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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토크】 ‘절판’ 앞에서....책이란 무엇인가?
    과거 취미란에 ‘독서’를 쓰는 것이 유행이었다. ‘클래식 음악 듣기, 영화 감상’등도.. 독서가 취미인 나로서는 책이 있다는 것이 축복이다. 책을 쓰는 작가, 출판하는 출판사에게 늘 고마운 마음을 갖고 산다. 책이 없는 세상은 매우 심심할 것이다. 다행히 어려서부터 책 사는 것을 좋아했고 지금도 책 읽는 것을 좋아한다. 이 책은 책에 대한 책이다. 어떤 책을 읽다 소개 되어 읽었는데 2006년에 발간된 책이라 소개된 책 중에는 ‘절판’된 책들이 많았다. 책에도 수명이 있고 유행이 있다. 무수한 책들이 만들어지고 사라진다. 죽을 때까지 다 볼 수 없는 책을 읽는 것이 취미인 것이 감사하다! (기사 화면에 이 책 '빠삐용의 책읽기' 사진을 실을려고 교보문고를 검색해 보니 이 책도 절판됐다. 다행히 도서관에 있어 빌려보게 된 것이다). 칼날 위에 서 있는 사랑 어떤 사람들에게 사랑이 가장 고결한 단어라면, 어떤 사람들에게는 금기어입니다. 믿을 수 없으시다고요? 유희처럼, 하룻밤 욕망 해소처럼 가볍게 사랑을 즐기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을 하는 매 순간마다 목숨을 걸어야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오스네 사이에르스타드 장편소설 『카불의 책장수』를 읽다보면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촌에는 참 다양한 삶들이 부대끼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아프가니스탄 여인들에게 '사랑'은 금기어입니다. 그들이 지하에서 펴내는 시집에 사랑을 표현하려면 피어린 절규가 담기지 않을 수 없습니다. '손을 주세요, 사랑하는 이여, 그리고 우리 함께 초원에 숨어요. 사랑하거나 칼 아래 쓰러지거나 둘 중 하나.' 이곳에 사는 여인들은 묻는 말에 대답하거나 요리를 칭찬하는 말에 답례를 표하기는 하지만, 외방인 앞에서 절대로 먼저 대화를 시작하는 법이 없습니다. 부모 몰래 금지된 사랑을 나누다 들키면 죽음입니다. 사랑은 언제나 칼날 위에 서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 나라에서 적용되던 이슬람 율법은 한없이 너그러우면서 동시에 비정한 부분이 있습니다. 그 율법을 비켜가기 위해 그녀들은 란다이(landay)라고 불리는 시를 읊습니다. 란다이는 "비명이나 칼로 찌르는 것처럼" 짧고 율동적이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한반도에서의 삶을 살아가면서 동시에 지구의 다른 쪽을 생각하는 이유는 무엇보다 균형 잡힌 시각을 갖춘 인간이 되고 싶기 때문입니다. 균형이 교양이고, 그것이 문화적 경쟁력이기도 합니다. 이 책의 저자는 노르웨이 출신 여성 종군기자입니다. 2001년에 9·11 테러가 있었고, 그해 10월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 정권을 테러 비호세력으로 지목하면서 대대적인 공습을 때립니다. 2002년 봄 사이에르스타드는 카불에서 책장수로 살아가는 술탄 칸의 집에 3개월 동안 머무릅니다. 이 책은 그때 목격한 것을 소설로 쓴 것입니다. 이 소설은 정치적 격변과 국가재건, 그리고 근본주의 이슬람 문화 밑에서 학대받는 여성 문제, 빈곤 문제를 소설 형식으 로 묘사합니다. 폐허가 된 카불의 방 네 칸짜리 아파트에서 술탄 칸은 홀어머니와 아내 둘, 그리고 아이 다섯과 동생, 사촌 두어 명을 데리고 삽니다. 가혹한 시련은 언제나 곁에 있습니다. 등장인물들은 일을 하고, 돈을 모으고, 저잣거리에서 장을 보고, 요리를 하고, 혼례를 준비하고, 혼례를 치르고, 경찰서와 감옥을 왕래하며 갈등하고 기뻐하고 슬퍼합니다. 국민의 4분의 3이 읽지도 쓰지도 못하는 나라에서 책장수의 가족이란 원래가 드문 경우지만, 주인공 술탄 칸은 30여 년 간 서적 판매업에 종사했습니다. 무엇보다 문학과 책을 사랑했습니다. 공산주의자, 무자헤딘, 탈레반 같은 여러 정권의 하수인들은 차례로 쳐들어와서 책을 불태웁니다. 자신도 체포되어 감옥에 갇히곤 했습니다. 그러나 책에 대한 열정을 굽히지 않습니다. 책을 숨기고, 감옥에서 살아나오고, 서점을 다시 세웁니다. 아이들 교육을 위해 교과서를 출판하려고 하고, 부르카를 감옥이라 규정하며 여성의 권리를 부르짖습니다. 그러나...... 술탄 칸은 집안에서는 누구보다 억압적인 또 다른 가부장일 뿐입니다. 전통의 고수와 근대화 사이에 끊임없이 혼란을 겪어온 그들의 역사는 멀지 않은 과거에 있었던 한국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독자들은 마치 증기탕에서 부르카를 뒤집어 쓴 느낌을 받을 것입니다. 부르카가 얼마나 머리를 죄고 두통을 일으키는지, 얼마나 밀폐된 공간인지, 얼마나 공기가 부족한지, 얼마나 금방 땀이 삐질삐질 나게 하는지에 대한 얘기입니다. 책을 덮고서 우리는 비로소 시원한 공기에 감사하고, 그것을 공유해야 한 다는 사명감을 느낍니다. 이 소설은 아프가니스탄 출신의 미국인 청년이 탈레반 치하에서 친구에게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아프간을 찾는다는 내용의 『연을 쫓는 아이』란 베스트셀러에 필적합니다.(※1996년 9월 탈레반은 연날리기를 금지했었습니다.)(pp. 93-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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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소개
    2024-05-06
  • 【북토크】 글을 잘 쓰는 구체적인 방법
    글쓰는 것은 나의 오래된 관심사항이다. 기회 되는대로 글쓰기에 대한 책을 읽는다. 이 책도 그러한 관심에서 봤다. 유익하다. 특별히 이문재 교수는 글쓰기에 대해 매우 잘 설명하고 있어 전문을 게재한다. 잘 읽어보면 많은 유익을 얻을 것이다. 이문재 (시인, 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교수) 정확해야 아름다울 수 있다 왜 저널리즘적 글쓰기인가? 글쓰기의 장르는 매우 다양합니다. 사적인 글쓰기/공적인 글쓰기, 사적인 글쓰기: 일기, (자서전) 편지, 이메일, 공적인 글쓰기: 시와 소설, 희곡, 에세이, 기행문 등 문학적 글쓰기, 기사, 칼럼 등 저널리즘적 글쓰기, 광고 문안, 연설문, 안내문, 보고서, 기획서, 청원서 등등. 글쓰기는 더 이상 문인, 저널리스트 등 몇몇 전문가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미디어 환경이 급속하게 변화하는 것과 아울러, '문자시대는 가고 영상 시대가 도래했다고들 말하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세히 들여다 봅시다. 영상 이미지 역시 최종적으로는 문자 언어로 번역되어야 이해와 소통이 가능합니다. 인터넷과 휴대전화와 같은 뉴 미디어 역시 문자 언어에 상당 부분 빚지고 있습니다. 인간이 언어를 버리지 않는 한 인간이 이야기를 포기하지 않는 한 문자 문화는 영원할 것입니다. 언어는 대중의 합의에 의해 정착되고, 또 동시에 대중에 의해 변화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언어에 일정한 규범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역설적이게도 언어가 대중(언중)에 의해 생성소멸하고 유통되고 기록(저장)되기 때문에 보다 정확한 말하기와 쓰기가 필요한 것입니다. 문자 시대는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문자는 영상 혹은 구술 문화에 의해 위축되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문자 시대를 능동적으로, 그리고 당당하게 영위하는 교양인들은 그리 많지 않아 보입니다. 교양인이라면, 적어도 대학교를 졸업한 교양인이라면 전공을 불문하고 정확한 글쓰기 능력을 보유하고 있어야 합니다. 거듭 강조하지만, 우리의 개별적 삶은 듣고 말하고 읽고 쓰는 행위의 연속입니다. 이 중에서 쓰는 행위가 가장 논리적이고 또 정확해야 합니다. 글쓰기의 일차적 목표는 자신이 생각한 대로 쓰는 것입니다. 하지만 생각한 것을 그대로 쓰기란 거의 불가능합니다(무의식이 개입하기 때문입니다). 우선 생각 자체가 정돈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신의 생각을 정돈하지 않고 글을 쓰는 것은, 설계도도 없이 집을 짓는 경우와 다르지 않습니다. 생각이 잘 정돈되었다 하더라도, 그것을 정확히 표현(건축으로 치면 시공 능력)할 수 없다면 글쓰기는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저널리즘적 글쓰기가 갖고 있는 몇 가지 미덕 우리가 저널리즘적 글쓰기(기사 쓰기)에 관심을 갖는 이유는, 저널리즘적 글쓰기가 정확한 사실에 바탕해, 정확하게 표현하는 글쓰기의 모범이기 때문입니다. 저널리즘적 글쓰기에도 다양한 장르가 있지만, 자기 주장이 강하게 드러나는 칼럼(사설)이든, 쓰는 이의 관점이 가능한 한 배제되는(이른바 '객관적'이라는 스트레이트 기사에 이르기까지 저널리즘적 글쓰기는 무엇보다도 정확성이 강조됩니다. 저널리즘적 글쓰기는 사실을 정확하게 표현하고 전달하는 데 가장 적합한 글쓰기 방법입니다. 저널리즘적 글쓰기에서 아름다움은 미덕이 아닙니다. 미사여구는 정확한 사실을 전달하는 데 있어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화려한 수사는 사실(fact)을 표현하는 데 있어 장애물일 수도 있습니다. 저널리즘적 글쓰기를 주목해야 하는 두 번째 이유는 다른 글쓰기와 달리 취재와 구성이 전제되기 때문입니다. 물론 소설이나 드라마 시나리오를 쓸 때에도 취재 과정이 없지 않습니다. 하지만 저널리즘에서처럼 구체적인 현장(인물)과 정확한 사실이 필요하지는 않습니다. 저널리즘에서 활용하는 다양한 취재기법은 우리가 다른 장르의 글쓰기를 할 때 얼마든지 응용할 수 있습니다. 기획서나 평가 보고서를 작성할 때에도, 홈페이지나 블로그를 꾸밀 때에도 저널리즘의 취재기법을 동원하면 글이 훨씬 입체적이고 풍성해집니다. 셋째, 저널리즘적 글쓰기는 사건이나 사고, 사태나 현상 등 사회적 관심사에 대한 새로운 접근 방법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정확하고 심층적인 보도 못지않게, 남과 다른 시각에서 분석하려는 태도 역시 저널리즘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넷째, 저널리즘적 글쓰기는 독자 대중의 알 권리를 기본으로 하지만, 인물이나 사건 사고, 사태 등에 대한 독자의 기본적 궁금증을 풀어주는 기능을 갖고 있습니다. 저널리즘적 글쓰기는 여론의 흐름에 민감하게 반응하기 때문에, 사회 변화와 그 변화의 방향성을 파악하는 데 시야를 넓히고 시력을 키울 수 있습니다. 다섯째, 저널리즘적 글쓰기는 표현뿐 아니라 전달에 큰 비중을 둡니다. 다시 말해 아무리 새로운 지식과 정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독자(수용자)에게 전달되고 소통(커뮤니케이션)되지 않는다면 저널리즘적 글쓰기는 존재 이유가 사라지고 맙니다. 우리의 일상적 삶은 우리가 저널리스트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끊임없이 정보를 송신하고 수신하는 환경 속에서 진행됩니다. 송신자이면서 수신자인 우리가 소통 능력을 키우지 못한다면, 그 삶은 심리적으로, 그리고 사회적으로 심각한 문제를 야기합니다. 소통 능력이 있는 시민들로 구성된 사회가 건강한 사회입니다. 마지막으로, 미디어 환경이 급변하면서, 우리는 저마다 '1인 미디어'의 주인공이 될 수 있습니다. 블로그에 이어, 사용자 제작 컨텐츠(UCC, User-created content)라는 용어가 일상적으로 쓰이고 있듯이, 우리는 저마다 저널리스트가 될 수 있습니다. 자기 의견과 주장이 분명하다면, 그 사람은 어디에 있든, 그 의견과 주장을 어떤 미디어를 통해 전달하든 이미 저널리스트인것입니다. 지식정보사회를 살아가면서 단순한 지식 정보 소비자에 머물지 않고, 지식과 정보를 주체적으로 해석하고, 동시에 지식과 정보, 의견을 개성적으로 생산하고 소통하기 위해 우리는 저널리즘적 글쓰기에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저널리즘적 글쓰기를 체득하면, 보고서뿐 아니라 한 권의 책을 집필할 때에도 시간과 노력을 효과적으로 운영할 수 있습니다. 한 편의 기사와 한 권의 논픽션의 구조와 글쓰기 방법은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기사, 노력한 만큼 잘 쓸 수 있다. 1. 저널리즘적 글쓰기의 유형: 스트레이트 기사, 인터뷰 기사, 스케치 • 분석 및 해설 기사(feature story), 르포르타쥬, 칼럼, 논설 등 2. 기사를 잘 쓰기 위한 몇 가지 방법: 1) 주제를 분명하게 설정합니다. 주제를 한 문장으로 만들 수 있다면, 절반은 성공한 것입니다. 가령 '누가 한국을 움직이는가'라고 하면 각 분야에서한국을 이끄는 영향력 있는 인물을 선정하는 기획일 것입니다. 기사의 주제는 분명한 계기가 있어야 하며, 독자에게 유익한 정보가 되어야 합니다. 정보성이 부족하다면 흥미를 끌 수 있는 방법을 마련해야 합니다. 2) 주제를 뒷받침할 자료와 전문가, 현장(사례), 관련 기사를 찾습니다. 주제가 정해졌다면 가장 먼저 관련 기사를 검색해야 합니다. 한창 취재하다가 비슷한 기사가 몇 년 전에 나온 사실을 알고 포기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관련 기사를 검토하다 보면, 주제를 바꾸거나, 취재 영역에 변화를 줄 수 있습니다. 3) 구성을 어떻게 할 것인가. ◎역피라미드형: 전문(요약)중요한 사실-흥미 있는 이야기 순으로 구성합니다. 1900년대 초 미국의 AP통신이 개발한 기사 구조로 스트레이트 기사에서 흔히 사용합니다. ◎피라미드형: 도입-중요한 사실-서스펜스 형성-클라이맥스 순입니다. 피라미드형은 피처 기사에서 자주씁니다. 독자의 관심을 계속 끌고 갈 수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문학적이고 연대기적인 서술 방식입니다. ◎혼합형: 클라이맥스(요약)-서론-본론 결론 순. 4) 1), 2), 3)이 충분하게 준비되었다면, 기사 작성에 들어갑니다. • 간결하게 써야 합니다. 국내 신문은 일반적으로 5행 이상(65~75자)을 넘지 않도록 하고 있습니다. 단문을 쓰라는 것입니다. • 가능하면 구어체를 씁니다. 이야기하듯이 쓰라는 것입니다. ·주어와 술어를 분명히 합니다. • 매력적인 언어를 찾습니다. ・쉽게 씁니다. 좋은 기사의 첫째 조건은 쉬운 문장입니다. 이상은 언론학 입문서에서 가장 일반적으로 권장하는 지침입니다. 필자가 경험한 바에 따르면, 기사를 잘 쓰기 위해서는 다음 몇 가지를 유념 해야합니다. 먼저, 앞에서 말한 대로 기사의 주제를 한 문장으로 압축하십시오. 이것이 나중에 기사 제목이 될 수 있을 뿐 아니라, 기획과 취재의 매 단계에서 판단 기준이 됩니다. '민물낚시, 환경오염 주범'이라는 기획 기사를 준비한다면, 바다낚시의 오염 문제에 관한 자료는 읽을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둘째, 기획과 취재 단계에서 기사의 첫 문장, 즉 리드를 구상하십시오. 첫 문장이 결정되지 않으면 기사를 쓰기 어렵습니다. 취재를 충분하게 해놓고서도 첫 문장, 즉 도입부를 어떻게 시작할 것인지 결정하지 못해 전전긍긍하는 기자들이 제법 많습니다. 어디 기사뿐인가요. 모든 종류의 글쓰기가 첫 문장 에서 좌우됩니다. 오죽하면, 작가들이 "첫 문장은 신의 선물이다" 라고 말하겠습니까. 필자는 기자 생활을 하는 동안, 기획이 정해지면 그때부터 제목과 첫 문장을 구상하기 시작했습니다. 짧은 시를 쓸 때에도, 산문이나 논문을 쓸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셋째, 복잡한 사안을 취재할 경우, 취재한 내용을 주위 동료나 가까운 이들에게 이야기하는 것이 좋습니다. 흥미로운 인물을 인터뷰했을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야기를 하는 동안, 취재한 내용을 정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상대방의 반응을 체크할 수 있습니다. 가령 상대방으로부터 더 취재해야 할 부분, 더 강조해야 할 부분 등 의외의 아이디어를 얻을 수도 있습니다. 넷째, 관련 서적을 찾으십시오. 인터넷 검색은 참고자료일 뿐입니다. 가장 새롭고 신뢰할 만한 정보와 자료는 책에 다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십시오. 필자는 특집 기사를 쓸 경우, 기사 검색을 한 다음 대형 서적으로 달려가곤 했습니다. 관련 서적 한두 권만 읽으면, 그 분야의 권위자가 누구인지, 그 분야와 관련된 최신 이론은 무엇인지 장악할 수 있습니다. 열심히 취재해서 기사를 썼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어떤 책에 다 나와 있는 내용인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다섯째, 소설을 많이 읽고 영화, TV 드라마를 자주 보십시오. 소설은 어휘력을 풍부하게 해줄 뿐 아니라, 인간과 사회를 이해하는 시각을 갖게 해줍니다. 문학 분야가 아니더라도 베스트셀러 책은 따라 읽어야 합니다. 관객이 많이 드는 영화와 시청률이 높은 드라마도 놓치지 않아야 합니다. 베스트셀러 책과 영화, 드라마에서 한 줄 인용하면서, 혹은 등장인물을 끌고 들어가면서 기사를 시작하면 독자들의 눈길을 더 많이, 또 오래 붙잡을 수 있습니다. 기사의 궁극 목표는 좀 더 많은 독자들이 읽도록 하는 것입니다. 여섯째, 늘 기사만 생각하십시오. 기자는 늘 기사만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자동차를 운전하거나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 심지어 가족이나 친구와 대화를 나눌 때에도 기사를 생각해야 합니다. 카페 옆자리에서 얻어들은 한 마디가 대형 기사로 발전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찬반양론이 팽팽한 기사일 경우, 가족이나 친구들의 의견을 청취해보면, 취재나 기사 작성에 적지 않은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기사는 혼자 쓰는 것이 아닙니다. 기사가 아니라 다른 장르의 글을 쓸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보고 읽고 느끼고 생각한 만큼 글은 달라집니다. 개성적 글쓰기를 위한 기초체력 다지기 정확한 문장이 관건입니다. 정확하지 않은 문장은 특히 저널리즘에서 문장이 아닙니다. 시나 소설과 같은 문학 작품에서도 정확성이 우선입니다. 아름다운 문장은 그 다음입니다. 정확한 문장을 구사하지 못하는 작가는 아름다운 문장, 개성적인 글을 쓰기 어렵습니다. 정확하고 개성적인 쓰기를 위해서는 '기초체력'이 필요합니다. 글쓰기를 위한 기초체력을 다지는 필자의 체험적 방법론을 소개합니다. 1. '나쁜 버릇'부터 찾는다 어떤 글이든 좋습니다. 자기가 쓴 글을 분석 대상으로 삼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면, 자주 나타나는 단어나 표현이 발견됩니다. 사람마다 특유의 말투(말버릇)나 몸짓이 있듯이 글에도 특유의 '버릇'이 나옵니다. 예컨대, 어떤 사람은 '~것이다'라는 종결어미를 자주 씁니다. '~것이다'는 가능하면 쓰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자신의 글 버릇을 찾아내는 눈을 가지고 있다면 가능성이있습니다. 다음으로, 수식어가 많은 문장, 접속사가 많은 문장, 나열이 많은 문장이 나쁜 문장입니다. 자기 글에서 나쁜 점을 발견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이미 글을 잘 쓰는 사람입니다. 자기 글에서 문제점을 발견할 수 있는 수준까지 빨리 올라가야 합니다. 자기 글의 문제점을 발견할 수 있다면, 그 문제점만 제거해도 글쓰기는 순식간에 한 단계 업그레이드됩니다. 자기 글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 모른다면, 정말 큰 문제입니다. 정신 바짝 차리고, 자기 글을 들여다보십시오. 자기가 쓴 글들을 '원수가 보내온 편지'라고 생각하고 여러 차례 읽어보십시오. 버릇이 발견될 때까지 읽으십시오. 2. 자기가 좋아하는 글을 찾아라 자기가 쓰고 싶은 글을 쓰는 기자나 작가의 글을 집중적으로 읽으십시오. 글쓰기의 모델을 하나 설정하는 것입니다. 가수가 되고 싶어하는 청소년들은 반드시 좋아하는 가수가 있습니다. 운동을 좋아하는 청소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소설가 지망생은 필사하고 싶은 선배 소설가가 한둘은 꼭 있습니다. 좋은 기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글을 그대로 베껴 쓰십시오(필사). 외우면 더 좋습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글을 적극 모방해보십시오. 그 과정에서 글쓰기 수준이 몰라보게 향상됩니다.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알 수 있는 국내 소설가 대부분이 선배 작가의 소설을 필사하면서 습작기를 거쳤습니다. 추천하고 싶은 필자 '모델'은 문인 이외에, 혹은 문인이면서 매체에 자주 기고하는 분들입니다. 제가 추천하고 싶은 분들은 도정일(문학평론가), 김종철(<녹색평론> 발행인), 고종석(소설가 겸 언론인), 김훈(소설가 겸 언론인). 배병삼(정치학 및 동양학), 한형조(동양철학), 송호근(사회학), 고미숙(문학평론가), 정혜신(정신과 전문의) 등입니다. 이외에도 좋은 필자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3. 새롭지 않으면 쓰지 말라 저널리즘의 생명은 새로움입니다. 새롭지 않으면 뉴스가 아닙니다. 저널리즘이 아니라도 그렇습니다. 모든 글쓰기는 새로워야 합니다. 사실이나 의견에서 새로워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표현이라도 새로워야 합니다. 새롭지 않다면 신기하거나(의외성) 흥미로워야 합니다. 새로움, 의외성, 흥미, 이 세가지 중 한 가지도 만족시키지 못한다면 글을 쓸 이유가 없습니다. 4. 자세히 관찰하라 관찰은 모든 글쓰기의 스타트 라인입니다. 사물이든 사건이든 인물이든자 세히 관찰하지 않고서는 정확한 글쓰기가 불가능합니다. 관찰이 부정확하면 사실관계가 흔들립니다. 정확히 보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우리의 오감 가운데, 시각이 특히 부정확합니다. 주변 환경에 따라 착시 현상이 얼마나 자주 일어나는지 상기해보십시오. 관찰은 단지 시각에 한정되지 않습니다. 많이, 그리고 정확히 느끼는 것도 관찰의 범주에 들어갑니다. 책읽기, 영화 감상, 미술 감상 등도 관찰입니다. 관찰은 대상에 대한 집중입니다. 자신을 완전히 비우고(선입견을 버리고, 현상학적으로 말하자면 판단을 중지하고) 대상에 몰입했다가, 다시 대상으로 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상상력은 이 관찰 단계에서 나옵니다. 관찰 훈련의 첫 단계는 자기가 본 것으로 소리 내어 말해보는 것입니다. 관찰 대상이 인물이라면, 머리 모양과 색깔, 길이에서부터 이목구비를 거쳐 구두까지 관찰하면서 하나하나 말해보십시오. 컴퓨터나 텔레비전, 화분, 식탁, 자동차 실내 등 늘 마주치는 대상을 하나 정해서 소리 내어 하나하나 관찰해보십시오. 그동안 전혀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일 것입니다. 그것이 발견입니다. 낯익은 것에서 낯선 것을 찾을 수 있다면, 바로 그것이 최고의 글쓰기 재료입니다. 5. 메모하고, 메모하고 또 메모하라 기억력이 남다르다고 해도, 메모를 따라갈 수는 없습니다. 뛰어난 작가는 물론이고 예술가, 심지어 기업의 CEO들도 메모를 자주 합니다. 뭔가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메모광입니다. 인간이 하루에 접하는 새로운 정보(자극)는 수십만 개가 넘는다고 합니다. 밤에 잠자리에 누워 하루를 돌이켜보십시오. '오늘 내가 새로 느낀 것, 새로 발견한 것'을 떠올려보십시오. 거의 없을 것입니다. 주머니 혹은 핸드백에 작은 수첩과 필기구를 반드시 챙기십시오. 수첩과 필기구를 챙기는 습관이 들었다면, 글쓰기를 위한 가장 필수적인 요건을 갖춘 것입니다. 저는 화장실에도 연필과 포스트잇을 갖다 놓습니다. 주머니에 메모지와 볼펜이 없으면 산책도 하지 못할 만큼 습관이 되어 있습니다. 참신한 아이디어는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하루에도 수천 번 새로운 생각이 떠오릅니다. 하지만 그것이 글쓰기로 이어지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좋은 글은 메모지에서 나옵니다. 메모지가 '상상력 발전소'입니다. 개성적인 글쓰기를 위한 세부 지침 1. 나로부터 시작하라 저널리즘적 글쓰기, 특히 스트레이트 기사에서 '나'는 차가운 전달자입니다. 스트레이트 기사에는 글쓰는 사람의 주관이 개입해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1990년대 이후, 활자매체의 기사는 연성화하고 있습니다. 피처 기사, 칼럼 등은 대단히 주관적이고 개성적인 문체를 구사합니다. 기사작성 연습을 하고 싶다면 굳이 멀리 갈 필요가 없습니다. '나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자서전을 써 보거나, 자기가 자기를 인터뷰하는 것입니다. 가족이나 친구를 소개하는 글도 좋은 훈련이 됩니다. 자기가 사는 마을(아파트)을 취재해 사진과 곁들여 기사를 써보는 것도 훌륭한 저널리즘적 글쓰기입니다. 시나 소설을 쓰기 원한다면 더욱 그렇습니다. '나'의 이야기를 쓰십시오. 문학적 글쓰기를 방해하는 가장 큰 요소 가운데 하나가 글쓰기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그렇다면 자기 자신에서 출발하십시오. 나에 대해, 나의 가족과 친구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은 바로 나입니다. 잘 알고 있는 소재를 글로 쓸 때, 글쓰기에 대한 두려움은 현저하게 줄어듭니다. '나'에 대한 글쓰기는 자기 삶을 성찰하는 진지한 계기를 제공합니다. 내가 어디에서 왔고, 또 어디에 있으며, 어디로 갈 것인가. 이 같은 인문학적 질문을 던지게 하는 것은 글쓰기 말고 거의 없습니다. 2. 반복하지 말라 반복은 강조할 때 말고는 피해야 합니다. 반복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표현의 반복과 내용의 반복이 그것입니다. 같은 단어, 같은 표현을 반복하지 마십시오. 사실을 왜곡하지 않는 범위에서 유의어를 쓰십시오. '그녀는 아름다운 숄을 두르고, 아름다운 가방을 들었으며, 아름다운 마을에 산다. 이 문장에서 '아름다운'은 반복될 뿐만 아니라, 정확하지도 않습니다. 글쓰기의 가장 큰 장애물 가운데 하나가 내용의 반복입니다. 중언부언하지 마십시오. 같은 내용(견해, 정보, 지식......)이 반복되면 독자는 냉정하게, 즉각 눈을 돌립니다. 친구와 이야기할 때를 떠올려보십시오. 어제 한 얘기를 오늘 하면 친구는 즉각 이렇게 나옵니다. "그거, 어제 들은 얘기야." 글쓰기도 마찬가지입니다. 3. 한 문장에는 하나의 정보만 담아라 이것은 문장을 짧게 쓰는 비결이기도 합니다. 한 문장에는 하나의 정보, 한문단에도 하나의 정보군을 담는 것입니다. 한 문장에 두 개 이상의 정보를 담는 순간, 문장은 길어집니다. 한 문단에 두 개 이상의 정보군을 담으면, 복잡해지기 때문에 독자가 이해하기 힘들어집니다. 아침에 집에서 나와 학교, 또는 사무실에 도착하기까지의 과정을 '한 문장, 하나의 정보' 원칙에 따라 글로 써보십시오. 처음에는 대단히 힘들 것입니다. 하지만 몇 번 고쳐 쓰다보면, 문장을 짧게 쓰는 방법을 스스로 터득할수 있을 것입니다. 4. 접속사를 쓰지 말라 통학 또는 통근 과정을 '한 문장, 하나의 정보' 원칙에 따라 쓰다 보면, 수시로 접속사가 끼어들 것입니다. 접속사 없이 쓰려고 애써보십시오. 최근에 읽은 소설 가운데 접속사가 거의 ('전혀' 라고 해도 크게 틀리지 않다) 없는 소설이 있습니다. 김훈의 장편소설 <남한산성>인데, 접속사에 유의하며 읽어보십시오. 매우 흥미로운 글읽기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접속사는 글 쓰는 이의 마음속에 있어야 합니다. 특히 연결형, 나열형 접속사를 피하십시오. 5. 나누고 묶어주어라 기사를 쓸 경우, 다양한 정보를 한꺼번에 제공해야 할 때가 자주 있습니다. 그럴 때는 유사한 것끼리 묶어줘야 독자가 편하게 읽을 수 있습니다. 음식 종류를 소개한다면, 국적별 혹은 재료별, 계절별 등으로 나누어 묶어줍니다. 6. 병치할 때 조심하라 같은 기능을 가진 단어, 구, 절 등이 나란히 놓일 때 자주 오류가 나타납니다. '사과와 큰 배' '철수는 중학생이고 영희는 공부를 잘한다'와 같은 문장이 의외로 많습니다. '사과'라는 단어와 '큰 배'라는 구는 병치하면 안 됩니다. 단어는 단어끼리, 구는 구끼리 병치하십시오. '사과와 배' '작은 사과와 큰 배'가 적확한 표현입니다. 앞의 문장은 '철수는 중학생이고, 영희는 초등학생이다로 써야 합니다. '중학생' (단어)과 '공부를 잘한다' (구)가 나란히 놓이면 대단히 어색합니다. '30-3-30 법칙'을 명심한다 언론인들은 30-3-30 법칙'을 자주 언급합니다. 여기서 30. 3. 30은 각각 30초, 3분, 30분을 일컫습니다. 독자들이 기사를 읽을 때, 처음 30초 동안은 제목이나 부제, 사진, 그래픽 요소, 기사의 도입부 등을 살펴본다는 것입니다. 독자들은 처음 30초 안에 기사를 읽을 것인지 말 것인지를 결정합니다. 만일 읽기로 마음먹었다면 다음 3분 동안 기사의 도입부를 읽습니다. 그리고 도입부가 흥미롭다면 30분 동안 기사를 끝까지 읽는다는 것입니다. 기자와 편집자는 처음 30초를 3분으로 늘리고, 다시 3분을 30분으로 늘리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것입니다. 기사만 그런 것은 아닙니다. 모든 글이 제목과 도입부에서 결정납니다. 시처럼 짧은 글에서도 제목이나 첫 연이 진부하면 독자들은 눈을 돌려버립니다. 소설은 굳이 설명이 필요 없습니다. 보고서나 논문도 마찬가지입니다. '30-3-30 법칙'은 첫 문장에 목숨을 걸라는 저널리즘적 글쓰기의 핵심을 압축하고 있는 법칙입니다. 이문재. 1959년 경기도 김포에서 태어나 경희대에서 국어국문학을 전공하고,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시사저널 취재부장, 문학동네 편집주간을 역임했고, 현재 <시사IN> 편집위원, <문학동네〉 편집위원, 〈녹색평론〉 편집자문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교수로 재직 중이다. 김달진문학상, 시와시학 젊은 시인상, 소월시문학상, 지훈문학상, 노작문학상을 수상하였으며, 시집으로 《내 젖은 구두 벗어 해에게 보여줄 때》, 《산책시편》, 《마음의 오지》, 《제국호텔> 등이 있다(pp.197-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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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03
  • “흥청망청” 108회 선관위... 명분없는 돈 낭비
    본 기사는 교회발전연구소 대표 이능규 목사에게 모 인사가 108회 선관위(위원장 권순웅 목사)에 대해 제보한 내용을 바탕으로 작성한 기사임을 밝힌다. 제보 내용에 따르면 선관위가 불필요한 돈을 낭비하고 있다. 제108회기 선관위는 공정선거감시단 해외 활동에 이미 많은 경비를 집행했다. ▲전국장로회연합회 임역원수련회(일본) : 고정식, 손정호, 김삼주, 신덕수, 한기영(750만원 집행) ▲농어촌교역자부부수양회(다낭) : 권순웅, 신덕수, 지동빈, 임종환, 최병도(613만원 집행) ▲전국교역자하기수양회(필리핀) : 전웅구, 김상원, 유병희, 한기영, 이상돈(599만 5천원 예산). 이때 위원장 권순웅 목사와 서기 한기영 목사가 강사를 맡았다고 한다. 현재 바뀐 선거규정에 따라 후보자는 행사에 참석할 수 없다. 그런데 선관위 공정선거감시단은 누구를 감시하기 위해 해외 행사에 동행하는 것인가? 제보자는 “돈**”이라는 격한 표현을 사용했다. 또한 선관위는 민찬기 목사가 제기한 가처분 신청 소송에 대응하기 위해 변호사비로 5천 5백만원을 지출했다. 선관위원들이 1차 투표해 7대7로 나왔다면 의견이 팽팽하다는 것인데 굳이 다시 투표해 7대8로 만든 것이 화근이다. 증경총회장단이나 실행위원회에 넘겨 자문을 구했다면 굳이 총회 돈을 지출할 소송에 휘말리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것이 중론이다. 현재 감사부는 107회기 선거관리위원회(위원장 배광식 목사)에 대해 특별재정감사를 하고 있다. 어제는 서기와 회계를, 오늘은 위원장과 심의분과장을 부른다. 안건은 선관위가 재정을 과잉지출했다는 것이다. 모 선관위원은 자기들은 비용을 아껴서 사용했다고 주장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기에 특별재정감사를 받는 것이다. 앞으로 108회기 선관위도 감사부에 의해 특별재정감사를 받지 말란 법이 어디 있겠는가? 이 악순환을 끊어야한다. 선관위의 근본적인 개혁이 필요한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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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2024-05-03
  • 【북토크】 가수 장기하의 깨달음
    가수 장기하를 좋아한다. 노래가 재미있기 때문이다. 그의 대중적인 첫 노래 “싸구려 커피”, “달이 떠오른다, 가자” 등은 신선했다. 읽을 책들을 검색하다 보니 그가 몇 년 전에 쓴 것이 있어 대출해서 봤다. 부담없이 재미있게 읽었다. 첫 장인 ‘안경과 왼손’은 주어진 환경을 담담히 받아들이고 돌아본 후 감사하는 내용이다. 읽어볼만해 전문을 소개한다. 안경과 왼손 얼마 전 안경을 잃어버렸다. 매우 아끼는 안경이었다. 아니, 아낀다는 표현으로도 모자란다. 이삼 년 전 그 안경을 산 이후로는 오직 그것만 써왔던 것이다. 그런데 어느날 아침 갑자기 사라져버렸다. 있을 만한 곳을 전부 다 여러 번씩 싹싹 뒤져봤지만 찾지 못했다. 결국 예전에 썼던 다른 안경을 쓰고 집을 나설 수밖에 없었다. 약속 장소로 가는 길, 이삼 일 전에 읽었던 무라카미 하루키 에세이의 한 구절을 떠올렸다. "형체 있는 것은 아무리 애써도 언젠가, 어디선가 사라져 없어지는 법이다. 그것이 사람이건 물건이건." 마음을 털어버렸다. 그래, 그 안경이랑은 여기 까지였나보지 뭐. 나는 국소성 이긴장증이라는 병을 가지고 있다. 해괴해 보이는 이름이지만 의미는 간단하다. '국소성'이란 특정 부위에 나타남을, '이'는 이상함을, '긴장'은 말 그대로 긴장을 뜻한다. 한마디로 특정 부위가 이상하게 긴장된다는 얘기다. 이 병명에서 가장 중요한 글자는 '이'다. '이'자가 들어간 병을 선고받는다는 것은 말하자면 이런 상황이다. 몸이 안 좋다. 병원을 찾아가 묻는다. "선생님, 저 왜 아픈건가요?" 의사가 답한다. "그러게요. 이상하네요." 그렇다. 내 병은 원인도 치료법도 알려지지 않은 희귀병이다. 이 병이 처음 생긴 것은 대략 십오년 전쯤으로, 군악대 시험을 준비하던 시절이었다. 당시 나는 '눈뜨고코베인'이라는 록밴드에서 드러머로 활동하고 있었다. 가수가 되겠다는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저 드럼 하나로 먹고살 수 있을 정도로 연주를 잘하는 사람, 즉 프로 드러머가 되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그 외의 진로는 상상조차 하지 않았다. 학교 공부는 최소한으로 하고 드럼 연습과 밴드 활동 위주로 생활했다. 그러다보니 군복무를 시작도 하지 않은 채 대학 오 년 차를 맞았고, 더이상은 입대를 미룰 수 없게 되었다. 내 선택은 당연히 군악대였다. 군대에 있는 동안 손발이 녹슬면 큰일 아닌가. 일반 부대는 절대로 안 된다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군악대는 록 연주만 잘한다고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클래식 타악, 특히 행진곡풍의 연주에 능통해야 했다. 자신은 있었다. 이미 연습이라면 많이 해온 터였기 때문이다. 좀 다른 장르의 연주라고 해서 못 해낼 것은 없다고 생각했고, 시험을 대비해 맹연습에 돌입했다. 이삼 개월쯤 지났을 때 복병이 나타났다. 연습만 하려고 하면 내 의지와 관계없이 왼손이 꽉 쥐이는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드럼 연주의 기본은 그립이다. 누가 툭 치면 놓쳐버릴 듯 살며시 스틱을 잡고 부드러운 움직임을 만들어야 빠르고 정확한 연주를 할 수 있다. 그런데 자꾸 나도 모르게 스틱을 힘껏 잡게 되고 그것을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이 반복되다보니 미쳐버릴 노릇이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연습하다 너무 답답하고 화가 나서 소리를 지르며 스틱을 집어던진 것도 한두 번이 아니다. 결국 군악대는 포기했다. 치료법도 알 수 없고 상태가 호전될 기미도 보이지 않으니 어쩔 수가 없었다. 더욱 중요한 것은, 프로 드러머의 꿈도 함께 버렸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게 그리 절망스러운 단념은 아니었다. 내 생각의 흐름은 이랬다. '하긴 군악대의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 연주하는 게, 내가 멋있는 음악을 하는 데는 오히려 해가 될지도 몰라. 멋있는 음악이라... 그래, 생각해보면 프로 드러머가 되는 것 자체가 멋있는 음악을 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 수도 있겠네. 연주로 먹고살려면 돈 되는 음악을 해야 하는데, 내가 지금 멋있다고 생각하는 우리나라 음악 중에 돈 되는 게 하나라도 있나? 그리고 나는 우리 밴드 음악이 제일 멋있는데 그걸로 돈을 벌어본 적도 없잖아? 애초에 음악으로 돈을 벌겠다는 생각 자체가 문제였어!' 나는 홀가분한 기분으로 프로 연주자가 아닌, 돈은 안 돼도 '멋있는 음악을 하는 뮤지션이 되겠다고 마음 먹었다. 그리고 일반 부대에 입대했다. 제대한 후 나는 그 '멋있는' 뮤지션이 되는 일을 실행에 옮겼다. 파트타임 일자리를 구한 상태에서, 내가 싱어송라이터로서 이끄는 새 밴드 '장기하와 얼굴들'을 시작한 것이다. 최소한의 돈과 최대한의 시간을 확보해 자유롭게 음악활동을 하겠다는 생각이었다. 곡은 군복무중 짬짬이 만들어뒀었다. 물론 큰 인기를 얻으리라는 기대는 전혀 없이 만든 노래들이었다. 눈앞에 있는 관객들만은 확실히 재밌게 해주겠다는 생각이 다였다. 그런데 터졌다. 소위 '대박'이었다. 활동을 시작하고 일 년이 지나기도 전에 전 국민적 히트곡을 보유한 밴드가 된 것이다. 모든 것이 거짓말처럼 순조로웠다. 한 가지만 빼고 말이다. 왼손에 힘이 들어가는 증상이 기타를 연주할 때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처음에 이 증상이 신기했던 건 유독 드럼 연주를 할 때만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다른 일을 할 때는 아무런 불편이 없었다. 물론 기타 연주를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군복무중에도 생활관에 비치된 통기타를 치며 노래를 만들었고, '장기하와 얼굴들' 첫 싱글을 녹음할 때도 기타는 내가 다쳤으며, 밴드 활동 초기에는 공연을 할 때도 절반 정도의 곡에서는 내가 기타를 잡았다. 그런데 급격하게 치솟는 인기를 실감하며 공연을 이어가던 어느 날, 기타를 연주할 때도 왼손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결국 기타도 포기했다. 이번 단념은 군악대 때와는 달리 좀 절망스러웠다. 공연에서 기타를 연주하지 않기로 했음은 물론이고, 평소에 혼자 치는 것도 거의 못하게 됐다. 늘 자유자재로 하던 기본적인 플레이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게 되니 짜증이 치밀었다. 자연히 심심풀이로 기타를 잡는 일이 점점 줄어들었다. 중학교 때 이후로 그때까지 줄곧 기타는 나의 가장 좋은 취미 중 하나였다. 집에 있을 때면 침대에 누워 기타를 배에 얹고 아무렇게나 퉁겼다. 그러면서 멜로디를 이리저리 흥얼거리다보면 이따금씩 노래가 만들어지곤 했다. 그런 일상이 하루아침에 송두리째 날아가버렸다. 게다가 이번에는 증상이 연주에만 국한돼 나타난 것이 아니라 일상 전반으로 퍼져나갔다. 곧 타자를 치는 것도, 단추를 잠그는 것도, 왼손을 써야 하는 어떠한 일도 예전만큼 쉽게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로부터 십 년이 흘렀다. 그런데 그 십 년을 돌이켜보면, 이 병이 내게 나쁜 일만은 아니었다. 사실 병에게 엎드려 절하고 싶을 지경이다. 프로 드러머의 길을 포기함으로써 결국 '장기하와 얼굴들'을 시작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기타 연주를 포기한 것 역시 내게 두 가지 커다란 선물을 가져다주었기 때문이다. 첫째는 새 기타리스트 하세가와 요헤이 형을 영입한 것, 둘째는 내가 무대에서 악기 없이 자유롭게 퍼포먼스를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두 가지가 없었다면 '장기하와 얼굴들’의 활동이 내게 가져다준 희열은 말도 안 되게 줄어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세월이 지나면서 증상도 아주 조금씩 좋아져 이제는 거의 다 나았다. 지금도 약간의 느낌이 남아 있긴 하지만, 일상에서 그것을 의식하게 되는 일은 드물다. 기타와 드럼도 취미 정도로는 다시 연주할 수 있게 되었다. 그간 연습을 안 했으니 남들 앞에 뽐낼 만한 연주력은 당연히 아니지만, 사실 이제는 그런 능력이 필요하지도 않다. 싱어송라이터로서 좋은 연주자들과 함께할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다. 무엇보다, 증상이 가장 심했을 때를 떠 올리면 집에서 혼자 재밌게 연주할 수 있는 것만 해도 감지덕지다. 지금도 이 병의 원인은 의학적으로 밝혀지지 않은 듯하고, 물론 나도 아직 정확히 어떤 일이 벌어진 것인지 알지 못한다. 다만 이렇게 추측할 뿐이다. 내가 나 스스로에게 과도한 것을 강요했고, 몸이 그만두라는 신호를 보냈다. 나는 그것을 무시하지 않고 충분히 쉬게 해주었으며, 그랬더니 시간을 두고 차츰 회복되었다. "형체 있는 것은 아무리 애써도 언젠가, 어디선가 사라져 없어지는 법이다. 그것이 사람이건 물건이건? 그리고 형체가 없긴 하지만 능력도 마찬가지다. 어제까지 당연히 할 수 있었던 일을 오늘 갑자기 못하게 될 수도 있다. 나는 그럴 때마다 무척 괴롭긴 했지만, 결국 다 순순히 받아들였다. 이 능력은 여기까지인가보다, 하고. 그리고 새로운 상황에 맞춰 새로운 계획을 세웠다. 그러고 나면 그전에는 상상도 못했던 다른 길이 열리곤 했던 것이다. 안경은 며칠 뒤에 소파 밑에서 찾았다. 전날 술에 취해 소파에서 잠들었고, 안경을 아무렇게나 내팽개치는 과정에서 소파 아래로 들어간 모양이었다. 거실에서 잠드는 일이 거의 없다보니 그곳을 찾아볼 생각은 하지 못했던 것이다. 먼지 구덩이 속에 얌전히 놓인 안경을 발견한 순간, 그야말로 날아갈 듯한 기분이었다. 아무리 많이 아끼는 안경이라 해도, 물건 하나로 그렇게까지 기쁠 수 있다싶었다. 모르긴 해도, 깨끗이 포기했었기 때문일 거다(pp.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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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02
  • 【단상】 부총회장 선거, 축제가 싸움판으로
    지난 4월 25일 오전 11시 참좋은교회(이윤찬 목사 시무)에서 대구교직자협의회 제31회 정기총회가 있었다. 이승희 증경총회장의 개회 예배 설교 후 합심기도 시간에 경북교직자협의회 대표회장 강전우 목사가 ‘총회와 영남지역을 위해서’ 기도할 때 부총회장 자격 문제로 소송이 붙은 총회를 염려하며 간절히 기도했다. 소송 관계자인 부총회장 후보 민찬기 목사나 장봉생 목사의 마음은 어떨지 모르나 총회 회관에서 먼 경상도 지역에서도 현 사태를 매우 안타깝게 여기며 탄식으로 기도하고 있다. 아마 이 사태를 지켜보는 대부분의 총대들의 마음도 편치는 않을 것이라고 본다. 한 사람의 부총회장이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과 물질이 필요하다. 노회와 협의회, 총회 등에서 오래 봉사하며 자신을 알려야한다. 이에 많은 시간이 든다. 그리고 물질로도 많이 섬겨야한다. 그래서 아무나 부총회장이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면에서 시간과 물질로 섬겨온 부총회장 후보들은 모두 총회의 귀한 자산이다. 바람직한 것은 단독 후보로 추대되는 것이지만 어쩔 수 없이 경선이 될 수도 있다. 그러다보면 친했던 사이도 서먹해지거나 “원수” 사이가 될 수 있다. 그래서 곽선희 목사는 운동을 할 때 서로 마주보는 것은 하지 않는다고 했다. 탁구나 테니스나 서로 마주보고 하다보면 감정 싸움이 될 수 있기에 자기는 각자 실력으로 승부하는 볼링을 한다고 말한 것을 들은 적이 있다. 일리 있는 말이다. 오래 세월 총회를 섬겨온 민찬기 목사나 장봉생 목사는 현재 서로를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내리 누르고 이겨야할 경쟁 상대로 보지 않겠는가 말이다. 이런 면에서 선거란 참으로 잔인한 것인지도 모른다. 민찬기 목사 소속 임원회가 민찬기 목사의 후보 자격에 대해 물었을 때 장봉생 목사 소속 노회도 임시노회를 열어 부총회장 출마 자격에 대해 선관위에 질의했다. 선관위가 이 문제를 다룰 때 투표에 처음에는 7:7 동수가 나왔다. 이어 재투표하여 7:8로 세 번 출마는 안된다는 결론을 내렸다. 다 지나간 일이지만 의견이 7대 7로 나뉘었다는 것은 선관위원 내에서도 의견이 팽팽했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 문제를 바로 처리할 것이 아니라 좀더 시간 여유를 두고 처리했다면 좋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있다. 증경총회장단의 의견을 듣는다든지, 실행위원회에서 의견을 구했다면 모양세는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속전속결로 재투표해 7:8로 세 번 출마 불가로 정했다. 그러자 민찬기 목사측에서는 이 문제에 대해 소송을 했고, 소속 노회에서 부총회장 후보로 추천을 받았다. 세상 법정이 이 문제를 어떻게 처리할지는 두고보면 된다. 그런데 성경은 교회 문제를 세상 법정에 끌고가는 것을 경고하고 있다. [고전6:1-7] “1 너희 중에 누가 다른 이와 더불어 다툼이 있는데 구태여 불의한 자들 앞에서 고발하고 성도 앞에서 하지 아니하느냐 2 성도가 세상을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세상도 너희에게 판단을 받겠거든 지극히 작은 일 판단하기를 감당하지 못하겠느냐 3 우리가 천사를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그러하거든 하물며 세상 일이랴 4 그런즉 너희가 세상 사건이 있을 때에 교회에서 경히 여김을 받는 자들을 세우느냐 5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 하여 이 말을 하노니 너희 가운데 그 형제간의 일을 판단할 만한 지혜 있는 자가 이같이 하나도 없느냐 6 형제가 형제와 더불어 고발할 뿐더러 믿지 아니하는 자들 앞에서 하느냐 7 너희가 피차 고발함으로 너희 가운데 이미 뚜렷한 허물이 있나니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 새로이 총회를 섬길 일꾼을 뽑는 총회 선거가 축제가 아니라 세상의 조롱거리가 되고, 사법의 판결을 받아야하는 싸움판이 된 것이 참으로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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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논단
    2024-04-26
  • 취재 기자를 내쫓는 노회들...무엇이 두려운가?
    봄 정기노회가 열리는 계절이다. 서울에서 먼 지방의 몇몇 노회를 취재갔다. 그 중 2개 노회에서 “내쫓김”을 당했다. 이리노회는 북일교회 문제로 회원 호명 때부터 시끄러웠다. 결국 노회원들간에 고성이 오갔다. 이런 가운데 취재하고 있는 기자들에게 나가달라고 "거칠게" 요구했다. 결국 쫓겨날 수 밖에 없었다. 충청노회도 전 총신대총장 김영우 목사 피소건에 대해 다루며 기자들에게 나가달라고 “험악하게” 요구했다. 결국 본당 중이층으로 쫓겨갈 수 밖에 없었다. 기자는 사실을 취재하고 알리기 위해 그 현장에 가 있는 것이다. 북일교회 문제는 대부분의 총회원들이 알고 있을만큼 큰 이슈이다. 당연히 기자들이 가서 취재할 수 밖에 없는 사항이다. 기자는 총회원들의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 대신해서 그 현장에 간 것이다. 그런데 무슨 이유로 기자들을 내쫓는 것인가? 그것이 과연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겠는가? 기자가 보면 안될만큼 감춰야할 문제가 있는가? 사실을 사실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문제해결에 도움이 될 수 있다. 문제 없는 노회는 취재간 기자들을 반기며 좋게 기사를 써서 노회를 잘 홍보해 달라고 부탁한다. 기자로서도 기분좋은 일이다. 반면 문제 있는 노회는 기자를 내쫓는다. 마치 잡상인 취급을 한다. 부득이 기자를 내보낼 필요가 있다면 “정중하게” 요청했으면 한다. 같은 합동측 목사한테 그렇게 함부로 해서 되겠는가? 앞으로도 “문제 있는” 이리노회와 충청노회 “사태 추이”에 대해 예의주시할 것이다.
    • 오피니언
    • 칼럼
    2024-0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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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단상】 또 다시 마주한 총신 도너월
    지난 10월 10일 사당동 총신대학에서는 뜻깊은 행사가 있었다. 故 명신홍 박사의 도서기증 50주년을 기념해 종합관 3층에 있는 도서관을 “명신홍기념도서관”으로 명명(命名)하는 행사였다. 명신홍 박사는 누구인가? 1904년 4월 14일 평안남도 김제면 원장리 노동에서 태어나 1936년 3월 평양신학교를 졸업 후 1939년 5월 미국 웨스트민스터신학교 신학석사 학위 취득을 시작으로 칼빈신학교 신학석사, 비블리컬신학교 신학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1948년부터 1971년까지 총회신학교 교수를 하며 1953년 38대 총회장을 역임하고 1965년부터 1969년까지 총회신학교 교장(현 총장직)을 감당하다 1975년 10월 14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탁월한 실력으로 신학교와 총회를 위해 많은 일을 감당했으며 특히 총신대학 구 본관 신축 모금을 위해 직장암 수술 후 배변주머니를 찬 채 미국을 방문할 때 비용을 절약하기 위해 배를 타고 태평양을 건넜으며 체류 비용을 절약하기 위해 추운 신학교 건물에 머물렀다. 그러면서 원서를 포함 수천권의 장서를 모았다가 모두 총신대학에 기증했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50년만에 “명신홍기념도서관”으로 명명한 것이다. “역사를 잊어버린 개인과 나라에는 미래가 없다”는 말이 있다. 나는 총신을 대학, 신대원, 목회전문대학원 등으로 15년간이나 다니고 도서관에도 자주 갔었지만 명신홍 박사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했다. 그러다 이번 행사 취재를 통해 참으로 대단한 분이시라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됐다. 명신홍 박사를 추모하는 글에 그의 사위 이은태 장로는 “총신대가 계속되느냐, 없어지느냐하는 위기의 순간을 수없이 겪으셨으며, 그 힘겨운 고군분투의 나날 인공항문을 다신 채로 총신을 위해 불꽃처럼 사셨다”고 적었다. 차녀 명돈신 권사도 “아버지는 신학교를 위해 낸 몸이니 죽으라면 죽으리라는 비장한 각오로 학교 건축 모금을 위해 미국을 다녀오셨다”고 적었다. 자신의 생명을 다해 총신을 세운 분을 후배들이 알지 못했다는 자책을 하며 이제라도 그분의 고귀한 헌신을 기념하기 위해 그분의 이름으로 도서관을 명명한 것은 참으로 귀한 일이라고 본다. 이미 종합관에는 “백남조기념홀”, “주기철목사기념관”등으로 이름이 명명된 장소가 있다. 이제 세 번째로 “명신홍기념도서관”이 명명된 것이다. 이것은 그 개인을 높이고자하는 것이 아니다. 그분들의 헌신과 수고를 잊지 않고 기억하며 우리도 그 뒤를 따라야한다는 의도라고 생각한다. "명신홍기념도서관" 현판제막식 후 감사예배를 드렸다. 이 시간에 명신홍 박사의 후손들은 총신의 발전을 위해 3천만원의 거금을 박성규 총장에게 전달했다. 참으로 대를 이은 헌신에 감사할 따름이다. 이어 오정호 총회장이 목회하는 새로남교회에서 10억을 전달했을 때 명신홍 박사의 사위 이은태 장로는 “약소하게 전달해서 송구하다”는 말을 했는데 박성규 총장은 “개인과 가정이 하기에 3천만원은 너무나 큰 거금”이라며 거듭 감사했다. 이어 도너월 리뉴얼 제막식이 있었다. 이때 새로남교회가 이날과 이전에 기부한 총 15억의 액수가 도너월에 새롭게 기록되었고, 명신홍 박사 후손이 드린 3천만원도 미리 기록되어 있었다. 행사 후 도너월에 기록된 많은 교회와 개인들의 이름을 찬찬히 보면서 귀한 헌신에 고마운 마음을 갖게 됐다. 최근 총신대학, 신대원, 군목 출신인 이국진 목사가 자신의 유튜브에서 총신 도너월 문제를 다뤘다. 일부 학생들이 도너월에 이름과 액수를 기재하는 것은 비성경적인 것이 아닌가하는 질문을 했다는 것이다. 이 질문을 다루는 가운데 본인이 미국에서 오랜 기간 유학할 때 교회나 신학교의 여러 비품과 건물에 기증자와 헌신자의 이름이 적혀있는 것을 예로 들었다. 미국 교인들은 이에 대해 아무 문제 제기를 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렇게 헌신한 사람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갖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그것이 다른 사람들의 헌신을 불러 일으키는 계기가 된다고 했다. 그러면서 자신의 교회도 이미 발전기금을 전달해 도너월에 이름이 올라 있지만 더 많이 하지 못한 아쉬움이 있다고 말했다. 그렇다. 도너월의 목적은 기증자를 드러내기 위함이 아니다. 수고한 분들을 학교가 잊지 않고 기억하며 고마워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며 또한 이를 통해 다른 사람들도 선한 일에 동참할 기회를 주고자 함이다. 이날 명신홍 박사가 수많은 장서를 학교를 위해 기증한 것을 학교가 늦게나마 그에 대한 감사로 도서관에 이름을 넣어 감사하고 이에 후손들이 또 다시 학교를 위해 발전기금을 전달하고 학교는 이에 도너월에 그 이름을 새겨 기념하고 감사하는 아름다운 선순환이 일어난 것이다. 곧 작은 발전기금을 낼 계획인 나에게 한 총신 선배가 “너도 형편이 그리 넉넉하지 않은데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느냐?”고 물었다. “형님도 도너월을 쳐다보고 묵상하다보면 나같은 마음이 생길겁니다”라고 답했다. 그렇다. 나태주 시인은 ‘풀꽃 1’에서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고 말했다. 총신대를 방문할 기회가 있다면 종합관 1층 로비 우측에 있는 도너월에 멈춰 거기에 적혀 있는 명단들을 자세히 보고, 오래 바라보기 바란다. 그러면 어느땐가 불쑥 저들과 같은 마음이 생길 것이다. 내가 바로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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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0-11
  • 【단상】 경선을 지켜보며
    競選은 ‘둘 이상의 후보가 경쟁하는 선거’를 말한다. 금번 108회 총회 선거의 특징은 한 경우를 제외하고 모두가 경선 했다는 것이다. 각 후보들이야 다 자기의 당선을 꿈꿨겠지만 대부분 많은 사람들이 예상한대로의 결과가 나왔다. 결국 그 후보가 그동안 어떻게 살아왔으며 어떤 활동을 했는지가 당락을 결정하는 요인이었다. 혜성같이 나타나서 당선되는 경우는 없다는 말이다. 이점은 앞으로의 선거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총회나 총회 산하 기관에서 책임자의 역할을 하고자하는 자는 자신의 이력관리를 잘 해야할 것이다. 자기가 목표하는 자리에 맞는 경력을 성실하게 쌓아가고 주위 사람들의 인정과 신망을 얻으면 원하는 자리에 갈 가능성이 많다. 투표하는 사람들은 말은 안해도 다 보고 듣고 있기 때문이다. 경선에 임하는 후보들은 당선되기 위해 몸부림 친다. 그래서 어떤 특정 개인이나 세력의 도움을 받으면 될 것이라는 기대를 하지만 꼭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한다. 그런데 경선에 임하게 되면 당사자는 정상적인 사고나 판단이 어려워진다. 주변에는 “당신이 유리하다”고 말하는 사람 밖에 없으니 현실 파악을 제대로 못하기도 한다. 그래서 낙선했을 때 망연자실할 수 있다. 그러나 제3자들은 그가 낙선할 것을 미리 예측하는 경우도 많다. 마치 장기나 바둑 두는 사람보다 훈수 두는 사람이 더 판세를 잘 보는 것처럼 말이다. 경선해야하는 후보는 애가 탈 것이다. 이번 총회 임원 선거에 나온 모 후보는 “이 일은 두 번 다시 못할 것 같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그만큼 힘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동안 성실하게 맡은 일을 잘 했다면 원하는 곳의 책임자가 될 가능성은 많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 다른 것에 휘둘려 그렇지 않은 사람이 된다면 결국 그 단체는 그로 인해 손해를 보게 될 것이다. 선거는 투표자들의 수준을 보여주는 바로미터이며, 결국 투표자들의 수준에 맞는 책임자가 당선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이후의 결과와 책임은 투표자들이 오롯이 감당해야할 것이다. 투표하는 자들은 “人事가 萬事”라는 말을 잊지 말아야한다. 올해 남은 한 선거를 관심있게 지켜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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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0-09
  • 【단상】 모든 것이 은혜였다
    코로나로 어려웠던 때에 가장 많이 들려졌던 복음성가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은혜”(내가 누려왔던 모든 것들이)였다. 그당시 여러 행사장에 취재 가면 “은혜”라는 특송을 많이 했다. 나는 그 가사들을 하나하나 새겨보며 구구절절이 맞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가사는 모든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니라 은혜였다고 말한다. “누려왔던 모든 것들, 지나왔던 모든 시간, 걸어왔던 모든 순간들이 은혜”였다 그리고 “아침 해, 저녁 노을, 봄의 꽃 향기, 가을의 열매, 계절의 모든 순간이 은혜”였다. 또한 하나님의 은혜는 “한 없는 은혜”였다. 결국 “우리 삶에 당연한 것은 없다!” 나만해도 그렇다. 짧은 인생을 살면서 총신대학, 총신신학대학원에 들어간 것, 군목생활을 한 것, 아내를 만난 것, 담임목회를 한 것, 신학박사가 된 것 그리고 기자가 된 것 등등 돌아보면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였다. 생각지 않게 담임목회를 중단하고 기자가 되어 취재 현장에서 계속해서 그 찬양을 들으며 나는 이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였다는 것을 다시한번 깨달았다. 구굴을 검색해 보니 이 찬양은 2년 전인 2021년 초 손경민 목사가 작사, 작곡해 발표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런 놀라운 곡을 만들어 코로나라는 어려운 때를 지나가는 한국교회와 성도들을 위로한 것에 대해 고마운 마음을 갖는다. 지금까지 하나님의 은혜로 살았듯이 앞으로도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기를 소망한다. 그래서 사도 바울의 고백이 언제나 나의 고백이 되기를 갈망한다. “고전15:10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내가 누려왔던 모든 것들이 내가 지나왔던 모든 시간이 내가 걸어왔던 모든 순간이 당연한 것 아니라 은혜였소 아침 해가 뜨고 저녁의 노을 봄의 꽃 향기와 가을의 열매 변하는 계절의 모든 순간이 당연한 것 아니라 은혜였소 모든 것이 은혜 은혜 은혜 한 없는 은혜 내 삶에 당연한 건 하나도 없었던 것을 모든 것이 은혜 은혜였소 내가 이 땅에 태어나 사는 것 어린 아이 시절과 지금까지 숨을 쉬며 살며 꿈을 꾸는 삶 당연한 것 아니라 은혜였소 내가 하나님의 자녀로 살며 오늘 찬양하고 예배하는 삶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축복이 당연한 것 아니라 은혜였소 모든 것이 은혜 은혜 은혜 한 없는 은혜 내 삶에 당연한 건 하나도 없었던 것을 모든 것이 은혜 은혜였소 모든 것이 은혜 은혜 은혜 한 없는 은혜 내 삶에 당연한 건 하나도 없었던 것을 모든 것이 은혜 은혜였소 모든 것이 은혜 은혜였소 모든 것이 은혜 은혜였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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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0-08
  • 【내이야기】 내 아내는 아프다
    오늘 어떤 일로 교외에 나와 아내와 아들과 함께 점심을 먹었다. 차를 타고 오는 길에 아내가 “이제 내 마음이 조금 편안하다”고 했다. 이 말에 나는 안도감을 느꼈다. 3년전 갑자기 목회에 갈등이 생기고 사임할 때 가장 큰 충격을 받은 것은 아내였다. 아내는 2005년 34살에 그 교회에 부임하면서 “하나님, 이 교회에서 쫓겨나지 않게 해주세요”하고 그동안 기도해왔다고 한다. 그런데 그만 쫓겨난 것이다. 그 교회는 원로목사 이후 12년간 4명의 담임목사를 내쫓았다. 그런 교회에 남편이 부임할 때 반대하지 않고 동의했는데 속으로는 그런 기도를 하고 있었다는 것을 전혀 몰랐다. 나는 15년간 한번도 그런 기도를 한 적이 없었고 당연히 30년 정년을 그 교회에서 채우고 원로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만 담임목사 중반에 문제가 생겼고 7개월간 갈등이 있었다. 2020년 코로나가 한창 기승일 때 나는 부목사와 함께 직접 300평이 넘는 땅에 지어진 교회 옥상 방수를 재시공하고, 교회 안과 밖을 페인트칠하며 관리집사 사택과 교회 뒷마당 정리 작업을 했다. 코로나로 정상적인 목회가 어려웠기에 남는 시간을 그렇게 보냈던 것이다. 부목사와 둘이 그 공사를 다 끝낸 후 나는 교회를 사임했다. 7월말 반대자들과 만나 10월 정기노회 때 시무사면 처리하고 12월까지 사택을 비우는 조건으로 합의했다. 그런데 그들은 앞으로 목양실을 사용하지 말아 달라고 했다. 내 모든 짐이 있는데 사용하지 말아달라고 하니 기가막혔지만 동의하고 저녁 때 필요한 경우만 교회 출입을 하기로 했다. 8월부터 나는 아침에 눈을 뜨면 갈곳이 없었다. 그동안은 눈만 뜨면 교회로 갔고 휴일에도 교회에 갔는데 이제는 교회에 갈 수 가 없게 된 것이다. 그래서 교회 근처 놀이터로 가서 내부를 빙빙돌며 시간을 보냈다. 밥을 먹으면 운동 겸 해서 아침, 점심, 저녁, 비가 오면 우산을 들고 여러 시간 놀이터 운동장을 돌았다. 그러면서 기도하고 찬양하며 울고, 웃으며 8월과 9월을 보냈다. 그해에는 여름 장마가 길어 비가 많이 왔다. 어려서부터 비를 좋아한 나는 놀이터 인조 잔디를 맨발로 여러 시간 걸으며 남들이 보면 미친 사람처럼 수많은 시간을 돌고 도는 시간을 보냈다. 아마도 그러면서 나는 담임목회사임의 충격을 이겨나가고 있었던 것 같았다. 그리고 9월 이후 친구의 신문사 기자로 제2의 사역을 시작하게 됐다. 그러나 아내는 그런 시간을 갖지 못했다. 무엇보다 왜 15년간 그렇게 기도했는데 우리가 나가게 됐는지 받아들이지 못했다. 15년 목회한 나와 사모로 내조한 자신의 의미는 무엇인지 고민했다. 그리고 자신의 위치가 변한 것에 대해 받아들이기 힘들어 했다. 그동안은 사람들을 만나고, 학교 동창 친구들을 만나도 “사모”라는 이유로 다 받아들여졌다. 사모가 무슨 돈이 있냐는 동의하에 내 아내는 친구들보다 여유가 없어도 어울릴 수 있었고 당당했다. 그러나 교회를 나오기로 결정한 이후 그 친구들을 만났을 때 “너도 이제 돈 벌어야지?”하는 친구들의 말에 아내는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많이 아파했다. 사실 아내는 담임목회로 나오면서 많이 힘들어 했다. 자주 소화불량에 걸렸고 원형탈모로 시달렸다. 문제 많은 교회의 문제 많은 교인들의 텃세로 인해 고통이 심했던 것이다. 담임으로 부임했을 때 내 나인 만 39세, 아내는 34세였다. 첫 담임이고, 첫 담임 사모이니 얼마나 어리고 미숙했을까? 반면 그들은 수많은 목회자와 사모를 다룬 “선수”들 아니던가? 나는 담임목사라 함부로 하지 않았지만 여자 성도들은 달랐다. 아내를 따돌리기도하고 괴롭히기도 했다. 그러면서 아내는 많은 어려움을 당했다. 나는 아내의 잦은 소화불량과 원형탈모에 큰 신경을 쓰지 않았었다. 그러나 지나놓고 보니 중간에 사임하지 않았다면 아내는 스트레스성 암에 걸려 죽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아내는 가슴에 멍울이 생겨 순천향병원에서 유방암이 의심된다고해 조직검사를 하기도 했다. 다행히 암이 아니었다. 그래서 지금 와서는 사임한 것이 오히려 감사하다. 교회를 사임 후 내가 가장 신경 쓴 것이 아내였다. 우선 아내는 시댁으로 들어가야했다. 갈곳이 마땅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사실 며느리 입장에서 시부모님과 한 건물에서 산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런데 결혼 후 한번도 같이 산 적이 없는 시부모님과 한 건물에 살아야하니 얼마나 힘들겠는가? 어떻게 해서든 집 문제를 해결해 볼려고 했지만 받은 퇴직금으로는 그것을 감당할 수 없었다. 그래서 부모님댁으로 들어가게 됐는데 동의하고 따라준 아내가 지금도 고맙다. 아내는 사임 후 돈을 벌어야한다는 생각을 늘 하고 산다. 그동안은 나를 만나 군목으로, 부목사로, 담임으로 내가 받는 사례를 가지고 부족하지만 안정적으로 살았는데 졸지에 내가 “실업자”가 됐으니 아내의 고민이 너무나 컸다. 55세에 담임으로 다시 청빙받아 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무슨 이유가 됐든 “교회에서 쫓겨난 목사”라는 꼬리표가 붙은 목사를 어느 교회가 청빙하겠는가 말이다. 그리고 나는 교회 개척을 한번도 생각해 본적이 없다. 그래서 기존교회에 부임을 했던 것이다. 이후 기자생활을 하면서 수입은 형편 없었다. 그동안은 퇴직금을 까먹으며 살아야했다. 나는 모든 돈 관리를 처음부터 아내에게 맡겼기에 얼마나 지출이 되는지 모른다. 그러나 4인 가족이 서울에서 살려면 숨만 셔도 돈이 든다. 그러면서 아내는 재정에 대해 불안해했고 무엇인가를 해야한다는 생각으로 평소 관심이 있고 해보기도했던 한복 만드는 일을 배우게 됐다. 국가에서 무료로 가르쳐주는 곳에 등록해 2년 넘게 다니며 지금은 간간히 용돈벌이를 하고 있다. 그런 아내에게 나는 “돈은 내가 벌테니 마음 편히 지내고, 당신은 당신 하고 싶은 것만 해”라고 말한다. 아내는 예민한 편인데 만약 돈 문제로 스트레스를 받아 병이 나면 큰일이다. 가뜩이나 시댁에 얹혀사는 것도 힘든데 돈 문제로 힘들어져 병이라도 나면 큰일이라는 생각으로 나는 아내가 스트레스를 받지 않도록 하고 있다. 29년을 함께 산 아내는 너무나 귀한 여자다. 내가 세상에서 가장 잘한 일 중 하나는 아내와 결혼한 것이다. 아내를 지금도 사랑하고 앞으로도 오래오래 같이 살고 싶다. 그런데 그런 아내가 목회할 때 많은 스트레스를 받아 소화불량에 걸리고 원형탈모에 시달렸다. 그리고 사임 후에도 이 상황에 대해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으로 인해, 시댁에 얹혀 사는 것으로 인해 그리고 돈을 벌어야한다는 압박감으로 마음이 편치 못했다. 그런 아내를 보며 늘 위로하고 격려했다. 그런데 사임 3년이 되가는 오늘 아내가 “이제 내 마음이 조금 편안하다”고 하니 너무나 고마웠다. 해고 노동자들은 “해고는 살인이다”라고 주장한다. 맞는 말이다. 돈을 버는 가장이 해고되면 그 가정은 어떻게 되는가? 실제로 과거 IMF때 실직으로 인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살로 내몰렸는가? 담임목사 강제 사임은 “살인”이다. 나의 사임으로 인해 내 가족, 부모님, 친구등등 수많은 사람들이 충격을 받았다. 나와 내 아내는 죽을 고비를 넘겼다. 그래서 나는 기회가 될 때마다 나의 사임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내 마음에 남겨진 상처가 너무 크기 때문이다. 마치 노인들이 살아온 힘겨운 날들을 되네이고, 남자들이 군생활을 이야기하며, 여자들이 출산한 이야기를 되풀이 하듯이 말이다. 담임목회할 때 내 아내는 아팠다. 그리고 사임 후에도 아팠다. 그러나 3년이 지난 오늘 이제는 조금 편안하다고 말했다. 언제 또 교회에서 받았던 상처가 불현듯 불쑥 떠올라 속이 뒤집어 질지는 모르나 이제는 편안하다고 말해주니 고맙고 고맙다. 아내도 회복과 극복의 과정을 밟고 있는 것 같다. 나를 내쫓은 이후 교회가 더 나락으로 떨어져간다는 소식을 접할 때 도대체 그들은 뭔 정신으로 그 일을 저질렀는지 묻고 싶다. 그들은 담임목사를 5명이나 내쫓으면서 그것이 “살인”이라는 것을 깨닫기는 했을까? 깨닫지 못한 것 같아 두렵다. 5명을 이미 내쫓았으니 기회가 되면 앞으로도 내쫓지 않으리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좋지 않은 버릇에 물든 교인들이 불쌍하다. 어쨌든 그거야 그 교인들이 책임져야할 문제고, 내 아내를 병들게했던 교회에서 벗어나게 되어 감사하고 감사하다. 담임목회와 아내 중 선택하라면 나는 아내를 선택할 것이다. 담임목회야 나 아니어도 할 사람들이 즐비하지만 세상에 내 아내는 하나이기 때문이다. 오늘도 어려운 가운데 묵묵히 목회를 감당하는 모든 목사와 사모 그리고 자녀들의 강건을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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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0-07
  • 【내이야기】 나는 왜 정신과를 찾아 갔는가?
    “혹시 이전에 교통사고를 당한 적이 있나요?” 정신과 의사가 내게 물었다. 1992년 말이거나 1993년 초 나는 정신과를 찾아갔다. 그 당시 살던 집은 양쪽 4차선 도로 옆이었는데 어느날부터 갑자기 차 소음이 너무나 크게 들렸다. 그동안 그 집에 여러해 살면서 그런적이 없었다. 그래서 이상하다싶어 우선 정신과를 찾았던 것이다. 마땅한 진료 과목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정신과 의사는 그 질문 외에도 “혹시 가족 중에 교통사고를 당한 적이 있느냐?”는 것도 물었지만 1983년 아버지가 크게 교통사고를 당하시기도 했지만 그것은 이미 10년 전 일이었다. 결국 별다른 이유를 찾을 수 없어 간단한 약 처방을 받았지만 먹지는 않았다. 하긴 나는 소음에 예민한 편이다. 그래서 기계식 손목시계도 잘 때는 초침 소리가 들리지 않도록 멀리 두고 잤다. 벽시계도 다 무소음으로 구입했다. 그런데 아마도 1993년 4월 군목을 위한 입대를 앞두고 알게모르게 신경이 쓰여 평상시와 같은 집 옆 도로 소음이 더 크게 들렸는지 모르겠다. 이후 군입대해 경북 영천에서 3개월간 군사훈련 받을 때 조용해서 오히려 좋아했던 경험이 있었다. 우리는 흔히 정신과는 “미친”사람이 간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몸이 아프면 병원에 가는 것이 당연하듯 마음과 정신이 아프면 정신과에 가서 상담도 받고 필요하면 약물 처방도 받아야한다. 대학 때 상담과 심리에 관련된 책을 많이 봤다. 그리고 한때 상담학을 전공할려고도 했다. 왜 그랬을까? 내게 풀어야할 숙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아버지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내가 어렸을 때 아버지는 술을 드시면 어머니와 싸우는 주사를 부렸다. 4남매 앞에서도 주사를 부렸다. 그래서 아버지가 술을 드시고 오시는 날엔 집안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때로 그냥 주무시기도 했지만 대부분 애끚은 어머니에게 트집을 잡아 험악한 말과 행동을 하셨다. 이때 큰 누나는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편이었고 나는 무서워 도망갔다. 이것이 지금의 내 “회피성향”을 만들었는지 모른다. 내가 3년전 교회 문제로 교인들과 갈등할 때 옳고 그름을 떠나 7개월만에 관둔 이유도 이 내 성향 때문이다. 내가 관둔다고 했을 때 주변 사람들은 잘못한 것이 없으니 끝까지 싸우라고 했다. 아마 내가 적극적이고 과감했다면 반대편 교인들을 다 내쫓고라도 지금도 목회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내 성향이 아니다. 그래서 내가 포기 했을 때 나와 함께 반대편 교인들과 싸웠던 한 권사는 크게 실망해 나를 외면했다. 지금도 그 권사를 생각하면 미안하고 마음이 아린다. 나는 지금도 어느 싸늘한 밤 부모님의 부부싸움을 피해 도망갔던 동네 놀이터의 그 서늘함을 잊지 못한다. 그것은 자주 내 기억의 수면위로 떠오른다. 결코 치유될 수 없는 마음의 큰 상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은 목회를 그만두고 3년전부터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다. 그러면 아버지와의 사이는 어떻게 되었을까? 진작에 아버지를 용서했다. 신대원 이후인지, 결혼해서 인지 어느때부터 아버지를 이해하고 용서했다. 아버지는 아버지(내게 친할아버지)의 얼굴을 모른다. 태어나신 후 1년도 안되어 할아버지께서 병으로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아버지께는 위로 형과 누나가 한분씩 계셨다. 경기도 광주에서 태어나 생활하셨는데 청상과부가 된 할머니는 억척같이 일하셔서 땅과 소들을 갖고 계셨다. 그런데 어려운 때 간신히 속성으로 초등학교를 졸업한 아버지가 중학교를 보내달라고 하셨는데 할머니는 친척 오빠의 말을 듣고 “땅 파먹고 살면 되지 공부가 무슨 소용 있느냐?”며 중학교를 보내지 않으셨다. 이후 20살에 아버지는 형과 크게 다툰 후 무작정 서울로 상경하셨다고 들었다. 그리고 곧 중매로 결혼해 4남매를 낳으셨다. 할머니께 아들 가르칠 필요가 없다고 하신 친척은 자기 자식들은 다 교육을 시켰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그 친척 어른을 원망한다. 사람이 사람 구실 할려면 배워야하는데 왜 할머니께 아들을 교육 시키라는 말을 하지 않았던가? 그랬다면 할머니는 아버지를 교육시키셨을 것이다. 그러면서 왜 자기는 자기 자식들은 가르쳤는가? 이후 아버지의 삶은 파란만장했다. 세상 물정 모르고 할머니 땅 팔아 사업을 하면서 여러번 망해먹었다. 그럴 때 마다 할머니께도 주사를 부렸다. 머리를 방 벽에 부딪히며 “내 눈을 빼달라”고 할머니에게 소리를 질렀다. 참으로 할머니 입장에서도 기막힌 일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아버지는 배우지 못한 설음을 갖고 사셨다. 그당시 관공서에 가면 대부분이 한자인데 그것을 읽을 수 없어 어려움을 당하셨다. 그래서 결혼하시면서 어머니께 ‘아들을 낳으면 대학까지 공부를 시키고, 딸을 낳으면 고등학교까지 교육을 시키자’고 다짐하셨다. 그래서 그 다짐대로 나와 내 남동생은 대학을 나왔고, 누나들은 고등학교까지 가르쳤다. 어느날부터 나는 이에 대해 아버지께 감사하고 있다. 그런 다짐으로 나를 가르쳐 주셨기에 내가 지금 이렇게 내 역할을 하며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주사부리는 아버지가 싫었다. 그래서 초등학교 때는 아버지가 빨리 죽거나, 어머니가 아버지와 이혼하셨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사춘기가 돼서는 아버지와 목욕을 가지 않았다. 이후 아버지가 큰 교통사고를 당하셔서 1년이 넘게 병원에 계셨지만 병문안도 제대로 가지 않았다. 이 문제로 큰 누나와 싸우기도 했다. 생각해 보면 참으로 안타깝다. 아들에게 있어 아버지는 영웅이고 모델이다. 그런데 내 아버지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그래서 원망했지만 세월이 흐르니 어려서 아버지를 잃은 아버지를 이해하고 용서하게 됐다. 그리고 비록 어머니에게는 주사를 부렸지만 4남매에게는 손찌검 한번 안하신 것도 감사하고, 다짐대로 대학까지 보내주신 것도 감사했다. 그리고 초등학교 때 육성회비를 제때 못내는 아이들은 집으로 돌려보내거나 교실 앞뒤로 보내 벌을 주었는데 빌려서라도 주셔서 절대 그런 일을 당하지 않도록 해주셨던 것도 감사했다. 부목사 때 아내가 먼저 시작한 「치유상담연구원」을 다니면서 상담을 더 공부하며 더 아버지를 용서하게 됐다. 집단상담 치료과정에서 어려서 아버지를 피해 한밤에 놀이터에서 떨고 있을 때 멀리서 주님이 나를 보고 계셨다는 것을 깨닫고 나는 눈물이 났고, 지금 이 대목을 쓰면서도 뜨거운 눈물이 흐른다. 그렇다. 그당시 나는 교회를 다니고 있지 않았지만 주님은 한밤에 추위에 떨고 있던 나를 바라보고 계셨던 것이다. 그래서 초등학교 때 잠시 다니던 교회를 안 다니고 중학교 때 다시 다니면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이 너무나 좋았다. 육신의 아버지는 싫었지만 하나님 아버지는 너무나 좋았다. 그래서 그 "하늘" 아버지가 좋아 고1때 목사가 되겠다고 서원했는지도 모른다. 나는 나이를 먹어가며 또 상담과 심리에 대한 책의 도움으로 아버지를 이해하고 용서하게 됐지만 그래도 집단상담을 통해 큰 도움을 받았다. 상담치유기법에 의해 내 어린 시절로 다시 돌아가 상황을 보고, 또 아버지 입장에서 그 상황을 보면서 책에서 본 것과는 비교되지 않는 치유경험을 했다. 나처럼 “역기능가정”에서 성장하지 않았다면 축복이다. 자신 안에 “성인아이”가 없다면 다행이다. 그러나 세상에 완벽한 가정, 부모가 어디 있겠는가? 우리 몸도 완전히 100% 건강할 수 없듯 마음과 정신도 완벽히 건강하지 못하다. 그렇게 자부하는 사람이 더 위험하다고 본다. 취재가서 모처럼 한성렬 교수님의 강의를 들었다. 「치유상담연구원」에서, 또 한 교수님이 운영하는 「예상」에서 많은 유익을 얻었다. 특별히 한 교수는 목회자 가정에서 성장한 장로로서 목사들의 상황을 잘 이해하고 있다. 요즘같이 목회가 어려운 때 목회자는 번아웃되어 목회를 제대로 감당하기가 어렵다. 또한 원가족에서 생긴 문제로 인해 목회와 가정에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한 교수는 목사들도 상담받아야 한다고 외치는 것이다. 그런데 여전히 기도만하면, 성령충만만 받으면 모든 게 해결된다고 하는 “신령파”도 많이 있다. 그러나 배고프면 음식을 먹어야 배부르듯이 마음의 문제, 심리의 문제 등은 기도와 아울러 상담이 필요하다. 과거에 한번 정신과를 간 이후 나는 정신과를 간 적이 없다. 그러나 나중에 필요하면 정신과를 갈 수도 있고, 앞으로도 필요하면 더 나은 삶을 위해 상담도 받고 싶다. 상담의 유익함을 경험한 자로서 그렇다. 그러나 상담 비용은 매우 비싸다. 요즘 뜨고있는 오은영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에게 상담 받을려면 엄청난 비용을 지불해야하는데도 예약자가 차고 넘친다고 한다. 이것은 정신과를 찾고 상담 받는 것에 대한 오해와 거부감이 많이 사라졌다는 것이며, 한편으로는 그만큼 삶에 치여 마음에 상처 받은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다. 목회자도 예외일수는 없다. 내가 굳이 내 이야기를 쓰는 이유는 경험자로서 상담받는 것이 유익하다는 것과 목회자도 인간인 이상 완전하지 않기에 상담을 받아야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말해주기 위해서이다. 주변에 보면 상담이 필요한 목사들이 많이 보인다. 그런데 정작 당사자는 그 사실을 모르고 있다. 나는 여전히 다양한 책을 통해 내 자신의 마음을 알아가고 치유하며 성숙해가는 과정을 밟고 있다. 더 온전해지고 행복해지기 위해서이다. 그 길에 상담을 받았던 것이 크게 유익했다는 것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싶다. 당신에게도 상담이 필요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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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2023-10-07
  • 【논설】 또 하나의 도너월 논쟁?
    페이스북에 이국진 선배 목사가 “총신 도너월을 없애야 할까요?”란 주제의 유튜브 영상을 올렸다. 곧 총신에 도너월을 할 예정이고, 이 사실을 기사로 작성해 알렸기에 관심을 갖고 봤다. 잘 설명해 주셔서 유익했다. 다음은 유튜브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총신대 종합관 1층 로비에 도너월이 있는데 학생들 중에 이것을 철거해야한다는 주장이 있다는 것이다. 총신대는 작년에 기증자의 이름을 액수별로 구분해 기념하도록 도너월을 만들었다. 그런데 이것은 사람의 이름을 드러내는 것이기에 비성경적이라는 주장이다. 성경적인 근거로 마 6:1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하느니라”를 든다. 이국진 목사는 먼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돌아봐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인간이 드러나지 않아야한다는 주장에는 일단 박수를 보내고 싶다고 했다. 하지만 이국진 목사는 성경 전체의 가르침에 주목해야한다고 말했다. 성경은 선한 일을 행한 자를 기리고 있다. 히브리서도 믿음의 사람들을 열거하며 본 받으라고 말씀한다. 로마서에서도 바울은 선교 동역자들의 이름을 열거하며 감사하고 있다. 고전 11:8에서는 빌립보교회가 자신을 도운 것을 언급하고 있다. 고후 9:2에서도 고린도교회가 재정적 헌신을 할 것이라고 빌립보 교회에 말해 좋은 영향을 끼쳤다고 말했다. 바나바도 전 재산을 드릴 때 무명으로 드리지 않았다. 이런 일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선한 일을 하는 동기 부여가 될 수 있다. 예수님께서도 향유를 부은 여인을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 잊지 말고 기리라고 하셨다. 이어 이국진 목사는 18년간의 미국 유학 경험을 예로 들며 미국교회와 신학교에는 모든 건물과 물품에 기증자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고 했다. 이것은 그동안 교회와 신학교가 유지되기 위해 많은 분들이 헌신한 것을 잊지 않고 기억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런 행태에 대해 미국 교인들은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있다. 오히려 이국진 목사가 이 문제를 제기했을 때 그들은 “참 흥미롭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들에게는 그것이 전혀 문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사실 익명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성경적인 것이라기 보다는 유교적인 사고방식일 수 있다. 그리고 실명이든 익명이든 개인적으로 결정하면 된다. 그런데 익명으로 해도 교만의 여지는 항상 존재한다고 경고했다. 익명을 통해 자기 자신을 더 높일려는 유혹에 빠질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언제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고 있는지 자신을 돌아보는 것이 중요하다. 도너월을 부정한다면 주보에 헌금자 이름을 적는 것도 하지 말아야한다는 주장까지 나갈 수 있다. 이것은 성경적이라고 할 수 없다. 성경은 헌신자들을 기록해 그들을 본받기를 바라고 있다. 그러면서 자신도 총신대에 가서 도너월을 볼 때마다 더 많이 헌신하고 싶다는 동기부여를 받는다고 했다. 그래서 도너월이 많은 사람들에게 선한 동기로 작용했으면 좋겠다고 끝맺었다. 그렇다. 나도 어려운 형편에 도너월에 참여하고자 한 것은 학교를 오가며 도너월을 봤기 때문이다. 거기에 비어있는 많은 자리를 보고 안타까운 마음에 10만원씩 4년 적금을 부어 500만원을 낼 생각을 했던 것이다. 그리고 익명으로 하는 것도 좋겠지만 한편으로 내 이름과 아내의 이름을 새겨 결혼 30주년 기념 선물로 남기고 싶었던 것이다. 마치 남산타워에 올라가면 수많은 자물쇠를 기념물로 걸어놓은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도너월 맞은 편에는 백남조기념홀이 있다. 백남조는 누구인가? 총신대를 위해 자기 재산을 내놓은 부전교회 장로님이 아니던가! 효암 백남조 장로는 총신대 사당동 캠퍼스 조성과 대학인가 등을 위해 힘썼으며 초대 재단이사장부터 제6대 재단 이사장까지 연임하는 등 21년 동안 총신대를 위해 헌신했었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총신대 대강당을 그의 이름으로 명명한 것이다. 참으로 고마운 장로님이 아닐 수 없다. 다행히 여러 사람이 나의 이러한 마음이 담긴 기사를 보고 자기도 해보겠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러면 된 것이다. 별볼일 없는 나를 드러내봤자 누가 알아주겠는가? 모교 총신을 향한 나의 이러한 마음이 한 사람에게라도 공명을 일으켜 그가 조금이라도 학교에 후원하기를 바래서 굳이 기사로 작성했던 것이다. 기회가 되면 총신대 종합관 로비 우측에 비어있는 도너월을 가서 보기 바란다. 그러면 여러분도 나와 같은 마음이 생길 것이다. 이는 총신대학을 나오지 않았더라도 합동측 모든 목사에게 해당되며 합동측 모든 교회와 교인들에게도 해당된다. 드려진 도너월 기금은 앞으로 합동 교단을 이끌어갈 총신신대원 학생들의 전액 장학금을 위한 기금으로 쓰여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매년 68억원이 필요하다. 그에 비하면 내가 드릴 액수는 참으로 부끄러울 뿐이다. 추후 정기적으로 소액이라도 계속해서 보낼 수 있기를 다짐해 본다. 또다른 도너월 논쟁을 잘 다뤄준 이국진 박사 선배께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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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0-04
  • 【내이야기】 “형이 왜 기자하는거야?”
    “형, 형이 왜 기자하는 거야?”하고 오랜만에 만난 1년 후배가 물었다. 한국군종목사단장을 역임하고 해군 대령으로 예편해 김포에 규모있는 교회로 부임한 학교, 동아리, 군목 후배였다. 그날은 아직 친구 밑에서 취재부장이라는 직함으로 기자 생활을 하고 있을 때였다. 친구가 군선교사 모임이 있으니 가보라고 해서 갔는데 그만 후배를 만난 것이었다. 후배는 오랫동안 연락이 끊어진 동안 왜 하고 있던 담임목회를 안하고 기자를 하는지 물은 것이다. 잠시 부끄러웠다. 기자라는 신분이 초라해 보였다. 가수 현진영이 노래한 “저 여자가 내 여자여야하고, 저 가정이 내 가정이어야 하는데”같이 “순서 맡는 자리가 내 자리가 되야하고, 박수 받는 자리가 내 자리여야 하는데” 이제는 그런 사람들을 취재하는 기자가 된 것이다. 후배에게 “살다보니 그렇게 됐다”는 식으로 간단히 말하고 헤어졌다. 이후 이 후배를 한 취재현장에서 또 보게 됐다. 그러자 “형, 형 글발이 살아 있던데. 언제부터 그렇게 기사를 잘 썼어?”하고 말했다. 그리고 이때는 시간 여유가 있어 교회를 떠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를 설명했다. 만 나이 39세에 서울 시내 중심가 용산에 있는 동암교회 담임으로 부임했다. 군목 4년, 경기노회 소속 혜성교회에서 부목사 3년, 또 같은 경기노회 소속 승동교회에서 부목사 5년을 보내고 처음 지원한 곳에 설교 한번 하고 부임했다. 이 교회는 함남노회의 중심교회로서 당시 한석지 증경총회장이 원로목사로서 생존해 계셨었다. 공교롭게 내가 교육전도사로 있었던 람원교회가 같은 함남노회라 1992년 목사 안수를 동암교회에서 받았는데 13년만에 담임으로 부임한 것이다. 1992년 한석지 목사님께서 원로로 물러난 이후 이 교회는 12년간 4명의 담임목사를 이런저런 이유로 내쫓았다. 그리고 15년만에 나도 그 대열에 합류했다. 이유라면, 교회가 성장하지 않은 것에 책임을 지라는 것이며, 자기들이 싫어하니 나가라는 것이었다. 내가 부임할 때 정치부장이었던 이호현 목사님(거짓이 아닌 팩트이기에 실명을 거론한다)은 이때도 정치부장을 하고 계셨는데 교회 상황을 알리자 안타까워하시며 개입을 하셨다. 15년 전 내가 동암교회에 부임하기 전 교회를 방문했을 때 “추후 담임목사를 이유없이 내쫓는 경우 노회는 즉각 시무장로를 치리할 것이다”와 같은 대자보가 교회 벽에 붙어 있었다. 그것을 떼어 잘 보관하고 있었는데 어디에 두었는지 잊어버렸다. 전임자는 총신대 역사학과 출신으로 목회를 잘했는데 시무 투표를 1년 연기하자는 말에 그만 1년 만에 사임하게 되어 노회가 깊이 개입해 장로들을 문책할 것이라고 경고했던 것이다. 나는 목사를 습관적으로 내쫓는 이러한 교인들의 악습을 제거하기 위해 각오를 단단히 가졌다. 이호현 목사님은 이 일을 책임맡은 노회장과 부노회장에게 “만약 동암교회 교인들이 말하는 이유로 담임목사가 나가야한다면 함남노회 목사의 80-90%는 다 나가야한다”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주동이된 한 장로는 70이 넘어 시무장로가 아니고, 또 한 장로는 10여년간 교회를 떠나 있다가 잠시 연로한 어머니 때문에 다니고 있는 상태라 이들을 치리한다는 것은 아무 영향력이 없었다. 그리고 이미 4명의 담임목사를 내쫓은 경험들이 있는지라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다. 그래서 분란 7개월만에 모든 것을 내려놓게 됐다. 여기까지 말하자, 후배는 “그때 내게 연락하지, 나도 현역으로 있을 때 이상한 교인들이 있어가지고 다 법적으로 싸워 처리했는데”라고 말했다. 나는 “나는 어려서부터 싸움을 잘 못해. 내가 먼저 죽을 것 같아 그냥 사임한 거야”라고 말하자 “그렇구나, 사람마다 기질이 다르기는 하지”라고 후배가 말했다. 사임 후 이미 교계 기자를 하는 대학동기를 우연히 만나 “발이 넓을테니 갈 교회를 소개해 달라”고 하자, 그 친구가 “너가 기자가 되어 교회를 알아보라”는 말에 덜컥 기자가 됐다. 그래서 나는 자칭 “얼떨결 기자”이다. 기자가 뭔지도, 교계에 기자가 있다는 것도 몰랐던 사람이다. 그런데 이제는 빛과소금뉴스라는 언론사를 운영하고 있다. 그래도 “형, 형이 왜 목회하지 않고 기자하는거야?” 하던 후배가 “형, 형 글발이 살아 있던데. 언제부터 그렇게 기사를 잘 썼어?”하고 말해주니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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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0-04
  • 【단상】 자랑스런 합동 군목
    9318564, 군종 51기인 나의 군번이다. 많은 것들은 잘 망각하는데 이상하게 군번은 세월이 흘러도 잊혀지지 않는다. 나는 총신대에 입학한 1985년에 군종장교사관후보생 선발시험에 합격해 이후 신대원까지 마치고 1993년에 입대했다. 원래는 1992년에 입대해 군종 50기가 되야했는데 병력 수급 조절을 이유로 내 기수 대부분이 1년 대기 발령했다. 덕분에 신대원 졸업 후 목사 안수를 받고 1년간의 여유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지난 6월 1일 군목 예비역과 현역을 아우르는 ‘합동군목회’가 창립됐다. 자료집을 보니 예비역은 군종 6기부터 시작해 77기까지 소천하신 분 포함 254명이다. 현역 군목은 61명이며, 후보생은 이번에 합격한 10명을 포함 84명이다. 나는 현역시절 군입대한 아들을 위해 전화하는 부모님들의 연락을 종종 받았다. 그분들은 자기 자녀가 어려운 군생활을 잔 견디고 신앙생활을 잘 할 수 있게 해달라고 간곡히 부탁했다. 그리고 전역 후 내 큰 아들이 군에 입대했을 때 그 부모님의 마음을 절실히 실감했다. 아들이 입대했을 때 그나마 기댈 수 있는 것이 군목이었다. 그래서 군목 동기를 통해 아들이 입대한 부대의 군목 연락처를 알아내 부탁을 하기도 했다. 군에 군목이 있기에 자녀들의 신앙생활이 유지되고 또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도움을 받을 수 있다. 그런면에서 군목 제도가 있다는 것이 참으로 고마운 일이다. 과거 한 때 군목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았다. “군목도 목사냐?”하는 비아냥거리는 소리도 있었다. 그래서 영관급 군목으로 전역 이후 사역지를 못찾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더이상 그런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타교단 군목들은 어떨지 모르나 우리 합동 교단 소속 군목들은 성실하게 맡은바 소임을 다하고 있다. 그래서 군대내 평가도 좋고 이후 전역해서도 교회로 잘 청빙되고 있다. 1년 직속 후배인 예비역 대령 황00 목사는 현역 시절부터 김포에 있는 모 교회 후임으로 내정돼 전역 후 부임하고 목회를 잘 감당하고 있다. 또한 같은 후배인 최00 목사도 육군 군종실장을 역임하고 대령으로 예편해 서울에 있는 모 교회로 부임하게 된다. 그리고 많은 선후배 군목들이 전역 후 교회에 부임해 목회를 성실하게 잘 감당하고 있다. 아마도 군대에서 지휘관의 특별참모 역할을 하며 많은 부대 교회를 목회한 것이 민간 목회를 할 때 많은 도움이 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특별히 현 총신대학교 총장 박성규 박사는 군종 45기로서 목회도 성실하게 감당하고 총장이 되어 학교발전에 앞장서고 있어 모든 군목들의 자랑이 되고 있다. 예비역 군목 소령 출신으로 군목후보생들에 대한 남다른 관심과 지원으로 국방부가 실시한 올해 군종사관 후보생 모집에 총신대학이 최다의 합격자를 내는 결과를 얻었다. 최종 합격자 26명 가운데 10명의 합격자를 배출했다(학교별 합격자 수는 다음과 같다. 총신대: 10명, 장신대: 6명, 숭실대: 5명, 연세대: 1명, 고신대: 1명, 감신대: 1명, 침신대: 1명, 서울신대: 1명). 이는 학교에서 군종사관 후보생 지원자들에게 시험에 집중할 수 있도록 배려하고 지원한 덕분이라 할 수 있다. 과거 총신대학 총장을 역임했던 정성구 박사는 군종 25기이다. 박성규 총장은 20년 만에 예비역 군목 가운데 2번째로 총신대학 총장이 된 것이라 군목들은 더 기뻐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합동군목회는 작년 12월 15일 첫 모임을 갖고 뜻을 모아 지난 6월 1일 창립예배를 드렸다. 예비역, 현역 군목들이 힘을 모아 군선교 사명을 감당하고 이후 한국교회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한 예비역 군목 선배는 얼마전 “군목은 엘리트”라고 말했다. 총신대학에 들어올 정도의 실력을 갖고 있고, 또 군종사관 후보생 시험에 합격했으니 엘리트라는 것이다. 사실 군목 시절 미국 군종학교 위탁 교육을 비롯해 국내 석사과정 위탁교육을 받거나, 총신대학의 학비 지원 혜택으로 많은 군목들이 Ph.D나 Th.D학위를 받고 있다. 그동안은 그런 생각을 해본적이 없었는데 일면 맞는 말이다. 물론 엘리트 의식으로 자만하는 군목들은 없다. 군복입은 목사로서의 사명을 묵묵히 성실하게 감당하고 있을 뿐이다. 군목으로 단기를 하든 장기를 하든, 현역이든 예비역이든 군목 사역은 잊혀지지 않는 좋은 경험이다. 앞으로도 계속해서 군과 교회에서 좋은 평가를 받고 인정받는 현역과 예비역들이 되기를 바란다. 합동군목회 창립 취지문 “하나님을 위하여, 나라를 위하여” 사랑하는 선후배 동역자 목사님들의 평안을 기원합니다. 목사로서 가장 뜨겁고 순수했던 시절 군선교를 위해 헌신했던 목사님들의 수고와 헌신에 깊은 감사드립니다. 군선교 현장은 다음 세대를 세우는 황금어장이기에 군목이었다는 우리의 정체성은 시간이 흘러도 소중한 추억으로 남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지금 군선교 현장은 타종교의 거센 도전과 인권을 가장한 인본주의의 확산, 사회 전반에 만연한 반기독교 정서로 인해 큰 위기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우리 합동교단은 가장 많은 군목과 군목후보생을 보유하고 있지만 군선교 현장의 변화와 위기에 효율적으로 대응하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이러한 위기 속에서 보다 능동적이고 효과적인 군선교 사역을 감당하기 위해 합동군목회(가칭)를 조직하려고 합니다. 합동군목회는 다음과 같은 역할들을 감당하려고 합니다. 첫째, 예비역 군목들의 풍부한 경험과 자산을 군선교 현장에 유산으로 전수하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예비역과 현역의 유대를 강화함으로써 군선교 위기에 공동으로 대응하고 시대와 상황에 맞는 선교전략을 마련하는 것입니다. 둘째, 현역 군목들의 군종활동을 효과적으로 후원하는 것입니다. 현역 군목들은 선교활동, 교육활동, 교회시설 관리, 전역 후 진로에 큰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이러한 후배들에게 선배의 정신적, 물질적 후원은 현역 군목들의 자질을 향상시켜 더 역량 있는 사역자로 만들 것입니다. 셋째, 군목후보생의 역량을 개발하는 것입니다. 우리 후배들이 어렵게 군목후보생으로 선발되었지만 임관할 때까지 방치되는 것이 현실입니다. 진로에 대한 고민으로 학업을 중단하거나 교회운영, 설교에 대한 경험이 없어 군목이 되었을 때 평가절하되는 안타까운 현상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합동군목회를 통해 유기적인 후보생 관리체계가 유지된다면 군선교 현장에서 시행착오를 예방할 수 있고 유능한 군목을 배출하는데 큰 역할을 감당할 것입니다. 다음 세대가 복음화 되어야 한국교회에 미래가 있습니다. 그래서 군선교는 우리가 포기할 수 없습니다. 이 거룩한 사역에 뜨거운 열정을 갖고 있는 선후배 목사님들의 적극적인 협력과 지원을 부탁드립니다. 2023년 6월 1일 합동군목회 창립준비위원회
    • 오피니언
    • 논단
    2023-10-04
  • 공약을 실천하는 오정호 총회장
    108회 총회가 새로남교회에서 개최된 총회를 시작으로 출발했다. 이제 앞으로 1년간 오정호 총회장이 총회를 어떻게 끌고 갈지 관심있게 지켜보고 있다. 오정호 총회장은 후보 시절 정견발표에서 몇 가지를 약속했다. 그리고 총회 기간에 그 약속들을 지키는 모습을 보여줘 총대들의 신뢰를 얻고 있다. 오정호 총회장은 다음과 같이 약속했다. 1. 정책총회로 세우겠습니다. 개인의 색깔을 드러내기보다, 총회의 발전을 우선하겠습니다. 앞선 107회 총회 때는 권순웅 총회장이 진두지휘해 샬롬 부흥 운동을 이끌며 많은 세미나와 훈련을 했다. 그러나 108회 총회 때 그 세미나와 훈련은 계승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정책을 세워 나가는 정책 총회로 방향을 정했기 때문이다. 2. 금권 선거를 하지 않은 것처럼, 이후에도 결코 이권에 개입하지 않겠습니다. 뒷모습이 아름다운 좋은 직분자가 되겠습니다. 지금까지 해왔던 것처럼, 어려운 동역자를 격려하고, 힘을 주는 사역을 진행하겠습니다. 총회 임원들이 이권에 개입하지 않겠다는 것은 지난 107회기 때도 나왔던 말이다. 그러나 이에 반하는 뒷말도 돌았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실망했다. 금번 회기에는 결코 총회 임원이 이권에 개입하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3. 총회가 화합과 연합과 품격의 중심에 서도록 하겠습니다. 목회자와 모든 성도들이 긍지와 자부심을 가지도록 힘쓰겠습니다. 이번 총회에서 구 충남노회 문제, 성석교회 문제등이 해결됐다. 그리고 선관위원들을 조사처리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었지만 위원장과 심의분과장의 공개 사과로 총대들의 분노를 달래고 일단락했다. 화합과 연합의 기조를 유지하기 위한 특단의 조처라고 본다. 4. 원팀으로 임원회와 상비부와 산하기관과 손에 손잡고 나아가겠습니다. 오정호 총회장은 총회 석상에서 각 상비부가 보고할 때 관계자들을 모두 나오게해 격려하며 감사하고 총대들에게 박수를 보내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우리는 원팀이라는 것을 말과 행동으로 자주 보여줬다. 많은 보고자들이 힘을 얻고 격려를 받았다. 다음의 약속들은 앞으로 어떤 식으로 지켜나갈지 관심있게 볼 사항들이다. 5. 주일학교와 청년들의 손을 잡고 뛰겠습니다. 현존하는 미래세대를 소중한 파트너로 존중하겠습니다. 6. 장로님과 가장 조화롭게 동역의 정신을 실천하겠습니다. 7. 농어촌교회를 포함한 전국교회를 찾아가 함께 예배하고, 목회 현실을 공감하며 함께 울고, 함께 웃는 동역자로 섬기겠습니다. 앞에 약속들을 잘 지켰듯이 이 약속들 또한 잘 지켜나갈 것이라고 기대해본다. 또한 오정호 총회장은 다음과 같은 약속도 했다. 1.총회 연금 · 기금을 살리겠습니다. 총회 소속 목회자의 75%가 국민연금 및 은급재단의 활성화를 노후 문제 해결을 위한 대안으로 꼽아 주셨습니다. 우리 총회 연금은 총회 소속 목회자의 은퇴 준비에 있어 매우 유용한 수단입니다. 기금을 확충하고 연금 가입자 수를 더 확보하고 운용수익을 높여 연 · 기금을 사랑과 나눔으로 살려 은퇴 후의 최소한의 안정된 삶의 기반을 마련하겠습니다. 실제로 오정호 총회장은 총회 때 총회발전기금 중 50억원을 은급기금으로 활용하기로 결정했다. 모든 총대들의 동의하에 총회 연기금을 살리겠다는 약속을 지킨 것이다. 2. 공의로운 재판을 실현하겠습니다. 판결의 부당성, 편파성, 정치성으로 인해 승복하지 않고 결국 국가 법정으로 가서 판결효력 무효 소송으로 가는 경우가 빈번합니다. 공의로운 재판, 교회를 든든히 세우는 재판이 되도록 하겠습니다. 재판 결과를 교회와 당사자가 신뢰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재판국 운영에 많은 발전이 있었지만, 여전히 개선되어야 할 요소가 남아 있습니다. 재판국을 새롭게 하여 신뢰받는 총회가 되도록 하겠습니다. 오정호 총회장은 금번 회기부터 재판 실명제를 도입했다. 판결문에 그 재판에 관여한 사람들의 이름을 남김으로써 그 재판 결과에 책임을 지도록 한 것이다. 요즘은 1000원도 안하는 과자 봉지에도 그 과자를 검수한 사람의 이름이 찍혀있다. 품질에 책임을 지겠다는 자세이다. 재판국은 노회, 교회, 개인에게 중요한 재판을 자신의 이름을 걸고 재판해야할 것이다. 3. 대안(代案)적 목회를 모색하여 목회의 아름다운 동역을 이루겠습니다. 우리나라는 급속하게 고령사회에서 초고령사회로 진입하고 있습니다. 2017년에 이미 고령사회로 진입했고 2025년에는 65세 이상 인구가 20%가 넘는 초고령사회가 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습니다. 고령사회, 인구절벽, 다문화 가족, MZ세대로 인한 사회현상은 우리 사회의 현실이 되었습니다. MZ세대의 탈교회 현상도 우려할 만한 상황입니다. 이제는 변화된 목회환경에 맞는 대안적 목회를 펼쳐야 할 때입니다. 미래지향적인 목회적 대안을 구축함으로 내일이 기대되는 교회가 되도록 하겠습니다. 특히 우리 총회의 정체성 확립과, 목회현장을 건강하게 세우는 일에 집중하겠습니다. 총신과 손을 잡고 목양아카데미를 설치하여 목회자님들의 재교육과 보수교육을 통하여 목회자의 마음이 다시 불타오르도록 돕겠습니다. 온-오프라인 환경을 활용한 목회자의 지속적인 교육과 재충전의 기회를 제공하겠습니다. 최신화되고 전문화된 목양 콘텐츠를 개발하겠습니다. 합동교단의 신학을 밑받침하는 총신의 교수들이 실전 목회를 하고 있는 목사들에게 다양한 재교육 기회를 제공하게 될 것이다. 이를 통해 교수들은 이론의 상아탑에서 벗어날 수 있고, 목사들은 오래 전 배운 것들에 머물지 않고 새로운 것들을 배움으로 목회에 질적 성장이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과거와 달리 총회와 총신은 서로 밀접한 관계이다. 이제 다양한 방법으로 서로 상생하고 윈윈하는 좋은 때가 왔다. 4. 총회와 총신과의 관계를 최상의 수준으로 열어가겠습니다. 그동안 총신이 정치가 난무함으로 상실한 총신의 대내외적 위상을 제고하여 대한민국을 넘어 세계적 개혁신학과 신앙의 요람으로 만드는데 열정을 총동원 하겠습니다. 총회는 총신을 진정성있게 존중하고, 총신은 총회의 결정과 정책에 아멘으로 화답하도록 섬기고, 이끌겠습니다. 오정호 총회장은 총회 때 보고하러 온 화종부 이사장과 박성규 총장을 양 손으로 붙잡고 총신과 총회는 원팀이라는 것을 강조했다. 화종부 이사장은 총신이 총회의 직할신학교라는 것을 분명히 밝혔고, 박성규 총장은 교회를 살리는 불붙은 사역자를 배출해 낼 것이라고 약속했다. 이에 오정호 총회장과 총대들은 총신에 10억 지원금을 가결했다. 5. 복음진리로 우리 총회를 견고하게 세워 우리나라를 지켜내겠습니다. 민족복음화와 세계 선교를 견인하겠습니다. 반성경, 반인륜적인 포괄적 차별금지법과 인권을 빙자한 악법 제정 시도와 문화를 빙자한 성혁명의 가치혼란을 척결하겠습니다. 우리 사회를 뒤흔드는 악성 이단은 물론 무신론적 가치관과 교회에 적대적이며 공격적인 세력의 도전에 대해 단호하게 맞서겠습니다. 교회의 가치를 훼손하고 예배와 전도의 자유를 침해하는 공정과 상식에 어긋난 모든 시도를 무력화시킴으로 한국교회를 지키고 믿음의 세대 계승을 이루는 거룩한 사역을 한국교회 의 모든 교단과 연합기관과 굳게 손잡고 실행하겠습니다. 우리 모두의 자랑인 GMS를 응원하고 격려하는 사역을 힘있게 감당하겠습니다. 그동안도 오정호 총회장은 악법폐지운동과 동성애 반대운동 등에 앞장서 왔다. 이제는 합동 교단을 대표하는 총회장이라는 위치에서 더 강력하게 한국교회와 사회를 지키는 운동을 전개해 나갈 것이라고 기대한다. 오정호 목사는 후보 공약에서 지지와 응원을 간곡히 부탁했다. 개혁신학의 영적 전우애를 간직하신 목사님! 건강한 교회를 세우기 위하여 평생 달려오신 장로님! 지금까지 한결같은 마음으로 저를 도와주신 것처럼 계속 지지해주시고 응원해 주시기를 정중하게 요청 드립니다. 믿어주시고 지지해주셔서 선거혁명을 조금이나마 이룰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정신으로 초지일관 달려 가겠습니다. 목사 오정호는 예수님의 신실한 제자다운 삶의 열매로 증거하기를 늘 기도하며 힘쓰겠습니다. 오정호 총회장은 총회 기간에 여러 약속들을 지켜나가는 모습을 보였다. 남은 약속도 잘 지켜 나가기를 모든 총대와 한국교회가 기대하며 지켜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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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논단
    2023-10-03
  • 108회 총회의 순항과 연착륙을 기대한다
    비행기가 무사히 착륙했다. 인천공항을 출발해 4시간 30분만에 베트남 다낭공항에 도착했다. 우리가 탄 비행기는 베트남 항공으로 기장이 베트남 사람이었는데 이륙과 착륙이 남다르게 부드러웠다. 108회 총회가 다행히도 목요일 오후에 파회했다. 그 다음날 베트남 다낭으로 결혼기념 여행을 가기로 준비를 했기에 총회가 금요일까지 할까봐 신경이 쓰였다. 금요일 오전, 이전과 달리 수많은 사람들이 출국하는 바람에 대기 시간이 길어 가까스로 비행기에 탑승했다. 그리고 모처럼만의 해외여행을 즐겼다. 비행기는 3단계로 운영된다. 이륙과 운항 그리고 착륙. 무거운 비행기가 이륙하기 위해서는 제일 많이 연료가 소비된다. 긴 활주로를 달려 탄력을 받아야하기에 노면의 충격을 가장 많이 받을 때이다. 이륙 이후에는 일정한 고도에 도달하기 위해 40도 정도로 기울어 가파르게 상승한다. 이때 제대로 상승하지 못하면 추락할 수 있다. 비행기는 온 힘을 다해 궤도에 도착하고자 용을 쓴다. 이후 정상 궤도에 오르면 구름 위를 떠 가듯이 운항한다. 가끔 난기류로 비행기가 흔들리기는 하지만 미리 예측 되기에 승객들에게 안내해 별 문제없이 운항은 계속된다. 이때 기장은 자동항법으로 전환하고 이륙 때 생긴 긴장의 끈을 늦춘다. 기내에서는 쉬는 사람, 자는 사람, 대화하는 사람, 책 읽는 사람 등등 다양한 활동이 이루어진다. 그리고 때가 되면 기내식이 제공되기도 한다. 그러다보면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하고 착륙하게 된다. 착륙은 너무나 중요하다. 비행기 운항의 마지막 단계이기 때문이다. 착륙을 제대로 못하면 이륙도, 운항도 아무 소용없다. 이번 비행기 기장의 착륙 실력은 대단했다. 지면에 비행기 바퀴가 부딪히는 충격도 느끼지 못했는데 착륙을 했던 것이다. 숨가빴던 108회 총회를 모두 취재 후 다음 날 비행기를 타면서 총회를 생각했다. 우선 108회 총회를 개회해 무사히 파회까지 했기에 108회 총회는 이륙에 성공했다. 4일간 진행된 총회를 통해 오정호 총회장은 108회 총회를 이륙시키고 정상 궤도에 진입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몇몇 시끄러운 문제들이 있었지만 뚝심으로 그 문제를 처리했다. 그에 대해 문제 제기를 하는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무난하게 총회를 진행했다고 본다. 만약 총회가 시끄러웠다면 오정호 총회장의 108회 총회 이륙에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다. 일부 사람들은 총회 진행에 문제가 있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찬반 논쟁이 있을 때는 양측이 의견을 개진할 시간을 주고 표결에 붙여 문제를 해결했다. 그래서 마지막 날 정치부 헌의안 전부를 해결하고 파회할 수 있었다. 초기에는 회의 진행이 느슨해 이러다가는 금요일날 끝나 베트남 여행에 차질이 나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한낱 기우에 지나지 않았다. 이제 오정호 총회장의 108회 총회는 정상 궤도에 올랐다. 앞으로 내년 총회 때까지 순항하기를 바란다. 1년여 기간에 여러 난기류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오정호 총회장은 “이권에 개입하지 않고 바르게 하겠다”고 공언했다. 총회 임원들이 이권에 개입하면 반드시 문제가 생긴다. 그래서 이것을 알기에 오정호 총회장은 절대 이권에 개입하지 않겠다고 수차례 밝힐 것이다. 그리고 최근 기독신문에 나온 한 대담에서 이렇게 밝혔다. ▲교단 목회자와 성도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부탁드립니다. 제가 총회장에 추대된다고 하니 아내가 후대까지 존경받을 수 있는 총회장이 되도록 힘쓰라고 조언하더군요. 그때 제가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저는 취임할 때보다 이임할 때 칭찬받고 싶습니다. 총회장이 되었다고 바뀌는 게 아니라, 초지일관 처음 다짐을 유지하고 스스로 점검하고 자중하면서 직분을 수행하겠습니다. 많이 도와주시길 바랍니다. ▲이임할 때 돌아보며 흐뭇해할 수 있는 총회장님이 되길 바라고, 새로남교회 성도들이 자랑스러워할 수 있는 총회장님이 되리라고 믿습니다. 후대까지 존경받고, 이임할 때 칭찬 받기 위해서는 그리고 무엇보다 한평생 목회하고 있는 새로남 교우들에게 자랑이 되기 위해서는 임기 1년 동안 많은 일들을 바르게 처리해야한다. 아무 사심없이 공명정대하게 일 처리를 한다면 분명 좋은 결과를 얻을 것이다. 그리고 1년간의 총회 운항을 끝내고 안전하게 착륙한다면 틀림없이 박수 받으며 퇴임하는 총회장이 될 것이다. 그러한 총회장이 되야 총회와 한국교회가 잘 될 수 있다. 108회 총회의 안전한 운항과 부르러운 연착륙을 108회 총회 기장인 오정호 총회장에게 기대하고 부탁하는 바이다.
    • 오피니언
    • 논단
    2023-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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