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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흥청망청” 108회 선관위... 명분없는 돈 낭비
    본 기사는 교회발전연구소 대표 이능규 목사에게 모 인사가 108회 선관위(위원장 권순웅 목사)에 대해 제보한 내용을 바탕으로 작성한 기사임을 밝힌다. 제보 내용에 따르면 선관위가 불필요한 돈을 낭비하고 있다. 제108회기 선관위는 공정선거감시단 해외 활동에 이미 많은 경비를 집행했다. ▲전국장로회연합회 임역원수련회(일본) : 고정식, 손정호, 김삼주, 신덕수, 한기영(750만원 집행) ▲농어촌교역자부부수양회(다낭) : 권순웅, 신덕수, 지동빈, 임종환, 최병도(613만원 집행) ▲전국교역자하기수양회(필리핀) : 전웅구, 김상원, 유병희, 한기영, 이상돈(599만5천원 예산). 이때 위원장 권순웅 목사와 서기 한기영 목사가 강사를 맡았다고 한다. 현재 바뀐 선거규정에 따라 후보자는 행사에 참석할 수 없다. 그런데 선관위 공정선거감시단은 누구를 감시하기 위해 해외 행사에 동행하는 것인가? 제보자는 “돈**”이라는 격한 표현을 사용했다. 또한 선관위는 민찬기 목사가 제기한 가처분 신청 소송에 대응하기 위해 변호사비로 5천 5백만원을 지출했다. 선관위원들이 1차 투표해 7대7로 나왔다면 의견이 팽팽하다는 것인데 굳이 다시 투표해 7대8로 만든 것이 화근이다. 증경총회장단이나 실행위원회에 넘겨 자문을 구했다면 굳이 총회 돈을 지출할 소송에 휘말리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것이 중론이다. 현재 감사부는 107회기 선거관리위원회(위원장 배광식 목사)에 대해 특별재정감사를 하고 있다. 어제는 서기와 회계를, 오늘은 위원장과 심의분과장을 부른다. 안건은 선관위가 재정을 과잉지출했다는 것이다. 모 선관위원은 자기들은 비용을 아껴서 사용했다고 주장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기에 특별재정감사를 받는 것이다. 앞으로 108회기 선관위도 감사부에 의해 특별재정감사를 받지 말란 법이 어디 있겠는가? 이 악순환을 끊어야한다. 선관위의 근본적인 개혁이 필요한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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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03
  • 취재 기자를 내쫓는 노회들...무엇이 두려운가?
    봄 정기노회가 열리는 계절이다. 서울에서 먼 지방의 몇몇 노회를 취재갔다. 그 중 2개 노회에서 “내쫓김”을 당했다. 이리노회는 북일교회 문제로 회원 호명 때부터 시끄러웠다. 결국 노회원들간에 고성이 오갔다. 이런 가운데 취재하고 있는 기자들에게 나가달라고 "거칠게" 요구했다. 결국 쫓겨날 수 밖에 없었다. 충청노회도 전 총신대총장 김영우 목사 피소건에 대해 다루며 기자들에게 나가달라고 “험악하게” 요구했다. 결국 본당 중이층으로 쫓겨갈 수 밖에 없었다. 기자는 사실을 취재하고 알리기 위해 그 현장에 가 있는 것이다. 북일교회 문제는 대부분의 총회원들이 알고 있을만큼 큰 이슈이다. 당연히 기자들이 가서 취재할 수 밖에 없는 사항이다. 기자는 총회원들의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 대신해서 그 현장에 간 것이다. 그런데 무슨 이유로 기자들을 내쫓는 것인가? 그것이 과연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겠는가? 기자가 보면 안될만큼 감춰야할 문제가 있는가? 사실을 사실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문제해결에 도움이 될 수 있다. 문제 없는 노회는 취재간 기자들을 반기며 좋게 기사를 써서 노회를 잘 홍보해 달라고 부탁한다. 기자로서도 기분좋은 일이다. 반면 문제 있는 노회는 기자를 내쫓는다. 마치 잡상인 취급을 한다. 부득이 기자를 내보낼 필요가 있다면 “정중하게” 요청했으면 한다. 같은 합동측 목사한테 그렇게 함부로 해서 되겠는가? 앞으로도 “문제 있는” 이리노회와 충청노회 “사태 추이”에 대해 예의주시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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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03
  • 【단상】 기록....소멸에 대한 몸부림
    기자는 기자(記者)다. 쓰는 자라는 말이다. 나는 15년간 담임목회를 하다가 갑자기 기자가 됐다. 그래서 많이 미숙하다. 지금도 여전히 실수하며 배워나가고 있다. 기자라는 이름을 가지고 처음 기사를 쓴 것은 2020년 9월이었다. 한 행사에 동행해 기사를 써야하는데 막막했다. 결국 다른 기자의 기사를 참고해 어거지 기사를 썼던 기억이 있다. 지나가니 이 또한 “추억”이다. 기자는 어떤 사건, 일에 대해 기록을 남기는 자다. 주로 사용하는 방법은 “글”이다. 글로 남기고 평가한다. 요즘은 녹음이나 녹화를 병행한다. 이 모든 것은 결국 남기기 위해서다. 유한한 인간이 하는 모든 것들은 다 소멸한다. 어떤 행위, 행사, 말 등등은 다 과거로 사라지며 소멸의 과정을 거친다. 이에 대한 저항, 몸부림이 쓰거나, 녹음하거나, 녹화하는 것이다. 나는 언젠가부터 녹화를 병행한다. 스마트폰에 촬영 기능이 있기 때문이다. 비록 방송 장비를 거창하게 준비하지 않아도 스마트폰만 있으면 즉시 현장에서 촬영이 가능하니 얼마나 좋은 세상에 살고 있는가? 이번 43회기 전국남전도회연합회 행사를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촬영했다. 그리고 각 기사에 영상을 첨부했다. 너무 좋았던 설교나 강의를 남기기 위해서다. 기사는 아무래도 한계가 있다. 모든 내용을 다 기록할 수 없고, 강사의 열정을 담아낼 수 없다. 기사에 대한 보완이 동영상 촬영이다. 이것은 일차적으로 나를 위한 것이다. 유익했던 내용을 기록으로 남겨 언제라도 보고 듣고 싶은 것이다. 그리고 그것에 대해 관심있는 자들에 대한 배려이다. 유튜브는 우리 생활에 깊숙이 파고 들었다. 나만해도 거의 텔레비전을 안 본다. 유튜브가 더 재밌고 유익하기 때문이다. 많은 개인들이 이곳에 동영상을 올리고 있다. 그리고 필요한 사람들은 찾아서 보고 있다. 나 또한 그 일에 동참하고 있는 것이다. 유한한 인간으로서 우리는 시간 속에서 소멸해 가고 있다. 나는 기자로서 글과 녹음, 촬영의 방법으로 기록으로 남기는 일을 한다. 기자는 다양한 방법으로 시간의 기록을 남긴다. 그래서 재밌고 보람이 있다. 이것이 기자라는 직업의 한 매력이라고 생각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사라지고 소멸하는 어떤 것에 대해 흔적을 남기는 또 다른 기사를 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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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15
  • 【내이야기】 달라진 설 명절 풍경
    설 명절 연휴를 보낸다. 이제는 과거와 다른 모습으로 이 기간을 보낸다. 예전에는 명절날 미리 준비한 음식을 가지고 부모님 댁에 와 아침을 동생네와 같이 먹었는데 이젠 그렇지 않다. 담임목회 중단 후 부모님 댁에 같이 살기에 명절날 아침 일찍 차 타고 올 일이 없다. 그리고 장모님께서는 재작년인 2022년에 세상을 떠나셨기에 처가댁에 갈 일도 없다. 처가댁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명절에 부모님 드실 것, 우리 식구 먹을 것 간단하게 준비해 밥 먹으면 그것으로 끝이다. 찾아갈 곳도, 찾아올 사람도 없다. 연휴 기간에는 취재할 일도 없기에 미리 대출한 여러 권의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낼 계획이다. 그러다 심심하면 밥 먹고 운동 삼아 뒷동산 한바퀴 돌고 오면 된다. 참으로 평안한 설 연휴이다. 지방에 사는 사람들은 명절을 맞아 긴 시간 차에 시달리며 고향을 찾아간다. 젊을 때 텔레비전에서 귀성길로 고속도로에 막혀 있는 차들을 보며 지방 여자와는 결혼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아내는 경기도 여자이다. 나 또한 서울 태생이라 지방과는 관계가 없다. 아버지는 경기도 분이신데 젊을 때 서울로 올라오셨고, 어머니는 충청북도 분이신데 결혼 후 서울에서 사셨고, 외가댁도 사라졌기에 더 이상 지방하고는 관계가 없다. 그래도 명절이라고 고향을 찾아가는 긴 행렬은 세월이 흐르면 아마 사라지지 않을까? 설레고 좋았던 어린 시절의 명절과는 너무 다른 명절이다. 앞으로 또 어떻게 달라질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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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09
  • 【내이야기】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4년전 담임목회를 중단하고 나올 때 두 명의 목사님이 떠 올랐다. 같은 노회, 같은 시찰회에 내가 시무했던 교회의 나쁜 것을 따라하는 교회가 있었다. 나는 다섯 번째로 담임목사직에서 내쫓겼는데, 같은 시찰회의 그 교회는 3명의 담임목사를 내쫓았다. 첫 번째 목사는 노회에 문제를 일으켜 면직됐고, 이후 부임한 목사는 몇 년 못있다가 갈등하고 결국 사임했다. 이후 또 한 목사가 왔는데 얼마 안있다가 내쫓겼다. 두, 세 번째 목사들과는 시찰회에서 교제를 했었다. 그런데 그들이 교회에서 어려움을 당하고 결국 사임했을 때 큰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러다 막상 내가 그 일을 당해보니 그 두 목사에게 참으로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들이 얼마나 힘들었을까를 내가 당해보니 비로소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2번째로 내쫓겼던 목사는 나왔던 교회 근처에서 목회하다 이전했는데 나중에는 노회를 옮겨 지방으로 갔다. 3번째로 내쫓겼던 목사는 무엇을 하는지 알지 못한다. 내가 그 두 목사가 어려울 때 관심을 갖지 않았기에 내가 어려울 때 다른 목사들의 무관심에 놀라기도 했지만 나도 그랬기에 ‘사람이 다 그렇지’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이제 내가 겪은 아픔을 통해 어려움 당하고 있는 목사에 대해 조금이나마 이해하고 동정할 수 있게 됐다. 과부가 다른 과부에 대해 진심으로 울어 줄 수 있는 것처럼 내가 그렇게 된 것이다. 성경은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롬 12:15)했지만 이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는 당해보면 안다. 그래서 함께 울어주는 자가 진짜 나를 사랑하는 자라는 것을 알 수 있다. 2024년 새해에는 이 한 구절의 말씀을 조금이나마 실천하며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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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1-13
  • 【단상】 2023년을 보내며...감사하고 감사하다!
    38년전인 1985년, 총신대 신학과 입학을 위한 면접에서 면접관이 좋아하는 성구를 외워보라고 했다. 그때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6-18)”를 말했던 것이 지금도 기억난다. 아마 면접이라는 떨리는 상황에서 생겨난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 성구는 대부분의 신자들이 좋아하고 암송하는 구절이다. 그때 왜 이 구절이 생각났는지는 모르겠다. 이후 자주 이 구절은 기억 속에 떠 올랐다. 한해를 마무리하는 시점에 또다시 이 구절이 떠오름에 감사하다. 2023년에 다양한 일들이 있었다. 좋았던 일도 있었고 나빴던 일도 있었다. 그러나 그 모든 과정을 거쳐 지금 시간에 이르렀기에 감사하다. 나빴던 일들도 언젠가 협력해 선을 이룰 것이라고 믿기에 그 또한 감사하게 생각한다. 변화를 싫어하고 안정지향적이기에 교회 개척은 생각해 본적도 없이 부목사를 거쳐 담임목회에 나서 15년간 목회를 하다 중단되고 생각지 않은 언론인의 길을 가고 있다. 이 과정에서 목회를 했으면 만나지 않았을 다양한 일들을 경험했다. 때로 힘들고 황당했지만 그래도 결론은 은혜였고 감사였다. 이제 몇시간 남지 않은 올 한해 2023년을 돌아보고 또 은혜와 감사로 마무리 하게 되어 감사하다. 인생에 원치않던 급변침이 있었지만 침몰하지 않고 미지의 길로 가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내년 말에도 또 다시 은혜와 감사의 마무리가 있을 것을 기대해 본다. 아듀 202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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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2-31

실시간 칼럼 기사

  • 【내이야기】 나의 산티아고, 뒷동산
    한 때 산티아고 순례길 열풍이 불었다. 인터넷을 찾아보니, 산티아고(Santiago)는 예수의 열두 제자 중 한 사람인 ‘성(聖) 야고보’의 스페인식 이름이다. 야고보가 헤롯 왕에게 참수되면서 열두 제자 중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는데, 그 유해가 안치된 산티아고 대성당까지 이어지는 여러 갈래의 길이 산티아고 순례길이다. 현대에 이르러 파울로 코엘료가 1987년도에 이 길을 걷고 <순례자>라는 제목의 책을 출간해 대성공을 거두면서 종교인뿐 아니라 세계인의 관심을 끌게 되었다. 종교인들만의 순례길에서 일반인들의 사색의 길, 자기 성찰의 길로 유명해진 것이다. 내게는 나만의 산티아고가 있다. 바로 집 뒤에 있는 오패산이다. 3년전 교회를 사임하고 부모님과 함께 살게 되면서 참 많이 찾았던 곳이다. 3년전 12월 말에 이사를 와서 한 겨울 저녁에 밥을 먹고 소화를 시킬겸해서 뒷동산을 오르내렸다. 작년에 데크 산책로가 둘래길로 만들어져 이제는 편하게 정해진 길을 왔다갔다하면 되지만 그때는 동산을 오르락 내리락하며 1시간 가량 산에 있었다. 그러면서 이생각 저생각을 하거나, 기도를 하거나하며 시간을 보냈다. 취재할 곳이 없어 쉴 때는 점심과 저녁 식사 후 뒷동산을 찾았다. 그러면서 나무를 보고 흐르는 작은 계곡물을 보며 또 새소리를 듣고 꽃을 보면서 마음의 평안을 찾았다. 목회를 하는 동안 ‘나는 자연인이다’란 TV프로를 즐겨봤다. 많은 사람들이 사람들을 떠나 산으로, 외딴 섬으로 가서 사는 것을 보는 것이 그 당시에 위로가 됐다. 한편으로 유튜브를 통해 UFC격투기를 즐겨봤다. 아마 목회 스트레스를 그렇게 풀었던 것 같다. 그러면 지금은 어떤가? 목회를 그만둔 후로 ‘나는 자연인이다’와 격투기에 관심이 없다. 어느날 이런 변화를 깨닫고 내 자신도 깜짝 놀랐다. 아마도 수없이 뒷동산을 찾아 오르내리면서 내 마음이 안정과 평화를 찾았던 것 같다. 지금도 저녁 식사 후에는 거의 대부분 뒷동산을 오른다. 데크 길을 따라 왕복하면 약 40여분이 걸린다. 그 시간 동안 이생각 저생각을 하고, 기도도 하면서 나만의 시간을 갖는다. 낮 시간에는 주민들이 여럿 보이지만 밤 시간에는 나 밖에 없다. 혼자 그 길을 걸을 때의 느낌은 가보지는 않았지만 산티아고 순례길과 비슷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한다. 이 동산을 중심으로 삼면을 이동하며 오랜 세월 살아오고 있다. 그래서 나는 이 동산이 친숙하다. 어렸을 때는 동산길에 눈이 내리면 비닐 비료 부대를 들고 올라가 눈썰매를 탔고, 아이들과 함께 산길을 헤쳐 정상에 올라가기도 했다. 지금은 그때와 모습이 많이 변해 동산 아래쪽에는 연립주택들이 많이 생겼지만 동산 정상은 예전 모습이 많이 남아있다. 동네 주변도 많이 변했지만 어렸을 때의 기억이 여전하다. 이제는 복개되어 차가 다니고 있지만 하수물이 흐르던 개천이 있었다는 것을 알고, 초등학교 때 늘 가던 옛 만화방이 있던 자리도 기억에 선명하다. 부모님은 이 근처에서 50여년을 살고 계시며 나도 수십년의 세월을 이곳에서 살았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뒷동산이 있다. 오늘도 저녁 시간에 뒷동산을 다녀왔다. 역시 혼자였다. 집에서 1분만 걸으면 바로 뒷동산에 갈 수 있으니 너무나 좋다. 특별한 일이 없으면 이곳에서 오래 살 것 같다. 어렸을 때는 놀이터로, 나이들어서는 나의 근심과 걱정을 받아주는 뒷동산이야말로 나의 산티아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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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0-26
  • 【잡글】 155만원의 출혈
    아이폰 15 프로를 샀다. 현금 155만원이 들었다. 내가 타고 있는 18년된 트라제 디젤보다 비싸다. 현재 사용하는 것은 아이폰 미니 12인데 메모리 용량이 64g이고 카메라 선명도가 떨어져 새로 구입한 것이다. 얼마전부터 “빛과소금뉴스방송”이라는 유튜브를 본격적으로 병행하고 있다. 취재 현장에서 좋은 강의, 설교 등등을 글로 적어 기사로 만드는 것도 좋은데 이왕이면 동영상으로 남겨야하겠다는 생각이 들어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메모리 64g는 너무 용량이 적어 다른 앱들을 깔고 나니 가용할 수 있는 것이 적어 긴 촬영이 어렵다. 그리고 카메라 성능도 떨어진다. 그래서 고민을 거듭하다가 더 나은 영상 촬영을 위해 신제품 아이폰 15 프로 256g를 구입했다. 정가는 170인데 자급제로 이용하기 위해 통신사 없이 중고나라에서 개인 직거래로 미개봉 제품을 구입했다. 열어보니 “역시”하는 말이 나온다. 아직은 중국 알리 익스프레스에서 미리 주문한 케이스, 액정보호필림이 오지 않아 사용하지 못하고 있다. 주문한 것들이 오면 좀 더 나은 동영상과 사진이 나올 것 같아 기대가 된다. 155만원이라는 거금을 들였지만 좀 더 나은 영상이 나올 수 있다면 감수할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아직 유튜브 구독자 수가 적으니 이 글을 보시는 분들은 “빛과소금뉴스방송”을 구독해 주시면 감사하겠다. 찾기 편하시라고 아래에 동영상을 하나 첨부해 드린다. 클릭하시면 제 채널로 올 수 있으니 많은 관심을 부탁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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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0-25
  • 【단상】 목사와 자가용...탐욕에 브레이크를 밟아라
    목사들의 자가용이 점점 비싸지고 있다. 자동차 업체들이 더 비싼 고급 승용차들을 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그랜져가 최상위였다. 이제는 제네시스가 최상위이다. 이에따라 목사들 중에 제네시스를 타는 경우가 많이 늘었다. 몇 년전 나는 충격을 받았다. 어느 모임에 취재를 갔는데 아는 목사가 제네시스를 끌고 왔다. 그가 경기 북부 지역에 개척한 교회는 아직도 은행 융자를 갚고 있는 형편이며 교세도 약했다. 그런데 제네시스라니! 내가 시험에 들었다. 과거 목회할 때 한 여집사가 시험에 들었다. 목양실에 커피 원두를 산 것이 이유였다. 목양실을 찾는 사람들에게 원두 커피를 대접하고 싶어 2-3만원에 구입한 것이다. 실제로 나는 커피를 좋아하지 않는다. 늦은 시간에 먹으면 잠을 설치기도 한다. 그런데 거기에 시험이 들었다. 그 당시 남편은 돈벌이가 시원치 않았다. 여집사가 벌어 먹고 살았다. 그래서 그게 시험거리가 된 것이다. 알겠는가? 교인들은 상상을 초월한 것에 시험이 든다. 이후 원두 커피 기계와 커피 원두를 교회 식당으로 옮겨 버렸다. 통상 교인수가 늘면 그에 비례해 목사 사례비와 판공비가 늘고 자가용이 좋아진다. 우리는 이것을 당연시한다. 교회도 자본주의 논리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누군가는 말했다. “한국에는 대형교회와 대형교회를 갈망하는 두 종류의 교회가 있다”고. 교회 규모에 따라 목회자 대접이 달라지니 그럴 수 밖에 없나보다. 세상 기업과 교회의 차이를 구분할 수 없다. 소위 ‘부흥’한 교회는 자신에 대한 대접이 달라지기를 원하고 심지어 요구한다. 그 안에는 사례비나 판공비 그리고 자동차가 포함되어 있다. 대령에서 장군이 되면 30가지가 달라진다고 한다. 작은 교회에서 큰 교회가 되면 몇 가지나 달라지는지는 내가 큰 교회를 이루지 못해 모르겠다. 담임으로 부임했을 때 차량구입을 했다. 교회에 차량이 아예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승용차로 구하지 않고 트라제 디젤 9인승으로 구입했다. 내 자가용 용도이기에 승합차를 구하는 것이 거시기해서 다인승차를 구입한 것이다. 그리고 주일에는 교회 공용으로 차를 사용했다. 15년 담임목회를 정리하고 나올 때 15년된 차를 받아 왔다. 어차피 폐차할 것인데 임시당회장이 교회에 요구한 내 퇴직 후 사례 3개월치에서 1개월치를 제하는 것으로 퉁쳐 내게 넘겨줬다. 그 액수는 240만원이었는데 15년된 디젤차를 참 잘도 팔아넘긴 셈이다. 교회에 분쟁이 나면 교인들이 이렇게 치사해질 수 있다는 것을 미리 알아두기 바란다. 나는 지금도 3년간 그 차를 이용하고 있다. 잘 해야 일주일에 한번 이용한다. 그래서 18년된 차가 15만키로정도 밖에 안된다. 오늘 마후라를 교체하러 장안평에 들려 거금 12만원을 지출했다. 앞으로 70세까지는 운행하고 싶은데 모르겠다. 아내는 차가 낡아 바꾸자고 하는데 굳이 잘 굴러가는 차를 바꾸는데 돈을 지출하고 싶지는 않다. 내 선배는 서울 시내 중심의 유서 깊은 교회를 담임하는데 담임목사용으로 매번 소나타를 사주고 있다. 교회 규모에 맞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그것이 장로들의 “소신”이라면 받아들여야지 어떻게 하겠는가? 자기들은 외제차를 타도 담임목사는 소처럼 일하라고 소나타만 사주니 그 교회도 참 알만하다. 그러나 그 선배는 “미국에 있을 때 좋은 차 많이 타봐서 차에 대해 별 미련이 없다”고 하고 잘 끌고 다닌다. 교회 분수에 맞게 차를 골라야한다. 작은 교회라면 그 수준에 맞는 차를 타야 손가락질 안 받는다. 그리고 큰 교회라고해도 한 단계 아래 등급의 차를 타면 겸손하다고 “존경”받는다. 분수에 맞지 않는 차를 타서 입에 오르내리고, 교인들을 시험들게 하고 싶다면 그렇게 하는 것이야 본인의 자유이지만 왜 바울이 2천년 전에 “그러므로 만일 음식이 내 형제를 실족하게 한다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하지 않게 하리라(고전 8:13)”고 했는지 잠시 묵상해 보기를 바란다. “그러므로 만일 내 차가 내 형제를 실족하게 한다면 나는 영원히 고급 승용차를 타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하지 않게 하리라” 이렇게 바꾸어 묵상해 볼 수 있지 않을까? 목사는 자신의 욕망을 제어하는 브레이크가 좋아야한다. 덜 가지고 덜 누릴수록 교인들이 존경한다는 단순한 사실을 잊지 말아야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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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0-24
  • 【내생각】 1천만원 뇌물 사건..천지지지 여지아지
    천지지지 여지아지(天知地知 汝知我知)는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네가 알고, 내가 안다’는 뜻이다. 선관위 1000만원 뇌물수수사건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를 전망이다. 성남노회는 진상을 밝혀달라고 성명서를 내고 총회 임원회에 진정서를 접수시켰다. 오정호 총회장은 총회 석상에서 “이 사건에 비하인드 스토리가 많다”고 하면서 배광식 선관위원장과 이종철 심의분과장의 공개 사과로 일단락 지을려고 했다. 그러나 여진이 계속되고 있다. 기독신문은 인터넷판 10월 15일자 사설로 ‘이유 있는 성남노회 성명’이란 사설을 실어 “총회임원회가 성남노회의 이번 성명을 반드시 짚고 가야 할 사안으로 여기고 간과하지 않길 바란다”고 말했다. 이 사건의 진실은 경찰서에 사건을 접수하거나 혹은 임원회가 조사처리위원회를 구성해 관련자를 대면시키면 곧 드러날 수 있다. 그러면 누가 거짓말을 하는지 드러난다. 천만원은 지금도 출처가 밝혀지지 않고 있다. 전달자는 그 돈의 출처를 말하지 않고 있다. 주었다고 의심받는 자는 준적이 없다고 말한다. 그러면 누군가는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분명 “천지지지 여지아지” 한데 여전히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거짓말은 버틴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이제 진실이 드러나면 감당해야할 후폭풍이 두려워 진실을 밝힐 타이밍을 놓친 것 같은데 여전히 시간이 흘러가고 있고 책임은 가중되고 있다. 누군가의 거짓말로 인해 총회가 곤혹스러워하고 있다. 관계없는 대다수 선관위원들이 도매금으로 비난을 당하고 있다. 관계자의 교회와 노회가 소란스럽다. 이 모두 한 사람의 거짓말로 인한 것이다. 간첩관련 옛 포스터 문구가 생각난다. “자수하여 광명 찾자” 이 문구는 이 사건에도 유효해 보인다. 작년 총회 임원 선거에서 모 낙선자에게 한 교계 신문이 “자살하지 말기를 바란다”는 파격적인 글을 실었다. 나 또한 관련자가 자책감으로 자살하지 않을까하는 불순한 생각이 드는 것을 피할 수 없다. 죽는 것 보다 진실을 밝히는 것이 더 낫다고 말해주고 싶다. 일이 커져도 너무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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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0-23
  • 【내이야기】 밴댕이 소갈딱지
    나는 지금도 종종 38년 전 일이 떠오르면 부끄러워한다. 그때는 총신대학 1학년 시절이었다. 어느날 같은 동아리에 있는 유아교육과 오*영을 학교에서 만났는데 “나 이번 학기 성적 장학금 타게됐다”면서 한껏 흥분해 있었다. 그래도 같은 학번 동아리 친구라고 내게 말했던 것이다. 내 반응은 무엇이었을까? “그래?”라고 말하고 그냥 지나쳤다. “축하한다”는 말도, “받을만 했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 부러웠기 때문이다. 가끔 뜬금없이 그때 생각이 나면 지금도 부끄럽다. 나에게 축하 받을 기대로 말했을텐데 나는 찬물을 끼얹었다. “나는 장학금을 받지 못하는데 염장 지르냐?“ 하는 못난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아마 그때 나도 장학금을 받았다면 서로 축하해 줬을 것이다. 그런데 열심히 안해 장학금을 받지 못했으면서도 친구의 기쁨을 함께하지 못하고 심드렁해했다. 38년 전 일인데 지금도 생생하다. 졸업 후 본적이 없는 그 친구를 우연히 만난다면 미안했다는 말과 함께 진심으로 축하한다는 말을 해야 그 기억에서 놓여날 것 같다. 그런면에서 나는 밴댕이 소갈딱지 인간이다. 그러면 38년이 지난 지금의 나는 어떠한가?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나이를 헛먹은 것 같아 부끄럽고 허탈하다. 혹시 밴댕이를 먹으면 “나보다 못한 놈에게 먹혀 억울하다”고 눈을 치켜 뜰 것 같다. ("밴댕이 소갈딱지, 소갈머리"란 밴댕이 내장이 워낙 작아서 속 좁은 사람을 일컫는 말로 쓰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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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0-20
  • 【단상】 또 다시 마주한 총신 도너월
    지난 10월 10일 사당동 총신대학에서는 뜻깊은 행사가 있었다. 故 명신홍 박사의 도서기증 50주년을 기념해 종합관 3층에 있는 도서관을 “명신홍기념도서관”으로 명명(命名)하는 행사였다. 명신홍 박사는 누구인가? 1904년 4월 14일 평안남도 김제면 원장리 노동에서 태어나 1936년 3월 평양신학교를 졸업 후 1939년 5월 미국 웨스트민스터신학교 신학석사 학위 취득을 시작으로 칼빈신학교 신학석사, 비블리컬신학교 신학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1948년부터 1971년까지 총회신학교 교수를 하며 1953년 38대 총회장을 역임하고 1965년부터 1969년까지 총회신학교 교장(현 총장직)을 감당하다 1975년 10월 14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탁월한 실력으로 신학교와 총회를 위해 많은 일을 감당했으며 특히 총신대학 구 본관 신축 모금을 위해 직장암 수술 후 배변주머니를 찬 채 미국을 방문할 때 비용을 절약하기 위해 배를 타고 태평양을 건넜으며 체류 비용을 절약하기 위해 추운 신학교 건물에 머물렀다. 그러면서 원서를 포함 수천권의 장서를 모았다가 모두 총신대학에 기증했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50년만에 “명신홍기념도서관”으로 명명한 것이다. “역사를 잊어버린 개인과 나라에는 미래가 없다”는 말이 있다. 나는 총신을 대학, 신대원, 목회전문대학원 등으로 15년간이나 다니고 도서관에도 자주 갔었지만 명신홍 박사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했다. 그러다 이번 행사 취재를 통해 참으로 대단한 분이시라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됐다. 명신홍 박사를 추모하는 글에 그의 사위 이은태 장로는 “총신대가 계속되느냐, 없어지느냐하는 위기의 순간을 수없이 겪으셨으며, 그 힘겨운 고군분투의 나날 인공항문을 다신 채로 총신을 위해 불꽃처럼 사셨다”고 적었다. 차녀 명돈신 권사도 “아버지는 신학교를 위해 낸 몸이니 죽으라면 죽으리라는 비장한 각오로 학교 건축 모금을 위해 미국을 다녀오셨다”고 적었다. 자신의 생명을 다해 총신을 세운 분을 후배들이 알지 못했다는 자책을 하며 이제라도 그분의 고귀한 헌신을 기념하기 위해 그분의 이름으로 도서관을 명명한 것은 참으로 귀한 일이라고 본다. 이미 종합관에는 “백남조기념홀”, “주기철목사기념관”등으로 이름이 명명된 장소가 있다. 이제 세 번째로 “명신홍기념도서관”이 명명된 것이다. 이것은 그 개인을 높이고자하는 것이 아니다. 그분들의 헌신과 수고를 잊지 않고 기억하며 우리도 그 뒤를 따라야한다는 의도라고 생각한다. "명신홍기념도서관" 현판제막식 후 감사예배를 드렸다. 이 시간에 명신홍 박사의 후손들은 총신의 발전을 위해 3천만원의 거금을 박성규 총장에게 전달했다. 참으로 대를 이은 헌신에 감사할 따름이다. 이어 오정호 총회장이 목회하는 새로남교회에서 10억을 전달했을 때 명신홍 박사의 사위 이은태 장로는 “약소하게 전달해서 송구하다”는 말을 했는데 박성규 총장은 “개인과 가정이 하기에 3천만원은 너무나 큰 거금”이라며 거듭 감사했다. 이어 도너월 리뉴얼 제막식이 있었다. 이때 새로남교회가 이날과 이전에 기부한 총 15억의 액수가 도너월에 새롭게 기록되었고, 명신홍 박사 후손이 드린 3천만원도 미리 기록되어 있었다. 행사 후 도너월에 기록된 많은 교회와 개인들의 이름을 찬찬히 보면서 귀한 헌신에 고마운 마음을 갖게 됐다. 최근 총신대학, 신대원, 군목 출신인 이국진 목사가 자신의 유튜브에서 총신 도너월 문제를 다뤘다. 일부 학생들이 도너월에 이름과 액수를 기재하는 것은 비성경적인 것이 아닌가하는 질문을 했다는 것이다. 이 질문을 다루는 가운데 본인이 미국에서 오랜 기간 유학할 때 교회나 신학교의 여러 비품과 건물에 기증자와 헌신자의 이름이 적혀있는 것을 예로 들었다. 미국 교인들은 이에 대해 아무 문제 제기를 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렇게 헌신한 사람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갖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그것이 다른 사람들의 헌신을 불러 일으키는 계기가 된다고 했다. 그러면서 자신의 교회도 이미 발전기금을 전달해 도너월에 이름이 올라 있지만 더 많이 하지 못한 아쉬움이 있다고 말했다. 그렇다. 도너월의 목적은 기증자를 드러내기 위함이 아니다. 수고한 분들을 학교가 잊지 않고 기억하며 고마워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며 또한 이를 통해 다른 사람들도 선한 일에 동참할 기회를 주고자 함이다. 이날 명신홍 박사가 수많은 장서를 학교를 위해 기증한 것을 학교가 늦게나마 그에 대한 감사로 도서관에 이름을 넣어 감사하고 이에 후손들이 또 다시 학교를 위해 발전기금을 전달하고 학교는 이에 도너월에 그 이름을 새겨 기념하고 감사하는 아름다운 선순환이 일어난 것이다. 곧 작은 발전기금을 낼 계획인 나에게 한 총신 선배가 “너도 형편이 그리 넉넉하지 않은데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느냐?”고 물었다. “형님도 도너월을 쳐다보고 묵상하다보면 나같은 마음이 생길겁니다”라고 답했다. 그렇다. 나태주 시인은 ‘풀꽃 1’에서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고 말했다. 총신대를 방문할 기회가 있다면 종합관 1층 로비 우측에 있는 도너월에 멈춰 거기에 적혀 있는 명단들을 자세히 보고, 오래 바라보기 바란다. 그러면 어느땐가 불쑥 저들과 같은 마음이 생길 것이다. 내가 바로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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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0-11
  • 【단상】 경선을 지켜보며
    競選은 ‘둘 이상의 후보가 경쟁하는 선거’를 말한다. 금번 108회 총회 선거의 특징은 한 경우를 제외하고 모두가 경선 했다는 것이다. 각 후보들이야 다 자기의 당선을 꿈꿨겠지만 대부분 많은 사람들이 예상한대로의 결과가 나왔다. 결국 그 후보가 그동안 어떻게 살아왔으며 어떤 활동을 했는지가 당락을 결정하는 요인이었다. 혜성같이 나타나서 당선되는 경우는 없다는 말이다. 이점은 앞으로의 선거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총회나 총회 산하 기관에서 책임자의 역할을 하고자하는 자는 자신의 이력관리를 잘 해야할 것이다. 자기가 목표하는 자리에 맞는 경력을 성실하게 쌓아가고 주위 사람들의 인정과 신망을 얻으면 원하는 자리에 갈 가능성이 많다. 투표하는 사람들은 말은 안해도 다 보고 듣고 있기 때문이다. 경선에 임하는 후보들은 당선되기 위해 몸부림 친다. 그래서 어떤 특정 개인이나 세력의 도움을 받으면 될 것이라는 기대를 하지만 꼭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한다. 그런데 경선에 임하게 되면 당사자는 정상적인 사고나 판단이 어려워진다. 주변에는 “당신이 유리하다”고 말하는 사람 밖에 없으니 현실 파악을 제대로 못하기도 한다. 그래서 낙선했을 때 망연자실할 수 있다. 그러나 제3자들은 그가 낙선할 것을 미리 예측하는 경우도 많다. 마치 장기나 바둑 두는 사람보다 훈수 두는 사람이 더 판세를 잘 보는 것처럼 말이다. 경선해야하는 후보는 애가 탈 것이다. 이번 총회 임원 선거에 나온 모 후보는 “이 일은 두 번 다시 못할 것 같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그만큼 힘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동안 성실하게 맡은 일을 잘 했다면 원하는 곳의 책임자가 될 가능성은 많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 다른 것에 휘둘려 그렇지 않은 사람이 된다면 결국 그 단체는 그로 인해 손해를 보게 될 것이다. 선거는 투표자들의 수준을 보여주는 바로미터이며, 결국 투표자들의 수준에 맞는 책임자가 당선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이후의 결과와 책임은 투표자들이 오롯이 감당해야할 것이다. 투표하는 자들은 “人事가 萬事”라는 말을 잊지 말아야한다. 올해 남은 한 선거를 관심있게 지켜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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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0-09
  • 【단상】 모든 것이 은혜였다
    코로나로 어려웠던 때에 가장 많이 들려졌던 복음성가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은혜”(내가 누려왔던 모든 것들이)였다. 그당시 여러 행사장에 취재 가면 “은혜”라는 특송을 많이 했다. 나는 그 가사들을 하나하나 새겨보며 구구절절이 맞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가사는 모든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니라 은혜였다고 말한다. “누려왔던 모든 것들, 지나왔던 모든 시간, 걸어왔던 모든 순간들이 은혜”였다 그리고 “아침 해, 저녁 노을, 봄의 꽃 향기, 가을의 열매, 계절의 모든 순간이 은혜”였다. 또한 하나님의 은혜는 “한 없는 은혜”였다. 결국 “우리 삶에 당연한 것은 없다!” 나만해도 그렇다. 짧은 인생을 살면서 총신대학, 총신신학대학원에 들어간 것, 군목생활을 한 것, 아내를 만난 것, 담임목회를 한 것, 신학박사가 된 것 그리고 기자가 된 것 등등 돌아보면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였다. 생각지 않게 담임목회를 중단하고 기자가 되어 취재 현장에서 계속해서 그 찬양을 들으며 나는 이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였다는 것을 다시한번 깨달았다. 구굴을 검색해 보니 이 찬양은 2년 전인 2021년 초 손경민 목사가 작사, 작곡해 발표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런 놀라운 곡을 만들어 코로나라는 어려운 때를 지나가는 한국교회와 성도들을 위로한 것에 대해 고마운 마음을 갖는다. 지금까지 하나님의 은혜로 살았듯이 앞으로도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기를 소망한다. 그래서 사도 바울의 고백이 언제나 나의 고백이 되기를 갈망한다. “고전15:10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내가 누려왔던 모든 것들이 내가 지나왔던 모든 시간이 내가 걸어왔던 모든 순간이 당연한 것 아니라 은혜였소 아침 해가 뜨고 저녁의 노을 봄의 꽃 향기와 가을의 열매 변하는 계절의 모든 순간이 당연한 것 아니라 은혜였소 모든 것이 은혜 은혜 은혜 한 없는 은혜 내 삶에 당연한 건 하나도 없었던 것을 모든 것이 은혜 은혜였소 내가 이 땅에 태어나 사는 것 어린 아이 시절과 지금까지 숨을 쉬며 살며 꿈을 꾸는 삶 당연한 것 아니라 은혜였소 내가 하나님의 자녀로 살며 오늘 찬양하고 예배하는 삶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축복이 당연한 것 아니라 은혜였소 모든 것이 은혜 은혜 은혜 한 없는 은혜 내 삶에 당연한 건 하나도 없었던 것을 모든 것이 은혜 은혜였소 모든 것이 은혜 은혜 은혜 한 없는 은혜 내 삶에 당연한 건 하나도 없었던 것을 모든 것이 은혜 은혜였소 모든 것이 은혜 은혜였소 모든 것이 은혜 은혜였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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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0-08
  • 【내이야기】 내 아내는 아프다
    오늘 어떤 일로 교외에 나와 아내와 아들과 함께 점심을 먹었다. 차를 타고 오는 길에 아내가 “이제 내 마음이 조금 편안하다”고 했다. 이 말에 나는 안도감을 느꼈다. 3년전 갑자기 목회에 갈등이 생기고 사임할 때 가장 큰 충격을 받은 것은 아내였다. 아내는 2005년 34살에 그 교회에 부임하면서 “하나님, 이 교회에서 쫓겨나지 않게 해주세요”하고 그동안 기도해왔다고 한다. 그런데 그만 쫓겨난 것이다. 그 교회는 원로목사 이후 12년간 4명의 담임목사를 내쫓았다. 그런 교회에 남편이 부임할 때 반대하지 않고 동의했는데 속으로는 그런 기도를 하고 있었다는 것을 전혀 몰랐다. 나는 15년간 한번도 그런 기도를 한 적이 없었고 당연히 30년 정년을 그 교회에서 채우고 원로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만 담임목사 중반에 문제가 생겼고 7개월간 갈등이 있었다. 2020년 코로나가 한창 기승일 때 나는 부목사와 함께 직접 300평이 넘는 땅에 지어진 교회 옥상 방수를 재시공하고, 교회 안과 밖을 페인트칠하며 관리집사 사택과 교회 뒷마당 정리 작업을 했다. 코로나로 정상적인 목회가 어려웠기에 남는 시간을 그렇게 보냈던 것이다. 부목사와 둘이 그 공사를 다 끝낸 후 나는 교회를 사임했다. 7월말 반대자들과 만나 10월 정기노회 때 시무사면 처리하고 12월까지 사택을 비우는 조건으로 합의했다. 그런데 그들은 앞으로 목양실을 사용하지 말아 달라고 했다. 내 모든 짐이 있는데 사용하지 말아달라고 하니 기가막혔지만 동의하고 저녁 때 필요한 경우만 교회 출입을 하기로 했다. 8월부터 나는 아침에 눈을 뜨면 갈곳이 없었다. 그동안은 눈만 뜨면 교회로 갔고 휴일에도 교회에 갔는데 이제는 교회에 갈 수 가 없게 된 것이다. 그래서 교회 근처 놀이터로 가서 내부를 빙빙돌며 시간을 보냈다. 밥을 먹으면 운동 겸 해서 아침, 점심, 저녁, 비가 오면 우산을 들고 여러 시간 놀이터 운동장을 돌았다. 그러면서 기도하고 찬양하며 울고, 웃으며 8월과 9월을 보냈다. 그해에는 여름 장마가 길어 비가 많이 왔다. 어려서부터 비를 좋아한 나는 놀이터 인조 잔디를 맨발로 여러 시간 걸으며 남들이 보면 미친 사람처럼 수많은 시간을 돌고 도는 시간을 보냈다. 아마도 그러면서 나는 담임목회사임의 충격을 이겨나가고 있었던 것 같았다. 그리고 9월 이후 친구의 신문사 기자로 제2의 사역을 시작하게 됐다. 그러나 아내는 그런 시간을 갖지 못했다. 무엇보다 왜 15년간 그렇게 기도했는데 우리가 나가게 됐는지 받아들이지 못했다. 15년 목회한 나와 사모로 내조한 자신의 의미는 무엇인지 고민했다. 그리고 자신의 위치가 변한 것에 대해 받아들이기 힘들어 했다. 그동안은 사람들을 만나고, 학교 동창 친구들을 만나도 “사모”라는 이유로 다 받아들여졌다. 사모가 무슨 돈이 있냐는 동의하에 내 아내는 친구들보다 여유가 없어도 어울릴 수 있었고 당당했다. 그러나 교회를 나오기로 결정한 이후 그 친구들을 만났을 때 “너도 이제 돈 벌어야지?”하는 친구들의 말에 아내는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많이 아파했다. 사실 아내는 담임목회로 나오면서 많이 힘들어 했다. 자주 소화불량에 걸렸고 원형탈모로 시달렸다. 문제 많은 교회의 문제 많은 교인들의 텃세로 인해 고통이 심했던 것이다. 담임으로 부임했을 때 내 나인 만 39세, 아내는 34세였다. 첫 담임이고, 첫 담임 사모이니 얼마나 어리고 미숙했을까? 반면 그들은 수많은 목회자와 사모를 다룬 “선수”들 아니던가? 나는 담임목사라 함부로 하지 않았지만 여자 성도들은 달랐다. 아내를 따돌리기도하고 괴롭히기도 했다. 그러면서 아내는 많은 어려움을 당했다. 나는 아내의 잦은 소화불량과 원형탈모에 큰 신경을 쓰지 않았었다. 그러나 지나놓고 보니 중간에 사임하지 않았다면 아내는 스트레스성 암에 걸려 죽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아내는 가슴에 멍울이 생겨 순천향병원에서 유방암이 의심된다고해 조직검사를 하기도 했다. 다행히 암이 아니었다. 그래서 지금 와서는 사임한 것이 오히려 감사하다. 교회를 사임 후 내가 가장 신경 쓴 것이 아내였다. 우선 아내는 시댁으로 들어가야했다. 갈곳이 마땅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사실 며느리 입장에서 시부모님과 한 건물에서 산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런데 결혼 후 한번도 같이 산 적이 없는 시부모님과 한 건물에 살아야하니 얼마나 힘들겠는가? 어떻게 해서든 집 문제를 해결해 볼려고 했지만 받은 퇴직금으로는 그것을 감당할 수 없었다. 그래서 부모님댁으로 들어가게 됐는데 동의하고 따라준 아내가 지금도 고맙다. 아내는 사임 후 돈을 벌어야한다는 생각을 늘 하고 산다. 그동안은 나를 만나 군목으로, 부목사로, 담임으로 내가 받는 사례를 가지고 부족하지만 안정적으로 살았는데 졸지에 내가 “실업자”가 됐으니 아내의 고민이 너무나 컸다. 55세에 담임으로 다시 청빙받아 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무슨 이유가 됐든 “교회에서 쫓겨난 목사”라는 꼬리표가 붙은 목사를 어느 교회가 청빙하겠는가 말이다. 그리고 나는 교회 개척을 한번도 생각해 본적이 없다. 그래서 기존교회에 부임을 했던 것이다. 이후 기자생활을 하면서 수입은 형편 없었다. 그동안은 퇴직금을 까먹으며 살아야했다. 나는 모든 돈 관리를 처음부터 아내에게 맡겼기에 얼마나 지출이 되는지 모른다. 그러나 4인 가족이 서울에서 살려면 숨만 셔도 돈이 든다. 그러면서 아내는 재정에 대해 불안해했고 무엇인가를 해야한다는 생각으로 평소 관심이 있고 해보기도했던 한복 만드는 일을 배우게 됐다. 국가에서 무료로 가르쳐주는 곳에 등록해 2년 넘게 다니며 지금은 간간히 용돈벌이를 하고 있다. 그런 아내에게 나는 “돈은 내가 벌테니 마음 편히 지내고, 당신은 당신 하고 싶은 것만 해”라고 말한다. 아내는 예민한 편인데 만약 돈 문제로 스트레스를 받아 병이 나면 큰일이다. 가뜩이나 시댁에 얹혀사는 것도 힘든데 돈 문제로 힘들어져 병이라도 나면 큰일이라는 생각으로 나는 아내가 스트레스를 받지 않도록 하고 있다. 29년을 함께 산 아내는 너무나 귀한 여자다. 내가 세상에서 가장 잘한 일 중 하나는 아내와 결혼한 것이다. 아내를 지금도 사랑하고 앞으로도 오래오래 같이 살고 싶다. 그런데 그런 아내가 목회할 때 많은 스트레스를 받아 소화불량에 걸리고 원형탈모에 시달렸다. 그리고 사임 후에도 이 상황에 대해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으로 인해, 시댁에 얹혀 사는 것으로 인해 그리고 돈을 벌어야한다는 압박감으로 마음이 편치 못했다. 그런 아내를 보며 늘 위로하고 격려했다. 그런데 사임 3년이 되가는 오늘 아내가 “이제 내 마음이 조금 편안하다”고 하니 너무나 고마웠다. 해고 노동자들은 “해고는 살인이다”라고 주장한다. 맞는 말이다. 돈을 버는 가장이 해고되면 그 가정은 어떻게 되는가? 실제로 과거 IMF때 실직으로 인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살로 내몰렸는가? 담임목사 강제 사임은 “살인”이다. 나의 사임으로 인해 내 가족, 부모님, 친구등등 수많은 사람들이 충격을 받았다. 나와 내 아내는 죽을 고비를 넘겼다. 그래서 나는 기회가 될 때마다 나의 사임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내 마음에 남겨진 상처가 너무 크기 때문이다. 마치 노인들이 살아온 힘겨운 날들을 되네이고, 남자들이 군생활을 이야기하며, 여자들이 출산한 이야기를 되풀이 하듯이 말이다. 담임목회할 때 내 아내는 아팠다. 그리고 사임 후에도 아팠다. 그러나 3년이 지난 오늘 이제는 조금 편안하다고 말했다. 언제 또 교회에서 받았던 상처가 불현듯 불쑥 떠올라 속이 뒤집어 질지는 모르나 이제는 편안하다고 말해주니 고맙고 고맙다. 아내도 회복과 극복의 과정을 밟고 있는 것 같다. 나를 내쫓은 이후 교회가 더 나락으로 떨어져간다는 소식을 접할 때 도대체 그들은 뭔 정신으로 그 일을 저질렀는지 묻고 싶다. 그들은 담임목사를 5명이나 내쫓으면서 그것이 “살인”이라는 것을 깨닫기는 했을까? 깨닫지 못한 것 같아 두렵다. 5명을 이미 내쫓았으니 기회가 되면 앞으로도 내쫓지 않으리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좋지 않은 버릇에 물든 교인들이 불쌍하다. 어쨌든 그거야 그 교인들이 책임져야할 문제고, 내 아내를 병들게했던 교회에서 벗어나게 되어 감사하고 감사하다. 담임목회와 아내 중 선택하라면 나는 아내를 선택할 것이다. 담임목회야 나 아니어도 할 사람들이 즐비하지만 세상에 내 아내는 하나이기 때문이다. 오늘도 어려운 가운데 묵묵히 목회를 감당하는 모든 목사와 사모 그리고 자녀들의 강건을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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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0-07
  • 【내이야기】 나는 왜 정신과를 찾아 갔는가?
    “혹시 이전에 교통사고를 당한 적이 있나요?” 정신과 의사가 내게 물었다. 1992년 말이거나 1993년 초 나는 정신과를 찾아갔다. 그 당시 살던 집은 양쪽 4차선 도로 옆이었는데 어느날부터 갑자기 차 소음이 너무나 크게 들렸다. 그동안 그 집에 여러해 살면서 그런적이 없었다. 그래서 이상하다싶어 우선 정신과를 찾았던 것이다. 마땅한 진료 과목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정신과 의사는 그 질문 외에도 “혹시 가족 중에 교통사고를 당한 적이 있느냐?”는 것도 물었지만 1983년 아버지가 크게 교통사고를 당하시기도 했지만 그것은 이미 10년 전 일이었다. 결국 별다른 이유를 찾을 수 없어 간단한 약 처방을 받았지만 먹지는 않았다. 하긴 나는 소음에 예민한 편이다. 그래서 기계식 손목시계도 잘 때는 초침 소리가 들리지 않도록 멀리 두고 잤다. 벽시계도 다 무소음으로 구입했다. 그런데 아마도 1993년 4월 군목을 위한 입대를 앞두고 알게모르게 신경이 쓰여 평상시와 같은 집 옆 도로 소음이 더 크게 들렸는지 모르겠다. 이후 군입대해 경북 영천에서 3개월간 군사훈련 받을 때 조용해서 오히려 좋아했던 경험이 있었다. 우리는 흔히 정신과는 “미친”사람이 간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몸이 아프면 병원에 가는 것이 당연하듯 마음과 정신이 아프면 정신과에 가서 상담도 받고 필요하면 약물 처방도 받아야한다. 대학 때 상담과 심리에 관련된 책을 많이 봤다. 그리고 한때 상담학을 전공할려고도 했다. 왜 그랬을까? 내게 풀어야할 숙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아버지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내가 어렸을 때 아버지는 술을 드시면 어머니와 싸우는 주사를 부렸다. 4남매 앞에서도 주사를 부렸다. 그래서 아버지가 술을 드시고 오시는 날엔 집안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때로 그냥 주무시기도 했지만 대부분 애끚은 어머니에게 트집을 잡아 험악한 말과 행동을 하셨다. 이때 큰 누나는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편이었고 나는 무서워 도망갔다. 이것이 지금의 내 “회피성향”을 만들었는지 모른다. 내가 3년전 교회 문제로 교인들과 갈등할 때 옳고 그름을 떠나 7개월만에 관둔 이유도 이 내 성향 때문이다. 내가 관둔다고 했을 때 주변 사람들은 잘못한 것이 없으니 끝까지 싸우라고 했다. 아마 내가 적극적이고 과감했다면 반대편 교인들을 다 내쫓고라도 지금도 목회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내 성향이 아니다. 그래서 내가 포기 했을 때 나와 함께 반대편 교인들과 싸웠던 한 권사는 크게 실망해 나를 외면했다. 지금도 그 권사를 생각하면 미안하고 마음이 아린다. 나는 지금도 어느 싸늘한 밤 부모님의 부부싸움을 피해 도망갔던 동네 놀이터의 그 서늘함을 잊지 못한다. 그것은 자주 내 기억의 수면위로 떠오른다. 결코 치유될 수 없는 마음의 큰 상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은 목회를 그만두고 3년전부터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다. 그러면 아버지와의 사이는 어떻게 되었을까? 진작에 아버지를 용서했다. 신대원 이후인지, 결혼해서 인지 어느때부터 아버지를 이해하고 용서했다. 아버지는 아버지(내게 친할아버지)의 얼굴을 모른다. 태어나신 후 1년도 안되어 할아버지께서 병으로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아버지께는 위로 형과 누나가 한분씩 계셨다. 경기도 광주에서 태어나 생활하셨는데 청상과부가 된 할머니는 억척같이 일하셔서 땅과 소들을 갖고 계셨다. 그런데 어려운 때 간신히 속성으로 초등학교를 졸업한 아버지가 중학교를 보내달라고 하셨는데 할머니는 친척 오빠의 말을 듣고 “땅 파먹고 살면 되지 공부가 무슨 소용 있느냐?”며 중학교를 보내지 않으셨다. 이후 20살에 아버지는 형과 크게 다툰 후 무작정 서울로 상경하셨다고 들었다. 그리고 곧 중매로 결혼해 4남매를 낳으셨다. 할머니께 아들 가르칠 필요가 없다고 하신 친척은 자기 자식들은 다 교육을 시켰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그 친척 어른을 원망한다. 사람이 사람 구실 할려면 배워야하는데 왜 할머니께 아들을 교육 시키라는 말을 하지 않았던가? 그랬다면 할머니는 아버지를 교육시키셨을 것이다. 그러면서 왜 자기는 자기 자식들은 가르쳤는가? 이후 아버지의 삶은 파란만장했다. 세상 물정 모르고 할머니 땅 팔아 사업을 하면서 여러번 망해먹었다. 그럴 때 마다 할머니께도 주사를 부렸다. 머리를 방 벽에 부딪히며 “내 눈을 빼달라”고 할머니에게 소리를 질렀다. 참으로 할머니 입장에서도 기막힌 일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아버지는 배우지 못한 설음을 갖고 사셨다. 그당시 관공서에 가면 대부분이 한자인데 그것을 읽을 수 없어 어려움을 당하셨다. 그래서 결혼하시면서 어머니께 ‘아들을 낳으면 대학까지 공부를 시키고, 딸을 낳으면 고등학교까지 교육을 시키자’고 다짐하셨다. 그래서 그 다짐대로 나와 내 남동생은 대학을 나왔고, 누나들은 고등학교까지 가르쳤다. 어느날부터 나는 이에 대해 아버지께 감사하고 있다. 그런 다짐으로 나를 가르쳐 주셨기에 내가 지금 이렇게 내 역할을 하며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주사부리는 아버지가 싫었다. 그래서 초등학교 때는 아버지가 빨리 죽거나, 어머니가 아버지와 이혼하셨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사춘기가 돼서는 아버지와 목욕을 가지 않았다. 이후 아버지가 큰 교통사고를 당하셔서 1년이 넘게 병원에 계셨지만 병문안도 제대로 가지 않았다. 이 문제로 큰 누나와 싸우기도 했다. 생각해 보면 참으로 안타깝다. 아들에게 있어 아버지는 영웅이고 모델이다. 그런데 내 아버지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그래서 원망했지만 세월이 흐르니 어려서 아버지를 잃은 아버지를 이해하고 용서하게 됐다. 그리고 비록 어머니에게는 주사를 부렸지만 4남매에게는 손찌검 한번 안하신 것도 감사하고, 다짐대로 대학까지 보내주신 것도 감사했다. 그리고 초등학교 때 육성회비를 제때 못내는 아이들은 집으로 돌려보내거나 교실 앞뒤로 보내 벌을 주었는데 빌려서라도 주셔서 절대 그런 일을 당하지 않도록 해주셨던 것도 감사했다. 부목사 때 아내가 먼저 시작한 「치유상담연구원」을 다니면서 상담을 더 공부하며 더 아버지를 용서하게 됐다. 집단상담 치료과정에서 어려서 아버지를 피해 한밤에 놀이터에서 떨고 있을 때 멀리서 주님이 나를 보고 계셨다는 것을 깨닫고 나는 눈물이 났고, 지금 이 대목을 쓰면서도 뜨거운 눈물이 흐른다. 그렇다. 그당시 나는 교회를 다니고 있지 않았지만 주님은 한밤에 추위에 떨고 있던 나를 바라보고 계셨던 것이다. 그래서 초등학교 때 잠시 다니던 교회를 안 다니고 중학교 때 다시 다니면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이 너무나 좋았다. 육신의 아버지는 싫었지만 하나님 아버지는 너무나 좋았다. 그래서 그 "하늘" 아버지가 좋아 고1때 목사가 되겠다고 서원했는지도 모른다. 나는 나이를 먹어가며 또 상담과 심리에 대한 책의 도움으로 아버지를 이해하고 용서하게 됐지만 그래도 집단상담을 통해 큰 도움을 받았다. 상담치유기법에 의해 내 어린 시절로 다시 돌아가 상황을 보고, 또 아버지 입장에서 그 상황을 보면서 책에서 본 것과는 비교되지 않는 치유경험을 했다. 나처럼 “역기능가정”에서 성장하지 않았다면 축복이다. 자신 안에 “성인아이”가 없다면 다행이다. 그러나 세상에 완벽한 가정, 부모가 어디 있겠는가? 우리 몸도 완전히 100% 건강할 수 없듯 마음과 정신도 완벽히 건강하지 못하다. 그렇게 자부하는 사람이 더 위험하다고 본다. 취재가서 모처럼 한성렬 교수님의 강의를 들었다. 「치유상담연구원」에서, 또 한 교수님이 운영하는 「예상」에서 많은 유익을 얻었다. 특별히 한 교수는 목회자 가정에서 성장한 장로로서 목사들의 상황을 잘 이해하고 있다. 요즘같이 목회가 어려운 때 목회자는 번아웃되어 목회를 제대로 감당하기가 어렵다. 또한 원가족에서 생긴 문제로 인해 목회와 가정에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한 교수는 목사들도 상담받아야 한다고 외치는 것이다. 그런데 여전히 기도만하면, 성령충만만 받으면 모든 게 해결된다고 하는 “신령파”도 많이 있다. 그러나 배고프면 음식을 먹어야 배부르듯이 마음의 문제, 심리의 문제 등은 기도와 아울러 상담이 필요하다. 과거에 한번 정신과를 간 이후 나는 정신과를 간 적이 없다. 그러나 나중에 필요하면 정신과를 갈 수도 있고, 앞으로도 필요하면 더 나은 삶을 위해 상담도 받고 싶다. 상담의 유익함을 경험한 자로서 그렇다. 그러나 상담 비용은 매우 비싸다. 요즘 뜨고있는 오은영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에게 상담 받을려면 엄청난 비용을 지불해야하는데도 예약자가 차고 넘친다고 한다. 이것은 정신과를 찾고 상담 받는 것에 대한 오해와 거부감이 많이 사라졌다는 것이며, 한편으로는 그만큼 삶에 치여 마음에 상처 받은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다. 목회자도 예외일수는 없다. 내가 굳이 내 이야기를 쓰는 이유는 경험자로서 상담받는 것이 유익하다는 것과 목회자도 인간인 이상 완전하지 않기에 상담을 받아야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말해주기 위해서이다. 주변에 보면 상담이 필요한 목사들이 많이 보인다. 그런데 정작 당사자는 그 사실을 모르고 있다. 나는 여전히 다양한 책을 통해 내 자신의 마음을 알아가고 치유하며 성숙해가는 과정을 밟고 있다. 더 온전해지고 행복해지기 위해서이다. 그 길에 상담을 받았던 것이 크게 유익했다는 것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싶다. 당신에게도 상담이 필요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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