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11(토)

오피니언
Home >  오피니언

실시간뉴스
  • 【북토크】 ‘절판’ 앞에서....책이란 무엇인가?
    과거 취미란에 ‘독서’를 쓰는 것이 유행이었다. ‘클래식 음악 듣기, 영화 감상’등도.. 독서가 취미인 나로서는 책이 있다는 것이 축복이다. 책을 쓰는 작가, 출판하는 출판사에게 늘 고마운 마음을 갖고 산다. 책이 없는 세상은 매우 심심할 것이다. 다행히 어려서부터 책 사는 것을 좋아했고 지금도 책 읽는 것을 좋아한다. 이 책은 책에 대한 책이다. 어떤 책을 읽다 소개 되어 읽었는데 2006년에 발간된 책이라 소개된 책 중에는 ‘절판’된 책들이 많았다. 책에도 수명이 있고 유행이 있다. 무수한 책들이 만들어지고 사라진다. 죽을 때까지 다 볼 수 없는 책을 읽는 것이 취미인 것이 감사하다! (기사 화면에 이 책 '빠삐용의 책읽기' 사진을 실을려고 교보문고를 검색해 보니 이 책도 절판됐다. 다행히 도서관에 있어 빌려보게 된 것이다). 칼날 위에 서 있는 사랑 어떤 사람들에게 사랑이 가장 고결한 단어라면, 어떤 사람들에게는 금기어입니다. 믿을 수 없으시다고요? 유희처럼, 하룻밤 욕망 해소처럼 가볍게 사랑을 즐기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을 하는 매 순간마다 목숨을 걸어야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오스네 사이에르스타드 장편소설 『카불의 책장수』를 읽다보면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촌에는 참 다양한 삶들이 부대끼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아프가니스탄 여인들에게 '사랑'은 금기어입니다. 그들이 지하에서 펴내는 시집에 사랑을 표현하려면 피어린 절규가 담기지 않을 수 없습니다. '손을 주세요, 사랑하는 이여, 그리고 우리 함께 초원에 숨어요. 사랑하거나 칼 아래 쓰러지거나 둘 중 하나.' 이곳에 사는 여인들은 묻는 말에 대답하거나 요리를 칭찬하는 말에 답례를 표하기는 하지만, 외방인 앞에서 절대로 먼저 대화를 시작하는 법이 없습니다. 부모 몰래 금지된 사랑을 나누다 들키면 죽음입니다. 사랑은 언제나 칼날 위에 서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 나라에서 적용되던 이슬람 율법은 한없이 너그러우면서 동시에 비정한 부분이 있습니다. 그 율법을 비켜가기 위해 그녀들은 란다이(landay)라고 불리는 시를 읊습니다. 란다이는 "비명이나 칼로 찌르는 것처럼" 짧고 율동적이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한반도에서의 삶을 살아가면서 동시에 지구의 다른 쪽을 생각하는 이유는 무엇보다 균형 잡힌 시각을 갖춘 인간이 되고 싶기 때문입니다. 균형이 교양이고, 그것이 문화적 경쟁력이기도 합니다. 이 책의 저자는 노르웨이 출신 여성 종군기자입니다. 2001년에 9·11 테러가 있었고, 그해 10월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 정권을 테러 비호세력으로 지목하면서 대대적인 공습을 때립니다. 2002년 봄 사이에르스타드는 카불에서 책장수로 살아가는 술탄 칸의 집에 3개월 동안 머무릅니다. 이 책은 그때 목격한 것을 소설로 쓴 것입니다. 이 소설은 정치적 격변과 국가재건, 그리고 근본주의 이슬람 문화 밑에서 학대받는 여성 문제, 빈곤 문제를 소설 형식으 로 묘사합니다. 폐허가 된 카불의 방 네 칸짜리 아파트에서 술탄 칸은 홀어머니와 아내 둘, 그리고 아이 다섯과 동생, 사촌 두어 명을 데리고 삽니다. 가혹한 시련은 언제나 곁에 있습니다. 등장인물들은 일을 하고, 돈을 모으고, 저잣거리에서 장을 보고, 요리를 하고, 혼례를 준비하고, 혼례를 치르고, 경찰서와 감옥을 왕래하며 갈등하고 기뻐하고 슬퍼합니다. 국민의 4분의 3이 읽지도 쓰지도 못하는 나라에서 책장수의 가족이란 원래가 드문 경우지만, 주인공 술탄 칸은 30여 년 간 서적 판매업에 종사했습니다. 무엇보다 문학과 책을 사랑했습니다. 공산주의자, 무자헤딘, 탈레반 같은 여러 정권의 하수인들은 차례로 쳐들어와서 책을 불태웁니다. 자신도 체포되어 감옥에 갇히곤 했습니다. 그러나 책에 대한 열정을 굽히지 않습니다. 책을 숨기고, 감옥에서 살아나오고, 서점을 다시 세웁니다. 아이들 교육을 위해 교과서를 출판하려고 하고, 부르카를 감옥이라 규정하며 여성의 권리를 부르짖습니다. 그러나...... 술탄 칸은 집안에서는 누구보다 억압적인 또 다른 가부장일 뿐입니다. 전통의 고수와 근대화 사이에 끊임없이 혼란을 겪어온 그들의 역사는 멀지 않은 과거에 있었던 한국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독자들은 마치 증기탕에서 부르카를 뒤집어 쓴 느낌을 받을 것입니다. 부르카가 얼마나 머리를 죄고 두통을 일으키는지, 얼마나 밀폐된 공간인지, 얼마나 공기가 부족한지, 얼마나 금방 땀이 삐질삐질 나게 하는지에 대한 얘기입니다. 책을 덮고서 우리는 비로소 시원한 공기에 감사하고, 그것을 공유해야 한 다는 사명감을 느낍니다. 이 소설은 아프가니스탄 출신의 미국인 청년이 탈레반 치하에서 친구에게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아프간을 찾는다는 내용의 『연을 쫓는 아이』란 베스트셀러에 필적합니다.(※1996년 9월 탈레반은 연날리기를 금지했었습니다.)(pp. 93-96).
    • 오피니언
    • 책소개
    2024-05-06
  • 【북토크】 글을 잘 쓰는 구체적인 방법
    글쓰는 것은 나의 오래된 관심사항이다. 기회 되는대로 글쓰기에 대한 책을 읽는다. 이 책도 그러한 관심에서 봤다. 유익하다. 특별히 이문재 교수는 글쓰기에 대해 매우 잘 설명하고 있어 전문을 게재한다. 잘 읽어보면 많은 유익을 얻을 것이다. 이문재 (시인, 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교수) 정확해야 아름다울 수 있다 왜 저널리즘적 글쓰기인가? 글쓰기의 장르는 매우 다양합니다. 사적인 글쓰기/공적인 글쓰기, 사적인 글쓰기: 일기, (자서전) 편지, 이메일, 공적인 글쓰기: 시와 소설, 희곡, 에세이, 기행문 등 문학적 글쓰기, 기사, 칼럼 등 저널리즘적 글쓰기, 광고 문안, 연설문, 안내문, 보고서, 기획서, 청원서 등등. 글쓰기는 더 이상 문인, 저널리스트 등 몇몇 전문가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미디어 환경이 급속하게 변화하는 것과 아울러, '문자시대는 가고 영상 시대가 도래했다고들 말하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세히 들여다 봅시다. 영상 이미지 역시 최종적으로는 문자 언어로 번역되어야 이해와 소통이 가능합니다. 인터넷과 휴대전화와 같은 뉴 미디어 역시 문자 언어에 상당 부분 빚지고 있습니다. 인간이 언어를 버리지 않는 한 인간이 이야기를 포기하지 않는 한 문자 문화는 영원할 것입니다. 언어는 대중의 합의에 의해 정착되고, 또 동시에 대중에 의해 변화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언어에 일정한 규범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역설적이게도 언어가 대중(언중)에 의해 생성소멸하고 유통되고 기록(저장)되기 때문에 보다 정확한 말하기와 쓰기가 필요한 것입니다. 문자 시대는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문자는 영상 혹은 구술 문화에 의해 위축되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문자 시대를 능동적으로, 그리고 당당하게 영위하는 교양인들은 그리 많지 않아 보입니다. 교양인이라면, 적어도 대학교를 졸업한 교양인이라면 전공을 불문하고 정확한 글쓰기 능력을 보유하고 있어야 합니다. 거듭 강조하지만, 우리의 개별적 삶은 듣고 말하고 읽고 쓰는 행위의 연속입니다. 이 중에서 쓰는 행위가 가장 논리적이고 또 정확해야 합니다. 글쓰기의 일차적 목표는 자신이 생각한 대로 쓰는 것입니다. 하지만 생각한 것을 그대로 쓰기란 거의 불가능합니다(무의식이 개입하기 때문입니다). 우선 생각 자체가 정돈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신의 생각을 정돈하지 않고 글을 쓰는 것은, 설계도도 없이 집을 짓는 경우와 다르지 않습니다. 생각이 잘 정돈되었다 하더라도, 그것을 정확히 표현(건축으로 치면 시공 능력)할 수 없다면 글쓰기는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저널리즘적 글쓰기가 갖고 있는 몇 가지 미덕 우리가 저널리즘적 글쓰기(기사 쓰기)에 관심을 갖는 이유는, 저널리즘적 글쓰기가 정확한 사실에 바탕해, 정확하게 표현하는 글쓰기의 모범이기 때문입니다. 저널리즘적 글쓰기에도 다양한 장르가 있지만, 자기 주장이 강하게 드러나는 칼럼(사설)이든, 쓰는 이의 관점이 가능한 한 배제되는(이른바 '객관적'이라는 스트레이트 기사에 이르기까지 저널리즘적 글쓰기는 무엇보다도 정확성이 강조됩니다. 저널리즘적 글쓰기는 사실을 정확하게 표현하고 전달하는 데 가장 적합한 글쓰기 방법입니다. 저널리즘적 글쓰기에서 아름다움은 미덕이 아닙니다. 미사여구는 정확한 사실을 전달하는 데 있어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화려한 수사는 사실(fact)을 표현하는 데 있어 장애물일 수도 있습니다. 저널리즘적 글쓰기를 주목해야 하는 두 번째 이유는 다른 글쓰기와 달리 취재와 구성이 전제되기 때문입니다. 물론 소설이나 드라마 시나리오를 쓸 때에도 취재 과정이 없지 않습니다. 하지만 저널리즘에서처럼 구체적인 현장(인물)과 정확한 사실이 필요하지는 않습니다. 저널리즘에서 활용하는 다양한 취재기법은 우리가 다른 장르의 글쓰기를 할 때 얼마든지 응용할 수 있습니다. 기획서나 평가 보고서를 작성할 때에도, 홈페이지나 블로그를 꾸밀 때에도 저널리즘의 취재기법을 동원하면 글이 훨씬 입체적이고 풍성해집니다. 셋째, 저널리즘적 글쓰기는 사건이나 사고, 사태나 현상 등 사회적 관심사에 대한 새로운 접근 방법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정확하고 심층적인 보도 못지않게, 남과 다른 시각에서 분석하려는 태도 역시 저널리즘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넷째, 저널리즘적 글쓰기는 독자 대중의 알 권리를 기본으로 하지만, 인물이나 사건 사고, 사태 등에 대한 독자의 기본적 궁금증을 풀어주는 기능을 갖고 있습니다. 저널리즘적 글쓰기는 여론의 흐름에 민감하게 반응하기 때문에, 사회 변화와 그 변화의 방향성을 파악하는 데 시야를 넓히고 시력을 키울 수 있습니다. 다섯째, 저널리즘적 글쓰기는 표현뿐 아니라 전달에 큰 비중을 둡니다. 다시 말해 아무리 새로운 지식과 정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독자(수용자)에게 전달되고 소통(커뮤니케이션)되지 않는다면 저널리즘적 글쓰기는 존재 이유가 사라지고 맙니다. 우리의 일상적 삶은 우리가 저널리스트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끊임없이 정보를 송신하고 수신하는 환경 속에서 진행됩니다. 송신자이면서 수신자인 우리가 소통 능력을 키우지 못한다면, 그 삶은 심리적으로, 그리고 사회적으로 심각한 문제를 야기합니다. 소통 능력이 있는 시민들로 구성된 사회가 건강한 사회입니다. 마지막으로, 미디어 환경이 급변하면서, 우리는 저마다 '1인 미디어'의 주인공이 될 수 있습니다. 블로그에 이어, 사용자 제작 컨텐츠(UCC, User-created content)라는 용어가 일상적으로 쓰이고 있듯이, 우리는 저마다 저널리스트가 될 수 있습니다. 자기 의견과 주장이 분명하다면, 그 사람은 어디에 있든, 그 의견과 주장을 어떤 미디어를 통해 전달하든 이미 저널리스트인것입니다. 지식정보사회를 살아가면서 단순한 지식 정보 소비자에 머물지 않고, 지식과 정보를 주체적으로 해석하고, 동시에 지식과 정보, 의견을 개성적으로 생산하고 소통하기 위해 우리는 저널리즘적 글쓰기에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저널리즘적 글쓰기를 체득하면, 보고서뿐 아니라 한 권의 책을 집필할 때에도 시간과 노력을 효과적으로 운영할 수 있습니다. 한 편의 기사와 한 권의 논픽션의 구조와 글쓰기 방법은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기사, 노력한 만큼 잘 쓸 수 있다. 1. 저널리즘적 글쓰기의 유형: 스트레이트 기사, 인터뷰 기사, 스케치 • 분석 및 해설 기사(feature story), 르포르타쥬, 칼럼, 논설 등 2. 기사를 잘 쓰기 위한 몇 가지 방법: 1) 주제를 분명하게 설정합니다. 주제를 한 문장으로 만들 수 있다면, 절반은 성공한 것입니다. 가령 '누가 한국을 움직이는가'라고 하면 각 분야에서한국을 이끄는 영향력 있는 인물을 선정하는 기획일 것입니다. 기사의 주제는 분명한 계기가 있어야 하며, 독자에게 유익한 정보가 되어야 합니다. 정보성이 부족하다면 흥미를 끌 수 있는 방법을 마련해야 합니다. 2) 주제를 뒷받침할 자료와 전문가, 현장(사례), 관련 기사를 찾습니다. 주제가 정해졌다면 가장 먼저 관련 기사를 검색해야 합니다. 한창 취재하다가 비슷한 기사가 몇 년 전에 나온 사실을 알고 포기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관련 기사를 검토하다 보면, 주제를 바꾸거나, 취재 영역에 변화를 줄 수 있습니다. 3) 구성을 어떻게 할 것인가. ◎역피라미드형: 전문(요약)중요한 사실-흥미 있는 이야기 순으로 구성합니다. 1900년대 초 미국의 AP통신이 개발한 기사 구조로 스트레이트 기사에서 흔히 사용합니다. ◎피라미드형: 도입-중요한 사실-서스펜스 형성-클라이맥스 순입니다. 피라미드형은 피처 기사에서 자주씁니다. 독자의 관심을 계속 끌고 갈 수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문학적이고 연대기적인 서술 방식입니다. ◎혼합형: 클라이맥스(요약)-서론-본론 결론 순. 4) 1), 2), 3)이 충분하게 준비되었다면, 기사 작성에 들어갑니다. • 간결하게 써야 합니다. 국내 신문은 일반적으로 5행 이상(65~75자)을 넘지 않도록 하고 있습니다. 단문을 쓰라는 것입니다. • 가능하면 구어체를 씁니다. 이야기하듯이 쓰라는 것입니다. ·주어와 술어를 분명히 합니다. • 매력적인 언어를 찾습니다. ・쉽게 씁니다. 좋은 기사의 첫째 조건은 쉬운 문장입니다. 이상은 언론학 입문서에서 가장 일반적으로 권장하는 지침입니다. 필자가 경험한 바에 따르면, 기사를 잘 쓰기 위해서는 다음 몇 가지를 유념 해야합니다. 먼저, 앞에서 말한 대로 기사의 주제를 한 문장으로 압축하십시오. 이것이 나중에 기사 제목이 될 수 있을 뿐 아니라, 기획과 취재의 매 단계에서 판단 기준이 됩니다. '민물낚시, 환경오염 주범'이라는 기획 기사를 준비한다면, 바다낚시의 오염 문제에 관한 자료는 읽을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둘째, 기획과 취재 단계에서 기사의 첫 문장, 즉 리드를 구상하십시오. 첫 문장이 결정되지 않으면 기사를 쓰기 어렵습니다. 취재를 충분하게 해놓고서도 첫 문장, 즉 도입부를 어떻게 시작할 것인지 결정하지 못해 전전긍긍하는 기자들이 제법 많습니다. 어디 기사뿐인가요. 모든 종류의 글쓰기가 첫 문장 에서 좌우됩니다. 오죽하면, 작가들이 "첫 문장은 신의 선물이다" 라고 말하겠습니까. 필자는 기자 생활을 하는 동안, 기획이 정해지면 그때부터 제목과 첫 문장을 구상하기 시작했습니다. 짧은 시를 쓸 때에도, 산문이나 논문을 쓸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셋째, 복잡한 사안을 취재할 경우, 취재한 내용을 주위 동료나 가까운 이들에게 이야기하는 것이 좋습니다. 흥미로운 인물을 인터뷰했을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야기를 하는 동안, 취재한 내용을 정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상대방의 반응을 체크할 수 있습니다. 가령 상대방으로부터 더 취재해야 할 부분, 더 강조해야 할 부분 등 의외의 아이디어를 얻을 수도 있습니다. 넷째, 관련 서적을 찾으십시오. 인터넷 검색은 참고자료일 뿐입니다. 가장 새롭고 신뢰할 만한 정보와 자료는 책에 다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십시오. 필자는 특집 기사를 쓸 경우, 기사 검색을 한 다음 대형 서적으로 달려가곤 했습니다. 관련 서적 한두 권만 읽으면, 그 분야의 권위자가 누구인지, 그 분야와 관련된 최신 이론은 무엇인지 장악할 수 있습니다. 열심히 취재해서 기사를 썼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어떤 책에 다 나와 있는 내용인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다섯째, 소설을 많이 읽고 영화, TV 드라마를 자주 보십시오. 소설은 어휘력을 풍부하게 해줄 뿐 아니라, 인간과 사회를 이해하는 시각을 갖게 해줍니다. 문학 분야가 아니더라도 베스트셀러 책은 따라 읽어야 합니다. 관객이 많이 드는 영화와 시청률이 높은 드라마도 놓치지 않아야 합니다. 베스트셀러 책과 영화, 드라마에서 한 줄 인용하면서, 혹은 등장인물을 끌고 들어가면서 기사를 시작하면 독자들의 눈길을 더 많이, 또 오래 붙잡을 수 있습니다. 기사의 궁극 목표는 좀 더 많은 독자들이 읽도록 하는 것입니다. 여섯째, 늘 기사만 생각하십시오. 기자는 늘 기사만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자동차를 운전하거나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 심지어 가족이나 친구와 대화를 나눌 때에도 기사를 생각해야 합니다. 카페 옆자리에서 얻어들은 한 마디가 대형 기사로 발전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찬반양론이 팽팽한 기사일 경우, 가족이나 친구들의 의견을 청취해보면, 취재나 기사 작성에 적지 않은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기사는 혼자 쓰는 것이 아닙니다. 기사가 아니라 다른 장르의 글을 쓸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보고 읽고 느끼고 생각한 만큼 글은 달라집니다. 개성적 글쓰기를 위한 기초체력 다지기 정확한 문장이 관건입니다. 정확하지 않은 문장은 특히 저널리즘에서 문장이 아닙니다. 시나 소설과 같은 문학 작품에서도 정확성이 우선입니다. 아름다운 문장은 그 다음입니다. 정확한 문장을 구사하지 못하는 작가는 아름다운 문장, 개성적인 글을 쓰기 어렵습니다. 정확하고 개성적인 쓰기를 위해서는 '기초체력'이 필요합니다. 글쓰기를 위한 기초체력을 다지는 필자의 체험적 방법론을 소개합니다. 1. '나쁜 버릇'부터 찾는다 어떤 글이든 좋습니다. 자기가 쓴 글을 분석 대상으로 삼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면, 자주 나타나는 단어나 표현이 발견됩니다. 사람마다 특유의 말투(말버릇)나 몸짓이 있듯이 글에도 특유의 '버릇'이 나옵니다. 예컨대, 어떤 사람은 '~것이다'라는 종결어미를 자주 씁니다. '~것이다'는 가능하면 쓰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자신의 글 버릇을 찾아내는 눈을 가지고 있다면 가능성이있습니다. 다음으로, 수식어가 많은 문장, 접속사가 많은 문장, 나열이 많은 문장이 나쁜 문장입니다. 자기 글에서 나쁜 점을 발견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이미 글을 잘 쓰는 사람입니다. 자기 글에서 문제점을 발견할 수 있는 수준까지 빨리 올라가야 합니다. 자기 글의 문제점을 발견할 수 있다면, 그 문제점만 제거해도 글쓰기는 순식간에 한 단계 업그레이드됩니다. 자기 글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 모른다면, 정말 큰 문제입니다. 정신 바짝 차리고, 자기 글을 들여다보십시오. 자기가 쓴 글들을 '원수가 보내온 편지'라고 생각하고 여러 차례 읽어보십시오. 버릇이 발견될 때까지 읽으십시오. 2. 자기가 좋아하는 글을 찾아라 자기가 쓰고 싶은 글을 쓰는 기자나 작가의 글을 집중적으로 읽으십시오. 글쓰기의 모델을 하나 설정하는 것입니다. 가수가 되고 싶어하는 청소년들은 반드시 좋아하는 가수가 있습니다. 운동을 좋아하는 청소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소설가 지망생은 필사하고 싶은 선배 소설가가 한둘은 꼭 있습니다. 좋은 기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글을 그대로 베껴 쓰십시오(필사). 외우면 더 좋습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글을 적극 모방해보십시오. 그 과정에서 글쓰기 수준이 몰라보게 향상됩니다.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알 수 있는 국내 소설가 대부분이 선배 작가의 소설을 필사하면서 습작기를 거쳤습니다. 추천하고 싶은 필자 '모델'은 문인 이외에, 혹은 문인이면서 매체에 자주 기고하는 분들입니다. 제가 추천하고 싶은 분들은 도정일(문학평론가), 김종철(<녹색평론> 발행인), 고종석(소설가 겸 언론인), 김훈(소설가 겸 언론인). 배병삼(정치학 및 동양학), 한형조(동양철학), 송호근(사회학), 고미숙(문학평론가), 정혜신(정신과 전문의) 등입니다. 이외에도 좋은 필자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3. 새롭지 않으면 쓰지 말라 저널리즘의 생명은 새로움입니다. 새롭지 않으면 뉴스가 아닙니다. 저널리즘이 아니라도 그렇습니다. 모든 글쓰기는 새로워야 합니다. 사실이나 의견에서 새로워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표현이라도 새로워야 합니다. 새롭지 않다면 신기하거나(의외성) 흥미로워야 합니다. 새로움, 의외성, 흥미, 이 세가지 중 한 가지도 만족시키지 못한다면 글을 쓸 이유가 없습니다. 4. 자세히 관찰하라 관찰은 모든 글쓰기의 스타트 라인입니다. 사물이든 사건이든 인물이든자 세히 관찰하지 않고서는 정확한 글쓰기가 불가능합니다. 관찰이 부정확하면 사실관계가 흔들립니다. 정확히 보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우리의 오감 가운데, 시각이 특히 부정확합니다. 주변 환경에 따라 착시 현상이 얼마나 자주 일어나는지 상기해보십시오. 관찰은 단지 시각에 한정되지 않습니다. 많이, 그리고 정확히 느끼는 것도 관찰의 범주에 들어갑니다. 책읽기, 영화 감상, 미술 감상 등도 관찰입니다. 관찰은 대상에 대한 집중입니다. 자신을 완전히 비우고(선입견을 버리고, 현상학적으로 말하자면 판단을 중지하고) 대상에 몰입했다가, 다시 대상으로 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상상력은 이 관찰 단계에서 나옵니다. 관찰 훈련의 첫 단계는 자기가 본 것으로 소리 내어 말해보는 것입니다. 관찰 대상이 인물이라면, 머리 모양과 색깔, 길이에서부터 이목구비를 거쳐 구두까지 관찰하면서 하나하나 말해보십시오. 컴퓨터나 텔레비전, 화분, 식탁, 자동차 실내 등 늘 마주치는 대상을 하나 정해서 소리 내어 하나하나 관찰해보십시오. 그동안 전혀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일 것입니다. 그것이 발견입니다. 낯익은 것에서 낯선 것을 찾을 수 있다면, 바로 그것이 최고의 글쓰기 재료입니다. 5. 메모하고, 메모하고 또 메모하라 기억력이 남다르다고 해도, 메모를 따라갈 수는 없습니다. 뛰어난 작가는 물론이고 예술가, 심지어 기업의 CEO들도 메모를 자주 합니다. 뭔가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메모광입니다. 인간이 하루에 접하는 새로운 정보(자극)는 수십만 개가 넘는다고 합니다. 밤에 잠자리에 누워 하루를 돌이켜보십시오. '오늘 내가 새로 느낀 것, 새로 발견한 것'을 떠올려보십시오. 거의 없을 것입니다. 주머니 혹은 핸드백에 작은 수첩과 필기구를 반드시 챙기십시오. 수첩과 필기구를 챙기는 습관이 들었다면, 글쓰기를 위한 가장 필수적인 요건을 갖춘 것입니다. 저는 화장실에도 연필과 포스트잇을 갖다 놓습니다. 주머니에 메모지와 볼펜이 없으면 산책도 하지 못할 만큼 습관이 되어 있습니다. 참신한 아이디어는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하루에도 수천 번 새로운 생각이 떠오릅니다. 하지만 그것이 글쓰기로 이어지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좋은 글은 메모지에서 나옵니다. 메모지가 '상상력 발전소'입니다. 개성적인 글쓰기를 위한 세부 지침 1. 나로부터 시작하라 저널리즘적 글쓰기, 특히 스트레이트 기사에서 '나'는 차가운 전달자입니다. 스트레이트 기사에는 글쓰는 사람의 주관이 개입해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1990년대 이후, 활자매체의 기사는 연성화하고 있습니다. 피처 기사, 칼럼 등은 대단히 주관적이고 개성적인 문체를 구사합니다. 기사작성 연습을 하고 싶다면 굳이 멀리 갈 필요가 없습니다. '나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자서전을 써 보거나, 자기가 자기를 인터뷰하는 것입니다. 가족이나 친구를 소개하는 글도 좋은 훈련이 됩니다. 자기가 사는 마을(아파트)을 취재해 사진과 곁들여 기사를 써보는 것도 훌륭한 저널리즘적 글쓰기입니다. 시나 소설을 쓰기 원한다면 더욱 그렇습니다. '나'의 이야기를 쓰십시오. 문학적 글쓰기를 방해하는 가장 큰 요소 가운데 하나가 글쓰기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그렇다면 자기 자신에서 출발하십시오. 나에 대해, 나의 가족과 친구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은 바로 나입니다. 잘 알고 있는 소재를 글로 쓸 때, 글쓰기에 대한 두려움은 현저하게 줄어듭니다. '나'에 대한 글쓰기는 자기 삶을 성찰하는 진지한 계기를 제공합니다. 내가 어디에서 왔고, 또 어디에 있으며, 어디로 갈 것인가. 이 같은 인문학적 질문을 던지게 하는 것은 글쓰기 말고 거의 없습니다. 2. 반복하지 말라 반복은 강조할 때 말고는 피해야 합니다. 반복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표현의 반복과 내용의 반복이 그것입니다. 같은 단어, 같은 표현을 반복하지 마십시오. 사실을 왜곡하지 않는 범위에서 유의어를 쓰십시오. '그녀는 아름다운 숄을 두르고, 아름다운 가방을 들었으며, 아름다운 마을에 산다. 이 문장에서 '아름다운'은 반복될 뿐만 아니라, 정확하지도 않습니다. 글쓰기의 가장 큰 장애물 가운데 하나가 내용의 반복입니다. 중언부언하지 마십시오. 같은 내용(견해, 정보, 지식......)이 반복되면 독자는 냉정하게, 즉각 눈을 돌립니다. 친구와 이야기할 때를 떠올려보십시오. 어제 한 얘기를 오늘 하면 친구는 즉각 이렇게 나옵니다. "그거, 어제 들은 얘기야." 글쓰기도 마찬가지입니다. 3. 한 문장에는 하나의 정보만 담아라 이것은 문장을 짧게 쓰는 비결이기도 합니다. 한 문장에는 하나의 정보, 한문단에도 하나의 정보군을 담는 것입니다. 한 문장에 두 개 이상의 정보를 담는 순간, 문장은 길어집니다. 한 문단에 두 개 이상의 정보군을 담으면, 복잡해지기 때문에 독자가 이해하기 힘들어집니다. 아침에 집에서 나와 학교, 또는 사무실에 도착하기까지의 과정을 '한 문장, 하나의 정보' 원칙에 따라 글로 써보십시오. 처음에는 대단히 힘들 것입니다. 하지만 몇 번 고쳐 쓰다보면, 문장을 짧게 쓰는 방법을 스스로 터득할수 있을 것입니다. 4. 접속사를 쓰지 말라 통학 또는 통근 과정을 '한 문장, 하나의 정보' 원칙에 따라 쓰다 보면, 수시로 접속사가 끼어들 것입니다. 접속사 없이 쓰려고 애써보십시오. 최근에 읽은 소설 가운데 접속사가 거의 ('전혀' 라고 해도 크게 틀리지 않다) 없는 소설이 있습니다. 김훈의 장편소설 <남한산성>인데, 접속사에 유의하며 읽어보십시오. 매우 흥미로운 글읽기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접속사는 글 쓰는 이의 마음속에 있어야 합니다. 특히 연결형, 나열형 접속사를 피하십시오. 5. 나누고 묶어주어라 기사를 쓸 경우, 다양한 정보를 한꺼번에 제공해야 할 때가 자주 있습니다. 그럴 때는 유사한 것끼리 묶어줘야 독자가 편하게 읽을 수 있습니다. 음식 종류를 소개한다면, 국적별 혹은 재료별, 계절별 등으로 나누어 묶어줍니다. 6. 병치할 때 조심하라 같은 기능을 가진 단어, 구, 절 등이 나란히 놓일 때 자주 오류가 나타납니다. '사과와 큰 배' '철수는 중학생이고 영희는 공부를 잘한다'와 같은 문장이 의외로 많습니다. '사과'라는 단어와 '큰 배'라는 구는 병치하면 안 됩니다. 단어는 단어끼리, 구는 구끼리 병치하십시오. '사과와 배' '작은 사과와 큰 배'가 적확한 표현입니다. 앞의 문장은 '철수는 중학생이고, 영희는 초등학생이다로 써야 합니다. '중학생' (단어)과 '공부를 잘한다' (구)가 나란히 놓이면 대단히 어색합니다. '30-3-30 법칙'을 명심한다 언론인들은 30-3-30 법칙'을 자주 언급합니다. 여기서 30. 3. 30은 각각 30초, 3분, 30분을 일컫습니다. 독자들이 기사를 읽을 때, 처음 30초 동안은 제목이나 부제, 사진, 그래픽 요소, 기사의 도입부 등을 살펴본다는 것입니다. 독자들은 처음 30초 안에 기사를 읽을 것인지 말 것인지를 결정합니다. 만일 읽기로 마음먹었다면 다음 3분 동안 기사의 도입부를 읽습니다. 그리고 도입부가 흥미롭다면 30분 동안 기사를 끝까지 읽는다는 것입니다. 기자와 편집자는 처음 30초를 3분으로 늘리고, 다시 3분을 30분으로 늘리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것입니다. 기사만 그런 것은 아닙니다. 모든 글이 제목과 도입부에서 결정납니다. 시처럼 짧은 글에서도 제목이나 첫 연이 진부하면 독자들은 눈을 돌려버립니다. 소설은 굳이 설명이 필요 없습니다. 보고서나 논문도 마찬가지입니다. '30-3-30 법칙'은 첫 문장에 목숨을 걸라는 저널리즘적 글쓰기의 핵심을 압축하고 있는 법칙입니다. 이문재. 1959년 경기도 김포에서 태어나 경희대에서 국어국문학을 전공하고,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시사저널 취재부장, 문학동네 편집주간을 역임했고, 현재 <시사IN> 편집위원, <문학동네〉 편집위원, 〈녹색평론〉 편집자문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교수로 재직 중이다. 김달진문학상, 시와시학 젊은 시인상, 소월시문학상, 지훈문학상, 노작문학상을 수상하였으며, 시집으로 《내 젖은 구두 벗어 해에게 보여줄 때》, 《산책시편》, 《마음의 오지》, 《제국호텔> 등이 있다(pp.197-212).
    • 오피니언
    • 책소개
    2024-05-03
  • “흥청망청” 108회 선관위... 명분없는 돈 낭비
    본 기사는 교회발전연구소 대표 이능규 목사에게 모 인사가 108회 선관위(위원장 권순웅 목사)에 대해 제보한 내용을 바탕으로 작성한 기사임을 밝힌다. 제보 내용에 따르면 선관위가 불필요한 돈을 낭비하고 있다. 제108회기 선관위는 공정선거감시단 해외 활동에 이미 많은 경비를 집행했다. ▲전국장로회연합회 임역원수련회(일본) : 고정식, 손정호, 김삼주, 신덕수, 한기영(750만원 집행) ▲농어촌교역자부부수양회(다낭) : 권순웅, 신덕수, 지동빈, 임종환, 최병도(613만원 집행) ▲전국교역자하기수양회(필리핀) : 전웅구, 김상원, 유병희, 한기영, 이상돈(599만 5천원 예산). 이때 위원장 권순웅 목사와 서기 한기영 목사가 강사를 맡았다고 한다. 현재 바뀐 선거규정에 따라 후보자는 행사에 참석할 수 없다. 그런데 선관위 공정선거감시단은 누구를 감시하기 위해 해외 행사에 동행하는 것인가? 제보자는 “돈**”이라는 격한 표현을 사용했다. 또한 선관위는 민찬기 목사가 제기한 가처분 신청 소송에 대응하기 위해 변호사비로 5천 5백만원을 지출했다. 선관위원들이 1차 투표해 7대7로 나왔다면 의견이 팽팽하다는 것인데 굳이 다시 투표해 7대8로 만든 것이 화근이다. 증경총회장단이나 실행위원회에 넘겨 자문을 구했다면 굳이 총회 돈을 지출할 소송에 휘말리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것이 중론이다. 현재 감사부는 107회기 선거관리위원회(위원장 배광식 목사)에 대해 특별재정감사를 하고 있다. 어제는 서기와 회계를, 오늘은 위원장과 심의분과장을 부른다. 안건은 선관위가 재정을 과잉지출했다는 것이다. 모 선관위원은 자기들은 비용을 아껴서 사용했다고 주장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기에 특별재정감사를 받는 것이다. 앞으로 108회기 선관위도 감사부에 의해 특별재정감사를 받지 말란 법이 어디 있겠는가? 이 악순환을 끊어야한다. 선관위의 근본적인 개혁이 필요한 때다.
    • 오피니언
    • 칼럼
    2024-05-03
  • 【북토크】 가수 장기하의 깨달음
    가수 장기하를 좋아한다. 노래가 재미있기 때문이다. 그의 대중적인 첫 노래 “싸구려 커피”, “달이 떠오른다, 가자” 등은 신선했다. 읽을 책들을 검색하다 보니 그가 몇 년 전에 쓴 것이 있어 대출해서 봤다. 부담없이 재미있게 읽었다. 첫 장인 ‘안경과 왼손’은 주어진 환경을 담담히 받아들이고 돌아본 후 감사하는 내용이다. 읽어볼만해 전문을 소개한다. 안경과 왼손 얼마 전 안경을 잃어버렸다. 매우 아끼는 안경이었다. 아니, 아낀다는 표현으로도 모자란다. 이삼 년 전 그 안경을 산 이후로는 오직 그것만 써왔던 것이다. 그런데 어느날 아침 갑자기 사라져버렸다. 있을 만한 곳을 전부 다 여러 번씩 싹싹 뒤져봤지만 찾지 못했다. 결국 예전에 썼던 다른 안경을 쓰고 집을 나설 수밖에 없었다. 약속 장소로 가는 길, 이삼 일 전에 읽었던 무라카미 하루키 에세이의 한 구절을 떠올렸다. "형체 있는 것은 아무리 애써도 언젠가, 어디선가 사라져 없어지는 법이다. 그것이 사람이건 물건이건." 마음을 털어버렸다. 그래, 그 안경이랑은 여기 까지였나보지 뭐. 나는 국소성 이긴장증이라는 병을 가지고 있다. 해괴해 보이는 이름이지만 의미는 간단하다. '국소성'이란 특정 부위에 나타남을, '이'는 이상함을, '긴장'은 말 그대로 긴장을 뜻한다. 한마디로 특정 부위가 이상하게 긴장된다는 얘기다. 이 병명에서 가장 중요한 글자는 '이'다. '이'자가 들어간 병을 선고받는다는 것은 말하자면 이런 상황이다. 몸이 안 좋다. 병원을 찾아가 묻는다. "선생님, 저 왜 아픈건가요?" 의사가 답한다. "그러게요. 이상하네요." 그렇다. 내 병은 원인도 치료법도 알려지지 않은 희귀병이다. 이 병이 처음 생긴 것은 대략 십오년 전쯤으로, 군악대 시험을 준비하던 시절이었다. 당시 나는 '눈뜨고코베인'이라는 록밴드에서 드러머로 활동하고 있었다. 가수가 되겠다는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저 드럼 하나로 먹고살 수 있을 정도로 연주를 잘하는 사람, 즉 프로 드러머가 되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그 외의 진로는 상상조차 하지 않았다. 학교 공부는 최소한으로 하고 드럼 연습과 밴드 활동 위주로 생활했다. 그러다보니 군복무를 시작도 하지 않은 채 대학 오 년 차를 맞았고, 더이상은 입대를 미룰 수 없게 되었다. 내 선택은 당연히 군악대였다. 군대에 있는 동안 손발이 녹슬면 큰일 아닌가. 일반 부대는 절대로 안 된다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군악대는 록 연주만 잘한다고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클래식 타악, 특히 행진곡풍의 연주에 능통해야 했다. 자신은 있었다. 이미 연습이라면 많이 해온 터였기 때문이다. 좀 다른 장르의 연주라고 해서 못 해낼 것은 없다고 생각했고, 시험을 대비해 맹연습에 돌입했다. 이삼 개월쯤 지났을 때 복병이 나타났다. 연습만 하려고 하면 내 의지와 관계없이 왼손이 꽉 쥐이는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드럼 연주의 기본은 그립이다. 누가 툭 치면 놓쳐버릴 듯 살며시 스틱을 잡고 부드러운 움직임을 만들어야 빠르고 정확한 연주를 할 수 있다. 그런데 자꾸 나도 모르게 스틱을 힘껏 잡게 되고 그것을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이 반복되다보니 미쳐버릴 노릇이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연습하다 너무 답답하고 화가 나서 소리를 지르며 스틱을 집어던진 것도 한두 번이 아니다. 결국 군악대는 포기했다. 치료법도 알 수 없고 상태가 호전될 기미도 보이지 않으니 어쩔 수가 없었다. 더욱 중요한 것은, 프로 드러머의 꿈도 함께 버렸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게 그리 절망스러운 단념은 아니었다. 내 생각의 흐름은 이랬다. '하긴 군악대의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 연주하는 게, 내가 멋있는 음악을 하는 데는 오히려 해가 될지도 몰라. 멋있는 음악이라... 그래, 생각해보면 프로 드러머가 되는 것 자체가 멋있는 음악을 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 수도 있겠네. 연주로 먹고살려면 돈 되는 음악을 해야 하는데, 내가 지금 멋있다고 생각하는 우리나라 음악 중에 돈 되는 게 하나라도 있나? 그리고 나는 우리 밴드 음악이 제일 멋있는데 그걸로 돈을 벌어본 적도 없잖아? 애초에 음악으로 돈을 벌겠다는 생각 자체가 문제였어!' 나는 홀가분한 기분으로 프로 연주자가 아닌, 돈은 안 돼도 '멋있는 음악을 하는 뮤지션이 되겠다고 마음 먹었다. 그리고 일반 부대에 입대했다. 제대한 후 나는 그 '멋있는' 뮤지션이 되는 일을 실행에 옮겼다. 파트타임 일자리를 구한 상태에서, 내가 싱어송라이터로서 이끄는 새 밴드 '장기하와 얼굴들'을 시작한 것이다. 최소한의 돈과 최대한의 시간을 확보해 자유롭게 음악활동을 하겠다는 생각이었다. 곡은 군복무중 짬짬이 만들어뒀었다. 물론 큰 인기를 얻으리라는 기대는 전혀 없이 만든 노래들이었다. 눈앞에 있는 관객들만은 확실히 재밌게 해주겠다는 생각이 다였다. 그런데 터졌다. 소위 '대박'이었다. 활동을 시작하고 일 년이 지나기도 전에 전 국민적 히트곡을 보유한 밴드가 된 것이다. 모든 것이 거짓말처럼 순조로웠다. 한 가지만 빼고 말이다. 왼손에 힘이 들어가는 증상이 기타를 연주할 때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처음에 이 증상이 신기했던 건 유독 드럼 연주를 할 때만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다른 일을 할 때는 아무런 불편이 없었다. 물론 기타 연주를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군복무중에도 생활관에 비치된 통기타를 치며 노래를 만들었고, '장기하와 얼굴들' 첫 싱글을 녹음할 때도 기타는 내가 다쳤으며, 밴드 활동 초기에는 공연을 할 때도 절반 정도의 곡에서는 내가 기타를 잡았다. 그런데 급격하게 치솟는 인기를 실감하며 공연을 이어가던 어느 날, 기타를 연주할 때도 왼손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결국 기타도 포기했다. 이번 단념은 군악대 때와는 달리 좀 절망스러웠다. 공연에서 기타를 연주하지 않기로 했음은 물론이고, 평소에 혼자 치는 것도 거의 못하게 됐다. 늘 자유자재로 하던 기본적인 플레이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게 되니 짜증이 치밀었다. 자연히 심심풀이로 기타를 잡는 일이 점점 줄어들었다. 중학교 때 이후로 그때까지 줄곧 기타는 나의 가장 좋은 취미 중 하나였다. 집에 있을 때면 침대에 누워 기타를 배에 얹고 아무렇게나 퉁겼다. 그러면서 멜로디를 이리저리 흥얼거리다보면 이따금씩 노래가 만들어지곤 했다. 그런 일상이 하루아침에 송두리째 날아가버렸다. 게다가 이번에는 증상이 연주에만 국한돼 나타난 것이 아니라 일상 전반으로 퍼져나갔다. 곧 타자를 치는 것도, 단추를 잠그는 것도, 왼손을 써야 하는 어떠한 일도 예전만큼 쉽게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로부터 십 년이 흘렀다. 그런데 그 십 년을 돌이켜보면, 이 병이 내게 나쁜 일만은 아니었다. 사실 병에게 엎드려 절하고 싶을 지경이다. 프로 드러머의 길을 포기함으로써 결국 '장기하와 얼굴들'을 시작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기타 연주를 포기한 것 역시 내게 두 가지 커다란 선물을 가져다주었기 때문이다. 첫째는 새 기타리스트 하세가와 요헤이 형을 영입한 것, 둘째는 내가 무대에서 악기 없이 자유롭게 퍼포먼스를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두 가지가 없었다면 '장기하와 얼굴들’의 활동이 내게 가져다준 희열은 말도 안 되게 줄어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세월이 지나면서 증상도 아주 조금씩 좋아져 이제는 거의 다 나았다. 지금도 약간의 느낌이 남아 있긴 하지만, 일상에서 그것을 의식하게 되는 일은 드물다. 기타와 드럼도 취미 정도로는 다시 연주할 수 있게 되었다. 그간 연습을 안 했으니 남들 앞에 뽐낼 만한 연주력은 당연히 아니지만, 사실 이제는 그런 능력이 필요하지도 않다. 싱어송라이터로서 좋은 연주자들과 함께할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다. 무엇보다, 증상이 가장 심했을 때를 떠 올리면 집에서 혼자 재밌게 연주할 수 있는 것만 해도 감지덕지다. 지금도 이 병의 원인은 의학적으로 밝혀지지 않은 듯하고, 물론 나도 아직 정확히 어떤 일이 벌어진 것인지 알지 못한다. 다만 이렇게 추측할 뿐이다. 내가 나 스스로에게 과도한 것을 강요했고, 몸이 그만두라는 신호를 보냈다. 나는 그것을 무시하지 않고 충분히 쉬게 해주었으며, 그랬더니 시간을 두고 차츰 회복되었다. "형체 있는 것은 아무리 애써도 언젠가, 어디선가 사라져 없어지는 법이다. 그것이 사람이건 물건이건? 그리고 형체가 없긴 하지만 능력도 마찬가지다. 어제까지 당연히 할 수 있었던 일을 오늘 갑자기 못하게 될 수도 있다. 나는 그럴 때마다 무척 괴롭긴 했지만, 결국 다 순순히 받아들였다. 이 능력은 여기까지인가보다, 하고. 그리고 새로운 상황에 맞춰 새로운 계획을 세웠다. 그러고 나면 그전에는 상상도 못했던 다른 길이 열리곤 했던 것이다. 안경은 며칠 뒤에 소파 밑에서 찾았다. 전날 술에 취해 소파에서 잠들었고, 안경을 아무렇게나 내팽개치는 과정에서 소파 아래로 들어간 모양이었다. 거실에서 잠드는 일이 거의 없다보니 그곳을 찾아볼 생각은 하지 못했던 것이다. 먼지 구덩이 속에 얌전히 놓인 안경을 발견한 순간, 그야말로 날아갈 듯한 기분이었다. 아무리 많이 아끼는 안경이라 해도, 물건 하나로 그렇게까지 기쁠 수 있다싶었다. 모르긴 해도, 깨끗이 포기했었기 때문일 거다(pp. 17-24).
    • 오피니언
    • 책소개
    2024-05-02
  • 【단상】 부총회장 선거, 축제가 싸움판으로
    지난 4월 25일 오전 11시 참좋은교회(이윤찬 목사 시무)에서 대구교직자협의회 제31회 정기총회가 있었다. 이승희 증경총회장의 개회 예배 설교 후 합심기도 시간에 경북교직자협의회 대표회장 강전우 목사가 ‘총회와 영남지역을 위해서’ 기도할 때 부총회장 자격 문제로 소송이 붙은 총회를 염려하며 간절히 기도했다. 소송 관계자인 부총회장 후보 민찬기 목사나 장봉생 목사의 마음은 어떨지 모르나 총회 회관에서 먼 경상도 지역에서도 현 사태를 매우 안타깝게 여기며 탄식으로 기도하고 있다. 아마 이 사태를 지켜보는 대부분의 총대들의 마음도 편치는 않을 것이라고 본다. 한 사람의 부총회장이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과 물질이 필요하다. 노회와 협의회, 총회 등에서 오래 봉사하며 자신을 알려야한다. 이에 많은 시간이 든다. 그리고 물질로도 많이 섬겨야한다. 그래서 아무나 부총회장이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면에서 시간과 물질로 섬겨온 부총회장 후보들은 모두 총회의 귀한 자산이다. 바람직한 것은 단독 후보로 추대되는 것이지만 어쩔 수 없이 경선이 될 수도 있다. 그러다보면 친했던 사이도 서먹해지거나 “원수” 사이가 될 수 있다. 그래서 곽선희 목사는 운동을 할 때 서로 마주보는 것은 하지 않는다고 했다. 탁구나 테니스나 서로 마주보고 하다보면 감정 싸움이 될 수 있기에 자기는 각자 실력으로 승부하는 볼링을 한다고 말한 것을 들은 적이 있다. 일리 있는 말이다. 오래 세월 총회를 섬겨온 민찬기 목사나 장봉생 목사는 현재 서로를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내리 누르고 이겨야할 경쟁 상대로 보지 않겠는가 말이다. 이런 면에서 선거란 참으로 잔인한 것인지도 모른다. 민찬기 목사 소속 임원회가 민찬기 목사의 후보 자격에 대해 물었을 때 장봉생 목사 소속 노회도 임시노회를 열어 부총회장 출마 자격에 대해 선관위에 질의했다. 선관위가 이 문제를 다룰 때 투표에 처음에는 7:7 동수가 나왔다. 이어 재투표하여 7:8로 세 번 출마는 안된다는 결론을 내렸다. 다 지나간 일이지만 의견이 7대 7로 나뉘었다는 것은 선관위원 내에서도 의견이 팽팽했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 문제를 바로 처리할 것이 아니라 좀더 시간 여유를 두고 처리했다면 좋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있다. 증경총회장단의 의견을 듣는다든지, 실행위원회에서 의견을 구했다면 모양세는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속전속결로 재투표해 7:8로 세 번 출마 불가로 정했다. 그러자 민찬기 목사측에서는 이 문제에 대해 소송을 했고, 소속 노회에서 부총회장 후보로 추천을 받았다. 세상 법정이 이 문제를 어떻게 처리할지는 두고보면 된다. 그런데 성경은 교회 문제를 세상 법정에 끌고가는 것을 경고하고 있다. [고전6:1-7] “1 너희 중에 누가 다른 이와 더불어 다툼이 있는데 구태여 불의한 자들 앞에서 고발하고 성도 앞에서 하지 아니하느냐 2 성도가 세상을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세상도 너희에게 판단을 받겠거든 지극히 작은 일 판단하기를 감당하지 못하겠느냐 3 우리가 천사를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그러하거든 하물며 세상 일이랴 4 그런즉 너희가 세상 사건이 있을 때에 교회에서 경히 여김을 받는 자들을 세우느냐 5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 하여 이 말을 하노니 너희 가운데 그 형제간의 일을 판단할 만한 지혜 있는 자가 이같이 하나도 없느냐 6 형제가 형제와 더불어 고발할 뿐더러 믿지 아니하는 자들 앞에서 하느냐 7 너희가 피차 고발함으로 너희 가운데 이미 뚜렷한 허물이 있나니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 새로이 총회를 섬길 일꾼을 뽑는 총회 선거가 축제가 아니라 세상의 조롱거리가 되고, 사법의 판결을 받아야하는 싸움판이 된 것이 참으로 안타깝다.
    • 오피니언
    • 논단
    2024-04-26
  • 취재 기자를 내쫓는 노회들...무엇이 두려운가?
    봄 정기노회가 열리는 계절이다. 서울에서 먼 지방의 몇몇 노회를 취재갔다. 그 중 2개 노회에서 “내쫓김”을 당했다. 이리노회는 북일교회 문제로 회원 호명 때부터 시끄러웠다. 결국 노회원들간에 고성이 오갔다. 이런 가운데 취재하고 있는 기자들에게 나가달라고 "거칠게" 요구했다. 결국 쫓겨날 수 밖에 없었다. 충청노회도 전 총신대총장 김영우 목사 피소건에 대해 다루며 기자들에게 나가달라고 “험악하게” 요구했다. 결국 본당 중이층으로 쫓겨갈 수 밖에 없었다. 기자는 사실을 취재하고 알리기 위해 그 현장에 가 있는 것이다. 북일교회 문제는 대부분의 총회원들이 알고 있을만큼 큰 이슈이다. 당연히 기자들이 가서 취재할 수 밖에 없는 사항이다. 기자는 총회원들의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 대신해서 그 현장에 간 것이다. 그런데 무슨 이유로 기자들을 내쫓는 것인가? 그것이 과연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겠는가? 기자가 보면 안될만큼 감춰야할 문제가 있는가? 사실을 사실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문제해결에 도움이 될 수 있다. 문제 없는 노회는 취재간 기자들을 반기며 좋게 기사를 써서 노회를 잘 홍보해 달라고 부탁한다. 기자로서도 기분좋은 일이다. 반면 문제 있는 노회는 기자를 내쫓는다. 마치 잡상인 취급을 한다. 부득이 기자를 내보낼 필요가 있다면 “정중하게” 요청했으면 한다. 같은 합동측 목사한테 그렇게 함부로 해서 되겠는가? 앞으로도 “문제 있는” 이리노회와 충청노회 “사태 추이”에 대해 예의주시할 것이다.
    • 오피니언
    • 칼럼
    2024-04-03

실시간 오피니언 기사

  • 말·문자·카톡 실수, 패망의 지름길
    우리는 하루를 살면서 수많은 말을 한다. 대면해서 말하든, 전화로 말하든, 문자나 카톡같이 글로 말하든 말을 하며 산다. 그러면서 종종 실수를 한다. 그런데 때로 이 실수가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낳기도 한다. 이것은 필자를 포함해 예외없이 모두에게 해당되는 일이다. 그런데 일반인이야 큰 문제가 안될 수 있지만 알려진 사람에게 이러한 실수는 치명타이다. 공개적인 자리에게 말실수를 해 큰 봉변을 당하는 경우를 보기도 한다. 또 문자나 카톡을 잘못 보내 이것이 문제가 되는 경우도 있다. 내용을 확인하지 않거나, 받는 사람을 잘 확인하지 못하고 보내 일파만파 문제를 만들기도 한다. 그나마 최근 카톡은 보낸지 5분 이내에서는 삭제할 수 있다. 그러나 누군가 캡처를 해두면 이 또한 골치 아파진다. 말도 누구나 다 있는 휴대폰으로 녹음하거나 영상을 찍어둘 수 있다. 결국 방법은, 매사 조심하는 것이다. 말조심, 글조심해서 손해볼게 없다. 총회 일을 하고자 하는 자나, 교계에서 뭔가 하기를 원하는 자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기본적으로 말·문자·카톡을 조심하는 것이다. 이것이 뜻하지 않게 자신의 발목을 잡을 수 있다. 뜨끔한 사람들이 없기를 바란다.
    • 오피니언
    • 논단
    2023-04-19
  • 총회총무 연임제, 再考의 필요성
    현 선거법상 임기 3년인 총회총무는 1회에 한해 연임할 수 있게 되어있다. 유능한 총회총무에게 총회를 한번 더 섬길 수 있는 기회를 주기 위함인지는 모르나 현실적으로는 문제가 있어 보인다. 첫 번째로, 총회총무는 지역 순환제인데 연임제도는 이에 반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번 총회총무는 영남지역 몫인데 현 총무가 출마하기에 이에 대해 불만이 많다고 한다. 이처럼 지역 순환제에 역행하는 총회총무 연임제는 재고해 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두 번째로, 총회총무가 연임을 위해 추천 받은 후 후보 등록하면 그때부터 업무가 중지된다. 그러면 새로운 총회총무를 선출하는 9월 총회까지 총회총무 업무는 공백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총회적으로 매우 큰 손실이다. 총회총무는 대외적인 업무를 통해 우리 교단의 위상을 높여야 할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두 가지 이유에서라도 총회총무 연임제는 한번 再考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 오피니언
    • 논단
    2023-04-18
  • 【논평】 박성규 목사 총장 선출이 의미하는 것
    싱겁게 끝나고 말았다. 총신대학교 22대 총장은 박성규 목사가 경쟁자 문병호 교수를 11:3으로 누르고 “압승”했다. 박성규 목사가 유리할 것이라는 것은 지난 3월 2일 총신대학교 총장후보추천위원회에서 박성규 목사가 10표, 문병호 교수가 5표를 얻을 때부터 있었던 말이다. 이후 4월 11일에 모인 이사회에서 14명의 이사가 투표할 시점까지 박성규 목사에게 불리한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결국 이변없이 박성규 목사가 무난히 총장으로 선출됐다. 과거 목사 총장으로는 길자연 목사와 김영우 목사가 있었다. 이들은 자기 정치를 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학교가 희생제물이 됐다. 일각에서는 목사 총장에 대한 우려의 소리가 있으나 이는 기우(杞憂)에 불과하다고 볼 수 있다. 박성규 목사의 삶의 족적을 보면 자기 정치를 할 야망가가 아니다. 그러므로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는 말은 적어도 박성규 총장에게는 해당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항간에는 교갱(교회갱신협의회)이 모든 권력을 쥐었다는 말이 있다. 금년 9월 108회 총회에서 총회장이 될 오정호 목사나 김기철 이사장 그리고 박성규 총장 등은 교갱에 속한 인물들이다. 그러나 교갱이 주요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제대로 역할을 하느냐가 중요하다. 교갱에 속한 인물들에게 주요 자리가 주어졌을 때 잘하면 인정을 받을 것이요, 못하면 “교갱도 별거 없네”하는 비판을 당할 것이다. 교갱에게 기회는 위기가 될 수 도 있다. 다행인 것은 지난 4월 10일 오정호 목사가 총회장 후보로 추천을 받는 자리에서 “새로운 미래를 열어가는 제108회기가 되기를 바란다”며 특별히 “총신을 복되게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겠다. 총신 신학과 신앙을 수호하고 계승하겠다”고 말했다. 총장 선출 후 박성규 목사는 “개혁신학의 정체성을 공고히 하고 교과과정을 다듬어 교회와 사회가 필요로 하는 인재를 키우는 일에 힘쓰겠다” 아울러 “담임교수제를 도입하고 모금활동을 활발히 전개해, 학생들과 교수들이 마음껏 공부하고 연구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겠다”고 했다. 현재 총신대는 재정 여유가 없다. 신임 총장의 일 중에 모금 활동이 우선 힘써야 할 일 중 하나일 정도이다. 박성규 목사는 그런 면에서 유리하다. 그동안 목회자로서 쌓아온 인맥을 통해 교회에서 많은 모금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해본다. 감히 교수들에게 한마디 하겠다. 교수들은 총장 자리가 ‘자기들의 밥 그릇’이라는 의식이 많았다. 그래서 박성규 목사가 총장 후보로 나설 때 대자보를 통해 “기울어진 운동장”이라는 비뚤어진 시각을 보여줬다. 이것은 교수들이 얼마나 정치적으로 왜곡되어 있는가를 보여주는 단초이다. 이번에 박성규 목사가 총장으로 선출된 이유 가운데 하나는 교수들 자체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교수에게 총장을 맡길 수 없다는 의식이 팽배했다는 것을 교수들은 애써 외면하고 있는 것 같다. 교수들 중에는 과거 정치에 야합해서 이익을 얻으며 교수로서의 본분을 망각한 자들도 있었다. 교수는 학문 성과로 자기 존재를 증명해야하는 사람들이다. 정치판을 기웃거려서는 안된다. 또한 단지 자기 학문의 울타리에 안주하지 말고 한국교회를 알고 조직 운영에 대해 알고 체험해야한다. 총장은 많은 일을 해야한다. 총신이 운영하는 교육 기관이 얼마나 많은가? 그 모든 것의 조화를 이루고 아우르는 행정력을 가져야한다. 그면에 있어 대형교회 목사는 탁월한 행정가이다. 교수가 목사를 능가하는 행정력이 없을 때 앞으로 목사 총장이 계속될 수 있다는 위기감을 가져야 할 것이다. 주제넘게 부전교회 교인들에게도 한마디 하겠다. 좋은 담임목사를 가졌다는 것에 대해 자부심을 가졌으면 한다. 쟁쟁한 교수 후보자들을 제치고 당당히 담임목사가 한국교회의 보수 신앙을 대표하는 총신대학교의 총장이 되었다는 것이 얼마나 자랑스러운 일인가! 이것은 부전교회 역사에 두고두고 자랑할 만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비록 좋은 담임목사를 떠나보내는 아픔이 있다지만 하나님께서 그를 총장으로 쓰시겠다고 하는데 어찌할 수 있는가? 가시는 길에 두 손 들어 축복을 빌어줘야 할 것이다. 박성규 목사도 부전교회에 대한 마음의 짐을 늘 갖고 살아갈 것이다. 부전교회에서 은퇴하지 못하고 사임하는 마음이야 얼마나 무거울까를 짐작해본다. 이제 총신대학교 총장 선거는 모두 끝났다. 신임 총장이 된 박성규 목사를 학교, 군목 후배로서 지지하고 응원한다. 교수들에게 격려를 보낸다. 부전교회 교인들에게도 축하드린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 하나님께 영광!
    • 오피니언
    • 논단
    2023-04-12
  • 〖독서일지〗 「깊이 읽는 여덟가지 복」
    김남준 목사는 여러 베스트셀러 책을 쓴 작가로, 이 책은 팔복에 대한 설교문이다. 가볍게 읽어볼만한 책이다. 하드 카바로 만들어 가격이 비싸지고, 여백 많은 편집으로 인해 페이지가 늘어났다. 맘 먹고 읽으면 몇 시간 만에 읽을 수 있는 분량이다. 팔복에 대한 설교 자료로 사용할 수 있을 것 같다. 목회자들이 자기의 설교를 준비할 때 출판을 염두에 두고 준비한다면 더 열심히 준비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해본다. 들을만한 설교, 내용있는 설교를 위해서는 많이 준비해야 할 것이다. 제9장 박해받는 자(p 219-236) 들어가는 말 죄가 들어온 후 평화가 사라졌습니다. 세상에는 다툼이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반목과 갈등, 분노와 억압은 일상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과의 화목이 깨지자 평화롭게 살 수 없게 되었습니다. 자연 만물도 함께 고통을 받게 되었습니다(롬 8:22). 진정한 평화는 하나님과의 화목을 통해서 옵니다. 이 일을 위해 그리스도께서 오셨습니다. 첫걸음은 복음을 믿는 것입니다. 거기서부터 평화가 시작되기 때문에,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딤후 4:2). 복음은 세상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입니다. 그러나 세상 권세를 잡은 마귀에게는 나쁜 소식입니다. 하나님 나라와 세상 나라의 백성들은 서로 다른 질서 속에서 살아 갑니다. 두 질서가 충돌하는 지점에서 박해가 일어납니다. 박해란 무엇인가? 국어사전적으로 박해란 '약한 처지의 개인이나 세력을 억누르거나 괴롭혀 해를 끼침'을 뜻합니다. 우리말 성경에 '박해받는 자'라고 번역된 단어는 '믿음이나 신념을 이유로 누군가를 괴롭히다.'라는 뜻을 가진 헬라어 동사 디오코에서 온것입니다. 신자의 부도덕한 행실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교회가 불법을 저질러 법정에서 심판을 받기도 합니다. 이것은 박해받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죄 때문에 고통받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아무 보상이 없습니다.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벧전 2:20). 진정한 의미의 박해는 하나님 나라의 의(義) 때문에 받는 고난을 가리킵니다."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마 5:10). 의는 하나님의 뜻에 부합한 상태입니다. 이때 의는 다음과 같이 정의됩니다. "인간의 의란 하나님의 성품의 반영으로서, 사람의 내면 세계와 외면 생활이 하나님의 뜻에 완벽히 합치된 상태다." 박해받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의를 위해서입니다. 자신뿐 아니라 이웃과 사회가 하나님의 뜻에 합치되기를 힘쓰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애쓰기에 핍박을 받습니다. 이것은 먼저 신자 안에서 경험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할 때, 두 개의 자아가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육체를 따라 살고자 하는 욕망과 성령을 따라 살고자 하는 의지가 대립하기 때문입니다. 은혜가 충만할 때는 죄가 없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하지만 은혜가 사라질 때는 욕망이 뚜렷이 느껴집니다. 둘은 한 마음 안에서 서로 싸움질하며 고통을 줍니다. “여호와여 주의 은혜로 나를 산같이 굳게 세우셨더니 주의 얼굴을 가리시매 내가 근심하였나이다"(시 30:7).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롬7:23). 의를 위한 고통은 마음의 갈등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거스르는 세상 사람들 때문에 고통을 겪습니다. 흔히 예수 믿으면 세상만사가 다 잘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신자도 많은 시련을 겪습니다. 어떤 고통은 원인을 설명할 수도 없습니다. 진정한 만족은 세상 것들을 누리는 데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이 행복의 근원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안에서 사람들과 올바른 관계를 가져야 합니다. 그 관계는 하나님 사랑의 질서를 따릅니다. 신자의 마음은 진리와 성령으로 변화됩니다. 구원과 함께, 삶에는 새로운 질서가 도입 됩니다. 세상과는 전혀 다른 질서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질서입니다. 그것이 세상 나라의 질서와 충돌하면 저항합니다. 그래서 세상의 미움을 받습니다. 박해는 세상 사람들과는 다른 존재로서, 다른 방식의 삶을 살기 때문에 당하는 것입니다. 집단에서 따돌림을 당하거나, 사회적으로 불이익을 받거나, 심지어 형벌에 처해지기도 합니다. 이로써 신자는 자신이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님을 깨닫게 됩니다. 믿음이 없다면 박해에 굴복할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산다면 굴복하지 않을 것입니다. 세상 나라가 낯설게 느껴질수록 하늘나라에 친숙해질 것입니다. 박해받을수록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갈망은 커질 것입니다. 의를 위해 박해를 받을 때, 그것은 하나님 나라와 관련됩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이 추구하던 것이 그 나라의 의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따라 살기에 고난을 받는 것입니다.핍박받아 흘린 눈물은 세상 사랑으로 얼룩진 마음의 창을 깨끗이 닦아 줍니다. 맑은 마음으로 천국을 소망하게 만들어 줍니다. 그의 울음 속에 하나님이 함께해 위로해 주십니다. 마태복음에서 박해라는 주제는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당시 초기 교회 공동체가 현재적으로 받고 있던 고난을 반영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그들은 동족인 유대인들에게 고난을 받으면서, 그런 현실에 대한 설명을 듣고 싶었을 것입니다. 박해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지도 알고 싶었을 것입니다. 신자를 박해하는 세상 세상이 그리스도를 박해했으니, 신자도 핍박받지 않겠습니까? 희생과 고난 없이 예수를 따를 수 없지 않겠습니까?(눅 9:23-24) 핍박을 피할 수 없음을 강조하셨습니다. 기독교 역사를 돌아보십시오. 박해의 피로 쓰여진 역사입니다. 원래 성경책의 모서리가 붉은색으로 칠해졌던 이유입니다. 믿음으로 산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를 위해 박해받았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로 일자리를 빼앗겼고, 삶의 터전에서 쫓겨났습니다. 세례 요한을 보십시오. 헤롯이 동생의 아내 헤로디아를 취한 일의 불의함을 지적하였습니다(마 14:3-4). 그는 감옥에 갇혔습니다. 헤롯의 생일날, 헤로디아의 딸은 춤을 추었습니다. 헤롯은 그 아이에게 무엇이든지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아이는 어미의 지시를 따라 세례 요한의 목을 소반에 얹어 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마 14:8). 세례 요한은 목베임을 당했습니다. 요한은 헤롯의 정적()이 아니었습니다. 다만 헤롯의 불의를 꾸짖었을 뿐입니다. 그냥 선지자로서 할 말을 했을 뿐입니다. 그러나 헤롯은 그를 죽였습니다. 우리가 의를 추구하며 살아갈 때 세상은 싫어합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은 세상과의 갈등을 의미합니다(히 11:36-38). 세상 사람들과 다른 부르심이 있어야 합니다. 자기를 희생할 대의(大)를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중국에서 한 노(老)목회자를 만났습니다. 그는 젊은 시절 그리스도를 만나 목회에 헌신하였습니다. 문화 대혁명이 일어났습니다. 신자에 대한 대대적인 박해가 시작되었고 목회자들은 가혹한 고문 끝에 강제 노동 수용소로 보내졌습니다. 사랑하는 아내와 어린 두 아들을 남긴 채, 이 목회자는 약 15년 동안 수용소에서 죽음 같은 세월을 이어 갔습니다. 그동안 가족들과 단한 번도 면회는 물론 서신 왕래도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만기 출소한 후 고향집에 돌아왔습니다. 교회는 이미 없어졌고 성도들은 뿔뿔이 흩어진 지 오래였습니다. 정든 집은 거의 폐허 상태였습니다. 큰아들은 마약 중독자가 되어 있었고 둘째 아들은 공산당원이 되어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아내는 화병으로 오래전에 세상을 떠난 뒤였습니다. 동네 주민으로부터 그간의 이야기들을 전해 듣고, 목회자는 마당에 주저앉아 통곡하며 울었습니다. 그때 선명한 주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얘야. 그래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는 더욱 목 놓아 통곡하며 대답했습니다. "예, 주님. 그래도 제가 주님을 사랑하나이다." 그 이야기를 듣고 숙소로 돌아와서 나도 모르게 한참 동안 흐느꼈습니다. 스스로 떠올린 주님의 물음이 귓가를 맴돌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얘야, 너도 그렇게 나를 사랑하느냐?" 바울의 평생 소원은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었습니다. 이전에 유익하던 것을 다 해로 여겼습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였기 때문입니다(빌 3:8).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은 다음의 두 가지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첫째로, 그리스도의 부활의 권능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둘째로,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함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입니다(빌 3:10-11). 순교의 종소리가 들려오는 인생 황혼의 때였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알기 위해서는 고난에 참여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고난에 참여함으로써 그리스도를 본받고자 했습니다(고전 11:1). 바울의 생애는 박해의 연대기였습니다. 유대인들에게 40에서 하나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습니다.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했습니다. 일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습니다. 여러번 여행하였습니다. 강물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을 겪었습니다. 또한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을 경험했습니다.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감수해야 했습니다.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했습니다.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번 굶고 춥고 헐벗어야 했습니다(고후 11:24-27). 신자는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며 살도록 부름받았습니다(마 6:33). 소명을 따라 살 때 세상으로부터 박해받습니다. 그때 두 가지를 깨닫게 됩니다. 첫째로, 자신이 그리스도를 따르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사도들은 박해를 받을 때 기뻐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들이 인정받았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행 5:41). 박해받는 것을 특권처럼 여겼습니다.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자기들이 그리스도 가신 길을 따라가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세상이 본향이 아님을 깨닫습니다. 박해받을 때 자기가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단지 나그네요, 이방인임을 확인합니다. 하늘 본향을 더욱 사모하게 됩니다(히 11:16).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 사랑은 영혼과 정신에서, 육체와 생활에서 크고 작은 섭리로 나타납니다(약 1:17). 우리가 지금 누리는 모든 것들, 의복과 음식뿐만 아니라 친구와 가족들까지도 모두 하나님이 주신 것들입니다. 그것들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됩니다. 그렇지만 신자는 이것들만으로는 살 수 없습니다. 모든 소망이 단지 세상에 있다면 어찌 인생이 허무하지 않겠습니까? 변하는 세상에 대한 사랑은 불멸할 영혼을 땅에 묶어 버립니다. 그리하여 날지 못하는 새가 되게 하니, 거기 무슨 자유가 있겠습니까? 자유가 없는데 무슨 행복이 있겠습니까? 행복과 불행은 모두 사랑에서 옵니다. 행복은 악한 것을 올바르게 미워한 것이고, 불행은 선한 것을 그릇되게 사랑한 것입니다. 만약 선한 것이 늘 아름답고 악한 것이 항상 추루하게 보였다면, 아무도 불행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 오류에 빠질 수 있기에, 박해는 우리를 깨어 정신 차리게 해줍니다(살전 5:6). 박해를 견딜 때, 자신이 그리스도의 길을 가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쏟는 눈물에 세상 사랑은 씻겨 나가고, 흘리는 핏물에 사랑은 깊어져 갑니다. 세상에 살고 있으나 하늘에 속한 사람임을 확신하게 됩니다. 박해받는 자의 행복 심령이 가난해집니다. 애통하는 자가 됩니다. 온유한 자가 됩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됩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가 됩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가 됩니다. 평화를 만드는 자가 됩니다. 그럴수록 세상으로부터 박해를 받습니다. 불의한 세상이기에 의를 위해 사는 사람이 박해를 받습니다. 그러나 그는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죄와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는 어린 양처럼 애통하였으나 박해를 받을 때는 사자처럼 담대합니다. 무엇 때문일까요?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마 5:10). 박해를 받는 자와 심령이 가난한 자가 받는 복이 동일합니다. 이는 우연이 아닙니다. 둘 모두 같은 선언으로 끝납니다.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마 5:3).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마 5:10).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이 말씀을 팔복이 아니라 칠복(福)이라고 봅니다. 왜냐하면 심령이 가난한 자의 복과 핍박받는 자의 복이 별개가 아니라 서로를 포함하는 동일한 복이라고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행복의 조건으로는 여덟 개지만, 행복의 선언으로는 일곱 개라고 보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행복의 종류와 관련해서 보면 칠복입니다. 천국이 그들의 것이라는 행복의 선언이 첫 번째와 여덟 번째에 동일하게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복이 있나니"라고 하신 조건으로 본다면 여덟 개이기 때문에 팔복이라고 부릅니다. 두 가지 복됨에 관해 동일한 선언, 곧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로 시작하고 끝을 내는 것은 일종의 문학적 장치입니다. 첫 번째 복이 존재의 변화를 말해 준다면, 여덟 번째 복은 변화된 존재가 세상에서 무엇을 겪게 되는지를 보여줍니다. 가난한 심령으로 하나님을 찾는 것은 천국을 누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하나님의 백성답게 사는 것도 이미 천국을 누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전자는 하나님 나라가 찾아오는 모습이고, 후자는 세상나라로 나아가는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식으로 천국을 누리게 하실까요? 천국을 두 국면에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첫째로, 지상적이고 현재적인 국면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이미 임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오심과 함께 하나님의 통치는 시작되었습니다(마 12:18). 신자는 거기서 하나님과의 평화를 누립니다. 박해받는 자는 고통을 겪습니다. 그러나 그는 다른 사람들이 알 수 없는 위로를 받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누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령한 방식으로 기쁨을 주십니다. 육체로는 박해를 받지만 영혼으로는 자유를 누리게 하십니다. 둘째로, 천상적이고 미래적인 국면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임했으나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습니다. 세상에는 여전히 하나님의 통치에 반항하는 권세들이 있습니다(엡 6:12). 이러한 반역은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날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그러나 마침내 세상 나라의 질서는 파괴되고 하늘나라의 질서는 완전하게 될 것입니다. 완전한 사랑 속에 정의로운 나라가 될 것입니다. 박해받는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을 것입니다. 또한 상속받을 나라를 현재적으로 누리며 살아갑니다. 그 나라에는 모든 것이 풍족합니다. 완전한 평화와 행복의 나라입니다. 영혼과 육체에 모자라는 것이 없을 것입니다. 신앙에는 두 가지가 함께 있어야 합니다. 초월성과 역사성입니다. 하나는 초월성입니다. 그것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신령한 은혜에 관한 것입니다. 십자가 사랑, 영적인 은혜 같은 것입니다. 신앙이 가진 이런 초월적인 은혜의 성격 때문에 한 인간으로서, 신자로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살아갈 힘을 얻습니다. 이것이 신앙의 초월성입니다. 또 하나는 역사성입니다. 그것은 신앙에 있어서 시간과 공간 안에 있는 시대적 상황에 관한 것입니다. 자기 시대의 역사 발전에 이바지해야 합니다. 사랑과 정의를 위해 살아야 합니다. 선을 행하고 불의에 항거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인정하는 문화 발전에 이바지해야 합니다. 세상의 땅끝까지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도록 살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신앙의 역사성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에 계실 때 박해를 받으셨습니다. 비난과 멸시, 조롱과 고난을 한 몸에 받으셨습니다. 세상을 사랑하셨기에 모든 삶으로 하나님 나라를 보여주셨습니다. 고난을 이기는 강인함과 세상에 굴복하지 않는 꿋꿋함이 어디서 나왔을까요?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하시도다 나는 항상 그가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요 8:29).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아버지와 함께하셨기에 모든 것을 견디고 이기실 수 있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시며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 28:20). 박해를 받으면서도 믿음으로 사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핍박 속에서도 믿음을 따라 살아갈 힘이 어디에서 나옵니까?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데서 나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고자 하는 열정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마 음이 변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이름을 위해 살고 싶어하는 마음도, 세상 욕심을 버리고 싶은 마음도 항상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지 않으신다면 곧 사라져 버립니다. 하나님 사랑 안에 있을 때만 정의롭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박해가 아무리 거칠고 강해도 하나님은 이겨 낼 힘을 주십니다. 의지하는 자를 더욱 강하게 하십니다. 신령한 은혜와 거룩한 능력을 주십니다. 매일 부어 주시는 은혜가 필요 합니다. 그래야 박해에 굴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박해의 크기가 아닙니다. 세상으로부터 미움받는 크기가 아닙니다.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생명이 충만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핍박을 받을 때 비겁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십시오. 박해를 견딜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영원한 하늘나라에서뿐만 아니라 잠시 머물 세상에서도 행복을 누리게 하십니다. 박해를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이 겪었습니다. 사랑의 기쁨으로 이기며 사십시오. 맺는말 하나님은 우리를 선택하셨습니다. 남이 알지 못한 복음을 들려주셨습니다. 믿음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이는 세상에서 소금과 빛으로 살게 하시기 위함입니다(마 5:13-14). 소금이 그 맛을 잃어버리면 아무 쓸모 없어집니다. 밖에 버려지고 사람들에게 밟히게 됩니다(마 5:13). 하나님을 누림으로 박해를 견뎌야 합니다. 의를 위한 삶을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십시오. 정의로운 삶을 사십시오. 박해를 견디십시오. 우리는 세상 사람들에게 없는 하나님 나라를 누리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에게는 그들이 알 수 없는 신령한 은혜가 있습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하나님을 두려워합니다(마10:28). 그 믿음으로 박해를 견딥니다. 그들이 욕하면 우리는 모욕받을 것이고, 때리면 맞을 것이며, 죽이면 죽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배신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박해받는 자에게는 그들이 모르는 행복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팔복의 사람으로 부르십니다. 이 부르심에 응답하시렵니까?
    • 오피니언
    • 책소개
    2023-03-31
  • 〖독서일지〗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었다」
    많이 알려진 홍민기 목사가 쓴 산상수훈 설교집이다. 마 5-7장을 큰 단락으로 나눠 설교했다. 평이하면서도 건질 것이 있다. 음악하는 사람들은 남의 음악을 많이 듣는다고 한다. 물론 실수로 표절할까봐 아예 안듣는 음악인도 있지만. 살교자로서 남의 설교를 읽고 보면서 배우는 것이 필요하다. 겸손하면 모든 사람에게서 배울 것이 있다고 하지 않는가! 삶으로 지키라(p 83-97) 맹세하지 마라 예수님은 "맹세하지 말라"라고 말씀하신다. 구약에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거짓 맹세하지 말라'(레 19:12 참조)라는 말씀이 있는데, 예수님은 아예 맹세 자체를 하지 말라고 하신다. 보통 우리는 불리할 때 맹세를 한다. 또 우리 삶으로 나타나지 않는 부분들을 강조할 때 맹세를 많이 한다. 그래서 맹세할 때 이어지는 대화는 거짓이거나 과장일 경우가 많다. “내가 하늘을 두고 맹세하는데…”라고 시작하는 문장은, 일단 신뢰가 가질 않는다. 진실되면 맹세를 하지 않는다.바리새인들은 잎만 무성한 나무였다. 그들은 말만 많이 하고, 삶 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에서는 하나님과 관계가 멀었다. 종교적인 삶에는 말과 정죄가 무성하다. 그들은 많은 율법들을 따랐지만, 또 자신들이 만든 수많은 규칙들로 율법을 지키지 못할 때 빠져나갈 구멍도 만들어놓고 신앙생활을 했다. 그러면서 자기들 기준에 따라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했다. 이런 것을 예수님이 가장 싫어하셨다. 말로 하나님을 따르다 보니 정죄가 무성하다. 삶으로 살면 정죄할 수 없다. 그 거룩한 삶의 모습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알기 때문이다. 정죄는 말씀을 삶으로 살아본 자의 입술에서 뱉어지는 언어가 아니다. 해보면 안다. 살아보면 안다. 내가 제일 안 된다는 것을...진실되게 하나님을 붙잡지 않는 것, 하나님의 마음을 붙잡지 않는 것을 하나님은 기뻐하지 않으신다. 본질을 붙잡지 않는 것, 겉모습만 반지르르한 종교적인 삶을 하나님은 분명히 심판하신다고 하셨다. 삶을 전투적으로 사는 사람에게는 맹세가 필요없다. 우리는 산 제사로 하나님께 드려져야 한다. 우리가 드리는 제사는 우리의 삶이어야 한다. 말이나 생각으로 하는 것이 우리의 삶으로 이행되고 있는지 점거해봐야 한다. 목표를 바로 세우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은 말이나 생각으로 하나님을 따르는 것이 아닌, 주님이 원하시는 삶을 사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드려지는 산 제사로 살아야 한다. 그래서 이 땅의 윤리와 도덕은 우리의 목표가 아니다. 그것은 기본이다. 우리의 목표는 거룩이다. 거룩은 전투다. 우리의 삶의 목표는 거룩이다.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한다. 그래서 때로는 세상과 충돌하고, 때로는 세상에 저항해야 하지만, 이 땅에서 구별된 삶을 사는 것이 우리의 목표여야지,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이 따르는 도덕과 윤리가 우리의 목표가 되면 안 된다. 구별된 자로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 우리가 이 땅에서 도덕적인 삶을 산다고 크리스천으로 사는게 아니다. 좀 더 윤리적으로 산다고 크리스천으로 사는 게 아니다. 하나님 앞에 드려지는 살아 있는 산 제사가 되어야 한다. 우리가 그 예배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내 생각에 '이 정도면 됐다' 싶은 부분을 드리면서 헌신한다고 생각한다. '하나님, 제가 이 부분을 드립니다'라면서 삶의 한 부분을 드리는 것으로 만족한다. 하지만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의 삶이 통째로 산 제사가 되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의 목표여야 한다. 산 제사가 되라는 것은 하나님의 요구이며, 협상 불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맹세를 하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입으로 맹세하지 말고, 네가 지금 말하고 있는 것, 네가 행하고자 하는것을 삶으로 드러내라는 것이다. 맹세는 신과 하는 약속이다. 하나님과 하는 약속이란 말이다. 우리는 그 약속을 지켜낼 수 없는, 약한 인생들이다. 그럼에도 "내가 맹세한다"라고 입에 담는 것은, 나의 어떠함을 스스로 증명하기 위함일 때가 많다. 맹세는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행동이다. 내가 이런 사람이라고 알리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런 식으로 사람에게 보이는 것을 싫어하신다. 삶으로 보여주는 것, 삶으로 증명하는 것, 삶이 산 제사가 되는 것.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옳음을 증명해서 상대방을 압제하고 통제하는 것은 선이 아니고 악이다. 신앙은 나의 옳음을 증명하는 게 아니다. 신앙이란 이름으로 누군가를 압제하고 통제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통제를 받는 것,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것이 신앙이다. 하나님의 만지심을 붙잡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거룩한 삶을 위한 사투 우리는 우리의 삶에 조금 더 엄격해져야 한다. 하나님은 물론 우리를 긍휼과 은혜로 바라보신다. 하지만 내가 하나님을 따를 때는 엄격과 거룩의 두 기둥을 붙잡아야 한다. 그런데 이것이 거꾸로 되어서 내가 하나님을 따를 때 긍휼과 은혜만 붙잡는다. 맨날 나의 연약함을 긍휼과 은혜로 손쉽게 덮으려고한다. '하나님, 제가 연약해서 어쩔 수 없이 죄를 지었어요. 절 긍휼히 여겨주실 거지요?' 하면서 주님의 긍휼과 은혜에 기대어 너무 쉽게 신앙생활을 한다. 그러나 우리가 목표를 너무 엄격하지 않게 잡는 것, 그리고 나에게는 엄격하지 않고 유연하면서 남에게는 엄격한 것은 바리새인과 같은 종교인의 모습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거룩한 삶을 살기를 바라신다. 거룩한 삶을 위해 날마다 사투하며 거룩한 몸부림으로 나아가야 한다. 말만 한다고 우리가 그러한 삶을 사는 게 아니다. 예배만 드린다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거룩한 삶을 사는 것도 아니다. 실제 우리 삶 속에서 거룩한 사투가 없이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산 제사로 드려지는 삶을 살 수가 없다. 사실 쉽진 않다. 너무 너무 어렵다. 언젠가 어느 유명한 교회에 다니는 한 장로님을 만났는데, 이분이 누가 묻지도 않았는데 자기 교회에 문제가 많다고 막 토로하셨다. 그래서 내가 "근데 왜 계속 다니세요?"라고 물어 봤다. 그러자 그 장로님이 너무 놀라운 얘기를 하셨다. “내 나이에 다른 데 가면 장로님이라고 인사나 받겠습니까? 여기 있으면 그래도 사람들이 와서 '장로님, 장로님' 합니다” 그 얘기를 듣고 정말 충격을 받았다. 그런 이유로 문제 있는 교회를 계속 다니는 것도 놀라웠고, 또 그렇게 생각하면 그냥 다니면 되지 문제 제기는 왜 하는가 싶었다. 본질을 분별하지 못하고 본질에서 벗어나다 보니까 벌어지는 안타까운 일이다. 본질에서 벗어난 모든 것은 우리의 영을 죽이는 것이다. 우리의 목표는 세상과 달라야 한다. 우리의 목표는 거룩이 다. 세상과 충돌할지라도 구별되는 것, 세상의 정을 맞을지라도 구별되는 것. 구별되지 않으면 우리의 신앙은 가짜다. 종교인과 신앙인의 구별은 종이 한 장 차이다. 우리의 중심에서 내가 어떤 선택을 하는지, 내가 정말로 하나님을 향한 거룩한 산제사가 되기를 원하는지를 진솔하게 돌아보라. 이 본질을 놓치는 순간, 우리도 신앙인이 아닌 종교인으로 전락하고 만다. 하나님은 속일 수 없다. 아닌 것은 아니다. 맞는 것은 진리다. 야고보서 5장 12절 말씀처럼 생각하는 대로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 생각이 말씀 위에 있을 때 말이다. 그리스도를 존귀하게 해드리는 삶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빌 1:20.21. 사도 바울의 이 고백을 우리 삶에도 꼭 적용해야 한다.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당신의 인생에서 그리스도께서 존귀하신가? 당신의 인생이 입으로 맹세하며 '내가 이렇게 믿는다, 저렇게 믿는다' 말만 앞서는 종교인의 모습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삶의 모든 선택이 그리스도를 존귀하게 하고 있는가? 우리의 갈급함으로 그리스도를 존귀하게 하는 것, 우리의 소망이 그리스도를 존귀한 하나님으로 이 땅에 선포하는 것, 그것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명령이자 신앙의 모습이다. 나는 여호와이니 이는 내 이름이라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내 찬송을 우상에게 주지 아니하리라 사 42:8.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는 것, 하나님의 이름을 아무 데나 얹는 것, 하나님의 이름을 내 주장에 끼워 넣는 것이다. 신앙은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는 것이다. 하나님의 이름을 이 땅에 선포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이름을 존귀하게 하는 것이다. 우리의 삶이 산 제사가 되어 일어나는, 그 구체적인 삶의 모습을 하나님은 우리에게 요구하신다. 우리는 바리새인처럼 살 수 없다. 우리는 종교인이 될 수 없다. 우리는 신앙을 가지고 사는, 신앙 공동체다. 소그룹으로 만날 때, "그냥 나는 연약해서 이렇게 됐어", "그래, 너도 연약해서 이렇게 됐지", "우리 다 약해서 괜찮아. 하나님이 괜찮다.고 하실 거야"라고 위안하며 넘어가지 말자. 엄격하게 자신을 보고, 거룩한 대화를 나누며, 서로가 서로에게 도전하고, 정말 주님을 붙잡고 살아가자고 외치고, 뉘우치고, 돌이키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연약함을 핑계로 나의 죄를 덮지 말고, 은혜와 사랑이란 단어로 나의 죄를 덮지 말자. 은혜와 사랑은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다. 우리를 덮는 것은 하나님이 덮어주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역이다. 그런데 우리는 미리 '우리의 연약함을 하나님이 덮어주실 거예요'라면서 하나님의 영역을 침범한다. 산상수훈 말씀은 예수님이 직접 하신 설교이기 때문에, 그 강도가 세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들이기 때문에 셀 수밖에 없다. 우리 이 말씀을 꼭 명심하여 산 제사가 되는 삶을 살자. 말로 하는 종교인에서 벗어나 본질을 붙잡자. 본질을 붙잡지 않으면 영이 죽는다. 그러니 깨어 있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고, 자신의 공동체를 위해 기도하라. 항상 깨어 있게 해달라고. 정말 하나님이 원하시는 예배가 계속해서 이뤄지게 해달라고. 은혜와 긍휼은 예수님의 몫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딤전 1:15,16. 디모데전후서는 사도 바울이 가장 마지막에 쓴 편지인데, 여기서 그가 뭐라고 고백하는가? 자신을 '죄인 중에 괴수'라고 한다. 사도 바울은 사도가 된 후에도 계속해서 더 성숙해지고 성장했다. 그래서 자신을 '수'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자신이 긍휼을 입은 까닭이 '예수께서 먼저 보여주신 일체의 오래 참음의 사랑' 때문이라고 한다. 예수님이 우리를 그렇게 긍휼과 은혜로 받아주시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다고 우리가 예수님에게 '오래 참아달라, 봐달라, 예수님 오래 참으셔야 합니다'라고 요청할 수 있는가? 그건 아니다. 이 오래 참음은 예수님이 우리에게 먼저 주신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거룩하게 구별되는 삶으로 나아가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에 그대로 순종하여 그 말씀이 우리의 삶에 능력으로 나타나기를 바란다. 내가 아들 둘을 키우면서, 아이들이 어릴 때 한 가지 규칙이 있었는데, 그것은 두 번까지는 봐주지만 같은 내용으로 세 번 경고를 받으면 혼나는 것이었다. 하루는 어떤 일로 아이들이 두 번째 경고를 받게 되었는데, 그날 내가 아주 크게 혼을 냈었다. 그러자 아이들 둘이 다 내게 항의를 했다. "아빠, 이번은 두 번째입니다. 이번은 경고여야지, 왜 혼내나요? 혼내면 안 되는 거예요." 잘못을 해서 혼나는 입장에서 할 수 있는 말인가? 두 번이나 잘못을 봐주고 경고로 넘어간 건 아빠인 내게 속한 문제이고, 아빠가 베푸는 용서요 은혜다. 그런데 자신들이 잘못했으면서 '아빠 이건 부당해요'라고 하는 건 웃기는 일 아닌가? 그런데 이게 우리가 하나님께 하고 있는 일이다. 잘 생각해 보라. '하나님, 어떻게 저한테 이러세요? 이것은 참아주셔야죠. 용서해주셔야죠. 넘어가주셔야죠.'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을 우리가 날마다 하고 있다. 우리는 잘못했으면서 하나님이 주실 은혜를 우리가 먼저 말해버린다. '하나님, 저 이거 잘못했어요. 용서해주실 거죠?' 이러지 말자는 것이다. 우리는 거룩한 산 제사가 되는 삶을 위해 애써 나아가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함부로 혀를 놀릴 수 없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 드리는 약속과 행위를 따로 생각할 수 없다. 악한 행위에서 벗어나야 한다. 악함에서 벗어나야 한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을 붙잡고 살아가야 한다. 거룩한 산 제사의 모습이 구체적으로 드러나야 한다. 그리스도를 존귀하게 하는 삶의 모습이 일상의 삶에서 매일 매일 등장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부담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의 평가를 준비하자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시 139:1-4. 하나님은 다 아신다. 우리가 앉고 일어서는 것도 아시고, 나의 생각도 다 아신다. 그러니 모든 것을 다 아시는 하나님의 평가를 받을 준비를 하라. 나의 평가는 중요하지 않다. 주변 사람들의 평가도 온전치 않다. 선한 척하지 말고,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의 평가를 준비하라. 거룩함에 목표를 두고 구별되어 하나님의 말씀에 구체적으로 순종하라. 하나님이 우리를 평가하실 것이다. 하나님의 기준에 맞는 삶을 살아가고, 거룩함을 위해 몸부림 치고, 하나님께서 진정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고민하고, 본질에 붙잡힘 당하여 온전한 예배를 드리고, 그 예배에서 받은 말씀으로 하루하루를 살자. 그렇게 살다가 하나님 앞에 서면 하나님이 평가하실 것이다. 내가 하나님 앞에 서는 날, 하나님께서는 나를 '네가 목사로 서 참 수고했다'라고 평가하지 않으실 것이다. 나의 직분보다 내가 진짜였는지, 가짜였는지, 내가 진심으로 했는지, 하는 척 했는지,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했는지를 평가하실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직분으로 평가하지 않으신다. '네가 진짜였냐?' 이것으로 판가름하실 것이다. 하나님의 평가는 '넌 착하고 충성되었어. 넌 진심이었어. 이제 나와 함께 낙원에 있자 아니면 '넌 많은 사람들을 속였어. 하지만 난 안 속아' 이 둘 중에 하나일 것이다. 우리의 기준이 이 땅의 도덕이나 윤리라면 하나님의 기준에 맞을 수가 없다. 우리가 우리의 삶을 유연하게 바라보면 거룩한 삶을 살아갈 수가 없다. 엄격한 거룩을 기준으로 삼는 것이 하나님의 기준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다. 선한 척하지 말고 하나님의 사람이 되라. 거룩한 척하지 말고 거룩한 산 제사가 되라. 예배드리는 척하지 말고 임재 예배가 되라. 우리의 삶이 진짜가 되기를, 그래서 우리의 삶으로 하나님을 존귀하게 해드리기를 바란다. 지금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회를 주시지만,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선 후에는 더 이상 기회가 없다. 서로 속고 속이다 죽고 나면 끝이다. 그때는 기회가 없으니, 지금 기준을 바로 세우고 목표를 바로 세워서 아무리 포장하고 화장해도 썩은 냄새가 나는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향기로운 산 제사로 살자. 그렇게 살다가 죽자. 그렇게 살다가 하나님 앞에 서자. 우리는 한 치 앞을 못 보지만, 살다 보면 이런 일 저런 일 많지만, 분명한 것은 그날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이다. 사람 앞에서 말로 맹세하여 사람을 속이지 말고, 결코 속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기준으로, 거룩함으로, 엄격함으로 나아가자. 그렇게 나아갈 때 하나님이 은혜와 긍휼로 우리를 붙잡아주실 것이다.
    • 오피니언
    • 책소개
    2023-03-30
  • 커밍 아웃, 나는 양파다!
    내 신문 논평을 보고 때로 묻는다. "당신은 좌파인가? 우파인가?" 대부분 우파인 사람들이 묻는 질문이다. 목사에게 좌파, 우파를 묻는 것은 큰 실례이다. 목사는 좌우 이념을 초월한 주파(主派, 주님 따르기파)이기 때문이다. 세상 모든 것을 뒤로하고 주님을 따르는 자가 목사 아닌가? 그런 목사 기자에게 그깟 세상의 하챦은 좌파, 우파를 따지니 참으로 어이없다. 이처럼 나는 주파이다. 그리고 양파(兩派)이다. 좌파, 우파 가리지 않고 잘 한 것은 잘했다고 하고, 못한 것은 못했다고한다. 어느 한쪽에 치우쳐서, 잘못하고 있음에도 말하지 못한다면 그게 무슨 언론이고 기자인가? 다시한번 말씀드린다. 나는 육군 군목으로 4년간 군복을 입었던 목사 기자로서 주파이며 양파이다. 그리고 과자도 양파링(兩派Ring-둥근 링)을 좋아한다. 21세기에 다 낡은 좌파, 우파 프레임 씌우기는 초등학교 운동회 때 청군, 백군으로 족하지 않은가? 웃자고 써본 글이니 죽자고 덤벼들지는 마시기를...
    • 오피니언
    • 논단
    2023-03-30
  • 윤 대통령에 대해 침묵하는 기독교 연합단체들...꿀먹었나?
    길거리를 걷다보면 국민의힘에서 내건 현수막이 보인다. “외교, 우리의 원칙은 오직 국익입니다” 윤 대통령이 일본을 방문했다. 가서 무엇을 했는지 잘 알려지지 않은 가운데 결과물이 하나 둘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다. 첫째로, 일본은 후쿠시마 제1원전 오염수를 해양에 방류하겠다고 했고 이에 대해 윤 대통령은 "시간이 걸리더라도 한국 국민의 이해를 구해나가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둘째로, 일본은 강제동원 지우기에 나서고 있다. 윤 정부가 지난 6일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대법원으로부터 받은 확정 판결을 이행하는 데 있어 피고인 일본 기업의 책임을 면제해주는 입장문을 미리 발표했기 때문이다. 셋째로, 윤 대통령 방일 후 일본은 독도가 자기들의 고유영토라고 소리를 높이고 있다. 독도가 일본 땅이 될 것인가 보다. 이제 더 이상 “독도는 우리 땅”이란 노래를 부를 수 없는 세상이 오고 있다. 윤 대통령과 국민의힘이 말하는 국익이 이것인가? 아낌없이 일본 편에 서는 것이 국익이며 대통령이 친히 방일해 할 일이란 말인가? 참 어이가 없다. 이제 국민들은 방사능에 오염된 물고기를 먹어야하며, 일제시대 강제동원이 없었다고 생각해야하며, 독도를 내줘야한다. 이때 기독교 연합 단체는 무엇하고 있는가? 물론 기대감은 없다. 지난 대선에서 한교연은 대놓고 윤석열 후보를 지지했다. 그러니 이제와서 윤 대통령에 대해 바른 소리를 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또한 “일본과 협력관계로 나아가겠다”고 3.1절 기념사에서 입장을 밝힌 윤 대통령을 지지하는 논평을 낸 한교총이 윤 대통령에게 쓴 소리를 하는 것도 기대할 수 없다. 그러면 이제 정서영 목사가 대표로 있는 한장총과 한기총은 어떠한가? 정 목사는 지난 대선에서 윤 대통령을 공개 지지한 한교연 6대 대표회장을 역임했었다. 한장총, 한기총은 “묵언수행”중인지 아무런 반응이 없다. 지난 대선에서 교계와 교회는 노골적으로 윤 후보를 지지했다. 이에 반하는 말을 하면 당장 “빨갱이”소리를 들어야했다. 광풍의 시기였다. 교회와 교인들의 지지로 윤 정부가 탄생한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그렇다고 이렇게 국익에 반하는 행동을 해도 그냥 있어야하는가? 윤 대통령이 나라를 팔아먹어도 박수칠 것인가? 답답한 마음에 수에칠 가치도 없는 미생(未生) 언론인 “빛과소금뉴스”가 한숨을 토해본다. 오늘 《황성신문》의 주필인 장지연이 1905년 11월 20일 《황성신문》에 쓴 글을 떠올린다. 고종 황제의 승인을 받지 않은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알리고 이토 히로부미와 을사오적을 규탄했던 이 글의 제목은 “是日也放聲大哭”(이 날에 목놓아 우노라)이었다. 암울한 역사는 반복되는가? 『是日也放聲大哭』 번역문 전문 저번에(지난 날에) 이등(이토 히로부미) 후작이 한국에 오자, 어리석은 우리 백성들이 서로 수군거리기를 “후작은 평소에 동양삼국의 안정과 평화를 주선하겠다고 자처하던 인물이니, 오늘 한국에 온 것은 필히 우리의 독립이 공고하게 바로서도록 도와줄 방법과 계획을 적극 알려주기 위함일 게야.” 하고 여겨서, 거리 곳곳에(제물포에서 한양까지) 관리와 백성 너나 할 것 없이 거리낌 없이 환영하는 것을 보건대, 세상만사에는 참으로 헤아리기 어려운 일이 많도다. 천만뜻밖에(꿈에서조차 생각하지 못한) 다섯 조항이 어찌하여 나와서 제출되었는고! 이 조항들은 단지 우리나라만의 문제가 아니라 동양삼국이 분열하는 조짐을 만들어낼 터인데, 이등 후작이 원래 주장했던 사상은 어디에 있단 말인가! 설사 그렇다 해도 우리 대황제폐하가 강경하신 뜻으로 줄곧 거부하셨으니, 짐작컨대 조약이 성립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것은 이등 후작도 이미 스스로 알아채고 파악했을 터이다. 안타깝도다, 저 개돼지만도 못한 이른바 우리 정부의 대신이라는 자들이 영리(사리사욕)에 눈이 멀고 으름장에 겁을 집어먹어 우물쭈물하며 벌벌 떨다가 나라 팔아먹는 도적놈이 되기로 작정한 것이다. 사천년 살아온 우리 땅과 오백년 조선의 종묘사직을 남에게 갖다 바치고, 살아있는 이천만 백성을 남의 노예로 몰아넣어 버렸으니, 저들 개돼지만도 못한 외부대신 박제순과 각 대신 놈들을 어떤 말로 꾸짖어야 할지 도무지 알 수 없거니와, 명색이 정부의 대표인 참정대신이라는 자는 그저 반대표 하나 적어냈다고 해서 그럴싸하게 책임을 모면하고 명예를 지키려 했단 말인가. 김상헌 선생처럼 항복 문서를 찢고 통곡하지도 못하고, 정온 선생처럼 칼로 자기 배를 찌르지도 못하면서, 뻔뻔하게 버젓이 살아서 세상에 다시 나오다니, 무슨 낯으로 강경하신 황상폐하를 다시 뵈며, 무슨 낯으로 이천만 동포를 다시 본단 말인가. 아아, 원통하고 또 분하도다. 노예가 돼버린 우리 이천만 동포여, 살았는가 죽었는가. 단군과 기자 이래 사천년 국민정신이 하룻밤 사이에 별안간 멸망하고 끊어져버린단 말인가. 원통하고 또 원통하도다, 동포들이여 동포들이여.
    • 오피니언
    • 논단
    2023-03-30
  • 〖독서일지〗 「매우 예민한 사람들을 위한 책」-동영상 첨부
    현직 정신과의사가 쓴 책이다. "매우 예민한 사람들"에 대한 사례와 이를 극복하는 방법에 대해 다루고 있다. 세상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고, 목사는 다양한 사람들을 상대해야하기에 인간에 대한 이해가 넓을수록 좋을 것 같다. 어렵지 않게 평이하게 쓰여졌기에 읽는데 어려움은 없다. 마침 동영상이 있기에 첨부한다. 6. 자존감 관리(p 290-294) 생일이 되면 모두 모여서 케이크에 불을 붙이고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른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태어난 날을 축하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존재가 소중하고 우리와 함께 있어서 기쁘다는 마음을 나누는 것이다. 가족의 생일을 축하하고 선물을 주는 것은 자존감self-esteem의 근원을 만든다. 자존감은 '자아존중감'이라고도 하며 자신이 사랑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소중한 존재이고 어떤 성과를 이뤄낼 만한 유능한 사람이라고 믿는 마음이다. 살다보면 누구나 실패와 좌절을 겪게 된다. 야단을 맞고 시험에 떨어지기도 하며, 뜻하지 않은 갈등을 겪기도 한다. 그때 자존감이 충분하지 않다면 예민해지고 좌절하며 심하면 죽고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자존감이 낮은 사람은 스스로에게 더 가혹한 벌을 내릴 때가 많다. 자존감의 가장 중요한 근간은 어릴 때 형성된다. ‘안전기지secure base’의 형성과 ‘적당한 좌절optimal frustration’의 경험이 자존감 형성에 중요하다. 두 경험 다 어릴 때 부모님, 특히 어머니로 인해 겪게 되지만 다른 보호자도 마찬가지 역할을 할 수 있다. 안전기는 유명한 존 볼비의 '낯선 상황 실험'에서 알 수 있다. 14개월 된 아기와 엄마를 방 안으로 들어오게 하고, 아기가 장난감을 가지고 놀게 한다. 엄마가 조용히 방을 나가면 아기는 패닉 상태에 빠지고 장난감에 더 이상 관심을 보이지 않으며 엄마를 찾으려고 운다. 엄마가 다시 들어오면 안아달라고 한 뒤 안정을 되찾으면 다시 장난감을 가지고 논다. 아기는 엄마에게 애착이 형성되어 있고 엄마는 아이를 위한 '안전기지' 역할을 한다. 안전기지가 없다면 세상을 탐구하지 못하고 자존감이 낮아 늘 예민한 상태가 된다. 어머니가 있다 하더라도 충분한 애착이 서로 이뤄지지 않는다면 안전기지가 형성되지 않고 낮은 자존감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우리나라 의과대학 학생 7000명을 대상으로 의과대학 학생의 자살 충동과 관계된 요인을 연구한 적이 있다. 의과대학 학생들은 학업관련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 처음에 이것이 가장 중요한 원인일 거라 생각했지만, 실제 연구 결과 자살 충동과 관련 있는 것은 어린 시절 부모와의 관계였다. 그중에서도 '정서적 학대emotional abuse'가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나타났다. 정서적 학대란 방임이나 차별 등 정서적으로 고통을 받는 것을 말한다. ‘엄마 아빠 사이가 안 좋았어요’. ‘어릴 때 항상 두 분이 다투는 것을 보고 자랐어요’. ‘부모님이 관심 있는 것은 오로지 성적뿐이었고 못하면 심하게 야단을 맞았어요’. ‘의대생이 되니 주변 친구들이 다 공부를 너무 잘해서 저는 뒤처지는 것 같아요’. ‘힘들면 곧잘 죽고 싶은 생각이 들어요’ 적당한 좌절은 인생의 어려운 점을 극복해나가기 위해 필요한 자존감을 키워준다. 부잣집 딸의 예를 들어 설명해보자. 사업으로 성공한 집안의 외동딸로 자란 아이가 있었는데, 창업주인 할아버지는 그 손녀를 몹시 예뻐했다. 아이에게 비서를 붙여서 항상 따라다니도록 했고 백화점 진열대의 물건을 아이가 보기만 하면 가격에 상관없이 물건을 사서 방에 넣어주었다. 방에 물건이 쌓여 더 이상 공간이 없을 정도가 되면 상자를 열어보지도 않은 채 어떤 물건들은 내다 버렸다. 그 아이는 나중에 어떻게 됐을까? 할아버지의 회사가 어려워져 이전처럼 원하는 물건을 사줄 수 없게 되자 심각한 열등감과 자존심 저하를 겪었다. 또한 이전에 자신을 좋아하던 사람들이 더는 관심을 안보이자 외모에 집착하기 시작했다. 얼굴과 전신 성형을 거듭하다가 결국 다른 사람을 의식해 집 밖에도 나오지 못한 채 혼자 지내는 신세가 되었다. 십대에 벼락스타가 된 가수 이야기를 해보자. 많은 사람이 관심을 보이고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이 기사화되는 상황이 처음에는 낯설겠지만 곧 적응된다. 하지만 인기가 떨어지고 사소한 실수로 인해 비난을 받으면 급격한 자존감 하락을 겪게 된다. 안전기지로 생각했던 팬들마저 점점 등을 돌리고, 적당한 좌절이 아닌 급격한 좌절을 겪어 심각한 우울증에 빠진다. 하지만 자신의 인기와 상관없이 도움을 줄 수 있는 친한 친구들이 있거나, 신기루 같은 인기보다는 자신이 보여줄 수 있는 음악에 관심을 갖는다면 위기에서 좀더 수월하게 벗어날 수 있다. 성인이 되어서도 마찬가지다. 배우자나 자식이 안전기지가 되면 좋겠지만 오히려 그 반대일 때가 많다. 혹은 자기 어머니가 안전기지가 되면 좋겠지만 그들도 이제 나이를 먹어 그런 역할을 하기 어려워진다. 이때 어릴 적부터 만나온 친구나 혹은 종교 공동체, 마을 공동체가 그 역할을 할 수 있다. 또는 자신이 만나서 상담받는 주치의 선생님이 그런 사람이 될 수도 있다. 자신에게 안전기지가 되는 인물이 누구인지 잘 생각해보자. 머릿속에 떠오르는 바로 그 사람을 평소에 잘 대하는 것이 좋다. 항상 좋은 관계를 유지하면서 서로 자존감을 북돋운다. 내 자존감이 중요한 것처럼 상대방의 자존감 유지도 중요하다. 배우자라면 서로의 역할을 존중하고 자존감을 낮추는 행동은 삼가야 할 것이다. 적당한 좌절은 어린 시절에 자존감을 만들고 마음의 맷집을 키우는 데 중요하다. 가풍이 있는 집안일수록 아이에게 모든 것을 다 해주지 않고 적당한 좌절과 성취감을 얻도록 도와준다. 어릴 때부터 적당한 좌절을 안정적으로 경험한 사람들은 자신의 좌절을 극복하기 위해서 새로운 도전을 하길 즐긴다. 하지만 좌절만 있어서는 안 된다. 잘한 일에는 보상이 뒤따라야 하는데, 칭찬이나 안아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수 있다. 성인이 되어서도 마찬가지다. 어느 정도의 좌절은 견디고 넘어갈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만일 내가 견딜 수 없는 심각한 좌절을 맞닥뜨리게 된다면 안전기지의 도움이 필요하다. 그리고 부모나 친구 혹은 주위 사람의 도움으로도 해결되지 않는다면 전문가의 도움을 받는데 주저하지 말자.
    • 오피니언
    • 책소개
    2023-03-28
  • 예의 없는 목사 · 장로들
    1987년 총신대 신학과 3학년 때부터 시작해 2020년까지 교육전도사, 교육목사, 군목, 부목사, 담임목사로 33년간 목회를 했다. 그리고 이제 기자로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다. 그러다보니 목회할 때하고 다른 경험들을 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내 기사가 마음에 든 사람들은 아는체를 하고 반가워하며 고마워했다. 반면 기사가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들은 대체로 시비를 걸었다. 한번은 어느 곳을 취재갔는데 알지도 못하는 목사인지 장로인지가 “왜 기사를 그렇게 싣냐”고 한마디하고 지나갔다. 어이가 없었다. 본인은 나를 알지만 나는 상대방을 알지 못한다. 초면인데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는가? 또 어떤 사람은 내 기사가 일방적이라고 비난했다. 그래서 반론권을 줄테니 기사를 작성해 오면 실어주겠다고했다. 그런데 아직도 반박 기사를 보내지 않고 있다. 또 어떤 사람을 엘리베이터에서 만났는데 내려서 나를 알아보고는 작년 내 기사를 명예훼손으로 고소할려고 했다고 다짜고짜 말했다. 누군지 모르기에 멍했는데 알고보니 과거 총회장을 역임했던 유명한(?) 인물로 이후 교회를 사임했었다. 기독신문에도 실린 기사를 근거로해 기사를 썼는데 무슨 명예훼손인가? 훼손될 명예라도 있는가? 이처럼 목회할 때와는 달리 기자가 돼서는 나에 대해 우호적인 사람들도 있고 적대적인 사람들도 있다. 기사에 대해 이해당사자들은 엇갈린 반응을 보인다. 그러나 기사가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예의를 갖춰야한다. 통성명을 하고 기사의 어떤 부분이 문제가 있다고 지적하면 판단해서 수정해 줄 수 도 있다. 막무가내로 비난하면 어쩌자는 것인가? 우스갯소리로 “예의는 쌈싸먹었냐?”는 말이있다. 설교할 때 쌈밥은 먹지 말자고 했다. 싸움을 하게 되기 때문이라고 했다. 우거지국은 먹지 말자고 했다. 우거지상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반면 피자는 먹자고 했다. 얼굴을 피고 살자는 것이었다. 쌈을 아무리 좋아해도 예의는 쌈싸먹어서는 안된다. 사회 생활의 기본은 상대방에 대한 예의이다. 총신대학 교훈을 떠올려 본다. “신자가 되라, 학자가 되라, 성자가 되라, 전도자가 되라, 목자가 되라” 비록 聖者는 못되어도 예의자는 되자.
    • 오피니언
    • 논단
    2023-03-27
  • 교단지 기독신문, 유감
    이번 기독신문 인터넷판에 “[특집/총회 튀르키예 구호방문] 무너진 초대교회의 도시”란 기사가 헤드라인으로 실렸다. 기독신문 기자가 현장에 동행했는지는 모르나 동행했다면 이것은 인터넷 교계신문은 가질 수 없는 교단지만의 "특혜"이다. 기독신문은 유일한 합동교단 교단지이다. 그래서 많은 혜택을 누리고 있다. 그럼에도 현재 경영악화로 인해 매주 교회를 방문해 “문서선교부흥예배”를 드리며 후원자를 확보하고 있다. 이 또한 인터넷교계신문이 누릴 수 없는 엄청난 “특혜”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교단지라는 한계가 기독신문에는 있다. 우선 발행인이 현 총회장이기에 총회에 비판적인 기사를 쓰기 힘든 구조이다. 권 총회장은 107회 총회 현장에서 기자회견을 통해 그 자리에 모인 많은 언론들에게 “감시와 견제 그리고 대안을 제시해 달라”고 말했었다. 그러나 교단지 기독신문에 언론의 기본 기능인 감시와 견제 기능이 있는가? 현재 교단의 핫이슈는 작년 107회 총회 때 총대들에 의해 폐지된 충남노회가 6개월 만에 부활한 것이다. 이로인해 구 충남노회에 큰 파장이 일고 있으며 충남노회 소속 천안중부교회(김종천 목사 시무)에서는 지난 3월 19일 공동의회 소집 건으로 인해 경찰 50여명이 출동하고 몸싸움이 벌어져 병원에 입원하는 일들이 벌어졌다. 그러나 이에 대한 기사는 기독신문에 한 건도 없다. 왜 그런가? 이 문제가 사소한 문제인가? 매주 교회에서 고성과 몸싸움이 벌어지고 있는데 타교단 남의 이야기인가? 속회 측(53개 교회)이 구 충남노회 부활로 인한 대책모임을 3월 13일 가졌었다. 이때 몇몇 인터넷 신문사가 현장 취재했고 기독신문 기자도 왔었다. 그러나 기독신문에는 이와 관련한 기사가 없었다. 왜 그런가? 3월 2일 총회장 권순웅 목사와 충남노회폐지후속처리소위원장 김상현 목사의 이름으로 “사회소송대응시행세칙에 의거 정기회 측 노회장 고영국 목사와 서기 이상규 목사에게 충남노회 정상화를 위한 소집권을 부여”한다는 공문 때문에 구 충남노회 속회 측과 천안중부교회는 아수라장이 되고 있다. 현재 이만한 핫 이슈가 우리 교단에 있는가? 대지진으로 어려움 당하는 튀르키예를 비행기로 12시간 가서 구호하고 위로하는 것은 매우 귀한 일이다. 그러나 총회에서 차로 2시간 거리인 충남지역 노회원들과 교회가 대지진 이상으로 황폐해지고 고통당하고 있다는 것을 외면해서는 안된다. 그런데 교단지 기독신문은 충남노회 부활 문제와 천안중부교회 공동의회 사태에 대해 나몰라라하고 있다. 몇몇 인터넷교계신문들만이 이 문제를 다루고 있다. 그러다보니 한계가 있다. 기독신문은 교단지라는 이점으로 대부분의 교회들이 구독하고 있기에 소식을 널리 전할 수 있으나 인터넷 신문은 그렇게 하기가 쉽지 않다. 파급력이 약하다. 현재는 개인 카톡이나 단톡방을 통해 기사를 전달하고 있으나 한계가 있다. 그래서 현재 교단에 이런 큰 문제가 있다는 것을 모르는 목사, 장로, 총대들이 많다. 앞으로도 교단 기관지 기독신문이 이 문제에 계속 침묵한다면 충남노회 폐지를 결의했던 1600명 총대에게 본지가 이에 대해 쓴 기사 10건을 문자로 보내야할지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
    • 오피니언
    • 논단
    2023-03-24
비밀번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