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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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단상】 부총회장 선거, 축제가 싸움판으로
    지난 4월 25일 오전 11시 참좋은교회(이윤찬 목사 시무)에서 대구교직자협의회 제31회 정기총회가 있었다. 이승희 증경총회장의 개회 예배 설교 후 합심기도 시간에 경북교직자협의회 대표회장 강전우 목사가 ‘총회와 영남지역을 위해서’ 기도할 때 부총회장 자격 문제로 소송이 붙은 총회를 염려하며 간절히 기도했다. 소송 관계자인 부총회장 후보 민찬기 목사나 장봉생 목사의 마음은 어떨지 모르나 총회 회관에서 먼 경상도 지역에서도 현 사태를 매우 안타깝게 여기며 탄식으로 기도하고 있다. 아마 이 사태를 지켜보는 대부분의 총대들의 마음도 편치는 않을 것이라고 본다. 한 사람의 부총회장이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과 물질이 필요하다. 노회와 협의회, 총회 등에서 오래 봉사하며 자신을 알려야한다. 이에 많은 시간이 든다. 그리고 물질로도 많이 섬겨야한다. 그래서 아무나 부총회장이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면에서 시간과 물질로 섬겨온 부총회장 후보들은 모두 총회의 귀한 자산이다. 바람직한 것은 단독 후보로 추대되는 것이지만 어쩔 수 없이 경선이 될 수도 있다. 그러다보면 친했던 사이도 서먹해지거나 “원수” 사이가 될 수 있다. 그래서 곽선희 목사는 운동을 할 때 서로 마주보는 것은 하지 않는다고 했다. 탁구나 테니스나 서로 마주보고 하다보면 감정 싸움이 될 수 있기에 자기는 각자 실력으로 승부하는 볼링을 한다고 말한 것을 들은 적이 있다. 일리 있는 말이다. 오래 세월 총회를 섬겨온 민찬기 목사나 장봉생 목사는 현재 서로를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내리 누르고 이겨야할 경쟁 상대로 보지 않겠는가 말이다. 이런 면에서 선거란 참으로 잔인한 것인지도 모른다. 민찬기 목사 소속 임원회가 민찬기 목사의 후보 자격에 대해 물었을 때 장봉생 목사 소속 노회도 임시노회를 열어 부총회장 출마 자격에 대해 선관위에 질의했다. 선관위가 이 문제를 다룰 때 투표에 처음에는 7:7 동수가 나왔다. 이어 재투표하여 7:8로 세 번 출마는 안된다는 결론을 내렸다. 다 지나간 일이지만 의견이 7대 7로 나뉘었다는 것은 선관위원 내에서도 의견이 팽팽했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 문제를 바로 처리할 것이 아니라 좀더 시간 여유를 두고 처리했다면 좋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있다. 증경총회장단의 의견을 듣는다든지, 실행위원회에서 의견을 구했다면 모양세는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속전속결로 재투표해 7:8로 세 번 출마 불가로 정했다. 그러자 민찬기 목사측에서는 이 문제에 대해 소송을 했고, 소속 노회에서 부총회장 후보로 추천을 받았다. 세상 법정이 이 문제를 어떻게 처리할지는 두고보면 된다. 그런데 성경은 교회 문제를 세상 법정에 끌고가는 것을 경고하고 있다. [고전6:1-7] “1 너희 중에 누가 다른 이와 더불어 다툼이 있는데 구태여 불의한 자들 앞에서 고발하고 성도 앞에서 하지 아니하느냐 2 성도가 세상을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세상도 너희에게 판단을 받겠거든 지극히 작은 일 판단하기를 감당하지 못하겠느냐 3 우리가 천사를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그러하거든 하물며 세상 일이랴 4 그런즉 너희가 세상 사건이 있을 때에 교회에서 경히 여김을 받는 자들을 세우느냐 5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 하여 이 말을 하노니 너희 가운데 그 형제간의 일을 판단할 만한 지혜 있는 자가 이같이 하나도 없느냐 6 형제가 형제와 더불어 고발할 뿐더러 믿지 아니하는 자들 앞에서 하느냐 7 너희가 피차 고발함으로 너희 가운데 이미 뚜렷한 허물이 있나니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 새로이 총회를 섬길 일꾼을 뽑는 총회 선거가 축제가 아니라 세상의 조롱거리가 되고, 사법의 판결을 받아야하는 싸움판이 된 것이 참으로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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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논단
    2024-04-26
  • 취재 기자를 내쫓는 노회들...무엇이 두려운가?
    봄 정기노회가 열리는 계절이다. 서울에서 먼 지방의 몇몇 노회를 취재갔다. 그 중 2개 노회에서 “내쫓김”을 당했다. 이리노회는 북일교회 문제로 회원 호명 때부터 시끄러웠다. 결국 노회원들간에 고성이 오갔다. 이런 가운데 취재하고 있는 기자들에게 나가달라고 "거칠게" 요구했다. 결국 쫓겨날 수 밖에 없었다. 충청노회도 전 총신대총장 김영우 목사 피소건에 대해 다루며 기자들에게 나가달라고 “험악하게” 요구했다. 결국 본당 중이층으로 쫓겨갈 수 밖에 없었다. 기자는 사실을 취재하고 알리기 위해 그 현장에 가 있는 것이다. 북일교회 문제는 대부분의 총회원들이 알고 있을만큼 큰 이슈이다. 당연히 기자들이 가서 취재할 수 밖에 없는 사항이다. 기자는 총회원들의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 대신해서 그 현장에 간 것이다. 그런데 무슨 이유로 기자들을 내쫓는 것인가? 그것이 과연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겠는가? 기자가 보면 안될만큼 감춰야할 문제가 있는가? 사실을 사실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문제해결에 도움이 될 수 있다. 문제 없는 노회는 취재간 기자들을 반기며 좋게 기사를 써서 노회를 잘 홍보해 달라고 부탁한다. 기자로서도 기분좋은 일이다. 반면 문제 있는 노회는 기자를 내쫓는다. 마치 잡상인 취급을 한다. 부득이 기자를 내보낼 필요가 있다면 “정중하게” 요청했으면 한다. 같은 합동측 목사한테 그렇게 함부로 해서 되겠는가? 앞으로도 “문제 있는” 이리노회와 충청노회 “사태 추이”에 대해 예의주시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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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2024-04-03
  • 【북토크】 편협한 꼰대가 되지는 말아야 할텐데....
    자기 생각에 갇혀 사는 사람은 편협한 사람이다. 이런 사람하고는 대화도 되지 않는다. 열린 사고가 필요하다. 남과 어울리기 위해서는 개방해야한다. 죽고 사는 진리의 문제가 아니라면 “그럴수도 있구나”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그러나 그것이 그리 쉽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으로 알고 있다. 편협함 공부를 하면서 문득 깨달은 건, 법률 외에 삶의 모든 기준들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시작한다는 것이다. 그 기준들은 절대불변의 진리가 아니어서 주변사람에게 영향을 받아 생성되기도 하고 타인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세워지기도 한다. 또 삶의 경험이 켜켜이 쌓이면서 조금씩 견고해지고 구체적으로 변하기도 한다. 그렇게 여러 기준들을 만들어 옳고 그름을 평가하는 일은 어쨌거나 사람이 하는 것이란 점에서 언제나 주관적이다. 하지만 우리는 종종 너무 쉽게 각자가 세운 판단 기준이 ‘정답’이라고 착각한다. 사람은 쉽게 타성에 젖으니 자신의 판단 기준과 결론이 절대적인 단 하나의 정답이라 믿으며 자기 우물 안에서 살아간다. 하지만 그 기준에 정답이란 없기에 자신이 바르고 타당한 기준을 세워가며 나이 먹고 있다는 생각도 사실 편협한 ‘착각’에 가깝다. 나이를 먹는 일이 무서운 건 나도 모르는 새 나의 판단이 바르고 타당한 정답이라고 생각하게 되기 때문이다. 특히 어떤 조직에 잘 적응한다는 것은 곧 그 곳의 기준을 잘 습득해 체화한다는 것이기도 하다. 공동체에서 튀는 사람이 되기 싫어서 공동체의 평가 기준을 답습하기도 하고, 나는 다르다 여기며 살아도 어느 날 문득 돌아보면 그 밥에 그 나물처럼 사고하게 되는 것이 현실이다. 자신의 존재를 정당화하기 위해 쉼 없이 자신의 옳고 그름을 고집하기도 하고 자신의 결핍된 부분을 숨기기 위해 고집스러운 기준으로 타인을 깎아 내리기도 한다. 입만 열면 세상 곳곳에 대한 불만을 쏟아 내는 투덜이 스머프 같은 사람이 있었다(입만 열면 남의 흉을 보는 사람도 있었는데 그 결이랑은 또 다르다). ‘이건 이래서 구리고, 저건 저래서 구리고’, ‘그런 사고방식이 말이 되느냐. 말은 그렇지만 속내는 이런 것 아니겠느냐’하는 식으로 언제나 자신 밖의 사람과 상황에 대해 평가만 늘어놓는 사람이었다. 초반에는 그가 솔직하고 유쾌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이 어떤 것. 누군가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는 지 밝히는 것은 꽤나 용기가 필요한 일이고 그 취향과 기준을 고백하는 것이 자신의 약점이 될 수도 있는 데 저렇게 쿨하게 늘어놓다니! 성격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대화의 주된 발언이 자기 자신 밖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한 평가이다 보니 들을수록 의아한 지점이 생겼다. 당신에게 평가할 자격이 있는지, 타인이 당신에게 평가 받아야 할 이유가 있는지, 평가할 자유가 있다고 해도 당신의 평가를 궁금해 하는 사람이 있는지 하는 것이었다. 심지어 그의 평가를 들으면 들을수록 그에 대한 인상 또한 '예리하고 유쾌한 사람이다' 라기 보다 ‘어딘가 모르게 편협하다’, ‘편협함을 자랑하는 태도가 참 멍청하다’까지 이어졌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난 뒤 몇몇 단정적인 말들에서 그가 타인에 대한 평가를 거침없이 내뱉을 수 있었던 까닭을 눈치 첼 수 있었다. 그 모든 것은 자신의 말이 정답이라고 여겨서 가능했던 것 이었다. 자기 말이 정답인 사람 곁에 다른 의견들은 오답처리 되기 마련이다. 그리고 자신의 의견이 오답이 되 는 대화를 좋아라할 사람은 없다. 그렇게 그는 자기주장이 뚜렷한 사람에서 편협한 사람으로 점차 다르게 기억 됐다. 중학생 때 유독 적이 없었던 한 친구가 떠오른다. 말수가 적어서, 자기주장이 강하지 않아서, 호불호가 없어서가 아니라 ‘편견’이 없어서 두루두루 모두와 잘 지내는 친구였다. 그는 어떤 친구들에게도 늘 같은 태도로 화답했다. 편견, 그러니까 그 편협함은 끊임없이 나를 위해 타인을 배척하는 수단이 된다. 진정한 세월의 지혜는 오히려 '편견 없음'에 가까울 거라 생각한다. 타인을 판단하는 가장 괜찮은 기준은 포용이 아닐까? 타인과 자신에 대해 사람은 언제나 ‘알 수 없음’ 한 줌은 가지고 사니까. 견고한 기준은 편협한 생각의 방증일지도 모른다(pp. 178-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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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소개
    2024-03-31
  • 【북토크】 自害가 생존전략이라니....
    나는 상담, 심리 관련 책도 좋아한다. 대학때부터 지금까지 기회 되는대로 읽고 있다. 우연히 보게 된 이 책에서 “자해도 생존방법”이라는 것에 작은 충격을 받았다. 오죽하면 살기 위해 자기 몸에 해를 주는 것인가? 길지 않은 인생을 사는데도 참 힘들다. 세상에 불쌍한 사람들이 참 많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리고 이들과도 더불어 살려면 무엇을 해야하는가 고민하게 된다. 자해하는 게 문제라고 말하며 부모님 권유로 상담실에 온 고등학생 내담자를 만났습니다. 고등학교에 입학한 이후 사소한 일로 친구들과 사이가 멀어졌고 왕따를 당하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학교 가는 게 힘들어서 지각과 결석을 반복하며 적응이 더 어려워졌다고 합니다. 친구들이 자신에 대해 안 좋게 말할까 봐 계속 예민한 상태로 있다 보니 피곤하고, 수업에 집중하기 어려워서 거의 책상에 엎드려 있는다고 합니다. 반대로 온라인에서 만난 학교 밖 친구들과는 관계를 잘 맺고 인기가 많다고 합니다. 웃으면서 인기가 많다고 얘기 하다가 이내 걱정하는 얼굴로, 사실 인기가 많은 이유는 친구들을 잃을까 봐 엄청나게 신경을 쓰면서 친구들 비위를 다 맞춰주기 때문이라고 털어놓았습니다. 학교에서는 왕따니까 밖에서 힘들게 만든 친구들이라도 잃지 않기 위해 친구들이 부르면 거절하지 못하고 모든 모임에 나가고 친구들 말을 들어주고 웃어주느라 에너지가 다 빠진다고 했습니다. 기분이 좋지 않은 날도 즐거운 것처럼 친구들과 놀고, 막상 집에 오면 허무하고 외로운 마음이 든다고 합니다. 혹시나 말실수해서 친구들이 자신을 싫어하게 될까 봐 매번 친구들에게 연락해서 자신이 잘못한 게 없는지 확인 한다고 합니다. 마음이 초조하고 불안한 상태로 가득 차 있다가 가족들의 말 한마디에 갑자기 화를 냅니다. 우울한 기분, 친구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공허한 느낌, 불안감이 뒤섞이면서 마음이 터질 것 같은 상태가 된다고 합니다. 그럴 때 자해를 하게 된다고, 어쩔 수 없이 하게 된다고, 나지막이 말 합니다. 물속에 오래 있을 때 가슴이 답답해지고 숨이 안 쉬어지다가 수면 위로 올라오면 숨이 크게 내쉬어지는 것처럼, 자해하고 나면 숨이 쉬어지고 살 것 같은 기분이 든다고 많은 내담자가 말합니다. 자해는 화가 나는 마음을 표현하는 방법이자 자신이 얼마나 힘든지 다른 사람에게 알리는 수단입니다. 아무런 감각이나 감정을 느끼지 못할 때 무언가를 느끼도록 도와주기도 하고, 사람들에게 도움이 필요하다고 요청하는 방법입니다. ‘자해는 나쁘다, 절대 해서는 안 된다’라는 말이 먼저 튀어나올 수도 있지만, 자해는 누군가에게는 필요한 생존전략이 됩니다(pp. 71-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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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소개
    2024-03-31
  • 【북토크】 문학을 통해 배운 것들
    이 책의 저자는 문학을 통해 배운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세상을 바라볼 때 시선의 위치와 방향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시야가 달라진다는 것,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자리에 서보는 일, 들리지 않는 목소리를 듣고 보이지 않는 존재를 보는 일, 한 편의 소설을 읽고 내 안의 무언가가 완전히 바뀌어버리는 일 또한 가능하다는 것, 인간은 끊임없이 이야기를 만들고 쓰면서 다른 세계를 상상하고 다른 사람이 되는 일을 꿈꾸면서도 끝내 자기 자신일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 이 모든 것을 나는 문학을 통해 배웠으며 이 경험이 나를 바꿨다는, 어쩌면 너무나도 문학도 같은 이야기다” 나는 이 글에 전적으로 동감한다. 그래서 지금도 이 “재미”에 열심히 책을 읽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 책은 직접 문학 작품을 다루지는 않는다. 저자는 넥플릭스, 왓챠, 웨이브 등 여러 OTT에 있는 드라마나 영화를 소재로 이 책 한권을 썼다. 물론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작품도 많다. 내공이 보통이 아니라는 느낌을 갖는다. 나는 이런 글을 쓸 실력이 없어 감탄하면서 봤다. 유홍준 교수는 그의 역작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서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을 했다. 모르면 보이지 않는다. 기회가 되면 이 책의 저자처럼 영화나 드라마에 대한 글도 써보고 싶다. 그럴려면 아들이 가입해 놨지만 안 보고 있는 넥플릭스를 열심히 이용해야 할 것 같다. 할 일이 또 하나 늘었다. 이 또한 새로운 도전이니 기대가 된다. 국어국문학을 전공했다. 서른 줄에 접어든 이후로는 이야기할 일이 거의 없긴 하지만, 피치 못할 이유로 전공을 언급해야 하는 상황이 되면 괜히 머쓱해진다. 직업이 작가이기 때문이다. 작가인데 국어국문학과를 나왔다고 하면 "전공을 살리셨구나!" 같은 말을 듣게 되고 만다. 전공을 살린 것일까? 괜히 골똘해졌다가는 국어학과 국문학의 차이라든가, '과연 어디까지가 문학인가'라는 질문이라든가,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해서 작가가 되면 전공을 살린 것인가 아닌가 같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게 되기 때문에, "그런가요?" 하고 대답한 뒤 얼른 소재를 바꾸는 것이 좋다. 그러지 않으면 "국문과가 굶는 과라던데... " 하는 식의 무례한 농담을 듣게 되어버리고 만다. 이 농담을 들을 때면 미소 비슷한 것도 지을 수 없기 때문에 재빠른 소재 전환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다시 한번 곰곰이 생각해봐도 국문학을 전공했기 때문에 작가가 된 것 같지는 않다. 인과관계가 없는 일로 보인다. 학과 공부가 나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거나 쓸모없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문학이 정말 재미있었기 때문에 열심히 공부했고, 그래서 상당히 많은 영향을 받았다. 문학 작품을 읽고, 문학을 배우고, 듣고, 공부하며 보낸 20대 초반의 몇 년간, 내가 세상을 보는 법은 달라졌다. 이 시절의 경험이 내 삶 전반에 어떤 영향을 미쳤고 또 나의 어떤 부분을 바꿨는지를 전부 말하자면 너무 긴 이야기가 될 것이다. 줄여서 말해보자면, 나는 문학을 통해 이런 것들을 배웠다. 세상을 바라볼 때 시선의 위치와 방향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시야가 달라진다는 것,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자리에 서보는 일, 들리지 않는 목소리를 듣고 보이지 않는 존재를 보는 일, 한 편의 소설을 읽고 내 안의 무언가가 완전히 바뀌어버리는 일 또한 가능하다는 것, 인간은 끊임없이 이야기를 만들고 쓰면서 다른 세계를 상상하고 다른 사람이 되는 일을 꿈꾸면서도 끝내 자기 자신일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 이 모든 것을 나는 문학을 통해 배웠으며 이 경험이 나를 바꿨다는, 어쩌면 너무나도 문학도 같은 이야기다(pp. 139-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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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소개
    2024-03-28
  • 【북토크】 한 대형 교회의 탄생과 몰락
    세상에는 별별 사람들이 있고, 별별 책들이 있다. 이 책도 그 중 하나다. 우연히 읽게 됐다. 읽다보니 재밌어서 끝까지 보게 됐다. 세계 여러 곳의 버려진 건물들에 대한 이야기가 흥미로웠다. 목사 아니랄까봐 그중 교회에 대해 다룬 이야기에 관심이 갔다. 큰 돈으로 지은 교회가 결국 교인들의 이사로 숫자가 줄자 큰 건물 유지에 실패하고 버려진 이야기다. 얼마전 아랫 지방에서 열린 노회를 취재했다. 교회가 매우 컸다. 그런데 외진 곳이라해서 부목사나 여전도사나 부교역자가 한명도 지원하지 않는다고 했다. 지방 작은 동네에 있는 이 큰 교회가 앞으로도 잘 유지가 될 수 있을지 염려스럽다. 인구감소는 절벽이라 지방은 소멸하고 있고 사람들은 먹고 사느라 종교에 관심이 없는데 앞으로 50년 후에도 그 큰 교회가 교회로서 제대로 살아남을 수 있을까?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기적의 도시'는 왜 미국의 살인 수도'가 됐을까-시티감리교교회(GARY CITY METHODIST CHURCH) 미국 인디애나주의 공업 도시 가운데 가장 젊은 도시인 게리Gary는 미시간호 남쪽에 40.46제곱킬로미터쯤 펼쳐진 습지에서 1906년에 태어났다. 시카고에서 고작 64킬로미터 떨어진 곳이다. 게리는 유나이티드스테이츠철강 United States Steal Corporaton(Us스틸)이 낳은 도시다. US스틸은 게리에 시간과 에너지, 비용을 쏟아 최첨단 공장을 짓는 대신 공장 노동자를 위한 마을은 눈에 띄게 무성의하게 계획했다. 예를 들어 게리에서는 시민이 아니라 철강 공장을 중심으로 전력 공급을 조절했기 때문에 가로등이 깜박거리곤 했다. 하지만 게리를 '기적의 도시' 나 '마법 같은 도시', '금세기의 도시'라고 부르며 옹호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금세기의 도시'라는 별칭은 게리의 앞날을 어느 정도 예언했다. 게리는 20세기의 우여곡절에 속수무책으로 휘둘렸고, 도시의 운명은 미국 제조업의 호황과 불황에 따라 요동쳤다. 도시 인구는 유럽 에서 이민자가 쏟아져 들어오고 짐크로Jim Crow법(공공시설에서 백인과 유색 인종을 분리하는 남부 주들의 법률로 1876년부터 1965년까지 시행됐다. 옮긴이)이 시행되는 남부에서 아프리카계 시민이 몰려오며 대거 늘어났다. 그러나 20세기 후반부터는 실업과 소위 백인 탈출white flight(백인 중산층이 도심에서 교외로 탈출하는 현상. 옮긴이) 탓에 인구가 대폭 줄어들었다. 게리의 인구는 1960년에 17만 8000명으로 절정에 달했지만, 오늘날에는 7만 8000명 미만이다. 도시가 이름을 따온 주인공은 엘버트 H. 게리라는 기업 변호사이자 카운티 지방법원 판사다. 그는 US스틸에 융자해준 존 피어폰트 모건의 의견에 따라 기업의 이사회 회장에 임명되며 기업가로 변신했다. 게리는 노동조합과 노동자 권리에 반대하고자 성경을 선택적으로 인용하는 독실한 사람이었다. 자존심이 강하고 유머 감각이라곤 없는 이 도덕주의자는 하얗게 센 머리와 콧수염을 깔끔하게 정리한 모습으로 귀족적 분위기를 풍겼다. 신도시에 게리라는 이름을 붙이자고 제안한 사람도 그였다. 모건이 “물렁뼈 아첨꾼”이라고 맹비난할 만큼 교활한 수완가였던 그는 이사회의 반대를 노련하게 물리쳤다. 사실 이사회는 새 도시에 US스틸 회장 윌리엄 엘리스 코리의 이름을 붙여야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미국 우체국도 신도시의 명칭을 게리로 정하면 메릴랜드주의 게리와 헷갈릴 것이라며 반대했다. 중서부에서 나고 자란 게리는 자신의 이름을 딴 도시가 설립된 후에도 계속 뉴욕에 머물렀지만, 내 마음은 인디애나주 게리에 있다"라고 자주 주장했다. 1920년대에 그는 급증하는 게리 인구에 헌신할 새로운 감리교 교회를 세우는 사업도 열정적으로 후원했다. 교회를 지을 부지를 제공하고 기업 자금 35만 달러를 공사 기금으로 내놓는 안을 승인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4단 건반 어니스트 스키너 파이프 오르간까지 개인적으로 기부했다. 아마 게리는 교회가 재정적으로 자립할 수 있도록 계획되었고, 예배를 보는 본관 외에도 사회적, 교육적 기능과 상업적 기능을 맡은 별관이 들어선다는 데 매력을 느꼈을 것이다. 이 계획은 진보적인 지역 목사 윌리엄 그랜트 시먼 박사가 주도했다. 인디애나 출신으로 보스턴신학교를 졸업하고 인디애나 그린필드의 드포대학교에서 철학을 가르쳤던 시먼은 1916년에 다코타웨슬 리언대학교에서 게리로 왔다. 게리에서 그는 낙천적 성격 덕분에 '서니 짐 Sunny Jim(명랑한 짐. 옮긴이)'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아울러 인종적 관용과 더 커다란 통합을 지지하며 큰 목소리를 냈다. 1924년, 그는 큐클럭스클랜(K.K.K)을 영웅으로 묘사하는 D.W. 그리피스의 영화 <국가의 탄생>이 "인종적 편견을 일으킨다"며 오르페움 극장에서 상영을 중단해달라고 게리 시장 R. O. 존슨을 압박했다. 안타깝게도 그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해 12월, 누군가가 어느 흑인 남성을 공격한 후 휘발유를 들이붓고 불을 질러서 심각한 화상을 입혔다. 가해자는 끝내 체포되지 않았고, 게리에서는 인종차별적 공격이 급증했다. 시먼은 교회가 게리의 모든 공동체를 하나로 모으기를 바랐다. 그러나 수많은 백인 신도의 저항과 인종 차별 탓에 모두를 포용하는 교회를 만들겠다는 그의 꿈은 꺾이고 말았다. 시먼은 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제작한 팸플릿에서 교회에 관한 자신의 비전을 이렇게 설명 했다. "쇠와 철을 만드는 건장한 노동자, 활발하게 영업하는 상업가, 바쁜 여성, 성장하는 아이들은 주일에 한 시간뿐만 아니라 주중에도 매시간 주님의 영향력을 확인하며 그리스도가 살아계신다고 확신합니다. 따라서 시내 교회에서 예배 계획과 포괄적인 목회 활동 계획을 마련했습니다. 교회는 일주일 내내 문을 엽니다. 교회는 청년과 노인을 위해 기독교 교육, 건전한 오락, 매력적이고 순수한 여흥 거리를 제공합니다. 무엇보다도 교회는 도시의 중심부에 기독교의 우애 정신을 불러옵니다" 게리의 시티감리교교회는 고딕 양식을 완벽하게 부활시킨 장중한 작품이자 중서부 최대의 감리교교회였다. 시카고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건축 회사 로앤드볼렌바허Lowe & Bplenbacher가 인디애나 베드퍼드의 석회암을 사용해서 21개월 만에 완공했다. 1926년 10월 3일에 시먼이 첫 예배를 집전했고, 게리에서는 일주일 동안 밤마다 축하 행사가 열렸다. 목사 관저 뒤로 각종 사무실과 체육관, 극장 홀까지 품은 9층짜리 건물이 들어섰다. 교회에서는 강연과 대담, 연극, 스포츠 행사(정규직 직원 여섯 명 중에는 스포츠 감독도 있었다), 공공 행사, 음악 콘서트, 종파를 초월한 공연과 쇼, 심지어 영화 상영까지 이루어졌다. 그런데 1700명쯤 되는 신도 가운데 일부는 교회 건물이 지나치게 가톨릭적이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교회 단지 전체를 관리하는 데 드는 비용은 시먼이 처음에 계산했던 것보다 더 컸다. 유지비 탓에 자금이 계속 부족해졌기 때문에 문제가 심각해졌다. 교회를 다니지 않는 사람도 찾아오게 만들어서 수익을 개선하고자 카페테리아를 만들자는 계획이 제안되었다. 하지만 자기 식당의 손님을 빼앗기고 싶지 않았던 주요 감리교 식당의 주인이 반대하는 바람에 무산되었다. 볼링장을 만드는 계획도 거론된 듯하지만, 실현되지 못했다. 어쨌든 교회가 춤과 저속한 언어를 반대했으니 젊은 노동자들 사이에서 인기가 없을 수밖에 없었다. 고단한 일상에서 벗어나 느긋함을 즐기려는 사람들은 언행을 조심할 필요가 없는 데다 술도 마실 수 있는 무허가 술집에 드나드는 편을 더 좋아했다. 시먼은 1929년에 결국 신도들에게 쫓겨나서 오하이오주 랭커스터 교구로 옮겼다. 그는 게리를 떠나면서도 이곳에는 "진보와 환대라는 진정 서구적인 정신"이 있다며 게리를 여전히 사랑한다고 밝혔다. 그는 1944년에 자동차 사고로 숨졌다. 유언에 따라 시먼의 유해는 그 자신이 설립에 힘을 보탰던 게리의 교회에 묻혔다. 전후 종교 부흥기였던 1950년대에 게리의 시티감리교교회는 무려 3000명이나 되는 신도수를 자랑했다. 백인과 중산층이 대다수였던 교회 신도는 게리의 심각한 인종간 불평등을 반영했다. 게리는 당대 미국 복부에서 인종 차별이 가장 극심한 도시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1960년대로 접어들자 부유한 백인이 교외로 떠나기 시작했다. 철강 산업에서 해외 경쟁이 치열해지고 자동화가 확대되면서 정리해고가 발생하자 도심 범죄율도 증가했다. 결국 교회 신도 숫자가 점차 줄어들었다. 1973년에 교회의 신도는 겨우 320명뿐이었고, 이 중에서 예배에 꾸준히 나오는 사람은 3분의 1에 지나지 않았다. 2년 후, 시티 감리교 교회는 문을 닫았다. 인디애나대학교가 교회와 이웃한 홀 일부를 인수했지만, 교회를 대신할 용도를 찾지 못했다. 게리가 "미국의 살인 수도"라는 부끄러운 이름을 얻은 1993년, 교회는 이미 무너져가는 겉껍질로 변해 있었다. 4년 후에는 화재가 건물 전체를 휩쓸었고, 복구를 향한 희망을 완전히 꺾어놓았다. 2000년대로 들어선 후 한동안은 철거가 유일한 답인 듯했지만, 이제는 공원 조성이라는 가능성이 새로 생겨났다. 이 도심 속 에덴은 러스트벨트에서 가장 고통받은 도시, 가까운 과거는 괴로웠고 미래는 불안한 이 지역에 위안이 되어 줄지도 모른다(pp. 274-282).
    • 오피니언
    • 책소개
    2024-03-28

실시간 오피니언 기사

  • 【단상】 38년 전 그 자리..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
    1985년도에 총신대학 신학과에 입학했다. 이후 38년의 세월이 흐르고 그때 앉았던 그 벤치에 앉아본다. 학교가 많이 변했다. 종합관은 철거되어 이전보다 더 높은 새로운 건물이 들어섰고, 학부때 주로 수업듣던 신관은 리모델링이 되어 속을 새로운 겉표면이 뒤덥고 있지만 속살이 어떤지를 알고 있다. 신관 위 운동장엔 새로운 강의 건물이 들어섰다. 38년간 많은 일들이 있었다. 그런데 38년만에 앉은 벤치는 그때와 같은 것 같은데, 나의 착각인가? 이제는 학부와 군목 5년 선배가 총장으로, 학부 동기가 부총장으로 있는 총신대학교. 학생 때는 나와 다른 사람들처럼 보였던 그 직책을 아는 사람들이 하고 있고 그 시대의 교수들은 이제 다 정년퇴임하고 세월의 뒤편으로 사라졌다. 38년 전 어느 날 수업 후 그 벤치에 앉아 성경 읽던 그 때의 나는 지금 이렇게 전혀 낯선 모습으로 다시 그 벤치에 앉는다. 과거 보다 몸이 불어나고 머리카락이 빠졌다. 그 세월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가? 육군 군목으로 4년, 부목사로 8년, 담임으로 15년...참으로 숨가쁘게 살았던 시간들이다. 이제는 전혀 생각지 않은 교계 기자로 제2의 삶을 살고 있다. 그래서 이렇게 모교에 와 볼 수 있는 기회를 갖는 것이기도 하다. 아직도 38년 전의 내 모습은 눈에, 마음에 선한데 낯선 모습의 내가 그 자리에 앉는다. 앞으로 또 얼마의 시간이 흘러 다시 그 벤치에 앉는다면 그 때의 나는 내게 무슨 상념을 안겨줄 것인가? 동창들, 동아리 멤버들이 함께 했던 이 자리에 더 이상 그들은 없다. 한참 후배들이 이 자리를 자기들 세상인양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언젠가 그들도 이 곳을 떠나 각자의 삶을 살다가 기회가 되면 나처럼 과거의 자기를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있겠지. 세월! 참 빠르다.
    • 오피니언
    • 칼럼
    2023-08-08
  • 총회 이권개입 근절...一罰百戒가 필요하다
    총회선거관리위원회(위원장 배광식 목사)는 지난 7월 25일 계룡 나눔의교회(김상윤 목사 시무)에서 열린 제8차 전체회의에서 오정호 목사를 총회장 후보로 확정했다. 또한 최근 총회준비위원회(위원장 정영교 목사)는 제3차 회의를 새로남교회(오정호 목사)에서 갖고, 제108회 총회 청사진에 대해 논의했다. 위원장 정영교 목사를 비롯한 총준위원들과 총회 부임원들이 함께 한 회의에서 오정호 부총회장이 제108회 총회 청사진을 꺼내놨다. 이중 관심끄는 것은 “이권에 개입하지 않겠다”는 다짐이었다. 오 부총회장은 “결코 이권에 개입하지 않겠다. 뒷모습이 아름다운 직분자가 되겠다”고 밝혔다. “이권에 개입하지 않겠다”는 것은 107회 임원회의 다짐이기도 했다. 그러나 총회임원이나 총회 내 주요 직책자들이 분쟁 사건에 이권을 노리고 개입했다는 “설”이 끊이지 않았다. 그래서 “개혁의 주체여야 할 인물들이 이권을 탐내면서 오히려 개혁의 걸림돌이 됐다”는 자조석인 말도 들린다. 여전히 해결되지 않는 충남노회와 천안중부교회가 바로 그 증거이다. 곧 총회의 수장이 될 부총회장의 입에서 “이권에 개입하지 않겠다”는 말이 나오는 현 총회 상황이 부끄럽고 자괴감이 든다. 얼마나 상황이 심각하면 이런 말을 해야하는가하는 생각이 든다. 타교단 사람들이 이 말을 들을 때 “참으로 훌륭하다”는 생각이 먼저 들까 아니면 “얼마나 이권에 개입했으면 저런 말을 해야하는가. 합동 교단도 별거 없네”하는 생각을 할까? “이권에 개입하지 않겠다”는 것은 단순히 말로, 구호로, 혹은 선서로 되는 것이 아니다. 그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미연에 “조치” 해야 하며 계속해서 “관리 감독”해야 하고 그럼에도 일이 발생되면 “처벌” 해야 한다. 이 과정이 없으면 빈말에 지나지 않는다. 과거에 이권이 개입한 것으로 의심되지만 문제삼지 않고 조사하지 않고 처벌하지 않고 그냥 넘어간 사례가 한두건인가 말이다. 오 부총회장은 108회 총회를 “명품총회”로 만들기 원한다. 그러기 위해서 이권에 개입하지 않겠다고 밝힌 것이다. 당연한 것임에도 적극 지지한다. 아울러 포도원 담을 허는 여우와 같이 “명품총회”를 망치는 일이 있을 때 반드시 조사하고 처리하고 권징하기를 바란다. 칼빈은 개혁교회의 표지를 “말씀, 성찬, 치리(권징)”로 명백히 규정했기 때문이다. 108회 총회 때는 구렁이 담 넘어가는 일이 생기지 않기를 바래본다. 권징이 살아있고, 一罰百戒가 실행되기를 바란다.
    • 오피니언
    • 논단
    2023-08-02
  • "자리", 양날의 검
    처음에 그를 봤을 때 겸손했다. 한 표가 아쉬운 총회 임원 후보자였기에 그랬는지 모른다. 이후 박빙의 차이로 당선됐다. 그리고 점점 그 자리에 걸맞는 사람으로 “변모”하고 “성장”했다. 흐믓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달라졌다. 이전의 겸손한 모습은 사라지고 권위적이고 고압적인 사람이 됐다. 원래 그런 사람이었는데 후보 시절이라 감추었던지, 자리가 그렇게 만들었는지 모르겠다. 달라진 모습에 충격을 받았고 당혹스러웠다. “자리”는 이처럼 양날의 검이다. 그 자리에 앉은 사람을 성장시키거나 몰락시킨다. 또한 “자리”는 그 사람의 본 모습을 보여주는 기회다. 흔히 "완장 차면 사람이 달라진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그”의 변질과 완고해짐을 보며 그럴려고 그 자리를 탐했는가하는 장탄식을 한다. 오늘도 "그"를 이어 그 "자리"에 앉을려고 수많은 사람들이 달려든다. 불속에 뛰어드는 불나방이 되지 않기를 바래본다. "자리"가 "죽을 자리"가 아니라 "사는 자리"가 되야한다. 그 “자리 결정”이 두 달도 안 남았다.
    • 오피니언
    • 칼럼
    2023-08-01
  • 알수록 좋은 사람 vs 알아서 싫은 사람
    나는 더 이상 배우 설경구가 출현하는 영화는 안 본다. 같이 영화를 찍었던 여배우와 정분나 처자식을 버리고 재혼했기 때문이다. 또한 더 이상 연예인 강호동이 나오는 프로를 안 본다. 강원도 평창에 땅 투기를 한 것이 발각 됐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수 김건모의 노래를 더 이상 듣지 않는다. 여성 폭행범이기 때문이다. 또한 더 이상 이재철 목사의 책을 읽지 않는다. 표리부동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됐기 때문이다. 모르는게 약이고 아는게 병인가? 알수록 좋은 사람도 있고, 알아서 싫은 사람도 있다. 108회 총회가 다가올수록 임원 입후보자의 진짜 모습이 드러날 것이다. 무엇보다 좋은 사람이 당선 되기를 바래본다.
    • 오피니언
    • 칼럼
    2023-07-31
  • 특정 사조직 만든 언론, 본격 선거 개입...좌시할 수 없다
    본 기자는 기사를 통해 한 언론이 특정 사조직의 중심에 있는 것에 대해 우려를 표명하고 비판했었다. 언론은 독립 기관으로 권력에 대해 감시와 견제를 해야함에도 그 언론은 대놓고 권력을 만드는 중심에 서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보수 언론 조선, 중앙, 동아도 하지 않는 짓이다. 그들은 노골적으로 친정부적이지만 그들이 정당 안에 들어가 있지는 않다. “언론의 가오”가 있기 때문이다. 언론은 어떤 권력도 무서워하지 않고 비판할 수 있고 비판해야하기에 늘 권력과는 일정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 언론의 숙명이다. 늘 적과의 동침이 언론과 권력의 관계이다. 그런데 이 언론은 본인이 나서서 세력을 규합했다. 늘 권력을 취재하는 입장에서 이제 자기 정치를 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 언론은 더 이상 언론이 아니다. 그 특정 세력의 나팔수요 기관지요 선동지이다. 이번에 그 언론이 모 부총회장 후보를 문제 삼는 기사를 실었다. 이에 다른 언론이 그 기사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기사를 실었다. 그러자 그 기사를 문제 삼아 본인이 방장으로 있는 300여명 규모의 단톡에서 그 언론사 대표를 “방출”시켰다. 제 3자의 입장에서 볼 때 문제점을 지적한 기사에는 별 문제점이 없었다. 팩트와 법에 근거해서 기사를 썼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른 것을 문제 삼아 “영구 퇴출”시켰다. 작년에 이 단톡방에서 먼저 퇴출을 당한 언론인 입장에서 참으로 안타깝다. 다른 의견을 수렴할 줄 모르는 언론이 어떻게 언론이라고 할 수 있는가? 자기 단톡방 나와바리에서 왕노릇할려고 하는가? 이 언론이 만든 사조직의 대표회장을 역임한 명예회장이 이번에 목사부총회장 후보로 나온다. 그래서 앞으로 상대 후보의 흠잡는 기사를 열심히 쓸 것이다. 그러나 1도 관심이 없다. 아무리 콩으로 메주를 쑨다해도 신뢰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무슨 기사를 써도 자기 사조직 부총회장 후보를 위한 기사구나하는 선입견을 버릴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오해를 받지 않기 위해서도 언론사가 중심이 되 총회 권력을 지향하는 사조직을 만들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각 언론사마다 지지하는 후보가 있을 수 있다. 그건 언론사 자유이다. 작년에 두 명의 부총회장 후보에 대해 어떤 언론사들은 특정 후보를 지지했고 어떤 언론사들은 중립(?)을 지켰다. 이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언론사가 사조직을 만들어 그 사조직의 후보를 지지하는 일은 하지 말아야한다. 그럼에도 이 언론은 아랑곳하지 않고 "마이동풍"으로 "무쏘의 뿔처럼 혼자서" 가고 있다. 과연 뜻대로 그 후보가 당선이 될지는 두고 볼 일이다. 혹여 이번에 그쪽 사조직 회원 후보가 되면 그 사조직은 대박(?)이 날 것이다. 총회 정치를 하고자 하는 자들은 다 그 사조직에 가입할려고 할 것이다. 이미 회원 면면을 보면 합리적인 의심이 가능하다. 본 기자는 총회를 위해서도 그 일은 막아야한다고 생각한다. 권순웅 총회장도 사조직이 총회 정치를 해서는 안된다고 성명서를 발표하지 않았던가? 특정 사조직에 의해 이권 카르텔이 형성되는 것을 좌시할 수 없음을 분명히 밝힌다. 앞으로 기사를 통해 이 일의 부당함을 계속 드러낼 것이다. 이 사조직의 발전적인 해체를 요구한다! 사조직의 文盲에 가까운 마타도어 부메랑 될 듯 http://www.pota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673 사조직 『합동포럼』, 또 하나의 총회인가? 총회임원 등용문인가? http://lnsnews.com/news/view.php?no=1196 사조직 『합동포럼』의 정체성?http://lnsnews.com/news/view.php?no=1211 사조직 『합동포럼』, 권언유착?http://lnsnews.com/news/view.php?no=1212
    • 오피니언
    • 논단
    2023-07-31
  • 【논단】 수틀리면(?) 노회 분립
    잊을만하면 노회 분립 건으로 총회가 시끄럽다. 얼마 전에는 한서노회가 시끄러운 가운데 분립하더니만 요즘은 전남노회가 난리다. 노회도, 총회 임원들도, 교계신문들도 이 일로 난리부르스다. 지난 27일 전남노회 양측 대표들이 임원들과 함께 모여 대화를 시도했다. 당연히 원만히 진행되지 못했다. 이미 서로의 마음이 갈라져있기 때문이다. 결국 정치력을 발휘해 분립쪽으로 진행될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 왜 노회 분립은 끊이지 않는가? 첫째, 노회 구성 조건이 엄격하지 않다. 현 헌법에 의하면 21개 당회만 있으면 노회를 만들 수 있다. 그러니 산술적으로 42개 당회만 있으면 두 개로 분립이 가능하다. 혹시 그렇지 못해도 당회가 모자란 쪽에 노회를 신설해 주고 일정기간 유예를 주어 21당회를 구성할 수 있는 특혜(?)를 주기도 한다. 이러니 너도나도 노회를 분립하는 것이다. 노회 신설이 어렵지 않기 때문이다. 둘째, 노회원들의 헤게모니 다툼으로 인해 노회가 분립 된다. 기득권 세력과 신진 세력이 부딪히면 결국 분립으로 가게 된다. 기득권 세력은 “만년무끼”로 노회의 주요 자리를 차지한다. 그리고 이권에 개입해 주머니를 채우는 경우가 많다. 그러니 노회를 바르게 하기 위해서든, 아니면 이권을 나눠먹기 위해서도 분립을 추진하게 되는 것이다. 셋째, 서로 꼴보기 싫어 분립하기도한다. 사람이라 서로 호불호가 있다. 당연한 것 아닌가? 한 손의 다섯 손가락들도 길이와 모양이 다르지 않은가? ‘다름’을 ‘틀림’이라고 생각하면 결국 분립의 길로 가게 된다. 여기에는 어떤 합리나 논리도 없다. ‘무조건 상대방이 꼴보기도 싫다’는 것이다. 그래서 노회를 쪼갠다. 현재 합동교단의 노회는 160여개이다. 반면 통합은 60여개이다. 교세가 비슷한데도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가? 말만 “합동 교단”이고 실은 “분열 교단”이라 그런 것인가? 노회수가 많다는 것을 부끄러워해야한다. 예수님은 요 17장에서 우리로 하나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셨건만 우리 교단은 아랑곳하지 않고 분열되고 있다. 노회 분열을 꾀하려는 자는 추후 이 일에 대해 책임을 져야한다. 그리고 노회 분립을 교인들에게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노회 분립은 교인들이 하는 게 아니라 목사가 하기에 교인들은 노회 분열로 인해 더 이상 연합활동을 같이 못하는 어려움을 당하기도 한다. 더 이상의 노회 분립이 없기를 바래보나 헛된 기대라는 것을 아니 참 씁쓸하다. 그런데 교인들도 줄고, 교회도 성장하지 않는데 과연 그 많은 노회가 유지될 수 있나? 결국 앞으로 노회가 어쩔수 없이 합병될 수 밖에 없는 때가 올 것이다. 그때 되야 "우리가 왜 분립했었지?" 현타가 올 것이다.
    • 오피니언
    • 논단
    2023-07-28
  • 성내기
    어느 취재 현장에서 있었던 일이다. 모임 현장에서 회원들 간에 말 다툼이 벌어졌다. 취재간 기자 입장에서 보면 한 회원이 원인 제공자였다. 그러자 다른 회원이 감정섞인 반응을 보였다. 나름 일리있는 항변이다. 그래도 지켜보는 입장에서는 덕스럽지 않았다. 이 장면을 보면서 많은 생각을 하고 나 자신을 돌아봤다. 때로 우리는 옳고 그름을 따지기 위해 언쟁과 논쟁을 벌인다. 그런 가운데 감정이 격해지기도 한다. 그러다보면 잠시 후에 후회할 말이나 행동을 하게된다. 5분도 안되게 벌어진 회원들간의 언쟁 장면을 보면서 두 가지가 떠올랐다. 한 가지는 모세가 므리바에서 백성들 앞에서 혈기를 부린 일이다(민20장). 이것이 한 이유가 되어 모세는 결국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게 된다. 또 한가지는 약 1:19-20말씀이었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니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하라. 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이를 이루지 못함이라” 결국 회원들간의 언쟁으로 인해 분위기는 싸해졌다.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는 말이 있다. 한 쪽이 잘못해도 상대방이 참았더라면 회원들은 참은 사람을 더 높게 평가해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지 못했다. 당사자는 몇 번 참았다가 화를 낸 것이었지만 참는 김에 더 참았더라면 좋았을 뻔했다. 취재 가서 회원들이 다투는 것은 처음 봤기에 앞으로 한동안 잊혀지지 않을 것 같다.
    • 오피니언
    • 논단
    2023-07-24
  • “하나님 앞에 약을 먹고 이 자리에서 죽겠다”
    “하나님 앞에 약을 먹고 이 자리에서 죽겠다” 최근 통장 잔고증명 위조 관련 항소심에서 1년 형을 받고 법정 구속된 어느 여인이 법정에서 외친 말이다. 관련 기사에 의하면 죄목은 다음과 같다. 경기 성남시 도촌동 땅 매입과정에서 2013년 4월 1일부터 10월 11일까지 4차례에 걸쳐 총 349억원가량이 저축은행에 예치된 것처럼 잔고증명서를 위조한 혐의 등으로 기소됐다. 동업자 안모씨와 공모해 2013년 8월 7일 도촌동 땅 관련 계약금 반환청구 소송을 제기하며 약 100억원의 위조된 잔고증명서를 법원에 제출한 혐의도 있다. 아울러 2013년 10월 도촌동 부동산을 매수하며 절반은 피고가 명의신탁한 회사에, 절반은 0씨 사위 명의로 소유권이전등기를 해 부동산실명법을 위반한 혐의도 받는다. 재판부는 "피고인의 항소는 제반 상황을 살펴봤을 때 받아들일 이유가 없다"며 기각하고 "항소심까지 충분히 방어권이 보장됐으며, 죄질이 나쁘고 재범과 도주 우려도 있어 법정구속한다"고 설명했다. 70대 후반의 고령이지만 법원은 피고가 “죄질이 나쁘고 재범과 도주 우려도 있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법정구속했다. 그러나 관련 기사의 댓글을 보면 죄질에 비해 구속 1년은 형평성이 맞지 않는다는 것이 많다. 봐주기 처벌이라는 것이다. 법적인 판단을 떠나 구속된 사람이 기독교 신자인지는 모르겠다. 검색 해보니 교회를 다녔던 것 같기도 하다. 그렇다고 해도 “하나님 앞에 약을 먹고 이 자리에서 죽겠다”는 발언은 신성모독적이다.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자기의 무죄를 주장하고자하는 것이 아닌가? 억울하다면 죽지 말고 살아 자기의 무죄를 밝히기를 바란다. 평생 저런 말을 들어본 적이 없어 충격적이다. 한동안 저 말이 뇌리를 떠나지 않을 것 같아 불쾌하다. 3계명은 말씀한다.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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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논단
    2023-07-22
  • 온도 1도 상승, 모두의 재앙
    한 뉴스에 의하면, 유엔이 제시한 기후변화 관련 최우선 목표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 지구의 평균 기온 상승폭을 산업화 이전 대비 섭씨 1.5도 이내로 억제하는 것이다. 이 한계치를 넘게 되면 폭염과 물 부족, 해수면 상승 등으로 인류의 생존이 위협받을 것으로 우려하고 있다. 2011~2020년 기준, 지구 온도는 산업화 이전 대비 1.1도 상승한 상태다 하지만 전 세계 탄소 배출량 등을 감안할 때 사실상 이 목표 달성이 불가능하단 관측이 나오는 가운데 세계기상기구가 또 한 번 암울한 전망을 공개했다. 세계기상기구는 보고서에서 지금까지 지구가 가장 더웠던 해가 2016년인데, 5년 내에 이기록이 깨질 확률을 98%, '1.5도 마지노선'이 뚫릴 확률을 66%로 분석했다. 지구가 뜨거워지고 있다. 생지옥 불가마로 변하고 있는 느낌이다. 전 세계의 기온이 높아져 많은 사람들이 고통당하고 있다. 우리나라도 예외없이 덥다보니 폭염주의보가 종종 발표된다. 집안 온도는 33도를 가리킨다. 참다 못해 벽걸이 에어콘을 켠다. 곧 시원한 바람이 나와 살 것 같다. 그런데 28도로 설정하면 미지근하고 27도로 설정하면 시원하다. 1도 차이가 얼마나 큰 가를 실감한다. 그런데 지구 온도가 전체적으로 1.5도 올라갈 수 있다고 한다. 그러면 보통 심각한 것이 아니다. 실내야 에어콘으로 온도 조절이 가능하지만 데워진 지구를 어떻게 식힐 것인가? 덥다고 온통 에어콘을 틀어댄다. 그 덕분에 실내에 들어가면 시원하고 밖으로 나오면 태양의 열기와 에어콘 실외기에서 나오는 더운 바람으로 인해 흡사 동남아에 와 있는 것 같다. 기성 세대야 어찌어찌 산다해도 후손들은 달라진 기후 환경에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짧은 기간에 기성 세대가 지구 환경을 버려놓은 것 같아 다음 세대에 미안할 뿐이다. 지구가 더 이상 뜨거워지지 않도록 해야한다. (사족, 기자로서 취재갈 때 너무 더워 정장을 못하고 가벼운 복장으로 가는 것을 양해해 주시기를, 자차를 이용하지 않고 대중교통을 이용하다보니 걷는 일이 많아 흐르는 땀 때문에 도저히 정장을 못하는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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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논단
    2023-07-21
  • 카메라와 핸드폰의 공생(?)
    취재 가서 사진 찍다보면 핸드폰으로 동영상을 찍는 분들과 불편한 일들이 종종 생긴다. 고성능 방송카메라는 뒤에서 줌으로 당겨 취재할 수 있기에 주로 뒤에 있는데 핸드폰은 근거리 촬영을 해야하기에 앞부분을 차지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면 카메라로 사진을 찍을 때 높이 솟은 핸드폰이 나오기고 하고 또 동영상 찍는데 방해된다는 한 소리도 들어야한다. 핸드폰이 많이 보급되고 카메라 화소가 좋아지면서 핸드폰으로 동영상을 찍는 경우가 많아져서 생기는 갈등(?)이다. 때로 어떤 취재 현장에서는 동영상 촬영은 일괄적으로 뒤로 옮겨 하도록 한 경우도 있었다. 그러면 카메라로 사진을 찍는 입장에서는 매우 편리하다. 카메라로 사진을 찍을 때 앞에서 핸드폰으로 동영상을 찍거나 양손을 높이 들어 사진을 찍을 때 참으로 난감하다. 이 문제를 어찌하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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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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