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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토크】 가수 장기하의 깨달음
    가수 장기하를 좋아한다. 노래가 재미있기 때문이다. 그의 대중적인 첫 노래 “싸구려 커피”, “달이 떠오른다, 가자” 등은 신선했다. 읽을 책들을 검색하다 보니 그가 몇 년 전에 쓴 것이 있어 대출해서 봤다. 부담없이 재미있게 읽었다. 첫 장인 ‘안경과 왼손’은 주어진 환경을 담담히 받아들이고 돌아본 후 감사하는 내용이다. 읽어볼만해 전문을 소개한다. 안경과 왼손 얼마 전 안경을 잃어버렸다. 매우 아끼는 안경이었다. 아니, 아낀다는 표현으로도 모자란다. 이삼 년 전 그 안경을 산 이후로는 오직 그것만 써왔던 것이다. 그런데 어느날 아침 갑자기 사라져버렸다. 있을 만한 곳을 전부 다 여러 번씩 싹싹 뒤져봤지만 찾지 못했다. 결국 예전에 썼던 다른 안경을 쓰고 집을 나설 수밖에 없었다. 약속 장소로 가는 길, 이삼 일 전에 읽었던 무라카미 하루키 에세이의 한 구절을 떠올렸다. "형체 있는 것은 아무리 애써도 언젠가, 어디선가 사라져 없어지는 법이다. 그것이 사람이건 물건이건." 마음을 털어버렸다. 그래, 그 안경이랑은 여기 까지였나보지 뭐. 나는 국소성 이긴장증이라는 병을 가지고 있다. 해괴해 보이는 이름이지만 의미는 간단하다. '국소성'이란 특정 부위에 나타남을, '이'는 이상함을, '긴장'은 말 그대로 긴장을 뜻한다. 한마디로 특정 부위가 이상하게 긴장된다는 얘기다. 이 병명에서 가장 중요한 글자는 '이'다. '이'자가 들어간 병을 선고받는다는 것은 말하자면 이런 상황이다. 몸이 안 좋다. 병원을 찾아가 묻는다. "선생님, 저 왜 아픈건가요?" 의사가 답한다. "그러게요. 이상하네요." 그렇다. 내 병은 원인도 치료법도 알려지지 않은 희귀병이다. 이 병이 처음 생긴 것은 대략 십오년 전쯤으로, 군악대 시험을 준비하던 시절이었다. 당시 나는 '눈뜨고코베인'이라는 록밴드에서 드러머로 활동하고 있었다. 가수가 되겠다는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저 드럼 하나로 먹고살 수 있을 정도로 연주를 잘하는 사람, 즉 프로 드러머가 되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그 외의 진로는 상상조차 하지 않았다. 학교 공부는 최소한으로 하고 드럼 연습과 밴드 활동 위주로 생활했다. 그러다보니 군복무를 시작도 하지 않은 채 대학 오 년 차를 맞았고, 더이상은 입대를 미룰 수 없게 되었다. 내 선택은 당연히 군악대였다. 군대에 있는 동안 손발이 녹슬면 큰일 아닌가. 일반 부대는 절대로 안 된다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군악대는 록 연주만 잘한다고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클래식 타악, 특히 행진곡풍의 연주에 능통해야 했다. 자신은 있었다. 이미 연습이라면 많이 해온 터였기 때문이다. 좀 다른 장르의 연주라고 해서 못 해낼 것은 없다고 생각했고, 시험을 대비해 맹연습에 돌입했다. 이삼 개월쯤 지났을 때 복병이 나타났다. 연습만 하려고 하면 내 의지와 관계없이 왼손이 꽉 쥐이는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드럼 연주의 기본은 그립이다. 누가 툭 치면 놓쳐버릴 듯 살며시 스틱을 잡고 부드러운 움직임을 만들어야 빠르고 정확한 연주를 할 수 있다. 그런데 자꾸 나도 모르게 스틱을 힘껏 잡게 되고 그것을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이 반복되다보니 미쳐버릴 노릇이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연습하다 너무 답답하고 화가 나서 소리를 지르며 스틱을 집어던진 것도 한두 번이 아니다. 결국 군악대는 포기했다. 치료법도 알 수 없고 상태가 호전될 기미도 보이지 않으니 어쩔 수가 없었다. 더욱 중요한 것은, 프로 드러머의 꿈도 함께 버렸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게 그리 절망스러운 단념은 아니었다. 내 생각의 흐름은 이랬다. '하긴 군악대의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 연주하는 게, 내가 멋있는 음악을 하는 데는 오히려 해가 될지도 몰라. 멋있는 음악이라... 그래, 생각해보면 프로 드러머가 되는 것 자체가 멋있는 음악을 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 수도 있겠네. 연주로 먹고살려면 돈 되는 음악을 해야 하는데, 내가 지금 멋있다고 생각하는 우리나라 음악 중에 돈 되는 게 하나라도 있나? 그리고 나는 우리 밴드 음악이 제일 멋있는데 그걸로 돈을 벌어본 적도 없잖아? 애초에 음악으로 돈을 벌겠다는 생각 자체가 문제였어!' 나는 홀가분한 기분으로 프로 연주자가 아닌, 돈은 안 돼도 '멋있는 음악을 하는 뮤지션이 되겠다고 마음 먹었다. 그리고 일반 부대에 입대했다. 제대한 후 나는 그 '멋있는' 뮤지션이 되는 일을 실행에 옮겼다. 파트타임 일자리를 구한 상태에서, 내가 싱어송라이터로서 이끄는 새 밴드 '장기하와 얼굴들'을 시작한 것이다. 최소한의 돈과 최대한의 시간을 확보해 자유롭게 음악활동을 하겠다는 생각이었다. 곡은 군복무중 짬짬이 만들어뒀었다. 물론 큰 인기를 얻으리라는 기대는 전혀 없이 만든 노래들이었다. 눈앞에 있는 관객들만은 확실히 재밌게 해주겠다는 생각이 다였다. 그런데 터졌다. 소위 '대박'이었다. 활동을 시작하고 일 년이 지나기도 전에 전 국민적 히트곡을 보유한 밴드가 된 것이다. 모든 것이 거짓말처럼 순조로웠다. 한 가지만 빼고 말이다. 왼손에 힘이 들어가는 증상이 기타를 연주할 때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처음에 이 증상이 신기했던 건 유독 드럼 연주를 할 때만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다른 일을 할 때는 아무런 불편이 없었다. 물론 기타 연주를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군복무중에도 생활관에 비치된 통기타를 치며 노래를 만들었고, '장기하와 얼굴들' 첫 싱글을 녹음할 때도 기타는 내가 다쳤으며, 밴드 활동 초기에는 공연을 할 때도 절반 정도의 곡에서는 내가 기타를 잡았다. 그런데 급격하게 치솟는 인기를 실감하며 공연을 이어가던 어느 날, 기타를 연주할 때도 왼손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결국 기타도 포기했다. 이번 단념은 군악대 때와는 달리 좀 절망스러웠다. 공연에서 기타를 연주하지 않기로 했음은 물론이고, 평소에 혼자 치는 것도 거의 못하게 됐다. 늘 자유자재로 하던 기본적인 플레이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게 되니 짜증이 치밀었다. 자연히 심심풀이로 기타를 잡는 일이 점점 줄어들었다. 중학교 때 이후로 그때까지 줄곧 기타는 나의 가장 좋은 취미 중 하나였다. 집에 있을 때면 침대에 누워 기타를 배에 얹고 아무렇게나 퉁겼다. 그러면서 멜로디를 이리저리 흥얼거리다보면 이따금씩 노래가 만들어지곤 했다. 그런 일상이 하루아침에 송두리째 날아가버렸다. 게다가 이번에는 증상이 연주에만 국한돼 나타난 것이 아니라 일상 전반으로 퍼져나갔다. 곧 타자를 치는 것도, 단추를 잠그는 것도, 왼손을 써야 하는 어떠한 일도 예전만큼 쉽게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로부터 십 년이 흘렀다. 그런데 그 십 년을 돌이켜보면, 이 병이 내게 나쁜 일만은 아니었다. 사실 병에게 엎드려 절하고 싶을 지경이다. 프로 드러머의 길을 포기함으로써 결국 '장기하와 얼굴들'을 시작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기타 연주를 포기한 것 역시 내게 두 가지 커다란 선물을 가져다주었기 때문이다. 첫째는 새 기타리스트 하세가와 요헤이 형을 영입한 것, 둘째는 내가 무대에서 악기 없이 자유롭게 퍼포먼스를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두 가지가 없었다면 '장기하와 얼굴들’의 활동이 내게 가져다준 희열은 말도 안 되게 줄어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세월이 지나면서 증상도 아주 조금씩 좋아져 이제는 거의 다 나았다. 지금도 약간의 느낌이 남아 있긴 하지만, 일상에서 그것을 의식하게 되는 일은 드물다. 기타와 드럼도 취미 정도로는 다시 연주할 수 있게 되었다. 그간 연습을 안 했으니 남들 앞에 뽐낼 만한 연주력은 당연히 아니지만, 사실 이제는 그런 능력이 필요하지도 않다. 싱어송라이터로서 좋은 연주자들과 함께할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다. 무엇보다, 증상이 가장 심했을 때를 떠 올리면 집에서 혼자 재밌게 연주할 수 있는 것만 해도 감지덕지다. 지금도 이 병의 원인은 의학적으로 밝혀지지 않은 듯하고, 물론 나도 아직 정확히 어떤 일이 벌어진 것인지 알지 못한다. 다만 이렇게 추측할 뿐이다. 내가 나 스스로에게 과도한 것을 강요했고, 몸이 그만두라는 신호를 보냈다. 나는 그것을 무시하지 않고 충분히 쉬게 해주었으며, 그랬더니 시간을 두고 차츰 회복되었다. "형체 있는 것은 아무리 애써도 언젠가, 어디선가 사라져 없어지는 법이다. 그것이 사람이건 물건이건? 그리고 형체가 없긴 하지만 능력도 마찬가지다. 어제까지 당연히 할 수 있었던 일을 오늘 갑자기 못하게 될 수도 있다. 나는 그럴 때마다 무척 괴롭긴 했지만, 결국 다 순순히 받아들였다. 이 능력은 여기까지인가보다, 하고. 그리고 새로운 상황에 맞춰 새로운 계획을 세웠다. 그러고 나면 그전에는 상상도 못했던 다른 길이 열리곤 했던 것이다. 안경은 며칠 뒤에 소파 밑에서 찾았다. 전날 술에 취해 소파에서 잠들었고, 안경을 아무렇게나 내팽개치는 과정에서 소파 아래로 들어간 모양이었다. 거실에서 잠드는 일이 거의 없다보니 그곳을 찾아볼 생각은 하지 못했던 것이다. 먼지 구덩이 속에 얌전히 놓인 안경을 발견한 순간, 그야말로 날아갈 듯한 기분이었다. 아무리 많이 아끼는 안경이라 해도, 물건 하나로 그렇게까지 기쁠 수 있다싶었다. 모르긴 해도, 깨끗이 포기했었기 때문일 거다(pp.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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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소개
    2024-05-02
  • 【단상】 부총회장 선거, 축제가 싸움판으로
    지난 4월 25일 오전 11시 참좋은교회(이윤찬 목사 시무)에서 대구교직자협의회 제31회 정기총회가 있었다. 이승희 증경총회장의 개회 예배 설교 후 합심기도 시간에 경북교직자협의회 대표회장 강전우 목사가 ‘총회와 영남지역을 위해서’ 기도할 때 부총회장 자격 문제로 소송이 붙은 총회를 염려하며 간절히 기도했다. 소송 관계자인 부총회장 후보 민찬기 목사나 장봉생 목사의 마음은 어떨지 모르나 총회 회관에서 먼 경상도 지역에서도 현 사태를 매우 안타깝게 여기며 탄식으로 기도하고 있다. 아마 이 사태를 지켜보는 대부분의 총대들의 마음도 편치는 않을 것이라고 본다. 한 사람의 부총회장이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과 물질이 필요하다. 노회와 협의회, 총회 등에서 오래 봉사하며 자신을 알려야한다. 이에 많은 시간이 든다. 그리고 물질로도 많이 섬겨야한다. 그래서 아무나 부총회장이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면에서 시간과 물질로 섬겨온 부총회장 후보들은 모두 총회의 귀한 자산이다. 바람직한 것은 단독 후보로 추대되는 것이지만 어쩔 수 없이 경선이 될 수도 있다. 그러다보면 친했던 사이도 서먹해지거나 “원수” 사이가 될 수 있다. 그래서 곽선희 목사는 운동을 할 때 서로 마주보는 것은 하지 않는다고 했다. 탁구나 테니스나 서로 마주보고 하다보면 감정 싸움이 될 수 있기에 자기는 각자 실력으로 승부하는 볼링을 한다고 말한 것을 들은 적이 있다. 일리 있는 말이다. 오래 세월 총회를 섬겨온 민찬기 목사나 장봉생 목사는 현재 서로를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내리 누르고 이겨야할 경쟁 상대로 보지 않겠는가 말이다. 이런 면에서 선거란 참으로 잔인한 것인지도 모른다. 민찬기 목사 소속 임원회가 민찬기 목사의 후보 자격에 대해 물었을 때 장봉생 목사 소속 노회도 임시노회를 열어 부총회장 출마 자격에 대해 선관위에 질의했다. 선관위가 이 문제를 다룰 때 투표에 처음에는 7:7 동수가 나왔다. 이어 재투표하여 7:8로 세 번 출마는 안된다는 결론을 내렸다. 다 지나간 일이지만 의견이 7대 7로 나뉘었다는 것은 선관위원 내에서도 의견이 팽팽했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 문제를 바로 처리할 것이 아니라 좀더 시간 여유를 두고 처리했다면 좋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있다. 증경총회장단의 의견을 듣는다든지, 실행위원회에서 의견을 구했다면 모양세는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속전속결로 재투표해 7:8로 세 번 출마 불가로 정했다. 그러자 민찬기 목사측에서는 이 문제에 대해 소송을 했고, 소속 노회에서 부총회장 후보로 추천을 받았다. 세상 법정이 이 문제를 어떻게 처리할지는 두고보면 된다. 그런데 성경은 교회 문제를 세상 법정에 끌고가는 것을 경고하고 있다. [고전6:1-7] “1 너희 중에 누가 다른 이와 더불어 다툼이 있는데 구태여 불의한 자들 앞에서 고발하고 성도 앞에서 하지 아니하느냐 2 성도가 세상을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세상도 너희에게 판단을 받겠거든 지극히 작은 일 판단하기를 감당하지 못하겠느냐 3 우리가 천사를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그러하거든 하물며 세상 일이랴 4 그런즉 너희가 세상 사건이 있을 때에 교회에서 경히 여김을 받는 자들을 세우느냐 5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 하여 이 말을 하노니 너희 가운데 그 형제간의 일을 판단할 만한 지혜 있는 자가 이같이 하나도 없느냐 6 형제가 형제와 더불어 고발할 뿐더러 믿지 아니하는 자들 앞에서 하느냐 7 너희가 피차 고발함으로 너희 가운데 이미 뚜렷한 허물이 있나니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 새로이 총회를 섬길 일꾼을 뽑는 총회 선거가 축제가 아니라 세상의 조롱거리가 되고, 사법의 판결을 받아야하는 싸움판이 된 것이 참으로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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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논단
    2024-04-26
  • 취재 기자를 내쫓는 노회들...무엇이 두려운가?
    봄 정기노회가 열리는 계절이다. 서울에서 먼 지방의 몇몇 노회를 취재갔다. 그 중 2개 노회에서 “내쫓김”을 당했다. 이리노회는 북일교회 문제로 회원 호명 때부터 시끄러웠다. 결국 노회원들간에 고성이 오갔다. 이런 가운데 취재하고 있는 기자들에게 나가달라고 "거칠게" 요구했다. 결국 쫓겨날 수 밖에 없었다. 충청노회도 전 총신대총장 김영우 목사 피소건에 대해 다루며 기자들에게 나가달라고 “험악하게” 요구했다. 결국 본당 중이층으로 쫓겨갈 수 밖에 없었다. 기자는 사실을 취재하고 알리기 위해 그 현장에 가 있는 것이다. 북일교회 문제는 대부분의 총회원들이 알고 있을만큼 큰 이슈이다. 당연히 기자들이 가서 취재할 수 밖에 없는 사항이다. 기자는 총회원들의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 대신해서 그 현장에 간 것이다. 그런데 무슨 이유로 기자들을 내쫓는 것인가? 그것이 과연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겠는가? 기자가 보면 안될만큼 감춰야할 문제가 있는가? 사실을 사실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문제해결에 도움이 될 수 있다. 문제 없는 노회는 취재간 기자들을 반기며 좋게 기사를 써서 노회를 잘 홍보해 달라고 부탁한다. 기자로서도 기분좋은 일이다. 반면 문제 있는 노회는 기자를 내쫓는다. 마치 잡상인 취급을 한다. 부득이 기자를 내보낼 필요가 있다면 “정중하게” 요청했으면 한다. 같은 합동측 목사한테 그렇게 함부로 해서 되겠는가? 앞으로도 “문제 있는” 이리노회와 충청노회 “사태 추이”에 대해 예의주시할 것이다.
    • 오피니언
    • 칼럼
    2024-04-03
  • 【북토크】 편협한 꼰대가 되지는 말아야 할텐데....
    자기 생각에 갇혀 사는 사람은 편협한 사람이다. 이런 사람하고는 대화도 되지 않는다. 열린 사고가 필요하다. 남과 어울리기 위해서는 개방해야한다. 죽고 사는 진리의 문제가 아니라면 “그럴수도 있구나”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그러나 그것이 그리 쉽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으로 알고 있다. 편협함 공부를 하면서 문득 깨달은 건, 법률 외에 삶의 모든 기준들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시작한다는 것이다. 그 기준들은 절대불변의 진리가 아니어서 주변사람에게 영향을 받아 생성되기도 하고 타인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세워지기도 한다. 또 삶의 경험이 켜켜이 쌓이면서 조금씩 견고해지고 구체적으로 변하기도 한다. 그렇게 여러 기준들을 만들어 옳고 그름을 평가하는 일은 어쨌거나 사람이 하는 것이란 점에서 언제나 주관적이다. 하지만 우리는 종종 너무 쉽게 각자가 세운 판단 기준이 ‘정답’이라고 착각한다. 사람은 쉽게 타성에 젖으니 자신의 판단 기준과 결론이 절대적인 단 하나의 정답이라 믿으며 자기 우물 안에서 살아간다. 하지만 그 기준에 정답이란 없기에 자신이 바르고 타당한 기준을 세워가며 나이 먹고 있다는 생각도 사실 편협한 ‘착각’에 가깝다. 나이를 먹는 일이 무서운 건 나도 모르는 새 나의 판단이 바르고 타당한 정답이라고 생각하게 되기 때문이다. 특히 어떤 조직에 잘 적응한다는 것은 곧 그 곳의 기준을 잘 습득해 체화한다는 것이기도 하다. 공동체에서 튀는 사람이 되기 싫어서 공동체의 평가 기준을 답습하기도 하고, 나는 다르다 여기며 살아도 어느 날 문득 돌아보면 그 밥에 그 나물처럼 사고하게 되는 것이 현실이다. 자신의 존재를 정당화하기 위해 쉼 없이 자신의 옳고 그름을 고집하기도 하고 자신의 결핍된 부분을 숨기기 위해 고집스러운 기준으로 타인을 깎아 내리기도 한다. 입만 열면 세상 곳곳에 대한 불만을 쏟아 내는 투덜이 스머프 같은 사람이 있었다(입만 열면 남의 흉을 보는 사람도 있었는데 그 결이랑은 또 다르다). ‘이건 이래서 구리고, 저건 저래서 구리고’, ‘그런 사고방식이 말이 되느냐. 말은 그렇지만 속내는 이런 것 아니겠느냐’하는 식으로 언제나 자신 밖의 사람과 상황에 대해 평가만 늘어놓는 사람이었다. 초반에는 그가 솔직하고 유쾌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이 어떤 것. 누군가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는 지 밝히는 것은 꽤나 용기가 필요한 일이고 그 취향과 기준을 고백하는 것이 자신의 약점이 될 수도 있는 데 저렇게 쿨하게 늘어놓다니! 성격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대화의 주된 발언이 자기 자신 밖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한 평가이다 보니 들을수록 의아한 지점이 생겼다. 당신에게 평가할 자격이 있는지, 타인이 당신에게 평가 받아야 할 이유가 있는지, 평가할 자유가 있다고 해도 당신의 평가를 궁금해 하는 사람이 있는지 하는 것이었다. 심지어 그의 평가를 들으면 들을수록 그에 대한 인상 또한 '예리하고 유쾌한 사람이다' 라기 보다 ‘어딘가 모르게 편협하다’, ‘편협함을 자랑하는 태도가 참 멍청하다’까지 이어졌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난 뒤 몇몇 단정적인 말들에서 그가 타인에 대한 평가를 거침없이 내뱉을 수 있었던 까닭을 눈치 첼 수 있었다. 그 모든 것은 자신의 말이 정답이라고 여겨서 가능했던 것 이었다. 자기 말이 정답인 사람 곁에 다른 의견들은 오답처리 되기 마련이다. 그리고 자신의 의견이 오답이 되 는 대화를 좋아라할 사람은 없다. 그렇게 그는 자기주장이 뚜렷한 사람에서 편협한 사람으로 점차 다르게 기억 됐다. 중학생 때 유독 적이 없었던 한 친구가 떠오른다. 말수가 적어서, 자기주장이 강하지 않아서, 호불호가 없어서가 아니라 ‘편견’이 없어서 두루두루 모두와 잘 지내는 친구였다. 그는 어떤 친구들에게도 늘 같은 태도로 화답했다. 편견, 그러니까 그 편협함은 끊임없이 나를 위해 타인을 배척하는 수단이 된다. 진정한 세월의 지혜는 오히려 '편견 없음'에 가까울 거라 생각한다. 타인을 판단하는 가장 괜찮은 기준은 포용이 아닐까? 타인과 자신에 대해 사람은 언제나 ‘알 수 없음’ 한 줌은 가지고 사니까. 견고한 기준은 편협한 생각의 방증일지도 모른다(pp. 178-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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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31
  • 【북토크】 自害가 생존전략이라니....
    나는 상담, 심리 관련 책도 좋아한다. 대학때부터 지금까지 기회 되는대로 읽고 있다. 우연히 보게 된 이 책에서 “자해도 생존방법”이라는 것에 작은 충격을 받았다. 오죽하면 살기 위해 자기 몸에 해를 주는 것인가? 길지 않은 인생을 사는데도 참 힘들다. 세상에 불쌍한 사람들이 참 많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리고 이들과도 더불어 살려면 무엇을 해야하는가 고민하게 된다. 자해하는 게 문제라고 말하며 부모님 권유로 상담실에 온 고등학생 내담자를 만났습니다. 고등학교에 입학한 이후 사소한 일로 친구들과 사이가 멀어졌고 왕따를 당하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학교 가는 게 힘들어서 지각과 결석을 반복하며 적응이 더 어려워졌다고 합니다. 친구들이 자신에 대해 안 좋게 말할까 봐 계속 예민한 상태로 있다 보니 피곤하고, 수업에 집중하기 어려워서 거의 책상에 엎드려 있는다고 합니다. 반대로 온라인에서 만난 학교 밖 친구들과는 관계를 잘 맺고 인기가 많다고 합니다. 웃으면서 인기가 많다고 얘기 하다가 이내 걱정하는 얼굴로, 사실 인기가 많은 이유는 친구들을 잃을까 봐 엄청나게 신경을 쓰면서 친구들 비위를 다 맞춰주기 때문이라고 털어놓았습니다. 학교에서는 왕따니까 밖에서 힘들게 만든 친구들이라도 잃지 않기 위해 친구들이 부르면 거절하지 못하고 모든 모임에 나가고 친구들 말을 들어주고 웃어주느라 에너지가 다 빠진다고 했습니다. 기분이 좋지 않은 날도 즐거운 것처럼 친구들과 놀고, 막상 집에 오면 허무하고 외로운 마음이 든다고 합니다. 혹시나 말실수해서 친구들이 자신을 싫어하게 될까 봐 매번 친구들에게 연락해서 자신이 잘못한 게 없는지 확인 한다고 합니다. 마음이 초조하고 불안한 상태로 가득 차 있다가 가족들의 말 한마디에 갑자기 화를 냅니다. 우울한 기분, 친구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공허한 느낌, 불안감이 뒤섞이면서 마음이 터질 것 같은 상태가 된다고 합니다. 그럴 때 자해를 하게 된다고, 어쩔 수 없이 하게 된다고, 나지막이 말 합니다. 물속에 오래 있을 때 가슴이 답답해지고 숨이 안 쉬어지다가 수면 위로 올라오면 숨이 크게 내쉬어지는 것처럼, 자해하고 나면 숨이 쉬어지고 살 것 같은 기분이 든다고 많은 내담자가 말합니다. 자해는 화가 나는 마음을 표현하는 방법이자 자신이 얼마나 힘든지 다른 사람에게 알리는 수단입니다. 아무런 감각이나 감정을 느끼지 못할 때 무언가를 느끼도록 도와주기도 하고, 사람들에게 도움이 필요하다고 요청하는 방법입니다. ‘자해는 나쁘다, 절대 해서는 안 된다’라는 말이 먼저 튀어나올 수도 있지만, 자해는 누군가에게는 필요한 생존전략이 됩니다(pp. 71-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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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소개
    2024-03-31
  • 【북토크】 문학을 통해 배운 것들
    이 책의 저자는 문학을 통해 배운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세상을 바라볼 때 시선의 위치와 방향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시야가 달라진다는 것,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자리에 서보는 일, 들리지 않는 목소리를 듣고 보이지 않는 존재를 보는 일, 한 편의 소설을 읽고 내 안의 무언가가 완전히 바뀌어버리는 일 또한 가능하다는 것, 인간은 끊임없이 이야기를 만들고 쓰면서 다른 세계를 상상하고 다른 사람이 되는 일을 꿈꾸면서도 끝내 자기 자신일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 이 모든 것을 나는 문학을 통해 배웠으며 이 경험이 나를 바꿨다는, 어쩌면 너무나도 문학도 같은 이야기다” 나는 이 글에 전적으로 동감한다. 그래서 지금도 이 “재미”에 열심히 책을 읽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 책은 직접 문학 작품을 다루지는 않는다. 저자는 넥플릭스, 왓챠, 웨이브 등 여러 OTT에 있는 드라마나 영화를 소재로 이 책 한권을 썼다. 물론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작품도 많다. 내공이 보통이 아니라는 느낌을 갖는다. 나는 이런 글을 쓸 실력이 없어 감탄하면서 봤다. 유홍준 교수는 그의 역작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서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을 했다. 모르면 보이지 않는다. 기회가 되면 이 책의 저자처럼 영화나 드라마에 대한 글도 써보고 싶다. 그럴려면 아들이 가입해 놨지만 안 보고 있는 넥플릭스를 열심히 이용해야 할 것 같다. 할 일이 또 하나 늘었다. 이 또한 새로운 도전이니 기대가 된다. 국어국문학을 전공했다. 서른 줄에 접어든 이후로는 이야기할 일이 거의 없긴 하지만, 피치 못할 이유로 전공을 언급해야 하는 상황이 되면 괜히 머쓱해진다. 직업이 작가이기 때문이다. 작가인데 국어국문학과를 나왔다고 하면 "전공을 살리셨구나!" 같은 말을 듣게 되고 만다. 전공을 살린 것일까? 괜히 골똘해졌다가는 국어학과 국문학의 차이라든가, '과연 어디까지가 문학인가'라는 질문이라든가,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해서 작가가 되면 전공을 살린 것인가 아닌가 같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게 되기 때문에, "그런가요?" 하고 대답한 뒤 얼른 소재를 바꾸는 것이 좋다. 그러지 않으면 "국문과가 굶는 과라던데... " 하는 식의 무례한 농담을 듣게 되어버리고 만다. 이 농담을 들을 때면 미소 비슷한 것도 지을 수 없기 때문에 재빠른 소재 전환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다시 한번 곰곰이 생각해봐도 국문학을 전공했기 때문에 작가가 된 것 같지는 않다. 인과관계가 없는 일로 보인다. 학과 공부가 나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거나 쓸모없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문학이 정말 재미있었기 때문에 열심히 공부했고, 그래서 상당히 많은 영향을 받았다. 문학 작품을 읽고, 문학을 배우고, 듣고, 공부하며 보낸 20대 초반의 몇 년간, 내가 세상을 보는 법은 달라졌다. 이 시절의 경험이 내 삶 전반에 어떤 영향을 미쳤고 또 나의 어떤 부분을 바꿨는지를 전부 말하자면 너무 긴 이야기가 될 것이다. 줄여서 말해보자면, 나는 문학을 통해 이런 것들을 배웠다. 세상을 바라볼 때 시선의 위치와 방향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시야가 달라진다는 것,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자리에 서보는 일, 들리지 않는 목소리를 듣고 보이지 않는 존재를 보는 일, 한 편의 소설을 읽고 내 안의 무언가가 완전히 바뀌어버리는 일 또한 가능하다는 것, 인간은 끊임없이 이야기를 만들고 쓰면서 다른 세계를 상상하고 다른 사람이 되는 일을 꿈꾸면서도 끝내 자기 자신일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 이 모든 것을 나는 문학을 통해 배웠으며 이 경험이 나를 바꿨다는, 어쩌면 너무나도 문학도 같은 이야기다(pp. 139-141).
    • 오피니언
    • 책소개
    2024-03-28

실시간 오피니언 기사

  • 【단상】 잊어버린 과거는 영원히 반복된다
    2004년 한 여성 작가가 샌프란시스코 근처에서 자살한다. 그 여성은 미국 국적의 중국인 2세 아이리스 장이다. 그녀는 1967년 미국에서 태어나 대학에서 저널리즘을 공부하고, 어린 시절부터 들었던 일본인들이 난징 대학살에 대한 기록물 『The Rape of Nanking』(역서, 역사는 누구의 편에 서는가-난징 대학살, 그 야만적 신실의 기록)을 1997년에 써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러나 이후 일본 우익세력으로부터 협박과 위협에 정신적 압박감이 상당해 치료를 받았고 이를 이겨내지 못해 남편과 아이를 두고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어떤 책을 읽다가 이 책을 소개하는 것을 보고 책을 읽게 됐다. 이 책은 1937년 중일전쟁 당시 일본군이 난징에 진입하며 난징 주변과 시내로 도망친 중국군 잔당을 수색한다는 명분으로 6주 동안 중국군 포로들과 난징 시민들을 무참히 학살한 사건을 다룬다. 이것은 지금까지도 중일관계에 심대한 악영향을 끼치는 사건 중 하나로 학살의 정확한 규모는 불명확하지만, 전후 일부 유골 매립지를 근거로 든 연구결과가 수만명 단위 이하로 내려가는 경우는 드문 것으로 볼 때 최소 수만 명 이상이 희생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극동국제재판 판결에 따르면 최소가 12만명이며 최대 추정숫자는 약 35만명 정도이다. 일본군들은 무력한 패잔병들과 양민들을 무참하게 살육하고 강간했다. 그들은 포로들을 먹일 것이 없다는 핑계로 다 도륙했다. 또한 중국인들은 돼지와 다를바가 없다고 생각하고 거침없이 칼로 베고 생매장하거나 불에 산채로 태워 죽였다. 그리고 여자는 어린아이나 노인을 불문하고 보는 족족 대낮에도 강간하거나 윤간하고 잔인하게 살해했다. 이때 당시 그곳에 있었던 선량한 외국인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더 많은 살육이 벌어졌을 것이다. 그런데 전후 일본은 이에 대한 책임을 지거나 사과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일은 날조요 조작이라고 주장하며 외면하고 있다. 오랫동안 학교를 다녔지만 난징대학살에 대해 제대로 배운 기억이 없다. 아니면 잊어버렸는지 모르겠다. 이 책을 보면서 다시 한번 일본 군국주의의 실체를 보았다. 그리고 왜 중국이 일본에 대해 적대적인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과거에 자신들에게 저지른 악행을 반성하거나 배상하지 않는데 어떻게 우호관계를 맺을 수 있겠는가? 같은 전범 국가이면서 여전히 이스라엘에게 반성하는 독일과 너무나 다른 행보이다. 그래서 일본은 비록 경제적으로는 선진국이지만 국민성이나 도덕성면에서는 결코 선진국이라 할 수 없는 국가이다. 최근 일본이 원전 사고 발생 12년 만에 후쿠시마 발전소에서 처리한 방사성 오염수를 태평양에 방류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중국은 일본산 어류의 수입을 전면 금지했다. 반면 대한민국은 대통령부터 나서서 아무 문제가 없다고 말하고 국민의힘 의원들도 너나 없이 바닷물을 마시고 회를 먹는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중국이나 우리나라나 다 일본에게 말할 수 없는 피해를 당했다. 우리는 36년간 지배를 당했다. 정신대로 끌려가고 전쟁터로 끌려가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당했다. 그런데 사과하지 않는 일본에게 저자세로 나가는 것이 과연 자주 국가인가를 의심케하며 자존심을 상하게 한다. 일본은 아시아 여러 국가를 번영으로 이끌기 위해 침략 전쟁을 벌였다는 말도 안되는 소리를 지금도 하고 있다. 하긴 우리나라 사람 가운데도 일본 때문에 근대화가 됐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으니 말문이 막힌다. 자신의 목숨과 바꾼 한 작가의 유작을 읽으며 인간이 도대체 얼마나 잔인해 질 수 있으며, 전쟁의 광기가 인간 속에 있는 악마의 근성을 어떻게 드러내는 가를 보게 된다. 그리고 반성없이 여전히 그때의 과거를 그리워하며 군비증강에 혈안이 되어 있는 일본과 이를 방조하는 미국 그리고 그 장단에 춤추는 현 정부를 보며 암담함을 느낀다.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 과거를 되풀이하며, 역사를 무시하는 사람은 역사의 희생물이 되기 싶다”는 책에 있는 경고가 요즘 일본과의 관계를 볼 때 섬뜩하다.
    • 오피니언
    • 논단
    2023-10-28
  • 【단상】 부품비 2200원, 기술료 107000원
    18년된 차에 작은 문제들이 발생하고 있다. 일 없는 날에 장안동을 들려 12만원에 마후라를 교체하고, 동네 현대차 블루핸즈를 찾아 윈도우를 수리했다. 언제부턴가 차 유리창 내리는 것이 됐다 안됐다했다. 108회 총회 후 운전석과 조수석에 내린 유리창이 올라가지 않아 다음날 베트남 다낭에 갈 때 차를 인천공항 주차장에 주차하면서 빗물 들어가지 말라고 비닐로 막고 다녀온 코미디를 연출했다. 혹시나 하고 했는데 정말 그 주간에 비가 왔었다. 그러다 어쩌다 다시 작동해 유리창을 올렸는데 그 후 더 이상 작동을 안해 할 수 없이 블루핸즈를 찾은 것이다. 엔지니어가 운전석 아래를 뜯고 점검하더니 원인을 알아내고 문제를 해결했다. 그리고 내민 청구서를 보고 기절할 뻔 했다. 차 유리창을 조절하는 파워 스위치에 전기를 전달하는 릴레이가 고장났는데 부품값은 2,200원, 기술료는 107,000원, 세금 10,900원으로 총 120,120이 나왔다. 부품값의 60배라니 참 어이가 없다. 그래도 어떡하겠는가? 울며 겨자먹기로 결제했다. 결국, 내가 할 수 없어 전문가에게 의뢰했기에 그 값을 지불할 수 밖에 없었다. 내가 할 수 있었다면 단돈 2천원으로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을 것이다. 내가 가입한 자동차 동호회에서 수리 정보를 찾아 봤으나 얻을 수 없었다. 그래서 직원이 수리를 할 때 곁에서 유심히 지켜봤다. 이후 똑같은 문제가 생기면 고쳐볼 요령으로 한 것이다. 비싼 수업료를 내고 한 수 배웠다는 생각으로 쓰린 속을 달랬다. 이게 바로 전문가의 값어치라는 것이다. 그 직원은 차 수리의 전문가이다. 그래서 2천원짜리 부품으로 60배의 이익을 남겼다. 이런 기술을 갖기 위해 많은 시간 노력했기에 전문가의 기술비는 그만큼 비싸게 책정된 것 같다. 그러면 나는 무엇의 전문가인가? 이제는 신문사를 운영하기에 운영의 전문가, 취재의 전문가, 기사의 전문가가 되야한다. 그를 통해 나의 가치와 몸값을 올려야하는 것이다.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는 도전이 됐다. 한동안 60배의 놀라운 이익을 낸 이 일이 기억에서 떠나지 않을 것 같다. 성경에도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에 대한 말씀이 있기는 하다. 이렇게 현대자동차가 성경의 원리를 구현하고 있다니.... 하긴 오너가 신자가 아님에도 현대자동차에는 GRACE란 이름의 승합차도 있었고, 지금은 GENESIS(창세기)란 브랜드도 갖고 있다. 그래서 요즘 목사들이 이 차를 많이 타는 것 같다. 나는 신약 바울서신으로 Th.M을 했기에 이 차는 패스.
    • 오피니언
    • 칼럼
    2023-10-28
  • 【기자생각】 전국장로회연합회 수석부회장 선거
    “국민들은 자신의 수준에 맞는 지도자를 선택한다”는 말이 있다. 투표를 통해서 지도자를 선택한다는 전제하에서 하는 말이다. 얼마 남지 않은 11월 23일, 영광대교회에서 열리는 전국장로회연합회(회장 정채혁 장로) 정기총회가 경선으로 후끈 달아올라 보인다. 차기 회장이 되는 수석부회장에 김경환 장로와 홍석환 장로가 경쟁하고 있다. 들리는 말에 회장인 정채혁 장로와 차기 회장인 오광춘 장로가 지지하는 후보가 다르다고 한다. 두 후보간 경선에 물러나는 권력과 신생 권력이 뒤엉킨 상황이다. 총대들은 두 경쟁 후보와 아울러 두 후보를 지지하는 세력도 신경쓰며 투표해야할 상황으로 보인다. 만약 정 장로가 지지하는 후보가 되면 신임회장이 될 오 장로에게 처음부터 데미지가 주어진 것처럼 될 것으로 보이고, 정 장로가 지지하는 후보가 되지 않으면 정 장로의 회장직에 대한 평가처럼 비칠수도 있다. 경선은 과열되지 않고 선을 넘지 않으면 유익한 점이 많다. 경선에 이기기 위해 더 노력할 것이고, 총대 한 사람 한 사람이 얼마나 소중하다는 것을 깨달으며, 표를 얻기 위해 후보 간 좋은 공약을 내놓게 된다. 이를 통해 그 단체는 발전할 기회를 갖게 된다. 얼마남지 않는 기간에 흑색선전 등과 같은 혼탁한 양상 없이 선의의 경쟁을 통해 좋은 후보가 당선 되기를 바래본다. 다시한번 “국민들은 자신의 수준에 맞는 지도자를 선택한다”는 말을 덧붙이고 싶다. 관심 갖고 지켜보고 있다.
    • 오피니언
    • 칼럼
    2023-10-27
  • 【내이야기】 나의 산티아고, 뒷동산
    한 때 산티아고 순례길 열풍이 불었다. 인터넷을 찾아보니, 산티아고(Santiago)는 예수의 열두 제자 중 한 사람인 ‘성(聖) 야고보’의 스페인식 이름이다. 야고보가 헤롯 왕에게 참수되면서 열두 제자 중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는데, 그 유해가 안치된 산티아고 대성당까지 이어지는 여러 갈래의 길이 산티아고 순례길이다. 현대에 이르러 파울로 코엘료가 1987년도에 이 길을 걷고 <순례자>라는 제목의 책을 출간해 대성공을 거두면서 종교인뿐 아니라 세계인의 관심을 끌게 되었다. 종교인들만의 순례길에서 일반인들의 사색의 길, 자기 성찰의 길로 유명해진 것이다. 내게는 나만의 산티아고가 있다. 바로 집 뒤에 있는 오패산이다. 3년전 교회를 사임하고 부모님과 함께 살게 되면서 참 많이 찾았던 곳이다. 3년전 12월 말에 이사를 와서 한 겨울 저녁에 밥을 먹고 소화를 시킬겸해서 뒷동산을 오르내렸다. 작년에 데크 산책로가 둘래길로 만들어져 이제는 편하게 정해진 길을 왔다갔다하면 되지만 그때는 동산을 오르락 내리락하며 1시간 가량 산에 있었다. 그러면서 이생각 저생각을 하거나, 기도를 하거나하며 시간을 보냈다. 취재할 곳이 없어 쉴 때는 점심과 저녁 식사 후 뒷동산을 찾았다. 그러면서 나무를 보고 흐르는 작은 계곡물을 보며 또 새소리를 듣고 꽃을 보면서 마음의 평안을 찾았다. 목회를 하는 동안 ‘나는 자연인이다’란 TV프로를 즐겨봤다. 많은 사람들이 사람들을 떠나 산으로, 외딴 섬으로 가서 사는 것을 보는 것이 그 당시에 위로가 됐다. 한편으로 유튜브를 통해 UFC격투기를 즐겨봤다. 아마 목회 스트레스를 그렇게 풀었던 것 같다. 그러면 지금은 어떤가? 목회를 그만둔 후로 ‘나는 자연인이다’와 격투기에 관심이 없다. 어느날 이런 변화를 깨닫고 내 자신도 깜짝 놀랐다. 아마도 수없이 뒷동산을 찾아 오르내리면서 내 마음이 안정과 평화를 찾았던 것 같다. 지금도 저녁 식사 후에는 거의 대부분 뒷동산을 오른다. 데크 길을 따라 왕복하면 약 40여분이 걸린다. 그 시간 동안 이생각 저생각을 하고, 기도도 하면서 나만의 시간을 갖는다. 낮 시간에는 주민들이 여럿 보이지만 밤 시간에는 나 밖에 없다. 혼자 그 길을 걸을 때의 느낌은 가보지는 않았지만 산티아고 순례길과 비슷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한다. 이 동산을 중심으로 삼면을 이동하며 오랜 세월 살아오고 있다. 그래서 나는 이 동산이 친숙하다. 어렸을 때는 동산길에 눈이 내리면 비닐 비료 부대를 들고 올라가 눈썰매를 탔고, 아이들과 함께 산길을 헤쳐 정상에 올라가기도 했다. 지금은 그때와 모습이 많이 변해 동산 아래쪽에는 연립주택들이 많이 생겼지만 동산 정상은 예전 모습이 많이 남아있다. 동네 주변도 많이 변했지만 어렸을 때의 기억이 여전하다. 이제는 복개되어 차가 다니고 있지만 하수물이 흐르던 개천이 있었다는 것을 알고, 초등학교 때 늘 가던 옛 만화방이 있던 자리도 기억에 선명하다. 부모님은 이 근처에서 50여년을 살고 계시며 나도 수십년의 세월을 이곳에서 살았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뒷동산이 있다. 오늘도 저녁 시간에 뒷동산을 다녀왔다. 역시 혼자였다. 집에서 1분만 걸으면 바로 뒷동산에 갈 수 있으니 너무나 좋다. 특별한 일이 없으면 이곳에서 오래 살 것 같다. 어렸을 때는 놀이터로, 나이들어서는 나의 근심과 걱정을 받아주는 뒷동산이야말로 나의 산티아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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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2023-10-26
  • 【잡글】 155만원의 출혈
    아이폰 15 프로를 샀다. 현금 155만원이 들었다. 내가 타고 있는 18년된 트라제 디젤보다 비싸다. 현재 사용하는 것은 아이폰 미니 12인데 메모리 용량이 64g이고 카메라 선명도가 떨어져 새로 구입한 것이다. 얼마전부터 “빛과소금뉴스방송”이라는 유튜브를 본격적으로 병행하고 있다. 취재 현장에서 좋은 강의, 설교 등등을 글로 적어 기사로 만드는 것도 좋은데 이왕이면 동영상으로 남겨야하겠다는 생각이 들어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메모리 64g는 너무 용량이 적어 다른 앱들을 깔고 나니 가용할 수 있는 것이 적어 긴 촬영이 어렵다. 그리고 카메라 성능도 떨어진다. 그래서 고민을 거듭하다가 더 나은 영상 촬영을 위해 신제품 아이폰 15 프로 256g를 구입했다. 정가는 170인데 자급제로 이용하기 위해 통신사 없이 중고나라에서 개인 직거래로 미개봉 제품을 구입했다. 열어보니 “역시”하는 말이 나온다. 아직은 중국 알리 익스프레스에서 미리 주문한 케이스, 액정보호필림이 오지 않아 사용하지 못하고 있다. 주문한 것들이 오면 좀 더 나은 동영상과 사진이 나올 것 같아 기대가 된다. 155만원이라는 거금을 들였지만 좀 더 나은 영상이 나올 수 있다면 감수할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아직 유튜브 구독자 수가 적으니 이 글을 보시는 분들은 “빛과소금뉴스방송”을 구독해 주시면 감사하겠다. 찾기 편하시라고 아래에 동영상을 하나 첨부해 드린다. 클릭하시면 제 채널로 올 수 있으니 많은 관심을 부탁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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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0-25
  • 【기자생각】 총회회관 1층 공실 사태 장기화....그 대책은?
    지난 9월 13일 "총회회관 1층 인테리어 감사예배"가 있었다. 그리고 한 달 반이 되가고 있다. 그런데 여전히 1층은 휑하다. 카페 장소에는 의자 등 집기가 들어왔지만 업체가 선정되지 않았고, 역사관은 시작도 하지 않고 있다. 총회에 갈 때마다 휑한 모습에 알아보니 카페는 월세가 높아 신청자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처음에는 월 500만원을 예상했다가 계속 내렸지만 여전히 아무도 응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과연 월세가 얼마로 내려가야 업자가 나설지 궁금하다. 또한 카페에서 얼마의 수입이 날지 궁금하다. 일반인을 상대로 하기 위해 별도의 출입구를 냈다고 하지만 과연 일반인들이 총회건물에 들어와 줄지도 미지수다. 이 사태가 장기화 될수록 결국 총회 재정에 문제가 될 수 있는데 뾰족한 수가 있는지나 모르겠다. 일각에서는 왜 식당을 내보냈는지 모르겠다는 소리도 나온다. 어차피 식당에서 커피나 기타 음료를 취급했기 때문이다. 이제 총회에 와서 저렴하게 밥 먹을 식당이 없어 인근의 비싼 식당에서 해결해야한다는 불만의 소리가 있다. 한편 역사관도 이전에 비해 공간이 협소해 과연 제대로 역사를 담아낼지 의문이다. 새로남교회(오정호 목사 시무)에서 2013년 새로남기독학교를 개교할 때 건물 1층을 과감하게 학생들은 물론이고 만인을 위한 기독교역사전시관으로 꾸몄다. 그 규모와 전시물은 어디에 내놔도 손색이 없을 정도이다. 그에 비하면 총회회관 한쪽 절반에 마련된 공간은 매우 협소하다. 이 작은 공간에 무엇을 전시할지 궁금하다. 옛 것을 없애고 새 것을 만들 때는 명분이 있어야한다. 그리고 새 것을 만들었는데 그 내용물이 부실하면 왜 옛 것을 없앴느냐하는 비난을 피할 수 없다. 그것이 현재 총회회관 1층의 현실이다. 1층의 휑한 공실 사태가 언제 끝날지 그리고 또 얼마의 비용이 추가될지 관심 가지고 지켜보고 있다. 이 사태가 장기활 될수록 이 일을 주도한 사람들에 대한 책임론이 재기되고, 의혹이 커질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총회유지재단이 공개 입찰을 통해 디자인업체 두로와 3억9780만원에 계약을 맺고 공사를 했다는 것을 기록으로 남겨둔다. 총회회관 1층을 생각하면 걱정을 떨쳐 버릴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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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0-25
  • 【단상】 목사와 자가용...탐욕에 브레이크를 밟아라
    목사들의 자가용이 점점 비싸지고 있다. 자동차 업체들이 더 비싼 고급 승용차들을 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그랜져가 최상위였다. 이제는 제네시스가 최상위이다. 이에따라 목사들 중에 제네시스를 타는 경우가 많이 늘었다. 몇 년전 나는 충격을 받았다. 어느 모임에 취재를 갔는데 아는 목사가 제네시스를 끌고 왔다. 그가 경기 북부 지역에 개척한 교회는 아직도 은행 융자를 갚고 있는 형편이며 교세도 약했다. 그런데 제네시스라니! 내가 시험에 들었다. 과거 목회할 때 한 여집사가 시험에 들었다. 목양실에 커피 원두를 산 것이 이유였다. 목양실을 찾는 사람들에게 원두 커피를 대접하고 싶어 2-3만원에 구입한 것이다. 실제로 나는 커피를 좋아하지 않는다. 늦은 시간에 먹으면 잠을 설치기도 한다. 그런데 거기에 시험이 들었다. 그 당시 남편은 돈벌이가 시원치 않았다. 여집사가 벌어 먹고 살았다. 그래서 그게 시험거리가 된 것이다. 알겠는가? 교인들은 상상을 초월한 것에 시험이 든다. 이후 원두 커피 기계와 커피 원두를 교회 식당으로 옮겨 버렸다. 통상 교인수가 늘면 그에 비례해 목사 사례비와 판공비가 늘고 자가용이 좋아진다. 우리는 이것을 당연시한다. 교회도 자본주의 논리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누군가는 말했다. “한국에는 대형교회와 대형교회를 갈망하는 두 종류의 교회가 있다”고. 교회 규모에 따라 목회자 대접이 달라지니 그럴 수 밖에 없나보다. 세상 기업과 교회의 차이를 구분할 수 없다. 소위 ‘부흥’한 교회는 자신에 대한 대접이 달라지기를 원하고 심지어 요구한다. 그 안에는 사례비나 판공비 그리고 자동차가 포함되어 있다. 대령에서 장군이 되면 30가지가 달라진다고 한다. 작은 교회에서 큰 교회가 되면 몇 가지나 달라지는지는 내가 큰 교회를 이루지 못해 모르겠다. 담임으로 부임했을 때 차량구입을 했다. 교회에 차량이 아예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승용차로 구하지 않고 트라제 디젤 9인승으로 구입했다. 내 자가용 용도이기에 승합차를 구하는 것이 거시기해서 다인승차를 구입한 것이다. 그리고 주일에는 교회 공용으로 차를 사용했다. 15년 담임목회를 정리하고 나올 때 15년된 차를 받아 왔다. 어차피 폐차할 것인데 임시당회장이 교회에 요구한 내 퇴직 후 사례 3개월치에서 1개월치를 제하는 것으로 퉁쳐 내게 넘겨줬다. 그 액수는 240만원이었는데 15년된 디젤차를 참 잘도 팔아넘긴 셈이다. 교회에 분쟁이 나면 교인들이 이렇게 치사해질 수 있다는 것을 미리 알아두기 바란다. 나는 지금도 3년간 그 차를 이용하고 있다. 잘 해야 일주일에 한번 이용한다. 그래서 18년된 차가 15만키로정도 밖에 안된다. 오늘 마후라를 교체하러 장안평에 들려 거금 12만원을 지출했다. 앞으로 70세까지는 운행하고 싶은데 모르겠다. 아내는 차가 낡아 바꾸자고 하는데 굳이 잘 굴러가는 차를 바꾸는데 돈을 지출하고 싶지는 않다. 내 선배는 서울 시내 중심의 유서 깊은 교회를 담임하는데 담임목사용으로 매번 소나타를 사주고 있다. 교회 규모에 맞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그것이 장로들의 “소신”이라면 받아들여야지 어떻게 하겠는가? 자기들은 외제차를 타도 담임목사는 소처럼 일하라고 소나타만 사주니 그 교회도 참 알만하다. 그러나 그 선배는 “미국에 있을 때 좋은 차 많이 타봐서 차에 대해 별 미련이 없다”고 하고 잘 끌고 다닌다. 교회 분수에 맞게 차를 골라야한다. 작은 교회라면 그 수준에 맞는 차를 타야 손가락질 안 받는다. 그리고 큰 교회라고해도 한 단계 아래 등급의 차를 타면 겸손하다고 “존경”받는다. 분수에 맞지 않는 차를 타서 입에 오르내리고, 교인들을 시험들게 하고 싶다면 그렇게 하는 것이야 본인의 자유이지만 왜 바울이 2천년 전에 “그러므로 만일 음식이 내 형제를 실족하게 한다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하지 않게 하리라(고전 8:13)”고 했는지 잠시 묵상해 보기를 바란다. “그러므로 만일 내 차가 내 형제를 실족하게 한다면 나는 영원히 고급 승용차를 타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하지 않게 하리라” 이렇게 바꾸어 묵상해 볼 수 있지 않을까? 목사는 자신의 욕망을 제어하는 브레이크가 좋아야한다. 덜 가지고 덜 누릴수록 교인들이 존경한다는 단순한 사실을 잊지 말아야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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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0-24
  • 【북토크】국가란 무엇인가? 안중근 가족의 비극을 돌아보며
    김 훈 작가가 쓴 『하얼빈』을 읽었다. 몇 권 읽은 김 작가의 소설과 수필은 늘 담백하다. 그런데 이 책은 더욱 담백했다. 일체 간을 하지 않은 음식을 먹는 느낌을 내내 지울 수 없었다. 우리가 민족의 영웅으로 대하는 안중근에 대해 이렇게 담백하게 쓸 수 있는 것 또한 작가의 역량이 대단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책을 읽으며 안중근의 세 자녀의 삶에 대해 알게 됐다. 그에게는 세 자녀가 있었다. 첫째 아들 분도는 안중근이 천주교 신부로 키워 달라고 유언했으나 일곱 살에 누군가 건네준 독이든 과자를 먹고 죽었다. 둘째이자 딸인 현생은 이후 남동생 준생과 함께 이토 히로부미 사후 그를 위해 마련된 사찰 박문사를 찾아 “아버지의 죄를 사죄한다”고 말했다. 친일 변절자로 살다 대구 효성여대(대구가톨릭대 전신)에서 불문학 교수를 지냈으며 57세 때 서울의 단칸방에서 고혈압으로 죽었다. 남편 황일청 또한 친일배신자로 낙인찍혀 1945년 12월에 광복군에게 암살된다. 귀국행 배를 타려고 가족들과 함께 충칭에서 상하이로 내려오던 중 여관에서 총을 맞고 숨진다. 셋째 준생은 둘째 아들로 30세까지 일제의 감시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지냈다. 일제는 그를 회유해 이토의 차남 이토 분키치에게 아버지 안중근의 죄를 사죄하고 함께 박문사를 참배하고 분향하게했다. 이에 김구는 광복 직후 중경에서 장개석을 만났을 때 안준생을 교수형에 처해달라고 요구했다. 일본은 상하이의 안준생에게 유럽계 세관장이 살던 관사를 내줬다. 그들에게 영혼을 내준 댓가로 난데없는 호강을 누렸지만 오래 가진 못했다. 1945년 일제 패망 이후 상하이까지 들어온 중국 공산당을 피해 홍콩으로 이주한다. 그는 아내 정옥녀와 아들 안웅호와 안연호를 미국으로 보낸 뒤 1951년 한국전쟁 와중의 국내로 들어온다. 그가 왜 가족 없이 혼자 귀국했는지 이유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자신이 한 친일행위가 해방된 국가에서 단죄되는 상황을 아내와 자식에게 부담지우지 않으려는 마음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안준생은 부산 피난지에서 폐결핵을 앓다가 1952년 숨진다. 그의 아들 안웅호는 미국에서 의박사가 됐다. 안준생은 아들에 대해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내 아들은 의사예요. 미국에서 제법 성공했고 주위의 존경과 사랑을 받으며 잘 살고 있어요. 내가 사람들의 경멸을 받으며 모은 돈으로 가족을 부양한 덕분에 사람답게 살게 된 거죠. 우습지 않나요. 영웅의 아들은 개같은 삶을 살고 변절자의 자식은 다시 성공했죠" 안중근은 국가의 영웅이지만 가정에게는 재앙이 됐다. 일제의 감시로 가족은 비참하게 살았고 자식들은 아버지를 부정하고 변절의 길을 걷게 됐다. 이에 대해 쉽게 비판할 수 없을 것이다. 국가가, 독립투쟁 단체가, 아니면 개인이 안중근의 가족을 돌봤더라면 자식들이 변절의 길을 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김훈 작가는 안중근이 사후에 철저하게 버려졌다는 것을 책 말미에 무심하게 기록하고 있다. 안정근, 안공근이 감옥 문 앞에 와서 시신을 돌려달라고 요구했다. 구리하라가 옥리를 보내서 ‘불가하다’라고 통보했다. 안정근, 안공근은 땅을 치며 울었다. 옥리들이 안중근의 몸을 마차에 싣고 가서 감옥 공동묘지에 묻었다. 하관 때 가는 비가 내렸고, 문상객은 없었다(책 277p). 3월 25일에 대한제국 황제 순종은 서른일곱 살의 생일을 맞았다. 아침에 황제는 덕수궁으로 가서 태황제 고종에게 인사를 드렸다. 오후에는 창덕궁으로 돌아와서 인정전에서 생일 하례를 받았다. 소네 통감과 통감부 고위 관리, 내각 대신들, 각국 영사들이 입궐해서 황제의 만수무강과 대한제국의 번영을 기원했다. 황제는 귀빈들에게 음식을 베풀어서 답례했고 시종무관들과 근위대 장교들에게는 따로 자리를 마련해주었다. 산수유와 매화가 잇달아 피어서 창덕궁의 봄은 화사했다. 후원 숲에서 뻐꾸기가 울었다(책 278p). 3월 27일은 부활절이었다. 조선 대목구장 뮈텔 주교는 서울명동대성당에서 부활 대축일 미사를 드렸다. 여러 나라의 외교관들과 통감부 관리들과 서양인 기술자들과 신자들이 참례했다. 봄의 햇살이 비쳐서 스테인드글라스의 빛이 영롱했다. 팔십여명이 영성체했고 예비 신자들이 영세 받고 입교했다(책 278p). 3월 29일에 관동도독부는 안중근 사건의 수사와 재판과 사형집행에 이르는 과정에서 애쓴 관리들에게 직급에 따라서 상여금을 내렸다(책 279p). 3월 26일 저녁에 빌렘은 안중근의 사형이 집행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27일 아침에 빌렘이 신자들을 소집했다. 안중근의 문중 사람들과 마을의 신자들이 청계동성당에 모였다. 빌렘은 여순감옥에서 안중근을 만나 고해성사를 베푼 일을 마을 신자들에게 말했다(책 280p). 나라의 독립을 위해 자신의 한 목숨을 내놓고 가정을 포기했는데 세상은 이에 대해 무심하다. 현재도 우리는 친일 잔재를 청산하지 못했고, 독립군의 후손들은 비참하게 살고 친일세력은 여전히 호의호식하는 것을 보면 이 나라가 유지되는 것이 기적이다. 그래서 내 두 아들에게 “다시 일제가 우리를 지배하는 일이 벌어지면 괜히 독립운동하지 말고 친일해라”고 말해야하는 이 현실이 웃어야할지 울어야할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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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0-24
  • 【내생각】 1천만원 뇌물 사건..천지지지 여지아지
    천지지지 여지아지(天知地知 汝知我知)는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네가 알고, 내가 안다’는 뜻이다. 선관위 1000만원 뇌물수수사건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를 전망이다. 성남노회는 진상을 밝혀달라고 성명서를 내고 총회 임원회에 진정서를 접수시켰다. 오정호 총회장은 총회 석상에서 “이 사건에 비하인드 스토리가 많다”고 하면서 배광식 선관위원장과 이종철 심의분과장의 공개 사과로 일단락 지을려고 했다. 그러나 여진이 계속되고 있다. 기독신문은 인터넷판 10월 15일자 사설로 ‘이유 있는 성남노회 성명’이란 사설을 실어 “총회임원회가 성남노회의 이번 성명을 반드시 짚고 가야 할 사안으로 여기고 간과하지 않길 바란다”고 말했다. 이 사건의 진실은 경찰서에 사건을 접수하거나 혹은 임원회가 조사처리위원회를 구성해 관련자를 대면시키면 곧 드러날 수 있다. 그러면 누가 거짓말을 하는지 드러난다. 천만원은 지금도 출처가 밝혀지지 않고 있다. 전달자는 그 돈의 출처를 말하지 않고 있다. 주었다고 의심받는 자는 준적이 없다고 말한다. 그러면 누군가는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분명 “천지지지 여지아지” 한데 여전히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거짓말은 버틴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이제 진실이 드러나면 감당해야할 후폭풍이 두려워 진실을 밝힐 타이밍을 놓친 것 같은데 여전히 시간이 흘러가고 있고 책임은 가중되고 있다. 누군가의 거짓말로 인해 총회가 곤혹스러워하고 있다. 관계없는 대다수 선관위원들이 도매금으로 비난을 당하고 있다. 관계자의 교회와 노회가 소란스럽다. 이 모두 한 사람의 거짓말로 인한 것이다. 간첩관련 옛 포스터 문구가 생각난다. “자수하여 광명 찾자” 이 문구는 이 사건에도 유효해 보인다. 작년 총회 임원 선거에서 모 낙선자에게 한 교계 신문이 “자살하지 말기를 바란다”는 파격적인 글을 실었다. 나 또한 관련자가 자책감으로 자살하지 않을까하는 불순한 생각이 드는 것을 피할 수 없다. 죽는 것 보다 진실을 밝히는 것이 더 낫다고 말해주고 싶다. 일이 커져도 너무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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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0-23
  • 【내이야기】 Why so serious?
    기자가 되면서 남의 얼굴만 찍는다. 좋은 사진을 얻기 위해 상대방의 표정을 매의 눈으로 쳐다보며 타이밍을 기다리고 이때다 싶으면 셔터를 누른다. 그리고 카메라의 액정을 통해 결과물을 확인한다. 이때 원하는대로 나오면 한장으로 마무리하지만 그러지 않을 때는 계속해서 찍어야한다. 총회 인물 중에 사진 찍기 곤란한 인물들이 몇 있다. 자세가 비뚤거나, 머리가 비뚤거나 또는 얼굴 표정이 밝지 못하거나, 정면을 안보고 좌우로 시선을 두는 경우 등이다. 그러면 사진 한 장 찍는데 어려움을 겪는다. 어느날 나도 모르게 남에 의해 사진에 찍힌 적이 있다. 보내준 사진을 보고 놀랬다. 표정이 밝지 못했기 때문이다. 한 취재장에서 오정호 총회장이 갑자기 취재 기자들을 앞으로 불러 참석자들에게 소개했다. 이 장면을 누군가 찍어 보내줬는데 내 모습이 맘에 들지 않았다. 너무 심각하고 어두웠다. 그래서 집에서 식구들과 밥을 먹으며 사진을 보이면서 내 표정이 이상하게 찍혔다고 하니 “늘 표정이 그렇다”고 말한다. 큰 충격을 받았다. 하긴 일상의 내 표정을 내가 볼일이 없으니 그럴 수 밖에. 누군가는 40세가 되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했다. 이제부터라도 그래야겠다. 어느 배트맨 영화에서 죠커가 말했던 대사가 생각난다. “Why so serious?” 난 왜 이리 심각한 얼굴이 됐을까? 웃는 얼굴로 살고 싶다. 이 글을 쓰고 나서 내 표정을 찍어보니 여전히 심각하다. 죠커가 비웃으면서 말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Why so serio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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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논단
    2023-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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