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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383】 전 법관의 ‘왜 책을 읽어야 하는가?’
나의 일상을 풍요롭게 채우는 건 어떤 의미인가, 다른 사람의 삶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가, 사람과 사회는 바뀔 수 있는가. 자작나무에서 지리산으로, 도스토옙스키에서 몽테스키외로, 일상에서 재판까지. 호의는 사람을, 세상을 어떻게 바꾸는가. 받은 것을 사회에 되돌려주라던 김장하 선생과의 추억, 법을 몰라 손해 보는 이들을 헤아리는 마음, ‘자살’을 시도했던 재소자가 ‘살자’는 다짐을 하게 만든 선물, 사랑하는 이를 그리워하며 속절없이 흘리는 눈물, 그리고 건강한 법원과 사회를 향한 진심 어린 조언…교보문고 계엄을 도모했던 윤석열을 단죄한 문형배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이 쓴 책으로 가볍게 읽을만하다. 착한 사람을 위한 법 2001. 4. 22. 법 없이 살 사람 착한 사람을 일컬어 '법 없이 살 사람'이라고들 한다. 법의 강제 없이도 타인에게 폐를 끼치지 않을 사람이란 뜻이리라. 과연 착한 사람에게 법은 필요 없는 것일까? 법 없이 살 수 없는 사람 나는 법이 어떠하다고 정의할 만큼 경력도 풍부하지도 않고 타고난 재주도 없지만, 1983년 법학을 전공한 이래 지금까지 18년을 법과 함께 살아온 경험에 비추어 (그런 점에서 나는 법 없이 살 수 없는 사람이다) 착한 사람일수록 법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p. 19). 종종 초등학교 동창 모임에 나가곤 하는데, 거기서 늘 하는 말이 있다. "사건이 터지고 나서 나에게 힘써달라고 전화해봐야 아무 소용 없다. 사건이 터지기 전에 나에게 법을 물어보라." 도대체, 전 재산과 다름없는 300만 원을 전세금으로 걸면서 그 집이 경매 중인 사실도 확인하지 않고 계약하는 사람을 누가 구제해줄 수 있겠는가? 그런 사람들은 대개 사건이 터지고 난 뒤에야, 집주인을 사기죄로 고소했으니 수사 기관에 힘 좀 써서 집주인을 즉시 구속시켜 달라고 법조인에게 전화를 한다. 법에는 두 가지 기능이 있다. 하나는 보장적 기능이다. 일정한 행위를 금지하고 거기에 저촉되지 않으면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게 해주는 측면이다. 여기서 '법 없이 살 사람'이 빛을 발한다. 다른 하나는 보호적 기능이다. 그러나 법의 이러한 보호적 기능도 경매 절차에서 배당 요구를 하는 임차인이나 노동자에게만 위력을 발휘한다는 사실에 유의하여야 한다. 여기서 '법 없이 살 사람'은 초라하기만 하다. 착한 사람부터 법을 알자 판사로서 사건을 처리하다 보면 '착한 사람은 법을 모르(p. 20)고, 법을 아는 사람은 착하지 않은 경우'를 종종 본다. 그런 사건일수록 해결이 어렵고, 착한 사람을 보호하고자 궁리를 해보나 한계가 있게 마련이다. 착한 사람에게 적용되는 법 따로 있고 착하지 않은 사람에게 적용되는 법 따로 있을 수는 없으니까. 그렇다면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하여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법을 아는 사람에게 착하기를 요구할 것 인가? 불가능은 아니나 어려운 과정을 거쳐야 할 것이다. 남는 방법은 착한 사람이 법을 아는 것이다. 그 길만이 법이 나쁜 사람을 지켜주는 도구 역할을 하지 못하게 하는 지름길이다(p. 21). 형사 재판 잘 받는 방법들 중 2006. 12. 19. 진술 거부권 행사 자기에게 불이익한 사실에 대하여 진술을 거부하는 것은 헌법 및 형사 소송법에서 보장된 피고인 및 피의자의 권리입니다. 따라서 법정에서 판사로부터 불이익한 사항에 대하여 질문을 받을 때 진술을 거부하면 되겠습니다. 괘씸죄가 걱정된다면 기억이 나지 않는다거나 잘 모르겠다고 대답하면 되겠습니다. 이것이 모순되거나 불합리한 답변을 하는 것보다 유리합니다. 답변 방식 법정에서 판사의 질문에 대하여 답변을 할 때는 결론을(p. 45) 먼저 말하고 이유를 나중에 설명하는 것이 효과적인 경우가 많습니다. 판사는 질문을 통하여 사건의 윤곽을 파악 하려고 하므로, 판사에게 결론을 먼저 말함으로써 판사가 설명이 더 필요한 부분인가를 쉽게 판단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좋습니다. 판사는 여러 각도에서 사건을 살피기 위하여 다양한 질문을 하는 것이므로, 설령 질문이 자신에게 불리한 내용 일지라도, 판사가 상대방의 편을 든다고 섣불리 생각하지 말고 정중하게 답변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한 과정을 통하여 판사는 피고인의 진심을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p. 46). 민사 재판 잘 받는 법 2007. 5. 17. 오늘 재판을 하면서 느낀 점을 토대로 민사 재판 잘 받는 방법을 적어보았습니다. 변호사를 선임하는 것이 유리합니다 소송을 하려면 어려운 일이 많으므로 형편이 허락한다면 변호사를 선임하는 것이 좋습니다. 변호사를 선임하였다고 해서 변호사에게 모든 것을 맡길 것이 아니라 수시로 소송 진행 정도를 확인하고 대응 방안을 함께 의논하는 것이 중요합니다(p. 61). 준비 서면을 간단명료하게 작성하는 것이 좋습니다. 변호사를 선임하지 못할 경우 법무사의 도움을 받거나 본인이 직접 준비 서면을 작성해야 할 터인데, 이때 주의할 점은 다음과 같습니다. 준비 서면이라는 것은 당사자의 주장에 불과하므로 아무리 유리한 내용을 적어놓더라도 증거가 없으면 인정받기가 어려운 반면, 불리한 내용은 별도의 증거가 없더라도 본인에게 불리하게 작용합니다. 따라서 준비 서면은 간단하게 작성하는 것이 좋습니다. 증거가 뒷받침되는 내용일 경우 명료하게 주장을 펼치는 것이 좋습니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준비 서면에 상대방을 비난하는 내용을 적을 경우 이익이 없을 뿐만 아니라 때로는 해롭다는 것입니다. 재판이라는 것이 당사자의 도덕성에 대한 심판이 아니라는 점에서 그렇고, 뚜렷한 증거 없이 상대 방을 비난할 때 판사에게 좋은 인상을 주기 어렵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준비 서면에 똑같은 내용을 되풀이하여 적어내는 것도 피해야 합니다. 재판부는 많은 사건을 처리하고 있으므로 그들의 노고를 덜어주는 것도 좋은 인상을 심어주는 방법이 될 수 있습니다(p. 62). 소송의 승패는 증거에 달려 있습니다 민사 소송에서 이기고 지는 것은 증거가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따라서 흥분할 필요 없이 차분하게 증거를 수집하여 제출하는 사람이 이길 수밖에 없습니다. 증거로는 애초 사건이 있었을 때 작성된 서류, 특히 상대방이 서명 또는 날인한 서류가 가장 효력이 강하고, 그 다음으로 제3자가 작성한 서류가 효력이 강합니다. 증인의 증언은 상황에 따라 다릅니다. 법정에서는 결론부터 먼저 이야기하는 것이 좋습니다 아직도 법정에서는 많은 사건을 처리하는 실정이므로 법정에서 판사로부터 질문을 받았을 때는 결론을 먼저 이야기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다음에 그 이유를 간단하게 설명하는 것이 좋습니다. 조정 또는 화해를 권유받았을 때는 존중하는 것이 좋습니다 재판을 하다 보면 어느 당사자의 주장이, 설득력은 있으나 증거로 뒷받침 되지 않는 경우가 제법 있습니다. 법적 관점으로만 해결할 경우 어느 당사자에게 더 가혹하기도(p. 63)합니다. 이길 승산이 있어 보이나 시간과 비용이 상당히 많이 드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럴 때 법원은 당사자에게 조정 또는 화해를 권고하는 데, 긍정적으로 검토해보는 것이 좋습니다. 특히 조정 또는 화해 절차에서는 집행에 관한 내용을 반영할 수도 있으므로 이러한 점에서도 조정 또는 화해의 효용은 높습니다. 증인 신문을 할 때는 불쾌한 감정을 드러내기보다는 허점을 짚어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법정에 출석한 증인을 상대로 질문을 할 경우 "거짓말쟁이다" "양심도 없느냐"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아무런 도움이 안 됩니다. 차분하게 증언의 허점을 짚어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려면 상대방이 질문하는 내용을 (미리 받을 수 있습니다) 검토하여 허점을 정리했다가 법정에서 질문 하는 것이 좋습니다. 바람 턱없이 부족한 내용일 것입니다. 이것저것 물어보고 소송을 잘해서 이길 사람이 이기는 재판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p. 64). 문제가 터지고 나서 소송을 잘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 은 문제가 터지기 전 검토를 충분히 하는 것입니다. 몇 천 만 원이 오고가는 계약을 체결할 때 변호사나 법을 잘 아는 사람에게 비용을 들여서라도 상담을 받아보는 것이 길게 볼 때 비용이 더 적게 듭니다(p. 65). 책을 읽는 이유 세 가지 2010. 2. 16. 책을 많이 읽는 이유가 뭐냐는 질문을 받는다. 무지를 극복하기 위해서다 지방에서 고등학교를 다닐 때까지 고전을 읽은 적이 없었다. 서울에 있는 대학교에 들어가 보니 문화 충격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사투리는 말을 안 하는 것으로 감출 수 있었지만 무지는 감출 방법이 없었다. '장 발장'이 《레미제라블》의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그때부터 닥치는 대로 읽었다(p. 108). 무경험을 극복하기 위해서다 판사가 되고 보니 사건을 이해하기엔 내 경험이 너무 좁고 얕다는 생각이 자주 들었다. 도대체 계약서도 작성하지 않고 거액의 거래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잡히면 처벌받을 게 뻔한 일을 왜 되풀이하는지, 궁금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래서 경험을 늘리려고 해보니 이 또한 걸리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당장 법관 윤리가 문제였다. 그래서 생각해본 것이 두 가지다. 지금은 언론사 사장이 된 어떤 분이 사법연수생이었던 나에게, 법조인이 되면 초등학교 동창생과 꾸준히 만나라고 당부했던 기억이 떠올라 초등학교 동창생을 만나기로 결심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18년 동안 1년에 몇 회는 초등학교 동창생을 (때로는 부부 동반으로) 만났으니 어느 정도는 실천한 셈이다. 두 번째가 책을 읽는 것이었다. 장르를 구분하지 말고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읽어보자 하였던 결심이 여기까지 나를 데려왔다. 무소신을 극복하기 위해서다 어릴 때부터 내성적이었다. 남녀 공학 중학교 시절 소풍(p. 109)을 가서 선생님의 권유에 노래를 불렀는데 가사를 까먹어 끝을 맺지 못할 정도로. 그때 불렀던 노래가 남진의 〈님과 함께〉였다. 고등학교 때는 교복이 중고라서 반장을 하지 못했다. 대학교 가서는 사투리 때문에 남 앞에 나서지 못했다. 이런저런 이유로 무슨 결정을 하려면 무척 어려웠다. 결정을 하고 나면 곧 후회를 하게 되고. 어느 날, 내성적인 이유가 소신이 없기 때문은 아닐까 생각했다. 군대에서 정훈장교를 하게 되었고 정훈장교 하는 일이 장병 교육이다 보니 남 앞에 서는 것에 대한 두려움도 어느 정도 해소된 뒤라서 그런 결론을 더욱 쉽게 내릴 수 있었다. 앞서간 사람들의 생각을 알고 그들의 생각과 내 생각을 서로 맞추어보는 과정을 통해 생각이 단단해져 소신을 갖출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사회 비판적인 내용을 포함해 많은 책을 읽게 되었다. 사족 "그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려면 그 사람이 누구와 만나고 무슨 책을 읽는지 말해달라." 책에서 읽은 기억이 난다(p. 110). 혼돈의 시기에 그나마 생존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 친구와 책 덕분이라 생각하니 이 글을 쓰는 감회가 남다르다. 모든 분들에게 책을 한번 읽어보시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다(p. 111). 책을 고르는 기준 2010.6.26. 책을 어떻게 고르냐는 질문을 종종 받는다. 저자를 보고 고른다 어떤 책을 읽고 감동을 받으면 그 저자가 쓴 책은 눈에 띄는 대로 사서 읽는 버릇이 있다. 예를 들면 고 장영희 교수의 《내 생애 단 한 번》을 읽고 《축복》 《살아온 기적 살아 갈 기적》 《문학의 숲을 거닐다》를 읽는 식이다. 여기에 해당하는 저자는 다음과 같다. 신영복 교수, 정 민 교수, 유시민 전 장관, 소설가 김 훈, 오지 탐험가 한비야,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 《열하일기》 전문가 고미숙 박사(p. 124). 주제어를 보고 고른다 제목이나 문장을 검색하여 관심 있는 주제어가 들어간 책을 고른다. 요즘 즐겨 찾는 주제어는 다음과 같다. 정의, 소통, 성찰, 역사, 철학, 인생, 여행, 행복. 이런 기준으로 고른 책은 다음과 같다. 《정의란 무엇인가》 《서양철학사》 《인도 여행》 《행복의 정복》 《무지개 원리》 《인생이란 무엇인가》 등등. 책 선택에 실패한 적은? 이런 기준으로 책을 골라 읽으면서 후회할 때가 제법 있다. 그러나 산 책은 다 읽는다. 재미가 없거나 이해가 되지 않는 책에 대하여는 독후감을 쓰지 않음으로써 복수를 한다. 블로그에 올린 책은 이중으로 검증을 거쳤다고 보면 된다. 지금껏 읽은 책은, 세어보지는 않았지만, 1천 권 정도 될 것 같다. 책을 고르는 장소는? 인터넷 서점에서 검색하여 고르는 경우가 많고 가끔 서점에 가서 고른다. 베스트셀러 항목과 새로 나온 책 항목을 많이 참조한다(p. 125). 블로그에 독후감을 쓰는 이유는? 독후감을 쓰다 보면 책 내용을 정리하는 효과가 있고, 글쓰기 훈련이 되며, 블로그에 저장해놓으면 다른 글을 쓸 때 인용하기 쉽기 때문이다. 나쁜 사람은 있어도 나쁜 책은 없다. 어떤 책에서도 스승 또는 반면교사를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여러분께 독서를 권한다. 책이 여러분을 끌어올려줄 것이다(p. 126). 왕후박나무 2011.4.1 남해군법원 다녀오는 길에 경남 남해군 창선면 왕후박 나무를 만났습니다. 500년 이상 되었다고 합니다. 둘레에는 동백나무가 꽃을 피우고 있었습니다. 후박나무는 녹나무과에 속합니다. 주로 방풍용으로 많이 심는다고 합니다. 남해군 창선면에 있는 왕후박나무는 천연기념물 제299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왕후박나무는 높이 솟구치지 않고 옆으로 퍼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람 부는 바닷가에서도 500년을 버틴 게 아닐까 생각해봤습니다. 그렇다면 이 나무는 알고 있는 것 같습니다. 자신을 낮추는 것이 자신을 높이는 가장 쉬운 방법이라는 것을 말입니다(p. 140). 조영남의 노래가 있죠. 〈겸손은 힘들어〉. 그렇죠. 겸손은 힘듭니다. 공자 이래 2천 년 동안 성현들은 겸손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겸손한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적습니다(p. 141). 조정에 임하는 자세 2013.4.28. 조정이란 조정은 법률 분쟁이 생겼을 때 판사의 판결이 아니라 당사자 간 타협을 통하여 분쟁을 해결하는 절차를 말한다. 실제로 미국에서는 법원에 접수된 사건 중 판결까지 가는 사건은 10퍼센트가 되지 않고 대개는 조정을 포함한 여러 가지 간이한 방법을 통하여 사건을 처리한다고 한다. 어떤 의미에서 조정은 이길 사람에게 양보를 요구하는 것이니 불합리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길 사람이라는 건 미리 정해진 것은 아니고 재판 절차를 통하여 증거를 대고 법리를 세워야 하고 그것으로 판사를 설득해야 하며 최종적으로 대법원까지 가봐야 아는 것이다(p. 188). 그리고 1천만 원을 받기 위하여 소송 비용으로 500만 원을 들여야 한다면, 700만 원을 받고 소송 비용을 100만 원 선에서 지출하는 것이 합리적일 수도 있다. 사건에 관하여 가장 절실한 이해관계자는 판사도 아니 고, 변호사도 아니며, 결국 당사자다. 사건을 주도적으로 해결해야 할 사람도 당사자일 수밖에 없으므로, 당사자의 주도권이 가장 잘 보장되는 조정 절차가 불합리하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조정에 임하는 자세 양보해야 한다. 조정은 당사자 간의 타협을 통하여 분쟁을 해결하는 것이고 대체로 당사자는 서로 이해관계가 상반되므로 양보를 해야 조정이 성공한다. 본인이 참석해야 한다. 변호사에게 소송을 위임한 경우라도 조정 절차에는 본인이 참석하는 것이 좋다. 판사의 설명을 들을 수 있고, 상대방의 입장을 직접 들을 수 있으며, 최종 결정을 내려야 하기 때문이다. 상생하는 방법도 있다. 본인에게 크게 불리하지 않으면서 상대방을 크게 배려하는 방법도 있다. 상대방이 특히 중요하게 생각하는 쟁점에 관하여 양보하더라도 본인에(p. 189)게 크게 불리하지 않은 경우도 있으므로, 상생하는 방법을 찾아본다. 집행 문제도 고려해야 한다. 소송을 하는 종국적 목적은 대체로 승소 판결을 받기 위함이 아니라 돈을 받아내기 위함이다. 법원에서 승소 판결을 받더라도 집행 절차에서 돈을 받아내는 비율은 생각보다 낮다. 조정 절차에서는 돈을 받아내는 방법도 협상 테이블에 올릴 수 있으므로 유리하다. 원고는 5천만 원을 고수하고 피고는 3천만 원을 고집할 경우 4천만 원 선에서 타협하는 것도 한 방법이지만 때로는 5천만 원으로 정하되 3개월 내에 3천만 원을 가져오면 나머지 2천만 원을 포기하는 방법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싸우는 것은 금물. 간혹 조정실에서 상대방과 말이나 몸으로 싸우는 사람이 있다. 사연이 있겠지만 판사 입장에서는 어리석은 행동이다. 자신의 문제를 효과적으로 풀 수 있는 자리를 어렵게 마련했는데 불만을 터트리는 자리로 만들어버리는 것은 불합리한 처사다. 그 사건이 해결 되지 않을 경우 가장 손해를 보는 사람은 판사도 아니요 변호사도 아니요 바로 당사자이기 때문이다. 판사의 설명에 귀 기울인다. 법원이 조정 절차를 주도하(p. 190)는 경우 판사로부터 사건 전반에 관한 설명을 듣게 된다. 판사는 내가 불리한 점, 내가 유리한 점을 나누어 설명할 것이다. 잘 들으면 판사가 생각하는 바를 엿볼 수 있다. 특히 2심이라면 사건 처리 방향이 대부분 결정되었다고 보면 된다. 민사 사건의 경우 대법원에 상고를 해서 2심 판결이 깨지는 비율이 10퍼센트가 안 된다는 점, 사실 인정은 원칙적으로 2심에서 하게 되어 있는 점을 고려할 때, 2심 재판부의 결론은 존중해야 한다. 그 바탕 위에서 내 입장을 최대한 반영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를 고민하는 것이 좋다. 마무리(롯데자이언츠의 마무리는?) 집안에 송사가 있으면 마음이 불편하다. 적당한 선에서 털고 나오는 것도 마음의 평화를 찾는 좋은 방법이다. '조금 손해 본 것은 다른 일을 해서 보충하면 된다.' 이런 생각으로 조정에 임할 수는 없을까요?(p. 191). 재판 속의 문학 내가 현실에서 맡은 재판은 그렇게 감동적이지 않았다(p. 304).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문학이 재판에서 많은 것을 차용하지만 재판은 문학에서 차용하지 않고 순수함을 고수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본 적이 있다. 판사는 많은 경험을 해야 하지만 여러 사정으로 제한적인 경험을 할 수밖에 없다. 문학이 그 대안이 될 수 있다. 문학은 보편적 진실을 추구하는 것이고, 재판은 구체적 진실을 추구하는 것이며, 양자는 서로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판사들이 다 가난했던 경험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김훈의 《흑산》을 읽고 나면 가난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가령, 배고픔을 면하자면 오직 먹어야 하는데 많은 끼니 중에서도 지금 당장 먹는 밥만이 배를 채운다는 내용이 그렇다. "아침에 먹은 밥이 저녁의 허기를 달래줄 수 없으며, 오늘 먹는 밥이 내일의 요기가 될 수 없음은 사농공상과 금수축생이 다 마찬가지다." 내가 10년 전 처리한 사건 중 20대 청년이 공무집행 방해죄로 구속 기소된 사건이 있었다. 생모라고 밝힌 사람이 탄원서를 보냈다. 오래전에 헤어진 아들이 재판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며 자신이 책임지고 선도를 할 테니 선처를 바란다는 내용이었다(p. 305). 재판을 하며 방청객을 둘러보니 유난히 눈에 띄는 분이 있었다. 피고인석 옆에 앉아 대화를 하게 하였더니 피고인을 껴안으면서 "이제 괜찮아, 엄마가 있잖아"라고 말했다. 피고인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생모와 시선도 마주치지 못하였다. 생모를 만났으니 이제 마음을 잡지 않겠는가 생각하고 집행 유예 판결을 선고했고, 피고인에게 책을 선물하면서 그 책 한 쪽을 읽어주었다. 알프레드 디 수자의 시 〈사랑하라.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이다. 내가 10년 전에 처리한 사건 중에 피고인이 자살을 하려고 여관에 불을 질러 기소된 사건이 있었다. 다행히 불은 크게 번지지는 않았고 다친 사람도 없었다. 선고하는 당일 피고인에게 자살을 열 번 외치게 하였다. "자살자살자살자살.... 이렇게 열 번 하면 본인은 '자살' 이라고 말하지만 듣는 사람에게는 '살자'로 들립니다. 생각하기 나름입니다. 실패라고 다 나쁜 것은 아닙니다. 자살에 실패해서 살았지 않았습니까?" 그러고서 피고인에게 《살아 있는 동안 해야 할 49가지》란 책을 선물했다. 나는 이런 재판을 하게 된 배경 중 8할이 문학 덕분이라고 생각한다(p. 306).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는 이렇게 시작한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모습이 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모두 제 각각의 불행을 안고 있다." 어쩌면 좋은 문학과 좋은 재판은 그 모습이 모두 비슷할지 모른다. 철저한 조사를 바탕으로, 공동체의 보편적 가치를 질문할 때, 주제와 이야기가 딱 들어맞을 때 독자들은 감동한다. 판사들이여! 《유토피아》를 쓴 토마스 모어가 영국의 대법관이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작가들이여! 긴장하시라. 대한민국의 판사도 또 다른 '유토피아'를 쓸지 누가 알겠는가?(p. 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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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382】 죽음을 늘 준비하며 살자
KBS 《아침마당》, 《강연100℃》 등에 출연해 전국의 시청자들에게 위로와 공감, 희망의 메시지를 전해준 호스피스 의사 김여환의 에세이 《내일은 못 볼지도 몰라요》. 극심한 암성 통증으로 고통 받는 환자들과 함께 지내면서 누구보다도 안타까운 마음으로 임종 선언을 했던 저자 김여환. 숨기려야 숨길 수 없는 삶의 마지막 순간을 꼼꼼히 기록한 이 책은, 삶이 완성되는 마지막 순간을 위해 더없이 소중한 오늘을 ‘있는 힘껏’ 아름답고 행복하게 살아내야 한다는 인생의 진리를 전하고 있다-교보문고. 이 책은 호스피스 의사가 수많은 죽음을 보고 삶과 죽음에 대해 느낀 것을 쓴 것이다. 많이 유익했는데 현재 절판됐다. 사람의 일생 중 가장 힘든 시기는 보증을 잘못서서 거액의 부도를 냈을 때나 남편이 바람을 펴서 이혼할까 말까 망설일 때가 아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인생의 반전 같은 일말의 빛조차 기대할 수 없는 시간들, 즉 죽음을 맞이하기 직전까지의 '짧은 삶'이다. 그 시기를 잘 보내야만 지금까지 살아온 세월을 온전한 나의 인생으로 만들 수 있다. 그래야만 남겨진 사람들의 인생도 편안해질 수 있다(p. 8). 그렇다. 나는 이 세상에 남들보다 조금 먼저 작별 인사를 건넨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이토록 자명한 삶의 진리를 힘겹게 깨달았다. 만약 우리에게 내일이 오지 않을 것임을 안다면, 오늘 우리의 삶은 결코 평범하지 않을 것이다. 또한 만약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과 내일 다시 못 볼지도 모른다는 것을 안다면, 한 번 더 사랑한다 말하고, 한 번 더 안아주어야 하며, 오늘 깃든 행복을 있는 힘을 다해 누려야 한다. 이렇게 수많은 '오늘의 삶'이 모일 때 삶의 아름다운 결과물은 비로소 완성 된다. 그러므로 "내일은 못 볼지도 몰라요."라는 말에 숨어 있는 참된 의미는 오지도 않은 내일에 대한 불안과 분노, 두려움과 슬픔에 오늘의 행복을 양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오늘 더 사랑하고, 오늘 더 행복해야만 한다(p. 10). "2012년 8월 21일 12시 42분, 신복연 할머니는 사망하셨습니다." 나는 할머니가 더 이상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니란 사실을 말했다. 그리고 통증 없이 편안히 좋은 곳으로 떠나셨다는 위로의 말도 빼놓지 않았다. 짤막한 사망 선언 뒤에는 언제나 그 마지막 순간을 지키고 있던 가족의 대성통곡으로 이어진다. 그런데 오늘은 조용했다(p. 22). 할머니의 둘째 딸이 낮은 목소리로 차분하게 말을 꺼냈다. "우리 엄마가 평소에 유언을 했어요. 내가 떠나면, 울지 말라고. 자식들이 우는 소리가 들리면 뒤 돌아보느라 떠나는 것이 힘드니, 울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어요." "아...하여간 대단하세요. 입원 내내 웃지 않으신 날이 없었는데, 그런 아름다운 유언까지 하신 줄은 몰랐어요. 제가 들어본 유언 중에 가장 훌륭한 유언인 것 같아요." "과장님, 그렇죠! 우리 엄마가 암에 걸렸다고 하니까, 동네 사람들이 이제 꽃 한 송이가 지는구나, 했다니까요." 곱게 아껴두었던 꽃분홍색 한복으로 갈아입고, 흰 양말까지 정갈하게 신은 신복연 할머니의 마지막 모습은 살아 있는 그 누구보다도 따뜻해 보였다(p. 23). 짧은 글 한 편을 쓸 때에도 마지막에 무슨 말을 쓸까를 생각하면서 쓰면 글의 흐름이 매끄러워지듯이, 인생도 자신의 마지막 순간을 생각하고 살다 보면 들쭉날쭉한 인생이 일관성 있게 변한다. 타인과의 소통도 중요하지만 그전에 자기 자신과 먼저 소통해야 한다. 자신의 마지막 순간과 소통하면 인생의 해답을 얻을 수 있다(p. 25). 자신과 만나려면 가장 낮은 곳으로 가야 한다. 그러므로 임종실은 부끄럽지만 가장 볼품없고 꾸밈없는 자신의 민낯이 있는 곳이었다. 그래서 나는 자신 있게 말한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만남은 바로 '나의 마지막'이라고(p. 26). "호호호, 난 아직 여기 입원할 단계는 아닌 걸요." "아직은 마약성 진통제를 쓸 만큼 아프지는 않아요." "며칠 전에도 산에 다녀올 만큼 괜찮았어요." 이렇게 말하면서 멀쩡하게 걸어 들어오는 말기 암 환자가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까? 나는 겉으로 보기에는 건강해 보이는 말기 암 환자들이 한두 달 뒤에는 누런 황달이 오거나 폐렴이 와서 황망히 떠나버린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남겨진 시간에 대해 불안해하거나 초조해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고 있는 그 짧은 시간에 환자에게 해 줄 수 있는 일에 집중한다. 칠순 잔치를 하든지, 마지막 콘서트를 하든지, 이혼한 뒤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아들을 찾아주는 일들 말이다. 그래도 나도 한 번쯤은 환자를 살려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모두가 죽는다고 포기했던 말기 암 환자가 완치되는 일이 우리 병동에서 일어나기를 기대했다. 환자들은 입원해서 퇴원(p. 45) 할 때까지 평균 27일을 살았다. 호스피스 경험이 쌓이면 쌓일수록 역시 기적이란 부질없는 비현실적인 희망이라는 것을 확신 하게 됐다. 일어날 수 없는 일을 가슴 저리게 갈구하기도 하고 신에게 떼를 쓰며 의지하기도 하는 것이 오히려 인간적이겠지만, 우리에게 남아 있는 시간이 별로 없다는 것이 훤히 보이는 나로서는 그렇게만 하다가 환자를 보낼 수는 없었다. 그런 애절한 생각을 할 시간이 있으면 조금밖에 남지 않은 삶에 집중해야 한다는 것이 오랜 경험을 통해 내린 슬픈 결론이었다. 사람이 좀 민민하고 삭막하게는 되었지만 현실적으로는 이것이 옳았다(p. 46). 말기 암 환자가 되면 환자와 가족은 육체와 정신적으로 이제까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상황과 맞닥뜨린다. 푸시시한 구차한 모습으로 마지막을 보낼 때쯤이면 원치 않았던 현재 시간이 살다 남은 찌꺼기 삶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약한 정신 때문이 아니라 몸이 약해지기 때문에 마음까지 통째로 흔들린다. 심지어 어떤 환자는 "잠자듯이 가는 그런 약 있잖아."라고 노골적으로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모든 말기 암 환자가 안락사를 원하는 것은 아니었다(p. 56). 비참한 마지막은 말기 암에 걸린 몸이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살다 남은 삶이라고 쓰러져버리는 마음이 만드는 것이다. 떠날 사람은 남아 있을 이를 위해 조금 남은 삶을 성실히 살아가고, 남아 있을 사람은 떠날 이가 세상에서 사랑받다가 가는구나 하는 느낌이 들도록 노력하면 서로 덜 힘들다. 처음과 마지막까지, 모두가 촘촘히 내 인생이기 때문이다(p. 58). 세상은 가벼움과 무거움이 서로 경계를 불분명하게 가른 채 섞여 있다. 어떤 부분은 내가 그보다 가볍고, 어떤 부분은 내가 그보다 무겁다. 그렇게 어우러져서 세상은 좀 더 좋게 변한다. 그러나 '죽음이 다가오는 것'과 같은 결정적인 순간이 다가오면 사람들은 가벼움과 무거움의 경계선을 남김없이 드러낸다. 고함을 지르고 입원실 바닥에 소변을 보는 한 할아버지 때문에 사흘 밤낮 동안 시달린 환자들이 하소연을 했다. 할아버지를 간병하던 할머니는 "환자가 병원에 자러 왔나요?"라며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그러면서 진정제도 못쓰게 하고 1인실로 가지도 않았다. 그런가 하면 뇌종양에 걸린 12살짜리 소녀는 과자를 들고 병실을 누비며 "아저씨, 빨리 나으세요."라고 하면서 환자들에게 나눠주었다. 한 신문 기자가 말기 폐암 환자에게 물었다(p. 67). "인생의 선배로서 우리에게 해주실 말씀이 없으신지요!" 후덕하게 생긴 환자는 가지고 있던 옷가지며 살림살이를 싹 정리할 정도로 죽음을 잘 받아들었다. 하지만 그는 기자의 질문에 대해 쓸쓸하게 대답했다. "저는....그런 것은 선배가 되고 싶진 않은데요." 그렇다. 죽음이란 일평생을 별 탈 없이 살다가 90살이 되어 마음 독하게 먹고 미리 준비해도 어려운 것이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맞닥뜨리는 죽음은 아무리 노력해도 익숙해지지 않는 법이다. 죽어가는 사람을 많이 돌본 의사로서 한 가지 분명히 말하고 싶은 것은, 어쩔 수 없이 먼저 떠나야 하는 사람들이 남은 사람들 걱정을 많이 했다는 것이다. 나 때문에 끼니를 거를까 봐, 나를 잃은 슬픔으로 행여 병이라도 생길까 봐, 경제적으로 힘들까 봐 등등.... 그들은 사소한 걱정을 몰래 했다. 남은 사람들은 그 마음을 알까? 임종실은 섞일 수 없는 삶과 죽음이 뒤엉켜 있고, 살아남은 이들이 비통함에 눈물을 흘리는 작은 방이다. 그러나 그곳을 거(p. 68)쳐 간 사람들은 한결같이 말한다. 존재란 그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죽어서도 사랑하는 이의 마음속에 영원히 살아 있는 것이라고(p. 69). 예전에 나는 보기조차 딱할 만큼 남을 부러워했다. 뚱뚱할 때는 날씬한 사람을, 늦게 시작한 의사 생활이 비참하다고 느껴질 때는 처음부터 순탄하게 직장 생활을 하는 동료를 얄밉도록 부러워했다. 누군가는 잘된 사람을 부러워하면서 인생의 꿈도 생기고 삶을 개척할 의지도 생긴다고 하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그 부러움이 오늘날의 나를 있게 한 계기는 되었을지라도 그 과정은 결코 행복하지 못했다. 이제 내가 진실로 부러워하는 사람은 돈이 많거나, 아이들이 좋은 대학에 입학했거나, 예쁘고 날씬하고 건강한 사람이 아니다. 그저 어떤 삶이 자신에게 다(p. 92)가오더라도 묵묵히 잘 받아들이고,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지 않으며, 자신의 삶을 그 자체로 당당하게 살아내는 사람이다. 우리는 저마다 지닌 인생의 향기가 따로 있다. 그러니까 이제는 그 누구도 부러워하지 말자. 인생의 마지막에는 행복했던 자신의 과거조차도 부러워하지 말아야 한다. 그 시간에는 그 시간에만 누릴 수 있는 나만의 행복이 따로 있는 것이다. 이렇게 마지막이 온 것도 견딜 수 없을 만큼 아쉬운데, 여러 가지 잣대로 부러워하면 병들어 있는 자신이 너무 불쌍하지 않은가. 부러워하지 말자, 그대여! 인생이 아파도 마지막까지 이 세상을 그 누구보다 당당하게 살아내야 한다(p. 93). 불행히도 호스피스에는 죽음을 편안하게 수용할 수 있는 묘약 따위는 없다. 그래도 사람들은 안고 갈 수밖에 없는 속사정을 들어주면 조금은 가벼워졌고, 끝까지 끈을 놓지 않고 가는(p. 108) 사람이 생각보다 많다는 평범한 사실에 평안을 찾아갔다. 대식 씨의 어머니처럼 때로는 버리는 것보다 안고 가는 것이 더 홀가분한 인생도 있다. 그러니까 결국 안고 가는 사람, 버리고 가는 사람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닌 셈이다(p. 109). 잘 죽어가기 위해 우리가 정말 배웠어야 할 것은 죽음의 5단계를 외우거나 혼자서 관 속에 들어가 보는 체험을 하는 것이(p. 112) 아니다. "저는요, 이미 죽음을 다 받아들였어요."라고 말하면서 의젓하게 지내다가 진짜 마지막이 다가오면 불안에 떠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죽음은 삶의 완성이라기보다는 결과물이다. 삶이란 누구에게나 신산스럽고, 일상은 상처와 갈등의 연속이다. 나에게 주어진 삶을 얼마만큼 잘 녹여내느냐에 따라서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있을 마지막 날은 달라진다(p. 113). 어쩌면 인생은 쓰고 싶은 대로가 아니라 저절로 쓰이는 소설책인지도 모른다. 때로는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지만 어떻게든 끝까지 살아내야 한다. 죽을 만큼 괴로워도 직접 해봐야 삶에 대한 사랑이 깊어진다. 사람들은 인생이 힘들어지면 앞으로 남은 여정이 얼마나 끔찍해질지 더 두려워한다. 남은 인생이 지금보다 더 불편해지더라도 초조해하거나 원통해하지 말자.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그대의 삶이 다른 누군가의 목숨을 구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으면 좋겠다. 자살이라는 '고의로 스스로를 죽이는 행위'를 생각할 만큼 견딜 수 없이 힘들다면 적극적으로 주변에 도움을 요청해야 한다. 아무 상관도 능력도 없는 사람에게조차 알려야 한다. 마음의 피눈물은 말하지 않으면 보이지 않고, 드러나지 않는 상처는 치유될 수 없다. 애써 고통을 삼키지 말자. 누구라도 도와줄 사(p. 120)람을 찾아다녀라. 자존심 따위 내세울 때가 아니다(p. 121). 치통이 아무리 심해도 한꺼번에 진통제를 다섯 알씩 먹지는 않는다. 통증을 잡으려다 사람을 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약국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타이레놀도 하루에 여섯 알을 초과하면 진통의 효과는 증가하지 않고 간에 부담만 준다. 이렇게 일반 진통제는 일반적으로 정해져 있는 용량을 초과하면 통증에 대한 효과보다는 약물에 대한 부작용이 심해지기 때문에 쓸 수 있는 용량의 한계가 있다. 이것을 약의 천장 효과(ceiling effect)라고 한다. 그런데 이런 천장 효과가 없는 약이 있다. 호스피스 병동에서 많이 쓰이는 마약성 진통제이다. 그것은 일반 진통제와 달리 많이 쓰면 쓸수록 통증이 잘 조절된다. 더군다나 날록손 (naloxone)이라는 해독제까지 있으니 '모르핀'이야말로 신이 세상을 떠날 때만은 아프지 말라고 인간에게 특별히 내려준 '마지막 선물'이다. 사망 원인 1위인 암은 사람이 떠날 무렵에 부쩍 커진다. 암(p. 129)덩어리가 커지면 정상 조직을 파괴하는 묵직한 암성 통증도 당연히 심해진다. 그래서 사람들은 너무 일찍부터 진통제를 쓰기 시작하면 통증이 가장 극심한 마지막 순간에는 정작 쓸 수 있는 약이 없을까 봐 전전긍긍한다. 모르핀을 최후의 약으로 넘겨 두었으면 하고 부탁까지 한다. 그러나 통증에 관한 한 모르핀은 쓰면 쓸수록 효과가 있는 약이다. 이러한 마약성 진통제의 비밀을 알려주면 누구나 "진짜 그런 약이 있나요?" 하고 물으며 신기해한다. 환자나 보호자는 어차피 살릴 수 없다면 고통 없이 떠날 수 있다는 확신만으로 가느다란 희망을 갖는다. 모르핀은 우리를 죽음의 공포보다 더 끔찍한 암성 통증에서 해방시켜주는 이로운 약제이다. 우리는 지금보다 좀 더 정확하게 모르핀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 아직도 말기 암 환자임에도 불구하고 환자, 보호자, 의료진의 모르핀에 대한 오해와 두려움으로 마약성 진통제를 거부하면서 의미 없는 통증에 시달리다가 마지막 순간을 맞이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나는 인생의 마지막 의사로서 당부한다. 언젠가 당신에게 그때가 오면 신이 내린 선물, 모르핀을 거절(p. 130)하지 말고 받아들이라고. 통증이 없으면 죽음의 맨 얼굴을 똑바로 응시할 수 있고, 고통 없는 죽음은 결코 폭력적이지 않을 것이다(p. 131). 내일 도사리고 있는 재앙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살아감 속에 죽어감의 흔적을 묻히는 것이다. 내일이라는 것이 그 누구에게도 완벽하게 보장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알면, 오늘 그대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무심코 거칠게 한 말이 마지막일 수도 있다는 것을 절대로 잊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오지도 않을 비겁한 내일을 위해 오늘의 행복을 너무 많이는 양보하지 말자(p. 163). 말기 암 환자가 되면 환자와 가족은 육체와 정신적으로 이제까지는 경험하지 못한 일을 경험하게 된다. 가족 간의 갈등이 있었다면, 분명히 그 갈등은 확대된다. 문제의 중심은 늘 '사랑과 돈'이다. 거기에 종교적인 문제가 곁들여지면 사태는 더욱 심각해진다(p. 174). 살다 보면 마음 내키지 않는 일을 해야 할 때가 있다. 하고 싶은 일만 해도 짧은 인생인데 굳이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면 큰 손해를 볼 것만 같다. 젊은 시절에는 내가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이 뭔지도 모를 때가 많다는 것을 기억하라. 그러나 매 순간 저마다 해야 할 일은 누구나 알고 있다. 해야 할 일을 하다 보면 진짜 하고 싶은 일이 훤히 보이고 그때 용기 내어 그 일을 하면 진정한 행복에 도달할 것이다. 인생은 생각보다 길기도, 또 속절없이 짧기도 하다. 그러기에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을 실수 없이 하려면 마음에 내키지 않더라도 '해야 하는 일'을 먼저 하면서 견뎌보는 것쯤은 각오해야 한다(p. 187). 웰다잉(well dying)은 삶의 완성이 아니라 삶의 결과물이다. 누구나 손쉽게 받을 수 있는 선물은 더군다나 아니다. 저마다 주어진 힘든 삶을 잘 살아내야만 누릴 수 있는 삶의 마지막 축 복인 것이다(p. 203). 죽음을 깊숙하게 연구하고 싶어서라든지 내 성격이 원래 우울해서 호스피스 의사가 된 건 아니다. 나는 호스피스 일을 해오는 동안 '죽음을 준비해야 하는 사람도 죽음에 이르기 직 전까지는 살아 있다'는 자명한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 누구도 아프지 않게 하루를 지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고 보면 나는 거창한 죽음의 여의사가 아니라 그저 생명의 에너지가 다 할 때까지 불편함 없이 살아갈 수 있게 해주는 의사로서 당연한 일을 하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이름이 주는 거부감 때문에 국내 암 환자의 마약성 진통제 사용률은 그리 높지 않다. 세계보건기구에 따르면, 국내 사용량은 모르핀으로 환산했을 때 환자 1인당 연간 45mg에 불과하다. 미국 693.44mg, 영국 334.52mg은 물론 세계 평균 58.00mg보다도 낮다. 통증을 효과적으로 다스릴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도 안 쓰는 것이다. 아직도 대한민국 사람들은 아프면서 죽어간다. 의사 입장에서 보면 죽음이 삶의 종착역인지 따위는 일단 환자의 통증을 덜어준다음에 생각할 일이다. 암 환자의 통증은 당사자가 아니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심하다. 출산의 고통이 10점 만점에 7~8점이라면 암 환자의 통증은 10점 이상도 간다.암성 통증은 암이 진행되는 생명의 마지막에는 더 심해지고, 그(p. 215) 끝을 알 수 없기 때문에 환자와 가족을 더더욱 애타게 한다(p. 216). 인생을 산다는 것은 세상에 놓인 하나의 다리를 건너는 것이다. 하지만 그저 다리를 건너는 일에만 집중한다면 세상의 아름다움은커녕 다리를 뒤흔들 고통과 혼돈의 시간이 다가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없다. 뜨거운 마음으로 용기를 내어 자기 삶의 아웃사이더가 되어보기를. 삶이 끝난 뒤에 죽음이 오는 것이 아니라 삶 속에 죽음이 있음을 알아차리기를, 그래서 지금 이 순간이 가장 행복하다고 느끼면서 아름다운 마무리를 하게 되기를 바란다(p. 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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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381】 삶의 찌질함과 누추함에 대하여
산문집 《연중무휴의 사랑》과 《헤아림의 조각들》(2023년 문학나눔 선정도서)로 2030 독자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던 임지은이 신작 《이유 없이 싫어하는 것들에 대하여》를 출간했다. 전작에서 냉철하고, 때론 따뜻한 연민과 너른 헤아림을 보여줬다면 이번 산문집에서는 작가 자신의 깊은 내면에 숨겨진 질투와 열등감, 욕망과 좌절, 위선 등의 감정을 진솔하게 마주해본다. 누구나 한번쯤 특별한 이유 없이 무언가를 미워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이 ‘싫음’이라는 감정은 과연 무엇일까. 숨기고만 싶은 이 복잡 미묘한 감정을 들여다볼수록 작가는 거기에 어떤 선망이나 외로움, 부끄러움 같은 것들이 들어 있다는 걸 깨달았다. 한편으론 자기가 가진 것 중 가장 소중한 것을 돋보이게 하려는, 서툰 사랑의 마음이기도 했다. 작가는 슬픔과 기쁨과 외로움이 버무려진 이 “혼탕과 같은 삶”에 깊게 몸 담그며, 미움과 사랑 사이의 낙차를 발견한다. 엄마를 통해 흉보는 마음과 사랑이 때론 붙어 있음을 알게 되었고, 온 세상과 자기 자신을 고루고루 아낌없이 사랑한다는 사람들 옆에서 홀로 투덜거리며 자신의 ‘싫음’을 통해 타인의 ‘싫음’ 또한 이해하게 되는 세계를 경험한다. 좋은 것은 당연하게 제 것이라 누리는 동거인에게 꼬인 마음이 드는 자신을 들여다보며 좋은 것을 좋은 것이라 수긍하기까지의 내면의 갈등과 고통을 인정하기도 한다. 이처럼 작가는 무언가를 좋아한다는 건 그것대로 멋진 일이지만, 무언가를 미워한다는 것 또한 때로는 좋은 일이라고 말한다. 작가의 시선을 따라 ‘이유 없이 싫어하는 것들’을 톺다 보면 이 책을 추천한 오은 시인의 말처럼, “곡절 없이 좋아하는 것들을 몇 곱절 더 소중하게 만들어주는” 생경한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곧 있으면 닥쳐올 매서운 겨울바람에도 직진하는 용기가 느껴지는 책이다.-교보문고 자신의 찌질함(?)을 드러내는 글을 보며 저자의 용기를 본다. 만족스럽지 않은 환경 가운데서도 살아볼려고 하는 저자의 몸부림(?)에 박수를 보낸다. 이토록 많은 말이 오가는 세상에 말 한마디가 그토록 크게 사람을 흔들 수 있다는 걸 생각하면 놀라고야 만다. 누군가의 말 한마디에 버티고 또 흔들릴 만큼 나는 취약 했다. 그러나 누군가를 흔드는 게 무작정 나쁘다거나, 사주는 믿을 만하지 않다는 주장을 하려는 건 아니다. 나를 흔들던 말 또한 나를 이쪽으로 데려왔음을, 내가 무언가를 그 안에서 발견했다는 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그 밤 안도 속에서 깨달은 건 나를 격려해주는 이가 없어도, 심지어 누가 나를 흔들어놓고 수면 아래로 밀어 넣는다 해도, 나는 내가 원하는 걸 쉽사리 포기하지 못하는 사람이란 사실이었다. 그로 인해 생겨난 불안과 슬픔과 무력감, 또 그에 따른 오기와 반발심을 동력 삼으며, 나는 내 안에서 끝내 살아남은 무언가를 마주했다. 어쩌면 그(p. 25)것이 그리도 중요했기 때문에 내가 그렇게나 흔들렸다는 사실 또한. 그러므로 물음에 대한 답은 추가되고 갱신된다. 어쩌다 작가가 되었을까? 나는 끝내 작가가 되고 싶었다(p. 26). 오늘날에는 자신을 돌보는 법에 대한 정보가 넘쳐난다. 그런 정보의 과잉은 때론 상처도 불행도 없어야 한다는 강박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어떤 건 꼭 완두콩 한 알 만큼의 불편도 용인하지 않기 위해 고안된 듯 보이니까. 혹시 사람들은 자신에게 좋은 것만 주어야 한다는 강박을 갖고 있는 걸까? 그렇게 해야만 제대로 된 사회 구성원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그건 좀.. 부자연스럽지 않나? 그래도 그런 정보들을 일찌감치 알았다면, 그래서 내 부모가 조금 더 자신을 돌보았다면 그들에게도 내게도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럼 내 부모도 조금은 덜 힘들었을 텐데. 나도, 조금 덜 우는 사람이었거나 조금 더 마음 놓고 우는 사람으로 자랐을 텐데. 어쩌다 한 번 하는 우리의 외식도 지금보다는 더 편안할 텐데(p. 103). 뒤늦게나마 나는 내게 좋은 것을 주는 법을 배우고 또 연습한다. 가능한 선에서 질 좋은 걸 산다. 누가 뭘 해주면 사양하지 않고 받는다. 목돈을 모아 요가를 등록하고 되도록 병원을 제때 간다. 때론 근사한 데서 밥을 먹기도 한다. 부모로선 잘 모를 좋은 걸 누려도, 스스로를 이기적이라 느끼지 않으려 이를 악문다. 동거인이 놀리는 걸 보면 갈 길이 먼 것 같지만, 나는 나를 보살피는 훈련을 거듭한다. 그래야 부모를 포함해 그 누구라도, 나를 챙기느라 그 자신을 뒷전으로 두지 않을 수 있다. 그래야 나에게 최선을 다해준 사람들을, 원망하지 않고 끝까지 이해할 수 있다. 동거인의 캠핑을 따라가는 건 훈련의 일환이다. 캠핑을 가면 동거인이 거의 대부분의 일을 도맡아 해주기 때문이다. 그동안 나는 뻔뻔하게 앉아서 쉰다. 겨울에는 가끔 엄마의 개도 캠핑에 데리고 간다. 텐트 안에서 개는 한 뼘의 볕이 있는 자리에 자기 몸을 두기도 하고, 난로 앞 조금 더 따뜻한 곳에 자리를 잡고 웅크리기도 한다. 주어진 데서 기어이 제 몸만큼의 좋음을 찾아내는 것이다. '너는 바로 아는구나'(p. 104). 내가 오래 걸려 배운 걸 개는 그냥 해낸다. 기특하고 근사한 개 같으니. 몇 년 전가지만 해도 그런 광경, 자신이 괜찮아지는 위치를 미리 알아두고 스스로를 거기 놓는 존재 앞에서는 마음이 볼썽 사납게 흐트러지곤 했다. 그러나 이제는.... 웅크린 개를 빤히 바라본다. 걷는 법을 모르고도 걸었고 숨 쉬는 법을 모르고도 숨 쉬었다. 사랑 하는 법을 모르고도 사랑했고 사는 법을 모르고도 살았다. 나를 키워낸 내 부모처럼, 언제나 모르면 모르는 대로 해내는 것들이 있다. 하지만 배우면 배우는 대로 더 해내게 된다. 그걸 안 뒤로 나는 배우고 싶은 모든 걸 조금 더 오래 본다. 그럼 볕을 받아 털끝 하나하나가 빛나는 작은 개의 부드러운 몸이 조금씩 솟았다 가라앉길 반복하듯 감탄과 슬픔이 내 몸을 고요히 오르내린다. 어떤 자연스러움은 누군가에게 훈련의 영역에 있지. 그런 게 언제나 조금씩 나를 상하게 만든다고, 개를 쓰다듬으며 생각한다. 아무 불편도 모르는 얼굴, 그래야 한다고 주장하는 멸균된 얼굴은 역시 내 것이 아니다. 훈련 해봤자 조금 상한 얼굴을 더 자연스럽게 여기는 내 관점은 아무래도 끝내 바뀌지 않을 모양이다. 그래선지 어떨 땐 사람들의 얼굴이 다 조금씩 상한 것처럼 보이곤 한다(p. 105). 대중교통을 오가며 힐끗힐끗 사람들을 본다. 사람들이 상처 입거나 불행하지 않길 바라면서. 그러나 나는 어쩐지 그들 각자의 상처나 불행이 없어지길 곧장 바라지는 않는다. 거기서 오는 고통과 모순 같은 것들은 한 사람을 감싸는 오래된 맥락이므로. 나로선 그 안에 새겨진 것들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싶다. 그들의 완두콩들을 헤아려 보고 싶다. 그런 건 사람이 상처와 불행 속에서도 그럭저 럭 버티며 살아갈 수 있는 존재임을 알려준다. 다만 그 사실을 증명하겠다고 나를 몰아세우는 건 그만두었다. 스스로를 보살피는 게 죄가 아니라는 걸 개조차 그냥 안다. 나는 개처럼 살아서 숨쉰다. 개에게 배운 바, 그건 머무르는 자리에서 언제나 한 뼘의 볕을 찾아내야만 한다는 뜻이다(p. 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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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380】 여전히 흥미로운 주제, 죽음
대한민국이 OECD 자살률 1위라는 아픈 현실을 몇 년째 마주하고 있다. “죽으면 모든 게 끝날 거야”라는 절망 속에서 위태롭게 흔들리는 젊은이들에게, 우리 사회는 어떤 대답을 들려주어야 할까? 이 무거운 질문에 답하기 위해, 평생을 의학계에 몸담았고 ‘죽음학 전도사’라 불리는 서울대 의대 명예교수와 그의 아내가 함께 펜을 들었다. 바로 신간 『죽음, 삶의 끝에서 만나는 질문 』의 저자 정현채, 이현숙 부부의 이야기다-교보문고. 의사가 하는 죽음에 대한 이야기이다. (1) 근사체험 (2) 사후통신 (3) 삶의 종말체험 (4) 사망 시 물리적 현상 (4) 영매 (5) 어린아이들과 관련된 환생 연구이다. 나는 근사체험만 인정한다. 죽음은 이 땅에서의 마지막이기에 나이가 들수록 더 많은 관심을 갖고 책을 찾아 읽게 된다. 읽은 책들이 죽어갈 때 도움이 되기를 바라면서..... 정현채 서울대학교 의대 명예교수 1980년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동 대학 내과학(소화기학) 교수로 재직했고, 현재 서울대 의대 명예교수로 있다. 지금까지 240여 편의 의과학 논문을 SCI 국제학술지에 발표했으며 위염이나 위궤양 등을 유발하는 헬리코박터 파일로리 연구의 권위자로 대한소화기학회 이사장, 대한헬리코박터및상부위장관 연구학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저명한 의학 저널 『랜싯』을 포함해 전문 학술지에 게재된 죽음에 관한 과학적 연구 성과를 공부하면서 2007년부터 대중을 상대로 죽음학 강의를 시작했다. 중학생부터 80대까지 다양한 계층을 상대로 800여 회 넘게 강의를 해 '죽음학 전도사'라는 별명을 얻었다. 한국죽음학회 이사로서 '한국인의 웰다잉 가이드라인' 제정위원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죽음에 대해 생각할수록 비관적이 되거나 자살 충동이 커지는 게 아니냐고 우려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오히려 정반대예요. 제가 산증인이죠. 인간의 죽음 전후로 일어나는 영적인 현상에 대 해 알면 알수록, 왜 자살하면 안 되는지 그 이유를 이해하게 되고,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의 의미를 깨달아 더욱 밀도 있고 충만 하게 살아가게 되거든요. '내 목숨 내 마음대로 하겠다는데, 웬 참견이냐?'고 할지 모르지만, 실상을 알고 나면 그런 말을 하기가 어려워져요. 우리는 모두 서로 촘촘하게 연결되어 있고, 모르고 지나치는 존재들조차도 서로 영향을 주고받아요. 가족과 친구는 더 말할 나위 없죠. 우리는 모두 이번 생에서 다뤄야 할 저마다의 과제를 갖고 태어나는데, 자살을 한다는 건 그 과제를 너무 빨리 내팽개쳐버리는 거예요. 도망친다고 그 과제에서 벗어나게 될까요? 그렇지 않아요. 그 과제를 잘 다루게 될 때까지 형태만 바뀐 채 계속 마주 치게 돼요. 죽음은 소멸이 아니라 다른 차원으로 옮겨가는 것이니까요. 그런데 살면서도 그런 걸 경험하지 않나요? 해결하지 못 한 채 외면하거나 회피했던 문제가 사라지지 않고 어느 순간 눈 앞에 떡하니 버티고 서 있는 경험을요(p. 19). 자살은 남겨진 가족들과 친구들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안겨주고, 이 상처는 수십 년이 지나도록 잘 아물지 않아요. 한 사람이 자살하면 주위 사람 다섯 명 내지 열 명이 자살 충동을 갖게 된다고 해요. 우리나라에서는 하루 평균 마흔 명 가까이 자살한다고 하니, 매일 200명 내지 400명 넘는 사람들이 지인의 자살로 인해 부정적인 영향을 받게 되는 거죠. 죽음은 누구에게나 찾아와요. 서둘러 스스로 생을 마감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사고로, 질병으로, 노화로 언젠가 다 죽어요. 그러니 그 전까지는, 자신의 삶은 물론 사랑하는 사람들의 삶까지 송두리째 무너뜨리는 선택만은 하지 않아야 해요. 저는 4년 전 침윤성 방광암 진단을 받고, 방광 전체와 그 옆에 인접해 있는 전립선까지 제거하는 큰 수술을 받았어요. 소장 60센티미터를 잘라내고 만들어 넣은 인공방광에는 괄약근이 없어서 자율적인 배뇨 조절이 안 돼요. 일정한 간격으로 화장실에 가야 해서 밤잠도 세 시간씩 끊어서 자요. 그러나 이것 때문에 비관하지는 않아요. 30년 전만 해도 방광 절제 수술을 받고 나면 비닐 소변주머니를 밖에서 연결해 부착하고 지내야 했는데, 수술법이 향상되면서 삶의 질이 높아졌어요. 그것만으로도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요. 가만히 주변을 둘러보면 감사할 일이 참 많아요(p. 23). 자살하는 순간 후회하지만 자살을 시도했는데 살아난 사람들은 이후 신체적인 고통을 겪더라도 살아 있다는 사실만으로 감격스러워하며 살아간다고 해요. 그리고 대다수의 사람이 더 이상 자살을 시도하지 않았다고 해요. 2013년 EBS 「다큐프라임」 '33분마다 떠나는 사람들. 당신은 혼자가 아닙니다'에서는, 미국 샌프란시스코 골든게이트교(금문교)에서 투신했다가 극적으로 살아남은 2퍼센트의 사람들을 다뤘어요. 미국 플로리다대학의 토머스 조이너 교수가 그 사람들과 면담한 결과, 투신해서 수면에 떨어지기까지 4초밖에 안 되는 짧은 시간 동안 그들은 한결같이 자신이 한 행동을 후회했다고 해요. "뛰어내린 순간 나는 인생에서 해결할 수 없는 일은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방금 다리에서 뛰어내렸다는 사실 만 빼고"(p. 38). "뛰어내리고 처음 떠오른 생각은 '방금 무슨 짓을 한 거지?' 였다. 나는 죽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떨어진 곳이 강이였으니 그나마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질 수 있었던 것이고, 고층 빌딩이었다면 떨어지는 순간 후회한다고 해도 돌이키기 힘들죠. 경북 영주에 사는 한 중학생의 경우가 바로 그랬어요. 같은 반 학생들의 괴롭힘을 이기지 못해, 아파트 20층 계단 창문을 열고 뛰어내리려다가 갑자기 마음을 바꿔 창문틀을 붙잡고 도와달라고 요청했어요. 때마침 20층에 사는 주민이 이 소리를 듣고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하러 갔지만, 이 학생은 팔에 힘이 빠져 결국 추락했다고해요.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에요. 이처럼 자살을 시도하는 사람들의 마음 한편에는 살고 싶은 의지가 강하게 있는 것 같아요. 다음에 소개하는 사례에서도 확인할 수 있어요. 우울증을 앓고 있던 한 여성이 오피스텔에서 자살하려고 목을 맸는데,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이웃의 신고로 경찰이 출동했어요. 잠긴 문을 따고 들어가보니 이 여성은 이미 사망한 것처럼 보였어요. 호흡도 없고 얼굴이 잿빛으로 변해 있었죠. 그런데 출동한 경찰관 중 한 명이 혹시 모르니 응급조치를 해보자며 심폐소생술을 시작했고, 얼마 뒤 이 여성은 "컥!? 하는 소리와 함께 숨을 쉬며 살아났어요. 그리(p. 39)고 살아나서 한 말이, 경찰이 들어왔을 때 자신은 여전히 의식이 있었는데 다른 경찰관이 "시신에 손대지 말고 현장을 보존하자"고 했을 때 속상했다는 거였어요(p. 40). 죽는 것 외에는 거기서 벗어날 방법이 없다고 자꾸 생각하게 만드는 상황에 있다면, 가족이나 상담사에게 솔직하게 털어놓고 그곳에서 벗어나기 위한 현실적인 방법을 찾으세요. 익숙한 곳을 벗어나는 걸 겁내지 마세요. 죽는 길밖에 없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지금 그곳보다 더 나쁜 곳은 이 세상에 없으니까요. 하나의 문이 닫히면 다른 문이 열려요. 70년을 살아보니 정말 그렇더라구요(p. 42). 케네스 링과 친절 바이러스 근사체험 연구에서 케네스 링 교수를 빼놓을 수 없죠. 미국 코네티컷대학 심리학과 교수로서 30년 넘게 학생들에게 근사체험에 대해 가르쳤어요. 강의를 들은 학생들은 직접 체험하지 않았는데도 근사 체험자에게 일어나는 삶의 변화를 마찬가지로 겪었죠.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삶의 의미를 찾게 되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감소한 거예요. 케네스 링 교수는 근사체험을 '친절 바이러스Benign Virus'라고 불러요. 왜냐하면, 이를 알게 된 사람은 근사체험을 직접 하지 않았어도 마치 바이러스에 감염된 것처럼 체험자와 비슷한 긍정적인 영향을 받기 때문이에요. 그런 변화를 저나 주변 사람들한테서도 발견해요. 한 중견기업의 대표는 평소 까칠한 편이었다는데, 죽음학 강의를 들으며 펑펑 울고 난 뒤로는 직원들을 대하는 태도가 한결 부드러워지고 자상해졌다고 했어요(p. 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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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379】 만화가 주는 즐거움과 편안함
“<을지로 순환선>의 만화가 최호철과 만화평론가 박인하가 함께한 여행기『펜 끝 기행』. 같은 학교 교수로 만나 떠난 제주도 교직원 연수에서 결성된 두 만화쟁이 '펜 끝 듀오'의 여행은 이후 일본, 이탈리아, 스위스, 중국을 거쳐 다시 우리 땅 울릉도와 독도에서 마무리된다. 화가였다가 만화를 선택한 최호철과 글쟁이였다가 만화를 선택한 박인하. 만화에 붙들린 두 사람은 세계를 바라볼 때 만화적으로 본다. 최호철은 여행지마다 그림을 그렸고, 박인하는 최호철의 크로키 북을 보며 농담을 던졌다. 이 책은 그들이 그렇게 함께한 여행의 추억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만화를 좋아했다. 초등학교때부터 대학때까지 만화를 봤다. 지금은 잘 안 보지만 그래도 만화가 좋다. 앞으로도 기회가 되면 이런 책들을 찾아 읽을려고 한다. 일본다운, 너무나 일본다운 규슈 한 일 두 나라는 모두 벚꽃을 좋아하고, 벚꽃 구경 하기를 즐긴다. 그래서 봄이면 어김없이 벚꽃 축제가 벌어지는데, 가만 보면 두 나라 사람들은 각각 다른 벚꽃을 즐긴다. 우리나라에서 즐기는 벚꽃은 봉오리가 오르기 시작해 화려하게 피어오르는 상태이다. 그래서 벚꽃 축제를 구경하기 위해 일기 예보에 민감하다. 바람이 불거나 비가 와 꽃잎이 떨어지면 꽝이 되어버리기 때문. 반면, 일본 사람들은 화려하게 만개한 뒤 흩날리는 벚꽃을 즐긴다. 만개한 벚꽃이 바람에 떨어지는 모습을 좋아하는 것이다. 비슷하지만 다른 이웃. 결국 이런 미세한 차이가 모여 문화의 차이가 되고, 문화의 차이는 풍경의 차이를 만들어낸다. '일본 미학'이라는 말이 있다. 다양한 논의가 있고, 학자마다 여러 설명을 더하지만 이방인인 우리의 눈으로 볼 때 일본의 모습 자체가 그대로 일본 미학이다. 가을이 서서히 겨울로 넘어가던 날, 두 만화쟁이는 학생들과 함께 후쿠오카를 찾았다. 후쿠오카를 여행지로 결정한 것은 순전히 우리나라에서 가까웠기 때문. 특별히 우리를 끌어당기는 매력이나 꼭 가야 할 곳을 생 각해놓지 않은 상태에서 기대 없이 찾은 곳이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만난 활화산 아소 산. 그 웅장한 모습은 대단했다. 아소 산은 해발 1000미터가 넘는 다섯 개의 산봉우리를 통틀어 부르는 이름으로 정식 명칭은 아소고다케인데, 다섯 개의 분화구마다 사실 다른 이름, 다카다케(1592미터), 나카다케(1506미터), 에보시 다케(1337미터), 기지마다케(1326미터), 네코다케(1433미터)로 부른다. 버스로 전망대 인근까지 올라가 케이블카를 타면 쉴 새 없이 하얀 연기를 내뿜는 분화구를 볼 수 있다. 은근하게 풍겨나는 유황 냄새, 곳곳에 자리 잡은 대피소, 은근히 겁을 주는 가이드의 말이 어우러지(p. 243)면 현재 진행형 활화산의 다이내믹함을 느낄 수 있다. 멀리 피어오르는 활화산의 기운을 바라보니, 주군을 위해 목숨을 거는 사무라이, 흩날리는 벚꽃처럼 배를 가르는 영화의 장면이 떠올랐다. 아소 산을 뒤로하고 찾은 곳은 구마모토 성. 구마모토 성은 약 400년 전, 전국 시대의 무장 가토 기요마사가 구마모토를 통치하기 위해 축성한 성이다. 가토 기요마사라고 하면 낯설지만, 한자음 그대로 '가등청정'이라고 읽으면 익숙하다. 바로 임진왜란 때 조선을 침략했다가 깨진 바로 그 장군. 적의 공격에 대비한 120개의 우물과 조선 성의 장점을 차용한 축조술이 인상적이었지만, 그보다는 거대함 속에 정교하게 쌓아 올린 구마모토 성의 모습 그 자체가 일본, 사무라이를 느낄 수 있는 너무나 일본적인 풍경이었다. 그러나 사실 가장 일본적인 풍경은 활활 불타오르는 아소 산과 전국 시대 의 칼바람이 담겨 있는 구마모토 성이 아니라 그 살벌함과 함께 일상을 살았을 일본 사람들의 모습이었다. 지금도 언제 터질지 모르는 아소 산 자락 아래에서 평화롭게 농사를 짓고 소를 키우는 바로 그들의 모습이 가장 일본다운, 너무나 일본다운 모습이었다(p. 244). 이 책을 쓰고 그리게 된 계기에 대해 말하자면(p. 276) 최호철 선생과 나는 같은 직장(청강문화산업대학)에 다닌다. 둘 다 만화창작과 선생이다. 사람들을 만나 "학교에서 만화를 가르치고 있습니다"라고 말하면 꽤나 흥미로운 눈으로 바라본다. 마치 황제펭귄처럼. 낯설지는 않으나 내 주변에서 마주칠 때 경험하는 신기한 느낌이 드는 모양이다. 어쨌든 우리는 5월마다 찾아오는 불량 만화 화형식의 주홍글씨를 가슴에 새기지 않은 만화인들이다. 최호철 선생은 화가였다가 만화를 붙들었고, 나는 글쟁이였다가 만화를 붙들었다. 더 정확히 우리 둘은 모두 만화에 붙들린 사람들이다. 만화에 붙들린 사람들은 세계를 바라볼 때 만화적으로 본다. 일단 빈 종이가 있으면 무조건 그리고, 조금이라도 분위기가 추락하면 농담을 날리고 싶다. 전자가 최호철 선생. 후자가 나다. 하지만 둘 다 천성이 숫기가 많은 사람들은 아니다. 은근 부끄럼쟁이들. 그래서 낯선 이들하고 떠들고 노는 것보다, 친한 이들과 수다 떠는 것이 좋다. 그래서인지 청강문화산업대학 만화창작과 선생들은 보통 직장인들과 달리 사우나 아줌마 분위기를 풍긴다. 그 때문에 여행에 대한 기억이 꽤 많다. 최호철 선생은 여행지마다 그림을 그렸고, 난 최호철 선생의 화집을 뒤적이며 농담을 던진다. 그러던 어느 날. 학교에서 월간 무가지 〈백도씨〉를 기획할 때였다. "우리 여행 간 거 내가 글 쓰고, 선생님이 그림 그려보세요." "만화? 나 마감 잘 못하는 거 알잖아?" 일단, 방어막을 친다. 역시, 공력이 대단하다. "그냥 한 쪽짜리 그림을 그리자고요. 한 쪽짜리 만화, 그게 최호철 스타일이 잖아!" 나도 다시 공격한다. 왠지 느낌이 낚은 것 같다(p. 277). "한 페이지..." "한 페이지에 되도록 많은 이야기를 담는 게 최호철 스타일 아닌가?" 낚았다. 파닥파닥! 그렇게 해서 〈백도씨〉에 '두 만화쟁이의 여행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연재를 시작했다. 내가 낚은 죄로 글을 썼고, 최호철 선생의 애간장 다 태우는 마감에 동참했다. 몇 번 빼먹은 적도 있지만, 한 스무 번쯤 마감을 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났다. 우리가 한때 사슴굴이라고 불렀던 최호철 선생의 개성 넘치는 연구실 소파에 앉아 뒹굴면서 이야기를 하다 한번 책으로 묶어보자는 생각이 번득였다. 최호철 선생은 낙서라고 하지만, 그냥 묵히기 아까운 그림이 많은 그의 크로키 북이 생각났다. "〈백도씨〉에 연재한 만화하고, 그와 연관된 크로키를 모아서 책으로 묶어봅 시다." "재미있을까?" "재미없으면 사람들이 만날 선생님 크로키 북 달라고 해서 보겠어요." "너무 성의 없게 그렸잖아." "성의 있게 그리면 마감 못하잖아요." "..." "또 그냥 그 시간에, 여행지에서 그린 그림이 난 좋던데." "그럽시다." 그렇게 시작된 작업이다. 그림을 모으고, 글을 고쳐 썼다. 최대한 여행지의 느낌을 사람들이 느껴주길 원했다. 여행에는 휴식과 수다가 공존한다. 혼자 가는 여행을 좋아하는 이들도 있지만, 난 함께 수다 떨 수 있는 사람과 가는 여행이 좋다. 서로 말도 안 되는 지식을 공유하고, 느낌을 나누는 여(p. 278)행이 좋다. 이 만화는 그런 여행의 기록이다. 글과 함께 그림도 읽어주었으면 좋겠다. 최호철의 그림은 읽히는 그림이다. 그림으로 이야기를 하기 때문이다. 어느 순간, 크로키 북에 그린 사람이 아주 구체적인 당신의 모습이기도 하고, 당신이 바라본 그의 모습이기도 하다. 그림을 읽으며 우리의 여행에 동행하면 어떨까? 같이 수다 떨고, 맛있는 것도 먹고, 바보 같은 개그도 하면서 말이다. 남자들이라면 더더욱, 수다가 주는 세계 평화를 함께 누려보자(p. 2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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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378】 짐승보다 못한 인간의 잔혹함
〈무시무시한 처형대 세계사〉는 야욕과 애증, 배반과 음모로 뒤엉킨 잔혹한 처형의 역사를 들려주는 책이다. 「알고보면 무시무시한 그림동화」를 통해 그림 동화 신드롬을 일으킨 작가 기류 미사오가 이번에는 무시무시한 역사 속 처형의 현장으로 안내한다. 고대 로마 시대부터 근대 유럽까지 '인간'이라는 존재에 의해 자행된 처참하고 잔혹한 처형의 역사를 생생하게 복원하였다. 이 책은 역사 속 처형장을 통해 인간 내면세계에 깃들어 있는 광기의 역사를 살펴본다. 저자는 '인간은 과연 어디까지 잔인해질 수 있을까'라는 결코 가볍지 않은 물음을 던지면서, 다양한 이유 때문에 엄청난 피를 흘려 왔던 인류의 역사를 되짚어보고 있다. 그리고 황제들을 비롯한 수많은 권력자들과 신의 이름을 내건 종교인들이 역사 속에서 저지른 처형의 만행과 광기의 현장을 낱낱이 고발한다-교보문고. 흥미롭게 읽었는데 품절됐다. 이 저자의 책들이 재미있어 열심히 읽고 있는데 「알고보면 무시무시한 그림동화」도 대출했다. 이처럼 맹수를 이용한 처형 방법은 그리스도교가 보급되기 훨씬 전에 시작되어 5세기까지 계속되었다. 처음에는 죄수의 팔다리를 묶어 자유를 구속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죄수의 몸을 묶지 않고 자유로운 상태에서 간단한 무기도 사용하게 함으로써 관중들에게 더 큰 즐거움을 안겨 주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목숨을 잃기 전에 맹수를 한두 마리쯤 해치우는 강한 죄수도 나타났다. 어쨌든 죄수와 맹수의 싸움은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긴장감으로 관중들에게 꽤 인기를 끌었다. 좀 더 시간이 흐르면서 죄수의 처형은 일종의 연극으로 연출되었다. 예를 들면, 죄수를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프로메테우스로 분장시켜 쇠사슬로 바위에 묶은 다음 대머리 독수리에게 간을 쪼이게 한다거나, 헤라클레스로 분장한 죄수가 곤봉을 들고 나와 황소와 싸우다가 클라이맥스에서 황소가 죄수를 허공으로 던져 버리는 식이었다. 그리고 여자 죄수가 생겨나면서 연극 마지막 부분에 음탕함의 상징으로 알려져 있는 곰이나 당나귀의 습격을 받는다는 설정도 선보였다고 한다(p. 23). 콜로세움에서 펼쳐진 다양한 잔혹극 역대 황제들의 입장에서 볼 때, 검투사 경기는 범죄자나 반역자의 잔혹한 죽음을 선보이는 것으로써 황제의 권력을 뒤흔들려 하는 자는 결코 용서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서민들에게 확실히 보여 주는 기회이기도 했다. 로마 콜로세움 안에는 지금도 십자가가 서 있다. 일찍이 이곳에서 수많은 잔혹한 방법으로 목숨을 잃은 그리스도교도들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함이다. 그들은 타르에 적신 셔츠를 입은 채 콜로세움으로 끌려가 화형에 처해졌다. 또는, 팔다리가 묶인 채 커다란 솥 안에서 끓는 기름에 튀겨지거나 끓는 물에 삶아지기도 했다. 성 로렌스(Sento Rorense)는 석쇠 위에서 불에 구워졌고, 성 포류카르프는 화형대 기둥에 묶인 채 불에 타 죽었다. 성 폰시아노(Sento Pontianus)는 쓰러질 때까지 벌겋게 달구어진 석쇠 위를 걸어야 했고, 성 아르테 미오(Artemius)는 맷돌에 몸이 으깨져 죽었다. 손발이 잘려 나가거나 내 장이 몸 밖으로 드러난 채 매달린 자들도 있었다. 또, 살가죽이 벗겨진 채 유리 조각 위에서 끌려 다닌 자도 있었다. 콜로세움에서 남녀 수십 명이 한꺼번에 기둥에 묶여 처형된 적도 있는데, 그 광경이 마치 나무들이 줄지어 늘어선 숲처럼 보였다고도 한다. 관중들은 그 중에서 누가 가장 먼저 숨이 끊어질지를 놓고 내기를 하기도 했다(p. 24). 당연히, 역대 황제들도 콜로세움에서 펼쳐지는 잔혹한 피의 향연을 더할 나위 없는 즐거움으로 여겼다. 예를 들어 카이사르(Caesar)는 기원 전 65년 안찰관이었을 때 검투사들을 320쌍이나 동원해 성대한 검투사 경기를 개최했으며, 아우구스투스(Augusus) 황제도 검투사를 1 만 명 정도 동원해 검투사 경기를 여덟 차례, 맹수 3,500마리를 이용해 맹수 사냥을 스물여섯 차례나 개최했다. 클라우디우스 1세(Claudius I) 황제 시대에는 한 경기장에서 검투사 500쌍이 동시에 겨루는 일도 흔했다. 잔혹한 취미가 있었던 클라우디우스 1세는 목이 잘린 검투사의 얼굴을 자세히 볼 수 있도록 일부러 죽은 자의 투구를 벗기게 했다고 한다. 칼리굴라 황제 시대의 검투사 경기는 잔혹한 취미를 끝없이 만족시키기 위한 절호의 수단이었다. 맹수 사냥에서는 범죄자를 짐승의 먹이로 던져 주었고, 검투사 경기에 출전해야 한다는 선고를 받은 죄수가 필사적으로 자비를 호소하면 그 혀를 잡아 빼라고 명령한 다음에 온몸의 상처가 곪아 악취를 견딜 수 없을 때까지 채찍으로 때리게 했다. 그리스도교도 박해로 유명한 폭군 네로도 30일에 걸쳐 잇따라 경기를 열었다. 그는 맹수를 풀어놓아 어린이를 포함한 5,000명을 물어 죽이게 했다. 새로운 것을 좋아한 도미티아누스(Domitianus) 황제는 로마 제국 안에 존재하는 난쟁이들을 모조리 모아 검투사 집단을 만들게 했다. 그리고 미녀들로 이루어진 검투사 집단도 만들게 해서 경기장에서 난쟁이와 미녀를 싸우게 한 뒤 그것을 최고의 유흥으로 삼았다고 한다. 코모두스(p. 25)(Comedits) 황제에 이르러서는 아예 정치를 총애하는 신하에게 맡겨 버리고 검투사 경기에만 열중, 자기 자신도 검투사로 자주 경기에 출전했다. 그런 그가 음모를 품은 검투사 한 명에게 침실에서 암살당한 것은 운명의 장난이었을까?(p. 26). 사실은 이랬다. 불길이 번지는 상황에서 수상쩍은 남자 몇 명이 술에 취한 척 비틀거리면서 '어떤 자는 이쪽, 어떤 자는 저쪽' 하는 식으로 햇불을 이용해 불을 붙이는 모습이 목격되었던 것이다. 로마 시대의 전기 작가인 수에토니우스(Gaius Suetonius Tranquillus)에 따르면, 이 수상쩍은 무리가 네로의 노예들이었기 때문에 집정관도 제지할 수 없었다고 한다. 폭력의 피해자 어쨌든, '네로가 방화를 명령했다'라는 소문이 흘러나오면서 민중들 사이에서는 당장에라도 폭동이 일어날 듯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그러자 네로는 소문을 불식시키려고 방화범을 만들어 내기로 했다. 그리고 그 제물이 된 것이 바로 그리스도교도들이었다. 당시 그리스도교도들은 이단시되어 마법을 부리고 유아를 살해하고 인육을 먹는다는 식으로 중상모략을 당하고 있었다. 아무리 엄격한 금지 정책을 펴도 계속 증가하는 그리스도교도 때문에 고민하고 있던 터라 네로는 이번 화재를 구실로 그들을 철저하게 탄압하려고 마음먹었던 것이다. 먼저 신앙을 고백한 자들이 심문을 당했고, 이어서 그들의 고백을 토(p. 67)대로 수많은 사람들이 방화죄 혐의를 받았다. 순교자들 중에는 사도 바울로와 12사도인 베드로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들은 놀림감이 되었으며, 상상을 초월하는 잔혹한 방법으로 살해당했다. 어떤 이는 짐승의 가죽을 덮어쓴 채 개 떼에게 내던져져 물려 죽었고, 어떤 이는 원형 경기장에 맹수의 먹이로 던져지기도 했다. 또 어떤 이는 온몸에 타르가 발라진 상태에서 기둥에 묶여 날이 어두워진 뒤 등불 대신 불을 밝히게끔 했다. 네로는 처형 장면을 구경하라며 바티카누스 (vaticanus) 왕실 정원을 제공해 전차 경기까지 개최하면서 흥을 돋우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처럼 이단자들을 처형한다는 명분도 네로의 인기를 돌이킬 수는 없었다. 특히 귀족들이 불만을 품은 것은 노예에서 해방된 자들이 점차 제국의 요직을 독점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었다. 화재 뒤처리 등으로 인해 그 해의 국고는 막대한 재정 부담을 안게 되었고 그 결과 재산 몰수라는 극단적 상황에 의지할 수밖 에 없었다. 때문에 다시 막을 연 반역죄 재판의 판결은 모두 유형이나 사형이었다(p. 68). 14~17세기 유럽에서는 마녀로 여겨지는 사람들을 끊임없이 체포해 가혹한 고문을 한 뒤 화형에 처했다. 이러한 마녀 재판의 폭풍은 약 300년 동안 이어지면서 유럽 전역에서 맹위를 떨쳤다. 그 기간 동안 목숨을 잃은 사람들이 수십만에 이른다는 설도 있고, 수백만이라는 설도 있다. 정확한 수는 알 수 없지만, 마녀로 지목되어 화형을 당한 희생자에 대한 기록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 프랑스 로렌(Lorraine)에서 1576~1606년 동안 2000~3000명. 보르도에서 1577년에만 400명. • 독일 트리에르(Trier)에서 1587~1593년 동안 368명. 뷔르츠부르(p. 121)크에서 1623~1631년 사이에 900명. 밤베르크에서 1623~1633 년 사이에 600명. 이것만 보아도 마녀 재판의 희생자가 엄청난 숫자라는 사실을 짐작 할 수 있다. 유럽 전체에서는 15세기 말부터 18세기 초까지 약 30만 명(900만 명이라는 설도 있다)이 화형을 당했다는 기록이 있다(p. 122). 마녀를 불태우는 검은 연기가 유럽 하늘을 끊임없이 뒤덮고 있었던 것이다.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등골이 오싹해지는 이야기다. 당시, 불안감을 해소하는 돌파구로 선택된 것이 '마녀'였다. 사람들은 이 세상의 모든 불행과 해악을 마녀 탓으로 돌려 잔혹하게 처형했다. 마녀 사냥이 무서운 것은 증거 없이 소문과 풍문만으로도 마녀로 몰릴 수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마녀 재판이 성행했던 원인으로는 첫째, 당시의 사회 불안을 꼽을 수 있다. 당시, 유럽인들은 예전에는 겪지 못했던 혹독한 상황에 빠져 있었다. 유럽 인구의 30퍼센트 정도를 앗아간 페스트의 유행, 극단적인 인플레이션, 종교 개혁 운동 등, 격동의 상황에서 민중들의 불안감은 날이 갈수록 심화되고 있었다. 답답하기만 한 그런 현실의 불안감을 해소하는 창구로 선택된 것이 바로 '마녀'였다. 마녀는 마력을 써서 날씨를 나쁘게 만들고, 밭농사의 수학물을 줄이고, 태아를 유산시키고, 남자를 성불구로 만들고, 갓난아기를 잡아먹고, 악마에게 살아 있는 제물을 바친다..... 이런 식으로 세상의 모든 불행과 해악을 마녀 탓으로 돌렸다. 유럽에 휘몰아친 종교 개혁 운동에 대해 로마 교황은 수도회를 결성해 이단 탄압에 나섰다. 마녀 재판의 전신은 13세기 로마 교황 그레고리우스 9세가 탄생시켰다. 이른바 '이단 심문' 제도다. 이단 심문관은 교황의 보호 아래 사교나 관헌을 능가하는 권한을 가지고 오로지 그리스도교 국가 전역에서 이단을 박멸하는 사명을 맡았다(p. 123). 그리고 잔혹하기로 유명했던 요한 22세가 내린 1318년 2월 27일 교서에서 '마녀'의 비참한 운명이 결정되었다. 프랑스 고위 성직자 앞으로 보낸 이 교서에는 이러한 내용이 쓰여 있었다. '언제 어디서든 마녀 재판을 시작하고 지속하여 판결을 내릴 수 있는 완전한 권한을 부여한다.' 이 마녀 재판 해금 명령에 박차를 가하듯, 교황 요한 22세는 1323년, 1326년, 1327년, 1330년, 1331년에 계속 마녀 재판 강화 명령을 발표 했다. 이 강화 명령에 따라 이단 심문관의 마녀 사냥이 급격하게 기세를 떨치기 시작했다(p. 124). 마녀 재판 그 자체도, 심문, 자백의 공술(고문을 통한 자백도 포함해서), 단죄 선고, 그리고 처형(대부분이 화형)이라는 식으로 공식화되어 있었다. 중요한 것은 피고를 한시라도 빨리 죽여 그 재산을 몰수하는 것이었다. 마녀에게서 몰수한 재산은 모두 교회 소유가 되었고, 마녀 재판에 들어가는 비용 전부를 여기에서 조달했다. 간수의 식대, 처형 담당자의 술값, 교살을 할 때 들어가는 밧줄 대금, 화형을 할 때 쓰는 장작과 기름값 등, 모든 비용을 여기에서 인출해 썼던 것이다(p. 165). 기요틴에 광란하는 사람들 로베스피에르를 처형하는 것으로 공포 정치가 막을 내리자, 국내의 무거운 공기는 사라지고 단번에 향락적인 분위기가 퍼지게 되었다. 사람들은 다양한 장소에 모여 오직 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추었다. 피비린내 나는 과거를 잊고 희망 없는 미래에서 눈을 돌리기 위해. 거리 도처에서 무도회가 열렸는데, 특히 인기를 모았던 것은 회원이 한정되어 있는 '희생자들의 무도회'였다. 가까운 친척이 기요틴에 처형을 당한 사람들만 이 모임에 참가할 수 있었다. 이 무도회에 참가하려고 일부러 큰돈을 주고 근친자가 기요틴에 처형되었다는 증명서를 위조하는 사람들도 속출했다고 한다. 모임에서 여자들은 머리카락을 틀어 올리고 훤히 드러난 목 주위에 칼자국을 모방한 빨간 리본을 묶었다. 남자들도 머리카락을 짧게 깎고 마찬가지로 빨간 리본을 목에 둘렀다. 그 모습을 보고 사람들은 눈살을 찌푸렸지만 그들 입장에서 보면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현실을 받아들여 슬픔을 이겨내고 살아가려면 이런 식으로 불행을 패러디하는 수밖에 없었는지도 모른다(p. 298). 마지막 공개 처형 프랑스에서 기요틴을 이용한 처형은 오랜 세월 동안 일반에게 공개 되었다. 그때마다 형장에는 프랑스 각지의 수많은 구경꾼들이 모여들었다. 그들 입장에서 볼 때 처형은 최고의 스트레스 해소 방법이었다. 1889년의 파리 만국 박람회 때에는 기요틴에 처형을 당한 사람이, 당시에 신축된 에펠탑보다 더 화제가 되었다고 한다. 피와 잔혹함에 대한 인간의 열광은 그 뿌리가 무척 강한 듯싶다. 프랑스에서의 마지막 기요틴 공개 처형은 1939년 와이트만이라는 살 인범의 처형이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축제 소동이 벌어지자 정부는 두 번 다시 같은 일을 되풀이하지 않겠다고 결의했다고 한다. 처형 전날 밤, 형장이 될 베르사유 감옥 앞 광장에는 엄청난 군중들이 모여들었다. 기요틴 처형을 한 번이라도 직접 구경하려고 나무와 가로등에 매달린 사람들, 건물 창문에 바짝 얼굴을 들이대고 있는 사람... 사람들은 마치 축제라도 즐기는 듯한 기분으로 술잔을 기울이고 음악에 맞추어 노래를 부르거나 춤을 추면서 소란스럽게 전야제를 보냈다. 가끔씩 말 잘하는 사람이 농담을 던지면 사람들이 웃음을 터뜨렸는데, 그 소리가 감방 안에 있는 사형수의 귀에도 들렸다니 정말 잔혹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그러자 정부도 더 이상은 간과할 수 없어 그 뒤로는 기요틴 공개 처형을 금지했다. 이후의 처형은 각각의 감옥이 위치한 안마당에서 이루어(p. 300)졌으며, 처형에 참가할 수 있는 사람은 관료 아홉 명뿐이었다. 잔혹함의 상징인 기요틴 처형대는 감옥의 담장 안으로 모습을 감추었고, 두 번 다시 사람들에게 공개되지 않았다(p. 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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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383】 전 법관의 ‘왜 책을 읽어야 하는가?’
- 나의 일상을 풍요롭게 채우는 건 어떤 의미인가, 다른 사람의 삶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가, 사람과 사회는 바뀔 수 있는가. 자작나무에서 지리산으로, 도스토옙스키에서 몽테스키외로, 일상에서 재판까지. 호의는 사람을, 세상을 어떻게 바꾸는가. 받은 것을 사회에 되돌려주라던 김장하 선생과의 추억, 법을 몰라 손해 보는 이들을 헤아리는 마음, ‘자살’을 시도했던 재소자가 ‘살자’는 다짐을 하게 만든 선물, 사랑하는 이를 그리워하며 속절없이 흘리는 눈물, 그리고 건강한 법원과 사회를 향한 진심 어린 조언…교보문고 계엄을 도모했던 윤석열을 단죄한 문형배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이 쓴 책으로 가볍게 읽을만하다. 착한 사람을 위한 법 2001. 4. 22. 법 없이 살 사람 착한 사람을 일컬어 '법 없이 살 사람'이라고들 한다. 법의 강제 없이도 타인에게 폐를 끼치지 않을 사람이란 뜻이리라. 과연 착한 사람에게 법은 필요 없는 것일까? 법 없이 살 수 없는 사람 나는 법이 어떠하다고 정의할 만큼 경력도 풍부하지도 않고 타고난 재주도 없지만, 1983년 법학을 전공한 이래 지금까지 18년을 법과 함께 살아온 경험에 비추어 (그런 점에서 나는 법 없이 살 수 없는 사람이다) 착한 사람일수록 법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p. 19). 종종 초등학교 동창 모임에 나가곤 하는데, 거기서 늘 하는 말이 있다. "사건이 터지고 나서 나에게 힘써달라고 전화해봐야 아무 소용 없다. 사건이 터지기 전에 나에게 법을 물어보라." 도대체, 전 재산과 다름없는 300만 원을 전세금으로 걸면서 그 집이 경매 중인 사실도 확인하지 않고 계약하는 사람을 누가 구제해줄 수 있겠는가? 그런 사람들은 대개 사건이 터지고 난 뒤에야, 집주인을 사기죄로 고소했으니 수사 기관에 힘 좀 써서 집주인을 즉시 구속시켜 달라고 법조인에게 전화를 한다. 법에는 두 가지 기능이 있다. 하나는 보장적 기능이다. 일정한 행위를 금지하고 거기에 저촉되지 않으면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게 해주는 측면이다. 여기서 '법 없이 살 사람'이 빛을 발한다. 다른 하나는 보호적 기능이다. 그러나 법의 이러한 보호적 기능도 경매 절차에서 배당 요구를 하는 임차인이나 노동자에게만 위력을 발휘한다는 사실에 유의하여야 한다. 여기서 '법 없이 살 사람'은 초라하기만 하다. 착한 사람부터 법을 알자 판사로서 사건을 처리하다 보면 '착한 사람은 법을 모르(p. 20)고, 법을 아는 사람은 착하지 않은 경우'를 종종 본다. 그런 사건일수록 해결이 어렵고, 착한 사람을 보호하고자 궁리를 해보나 한계가 있게 마련이다. 착한 사람에게 적용되는 법 따로 있고 착하지 않은 사람에게 적용되는 법 따로 있을 수는 없으니까. 그렇다면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하여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법을 아는 사람에게 착하기를 요구할 것 인가? 불가능은 아니나 어려운 과정을 거쳐야 할 것이다. 남는 방법은 착한 사람이 법을 아는 것이다. 그 길만이 법이 나쁜 사람을 지켜주는 도구 역할을 하지 못하게 하는 지름길이다(p. 21). 형사 재판 잘 받는 방법들 중 2006. 12. 19. 진술 거부권 행사 자기에게 불이익한 사실에 대하여 진술을 거부하는 것은 헌법 및 형사 소송법에서 보장된 피고인 및 피의자의 권리입니다. 따라서 법정에서 판사로부터 불이익한 사항에 대하여 질문을 받을 때 진술을 거부하면 되겠습니다. 괘씸죄가 걱정된다면 기억이 나지 않는다거나 잘 모르겠다고 대답하면 되겠습니다. 이것이 모순되거나 불합리한 답변을 하는 것보다 유리합니다. 답변 방식 법정에서 판사의 질문에 대하여 답변을 할 때는 결론을(p. 45) 먼저 말하고 이유를 나중에 설명하는 것이 효과적인 경우가 많습니다. 판사는 질문을 통하여 사건의 윤곽을 파악 하려고 하므로, 판사에게 결론을 먼저 말함으로써 판사가 설명이 더 필요한 부분인가를 쉽게 판단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좋습니다. 판사는 여러 각도에서 사건을 살피기 위하여 다양한 질문을 하는 것이므로, 설령 질문이 자신에게 불리한 내용 일지라도, 판사가 상대방의 편을 든다고 섣불리 생각하지 말고 정중하게 답변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한 과정을 통하여 판사는 피고인의 진심을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p. 46). 민사 재판 잘 받는 법 2007. 5. 17. 오늘 재판을 하면서 느낀 점을 토대로 민사 재판 잘 받는 방법을 적어보았습니다. 변호사를 선임하는 것이 유리합니다 소송을 하려면 어려운 일이 많으므로 형편이 허락한다면 변호사를 선임하는 것이 좋습니다. 변호사를 선임하였다고 해서 변호사에게 모든 것을 맡길 것이 아니라 수시로 소송 진행 정도를 확인하고 대응 방안을 함께 의논하는 것이 중요합니다(p. 61). 준비 서면을 간단명료하게 작성하는 것이 좋습니다. 변호사를 선임하지 못할 경우 법무사의 도움을 받거나 본인이 직접 준비 서면을 작성해야 할 터인데, 이때 주의할 점은 다음과 같습니다. 준비 서면이라는 것은 당사자의 주장에 불과하므로 아무리 유리한 내용을 적어놓더라도 증거가 없으면 인정받기가 어려운 반면, 불리한 내용은 별도의 증거가 없더라도 본인에게 불리하게 작용합니다. 따라서 준비 서면은 간단하게 작성하는 것이 좋습니다. 증거가 뒷받침되는 내용일 경우 명료하게 주장을 펼치는 것이 좋습니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준비 서면에 상대방을 비난하는 내용을 적을 경우 이익이 없을 뿐만 아니라 때로는 해롭다는 것입니다. 재판이라는 것이 당사자의 도덕성에 대한 심판이 아니라는 점에서 그렇고, 뚜렷한 증거 없이 상대 방을 비난할 때 판사에게 좋은 인상을 주기 어렵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준비 서면에 똑같은 내용을 되풀이하여 적어내는 것도 피해야 합니다. 재판부는 많은 사건을 처리하고 있으므로 그들의 노고를 덜어주는 것도 좋은 인상을 심어주는 방법이 될 수 있습니다(p. 62). 소송의 승패는 증거에 달려 있습니다 민사 소송에서 이기고 지는 것은 증거가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따라서 흥분할 필요 없이 차분하게 증거를 수집하여 제출하는 사람이 이길 수밖에 없습니다. 증거로는 애초 사건이 있었을 때 작성된 서류, 특히 상대방이 서명 또는 날인한 서류가 가장 효력이 강하고, 그 다음으로 제3자가 작성한 서류가 효력이 강합니다. 증인의 증언은 상황에 따라 다릅니다. 법정에서는 결론부터 먼저 이야기하는 것이 좋습니다 아직도 법정에서는 많은 사건을 처리하는 실정이므로 법정에서 판사로부터 질문을 받았을 때는 결론을 먼저 이야기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다음에 그 이유를 간단하게 설명하는 것이 좋습니다. 조정 또는 화해를 권유받았을 때는 존중하는 것이 좋습니다 재판을 하다 보면 어느 당사자의 주장이, 설득력은 있으나 증거로 뒷받침 되지 않는 경우가 제법 있습니다. 법적 관점으로만 해결할 경우 어느 당사자에게 더 가혹하기도(p. 63)합니다. 이길 승산이 있어 보이나 시간과 비용이 상당히 많이 드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럴 때 법원은 당사자에게 조정 또는 화해를 권고하는 데, 긍정적으로 검토해보는 것이 좋습니다. 특히 조정 또는 화해 절차에서는 집행에 관한 내용을 반영할 수도 있으므로 이러한 점에서도 조정 또는 화해의 효용은 높습니다. 증인 신문을 할 때는 불쾌한 감정을 드러내기보다는 허점을 짚어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법정에 출석한 증인을 상대로 질문을 할 경우 "거짓말쟁이다" "양심도 없느냐"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아무런 도움이 안 됩니다. 차분하게 증언의 허점을 짚어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려면 상대방이 질문하는 내용을 (미리 받을 수 있습니다) 검토하여 허점을 정리했다가 법정에서 질문 하는 것이 좋습니다. 바람 턱없이 부족한 내용일 것입니다. 이것저것 물어보고 소송을 잘해서 이길 사람이 이기는 재판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p. 64). 문제가 터지고 나서 소송을 잘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 은 문제가 터지기 전 검토를 충분히 하는 것입니다. 몇 천 만 원이 오고가는 계약을 체결할 때 변호사나 법을 잘 아는 사람에게 비용을 들여서라도 상담을 받아보는 것이 길게 볼 때 비용이 더 적게 듭니다(p. 65). 책을 읽는 이유 세 가지 2010. 2. 16. 책을 많이 읽는 이유가 뭐냐는 질문을 받는다. 무지를 극복하기 위해서다 지방에서 고등학교를 다닐 때까지 고전을 읽은 적이 없었다. 서울에 있는 대학교에 들어가 보니 문화 충격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사투리는 말을 안 하는 것으로 감출 수 있었지만 무지는 감출 방법이 없었다. '장 발장'이 《레미제라블》의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그때부터 닥치는 대로 읽었다(p. 108). 무경험을 극복하기 위해서다 판사가 되고 보니 사건을 이해하기엔 내 경험이 너무 좁고 얕다는 생각이 자주 들었다. 도대체 계약서도 작성하지 않고 거액의 거래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잡히면 처벌받을 게 뻔한 일을 왜 되풀이하는지, 궁금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래서 경험을 늘리려고 해보니 이 또한 걸리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당장 법관 윤리가 문제였다. 그래서 생각해본 것이 두 가지다. 지금은 언론사 사장이 된 어떤 분이 사법연수생이었던 나에게, 법조인이 되면 초등학교 동창생과 꾸준히 만나라고 당부했던 기억이 떠올라 초등학교 동창생을 만나기로 결심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18년 동안 1년에 몇 회는 초등학교 동창생을 (때로는 부부 동반으로) 만났으니 어느 정도는 실천한 셈이다. 두 번째가 책을 읽는 것이었다. 장르를 구분하지 말고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읽어보자 하였던 결심이 여기까지 나를 데려왔다. 무소신을 극복하기 위해서다 어릴 때부터 내성적이었다. 남녀 공학 중학교 시절 소풍(p. 109)을 가서 선생님의 권유에 노래를 불렀는데 가사를 까먹어 끝을 맺지 못할 정도로. 그때 불렀던 노래가 남진의 〈님과 함께〉였다. 고등학교 때는 교복이 중고라서 반장을 하지 못했다. 대학교 가서는 사투리 때문에 남 앞에 나서지 못했다. 이런저런 이유로 무슨 결정을 하려면 무척 어려웠다. 결정을 하고 나면 곧 후회를 하게 되고. 어느 날, 내성적인 이유가 소신이 없기 때문은 아닐까 생각했다. 군대에서 정훈장교를 하게 되었고 정훈장교 하는 일이 장병 교육이다 보니 남 앞에 서는 것에 대한 두려움도 어느 정도 해소된 뒤라서 그런 결론을 더욱 쉽게 내릴 수 있었다. 앞서간 사람들의 생각을 알고 그들의 생각과 내 생각을 서로 맞추어보는 과정을 통해 생각이 단단해져 소신을 갖출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사회 비판적인 내용을 포함해 많은 책을 읽게 되었다. 사족 "그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려면 그 사람이 누구와 만나고 무슨 책을 읽는지 말해달라." 책에서 읽은 기억이 난다(p. 110). 혼돈의 시기에 그나마 생존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 친구와 책 덕분이라 생각하니 이 글을 쓰는 감회가 남다르다. 모든 분들에게 책을 한번 읽어보시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다(p. 111). 책을 고르는 기준 2010.6.26. 책을 어떻게 고르냐는 질문을 종종 받는다. 저자를 보고 고른다 어떤 책을 읽고 감동을 받으면 그 저자가 쓴 책은 눈에 띄는 대로 사서 읽는 버릇이 있다. 예를 들면 고 장영희 교수의 《내 생애 단 한 번》을 읽고 《축복》 《살아온 기적 살아 갈 기적》 《문학의 숲을 거닐다》를 읽는 식이다. 여기에 해당하는 저자는 다음과 같다. 신영복 교수, 정 민 교수, 유시민 전 장관, 소설가 김 훈, 오지 탐험가 한비야,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 《열하일기》 전문가 고미숙 박사(p. 124). 주제어를 보고 고른다 제목이나 문장을 검색하여 관심 있는 주제어가 들어간 책을 고른다. 요즘 즐겨 찾는 주제어는 다음과 같다. 정의, 소통, 성찰, 역사, 철학, 인생, 여행, 행복. 이런 기준으로 고른 책은 다음과 같다. 《정의란 무엇인가》 《서양철학사》 《인도 여행》 《행복의 정복》 《무지개 원리》 《인생이란 무엇인가》 등등. 책 선택에 실패한 적은? 이런 기준으로 책을 골라 읽으면서 후회할 때가 제법 있다. 그러나 산 책은 다 읽는다. 재미가 없거나 이해가 되지 않는 책에 대하여는 독후감을 쓰지 않음으로써 복수를 한다. 블로그에 올린 책은 이중으로 검증을 거쳤다고 보면 된다. 지금껏 읽은 책은, 세어보지는 않았지만, 1천 권 정도 될 것 같다. 책을 고르는 장소는? 인터넷 서점에서 검색하여 고르는 경우가 많고 가끔 서점에 가서 고른다. 베스트셀러 항목과 새로 나온 책 항목을 많이 참조한다(p. 125). 블로그에 독후감을 쓰는 이유는? 독후감을 쓰다 보면 책 내용을 정리하는 효과가 있고, 글쓰기 훈련이 되며, 블로그에 저장해놓으면 다른 글을 쓸 때 인용하기 쉽기 때문이다. 나쁜 사람은 있어도 나쁜 책은 없다. 어떤 책에서도 스승 또는 반면교사를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여러분께 독서를 권한다. 책이 여러분을 끌어올려줄 것이다(p. 126). 왕후박나무 2011.4.1 남해군법원 다녀오는 길에 경남 남해군 창선면 왕후박 나무를 만났습니다. 500년 이상 되었다고 합니다. 둘레에는 동백나무가 꽃을 피우고 있었습니다. 후박나무는 녹나무과에 속합니다. 주로 방풍용으로 많이 심는다고 합니다. 남해군 창선면에 있는 왕후박나무는 천연기념물 제299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왕후박나무는 높이 솟구치지 않고 옆으로 퍼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람 부는 바닷가에서도 500년을 버틴 게 아닐까 생각해봤습니다. 그렇다면 이 나무는 알고 있는 것 같습니다. 자신을 낮추는 것이 자신을 높이는 가장 쉬운 방법이라는 것을 말입니다(p. 140). 조영남의 노래가 있죠. 〈겸손은 힘들어〉. 그렇죠. 겸손은 힘듭니다. 공자 이래 2천 년 동안 성현들은 겸손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겸손한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적습니다(p. 141). 조정에 임하는 자세 2013.4.28. 조정이란 조정은 법률 분쟁이 생겼을 때 판사의 판결이 아니라 당사자 간 타협을 통하여 분쟁을 해결하는 절차를 말한다. 실제로 미국에서는 법원에 접수된 사건 중 판결까지 가는 사건은 10퍼센트가 되지 않고 대개는 조정을 포함한 여러 가지 간이한 방법을 통하여 사건을 처리한다고 한다. 어떤 의미에서 조정은 이길 사람에게 양보를 요구하는 것이니 불합리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길 사람이라는 건 미리 정해진 것은 아니고 재판 절차를 통하여 증거를 대고 법리를 세워야 하고 그것으로 판사를 설득해야 하며 최종적으로 대법원까지 가봐야 아는 것이다(p. 188). 그리고 1천만 원을 받기 위하여 소송 비용으로 500만 원을 들여야 한다면, 700만 원을 받고 소송 비용을 100만 원 선에서 지출하는 것이 합리적일 수도 있다. 사건에 관하여 가장 절실한 이해관계자는 판사도 아니 고, 변호사도 아니며, 결국 당사자다. 사건을 주도적으로 해결해야 할 사람도 당사자일 수밖에 없으므로, 당사자의 주도권이 가장 잘 보장되는 조정 절차가 불합리하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조정에 임하는 자세 양보해야 한다. 조정은 당사자 간의 타협을 통하여 분쟁을 해결하는 것이고 대체로 당사자는 서로 이해관계가 상반되므로 양보를 해야 조정이 성공한다. 본인이 참석해야 한다. 변호사에게 소송을 위임한 경우라도 조정 절차에는 본인이 참석하는 것이 좋다. 판사의 설명을 들을 수 있고, 상대방의 입장을 직접 들을 수 있으며, 최종 결정을 내려야 하기 때문이다. 상생하는 방법도 있다. 본인에게 크게 불리하지 않으면서 상대방을 크게 배려하는 방법도 있다. 상대방이 특히 중요하게 생각하는 쟁점에 관하여 양보하더라도 본인에(p. 189)게 크게 불리하지 않은 경우도 있으므로, 상생하는 방법을 찾아본다. 집행 문제도 고려해야 한다. 소송을 하는 종국적 목적은 대체로 승소 판결을 받기 위함이 아니라 돈을 받아내기 위함이다. 법원에서 승소 판결을 받더라도 집행 절차에서 돈을 받아내는 비율은 생각보다 낮다. 조정 절차에서는 돈을 받아내는 방법도 협상 테이블에 올릴 수 있으므로 유리하다. 원고는 5천만 원을 고수하고 피고는 3천만 원을 고집할 경우 4천만 원 선에서 타협하는 것도 한 방법이지만 때로는 5천만 원으로 정하되 3개월 내에 3천만 원을 가져오면 나머지 2천만 원을 포기하는 방법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싸우는 것은 금물. 간혹 조정실에서 상대방과 말이나 몸으로 싸우는 사람이 있다. 사연이 있겠지만 판사 입장에서는 어리석은 행동이다. 자신의 문제를 효과적으로 풀 수 있는 자리를 어렵게 마련했는데 불만을 터트리는 자리로 만들어버리는 것은 불합리한 처사다. 그 사건이 해결 되지 않을 경우 가장 손해를 보는 사람은 판사도 아니요 변호사도 아니요 바로 당사자이기 때문이다. 판사의 설명에 귀 기울인다. 법원이 조정 절차를 주도하(p. 190)는 경우 판사로부터 사건 전반에 관한 설명을 듣게 된다. 판사는 내가 불리한 점, 내가 유리한 점을 나누어 설명할 것이다. 잘 들으면 판사가 생각하는 바를 엿볼 수 있다. 특히 2심이라면 사건 처리 방향이 대부분 결정되었다고 보면 된다. 민사 사건의 경우 대법원에 상고를 해서 2심 판결이 깨지는 비율이 10퍼센트가 안 된다는 점, 사실 인정은 원칙적으로 2심에서 하게 되어 있는 점을 고려할 때, 2심 재판부의 결론은 존중해야 한다. 그 바탕 위에서 내 입장을 최대한 반영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를 고민하는 것이 좋다. 마무리(롯데자이언츠의 마무리는?) 집안에 송사가 있으면 마음이 불편하다. 적당한 선에서 털고 나오는 것도 마음의 평화를 찾는 좋은 방법이다. '조금 손해 본 것은 다른 일을 해서 보충하면 된다.' 이런 생각으로 조정에 임할 수는 없을까요?(p. 191). 재판 속의 문학 내가 현실에서 맡은 재판은 그렇게 감동적이지 않았다(p. 304).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문학이 재판에서 많은 것을 차용하지만 재판은 문학에서 차용하지 않고 순수함을 고수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본 적이 있다. 판사는 많은 경험을 해야 하지만 여러 사정으로 제한적인 경험을 할 수밖에 없다. 문학이 그 대안이 될 수 있다. 문학은 보편적 진실을 추구하는 것이고, 재판은 구체적 진실을 추구하는 것이며, 양자는 서로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판사들이 다 가난했던 경험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김훈의 《흑산》을 읽고 나면 가난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가령, 배고픔을 면하자면 오직 먹어야 하는데 많은 끼니 중에서도 지금 당장 먹는 밥만이 배를 채운다는 내용이 그렇다. "아침에 먹은 밥이 저녁의 허기를 달래줄 수 없으며, 오늘 먹는 밥이 내일의 요기가 될 수 없음은 사농공상과 금수축생이 다 마찬가지다." 내가 10년 전 처리한 사건 중 20대 청년이 공무집행 방해죄로 구속 기소된 사건이 있었다. 생모라고 밝힌 사람이 탄원서를 보냈다. 오래전에 헤어진 아들이 재판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며 자신이 책임지고 선도를 할 테니 선처를 바란다는 내용이었다(p. 305). 재판을 하며 방청객을 둘러보니 유난히 눈에 띄는 분이 있었다. 피고인석 옆에 앉아 대화를 하게 하였더니 피고인을 껴안으면서 "이제 괜찮아, 엄마가 있잖아"라고 말했다. 피고인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생모와 시선도 마주치지 못하였다. 생모를 만났으니 이제 마음을 잡지 않겠는가 생각하고 집행 유예 판결을 선고했고, 피고인에게 책을 선물하면서 그 책 한 쪽을 읽어주었다. 알프레드 디 수자의 시 〈사랑하라.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이다. 내가 10년 전에 처리한 사건 중에 피고인이 자살을 하려고 여관에 불을 질러 기소된 사건이 있었다. 다행히 불은 크게 번지지는 않았고 다친 사람도 없었다. 선고하는 당일 피고인에게 자살을 열 번 외치게 하였다. "자살자살자살자살.... 이렇게 열 번 하면 본인은 '자살' 이라고 말하지만 듣는 사람에게는 '살자'로 들립니다. 생각하기 나름입니다. 실패라고 다 나쁜 것은 아닙니다. 자살에 실패해서 살았지 않았습니까?" 그러고서 피고인에게 《살아 있는 동안 해야 할 49가지》란 책을 선물했다. 나는 이런 재판을 하게 된 배경 중 8할이 문학 덕분이라고 생각한다(p. 306).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는 이렇게 시작한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모습이 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모두 제 각각의 불행을 안고 있다." 어쩌면 좋은 문학과 좋은 재판은 그 모습이 모두 비슷할지 모른다. 철저한 조사를 바탕으로, 공동체의 보편적 가치를 질문할 때, 주제와 이야기가 딱 들어맞을 때 독자들은 감동한다. 판사들이여! 《유토피아》를 쓴 토마스 모어가 영국의 대법관이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작가들이여! 긴장하시라. 대한민국의 판사도 또 다른 '유토피아'를 쓸지 누가 알겠는가?(p. 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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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 책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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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383】 전 법관의 ‘왜 책을 읽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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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382】 죽음을 늘 준비하며 살자
- KBS 《아침마당》, 《강연100℃》 등에 출연해 전국의 시청자들에게 위로와 공감, 희망의 메시지를 전해준 호스피스 의사 김여환의 에세이 《내일은 못 볼지도 몰라요》. 극심한 암성 통증으로 고통 받는 환자들과 함께 지내면서 누구보다도 안타까운 마음으로 임종 선언을 했던 저자 김여환. 숨기려야 숨길 수 없는 삶의 마지막 순간을 꼼꼼히 기록한 이 책은, 삶이 완성되는 마지막 순간을 위해 더없이 소중한 오늘을 ‘있는 힘껏’ 아름답고 행복하게 살아내야 한다는 인생의 진리를 전하고 있다-교보문고. 이 책은 호스피스 의사가 수많은 죽음을 보고 삶과 죽음에 대해 느낀 것을 쓴 것이다. 많이 유익했는데 현재 절판됐다. 사람의 일생 중 가장 힘든 시기는 보증을 잘못서서 거액의 부도를 냈을 때나 남편이 바람을 펴서 이혼할까 말까 망설일 때가 아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인생의 반전 같은 일말의 빛조차 기대할 수 없는 시간들, 즉 죽음을 맞이하기 직전까지의 '짧은 삶'이다. 그 시기를 잘 보내야만 지금까지 살아온 세월을 온전한 나의 인생으로 만들 수 있다. 그래야만 남겨진 사람들의 인생도 편안해질 수 있다(p. 8). 그렇다. 나는 이 세상에 남들보다 조금 먼저 작별 인사를 건넨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이토록 자명한 삶의 진리를 힘겹게 깨달았다. 만약 우리에게 내일이 오지 않을 것임을 안다면, 오늘 우리의 삶은 결코 평범하지 않을 것이다. 또한 만약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과 내일 다시 못 볼지도 모른다는 것을 안다면, 한 번 더 사랑한다 말하고, 한 번 더 안아주어야 하며, 오늘 깃든 행복을 있는 힘을 다해 누려야 한다. 이렇게 수많은 '오늘의 삶'이 모일 때 삶의 아름다운 결과물은 비로소 완성 된다. 그러므로 "내일은 못 볼지도 몰라요."라는 말에 숨어 있는 참된 의미는 오지도 않은 내일에 대한 불안과 분노, 두려움과 슬픔에 오늘의 행복을 양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오늘 더 사랑하고, 오늘 더 행복해야만 한다(p. 10). "2012년 8월 21일 12시 42분, 신복연 할머니는 사망하셨습니다." 나는 할머니가 더 이상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니란 사실을 말했다. 그리고 통증 없이 편안히 좋은 곳으로 떠나셨다는 위로의 말도 빼놓지 않았다. 짤막한 사망 선언 뒤에는 언제나 그 마지막 순간을 지키고 있던 가족의 대성통곡으로 이어진다. 그런데 오늘은 조용했다(p. 22). 할머니의 둘째 딸이 낮은 목소리로 차분하게 말을 꺼냈다. "우리 엄마가 평소에 유언을 했어요. 내가 떠나면, 울지 말라고. 자식들이 우는 소리가 들리면 뒤 돌아보느라 떠나는 것이 힘드니, 울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어요." "아...하여간 대단하세요. 입원 내내 웃지 않으신 날이 없었는데, 그런 아름다운 유언까지 하신 줄은 몰랐어요. 제가 들어본 유언 중에 가장 훌륭한 유언인 것 같아요." "과장님, 그렇죠! 우리 엄마가 암에 걸렸다고 하니까, 동네 사람들이 이제 꽃 한 송이가 지는구나, 했다니까요." 곱게 아껴두었던 꽃분홍색 한복으로 갈아입고, 흰 양말까지 정갈하게 신은 신복연 할머니의 마지막 모습은 살아 있는 그 누구보다도 따뜻해 보였다(p. 23). 짧은 글 한 편을 쓸 때에도 마지막에 무슨 말을 쓸까를 생각하면서 쓰면 글의 흐름이 매끄러워지듯이, 인생도 자신의 마지막 순간을 생각하고 살다 보면 들쭉날쭉한 인생이 일관성 있게 변한다. 타인과의 소통도 중요하지만 그전에 자기 자신과 먼저 소통해야 한다. 자신의 마지막 순간과 소통하면 인생의 해답을 얻을 수 있다(p. 25). 자신과 만나려면 가장 낮은 곳으로 가야 한다. 그러므로 임종실은 부끄럽지만 가장 볼품없고 꾸밈없는 자신의 민낯이 있는 곳이었다. 그래서 나는 자신 있게 말한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만남은 바로 '나의 마지막'이라고(p. 26). "호호호, 난 아직 여기 입원할 단계는 아닌 걸요." "아직은 마약성 진통제를 쓸 만큼 아프지는 않아요." "며칠 전에도 산에 다녀올 만큼 괜찮았어요." 이렇게 말하면서 멀쩡하게 걸어 들어오는 말기 암 환자가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까? 나는 겉으로 보기에는 건강해 보이는 말기 암 환자들이 한두 달 뒤에는 누런 황달이 오거나 폐렴이 와서 황망히 떠나버린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남겨진 시간에 대해 불안해하거나 초조해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고 있는 그 짧은 시간에 환자에게 해 줄 수 있는 일에 집중한다. 칠순 잔치를 하든지, 마지막 콘서트를 하든지, 이혼한 뒤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아들을 찾아주는 일들 말이다. 그래도 나도 한 번쯤은 환자를 살려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모두가 죽는다고 포기했던 말기 암 환자가 완치되는 일이 우리 병동에서 일어나기를 기대했다. 환자들은 입원해서 퇴원(p. 45) 할 때까지 평균 27일을 살았다. 호스피스 경험이 쌓이면 쌓일수록 역시 기적이란 부질없는 비현실적인 희망이라는 것을 확신 하게 됐다. 일어날 수 없는 일을 가슴 저리게 갈구하기도 하고 신에게 떼를 쓰며 의지하기도 하는 것이 오히려 인간적이겠지만, 우리에게 남아 있는 시간이 별로 없다는 것이 훤히 보이는 나로서는 그렇게만 하다가 환자를 보낼 수는 없었다. 그런 애절한 생각을 할 시간이 있으면 조금밖에 남지 않은 삶에 집중해야 한다는 것이 오랜 경험을 통해 내린 슬픈 결론이었다. 사람이 좀 민민하고 삭막하게는 되었지만 현실적으로는 이것이 옳았다(p. 46). 말기 암 환자가 되면 환자와 가족은 육체와 정신적으로 이제까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상황과 맞닥뜨린다. 푸시시한 구차한 모습으로 마지막을 보낼 때쯤이면 원치 않았던 현재 시간이 살다 남은 찌꺼기 삶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약한 정신 때문이 아니라 몸이 약해지기 때문에 마음까지 통째로 흔들린다. 심지어 어떤 환자는 "잠자듯이 가는 그런 약 있잖아."라고 노골적으로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모든 말기 암 환자가 안락사를 원하는 것은 아니었다(p. 56). 비참한 마지막은 말기 암에 걸린 몸이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살다 남은 삶이라고 쓰러져버리는 마음이 만드는 것이다. 떠날 사람은 남아 있을 이를 위해 조금 남은 삶을 성실히 살아가고, 남아 있을 사람은 떠날 이가 세상에서 사랑받다가 가는구나 하는 느낌이 들도록 노력하면 서로 덜 힘들다. 처음과 마지막까지, 모두가 촘촘히 내 인생이기 때문이다(p. 58). 세상은 가벼움과 무거움이 서로 경계를 불분명하게 가른 채 섞여 있다. 어떤 부분은 내가 그보다 가볍고, 어떤 부분은 내가 그보다 무겁다. 그렇게 어우러져서 세상은 좀 더 좋게 변한다. 그러나 '죽음이 다가오는 것'과 같은 결정적인 순간이 다가오면 사람들은 가벼움과 무거움의 경계선을 남김없이 드러낸다. 고함을 지르고 입원실 바닥에 소변을 보는 한 할아버지 때문에 사흘 밤낮 동안 시달린 환자들이 하소연을 했다. 할아버지를 간병하던 할머니는 "환자가 병원에 자러 왔나요?"라며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그러면서 진정제도 못쓰게 하고 1인실로 가지도 않았다. 그런가 하면 뇌종양에 걸린 12살짜리 소녀는 과자를 들고 병실을 누비며 "아저씨, 빨리 나으세요."라고 하면서 환자들에게 나눠주었다. 한 신문 기자가 말기 폐암 환자에게 물었다(p. 67). "인생의 선배로서 우리에게 해주실 말씀이 없으신지요!" 후덕하게 생긴 환자는 가지고 있던 옷가지며 살림살이를 싹 정리할 정도로 죽음을 잘 받아들었다. 하지만 그는 기자의 질문에 대해 쓸쓸하게 대답했다. "저는....그런 것은 선배가 되고 싶진 않은데요." 그렇다. 죽음이란 일평생을 별 탈 없이 살다가 90살이 되어 마음 독하게 먹고 미리 준비해도 어려운 것이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맞닥뜨리는 죽음은 아무리 노력해도 익숙해지지 않는 법이다. 죽어가는 사람을 많이 돌본 의사로서 한 가지 분명히 말하고 싶은 것은, 어쩔 수 없이 먼저 떠나야 하는 사람들이 남은 사람들 걱정을 많이 했다는 것이다. 나 때문에 끼니를 거를까 봐, 나를 잃은 슬픔으로 행여 병이라도 생길까 봐, 경제적으로 힘들까 봐 등등.... 그들은 사소한 걱정을 몰래 했다. 남은 사람들은 그 마음을 알까? 임종실은 섞일 수 없는 삶과 죽음이 뒤엉켜 있고, 살아남은 이들이 비통함에 눈물을 흘리는 작은 방이다. 그러나 그곳을 거(p. 68)쳐 간 사람들은 한결같이 말한다. 존재란 그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죽어서도 사랑하는 이의 마음속에 영원히 살아 있는 것이라고(p. 69). 예전에 나는 보기조차 딱할 만큼 남을 부러워했다. 뚱뚱할 때는 날씬한 사람을, 늦게 시작한 의사 생활이 비참하다고 느껴질 때는 처음부터 순탄하게 직장 생활을 하는 동료를 얄밉도록 부러워했다. 누군가는 잘된 사람을 부러워하면서 인생의 꿈도 생기고 삶을 개척할 의지도 생긴다고 하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그 부러움이 오늘날의 나를 있게 한 계기는 되었을지라도 그 과정은 결코 행복하지 못했다. 이제 내가 진실로 부러워하는 사람은 돈이 많거나, 아이들이 좋은 대학에 입학했거나, 예쁘고 날씬하고 건강한 사람이 아니다. 그저 어떤 삶이 자신에게 다(p. 92)가오더라도 묵묵히 잘 받아들이고,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지 않으며, 자신의 삶을 그 자체로 당당하게 살아내는 사람이다. 우리는 저마다 지닌 인생의 향기가 따로 있다. 그러니까 이제는 그 누구도 부러워하지 말자. 인생의 마지막에는 행복했던 자신의 과거조차도 부러워하지 말아야 한다. 그 시간에는 그 시간에만 누릴 수 있는 나만의 행복이 따로 있는 것이다. 이렇게 마지막이 온 것도 견딜 수 없을 만큼 아쉬운데, 여러 가지 잣대로 부러워하면 병들어 있는 자신이 너무 불쌍하지 않은가. 부러워하지 말자, 그대여! 인생이 아파도 마지막까지 이 세상을 그 누구보다 당당하게 살아내야 한다(p. 93). 불행히도 호스피스에는 죽음을 편안하게 수용할 수 있는 묘약 따위는 없다. 그래도 사람들은 안고 갈 수밖에 없는 속사정을 들어주면 조금은 가벼워졌고, 끝까지 끈을 놓지 않고 가는(p. 108) 사람이 생각보다 많다는 평범한 사실에 평안을 찾아갔다. 대식 씨의 어머니처럼 때로는 버리는 것보다 안고 가는 것이 더 홀가분한 인생도 있다. 그러니까 결국 안고 가는 사람, 버리고 가는 사람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닌 셈이다(p. 109). 잘 죽어가기 위해 우리가 정말 배웠어야 할 것은 죽음의 5단계를 외우거나 혼자서 관 속에 들어가 보는 체험을 하는 것이(p. 112) 아니다. "저는요, 이미 죽음을 다 받아들였어요."라고 말하면서 의젓하게 지내다가 진짜 마지막이 다가오면 불안에 떠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죽음은 삶의 완성이라기보다는 결과물이다. 삶이란 누구에게나 신산스럽고, 일상은 상처와 갈등의 연속이다. 나에게 주어진 삶을 얼마만큼 잘 녹여내느냐에 따라서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있을 마지막 날은 달라진다(p. 113). 어쩌면 인생은 쓰고 싶은 대로가 아니라 저절로 쓰이는 소설책인지도 모른다. 때로는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지만 어떻게든 끝까지 살아내야 한다. 죽을 만큼 괴로워도 직접 해봐야 삶에 대한 사랑이 깊어진다. 사람들은 인생이 힘들어지면 앞으로 남은 여정이 얼마나 끔찍해질지 더 두려워한다. 남은 인생이 지금보다 더 불편해지더라도 초조해하거나 원통해하지 말자.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그대의 삶이 다른 누군가의 목숨을 구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으면 좋겠다. 자살이라는 '고의로 스스로를 죽이는 행위'를 생각할 만큼 견딜 수 없이 힘들다면 적극적으로 주변에 도움을 요청해야 한다. 아무 상관도 능력도 없는 사람에게조차 알려야 한다. 마음의 피눈물은 말하지 않으면 보이지 않고, 드러나지 않는 상처는 치유될 수 없다. 애써 고통을 삼키지 말자. 누구라도 도와줄 사(p. 120)람을 찾아다녀라. 자존심 따위 내세울 때가 아니다(p. 121). 치통이 아무리 심해도 한꺼번에 진통제를 다섯 알씩 먹지는 않는다. 통증을 잡으려다 사람을 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약국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타이레놀도 하루에 여섯 알을 초과하면 진통의 효과는 증가하지 않고 간에 부담만 준다. 이렇게 일반 진통제는 일반적으로 정해져 있는 용량을 초과하면 통증에 대한 효과보다는 약물에 대한 부작용이 심해지기 때문에 쓸 수 있는 용량의 한계가 있다. 이것을 약의 천장 효과(ceiling effect)라고 한다. 그런데 이런 천장 효과가 없는 약이 있다. 호스피스 병동에서 많이 쓰이는 마약성 진통제이다. 그것은 일반 진통제와 달리 많이 쓰면 쓸수록 통증이 잘 조절된다. 더군다나 날록손 (naloxone)이라는 해독제까지 있으니 '모르핀'이야말로 신이 세상을 떠날 때만은 아프지 말라고 인간에게 특별히 내려준 '마지막 선물'이다. 사망 원인 1위인 암은 사람이 떠날 무렵에 부쩍 커진다. 암(p. 129)덩어리가 커지면 정상 조직을 파괴하는 묵직한 암성 통증도 당연히 심해진다. 그래서 사람들은 너무 일찍부터 진통제를 쓰기 시작하면 통증이 가장 극심한 마지막 순간에는 정작 쓸 수 있는 약이 없을까 봐 전전긍긍한다. 모르핀을 최후의 약으로 넘겨 두었으면 하고 부탁까지 한다. 그러나 통증에 관한 한 모르핀은 쓰면 쓸수록 효과가 있는 약이다. 이러한 마약성 진통제의 비밀을 알려주면 누구나 "진짜 그런 약이 있나요?" 하고 물으며 신기해한다. 환자나 보호자는 어차피 살릴 수 없다면 고통 없이 떠날 수 있다는 확신만으로 가느다란 희망을 갖는다. 모르핀은 우리를 죽음의 공포보다 더 끔찍한 암성 통증에서 해방시켜주는 이로운 약제이다. 우리는 지금보다 좀 더 정확하게 모르핀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 아직도 말기 암 환자임에도 불구하고 환자, 보호자, 의료진의 모르핀에 대한 오해와 두려움으로 마약성 진통제를 거부하면서 의미 없는 통증에 시달리다가 마지막 순간을 맞이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나는 인생의 마지막 의사로서 당부한다. 언젠가 당신에게 그때가 오면 신이 내린 선물, 모르핀을 거절(p. 130)하지 말고 받아들이라고. 통증이 없으면 죽음의 맨 얼굴을 똑바로 응시할 수 있고, 고통 없는 죽음은 결코 폭력적이지 않을 것이다(p. 131). 내일 도사리고 있는 재앙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살아감 속에 죽어감의 흔적을 묻히는 것이다. 내일이라는 것이 그 누구에게도 완벽하게 보장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알면, 오늘 그대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무심코 거칠게 한 말이 마지막일 수도 있다는 것을 절대로 잊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오지도 않을 비겁한 내일을 위해 오늘의 행복을 너무 많이는 양보하지 말자(p. 163). 말기 암 환자가 되면 환자와 가족은 육체와 정신적으로 이제까지는 경험하지 못한 일을 경험하게 된다. 가족 간의 갈등이 있었다면, 분명히 그 갈등은 확대된다. 문제의 중심은 늘 '사랑과 돈'이다. 거기에 종교적인 문제가 곁들여지면 사태는 더욱 심각해진다(p. 174). 살다 보면 마음 내키지 않는 일을 해야 할 때가 있다. 하고 싶은 일만 해도 짧은 인생인데 굳이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면 큰 손해를 볼 것만 같다. 젊은 시절에는 내가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이 뭔지도 모를 때가 많다는 것을 기억하라. 그러나 매 순간 저마다 해야 할 일은 누구나 알고 있다. 해야 할 일을 하다 보면 진짜 하고 싶은 일이 훤히 보이고 그때 용기 내어 그 일을 하면 진정한 행복에 도달할 것이다. 인생은 생각보다 길기도, 또 속절없이 짧기도 하다. 그러기에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을 실수 없이 하려면 마음에 내키지 않더라도 '해야 하는 일'을 먼저 하면서 견뎌보는 것쯤은 각오해야 한다(p. 187). 웰다잉(well dying)은 삶의 완성이 아니라 삶의 결과물이다. 누구나 손쉽게 받을 수 있는 선물은 더군다나 아니다. 저마다 주어진 힘든 삶을 잘 살아내야만 누릴 수 있는 삶의 마지막 축 복인 것이다(p. 203). 죽음을 깊숙하게 연구하고 싶어서라든지 내 성격이 원래 우울해서 호스피스 의사가 된 건 아니다. 나는 호스피스 일을 해오는 동안 '죽음을 준비해야 하는 사람도 죽음에 이르기 직 전까지는 살아 있다'는 자명한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 누구도 아프지 않게 하루를 지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고 보면 나는 거창한 죽음의 여의사가 아니라 그저 생명의 에너지가 다 할 때까지 불편함 없이 살아갈 수 있게 해주는 의사로서 당연한 일을 하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이름이 주는 거부감 때문에 국내 암 환자의 마약성 진통제 사용률은 그리 높지 않다. 세계보건기구에 따르면, 국내 사용량은 모르핀으로 환산했을 때 환자 1인당 연간 45mg에 불과하다. 미국 693.44mg, 영국 334.52mg은 물론 세계 평균 58.00mg보다도 낮다. 통증을 효과적으로 다스릴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도 안 쓰는 것이다. 아직도 대한민국 사람들은 아프면서 죽어간다. 의사 입장에서 보면 죽음이 삶의 종착역인지 따위는 일단 환자의 통증을 덜어준다음에 생각할 일이다. 암 환자의 통증은 당사자가 아니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심하다. 출산의 고통이 10점 만점에 7~8점이라면 암 환자의 통증은 10점 이상도 간다.암성 통증은 암이 진행되는 생명의 마지막에는 더 심해지고, 그(p. 215) 끝을 알 수 없기 때문에 환자와 가족을 더더욱 애타게 한다(p. 216). 인생을 산다는 것은 세상에 놓인 하나의 다리를 건너는 것이다. 하지만 그저 다리를 건너는 일에만 집중한다면 세상의 아름다움은커녕 다리를 뒤흔들 고통과 혼돈의 시간이 다가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없다. 뜨거운 마음으로 용기를 내어 자기 삶의 아웃사이더가 되어보기를. 삶이 끝난 뒤에 죽음이 오는 것이 아니라 삶 속에 죽음이 있음을 알아차리기를, 그래서 지금 이 순간이 가장 행복하다고 느끼면서 아름다운 마무리를 하게 되기를 바란다(p. 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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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382】 죽음을 늘 준비하며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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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381】 삶의 찌질함과 누추함에 대하여
- 산문집 《연중무휴의 사랑》과 《헤아림의 조각들》(2023년 문학나눔 선정도서)로 2030 독자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던 임지은이 신작 《이유 없이 싫어하는 것들에 대하여》를 출간했다. 전작에서 냉철하고, 때론 따뜻한 연민과 너른 헤아림을 보여줬다면 이번 산문집에서는 작가 자신의 깊은 내면에 숨겨진 질투와 열등감, 욕망과 좌절, 위선 등의 감정을 진솔하게 마주해본다. 누구나 한번쯤 특별한 이유 없이 무언가를 미워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이 ‘싫음’이라는 감정은 과연 무엇일까. 숨기고만 싶은 이 복잡 미묘한 감정을 들여다볼수록 작가는 거기에 어떤 선망이나 외로움, 부끄러움 같은 것들이 들어 있다는 걸 깨달았다. 한편으론 자기가 가진 것 중 가장 소중한 것을 돋보이게 하려는, 서툰 사랑의 마음이기도 했다. 작가는 슬픔과 기쁨과 외로움이 버무려진 이 “혼탕과 같은 삶”에 깊게 몸 담그며, 미움과 사랑 사이의 낙차를 발견한다. 엄마를 통해 흉보는 마음과 사랑이 때론 붙어 있음을 알게 되었고, 온 세상과 자기 자신을 고루고루 아낌없이 사랑한다는 사람들 옆에서 홀로 투덜거리며 자신의 ‘싫음’을 통해 타인의 ‘싫음’ 또한 이해하게 되는 세계를 경험한다. 좋은 것은 당연하게 제 것이라 누리는 동거인에게 꼬인 마음이 드는 자신을 들여다보며 좋은 것을 좋은 것이라 수긍하기까지의 내면의 갈등과 고통을 인정하기도 한다. 이처럼 작가는 무언가를 좋아한다는 건 그것대로 멋진 일이지만, 무언가를 미워한다는 것 또한 때로는 좋은 일이라고 말한다. 작가의 시선을 따라 ‘이유 없이 싫어하는 것들’을 톺다 보면 이 책을 추천한 오은 시인의 말처럼, “곡절 없이 좋아하는 것들을 몇 곱절 더 소중하게 만들어주는” 생경한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곧 있으면 닥쳐올 매서운 겨울바람에도 직진하는 용기가 느껴지는 책이다.-교보문고 자신의 찌질함(?)을 드러내는 글을 보며 저자의 용기를 본다. 만족스럽지 않은 환경 가운데서도 살아볼려고 하는 저자의 몸부림(?)에 박수를 보낸다. 이토록 많은 말이 오가는 세상에 말 한마디가 그토록 크게 사람을 흔들 수 있다는 걸 생각하면 놀라고야 만다. 누군가의 말 한마디에 버티고 또 흔들릴 만큼 나는 취약 했다. 그러나 누군가를 흔드는 게 무작정 나쁘다거나, 사주는 믿을 만하지 않다는 주장을 하려는 건 아니다. 나를 흔들던 말 또한 나를 이쪽으로 데려왔음을, 내가 무언가를 그 안에서 발견했다는 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그 밤 안도 속에서 깨달은 건 나를 격려해주는 이가 없어도, 심지어 누가 나를 흔들어놓고 수면 아래로 밀어 넣는다 해도, 나는 내가 원하는 걸 쉽사리 포기하지 못하는 사람이란 사실이었다. 그로 인해 생겨난 불안과 슬픔과 무력감, 또 그에 따른 오기와 반발심을 동력 삼으며, 나는 내 안에서 끝내 살아남은 무언가를 마주했다. 어쩌면 그(p. 25)것이 그리도 중요했기 때문에 내가 그렇게나 흔들렸다는 사실 또한. 그러므로 물음에 대한 답은 추가되고 갱신된다. 어쩌다 작가가 되었을까? 나는 끝내 작가가 되고 싶었다(p. 26). 오늘날에는 자신을 돌보는 법에 대한 정보가 넘쳐난다. 그런 정보의 과잉은 때론 상처도 불행도 없어야 한다는 강박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어떤 건 꼭 완두콩 한 알 만큼의 불편도 용인하지 않기 위해 고안된 듯 보이니까. 혹시 사람들은 자신에게 좋은 것만 주어야 한다는 강박을 갖고 있는 걸까? 그렇게 해야만 제대로 된 사회 구성원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그건 좀.. 부자연스럽지 않나? 그래도 그런 정보들을 일찌감치 알았다면, 그래서 내 부모가 조금 더 자신을 돌보았다면 그들에게도 내게도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럼 내 부모도 조금은 덜 힘들었을 텐데. 나도, 조금 덜 우는 사람이었거나 조금 더 마음 놓고 우는 사람으로 자랐을 텐데. 어쩌다 한 번 하는 우리의 외식도 지금보다는 더 편안할 텐데(p. 103). 뒤늦게나마 나는 내게 좋은 것을 주는 법을 배우고 또 연습한다. 가능한 선에서 질 좋은 걸 산다. 누가 뭘 해주면 사양하지 않고 받는다. 목돈을 모아 요가를 등록하고 되도록 병원을 제때 간다. 때론 근사한 데서 밥을 먹기도 한다. 부모로선 잘 모를 좋은 걸 누려도, 스스로를 이기적이라 느끼지 않으려 이를 악문다. 동거인이 놀리는 걸 보면 갈 길이 먼 것 같지만, 나는 나를 보살피는 훈련을 거듭한다. 그래야 부모를 포함해 그 누구라도, 나를 챙기느라 그 자신을 뒷전으로 두지 않을 수 있다. 그래야 나에게 최선을 다해준 사람들을, 원망하지 않고 끝까지 이해할 수 있다. 동거인의 캠핑을 따라가는 건 훈련의 일환이다. 캠핑을 가면 동거인이 거의 대부분의 일을 도맡아 해주기 때문이다. 그동안 나는 뻔뻔하게 앉아서 쉰다. 겨울에는 가끔 엄마의 개도 캠핑에 데리고 간다. 텐트 안에서 개는 한 뼘의 볕이 있는 자리에 자기 몸을 두기도 하고, 난로 앞 조금 더 따뜻한 곳에 자리를 잡고 웅크리기도 한다. 주어진 데서 기어이 제 몸만큼의 좋음을 찾아내는 것이다. '너는 바로 아는구나'(p. 104). 내가 오래 걸려 배운 걸 개는 그냥 해낸다. 기특하고 근사한 개 같으니. 몇 년 전가지만 해도 그런 광경, 자신이 괜찮아지는 위치를 미리 알아두고 스스로를 거기 놓는 존재 앞에서는 마음이 볼썽 사납게 흐트러지곤 했다. 그러나 이제는.... 웅크린 개를 빤히 바라본다. 걷는 법을 모르고도 걸었고 숨 쉬는 법을 모르고도 숨 쉬었다. 사랑 하는 법을 모르고도 사랑했고 사는 법을 모르고도 살았다. 나를 키워낸 내 부모처럼, 언제나 모르면 모르는 대로 해내는 것들이 있다. 하지만 배우면 배우는 대로 더 해내게 된다. 그걸 안 뒤로 나는 배우고 싶은 모든 걸 조금 더 오래 본다. 그럼 볕을 받아 털끝 하나하나가 빛나는 작은 개의 부드러운 몸이 조금씩 솟았다 가라앉길 반복하듯 감탄과 슬픔이 내 몸을 고요히 오르내린다. 어떤 자연스러움은 누군가에게 훈련의 영역에 있지. 그런 게 언제나 조금씩 나를 상하게 만든다고, 개를 쓰다듬으며 생각한다. 아무 불편도 모르는 얼굴, 그래야 한다고 주장하는 멸균된 얼굴은 역시 내 것이 아니다. 훈련 해봤자 조금 상한 얼굴을 더 자연스럽게 여기는 내 관점은 아무래도 끝내 바뀌지 않을 모양이다. 그래선지 어떨 땐 사람들의 얼굴이 다 조금씩 상한 것처럼 보이곤 한다(p. 105). 대중교통을 오가며 힐끗힐끗 사람들을 본다. 사람들이 상처 입거나 불행하지 않길 바라면서. 그러나 나는 어쩐지 그들 각자의 상처나 불행이 없어지길 곧장 바라지는 않는다. 거기서 오는 고통과 모순 같은 것들은 한 사람을 감싸는 오래된 맥락이므로. 나로선 그 안에 새겨진 것들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싶다. 그들의 완두콩들을 헤아려 보고 싶다. 그런 건 사람이 상처와 불행 속에서도 그럭저 럭 버티며 살아갈 수 있는 존재임을 알려준다. 다만 그 사실을 증명하겠다고 나를 몰아세우는 건 그만두었다. 스스로를 보살피는 게 죄가 아니라는 걸 개조차 그냥 안다. 나는 개처럼 살아서 숨쉰다. 개에게 배운 바, 그건 머무르는 자리에서 언제나 한 뼘의 볕을 찾아내야만 한다는 뜻이다(p. 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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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381】 삶의 찌질함과 누추함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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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380】 여전히 흥미로운 주제, 죽음
- 대한민국이 OECD 자살률 1위라는 아픈 현실을 몇 년째 마주하고 있다. “죽으면 모든 게 끝날 거야”라는 절망 속에서 위태롭게 흔들리는 젊은이들에게, 우리 사회는 어떤 대답을 들려주어야 할까? 이 무거운 질문에 답하기 위해, 평생을 의학계에 몸담았고 ‘죽음학 전도사’라 불리는 서울대 의대 명예교수와 그의 아내가 함께 펜을 들었다. 바로 신간 『죽음, 삶의 끝에서 만나는 질문 』의 저자 정현채, 이현숙 부부의 이야기다-교보문고. 의사가 하는 죽음에 대한 이야기이다. (1) 근사체험 (2) 사후통신 (3) 삶의 종말체험 (4) 사망 시 물리적 현상 (4) 영매 (5) 어린아이들과 관련된 환생 연구이다. 나는 근사체험만 인정한다. 죽음은 이 땅에서의 마지막이기에 나이가 들수록 더 많은 관심을 갖고 책을 찾아 읽게 된다. 읽은 책들이 죽어갈 때 도움이 되기를 바라면서..... 정현채 서울대학교 의대 명예교수 1980년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동 대학 내과학(소화기학) 교수로 재직했고, 현재 서울대 의대 명예교수로 있다. 지금까지 240여 편의 의과학 논문을 SCI 국제학술지에 발표했으며 위염이나 위궤양 등을 유발하는 헬리코박터 파일로리 연구의 권위자로 대한소화기학회 이사장, 대한헬리코박터및상부위장관 연구학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저명한 의학 저널 『랜싯』을 포함해 전문 학술지에 게재된 죽음에 관한 과학적 연구 성과를 공부하면서 2007년부터 대중을 상대로 죽음학 강의를 시작했다. 중학생부터 80대까지 다양한 계층을 상대로 800여 회 넘게 강의를 해 '죽음학 전도사'라는 별명을 얻었다. 한국죽음학회 이사로서 '한국인의 웰다잉 가이드라인' 제정위원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죽음에 대해 생각할수록 비관적이 되거나 자살 충동이 커지는 게 아니냐고 우려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오히려 정반대예요. 제가 산증인이죠. 인간의 죽음 전후로 일어나는 영적인 현상에 대 해 알면 알수록, 왜 자살하면 안 되는지 그 이유를 이해하게 되고,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의 의미를 깨달아 더욱 밀도 있고 충만 하게 살아가게 되거든요. '내 목숨 내 마음대로 하겠다는데, 웬 참견이냐?'고 할지 모르지만, 실상을 알고 나면 그런 말을 하기가 어려워져요. 우리는 모두 서로 촘촘하게 연결되어 있고, 모르고 지나치는 존재들조차도 서로 영향을 주고받아요. 가족과 친구는 더 말할 나위 없죠. 우리는 모두 이번 생에서 다뤄야 할 저마다의 과제를 갖고 태어나는데, 자살을 한다는 건 그 과제를 너무 빨리 내팽개쳐버리는 거예요. 도망친다고 그 과제에서 벗어나게 될까요? 그렇지 않아요. 그 과제를 잘 다루게 될 때까지 형태만 바뀐 채 계속 마주 치게 돼요. 죽음은 소멸이 아니라 다른 차원으로 옮겨가는 것이니까요. 그런데 살면서도 그런 걸 경험하지 않나요? 해결하지 못 한 채 외면하거나 회피했던 문제가 사라지지 않고 어느 순간 눈 앞에 떡하니 버티고 서 있는 경험을요(p. 19). 자살은 남겨진 가족들과 친구들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안겨주고, 이 상처는 수십 년이 지나도록 잘 아물지 않아요. 한 사람이 자살하면 주위 사람 다섯 명 내지 열 명이 자살 충동을 갖게 된다고 해요. 우리나라에서는 하루 평균 마흔 명 가까이 자살한다고 하니, 매일 200명 내지 400명 넘는 사람들이 지인의 자살로 인해 부정적인 영향을 받게 되는 거죠. 죽음은 누구에게나 찾아와요. 서둘러 스스로 생을 마감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사고로, 질병으로, 노화로 언젠가 다 죽어요. 그러니 그 전까지는, 자신의 삶은 물론 사랑하는 사람들의 삶까지 송두리째 무너뜨리는 선택만은 하지 않아야 해요. 저는 4년 전 침윤성 방광암 진단을 받고, 방광 전체와 그 옆에 인접해 있는 전립선까지 제거하는 큰 수술을 받았어요. 소장 60센티미터를 잘라내고 만들어 넣은 인공방광에는 괄약근이 없어서 자율적인 배뇨 조절이 안 돼요. 일정한 간격으로 화장실에 가야 해서 밤잠도 세 시간씩 끊어서 자요. 그러나 이것 때문에 비관하지는 않아요. 30년 전만 해도 방광 절제 수술을 받고 나면 비닐 소변주머니를 밖에서 연결해 부착하고 지내야 했는데, 수술법이 향상되면서 삶의 질이 높아졌어요. 그것만으로도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요. 가만히 주변을 둘러보면 감사할 일이 참 많아요(p. 23). 자살하는 순간 후회하지만 자살을 시도했는데 살아난 사람들은 이후 신체적인 고통을 겪더라도 살아 있다는 사실만으로 감격스러워하며 살아간다고 해요. 그리고 대다수의 사람이 더 이상 자살을 시도하지 않았다고 해요. 2013년 EBS 「다큐프라임」 '33분마다 떠나는 사람들. 당신은 혼자가 아닙니다'에서는, 미국 샌프란시스코 골든게이트교(금문교)에서 투신했다가 극적으로 살아남은 2퍼센트의 사람들을 다뤘어요. 미국 플로리다대학의 토머스 조이너 교수가 그 사람들과 면담한 결과, 투신해서 수면에 떨어지기까지 4초밖에 안 되는 짧은 시간 동안 그들은 한결같이 자신이 한 행동을 후회했다고 해요. "뛰어내린 순간 나는 인생에서 해결할 수 없는 일은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방금 다리에서 뛰어내렸다는 사실 만 빼고"(p. 38). "뛰어내리고 처음 떠오른 생각은 '방금 무슨 짓을 한 거지?' 였다. 나는 죽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떨어진 곳이 강이였으니 그나마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질 수 있었던 것이고, 고층 빌딩이었다면 떨어지는 순간 후회한다고 해도 돌이키기 힘들죠. 경북 영주에 사는 한 중학생의 경우가 바로 그랬어요. 같은 반 학생들의 괴롭힘을 이기지 못해, 아파트 20층 계단 창문을 열고 뛰어내리려다가 갑자기 마음을 바꿔 창문틀을 붙잡고 도와달라고 요청했어요. 때마침 20층에 사는 주민이 이 소리를 듣고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하러 갔지만, 이 학생은 팔에 힘이 빠져 결국 추락했다고해요.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에요. 이처럼 자살을 시도하는 사람들의 마음 한편에는 살고 싶은 의지가 강하게 있는 것 같아요. 다음에 소개하는 사례에서도 확인할 수 있어요. 우울증을 앓고 있던 한 여성이 오피스텔에서 자살하려고 목을 맸는데,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이웃의 신고로 경찰이 출동했어요. 잠긴 문을 따고 들어가보니 이 여성은 이미 사망한 것처럼 보였어요. 호흡도 없고 얼굴이 잿빛으로 변해 있었죠. 그런데 출동한 경찰관 중 한 명이 혹시 모르니 응급조치를 해보자며 심폐소생술을 시작했고, 얼마 뒤 이 여성은 "컥!? 하는 소리와 함께 숨을 쉬며 살아났어요. 그리(p. 39)고 살아나서 한 말이, 경찰이 들어왔을 때 자신은 여전히 의식이 있었는데 다른 경찰관이 "시신에 손대지 말고 현장을 보존하자"고 했을 때 속상했다는 거였어요(p. 40). 죽는 것 외에는 거기서 벗어날 방법이 없다고 자꾸 생각하게 만드는 상황에 있다면, 가족이나 상담사에게 솔직하게 털어놓고 그곳에서 벗어나기 위한 현실적인 방법을 찾으세요. 익숙한 곳을 벗어나는 걸 겁내지 마세요. 죽는 길밖에 없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지금 그곳보다 더 나쁜 곳은 이 세상에 없으니까요. 하나의 문이 닫히면 다른 문이 열려요. 70년을 살아보니 정말 그렇더라구요(p. 42). 케네스 링과 친절 바이러스 근사체험 연구에서 케네스 링 교수를 빼놓을 수 없죠. 미국 코네티컷대학 심리학과 교수로서 30년 넘게 학생들에게 근사체험에 대해 가르쳤어요. 강의를 들은 학생들은 직접 체험하지 않았는데도 근사 체험자에게 일어나는 삶의 변화를 마찬가지로 겪었죠.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삶의 의미를 찾게 되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감소한 거예요. 케네스 링 교수는 근사체험을 '친절 바이러스Benign Virus'라고 불러요. 왜냐하면, 이를 알게 된 사람은 근사체험을 직접 하지 않았어도 마치 바이러스에 감염된 것처럼 체험자와 비슷한 긍정적인 영향을 받기 때문이에요. 그런 변화를 저나 주변 사람들한테서도 발견해요. 한 중견기업의 대표는 평소 까칠한 편이었다는데, 죽음학 강의를 들으며 펑펑 울고 난 뒤로는 직원들을 대하는 태도가 한결 부드러워지고 자상해졌다고 했어요(p. 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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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380】 여전히 흥미로운 주제,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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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379】 만화가 주는 즐거움과 편안함
- “<을지로 순환선>의 만화가 최호철과 만화평론가 박인하가 함께한 여행기『펜 끝 기행』. 같은 학교 교수로 만나 떠난 제주도 교직원 연수에서 결성된 두 만화쟁이 '펜 끝 듀오'의 여행은 이후 일본, 이탈리아, 스위스, 중국을 거쳐 다시 우리 땅 울릉도와 독도에서 마무리된다. 화가였다가 만화를 선택한 최호철과 글쟁이였다가 만화를 선택한 박인하. 만화에 붙들린 두 사람은 세계를 바라볼 때 만화적으로 본다. 최호철은 여행지마다 그림을 그렸고, 박인하는 최호철의 크로키 북을 보며 농담을 던졌다. 이 책은 그들이 그렇게 함께한 여행의 추억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만화를 좋아했다. 초등학교때부터 대학때까지 만화를 봤다. 지금은 잘 안 보지만 그래도 만화가 좋다. 앞으로도 기회가 되면 이런 책들을 찾아 읽을려고 한다. 일본다운, 너무나 일본다운 규슈 한 일 두 나라는 모두 벚꽃을 좋아하고, 벚꽃 구경 하기를 즐긴다. 그래서 봄이면 어김없이 벚꽃 축제가 벌어지는데, 가만 보면 두 나라 사람들은 각각 다른 벚꽃을 즐긴다. 우리나라에서 즐기는 벚꽃은 봉오리가 오르기 시작해 화려하게 피어오르는 상태이다. 그래서 벚꽃 축제를 구경하기 위해 일기 예보에 민감하다. 바람이 불거나 비가 와 꽃잎이 떨어지면 꽝이 되어버리기 때문. 반면, 일본 사람들은 화려하게 만개한 뒤 흩날리는 벚꽃을 즐긴다. 만개한 벚꽃이 바람에 떨어지는 모습을 좋아하는 것이다. 비슷하지만 다른 이웃. 결국 이런 미세한 차이가 모여 문화의 차이가 되고, 문화의 차이는 풍경의 차이를 만들어낸다. '일본 미학'이라는 말이 있다. 다양한 논의가 있고, 학자마다 여러 설명을 더하지만 이방인인 우리의 눈으로 볼 때 일본의 모습 자체가 그대로 일본 미학이다. 가을이 서서히 겨울로 넘어가던 날, 두 만화쟁이는 학생들과 함께 후쿠오카를 찾았다. 후쿠오카를 여행지로 결정한 것은 순전히 우리나라에서 가까웠기 때문. 특별히 우리를 끌어당기는 매력이나 꼭 가야 할 곳을 생 각해놓지 않은 상태에서 기대 없이 찾은 곳이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만난 활화산 아소 산. 그 웅장한 모습은 대단했다. 아소 산은 해발 1000미터가 넘는 다섯 개의 산봉우리를 통틀어 부르는 이름으로 정식 명칭은 아소고다케인데, 다섯 개의 분화구마다 사실 다른 이름, 다카다케(1592미터), 나카다케(1506미터), 에보시 다케(1337미터), 기지마다케(1326미터), 네코다케(1433미터)로 부른다. 버스로 전망대 인근까지 올라가 케이블카를 타면 쉴 새 없이 하얀 연기를 내뿜는 분화구를 볼 수 있다. 은근하게 풍겨나는 유황 냄새, 곳곳에 자리 잡은 대피소, 은근히 겁을 주는 가이드의 말이 어우러지(p. 243)면 현재 진행형 활화산의 다이내믹함을 느낄 수 있다. 멀리 피어오르는 활화산의 기운을 바라보니, 주군을 위해 목숨을 거는 사무라이, 흩날리는 벚꽃처럼 배를 가르는 영화의 장면이 떠올랐다. 아소 산을 뒤로하고 찾은 곳은 구마모토 성. 구마모토 성은 약 400년 전, 전국 시대의 무장 가토 기요마사가 구마모토를 통치하기 위해 축성한 성이다. 가토 기요마사라고 하면 낯설지만, 한자음 그대로 '가등청정'이라고 읽으면 익숙하다. 바로 임진왜란 때 조선을 침략했다가 깨진 바로 그 장군. 적의 공격에 대비한 120개의 우물과 조선 성의 장점을 차용한 축조술이 인상적이었지만, 그보다는 거대함 속에 정교하게 쌓아 올린 구마모토 성의 모습 그 자체가 일본, 사무라이를 느낄 수 있는 너무나 일본적인 풍경이었다. 그러나 사실 가장 일본적인 풍경은 활활 불타오르는 아소 산과 전국 시대 의 칼바람이 담겨 있는 구마모토 성이 아니라 그 살벌함과 함께 일상을 살았을 일본 사람들의 모습이었다. 지금도 언제 터질지 모르는 아소 산 자락 아래에서 평화롭게 농사를 짓고 소를 키우는 바로 그들의 모습이 가장 일본다운, 너무나 일본다운 모습이었다(p. 244). 이 책을 쓰고 그리게 된 계기에 대해 말하자면(p. 276) 최호철 선생과 나는 같은 직장(청강문화산업대학)에 다닌다. 둘 다 만화창작과 선생이다. 사람들을 만나 "학교에서 만화를 가르치고 있습니다"라고 말하면 꽤나 흥미로운 눈으로 바라본다. 마치 황제펭귄처럼. 낯설지는 않으나 내 주변에서 마주칠 때 경험하는 신기한 느낌이 드는 모양이다. 어쨌든 우리는 5월마다 찾아오는 불량 만화 화형식의 주홍글씨를 가슴에 새기지 않은 만화인들이다. 최호철 선생은 화가였다가 만화를 붙들었고, 나는 글쟁이였다가 만화를 붙들었다. 더 정확히 우리 둘은 모두 만화에 붙들린 사람들이다. 만화에 붙들린 사람들은 세계를 바라볼 때 만화적으로 본다. 일단 빈 종이가 있으면 무조건 그리고, 조금이라도 분위기가 추락하면 농담을 날리고 싶다. 전자가 최호철 선생. 후자가 나다. 하지만 둘 다 천성이 숫기가 많은 사람들은 아니다. 은근 부끄럼쟁이들. 그래서 낯선 이들하고 떠들고 노는 것보다, 친한 이들과 수다 떠는 것이 좋다. 그래서인지 청강문화산업대학 만화창작과 선생들은 보통 직장인들과 달리 사우나 아줌마 분위기를 풍긴다. 그 때문에 여행에 대한 기억이 꽤 많다. 최호철 선생은 여행지마다 그림을 그렸고, 난 최호철 선생의 화집을 뒤적이며 농담을 던진다. 그러던 어느 날. 학교에서 월간 무가지 〈백도씨〉를 기획할 때였다. "우리 여행 간 거 내가 글 쓰고, 선생님이 그림 그려보세요." "만화? 나 마감 잘 못하는 거 알잖아?" 일단, 방어막을 친다. 역시, 공력이 대단하다. "그냥 한 쪽짜리 그림을 그리자고요. 한 쪽짜리 만화, 그게 최호철 스타일이 잖아!" 나도 다시 공격한다. 왠지 느낌이 낚은 것 같다(p. 277). "한 페이지..." "한 페이지에 되도록 많은 이야기를 담는 게 최호철 스타일 아닌가?" 낚았다. 파닥파닥! 그렇게 해서 〈백도씨〉에 '두 만화쟁이의 여행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연재를 시작했다. 내가 낚은 죄로 글을 썼고, 최호철 선생의 애간장 다 태우는 마감에 동참했다. 몇 번 빼먹은 적도 있지만, 한 스무 번쯤 마감을 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났다. 우리가 한때 사슴굴이라고 불렀던 최호철 선생의 개성 넘치는 연구실 소파에 앉아 뒹굴면서 이야기를 하다 한번 책으로 묶어보자는 생각이 번득였다. 최호철 선생은 낙서라고 하지만, 그냥 묵히기 아까운 그림이 많은 그의 크로키 북이 생각났다. "〈백도씨〉에 연재한 만화하고, 그와 연관된 크로키를 모아서 책으로 묶어봅 시다." "재미있을까?" "재미없으면 사람들이 만날 선생님 크로키 북 달라고 해서 보겠어요." "너무 성의 없게 그렸잖아." "성의 있게 그리면 마감 못하잖아요." "..." "또 그냥 그 시간에, 여행지에서 그린 그림이 난 좋던데." "그럽시다." 그렇게 시작된 작업이다. 그림을 모으고, 글을 고쳐 썼다. 최대한 여행지의 느낌을 사람들이 느껴주길 원했다. 여행에는 휴식과 수다가 공존한다. 혼자 가는 여행을 좋아하는 이들도 있지만, 난 함께 수다 떨 수 있는 사람과 가는 여행이 좋다. 서로 말도 안 되는 지식을 공유하고, 느낌을 나누는 여(p. 278)행이 좋다. 이 만화는 그런 여행의 기록이다. 글과 함께 그림도 읽어주었으면 좋겠다. 최호철의 그림은 읽히는 그림이다. 그림으로 이야기를 하기 때문이다. 어느 순간, 크로키 북에 그린 사람이 아주 구체적인 당신의 모습이기도 하고, 당신이 바라본 그의 모습이기도 하다. 그림을 읽으며 우리의 여행에 동행하면 어떨까? 같이 수다 떨고, 맛있는 것도 먹고, 바보 같은 개그도 하면서 말이다. 남자들이라면 더더욱, 수다가 주는 세계 평화를 함께 누려보자(p. 2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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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379】 만화가 주는 즐거움과 편안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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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378】 짐승보다 못한 인간의 잔혹함
- 〈무시무시한 처형대 세계사〉는 야욕과 애증, 배반과 음모로 뒤엉킨 잔혹한 처형의 역사를 들려주는 책이다. 「알고보면 무시무시한 그림동화」를 통해 그림 동화 신드롬을 일으킨 작가 기류 미사오가 이번에는 무시무시한 역사 속 처형의 현장으로 안내한다. 고대 로마 시대부터 근대 유럽까지 '인간'이라는 존재에 의해 자행된 처참하고 잔혹한 처형의 역사를 생생하게 복원하였다. 이 책은 역사 속 처형장을 통해 인간 내면세계에 깃들어 있는 광기의 역사를 살펴본다. 저자는 '인간은 과연 어디까지 잔인해질 수 있을까'라는 결코 가볍지 않은 물음을 던지면서, 다양한 이유 때문에 엄청난 피를 흘려 왔던 인류의 역사를 되짚어보고 있다. 그리고 황제들을 비롯한 수많은 권력자들과 신의 이름을 내건 종교인들이 역사 속에서 저지른 처형의 만행과 광기의 현장을 낱낱이 고발한다-교보문고. 흥미롭게 읽었는데 품절됐다. 이 저자의 책들이 재미있어 열심히 읽고 있는데 「알고보면 무시무시한 그림동화」도 대출했다. 이처럼 맹수를 이용한 처형 방법은 그리스도교가 보급되기 훨씬 전에 시작되어 5세기까지 계속되었다. 처음에는 죄수의 팔다리를 묶어 자유를 구속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죄수의 몸을 묶지 않고 자유로운 상태에서 간단한 무기도 사용하게 함으로써 관중들에게 더 큰 즐거움을 안겨 주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목숨을 잃기 전에 맹수를 한두 마리쯤 해치우는 강한 죄수도 나타났다. 어쨌든 죄수와 맹수의 싸움은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긴장감으로 관중들에게 꽤 인기를 끌었다. 좀 더 시간이 흐르면서 죄수의 처형은 일종의 연극으로 연출되었다. 예를 들면, 죄수를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프로메테우스로 분장시켜 쇠사슬로 바위에 묶은 다음 대머리 독수리에게 간을 쪼이게 한다거나, 헤라클레스로 분장한 죄수가 곤봉을 들고 나와 황소와 싸우다가 클라이맥스에서 황소가 죄수를 허공으로 던져 버리는 식이었다. 그리고 여자 죄수가 생겨나면서 연극 마지막 부분에 음탕함의 상징으로 알려져 있는 곰이나 당나귀의 습격을 받는다는 설정도 선보였다고 한다(p. 23). 콜로세움에서 펼쳐진 다양한 잔혹극 역대 황제들의 입장에서 볼 때, 검투사 경기는 범죄자나 반역자의 잔혹한 죽음을 선보이는 것으로써 황제의 권력을 뒤흔들려 하는 자는 결코 용서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서민들에게 확실히 보여 주는 기회이기도 했다. 로마 콜로세움 안에는 지금도 십자가가 서 있다. 일찍이 이곳에서 수많은 잔혹한 방법으로 목숨을 잃은 그리스도교도들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함이다. 그들은 타르에 적신 셔츠를 입은 채 콜로세움으로 끌려가 화형에 처해졌다. 또는, 팔다리가 묶인 채 커다란 솥 안에서 끓는 기름에 튀겨지거나 끓는 물에 삶아지기도 했다. 성 로렌스(Sento Rorense)는 석쇠 위에서 불에 구워졌고, 성 포류카르프는 화형대 기둥에 묶인 채 불에 타 죽었다. 성 폰시아노(Sento Pontianus)는 쓰러질 때까지 벌겋게 달구어진 석쇠 위를 걸어야 했고, 성 아르테 미오(Artemius)는 맷돌에 몸이 으깨져 죽었다. 손발이 잘려 나가거나 내 장이 몸 밖으로 드러난 채 매달린 자들도 있었다. 또, 살가죽이 벗겨진 채 유리 조각 위에서 끌려 다닌 자도 있었다. 콜로세움에서 남녀 수십 명이 한꺼번에 기둥에 묶여 처형된 적도 있는데, 그 광경이 마치 나무들이 줄지어 늘어선 숲처럼 보였다고도 한다. 관중들은 그 중에서 누가 가장 먼저 숨이 끊어질지를 놓고 내기를 하기도 했다(p. 24). 당연히, 역대 황제들도 콜로세움에서 펼쳐지는 잔혹한 피의 향연을 더할 나위 없는 즐거움으로 여겼다. 예를 들어 카이사르(Caesar)는 기원 전 65년 안찰관이었을 때 검투사들을 320쌍이나 동원해 성대한 검투사 경기를 개최했으며, 아우구스투스(Augusus) 황제도 검투사를 1 만 명 정도 동원해 검투사 경기를 여덟 차례, 맹수 3,500마리를 이용해 맹수 사냥을 스물여섯 차례나 개최했다. 클라우디우스 1세(Claudius I) 황제 시대에는 한 경기장에서 검투사 500쌍이 동시에 겨루는 일도 흔했다. 잔혹한 취미가 있었던 클라우디우스 1세는 목이 잘린 검투사의 얼굴을 자세히 볼 수 있도록 일부러 죽은 자의 투구를 벗기게 했다고 한다. 칼리굴라 황제 시대의 검투사 경기는 잔혹한 취미를 끝없이 만족시키기 위한 절호의 수단이었다. 맹수 사냥에서는 범죄자를 짐승의 먹이로 던져 주었고, 검투사 경기에 출전해야 한다는 선고를 받은 죄수가 필사적으로 자비를 호소하면 그 혀를 잡아 빼라고 명령한 다음에 온몸의 상처가 곪아 악취를 견딜 수 없을 때까지 채찍으로 때리게 했다. 그리스도교도 박해로 유명한 폭군 네로도 30일에 걸쳐 잇따라 경기를 열었다. 그는 맹수를 풀어놓아 어린이를 포함한 5,000명을 물어 죽이게 했다. 새로운 것을 좋아한 도미티아누스(Domitianus) 황제는 로마 제국 안에 존재하는 난쟁이들을 모조리 모아 검투사 집단을 만들게 했다. 그리고 미녀들로 이루어진 검투사 집단도 만들게 해서 경기장에서 난쟁이와 미녀를 싸우게 한 뒤 그것을 최고의 유흥으로 삼았다고 한다. 코모두스(p. 25)(Comedits) 황제에 이르러서는 아예 정치를 총애하는 신하에게 맡겨 버리고 검투사 경기에만 열중, 자기 자신도 검투사로 자주 경기에 출전했다. 그런 그가 음모를 품은 검투사 한 명에게 침실에서 암살당한 것은 운명의 장난이었을까?(p. 26). 사실은 이랬다. 불길이 번지는 상황에서 수상쩍은 남자 몇 명이 술에 취한 척 비틀거리면서 '어떤 자는 이쪽, 어떤 자는 저쪽' 하는 식으로 햇불을 이용해 불을 붙이는 모습이 목격되었던 것이다. 로마 시대의 전기 작가인 수에토니우스(Gaius Suetonius Tranquillus)에 따르면, 이 수상쩍은 무리가 네로의 노예들이었기 때문에 집정관도 제지할 수 없었다고 한다. 폭력의 피해자 어쨌든, '네로가 방화를 명령했다'라는 소문이 흘러나오면서 민중들 사이에서는 당장에라도 폭동이 일어날 듯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그러자 네로는 소문을 불식시키려고 방화범을 만들어 내기로 했다. 그리고 그 제물이 된 것이 바로 그리스도교도들이었다. 당시 그리스도교도들은 이단시되어 마법을 부리고 유아를 살해하고 인육을 먹는다는 식으로 중상모략을 당하고 있었다. 아무리 엄격한 금지 정책을 펴도 계속 증가하는 그리스도교도 때문에 고민하고 있던 터라 네로는 이번 화재를 구실로 그들을 철저하게 탄압하려고 마음먹었던 것이다. 먼저 신앙을 고백한 자들이 심문을 당했고, 이어서 그들의 고백을 토(p. 67)대로 수많은 사람들이 방화죄 혐의를 받았다. 순교자들 중에는 사도 바울로와 12사도인 베드로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들은 놀림감이 되었으며, 상상을 초월하는 잔혹한 방법으로 살해당했다. 어떤 이는 짐승의 가죽을 덮어쓴 채 개 떼에게 내던져져 물려 죽었고, 어떤 이는 원형 경기장에 맹수의 먹이로 던져지기도 했다. 또 어떤 이는 온몸에 타르가 발라진 상태에서 기둥에 묶여 날이 어두워진 뒤 등불 대신 불을 밝히게끔 했다. 네로는 처형 장면을 구경하라며 바티카누스 (vaticanus) 왕실 정원을 제공해 전차 경기까지 개최하면서 흥을 돋우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처럼 이단자들을 처형한다는 명분도 네로의 인기를 돌이킬 수는 없었다. 특히 귀족들이 불만을 품은 것은 노예에서 해방된 자들이 점차 제국의 요직을 독점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었다. 화재 뒤처리 등으로 인해 그 해의 국고는 막대한 재정 부담을 안게 되었고 그 결과 재산 몰수라는 극단적 상황에 의지할 수밖 에 없었다. 때문에 다시 막을 연 반역죄 재판의 판결은 모두 유형이나 사형이었다(p. 68). 14~17세기 유럽에서는 마녀로 여겨지는 사람들을 끊임없이 체포해 가혹한 고문을 한 뒤 화형에 처했다. 이러한 마녀 재판의 폭풍은 약 300년 동안 이어지면서 유럽 전역에서 맹위를 떨쳤다. 그 기간 동안 목숨을 잃은 사람들이 수십만에 이른다는 설도 있고, 수백만이라는 설도 있다. 정확한 수는 알 수 없지만, 마녀로 지목되어 화형을 당한 희생자에 대한 기록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 프랑스 로렌(Lorraine)에서 1576~1606년 동안 2000~3000명. 보르도에서 1577년에만 400명. • 독일 트리에르(Trier)에서 1587~1593년 동안 368명. 뷔르츠부르(p. 121)크에서 1623~1631년 사이에 900명. 밤베르크에서 1623~1633 년 사이에 600명. 이것만 보아도 마녀 재판의 희생자가 엄청난 숫자라는 사실을 짐작 할 수 있다. 유럽 전체에서는 15세기 말부터 18세기 초까지 약 30만 명(900만 명이라는 설도 있다)이 화형을 당했다는 기록이 있다(p. 122). 마녀를 불태우는 검은 연기가 유럽 하늘을 끊임없이 뒤덮고 있었던 것이다.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등골이 오싹해지는 이야기다. 당시, 불안감을 해소하는 돌파구로 선택된 것이 '마녀'였다. 사람들은 이 세상의 모든 불행과 해악을 마녀 탓으로 돌려 잔혹하게 처형했다. 마녀 사냥이 무서운 것은 증거 없이 소문과 풍문만으로도 마녀로 몰릴 수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마녀 재판이 성행했던 원인으로는 첫째, 당시의 사회 불안을 꼽을 수 있다. 당시, 유럽인들은 예전에는 겪지 못했던 혹독한 상황에 빠져 있었다. 유럽 인구의 30퍼센트 정도를 앗아간 페스트의 유행, 극단적인 인플레이션, 종교 개혁 운동 등, 격동의 상황에서 민중들의 불안감은 날이 갈수록 심화되고 있었다. 답답하기만 한 그런 현실의 불안감을 해소하는 창구로 선택된 것이 바로 '마녀'였다. 마녀는 마력을 써서 날씨를 나쁘게 만들고, 밭농사의 수학물을 줄이고, 태아를 유산시키고, 남자를 성불구로 만들고, 갓난아기를 잡아먹고, 악마에게 살아 있는 제물을 바친다..... 이런 식으로 세상의 모든 불행과 해악을 마녀 탓으로 돌렸다. 유럽에 휘몰아친 종교 개혁 운동에 대해 로마 교황은 수도회를 결성해 이단 탄압에 나섰다. 마녀 재판의 전신은 13세기 로마 교황 그레고리우스 9세가 탄생시켰다. 이른바 '이단 심문' 제도다. 이단 심문관은 교황의 보호 아래 사교나 관헌을 능가하는 권한을 가지고 오로지 그리스도교 국가 전역에서 이단을 박멸하는 사명을 맡았다(p. 123). 그리고 잔혹하기로 유명했던 요한 22세가 내린 1318년 2월 27일 교서에서 '마녀'의 비참한 운명이 결정되었다. 프랑스 고위 성직자 앞으로 보낸 이 교서에는 이러한 내용이 쓰여 있었다. '언제 어디서든 마녀 재판을 시작하고 지속하여 판결을 내릴 수 있는 완전한 권한을 부여한다.' 이 마녀 재판 해금 명령에 박차를 가하듯, 교황 요한 22세는 1323년, 1326년, 1327년, 1330년, 1331년에 계속 마녀 재판 강화 명령을 발표 했다. 이 강화 명령에 따라 이단 심문관의 마녀 사냥이 급격하게 기세를 떨치기 시작했다(p. 124). 마녀 재판 그 자체도, 심문, 자백의 공술(고문을 통한 자백도 포함해서), 단죄 선고, 그리고 처형(대부분이 화형)이라는 식으로 공식화되어 있었다. 중요한 것은 피고를 한시라도 빨리 죽여 그 재산을 몰수하는 것이었다. 마녀에게서 몰수한 재산은 모두 교회 소유가 되었고, 마녀 재판에 들어가는 비용 전부를 여기에서 조달했다. 간수의 식대, 처형 담당자의 술값, 교살을 할 때 들어가는 밧줄 대금, 화형을 할 때 쓰는 장작과 기름값 등, 모든 비용을 여기에서 인출해 썼던 것이다(p. 165). 기요틴에 광란하는 사람들 로베스피에르를 처형하는 것으로 공포 정치가 막을 내리자, 국내의 무거운 공기는 사라지고 단번에 향락적인 분위기가 퍼지게 되었다. 사람들은 다양한 장소에 모여 오직 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추었다. 피비린내 나는 과거를 잊고 희망 없는 미래에서 눈을 돌리기 위해. 거리 도처에서 무도회가 열렸는데, 특히 인기를 모았던 것은 회원이 한정되어 있는 '희생자들의 무도회'였다. 가까운 친척이 기요틴에 처형을 당한 사람들만 이 모임에 참가할 수 있었다. 이 무도회에 참가하려고 일부러 큰돈을 주고 근친자가 기요틴에 처형되었다는 증명서를 위조하는 사람들도 속출했다고 한다. 모임에서 여자들은 머리카락을 틀어 올리고 훤히 드러난 목 주위에 칼자국을 모방한 빨간 리본을 묶었다. 남자들도 머리카락을 짧게 깎고 마찬가지로 빨간 리본을 목에 둘렀다. 그 모습을 보고 사람들은 눈살을 찌푸렸지만 그들 입장에서 보면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현실을 받아들여 슬픔을 이겨내고 살아가려면 이런 식으로 불행을 패러디하는 수밖에 없었는지도 모른다(p. 298). 마지막 공개 처형 프랑스에서 기요틴을 이용한 처형은 오랜 세월 동안 일반에게 공개 되었다. 그때마다 형장에는 프랑스 각지의 수많은 구경꾼들이 모여들었다. 그들 입장에서 볼 때 처형은 최고의 스트레스 해소 방법이었다. 1889년의 파리 만국 박람회 때에는 기요틴에 처형을 당한 사람이, 당시에 신축된 에펠탑보다 더 화제가 되었다고 한다. 피와 잔혹함에 대한 인간의 열광은 그 뿌리가 무척 강한 듯싶다. 프랑스에서의 마지막 기요틴 공개 처형은 1939년 와이트만이라는 살 인범의 처형이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축제 소동이 벌어지자 정부는 두 번 다시 같은 일을 되풀이하지 않겠다고 결의했다고 한다. 처형 전날 밤, 형장이 될 베르사유 감옥 앞 광장에는 엄청난 군중들이 모여들었다. 기요틴 처형을 한 번이라도 직접 구경하려고 나무와 가로등에 매달린 사람들, 건물 창문에 바짝 얼굴을 들이대고 있는 사람... 사람들은 마치 축제라도 즐기는 듯한 기분으로 술잔을 기울이고 음악에 맞추어 노래를 부르거나 춤을 추면서 소란스럽게 전야제를 보냈다. 가끔씩 말 잘하는 사람이 농담을 던지면 사람들이 웃음을 터뜨렸는데, 그 소리가 감방 안에 있는 사형수의 귀에도 들렸다니 정말 잔혹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그러자 정부도 더 이상은 간과할 수 없어 그 뒤로는 기요틴 공개 처형을 금지했다. 이후의 처형은 각각의 감옥이 위치한 안마당에서 이루어(p. 300)졌으며, 처형에 참가할 수 있는 사람은 관료 아홉 명뿐이었다. 잔혹함의 상징인 기요틴 처형대는 감옥의 담장 안으로 모습을 감추었고, 두 번 다시 사람들에게 공개되지 않았다(p. 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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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378】 짐승보다 못한 인간의 잔혹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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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285】 대한민국은 결국 침몰하는가?
- 대한민국이 위태롭다. 내 나이 60인데 살아 생전에 국가의 위기를 경험할 것 같아 착잡하다. 무엇보다 인구소멸은 절망적이다. 아이가 없다는 것은 미래가 없다는 것이다. 대한민국은 사람 살기 어려운 땅이 되어가고 있다. 국가의 소멸을 그저 바라볼 수 밖에 없음에 절망을 느낀다. 누구도 경험하지 못한 나라 대한민국은 '수축 사회'를 넘어 '소멸 국가'로 착실하게 나아가고 있습니다. 출생률이 명확하게 보여 줍니다. 2012년 1.3 수준이던 합계출산율은 10년 만인 2022년에 0.78로 떨어졌습니다. 놀라운 것은 속도입니다. 합계출산율 1.0이 붕괴한 때(p. 23)가 2018년입니다. 그해 0.98이던 것이 불과 4년 만에 0.78까지 하락했습니다. 1.0에서 0.78까지 4년밖에 걸리지 않았습니다. 0.78에서 0.5까지는 얼마나 걸릴까요? 인구학자인 전영수 한양대 국제학대학원 교수는 《한겨레》와의 인터뷰(2022년 8월 29일 자)에서 '출산율이 0.5까지 떨어질 것이고, 마지막 골든 타임은 앞으로 5년'이라고 했습니다. 벌써 2년이 지났네요. 전 교수는 출생률 하락의 원인으로 청년의 불확실한 미래와 여성에게 전가되는 '독박 육아'를 꼽았습니다. 대한민국의 '정해진 미래'는 229개 지방 자치 단체 중 절반이 직면한 '지방 소멸'이 잘 보여 준다고도 했습니다. 지방이 소멸해도 수도권에 다 같이 모여 살면 되는데, 그게 출생률과 무슨 상관이냐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서울의 2022년 합 계출산율은 0.59로 전국 최저였습니다. 수도권 집중과 지방 소멸이 인구 절벽과 관계가 없다고 말하기 어려운 이유입니다. 국가의 합계출산율이 0.5까지 떨어지면 어떻게 될까요?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인류 역사에서 한 번도 없던 일이니까요. 일상의 풍경을 생각해 본다면 아마도 시내의 폐교된 초등학교들이 요양 병원으로 바뀌는 게 가장 두드러지지 않을까요? 병설 유치원은 방문형 노인 돌봄 시설로 탈바꿈하고, 노란색 버스들은 이제 아이들이 아니라 노인들을 실어 나르게 되겠지요. 그 외에도 의료, 복지, 연금에서 심각한 재정적 부담이 생길 것이 분명해 보입니다. 그러나 그 구체적인 상황은 아(p. 24)직 미지수입니다. 전대미문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에서 1.0이 안 되는 국가는 한국이 유일한데, 0.5의 상황은 어떤 나라도 겪어 보지 못했기에 예측 자체가 어렵습니다. 다만 현재 소멸 위험 지역의 상황을 미뤄볼 때 한 가지 정도는 예상할 수 있을 겁니다. 합계출산율이 0.5 수준이 되면 '회복 탄력성'이 없어지리라는 것입니다. 고무줄을 잡아당기면 늘어났다가 다시 줄어듭니다. 이걸 회복 탄력성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너무 많이 잡아당기면 그냥 끊어져 버리거나 다시 줄어들지 않습니다. 회복 탄력성이 사라진 것이죠. 합계출산율이 0.5 밑으로 떨어지면 지금 지방에서 산부인과와 소아과, 초등학교가 사라지듯이 출산, 육아, 교육의 기반이 무너지고, 아이를 낳아 기르기가 극도로 어려워집니다. 즉, 다시 출생률이 높아질 수 있는 가능성 자체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출생률을 회복할 수 없는 대한민국은 조용히 그대로 소멸해 갈 수밖에 없습니다(p. 25). 기업은 대체로 정치보다 빠릅니다. 위기가 현실화하기 전에 움직이기 마련입니다. 지구적 밸류 체인을 포기할 수 없는 선도적 기술 기업이 먼저 한국을 탈출하기 시작했습니다. 한번 이런 일이 벌어지면 탈출 러시가 일어날 가능성이 큽니다. 미래 가치를 내다보는 주식과 금융 시장도 가만있지 않을 것입니다. 당장 오늘내일의 수출 경기에 일희일비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p. 35). 심판만 요구하는 무책임한 정치 이렇게 위기를 넘어 소멸로 가는 대한민국에서 국가 경영에 가장 큰 책임이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국민에게서 권력을 위임받은 대통령과 정부, 국회의 정치인들입니다. 그런데 이 사태를 팔짱 끼고 바라만 보는 사람도 바로 그들입니다. 왜일까요? 제22대 총선 때문입니다(p. 36). 충선이 1년 가까이 남았지만 거대 양당의 선거 프레임은 이미 정해졌습니다. '심판'입니다. 여당은 문재인 정부와 야당 심판이고, 야당은 '윤석열 정부와 여당 심판'입니다. 정부 · 여당이 지난 1년 여간 여러 비판을 받으면서도 '전 정부 탓' 프레임을 지속한 이유는 2020년 총선의 기억 때문입니다. 당시 더불어민주당은 탄핵된 세력이 아직도 국회 권력을 차지하고 있어서 개혁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면서 '확실한 적폐 청산'을 요구했습니다. 결과는 180석 석권이었습니다. 반대로 국민의힘은 제20대 대선에서 '문재인 정부 심판'으로 승리한 기억을 갖 고 있습니다. 자기들이 잘하려고 노력하기보다는 상대를 심판하는 프레임에 매달리는 것입니다. 여당은 국민들이 윤석열 대통령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더라도 문재인 정부 심판을 강조하 면 지지층이 결집하리라고 기대합니다. 이에 대해 민주당 역시 '윤석열 정부 심판론' 외에 다른 전략은 보이지 않습니다. 민생 보다는 야당 탄압을 강조하기에 급급합니다. 이제 모든 것이 이해됩니다. 심판 프레임에서 머무는 한 두 정치 세력은 '나라가 망할수록 자신에게 유리하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인구 소멸도, 세계 질서의 변화도, 에너지 전환이라는 거대한 변환에도 아무 관심이 없습니다. 정부는 국가 경영에 신중을 기할 필요가 없습니다. 정부•여당은 국가의 미래가 아니라 집권 세력, 지지 세력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필사 적입니다. 국정 운영에 대한 책임은 뒷전입니다. 결과가 나쁘(p. 37)면 전 정부와 야당 탓을 하면 됩니다. 야당은 정부가 외교와 경제를 망치고 있으니 반사 이익을 누릴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모두 나라가 망해도 좋은 것입니다. 아니, 망하게 방치할수록 좋습니다. 그 책임을 누구에게 돌리는 게 더 설득력이 있느냐의 문제만 남았습니다. 물론 나라가 망하기 전에 '나의 공천'이라는 더 중요한 문제가 남아 있지만 말입니다(p. 38). 입시와 일자리, 어른들이 흔히 청년들의 삶을 평가하는 기준인 이 두 가지 분야에서 성공했다고 말할 수 있는 비율은 이미 정해져 있습니다. 대한민국에서 90% 청년에게는 '실패'가 예정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른 선진국들이라고 이런 괜찮(p. 46)은 일자리의 수가 훨씬 더 많은 것은 아닐 겁니다. 우리와 비슷한 수준 이상의 경제력을 갖춘 나라들의 성장률도 그렇게 높지는 않을 테니까요. 그럼 무엇이 문제일까요? 두 가지 요인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시간과 공간의 차이입니다. 외환 위기를 맞기 전인 1990년대 중반까지 한국은 고도성장을 지속하던 나라였습니다. 새로운 일자리, 좋은 일자리가 계속 생겨났습니다. 입시 경쟁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청년들 중 다수는 대학을 나오지 않고도 괜찮은 일자리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공부를 못하면 기술이라도 배우라'는 말이 일리가 있었지요. 개인들의 여건은 다르겠지만 누구든 열심히 노력을 한다면 그럭저럭 살아갈 수 있는 사회라고 믿었고, 그것이 어느 정도 사실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어른들은 청년들의 삶이란 자기하기 나름이라고 여깁니다. 그것이 자기들의 생애 경험이었으니까요. 그러나 그 이후로는 달라졌습니다. 7~10% 성장 시대의 경험과 1~2% 성장 시대의 상황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주어진 여건이 어렵거나 한번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면 다시 일어나기가 어려워졌습니다. 외환 위기 이후의 대한민국은 각자도생과 무한 경쟁이 지배하는 '부자 되세요 이데올로기'의 사회가 되었습니다. 이런 시간적 차이의 문턱을 넘어서는 방법이 있습니다. 제도와 생각을 바꾸는 것입니다. 삶에 대한 평가, 곧 행복의 기준을 입시와 일자리가 아니라 더 다양한 요소들이 채우고 그것을 얻(p. 47)을 수 있는 기회가 모두에게 충분히 주어진다면 상황은 달라질 것입니다. 태어난 배경에 따른 기회 요인의 차이를 줄일 수 있는 국가의 복지, 20대 초반에 인생의 방향과 삶의 질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여러 번 다시 도전할 수 있는 기회가 있는 나라, 물질적 풍요 이외에 건강, 자유, 가족, 일에서의 보람, 여가, 친구들과의 교제 등에서 행복을 얻는 사람들, 아마도 이런 것이 행복도가 높은 선진국들에 존재하는 조건일 것입니다. 그런 공간에서는 저성장에도 불구하고 청년들이 절망할 이유가 별로 많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과거의 사고방식과 제도를 지금도 바꾸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세대 간의 인식 차이와 갈등, 청년들의 절망감을 부르고 있습니다(p. 48). 한국이 세계 10위권의 경제 대국이고 BTS와 드라마 〈오징어 게임〉을 가진 문화 대국이라는 자부심에 우리의 어깨가 좍 펴집니다. 그러나 이런 정도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OECD 부동의 1등 항목이 있습니다. 그것도 평균치를 2배나 넘기는 압도적 수치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로 자살률입니다. 지극히 '한국적인' 자살률 한국이 원래 자살이 많지 않았냐고요? 아닙니다. 한국의 자살률(인구 10만 명당 자살자 수)은 1990년 초반까지 OBCD 회원국 가운데 가장 낮은 수준이었고, 자살자 수도 1983년에서(p. 60) 1992년까지는 연간 3천 명대를 유지했습니다. 그런데 이때부터 20년 동안 자살자 수가 급등합니다. 1993년에 4천 명대, 불과 3년 뒤인 1996년에는 5천 명을 넘어섰고 이때부터 상승세가 더욱 가팔라집니다. 매년 1천 명 가까이 늘더니 2005년에는 1만 2천 명이 됐습니다. 12년 동안 인구는 불과 10% 늘었는데 자살자 수는 3배가 된 겁니다. 박명림 연세대 교수(정치학)에 따르면 한국의 자살률에서 중요하게 봐야 할 두 가지 지점이 있습니다. 하나는 지난 30년 동안 OECD 회원국들과 한국의 자살률 추이가 극단적으로 반대 경향을 보여 준다는 것입니다. 1988년에 한국의 자살률은 8.4명으로 당시 OECD 평균인 17.2명의 절반에 불과했습니(p. 61)다. 그러나 1997년에는 13위, 1998년에는 7위로 올라가다가 2003년에 1위를 차지한 이후에는 지금까지 20년 넘게 그 순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이 기간 동안 다른 OECD 국가들의 자살률은 오히려 감소했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한국의 높은 자살률이 전 지구적인 추세나 인류사적 변화가 아니라 순전히 '한국적인' 일임을 의미합니다. 둘째는 자살률이 급격히 높아진 특정 시기가 있다는 것입니다. 한국의 자살률은 1997~1998년, 2001~2003년, 2008~2009년에 각각 크게 증가했습니다. 외환 위기, 카드 대란, 글로벌 금융 위기가 발생한 시기입니다. 이는 한국의 자살이 개인적 • 문화적 요인이 아니라 사회적 · 경제적 요인 때문에 일어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한국 사람들이 다른 나라 사람들보다 많이 자살하는 것은 개인의 책임이 아니라 사회 구조적 원인과 이를 방기한 국가의 책임이라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요인이 가장 치명적이었을까요? 가장 연관 관계가 높아 보이는 것은 '불평등'입니다. 한국의 불평등도는 1990년대 중반부터 급격히 높아집니다. 1994년에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GNI은 막 1만 달러를 넘어섰는데 지금은 3만 달러 수준입니다. 형식적으로는 3배나 잘살게 되었는데 자살자 수도 3배나 늘었습니다. 자살의 원인이 이렇게 구조적인 데에 있다면, 국가가 자살률과 관련해 신경 써야 할 부분도 구조적인 사회경제적 불평등을 줄이는 것이어야 할 겁니다(p. 62). 한국의 자살률 추이가 저출생과도 관련이 있을까요? 2021년 대한신경과학회는 출생률 감소의 가장 큰 원인은 자살률 증가라는 연구 결과를 공개했습니다. 2023년 3월, 서울시자살예방 센터장을 맡은 황순찬 인하대 교수도 대한우울자살예방학회에서 같은 내용을 발표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살이 많은 나라는 아이를 낳지 않는다.' 과연 그렇습니다. 1992~2005년 자살자 수가 330% 늘어나는 사이 출생률은 1.76에서 1.08까지 떨어졌습니다(p. 63). 결국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전체 평균과 달리 출생률과 관련 있는 세대의 자살률은 지속적으로 늘고 있고 그 주요 원인은 지금 행복하지 않다는 것, 미래에 대한 희망도 없다는 것, 그리고 학업과 일자리를 둘러싼 경쟁 체제에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한국의 교육 수준이나 경제 수준이 다른 나라보다 낮은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세계적으로 한국의 문맹률은 낮고 대학 진학률은 높으며 경제는 지속적으로 성장해 왔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때문에 사람들은 죽어 가고, 경쟁 과정에서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는 사람들은 결혼하거나 아이를 낳을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p. 64). 지금 대한민국은 다시는 과거와 같은 고도성장을 경험할 수 없을 겁니다. 그래서 과거에 통했던 시스템이 앞으로도 통할 것이라는 믿음을 이제는 버려야 합니다. 무한 경쟁이 아니라 모두가 행복한 삶을 위해 사회 전체의 시스템을 바꾸지 않으면 우리는 소멸을 막을 수 없습니다. 교육으로 따지자면 최상위권 대학, 인서울 4년제 대학에 집중된 관심과 지원을 수도권 밖 대학과 전문대학, 그리고 대학에 진학하지 않는 청년들에게 넓혀야 합니다. 특히 전문대학이 지방에 많고 전문대학 재학생 중 저소득층과 여학생이 많다는 사실은, 의과대학 정원을 몇 명으로 할 것인가보다 훨씬 중요합니다. 역진적 사회 보장을 누리게 되는 소수의 정규직 일자리가 아니라, 그 밖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다른 일자리에서도 괜찮은 임금과 산업 안전, 보(p. 68)편적 공적 복지와 사회 안전망을 보장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사회 개혁, 제도 개혁의 과정에서 일과 돌봄의 균형, 성별에 따른 불평등 문제도 고려되어야 저출생 문제에 대한 해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대한민국 모든 문제의 시작과 끝 지금 한국은 '자살의 나라'입니다. 그런데 국가적 차원에서 진지하게 자살을 말하는 정치인이나 정당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간혹 저출생•고령화나 지역 소멸에 대응하는 정책이 제안되기는 합니다. 그러나 자살에 대한 이야기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자살은 단지 의료 분야에 한정된 정신 건강 차원의 문제가 아닙니다.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의 문제입니다. 지금 대한민국이 맞닥뜨린 모든 문제의 시작과 끝에 자살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개인의 자살이지만 마지막은 국가의 소멸이 될 것입니다. 지금도 매년 1만 3천 명 정도가 자살로 생을 마감합니다. 하루 평균 36명, 이 글을 읽는 동안에도 이 땅에서 36분마다 1명이 자살합니다. 이런 나라에서 누가 희망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자살률을 낮춰서 사회의 소멸을 막아 보겠다는 정치인과 정당은 과연 없는 걸까요?(p. 69). '가해자에게 스토리를 부여해서는 안 된다'는 원칙이 있습니다. 가해자에게 서사를 부여하는 것은 범죄 행위를 용인하거나 심지어 미화하도록 하고 피해자에게는 말할 수 없는 고통을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원칙을 세우는 이유는 사건을 객관적으로 이해하고, 정의를 바로 세우며, 다음의 모방 범죄를 막(p. 84)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원칙을 구실로 사실은 더 쉽고 나쁜 선택을 해 왔습니다. 가해자를 단순히 '악마화'하는 것입니다. 도저히 납득되지 않는 범죄의 경우 개인에게서 사건의 원인을 찾는 것은 범죄자 검거를 목적으로 하는 수사에서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 수사 기관에는 프로파일러라는 전문가들이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범인을 검거하는 것만으로는 이런 문제에 대처하기에 충분하지 않습니다. 사회적으로 범죄를 예방하고 사후 대책을 마련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것입니다. 대중은, 범인을 잡고 그들이 어떤 일을 벌였으며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에 대해 많은 관심을 기울이지만, 이런 범죄를 근본적으로 예방하거나 줄이는 방법에 대해서는 큰 관심을 갖지 않는 편입니다. 그래서 정부나 국회에서도 이런 일에 열중하는 사람을 찾기란 어렵습니다. 이런 일에는 시간이 걸리고 대책은 복잡하며 정답을 찾기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근본적 대책을 세우는 일이 불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p. 85). 여성들이 결혼하지 않는 것은 육아와 가사에 대한 생각이 이처럼 세대 간, 성별 간에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필요한 것은 여성이 출산 뒤에도 일할 수 있는 사회 인식의 변화와 이를 이끌어 낼 제도적 장치입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말로만 저출산이 문제라고 하고 이런 부분을 고치려는 노(p. 112)력은 별로 하지 않았습니다(p. 113). 백승욱은 《연결된 위기》의 '한반도 핵 위기의 극단적 시나리오'라는 작은 항목에서 그 과정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남북한 사이 공중전 중심의 국지적 위기가 고조되고, 남북한 중간 지대가 분쟁 지역의 특징을 띠게 되며, 이 과정에서 북한의 전투기가 연이어 격추된다. 북한이 남한의 전투기 발진 기지인 남한의 공군 기지를 대상으로 제한적 전술핵을 발사한다. 동시에 북한은 미국이 공격하면 미국과 서울에 전략핵을 쏘겠다고 위협한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분명합니다. 한반도의 소멸입니다(p. 127). 영국의 정치학자 버나드 크릭Bemard Crick은 정치를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 여러 공적인 사안들을 조정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에게 정치란 이견을 '조정'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전에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필수적입니다. 내 의견만 말해서는 정치가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권력을 가진 한 사람만 발언한다는 것은 독재의 강력한 징후입니다. 그런 곳에서는 정치가 소멸하게 됩니다. 정치가 소멸해도 일이 없다면 괜찮습니다. 그러나 정치의 소멸은 생각보다 많은 곳에 영향을 미칩니다. 현대 사회에서는 특히 행정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칩니다(p. 166). 좌든 우든 사람들은 살 만하면 일단은 두고 봅니다. 심지어 부패한 정부라도 유능하다면 참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무능은 선거에서 잘 용납하지 않습니다. 유능한 정부는 우연으로 가능 합니다. 전두환 정부에서 우리나라는 3저 호황을 누렸습니다. 그러나 무능한 정부는 우연이 없습니다. 머리는 빌리면 된다던 김영삼 정부에서 우리는 외환 위기를 맞았고, 결과는 헌정 사상 첫 평화적 정권 교체였습니다(p. 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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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285】 대한민국은 결국 침몰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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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284】 어른이 되어 만나는 나의 ‘내면 아이’
- 누구에게나 성장하지 못하고 멈춘 내면 아이가 있다. 그것이 알게 모르게 성인이 된 후에도 우리의 삶을 붙잡는다. 내게도 분명 멈춰버린 내면 아이가 있고 그것이 여전히 지금도 때로 문제를 일으킨다. 작가는 자신의 내면아이와의 대화를 통해 과거에서 벗어나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각자의 내면 아이를 만나야 한다. 니콜 르페라는 《내 안의 어린아이가 울고 있다》에서 내면아이의 일곱 가지 유형을 보여준다. 첫째는 돌보미 유형이다. 돌보미 유형은 공의존codependency, 즉 자신의 정서적 욕구나 자존감을 상대방에게서 찾으려는 성향을 보인다. 사랑받는 유일한 방법은 자신의 욕구를 무시하고 타인의 요구를 만족시켜 주는 것이라 믿는다. 둘째, 과잉성취 유형은 필사적으로 성공과 성취를 통해 타인에게 인정받으려고 한다. 낮은 자존감을 숨기기 위해 어떻게든 타인의 검증 을 받으려 하며, 사랑받는 유일한 방법은 성공뿐이라 믿는다. 셋째, 저성취 유형의 내면아이는 비판과 실패를 부끄럽게 생각하기에 자꾸만 움츠러들고, 눈에 띄지 않으려 하고, 자신의 잠재력을 맘껏 발휘하지 못한다. 저성취 유형은 투명인간처럼 살기를 꿈꾼다. '밀당'같은 것에는 아예 가까이(p. 9) 가지 않으며, 사랑받는 유일한 방법은 차라리 보이지 않는 것이라고 믿는다. 넷째, 구조자/보호자 유형은 주변 사람들을 열정적으로 구원하려 한다. 다른 사람들을 무력하고 의존적인 존재로 보고, 강력한 힘으로 무장하여 타인이 자신을 우러러보기를 바란다. 다른 사람의 문제를 해결해 주고, 어려움에 빠진 사람을 구하는 것이 사랑받는 길이라 생각한다. 다섯째, 파티 스타 유형은 매우 외향적이고 활기차고 재미있는 내면아이다. 단점이나 힘든 모습을 결코 들키지 않으려 한다. 파티 스타 유형의 내면아이는 행복한 척하고, 주변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줌으로써 사랑받기를 원한다. 여섯째, 예스맨 유형의 내면아이는 자기희생을 추구하여 인정받으려 한다. 어떤 상황에서도 이타적이고 착한 모습을 보이려 하고, 자기희생만이 사랑받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일곱째, 영웅숭배 유형은 끊임없이 자신을 이끌어 줄 지도자를 필요로 한다. 완벽주의를 추구하는 부모 밑에서 자랐을 가능성이 크고, 실수를 두려워하며, 자신의 욕구를 부정하고, 영웅적인 인물을 롤모델로 삼아 그를 성공적으로 모방해야 사랑받을 수 있다고 믿는다(p. 10). 정말 어린 시절의 나를 잃어버린 것일까 조이: 루나, 넌 날 언제 버리기로 결심한 거야? 루나: 내가 널 버리다니, 그 말은 너무 심한걸? 그럴 리가 있니? 내가 날 버리는 거나 마찬가지잖아. 나는 죄책감을 느끼며 내 안의 어린아이, 조이를 바라보았다. 갑자기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만 같았다. 널 버린 적은 없어. 네가 설마 내 안에서 여전히 살고 있는지 미처 몰랐던 것이지. 루나: 조이, 난 널 버린 적 없어. 네 목소리를 잘 듣지 못한 거야. 사실 네가 내 안에 살고 있는지도 잘 몰랐어. 조이: 너무 죄책감 느낄 필요 없어. 어른들은 자주 날 버리니까(p. 50). 어른들은 자기가 어린아이였을 때를 잘 잊어버려. 어릴 때 부모님께 "공부하라"는 말을 듣는 걸 그렇게 싫어했던 어른들이, 자기 아이를 낳으면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이 어떻게든 "공부하라"고 말할 기회를 찾잖아. 술 마시는 부모가 싫었던 사람도 나중에 알코올 중독이 되고, 매 맞는 게 너무 싫었던 사람도 자기 아이를 때려. 어른들은 너무 자주 자기가 어린아이였을 때를 잊어버려. 루나: 조이, 내가 정말 미안해. 내가 널 버린듯한 느낌이 들게 했구나. 난, 사느라 너무 바빴어. 핑계인 걸 알지만. 이 세상에서 그냥 평범하게 살아남는 것조차 나에게는 너무 어렵고 힘든 일이었어. 내 안의 내면아이를 돌봐야 한다는 걸 안것도,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매 일 아침 일어나자마자 벌써 지친 느낌이 들었거든. 조이: 알았어. 널 탓하려던 게 아니야. 그냥 물어보고 싶었던 거야. 언제 나에게서 완전히 멀어졌는지. 그러면 다시, 네가 충격받지 않게, 순한 양처럼 다소곳하게 물어볼게. 루나 너는 언제 날 잊어버리기로 결심한 거야? 루나: 응, 결심까진 아니지만 너와 멀어지게 된 계기가 있어(p. 51). 성적표 사건이야. 조이: 성적표 사건? 초등학교 4학년 때? 루나: 맞아. 그거야. 초등학교 때 최악의 성적표를 받았을 때였어. 그전엔 수나 우만 받다가, 미가 가득한 성적표를 받은 거지. 그런데 더 큰 충격은 성적표를 받아든 엄마의 반응이었어. 난 어릴 때부터 엄마를 정말 무서워했거든. 엄마는 스스로를 호랑이라고 불렀어. 나를 향해 사납게 포효하던 엄마의 모습을 매일 봤지. 지금은 웃으면서 말할 수 있는데, 그때는 엄마가 너무 무서웠어. 그런데 성적표를 본 엄마의 반응이 내 성적표보다 더 충격적이었어. 엄마가 불같이 화를 내며 성적표를 찢어버린 거야. 두 조각으로만 찢어도 충분히 분노를 표현할 수 있었을 텐데, 정말 성적표는 산산조각나 버렸어. 문제는 성적표를 확인하고 부모님께 도장을 받아서 다시 선생님께 들고 가야 한다는 거였어. 왜 내 주변에는 무서운 어른들밖에 없었을까. 따뜻하고 살갑게 나를 위로하는 어른들이 별로 없었어. 모두 화가 나 있었어. 모두 자기 삶을 사랑하지 않았나 봐. 여하튼 나는 선생님이 너무 무섭고, 엄마도 무서웠는데, 그 무서운(p. 52). 어른들 사이에 끼어서 내 성적표가 산산조각나는 것을 지켜보면서 울었지. 조이: 너와 내가 함께 울었지. 어른이 되고 싶은 루나 너도, 아직 어린아이로 머물고 싶은 나도, 함께 울었어. 루나: 그때부터 결정적으로 너와 멀어지기 시작한 것 같아. 어린아이의 놀이 같은 건 다 잊고, 공부를 열심히 하기로 마음먹었지. 공부를 해야만 엄마한테 수치스러운 딸이 되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 시작했어. 뭔가를 잘하지 않으면 엄마에게 사랑받을 수 없을 것 같았어. 뭐든 잘해야만 예쁨 받는 것 같았어. 조이: 그런 건 아니었을 거야. 부모님은 널 사랑하시잖아. 루나: 머리로는 알지. 하지만 마음은 사랑보다 두려움이 더 컸어. 그때의 공포로부터 벗어날 수가 없었어. 아주 오랫동안(p. 53). 조이: 어렸을 땐 우리 모두 똑똑했어. 어릴 땐 오히려 다 알고 있었어. 학교에 가면서, 타인의 시선을 신경 쓰면서, 취직하고, 결혼하고, 끊임없이 사회 속에 적응하면서, 어른들은 어린 시절에 이미 알고 있었던 것까지 잃어버려. 어린 왕자를 떠올려 봐. 조종사는 물을 못 찾을 까 봐 겁내는데, 어린 왕자는 두려워하지 않잖아. 사막이 아름다운 건 어딘가에 우물이 숨겨져 있기 때문이라는 걸, 어린 왕자는 그냥 알잖아. 많이 배운다고 해서 알 수 있는 게 아니야. 많이 배우면서 오히려 원래 알았던 것을 형편없이 잊기도 하지. 넌 두려움으로부터 배운 게 더 많아. 루나: 두려움으로부터 과연 배울 게 있을까. 생각만 해도 머릿속이 캄캄해지는데? 조이: 루나, 항상 넌 두려움에 떨고 있는 사람들 편에서 생각하잖아. 자신감 넘치는 사람들의 편이 아니라. 난 그런 네가 좋아. 항상 더 아픈 사람들, 더 슬픈 사람들의 입(p. 72)장에서 생각하려고 애쓰잖아. 루나: 그러고 싶은데, 마음의 체력이 달려 애는 쓰는데, 자꾸만 아픈 사람들의 마음을 놓치기도 해. 조이: 루나, 너 요새 나한테 숨기는 거 있지? 루나: 뭐? 너한테 어떻게 숨겨. 항상 내 심장에 매달려 다니는 나의 어린 왕자님을. 조이: 아냐, 넌 숨기고 있어. 몸이 약해진 걸 숨기고 계속 무리하고 있잖아. 운동은 전혀 하지 않고. 앉아서 일만 하고 있잖아. 몸이 없으면 내면아이고 성인자아고 없어. 트라우마를 치유하려면 몸부터 챙겨야 해. 거꾸로 트라우마를 치유하면 몸이 건강해지기도 하고. 넌 건강해져야 해. 지금 그 몸 상태로는 트라우마는커녕 작은 스트레스에조차 폭발해 버릴 거야. 며칠 전에도 폭발 했지? 머리 끝까지 화가 나서 분통을 터뜨렸지? 난 다 봤어. 치유되지 못한 트라우마는 유전되거나 혹은 전염된다고 하잖아. 네가 네 아픔을 치유하지 못하면, 네 곁의 소중한 사람들이 같이 다쳐. 루나: 들켰네. 내가 내 몸 못 챙기고, 내가 내 감정도 보살피지 못했다는 거. 정말 신기하게도 《몸은 기억한다》는(p. 73) 책을 보니까, 트라우마가 우리 몸에 엄청난 악영향을 끼친다는 이야기가 나오더라고. 나도 모르게 그 책에 이끌려서 읽어 보니까, 딱 나에게 하는 말 같았어. 몸과 마음은 아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어서 마음의 상처가 몸으로 전이되어 병이 될 수도 있고, 반대로 마음이 나아지면 몸도 나아질 수 있다는 사례를 설명하는 책이야. 그런데 변명을 하자면, 어른들은 자주 몸의 소중함을 잊어버리곤 해. 자기 자신보다 일을 중시해. 하지만 일에 대한 욕심이 자기를 망치고 있다는 걸 잘 모르지. 조이: 그래. 넌 항상 말은 잘하더라. 다른 사람들에게는 온갖 위로의 말들을 화려하게 잘도 챙겨주면서. 넌 너 자신을 위로하는 법을 몰라. 너는 쉬고, 놀고, 뛰고, 몸을 움직여야 해. 넌 마음만 움직여서 세상을 바꾸려고 하더라. 그래서 네 몸에 갇혀 있는 난 항상 갑갑해. 하루 종 일 의자에 몸을 결박해 놓고 책상머리에만 앉아 있으려고 하는 너 때문에, 예전처럼 아무 멀리, 아주 오래, 여행을 떠나줘. 하루 종일 온 세상을 바지런히 걸어줘. 때로는 마라톤 선수처럼 끝없이 달리고 또 달려봐. 일을 위해서가 아니라 네 안의 어린 왕자를 위해, 나를 위(p. 74)해, 그렇게 해줘. 내가 숨 쉴 수 있게. 내가 어린 왕자처럼 커다란 세상을 만날 수 있게. 루나: 내 몸이 문제였구나. 쉴 줄 모르고, 놀 줄 모르고, 내 영혼을 끊임없이 가두려고만 하는 내 몸이. 조이: 자전거 못 타고, 수영 못해도 괜찮아. 하지만 지금 배우는 것도 늦지 않았어. 살아있는 한, 끊임없이 네 안의 어린아이를 끌어내도 괜찮아. 루나: 너무 창피해. 이 나이에 어떻게 자전거를? 수영을? 조이: 넌 어린 시절의 너를 잊어버렸구나. 너 자전거도 탔어. 수영도 했어. 그런데 잊어버렸지. 폼이 어색하다고, 비틀거린다고, 누군가 지적하고 나서, 그때부터 자전거 안 탔잖아. 수영도 서툴지만 조금은 할 줄 알았는데, 어느 순간 물을 무서워하게 되었잖아. 안 된다고 생각하 고, 넌 안 된다고 스스로 자책하면서. 안 된다고 생각하지 마. 배려 없이 남을 비판하는 사람 말을 왜 듣니. 어린애가 수영 배우는데 잘 못할 수도 있지, 그걸 이상하다고 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이상한 거지. 안 된다는 생각이 널 그렇게 만든 거야(p. 75). 조이: 루나, 어른이 된 너의 기억은 좀 아름답게 윤색된 것 같아. 난 그때 많이 외롭고 힘들었어. 엄마 아빠는 도대체 왜 내 곁에 없었던 거야. 어떻게 딸을 어린이날에 그렇게 혼자 있게 내버려둘 수 있어. 다들 너무해. 조이는 아직도 입술을 비쭉거리며 나를 어처구니없다는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루나: 그래, 부모님은 분명 급한 사정이 있었을 거야. 어떤 상황이었는지 기억은 안 나지만. 날 혼자 내버려 둘 분들이 아니야. 그리고 J를 보냈잖아. J도 겨우 열여덟이었으니 친구랑 놀고 싶었을 거고. 어쩌면 그때 난 겨우 아홉 살이었으니까 홀로 낯선 동네를 헤매는 상황에서 신기함보다 외로움이 더 컸을 거야. 하지만 어른이 되(p. 98)어보니 그런 시간이 소중했다는 것을 알겠어. 추억은 항상 다른 빛깔로 채색되거든. 기억은 현재 내가 어떤 사람인지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져. 어른이 된 나는, 혼자 있는 시간이 좋아. 물론 365일 혼자 있을 수는 없지 만, 혼자 글 쓰는 사람이 되었잖아. 혼자 책 읽고 글 쓸 수 있는 시간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참 기쁘고 좋아. 이런 사람이 된 이후로 혼자 있었던 순간이 새로운 의미로 다가오더라. 어릴 때는 심심하기도 하고, 외롭기도 하고, 막막하기도 했던 그 순간이, 어른이 되니 '혼자 있음의 자유'를 경험했던 소중한 시간으로 다시 채색 되는 거야. 다행이지 않니? 슬픈 기억조차도 아름답게 다시 채색될 기회가 있는 거잖아. 그렇지 않니, 조이? 조이는 한참 내 눈을 뚫어져라 바라보더니, 환하게 미소 짓기 시작했다. 어떤 양을 그려줘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떼를 쓰던 어린 왕자에게 조종사가 '빈 상자' 하나를 아무렇게나 그려주니, 그제야 마음에 든다며 자신이 꿈꾸던 바로 그 양이 상자 안에서 곤히 잠들었다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은 것처럼. 내 안의 내면아이 조이는 그제야 내 이야기에(p. 99) 공감하는 얼굴이 되었다(p. 100). 조이: 루나, 넌 또 자기 자신을 낮추고 있구나. 재능이 어중간(p. 125)하다는 생각도 너무 어른스러운 판단이야. 난 누군가가 정말로 무언가에 대해 열정을 갖고 있다면, 일단 한번 끝까지 가봐야 한다고 생각해. 달리기든, 그림 그리기든, 노래 부르기든, 과학실험이든, 그게 뭐든! 정말로 꿈꾸는 것이 하나라도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이야! 넌 계속 꿈꿀 자격이 있었어. 그런데 꿈꾸는 것을 너무 쉽게 포기하고, 어른들이 가라고 하는 길로 가버린 거야. 루나: 그래, 네 말이 맞아. 하지만 그럴 용기가 없었지. 초등학교 6학년 때, 우리 학교 합창단 피아노 반주를 했거든. 그때가 참 좋았는데, 왠지 그런 시간은 이제 다시 오지 않을 것 같더라고. 그 피아노 연주를 끝으로 피아노 학원에 나가지 않았어. 공부만 열심히 해야겠다고 결심했지. 피아노를 연주하는 것은 참 좋은데, 나만 혼자 그 피아노 의자에 앉아있는 것이 너무 외롭더라고. 아무도 가지 않는 길을 나 혼자 걸어가는 느낌이었어. 그렇다고 다른 아이들처럼 합창단의 한 파트를 맡아 노래하고 싶지는 않았어. 피아노 의자 위에, 꼭 앉아 있고 싶었어. 아무리 외롭더라도, 하지만 부모님이 예중, 예고에 보내주시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지. 그런데 더(p. 126) 가슴 아픈 것은, 아빠가 나를 예중, 예고에 보내주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말씀하신 거야. 아빠는 내 마음을 어렴풋이 이해하고 계셨던 거지. 엄마 아빠가 공부하라고 다그치실 때는 무섭고 두려웠지만, 그렇게 내 마음을 이해해 주실 때는 천군만마를 얻은 듯 기뻤단다. 우리는 서로 사랑했지만 서로에게 완벽한 존재일 수가 없어. 부모와 자식 사이는 항상 그래. 하지만 완벽한 사랑은 없어도, 완벽한 존중은 가능하지. 부모님이 좀 더 자주, "네가 가는 길을 완전히 응원해 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표현해 주셨다면, 그 후로도 오랫동안 잘 지냈을 텐데. 그때 잠깐뿐이었지. 그 후로 오랫동안 내가 가는 길을 반대하셨어. 지금은 내 나이가 너무 많아서 어쩔 수 없이 이해해 주시지만, 하하!(p. 127). 조이: 다시 한 번 이야기해 봐. 난 그날 도대체 왜 그렇게 슬펐던 거야? 루나: 과학실습실이었어. 비커와 시험관이 가득한 실험실이었지. 그 전의 기억은 잘 나지 않는데, 이미 담임 선생님이 나를 싫어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는 했어, 담임 선생님이 날 싫어한다는 건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은 공포였지. 도대체 왜 나는 선생님의 눈 밖에 난 것 일까.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선생님이 우리 엄마에 게 촌지를 요구했대. 그런데 엄마가 학교에 못 갔대. 그 일 이후로 내가 미움을 받은 것 같다고, 엄마가 나중에(p. 142) 내가 어른이 되고 나서 이야기해 주었지. 차라리 몰랐으면 좋았겠더라. 그 시절엔 어떻게 교사가 학부모에 게 당당히 촌지를 요구할 수 있었지? 엄마는 잔뜩 겁을 먹었대. 내 자식에게 피해가 갈까 봐. 그때 우리 막내가 너무 어렸거든. 엄마는 그 세 살배기 아이를 혼자 내버려두고 학교에 갈 수는 없었어. 그리고 엄마가 촌지를 주지 않은 것은 참 잘했다고 생각해. 그 당시에는 정말 파렴치하게도 학부모에게 적극적으로 촌지를 요구하는 선생님들이 있었대. 참 기막히지. 그런데 그런 영문을 전혀 모르던 내가, '촌지'라는 단어도 몰랐던 내가, 선생님 눈치를 보느라 겁을 먹은 나머지 비커를 깨버린 거야. 그날의 그 공포를 기억해. 선생님이 나를 예의 주시하는 것이 느껴졌거든. 50명이 넘는 아이 중에, 선생님이 유독 나를 노려보는 것이 느껴졌어. 그러니 더 떨리더라고. 내가 이 비커를 깰 것 같다는 두려움이 엄습했고, 정말 무슨 예언이 이루어지기라도 하는 것처럼, 비커가 와장창 깨져버렸지. 조이: 이제 기억 나. 두려움 때문에 기억들이 마구 엉망진창으로 뒤죽박죽이었는데, 네가 조리 있게 설명해 주니(p. 143)까 생생하게 기억이 나, 루나. 루나: 그래, 비커가 깨진 순간, 선생님의 그 차가운 눈빛을 영원히 잊을 수 없지. 선생님의 이름도, 선생님의 얼굴도, 선생님의 목소리도 정확히 기억나. 사람을 그 자리에서 완전히 얼어붙게 하는 맹렬한 차가움을 간직한 목소리로, 선생님은 나에게 말했지. "또 너니?" 난 이해할 수가 없었어. 내가 무얼 잘못했는지도 모르는 애한테, 왜 '또 너니'라고 말했는지. 게다가 비커가 깨졌는데, 열 한 살짜리 아이인데, 나라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다가가서 괜찮냐고, 다치지 않았냐고, 그것부터 물어볼 것 같거든. 그런데 쉰 살이 넘은 어른이 열한 살짜리 아이를 그렇게 찍어놓고 미워한다는 것이 지금도 잘 이해가 안 돼. 아무리 촌지에 목마른 닳고 닳은 사람일지라도 말이야.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었을까. 조이: 루나, 너도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했구나. 어른이 되어도 다 이해되지 않는 것이 있는 거구나. 어쩐지 마음이 놓여, 어른이 되면 다 이해할 수 있게 되는 줄 알았어. 루나: 응, 아무리 모든 정보를 종합해서 생각해 봐도, 쉰 살이 넘은 어른이 어린아이를 그토록 격렬하게 미워할 수(p. 144) 있다는 것이 잘 이해되지는 않아. 그리고 사람은 자기 마음을 비춰서 타인을 바라보게 마련이거든. 자기가 할 수 없는 일을 타인이 했을 때, 아무리 노력해도 이해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지. 조이: 그래서 너무 착한 사람들은 사악한 사람들을 이해 못 하는 거구나? 사악한 사람들은 착한 사람들을 이해 못 하고, 자기처럼 나쁘고 고약한 구석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루나: 맞아, 사람들은 자기 마음에 비춰서 타인을 바라보는 습관을 버리기가 너무 어렵기 때문에, 타인을 이해하는 데는 엄청난 노력이 필요한 거야(p. 145). 당신을 아직도 잠 못 이루게 하는 아픈 기억이 있나요? 그 기억이 당신의 어떤 가능성을 붙잡고 있는 것일까요? 당신의 핵심 트라우마를 기억하는지요? 당신의 삶에서 가장 아팠던 기억들, 그중에서도 유독 더 아픈 기억이 있다면, 그것이 당신의 핵심 트라우마입니다. 그 트라우마를 아무도 볼 수 없는 곳에 적어두세요. 기록하다가 눈물이 나거나 너무 힘들면, 잠시 멈추어도 됩니다. 그리고 기운을 다시 차리면 다시 기록해 보세요. 핵심 트라우마를 다 적고 나서, 그 기록을 일주일에 한 번씩 열어보세요. 그리고 그 핵심 트라우마 중에서 '내가 이렇게 했다면 좋았을 텐데'라는 생각이 드는 부분들을 적어보세요. 두꺼운 노트가 필요할지도 모릅니다. 넉넉하게 나의 생각을 적어둘 수 있는 노트를 마련하고, 되도록 종이와 펜으로 내 손을 움직여 트라우마를 기록하고, 그 상처를 지금의 나라면 어떻게 극복하고 싶은지, 6개월 동안 매주 써보세요. 그리고 1년 후, 2년 후에도 써보세요. 그렇게 우리는 핵심 트라우마와 대면하고, 조금씩 친밀해지고, 그리하여 마침내 트라우마를 간직한 채로도 앞으로 조금씩 나아가고 있는 나 자신과 만날 수 있습니다(p. 162). 조이: 가엾은 루나, 넌 그렇게 세상의 더러움에 쉽게 감염되고 물들어 버리는 그런 사람이 아니야. 넌 항상 아이들의 환상 속 세계를 이해했잖아. 피터팬과 웬디는 물론 온갖 어린 시절의 이야기들 속에서 넌 항상 너만의 네버랜드를, 어린 왕자와 조종사가 마지막으로 헤어진 그 아름다운 사막의 모래언덕을 잊지 않으려 발버둥을 쳤잖아. 네가 아름다운 시와 소설을 읽을 때마다, 나는 귀를 쫑긋하고 너의 낭독 소리를 듣곤 했어. 그거 알아? 어른들이 아름다운 문학작품을 읽을 때마다, 어린 시절의 동화를 다시 한 번 열심히 읽을 때마다, 어른들 속의 내면아이는 좋아서 팔짝팔짝 뛰어. 어른들이 '갑자기 내가 왜 이러지?' 하고 갸우뚱하면서 때아닌 어린 시절 동화책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내면아이는 미친 듯이 설레고 두근거려. 어른들이 내면아이에 게 다가오는 가장 어여쁜 발자국 소리야. 루나: 동화책 페이지를 다시 넘기는 소리가? 조이: 응, 어린아이들의 미소를 뿌듯하게 바라볼 때도. 이제는 아무 상관 없는데 왜 어린 시절의 동화책들이 그리(p. 233)워지는 걸까, 골똘히 생각하는 것도. 어린 시절의 동네 놀이터에 다시 가볼 때도, 놀이터의 그네를 다시 타는 순간도. 그 모든 순간이 내면아이의 심장에 문을 두드리는 소리야(p. 234). 이제 너무 늙고 약해진 엄마에게 때늦은 사과를 받아봐야 뭐하겠냐고 하시겠지만, 사과는 분명 의미있어요. 저도 그렇게 부모님의 사과를 뜻밖의 순간에 받아낸 적이 있거든요(웃음). 지금은 웃으면서 말할 수 있지만, 그때는 정말 심각했어요. 엄마에게 왜 날 가둬 키우기만 했냐고. 아이들(p. 261)과 제대로 놀지도 못하게 하고, 항상 집에 들어오는 시간만 체크하고, 공부만 열심히 하라고 강요하는 그런 엄마가 너무 미웠다고 다 이야기한 적이 있었어요. 사실은 그때는 엄마를 안 볼 생각이었어요. 다신 안 보겠다는 각오를 하고, 엄마에게 서운한 걸 다 이야기해야겠다고 마음먹었지요. 저는 당연히 엄마가 늘 그랬듯이 화를 내고 저를 혼내실 줄 알았어요. 그런데 놀랍게도 엄마가 미안하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때가 엄마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들은 최초의 순간 이었어요(p. 2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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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284】 어른이 되어 만나는 나의 ‘내면 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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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283】 삶을 사는 몇 가지 방법들
- 이 책의 원제목은 Rules for Aging이다. 그런데 크게 공감 가는 것들은 몇 가지 없고 나머지는 아는 것들이거나 공감이 되지 않는 것들이다. 아마 동서양의 차이 때문인 것 같기도 하다. 지혜롭게 나이 들어야 한다는 생각은 늘 하고 있고, 늙음에 대한 책도 관심 있게 읽고 있다. 당신만 생각하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물론 나도 알고 있다. 당신은 어제의 친구들이 적으로 변해간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단골 가게 주인, 미화원, 목사, 시누이, 하다못해 당신이 키우는 개마저 당신의 몸무게가 늘고 있다고, 당신이 무감각해지고 있다고, 당신이 제정신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처럼 느껴질 것이다. 게다가 당신은 모든 사람들이 당신을 불성실한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당신이 열심히 해놓은 일을 폄하하기 위해, 당신을 해칠 계략을 꾸미기 위해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확신하고 있다. 하지만 장담하건데, 당신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p. 15)다. 그들은 자신만을 생각하고 있다. 바로 당신이 당신 자신만을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p. 16). 모든 사람의 작품은 훌륭하다 이 법칙은 처음 만나 생판 모르는 사람이 당신을 자기 작품을 평가할 수 있는 사람으로 무조건 결정했을 때 적용하면 좋다. 누군가 오늘날까지 세상에 한 번도 드러내 보이지 않은 자신의 그림, 요리, 조각 작품, 드레스 디자인, 사랑 노래, 또는 존 고티의 삶에 대한 3만 행에 이르는 길고 긴 희비극 서사시를 당신에게 보여주었다고 치자. 그들도 이런 요구가 당신에게 부담스럽다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정말 당신의 의견을 존중하기에 '솔직한 의견'을 듣고자 한다. 이런 일이 생기면, "아주 훌륭하군요."라는(p. 70) 말만 하라. 다른 말은 한마디도 더하지 말라. 따뜻하게 악수를 나누고, 등을 한 번 툭 쳐주고, 씩 웃고, 그 자리를 떠나라. 설사 그들이 '훌륭하다'라는 말 이외의 다른 것을 듣고 싶어 한다 하더라도, 당신이 도울 수 있는 일은 이 정도면 다 한 것이다(p. 71). 다른 사람을 개선하려 하지 말라, 그에게 도움이 될 거라는 걸 안다 해도 다음은 언제든지 흔히 일어날 수 있는 상황이다. 여기 당신의 친구, 친척, 고용인, 고용주, 직장 동료가 있다. 그들은 세상 사람들 모두가 알고 있는 자신들의 결점을 모르고 있다. 그리고 당신은 그저 솔직하고 상처를 주지 않는 대화로 그들에게 무엇이 문제인지 가르쳐줄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다. 당신에게 지적을 받은 그들은 환한 빛을 보듯 자신들의 결점이 무엇이었는지 깨닫는다. 그리고 당신의 친절하고 용감한 행동을 언제 까지나 고맙게 생각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는 얌전하게 있는 편이 더 낫다. 당신이 그들의(p. 104) 불쾌한 테이블 매너에 대해서, 옷을 고르는 취향에 대해서, 큰 소리로 떠드는 버릇에 대해서, 말귀를 잘 알아듣지 못하는 눈치 없음에 대해서, 편집증에 대해서 알려주는 바로 그 순간부터, 그들은 즉시 그 문제점들을 고치려고 애쓸 것이다. 그들의 행동이 점점 나아짐에 따라 그들의 삶도 구제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개과천선한 자신에 대해, 그리고 미래의 모든 행복에 대해서 당신에게 빚진 기분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래서 무슨 일이든 당신에게 정직하고, 솔직하고, 숨김없이 드러내려 할 것이다. 제발 두 손 모아 빌겠다. 개선의 뮤즈가 당신 귀에 대고 '저 사 람의 잘못을 고쳐서 다른 사람으로 만들어봐.' 하고 속삭일 때, 힘껏 그 뺨을 내리쳐라. 제2의 법칙을 상기해보라. 당신이 그들에게 무엇이 문제인지 말하지 않는다면, 어느 누구도 당신 생각을 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지적한 다음 정말 그들이 당신 생각을 하고 있다는 확신이 들 때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때는 그들이 당신을 죽이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다(p. 106). 자기반성은 적당하게 해야 오래 산다 프로이트 이후 1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사람들은 끊임없는 자기반성이 정신 건강에 좋다고 믿으며 살아왔다. 문제는 그 결과 이 말이 자신들에게 얼마나 비참하고 비정한 족쇄로 작용했는지를 깨닫지 못한다는 데 있다. 어느 정도의 자기 실험 혹은 자기반성은 좋은 일일 수 있다. 물론 이 경우에도 자기반성이란 주어진 상황에서 자신이 꼭 해야 할 일에 정확한 방향을 잡아 나가는 것이어야지, 결코 다른 것으로까지 밀려나서는 안 된다는 전제가 따른다. 당신이 매일 밤낮을 자기비난으로 채운다 해도 결국 당신 자신이 불완전한 사람이라는 점에서는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p. 136) 못할 테니 말이다. 이번 법칙은 이런저런 일이 일어났을 때 어떻게 행동해야 적절한가 하는 문제와는 전혀 다른 문제다. 만약 자신에게 정직한 사람이라면 2분 동안 자기반성을 할 것이고, 자신에게 정직하고 싶지 않다면 5분 동안 자기반성을 한 다음 당신 방식대로 진실을 만들어나갈 것이다. 이 두 가지 모두 싫다면, 다시 말해 자기반성 같은 것에 매달리고 싶지 않으면 생각을 외부로 옮겨라. 달리기를 하라. 꽃병을 만들라. 책을 읽으라. 그렇다. 책 속에는 비참한 인생의 실험이 수없이 많이 들어 있다. 책에서 펼쳐지는 인생 실험을 즐겨라(p. 137). 묵묵하게, 그리고 꾸준히! 이것이 경주에서 이기는 비결이다 당신에게 사람들의 정신을 번쩍 들게 만들 만큼 특별한 재능과 능력이 있다면, 그 일은 아마 당신이 처음부터 잘하는 일이었을 것이다. 수많은 세월 동안 그 일을 해왔던 당신은 이제 우울한 감상에 젖어, 칭찬과 찬사가 끊이지 않았던 초창기 시절을 돌아보고 있다. 당신은 옛날에 느꼈던 자극과 흥분을 다시 불러일으키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 그렇다고 걱정하지도 말라. 만약 당신이 지금 하고 있는 일로 사람들의 관심을 얻으려 한다면, 당신은 당신과 전혀 닮지 않은 다른 무언가를 하게 되기 십상이며, 그 결과 사람들은 당신이 눈에 띄지 않게 조용히, 하지(p. 145)만 행복하게 해오고 있었던 그 일에 대해서조차 잊어버리고 말 것이다. 현대인이 깨닫기 가장 어려운 덕목 중 하나가 바로 이 꾸준히 능력을 쌓아가는 것이다. 이 말은 요즘 유행하는 새로움, 혁신, 그리고 흥분과는 반대되는 개념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누가 만족스러운 삶을 살고 있는지 보라. 바로 꾸준하게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자신들은 비록 인식하지 못한다 해도 많은 사람들이 그들을 아주 중요하게 여기고 많은 감사를 보내고 있다. 어떤 일에 흥분한다는 것은, 그것을 감당할 수 있는 젊은이들에게나 해당되는 것이다(p. 146). 모든 사람이 모든 일에 대해서 감사하기를 기대하라 물론 농담이다. 어느 누구에게도, 어떤 일에 대해서도, 감사 인사 같은 건 기대하지 말라. 이 말은 이 넓은 우주 차원에서 당신이 감사받을 자격이 없다는 것도 아니고, 또 감사를 받지 말라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여기는 지구라는 세상이다. 이 지구에서는 당신이 어떤 좋은 일을 하고 그 일에 대한 감사 표시를 기대한다면, 당신에게 돌아오는 것은 화를 내는 당신 모습과 쓸데없는 일에 말려드는 것뿐이다. 결국 아까운 시간만 허비하고 만다는 이야기다. 가뭄에 콩 나듯, 당신이 베푼 친절이나 연민 또는 관대한 행위(p. 158)에 대해서 감사를 표시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쓸데없이 참견하지 말라. 건강에 나쁘니까. 다른 사람에게 아무런 기대도 하지 말고, 그냥 조용히 앞으로 계속 가라. 그래야만 행여 - 물론 그럴 경우는 아주 드문데 - 누군가 당신에게 감사를 표시할 때, 심장마비를 일으키지 않을 수 있다. 심장마비에 걸리면 죽을 수도 있다(이걸 가르쳐준 나에게 고마워하지 않아도 된다.)(p. 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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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283】 삶을 사는 몇 가지 방법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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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282】 세상이 변하고 있는데 자신의 경쟁력은?
- 세상이 변하고 있다. 이전의 생각에 머물러 있다면 도태는 분명하다. 세상의 흐름을 알고 따라가야 한다. 그리고 앞서가야 한다. 그래야 살아남을 수 있다. 평생 공부하고 방향을 찾아가야 한다. 각자의 역량을 키워야 생존할 수 있다. 무엇보다 가장 경계할 것은 학력만이 전부인 이력입니다. 다른 이에게 무엇인가 이로운 것을 주는 행위를 사회적 성취라 정의한다면, 배우는 이유는 깨치고 얻은 지혜를 모두에게 돌려주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학력은 사회적 성취의 단계에서 필요한 준비일 뿐, 그 자체가 성취라 보긴 어렵습니다. 학력을 얻기까지의 과정이 치열하다 해(p. 72)서 학력 그 자체를 성과로 평가하는 사회는 돌려줌 없는 이기적 인간을 양산할 수 있습니다. 학벌을 성취라 생각하고 안주하는 이들도 있지만 이내 그것을 잊고 겸허하게 끊임없는 노력을 경주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권위의 명패를 벗어 던지고 일신하며 나아가는 이들에게 학위의 끝인 졸업은 새로운 시작을 의미합니다(p. 73). 언어 표현은 현행화를 게을리하면 다음 세대의 혐오를 받습니다. 대상을 타자화시키지 않도록 계속 사유해야 합니다. '유니섹스unisex'라는 말은 '젠더리스genderless'라는 표현으로 진화합니다. 유니섹스는 '내가 옷을 만들었는데 남성도 여성도 입을 수 있다'라는 것입니다. 이에 반해 젠더리스는 '성 구분 자체를 하지 말자'라는 것입니다. 이 모든 변화가 결국 생각의 변화와 연결되기 시작하여 이전의 고정관념은 자연스럽게 거부됩니다. 과거에는 영화 〈300〉의 주인공들처럼 근육과 활동성이 뛰어난 남성을 이상적으로 규정했다면 요즘은 달라졌습니다. 화장품 광고 모델, 색조 화장 전문가로 남성이 등장합니다. 여성이 근육을 만들고 뽐내는 것도 각광받고 있습니다. 사회 문화적으로 성에 대한 고정관념과 역할에 대한 족쇄가 풀리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남성적', '여성적'이라는 표현도 적절치 못한 표현으로 꺼려지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젠더리스라는 말조차 구분을 전제로 한다는 의견도 있으니 표현은 끊임없이 현행화해야 합니다. 관행적 표현과 차별적 인식을 형성할 수 있는 언어를 새로운 표현으로 대체해야 합니다. 익숙한 표현일지라도 변화한 사회에 맞추어 낯설게 바라보고 세심하게 언어를 재정의 할수록 계속 새로운 세계가 열립니다(p. 85). 대학 졸업을 앞둔 어떤 청년들은 부모가 '너 뭐 할건데?'라고 묻는 순간 당황해한다고 합니다. '대학을 가라고 한 것은 부모님인데 왜 나에게 묻지?'라는 생각이 든다는 것 입니다. 이미 부모의 발 빠른 정보력으로 중국어과에 간 선(p. 160)배들은 조선족 중국인과 경쟁해야 하는 입장에 놓이게 됩니다. 통번역 대학원에도 태어날 때부터 이중 언어를 사용한 네이티브들이 입학한다고 합니다. 이 모든 광경이 장님이 장님을 이끌고 간 결과입니다. 부모들은 먼저 살았다는 이유 때문에 아는 척해야 하는 책무에 놓여 있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부모가 해야 할 일은 '나도 잘 몰라, 함께 고민하며 탐색해 보자' 라고 하는 것입니다. 입시 과정과 사교육은 고도화되었는데 입시 후의 대학 생활과 진로에 대한 논의는 유예되었습니다. 행위는 전문화되었으나 목표는 전문화되지 않은 것입니다. 그렇기에 이제는 과거와 현재의 단서만으로 미래를 단정 지어 진로와 교육을 이야기할 것이 아니라, 사회 변화와 다가올 미래를 제대로 고민해 보아야 합니다. 그 변화에 맞추어 다음 세대의 기여를 고민해 보아야 합니다(p. 161). '인재는 영입하는 것이지 육성하는 것이 아니다.' 이런 흐름에 따라 리더의 역할 변화도 분명해집니다. 이제 작업 프로세스에 참여하지 않고 작업 분배와 공정 점검, 결과의 취합만 맡는 전업 관리 모델은 구성원들이 동의하지 않습니다. 작업 공정이 시스템에 의해 실시간으로 투명하게 보일수록 '무임승차자'와 '군림하는 사람'은 더욱 설 자리를 잃게 됩니다. 그러니 리더에게는 더 깊은 통찰력과 더 높은 전문가적 자세가 요구됩니다. 핵개인들이 함께 일하는 동료 의 전문성을 알아보는 안목을 키울수록, 훈수만 두고 결과물만 취하려는 구성원이나 '20년 차 나이테'를 관록의 증거로 들이대는 관리자는 숨을 곳이 없습니다. 회사의 문화와 사규도 핵개인들의 성향을 반영해 계속 갱신되는 중입니다. 이제 리더와 구성원은 서로의 재능과 역할을 어떻게 조합하고 협력할지, 새로운 상호작용의 규칙을 정해야 합니다. "내가 신입사원이던 시절에는 과장만 달면 아무 일도 안 했는데." 20년 차 부장님들의 하소연은 이제 어림없는 이야기입니다. 지금 시대는 경험이 아니라 지혜가 자산입니다. 같은 상황이 반복된다면 먼저 경험해 본 자가 유리할 수 있지만,(p. 179) 환경 변화가 빠르면 경험이 독이 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생성형 Al로 빠르게 학습하며 새롭게 적응하는 구성원들은 '내가 해봐서 아는데'라는 상급자의 말을 소음으로 믿고 거릅니다. 이제는 각 개인의 축적된 경험보다 집합적으로 축적된 지혜와 어떻게 협력할 것인지가 중요해집니다. 그러니 '나는 20년 동안 나만의 경험을 쌓아왔다'라는 자신감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지혜의 원료는 네트워크상에 있기에 딱딱한 권위의 액상화는 점점 더 가속화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대중에게 울림을 주는 서사의 핵심은 목표가 아니라 의미입니다. '내가 이 회사에 20년을 다녔는데...,' '1 만 직원들과 함께 10조 매출을 냈는데' 같은 말에 감동적인 리액션을 해줄 인구 집단은 거의 남아 있지 않습니다. 청년들의 반응은 더욱 싸늘해서 '그래서 어쩌라고.'라는 표정입니다. 수치화된 업적만으로는 존경을 이끌어내지 못합니다. 그때그때 여건과 환경 변수는 모두 다르기 때문입니다. 구성원들이 기대하는 것은 당신만의 서사입니다. 당신이 그 일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 기여가 얼마만큼 치열했는지. 그 맥락이 있다면 꽤 괜찮은 선배 직업인으로 마땅한 존경을 받을 것입니다. 그게 아니라면 '과거의 권세를 그리워하는 노(p. 180)회한 직장인'으로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p. 181). 통상 제조업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제품이 많이 팔리면 마진율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공급량을 늘리려 합니다. 시장 경쟁으로 인해 마진에 한계가 있기 때문에 이들은 양적 팽창으로 규모를 늘려야만 성장이 유지된다고 생각합니다. 하이엔드 시장은 일반 시장과 전혀 다른 규칙으로 움직입니다. 유럽의 럭셔리 브랜드는 마진의 한계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샤넬은 매년 가격을 올리고, 올릴수록 더 잘 팔립니다. 그들이 파는 것은 선망입니다. 똑같은 산업에서 값이 갈수 록 오르는 물건과 가격이 계속 떨어지는 물건이 있다면 여러분은 어떤 물건을 사고 싶습니까? 하이엔드는 개별성과 고유성이 교차되는 장소입니다. 그러니 기업도 개인도 여기서 돌파구를 찾아보아야 합니다. 소량을 만들고, 단가는 높이고, 세계로 가는 것이 옳습니다(p. 197). 이연된 보상, 불공정한 거래 효도가 대를 이은 보상의 체계라면 그 보상의 적정선은 어느 정도 수준인가도 궁금합니다. 인생칠십고래희라는 말처럼 기대 수명이 70세가 안 되던 시기라면, 유아기부터 청소년기까지 20년 동안 받은 양육의 은혜를 부모의 60세 이후 갚아 나가는 것이 꽤 합리적인 기준으로 보입니다. 더욱이 부양의 어려움을 나눌 수 있는 형제자매가 두세 명 이상 존재했기에 1인당 모시는 기간은 20년이 채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떠한가요? 1990년 이후 출생률이 1.x 명대를 지나 이제 0.x명대로 향하고 있습니다. 반대로 장수의 축복은 기대 수명 100세 시대를 향하고 있습니다. 한 명의 자식이 두 분의 30년이 넘는 여명을 책임져야 한다면 60(p. 221)년의 돌봄이 책무로 다가오는 셈입니다. 아버지와 어머니 양가 각각 할머니, 할아버지까지 생존하시면 한 명의 젊은이가 6명의 노인을 돌봐야 하는 일도 생깁니다. 20년 양육의 되 갚음이 산술적으로는 누계 100년 이상의 돌봄으로 길어질 터이니 효도란 다음 세대에게는 불공정한 거래로 다가올 수 밖에 없습니다. 한국 사회의 가장 큰 특징은 '이연된 보상'입니다. 부모의 은혜는 하늘과 같기에 다 갚을 수도 없다고들 합니다. 그러하기에 한참 후 부모의 삶이 쇠약해졌을 때 보은합니다. 스승의 은혜 역시 너무 크기에 카네이션을 다는 것만으로는 갚을 수 없다고 합니다. 선배의 은혜 역시 후배에게 베품으로 갚아 나갑니다. 이처럼 이연된 보상은 지금의 상하관계가 지속적으로 구조화되길 희망하며 집단이 하나의 유기체처럼 흘러가도록 작동합니다. 연공서열과 기수 문화 모두 이런 이연된 보상의 산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처럼 유동성이 커지는 시기가 오면 이 보상 체계에 반론을 제기하는 목소리가 커지기 마련입니다. 경력의 연한이 짧은 사람들이 더욱 적극적으로 시장 가치에 맞는 성과급과 급여 현실화를 요구하는 것은 이 시스템에 대한 그들의 의문을 반영합니다(p. 223). 그러면 어떻게 될까요? 한쪽에서는 '오래 다니면 이익을 보니 당신도 수혜자다. 그러니 기다려라'라고 합니다. 그러나 다른 한쪽에서는 '좋은 이야기지만 난 곧 그만둘 것이다' 라고 합니다. 현재의 환경과 역학이 항구적이라면 이 전제의 수혜는 믿을 만합니다. 그저 기다리기만 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저성장과 세계화, 지능화와 글로벌화의 무한 경쟁의 시기가 도래하면 그 어떤 약속도 유지되기 어렵습니다. 미래를 믿지 못하니 '즉각 보상'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부도날지도 모를 어음 말고 현금을 달라는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p. 224). 서로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만 한쪽이 일방적으로 희생하는 관계는 지속할 수 없습니다. 큰딸의 희생 서사도, 친정 어머니의 도우미 역할도 정당한 대가와 세세한 규칙이 필요합니다. 고마워하는 것은 인간된 도리이나, 미안해하는 것은 '공정하지 않다'라는 마음의 신호입니다. 이러한 '돌봄 과도기'의 핵개인들은 무엇을 해야 할까(p. 236)요? 각자 독립체로 스스로를 관리해 폐 끼치지 않는 사회가 좋은 것인지, 적당한 민폐로 서로의 정이 관계 자본으로 쌓이는 사회가 건강한 것인지 그 정도를 합의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 누구의 삶도 도구화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서로를 보살피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도리이나, 내 삶이 누군가를 돌보기 위한 자원으로 인식되는 것은 억울한 일입니다. 그 결과는 현재 극단적인 출생률 저하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인구집단의 유지와 번성을 위해서라도 생로병사에 필요한 비용과 노동을 '공적 시스템'으로 세밀하게 설계하는 일이 시급합니다. 그리고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시대의 어려움으로 인해 자립의 힘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에 대해 사회가 지원과 협 력의 체계를 갖춰야 한다는 것입니다. 효도의 종말이 인륜의 저버림이 아니라 준비된 사회의 안전판이 실효적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믿음으로 인식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각자가 스스로를 도구화하지 않고 자신의 행복을 추구할 수 있는 사회의 출발점입니다. 그리고 행복한 각자가 모여 더 크고 행복한 사회를 만들 수 있는 기본권이 될 것입니다(p. 237). 늙는 모습도 천차만별 일상에서 음악을 듣는 경우만 보아도 우리의 뇌는 익숙한 것에 머물고 싶어 한다고 합니다. 31세 이후에는 새로운 음악을 듣지 않는다는 뇌 과학 분야의 연구가 있습니다. 플레이 리스트를 보면 그 사람의 나이를 유추할 수 있습니다. 대체로 우리는 10대와 20대에 들었던 음악을 나이 들어서도 듣습니다. 새로운 취향을 탐색하는 호기심에도 노화가 진행되는 것입니다. 나이듦을 판정하는 중요한 기준 중의 하나가 바로 완고함입니다.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려면 동기와 의지가 요구되기 때문입니다. 나이가 들면 누구나 낯선 것을 수용하려는 적극성이 줄어듭니다. 지금까지 해왔던 관성을 이어가려고 하는 것입니다(p. 240). 지금 우리 사회 전반을 지배하는 가치는 '어떻게 함께 살 것인가'입니다. 나이를 기반으로 선을 긋고 구분 짓기를 반복한다면 각자가 서 있는 삶의 토대는 점점 작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새로운 생애주기에 대한 적응은 어떤 연령대도 피해갈 수 없는 과제가 되었습니다. 오래가고 함께 가는 공존을 위한 전제는 타자화를 멈추는 것입니다(p. 259). 선배보다 선구자가 되어야 한 분야 전문가가 갖는 권위는 어느 분야든 예전만큼 강하지 않습니다. 과거에는 권위의 정점인 메이저리그로 가고자 달렸다면, 이제는 자기 마당에 차린 아틀리에에서 장인으로 살기를 꿈꾸는 것 같습니다. 미래학자 다니엘 핑크는 《파는 것이 인간이다》라는 책에서 모든 인간은 '자기 세일즈를 해야 된다'라고 선언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팔아야 할까요? 가장 경쟁력 있는 상품은 '서사natrative'입니다. 각자의 서사는 권위의 증거이자 원료입니다. 성장과 좌절이 진실하게 누적된 나의 기록은 유일무이한 나만의 서사입니다. 나무의 나이가 그러하듯 서사는 결코 급조될 수 없습니다. 오직 시간과 진정성으로 만들어집니다(p. 286). 세계의 누구도 하지 않은 고민을 계속하면 적어도 그 누구보다 앞에 선 나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내가 맨 앞에 있다면, 먼저 최대한 많이 고민해 본 것이라면, 그때 비교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스스로에게 너그러워질 수 있습니다. 그 다음에 오는 것은 산의 정상에 오른 뒤에야 산의 높이를 나타내는 숫자가 목표가 아니었음을 깨닫는 것과 같습니다. 결국 인정의 정점에는 나 자신으로부터의 인정이 있습니다. 이 시점에 이르면 밖으로부터의 인정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내가 행하는 것이 결국 내 인생'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우리는 자유로워집니다. 그 누구의 눈치도 볼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최고'라는 상댓값이 아니라, 가장 앞에 선 자가 맛보는 '최선'이라는 절댓값입니다. 이 전선의 앞에 서기 위해서는 희귀함을 추구하는 것이 옳습니다. 희귀함이 쌓이면 고유성을 갖습니다. 그러나 고유성이 진정성까지 가기 위해서는 축적의 시간이 다시 요구될(p. 297)수 있습니다. 고유함은 나의 주장이고, 진정성은 타인의 평가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고유성과 진정성의 단서가 내가 오랫동안 쌓아둔 내러티브라는 것은 잊지 말아야 할 필수 전제가 됩니다(p. 299). 상호허겁의 평형 인생은 짧고 자신의 삶을 형벌처럼 받아들일 이유는 없(p. 318)습니다. 언제든 잘못이 있다면 바로잡으며 꾸준히 자신의 삶을 수정해 나가려는 용기는 이 시대에 큰 미덕이 됩니다. 이 용기를 실행에 옮기지 못한 채 '그만둔 것처럼 살아가는 태도'를 지칭하는 말이 '조용한 퇴사quiet quitting' 입니다. 이는 직장을 그만두진 않지만 딱 주어진 만큼 최소한의 의무만 다하고 그 이상의 기여는 하지 않겠다는 삶의 방식입니다. 직장의 의미를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가치 교환의 장소로만 받아들이는 사람이라면 문제될 일은 아닙니다. 하지만 직업을 자아실현의 수단이자 자신을 성장시킬 기회로 삼고자 하는 이들에게 이런 소극적 태도는 자아 발전에 도움될 리 없습니다. 직업에서 얻는 경험과 자산이 자신의 자아를 발전시키는 연료로 쓰이길 바란다면, 명시적인 그만둠이 아닌 묵시적인 그만둠은 일종의 '수동 공격'일 수 있습니다. 이는 그 주변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상처 입힙니다. 비전 없다고 여기는 직장에 계속 머물거나 서로를 갉아 먹는 인간관계에 집착하기보다는 스스로 정한 반환점까지 할 수 있는 노력을 다해보고 그에 도달하면 그만두는 결정을 내리는 것도 나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만둘 수 있다'라는 생각만으로도 불균(p. 319)형한 관계가 대등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만두어서 대등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만둘 수 있기 때문에 대등해지는 것 입니다. 칼은 칼집에 있을 때 효과가 있기 때문입니다. 나에게 대안이 있을 때 상대는 나를 존중하기 마련입니다. 생태학자 최재천 교수는 영국 작가 새뮤얼 존슨의 표현을 인용하여 '상호허겁(mutual cowardice)이 인간을 평화롭게 만든다'라고 말했습니다. 서로를 적당히 두려워하는 관계가 생태계에 최적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일단 '저 사람은 갈 곳이 없다. 그만두지 않을 것이다'라는 신호가 보이면 경쟁 서열 집단에서는 조심성이 사라집니다. 상대가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것은 무기 없이 전쟁터에 나선다는 이야기와 같기 때문입니다(p. 320). 지금까지 많은 개인들은 자신만의 트랙을 설계하고 독립된 목표를 설정할 기회가 많지 않았습니다. 조직의 안정성이 나의 미래를 담보하고 그 안에서 나의 성장을 위한 단계별 기준을 쉽게 찾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제 아닙니다. 각자의 목표가 지금 내가 속한 조직을 넘어서야만 타인에 의한 평가로부터 해방되고 시험 보는 꿈이 악몽처럼 평생을 괴롭혔던 과거와 작별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지금까지의 가치관을 넘어 나만의 지향점으로 새로운 가치를 천명할 수 있다면 우리는 각자 세계의 주인이 되는 핵개(p. 333)인으로 거듭날 기회를 얻게 됩니다. 이기려는 경쟁에서 내려오고 보여지는 것의 구속을 벗어던질 때 스스로를 인정할 수 있도록 자신을 돌아볼 수 있습니다. 스스로가 스스로의 권위를 자신있게 인정하는 사 회로의 변화를 꿈꿔 봅니다(p. 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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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282】 세상이 변하고 있는데 자신의 경쟁력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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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281】 변화하는 세상에서 가정의 의미는?
- 제목처럼 이 책은 소위 정상 가족이라고 하는 가족이 얼마나 이상한가를 보여준다. 반면 이상해 보이는 가족이 실은 정상일 수 있음도 보여준다. 우리의 가정은 변화하는 세상에 어떻게 대응하고 있는가? 대한민국의 가정은 평안한가? 아이를 훈육하기 위해 때린다는 주장은 아동보호전문기관 상담원들을 괴롭히는 항변 1순위다. 상담원들이 신고를 받고 현장 조사를 나가면 “내 자식 내가 가르치는데 웬 참견이냐" 라며 상담과 조사를 거부하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학대 신고를 받아도 "부모가 그 정도는 할 수 있지"라며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조사에 불성실한 경찰들도 많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대부분의 아동학대는 극히 비정상적인 사람들의 고의적 폭력이라기보다 보통 사람들의 우발적 체벌이 통제력을 잃고 치달은 결과라는 것이 그간 숱한 분석(p. 26)과 연구를 통해 확인된 사실이다. 평소 체벌을 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부모들이 극도의 양육 스트레스를 겪을 때 이 스트레스가 촉매제가 되어 학대로 치닫게 된다는 것이다. 반면 체벌을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부모들은 양육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는 상황에서도 학대로 치닫는 경우가 없었다. 도구를 갖고 엉덩이를 자주 때리는 부모들이 그렇지 않은 부모에 비해 학대를 할 가능성이 9배나 높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여전히 아무리 그래도 체벌과 학대는 엄연히 다르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끔찍한 학대와 훈육 목적의 체벌이 무슨 상관이냐고 생각할 수도 있다. 현실의 답은 '상관있다'이다. 국가가 체벌을 금지하면 학대도 줄어든다. OECD 회원국 가운데 법으로 체벌을 금지한 나라에서 아이가 학대로 사망할 확률은 10만 명당 평균 0.5명 미만으로 다른 나라에 비해 훨씬 낮았다. 반면 체벌금지 법률이 없는 한국은 학대로 사망할 확률이 10 만 명당 1.16명이었고, 29개국 중 세 번째로 높았다(p. 27). 미숙한 아이들을 때려서라도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 체벌을 지지하는 사람들의 주장이다. 열등한 상대에 대한 교정 목적의 폭력은 정당화될 수 있다는 오래된 논리다. 그러나 수많은 경험(p. 28)적 연구는 체벌의 교육적 효과는 없고 되레 폭력의 내면화를 통해 뒤틀린 인성을 만들어낼 뿐이라고 지적한다. 아이들에게도 반성보다 공포만 불러일으킬 뿐이다(p. 29). 매를 들고 무섭고 엄하게 다스려야 아이들이 문제행동을 보이지 않고 잘 자란다는 통념을 뒷받침하는 과학적 근거는 없다. 무수한 실증적 데이터는 오히려 그 반대를 가리킨다. 체벌의 긍(p. 30)정적 효과는 그저 믿음뿐이고, 체벌의 부정적 효과를 보여주는 연구들은 워낙 많아서 이건 논쟁이라고 할 수도 없다. 2016년에 미국 텍사스대학교 오스틴 캠퍼스의 발달심리학자 엘리자베스 거쇼프는 이 분야의 거의 '끝판왕' 이라고 할 만한 연구를 발표했다. 체벌과 관련한 50년치 데이터를 메타 분석한 결과 체벌을 받은 아이도 반사회적 행동과 공격적 성향을 보이게 될 경향이 높다는 것이다. 아이들 16만 1,000여 명에 대한 데이터가 포함된 이 연구에서 연구진은 체벌의 정의를 '손바닥으로 아이의 엉덩이나 팔다리를 때리는 정도'로 한정했다. 보통 사람들이 학대라고 생각하 지 않는 정도의 체벌을 대상으로 그 영향을 분석한 것이다. 그 결과 체벌을 받은 아이들은 반사회적 행동과 공격적 성향, 인지 장애 등 부정적 행태 17개 중 13개와 연관된 행동을 보였다. 많은 이들이 체벌을 '잠재적 학대'로 보지 않는다는 점에서 출발한 이 연구는 체벌과 신체적 학대는 동일한 수준으로 아이에게 해로운 영향을 끼친다고 지적했다. 체벌은 아이의 행동과 발달 측면에서 부정적 결과를 낳는 반면, 부모가 애초 아이를 체벌할 때 의도했던 목표의 달성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것이다(p. 31). 방송도 마찬가지다. 2017년 1월 초 한 방송 프로그램에선 가수 김건모 씨가 어린 시절 '체벌'에 대한 이야기를 했는데 이 방송은 "건모를 키운 건 8할이 엄마의 매", "매를 통해 전해진 엄마의 사랑" 등의 자막을 내보냈다. 가족 간 갈등을 단골 소재로 다루는 '막장 드라마'에선 부모가 자녀를 때리고 모욕하는 장면들이 예사롭게 등장한다. '폭력도 정'이라고 바라보는 듯하다. 인터넷 쇼핑몰에서 파는 회초리에는 "어른들에게 옛 향수를, 아이들에겐 참교육을 알려줄 좋은 선물이 된다"라는 홍보문구가 달렸다(p. 34). '체벌 덕분에 오늘날 나는 괜찮은 사람이 될 수 있었다'는 논리 역시 한국뿐 아니라 다른 나라들에서도 체벌금지가 사회적 의제가 될 때마다 등장하는 체벌 옹호의 논리다. 철학자 버트 런드 러셀은 『런던통신』에서 "학창 시절 회초리나 채찍으로 매를 맞았던 이들은 거의 한결같이 그 덕에 자신이 더 나은 사람이 되었다고 믿고 있다. 내가 볼 때는 이렇게 믿는 것 자체가 체벌이 끼치는 악영향 중 하나"라고 말했다(p. 35). 사랑과 폭력 사랑을 폭력과 연관 짓는 사고방식은 우리 사회에 너무 만연하다. 체벌뿐 아니라 위에 언급한 데이트 폭력, 가정폭력에서도 그렇고 대학입학 시즌만 되면 군기잡기성 체벌이 문제가 되는 신입생 환영회의 일그러진 모습도 그렇다. 어쩌다가 '환영'의 방식으로 폭력을 사용하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됐을까. 나는 우리 사회에서 폭력을 '할 만한 것'으로 수용하게 만드는 하위문화 중 첫손에 꼽을 만한 것이 부모의 체벌이라고 생각한다. 인류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사회적 계층화, 정치적 의사결정의 비민주성, 폭력적 문화가 심한 사회일수록 체벌이 심한 경향성이 있다. "부모가 그럴 의도가 없었다고 해도 신체적 체벌은 부모와 자녀 사이의 힘의 차이를 생생하게 드러낸다. 이 불평등함을 인지한 어린이들은 어른이 되어서도 힘과 권력에 따른(p. 39) 불평등을 당연하다고 받아들이기 쉽다"는 것이다. 비교적 일상적으로 어린이에게 신체적 체벌을 가하는 지역에서는 부인이나 형제자매를 향한 과도한 폭력도 함께 관찰됐다." 심리학자 스티븐 핑커Steven Pinker는 폭력성의 역사를 살핀 책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에서 미국의 예를 들어 체벌 찬성율은 살인율과 궤적이 같다고 설명했다. 체벌을 용인하는 하위문화가 성인의 극단적 폭력도 부추긴다는 뜻이다. 유엔아동권리위원회가 체벌 근절이 '사회에서 모든 형태의 폭력을 줄이고 방지 하기 위한 핵심전략'이라고 강조하는 것도 그런 맥락에서다(p. 40). 유교문화권 특유의 가족주의? 부모가 자녀를 살해한 뒤 자살하는 참극을 자녀의 인권유린(p. 91)과 폭력, 범죄의 관점으로 바라보지 않고 '동반자살'이라고 부르며 동정하는 시선에는 가족주의가 진하게 배어 있다. 살해의 비윤리성보다는 가족이 운명공동체이므로 부모가 끝까지 책임을 지기 위해 자식의 목숨을 처분하는 것이 가능할 수 있다는 전제를 갖고 있는 것이다. 한국의 가족주의는 이처럼 부모의 무한 책임 정서 위에 구축되어 있다. 여기에 자녀의 독립적 인격과 개별성은 없다. 그런데 이게 흔히들 가족주의가 강하다고 하는 동아시아의 유교문화권에서 공통된 현상일까? 부모의 자녀 살해 후 자살 사건을 '동반자살'이라며 온정적으로 바라보는 것은 일본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일본도 한국처럼 부모의 자녀 살해 후 자살을 오야코 신주(부모자녀 동반자살)라 부르며 온정적으로 대해 왔다. 『유년기 인류학』에는 자녀 살해 후 자살 사건을 바라보는 일본인들의 집단적 심리를 선명히 보여주는 사례가 실려 있다. 1985년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한 일본인 이혼 여성이 각기 생후 4세와 6개월 된 두 명의 자녀를 데리고 태평양에 투신했다. 그녀 는 구조됐지만 아이들은 익사했다. 엄마는 두 아이를 살해한 혐의로 재판에 회부됐는데, 당시 일본계 미국인 단체들은 미국과 일본에서 받은 2만 5,000명의 서명과 함께 이 사건은 살인이 아(p. 92)니라 '부모자녀 동반자살'에 해당한다는 탄원서를 제출했다고 한다. 이들은 "그녀가 결코 악의를 갖고 아이들을 죽인 것이 아니며, 오히려 그들을 사랑했기 때문에 그랬다"라고 호소했다. 아 이들을 '엄마에게 순종하는 아이' 정도가 아니라 엄마와 한 몸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한 나머지 아이의 목숨을 앗아간 행동조차 살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같은 유교문화권 중 일본, 한국, 대만, 홍콩은 이러한 유형의 사건을 모두 '가족 동반자살'이라고 부르며 마치 가족 구성원 전체의 자발적 결정인 양 다루지만 중국 본토는 그렇지 않다는 점이다. 중국 본토에서는 부모의 자녀 살해 후 자살 사건이 거의 발견되지 않으며, 그런 사건이 발생해도 언론은 이를 한국•일본과 달리 '가족 자살'로 부르지 않고 '윤리참극'이라는 단어를 사용 한다. 중국 본토에서는 엄격히 살인을 강조하고 자녀는 부모의 소유물이 아니며 함부로 부모가 그 생사 여부를 결정할 수 없는 국가의 성원이라는 점을 강조한다고 한다. 한국과 일본에서는 '가족' 윤리가 우위지만 중국에서는 '개인' 윤리가 우선이라는 것이다. 인류학자 이현정은 이 차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중국의 경우 부모와 자녀를 개별적 개인을 넘어 하나의 집단적(p. 93) 정체성으로 바라보는 사고가 매우 약하다. 이는 "49년 사회주의 혁명 이후 국가가 유교주의적 전통 사상을 반혁명적인 것으로 비판하고 개인의 생산활동 및 사회정체성을 가족이나 종족이 아니라 집체를 중심으로 재구성한 역사적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다. 게다가 사회주의 국가인 중국의 새로운 형태의 공동체 관계에서는 자녀의 운명이 반드시 부모에 의해 결정되지도 않았다. 이러한 맥락에서 중국 사회에서는 부모와 자녀가 운명 공동체라는 시각이 한국보다 약하다는 것이다. 또 하나의 이유로 이현정은 핵가족과 확대가족이라는 구조의 차이를 들었다. 1920~1950년대 통계자료로 한중일 3국을 비교한 결과에 따르면 일본과 한국은 이미 그 시절에 핵가족이 전체 가족 유형의 80%였지만 중국은 60%가 안 된다고 한다. 핵가족 구조가 지배적인 일본과 한국에서는 부모의 위기는 곧 가족 전체의 존립 문제로 인식되기 쉽다. 반면 중국의 경우 확대가족의 성격이 강하고 핵가족 외부의 상호의존관계인 가족 밖 네트워크가 튼튼해 자신이 죽더라도 자녀를 다른 가까운 누군가가 돌봐줄 것이라는 믿음이 있다. 이 점은 한국이나 일본의 부모들이 자녀의 불확실한 미래를 염려하여 혼자 놔두기보다 차라리 함께 세상을 떠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는 것과 대비된다(p. 94). 결국 같은 유교문화권 내에서도 부모의 자녀 살해 후 자살을 바라보는 시각의 차이는 부모가 자녀를 독립된 개인으로 바라보느냐, 그리고 위기 상황에서 가족 밖에 기댈 언덕이 있느냐 여부에 놓여 있다. 체제의 차이를 감안하더라도 한국 사회에서 이 두 질문에 대한 답은 부정적이다. 한국 사회에서 부모의 자녀 살해 후 자살은 사회적 안전망이 부족하고, 생존의 책임을 떠맡은 핵가족이 위기 상황에서 해결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 그리고 공고한 가족주의로 인해 부모 자녀 사이에 자아가 분리되지 못한 자아혼란이 함께 만들어내는 참극이라 할 수 있다. 사회 양극화와 가족에게 모든 걸 떠넘기는 구조, 자녀 양육이 거의 전적으로 핵가족 내 부모의 성별 분업에 달려 있고, 위기 상황에 직면했을 때 부모가 없는 자녀는 정상적 사회 성원으로 자라기 힘든 사회구조. 이 구조의 가장 밑바닥에 아이들이 깔려 목숨을 잃고 있다(p. 95). 그런데 미혼모가 혼자 이 고생을 하는 동안 미혼부는 대체 어디로 갔을까. 한국미혼모지원네트워크 박영미 대표에 따르면 파트너의 임신 사실을 알게 되면 절반가량의 미혼부들이 그 사 실을 부정하거나 소식을 감춘다고 한다. 미혼부나 그들의 가족은 자녀에 대한 권리를 미혼모에게 쉽게 떠넘겨버리거나 부모 자녀 관계를 부정해버린다. '가족 제도' 주변에 둘러쳐진 금 밖으로 한 발만 나가면 그 강력한 가족주의가 이렇게 어처구니없(p. 118)이 무너져 내리는 것이다. 출산에 동의한 미혼부조차 출산 후에는 소식을 끊거나 책임을 방기한다. 아무도 미혼부의 책임을 묻지 않는다. 여성들에게 성관계는 임신, 출산, 육아까지 이어지는 고민을 안겨주지만 많은 경우 남성들에게 성관계는 그저 욕망일 뿐이다. 이런 불균형을 보면 한국의 가족주의는 매우 남성 편의적인 가족주의라는 생각이 든다. 미혼모지원네트워크의 2016년 연구에 따르면 미혼모가 미혼부와 관계가 완전히 단절된 경우가 78%이고, 미혼부로부터 양육비를 지원받는 경우는 9.4%에 불과하다고 한다. 친자확인소송을 하고 양육비 청구를 하면 받아낼 수는 있겠지만 아이를 빼앗길까 봐 미혼모가 지레 포기하는 경우도 많다. 양육비이행관리원이 있지만 미혼부의 양육비 지급을 강제하는 수단에까지는 이르지 못하고 있다(p. 119). 자신보다 아래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 대한 공공연한 멸시, '정상가족'의 범위 밖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미혼모, 이주 노동자, 다문화가정 아이들에 대한 차별을 서슴지 않는 심성도 이처럼 내 가족 말고는 다른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은 배타적 가족주의에서 비롯됐다. 그 결과 우리는 사회적 신뢰도가 바닥에 처한 사회가 되어 버렸다. 〈2016 OECD 사회지표〉를 보면 거의 모든 지표들이 나쁘지만 사회통합성을 보여주는 타인 신뢰도, 정부 신뢰도, 사회 관계는 35개국 중 24~29위를 오가는 바닥 수준이다. 우리가 이토록 각박해진 이유는 흔히들 말하는 가족 해체, 개인주의화 때문이 아니라 배타적 가족주의에서 비롯된 차별과 혐오의 영향이 가장 크다고 나는 생각한다(p. 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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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281】 변화하는 세상에서 가정의 의미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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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280】 인간은 각자의 삶을 살아간다
- 『토지』에 나오는 인물을 들어 인간됨에 대해 쓴 책이다. 진작에 『토지』를 구입했지만 묵혀두고 있다. 그러다 먼저 우연히 이 책을 읽게 됐다. 아직도 언제 20권의 대하소설의 대장정을 시작할지 엄두가 안 난다. 언젠가는 읽을 것이다. 『토지』에는 600여명의 인물이 나온다니 그 안에는 나도 있을 것이고 내가 알고 있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소설 속 다양한 등장인물처럼 사람은 각자의 인생을 살아간다. 『토지』에서는 양반이라는 절대적 기준점으로부터 모든 사람이 위치 지워졌습니다. 그래서 누군가는 양반 때문에 죽음조차 불사하고, 누군가의 삶은 양반이라는 이름으로 질질 끌려 다녔고, 또 누군가는 양반이 아니어서 인간의 범주 밖으로 내동댕이쳐졌습니다. 마찬가지로, 지금 우리에게 우리 삶을 장악하는 절대적 기준은 무엇이며, 그것이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지 생각해보고 싶습니다. 기준의 크기나 영향력보다 그것이 생겨난 근원이 궁금합니다. 내 삶의 기준이 나의 판단과 선택으로 만들어졌는지 아니면 타인의 기준이나 사회의 기준을 그대로 옮겨다가 중심으로 삼은 것인지 말입니다. 그리고 나는 어떻게 삶을 움직여나가고 있는지 혹은 끌려가고 있는지, 짓눌려 있는지.....곰곰 돌이켜볼 일입니다(p. 48). 이렇게 자기 삶의 가치를 확보한 조병수는 그제야 자신의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꼽추라는 첫 번째 혹덩어리도, 추악한 부모라는 두 번째 혹덩어리도 말입니다. 말년에 외로워 진 조준구가 아들을 찾아왔다가 중풍으로 쓰러져 마지막 순간까지 병수에게 가학적 행패를 부리는데도 말입니다. 그 시궁창 같은 인연 앞에서 병수는 "내가 불구자로 태어난 것도 운명이며 저런 부친의 아들로 태어난 것도 운명이다. 운명을 어찌 거역하겠느냐"라고 말합니다. 이때 병수가 운명을 거역하지 않겠다는 것은 그에 복종하는 일과는 좀 다릅니다. 자신이 '꼽추'이고 자기 부모가 저런 사람들이란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만, 병수 는 이제 그런 것에 끌려 다니지 않습니다. 자기 앞에 놓여 있는 것, 자기에게 주어진 것을 인정하고, 그로부터 자기 힘으로 살아(p. 63)나가는 자기 삶의 창조를 시작하는 것이지요. 자신을 짓누른다고 생각했던 두 개의 혹덩어리를 선선히 짊어지고는 다른 방식으로 세상과 만나 살아가는 병수. 그의 삶이 신산해 보이지만, 바로 그의 삶 자체가 세상과 그 자신을 변환시킨 예술이다 싶습니다(p. 64). 독립운동 자금 전달과 아들 영호의 학생운동, 이 두 가지로부터 한복이는 비로소 살인자의 자식이라는 멍에를 벗은 것이지요. 결국 인간이 뭔가 다르게 살아간다는 것은, 내가 어디어디에 는 신경 쓰지 말아야지, 그 틀에 얽매이지 말아야지, 그저 다짐한다고 혹은 생각한다고 되는 게 아닌 것 같습니다. 사는 것 자체가 달라져야, 다른 일을 해봐야, 다른 행동에 나서야 그야말로 다르게 살게 된다는 것을 한복이를 보면서 깨닫게 됩니다(p. 70). 이처럼 어떤 변화를 일으키려면 그 변화에 필요한 힘을 여러 방식으로 만들어내야 하고, 그 힘이 배치되는 관계를 새롭게 조직해냈을 때 비로소 변화가 일어난다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즉 내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장으로 나를 옮겨놓고, 또 다른 새로운 장으로 나를 밀어 넣는다면 그것이야말로 나를 바꾸어나가는 과정이라 할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그것은 나와 '약속'하기 즉 '미래에 대한 명령'을 만들어내는 일입니다. 그렇게 내가 '약속'할 수 있는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내가 내 운명의 주인(I am the master of my face)이기 때문입니다. 이쯤에서 남아공 넬슨 만델라 전 대통령의 수감 생활 27년을 버티게 해주었다는 시 한 구 절을 들려드리고 싶습니다. 세월의 위협은 지금도 앞으로도 내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지 못하리라 (…) 나는 내 운명의 주인이요 나는 내 영혼의 선장일지니 「인빅투스Invictus」, 윌리엄 어니스트 헨리William Ernest Henley(p. 79). 인빅투스(Invictus)는 '정복되지 않는 굴하지 않는'이라는 뜻의 라틴어라고 합니다. 『토지』에서 운명의 굴레로부터 벗어나 운명의 주인이 된 한복이는 늘그막에 이렇게 말합니다. "산다는 거는.....참 숨이 막히제? 억새풀같이 자라고, 벼랑에 매달려 살고......그래도 나는 나다!"(p. 80). 강청댁, 왜 질투합니까? 용이를 소유하지 못했다는 결핍 때문(p. 117)에 그런 것도 있겠지만, 더 중요한 것은 저 남자가 월선이한테는 이러저러하게 하면서 나한테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월선이와의 비교 때문에 정작 자기 자신만 끝없이 추락 합니다. 다른 사람과의 비교 때문에 자신이 피폐해져간다면, 그것은 사랑이라는 가치 추구 방식과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 되고 맙니다. 그것은 나와 비교되는 대상 때문에 발동하는 질투의 감정입니다. 다르게 말하자면 질투는 다른 사람이 기준이 되는 삶을 살아나가게끔 만드는 일입니다. 그래서 질투에 사로잡혀 있는 한, '나'는 결코 충족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강청댁은 시간이 흐를수록 나날이 피폐해져가고 자신을 스스로 추스를 수 없게 됩니다. 그녀도 한때는 수줍은 미소를 띠는 새댁이었는데 말 입니다. 일본 영화 〈감각의 제국〉(오시마 나기사, 1976)은 질투로 인해 극단으로 치닫는 한 여성의 모습을 더욱더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고급 술집의 어리고 예쁜 게이샤는 주인 아저씨와 사랑에 빠집니다. 처음에는 주인아줌마 몰래 사랑을 나누는 정도였지만, 그 사랑이 점점 깊어져 주인 아저씨와 게이샤는 술집을 나옵니다. 둘이서 방을 얻어놓고 둘만의 사랑에 점점 더 열중하게 됩니다. 게이샤는 자신이 벌어서 생활을 책임져야 하지만 남자를 독차지할 수 있다는 생각에 그 또한 즐겁기만 합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뭔가 이 남자가 완전히 내 것이라는 확신이 들지 않습니다. 그저 남자를 내 방에 데려다놓았을 뿐 남자를 완전히 가졌다는 충족감 이 안 드는 겁니다(p. 118). 그러자 그녀의 집착은 점점 더 정도가 심해집니다. 급기야 남자를 외출도 하지 못하게 감금이나 마찬가지의 상태를 만들어버 립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에 대한, 남자에 대한 충족감을 여전히 확인할 수 없었던 그녀는 결국 남자의 성기를 잘라 손에 쥐고 거리를 활보하는 기괴한 극단으로 치닫고야 맙니다. 1936년 일본에서 실제로 일어난 ‘아베 사다' 사건을 재구성했다고 알려진 이 영화는 우리에게 사랑을 소유의 방식으로 볼 때 욕망이 끝이 없다는 걸 보여줍니다(p. 119). '팩트'만 말해라, 이것이 '팩트'다 따위는 꽤나 객관적이고 이성적임을 자부하는 요즘 사람들이 자주 쓰는 말입니다. 드러난 사실만 가지고 따지겠다는, 일종의 법리와 증거를 주장하고 논박하는 태도라고 할까요. 이런 태도로 봉기에게 접근한다면 봉기가 저지른 명백한 죄는 그다지 크지 않습니다. 미역 한두 오리,(p. 204) 체 한 개 따위의 소소한 물품을 가로챘을 뿐이고,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들에게 악담을 해낸 정도입니다. 간혹 복동네의 자살처럼 엄청난 파장을 불러일으킨 일도 있긴 했습니다만, 봉기의 뻔뻔한 말마따나 그가 곧바로 살인 죄인인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가장 무시무시한 사실은 이런 삶으로부터 세상의 모든 죄가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부끄러움이 없는 곳, 자기 성찰과 공감이 없는 곳에서는 그 어떤 악이라도 정당성을 획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비록 『토지』에서는 봉기라는 밉살스러운 사람을 보여주는 정도에 그치지만, 인류의 역사는 부끄러움이 사라진 자리에서 인간이란 의미도 사라져버린다는 것을 생생히 증언하고 있습니다.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 이라는 말로 널리 알려진 아이히만(유대인 학살자)의 일화도 그러했습니다. 성실하고도 효율적으로 나치의 과업을 완수했던 관료 아이히만은 늘 당당했습니다. 그는 전범재판에서 어떤 부끄러움도 없다고 말했고, 아니 그 부끄러움을 느끼려 하지도 않았습니다. 관료로서 맡은 바 책임을 다했을 뿐이라고 했습니다. 그의 모습으로부터 자신을 성찰하지 못하는 인간, 타인의 존재를 의식하지 못하는 인간 그래서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지 못하는 인간, 그것은 인간일 수 없다는 가장 잔혹한 사실과 마주하게 됩니다. 『토지』에서는 부끄러움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일제강점 말기 여학교에서 상의(홍이의 딸)가 전쟁 지원 활동에 동원되어 주먹밥을 만들다가 남몰래 동생 상근이에게 주먹밥 하나를 건네줍니다. 상근이는 다른 사람들이 볼까 봐서 부끄러운 마(p. 205)음에 얼른 자리를 피합니다. 나중에 상근이는 누나 때문에 망신스러웠다고 투덜거립니다. 당장의 배고픔보다 자존심을 내세우는 소년의 모습을 보며 어른들은 '"치는 배부른 사람이 챙기는 거지, 너처럼 그랬다가는 굶어 죽을 기다"라며 웃습니다. 그런데 멀찍이 앉아 있던 노인이 불쑥 끼어듭니다. "아무리 배가 고프고 기찹아도 염치를 채리야만 그기이 사람이제. 있고 없고가 상관없는 기라. 있다고 해서 어디 염치 채리더나?" 20권 292쪽 그렇습니다. 부끄러움을 잃어버린 삶, 그 이후의 결과가 아니라 그 자체가 바로 문제입니다. 염치를 차려야, 부끄러움을 알아야 그게 사람이기 때문입니다(p. 206). -'나'를 위로하는 나쁜 방식 일상생활에서는 이유 없는 일, 이유를 모르는 일 혹은 아무리 애를 써도 알 수 없는 일이 더 많습니다. 그 이유를 찾으려 들면,(p. 214) 오히려 힘만 듭니다. 생각해보세요. 어쩌다 여러분은 지금 그 상황에 놓여 있게 되었나요? 물론 설명하려면 여러 가지 이유를 댈 수도 있을 겁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어쩌다가 지금 이런 글을 쓰고 있는 것일까요. 서두에서 제가 『토지』를 읽어왔던 내력을 설명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지금 제가 이 글을 쓰는 이유가 되어주지는 않습니다. 물론 얼마든지 여기저기서 이유를 찾아와 다시 맞춰볼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논리적 설명까지 가능하지는 않습니다. 애써 찾아온 이유들을 반대로 확 뒤집어서 진짜 그것 때문에 이렇게 되었나? 이래서 그렇게 되었나? 하고 따지고 들기 시작하면 이 또한 증명할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 풍파를 겪어온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가끔씩 "그게 팔자야, 운명이야" 하며 무덤덤해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어릴 때는 그런 모습이 패잔병 같아 보여서 참 싫었습니다. 그런데 그 말 속에는 아주 오래된 삶이 전해주는 지혜가 빛나고 있음을 어른이 되어서야 깨달았습니다. 그 말들은 "아이고, 내 팔자야"라며 한탄하는 넋두리가 아니었습니다.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긍정의 방식이었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살아가면서 원인과 이유를 찾아내 그것을 결과와 연결 지어 생각하려는 것은 그렇게 했을 때 내 마음이 좀 편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나를 위해서 그게 이유라고, 원인이라고 꾸며대는 방식, 그리하여 나를 위로하는 방식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어쩌면 삶을 살아가는 가장 긍정적이고 솔직한 자세는, 내게(p. 215) 일어난 일을 그냥 그 자체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지금의 내가 밀고 나가는 겁니다(p. 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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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280】 인간은 각자의 삶을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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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279】 하늘과 땅, 모두 살아가기 어렵다
- 하늘을 나는 직업을 가졌던 저자는 사람이 사는 땅, 대지에 대해 남다른 생각을 했다. 이당시 하늘을 날아다니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실제로 여러 사고가 있었다. 그렇다고해서 인간의 땅 대지는 쉬운가? 그렇지 않다. 그때나 지금이나 땅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결국 12년 동안 일을 한 뒤 다시 한 번 남대서양을 횡단하던 중, 그는 뒤쪽 오른편 엔진을 끈다는 짧은 메시지를 남겼다. 그리고 침묵이 흘렀다. 이 소식은 별로 불안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지만 침묵이 10분 동안 계속되자 파리에서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이르는 항공로의 모든 무전국은 불안감 속에서 철야 근무에 들어갔다. 10분 늦는다는 것은 일상생활에서는 별 의미가 없지만, 우편 비행기에는 중대한 의미를 가지기 때문이다. 이 죽은듯한 시간 속에는 아직 알려지지 않은 사건이 숨겨져 있다. 무의미한 것이건 불행한 것이건 그 사건은 이미 저질러진 것이다. 운명은 판결을 내렸고, 이 판결에 대해 더 이상 항소할 길이 없다. 강철 같은 손이 승무원을 무사히 물에 착수시키거나 파국으로 이끌어 간 것이다. 그(p. 34)러나 판결은 기다리는 사람들에게는 통보되지 않는다. 우리들 가운데 이렇게 점점 희미해져 가는 희망을, 시간이 지 날수록 마치 죽을 병처럼 악화되는 이 침묵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우리는 희망을 품고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희망은 점점 사라졌다. 이제 우리는 동료들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리라는 것을, 자신들이 그렇게 자주 날아다니던 남대서양 속에 우리의 동료들이 잠들었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했다. 결국 메르모즈는 자기의 업적 뒤로 영원히 숨어 버린 것이다. 마치 볏짚을 잘 묶고 나서 자신의 밭에 누워 잠든 추수꾼처럼. 어떤 동료가 이처럼 죽을 때면, 그의 죽음 역시 직무상의 명령에 따른 행동처럼 여겨지고, 여느 죽음보다 처음에는 더 슬프지 않다. 물론 그는 마지막 전근 명령에 따라 저 멀리로 떠났다. 하지만 매일 먹는 빵이 없는 것처럼 그의 존재가 뼈에 사무치도록 그립지는 않다. 실제로 우리는 동료를 오랫동안 기다리는 데 익숙하다(p. 35). 가끔 흑인 노예가 문 앞에 쭈그리고 앉아 저녁 바람을 맛보는 일도 있다. 이 포로의 육중한 몸속에서는 더 이상 추억이 떠오르지 않는다. 그는 단지 붙잡힌 당시의 일, 주먹질과 비명 소리, 지(p. 109)금의 암흑 속으로 그를 밀어 넣은 남자의 팔만 기억할 뿐이다. 그 시간 이후 그는 기이한 꿈속에 빠져들었다. 장님처럼 천천히 흐르는 세네갈의 강물이나 모로코 남부의 하얀 도시들의 풍경을 빼앗긴 채, 그리고 귀머거리처럼 친근한 목소리들을 빼앗긴 채 말이다. 이 흑인 노예는 불행한 것이 아니라 불구가 된 것이다. 어느 날 유목민들의 생활 반경 속에 들어와, 그들이 이주할 때마다 이끌려 다니고, 그들이 사막에서 그려나가는 궤도에 평생 동안 매어 있게 된 지금, 그와 과거, 가정, 아내와 아이들 사이에 공유할 무엇이 남아 있겠는가? 그 모든 것들은 지금 그에게 죽은 것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오랫동안 위대한 사랑을 품고 살아왔으나 그 사랑을 빼앗긴 사람들은 종종 자신들의 고독한 고귀함에 싫증을 느끼곤 했다. 그들은 겸손하게 삶에 다가가 평범한 사랑을 가지고 자신들의 행복을 만들어 나간다. 그들은 체념하고, 스스로를 노예로 만들어, 일상의 평화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마음 편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 노예는 주인의 숯불을 자신의 자랑으로 삼는다. 자, 들어. 가끔씩 주인이 포로에게 말한다. 이때야말로 주인이 노예에게 선한 모습을 보이는 순간이다. 그날 하루의 피로와 무더위로부터 벗어나 시원한 저녁으로 들어가는 순간이다. 주인은 노예에게 차를 한 잔 준다. 그러면 노예는 고마워 어쩔 줄 모르고, 이 차 한 잔으로 인해 주인의 무릎에 입이라도 맞출 지경이 된다. 노예는 결코 사술에 묵이지 않는다. 그(p. 110)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토록 충성스러운데! 그는 현명하게도 빼앗긴 후인 왕으로서의 모습을 부정해 버린다. 그는 단지 행복한 포로일 뿐이다. 하지만 그는 어느 날엔가 해방될 것이다. 너무 늙어서 음식과 의복 값을 못하게 되면, 그는 무한한 자유를 얻게 될 것이다. 그러면 사흘 동안 이 노예는 이 천막, 저 천막을 헛되이 돌아다니며 자기를 써 달라고 간청할 것이다. 하루가 지날수록 쇠약해지는 그는 사흘째 되는 날이 저물면 언제나처럼 담담하게 모래 위에 몸을 눕힐 것이다. 쥐비에서 나는 이처럼 벌거벗은 채 죽어가는 사람들을 본 적이 있다. 무어 인들은 그들의 임종의 곁을 스치고 지나다니지만, 그들의 태도가 그다지 냉혹한 것은 아니었다. 무어 인 아이들은 검은 몸뚱이 곁에서 놀았으며, 새벽마다 이 몸뚱이가 아직 움직이는지 장난삼아 보러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결코 그 늙은 노예를 비웃지는 않았다. 그것은 자연의 질서에 속한 것으로, 마치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 같다. "너는 그동안 수고 많았으니, 잠잘 권리가 있다. 가서 자거라." 그는 여전히 드러누운 채 현기증에 지나지 않는 허기를 느꼈지만, 유일한 괴로움인 부당함은 느끼지 못 했다. 그는 조금씩 대지와 하나가 되었다. 태양에 의해 말라붙고, 대지에 의해 받아들여졌다. 30년 동안 일을 하고 나서 잠과 대지에 대한 권리를 얻은 것이다(p. 111). 아무리 하찮은 것일지라도, 우리는 우리가 맡은 역할을 자각 할 때 비로소 행복해질 수 있다. 그때에만 비로소 우리는 평화롭게 살 수 있고, 또한 평화롭게 죽을 수 있다. 생명에 의미를 주는 것은 죽음에도 의미를 주기 때문이다. 죽음이 삶의 질서 속에서 이루어질 때 그것은 아주 감미롭다(p. 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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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279】 하늘과 땅, 모두 살아가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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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278】 여전히 어려운 내 마음, 네 마음
- 내 몸이지만 내 몸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고, 내 맘이지만 내 맘에 대해 알지도 못하며 일생을 살아간다. 그래서 마음 탐구를 오랫 동안 하고 있다. 아마 죽을 때까지 내 마음도 모르고 남의 마음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살아갈 것 같다. ONE POINT LESSON 책상 정리의 사례는 다이어트에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살을 빼고 싶지만 빠지지 않는다"라는 말을 잘 들여다보면, 마치 '살이 빠지지 않는 나'가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과식하는 나, 따뜻한 곳에 누워 있고 싶은 나', '소파에 누워서 TV를 보고 싶은 나', 즉 늘 과식하고 누워서 TV를 보고 있기 때문에 '살 빼고 싶은 나'를 실현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살이 빠지지 않는 나'라고 하는 '상자'를 걷어내 보면, 문제는 살을 빼느냐 마느냐가 아니라 다이어트를 방해하는 과식이나 TV가 진정한 문제인 것입니다. '....하고 싶지만 도저히 못한다''라는 생각이 들 때에는 '할 수 없는 것'을 고민하기보다는 '나는 무엇을 하고 싶어서 이것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인가?라고 생각하면, '~하고(p. 36)싶지만 도저히 하지 못한다'라는 굴레에서 해방될 수 있습니다(p. 37). 내면의 소리에 마주하기 자신의 약점과 장점 모두를 사실 그대로 보여주고 살아간다면 당당해지고 힘이 생깁니다. 가면을 벗고 자신의 얼굴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입장을 반대로 생각하는 것도 한 방법입니다. 개인적으로 친밀하거나 특별히 관심을 두지 않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의 외모나 성격 등에 그다지 신경 쓰지도 않고 관찰하지 않을뿐더러 판단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이것과 동일합니다. 다른 사람도 나와 특별한 관계가 아닌 이상 나의 외모와 태도, 성격 등에 크게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혹시 과민하게 스스로의 착각에 빠져 나의 민낯을 보여주면 안 될 것 같은 두려움으로 겉모습을 과다하게 포장하고 있지 않는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p. 47).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는 두려움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모습 그대로 보여주면 사람들이 '싫어할 거야!', '실망할 거야!', '나를 떠날 거야!'와 같은 추측으로 두려움에 빠지게 됩니다. 그런데 사실 그런 추측들이 사실인지 객관적으로 평가하고 확인해봐야 합니다. '어떤 근거로 나를 싫어 한다고 판단하고 있는 것일까?' 하나하나 근거를 찾아보고 스스로에게 질문해봅니다. 변호사가 확실한 증거를 밝히며 반대 심문을 하듯이 자신이 단정 짓고 있는 것들에 대해 논박을 하며 원인불명의 추측들을 소멸시키는 것입니다. 지금 존재하는 것은 지금의 나 자신'입니다. 나와 같은 존재는 지구상 어디에도 없습니다. 자신의 존재가치가 그만큼 소중하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가장 소중한 건 '나 자신'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p. 48). 그런데 왜 '자기 비난 상자'에서 빠져나오지 못할까요? 어린 시절의 잘못된 환경 때문에 생긴 트라우마나 실패의 경험은 털어버리고 자신이 즐겁게 잘할 수 있는 일을 찾아 살아가면 된다고 생각하지만, 그러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 비난 상자'에 갇히게 되는 것입니다. 하버드대학교 사회심리학자인 다니엘 웨그너 Daniel Wegner 교수가 1987년 '어떤 생각이나 욕구를 누르려고 하면 효과가 있을까?'라는 실험을 했습니다(p. 55). 학생을 두 그룹으로 나눠 A 그룹에는 흰곰을 생각하라고 지시했고, B 그룹에는 흰곰을 생각하지 말라고 지시했습니다. 그리고 그 두 그룹은 흰곰이 떠오를 때마다 종을 치라고 지시 했습니다. 결과를 보면, 종을 친 횟수가 많은 그룹은 흰곰을 생각하지 말라는 지시를 받은 B 그룹이었습니다. 생각하지 말라고 하면 오히려 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 우리 인간이고, 이는 우리가 살아가면서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행동입니다(사고 억제의 역설적 효과 ironic proces theory는 특정 생각, 욕구를 억누르려 하면 할수록 그것이 더 자주 떠오르거나 행동하게 되는 효과이다). 티벳 속담에 '걱정을 하여 걱정이 없어지면 걱정이 없겠네!'라는 말이 있습니다. 누구나 많은 생각을 하고 걱정을 한 가득씩 안고 살아갑니다. 하지만 다행히도 신이 인간에게 주신 최대의 선물인 '망각'으로 인하여 걱정의 농도가 옅어지다 시간이 흐르면서 잊히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그런데 자기 비난 상자에 갇혀 있는 사람들은 이 '망각'의 선물을 '망각'한 것입니다. 과거에 고민했던 일이나 고통, 힘 들었던 기억들을 그대로 안고 또는 그것을 중복시키면서 후회하고 자신을 책망합니다(p. 56). 상담자: 집에 돌아와서 컴퓨터로 이메일 확인하는 상황을 자세히 설명해줄 수 있나요? 어떤 자세와 어떤 표정일까요? 경애: 잠옷을 갈아입고 식탁에 앉아요. 그리고 어느새 노트북을 가지고 와서 이메일을 확인하고 있어요. 등을 웅크리고 앉아서 아무런 표정 없이 컴퓨터 화면을 그냥 보고 있네요. 상담자: 그런 자신의 모습을 보고 어떤 생각이 드세요? 경애: 머저리 같아요. 정신병자 같고 넋이 나간 미친 사람같이 느껴져요. 정말 꼴불견이에요. 너무 못나 보여요. 상담자: 지금 그런 모습이 아닌 원래 경애 씨는 어떤 사람인가요? 경애: 잘 웃고 친구들과 어울려 떠들고 즐기면서 리더십도 있고, 밝은 사람이에요. 상담자: 그런 긍정적인 면을 잘 기억하고 이야기해줄 만한 사람이 있다면 누가 있을까요? 경애: (한참을 생각하다가) 1년 전 미국에서 제가 한창 일을 열심히 배우고 열정적일 때, 제 멘토가 되어주었던 상사가 떠올라요(p. 66). 그분은 지금의 형편없는 제가 아닌 당시의 활달하고 생기 넘쳤던 모습을 기억하고 계실 거예요. 그분이 보고 싶네요. 상담자; 그분은 경애 씨에게 어떤 존재였나요? 경애: 제가 일을 시작할 때 겁이 많았는데 차근차근 할 수 있도록 잘 설명해주셨고, 힘들 때마다 잘할 수 있을 거라고 격려해 주셨어요. 그래서 그때는 안심하고 일했나 봐요. 실수해도 되고 못 해도 된다는 편안한 생각에 즐겁게 일했었는데....그분은 저에게 올바른 방향을 알게 하고 안정감을 갖게 해주신 분이에요. 상담자: 그럼 그때 미국에서 힘이 되어주었고 경애 씨의 상황을 잘 알고 어떻게 경애 씨답게 앞으로 가야 하는지 도움을 주었던 상사가 지금 앞에 앉아 있다면 어떤 말을 하실까요? 경애: "경애야! 너는 처음에는 불안해하지만 일이 조금 익숙해지면 어느 누구보다도 일을 능숙하게 잘 해내잖니? 한국 생활이 날 설고 힘들었을 텐데 지금도 잘 해내고 있잖아. 너무 잘하려고 하지 않아도 괜찮아. 인정받으면 좋지만 그렇지 않아도 돼. 네가 미국에서 얼마나 잘 해냈는지 잊지 마!"라고 말해주실 것 같아요. 상담자: 앞으로도 경애 씨가 자신을 멍청이 같고 형편없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그분이라면 어떤 조언을 해주실지 떠올려보세요(p. 67). 사실 경애 씨는 회사에서 어느 누구에게도 비난받거나 실망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습니다. 충분히 인정받고 잘 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더 잘해야 된다는 생각이 불안을 만들고 그 불안이 집에 와서도 끊임없이 업무 확인을 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p. 68). ONE POINT LESSON 자기 스스로를 비난하고 자책하는 '자기 비난 상자'에 갇히는 사람들은 자기 자신이 정한 기준에 집착하는 경향 이 있습니다. '매니저라면 인정받고 실수 없이 일을 해야 해!', '난 훌륭 한 부모가 되어야 해!', '난 착한 딸이 되어야 해!'라는 신념을 만들어놓고 그것을 이루지 못하면 자책하게 되고 바로 '죄책감'이라는 감정에 빠지게 됩니다. 경애 씨도 이러한 '죄책감' 때문에 매일 귀가 후 집에서 2시간 이상 업무를 확인하지 않으면 안 되는 벌을 스스로에게 주고 있었던 것입니다. '자기 비난 상자'에 빠지게 하(p. 68)는 '죄책감'을 버리기 위해서는 먼저 '난 이렇게 해야만 해!' 라고 하는 어떤 신념이 있는지 그 문장들을 찾아서 건강하게 바꿀 필요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나는 돈을 많이 벌어야만 해!' 또는 '나는 1등을 해야만 해!'라고 생각하면 어떤가요? 내가 정한 신념은 그에 따른 행동을 낳습니다. 따라서 돈을 많이 벌어야 한 다는 생각이나 1등을 해야만 한다는 생각에 벌써 긴장하게 되면서 불안해지고 '못 하면 어떡하지?'라는 걱정과 염려가 점점 눈덩이처럼 커집니다. 그리고 '어떠한 상황에서도 돈을 많이 벌어야 해!'라거나, '무슨 일이 있어도 나는 1등이 아니면 안 돼'라고 계속 생각하게 되면 걱정과 염려의 눈덩이는 점점 공포감으로 발전합니다. 결국 나를 살리기 위해 가진 신념이 반대로 나를 죽이는 신념이 되고 맙니다. 그래서 '~ 해야만 해!'라는 신념에서 '~ 될 수 있으면 좋 지!'라는 생각으로 바꿔주어야 합니다. 그렇게 된다면 신념을 이루지 못한다는 불안과 공포감으로부터 단순한 걱정으로 옮겨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p. 69). 이렇게 하는 것의 목적은 무작정 불안감을 버리고 긍정적인 상태로 만들자는 것이 아니라, 내가 정한 신념 때문에 딸려오는 쓸데없는 짐을 벗어 던지게 하려는 것입니다. 결국 성과를 내는 것이나 1등으로 가는 목표에 있어서 불안과 공포감을 안고 가느냐, 아니면 단순한 걱정을 안고 가느냐의 차이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선택을 하시겠습니까?(p. 70). 타인의 칭찬에 의심 대신 일단 믿기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지만 사실 칭찬에 부담을 느끼는 사람이 더 많은 것 같습니다. 한국인들이 특히 '겸손'을 '미덕'이라고 여겨서 그런지 칭찬에 대한 반응을 보면 '그냥 운이 좋았을 뿐이에요', '덕분에 잘된 것이지요', '별말씀을··' 하며 손사래 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사실 인사치레이건 아니건 칭찬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관찰하고 배려해서 해준 말임에도 애써 부정하는 것이 과연 '겸손'이고 '미덕'인지는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칭찬에 부담을 느낀다는 것은 그러한 칭찬에 대해 '나는 그렇지 않아!'라고 부정하는 마음이 크기 때문에 '그럴 리 없다' 라고 잘못된 해석을 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자기 비난 상자'에서 빠져나오기 위해서는 의례적인 칭찬일지라도 그 의미를 깊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칭찬을 받으면 자신이 했던 구체적인 행동을 생각(p. 84)해보고, 그것이 사실이면 상대방의 칭찬을 순수하게 수용하고 자신을 믿어도 좋습니다. 그렇게 될 때 자신의 내면에 긍정적인 소리를 입력하게 되고, 긍정적인 행동을 하는 사람으로서 반응하게 됩니다. 그러면 그 반응이 긍정적인 정서를 일으키게 되고, 그러한 행동을 다시 하도록 만드는 연쇄작용으로 이어집니다. 여러분은 중요한 친구를 대할 때 어떻게 하나요? 부정적인 피드백을 하거나 폄하하고 모멸감을 주나요? 아니면 친구가 어려울 때 지지해주고 격려해주며 당신의 친구가 얼마나 중요하고 소중한 사람인지 알 수 있도록 힘이 되려고 애쓰나요? 소중한 친구를 대하듯 자신을 대하기 위해 먼저 무엇을 하면 좋을지 생각해보기 바랍니다(p. 85).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할 때와 타인의 말을 그대로 수용할 때, 무엇이 효과적인지 계산하기 무조건 네네 상자에 갇혀 타인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면 문제가 됩니다. 선택하고 결정하는 데 있어 타인의 말을 수용 했다고 하지만, 결과에 대한 책임은 자신의 삶에 흔적으로 남기 때문에 누구의 탓도 할 수 없습니다. 또한 자신에게 필요한 것은 타인보다는 자신이 제일 잘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사람과의 관계나 일에 있어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게 될 때와 타인의 말을 그대로 수용하게 될 때를 따져봅니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어느 쪽이 자신에게 효과적인지 손익계산을 해보면 보다 지혜로운 선택을 할 수 있습니다(p. 169). '00한 때문에' 대신 '00한 덕분에'로 생각 습관 바꾸기 어차피 과거는 잊을 수도 없고 바꿀 수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 일에 대한 '해석'을 바꾸어주는 것뿐입니다. 예를 들면 '남자 친구가 배신하여 너무 큰 상처를 받았고, 지금도 그것 때문에 괴롭다' 대신에 '남자친구가 배신한 덕분에 지금의 좋은 남자친구를 만나게 되었다.' '수능 시험 때 몸이 아팠던 탓에 시험을 망쳐 좋은 학교에 입학하지 못했다' 대신에 '수능 시험 때 몸이 아팠던 덕분에 지금의 학교에 들어와서 더욱 열심히 학교를 다녔고, 그런 좌절의 시간을 통해 더 성숙해지는 계기가 되었다.' '부모님이 이혼한 가정에서 자란 탓에 결혼에 대한 불안감으로 결혼하기가 두렵다' 대신에 '부모님이 이혼한 가정에서 자란 덕분에 부모님께 의존하기보다는 일찍 독립심이 생겼고, 결혼에서 무엇이 중요한 것인지 알게 되었다.' 우리의 뇌는 내가 사용하는 방향대로 변화되는 신경가소성 Neural plasticity (우리의 경험이 신경계의 기능적 및 구조적 변형을 일으키는 형상)이 있습니다. 이렇게 생각의 해석을 계속 바꿔줄수록 과거를 떨쳐내고 삶의 활력을 만들어갈 수 있습니다(p. 202). ONE POINT LESSON '무한 생각 상자'에 얽매이지 않고 잘 살아가는 사람들은 분기점에서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 고민하지 않습니다. 선택한 길을 믿고 절대로 뒤돌아보지 말고 선택한 길 앞에 있는 희망과 목표, 자신의 꿈을 향해 열심히 살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신의 선택을 믿고 열심히 살다가 성공하면 베스트이고, 혹시 실패하더라도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은 실패의 원인이 분기점 탓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인생은 디지털적인 데이터가 모인 것이 아니라 아날로그적인 체험이 모여진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인생의 분기점'이 있다고 생각하는 자체가 단순한 환상에 지나지 않을까 싶습니다. 물론 인생의 진로를 선택해야 할 순간이 있습니다. 그때 자신의 선택이 최선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p. 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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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278】 여전히 어려운 내 마음, 네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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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277】 노년에 직면한 여성들의 자기 이야기
- 여성에게 노년은 남성보다 힘들 수 있다. 아무래도 여성이 외적인 아름다움에 더 치중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들은 노년에도 자기 일을 하고 돈을 벌고, 건강을 유지하기 원한다. 남자나 여자나 다 늙는다. 하루라도 일찍 노년을 준비하는 것이 필요하다. 장편소설이나 문학 전집을 번역하는 일에서 가장 필요한 덕목은 무심하게 앞으로 나아가는 힘이다. 생각이나 감정에 동요 없이 매일 조금씩, 여덟 쪽에서 열 쪽을 일본어에서 우리말로 옮긴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세상 모든 일이 일정 부분은 매일 조금씩 쉬지 않고 꼬박꼬박 무심하게 앞으로 나가는 힘을 요구한다. 무슨 일을 하든 나아가기를 멈추면 거기서 끝이니까. 끝이 다 나쁜 것은 아니지만, 오래오래 한 가지 일을 지속하다 보면 쉽게 도달하기 어려운 지점까지 가닿기도 한다(p. 20).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려면 내 안의 목소리를 듣는 일도 필요하지만 나에게 다양한 기회를 주는 일도 필요하다. 나를 계속 열어 두는 연습을 한다. 내가 세상을 궁금해하는 만큼 세상은 나에게 새로운 경험을 줄 것이다. 정신적 스트레칭이다. 새로운 경험만큼 나는 더 유연해질 것이다. 나이가 더 들(p. 53)면서 점점 조개가 되어 간다 할지라도 의식적으로 자주 입을 벌려 세상과 호흡하고 싶다. 세상을 못마땅해하기보다는 끝까지 세상을 선물로 여기고 싶다. 나의 경계가 어디까지인지 늘 실험하고 기꺼이 허물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호기심이 제2의 천성이 될 때까지 꼭 붙들고 싶다. 이것이 바로 김 선생님과 이 선생님이 그들의 삶으로써 내게 전해 준 가장 값진 가르침일 것이다(p. 54). 죽음의 순간을 구체적으로 떠올리면 내가 좋아하는 일상, 옳다고 여기는 대의, 누구를 더 사랑하고 돌볼지, 어떤 일에 집중할지 정리할 수 있다. 그렇게 나답게 살아가는 법을 조금씩 알게 된다. 그래서 김영민 선생께서도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라고 하시지 않았을까. 게다가 자신이 언제 죽을지 아무도 모른다. 인생의 의미는 내가 구하는 것이 아니라 삶이 내게 묻는 거고, 죽음은 아랑곳없이 닥친 결과다. 그러니 죽음이 뜬금없어 보일 때 지금 당장 죽어도 원하는 방식으로 죽을 수 있을지 고민해 보고, 그렇게 살아가면 좋겠다(p. 69). 마지막으로 내가 좋아하는 멋진 언니 중 한 분인 시몬(p. 75) 드 보부아르 님의 잘 늙는 방법을 몇 가지 공유한다.(에릭 와이너의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에 실린 글을 참고했다.) 과거를 받아들이자. 삶을 의미 있게 해 주는 친구를 사귀고, 타인의 생각이나 평가에 신경 쓰지 말자. 호기심을 잃지 말고, 자기 존재에 의미를 부여해 주는 사회적·정치적·지적·창의적 작업을 추구하자. 인생에서 모든 것을 최대한 많이, 오랫동안 즐겼으므로 때로는 모든 일을 멈추고 쉬는 한 때를 보내자. 내가 끝마치지 못한 일은 다음 세대가 끝마쳐 줄 것이다. 부디 120세에 내가 뿌듯한 마음으로 이 글을 보면 좋겠다. 나답게 사는 것이 가장 잘 늙어 가는 것 아니겠는가. 좋아하는 것은 더 좋아하고 싫은 건 눈치 보지 않고 버리고, 건강 염려 없이 먹고 싶은 걸 먹을 수 있는 나이, 나는 늙어 가는 시간이 기대된다(p. 76). 혼자 지내는 시간이 길어지다 보니 사람과의 관계에 대한 생각도 예전과 달라졌다. 번잡한 일정이 빼곡했던 예전엔 종종 선약이 있다며 양해를 구하고 모임을 빠져나왔다. 선약은 나 자신과의 약속이다. 그렇게 해서라도 오롯이 혼자 지내는 시간이 하루에 2~3시간, 1주일에 최소 하루는 있어야 번다한 일과 만남을 감당할 수 있었다. 안 그러면 익사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프리드리히 니체는 “하루의 3분의 2를 자신을 위해 쓰지 못하는 사람은 노예"라고 했다던데, 그렇게 까지는 못하더라도 하루에 2~3시간은 나를 위해 쓸 수 있어야 하지 않은가. 지금은 거꾸로다. 워낙 혼자 지내는 시간을 즐기다 보니 점점 만나는 사람이 줄어들고 연락이 뜸해진다. 계속 이렇게 살다가는 고립된 외톨이가 될지도 모르겠다는 위기감이 슬며시 찾아온다. 관계 속에 있을 땐 혼자 있고 싶어지고, 혼자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 연결되고 싶어 하는 이 마음은 그저 변덕일까(p. 87). 노년기에 들어서도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려면, 아니, 최소한 하기 싫은 일을 하지 않으려면, 혹은 '비참' 하지 않으려면 건강과 돈이 꼭 필요하다. 모든 불안은 이 두 가지에서 온다. 나이 든다는 것. 노안이 오고 체력이 예전 같지 않고 살이 찌고 무릎과 허리가 아프고 눈, 치아, 머리술 등 몸의 모든 부분이 관심을 요구한다. 이때 짜증이 난다면 아직 나이 들지 않은 것이다. 나이 듦은 그만큼 수용하기 힘든 인식이다. 나이 든다는 것은 타자가 되는 것이며 그 이상의 경험이기도 하다. 죽음과 마주하는 문제다(p. 145). 글을 쓰다 보면 막히는 때가 있는데, 이는 거기서 멈추고 다시 질문해야 한다는 좋은 신호다. 모든 것을 다시 점검해야 한다. 쓰다가 길을 잃은 느낌이 드는 데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다. 최초의 문제의식과 다른 내용을 쓰고 있거나, 자기 생각을 뒷받침할 사유(이론)을 찾지 못해 '이론을 창시 하는 고통'을 겪고 있거나, 사례가 적절하지 않거나, 문제의식 자체가 틀렸거나....이 과정을 통해 내가 모르는 것을 깨달아야 하는데, 이는 쓰기를 반복해야만 알 수 있다. 겪어야만 깨달을 수 있고,(p. 155) 이때 새로운 지식이 생산된다. 과학자는 실험을 반복하고, 글쓴이는 쓰기를 반복한다. 프로 운동선수나 세계적인 예술가들은 연습을 거듭한다. 연습을 훈련이라고 하는 이유다. 거듭하는 연습을 훈련이라고 하는데, 이는 몸에 익을 만큼 되풀이한다는 뜻이다. 우리는 위대한 운동선수나 예술가의 영광을 보지만, 사실 그들의 영광은 일반인이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연습한 몸의 결과다. 연습이 예술(art, 기술)이다. 공부는 쓰기가 연습이다. 글쓰기의 좌절에 익숙한 나는 완벽한 글은 없어도 완벽한 인생은 있지 않을까라는 망상에 자주 빠진다. 그래서 부동산 매매로 인한 불로소득보다 표절로 인한 불로소득이 내용상으로는 더 부정의하다고 생각한다. 전자는 세금도 내고 비난도 받는다. 발품도 팔아야 한다. 표절은 그냥 아무것도 안 하기다. 표절은 새로운 글, 익숙하지 않지만 뭔가를 시도하는 글, 논쟁적인 글을 쓰려는 이들을 죽인다. 훌륭한 저작을 남긴 지식인이나 작가의 오만을 사랑할 수 있는 이유가 여기 있다. 쓰기를 반복하는 일은 좌절의 연속이다. 그러니 무조건 계속 쓸 수도 없다. 길을 잃는 공포가 엄습한다. 사유보다 힘든 일이 쓰기다. 그래서 우울은 공부의 벗이다. 공부를 멈추지 않는 사람은 겸손하다. 자신에게(p. 157) 몰두한다. 계속 자기 한계, 사회적 한계와 싸워야 하기 때문이다. 공부를 계속하는 사람이 드문 이유다. 내가 역사에서 가장 부러워하는 인물이 있는데, 프랑스 의 사상가 볼테르의 친구인 니콜라 클로드 티에리오이다. 그는 당시 부르주아 가정에서 태어나 평생 책만 읽으며 거의 매일 볼테르와 대화를 나누었는데, 그 많은 책을 읽었으면서도 단 한 줄의 문장도 남기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는 볼테르의 친구로서 볼테르와 관련한 문헌에 언제나 등장한다. 그의 이름은 역사에 남았다. 한 줄도 안 썼는데! 일상의 노동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백인 중산층 남성의 특권이다. 쓰기의 고통은 김승옥이 스물두 살에 쓴 단편, 〈누이를 이해하기 위해서〉에도 등장한다. 너무나 솔직하다. 그는 고뇌를 사랑하는 사람을 존경하지만 그들을 존경하기만 하면 그걸로써 의무감의 해방을 느끼는 사람이 됐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그럼에도 "왜 글을 쓰는가" 내가 가장 많이 받는 질문이기도 한데, 대답은 간단하다. 앞서 말한 대로 생계가 첫 번째였고, 두 번째는 내가 주변인이라는 사실이 유일하게 자원으(p. 158)로 작용하는 분야가 공부이기 때문이다. 김미례 감독의 다큐 멘터리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2020)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사회적 약자가 가장 가질 수 없는 자원은 폭력이다." 이와 달리 국가, 자본, 권력층은 합법적이든 비합법적이든 구조적으로 폭력의 총체다. 다시 말해 사회적 약자의 무기는 언어밖에 없다. 게다가 사회적 약자의 경험은 지배 이데올로기와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자신의 위치성을 자각한 이들의 글은 독창적일 가능성이 많다. '다른 이야기'만이 세상을 구할 수 있다. 그리고 다른 이야기, 창의적인 이야기는 쓰기의 계속적인 실패를 통한 모색에서만 가능하다. 공부는 하는 것이 아니다. '노가다', 공부(工夫)가 되는 것이다(p. 159). 왜 인간은 이토록 말하지 못해 안달일까. 자신의 말을 통해 타인과 연결되고자 하는 욕망이 깊은 곳에 깔려 있기 때문이 아닐까. 말하고 싶은 욕망과 기억을 잃을 것에 대한 두려움에는 공통점이 있다. 모두 연결되고 싶은 마음과 관련이 있다. 영원히 살지 못하는 인간은 사라지는 두려움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 그러나 제 이야기를 전달하면 구전되는 인물로 남을 것이다. 나는 낯선 사람들이 내게 전한(p. 199) 이야기를 간직하고 싶다. 나의 기억 속에서 그들의 말은 살아 있으며, 내가 이 말을 나눈다면 그들은 계속 살아 있게 될 것이다(p. 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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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277】 노년에 직면한 여성들의 자기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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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276】 자기 일을 사랑하는 사람이 결국 성공한다
- 비즈니스도 사랑을 강조한다. 자기 일에 대한 사랑 그리고 자기의 비즈니스 대상인 고객 사랑. 저자는 마지막 부분에서 이 두 가지를 강조하고 있다. 그래야 성공할 수 있다고 말한다. 목사로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오버랩 된다. 목회할 때 나를 부르신 하나님을 사랑하고, 목양의 대상인 성도를 사랑한다면 성공적인 목회를 할 것이라 생각한다. 자, 조금 더 깊이 들어가 볼까요. 욕망이 있는 곳에 비즈니스가 생기는 법, 노인들의 욕망이 연결되는 산업은 물론 이것만이 아닙니다. 60대 카페에 가보니 '정모' 사진들이 보입니다. 그분들이 입고 있는 옷들은 비슷합니다. 태반이 아웃도어이고, 대부분 고어텍스 로고가 박혀 있습니다. 생각건대 지난 10여년 동안 자식들이 어버이날에 사드린 선물이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큰맘 먹고 고어텍스 로고가 박혀 있는 고가의 아웃도어를 사드렸을 겁니다. 고어텍스는 방수기능에 발수성이 있고, 통기까지 되는 훌륭한 섬유입니다. 이것으로 만든 옷을 입으면 히말라야에도 갈 수(p. 46)있죠. 그런데 그 옷을 입고 우리는 동네 뒷산에 갑니다. 고작 해발 150m를 오르는 데 고어텍스가 왜 필요할까요? 가격 때문입니다. 기능성 원단일수록 고가이기 때문에 고어텍스 로고가 박혀 있으면 그 재킷은 다른 무명의 원단을 사용한 것보다 비싸며, 사람들도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고어텍스 재킷을 입고 있는 김 영감님은 옆집 박 영감보다 돋보입니다. 그런 옷이 여러 벌 있으면 더 부자로 인정받죠. 사정이 이렇다 보니 우리나라 아웃도어 시장이 한때 6조 9000억 원 규모로까지 불어나기도 했습니다. 이제는 그 자리를 한 벌에 수십만 원에서 수백만 원에 이르는 고가 패딩이 차지했지만요. 처음에는 한국에서 아웃도어가 팔리는 이유가 우리나라 지형의 70%가 산이어서 그렇다는 추측도 있었다지만, 150m 올라가는 데 무슨 말씀. 그럼에도 아웃도어를 마케팅하는 사람들은 통기성과 발수성을 말해야 합니다. 그게 그 옷이 비싼 이유이고, 기꺼이 지갑을 여는 구실이 되어주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마케팅입니다. 마케팅은 숨겨진 욕망을 끝까지 뽑아 내는 작업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에둘러 표현해야 합니다. 대놓고 이야기하면 품격이 떨어져서 그것을 사는 사람들까지 없어 보이게 만들거든요. 기업은 그들이 떳떳하게 살 수 있는 명분을 만들어주어야 합니다(p. 47). 지금까지의 삶에서 형성해온 이해는 '경험'이라는 소중한 자산으로 켜켜이 쌓이지만, 때로는 나의 기득지가 지금의 세상과 맞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기도 합니다. 기술과 삶이 급변하는 사 회 속에서 기존의 상식은 어느덧 유효기간을 다하고 있습니다. '감이 떨어졌다'거나 '이제 나는 트렌디하지 않다'고 한탄할 때가(p. 56) 딱 이런 상황입니다. '나도 왕년엔 잘나갔지'라고 스스로를 위로 해봐도 씁쓸한 마음은 감출 수 없습니다. 개인적 감상이 이럴진대 만약 트렌디해야 하는 비즈니스를 하고 있다면 현 시대와의 차이만큼 나의 경쟁력이 줄어듦은 당연한 귀결일 것입니다. 어찌보면 골치 아픈 일이죠. 많이 알고 많이 경험할수록 도움이 되어야 하는데, 내가 쌓아온 경험이 오히려 허들이 되다니요. 이 상황을 타개할 해법은 무엇일까요? 미친듯한 크리에이티브? 아뇨, 저는 오히려 상상하지 말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함께 모여 자신의 느낌을 공유하는' 본래 의미로서의 상식 comon sense 을 계속 현재시제로 업데이트해 유지하려면, 상상하지 말고 관찰해야 합니다. 창의성만이 세상을 구원할 것 같은 시대에 상상하지 말라는 말은 어불성설인 것 같습니다. 상상하지 말라는 것을 상상력을 발휘하지 말라는 뜻으로 오해하지는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상상력은 물론 필요합니다. 데이터는 결과가 아니라 씨앗일 뿐이므로, 결과를 낳기 위해서는 데이터를 토대로 상상력을 발휘해야 합니다. 단,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처음부터 상상하지는 말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알고 있는 것으로 생각을 시작해서는 안 됩니다(p. 57). 새 물을 뜨려면 그릇에 담긴 물을 버려야 합니다. 여러분 머릿속에 있는 그것, 어렴풋하게 알고 있는 그것, 과거에 알고 있던 그 것, 그 모든 기득지를 버리는 것부터 시작합시다. 그래야 새로운 것이 담길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알던 것은 과거의 사회상입니다. 세상은 지금도 변 화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인정하자는 것입니다. 보고 싶은 대로, 과거의 잣대로 현재를 상상하는 습관을 멈추십시오. 지금까지는 여러분의 지식이 여러분을 지켜주었을지 모르지만, 그 지식이 좁고 낡은 것으로 판명나는 순간 여러분의 지식은 회사가 여러분을 버리는 구실이 될지도 모릅니다(p. 58). 자살에 이르는 과정을 거칠게 단순화하면 이렇습니다. 어디나 그렇지만 대기업은 일이 매우 많습니다. 중간관리자가 되면 스트레스는 더 극심해지죠. 그래서 그만두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지만, 한창 학령기인 아이들이 눈에 밟혀 결심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대기업을 그만두면 그보다 규모가 작은 곳으로 이직해야 하는데, 그러면 당장 월급이 줄고 아이들 사교육을 줄여야 하거든요. 그러니 어떻게든 버텨보려 하다가 한계에 부딪혀 극단적 선택을 하는 것입니다(p. 75). 개인의 한계를 다스려가며 의지를 갖고 잘 버텨보려는 사람들 앞에는 명예퇴직의 시련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사실 이 경우가 훨씬 더 많죠. 힘들어도 회사생활을 잘해보려 하는 사람을 기업이 내치는 겁니다. 한국은 경력 25년 차와 신입사원의 임금 차이가 3배에 이릅니다. 반면 독일은 1.3~1.7배입니다. 임금 격차가 크지 않으면 연차가 높아도 회사의 부담이 적으니 종신고용이 가능한데, 한국은 부장이 되면 사람을 정리해야 합니다. 고도로 전문화된 일이면 숙련된 인력이 필요하지만, 대개는 업무가 표준화돼 있으므로 사원이나 중간관리자나 하는 일이 비슷한데 3배나 연봉을 주고 고용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죠(p. 76). 소셜 네트워크를 보면 2011년을 기점으로 '현재'에 대한 대화가 '미래'를 앞질렀습니다. '카르페 디엠'이라고 긍정적으로 해석하기에는 상황이 너무 부정적입니다. 현재를 즐기고자 해서가 아니라 '미래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미래를 말하지 않는 것이니까요. 과거 개발시대에는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몇 차례나 하며 버텼습니다. 그때의 설득화법은 한마디로 '5년만 참으면 좋아진다'였고, 그때는 온 국민이 그 말을 믿었습니다. 이제는 이런 약속을 얼마나 믿을까요? 몇 년만 고생하면 집 살 수 있다, 승진할 수 있다는 말은 누구도 보장할 수 없는 공약이 되었습니다. 사회 흐름이 이러하니 연금이나 저축이나 주식 관련 업종은(p. 78)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미래가 있어야 없는 돈이라도 아껴서 준비를 할 텐데 그게 안 보이니 돈을 모으지 않습니다. 그래서 의미 없는 미래 대신 현재의 내 만족에 충실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미래를 포기한 채 흥청망청 아무렇게나 현재를 사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기에는 주머니가 너무 가볍고, 나는 너무 소중한 존재입니다. 사람의 욕망이란 억압될지언정 사라지지는 않는 법이니 어딘가에서 어떤 식으로든 발현되고야 맙니다. 최근에는 그것이 작은 사치, 이른바 '소확행'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암울한 기분을 떨쳐버리고 싶지만 돈이 많지 않으니 소소하게 기분을 내는 것입니다. 사람이 밥만 먹고 살 수는 없고, 경제적으로 어렵더라도 기분은 내고 싶은 게 인지상정이니까요. 상징적인 것이 네일 아트입니다. 3만~5만 원을 주면 누군가가 정성껏 내 손톱을 다듬어주고 아름답게 꾸며주죠. 그 손맛을 한번 보고 나면 끊을 수 없다고 하네요. 또 손을 볼 때마다 자신이 귀하고 예쁜 존재가 된 것 같은 느낌까지 드니, 한 달에 한두 번씩 네일숍에 갈 이유가 충분하다고 합니다. "금붙이 사다 안겨 줄 남자도 없으니 손톱에 기분이라도 내야지"라는 어떤 블로거의 말처럼 취업, 결혼, 출산을 포기하는 데 더해 연애조차 힘들다는 오늘날의 사회상에서는 이러한 작은 사치가 그나마 위안이 됩니다(p. 79). 작은 사치에서 뭐니 뭐니 해도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것은 '먹방', '먹부림', '폭풍 흡입'으로 대변되는 먹기 열풍입니다. 저렴한 가격으로 만족감을 느끼는 데는 먹는 게 최고죠. 그래서인지 '먹다'라는 말이 일상생활에서 점점 더 많이 표현되고 있습니다. 몇 년 전만 해도 여자나 남자나 날씬해야 대접받고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이 사회의 상식이었는데 말입니다. 물론 지금도 그 상식은 바뀌지 않았지만, 스트레스 해소에는 먹는 게 최고이니 날씬한 미래를 잠시 미루고 먹는 만족을 택하는 것입니다. 이제는 많이 먹는 게 죄악시되기보다는, 먹는 행위 자체가 일상에서 가장 신나는 이벤트가 되었습니다(p. 80). 이처럼 일생을 보면 삶의 매 순간마다 기회가 숨어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중에서 한 가지만 잘하면 됩니다. 다 하려고 욕심내지는 마시고요. 다 잘할 수도 없고, 사람들이 믿지도 않을 테니까요. 사람의 일생을 잘 관찰하고, 그중 하나를 택해서 10년을 하면 누구든 전문가가 될 수 있습니다(p. 97). 남들과 똑같아 보이면 그 순간 가치가 사라집니다. 어떻게든 달라야 합니다. 다르면 인지가 되고, 인지된 다음에 기능을 올리면 자연스럽게 기억됩니다. 이 프로세스를 저의 차별화에 그대로 적용한 것입니다. '송길영'이란 이름 석 자를 알리는 것보다 저의 특징과 효용을 알리면 자연스럽게 사람들에게 기억됩니다(p. 99). '이 좋은 물건을 왜 안 살까'를 궁금해할 것이 아니라 '이 물건이 사람들의 일상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를 고민해보십시오. 시선을 제품이 아니라 인간의 수준으로 끌어올리면 점차 내 텃밭을 넓힐 수 있습니다. 산업을 보지 말고 인간을 보면 언제나 답이 나오게 돼 있습니다. 기업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그 분야 전문가이기 때문에 자꾸 산업 이야기를 하는데, 그리 의미가 없습니다. 펄프 함량이 어떻고 조직이 어떻고 하는 전문적 지식보다는, 사람들에게 그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보아야 합니다(p. 107). '업'이 아니라 '삶'으로 프레임을 잡아서 보면, 내가 어떤 일을 해야 하고 어떤 일은 할 필요 없는지가 명확히 보입니다. 반대로 삶이 아니라 업으로 들어가면 어떨 것 같은가요? 지금은 매우 중요해 보이는 신기술이나 소중한 먹거리 산업들도 순식(p. 109)간에 사라져버립니다. 웬만한 기술은 3년을 버티기 힘든 세상입니다. 특정 기술과 서비스에만 맹목적으로 매달리다가 그 기술과 함께 순장당할 수 있다는 말이죠. 하다못해 제 주요 분야인 빅데이터라는 단어도 몇 년 지나지 않아 열기가 시들해질 겁니다. 그러니 특정 기술 전문가에만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되는 순간, 그 기술과 함께 없어질 테니까요(p. 110). 이런 맥락에서, 데이터 분석을 하고 싶다며 조언을 구하는 사람들에게 저는 가장 먼저 '책을 많이 읽으라'고 말합니다. 그 안에 사회의 흐름과 중요한 지식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데이터 분석이 인간의 욕망을 파악하는 일인 만큼, 인간을 심도 깊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인문적 소양이 필수적입니다. 저는 컴퓨터사이언스를 전공했지만 인문 전공자들과 함께 데이터를 분석합니다. 데이터를 분석해서 추이를 발견해내는 일이 결국에는 '인간의 생각'을 파악하기 위한 과정이기 때문입니다(p. 205). 처음부터 인문적 통찰을 가지고 가설을 세웠다면 좋았겠지만, 예전에는 그저 데이터만 모아놓고 인문 분야의 교수들을 찾아다니며 "이거 어떻게 생각하세요?" 하며 물어보기에 바빴습니다. 지금은 심리학, 사회학, 철학, 인류학, 경제학 연구자들이나 학회의 도움을 받고, 직원도 인문사회 분야를 전공한 인재를 주로 모셔와서 통찰의 깊이를 더하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책과 함께 신문과 뉴스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3년만 꾸준히 챙겨서 보면 세상이 어떻게, 왜 변하는지 저절로 알게 됩니다. 뉴스를 보고 3개월 후면 그들의 정치적 의도라든지 행간이 실제 화됩니다. 이뿐인가요. 검색엔진도 있고, 포털도 있고, TV 프로 그램도 트렌드를 읽는 중요한 경로입니다. 정보는 많고 수단도 충분합니다. 우리는 그저 많이 관찰하고, 많이 읽고, 많이 고민 하면 됩니다(p. 206). 결국 대중은 우리가 보낸 시간과 고민의 총량에 비례하여 사랑을 되돌려주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점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여러분이 어떤 일을 할 때 '고민'이 아니라 '행위'에 대해 보상받는다면 시간당 임금에 함몰돼버립니다. 삽질 1000 번 하면 얼마하는 식으로요. 그나마 지금은 임금이 싼 나라로 이런 노동이 옮겨가기 때문에 경쟁할 수도 없습니다. 다른 식의 경쟁력을 찾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전히 이런 구도에 사로잡힐 때가 많습니다(p. 241). 그래서 툭하면 애플 나쁘다고 욕하지 않습니까. 우리나라 신문에서 특히 많이 보이는 비판인데, 팍스콘에서 아이폰 만드는 비용은 부품가를 다 합해도 200달러가 채 안 되는데 판매가는 750달러나 매겨서 550달러는 거저먹으니 애플이 나쁘다는 말입니다. 부품을 분해했더니 반도체가 얼마이고 다른 부품은 또 얼마라며 시시콜콜 따집니다. 사람들이 사는 게 아이폰에 들어간 반도체인가요? 우리는 아이폰의 원가를 사는 게 아니라 아이폰의 설계를 삽니다. 즉 애플이 한 고민의 총량을 사는 겁니다. 고민을 많이 할수록 고민의 총량이 부가가치로 전환됩니다. 이 말은 곧 고민을 적게 하고 일을 쉽게 하면 가져갈 게 없다는 뜻입니다. 한게 없으니까요. 따라서 고민의 총량을 늘려야 합니다(p. 242). 마지막으로, 책을 마치기 전에 '제대로 관찰하고 배려하는 법' 에 관해 소소한 팁 하나를 드릴까 합니다. 여러분의 자녀가 학교에서 돌아왔을 때의 표정을 본 적 있는지요? 길거리에서 마주치는 수많은 아이들의 표정에서는 아무 것도 못 읽는 사람도, 자기 아이 얼굴에서 언뜻 스치는 미묘한 표정 변화는 귀신같이 포착합니다. 애정이 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물건을 팔고 싶으면 그것을 살 사람들에게 애정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들의 표정을 읽을 수 있습니다. 기다렸다는 듯이 사는지, 마음에 안 들지만 대안이 없어서 할 수 없이 사는지, 아무 생각 없이 심부름만 하는 건지··· 이러한 차이를 읽을 수 있어야 그들이 원하는 것을 줄 수 있습니다. 비즈니스란 결국 가치를 만드는 것이고, 가치를 만들려면 이것을 사용하는 사람에 대한 애정을 갖고 고민해야 합니다. 애정이 있으면 고민하게 되고, 고민하면 이해하고, 이해하면 배려할 수 있습니다. 배려를 받은 사람은 만족할 것이고, 만족하면 사랑 하게 됩니다. 20여 년 동안 일하며 제가 깨달은 가치의 선순환은 이것입니다. 반대로 애정이 없으면 고민을 안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그렇습니다(p. 281). 그러니 일로 성공하고 싶다면 좋아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좋아하는 일을 하면 시키지 않아도 미친 듯이 합니다. 날이 갈수록 경쟁이 치열해지는 것이 지금의 사회라면, 앞으로는 전 세계가 유기적으로 연결됨에 따라 세계 1등이 모든 것을 가지는 승자독식의 구조로 더욱 변화할 겁니다. 그러므로 좋아하는 일을 해야 그나마 승산이 있습니다. 좋아하지 않는 일을 하면 잘할 이유를 못 찾고 대충 할 테니 전망이 없습니다. 저는 그래서 애정이 있는 사람이 비즈니스를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자기 일에 대한 애정과, 내 결과물을 향유할 사람들에 대한 애정 둘 다 있어야 합니다. 강연을 할 때 저는 청중들에게 하기 싫은 일을 하고 있다면 빨리 그만두라고 말합니다. 이 일을 하고 있지만 내 고객이 싫다, 일은 싫지만 급여가 좋으니까 한다 는 사람들은 특히 그렇습니다. 자신의 꿈을 찾으라는 자기계발적 교훈을 설파하는 게 아니라, 어차피 현실적으로 안 될 터이니 하지 말라는 겁니다. 성공할 수가 없어요. 경쟁자는 혼신의 힘을 다하는데 여러분의 제품에는 혼이 담기지 않았다면 어떻게 성공하겠습니까. 사람들은 그 차이를 다 압니다. 애정이 있어야 승산이 생깁니다(p. 2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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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276】 자기 일을 사랑하는 사람이 결국 성공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