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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흥청망청” 108회 선관위... 명분없는 돈 낭비
    본 기사는 교회발전연구소 대표 이능규 목사에게 모 인사가 108회 선관위(위원장 권순웅 목사)에 대해 제보한 내용을 바탕으로 작성한 기사임을 밝힌다. 제보 내용에 따르면 선관위가 불필요한 돈을 낭비하고 있다. 제108회기 선관위는 공정선거감시단 해외 활동에 이미 많은 경비를 집행했다. ▲전국장로회연합회 임역원수련회(일본) : 고정식, 손정호, 김삼주, 신덕수, 한기영(750만원 집행) ▲농어촌교역자부부수양회(다낭) : 권순웅, 신덕수, 지동빈, 임종환, 최병도(613만원 집행) ▲전국교역자하기수양회(필리핀) : 전웅구, 김상원, 유병희, 한기영, 이상돈(599만5천원 예산). 이때 위원장 권순웅 목사와 서기 한기영 목사가 강사를 맡았다고 한다. 현재 바뀐 선거규정에 따라 후보자는 행사에 참석할 수 없다. 그런데 선관위 공정선거감시단은 누구를 감시하기 위해 해외 행사에 동행하는 것인가? 제보자는 “돈**”이라는 격한 표현을 사용했다. 또한 선관위는 민찬기 목사가 제기한 가처분 신청 소송에 대응하기 위해 변호사비로 5천 5백만원을 지출했다. 선관위원들이 1차 투표해 7대7로 나왔다면 의견이 팽팽하다는 것인데 굳이 다시 투표해 7대8로 만든 것이 화근이다. 증경총회장단이나 실행위원회에 넘겨 자문을 구했다면 굳이 총회 돈을 지출할 소송에 휘말리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것이 중론이다. 현재 감사부는 107회기 선거관리위원회(위원장 배광식 목사)에 대해 특별재정감사를 하고 있다. 어제는 서기와 회계를, 오늘은 위원장과 심의분과장을 부른다. 안건은 선관위가 재정을 과잉지출했다는 것이다. 모 선관위원은 자기들은 비용을 아껴서 사용했다고 주장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기에 특별재정감사를 받는 것이다. 앞으로 108회기 선관위도 감사부에 의해 특별재정감사를 받지 말란 법이 어디 있겠는가? 이 악순환을 끊어야한다. 선관위의 근본적인 개혁이 필요한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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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03
  • 취재 기자를 내쫓는 노회들...무엇이 두려운가?
    봄 정기노회가 열리는 계절이다. 서울에서 먼 지방의 몇몇 노회를 취재갔다. 그 중 2개 노회에서 “내쫓김”을 당했다. 이리노회는 북일교회 문제로 회원 호명 때부터 시끄러웠다. 결국 노회원들간에 고성이 오갔다. 이런 가운데 취재하고 있는 기자들에게 나가달라고 "거칠게" 요구했다. 결국 쫓겨날 수 밖에 없었다. 충청노회도 전 총신대총장 김영우 목사 피소건에 대해 다루며 기자들에게 나가달라고 “험악하게” 요구했다. 결국 본당 중이층으로 쫓겨갈 수 밖에 없었다. 기자는 사실을 취재하고 알리기 위해 그 현장에 가 있는 것이다. 북일교회 문제는 대부분의 총회원들이 알고 있을만큼 큰 이슈이다. 당연히 기자들이 가서 취재할 수 밖에 없는 사항이다. 기자는 총회원들의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 대신해서 그 현장에 간 것이다. 그런데 무슨 이유로 기자들을 내쫓는 것인가? 그것이 과연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겠는가? 기자가 보면 안될만큼 감춰야할 문제가 있는가? 사실을 사실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문제해결에 도움이 될 수 있다. 문제 없는 노회는 취재간 기자들을 반기며 좋게 기사를 써서 노회를 잘 홍보해 달라고 부탁한다. 기자로서도 기분좋은 일이다. 반면 문제 있는 노회는 기자를 내쫓는다. 마치 잡상인 취급을 한다. 부득이 기자를 내보낼 필요가 있다면 “정중하게” 요청했으면 한다. 같은 합동측 목사한테 그렇게 함부로 해서 되겠는가? 앞으로도 “문제 있는” 이리노회와 충청노회 “사태 추이”에 대해 예의주시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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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03
  • 【단상】 기록....소멸에 대한 몸부림
    기자는 기자(記者)다. 쓰는 자라는 말이다. 나는 15년간 담임목회를 하다가 갑자기 기자가 됐다. 그래서 많이 미숙하다. 지금도 여전히 실수하며 배워나가고 있다. 기자라는 이름을 가지고 처음 기사를 쓴 것은 2020년 9월이었다. 한 행사에 동행해 기사를 써야하는데 막막했다. 결국 다른 기자의 기사를 참고해 어거지 기사를 썼던 기억이 있다. 지나가니 이 또한 “추억”이다. 기자는 어떤 사건, 일에 대해 기록을 남기는 자다. 주로 사용하는 방법은 “글”이다. 글로 남기고 평가한다. 요즘은 녹음이나 녹화를 병행한다. 이 모든 것은 결국 남기기 위해서다. 유한한 인간이 하는 모든 것들은 다 소멸한다. 어떤 행위, 행사, 말 등등은 다 과거로 사라지며 소멸의 과정을 거친다. 이에 대한 저항, 몸부림이 쓰거나, 녹음하거나, 녹화하는 것이다. 나는 언젠가부터 녹화를 병행한다. 스마트폰에 촬영 기능이 있기 때문이다. 비록 방송 장비를 거창하게 준비하지 않아도 스마트폰만 있으면 즉시 현장에서 촬영이 가능하니 얼마나 좋은 세상에 살고 있는가? 이번 43회기 전국남전도회연합회 행사를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촬영했다. 그리고 각 기사에 영상을 첨부했다. 너무 좋았던 설교나 강의를 남기기 위해서다. 기사는 아무래도 한계가 있다. 모든 내용을 다 기록할 수 없고, 강사의 열정을 담아낼 수 없다. 기사에 대한 보완이 동영상 촬영이다. 이것은 일차적으로 나를 위한 것이다. 유익했던 내용을 기록으로 남겨 언제라도 보고 듣고 싶은 것이다. 그리고 그것에 대해 관심있는 자들에 대한 배려이다. 유튜브는 우리 생활에 깊숙이 파고 들었다. 나만해도 거의 텔레비전을 안 본다. 유튜브가 더 재밌고 유익하기 때문이다. 많은 개인들이 이곳에 동영상을 올리고 있다. 그리고 필요한 사람들은 찾아서 보고 있다. 나 또한 그 일에 동참하고 있는 것이다. 유한한 인간으로서 우리는 시간 속에서 소멸해 가고 있다. 나는 기자로서 글과 녹음, 촬영의 방법으로 기록으로 남기는 일을 한다. 기자는 다양한 방법으로 시간의 기록을 남긴다. 그래서 재밌고 보람이 있다. 이것이 기자라는 직업의 한 매력이라고 생각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사라지고 소멸하는 어떤 것에 대해 흔적을 남기는 또 다른 기사를 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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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15
  • 【내이야기】 달라진 설 명절 풍경
    설 명절 연휴를 보낸다. 이제는 과거와 다른 모습으로 이 기간을 보낸다. 예전에는 명절날 미리 준비한 음식을 가지고 부모님 댁에 와 아침을 동생네와 같이 먹었는데 이젠 그렇지 않다. 담임목회 중단 후 부모님 댁에 같이 살기에 명절날 아침 일찍 차 타고 올 일이 없다. 그리고 장모님께서는 재작년인 2022년에 세상을 떠나셨기에 처가댁에 갈 일도 없다. 처가댁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명절에 부모님 드실 것, 우리 식구 먹을 것 간단하게 준비해 밥 먹으면 그것으로 끝이다. 찾아갈 곳도, 찾아올 사람도 없다. 연휴 기간에는 취재할 일도 없기에 미리 대출한 여러 권의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낼 계획이다. 그러다 심심하면 밥 먹고 운동 삼아 뒷동산 한바퀴 돌고 오면 된다. 참으로 평안한 설 연휴이다. 지방에 사는 사람들은 명절을 맞아 긴 시간 차에 시달리며 고향을 찾아간다. 젊을 때 텔레비전에서 귀성길로 고속도로에 막혀 있는 차들을 보며 지방 여자와는 결혼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아내는 경기도 여자이다. 나 또한 서울 태생이라 지방과는 관계가 없다. 아버지는 경기도 분이신데 젊을 때 서울로 올라오셨고, 어머니는 충청북도 분이신데 결혼 후 서울에서 사셨고, 외가댁도 사라졌기에 더 이상 지방하고는 관계가 없다. 그래도 명절이라고 고향을 찾아가는 긴 행렬은 세월이 흐르면 아마 사라지지 않을까? 설레고 좋았던 어린 시절의 명절과는 너무 다른 명절이다. 앞으로 또 어떻게 달라질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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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09
  • 【내이야기】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4년전 담임목회를 중단하고 나올 때 두 명의 목사님이 떠 올랐다. 같은 노회, 같은 시찰회에 내가 시무했던 교회의 나쁜 것을 따라하는 교회가 있었다. 나는 다섯 번째로 담임목사직에서 내쫓겼는데, 같은 시찰회의 그 교회는 3명의 담임목사를 내쫓았다. 첫 번째 목사는 노회에 문제를 일으켜 면직됐고, 이후 부임한 목사는 몇 년 못있다가 갈등하고 결국 사임했다. 이후 또 한 목사가 왔는데 얼마 안있다가 내쫓겼다. 두, 세 번째 목사들과는 시찰회에서 교제를 했었다. 그런데 그들이 교회에서 어려움을 당하고 결국 사임했을 때 큰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러다 막상 내가 그 일을 당해보니 그 두 목사에게 참으로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들이 얼마나 힘들었을까를 내가 당해보니 비로소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2번째로 내쫓겼던 목사는 나왔던 교회 근처에서 목회하다 이전했는데 나중에는 노회를 옮겨 지방으로 갔다. 3번째로 내쫓겼던 목사는 무엇을 하는지 알지 못한다. 내가 그 두 목사가 어려울 때 관심을 갖지 않았기에 내가 어려울 때 다른 목사들의 무관심에 놀라기도 했지만 나도 그랬기에 ‘사람이 다 그렇지’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이제 내가 겪은 아픔을 통해 어려움 당하고 있는 목사에 대해 조금이나마 이해하고 동정할 수 있게 됐다. 과부가 다른 과부에 대해 진심으로 울어 줄 수 있는 것처럼 내가 그렇게 된 것이다. 성경은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롬 12:15)했지만 이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는 당해보면 안다. 그래서 함께 울어주는 자가 진짜 나를 사랑하는 자라는 것을 알 수 있다. 2024년 새해에는 이 한 구절의 말씀을 조금이나마 실천하며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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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1-13
  • 【단상】 2023년을 보내며...감사하고 감사하다!
    38년전인 1985년, 총신대 신학과 입학을 위한 면접에서 면접관이 좋아하는 성구를 외워보라고 했다. 그때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6-18)”를 말했던 것이 지금도 기억난다. 아마 면접이라는 떨리는 상황에서 생겨난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 성구는 대부분의 신자들이 좋아하고 암송하는 구절이다. 그때 왜 이 구절이 생각났는지는 모르겠다. 이후 자주 이 구절은 기억 속에 떠 올랐다. 한해를 마무리하는 시점에 또다시 이 구절이 떠오름에 감사하다. 2023년에 다양한 일들이 있었다. 좋았던 일도 있었고 나빴던 일도 있었다. 그러나 그 모든 과정을 거쳐 지금 시간에 이르렀기에 감사하다. 나빴던 일들도 언젠가 협력해 선을 이룰 것이라고 믿기에 그 또한 감사하게 생각한다. 변화를 싫어하고 안정지향적이기에 교회 개척은 생각해 본적도 없이 부목사를 거쳐 담임목회에 나서 15년간 목회를 하다 중단되고 생각지 않은 언론인의 길을 가고 있다. 이 과정에서 목회를 했으면 만나지 않았을 다양한 일들을 경험했다. 때로 힘들고 황당했지만 그래도 결론은 은혜였고 감사였다. 이제 몇시간 남지 않은 올 한해 2023년을 돌아보고 또 은혜와 감사로 마무리 하게 되어 감사하다. 인생에 원치않던 급변침이 있었지만 침몰하지 않고 미지의 길로 가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내년 말에도 또 다시 은혜와 감사의 마무리가 있을 것을 기대해 본다. 아듀 202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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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2-31

실시간 칼럼 기사

  • 【내이야기】 “형이 왜 기자하는거야?”
    “형, 형이 왜 기자하는 거야?”하고 오랜만에 만난 1년 후배가 물었다. 한국군종목사단장을 역임하고 해군 대령으로 예편해 김포에 규모있는 교회로 부임한 학교, 동아리, 군목 후배였다. 그날은 아직 친구 밑에서 취재부장이라는 직함으로 기자 생활을 하고 있을 때였다. 친구가 군선교사 모임이 있으니 가보라고 해서 갔는데 그만 후배를 만난 것이었다. 후배는 오랫동안 연락이 끊어진 동안 왜 하고 있던 담임목회를 안하고 기자를 하는지 물은 것이다. 잠시 부끄러웠다. 기자라는 신분이 초라해 보였다. 가수 현진영이 노래한 “저 여자가 내 여자여야하고, 저 가정이 내 가정이어야 하는데”같이 “순서 맡는 자리가 내 자리가 되야하고, 박수 받는 자리가 내 자리여야 하는데” 이제는 그런 사람들을 취재하는 기자가 된 것이다. 후배에게 “살다보니 그렇게 됐다”는 식으로 간단히 말하고 헤어졌다. 이후 이 후배를 한 취재현장에서 또 보게 됐다. 그러자 “형, 형 글발이 살아 있던데. 언제부터 그렇게 기사를 잘 썼어?”하고 말했다. 그리고 이때는 시간 여유가 있어 교회를 떠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를 설명했다. 만 나이 39세에 서울 시내 중심가 용산에 있는 동암교회 담임으로 부임했다. 군목 4년, 경기노회 소속 혜성교회에서 부목사 3년, 또 같은 경기노회 소속 승동교회에서 부목사 5년을 보내고 처음 지원한 곳에 설교 한번 하고 부임했다. 이 교회는 함남노회의 중심교회로서 당시 한석지 증경총회장이 원로목사로서 생존해 계셨었다. 공교롭게 내가 교육전도사로 있었던 람원교회가 같은 함남노회라 1992년 목사 안수를 동암교회에서 받았는데 13년만에 담임으로 부임한 것이다. 1992년 한석지 목사님께서 원로로 물러난 이후 이 교회는 12년간 4명의 담임목사를 이런저런 이유로 내쫓았다. 그리고 15년만에 나도 그 대열에 합류했다. 이유라면, 교회가 성장하지 않은 것에 책임을 지라는 것이며, 자기들이 싫어하니 나가라는 것이었다. 내가 부임할 때 정치부장이었던 이호현 목사님(거짓이 아닌 팩트이기에 실명을 거론한다)은 이때도 정치부장을 하고 계셨는데 교회 상황을 알리자 안타까워하시며 개입을 하셨다. 15년 전 내가 동암교회에 부임하기 전 교회를 방문했을 때 “추후 담임목사를 이유없이 내쫓는 경우 노회는 즉각 시무장로를 치리할 것이다”와 같은 대자보가 교회 벽에 붙어 있었다. 그것을 떼어 잘 보관하고 있었는데 어디에 두었는지 잊어버렸다. 전임자는 총신대 역사학과 출신으로 목회를 잘했는데 시무 투표를 1년 연기하자는 말에 그만 1년 만에 사임하게 되어 노회가 깊이 개입해 장로들을 문책할 것이라고 경고했던 것이다. 나는 목사를 습관적으로 내쫓는 이러한 교인들의 악습을 제거하기 위해 각오를 단단히 가졌다. 이호현 목사님은 이 일을 책임맡은 노회장과 부노회장에게 “만약 동암교회 교인들이 말하는 이유로 담임목사가 나가야한다면 함남노회 목사의 80-90%는 다 나가야한다”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주동이된 한 장로는 70이 넘어 시무장로가 아니고, 또 한 장로는 10여년간 교회를 떠나 있다가 잠시 연로한 어머니 때문에 다니고 있는 상태라 이들을 치리한다는 것은 아무 영향력이 없었다. 그리고 이미 4명의 담임목사를 내쫓은 경험들이 있는지라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다. 그래서 분란 7개월만에 모든 것을 내려놓게 됐다. 여기까지 말하자, 후배는 “그때 내게 연락하지, 나도 현역으로 있을 때 이상한 교인들이 있어가지고 다 법적으로 싸워 처리했는데”라고 말했다. 나는 “나는 어려서부터 싸움을 잘 못해. 내가 먼저 죽을 것 같아 그냥 사임한 거야”라고 말하자 “그렇구나, 사람마다 기질이 다르기는 하지”라고 후배가 말했다. 사임 후 이미 교계 기자를 하는 대학동기를 우연히 만나 “발이 넓을테니 갈 교회를 소개해 달라”고 하자, 그 친구가 “너가 기자가 되어 교회를 알아보라”는 말에 덜컥 기자가 됐다. 그래서 나는 자칭 “얼떨결 기자”이다. 기자가 뭔지도, 교계에 기자가 있다는 것도 몰랐던 사람이다. 그런데 이제는 빛과소금뉴스라는 언론사를 운영하고 있다. 그래도 “형, 형이 왜 목회하지 않고 기자하는거야?” 하던 후배가 “형, 형 글발이 살아 있던데. 언제부터 그렇게 기사를 잘 썼어?”하고 말해주니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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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0-04
  • 【내이야기】부모님의 노년을 함께 함이 은혜라
    “그러면 에미 집으로 이사를 오너라” 어머니께서 전화를 걸어 하신 말씀이다. 갑작스러운 담임목회 사임으로 당장 거처할 집이 문제였다. 2020년 1월부터 있었던 교인과의 갈등을 7월에 마무리하고 10월 노회 때 시무 사면 처리를 한 후 12월 말까지 사택을 비워주기로 했다. 그동안 거처를 마련해야했다. 그런데 언제나 사택을 주는 교회에서만 부목사 사역을 했기에 어떤 식으로 집 문제를 해결해야할지 막막했다. 아내와 이런저런 논의를 했지만 답이 나오지 않았다. 결국 어머니께서 결단하셨다. 어머니는 20여년전 적은 돈으로 전세를 안고 지하1층, 지상 3층, 옥상이 있는 다가구 주택을 구입했다. 큰 교통사고 이후 경제력이 없는 아버지를 대신해 집세를 받아 생활하시기 위해서였다. 지하 1층과 1층은 각각 2가구가, 2 · 3층은 전체를 다 쓰는 구조였다. 어머니는 아버지와 3층에서 사셨는데 2층을 내보내고 우리 식구를 살게 할려고 하셨다. 그러나 2층 세입자가 작은 금액의 반전세로 살고 있기에 나가지 않겠다고해서 할 수 없이 1층의 한 가구를 이사비를 주어 내보내고 부모님께서 그리로 옮기시고 우리 식구는 3층에 살게 됐다. 가까스로 12월 말까지 집 수리를 끝내고 이사했다. 뜻하지 않게 부모님께 얹혀 살면서 연로하신 부모님을 돌보게 됐다. 곧이어 허리가 늘 아프신 어머니께서 병원에 가셔서 X-ray를 찍어보니 척추에 금이 가 있었다. 그래서 의료용 시멘트를 주사하는 시술을 받으시게 됐다. 이어 작년 9월에는 계단에 있는 빗물에 넘어져 구르는 바람에 우측 대퇴부가 두 군대 골절됐다. 마침 107회 총회 취재차 출타한 상황이라 아내와 아들이 병원으로 모시고 가 수술을 받으셨다. 그리고 한달 정도 병원에 입원해 계셨다. 그동안 아버지 간병이 문제였다. 아버지는 1984년 당한 교통사고로 다리 뼈가 으스러져 철심을 박았는데 이후 연로하시자 더 이상 걷지 못하시고 7년째 침대에 누워 대소변을 받아내야했다. 오전에는 간병인이 오지만 저녁에는 없기에 한달 정도를 내가 대소변을 받아내야했다. 이후 어머니가 퇴원하셨는데 그만 올해 3월에 직장암 수술을 받으시고 체력이 급격히 약해지셨다. 그리고 두 주 전에는 아버지께서 폐렴으로 병원에 입원하셨다가 오늘 보름만에 퇴원하셨다. 의사는 아버지가 점점 더 기력이 약해질 것이라고 했다. 어머니는 늘 “늙은 부모 모시느라고 아들이 고생이 많다”고 말씀하신다. 생로병사는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내가 나이를 먹어가듯이 부모님들은 연로해지고 계시다. 80대 중반을 향해 가면서 부모님들의 몸은 연약해질대로 연약해지셨다. 나는 4형제인데 누님들은 다 아랫지방에서 살고 있고, 남동생은 서울에 살지만 직장생활에 메여 있어 그동안도 부모님 가까이 사는 내가 도왔었다. 부모님은 강북구 번동에 사시고 나는 혜화동, 인사동에서 부목사를, 후암동에서 담임목회를 했기에 일이 생기면 수시로 부모님을 찾아뵐 수 있었다. 그리고 다시 부모님과 함께 살면서 부모님의 병수발이나 일상을 돕고 있다. 부모님과 함께 살면서 부모님이 연로해지셨음을 알게 됐다. 그동안은 가끔 뵈서 몰랐는데 가까이서 뵈니 일상을 살아가시는 게 쉽지 않음을 알게 됐다. 그래서 어머니께서 아는 동네분들에게 인사하면 “아들이 함께 살아 든든하겠다”는 말씀들을 하신다. 자식으로서 부모님의 노년을 함께하니 감사한 일이다. 낳으시고 길러주신 부모님께 조금이나마 도움을 드리고 의지가 되니 다행이다. 또한 자식으로서 더더욱 연로해지시는 부모님을 보면서 짠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셨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다. 이제는 같이 살아 늘 대하는 부모님이 언젠가 세상을 떠나신다고 생각하면 아찔하다. 연로하신 부모님을 보살피며 나 또한 언젠가 부모님처럼 연로해질 것이라는 것을 생각하니 부모님과 함께 사는 것이 은혜이다. 어머니는 언젠가 때가 되면 요양원으로 가겠다고 하시지만 나는 그렇게 하고 싶지 않다. 가능하면 사시던 집에서 부모님이 눈을 감으셨으면한다. 갑작스러운 목회 중단으로 부모님과 함께 살면서 부모님의 노년을 함께 할 수 있는 것이 은혜이다. 언젠가 떠나실 부모님과 함께 남은 시간 정을 주고 받으며 사니 감사하다. 어머니의 굽은 등과 마른 몸을 보면 눈물이 난다. 침상에만 계셔서 몸이 굳어지신 아버지를 보면 눈앞이 흐려진다. 그리고 이것이 내 노년의 모습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내가 노년을 보낼 때 내 아들들이 함께, 혹은 가까이 살아준다면 얼마나 좋을까하는 생각을 해본다. 나 또한 나이를 먹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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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0-02
  • 【단상】“남자가 흘리지 말아야 할 것은 눈물만이 아니죠”
    남자 화장실 소변기 앞 눈높이 위치에 있는 “남자가 흘리지 말아야 할 것은 눈물만이 아니죠!”라는 문구를 봤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는 안다. 소변을 볼 때 변기 밖으로 흘리지 말라는 것이다. 안 그러면 화장실에 찌린내가 나기 때문이다. 실제로 가정에서도 이미 남성들은 서서 볼일을 못 보고 앉아서 볼일을 보고 있다. 천하의 배우 최민수도 그 아내에게 굴복해 앉아서 소변을 보고 있다고 한 방송에서 실토했다. 가정 화장실에는 좌변기 하나만 설치 되어 있기에 서서 소변을 보면 밖으로 튀게 되어 아내와 어머니께 잔소리를 듣는다. 그래서 결국 남자들도 여자처럼 앉아서 소변을 보는 경우가 많아졌다. 공중화장실에 가면 “남자가 흘리지 말아야 할 것은 눈물만이 아니죠”라며 소변을 밖으로 흘리지 말라는 경고가 예외없이 붙어 있다. 그런데 그 문구가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 왜 남자의 눈물을 소변과 동등하게 취급하고 있는가? 남자의 눈물은 소변처럼 더럽다는 것인가? 남자는 눈물을 흘리면 안된다는 것인가? 도대체 어떤 인간이 이런 문구를 만들어냈는지 기가 막힌다. 물론 요즘은 그런 것 같지 않지만 어렸을 때 또는 학창 시절에 “남자는 울면 안된다”는 말을 종종 들었다. 그때는 그런가보다 했지만 어느때부터인가 이상하게 생각됐다. 왜 남자는 눈물을 흘리면 안되는가? 남자는 울면 안되는가? 그리고 크리스마스 노래에도 “울면 안 돼 울면 안 돼 산타할아버지는 우는 아이에게 선물을 안 주신데요” 이런 가사가 있는데 어느 날 이 가사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다. 왜 아이가 울면 산타는 선물을 주지 않는가? 이 또한 아이에게도 울지 말 것을 강요하는 것 아닌가? 심지어 “남자는 세 번 운다. 태어났을 때 한 번 울고, 부모가 돌아가셨을 때 한 번 울고, 나라가 망했을 때 한 번 운다”는 말도 있다. 누가 만들었는지 궁금하다. 결국 이 모든 것은 남성들에게 울지 말 것을 강요하는 것이며, 우는 남자는 남자가 아니라는 왜곡된 성차별로도 볼 수 있다. 나는 울고 싶다. 학창 시절 교회 생활하며 기도할 때마다 울부짖었다. 신대원 때 기도 동산에서 울부짖었었다. 그리고 부목사, 담임목회할 때도 울부짖었었다. 그러나 눈물이 메말랐다. 이제는 한 교회를 책임지는 담임목사가 아닌 교계 기자가 되어 교회와 노회, 총회를 취재하면서 보게 되는 많은 안타까운 일들을 놓고 기도해야 하는데 눈물이 메말랐다. 과거처럼 울고 싶다. 통곡하고 싶다. 그래서 “남자가 흘리지 말아야 할 것은 눈물만이 아니죠!”라는 문구가 거슬리는지도 모른다. 그동안 수없이 연속 기사를 썼던 천안중부교회를 위해, 구 충남노회를 위해 그리고 총회를 위해 울고 싶다. 통곡하고 싶다. 주여 은혜를 회복하소서! 눈물을 회복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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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0-02
  • 【내이야기】Memento mori
    Memento mori(메멘토 모리)는 "자신의 죽음을 기억하라" 또는 "너는 반드시 죽는다는 것을 기억하라", "네가 죽을 것을 기억하라"를 뜻하는 라틴어다. 추석 연휴에 장인, 장모가 모셔져 있는 국립대전현충원을 찾았다. 장인께서는 한국전쟁 참전 용사로서 1996년에 소천 후 댁 근처 묘지에 매장했다가 이곳으로 이장했고, 장모님은 작년 5월 소천하셔서 합장하게 됐다. 나는 1994년에 결혼해 장인과는 2년 남짓 시간을 함께 했고, 장모님과는 28년을 함께 했다. 자주 뵙지는 못했지만 장모님은 여러 사위 중에 제일 나를 좋아하셨는데 갑자기 병으로 세상을 떠나셨다. 입관 전 장모님의 모습을 뵐 때 만감이 교차했었다. 그동안 목회를 하면서 수많은 장례예배를 했지만 고인의 모습을 직접 본 것은 장모님이 처음이었다. 어르신들은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쓰면 소설 10권은 될 것이라는 말씀을 자주 하셨다. 그리고 실제로 목회를 할 때 한 권사는 자신의 이야기를 글로 남길려는 계획을 하기도 했었다. 그만큼 살아오면서 겪은 일들이 얼마나 많았겠는가? 그러나 그 모든 것을 뒤로하고 한줌의 재로 돌아가 흙속에 묻혀 계신다. 장모님께서 살아계실 때 가끔 모시고 국립대전현충원에 가면 장인 어른의 비석을 어루만지며 애틋해 하셨는데 이제 사랑하던 남편과 합장되어 있다. 부부의 마음은 자식도 결코 알 수 없는 비밀이다. 한평생 부부의 연을 맺고 살다 사별했으니 그 마음이 어떠하겠는가? 장모님은 장인 어른의 소천 후 26년을 홀로 사셨다. 그 허전했던 마음을 어찌 다 헤아릴 수 있겠는가? 국립대전현충원을 방문할 때마다 묘비는 늘어났고 묘지는 줄어들었다. 이전에 비어있던 곳에 묘비가 빽빽하다. 그 누구도 죽음을 이길 수 없다. 때가 되면 모두 죽어야한다. 오늘은 내가 성묘를 왔지만 언젠가 입장이 바뀔 날이 올 것이다. 우리는 애써 죽음을 외면하고 잊으면서 살려고한다. 그래서 묘지를 외진 곳에 두고, 화장장을 혐오시설이라고 외면하고 있다. 그런다고 그 누군들 죽음을 피해갈 수 있겠는가? 앞서간 사람들은 우리에게 “자신의 죽음을 기억하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묘비는 그것을 실체로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死者의 장소를 벗어나 산자의 곳으로 나오자마자 ‘오늘 저녁은 무엇을 먹지?’ 가족들과 말하면서 나는 죽음을 망각하는 어리석은 습관에 또 다시 빠져든다. 아! "Memento m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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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0-02
  • 【단상】"海에게서 中年에게"
    다낭 미케비치 해변의 파도를 보면서 뜬금없이 최남선의 “해에게서 소년에게”가 떠올랐다. 학교 다닐 때 최초의 신체시라고 배웠던 기억이 난다. 인터넷을 뒤져보니 “이 시는 근대 잡지의 효시인 『소년』 창간호의 권두시로, 각 연의 대응되는 행의 자수가 완전히 일치한다는 점에서 창가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는 면이 있으나, 한 연씩 떼어놓고 볼 때는 정형적 자수율을 전혀 갖지 않은 자유시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새로운 세계와 문명개화를 상징하는 ‘바다’와 새 시대를 상징하는 ‘소년’을 통해, 개화와 계몽을 노래했다는 점에서 국민적 계몽시라는 문학사적 의의가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중년의 나이이기에 “海에게서 少年에게”가 아니라 “海에게서 中年에게”라고 쓰고 싶다. 미케비치 해변을 찾은 그날 파도는 쉼없이 내게 여러 말을 했다. 산에 올라도, 흐르는 강을 보아도 그들은 내게 무언가 말을 한다. 나의 연약함과 유한함을 잊지 말라고. 수영을 못하기에 바다로 조금만 들어가 영상을 찍었다. 다낭 미케비치 해변은 백사장이 길어 멀리까지 바닥이 낮기에 가슴 높이까지 가본적도 있지만 쉼없이 변형되는 파도에 물을 먹으며 무서움이 들었다. 파도는 예상 가능하지 않은 형태로 오기에 여러해 전 강원도 동해에서 파도 맞이 물놀이를 하다가 갑작스러운 파도에 뒤집혀 안경을 잃어버리기도 했다. 자연은 자신의 방식으로 내게 겸손할 것과 나의 왜소함을 가르쳐 주고 있다. 자주 갈 수 없는 곳이기에 미케비치 파도의 가르침을 잊지 않고자 동영상으로 남겨봤다. 海에게서 少年에게 처……ㄹ썩, 처……ㄹ썩, 척, 쏴……아. 때린다 부순다 무너 버린다. 태산 같은 높은 뫼, 집채 같은 바윗돌이나, 요것이 무어야, 요게 무어야. 나의 큰 힘 아느냐 모르느냐, 호통까지 하면서, 때린다 부순다 무너 버린다. 처……ㄹ썩, 처……ㄹ썩, 척, 튜르릉, 꽉. 처……ㄹ썩, 처……ㄹ썩, 척, 쏴……아. 내게는 아무 것 두려움 없어, 육상(陸上)에서, 아무런 힘과 권(權)을 부리던 자라도, 내 앞에 와서는 꼼짝 못하고, 아무리 큰 물건도 내게는 행세하지 못하네. 내게는 내게는 나의 앞에는 처……ㄹ썩, 처……ㄹ썩, 척, 튜르릉, 꽉. 처……ㄹ썩, 처……ㄹ썩, 척, 쏴……아. 나에게 절하지 아니한 자가, 지금까지 있거든 통기(通寄)하고 나서 보아라. 진시황(秦始皇), 나파륜(나폴레옹), 너희들이냐. 누구 누구 누구냐 너희 역시 내게는 굽히도다. 나하고 겨룰 이 있건 오너라. 처……ㄹ썩, 처……ㄹ썩, 척, 튜르릉, 꽉. 처……ㄹ썩, 처……ㄹ썩, 척, 쏴……아. 조그만 산모를 의지하거나, 좁쌀 같은 작은 섬, 손뼉만한 땅을 가지고, 고 속에 있어서 영악한 체를, 부리면서, 나 혼자 거룩하다 하는 자, 이리 좀 오너라, 나를 보아라. 처……ㄹ썩, 처……ㄹ썩, 척, 튜르릉, 꽉. 처……ㄹ썩, 처……ㄹ썩, 척, 쏴……아. 나의 짝 될 이는 하나 있도다. 크고 길고 넓게 뒤덮은 바 저 푸른 하늘. 저것은 우리와 틀림이 없어, 작은 시비, 작은 쌈, 온갖 모든 더러운 것 없도다. 조따위 세상에 조 사람처럼. 처……ㄹ썩, 처……ㄹ썩, 척, 튜르릉, 꽉. 처……ㄹ썩, 처……ㄹ썩, 척, 쏴……아. 저 세상 저 사람 모두 미우나, 그 중에서 똑 하나 사랑하는 일이 있으니, 담 크고 순진한 소년배(少年輩)들이, 재롱처럼 귀엽게 나의 품에 와서 안김이로다. 오너라 소년배 입 맞춰 주마. 처……ㄹ썩, 처……ㄹ썩, 척, 튜르릉, 꽉. (업거든 : ‘있거든’으로 바로잡는 것이 자연스럽다. 통기 : 기별을 보내어 알게 함. 통지. 산모 : 산모퉁이. 순정한 : ‘純情’으로 바로잡는 것이 자연스럽다) 최남선 : 서울 출생(1890), 일본 동경부립 제일 중학 입학, 2개월 만에 귀국(1904), 와세다 대학 고등사범 지리역사학과 입학(1906), 종합 월간지 『소년』 창간(1908), 종합 월간지 『청춘』 창간(1914), 3·1 운동시 「독립 선언서」 기초. 체포되어 다음 해 출옥(1919), 『동명』 발간(1922), 만주 신경에서 『만몽일보사』 고문 역임(1938), 해방 후 친일 반민족 행위로 기소. 수감되었다가 병으로 보석 출감(1949), 사망(1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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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9-29
  • 【단상】 결혼 30주년 기념 선물이 왜 총신대로?
    “그러면 500만원을 미리 내세요. 적금해서 모으나 미리 내고 모으나 같은 것 이니까요” 베트남 다낭으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아내가 내게 한 말이다. 내년이 결혼 30주년이다. 그런데 모시고 사는 부모님의 건강을 장담할 수 없어 1년 앞당겨 미리 기념 여행을 가고 있다. 제주도 가는 비용이면 갈 수 있다는 베트남 다낭으로 목적지를 정했다. 108회 총회 기간에 학부, 신대원, 군목 5년 선배인 박성규 총장이 총신대학교에 대해 보고하는 시간을 가졌다. 신대원 전 학생에게 장학금을 지급할려면 매년 68억이 필요하고 이를 위해 열심히 모금활동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후 총회에 참석한 예비역, 현역 군목들 저녁 식사 자리에서 선배 총장께 웃으며 물었다. “총신대학 종합관 현관 벽에 도너월이 있는데 거기에 이름을 올릴려면 최소 금액이 얼마입니까?” 500만원이라고 답했다. 그래서 “적금을 들어서라도 모교에 이름을 남겨야겠다”고 농담조로 말했다. 총신대학에 도너월이 있다는 것을 안것은 작년에 오정호 목사가 노회에서 부총회장 후보로 추대된 후 이어서 총신대학교 도너월(Donor Wall) 제막식에 참석했다 상대편 후보에게 고발을 당했을 때였다. 총신대 도너월은 대학을 위해 후원한 기부자들의 뜻을 기리고 이에 대한 예우를 위해 만들어졌다. 명패는 2017년부터 2022년 2월 28일까지 5년 간 대학에 기부한 교회 명과 개인 이름을 기재했으며 익명 기부자는 제외했다. 이날 제막식에서 오정호 목사는 총신발전기금으로 3억 원을 전달하는 기부금 전달식도 함께 진행했다. 이재서 총장은 제막식에서 “그동안 총신대는 많은 사랑을 받아왔다. 그 사랑에 감사를 담아 도너월을 만들었다”며 “학교를 내 몸과 같이 도와준 사람들의 정성어린 뜻을 앞으로 소중히 여기겠다”고 강조했다(한국대학신문 - 429개 대학을 연결하는 '힘'(https://news.unn.net)에서 기사 인용) 이후 총신대학 종합관 로비를 지나갈 때 마다 비어있는 많은 자리를 보고 나도 저 자리를 채워야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어쩌다보니 그 날이 일찍 왔다. 총장과의 대화 후 이틀 만에 하늘같은 아내가 하늘에서 윤허했다. 나는 4년간 월 10만원씩 적금을 들어 만기가 되면 500만원을 기부할려고 했는데, 아내는 먼저 기부하라고 한 것이다. 결국 결혼 30주년 기념 여행에서 엉뚱하게 선물을 받은 것은 총신대학이다. 그 기부금은 내가 나온 총신신대원 장학금으로 알지 못하는 후배에게 주어질 것이다. 그 후배가 알지 못하는 선배가 기부한 돈으로 훌륭한 목회자가 되기를 기대해 본다. 1985년 총신대학 신학과 입학을 시작으로 학부 4년, 신대원 3년, 목회전문대학원 3년(박사 학위 논문 쓰는 기간이 길어 실제로는 7년)의 세월을 총신에서 보냈다. 중간에 Th.M은 아세아연합신학대학원에서 했는데 그 당시 군목에게 등록금 반액 할인을 해줬기 때문이다. 총신이 그때 같은 혜택을 줬으면 Th.M도 총신에서 했을 것이다. 지금은 총신도 군목에게 등록금 할인 혜택을 주어 여러 군목들이 총신에서 공부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학교를 다닐 때는 모교의 소중함을 몰랐었다. 다른 학교에 비해 부족한 시설과 교수진에 대해 비판했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를수록 모교에 대한 마음이 애틋하다. 거기서 교육받았기에 많은 것들을 얻었고 누릴 수 있었다. 이제 나이를 먹으니 조금이나마 모교의 소중함을 알고 고마운 마음을 갖게 된다. 학부를 총신대학을 나왔든, 신학교를 나왔든, 일반대학을 나왔든 합동측 목사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총신신학대학원을 나와야한다. 그래서 모든 합동측 목사에게 총신은 모교이다. 필자도 일반대학을 나온 후 신대원에 들어갈려고 했다. 그런데 그만 일반대학에 떨어져 바로 총신대학에 진학하게 됐고 다행히 군목 시험에 합격해 군목생활을 경험했다. 돌아보면 이 또한 하나님의 은혜였다. 총신을 나와 합동측 목사가 되어 많은 혜택을 누렸다. 그것을 조금이나마 갚기 위해 모교에 기부하고자 하는데 감사하게도 학교는 그것을 도너월에 새겨 기념해 준다니 이 또한 고마운 일이다. 결국 학교 기부가 결혼 30주년 기념 선물이 된 것이다. 곧 학교에 연락해 기부 절차를 진행할 것이다. 기꺼이 허락해준 아내에게 감사하며 진짜 결혼 기념 30주년이 되는 내년에는 아내에게 더 큰 선물을 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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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9-23
  • 【단상】한국 기독교 망국병, 지역감정
    취재 갔다가 알게 된 목사가 있다. 모 선교단체를 이끄는데 그가 방장인 1000여명이 넘는 단톡에 강제 가입됐다. 그런데 주로 여권을 지지하고 야권을 욕하는 기사가 난무했다. 몇번을 나왔는데 또 불렀기에 “선교 단체 단톡이 너무 정치 편향적”이라고 말하고, 더 이상 부르지 말라는 글을 남기고 방금 탈퇴했다. 그러자 개인 톡이 와 몇 마디 주고 받았다. 그러다 갑자기 호남을 거론했다. 나를 호남 사람으로 단정한 것 같다. “나는 서울 사람이고 지역 감정이 부끄럽다”고 답하자 더 이상 대답이 없다. 지겹고 지겨운 것이 영호남 지역감정이다. 대한민국의 “중심” 서울에서 태어나 지금도 서울 사람으로 사는 입장에서 볼 때 지방의 지역 감정이 너무 심하다는 생각을 한다. 선거 때 그 지역 출신은 막대기만 세워도 당선 되고, 그 지역 출신 대통령이면 나라를 팔아 먹어도 지지한다는 말을 대놓고 한다. 대한민국의 중심 서울에 사는 입장에서 볼 때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어이없다. 그런데 지역 감정에 있어서는 신앙인도 일반인과 별반 다를게 없다. 그러면 영호남 사람이 믿는 하나님은 "전라도 하나님"과 "경상도 하나님"으로 나뉘어 있는가? 코딱지 만한 나라를 영호남으로 갈라 놓는 이유가 무엇인가?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 휴전선은 영호남 사이에도 있다. 사탄은 분열의 영이다. 교단 안에서든 어디서든 지역 감정에 경도된 자는 분열의 영에 사로 잡혀 있는 것이다.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자. 지겹고 지겹다 영호남 지역감정! 결혼 30 주년 기념으로 제주도 여행 비용으로 베트남 다낭에 왔는데도 “영호남 지역감정”을 겪어야 하니 지역 감정의 망령은 국경을 초월하나 보다. 어이가 없다. 그놈의 지역감정! Chán quá đi (베트남어로 "지겹다 지겨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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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9-23
  • 오정호 총회장의 탁월한 회의 진행 능력...많은 난제 해결
    총회가 중반을 향하고 있다. 올해도 산적한 문제와 논쟁거리가 있다. 1년에 한번 모이는 총회이다보니 한꺼번에 수많은 일들을 논의하고 결정해야한다. 그런데 오정호 총회장의 탁월한 회의 진행으로 인해 그 난제들이 해결되고 있음에 모든 총대들은 만족해하고 있다. 예를 들어 오정호 총회장은 여성 교역자의 지위 향상을 위해 그동안 하지 못했던 전향적인 결정을 이끌어 냈다. 여성사역자지위향상위원회가 상설위로, 목사후보생 고시 및 강도사고시 응시 자격이 허락되어 여성 준목 제도 신설이 결의됐다. 물론 여성 안수를 주지는 않지만 이전과는 다른 진전된 결과를 도출한 것이다. 또한 그동안 10여년간 총회와 총대 그리고 해당 교회들을 괴롭혔던 구 충남노회 문제를 해결했다. 충남노회폐지후속대책소위원회 보고 시간에 위원장 김상현 목사와 서기 고광석 목사가 나와 인사 후 고광석 목사가 결과 보고를 했다. 이로인해 총대들간에 찬반 격론이 50여분간 벌어졌다. 이때 오정호 총회장은 양쪽이 견해를 발표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노회 신설을 허락하는 결론을 이끌어냈다. 이 두 사례는 굉장히 예민하고 논란 많은 안건이었다. 그러나 오정호 총회장은 그 안건들에 대해 이미 해박하게 알고 있었고 복안을 갖고 있는 가운데 총대들의 의견을 수렴하면서 뚝심있게 결정을 이끌어 낸 것이다. 총대들의 동의와 본인의 소신이 이처럼 전향적인 결정을 만들어낸 것이다. 그런면에서 오정호 총회장은 탁월한 회의 진행자이다. 결국 자신이 생각하는 바를 총대들의 토론을 통해 도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그 자신이 오랜 기간 총대로 활동했고 부총회장을 지내면서 그 건들에 대해 보고 듣고 생각해 왔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여유를 갖고, 유머러스하게 또 자신이 실수한 것이 있다면 과감히 인정하고, 들어줄 것은 들어주되 과감히 밀고 나가야할 것은 밀고 나가는 오정호 총회장의 리더십과 회의 진행 방식이 1600여명의 총대를 이끌어 가고 있다. 그 리더십이 바로 오늘날의 새로남교회라는 메가처치를 이룬 원동력이다. 오정호 총회장의 리더십은 소통의 리더십이다. 남의 이야기를 경청한다. 오정호 총회장은 취임사에서 “일방통행이 아니라, 마음을 얻고(이청득심/以聽得心), 사람을 얻겠습니다.(이청득인/以聽得人)”라고 밝혔다. 오정호 총회장은 남의 이야기를 들어준다. 그것은 리더에게 매우 중요한 자질이다. 때로 상대방이 말도 안되는 이야기를 하더라도 경청하고자하는 태도가 몸에 배어 있다. 또한 아울러 오정호 총회장의 리더십은 결단 할 때는 과감하게 결단하는 리더십니다. 리더는 결정하는 자이다. 많은 의견을 듣지만 최종 결정자는 리더이다. 총회장으로서 총대들의 의견을 듣고 최종 결정을 도출하는 것이 총회장이다. 총회장으로 자기의 견해가 있을 때 총대들로 하여금 총회장의 생각에 동의하게 하고 그에 따라 총대 스스로 결정하게 만드는 것은 리더가 갖춰야할 자질이다. 그 면에 있어 오정호 총회장은 그 능력을 유감없이 총회진행에서 보여주고 있다. 물론 회의에서 모두를 만족시키는 것은 어렵다. 총대들간 견해가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견이 있을 때는 어쩔 수 없이 다수결로 결정한다. 그러나 오정호 총회장이 충분히 자신들의 의견을 밝힐 수 있는 기회를 주었기에 총대들을 설득하지 못한 자신을 자책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오늘은 수요일이다. 이제 총회가 중반을 향해간다. 오늘도 아침부터 수많은 안건들을 쉼없이 처리해야한다. 남은 기간도 지난 이틀처럼 오정호 총회장의 리더십과 탁월한 회의 진행 능력으로 회무를 잘 처리할 것이라고 믿고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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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9-20
  • 새로남교회 총회...지역 상권 활성화에 큰 도움
    요즘 총회가 열리는 새로남교회 주변 식당은 즐거운 비명을 지르고 있다. 총대만 1600여명과 총회 관련한 인원들까지 포함하면 약 2천여명의 사람들이 매 식사 시간마다 교회 주변 식당을 찾고 있기 때문이다. 급기야 한 거리에는 현수막을 붙이고 총대들의 방문을 환영했다. 새로남교회는 총대들의 식사 편의를 위해 교회 주변 여러 식당을 소개하는 일을 했다. 식당업자 입장에서는 한 사람이라도 손님이 와서 매상을 올려주는 것이 가장 기쁜 일인데, 약 2000여명의 사람들이 월요일 낮부터 금요일 낮까지 적어도 10끼는 식사해야한다. 한끼 식사비를 1만원으로 잡는다면 총회 기간 약 2억의 돈이 소비된다. 이는 지역 식당을 활성화하는 것이다. 또한 2000여명의 사람들이 주변 숙소에 머물면서 숙박업도 때아닌 호황을 누리고 있다. 적어도 지난 봄에 숙소를 예약해야할 정도로 방을 구하는 것이 전쟁이었다. 경기가 어려운 이 때 총회를 개최해 지역 상권에 큰 도움을 준 새로남교회에 대해 지역 업체들은 고마운 마음을 가졌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현수막에 표현된 것이다. 총회로 인한 지역 경제 활성화를 통해 교회에 대한 이미지가 좋아지고 또 이것이 그들의 전도로 이어지기를 소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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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9-20
  • “당연”인가? “감사“인가?
    저녁 10시경에 ‘띵’하고 문자 하나가 왔다. 알지 못하는 번호로 온 문자였고, 그 내용은 충격적이었다. 대전 새로남교회에서 곧 열리는 총회를 위해 교회에서 만든 주차 안내를 기사로 만들어 자비로 전 총대들에게 단체 문자 전송했다. 주차 동영상까지 만든 새로남교회의 세심함에 감동 받아 교단 목사 기자로 총대들에게 서비스를 한 것이다. 몇몇 아는 분들이 고맙다고 톡으로 문자로 응답했다. 그런데 이게 왠 뚱딴지 같은 반응인가? 과연 총회를 개최하는 교회가 모든 총대들의 주차비를 부담해야한다는 법이라도 있는 것인가? 이것은 교회적으로 큰 배려이며 섬김이다. 그러면 고마운 마음을 가지면 된다. 그것을 어찌 “당연”하다고 말하고 그걸 기사로 쓴 기자를 “깝깝”하다고 할 수 있는가? 전 총대 전화번호가 있어 하루가 지난 후 망설이다. 검색해 봤다. 어느 목사의 이름이 검색됐고, 총회 홈페이지에서 경북 지역의 B교회라는 것을 알아냈다. 네이버 지도를 통해 교회 건물까지 볼 수 있었다. 지금이 그런 세상이다. 세상에 당연한 것은 없다. 생각해 보면 모두가 고마운 것이고 감사한 것이다. 목회할 때 한 청년이 교육전도사에게 “전도사님은 사례를 받으니까 교회 일 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식의 말을 하는 것을 들었다. 어이가 없었다. 교역자가 받는 돈은 “월급”이라고 하지 않는다. “사례”라고 한다. 사례란 감사해서 드리는 것을 말한다. 그 청년은 자기가 교사를 하면서 월급을 받기에 교육전도사도 교회 일 해서 받으니 월급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새로남교회 담임인 오정호 목사가 총회장이 되니 오 목사나 전교인들은 총대들을 정성으로 섬기고자 한다. 건물 전체를 개보수하면서 “환대총회”를 할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리고 주차 하나하나에도 신경을 쓰고 준비하고 있다. 그러면 이것이 “당연”한 것인가? “감사”한 일이 아닌가? 왜 나는 “감사”한 일이라고 생각하는데 그 목사는 그것이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하는가? 그래서 면식도 없는 내게 그렇게 “문자 지적질”을 하는가? 그 목사는 맥추감사절이든 추수감사절이든 감사절기에 도대체 무엇이라 설교할지 궁금하다. “범사”에 감사하라고 설교할 수 있을까? 하나님의 은혜도, 주시는 복도 “당연”하다고 설교하지는 않을 것이다. 다른 사람의 수고를 당연히 여기는 그 목사가 부끄럽고 안타깝다. 그래도 1600여명의 총대중 한명이니 그나마 다행이다. 이런 목사나 장로가 한 명 더 있었다면 나는 합동 교단에 절망했을 것이다. 마침 지나가는 버스 이름이 “땡큐 버스”인 것이 눈에 띄었다.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는 옛말이 생각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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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2023-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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