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8(일)
 
  • 주변에 있는 신자들의 삶이 말없는 영향력을 갖는다


9788984315785.jpg

 

우연히 한승헌 변호사의 자서전을 읽게 됐다. 작은 활자로 400페이지가 넘다보니 읽는데 많은 시간이 걸렸다. 책을 통해 지나온 민주화 과정에 대해 모르던 것을 많이 알게 됐다. 오늘날의 자유가 그냥 주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됐다. 저자는 책 말미에 자신의 신앙에 대해 말하고 있다. 불신자였던 자신이 어떻게 신앙을 갖게 됐는지에 대한 것이라 관심있게 봤다. 역시 주변에 있는 기존 신자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것을 확인했다. 책을 읽고 인터넷을 검색해 보니 저자는 2022년에 87세로 세상을 떠나셨다. 그래도 책을 통해 그분과 좋은 만남을 갖게되니 책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새삼 느낀다. 신앙 여정에 대한 글이니 길지만 읽어볼 만하다. (인터넷 교보문고를 검색하니 책이 절판됐다. 도서관에 있기에 대출해서 읽었는데 세월이 흐르다보니 그렇게 된 것 같다.)

 

나의 신앙

내 어린 시절, 어머님은 조왕님께 정안수를 떠놓고 빌기도 하고, 절에 가서 불공도 드리고, ‘단골에미’ 불러다 굿도 하는, 어찌 보면 다종교주의자였고, 달리 보면 범신론자였다. 나는 어머니가 신앙은 있으나 종교는 없는 분으로 생각되었다. 아니, 신앙이나 종교라기보다는 인간의 기본 염원인 기복의 마음이 간절했다고 본다. 그 시절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런 샤머니즘 류의 신앙에 젖어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나도 무종교로 자라고 사회생활에 들어갔다. 사실, 대학 2학년 때 선배 한 분의 권고로 교회에 처음 나가본 적이 있었다. 그러나 목사와 장로, 장로와 장로 사이에 반목과 음해가 끊이지 않는 것을 보고, 교회 나가기를 그만두었다. 신도들의 모범이 되어야 할 그들의 반신앙적 행태에 실망했던 것이다. 입으로 하는 설교나 기도보다 행실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 후 검사가 되어, 이름 난 목사와 장로 사이의 고소사건을 맡게 되었다. 서로 말이 달라서 대질신문을 하려고 두 사람을 동시에 나오도록 했다. 예정된 시각에 검사실에 출석한 두 사람은 내 책상 앞에 앉자마자 기도를 시작했다. 기도는 끝날 줄을 몰랐다. 마치 기도경연대회라도 하는 것 같았다. 그들은 나의 화해 권유를 끝내 거부했다. 양측이 조금씩만 양보하면 어렵지 않게 화해가 될 사건이었건만, 피차 막무가내였다. 기독교인 아닌 일반인보다 훨씬 이기적으로 보였다. 이래서 나의 마음은 기독교에서 한발 멀어졌다. 말과 실천 사이의 이중성이 싫었다.

 

그 후 변호사로 전신하면서 어쩌다가 여러 시국사건의 변호인이 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기독교인들과의 얽힘이 늘어갔다. 1973년 5월의 남산 야외음악당 부활절 연합예배사건에서는 박형규 목사와 젊은 기독청년들이 박정권의 유신통치를 비판하는 전단을 살포했대서 내란예비음모 혐의로 구속기소되었다. 나는 KNCC 측의 의뢰을 받고 그 사건의 변호를 맡게 되었다. 그 후에도 나는 기독교인들이 피고인으로 등장하는 여러 사건들을 변호하게 된다. 그중에서도 1974년 정초에 터진 대통령 긴급조치 1호 사건과 그해 4월에 세상을 놀라게 한 긴급조치 4호 사건을 계기로 많은 기독교 목사, 전도사, 장로, 신학생, 기독청년들을 감옥과 법정에서 만나게 되었다. 박 정권의 유신헌법을 반대하거나 비판하거나 그 개정을 주장만 해도 징역 15년에 처하겠다는 긴급조치가 나오자 세상이 온통 얼어붙었다. 그런 공포 분위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유신헌법에 반대하는 개헌운동을 하다가 잡혀 들어간 구속자들이 속출했는데, 그 대부분이 (또는 주동자가) 기독교인들이었다. 그들은 긴급조치의 협박에 맞서 유신통치를 공격하고, 법정에서 하나님의 정의와 진리를 내세워 의연하게 싸웠다. 나는 당시 신자가 아니어서 그들의 '신앙적 결단'을 이해하고 변호하기 위해서 성경과 기독교서적을 소나기식으로 공부하여 법정 신문과 변론에 엉성하게나마 활용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불의를 외면하고, 심지어 같은 기독교인들조차도 정교분리를 이유로 유신독재에 눈감는 판국에 일신의 위해와 고난을 무릅쓰고 반독재운동에 나선 기독교인들의 용기에 나는 감동했다. 그러다 1970년대 초반부터 수유리에 있는 크리스천아카데미의 각종 모임에 제법 열심히 나가게 되었는데, 거기서 주워들은 넌크리스천적인 크리스천', '크리스천적인 넌크리스천' 이란 말에 마음이 끌렸다. 꼭 교회에 나가지 않더라도 기독교인답게 살면 되지 않느냐는 생각이었다.

 

1975년 1월에 이어 3월에 중앙정보부에 붙들려간 나는 반공법 위반으로 구속되었다. 재구속된 김지하 시인의 변호인을 사퇴하라는 요구를 거듭 거절한 것이 화근이었다. 서울구치소에 수감되어 있는 동안 어이없는 투옥에 분개하면서도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게 되었다. 성경도 읽었다. 1심은 ‘묻지마 유죄다’ 실형으로 끝났고, 항소심에서 겨우 풀려나왔다. 아홉 달 동안의 감옥살이 (독방생활)는 나에게 신앙으로서의 기독교와 지식으로서의 기독교를 아울러 체득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그 사건으로 변호사 자격까지 박탈당해 하루아침에 실업자가 되었다. 생각다 못해 삼민사라는 출판사를 시작했는데, 여기서 많은 기독교서적을 발행하게 되었다. 여직원 한 사람만 두고 꾸려나가는 형편이고 보니, 모든 책의 원고 손질이나 교정을 내가 직접 보게 되어, 나는 훌륭한 기독교 성직자와 신학자, 지도자들의 책을 몇 번씩 읽게 되었다. 나에게는 큰 공부가 되었고, 깨달음의 기회가 되었다. 결국 기독교와의 거리가 가까워져갔다.

 

그 무렵 내가 힘을 기울이던 앰네스티운동에도 많은 기독교인들이 열성을 보였고, 중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억압에 저항하고 불의에 맞서는 기독교인들을 대할 적마다 나는 그들을 존경하고 본받고자 하는 마음이 우러났다. 그 무렵, 아내의 인척 할아버지 되시는 주형옥 목사님으로부터 편지가 왔다. 교회에 나가라는 말씀이었다. 목사가 전도하는 일이야 다반사다 싶어그냥 있었는데, 그 다음 주에 또 편지가 왔다. 그렇게 해서 전후 열네 통의 편지를 받고 나니,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교회를 정하지 못하고 여러곳을 순례하던 끝에 '회원교회'라는 개척교회를 내 신앙의 첫 둥지로 정했다. 개척단계라 예배당도 따로 없고 교인 수도 적었지만, 거기 나오는 교우들이 한 시대의 '부상자' 혹은 그 동지들이라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면서 믿음을 가꾸어나갔다. 그러다 1980년 김대중내란음모사건 피고인의 한 사람으로 투옥되어 서울구치소의 ‘재수생’이 되었다. 남산 지하실에서 조사와 고문이 범벅이 된수모를 겪고 자술서라는 것을 쓰게 되었는데, 그 첫머리에 '종교' 란이 있었다. 나는 기독교라고 쓸 자신이 없어서 한참 망설이다가, 그렇다고 '무(종교)'라고 쓸 수도 없어서 생각 끝에 앞으로 기독교인답게 살자는 다짐의 뜻으로 기독교 라고 써 넣었다. 김대중내란음모사건의 '피고인'들은 거의 민주화운동에 헌신한 인사와 청년들이었는데, 그중에도 역시 기독교인들이 많았다. 사형이 구형된 김대중 선생의 의연하면서도 절절한 최후진술은 참으로 기독교의 사랑을 증언하는 명연설이었다. 나는 하나님께 간절한 기도를 드린 끝에 1981년 5월, 부처님 오신 날에 석방되었다. 감방에서는 면학 분위기가 좋아 책을 많이 읽었는데, 특히 성경을 몇 독하고 기독교서적도 열심히 읽었다. 

 

앞서 적은 대로, 어머니는 기독교인이 아니셨다. 반면, 아내는 어릴 적부 터 기독교인이어서 혹시 신앙문제로 고부간의 갈등· 불화가 생길까 봐서 걱정이 되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어머니께서 "하나밖에 없는 며느리가 하나님을 믿고 교회에 나간다는데, 내가 거기에 따라야지"라고 말씀하시는 것이아닌가. 나와 아내는 깜짝 놀랐다. 1962년부터 우리 가족의 서울살이가 시작되었는데, 어쩌다보니 식구들이 각기 다른 교회에 나가게 되었다. 그러던 중 어머님께서 노환으로 교회 나가시기가 어렵게 되자, 가족회의를 열어 어머님께서 나가시던 교회(양광감리교회)로 온 가족이 일원화하기로 했다. 그리고 며느리와 사위도 기독교신앙을 가진 젊은이들이어서 아주 다행스러웠다. 내가 기독교인이 된 것은 기독교인들을 변호하다가 그들의 올바른 신앙 에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말한다. "흔히들 피고인은 변호사를 잘 만나야 한다고 하는데, 변호사는 피고인을 잘 만나야 한다"고. 내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적지 않은 고난을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내가 알았든 몰랐든 하나님의 사랑과 도우심에 의한 것이었음을 뒤늦게나마 깨닫게 되었다. 그 은총에 보답하기 위해서도 하나님과의 수직적인 관계 못지 않게 이 세상 형제들과의 수평적인 관계를 중시해야 한다고 믿게 되었다. 그리고 신앙이란 자신의 심령의 평안을 구하기보다는 이웃과 세상을 위해서 사서 고생하는 것이란 점도 깨달았다. 해서는 안 될 일을 하는 죄(sin of commission) 못지않게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 죄(sin of omission)를 명심해야 한다고 믿는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시련을 주시지만, 아울러그것을 이겨낼 힘과 지혜도 주신다는 것, 이유 없는 고난은 있을지 몰라도 의미 없는 고난은 없다는 것, 하나님의 역사는 단막극이 아니라는 것, 신앙이란 패배 가운데서도 승리를 찾는다는 것. 하나님을 입술로만 사랑해서는 안 되며,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는 것, 이 세상의 불의에 눈 감는 신앙은 하나님의 뜻에 어긋난다는 것, 이런 생각이 나의 신앙관이다(pp. 381-385).

 

 

KakaoTalk_20230919_112218604.jpg

태그
비밀번호 :
메일보내기닫기
기사제목
【북토크】 어느 변호사가 신앙을 갖게 된 여정
보내는 분 이메일
받는 분 이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