰 역할 감당하시기 바란다"고 격려사한 후 엄정묵 목사(증경대표회장)가 "그동안도 잘하셨기에 대표회장으로 큰 일 감당할 것을 믿고 기대한다"고 격려사하고, 장대영 목사(증경대표회장)가 "부흥사는 선지자다. 하나님의 비밀을 알고 잘 감당하시기 바란다"고 격려사했다. 유중현 목사(증경대표회장)가 "직전 회장은 많은 수고하셨고, 신임회장은 앞으로 큰 수고하시기 바란다"고 축사한 후 양명환 감독(증경대표회장)가 "담임 목사가 대표회장 된 것은 원당소망교회에 큰 축복이기에 축하한다"고 축사하고, 심평종 목사(세기총대표회장)가 "예수님과 함께 코로나를 이겨내는 능력의 종이 되기를 바란다"고 후 오범열 목사(남포월드협의회 총재)가 "큰 함대가 큰 일을 감당한다. 신임대표가 큰 일을 하실 것을 믿는다"고 축사 후 황준석 목사(필라지부 증경대표회장)가 "신임대표는 이 협의회에서 다양한 경험을 했다. 그것을 바탕으로 이 협의회를 잘 이끌어 갈 것을 확신하며 축하한다"고 축사하고, 이옥화 목사(여성부흥협의회 직전대표회장)가 "한국교회를 살리는 사역을 잘 감당하시기를 기대하며 축하한다"고 축사한 후 한영희 목사(여성부흥협의회 대표회장)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대표회장이 되어 주님께 충성하시기를 바란다"고 축사했다. 이어 각 교단 및 단체가 정 대표회장에게 축하패를 증정했다. 3부 특별기도회 시간에, ▲ ‘(사)한국기독교부흥협의회를 위하여’, 정운주 목사(감사)가, ▲ ‘세계복음화와 민족복음화를 위하여’, 문은수 목사(총강사단장)가 ▲ ‘코로나19 바이러스 극복을 위하여’, 천용호 목사(국내선교회장)가 ▲ ‘부흥사들의 영적 각성과 이단척결을 위하여’, 성두현 목사(연수원장)가 ▲ ‘한국교회의 예배회복을 위하여’, 전희종 목사(감사)가 ▲ ‘동성애차별금지법을 위하여’, 이광택 목사(실무회장)가 ▲ ‘20대 대통령선거를 위하여’, 이의현 목사(성회본부장)가 특별기도했다. 4부 나눔의 시간에 심원보 목사(증경대표회장)가 새출발을 위한 축복기도를 한 후 대표회장 내외, 증경대표회장, 실무임원들이 축하케익을 컷팅하고 김 조 목사(증경대표회장)가 오찬축복기도함으로 모든 순서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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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3-18
  • 먼 하늘을 본다
    뒷산 등산로에 설치되어 있는 팔베개하고 다리 꼬고 하늘 쳐다보고 있는 곰 한 마리 나도 어렸을 때 저 모습으로 하늘을 본적이 많았다 그러나 최근에는 그래본 적이 없다. 모든 일 멈추고 편한 자세로 멍하니 흘러가는 구름을 보면 수많은 상념을 할 수 있을텐데 바쁜 나에게 ‘너도 나처럼 해봐’라고 말하는 부러운 곰 한마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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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3-18
  • 바보처럼 살라고요?(시편 37:1~11)
    I. 도입 우리나라 고전소설 가운데는 춘향전, 흥부전, 홍길동전처럼 ‘권선징악(勸善懲惡)’이 주제인 것이 많습니다. 세상에서는 악당들이 떵떵거리고 사는 경우가 많지만, 사람들은 소설의 주인공처럼 지조를 지키며 욕심을 버리고 약자를 도우며 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주인공이 악당을 물리칠 때 환호성을 지릅니다. 권선징악은 사람들의 양심의 소리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은 양심의 소리보다 더 높은 차원에서 온유한 사람으로 살아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온유하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온유하게 살면 어떻게 될까요? 온유하게 사는 것은 여러 가지로 불리한데 왜 온유하게 살아야 할까요? II. 온유한 자는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 마태복음 5장에서 예수님은 여덟 종류의 복 있는 사람에 관해 설명하셨습니다. 그 세 번째가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말은 예수님과 우리 사이의 시간적, 문화적 간격 때문에 오해의 소지가 있습니다. (1)온유하다는 말의 뜻이 무엇인지 (2)복이 있다는 것은 무슨 뜻인지 (3)땅을 기업으로 받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우리 개념이 아니라 예수님의 개념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서는 먼저 복에 대하여 설명하고 시편으로 돌아가서 온유한 자와 땅을 차지한다는 말을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예수님과 마태는 유대인입니다. 또한, 마태복음의 주된 독자는 유대인입니다. 그러므로 마태복음은 2000년 전 유대인의 사고방식으로 생각해야만 제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마태복음이 사용한 복(μακάριος)이라는 말 속에 담긴 히브리적 개념부터 알아야 합니다. 구약에서 복 있는 사람에 대해 말하는 대표적인 성경은 시편 1:1입니다. 여기서 복 있다는 말은 히브리어로 아쉐르(אֶשֶׁר)인데 이 말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의미합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은 바로 천국의 모습입니다. 결론적으로, 온유한 자가 복이 있다고 할 때 세속적인 복을 받는다는 의미보다는 하나님께서 온유한 자와 함께해 주신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온유하다는 것은 무슨 뜻이며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 청중들은 모두 시편 37편을 떠 올렸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어릴 때부터 회당에서 이 성경을 여러 번 읽고 달달 외우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마치 우리나라 사람들이, “나의 죽음을 적에게 알리지 마라”라는 말을 하면 누구나 이순신 장군을 떠올리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시편 37편을 통해서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III. 온유한 자는 의인이고 여호와를 신뢰하는 사람이다. 시편 37편은 두 가지 이미지(image)를 대조적으로 보여주는데 첫째는 풀이고(2절) 둘째는 빛입니다(6절). 풀이 얼마나 잘 자라는지 농부들은 풀과의 전쟁을 치릅니다. 조그마한 주말농장만 해도 이것을 실감합니다. 그런 풀들도 겨울이 오면 다 죽어 버립니다. 이스라엘에는 우리나라와는 달리 가을부터 봄까지 우기(雨期)입니다. 그러다가 봄에 건기(乾期)가 시작되면 온 세상은 메마르고 강렬한 햇볕이 내리쪼입니다. 우기 동안에 쑥쑥 자라던 풀들은 건기의 햇빛에 금새 말라 죽어 버립니다. 다윗이 보기에 지금 떵떵거리는 악인들은 우기 때의 풀과 같습니다(2절). 하지만 하나님께서 의인들은 정오의 빛 같게 해 주실 것입니다(6절). 그러니까 악인들이 까불어 봐도 별 것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시편 37편을 인용하여 온유한 자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라고 하셨는데 온유한 자는 어떤 사람일까요? 온유하다는 말을 헬라어로 보면 프라우스(πραΰς)인데 이 말은 gentle하고 친절하고 겸손하고 동정심이 많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인용하신 시편 37편에서 말하는 온유한 자란 인정 많고 친절하고 동정심이 많은 것과는 다릅니다. 시편 37:11에서 온유한 자는 히브리어로 아나우(עָנָו)인데 가난하고 고통받는 자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싸울 힘이 없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대신 싸워 주실 것을 믿기에 가난하고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다윗 자신입니다. 다윗은 자기를 죽이려는 사울을 죽일 기회가 여러 번 있었지만 죽이지 않았습니다. 결국, 사울은 전쟁터에서 적에게 죽었습니다. 때가 되자 하나님이 사울을 제거해 주신 것입니다. 다윗처럼 하나님이 원수를 제거해 주실 때까지 가난하게 고통받으며 사는 것이 복되며 결국 주인공이 되어 몽땅 차지할 수 있습니다. 시편 37편 11절에서 말하는 온유한 자가 어떤 사람인지 알기 위해서는 9, 22, 29, 34절과 비교해보면 선명해집니다. 온유한 자는 어떤 사람일까요? 9절을 보면 그들은 여호와를 소망하는 자입니다. 22절을 보면 그들은 주의 복을 받은 자들입니다. 또 29절을 보면 그들은 의인이며, 34절을 보면 여호와를 바라고 그의 도를 지키는 자입니다. 이 말씀을 보면, 신자는 여호와를 신뢰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신자의 싸움은 이기느냐 지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신자의 문제는 악한 방법으로 싸우고 싶은 유혹을 물리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뢰하는 자는 그 유혹을 물리칩니다. 그런 사람이 진실로 믿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사탄의 세 가지 유혹을 이긴 것은, 바로 이 유혹을 물리치신 것입니다. 제가 부끄러운 고백을 한 가지 하겠습니다. 참으로 안타깝게도 저는 제 일생에 이 싸움에 진 적이 있습니다. 이러면 안 되는데 하면서도 딱 한 번만 눈 질끔 감으면 되겠지 했는데 그것이 평생의 후회로 남습니다. 그 경험을 통해 저는 한 번 눈 감으면 다음에 또 눈 감아야 하는 일이 생기는 것을 알았습니다. 반면에 한 번 물리치면 다음에도 물리치게 된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한번 외쳐 보세요. “한번 눈 감으면 또 눈 감게 되고, 한번 물리치면 또 물리치게 된다. 한 번만 물리치자.”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의 말과 행동만이 아니라, 생각까지도 다 알고 계십니다. 온유한 사람이란 부드러운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떳떳한 사람입니다. 그런 온유한 성도가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온전히 의뢰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 복 있는 사람이며 그런 사람이 땅을 차지할 것입니다. IV. 진정한 기업(상속)은 영원한 천국이다. 이제는 ‘땅을 차지한다’ 혹은 ‘땅을 기업으로 상속받는다’는 말을 생각해 볼 차례입니다. 창세기 12장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그 후손들에게 가나안 땅을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 약속대로 여호수아 시대에 가나안에 들어왔습니다. 가나안 땅은 약속의 땅이며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땅이며 풍요롭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입니다. 구약 시대에 가나안 땅은 천국의 모형이지 완성된 천국은 아닙니다 . 그래서 세상에는 악인이 순진한 사람의 땅을 빼앗아 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럴 때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는 사람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빼앗긴 땅을 되찾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뢰하는 사람은 땅을 빼앗길지언정 악한 방법을 동원할 수는 없습니다. 자기 권리를 빼앗겼을 때 그것을 되찾기 위해 악한 방법을 동원하기보다 하나님이 해결해 주시기를 기다리는 사람, 그런 사람이 바로 온유한 사람입니다. 이럴 때 이것을 지켜보시는 하나님은 뭐라고 하시며 어떤 조처를 내리실까요?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네 권리도 못 챙기는 너는 참으로 어리석구나. 그래서야 어디 세상에 살아남겠니?” 오히려 하나님을 의지하는 그 사람을 하나님이 책임져 주십니다. 시편 37편에서 다윗은 그렇게 온유한 사람이 결국 땅을 차지하게 된다고 5번이나 말하고 있습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다윗은 25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의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도다.” 이것은 다윗의 고백일 뿐이 아니라 다윗을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약속인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의 방식대로 사느라 나의 정당한 권리를 빼앗겨서 가난하고 고통당할 때 여러분은 하나님이 내 편이 되시고 하나님이 도우시고 하나님이 더 큰 것으로 채워주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여기 놓칠 수 없는 다른 비밀이 하나 더 있습니다. 성도가 믿음으로 살고 의롭게 사느라고 손해를 본 것 가운데 이 땅에서 다 보상받지 못하는 것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왜 이것을 다 보상해 주지 않으실까요? 그 이유는 이 땅은 영원히 살 곳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가나안 땅은 천국의 모형이지만 완성된 천국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성도가 이 땅에서 복을 누리는 것도 영원한 복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 방식으로 사느라 빼앗긴 것 가운데 다 보상해 주지 않으신 것은 천국에 적립해 놓은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월급을 받아서 다 써버리는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이 아닙니다. 그래서 요즘은 국가에서 강제로 월급 일부를 떼어가서 적립해 놓습니다. 그렇게 떼어간 돈으로 갑자기 직장을 잃어버리면 실업 급여를 지급해줍니다. 또 퇴직할 때는 퇴직금을 지급해줍니다. 은퇴 후에는 연금도 줍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도 우리에게 보상해 주는 대신 일부는 천국에 적립해 놓으십니다. 그리고 영원한 천국에서 생명의 면류관을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찬양합니다. 나의 영원하신 기업 생명보다 귀하다 나의 갈길 다가도록 나와 동행 하소서 주께로 가까이 주께로 가오니 나의 갈길 다가도록 나와 동행 하소서 V. 마무리 세상에는 악인이 있어 성도의 권리를 빼앗아 가기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를 괴롭히는 악인은 저 밖의 불신자 가운데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 같은 교회의 지체나 한 가정의 가족도 우리를 시험합니다. 다윗을 죽이려고 하던 사울이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이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럴 때 우리는 내가 나서서 그 사람을 혼 내주고 빼앗아 오고 싶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신뢰하는 다윗은 원수를 자기 손으로 갚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온유한 사람을 돕는 것을 믿었습니다. 사도 바울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롬 12:19)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시편 37편에서 말하는 온유한 사람이란 세상의 시각으로 보면 바보 같은 사람입니다. 시편 37:1은 그렇게 바보처럼 살라고 합니다. 왜일까요? 시편 37편에는 ‘왜냐하면(כִּי 키)’이라는 단어가 8번이나 나오는데 첫 번째가 2절입니다. 2절에서는 우리가 바보처럼 빼앗기며 살아야 하는 이유가 전능하고 선하신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의뢰하고 온유한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이 땅에서 주의 복을 받고 땅을 차지하시기 바랍니다. 영원한 천국에서 면류관을 받는 신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시편 37편 설교 준비과정 1. 이 시의 카테고리는 전형적인 신뢰시이다. 2. 이 시의 패턴은 평행법이 주를 이룬다. 대부분은 동의적 평행법이고 일부 구간에는 대조적 평행법도 사용하고 있다. 김창대에 의하면 이 시는 다음과 같은 패널 구조로 되어있다. A. 여호와를 의지하는 의인은 공의와 의로 빛날 것 (1-8절) B. 의인의 복: 땅 상속, 화평을 누림 (9-11절) C. 의인을 해하려는 악인의 행동을 실패함 (12-15절) D. 의인과 악인의 대조: 의인의 기업은 영원함, 땅 상속 (16-22절) B’. 의인의 복: 여호와께서 잡아 줌, 땅 상속 (23-31절) C’. 의인을 해하려는 악인의 행동을 실패함 (32-33절) A’ 여호와를 의지하는 의인은 땅을 차지하고 평안과 구원을 누림 (34-40절) 3. 이 시에 사용된 이미지는 풀(2절)과 빛(6절)의 대조이다. 풀은 한 낮의 빛에 말라버린다. 4. 시편 37편에서 왜냐하면(כִּי)이 8번 나온다. 즉 이 시는 반전의 시이다. 이 시가 말하려는 핵심 메시지는 다음과 같다: 여호와가 계시기에 의인은 반드시 성공하고 악인은 반드시 멸망한다. 5. 이 시가 신약에 제공하는 신학은 무엇인가? 마태복음 팔복에서 예수님이 설명하는 온유한 자의 기초를 제공한다. 온유한 자란 여호와를 의뢰하고 악인을 부러워하지 않으며 악을 떠나 선을 행한다. 6. 신자의 싸움은 이기느냐 지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신자는 악한 방법으로 싸우고 싶은 유혹에 넘어가느냐 물리치느냐의 문제이다. 예수님은 사탄의 세 가지 유혹에서 바로 이 유혹을 물리치셨다. 나는 평생에 한 번, 이 싸움에 진 적이 있다. 내 평생의 후회되는 경험이다. 내 생각과 말과 행동이 낱낱이 신문 기사로 나간다고 해도 하나님 앞에서 떳떳하고 사람들 앞에서 부끄러움이 없을 선택을 하라. 7. 시편 37편의 아웃라인은 악인과 의인의 반복되는 대조를 통해 점점 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는 진행이므로 하향 및 상향 그래프를 반복하면서 올라가는 모습이다. 8. 이 시를 통한 설교 제목은 8번의 왜냐하면(כִּי)을 생각하면서 “왜냐하면요?”가 적합하다. 9. 본문은 40절로 설교 본문으로는 너무 길기에 1~11절만 선택하고 나머지는 필요에 따라 설교 도중에 언급한다. 10. 설교 개요 I. 도입 우리나라의 유명한 고전소설 가운데 심청전을 제외한 춘향전, 흥부전, 홍길동전은 ‘권선징악(勸善懲惡)’이 주제이다. 권선징악은 모든 사람의 양심의 소리이다. 하지만 실제로 세상에서는 악인이 더 떵떵거리고 사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성도는 전혀 다른 이유로 온유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II. 온유한 자는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 마태복음 팔복에서 예수님은 온유한 자가 땅을 기업으로 받는 복이 있다고 하셨다. 그런데 이 말에서 온유하다는 말은 오해받기 쉬운 표현이다.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는 말 역시 설명이 더 필요한 내용이다. 이 시에서 보여주는 두 가지 이미지는 태양과 풀이다. 팔레스틴에서 풀은 낮의 강력한 햇빛에 맥없이 말라버리는데 악인은 단지 풀과 같고 의인은 강력한 빛이다. III. 온유한 자는 의인이고 여호와를 신뢰하는 사람이다. 에수님의 말씀은 바로 시편 37편의 사상을 그대로 펼친 것이다. 의인과 악인은 그 행동이 얼마나 착한가보다 여호와를 신뢰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다. 신자의 싸움은 이기느냐 지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신자는 악한 방법으로 싸우고 싶은 유혹에 넘어가느냐 물리치느냐의 문제이다. 예수님은 사탄의 세 가지 유혹에서 바로 이 유혹을 물리치셨다. 나는 평생에 한 번, 이 싸움에 진 적이 있다. 내 평생의 후회되는 경험이다. 내 생각과 말과 행동이 낱낱이 신문 기사로 나간다고 해도 하나님 앞에서 떳떳하고 사람들 앞에서 부끄러움이 없을 선택을 하라. IV. 진정한 기업(상속)은 영원한 천국이다. 가나안 땅은 천국의 모형이다. 창세기 12장에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땅은 1차적으로는 가나안 땅을, 궁극적으로는 천국 약속이다. 하나님 방식으로 사느라 빼앗긴 땅 가운데 이 땅에서 회복하지 못한 기업은 천국에 적금해 놓은 것이다. “나의 영원하신 기업 생명보다 귀하다.” V. 마무리 신자를 유혹하고 시험하는 자는 언제나 바깥 불신자가 아니다. 때로 같은 신앙공동체의 지체나 한 가정의 가족도 시험한다. 그 사람이 회개하고 연단받는 것은 그 사람과 하나님 사이의 문제이다. 그 사람은 하나님께 맡기고 나는 내 믿음을 지켜야 한다. 결론/ 내가 왜 바보 같이 빼앗기고 살아야 하느냐고? 전능하고 선하신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 목회
    • 강해
    2022-03-18
  • 인도네시아 이야기 5
    현지 목회자들과 6주간 세미나를 마치고 새로운 사역지, 폰티아낙 서울, 대련, 성도. 고향이자 교역자로서 첫 사역을 시작했던 도시 서울, 인구 1000만. 선교사로서 첫 발을 내딛었던 항구 도시 중국의 대련, 인구 600만. 중국에서의 마지막 사역지 사천성 성도, 인구 1200만. 그런데 새로운 사역지 폰티아낙은 도심과 주변 인구 다해서 60만명의 소도시다. 태어나서 살아본 도시 중 제일 작다. 그런데 이래 봬도 세계에서 3번째로 큰 섬인 ‘칼리만탄’(흔히 알려진 이름인 보르네오섬의 인도네시아식 이름)의 최대 도시다. 어머니 장례 일정을 모두 마친 후 10월 13일 인도네시아에 다시 들어와 5일 간의 호텔 격리를 하면서 이사 준비를 시작했다. 그리고 10월24일 떨리는 마음으로 폰티아낙에 도착했다. 짐을 기다리며 공항을 찬찬히 돌아보는데 누군가 해주었던 지방 도시의 고속버스 터미날 같다는 말이 생각났다. 주변 사람들을 살펴보니 화교의 비율이 높은 도시라는 것이 느껴진다. 공항에 마중 나오신 선교사님의 차를 타고 10여분 달리니 벌써 도심이다. 도시의 첫 인상, 포근하고 아기자기하다. 이사하기 전에 주변의 많은 사람들, 심지어 인도네시아 사람들도 폰티아낙이 인니에서도 더운 지역 중 하나라고 겁을 많이 줬었는데… 우기라 그런지 생각만큼 덥지 않다. 심지어 잘 때 에어컨을 켜지 않아도 된다. 자카르타보다 공기도 맑고 먼지도 많지 않은 것 같다. 여하튼 느낌이 좋다. 동네 풍경 계속되는 Challenge! 나는 20대 초반에 폐결핵을 앓아서 건강 검진 때마다 폐 상태에 관심을 갖고 살핀다. 그런데 하나님은 한동안 산소 부족으로 호흡에 어려움이 있을 수 있는 해발 3000미터 이상 되는 동티벳 고원을 누비게 하셨다. 이번에는 땀이 많아 여름을 힘겹게 나는 사람을 적도선(赤道線)이 지나는 도시에 보내셨다. 생각보다 덥지 않음에도 계속 흐르는 땀으로 하루에도 여러 번 옷을 갈아입는다. 게다가 이번에는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대학 정규과정에 등록해 언어를 배울 기회도 갖지 못했다. 왠지 점점 더 어려운 시험을 치르는 것 같다. 그런데 이제까지 그래왔듯이 이번에도 주님의 도우심으로 잘 이겨낼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다. 그리고 다음에는 또 어떤 Challenge를 준비하실지 기대가 되기도 한다. 험난한 이사 과정 일단 인니에 다시 들어온 이상 새로운 사역지로 빨리 가기 위해 지체없이 이사를 진행했다. 물론 첫 걸음부터 예상 외의 어려움에 맞닥뜨렸다. 이사업체들마다 섬(자바섬)에서 섬(보르네오)으로 가는 이사라 한국에 가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은 비용을 요구한다. 세 번의 견적을 받아보았는데도 결론이 나지 않는다. 이사하기로 한 5일 전, 인니어 과외 선생님인 Tania 자매를 통해 극적으로 착한(?) 가격의 현지 업체와 계약했다. 출발부터 스릴 만점이다. 빠른 정착을 위해 현지에 계신 선교사님의 도움으로 거주를 위한 준비를 미리 시작했음에도 현지 도착 3주가 되어서야 기본 생활이 가능한 세팅이 끝났다. 집 주인이 새로 지어 판매를 하려다가 갑자기 월세로 돌린 집이라 생활에 필요한 기본적인 것들이 전혀 없는 상태였고, 낯선 땅에서 필요한 것들을 사서 설치하는 것이 쉽지 않다. 벌레와 모기가 많은 지역이라 방충망은 필수여서 오기 전에 미리 주문했는데 2주가 다 되도록 진도가 나가지 않는다. 2주가 지날 시점에 일을 시작하는데 하루 와서 조금 일하고, 며칠 있다 또 조금 하고… 시작한지 일주일이 더 지나서야 겨우 마무리했는데 결과물이 엉망이다. 마치 집에 있던 부품들을 가지고 얼기설기 만든 듯해서 보고 있으면 한숨이 난다. 새 물품 비용을 내고 중고 물품을 받은 것 같다. 그러나 현지인과 불편한 관계를 맺는 것이 조심스러워 컴플레인도 제대로 못하니 속이 더 답답하다. 그럴 때마다 아내와 얼굴을 쳐다보고 웃으며 “사바르”를 반복한다. 인니말로 “참아야 하느니라~”는 의미이다. 도착 후 매일 아침, 마당에 물이 흥건해 수도국에 알렸는데, 마당을 지나는 상수도관에 누수가 있다고 한다. 며칠 후 수도국 직원들이 와서 몸 깊이만큼 땅을 세 군데나 파고 나서야 해결할 수 있었다. 정착 초기부터 마당에 굴을 파다니... 누수 공사중인 수도국 직원 모습 그사이 며칠은 물을 쓸 수가 없어 밥도 지을 수 없고 무엇보다 제대로 씻을 수가 없었다. 아내는 생수로 기본적인 세수만 하고 잠을 청해야 했고, 땀이 많은 나는 그럴 수 없어 적당히 더러운(?) 물로 먼저 씻고, 생수로 다시 몸을 헹구는 샤워를 했다. 밤마다 생수 두 통으로 마무리 샤워를 하는데 이거 어디서 본 듯한 장면이다. ^^ 기본적으로 수돗물 상태가 좋지 않고, 때로 수돗물에 해수가 유입되기도 한다는 정보에 자카르타에서 정수기를 사와서 자가 설치를 하기로 했다. 호기롭게 시작했으나 부품을 잘못 사왔고, 다시 주문을 할 때마다 꼭 한 가지씩 잘못된 부분을 깨닫게 되어 부품 구입만 10번은 한 것 같다. 결국 도착 2주가 지나서야 제대로 정수된 물을 쓰게 되었다. 아, 깨끗한 물의 소중함이여! 수도관 누수가 잡히고, 물탱크 청소도 마치고, 정수기 자가 설치까지 마친 후, 깨끗한 물로 샤워하며 생각한다. 저녁에 샤워를 할 수 있고, 더러워진 옷을 세탁기에 돌릴 수 있으며, 식후에 깨끗한 물로 설거지를 할 수 있다니… 당연한 듯 생각없이 누려왔던 ‘깨끗한 물’, 당연한 것이 아니고 참으로 귀한 ‘은혜’였다. 폰티아낙은 일반 택시는 공항이 아니면 보기 힘들고 대중 교통도 거의 없다. 사람들은 대개 개인 차량이나 오토바이를 이용한다. 아니면 모바일 기반의 서비스인 Grab이나 Gojek 택시를 이용할 수 있다. 어느 날 필요한 물건을 사러 나갔는데 늦은 오후 비가 오기 시작한다. 어두워져 집으로 돌아가려는데 갑자기 Gojek 택시가 잡히지 않는다. 게다가 나의 핸드폰은 밧데리가 떨어져서 이미 꺼졌고, 아내 것도 20% 밖에 남지 않았다. 급한 마음에 아는 선교사님께 전화를 하는데 응답이 없다. 갑자기 긴장이 되기 시작한다. 이렇게 미아가 되는 건 아닌가? 이제 정말 비상이다. 아내 핸드폰마저 꺼지면 아는 선교사님께 SOS를 보내기도 힘들게 된다. 먼저 급한대로 카톡에 도움을 요청하는 글을 남겨 놓고, 여차하면 걸어갈 요량으로 집까지 가는 길을 검색했다. 비상조치가 끝난 후 다시 Gojek 택시를 부르는데… 1시간만에 응답이 온다. 오, 주여! 왠지 처음 선교사가 되었을 때보다 더 힘든 것 같다. 그래도 이제 기본 생활이 가능하게 되어 블로그에 글을 올릴 정도가 되었다. 이제 본질적인 일에 집중하며 살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현지 목회자들과의 세미나 이사하고 정리하는 중에 매주 수요일 현지 인니 목회자와 한국 선교사들이 6주에 걸쳐 온라인으로 세미나를 가졌다. 인니 재입국과 이사, 집 정리 등 일들도 많았고, 인니어로 진행이 되는 세미나라 미리 책을 읽고 준비해야 할 부분이 많아 힘들었지만 의미가 있는 시간이었다. 현지의 목회자들은 교단장 출신도 두 명이나 되고 다들 교단 중직인데 어떻게 하면 주님이 원하시는 목회를 할 수 있을까 고민하고 기꺼이 공부에 참여하는 모습이 너무 귀해 보인다. “하나님, 이들이 주님이 기뻐하시는 교회를 세울 수 있도록, 잘 돕게 하소서.” 현지 목회자들과 6주간 세미나를 마치고 기도제목 1. 건강 이사하고 집 세팅하는 과정이 생각 이상으로 험난해서 건강이 조심스럽습니다. 11일에는 가까이서 저의 정착을 도왔던 선교사님이 전날부터 몸에 열이 나고 몸 상태가 좋지 않아 안티겐 검사를 했고, 밀접 접촉자인 저도 검사를 하였습니다. 일단 모두 음성으로 나왔습니다. 건강위해. 2. 목회자비자 이번에 입국할 때는 단기 방문비자로 들어왔습니다. 2개월 비자이고 이후 한 달에 한 번씩 연장이 가능해서 최대 6개월까지 거주할 수 있습니다. 학교를 통한 비자 상황은 학교에서 처음으로 외국인 교수에게 비자를 내주는 것이라 계속 크고 작은 문제들이 있어 늦어지고 있습니다. 안정적인 비자 발급을 위해. 3. 언어 폰티아낙에 온 후 책상에서의 공부 시간은 줄고 현지인과 부딪히며 언어를 익히는 시간이 늘었습니다. 언어에 진보가 있어서 곧 시작될 신학교 강의에 지장 없도록. 4. 정착을 위한 세팅의 마무리 집이 편안한 공간이 되어야 힘있게 일할 수 있습니다. 집과 학교 사무실 세팅, 필요 물품의 구입, 그 외 복잡한 각종 서류 작업들이 순조롭게 마무리되도록. 감사합니다.
    • 선교
    • 국외선교
    2022-03-18
  •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교회 활성화를 위한 청중의 설교 참여 방안 연구』
    I. 들어가는 글한국교회는 1970년대와 80년대를 지나오면서 선교 역사상 유례를 찾기 어려운 부흥을 경험하였다. 그러나 2000년대로 들어오면서 부흥과 성장이 주춤하더니 2020 년에 와서 코로나 19의 직격탄을 맞아 침체의 늪에 빠져 있다. 방역을 이유로 정부로 부터 각종 소그룹 모임과 식사의 코이노니아(κοινωνία)가 금지당한 것은 물론이고, 정규 예배마저도 집합 인원이 제한당하는 기간이 길어지면서 교회는 신앙 공동체의 기능을 상실할 위기에 놓여 있다. 집합 제한 기간이 장기화함에 따라, 목회자를 대상으로 한 설문 조사에서는 코로나 사태 이후에 출석 교인 30% 정도가 교회로 복귀하지 않을 것으로 예상한다는 우려스러운 통계도 나오고 있다.1) 실제로 10월 5일에 보건복지부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현재 16%의 교회는 예배를 드리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2) 과연 언제쯤이면 코로나 19가 종식되고 다시 소그룹 모임을 시작할 수 있을까? 2020년 5월 14일에 WHO는 COVID-19는 팬데믹(pandemic)을 넘어 엔데믹 (endemic)이 될 수 있다는 우울한 경고를 했다.3) 엔데믹이란 말라리아(Malaria)나 뎅기열(Dengue fever)처럼 지역사회에서 주기적으로 발생하는 감염병을 의미한다. 한편 정은경 질병관리청장은 2021년 11월 초에는 위드 코로나(with COVID-19)를 시작할 수 있다고 발표하였다.4) 이런 추세라면 코로나 19가 종식되지 않더라도 머지 않아 다시 소그룹 모임이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정형외과적 치료 후에는 재활 치료가 꼭 필요하듯이 코로나 팬데믹을 경험하면서 정체된 신앙 공동체를 활성화하기 위해서는 특별한 준비와 노력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교회가 바람직한 공동체의 모습으로 회복하기 위해 설교자는 어떤 노력을 할 수 있을까? 연구자는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초대교회의 모습으로부터 모색하려고 한다. 초대교회의 모습을 볼 때 생명력 있는 설교와 설교 후의 말씀 나눔이라는 두 가지 방법을 통해 신앙 공동체가 활성화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대표적인 예로, 베뢰아의 성도들은 말씀을 받은 후에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였다. 이같은 성경적 모범을 따르면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교회를 활성화하기 위한 해결책은 다음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는 설교자의 수준을 높이는 것이며, 둘째는 청중들도 받은 말씀을 서로 나누는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이다. 설교자가 수준을 높이고 청중은 받은 말씀을 나누는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이 두 가지 과제를 동시에 해결할 방법으로 연구자는 “설교 비평”을 대안으로 제시하고자 한다. 그렇다면 이 두 가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설교 비평의 근거와 기준, 그리고 실행 방법은 무엇인가? 1) 이 내용은 한국교회100주년기념관에서 열린 ‘코로나19 이후 2021년 한국교회 변화 추적조사 결과 발표 기자회견’에서 공개됐다. 「크리스천투데이」 (2021년 8월 13일), 2021년 10월 19일 접속, 해당싸이 트: https://www.christiantoday.co.kr/news/341847.2) 「크리스천투데이」 (2021년 10월 13일), 2021년 10월 19일 접속, 해당싸이트: https://www.christiandaily.co.kr/news/108335.3) 「중앙일보」 (2020년 5월 14일). 2021년 10월 19일 접속, 해당싸이트: https://www.joongang.co.kr/article/23776686#home.4) 「KBS NEWS」 (2021년 10월 7일), 2021년 10월 19일 접속, 해당싸이트: https://news.kbs.co.kr/news/view.do?ncd=5295884. 선포된 말씀을 드높이는 설교 비평을 수행하기 위하여, 그리고 이를 통해 교회 활성화에 이바지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순서로 이론 정립과 방법론을 마련할 필 요가 있다. ⓵먼저 설교 비평의 필요성과 설교 비평의 이론적 근거를 확인하고 ⓶설교자의 설교를 더욱 발전시킬 방안을 마련한 후에 ⓷청중이 설교 비평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긍정적이고 효과적인 방법을 제시하여 청중의 자발적인 참여하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II. 펴는 글1. 설교 비평의 필요성과 비평 사례(事例) 1) 찬미로서의 설교 비평설교 비평이 필요한 이유는 먼저 열정적으로 말씀을 준비하고 전달한 설교자를 격려하고 찬미하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청중 역시 그 말씀을 통해 성숙의 기회를 얻기 위해서이다. 이러한 근거는 독일의 설교학자 Rudolf Bohren(1920~2010)의 설명으로부터 확보할 수 있다.5) Bohren은 설교자에 대한 청중의 열정적 공감을 유도하는 방안으로 설교 비평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Bohren은 설교에 관한 그의 역작 Predigtlehre 마지막 장(章)에서 설교 비평은 가능할 뿐만 아니라 교회의 성숙을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역설(力說)한다. Bohren에 의하면 설교 비평이 설교의 추가 부록이 아니며 설교에 빠져서는 안 되는 것이다. 비평(批評)이란 그 용어부터 부정적 느낌이 강함에도 불구하고 Bohren이 교회 성숙에 설교 비평이 꼭 필요하다고 한 이유는 무엇인가? Bohren이 설교 비평이 필요하다고 말한 것은 청중이 설교를 평가하도록 하자는 것이 아니다. Bohren이 생각 하는 설교 비평은 설교를 찬미하고 설교에 대하여 “아멘”이라고 말하게 하는 방법이다. 마치 설교가 본문의 찬미인 것처럼 설교 비평은 설교 찬미를 목적으로 삼는다.6)다시 말하면, Bohren이 말하는 설교 비평이란 청중이 설교를 듣는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였음을 표현하는 열정적 공감이다. 그래서 Bohren은 설교 비평의 목적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설교 비평의 과제는 설교의 이해와 설교에 관한 기쁨을 재촉하는 일에 있다. 설교를 듣는 도움을 주려고 한다. 설교와 꼭같이 말씀에 봉사하는 길이다.”7) 5) Rudolf Bohren은 스위스 Grindelwald에서 태어난 스위스인 목사이지만 독일 하이델베르크 대학교 (University of Heidelberg) 등에서 교수 활동을 하였고 마지막으로 독일 뷔르템베르크 (Württemberg)에서 사망했기에 독일 학자라고 할 수 있다., 박근원 옮김, 『설교학실천론』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80), 287.6) Rudolf Bohren, 7) Bohren, 『설교학실천론』, 288.이처럼 찬미로서의 설교 비평은 비평에 노출된 설교자와 비평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청중 모두에게 도움을 주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Bohren은 설교 비평을 외면하거나 회피하는 설교자나 설교 비평의 기회를 얻지 못하는 청중은 말씀 안에서 성숙할 기회를 놓치게 된다고 한다. Bohren은 교회 안에서 설교 비평이 방해를 받는 동안에는 말씀의 진행도 방해를 받고 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설교 비평은 설교에 빠져서는 안 되는 본질이다. 다만, 설교 비평은 찬미가 목적이기 때문에 오직 성숙한 교회만이 설교 비평의 과제를 수행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성숙한 교회는 건전한 설교 비평을 통해 더욱 성숙의 자리로 나아갈 수 있다.8) 2) 청중 참여로서의 설교 비평설교 비평이 필요한 또 하나의 이유는 청중의 설교 참여를 위해서이다. 설교에서 청중은 수동적인 존재들이 아니라 설교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자이다. 이러한 사실은 Fred B. Craddock과 Lucy Atkinson Rose의 설명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Craddock은 오늘날 청중은 설교에 참여하되 설교가 만들어지기 전부터 설교자에게 말하고 설교에 참여하고 있다고 한다.9)Rose 역시 청중은 설교에 참여하는 자들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Rose는 『하나님 말씀과 대화 설교』에서 설교학의 흐름을 전통적인 설교학과 케리그마 설교학, 그리고 신설교학으로 구분하여 각각 특징과 장단점을 분석하였다. 그 후 신설교학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으로 자신의 대화 설교(conversational preaching)를 제안하였다. 여기에서 Rose는 설교의 목적을 “교회의 중심적인 대화를 촉진시키고 강화하기 위하여 신앙 공동체를 매 주일 하나님의 말씀 주위로 끌어모으는 것”이라고 결론짓는다.10) 설교의 목적이 ‘청중을 대화 테이블로 초대하는 것’이라면 대화 테이블로 모이게 하는 방법은 무엇이며 모여서 할 일은 무엇인가? 이 설명을 뒷받침하기 위해 Rose는 Dietrich Ritschl의 말을 인용하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설교자와 회중은 함께 만인 제사장의 권리를 공유하고 있으며, 함께 공유하는 제사장적 책임을 감당함에 있어서 설교자와 회중은 하나님의 말씀을 함께 해석해야 한다.”11) 더 나아가 Rose는 설교는 설교자만의 고유한 사역이 아니라 모든 예배자들이 함께 감당해야 할 사역이라는 Ritschl의 말을 받아들인다. 그렇다면 Rose의 대화 테이블에서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일은 아마 ‘들은 말씀을 드높이는’ 설교 비평일 것이다.Rose는 Craddock을 잇는 신설교학자로서 설교의 목적이 진리를 전달하거나 하나 8) Bohren, 『설교학실천론』, 298.9) Fred B. Craddock, , 이우제 옮김, 『크래독의 설교 레슨』 (서울: 대서, 2007), 37.이승진 옮김, 『하나님 말씀과 대화 설교』 (서울: 기독교10) Lucy Atkinson Rose, S 문서선교회, 2010), 190.11) Rose, 『하나님 말씀과 대화 설교』, 179-81. 님과의 만남을 중재하거나 회중을 변화시키는 것에 있지 않다는 신설교학의 설교관을 가지고 있다.12) 개혁주의의 입장에서 Rose의 설교관을 다 동의할 수는 없지만, 신앙 공동체가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대화할 것을 강조하는 면에서 Rose의 주장은 주목할 가치가 있다. 설교 비평의 필요성은 설교의 적용이라는 면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Daniel M. Doriani는 적용의 네 가지 측면을 의무, 성품, 목표, 그리고 분별력으로 구분한다. 다시 말하면 성경은 청중의 다음 네 가지 질문에 답한다는 것이다. ⓵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⓶나는 어떻게 옳은 일을 하는 사람이 될 수 있는가? ⓷우리는 어떠한 목표를 추구해야 하는가? ⓸우리는 어떻게 옳고 그름에 대한 분별력을 얻을 수 있는가?13)Doriani는 적용을 청중의 의무로 남겨놓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적용으로 청중을 데려갈 책임이 설교자에게 있다고 한다. 하지만 청중을 적용까지 데려가는 것은 설교자의 책임이지만 그 가치관을 받아들이고 실행하는 주체는 청중 자신이다. 그러므로 공동체 구성원들이 각자 결심한 내용을 자신의 입으로 표현하고 서로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기 위해서는 설교 비평이 꼭 필요하다. 3) 성경과 교회사에 나타난 설교 비평 사례이처럼 중요한 설교 비평은 성경 속에서, 그리고 교회사에서는 어떻게 적용되었는지 그 사례를 확인해 볼 때 그 필요성에 대하여 더욱 확신할 수 있을 것이다. 성경 적으로 그리고 교회사적으로 모범적인 설교 비평의 사례가 있다. 성경 속에서는 복음서와 사도행전에서 설교 비평의 사례를 확인할 수 있고 교회사에서는 청교도의 가르침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신앙의 바람직한 전통이다. 복음서에 등장하는 설교 비평 사례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이후, 예수님이 제자들과 육체로 함께 계시지 않는 상황에서 시작되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새벽에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의 무덤에 갔다가 무덤이 열려 있는 것을 보고 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 그 후 마리아는 제자들에게 달려와 그녀가 주를 본 사실과 예수님이 전하신 가슴 벅찬 말씀을 전하였다(요 20:18). 또 다른 예로,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 역시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으로부터 말씀을 받은 후 밤중에 예루살렘으로 달려와서 그들이 예수님을 만난 사실과 예수께서 하신 말씀의 내용을 다른 제자들에게 전달하였다(눅 24:35). 이처럼 제자들이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서로 나누는 모습은 설교 비평의 기원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모습은 부활이라는 충격적인 상황에서만 발생한 일시적 현상인가? 사도행 12) Rose, 『하나님 말씀과 대화 설교』, 190.13) Daniel M. Doriani, Getting the message : a plan for interpreting and applying the Bible,정옥배 옮김, 『적용, 성경과 삶의 통합을 말하다』 (서울: 한국성서유니온선교회, 2011), 133.전에 나타난 사건을 볼 때 부활 이후 상당한 기간이 지난 후에, 예루살렘이 아닌 마케도니아의 도시 베뢰아에서도 이런 현상이 존재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사도 바울로 부터 복음을 전해 받은 베뢰아 사람들은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은 후에 그 말씀을 성경에서 확인하며 내면화하는 과정을 거쳤다.14) 그런가 하면 바울이 이고니온에서 복음을 전했을 때는 정반대의 반응이 일어났다. 믿지 않는 유대인들은 사람들이 바울에게 반감을 품도록 선동하였고 심지어 돌로 쳐 죽이려고 하였다. 이것을 보면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전해졌을 때는 기뻐하며 그 말씀으로 서로 대화하든지 혹은 반발하든지 어떤 종류의 반향이 있는 것이 당연하다.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능력 있는 말씀이 선포되었는데 아무런 반응이 없이 조용히 귀가하고 잊어버린다면 오히려 이상한 현상이다. 설교를 들은 청중은 그 들은 내용에 관해 대화를 나누는 것이 자연스럽고 설교의 목적에 부합하는 것이다. 설교 비평의 사례는 교회사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17세기의 청교도들은 설교를 통해 들은 말씀으로 서로 교제하는 것을 강조했고 또 실천했다.15) 설교 비평(설교 나눔)은 공동체의 구성원들만이 아니라 가장(家長)을 중심으로 가족들과 하는 것이 신명기 6장에 나타난 쉐마의 정신에 부합된다. 그런 정신에 입각하여 17세기의 영향력 있는 청교도 가운데 Lewis Bayly(1575~1631)는 그의 저서 The Practice of Piety를 통해 예배가 끝난 후에 집으로 돌아가서는 가족들이 함께 모여 들은 설교를 검사하고, 저녁에는 하나님의 하실 일을 묵상하면서 기도함으로 주일을 마치라고 권면했다.16) 이러한 Bayly의 가르침이야말로 가장 모범적인 설교 비평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성경의 제자들과 신실한 청교도 신앙인들이 설교를 들은 후에 서로 그 내용을 나누며 확인하는 시간을 가졌다면 오늘날의 청중 역시 설교를 들은 후 서로 확인하고 내면화하여 순종하도록 제도적 장치를 만들어 서로 협력하는 것이 필요하다. 특히나 지금처럼 코로나 시대를 맞아 영상으로 예배를 드리거나 설교를 듣는 경우에는 그 한계점을 보완할 방안이 필요한데 그 가운데 하나가 가정이나 소그룹에서 설교를 나누는 것이다.17) 14) 사도행전 17:11에서 “상고하다”로 번역된 헬라어 ἀνακρίνω는 ‘조사하다’, ‘검토하다’, ‘심문하다’의 의미를 가진다. 그러므로 베뢰아 성도들의 모습은 설교 비평의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15) Nicholas Bownd, The True Doctrine of the Sabbath: or, Sabbatum Veteris Et Novi Testamenti(Grand Rapids: Reformation Heritage Books, 2015), 368, 370-75.16) 홍인택, 『웨스트민스터 총회의 율법과 성화』 (서울: 개혁주의신학사, 2021), 273.17) 조광현, “코로나 시대, 영상 설교에 대한 설교학적 고찰”, 한국복음주의실천신학회, 「복음과실천신 학」 57 (2020): 203-204. 2. 설교 비평의 실태(實態)와 비평의 기준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설교학적 이유와 또 성경적, 교회사적 근거로 볼 때 설교 비평은 꼭 필요한 덕목이다. 그런데 이렇게 중요한 설교 비평이 지금까지 관심 밖으로 밀려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첫째는 강단의 성역화라는 장벽 때문이고 둘째는 설교 비평자의 자질 및 설교 비평의 기준이 마련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연구자는 먼저 설교 비평의 현주소를 살핀 후에 바람직한 기준과 방법에 대하여 생각해 보려고 한다. 1) 성역화된 한국교회 강단설교는 정당성(validity)이 있는 성경해석을 통해 도출해 낸 메시지를 청중의 삶 에 적실성(relevancy)이 있도록 전달해주는 것이다.18) 그런데 일부 설교자의 설교에서는 정당성과 적실성 가운데 한쪽 혹은 양쪽 모두 확보되지 않은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이처럼 설교자들이 어떠한 교정도 받지 않은 상태로 계속해서 강단에 서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 이유는 한국교회의 설교 강단은 오래전부터 성역(聖域)으로 취급되어 객관적인 평가를 받을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다. 총신대학교 류응렬 교수는 2004년 10월 18일에 「기독교사상」이 발간한 『한국교회 16인의 설교를 말한다』에 대해 평가하면서 그동안 한국교회 강단은 거의 폐쇄된 성역이었음을 지적하고 있다. 이 책이 지적하는 한국교회 설교자들의 문제를 류응렬은 다음 세 가지로 요약한다.19)첫째, 한국교회 설교자들의 가장 큰 문제점으로 신학이 없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래서 성경해석을 자의적으로 흐르게 만들고 주어진 현실과 타협하게 만드는 문제가 발생한다. 둘째, 한국교회 강단의 문제는 잘못된 교회론에서 비롯된다고 지적한다. 그래서 공동체에 대한 시각을 상실한 채 개인주의 신앙으로 흐르는 결과를 초래한다. 셋째, 설교자들의 역사의식 결여를 지적한다. 그 결과 한국교회 강단은 올바른 방향을 제시하지 못하고 개인적 신앙생활에만 집중하게 된다.한국교회 강단의 이런 문제점은 「기독교사상」이 선정한 16인만의 문제는 아니다. 이 책에 선정되지 않은 설교자들에게 어쩌면 더 많은 문제점이 있을 수 있다. 그 로부터 17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이런 문제점들은 미해결의 문제점으로 남아있다. 그러므로 설교자들은 정기적으로 자신의 설교에 대해 올바른 기준으로 평가받을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그동안 한국교회 설교 강단은 왜 이처럼 평가 불가한 성역으로 인식 되었을까? 서울신학대학교 정인교 교수는 한국교회의 설교가 거론 불가의 성역이었던 이유를 설교를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으로 여기는 가치관에 있다고 본다. 이런 가 18) 정창균, 『고정관념을 넘어서는 설교』 (수원: 합동신학대학원출판부, 2002), 9. 19) 류응렬, “한국교회 설교비평의 분석과 평가 그리고 제언”, 대한기독교서회, 「기독교사상」 51 (2007/12) : 186-88. 치관은 Martin Luther가 설교를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Verkuendigtes Wort Gottes)으로 설명한 것에서 기원한다. 그러므로 문자적으로만 보면 설교 비평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건드린다는 부담이 있는 것이다.이런 부담이 있음에도 정인교는 설교에 대한 비평은 피할 수 없는 당위라고 주장한다. 정인교는 설교 비평은 설교자가 가진 속성상 반드시 필요하다고 한다. 왜냐하면,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 설교가 한계를 가진 인간 설교자를 매개로 청중에게 전달되기 때문이다. 비록 설교자가 사역자로 부름을 받았다는 ‘내적 소명 ’(vocatio interna)과 신학 수업과 안수(按手)라는 ‘외적 소명’(vocatio externa), 그리고 교회의 부름이라는 ‘간접 소명’(vocatio mediata)을 받았더라도 설교자는 불완전한 인간일 수밖에 없다.20)그러므로 정인교는 “이런 완전치 않은 설교자에게 말씀을 맡겨놓고 아무런 통제나 조정의 노력이 없다면 그로부터 야기될 수 있는 문제는 실로 심각한 것이 사실이다.”라고 평가한다. 그래서 정인교는 설교 비평은 설교의 성격상 반드시 필요한 영역이며, 120년(2007년 당시 기준) 한국 기독교 역사로 볼 때 오히려 늦은 감이 없지 않다고 주장한다.21)그러므로 정인교는 정용섭의 『속빈 설교 꽉찬 설교』에 대해 논평하면서 “이 책을 통해, 설교자를 하나님의 진리의 완벽한 매개자로 신격화하는 것은 결국 설교자뿐 아니라 스스로를 죽이는 위험한 일임을 깊이 발견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라고 설교 비평의 필요성을 피력하였다.22) 2) 한국교회 설교 비평의 실태와 문제점그렇다면 한국교회 강단에서 설교 비평의 실태는 어떠한가? 한국교회에서 설교 비평은 2006년과 2007년에 정용섭에 의해 발간된 두 저서, 『속빈 설교 꽉찬 설교』와 『설교와 선동 사이에서』를 통해 본격적인 문을 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를 두고 류응렬은 설교 비평이라는 장르가 드디어 하나의 학문이 될 가능성을 보여준 사건으로 평가한다. 류응렬은 정용섭이 한국교회 강단에서 성경이 사라지고 간증 수준의 설교가 되어버린 사실을 지적하는 것과 설교자가 본문을 제대로 다루지 않거나 제멋대로 다루는 것을 지적한 사실을 중요하게 평가한다.23)하지만 류응렬은 한국교회 설교를 비평한 정용섭 자신에게도 심각한 문제가 있음을 지적한다. 류응렬에 의하면 올바른 설교 비평의 목적은 다음과 같다. “설교 비평이란 설교에 대한 객관적 평가를 통해 사람들에게 그 사람과 설교에 대한 정확한 20) 정인교, “한국교회와 설교 비평 – 이상과 현실 그리고 미래”, 대한기독교서회, 「기독교사상」 51 (2007/12): 147-48.21) 정인교, “한국교회와 설교 비평 – 이상과 현실 그리고 미래”, 161.22) 정인교, “한국교회와 설교 비평 – 이상과 현실 그리고 미래”, 155.23) 류응렬, “한국교회 설교비평의 분석과 평가 그리고 제언”, 190-93. 이해력을 돕고, 바람직한 설교에 대한 그림을 그려주며, 또한 설교하는 당사자에게는 이를 통해 설교의 발전을 꾀하여 결국 한국교회 강단을 말씀에 근거하여 새롭게 세우는 데 있어야 한다.”24) 이에 비해 정용섭의 설교 비평에는 중대한 문제점이 있는데 첫째는 그의 성경관의 문제이다. 정용섭은 성경에 대한 축자영감설을 믿는 설교자들이 미숙한 성서 이해를 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그처럼 정용섭이 성경의 축자영감설을 믿지 않는다면 그는 왜 설교자가 강단에서 성경 본문을 존중하지 않음을 지적한 것일까? 성경 속에 하나님의 말씀도 아닌 신화적 요소까지 들어있다고 가정한다면 설교자들이 그런 성경 본문에 집중해서 무엇을 얻겠느냐고 류응렬은 반문한다.25) 그러므로 설교 비평을 하는 사람은 먼저 성경에 관한 바른 관점을 소유해야 한다. 그리하여 그 설교가 과연 성경의 바른 해석에서 출발했는지를 물어야 그 설교 비평이 올바르고 유익한 비평이 될 수 있을 것이다.잘못된 성경관을 소유한 정용섭의 비평에는 여러 설교자에 대한 그릇된 평가가 다수 발견된다. 먼저 김상복의 설교에 대해 정용섭은 “김 목사는 축자영감설에 기초 함으로써 신학과 과학을 혼동하는 창조과학회 유의 방식으로 성서에 접근한다.”라면서 “김 목사가 이런 자기모순에 빠진 이유는 성서의 신화까지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고 싶다는, 일종의 신화적 심리 상태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라고 했다.26)정용섭이 축자영감설을 부정하는 잘못된 성경관은 로이드 존스를 비평하는 것에도 드러난다. 그는 로이드 존스에 대하여 “복음주의자로 자처하는 로이드 존스는 성서를 문자의 차원에서 오류가 없는 말씀으로 믿는다는 것에 대해 여러 말을 할 생각은 없다.”라고 하면서도 축자영감설이 로이드 존스의 설교 구성에 다음 두 가지 오류를 끼쳤다고 지적한다. “하나는 그가 오늘날의 고고학을 총체적으로 부정한다는 것이고 다른 한 가지는 성서의 희화화이다.” 로이드 존스가 성경을 희화화했다는 말에 대하여 정용섭은 다음과 같은 설명을 덧붙이고 있다. “고대인들의 우주론적 언어를 아 런 해석 없이 그대로 문자의 차원에서 선포한다는 것은 종말론적으로 하나님 말씀이 성서를 박물관의 유물로 만드는 격이다.”27) 정용섭의 또 다른 문제점은 다른 설교자를 향한 그의 태도이다. 정용섭은 자신이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매우 공격적이고 부정적인 표현을 사용하는 것을 서슴지 않고 있다. 예를 들어 김남준에 대해서는 “청교도 신앙의 영적 결벽증”이라고 했고 한국교회 다수가 존경하는 하용조에 대해서는 “근본주의적 강해 설교의 조급증”이라는 표제를 붙였다.28) 특히 박영선에 대해서 “그럴듯한 신학적 포즈를 취하긴 했지만, 그 포즈의 뒤안길은 결코 신학적이지 못하다.”라고 표현한 것은 정당한 비평이 아니라 작정하고 비꼬는 것으로밖에 볼 수 없다.29) 24) 류응렬, “한국교회 설교비평의 분석과 평가 그리고 제언”, 176.25) 류응렬, “한국교회 설교비평의 분석과 평가 그리고 제언”, 193-95.26) 정용섭, 『설교와 선동 사이에서』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7), 28-29.27) 정용섭, 『설교와 선동 사이에서』, 329-30.28) 정용섭, 『속빈 설교 꽉찬 설교』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6), 63, 315. 『설교와 선동 사이에서』에서 정용섭은 『속빈 설교 꽉찬 설교』에서보다 더욱 도발적인 용어와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김서택의 설교에 대해서는 “종교적 모범생 콤플렉스에 의한 복음의 훼손”이라고 했고, 이동원의 설교에 대해서는 “규범 설교의 역사 허무주의”라고 했다. 장경동의 설교에 대해서는 “허무주의 영성”이라고 간단히 말하는가 하면 정필도의 설교에 대해서는 “기독교 신앙의 은폐된 폭력성”이라고 비판하고 있다.30) 이와 같은 정용섭의 태도는 비평이 아니라 비판이며, 깎아 세우기가 아니라 허물고 짓밟기에 불과하다. 정용섭은 자신의 저서 제목을 『설교와 선동 사이에서』라고 붙였는데 정용섭이야말로 “비평과 선동 사이에” 서 있는 듯한 인상을 지울 수가 없다. 이러한 정용섭의 설교 비평에 대해 정인교는 “이러한 접근은 설교 비평의 본질을 훼손하고 오도할 수 있는 지극히 위험한 요소를 함유하고 있다.”라고 우려를 표현한다.31) 3) 바람직한 설교 비평의 기준신성욱 교수가 말한 대로 “한 편의 설교 속에는 그 사람의 성경관과 신학적인 지식과 인생 경험과 인격 모두가 고스란히 녹아져 있다.”32) 그러므로 설교를 비평할 때는 설교자에 대하여 예를 갖추어 긍정적 평가 후에 아쉬운 점이나 보완점을 언급해야 한다. 또한, 설교를 비평하는 사람은 설교자 못지않은 설교학적 기준을 확보해야 한다. 이런 면에서 김창인의 설교를 평가한 신성욱은 설교 비평의 좋은 예를 보여주고 있다. 김대혁 교수 역시 설교 비평의 모범을 보여준다. 김대혁은 Abraham Kuruvilla의 설교 이론에 대하여 비평하면서 먼저 네 가지의 공헌을 나열한 후 세 가지 정도의 아쉬운 점을 덧붙이는 방식을 취하였다.33) 하지만 정용섭의 비평은 비평가의 자질과 비평 기준 확보의 시급성을 절감하게 했다. 정인교에 의하면 한국교회 설교 비평의 문제점은 다음 다섯 가지이다. 첫째, 비평자들의 기본적인 시각과 태도가 부정적 비판 일변도인 것이 문제이다. 둘째, 작금의 설교 비평은 지나치리만큼 설교의 내용에만 치중함으로 설교를 전체적으로 조명하지 않는다. 셋째, 설교 비평의 기준을 어떻게 설정하는가 하는 문제가 대두된다. 넷째, 비평자의 입장이 설교 비평의 절대 기준이 되어 선택의 문제를 당위의 문제로 몰 29) 정용섭, 『속빈 설교 꽉찬 설교』, 145.30) 정용섭, 『설교와 선동 사이에서』, 37, 129, 197, 243.31) 정인교, “한국교회와 설교비평 – 이상과 현실 그리고 미래”, 157.32) 신성욱, “성경해석학적 관점에서 본 김창인 목사의 설교와 신학적 특징”, 한국복음주의실천신학회, 「복음과 실천신학」 60 (2021): 91. (https://doi.org/10.25309/kept.2021.8.15.082)33) 김대혁, “Abraham Kuruvilla의 설교 방법론에 관한 비평적 평가”, 한국복음주의실천신학회, 「복음 과 실천신학」 60 (2021): 31-40. (https://doi.org/10.25309/kept.2021.8.15.011) 고 가는 것 역시 설교 비평을 왜곡시킬 수 있다. 다섯째, 비평자의 독선이 문제이다. 설교 비평은 설교자에 대한 예의만이 아니라 회중에 대한 예의까지도 갖추어야 한다.34) 그렇다면 설교 비평을 위한 바람직한 기준은 무엇인가? 정인교가 제시하는 설교 비평의 합리적 기준은 다음의 일곱 가지이다. 첫째, 설교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가? 둘째, 설교된 내용의 조직신학적 배경에 관해 물어야 한다. 셋째, 어떻게 설교되어 있는가를 물어야 한다. 설교는 무엇을 말하는 것과 더불어 어떻게 말하는가가 중요하다. 넷째, 누구에 의해 설교가 행해지는가를 물어야 한다. 설교 비평은 설교자에 대한 이해와 공동체 및 설교의 목회적 차원과 계획에 대한 이해를 요구한다. 다섯째, 설교가 위치하는 삶의 정황에 관해 물어야 한다. 여섯째, 설교의 결과를 물어야 한다. 일곱째, 설교가 주로 어떤 공동체를 만들고 있는가를 물어야 한다.35) 류응렬 역시 한국교회 강단이 말씀으로 회복되고 하나님 나라를 진리 위에 세우는 설교 비평을 위하여 다섯 가지 제안을 하고 있다. 첫째, 성경적인 설교 신학의 정립이 필요하다. 둘째, 균형 잡힌 설교 비평은 설교자와 설교를 동시에 연구하는 것이 다. 셋째, 설교자의 의도를 존중하며 읽는 자세이다. 넷째, 설교 본문뿐 아니라 설교 전달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마지막으로, 설교는 예배의 상황에서 이해해야 한다.36)이상의 다섯 가지 제안 가운데 세 번째의 태도에 관한 부분은 특히 중요하다. 류응렬이 한종호의 『전병욱 비판적 읽기』에 대한 평가에서도 말했듯이 설교자의 의도와 다르게 비평가의 의도대로 해석해버리는 것은 파괴적인 결과가 나올 수밖에 없다. “한종호의 눈에 비치는 전병욱은 어떤 말을 해도 이미 그의 눈 밖에 난 사람처럼 여겨진다.”라고 한 류응렬의 평가처럼 설교자의 의도를 존중하지 않으면 결코 균형 잡힌 설교 비평이 될 수 없을 것이다.37) 그렇다면 설교 비평은 설교에 대한 이해와 공감이며 설교에 대한 찬미라고 하는 Rudolf Bohren의 기준은 어떠한지 살펴보자. Bohren은 설교 분석의 기준을 먼저 “지, 정, 의” 세 개의 카테고리로 구분하고 각 카테고리에 세부적인 가지를 추가하는 방식으로 비평의 기준을 제시하였다.38) 설교 비평의 기준을 세 개로 구분하는 Bohren의 카테고리는 청중이 기억하기 좋은 장점도 있으며 그 속에는 정인교가 제안하는 일곱 가지 기준도 대부분 포함된다. 그러므로 연구자는 Bohren의 구분을 설교 비평의 기준으로 삼고자 한다. 한편, 김지혁 교수에 의하면 설교의 적용은 마음의 결단 문제이며, 의지와 더불어 정서와 감정을 포함하는 전인격적인 문제이다. 그리고 성도들은 마음의 감각을 통 34) 정인교, “한국교회와 설교비평 – 이상과 현실 그리고 미래”, 161-66.35) 정인교, “한국교회와 설교비평 – 이상과 현실 그리고 미래”, 168-71.36) 류응렬, “한국교회 설교비평의 분석과 평가 그리고 제언”, 197-99.37) 류응렬, “한국교회 설교비평의 분석과 평가 그리고 제언”, 184-86.38) Bohren, 『설교학실천론』, 290-298. 해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경험한다.39) 그러므로 설교 비평을 할 때는 지, 정, 의 삼 요소 가운데 감동을 가장 먼저 나누는 것이 좋다. (1) 감동 : 어떤 감동을 하였는가?설교자는 메시지를 전할 때 청중의 감정에 호소한다. 그러므로 그 설교가 청중의 마음을 붙잡았다는 사실은 메시지 전달이 성공했음을 판단하는 중요한 기준이 된다. 청중이 자신의 마음을 감동하게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파악할 때 설교자가 호소하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한다. 이처럼 청중에게 무엇인가가 들렸고, 청중이 그것을 이야기 하는 일은 바로 설교의 찬미이다. 이렇게 될 때 청중은 설교자의 편에 선 증인이 되 는 셈이다. (2) 내용 : 어떤 내용을 들었는가?마음을 붙잡는다는 것은 개인적인 정서로만 이해되어서는 안 되고 설교의 근거와 내용도 함께 파악해야 한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다음 질문이 필요하다.a. 본문의 내용: 본문의 고유한 교훈은 무엇인지, 본문에서 무엇을 깨달았는지, 설 자는 무엇을 설교하였는지 나누는 것이다. b. 교리의 내용: 성경해석을 통해서 깨닫게 된 신앙 교리가 무엇인지 파악하는 것 이다. 율법과 복음의 관계, 그리스도의 사역과 그 은혜를 나누고 그 깨달음과 전체 성경 및 조직신학적 조화에 대해 나누는 것이다. c. 청중의 상황: 설교의 내용이 현재 시대와 교회의 상황과 개인의 상황에서 어떤 의미로 와닿는지 나누는 것이다. 설교는 그 문제에 대해 어떤 해답을 주었는지 나누는 것이다. (3) 결단 : 어떤 결단을 하였는가?설교는 단순발화행위나 의미 수반 발화행위로 끝나지 않고 반드시 효과 수반 발화행위가 되어야 한다.40) 그렇다면 설교는 청중에게서 어떤 효과가 발생하게 하는 것이 목적이다. 그러므로 그런 효과를 함께 나누는 것이 중요하다. a. 개인에 대한 효과: 설교가 개인을 어디로 인도하려고 하는가? 개인에게 어떤 사고를 하도록 하는가? 개인에게 어떤 호소를 주는가에 대해 나누는 것이다.b. 교회에 대한 효과: 설교가 교회의 미래에 대해 어떤 의미가 있는가? 교회의 미래 현상과 그 근거를 설교 가운데서 무엇을 발견할 수 있었는가?c. 사회에 대한 효과: 설교가 비판적 정치의식과 사회적 책임감을 일깨워주는가? 예를 들어 최근에는 교회가 차별금지법과 동성혼 합법화를 막아내어야 하는 필요성이 39) 김지혁, “Jonathan Edwards의 마음의 감각과 그의 설교학적 미학”, 한국복음주의실천신학회, 「복음과 실천신학」 33 (2014): 43, 53.40) John L. Austin, How to do things with words, 2nd ed. by J. O. Urmson & Maria Sbisa (Cambridge: Harvard University Press, 1962. 1975), 94-132. 있다. 이런 사회적 이슈들에 관하여 청중을 어떤 행동의 필요성을 깨달았는가? 3. 효과적인 설교 비평 방법지금까지 설교 비평의 필요성과 설교 비평의 실태를 살펴보았다. 그리고 비평을 위한 바람직한 기준이 무엇인지 살펴보았다. 그러므로 이제는 이러한 기준으로 설교의 발전과 청중의 설교 참여를 위하여 효과적인 설교 비평 방법에 관하여 생각해 보자. 설교 비평을 통해 긍정적인 효과를 거두기 위해서는 신중하고 지혜로운 방법이 필요한데 이를 위하여 연구자는 설교자 그룹과 청중 그룹을 구분하는 이중 노선의 설교 비평 방법론을 제안한다. 한편, 모임 운영 방식 역시 대면과 비대면이라는 이중 방식을 제안하고자 한다. 이중 노선의 설교 비평이란 무엇이며 그 필요성은 무엇인가? 설교 비평은 아무리 좋게 표현해도 설교자와 청중 모두에게 부담스러운 것임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 다. 왜냐하면 비평(批評, critique)이란 평가하고 잘못을 지적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 문이다.41) 하나님의 말씀으로 선포된 다른 사람의 설교를 평가하는 것도 부담이지만 자신의 설교를 다른 사람에게 평가받는 것도 그다지 달갑지 않은 일이다. 특히나 신앙과 인격 수준이 다양한 청중에게 설교를 비평하도록 했을 때 과연 어떤 결과들이 쏟아져 나올지는 예측 불허의 일이다. 그리고 설교 비평에 참여한 청중들 쪽에서도 이를 통해 반드시 개인의 경건은 깊어지고 신앙 공동체는 활성화된다고 보장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Bohren은 오직 성숙한 교회만이 설교 비평의 과제를 수행할 수 있다고 지적한 것이다.42) 바로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 방안으로 연구자는 설교 비평에 참여하는 주체를 설교자 그룹과 청중 그룹으로 구분하여 이중 노선으로 시행할 것을 제안한다. 1) 설교자 중심의 설교 비평 모임먼저 설교자 중심의 설교 비평 모임에 대하여 생각해 보자. 앞에서 언급했듯이 한국교회에서 설교 비평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이유는 한국교회 강단이 성역으로 인식되어 왔기 때문이며 성역화의 첫째 이유는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의식 때문이다. 그런데 인간 설교자가 하는 말은 어떤 이유와 근거로 하나님의 말씀이 될 수 있는가? 이에 대하여 Rudolf Bohren은 두 가지 이유로 설명한다. Bohren이 말하는 첫째 이유는 하나님께서 인간 설교자와 공동 설교자가 되어 41)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은 ‘비평(批評)’을 ‘사물의 옳고 그름, 아름다움과 추함 따위를 분석하 여 가치를 논함’이라고 해설하고 있다.42) Bohren, 『설교학실천론』, 298. 주시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 설교자와 공동 설교자가 되어 주실 뿐 아니라 첫 번째 설교자가 되어 주신다.43) 인간 설교자가 말하는 내용은 하나님께서 하고 싶은 말씀이며 인간 설교자는 하나님을 위하여, 그리고 하나님을 대신하여 그 말을 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설교자는 자신의 말이 과연 하나님께서 하고 싶은 말씀이 맞는지 점검하는 겸손함이 필요하다. 그런데 사람이란 자신을 객관적으로 평가하기에 한계가 있는 존재이다. 또 본인이 중요하게 여기고 강조하면서도 정작 본인은 그 부분에 실수할 수 있는 것이 사람의 약점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설교를 객관적으로 평가받고 발전시키기 원하는 설교자는 설교자들로 구성된 비평 그룹을 가지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앞에서 정용섭의 설교 비평을 통해서도 살펴보았듯이 한 사람이 설교 비평을 독점하는 것은 균형을 잃을 우려가 있다. 그러므로 설교를 평가하고 점검하는 작업은 일정한 교육을 받고 준비가 된 설교자들이 그룹을 만들어 참여하는 것이 안전하다. 설교자들로 구성된 설교 비평 그룹은 매주 한 사람씩 순서를 정하여 설교를 비평하되 설교자의 개별성과 시간적, 공간적 상황성도 함께 고려하도록 사전에 설교 환경에 대한 설명을 들고 설교 영상을 시청한 후에 평가하는 것이 좋다. 이렇게 설교자들의 설교 비평 모임에 계속 참여하는 설교자의 설교는 점점 정당성과 적실성을 확보한 설교로 발전할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인식하지 못했던 습관도 발견하여 개선하게 될 것이다. 설교자 비평 그룹에서 하는 일은 설교에 공감하고 격려하는 일과 더불어 설교의 내용과 전달 방법 등을 평가하며 그 설교자가 더 발전할 수 있도록 세워주는 것이다. 이때 중요한 것은 반드시 설교에 대한 공감과 격려를 먼저 한 후에 발전 요소를 덧 붙여 주는 순서를 지키는 것이 좋다. 이러한 방향성을 잘 기억하기 위해서는 이 그룹의 이름을 “설교 비평 모임”보다는 “설교 공감 모임”(설공모)이라고 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설교 비평을 할 때의 기준은 앞에서 설명한 Bohren의 기준을 사용하는 것이 무난하다. 이처럼 기준을 정해놓고 평가를 하게 되면, 설교를 준비할 때부터 그 기준을 의식하며 균형 있는 설교를 준비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이런 비평 활동에 참여 하는 설교자는 자신의 교회 공동체 안에 일반 청중 중심의 설교 비평 모임을 시작할 마음이 생길 것이다. 2) 청중 중심의 설교 비평 모임이제 일반 청중이 참여하는 설교 비평 모임에 대하여 생각해 보자. Bohren은 자신이 열정을 다하여 즐기는 일이 네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그림을 그리는 일, 스키를 타는 일, 나무를 찍어 넘어뜨리는 일, 그리고 설교하는 일이라고 한다. 이 말은 설교 43) Bohren, 『설교학실천론』, 119-20. 를 여가의 일종으로 한다는 뜻이 아니라 오히려 정반대이다. 그가 설교하는 일에 그 만큼 열정을 다하며 즐겁게 한다는 뜻이다.44) 그러면 청중 중심의 설교 비평 모임은 어떻게 운영하는 것이 좋을까? (1) 설교자가 설교하는 일에 그런 열정을 가지고 임한다면 청중 역시 같은 열정으로 동참하도록 할 방안이 필요하다. 청중의 열정적 동참은 청중 자신을 위해서도 필요하며 설교자가 계속해서 열정을 가지고 설교하기 위해서도 필요하다. 청중이 설교에 열정적으로 참여한다는 말은 먼저 설교가 선포되는 시간에 귀를 기울여 잘 듣는 것이다. 또한, 설교 후에 그 내용을 기억하고 개인의 가치관과 삶에 적용하는 것도 포함한다. 어떻게 하면 청중이 설교를 듣는 일과 적용에 열정적으로 동참하게 할 수 있을까? 예배가 끝나면 곧장 일상생활과 생업에 쫓기며 살아가는 청중은 제도적으로 모임을 만들어 참여하도록 권장하지 않으면 자발적으로 이런 관심을 가지기가 쉽지 않다. 그러므로 그들이 들은 메시지를 기억하게 하고, 깨달은 교훈대로 순종할 수 있도록 독려하는 방안이 필요하다. 그것이 바로 설교 비평이다. 사람이란 자기 생각을 말로 표현하는 과정을 통해 정리되고 결심이 강화되는 존재이다. 그리고 순종의 결심을 서로 나누면서 책임감이 강화될 수 있다. 이를 위해 설교를 들은 후에 소그룹에서 서로 나누는 시간이 필요하다. 이처럼 설교 나눔에 참여 하는 사람은 설교 시간에 더욱 집중해서 듣는 효과도 있을 것이다. (2) 또 한 가지 중요한 방법은 청중이 열정을 다하여 설교를 듣는 것 자체가 곧 하나님과 동역하는 것임을 알게 하는 것이다. 설교를 경청하는 것은 왜 하나님과 동역 하는 것인가? 이것은 Bohren이 말하는, 인간 설교자의 말이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 두 번째 이유를 통해서 설명할 수 있다. Bohren에 의하면 설교자가 강단에 설 때 인간 청중들에게 설교하기에 앞서 눈에 보이지 않는 또 다른 청중 앞에서 설교하는 것이다. 그 청중은 거기에 있는 어떤 청중보다 더욱 주목받기 원하시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모든 인간 청중들보다 더욱 소중한 청중이시다. 설교의 우선적인 목표는 첫 번째 청중이신 하나님의 존재를 알리고 선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설교자가 하는 설교의 가치를 판단하는 분은 바로 이분,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설교자의 설교는 첫 번째 청중이신 하나님에 의해 정당화되는 것이다.45)그런데 설교 현장에서 하나님이 첫 번째 청중이 되신다는 이 사실은 설교자의 설교를 정당하게 할 뿐 아니라 청중이 설교에 귀를 기울이는 것에도 중요성을 부여한다. 설교가 행해질 때 그 자리에서 하나님께서 직접 듣고 계신다면 청중이 설교를 듣 44) Rudolf Bohren, Predigtlehre, 박근원 옮김, 『설교학원론』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79), 13. 45) Bohren, 『설교학실천론』, 151-52.는 것은 하나님과 동역하는 것이 된다. 설교를 듣는 행위만이 아니라 설교 이후에 그 설교에 대해 계속해서 생각하는 것과 들은 설교를 다른 사람과 이야기하는 것도 하나님과 동역하는 것이 된다. 시편 1편은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것이 복되다고 한다. 여기서 묵상한다는 말은 히브리어로 하가(הָגָה)인데 ‘중얼거리다’, ‘묵상(명상)하다’, ‘작은 소리로 읊조리다’ 등의 뜻을 가진다. 이를 근거로 Bohren은 설교에 대해 명상하고 설교 비평에 참여하는 것이 바로 설교자의 열정에 동참하는 것이며 설교를 찬미하는 것이라고 한다.46) (3) 이렇게 일반 청중을 중심으로 설교 비평 모임을 운영할 때는 설교자 그룹과는 다른 주의가 요구된다. 일반 청중은 설교에 대한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적이 없으므 로 이 모임에서 설교자의 발전 요소를 지적하는 것은 필요하지 않다. 청중이 참여하는 설교 비평 모임은 설교에 대한 이해를 보완해주며 각자의 공감을 나누는 것, 그리고 각자의 깨달음에 대한 구체적인 실천을 나누는 것이 목적이다. 말하자면 청중 그룹의 설교 비평은 설교를 평가하기보다는 말씀을 공유하 고 내면화하는 방법으로 들은 말씀을 드높이는 것에 목적이 있다. Bohren은 설교 비평은 설교의 찬미이며 설교를 해석하는 것이고 설교에 열정적으로 공감하는 것이라고 설명 하였다.47) 그런데 비평이라는 단어는 날카롭게 분석하고 옳고 그름을 논한다는 부정적인 느낌이 강하다. 그러므로 이 모임의 이름에는 ‘설교 비평’이라는 표현대신 서로 격의 없이 대화한다는 느낌을 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좋다. 그래서 연구자가 설교 비평 모임의 이름으로 “들은 말씀 드높이기, 위톡(We Talk)”을 제안한다. ‘위톡’ 46) Bohren, 『설교학실천론』, 286-87. 47) Bohren, 『설교학실천론』, 287-88. 의 원활한 진행을 위하여 참석자들에게 위의 그림과 같은 양식(Form)을 제공하는 것도 도움이 될 것이다. 위톡(We Talk) 모임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잘 훈련된 리더가 필요하다. 리더를 세우는 가장 모범적인 사례는 옥한흠 목사의 제자훈련을 예로 들 수 있다. 평생의 목회를 통해 평신도를 깨우는 일에 집중했던 옥한흠은 한국교회의 문제점이 평신도를 수동적인 존재로만 취급한 것이라고 지적한다.48) 옥한흠의 제자훈련은 평신도 지도자를 세우는 것이 목적인데 평신도 지도자(순장)들의 사명은 각 다락방에서 순원들과 함께 말씀을 중심으로 하는 대화를 이끄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제자훈련은 한 시대의 유행이 아니라 지속(持續)되어야 할 성경적 모델이다. (4) 이처럼 청중들이 설교를 서로 나누고 적용하게 할 때 여기에 ‘집단지성’이 발생 하는 유익이 있다. 집단 지성(集團知性, collective intelligence)이란 한 세기 전까지는 필요성과 유익함을 생각하지 못하던 새로운 발견이다. Charles Leadbeater에 의하면 19세기와 20세기 초에 출현한 대규모 기업들은 군대형 조직이었다. 사람들은 자신이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알고 싶으면 작업 지시서를 보거나, 명령계통의 직속 상관의 지시를 따르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집단지성은 조직이 직면한 여러 가지 도전을 극복할 수 있는 효과적인 방안을 제공하는 대안적인 조직화 방식으로 떠오르고 있다.49)Leadbeater에 의하면 단독 발명가로 널리 알려진 토머스 에디슨이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훌륭한 협업활동가였기 때문이다. 아이디어가 소비자, 개발자, 공급자 사이에 공유될 때 혁신은 번성한다. 아이디어 창안에 관계하는 사람들의 수가 늘어나면, 누가 무슨 일을 했고, 따라서 누가 어느 만큼 소유하게 될지를 계산하는 것은 점점 어려워진다. 협업에 의한 혁신은 반드시 공동 소유권의 형태를 취해야 한다.50) 이처럼 발명과 생산의 아이디어 창출에서 협업을 통한 집단지성이 발생한다면 청중이 들은 말씀을 가지고 서로 이해와 깨달음 및 그 적용을 서로 나누는 동안에도 집단지성을 통한 상승효과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유익함은 태초부터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부여해 주신 축복이다. 그러므로 이를 가장 먼저 활용하고 유익함을 누려야 하는 것은 바로 교회 공동체이다. 그리고 이러한 유익은 설교 비평을 위한 ‘들은 말씀 드높이기, 위톡’ 모임을 통해서 적용할 수 있다. 48) 옥한흠, 『다시 쓰는 평신도를 깨운다』 (서울: 두란노, 1999), 43.49) Charles Leadbeater, We think : mass innovation, not mass production, 이순희 옮김, 『집단지성이란 무엇인가 : 우리는 나보다 똑똑하다』 (파주: 북이십일, 2009), 131.50) Leadbeater, 『집단지성이란 무엇인가 : 우리는 나보다 똑똑하다』, 137. 165. 3) 메타버스 시대의 청중 참여 방안그런데 ‘위톡’을 운영할 때는 대면 방식만이 아니라 비대면 방식까지 적절하게 사용할 필요성이 있다. 2020년에 한국교회는 갑자기 들이닥친 코로나 19의 사태에서 “대면 예배 전면금지 및 비대면 예배만 허용”이라는 전대미문의 행정 명령에 직면하였다. 처음에는 예배 및 설교를 촬영하고 송출하는 것에 관심이 없던 일부 목사들은 혼란을 겪기도 했지만 궁하면 통한다는 격언처럼 1년 이상 그런 상황을 지나오면서 이제는 목사마다 방송 전문가가 되었다. 청중들도 마찬가지이다. 대면 예배 전면금지라는 사상 초유의 사태를 통해 일반 성도들이 가정에서 스마트폰을 통해 예배드리는 것을 경험하게 되었다.51) 소그룹 모 임을 금지당하자 영상으로 회의와 성경공부를 하는 것에 익숙해진 상황이다. 신광철에 의하면 코로나 사태가 극복된 이후에도 사람들은 코로나 19 이전의 상황으로 회복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52) 처음에는 어쩔 수 없이 시작한 비대면 활동이었으나 이제 비대면 활동은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도 사라지지 않고 다양한 방법과 목적으로 활용될 것이다. 오늘날은 메타버스 시대이며 현대인들은 포노 사피엔스가 되어 있기에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공동체 모임에는 비대면 활동을 빼놓고는 생각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므로 ‘들은 말씀 드높이기, 위톡’ 역시 대면 모임과 비대면 모임이라는 두 가지 방식을 적절히 활용할 필요가 있다. 현대인들은 스스로 인식하기도 전에 메타버스 세계에 살고 있다. 메타버스란 무엇이며 이를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 메타버스(Metaverse)는 초월을 의미하는 메타(Meta)와 현실 세계를 뜻하는 유니 버스(Universe)의 합성어로서 현실 세계와 다른 가상 공간 세계를 지칭하는 개념이다. 메타버스는 1992년 Neal Stephenson의 SF 소설 스노우 크래쉬(Snow Crash) 에서 처음 등장한 표현이다.53) 기술연구단체인 ASF(Acceleration Studies Foundation)는 메타버스를 증강현실(Augmented Reality), 일상기록(Lifelogging), 거울 세계(Mirror Worlds), 가상세계(Virtual Worlds)의 네 가지로 분류한다.54)메타버스는 전 세대를 막론하고 문화와 예술, 교육과 각종 사업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아직 메타버스라는 용어조차 생소한 사람일지라도 인터넷 쇼핑을 한 번 이라도 해 보았거나 소셜네트워크 서비스(SNS)를 한 번이라도 사용해 보았다면 그는 이미 메타버스의 거울 세계와 라이프로깅을 경험한 사람이다. 또한, 오늘날은 뉴미디어 생태계의 세상이다. 스마트폰, 태블릿PC, 스마트TV 등 51) 안덕원, “디지털 미디어 시대의 기독교 예배-전통적인 경계선 밖에서 드리는 대안 예배를 위한 제언”, 한국복음주의실천신학회, 「복음과 실천신학」 56 (2020): 48. (https://doi.org/10.25309/kept.2020.8.15.045)52) 신광철, “위드/포스트 코로나 시대 문화콘텐츠 교육의 방향”, 인문콘텐츠학회, 「인문콘텐츠」 59 (2020/12): 109.53) 한송이 · 김태종, “메타버스 뉴스 빅데이터 분석: 토픽 모델링 분석을 중심으로”, 한국디지털콘텐츠 학회, 「한국디지털콘텐츠학회 논문지」 22/7 (2021/07): 1092.54) 김상균, 『메타버스』 (화성: 플랜비디자인, 2020), 23. 으로 IT 패러다임이 확산된 ICCT(Information, Communication, Contents Technology) 거버넌스(governance)에서의 미디어 환경은 콘텐츠(Contents), 플랫폼 (Platform), 네트워크(Network), 그리고 디바이스(Device)의 네 가지 CPND가 상호 결합하여 의사소통이 이루어지고 있다.55) 현대인들은 이러한 뉴미디어의 CPND를 통해서 온라인 쇼핑과 음식 주문, 영화감상과 은행 업무 등 온라인 전가 상거래 활동을 하고 있다. 그리고 젊은이들은 물론이고 상당수의 노년층 인구들도 각종 SNS를 통해 의사소통과 희노애락을 나누고 있다.56)이렇게 뉴미디어의 CPND를 사용하는 현대인들은 특히 스마트폰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포노 사피엔스가 되어 있고 오늘날이 포노 사피엔스 시대라는 사실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57) 현대인이 가장 사랑하는 물건, 내 몸에서 절대로 멀리 두지 않는 물건, 명품을 제외하고는 외출할 때 반드시 소지하는 물건은 바로 스마트폰이다. 자신이 소지한 물건의 목록을 작성하게 한 후 하나씩 버리는 실험을 해 보면 속옷을 제외하고는 거의 마지막까지 남는 물건이 바로 스마트폰이다.58) 이렇게 스마트폰을 손에서 놓지 않고 생활하는 사람들을 포노 사피엔스라고 부른다. 성균관대학교 기계공학부의 최재붕 교수에 의하면, “포노 사피엔스란 스마트폰의 등장으로 시공간의 제약 없이 교통할 수 있고 정보 전달이 빨라져 정보 격차가 점차 해소되는 등 편리한 생활을 하게 되면서, 스마트폰 없이 생활하는 것이 힘들어지는 사람이 늘어나며 등장한 용어이다.” 이 말은 “영국의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가 ‘지혜가 있는 인간’이라는 의미의 호모 사피엔스에 빗대어 포노 사피엔스(지혜가 있는 폰을 쓰는 인간)라고 부른 데서 나왔다.”59) 최재붕은 포노 사피엔스 시대는 전 세계 50%의 인구가 선택한 인류의 운명(運命)이라면서 앞으로 지속적으로 확대될 문명으 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한다.60)이는 사도 시대에 복음이 전해진 로마의 도로망과 비교해 보더라도 당연한 이치 이다. 사도들이 복음을 전하기 전에 로마 사회는 로마는 반란을 진압하고 세금을 징수하며 상업적 이익을 도모하여 제국을 효율적으로 통지하고자 제국 전역으로 통하는 도로를 만들어 ‘길은 로마로’ 통하게 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러한 인프라를 복음을 전파하는 도구로 사용하셨다. 로마가 군사적 목적으로 만든 도로를 통해 복음은 급속히 제국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인터넷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인터넷은 처음에 군사적 목적으로 개발되었지만 상업 용도로 급속히 확산되었다.61) 55) 최창현, “C-P-N-D 생태계와 ICCT”, 한국디지털정책학회, 「디지털융복합연구」 12/3 (2014): 7-8.56) 이승진, “뉴노멀 시대에 적실한 설교 사역에 관한 연구”, 한국설교학회, 「설교한국」 13 (2021 봄): 13.57) 박성환, “포노 사피엔스 시대에 스마트폰을 활용한 어린이 설교”, 한국복음주의실천신학회, 「복음과 실천신학」 59 (2020): 199. (https://doi.org/10.25309/kept.2021.5.15.173)58) 김상균, 『메타버스』, 29.59) 최재붕, 『포노 사피엔스 : 스마트폰이 낳은 신인류』 (파주: 쌤앤파커스, 2019), 25.60) 최재붕, 『포노 사피엔스 : 스마트폰이 낳은 신인류』, 90-92.61) 김현철 · 조민철, 『메타버스 교회학교』 (서울: 꿈이있는미래, 2021), 41. 초대교회 시대에도 예배는 모여서 드렸지만 복음 전파와 양육에는 편지를 사용 하기도 했다. 특히 사도 바울은 직접 전도했던 지역 교회는 양육하는 일에 편지를 활용하였고 방문한 적이 없는 로마교회에도 편지로 복음을 전했다(롬 1:15). 베드로와 요한, 야고보와 유다도 편지로 성도를 양육하는 일에 힘썼다. 이것을 생각하면 오늘날 예배는 대면 모임을 중시하더라도 전도와 성경공부 등의 소모임은 비대면을 활용 할 수 있다. 총신대학교의 주종훈 교수에 의하면 가상 공간의 모임에서도 성령께서 역사와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수 있다.62)현실 세계와 메타버스를 병행하여 위톡 모임을 운영할 때는 다음과 같은 긍정적인 효과가 예상된다. (1) 현실 세계는 한 주간에 두 번 이상 모이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메타버스는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언제나 교제하며 삶을 나눌 수 있다. (2) 혹 어떤 구성원이 대면 모임에 동참하지 못하는 사정이 발생했을 경우 그 구성원을 위하여 대면 및 비대면 모임을 병행할 수 있다. 이 경우 현장에 와 있는 구성원들 도 모두 영상회의 도구(Zoom, Meet 등)에 접속하여 얼굴을 마주 볼 수 있다. (3) 메타버스로 대화하면서 발생하는 아쉬움은 현실 세계의 대면 만남을 더욱 갈망하게 만들어 준다. 그 결과 약속된 대면 모임을 더욱 귀히 여기며 사모하게 될 것이다. (4) 위톡 구성원들끼리의 대화방을 적절히 활용하면 지난주일 설교의 요지를 올려 주어서 기억을 되살려 주거나 각자가 결심한 실천 사항을 격려하는 데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III. 나가는 글이상으로 연구자는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교회 활성화를 위한 청중의 설교 참여 방안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코로나 19로 공동체의 기능을 상실할 위기에 처한 한국교회는 코로나 19가 종식되지 않더라도 위드 코로나의 방법으로 소그룹 모임이 재개될 것을 기대하면서 대비할 필요성이 있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 연구자는 설교 비평을 제안하였다. 설교 비평이 필요한 또 한 가지 중요한 이유는 한국교회 강단의 설교가 정당성과 적실성이 확보되지 않은 채 선포되는 경우가 있고 이에 대한 보완책이 필요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설교 비평은 자칫하면 설교 비판이라는 부정적 결과로 전락할 우려가 있다. 이런 우려는 실제로 설교 비평의 포문을 연 정용섭의 두 비평서에서도 드러났음을 류응렬과 정인교의 분석과 평가를 통해 확인하였다. 그러므로 설교 비평을 시행하기 전에는 먼저 객관적이고 바람직한 비평의 기준을 마련하고 비평자의 자질도 잘 준 비해야 한다. 또한, 설교 비평을 시행할 때에는 설교 발전을 위한 설교자 비평 그룹 62) 주종훈, “디지털 예배의 목회적 신학적 고찰과 실천 방향”, 한국복음주의실천신학회. 「복음과실천신학」 60 (2021): 74. (https://doi.org/10.25309/kept.2021.8.15.045) 과 설교를 찬미하고 말씀을 드높이기 위한 일반 청중 그룹으로 구분하여 시행하는 것 이 좋다. 설교자 비평 그룹은 먼저 비평을 위한 충분한 준비 공부를 한 후에 시작하되 서로 예의를 갖추어 격려와 감사를 한 후에 발전을 위한 제언을 하는 “설교 공감 모임”으로 진행함으로 긍정적인 효과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으로 일반 청중의 경우에는 먼저 성숙한 리더를 세우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비평 그룹의 명칭도 비평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말고 허심탄회하게 서로 대화하는 느낌을 주는 이름 “들은 말씀 드높이기: 위톡”을 사용하는 것이 좋다. 대화의 내용은 “지, 정, 의”의 요소로 구분하여 설교에서 무엇을 깨달았는지, 설교에서 어떤 감동을 받았는지, 그리고 설교를 통해 어떤 결심을 하게 되었는지를 나눔으로 신자 개인의 경건과 신앙 공동체의 성숙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오늘날은 메타버스 시대이며 현대인들은 포노 사피엔스임을 감안(勘案)하면 현장에 직접 모이는 방식과 더불어 비대면으로 만나는 방식도 적절히 활용하여 운영할 수도 있다. 그럴 때 대면 모임으로만 미처 생각하지 못한 여러 가지 효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 목회
    • 신학
    2022-03-18
  • 산을 내려오며
    집 뒤에 작은 산이 있다. 높지 않아 산책하듯 다녀온다. 산을 오르기 위해서는 오르막 길을 가야하고 내려오기 위해서는 내리막 길을 걸어야한다.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다. 인생도 그러하다. 이것을 잊지 않기 위해 수시로 산을 찾는다.
    • 문화
    • 포토에세이
    2022-03-18
  • 피곤한 인생
    늦은 심야 버스 앞자리 여성이 졸고 있다. 꾸벅꾸벅 아, 피곤한 인생이여
    • 문화
    • 포토에세이
    2022-03-18
  • 기억치료
    한 대학생 남자가 상담사를 찾아와서 하는 말이 자신이 지금까지 살아온 삶이 너무나 바보 같아서 “이제는 절대로 과거처럼 살아가지 않겠다”고 말하면서 자신을 완전히 바꾸어 성공적인 삶을 살고 싶다고 말했다. 무엇이 그 학생으로 하여금 지난 날의 삶을 전부 부정하고 완전히 다른 삶을 살아가게 만들었는지 궁금해서 최근에 어떤 일을 겪었는지를 물어보게 되었다. 그 학생에게는 일년 동안 사귀던 여자 친구가 있었는데 학교 공부도 내팽개칠 정도로 끔찍이 잘 해주었건 만 군대를 다녀온 직후 그녀로부터 이별을 통보받았다고 한다. 무척이나 사랑했던 사람으로부터의 버림을 당하는 경험은 그 학생에게 자신이 무가치하고 지금까지 잘못된 삶을 살아왔다고 생각하기에 충분할 만큼 충격적이었다. 그 충격이 너무나 커서 그 이전에 살았던 삶에서는 약간의 가치도 찾을 수가 없고 100% 다른 삶을 살아야 한다는 극단적인 생각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연애를 하면서 허비하던 과거와는 반대로 1분 일초도 낭비하지 않고 계획하고 무엇인가를 배우고 노력하며 살아가는 완벽주의를 추구하게 되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다양한 경험을 하는데 그 경험 중에 때로는 상처를 받기도 하고, 해야 하는 많은 일로 스트레스를 받게 되지만 대부분 어려움들을 잘 이겨낸다. 그것은 우리 인간에게 있는 기억을 처리하는 기능 때문이다. 하루에 있었던 경험을 필요한 것은 저장하고 그렇지 않은 것은 처리하면서 적절하게 정보들을 처리하는 놀라운 기능을 인간의 뇌는 가지고 있다. 그런데, 살아가면서 어떤 충격적인 사건을 경험할 때 그 사건이 뇌의 일반적인 기능을 압도해 버리면 뇌는 그 경험을 적절하게 정리하지 못하고 그 때 경험한 감정, 믿음, 행동을 생생하고 강하게 기억함으로 말미암아 현재의 삶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게 된다. 위에 설명한 이야기의 주인공이 그렇게 반응하는 경우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여자 친구와의 헤어짐이 아픈 경험이지만 뇌에서 적절하게 기억을 잘 처리할 수 있었다면 그렇게 극단적인 반응을 보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픈 경험을 교훈 삼아 앞으로의 삶에서 더 건강한 선택을 하며 살아갈 수 있을 텐데 너무나 큰 충격을 받은 나머지 소화시키기가 어려웠고 그 사건이 있기 이전의 모든 삶은 무가치하고 의미 없는 삶으로 바라보게 된 것이다. 큰 트라우마로 인해서 자신의 과거 삶에 대한 부정적인 인지가 생겨난 것이다. 그런 부정적인 인지는 그의 삶에서 ‘완벽주의’라고 하는 삶의 방식을 선택하게 만들었다. 아마존의 심리학 분야 베스트 셀러 중에 하나였던 『트라우마, 내가 나를 더 아프게 할 때』 라는 책은 뇌의 정리가 되지 않은 부정적 기억 즉, 과거의 트라우마를 EMDR (Eye Movement Desentization Reprocessing) 기법으로 치유할 때 사람들에게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지를 설명하는 책이다. 이 책의 제일 첫 장은 처리되지 않은 무의식적 기억이 나를 지배한다는 제목으로 세 사람의 사례를 설명하는 데 이들 모두 성인으로서 정상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일 것 같은데 처리되지 않은 과거의 무의식적 기억으로 인해 삶에서 부정적인 행동 패턴을 가지게 된 것을 설명한다. 현재의 삶을 건강하게 살아가기 위해서 과거의 부정적 경험이나 그 경험에 대한 기억을 다루는 것이 왜 그렇게 중요할까? 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현재의 삶에서 그다지 실패를 경험하지 않고 정서적으로 어려움을 겪지 않으며 평온하게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과거를 다루는 것이 그렇게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사건, 사고는 누구나에게 일어날 수 있고 관계의 어려움은 내가 원치 않아도 일어날 때가 있다. 그래서 어린 시절은 행복하게 특별한 문제없이 살았다가 성인이 된 이후에 시댁과의 관계에서 큰 트라우마를 겪는 분들도 있기 마련이다. 그 트라우마의 경험이 적절히 내면 안에서 처리가 되지 않는다면 성인기의 트라우마도 위의 예처럼 충분히 부정적인 인지와 부정적인 삶의 행동방식으로 이어지게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처리가 되지 않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처리되지 않았다는 것은 쉽게 생각하면 과거의 아픈 경험이 무의식적으로든 의식적으로든 현재의 삶의 감정, 사고, 행동에 강한 부정적인 영향으로 반응되어진다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시댁식구와의 갈등을 겪은 사람이 시댁이라는 말만 들어도 마음이 갑자기 차가워지고 가슴이 많이 답답해진다면 그것은 처리가 되지 않았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반대로 처리가 되었다는 것은 과거의 나쁜 경험이 내 안에서 충분한 처리 과정을 거쳐서 이해되어지고 통합되어져서 감정적으로, 생각으로, 행동으로 적절한 반응을 보이게 되는 것이다. 예전에는 마음에 떠올리기만 해도 극도 한 분노가 올라왔는데 이제는 약간의 불편함은 있지만 담담하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생긴다면 적절한 처리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위에 소개한 책에서는 적절한 처리가 된 것을 ‘적응적 해결 (adaptive resolution)’이라고 말한다. 어떤 정서적 혼란을 경험했을 때 뇌에 있는 치유를 위한 메커니즘인 적응적 정보 처리 시스템이 잘 작동해서 삶에 잘 적응하도록 부정적 경험을 소화해서 성장하는 학습으로 이어지게 하는 것이다. 만약 내 안에 처리되지 않은 기억이 있다고 여겨진다면 또는 기억은 특별히 나지 않지만 가끔 이성적이지 않은 부정적 생각, 감정, 행동에 무의식적으로 강하게 반응하는 나의 모습을 본다면 내 안에는 어쩌면 처리가 필요한 기억들이 뇌에 저장되어 나를 괴롭히고 있는 지도 모른다. 이런 분들은 EMDR 치료사를 통해 기억 치료를 받거나 아니면 가까운 지역의 상담사를 통해 충분한 트라우마 치유를 통해 자신의 기억을 적절히 다루어 더 이상 과거가 현재의 삶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지 않도록 도움을 받는 것이 필요하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예전에 비해서 좋은 치료사 선생님들이 많이 배출되어 있어서 지역마다 상당히 좋은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는 선생님들이 계신다. 그러므로 눈에 보이지 않지만 어쩌면 가장 중요한 내면의 건강을 위해 그리고 건강한 기억과 적응적 해결을 위해 시간을 투자하여 현재와 미래의 삶이 모두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란다. 이것은 락 다운 기간에 해볼 만한 인생을 위한 좋은 투자가 될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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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3-18
  • 이상대 목사, 미래목회포럼 대표 선임
    (사)미래목회포럼 제18회 정기총회가 12월 2일 오후 2시 한국기독교연합회관 중강당에서 있었다. 1부 총회 회무처리는 오정호 목사(대표, 새로남교회)의 사회로 심상효 목사(서기, 성지교회)가 회원 점명 후 박재신 목사(실행위원, 은혜광성교회)가 개회기도했다. 이상대 목사(총괄본부장, 서광교회)가 정기이사회 결의안을 보고하고, 박병득 목사(사무총장)이 2021년도 사업결과 보고를 했다. 현종익 전 총장(감사, 제주대학교)이 2021년도 감사 보고를 하고, 박 사무총장이 회계보고 후 정성진 목사(이사장, 거룩한빛광성교회)가 제18회기 대표 및 임원을 인준했다. 박 사무총장이 휘장을 분배하고 고퇴를 전달했으며 신구 임원을 교체했다. 이어 배진기 목사(중앙위원, 포항안디옥교회)가 폐회기도함으로 정기총회를 마쳤다. 취임사하는 이상대 목사 2부 이취임 및 위촉 감사예배는 이동규 목사(부대표, 청주순복음교회)의 인도로 박동찬 목사(부대표, 일산광림교회)가 기도 후 황덕영 목사(부대표, 새중앙교회)가 사도행전 18장 5절부터 11절까지 봉독했다. 서광교회 중창단의 특송 후 최이우 목사(전 대표, 지도위원, 한국복음주의협의회 회장, 종교교회)가 ‘두려워 말고 말하라’는 제목으로 설교했다. 최 목사는 “바울의 선교에는 여러 장애가 있었고, 고린도 지역을 선교할 때 여러 어려움이 있었다. 바울은 잘못된 복음을 전하는 자들과 대결하며 복음을 전했다. 행위를 통해 구원 얻고자 하는 자들에 대해 바울은 오직 믿음을 강조했다”며 “여러 어려움으로 두려워하는 바울에게 주님은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셔서 바울은 고린도에 1년 6개월을 머물며 복음을 전했다”면서 “우리가 전할 복음은 오직 예수이다. 코로나로 어려운 상황에 있는 교회에 미래목회포럼이 희망이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이후 ‘한국교회 거룩성 회복과 코로나19 종식을 위해’ 송용현 목사(중앙위원, 안성교회)가, ‘한국교회의 연합과 남북통일을 위해’ 설동주 목사(본부장, 과천약수교회)가, ‘대통령 선거와 사회통합을 위해’ 윤성민 교수(정책자문위원, 강남대학교)가 합심기도했다. 오정호 목사가 “응원을 많이 해주셔서 감사하다. 대선을 앞두고 신자들이 다른 종교 행사에 어디까지 나서야 하는지 포럼을 통해 가이드 라인을 만든 것에 보람을 느낀다. 신임원들이 더 큰 일 감당하기 바란다. 정치적 견해는 달라도 신자로서 중용의 자세를 가져야 한다”며 “모든 것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이임사하고, 정성진 목사가 “신임원들이 잘 해줄 것을 기대하면서 물러나게 되어 감사하다”고 직전 이사장 이임사했다. 이상대 대표가 “모든 순서를 맡아주신 분들에게 감사드린다. 기자들에게도 감사한다. 지난 2년간 코로나로 한국교회가 어려웠다. 이 상황에서 다양한 방법으로 대응했다. 미래목회포럼은 대정부 발언을 여러 차례 했다”며 “다섯 차례의 포럼을 통해 방향제시를 했다. 한국교회의 미래를 고민해야할 때가 되었다”면서도 “2022년을 대비하며 가슴이 띈다. 미래에 소망을 주는 미래목회포럼이 되겠다. 대안과 정답을 제시하는 미래목회포럼이 되겠다. 사회를 향해서도 우리의 목소리를 내겠다. 잘 감당하도록 관심과 기도를 부탁드린다”고 대표 취임인사했다. 박경배 이사장(송촌장로교회)은 “미래목회포럼이 기쁨을 주었다. 귀한 직임을 주셨으니 기대에 맞게 성실히 감당하겠다. 사회의 어려움에 교회도 책임이 있다. 교회가 어려워진 것에는 목회자의 책임이 크다”며 “한국교회에 더 나은 방향을 제시하는 미래목회포럼이 되기를 바란다”고 이사장 취임인사했다. 지형은 목사(기성 총회장, 성락성결교회)가 “미래목회포럼 구성원은 한국교회에 본이 되는 분들이다. 포럼이 살아있는 물을 공급하는 큰 일 감당하시기 바란다. 열정적인 신임 이사장과 대표를 통해 내년도에 많은 일 하시기 부탁드린다”고 축사하고, 김인환 목사(전 대표, 지도위원, 성은교회)가 “연합사업은 미래목회포럼이 처음이었다. 회원들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다. 미래목회포럼은 ‘포럼’이기에 학문이며 신학이다. 미래목회포럼은 한국교회의 방향을 제시해줘야 한다”고 축사했다. 이어 김봉준 목사(전 대표, 지도위원, 아홉길사랑교회)가 축하 케익 및 컷팅식을 진행한 후 오정호 목사(직전 대표, 새로남교회)가 축도함으로 감사예배를 마쳤다. 미래목회포럼 핵심가치 - 한국사회와 교회에 제기되는 제반 현안과 이슈에 대해 대안을 제시한다. - 한국교회 목회자들의 연합과 나눔, 혁신을 통한 영적갱신운동을 전개한다. - 바른 기독교 정신, 문화정착을 위한 역할을 감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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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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