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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토크】 ‘절판’ 앞에서....책이란 무엇인가?
    과거 취미란에 ‘독서’를 쓰는 것이 유행이었다. ‘클래식 음악 듣기, 영화 감상’등도.. 독서가 취미인 나로서는 책이 있다는 것이 축복이다. 책을 쓰는 작가, 출판하는 출판사에게 늘 고마운 마음을 갖고 산다. 책이 없는 세상은 매우 심심할 것이다. 다행히 어려서부터 책 사는 것을 좋아했고 지금도 책 읽는 것을 좋아한다. 이 책은 책에 대한 책이다. 어떤 책을 읽다 소개 되어 읽었는데 2006년에 발간된 책이라 소개된 책 중에는 ‘절판’된 책들이 많았다. 책에도 수명이 있고 유행이 있다. 무수한 책들이 만들어지고 사라진다. 죽을 때까지 다 볼 수 없는 책을 읽는 것이 취미인 것이 감사하다! (기사 화면에 이 책 '빠삐용의 책읽기' 사진을 실을려고 교보문고를 검색해 보니 이 책도 절판됐다. 다행히 도서관에 있어 빌려보게 된 것이다). 칼날 위에 서 있는 사랑 어떤 사람들에게 사랑이 가장 고결한 단어라면, 어떤 사람들에게는 금기어입니다. 믿을 수 없으시다고요? 유희처럼, 하룻밤 욕망 해소처럼 가볍게 사랑을 즐기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을 하는 매 순간마다 목숨을 걸어야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오스네 사이에르스타드 장편소설 『카불의 책장수』를 읽다보면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촌에는 참 다양한 삶들이 부대끼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아프가니스탄 여인들에게 '사랑'은 금기어입니다. 그들이 지하에서 펴내는 시집에 사랑을 표현하려면 피어린 절규가 담기지 않을 수 없습니다. '손을 주세요, 사랑하는 이여, 그리고 우리 함께 초원에 숨어요. 사랑하거나 칼 아래 쓰러지거나 둘 중 하나.' 이곳에 사는 여인들은 묻는 말에 대답하거나 요리를 칭찬하는 말에 답례를 표하기는 하지만, 외방인 앞에서 절대로 먼저 대화를 시작하는 법이 없습니다. 부모 몰래 금지된 사랑을 나누다 들키면 죽음입니다. 사랑은 언제나 칼날 위에 서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 나라에서 적용되던 이슬람 율법은 한없이 너그러우면서 동시에 비정한 부분이 있습니다. 그 율법을 비켜가기 위해 그녀들은 란다이(landay)라고 불리는 시를 읊습니다. 란다이는 "비명이나 칼로 찌르는 것처럼" 짧고 율동적이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한반도에서의 삶을 살아가면서 동시에 지구의 다른 쪽을 생각하는 이유는 무엇보다 균형 잡힌 시각을 갖춘 인간이 되고 싶기 때문입니다. 균형이 교양이고, 그것이 문화적 경쟁력이기도 합니다. 이 책의 저자는 노르웨이 출신 여성 종군기자입니다. 2001년에 9·11 테러가 있었고, 그해 10월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 정권을 테러 비호세력으로 지목하면서 대대적인 공습을 때립니다. 2002년 봄 사이에르스타드는 카불에서 책장수로 살아가는 술탄 칸의 집에 3개월 동안 머무릅니다. 이 책은 그때 목격한 것을 소설로 쓴 것입니다. 이 소설은 정치적 격변과 국가재건, 그리고 근본주의 이슬람 문화 밑에서 학대받는 여성 문제, 빈곤 문제를 소설 형식으 로 묘사합니다. 폐허가 된 카불의 방 네 칸짜리 아파트에서 술탄 칸은 홀어머니와 아내 둘, 그리고 아이 다섯과 동생, 사촌 두어 명을 데리고 삽니다. 가혹한 시련은 언제나 곁에 있습니다. 등장인물들은 일을 하고, 돈을 모으고, 저잣거리에서 장을 보고, 요리를 하고, 혼례를 준비하고, 혼례를 치르고, 경찰서와 감옥을 왕래하며 갈등하고 기뻐하고 슬퍼합니다. 국민의 4분의 3이 읽지도 쓰지도 못하는 나라에서 책장수의 가족이란 원래가 드문 경우지만, 주인공 술탄 칸은 30여 년 간 서적 판매업에 종사했습니다. 무엇보다 문학과 책을 사랑했습니다. 공산주의자, 무자헤딘, 탈레반 같은 여러 정권의 하수인들은 차례로 쳐들어와서 책을 불태웁니다. 자신도 체포되어 감옥에 갇히곤 했습니다. 그러나 책에 대한 열정을 굽히지 않습니다. 책을 숨기고, 감옥에서 살아나오고, 서점을 다시 세웁니다. 아이들 교육을 위해 교과서를 출판하려고 하고, 부르카를 감옥이라 규정하며 여성의 권리를 부르짖습니다. 그러나...... 술탄 칸은 집안에서는 누구보다 억압적인 또 다른 가부장일 뿐입니다. 전통의 고수와 근대화 사이에 끊임없이 혼란을 겪어온 그들의 역사는 멀지 않은 과거에 있었던 한국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독자들은 마치 증기탕에서 부르카를 뒤집어 쓴 느낌을 받을 것입니다. 부르카가 얼마나 머리를 죄고 두통을 일으키는지, 얼마나 밀폐된 공간인지, 얼마나 공기가 부족한지, 얼마나 금방 땀이 삐질삐질 나게 하는지에 대한 얘기입니다. 책을 덮고서 우리는 비로소 시원한 공기에 감사하고, 그것을 공유해야 한 다는 사명감을 느낍니다. 이 소설은 아프가니스탄 출신의 미국인 청년이 탈레반 치하에서 친구에게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아프간을 찾는다는 내용의 『연을 쫓는 아이』란 베스트셀러에 필적합니다.(※1996년 9월 탈레반은 연날리기를 금지했었습니다.)(pp. 93-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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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소개
    2024-05-06
  • 【북토크】 글을 잘 쓰는 구체적인 방법
    글쓰는 것은 나의 오래된 관심사항이다. 기회 되는대로 글쓰기에 대한 책을 읽는다. 이 책도 그러한 관심에서 봤다. 유익하다. 특별히 이문재 교수는 글쓰기에 대해 매우 잘 설명하고 있어 전문을 게재한다. 잘 읽어보면 많은 유익을 얻을 것이다. 이문재 (시인, 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교수) 정확해야 아름다울 수 있다 왜 저널리즘적 글쓰기인가? 글쓰기의 장르는 매우 다양합니다. 사적인 글쓰기/공적인 글쓰기, 사적인 글쓰기: 일기, (자서전) 편지, 이메일, 공적인 글쓰기: 시와 소설, 희곡, 에세이, 기행문 등 문학적 글쓰기, 기사, 칼럼 등 저널리즘적 글쓰기, 광고 문안, 연설문, 안내문, 보고서, 기획서, 청원서 등등. 글쓰기는 더 이상 문인, 저널리스트 등 몇몇 전문가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미디어 환경이 급속하게 변화하는 것과 아울러, '문자시대는 가고 영상 시대가 도래했다고들 말하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세히 들여다 봅시다. 영상 이미지 역시 최종적으로는 문자 언어로 번역되어야 이해와 소통이 가능합니다. 인터넷과 휴대전화와 같은 뉴 미디어 역시 문자 언어에 상당 부분 빚지고 있습니다. 인간이 언어를 버리지 않는 한 인간이 이야기를 포기하지 않는 한 문자 문화는 영원할 것입니다. 언어는 대중의 합의에 의해 정착되고, 또 동시에 대중에 의해 변화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언어에 일정한 규범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역설적이게도 언어가 대중(언중)에 의해 생성소멸하고 유통되고 기록(저장)되기 때문에 보다 정확한 말하기와 쓰기가 필요한 것입니다. 문자 시대는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문자는 영상 혹은 구술 문화에 의해 위축되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문자 시대를 능동적으로, 그리고 당당하게 영위하는 교양인들은 그리 많지 않아 보입니다. 교양인이라면, 적어도 대학교를 졸업한 교양인이라면 전공을 불문하고 정확한 글쓰기 능력을 보유하고 있어야 합니다. 거듭 강조하지만, 우리의 개별적 삶은 듣고 말하고 읽고 쓰는 행위의 연속입니다. 이 중에서 쓰는 행위가 가장 논리적이고 또 정확해야 합니다. 글쓰기의 일차적 목표는 자신이 생각한 대로 쓰는 것입니다. 하지만 생각한 것을 그대로 쓰기란 거의 불가능합니다(무의식이 개입하기 때문입니다). 우선 생각 자체가 정돈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신의 생각을 정돈하지 않고 글을 쓰는 것은, 설계도도 없이 집을 짓는 경우와 다르지 않습니다. 생각이 잘 정돈되었다 하더라도, 그것을 정확히 표현(건축으로 치면 시공 능력)할 수 없다면 글쓰기는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저널리즘적 글쓰기가 갖고 있는 몇 가지 미덕 우리가 저널리즘적 글쓰기(기사 쓰기)에 관심을 갖는 이유는, 저널리즘적 글쓰기가 정확한 사실에 바탕해, 정확하게 표현하는 글쓰기의 모범이기 때문입니다. 저널리즘적 글쓰기에도 다양한 장르가 있지만, 자기 주장이 강하게 드러나는 칼럼(사설)이든, 쓰는 이의 관점이 가능한 한 배제되는(이른바 '객관적'이라는 스트레이트 기사에 이르기까지 저널리즘적 글쓰기는 무엇보다도 정확성이 강조됩니다. 저널리즘적 글쓰기는 사실을 정확하게 표현하고 전달하는 데 가장 적합한 글쓰기 방법입니다. 저널리즘적 글쓰기에서 아름다움은 미덕이 아닙니다. 미사여구는 정확한 사실을 전달하는 데 있어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화려한 수사는 사실(fact)을 표현하는 데 있어 장애물일 수도 있습니다. 저널리즘적 글쓰기를 주목해야 하는 두 번째 이유는 다른 글쓰기와 달리 취재와 구성이 전제되기 때문입니다. 물론 소설이나 드라마 시나리오를 쓸 때에도 취재 과정이 없지 않습니다. 하지만 저널리즘에서처럼 구체적인 현장(인물)과 정확한 사실이 필요하지는 않습니다. 저널리즘에서 활용하는 다양한 취재기법은 우리가 다른 장르의 글쓰기를 할 때 얼마든지 응용할 수 있습니다. 기획서나 평가 보고서를 작성할 때에도, 홈페이지나 블로그를 꾸밀 때에도 저널리즘의 취재기법을 동원하면 글이 훨씬 입체적이고 풍성해집니다. 셋째, 저널리즘적 글쓰기는 사건이나 사고, 사태나 현상 등 사회적 관심사에 대한 새로운 접근 방법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정확하고 심층적인 보도 못지않게, 남과 다른 시각에서 분석하려는 태도 역시 저널리즘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넷째, 저널리즘적 글쓰기는 독자 대중의 알 권리를 기본으로 하지만, 인물이나 사건 사고, 사태 등에 대한 독자의 기본적 궁금증을 풀어주는 기능을 갖고 있습니다. 저널리즘적 글쓰기는 여론의 흐름에 민감하게 반응하기 때문에, 사회 변화와 그 변화의 방향성을 파악하는 데 시야를 넓히고 시력을 키울 수 있습니다. 다섯째, 저널리즘적 글쓰기는 표현뿐 아니라 전달에 큰 비중을 둡니다. 다시 말해 아무리 새로운 지식과 정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독자(수용자)에게 전달되고 소통(커뮤니케이션)되지 않는다면 저널리즘적 글쓰기는 존재 이유가 사라지고 맙니다. 우리의 일상적 삶은 우리가 저널리스트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끊임없이 정보를 송신하고 수신하는 환경 속에서 진행됩니다. 송신자이면서 수신자인 우리가 소통 능력을 키우지 못한다면, 그 삶은 심리적으로, 그리고 사회적으로 심각한 문제를 야기합니다. 소통 능력이 있는 시민들로 구성된 사회가 건강한 사회입니다. 마지막으로, 미디어 환경이 급변하면서, 우리는 저마다 '1인 미디어'의 주인공이 될 수 있습니다. 블로그에 이어, 사용자 제작 컨텐츠(UCC, User-created content)라는 용어가 일상적으로 쓰이고 있듯이, 우리는 저마다 저널리스트가 될 수 있습니다. 자기 의견과 주장이 분명하다면, 그 사람은 어디에 있든, 그 의견과 주장을 어떤 미디어를 통해 전달하든 이미 저널리스트인것입니다. 지식정보사회를 살아가면서 단순한 지식 정보 소비자에 머물지 않고, 지식과 정보를 주체적으로 해석하고, 동시에 지식과 정보, 의견을 개성적으로 생산하고 소통하기 위해 우리는 저널리즘적 글쓰기에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저널리즘적 글쓰기를 체득하면, 보고서뿐 아니라 한 권의 책을 집필할 때에도 시간과 노력을 효과적으로 운영할 수 있습니다. 한 편의 기사와 한 권의 논픽션의 구조와 글쓰기 방법은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기사, 노력한 만큼 잘 쓸 수 있다. 1. 저널리즘적 글쓰기의 유형: 스트레이트 기사, 인터뷰 기사, 스케치 • 분석 및 해설 기사(feature story), 르포르타쥬, 칼럼, 논설 등 2. 기사를 잘 쓰기 위한 몇 가지 방법: 1) 주제를 분명하게 설정합니다. 주제를 한 문장으로 만들 수 있다면, 절반은 성공한 것입니다. 가령 '누가 한국을 움직이는가'라고 하면 각 분야에서한국을 이끄는 영향력 있는 인물을 선정하는 기획일 것입니다. 기사의 주제는 분명한 계기가 있어야 하며, 독자에게 유익한 정보가 되어야 합니다. 정보성이 부족하다면 흥미를 끌 수 있는 방법을 마련해야 합니다. 2) 주제를 뒷받침할 자료와 전문가, 현장(사례), 관련 기사를 찾습니다. 주제가 정해졌다면 가장 먼저 관련 기사를 검색해야 합니다. 한창 취재하다가 비슷한 기사가 몇 년 전에 나온 사실을 알고 포기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관련 기사를 검토하다 보면, 주제를 바꾸거나, 취재 영역에 변화를 줄 수 있습니다. 3) 구성을 어떻게 할 것인가. ◎역피라미드형: 전문(요약)중요한 사실-흥미 있는 이야기 순으로 구성합니다. 1900년대 초 미국의 AP통신이 개발한 기사 구조로 스트레이트 기사에서 흔히 사용합니다. ◎피라미드형: 도입-중요한 사실-서스펜스 형성-클라이맥스 순입니다. 피라미드형은 피처 기사에서 자주씁니다. 독자의 관심을 계속 끌고 갈 수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문학적이고 연대기적인 서술 방식입니다. ◎혼합형: 클라이맥스(요약)-서론-본론 결론 순. 4) 1), 2), 3)이 충분하게 준비되었다면, 기사 작성에 들어갑니다. • 간결하게 써야 합니다. 국내 신문은 일반적으로 5행 이상(65~75자)을 넘지 않도록 하고 있습니다. 단문을 쓰라는 것입니다. • 가능하면 구어체를 씁니다. 이야기하듯이 쓰라는 것입니다. ·주어와 술어를 분명히 합니다. • 매력적인 언어를 찾습니다. ・쉽게 씁니다. 좋은 기사의 첫째 조건은 쉬운 문장입니다. 이상은 언론학 입문서에서 가장 일반적으로 권장하는 지침입니다. 필자가 경험한 바에 따르면, 기사를 잘 쓰기 위해서는 다음 몇 가지를 유념 해야합니다. 먼저, 앞에서 말한 대로 기사의 주제를 한 문장으로 압축하십시오. 이것이 나중에 기사 제목이 될 수 있을 뿐 아니라, 기획과 취재의 매 단계에서 판단 기준이 됩니다. '민물낚시, 환경오염 주범'이라는 기획 기사를 준비한다면, 바다낚시의 오염 문제에 관한 자료는 읽을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둘째, 기획과 취재 단계에서 기사의 첫 문장, 즉 리드를 구상하십시오. 첫 문장이 결정되지 않으면 기사를 쓰기 어렵습니다. 취재를 충분하게 해놓고서도 첫 문장, 즉 도입부를 어떻게 시작할 것인지 결정하지 못해 전전긍긍하는 기자들이 제법 많습니다. 어디 기사뿐인가요. 모든 종류의 글쓰기가 첫 문장 에서 좌우됩니다. 오죽하면, 작가들이 "첫 문장은 신의 선물이다" 라고 말하겠습니까. 필자는 기자 생활을 하는 동안, 기획이 정해지면 그때부터 제목과 첫 문장을 구상하기 시작했습니다. 짧은 시를 쓸 때에도, 산문이나 논문을 쓸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셋째, 복잡한 사안을 취재할 경우, 취재한 내용을 주위 동료나 가까운 이들에게 이야기하는 것이 좋습니다. 흥미로운 인물을 인터뷰했을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야기를 하는 동안, 취재한 내용을 정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상대방의 반응을 체크할 수 있습니다. 가령 상대방으로부터 더 취재해야 할 부분, 더 강조해야 할 부분 등 의외의 아이디어를 얻을 수도 있습니다. 넷째, 관련 서적을 찾으십시오. 인터넷 검색은 참고자료일 뿐입니다. 가장 새롭고 신뢰할 만한 정보와 자료는 책에 다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십시오. 필자는 특집 기사를 쓸 경우, 기사 검색을 한 다음 대형 서적으로 달려가곤 했습니다. 관련 서적 한두 권만 읽으면, 그 분야의 권위자가 누구인지, 그 분야와 관련된 최신 이론은 무엇인지 장악할 수 있습니다. 열심히 취재해서 기사를 썼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어떤 책에 다 나와 있는 내용인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다섯째, 소설을 많이 읽고 영화, TV 드라마를 자주 보십시오. 소설은 어휘력을 풍부하게 해줄 뿐 아니라, 인간과 사회를 이해하는 시각을 갖게 해줍니다. 문학 분야가 아니더라도 베스트셀러 책은 따라 읽어야 합니다. 관객이 많이 드는 영화와 시청률이 높은 드라마도 놓치지 않아야 합니다. 베스트셀러 책과 영화, 드라마에서 한 줄 인용하면서, 혹은 등장인물을 끌고 들어가면서 기사를 시작하면 독자들의 눈길을 더 많이, 또 오래 붙잡을 수 있습니다. 기사의 궁극 목표는 좀 더 많은 독자들이 읽도록 하는 것입니다. 여섯째, 늘 기사만 생각하십시오. 기자는 늘 기사만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자동차를 운전하거나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 심지어 가족이나 친구와 대화를 나눌 때에도 기사를 생각해야 합니다. 카페 옆자리에서 얻어들은 한 마디가 대형 기사로 발전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찬반양론이 팽팽한 기사일 경우, 가족이나 친구들의 의견을 청취해보면, 취재나 기사 작성에 적지 않은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기사는 혼자 쓰는 것이 아닙니다. 기사가 아니라 다른 장르의 글을 쓸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보고 읽고 느끼고 생각한 만큼 글은 달라집니다. 개성적 글쓰기를 위한 기초체력 다지기 정확한 문장이 관건입니다. 정확하지 않은 문장은 특히 저널리즘에서 문장이 아닙니다. 시나 소설과 같은 문학 작품에서도 정확성이 우선입니다. 아름다운 문장은 그 다음입니다. 정확한 문장을 구사하지 못하는 작가는 아름다운 문장, 개성적인 글을 쓰기 어렵습니다. 정확하고 개성적인 쓰기를 위해서는 '기초체력'이 필요합니다. 글쓰기를 위한 기초체력을 다지는 필자의 체험적 방법론을 소개합니다. 1. '나쁜 버릇'부터 찾는다 어떤 글이든 좋습니다. 자기가 쓴 글을 분석 대상으로 삼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면, 자주 나타나는 단어나 표현이 발견됩니다. 사람마다 특유의 말투(말버릇)나 몸짓이 있듯이 글에도 특유의 '버릇'이 나옵니다. 예컨대, 어떤 사람은 '~것이다'라는 종결어미를 자주 씁니다. '~것이다'는 가능하면 쓰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자신의 글 버릇을 찾아내는 눈을 가지고 있다면 가능성이있습니다. 다음으로, 수식어가 많은 문장, 접속사가 많은 문장, 나열이 많은 문장이 나쁜 문장입니다. 자기 글에서 나쁜 점을 발견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이미 글을 잘 쓰는 사람입니다. 자기 글에서 문제점을 발견할 수 있는 수준까지 빨리 올라가야 합니다. 자기 글의 문제점을 발견할 수 있다면, 그 문제점만 제거해도 글쓰기는 순식간에 한 단계 업그레이드됩니다. 자기 글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 모른다면, 정말 큰 문제입니다. 정신 바짝 차리고, 자기 글을 들여다보십시오. 자기가 쓴 글들을 '원수가 보내온 편지'라고 생각하고 여러 차례 읽어보십시오. 버릇이 발견될 때까지 읽으십시오. 2. 자기가 좋아하는 글을 찾아라 자기가 쓰고 싶은 글을 쓰는 기자나 작가의 글을 집중적으로 읽으십시오. 글쓰기의 모델을 하나 설정하는 것입니다. 가수가 되고 싶어하는 청소년들은 반드시 좋아하는 가수가 있습니다. 운동을 좋아하는 청소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소설가 지망생은 필사하고 싶은 선배 소설가가 한둘은 꼭 있습니다. 좋은 기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글을 그대로 베껴 쓰십시오(필사). 외우면 더 좋습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글을 적극 모방해보십시오. 그 과정에서 글쓰기 수준이 몰라보게 향상됩니다.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알 수 있는 국내 소설가 대부분이 선배 작가의 소설을 필사하면서 습작기를 거쳤습니다. 추천하고 싶은 필자 '모델'은 문인 이외에, 혹은 문인이면서 매체에 자주 기고하는 분들입니다. 제가 추천하고 싶은 분들은 도정일(문학평론가), 김종철(<녹색평론> 발행인), 고종석(소설가 겸 언론인), 김훈(소설가 겸 언론인). 배병삼(정치학 및 동양학), 한형조(동양철학), 송호근(사회학), 고미숙(문학평론가), 정혜신(정신과 전문의) 등입니다. 이외에도 좋은 필자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3. 새롭지 않으면 쓰지 말라 저널리즘의 생명은 새로움입니다. 새롭지 않으면 뉴스가 아닙니다. 저널리즘이 아니라도 그렇습니다. 모든 글쓰기는 새로워야 합니다. 사실이나 의견에서 새로워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표현이라도 새로워야 합니다. 새롭지 않다면 신기하거나(의외성) 흥미로워야 합니다. 새로움, 의외성, 흥미, 이 세가지 중 한 가지도 만족시키지 못한다면 글을 쓸 이유가 없습니다. 4. 자세히 관찰하라 관찰은 모든 글쓰기의 스타트 라인입니다. 사물이든 사건이든 인물이든자 세히 관찰하지 않고서는 정확한 글쓰기가 불가능합니다. 관찰이 부정확하면 사실관계가 흔들립니다. 정확히 보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우리의 오감 가운데, 시각이 특히 부정확합니다. 주변 환경에 따라 착시 현상이 얼마나 자주 일어나는지 상기해보십시오. 관찰은 단지 시각에 한정되지 않습니다. 많이, 그리고 정확히 느끼는 것도 관찰의 범주에 들어갑니다. 책읽기, 영화 감상, 미술 감상 등도 관찰입니다. 관찰은 대상에 대한 집중입니다. 자신을 완전히 비우고(선입견을 버리고, 현상학적으로 말하자면 판단을 중지하고) 대상에 몰입했다가, 다시 대상으로 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상상력은 이 관찰 단계에서 나옵니다. 관찰 훈련의 첫 단계는 자기가 본 것으로 소리 내어 말해보는 것입니다. 관찰 대상이 인물이라면, 머리 모양과 색깔, 길이에서부터 이목구비를 거쳐 구두까지 관찰하면서 하나하나 말해보십시오. 컴퓨터나 텔레비전, 화분, 식탁, 자동차 실내 등 늘 마주치는 대상을 하나 정해서 소리 내어 하나하나 관찰해보십시오. 그동안 전혀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일 것입니다. 그것이 발견입니다. 낯익은 것에서 낯선 것을 찾을 수 있다면, 바로 그것이 최고의 글쓰기 재료입니다. 5. 메모하고, 메모하고 또 메모하라 기억력이 남다르다고 해도, 메모를 따라갈 수는 없습니다. 뛰어난 작가는 물론이고 예술가, 심지어 기업의 CEO들도 메모를 자주 합니다. 뭔가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메모광입니다. 인간이 하루에 접하는 새로운 정보(자극)는 수십만 개가 넘는다고 합니다. 밤에 잠자리에 누워 하루를 돌이켜보십시오. '오늘 내가 새로 느낀 것, 새로 발견한 것'을 떠올려보십시오. 거의 없을 것입니다. 주머니 혹은 핸드백에 작은 수첩과 필기구를 반드시 챙기십시오. 수첩과 필기구를 챙기는 습관이 들었다면, 글쓰기를 위한 가장 필수적인 요건을 갖춘 것입니다. 저는 화장실에도 연필과 포스트잇을 갖다 놓습니다. 주머니에 메모지와 볼펜이 없으면 산책도 하지 못할 만큼 습관이 되어 있습니다. 참신한 아이디어는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하루에도 수천 번 새로운 생각이 떠오릅니다. 하지만 그것이 글쓰기로 이어지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좋은 글은 메모지에서 나옵니다. 메모지가 '상상력 발전소'입니다. 개성적인 글쓰기를 위한 세부 지침 1. 나로부터 시작하라 저널리즘적 글쓰기, 특히 스트레이트 기사에서 '나'는 차가운 전달자입니다. 스트레이트 기사에는 글쓰는 사람의 주관이 개입해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1990년대 이후, 활자매체의 기사는 연성화하고 있습니다. 피처 기사, 칼럼 등은 대단히 주관적이고 개성적인 문체를 구사합니다. 기사작성 연습을 하고 싶다면 굳이 멀리 갈 필요가 없습니다. '나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자서전을 써 보거나, 자기가 자기를 인터뷰하는 것입니다. 가족이나 친구를 소개하는 글도 좋은 훈련이 됩니다. 자기가 사는 마을(아파트)을 취재해 사진과 곁들여 기사를 써보는 것도 훌륭한 저널리즘적 글쓰기입니다. 시나 소설을 쓰기 원한다면 더욱 그렇습니다. '나'의 이야기를 쓰십시오. 문학적 글쓰기를 방해하는 가장 큰 요소 가운데 하나가 글쓰기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그렇다면 자기 자신에서 출발하십시오. 나에 대해, 나의 가족과 친구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은 바로 나입니다. 잘 알고 있는 소재를 글로 쓸 때, 글쓰기에 대한 두려움은 현저하게 줄어듭니다. '나'에 대한 글쓰기는 자기 삶을 성찰하는 진지한 계기를 제공합니다. 내가 어디에서 왔고, 또 어디에 있으며, 어디로 갈 것인가. 이 같은 인문학적 질문을 던지게 하는 것은 글쓰기 말고 거의 없습니다. 2. 반복하지 말라 반복은 강조할 때 말고는 피해야 합니다. 반복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표현의 반복과 내용의 반복이 그것입니다. 같은 단어, 같은 표현을 반복하지 마십시오. 사실을 왜곡하지 않는 범위에서 유의어를 쓰십시오. '그녀는 아름다운 숄을 두르고, 아름다운 가방을 들었으며, 아름다운 마을에 산다. 이 문장에서 '아름다운'은 반복될 뿐만 아니라, 정확하지도 않습니다. 글쓰기의 가장 큰 장애물 가운데 하나가 내용의 반복입니다. 중언부언하지 마십시오. 같은 내용(견해, 정보, 지식......)이 반복되면 독자는 냉정하게, 즉각 눈을 돌립니다. 친구와 이야기할 때를 떠올려보십시오. 어제 한 얘기를 오늘 하면 친구는 즉각 이렇게 나옵니다. "그거, 어제 들은 얘기야." 글쓰기도 마찬가지입니다. 3. 한 문장에는 하나의 정보만 담아라 이것은 문장을 짧게 쓰는 비결이기도 합니다. 한 문장에는 하나의 정보, 한문단에도 하나의 정보군을 담는 것입니다. 한 문장에 두 개 이상의 정보를 담는 순간, 문장은 길어집니다. 한 문단에 두 개 이상의 정보군을 담으면, 복잡해지기 때문에 독자가 이해하기 힘들어집니다. 아침에 집에서 나와 학교, 또는 사무실에 도착하기까지의 과정을 '한 문장, 하나의 정보' 원칙에 따라 글로 써보십시오. 처음에는 대단히 힘들 것입니다. 하지만 몇 번 고쳐 쓰다보면, 문장을 짧게 쓰는 방법을 스스로 터득할수 있을 것입니다. 4. 접속사를 쓰지 말라 통학 또는 통근 과정을 '한 문장, 하나의 정보' 원칙에 따라 쓰다 보면, 수시로 접속사가 끼어들 것입니다. 접속사 없이 쓰려고 애써보십시오. 최근에 읽은 소설 가운데 접속사가 거의 ('전혀' 라고 해도 크게 틀리지 않다) 없는 소설이 있습니다. 김훈의 장편소설 <남한산성>인데, 접속사에 유의하며 읽어보십시오. 매우 흥미로운 글읽기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접속사는 글 쓰는 이의 마음속에 있어야 합니다. 특히 연결형, 나열형 접속사를 피하십시오. 5. 나누고 묶어주어라 기사를 쓸 경우, 다양한 정보를 한꺼번에 제공해야 할 때가 자주 있습니다. 그럴 때는 유사한 것끼리 묶어줘야 독자가 편하게 읽을 수 있습니다. 음식 종류를 소개한다면, 국적별 혹은 재료별, 계절별 등으로 나누어 묶어줍니다. 6. 병치할 때 조심하라 같은 기능을 가진 단어, 구, 절 등이 나란히 놓일 때 자주 오류가 나타납니다. '사과와 큰 배' '철수는 중학생이고 영희는 공부를 잘한다'와 같은 문장이 의외로 많습니다. '사과'라는 단어와 '큰 배'라는 구는 병치하면 안 됩니다. 단어는 단어끼리, 구는 구끼리 병치하십시오. '사과와 배' '작은 사과와 큰 배'가 적확한 표현입니다. 앞의 문장은 '철수는 중학생이고, 영희는 초등학생이다로 써야 합니다. '중학생' (단어)과 '공부를 잘한다' (구)가 나란히 놓이면 대단히 어색합니다. '30-3-30 법칙'을 명심한다 언론인들은 30-3-30 법칙'을 자주 언급합니다. 여기서 30. 3. 30은 각각 30초, 3분, 30분을 일컫습니다. 독자들이 기사를 읽을 때, 처음 30초 동안은 제목이나 부제, 사진, 그래픽 요소, 기사의 도입부 등을 살펴본다는 것입니다. 독자들은 처음 30초 안에 기사를 읽을 것인지 말 것인지를 결정합니다. 만일 읽기로 마음먹었다면 다음 3분 동안 기사의 도입부를 읽습니다. 그리고 도입부가 흥미롭다면 30분 동안 기사를 끝까지 읽는다는 것입니다. 기자와 편집자는 처음 30초를 3분으로 늘리고, 다시 3분을 30분으로 늘리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것입니다. 기사만 그런 것은 아닙니다. 모든 글이 제목과 도입부에서 결정납니다. 시처럼 짧은 글에서도 제목이나 첫 연이 진부하면 독자들은 눈을 돌려버립니다. 소설은 굳이 설명이 필요 없습니다. 보고서나 논문도 마찬가지입니다. '30-3-30 법칙'은 첫 문장에 목숨을 걸라는 저널리즘적 글쓰기의 핵심을 압축하고 있는 법칙입니다. 이문재. 1959년 경기도 김포에서 태어나 경희대에서 국어국문학을 전공하고,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시사저널 취재부장, 문학동네 편집주간을 역임했고, 현재 <시사IN> 편집위원, <문학동네〉 편집위원, 〈녹색평론〉 편집자문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교수로 재직 중이다. 김달진문학상, 시와시학 젊은 시인상, 소월시문학상, 지훈문학상, 노작문학상을 수상하였으며, 시집으로 《내 젖은 구두 벗어 해에게 보여줄 때》, 《산책시편》, 《마음의 오지》, 《제국호텔> 등이 있다(pp.197-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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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03
  • “흥청망청” 108회 선관위... 명분없는 돈 낭비
    본 기사는 교회발전연구소 대표 이능규 목사에게 모 인사가 108회 선관위(위원장 권순웅 목사)에 대해 제보한 내용을 바탕으로 작성한 기사임을 밝힌다. 제보 내용에 따르면 선관위가 불필요한 돈을 낭비하고 있다. 제108회기 선관위는 공정선거감시단 해외 활동에 이미 많은 경비를 집행했다. ▲전국장로회연합회 임역원수련회(일본) : 고정식, 손정호, 김삼주, 신덕수, 한기영(750만원 집행) ▲농어촌교역자부부수양회(다낭) : 권순웅, 신덕수, 지동빈, 임종환, 최병도(613만원 집행) ▲전국교역자하기수양회(필리핀) : 전웅구, 김상원, 유병희, 한기영, 이상돈(599만 5천원 예산). 이때 위원장 권순웅 목사와 서기 한기영 목사가 강사를 맡았다고 한다. 현재 바뀐 선거규정에 따라 후보자는 행사에 참석할 수 없다. 그런데 선관위 공정선거감시단은 누구를 감시하기 위해 해외 행사에 동행하는 것인가? 제보자는 “돈**”이라는 격한 표현을 사용했다. 또한 선관위는 민찬기 목사가 제기한 가처분 신청 소송에 대응하기 위해 변호사비로 5천 5백만원을 지출했다. 선관위원들이 1차 투표해 7대7로 나왔다면 의견이 팽팽하다는 것인데 굳이 다시 투표해 7대8로 만든 것이 화근이다. 증경총회장단이나 실행위원회에 넘겨 자문을 구했다면 굳이 총회 돈을 지출할 소송에 휘말리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것이 중론이다. 현재 감사부는 107회기 선거관리위원회(위원장 배광식 목사)에 대해 특별재정감사를 하고 있다. 어제는 서기와 회계를, 오늘은 위원장과 심의분과장을 부른다. 안건은 선관위가 재정을 과잉지출했다는 것이다. 모 선관위원은 자기들은 비용을 아껴서 사용했다고 주장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기에 특별재정감사를 받는 것이다. 앞으로 108회기 선관위도 감사부에 의해 특별재정감사를 받지 말란 법이 어디 있겠는가? 이 악순환을 끊어야한다. 선관위의 근본적인 개혁이 필요한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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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2024-05-03
  • 【북토크】 가수 장기하의 깨달음
    가수 장기하를 좋아한다. 노래가 재미있기 때문이다. 그의 대중적인 첫 노래 “싸구려 커피”, “달이 떠오른다, 가자” 등은 신선했다. 읽을 책들을 검색하다 보니 그가 몇 년 전에 쓴 것이 있어 대출해서 봤다. 부담없이 재미있게 읽었다. 첫 장인 ‘안경과 왼손’은 주어진 환경을 담담히 받아들이고 돌아본 후 감사하는 내용이다. 읽어볼만해 전문을 소개한다. 안경과 왼손 얼마 전 안경을 잃어버렸다. 매우 아끼는 안경이었다. 아니, 아낀다는 표현으로도 모자란다. 이삼 년 전 그 안경을 산 이후로는 오직 그것만 써왔던 것이다. 그런데 어느날 아침 갑자기 사라져버렸다. 있을 만한 곳을 전부 다 여러 번씩 싹싹 뒤져봤지만 찾지 못했다. 결국 예전에 썼던 다른 안경을 쓰고 집을 나설 수밖에 없었다. 약속 장소로 가는 길, 이삼 일 전에 읽었던 무라카미 하루키 에세이의 한 구절을 떠올렸다. "형체 있는 것은 아무리 애써도 언젠가, 어디선가 사라져 없어지는 법이다. 그것이 사람이건 물건이건." 마음을 털어버렸다. 그래, 그 안경이랑은 여기 까지였나보지 뭐. 나는 국소성 이긴장증이라는 병을 가지고 있다. 해괴해 보이는 이름이지만 의미는 간단하다. '국소성'이란 특정 부위에 나타남을, '이'는 이상함을, '긴장'은 말 그대로 긴장을 뜻한다. 한마디로 특정 부위가 이상하게 긴장된다는 얘기다. 이 병명에서 가장 중요한 글자는 '이'다. '이'자가 들어간 병을 선고받는다는 것은 말하자면 이런 상황이다. 몸이 안 좋다. 병원을 찾아가 묻는다. "선생님, 저 왜 아픈건가요?" 의사가 답한다. "그러게요. 이상하네요." 그렇다. 내 병은 원인도 치료법도 알려지지 않은 희귀병이다. 이 병이 처음 생긴 것은 대략 십오년 전쯤으로, 군악대 시험을 준비하던 시절이었다. 당시 나는 '눈뜨고코베인'이라는 록밴드에서 드러머로 활동하고 있었다. 가수가 되겠다는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저 드럼 하나로 먹고살 수 있을 정도로 연주를 잘하는 사람, 즉 프로 드러머가 되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그 외의 진로는 상상조차 하지 않았다. 학교 공부는 최소한으로 하고 드럼 연습과 밴드 활동 위주로 생활했다. 그러다보니 군복무를 시작도 하지 않은 채 대학 오 년 차를 맞았고, 더이상은 입대를 미룰 수 없게 되었다. 내 선택은 당연히 군악대였다. 군대에 있는 동안 손발이 녹슬면 큰일 아닌가. 일반 부대는 절대로 안 된다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군악대는 록 연주만 잘한다고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클래식 타악, 특히 행진곡풍의 연주에 능통해야 했다. 자신은 있었다. 이미 연습이라면 많이 해온 터였기 때문이다. 좀 다른 장르의 연주라고 해서 못 해낼 것은 없다고 생각했고, 시험을 대비해 맹연습에 돌입했다. 이삼 개월쯤 지났을 때 복병이 나타났다. 연습만 하려고 하면 내 의지와 관계없이 왼손이 꽉 쥐이는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드럼 연주의 기본은 그립이다. 누가 툭 치면 놓쳐버릴 듯 살며시 스틱을 잡고 부드러운 움직임을 만들어야 빠르고 정확한 연주를 할 수 있다. 그런데 자꾸 나도 모르게 스틱을 힘껏 잡게 되고 그것을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이 반복되다보니 미쳐버릴 노릇이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연습하다 너무 답답하고 화가 나서 소리를 지르며 스틱을 집어던진 것도 한두 번이 아니다. 결국 군악대는 포기했다. 치료법도 알 수 없고 상태가 호전될 기미도 보이지 않으니 어쩔 수가 없었다. 더욱 중요한 것은, 프로 드러머의 꿈도 함께 버렸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게 그리 절망스러운 단념은 아니었다. 내 생각의 흐름은 이랬다. '하긴 군악대의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 연주하는 게, 내가 멋있는 음악을 하는 데는 오히려 해가 될지도 몰라. 멋있는 음악이라... 그래, 생각해보면 프로 드러머가 되는 것 자체가 멋있는 음악을 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 수도 있겠네. 연주로 먹고살려면 돈 되는 음악을 해야 하는데, 내가 지금 멋있다고 생각하는 우리나라 음악 중에 돈 되는 게 하나라도 있나? 그리고 나는 우리 밴드 음악이 제일 멋있는데 그걸로 돈을 벌어본 적도 없잖아? 애초에 음악으로 돈을 벌겠다는 생각 자체가 문제였어!' 나는 홀가분한 기분으로 프로 연주자가 아닌, 돈은 안 돼도 '멋있는 음악을 하는 뮤지션이 되겠다고 마음 먹었다. 그리고 일반 부대에 입대했다. 제대한 후 나는 그 '멋있는' 뮤지션이 되는 일을 실행에 옮겼다. 파트타임 일자리를 구한 상태에서, 내가 싱어송라이터로서 이끄는 새 밴드 '장기하와 얼굴들'을 시작한 것이다. 최소한의 돈과 최대한의 시간을 확보해 자유롭게 음악활동을 하겠다는 생각이었다. 곡은 군복무중 짬짬이 만들어뒀었다. 물론 큰 인기를 얻으리라는 기대는 전혀 없이 만든 노래들이었다. 눈앞에 있는 관객들만은 확실히 재밌게 해주겠다는 생각이 다였다. 그런데 터졌다. 소위 '대박'이었다. 활동을 시작하고 일 년이 지나기도 전에 전 국민적 히트곡을 보유한 밴드가 된 것이다. 모든 것이 거짓말처럼 순조로웠다. 한 가지만 빼고 말이다. 왼손에 힘이 들어가는 증상이 기타를 연주할 때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처음에 이 증상이 신기했던 건 유독 드럼 연주를 할 때만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다른 일을 할 때는 아무런 불편이 없었다. 물론 기타 연주를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군복무중에도 생활관에 비치된 통기타를 치며 노래를 만들었고, '장기하와 얼굴들' 첫 싱글을 녹음할 때도 기타는 내가 다쳤으며, 밴드 활동 초기에는 공연을 할 때도 절반 정도의 곡에서는 내가 기타를 잡았다. 그런데 급격하게 치솟는 인기를 실감하며 공연을 이어가던 어느 날, 기타를 연주할 때도 왼손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결국 기타도 포기했다. 이번 단념은 군악대 때와는 달리 좀 절망스러웠다. 공연에서 기타를 연주하지 않기로 했음은 물론이고, 평소에 혼자 치는 것도 거의 못하게 됐다. 늘 자유자재로 하던 기본적인 플레이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게 되니 짜증이 치밀었다. 자연히 심심풀이로 기타를 잡는 일이 점점 줄어들었다. 중학교 때 이후로 그때까지 줄곧 기타는 나의 가장 좋은 취미 중 하나였다. 집에 있을 때면 침대에 누워 기타를 배에 얹고 아무렇게나 퉁겼다. 그러면서 멜로디를 이리저리 흥얼거리다보면 이따금씩 노래가 만들어지곤 했다. 그런 일상이 하루아침에 송두리째 날아가버렸다. 게다가 이번에는 증상이 연주에만 국한돼 나타난 것이 아니라 일상 전반으로 퍼져나갔다. 곧 타자를 치는 것도, 단추를 잠그는 것도, 왼손을 써야 하는 어떠한 일도 예전만큼 쉽게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로부터 십 년이 흘렀다. 그런데 그 십 년을 돌이켜보면, 이 병이 내게 나쁜 일만은 아니었다. 사실 병에게 엎드려 절하고 싶을 지경이다. 프로 드러머의 길을 포기함으로써 결국 '장기하와 얼굴들'을 시작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기타 연주를 포기한 것 역시 내게 두 가지 커다란 선물을 가져다주었기 때문이다. 첫째는 새 기타리스트 하세가와 요헤이 형을 영입한 것, 둘째는 내가 무대에서 악기 없이 자유롭게 퍼포먼스를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두 가지가 없었다면 '장기하와 얼굴들’의 활동이 내게 가져다준 희열은 말도 안 되게 줄어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세월이 지나면서 증상도 아주 조금씩 좋아져 이제는 거의 다 나았다. 지금도 약간의 느낌이 남아 있긴 하지만, 일상에서 그것을 의식하게 되는 일은 드물다. 기타와 드럼도 취미 정도로는 다시 연주할 수 있게 되었다. 그간 연습을 안 했으니 남들 앞에 뽐낼 만한 연주력은 당연히 아니지만, 사실 이제는 그런 능력이 필요하지도 않다. 싱어송라이터로서 좋은 연주자들과 함께할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다. 무엇보다, 증상이 가장 심했을 때를 떠 올리면 집에서 혼자 재밌게 연주할 수 있는 것만 해도 감지덕지다. 지금도 이 병의 원인은 의학적으로 밝혀지지 않은 듯하고, 물론 나도 아직 정확히 어떤 일이 벌어진 것인지 알지 못한다. 다만 이렇게 추측할 뿐이다. 내가 나 스스로에게 과도한 것을 강요했고, 몸이 그만두라는 신호를 보냈다. 나는 그것을 무시하지 않고 충분히 쉬게 해주었으며, 그랬더니 시간을 두고 차츰 회복되었다. "형체 있는 것은 아무리 애써도 언젠가, 어디선가 사라져 없어지는 법이다. 그것이 사람이건 물건이건? 그리고 형체가 없긴 하지만 능력도 마찬가지다. 어제까지 당연히 할 수 있었던 일을 오늘 갑자기 못하게 될 수도 있다. 나는 그럴 때마다 무척 괴롭긴 했지만, 결국 다 순순히 받아들였다. 이 능력은 여기까지인가보다, 하고. 그리고 새로운 상황에 맞춰 새로운 계획을 세웠다. 그러고 나면 그전에는 상상도 못했던 다른 길이 열리곤 했던 것이다. 안경은 며칠 뒤에 소파 밑에서 찾았다. 전날 술에 취해 소파에서 잠들었고, 안경을 아무렇게나 내팽개치는 과정에서 소파 아래로 들어간 모양이었다. 거실에서 잠드는 일이 거의 없다보니 그곳을 찾아볼 생각은 하지 못했던 것이다. 먼지 구덩이 속에 얌전히 놓인 안경을 발견한 순간, 그야말로 날아갈 듯한 기분이었다. 아무리 많이 아끼는 안경이라 해도, 물건 하나로 그렇게까지 기쁠 수 있다싶었다. 모르긴 해도, 깨끗이 포기했었기 때문일 거다(pp.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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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소개
    2024-05-02
  • 【단상】 부총회장 선거, 축제가 싸움판으로
    지난 4월 25일 오전 11시 참좋은교회(이윤찬 목사 시무)에서 대구교직자협의회 제31회 정기총회가 있었다. 이승희 증경총회장의 개회 예배 설교 후 합심기도 시간에 경북교직자협의회 대표회장 강전우 목사가 ‘총회와 영남지역을 위해서’ 기도할 때 부총회장 자격 문제로 소송이 붙은 총회를 염려하며 간절히 기도했다. 소송 관계자인 부총회장 후보 민찬기 목사나 장봉생 목사의 마음은 어떨지 모르나 총회 회관에서 먼 경상도 지역에서도 현 사태를 매우 안타깝게 여기며 탄식으로 기도하고 있다. 아마 이 사태를 지켜보는 대부분의 총대들의 마음도 편치는 않을 것이라고 본다. 한 사람의 부총회장이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과 물질이 필요하다. 노회와 협의회, 총회 등에서 오래 봉사하며 자신을 알려야한다. 이에 많은 시간이 든다. 그리고 물질로도 많이 섬겨야한다. 그래서 아무나 부총회장이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면에서 시간과 물질로 섬겨온 부총회장 후보들은 모두 총회의 귀한 자산이다. 바람직한 것은 단독 후보로 추대되는 것이지만 어쩔 수 없이 경선이 될 수도 있다. 그러다보면 친했던 사이도 서먹해지거나 “원수” 사이가 될 수 있다. 그래서 곽선희 목사는 운동을 할 때 서로 마주보는 것은 하지 않는다고 했다. 탁구나 테니스나 서로 마주보고 하다보면 감정 싸움이 될 수 있기에 자기는 각자 실력으로 승부하는 볼링을 한다고 말한 것을 들은 적이 있다. 일리 있는 말이다. 오래 세월 총회를 섬겨온 민찬기 목사나 장봉생 목사는 현재 서로를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내리 누르고 이겨야할 경쟁 상대로 보지 않겠는가 말이다. 이런 면에서 선거란 참으로 잔인한 것인지도 모른다. 민찬기 목사 소속 임원회가 민찬기 목사의 후보 자격에 대해 물었을 때 장봉생 목사 소속 노회도 임시노회를 열어 부총회장 출마 자격에 대해 선관위에 질의했다. 선관위가 이 문제를 다룰 때 투표에 처음에는 7:7 동수가 나왔다. 이어 재투표하여 7:8로 세 번 출마는 안된다는 결론을 내렸다. 다 지나간 일이지만 의견이 7대 7로 나뉘었다는 것은 선관위원 내에서도 의견이 팽팽했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 문제를 바로 처리할 것이 아니라 좀더 시간 여유를 두고 처리했다면 좋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있다. 증경총회장단의 의견을 듣는다든지, 실행위원회에서 의견을 구했다면 모양세는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속전속결로 재투표해 7:8로 세 번 출마 불가로 정했다. 그러자 민찬기 목사측에서는 이 문제에 대해 소송을 했고, 소속 노회에서 부총회장 후보로 추천을 받았다. 세상 법정이 이 문제를 어떻게 처리할지는 두고보면 된다. 그런데 성경은 교회 문제를 세상 법정에 끌고가는 것을 경고하고 있다. [고전6:1-7] “1 너희 중에 누가 다른 이와 더불어 다툼이 있는데 구태여 불의한 자들 앞에서 고발하고 성도 앞에서 하지 아니하느냐 2 성도가 세상을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세상도 너희에게 판단을 받겠거든 지극히 작은 일 판단하기를 감당하지 못하겠느냐 3 우리가 천사를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그러하거든 하물며 세상 일이랴 4 그런즉 너희가 세상 사건이 있을 때에 교회에서 경히 여김을 받는 자들을 세우느냐 5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 하여 이 말을 하노니 너희 가운데 그 형제간의 일을 판단할 만한 지혜 있는 자가 이같이 하나도 없느냐 6 형제가 형제와 더불어 고발할 뿐더러 믿지 아니하는 자들 앞에서 하느냐 7 너희가 피차 고발함으로 너희 가운데 이미 뚜렷한 허물이 있나니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 새로이 총회를 섬길 일꾼을 뽑는 총회 선거가 축제가 아니라 세상의 조롱거리가 되고, 사법의 판결을 받아야하는 싸움판이 된 것이 참으로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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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논단
    2024-04-26
  • 취재 기자를 내쫓는 노회들...무엇이 두려운가?
    봄 정기노회가 열리는 계절이다. 서울에서 먼 지방의 몇몇 노회를 취재갔다. 그 중 2개 노회에서 “내쫓김”을 당했다. 이리노회는 북일교회 문제로 회원 호명 때부터 시끄러웠다. 결국 노회원들간에 고성이 오갔다. 이런 가운데 취재하고 있는 기자들에게 나가달라고 "거칠게" 요구했다. 결국 쫓겨날 수 밖에 없었다. 충청노회도 전 총신대총장 김영우 목사 피소건에 대해 다루며 기자들에게 나가달라고 “험악하게” 요구했다. 결국 본당 중이층으로 쫓겨갈 수 밖에 없었다. 기자는 사실을 취재하고 알리기 위해 그 현장에 가 있는 것이다. 북일교회 문제는 대부분의 총회원들이 알고 있을만큼 큰 이슈이다. 당연히 기자들이 가서 취재할 수 밖에 없는 사항이다. 기자는 총회원들의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 대신해서 그 현장에 간 것이다. 그런데 무슨 이유로 기자들을 내쫓는 것인가? 그것이 과연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겠는가? 기자가 보면 안될만큼 감춰야할 문제가 있는가? 사실을 사실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문제해결에 도움이 될 수 있다. 문제 없는 노회는 취재간 기자들을 반기며 좋게 기사를 써서 노회를 잘 홍보해 달라고 부탁한다. 기자로서도 기분좋은 일이다. 반면 문제 있는 노회는 기자를 내쫓는다. 마치 잡상인 취급을 한다. 부득이 기자를 내보낼 필요가 있다면 “정중하게” 요청했으면 한다. 같은 합동측 목사한테 그렇게 함부로 해서 되겠는가? 앞으로도 “문제 있는” 이리노회와 충청노회 “사태 추이”에 대해 예의주시할 것이다.
    • 오피니언
    • 칼럼
    2024-0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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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서일지〗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내공이 만만치 않은 작가의 산문집이다. 그동안 써서 발표한 글들을 분야별로 모아놓은 책이다. 생각하는 힘을 키워주고 생각지 못했던 것을 보게하는 다른 시각을 줄만한 책이다. 이 자가가 쓴 다른 책도 읽어볼 계획이다. 국가의 살인(p 233-235) 김일란·홍지유 <두 개의 문> 제목은 어려웠고 포스터는 생경했다. 그렇더라도 영화 자체는 얼마간 익숙한 방식으로 찍었으리라 짐작하며 영화관으로 들어갔다. 분노와 슬픔을 예감하면서, 그리고 그런 감정적인 반응에 머물고 말 나 자신을 미리 조금 냉소하면서. 그러나 영화 <두 개의 문>은 예상과 달랐다. 분노와 슬픔보다는 분석과 성찰을 유도하고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제목과 포스터는 정직한 것이었다. 이미 <씨네21> 이영진 기자가 이 영화의 목표와 성취를 다음과같이 정확히 요약했으니 인용으로 대신하자. 국가의 무자비한 폭력을 증명하는 방식에 있어 <두 개의 문>은 유사 주제의 다큐멘터리들과 다른 방식을 취한다. 대개는 희생당한 이들의 편에 서서 억울함에 대한 호소를 강조하게 마련이다. 하지만 <두 개의 문>에는 사지로 내몰렸던 철거민들의 피맺힌 절규가 거의 나오지 않는다. 대신 철거민들의 입장에서 볼 때 가해자라고 불렸던 경찰들의 드러나지 않은 희생을 밝혀냄으로써 <두 개의 문〉은 면죄부를 받은 국가 폭력에 곱절의 중형을 선고하고자 한다.<씨네21>858호) 이 말 그대로다. 보고 나니 제목도 이해가 됐다. 참사 현장인 남일당 건물 4층에는 옥상으로 통하는 문이 두 개 있었는데, 건물에 진입한 특공대원들은 그 두 개의 문 중 어디를 열어야 망루로 갈 수 있는지조차 알지 못했다. 진압 지도부는 인명 피해를 예방하기 위해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최소한의 정보도 제공하지 않은 채 그저 올라가서 진압하라고 명령했을 뿐이다. 즉, '두 개의 문'이란 말단 특공대원들이 체험한 현장의 부조리함을 상징하는 말일 것이다. 특공대원 중 하나는 현장을 '생지옥'에 비유했다. 그러나 이것은 제목의 1차적인 의미를 설명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더 심층적인 의미가 있다. '문'이란 참사를 보는 '시선'의 은유이기도 하다. 일단은 다섯 명의 희생자와 유족들의 시선으로 이 참사를 봐야 한다. 그러나 갑작스런 명령을 받고는 생지옥으로 걸어 들어가야 했던 특공대원들의 시선으로도 봐야 한다. 이 두 개의 시선은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 이 '두 개의 문'을 함께 열어야만 참사의 진실에 도달할 수 있다. 이미 다 알고 있는 사실 아니냐고 반문할 분도 있으리라. 그러나 이 영화는 이미 알고 있었던 사실을 전혀 몰랐던 것처럼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힘을 갖고 있었다. 특공대원 한 명을 죽인 것은 물론 현장의 철거민들이 아니었다. 반대로 철거민 다섯 명을 죽인 것도 현장의 특공대원이 아니었다. 그들은 모두 희생자다. 가해자들은 그날 새벽 작전 명령이 떨어진 전화기 저편에 있었을 것이다. 이 여섯 명을 한꺼번에 죽인 범인은 '국가'라는 시스템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스스로 '국가'임을 자임하는 몇몇 인사들이다. 일신의 영달을 위해 무력 진압을 강행한 지도부와 그 수장, 그리고 그들의 충성의 대상이 된 정부와 그 핵심 권력자들이다. 이 상황을 정확히 명명하려면 '국가 폭력'이라는 익숙한 용어 대신 '국가 살인'이라는 용어를 도입해야 할지도 모른다. 용산참사는 예외적인 사건이 아니라 상징적인 사건일 것이다. 참사는 곳곳에서 다른 형태로 일상화되어 있다. 군사독재 시절과는 달리 이제 국가는 죽음을 방치하는 방식으로 살인을 한다.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들 중 22명이 목숨을 잃거나 버리는 동안 국가는 무엇을 했나. OECD 가입국 중 자살률 1위인 대한민국에서는 매일 40명씩 자살한다. 입시 지옥 속에서 학생들은 자살하고, 정리해고와 가계 부채로 4, 50대는 자살하며, 극빈과 고독 속에서 노인들은 자살한다. 처음 한 명의 죽음은 '자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두 번째 죽음부터는 '타살'이고, 수백 수천 번째가 되면 그것은 '학살'이다.(2012.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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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3-24
  • 〖독서일지〗 「여자의 심리코드」
    모처럼 땡기는 책을 만났다. 심리, 상담에 관심이 많은데 충분히 채우고도 남는 책이다. 상당한 수준의 책이기에 정독이 필요하다. 이 작가의 다른 책도 읽어야겠다고 생각한다. 목사의 설교가 이만한 질적 수준이 되는가 반성해본다. 모든 내용이 좋은데 맛보기만 실어본다. "한 말씀만 하소서"(p 70-73) 근원적인 결여감에 몸부림치는 여성인 우리에게 두 가지 선택권이 있습니다. 스스로를 남근화시키거나 팔루스를 가정한 절대적 대상으로 결여를 메우는 선택입니다. 스스로를 남근화 시킨다는 뜻은 능력이나 지위, 역량 등을 개발하고 그것을 가지려는 의지입니다. 부성적 동일시와 동시에 아버지와 경쟁하는 딸이 되는 것이지요. 절대적 대상을 통해 팔루스를 가지려고 할 때 그 대상은 남편이 될 수도 있고 스승이 될 수도 있고 종교 지도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여성은 자신을 약자의 위치에 놓고 기름을 부어 줄 대상을 끝없이 갈구합니다. 앞서 언급한대로 여성은 끊임없이 정체성의 문제로 혼란과 고통을 겪습니다. 항상 의존할 팔루스(남근)나 신탁의 언어를 쫓지요. 스스로가 가진 자가 아니라 대상을 통해 간접적으로 정체성을 보증받고자 하기 때문에 그 정체성을 확인해 줄 절대적 대상에게 무한한 헌신이 가능하지요. 그래서 저는 여성의 희생과 헌신에는 항상 함정과 속임수가 내재한다고 자주 언급합니다. 온전한 희생, 온전한 퍼부음은 스스로의 결여를 타자를 메우는 방식으로 보상하는 행위의 이면이기 때문입니다. 가령, 여성이 검소하고 소박한 생활을 유지하며 온전히 헌신할 때 그것이 가능한 이유 중 하나는 비단 사랑의 차원이 아닙니다. 남편이라는 절대적 팔루스, 남근을 소유하고 소유할 수 있다는 상상적 환상이 강력하게 작동하기 때문입니다. 여성은 남편을 중심으로 아내로서, 엄마로서 자신을 있는 힘껏 소비하고 소진하기를 멈추지 않습니다. 여기서 다수의 남성들, 즉 강박 구조를 가진 사람들은 자신을 중심으로 쏟아부어지는 채워짐과 자기중심적 만족을 이루면서 가족이라는 합이 맞아지지요. 이런 합의 상태에 균열이 생기고 다시 구멍이 출현하는 상태를 견디지 못할 때, 여성은 쇼핑 중독이나 명품 중독 등가질 수 없는 팔루스를 상징적 물건으로 대체해 끝없이 채워 넣으려는 욕망을 반복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욕망을 채우는 일은 불가능하지요. 히스테리적 주체인 여자는 집요한 요구와 증상의 길을 완고하게 갑니다. 그것은 분석 임상에서 어렵잖게 만나게 되는 현상입니다. 여자의 요구(소녀들의 집요한 요구)를 포기할 수 있도록 안내하려는 기운만 느껴져도 더욱 집요해져서 꼬리에 꼬리를 물며 무의식적 여자의 요구가 얼마나 타당하고 합당한지를 의식적으로 설득하는 데 에너지를 할애합니다. 물론 그 방법은 결코옳지 못한 방법이지만 많은 분석가들은 여자의 요구 앞에서 어떤 해답이나 행로, 경로를 제시하도록 또한 요구받습니다. 히스테리 담화에서 그녀들은 끝없이 자신의 결여를 언어의 세례로 메우려는 시도를 합니다. “그럼 저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라는 전형적인 언어적 요구가 그것이지요. 해답을 요구하는 말에 분석가나 치료자들은 반드시 답해야 할 것 같습니다. 실제 많은 전문가들은 쉼 없이 전문적 솔루션과 해결책들을 제시하지요. 그래야 전문가들은 자신들의 전문성을 훼손당하지 않으니까요. 하지만 그것은 히스테리증자의 게임에 충실히 반응하는 단계에 그치는 일입니다. 더 이상의 언어적 세례, 언어적 지식이 전문가로부터 얻을 수 없다는 알아차림이 무의식적으로라도 일어나면 그녀는 여러 가지 이유와 핑계를 제시하며 그를 떠날 테니까요. 언어를 요구하지만 결코 만족될 수 없는 언어의 결핍에 시달리는 그녀들은 끝없이 멘토와 스승, 종교 지도자들을 찾습니다. 하지만 온전한 말씀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어떤 말씀, 어떤 이상적인 제안에도 우리를 결코 만족할 수 없으며 그것을 반박하거나 빠져나갈 출구를 찾아내기 때문이지요. 히스테리적 여성들은 자신들의 불안과 불만족에 대한 해답을 타자에게 요구하기를 포기하고 스스로가 언어를 생산하고 그 언어를 탐닉하고 향유할 수 있는 지점에까지 가야만 합니다. 아버지의 언어는 아이의 세계가 된다 (p 78 – 81) 아버지인 남성이 전달하는 언어 중에 자녀를 부끄럽게 만들지 않는 언어는 자녀에게 사회적으로 위축되지 않는 정신적 기반을 만들어 줄 수도 있습니다. 이처럼 언어에는 단순히 말이 아닌 그 사람의 정신과 태도, 욕망이 포함되어 있지요. 그런데 많은 여성들은 자신이 이룬 대단한 성취에도 사회적으로 위축되고 소위 낮은 자존감을 보입니다. 이미 사회적 성취를 이룬 여성이지만 부끄러운 아버지를 두었다는 생각에 어른다운 어른의 모습을 보이는 타자를 갈망하기도 합니다. 아버지가 부끄럽다는 뜻은 능력이나 재력, 사회적으로 성공한 모습과는 무관합니다. 대단한 사회적 지위를 가진 아버지라도 경박한 언어를 쏟아내는 사람도 많습니다. 청소 노동자라 하더라도 아이에게 당당한 태도와 언어로 전달한다면 그의 자녀들은 어른이 되어서도 아버지를 부끄러워하기보다 자부심으로삼으니까요. 이토록 아버지의 언어가 중요한데 만약 자신의 눈앞에서 아버지가 다른 사람으로부터 모멸과 경멸을 겪는 장면을 목격한다든지, 어머니가 아버지를 끊임없이 폄하하고 훼손하는 언어로 대한다면, 자녀는 아버지를 잃는 차원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사회적 정체성을 잃고, 라깡적 언어로 풀자면 상상계에서 상징계로 진입을 방해하고, 스스로 설 자리를 못찾게 합니다. 자녀는 큰 결여감에 시달리게 되지요. 계속 반복하는 말입니다만, 아버지가 실제로 존재하지 않아도 어머니의 음성과 언어 속에서 이런 아버지의 기능은 살아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부성적 언어를 준 아버지와 어머니 밑에서 우리는 평생을 위축되고 낮은 자존감에 시달리며 살아야 하냐고 질문을 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부모에게서 얻지 못한 언어적 정체성은 우리가 성인이 되고 아버지의 기능이 담긴 언어를 스스로 발화하면 충분히 회복될 수 있습니다. 성인이 되고 나이가 40대를 넘긴 중년 남성임에도 아버지의 사회적 얼굴을 자신의 얼굴로 사용하는 사람들이 존재합니다. 자존감 높은 아버지 밑에서 남자아이가 자존감 높게 자랐을지라도, 그 아버지를 넘어서는 자신만의 언어를 창안하지 못하면 나이가 아무리 들어도 아빠를 내세우는 소년에 불과합니다. 자식의 언어는 부모의 언어를 토대로 영향을 받는 것은 분명하지만, 우리는 그것마저도 넘어서는 자신만의 언어를 만들어내야 하지요. 그러기 위해서 다시 나 자신으로 돌아가야 하고 내가 나를 싫어하지 않을 수 있는 지점까지 가야 합니다. 내 속에 빼곡한 비난과 판단의 언어들, 가치를 매기는 세속의 언어들로부터 나라는 존재를 받아들이는 언어를 스스로 발화할 수 있어야 합니다. 쪼그라진 아버지를 두어서 열등감과 수치심에 시달렸던 사람들 중에도 그러한 아버지의 기능을 스스로 복원하며 단단한 사회인으로 자리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게 존재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무엇보다 누구로부터가 아닌 내가 나를 사랑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파도에 몸을 맡기려면 몸에 힘을 빼야한다” (p 244 – 245) 우리는 어리석은 질문을 혼잣말처럼 반복적으로 되뇌일 때가 있습니다. '왜 혼자가 되면 안 되고, 왜 나는 고통받아서는 안 되고, 왜 나는 불행해지면 안 되는 것인가...' 물론 프로이트의 기본 명제인 현실 원칙에 따라, 사실 우리는 불쾌한 상황을 피하고 안정된 상황으로 가려는 본성을 지녔습니다. 하지만 인간이 그런 본성을 지녔다고 해서 내가 가진 기준이 완고해도 된다는 말은 아닐 테지요. 절대로 나에게 고통이나 불행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퇴행적 고집은 일어나지도 않은 불행, 닥쳐오지도 않은 외로움에 과도한 불안을 일으키며 갖가지 증상을 만들어 낼 테니까요. 물론 이것은 나약해서가 아니라 충동이 붙들고 있는 어떤 욕망 때문입니다. 타인에게 일어나는 불행이 나에게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으며 타인에게 일어나는 고통이 나에게도 얼마든지 찾아들 수 있습니다. 타인에게 일어나는 가난은 얼마든지 나에게도 닥칠수 있는 일입니다. 수많은 전문가들은 고통으로부터, 불행으로부터 어떻게 하면 행복해질 수 있는지 가르쳐 줄 듯 사람들을 현혹합니다. 그런데 정말 행복해지는 일을 꼭 배워야 할까요? 정말 불행은 찾아오면 안 될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 우리는 막다른 곳에 다다르면 안 되는지 생각해 봅니다. 마치 죽을 듯한 소외와 고립,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는 막다른 곳에 막상 다다르면, 많은 것이 물러나고 죽을 듯한 공포감마저 고요해짐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나에게 어떤 일이든 일어날 수 있고 어떤 불행이든 닥쳐올 수도 있다는 열린 태도가 오히려 세상에 서 있는 나를 담담하게 만듭니다. 고통을 막기 위한 몸부림이 아니라 그저 힘을 빼기만 해도 새로운 가능성이 많이 열리기도 합니다. 파도로부터 있는 힘을 다해 도망쳐도 물보라에 압도되지만, 몸에 힘을 빼는 순간 하늘을보며 파도를 타게 될지도 모를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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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3-24
  • 국민의힘 당대표 김기현 장로에게
    김기현 울산 대암교회 시무장로가 국민의힘 당대표가 됐다. 지난 21일 있었던 국민의힘 기독인회 3월 조찬기도회에서 이를 축하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 기도회에 낯익은 이름들이 등장한다. 배광식, 한기승, 배만석 목사 등이다. 아는 사람들은 알고 있듯이 배광식 목사는 자기 교회 『김기현 장로 대통령 만들기 프로젝트』에 총대를 맨 사람이다. 그래서 본인이 총회장으로 있을 때 뻔질나게, 누가 지적을 하든 말든 김기현 장로에게 순서를 맡겼었다. 그결과 이전에는 없었던 국회조찬기도회 지도목사라는 직함을 꿰찼다. 과연 배광식 목사와 김기현 장로의 대통령 꿈은 이뤄질까? 깜냥이 되나? 이번 당대표 선거가 어떤 모습으로 치뤄졌는지 우리는 두 눈으로 지켜봤다. 초등학교 반장 선거만도 못했다. 유력한 후보인 나경원을 짓누르고, 안철수에게는 "가만 있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라는 조폭 용어로 겁박을 하고, 윤 대통령이 나서서 전폭 지원하지 않았던가? 이것은 김기현이 변방의 영향력 없는 정치인이라는 반증이 아니던가? 그래서 오직 "윤심"을 받들어 모시는 당대표가 되겠다는 충성서약을 통해 간신히 당대표가 됐다. 이런 인물이 대통령이 될 수 있을까? 산기도 열심히 하는 배광식 담임목사와 열심히 기도하면 될지도 모르겠다. 김기현 당대표는“기독교 정신으로 하나님 앞에 겸손함을 잊지 않고 나라와 국민을 위해 모든 헌신과 희생을 아끼지 않겠다”고 말했다. 두렵다. 과연 그가 생각하는 “기독교 정신”은 무엇인가? 과거 역대 기독교 정치인이 어떤 모습을 보였는가? 김영삼, 이명박 장로말이다. 장로이기 때문에 얼마나 많은 교인들이 맹목적으로 표를 줬는가? 그리고 부메랑으로 이들 때문에 교회가 얼마나 많은 욕을 먹었는가? 기독교인 정치인들이여 하나님의 이름을 들먹거리지말고 국민이 바라는 상식선에서 정치인의 역할을 제대로 해주기 바란다. 부디 하나님의 이름에 먹칠하기 않기를 바란다. 나는 앞으로 교회가 욕을 먹지 않기 위해서라도 기독교인 정치인에게 투표하지 않을 것이다. 어차피 정치라는 것이 정도 차이는 있지만 다 사리사욕, 자기 욕망을 위한 것이 아닌가? 욕먹는 것이 정치인의 숙명이라면 당사자와 교회를 위해서 비기독교인에게 표를 던질 것이다. 이렇게 해야하는 현실이 참으로 서글프다. 그래서 김기현 장로가 당대표 된 것에 마냥 축하할 수 없는 이 마음도 헤아려 주기를 바란다. 아주 가끔 김기현 장로의 행보를 멀리서 지켜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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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3-22
  • 【구 충남노회 사태5】구 충남노회 문제, 108회 총회에서 다뤄져야한다!
    작년 9월 107회 총회 현장에서 충남노회는 총대들의 결의로 폐지됐다. 그러나 폐지를 선언했던 권순웅 총회장에 의해 충남노회가 다시 살아났다. 총회장 권순웅 목사와 충남노회폐지후속처리소위원장 김상현 목사의 이름으로 폐지된 충남노회의 노회장과 서기에게 “충남노회 정상화를 위한 소집권”을 부여하는 공문을 보냈기 때문이다. 이 공문 하나로 소위 정기회 측은 잔치집이 됐고, 속회 측은 초상집이 됐다. 3월 13일 기자가 양 측을 만났을 때 이 분위기는 확연했다. 그러나 공문 하나로 10년된 문제가, 그래서 오죽하면 노회원들이 자기 노회를 폐지해 달라고 간청했던 충남노회 문제가 해결되겠는가? 그래도 정기회 측을 만났을 때 칼자루를 쥐었다고 생각한 그들은 "속회 측이 불안해하지 않게 기득권과 재판권을 내려 놓고 충남노회를 정상화하고 하나되게 하겠다"고 했고, "과거 서로 고소, 고발이 난무했는데 법률 논쟁없이 속회 측과 대화로 문제를 풀어나가기를 원한다"고 밝혔다. 그래서 순진했던 기자는 그렇게 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기대했다. 그러나 이어 속회 측을 만났을 때 그들은 정기회 측을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래서 기자는 속회 측의 의심이 지나친 것이 아닌가하는 의구심을 가졌다. 그러나 속회 측의 생각이 맞았다는 것이 곧 드러났다. 정기회 측 이상규 목사는 자기 편을 손 들어준 3월 2일자 총회 공문을 받고 즉시 자신이 충남노회에서 파송한 천안중부교회 임시당회장이라고 하며 3월 9일 임시당회를 열었다. 그리고 임시당회에 참석한 일부 장로들과 교회의 가장 중요한 ‘정관개정’과 ‘김종천 목사 해임’ 건을 공동의회 안건으로 올려놓았다. 그리고 자기 의견을 따르지 않는 장진수 장로와 박경원 장로에 대해 권고사직키로 하는 결의를 했다. 그리고 5일 지나서 4개의 언론사 대표를 만나서는 "속회 측이 불안해하지 않게 기득권과 재판권을 내려 놓고 충남노회를 정상화하고 하나되게 하겠다", "과거 서로 고소, 고발이 난무했는데 법률 논쟁없이 속회 측과 대화로 문제를 풀어나가기를 원한다"고 했다. 이는 충남노회 문제를 객관적으로 다루기 위해 실사하러 내려간 언론사 대표들을 기망(欺罔)한 행동이 아닐 수 없다. 또한 이는 당일 속회 측을 만나 정기회 측의 이러한 생각을 전했을 때 왜 그들이 이 말을 믿지 않았는지에 대한 반증인 것이다. 정기회 측은 분쟁 가운데 있는 천안중부교회 문제에 불법으로 개입하면서 자기들의 속내를 백일하에 드러냈다. (구 충남노회는 정기회 측, 속회 측, 윤00 목사 측으로 3개 분파가 있는데 천안중부교회는 과거 정기회 측에 속해있다 정기회 측이 불법으로 목사 면직을 하자 현재는 윤00 목사 측에 속해 있다.) 앞으로 구 충남노회 문제는 어떻게 되겠는가? 현 107회 총회에서는 더 이상 할 것이 없다. 총회장 권순웅 목사와 충남노회폐지후속처리소위원장 김상현 목사의 이름으로 만든 공문이 최종 결정이기 때문이다. “총회임원회가 본 위원회에 부여한 결의와 사회소송대응시행세칙에 의거 정기회 측(노회장 고영국 목사와 서기 이상규 목사)에 충남노회 정상화를 위한 소집권을 부여하기로 하다” 폐지된 구 충남노회를 살린 사회소송대응시행세칙은 증경총회장 소강석 목사 때 만들어졌지만 소강석 목사와 배광식 증경총회장은 적용하지 않았다. 그리고 3년 만에 권순웅 총회장이 이 법을 적용했다. 권 총회장은 “충남노회에 이 법이 적용된다는 것을 몰랐다. 그러므로 폐지 결의를 한 모든 총대와 자신의 잘못”이라고 말했다. 총회임원회는 정기회 측에 노회 정상화를 위한 “소집권”만을 부여했다. 결국 다시 모여 잘 해보라는 것이다. 그러나 정기회 측은 딱 “소집권”만을 받았다는 것을 망각해서는 안된다. 소집권만이 한계이다. 그러므로 소집권 이상을 벗어난 행동은 모두 불법이다. 결국 총회 임원회는 자신들의 잘못을 깨닫고 욕 먹을 각오를 하고 죽이되든 밥이되든, 치고받든 모여서 해보라는 “소집권”만을 준 것이다. 그러므로 속회 측이 소집에 응하지 않으면 어떻게 할 방법이 없다. 이 와중에 정기회 측은 3월 16일 충남노회 정상화 선언문을 발표했다. 그리고 4월 10일 정기노회 소집 공고했다. 그러나 정기회 측 교회는 8개이며 속회 측 교회는 53개 교회이다. 즉 아무리 정기회 측이 소집 공고를 해도 속회 측이 참석하지 않으면 개회도 할 수 없다. 이제 총회 임원회는 더 이상 구 충남노회를 위해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 사문화된 사회소송대응시행세칙까지 사용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기회 측이 천안중부교회에 보인 행태로 인해 속이 다 들여다 보였다. 이제 정기회 측이 어떤 말을 해도 속회 측은 믿지 않게 됐다. 이제 남은 것은 6개월 뒤 열리는 108회 총회이다. 속회 측은 108회 때 총회장이 될 오정호 목사가 이 문제를 잘 해결해 줄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다. 최근 기독신문 기사를 보니 새로남교회(오정호 목사)가 3월 14일 제108회 총회를 위한 실무 역할을 담당할 당회원 교역자 직원들이 자리를 함께 한 가운데 준비모임을 가졌다고 한다. 이 자리에서 오정호 목사는 설교를 통해 “제108회 총회가 명품 총회, 복된 총회가 될 수 있도록 오시는 분들의 환대와 영접을 위해 최선을 다해 준비하자”고 당부했으며 앞서 제107회 총회를 실무책임자로 치른 바 있는 주다산교회 장로 등이 조언자 역할로 참석해 눈길을 끌었다고 한다. 구 충남노회 문제를 위해 10년을 기다려온 속회 측에게 108회 총회까지 남은 6개월은 긴 시간이 아닐 것이다. 시간은 속회 측편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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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3-19
  • 〖독서일지〗 「가족의 두 얼굴」
    흥미있게 본 재미난 책이다. 심리학자가 본 가족의 적나라한 모습에 대한 해석과 대안이 많이 유익했다. 버릴 것 없는 내용들이다. 일독을 권한다. 이 저자의 다른 책도 봐야겠다. 감추고 부정할수록 더 커지는 상처(p 66-73) 트라우마(trauma)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로 마음에 난 정신적 상처를 말합니다. 그렇다고 마음의 상처를 모두 트라우마라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날카로운 것에 살짝 손을 베었을 때를 떠올려 보면 당장은 아프고 피가 흐르지만, 잘 지혈하고 감싸 준 뒤 며칠이 지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상처가 아뭅니다. 그러나 깊이 베인 상처는 쉬 낫지도 않을뿐더러 치료가 끝난 뒤에도 두고두고 흉이 남습니다. 심리학에서 트라우마라고 할 때는 이처럼 지속적이고 어쩌면 항구적일 수도 있는 마음속 깊은 상처를 말합니다. 트라우마는 익명의 대중이 붐비는 전철이나 공공장소보다 가정에서 더 자주 발생합니다. 가족은 한 번 우연히 마주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지하철에서 접촉한 불쾌한 사람을 다시 만날 확률은 희박하지만, 가족은 싫든 좋든 평생 함께 해야 합니다. 어쩌면 이것이 가족심리학이 별도로 필요한 중요한 이유입니다. 한 조사에 따르면 서구에서는 열 살 이전의 네 아이 중 한 명꼴로 트라우마로 힘겨워하며 성인 두 사람 중 한 명이 트라우마로 인해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간다고 합니다. 아주 운이 없거나 극히 예외적인 경우에만 트라우마가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저명한 프랑스 신경정신과 의사 보리스 시륄니크(Boris Cy-rulnik)는 트라우마는 피해자의 기억 속에 새겨져 마치 그를 따라 다니는 유령처럼 그 사람의 일부가 된다고 말합니다. 트라우마를 만든 사건은 일회적이었을지라도 피해자에게는 매일, 때로는 하루에도 수십 번 그때의 생생한 감정이 치밀어 오릅니다. 특히 성인기보다는 어린 시절 트라우마의 경험이 인생에서 매우 중요한 영향을 미칩니다. 보리스 시륄니크는 그의 저서 『유령의 속삭임」에서 트라우마에 대처하는 자세가 상반된 두 인물을 분석한 바 있습니다. 심리학적으로 흥미로운 연구 대상이기도 한 두 사람을 만나볼까요. 만인의 연인에게 숨겨진 비극 노마진 모턴슨(Norma Jeane Mortenson)은 36세로 짧은 생을 마감한 아름다운 여인이었습니다. 16세에 처음 결혼했지만 4년 만에 이혼했고 두 번째 결혼 상대는 아직까지도 미국인들이 '야구 영웅'으로 가장 먼저 떠올리는 전설의 타자 조 디마지오였습니다. 야구 영웅과 헤어진 뒤 만난 세 번째 남편은 '세일즈맨의 죽음」으로 유명한 아서 밀러입니다. 결혼까지 가지는 않았지만 천재 과학자 아인슈타인도 그녀와 사랑을 나누었던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이제 누구인지 감이 오지요. 그녀는 바로 마릴린 먼로입니다. 타고난 미모로 사진 모델과 영화배우로 활동하면서 마릴린 먼로로 이름을 바꾼 것입니다. 출연한 영화마다 히트하면서 그녀는 곧 할리우드와 브로드웨이 최고의 스타로 떠올랐습니다. 동시대 남성들의 영원한 연인이자 섹스 심벌이었고 사후 5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아름다움과 백치미의 상징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삶은 놀랄 만큼 비극적입니다. 미혼모였던 먼로의 어머니는 알코올 중독으로 정상적인 자녀 양육이 불가능했습니다. 먼로는 일찌감치 고아원에 맡겨졌습니다. 최근에 읽은 동물학 책에 따르면 주인이 두 번 이상 바뀐 경험을 한 애완견은 더 이상 애완견 역할을 하지 못합니다. '버림받은 충격으로 지나치게 우울하거나 공격적인 성향을 갖기 때문입니다. 강아지도 그러한데 사람은 어떠할까요? 먼로는 어린 시절 생모에게 버림받고 여러 고아원과 몇 곳의 위탁 가정에 연달아 맡겨졌습니다. 어느 한 곳에서도 사랑받지 못하고 여러 곳을 전전했으며 아홉 살 나이에 이웃 아저씨에게 성폭행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조금 더 성장하자 주위의 남자들은 그녀를 성적 대상으로만 대했습니다. 그녀는 내게서 따뜻한 사랑과 돌봄을 찾았지만 안타깝게도 그녀를 농락하고 이용해 먹으려는 사람들만 주위에 우글거렸습니다. 성장기가 불우했을지라도 배우로 성공한 뒤 먼로가 가진 아름다움과 스타로서의 명성은 오히려 남자들을 쥐락펴락할 수 있는 놀라운 무기가 될 수도 있었는데 먼로는 그러지 못했습니다. 그녀는 어린 시절 받지 못한 사랑을 남자들에게서 보상받으려 했고 그것은 덫이 되었습니다. 심리학자 앨리스 밀러(Alice Miller)는 어린 시절 부모에게 사랑을 받지 못한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더욱 채워지지 못한 사랑에 집착한다고 말합니다. 먼로는 집착하면 할수록 더욱 상처를 받았습니다. 숱한 염문에도 불구하고 세기의 연인인 먼로는 끝내 약물 과다 복용으로 힘든 삶을 마감했습니다. 버림받음의 트라우마를 경험하지 않으려고 몸부림쳤지만 결국 더 큰 상처를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이 가여운 여인이 트라우마로부터 벗어날 방법은 없었을까요? 그녀가 상처의 수렁에 빠지지 않고 건강하고 주체적인 인생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불행으로 인해 손상된 자아상을 회복하는 것이 필요했습니다. "어린 시절이 불행했다고 성인이 되어서도 반드시 불행한 것은 아니야!", "엄마의 외로운 삶에 가슴이 아프고 아버지의 불성실함에 화가 나지만 나는 달라. 나는 엄마와 같은 삶을 반복하지는 않을 거야." 먼로는 스스로 자아상 회복을 위해 이런 주문을 외우며 자기 존중을 이끌어내려고 노력했어야 합니다. 트라우마를 극복한 미운 오리새끼 어린 시절 트라우마를 가진 사람이 먼로처럼 다 비극적인 삶을 사는 것은 아닙니다. 대표적으로 동화 작가 안데르센이 있습니다. 1805년 그는 매춘부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포주인 외할머니는 딸을 억지로 길거리로 내보내 돈을 벌게 했습니다. 딸이 안가려고 하면 뺨을 때려서라도 몸을 팔 것을 강요했습니다. 매춘을 하던 도중 임신이 된 그녀는 집을 뛰쳐나와 한 남자를 만나 결혼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군인이었던 남편은 광기의 발작 속에서 자살하였으며 그녀도 알코올 중독으로 사망합니다. 안데르센의 어린 시절은 중독, 폭력, 매춘, 가난으로 점철되었습니다. 한 인간의 출발점에서 이보다 더 불행한 조건을 갖춘 이가 또 있을까 싶습니다. 그러나 이런 암울한 조건에서 안데르센은 먼로와는 다른 삶을 선택합니다. 비록 불행한 가정사를 가졌으나 글을 배우고 시를 쓰면서 새로운 문화에 눈을 떴습니다. 그에게 관심을 가져준 이들과 교감을 나누고 창작의 기쁨 속에 과거의 그림자를 다스릴 줄 알았습니다. 그는 결코 과거의 불행을 회피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문학 작품에는 불행과 행복이라는 두 세계가 모두 공존합니다. 만일 그가 어린 시절의 불행을 저주하는 데만 몰두했다면 그의 아름다운 동화 작품들은 세상에 나오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불행한 과거에 사로잡히지 않고 행복을 향한 날갯짓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던 안데르센의 내면을 가장 잘 반영한 작품이 대표작 「미운 오리새끼」입니다. 미운 오리새끼는 주변으로부터 따돌림 당하고 무시당하는 슬픈 과거를 지녔습니다. 안데르센은 이 불행을 없는 일로 지우려 하지 않습니다. 불행을 인정하고 행복으로 향하는 노력을 포기하지 않았기에 마침내 백조로 변한 '미운 오리새끼' 이야기를 쓸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안데르센 자신의 자전적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안데르센도 어린 시절의 아픔이 있지만 다른 선택을 했습니다. 안데르센은 그의 힘든 어린 시절에만 머물지 않았습니다. 현실의 고통을 단순히 지워 버리고 싶은 기억으로만 치부하지 않고 행복으로 가기 위한 여정이라는 적극적 관점을 가졌습니다. 자신의 트라우마와 불행을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았기에 안데르센은 '「성냥팔이 소녀」, 「미운 오리새끼」, 「왕자와 거지」 같은 슬프면서도 따뜻한, 깊은 여운을 남기는 명작 동화를 남길 수 있었습니다. 안데르센이 자신의 불행에 긍정적인 의미를 부여한 것은 일종의 관점의 변화이자 가치관의 변화, 즉 패러다임(paradigm)의 변화입니다. 상처와 불행을 치유하는 데에는 이렇게 패러다임의 변화가 꼭 필요합니다. 똥떡, 상처 치유의 지혜 오늘날처럼 과학과 심리학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대에 우리 조상들이 트라우마에 대처하는 지혜를 엿볼 수 있는 풍습입니다. 똥떡은 어린이가 변을 보다가 똥통에 빠졌을 때 부모가 급하게 만들어 주는 떡을 말합니다. 구덩이를 파서 만든 똥통, 즉 재래식 변소에서 어린아이가 변을 보다가 빠지는 일이 비일비재했고 목숨을 잃는 경우도 생기곤 했습니다. 어린아이가 똥통에 빠지면 얼마나 놀라고 두렵겠습니까. 혐오스러운 냄새, 수치스러움과 불안감까지 뭉쳐져 아이는 변소 가는 일에 대해 커다란 두려움을 갖게 됩니다. 그렇다고 변소에 안 갈 수도 없는 일. 변소에 갈 때마다 아이는 똥통에 빠졌을 때의 불쾌하고 공포스러운 기억을 떠올리게 됩니다. 트라우마가 증폭되는 과정입니다. 현명한 부모들은 이런 아이의 마음을 헤아려 재빨리 집에 있는 재료로 똥떡을 만들었습니다. 똥떡으로 부모들은 제를 올려 부정한 귀신이 타지 않기를 빈 뒤 온 동네에 나누어 주었습니다. 아이는 직접 떡을 들고 동네를 돌며 “똥떡, 똥떡” 하고 크게 소리를 칩니다. 예기치 않은 간식거리를 받아든 이웃들은 아이에게 좋은 덕담을 해주기 마련입니다. “녀석 놀랐겠구나” 하며 머리도 쓰다듬어 줍니다. 아이는 이웃들로부터 관심과 격려를 받으면서 자연히 똥통에 빠진 황당한 경험을 대수롭지 않은 일로 극복하게 됩니다. 바로 이것이 심리학에서 말하는 '직면'입니다. 자신이 경험한 현실을 외면하거나 없었던 일로 애써 피하는 것이 아니라 당당하게 마주보는 것을 말합니다. 똥떡은 변소에 빠진 아이의 불안, 수치, 공포를 치유하는 놀라운 트라우마 치료 메커니즘이었던 것입니다. 이쯤 되면 왜 똥떡이 특별한 재료나 형식 없이 급하게 만들어졌는지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조상들은 사건이 발생한 즉시 똥떡을 만들어 아이의 상처가 더 깊어지기 전에 회복시키려 했던 것입니다. 아이는 부모가 만들어 준 똥떡을 통해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고 다음 날 다시 변소에 갈 수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직면하는 것이 중요하다 트라우마 치료는 가능한 한 빠른 시간 내에 무엇보다 직면을 통해 이루어져야 합니다. 핵심은 가족의 따뜻한 배려와 공감, 적극적인 관심입니다. 조상들이라고 해서 모든 가정에서 똥떡을 만들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아마도 자녀를 소중하게 여기는 가정에서 내려온 전통이었을 것입니다. 모든 트라우마의 치료에는 이러한 '똥떡'이 필요합니다. 트라우마를 입으면 우리 마음은 자동으로 방어기제를 작동시킵니다. 그런데 이 방어기제는 상처를 치유하는 것이 아니라 은폐하고 회피시키는 데 불과하기 때문에 근본 해결책이 되지 못할뿐더러 대개 일을 더 키우곤 합니다. 따라서 방어기제가 작동하기 전에 트라우마에 대한 조기 치료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트라우마 피해자에 대한 따뜻한 배려와 공감, 지지는 직면이라는 힘든 과정에서 드러나는 상처를 아물게 하는 힘으로 작용합니다.
    • 오피니언
    • 책소개
    2023-03-18
  • 〖독서일지〗 「배우의 목소리」
    30대 무명(?) 여배우인 연지라는 작가가 쓴 에세이다. 어쩌다 대출해 보게 됐는데 글 실력이 애사롭지 않아 흥미롭게 계속해서 읽었다. 글을 잘 쓴다. 배우의 길을 가기 위한 고충과 거기서 생긴 여러 느낌들을 잘 적어 재밌게 읽었다. 모든 글들이 좋았는데 두 가지만 올려본다. 글을 쓰는 것의 유익에 대해서는 동감한다. 글 쓰기는 치료 효과가 있다고하니 글 쓰기를 꾸준히 해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쓰다가 책으로 내는 경우도 많다. 또한 ‘배우니까 배우다’는 재치있는 글이다. 배워놓으면 언젠가 다 쓸 일이 있으니 배우기를 쉬지 않는 것이 중요함을 일깨운다. 드라마를 안봐 잘 모르는 배우라 유튜브 검색해 보니 교보문고에서 저자 소개 동영상이 있어 링크를 걸어본다. 열심히 하니 잘 되기를 바래본다. 당신에게도 대나무 숲이 있나요?: 글을 쓴다는 것(p. 112-118) 매년 다이어리를 산다. 큰 서점에 가 한두 바퀴 돌며 아이 쇼핑(?)을 한 후 문구 센터에 가 본다. 다시 몇 바퀴를 돌며 새해에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쓸 다이어리를 고른다. 엄청 심혈을 기울인다. 1년을 쓸 거니까. 마음에 드는 디자인과 색상의 다이어리를 찾으면 1년을 잘 보낼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고심 끝에 산 다이어리는 모서리 부분이라도 뭉개질까 봐 아기처럼 안고 집에 간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다이어리를 조심스럽게 펼친다. 각각의 색상을 뽐내는 예쁜 펜들도 쭉 나열한다. 자, 기념일부터 체크를 시작하자. 오늘은 쓸 게 없으니까. 하루, 이틀.... 조심스럽게 펼친 그 다이어리는 열흘도 채 쓰지 못한다. 술 먹고 썼는지 점점 갈겨 쓴 글씨와 오늘의 일이 아닌 그제의 일을 숙제처럼 쓰는 나를 보며 '역시 다이어리 쓰는 것도 근성이군' 하며 어딘가에 처박아 둔다. 그렇게 어딘가에 처박혀진 다이어리를 세 보면 다섯 손가락은 족히 넘을 것이다. 그런 내가 이렇게 긴 글을 쓴다는 것은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하루 몇 줄의 일기도 못 쓰면서 무슨 글이람. 하지만 나에게도 대나무 숲은 필요했나 보다. 언니를 통해 글 쓰는 플랫폼을 알게 되었다. 거기서 글을 쓰려면 작가 신청을 해야 한단다. 작가 신청은 신청서에 내가 어떤 사람인지, 그리고 어떤 글을 쓸 것인지 작성한 뒤, 그동안 써 놓았던 글을 첨부하는 방식이었다. 며칠 뒤, 떨어졌다는 메일이 왔다. 어느 정도 예상한 바였지만 오기가 생겼다. 나에게 떨어지는 일이란, 연기 오디션 혹은 로또 당첨에서만 허용되는 거였는데... '글 좀 쓰겠다는데 떨어뜨려?'라는 오기가 들었다. 그래서 생각을 조금 더 정리하고 글도 더 많이 다듬어 두 번째 신청을 했다. 며칠 뒤 메일함에는, “축하합니다. 작가가 되셨습니다.”라는 글이 도착해 있었다. 이게 뭐라고 눈이 초롱초롱해지며 잔뜩 들떠서 노트북 화면을 캡처했었다. 나도 이제 글을 써서 '발간'이라는 것을 할 수 있는 것이었다. 발간을 하면 내 글을 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볼 수 있고 소통도 할 수 있었다. 마치, 열린 대나무 숲 느낌이랄까. 내가 열어 놓은 대나무 숲에서는 사람들이 나를 '작가님'이라고 부른다. 그 플랫폼에서는 대부분 그렇게 부르지만 '작가님'이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여간 마음이 근질근질한게 아니다. '배우님' 아니면 '쌤'으로만 불렸는데 작가라니. 분명 광대가 올라가는 일이었다.내 대나무 숲에 본격적으로 내 이야기를 써 본다. 일기보다 나만의 메시지가 조금 더 담긴 어떤 다짐의 글. 얼마 후, 첫 댓글이 달렸다. 배우님, 작가님을 응원한다고. 나를 응원한다는 댓글들이 달린 것을 보며 가슴이 몽글몽글 따듯해 지는 게 느껴졌다. 그렇게 익명의 누군가들에게 큰 힘을 받았다. 내 대나무 숲은 대부분 아픈 기억, 좋지 않았던 경험을 털어 내는 곳이기에 우울할 만도 한데, 사람들은 '내 잘못이 아니다'라며 나를 감싸 주었다. 보이지 않는 이들의 위로에 가끔 눈물이 차오르기도 했다. 그렇게 책상에 앉아 노트북을 켜고 키보드를 두드리는 날이 10일을 훌쩍 넘어 100일도 훨씬 넘었다. 나는 나에게 있었던 안 좋은 일들은 털어내고, 좋은 일들은 하나라도 더 기억하고 싶어 글을 써 보기로 했다. 우울증에 좋은 방법이라고 의사 선생님이 알려 주신 것도 아니었고, 돈을 주겠다며 누가 써 달라 한 것도 아니었다. 그랬다면 하나의 과제로 느껴져 쓰기 싫었을 것이다. 그저 온전히 나를 위해서, 하얀 창에 깜박이는 커서를 움직였다. 책을 많이 읽는 편은 아니지만, 살면서 책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위로가 필요할 땐 나보다 더 힘든 삶을 살아 낸 저자의 에세이를 읽고, 재미없는 인생에 친구가 필요할 땐 추리소설을, 열심히 살고 싶은 자극이 필요할 땐 자기계발 서적 매대 앞을 어슬렁거렸다. 내 상황에 맞춰 책을 찾아 읽은 셈이다. 책에 답이 있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독서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읽는 일과 더불어 쓰는 일은 더욱더 추천할 만한일인 것 같다. 끄적끄적거리며 쓰다 보면 느낀다. 뭔가 정리되는 느낌. 뭔가 선명해지는 느낌. 혹시 그런 적 있지 않은가? 친구에게 고민을 이야기하다가 내가 원하는 답을 찾거나 혹은 갈팡질팡하던 일에 시원한 결정을 내린 경험. 이야기를 들어 주던 상대에겐 '답정너'라 불릴 수 있지만 말이다. 하지만 말을 하다 보면 알게 된다. 내가 진정 원하는 것을. 내가 해야 하는 선택을. 아, 한 가지 얘기하자면 나는 말을 잘하지 못한다. 배우가 말을 못 해서 어떡하냐 걱정하시겠지만, 그래도 어쩌겠는가. 이렇게 생겨 먹은 것을. 아무튼 말을 조리 있게 하지 못하겠다. 말을 잘하고 싶다고 마음을 먹으면 먹을수록 여기서 새고 저기서 새고 헛소리가 나온다. 그러다 보니 말을 아끼게 되었다. 사적인 자리에서 대화를 하다 보면 주도권을 뺏기기 일쑤라, 늘 내 이야기보따리는 동전 가득한 저금통처럼 무거웠다. 차곡차곡 쌓여 내 마음 한쪽에 턱 하니 놓여 있었다. 어떻게 빼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쓰다 보니, 저금통 한쪽을 뚫어 동전을 하나씩 빼내는 것 같이 점점 마음이 가벼워졌다. 빼낸 동전으로 자판기에서 탄산음료를 뽑아 한 번에 들이켠 것 같이 상쾌해졌다. 말로 다 할 수 없었던 이야기들을 글로는 얼마든지 쓸 수 있었다. 말로 했다면 밤에 누워 했던 말들을 되뇌며 전전긍긍했을 텐데, 글은 쓰고 나서도 뒷맛이 찜찜하지 않았다. "얜 뭐지?" 싶은 헛소리를 해도 쪽팔리지 않았고, 누군가에게 말이 끊겨 똥 싸다 끊고 나온 것 같은 느낌도 들지 않았다. 그야말로 신세계였다. 거기다 마음을 청소하는 느낌이랄까. 대충 집어넣어 놨던 기억들을 깨끗이 닦고 다림질해 예쁘게 '마음' 상자에 넣어 놓는 느낌이었다. 외면했던 안 좋은 기억도 용기 내어 먼지를 털고 '경험'이라는 상자에 넣을 수 있다. 그래서 글쓰기 초보인 내가, 감히 주변 사람들에게 글 쓰는 것을 추천한다. 나는 악필에 꾸미는 것도 못해 다이어리에 일기 쓰는 것은 포기했지만, 다이어리든, 수첩이든, 어디든 상관없다. 시원하고 상쾌한 혼자만의 대나무 숲을 갖고 싶은 분들에게 글을 쓰는 것을 추천한다. 내 생각을 드러내는 일이 쉬운 것은 아니지만, 누군가와의 소통을 원하는 분이라면 혼자 쓰는 글에서 멈추지 말고 쓴 글을 공개적으로 공유하는 것까지 나아갔으면 좋겠다. 어떤 플랫폼이든 상관없다. 글을 쓴다는 것은 나라는 인간을 완전히 드러내는 일이다. 그래서 쉽지 않다. 하지만 한 번 정도는 시도해 보면 좋겠다. 글을 쓴다는 이 작은 용기가 상처에 반창고를 붙여 주고 따듯한 손길로 등을 쓰다듬어 줄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당신에게도 이런 대나무 숲이 있었으면 좋겠다. 배우니까 배우다(p. 258-260): 언제 써먹을지는 몰라도 어렸을 때부터 그랬다. 똥인지 된장인지 찍어 먹...진 않아도 냄새까지 맡아 봐야 성이 찼다. 돌다리를 두들겨 보며 가기는커녕 첨벙첨벙 빠져 가며 뛰어다녔다. '그냥 하면 되지', '되면 좋고 안 돼도 경험'이라는 말을 써 가며 늘 몸으로 부딪쳤다. 주변 사람들은 이런 나의 성격에 대해 추진력이라고 쓰고, 막무가내라 읽었다. 늦은 시각 한 에이전시에서 연락이 왔다. 골프 관련 촬영이 있는데 스윙을 할 줄 아냐며, 할 줄 안다면 캐스팅 후보에 올리겠다고. 순간 거짓말을 했다. 할 줄 안다고. 전화를 끊자마자 바로 초록창에 골프 레슨을 검색하기 시작했다. 예상 촬영 날짜까지 약 10일이 남은 상황. 일반적으로 골프 레슨은 1회에 15~20분을 알려 주는 곳이 대부분이었다. 그 정도로는 10일 만에 해내지 못할 것 같았다. 그래서 골프 스쿨이라는 곳을 찾았다. 50분 수업 후 1시간 연습할 시간을 준다는 곳이었다. 당장 다음 날 방문해 프로님께 애걸복걸했다. 일주일 안에 스윙 폼이 나와야 한다고. 프로님은 곤란한 표정으로 말씀하셨다. “저는 마술사가 아니에요." 하지만 하루 2시간씩 배우고 연습한다면 못 할 거 있나 싶은 자만심은 사그라들지 않았다. 골프채 잡는 법도, 그냥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일단 시작했다. 매일 두 시간가량 배우고 집에서는 유튜브로 용어와 다른 사람들이 스윙하는 자세를 탐구(?)했다. 자세를 잡느라 허리는 계속 아파 왔지만 멈출 수가 없었다. 그냥 미친 듯이 했다. 마치 골프 선수 역할을 맡은 것마냥. 간절함 덕분인지 헛스윙하며 공 근처도 닿지 못했던 골프채는 점점 타점을 찾아가더니 공을 쳐내기 시작했다. 골프채가 때린 공은 맑고 경쾌한 소리를 내며 날아갔고 그때만큼은 허리 통증이 싹 씻겨 나갔다. 그렇게 10일 중 7일이 지났다. 나는 느끼고 있었다. 최종 캐스팅에서 떨어졌다는 사실을. 연락이 없으면 암묵적으로 떨어진 것이다. 그럼에도 남은 3일을 꽉꽉 채웠다. 또 언제 골프 관련 촬영으로 연락이 올지 모르니까. 배우에게 헛된 경험, 필요 없는 재주는 없다 여기며 오늘도 자세를 잡아 본다. 아이코, 허리야. 배우는 늘 배워야 해서 배우인가 보다. Epilogue: 과정 속의 내가 과정 속의 그대들에게 꽤나 긴 여행을 마치고 집에 돌아온 기분입니다. 글을 쓰며 20대 초반의 나로 돌아가 보기도 하고 현재의 나를 멀리서 바라보기도 했습니다. 저는 아직도 무명의 배우이고, 우울증 약을 먹고 있으며, 오디션 당락에 따라 일희일비하는 과정 속에 있습니다. 내 인생이 해피엔딩인지 새드엔딩인지 모를 아직 '과정'을 지나고 있는 내가 그대들과 나누고싶은 말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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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3-16
  • 『생명사역 컨퍼런스』, 세속 가치관의 복음 장사꾼인가?
    권성수 원로목사가 진행하는 제7회 『생명사역 컨퍼런스』를 소개하는 기독신문 광고 문구를 보고 기겁했다. “대구동신교회는 지난 22년 동안 생명사역을 통해 출석 성도의 수는 800명에서 8,000명으로, 교회 예산은 12배 성장을 이루었습니다” 그러면 “이 컨퍼런스를 하면 이런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말인가?”, “이 수치가 생명사역하고 무슨 상관이 있는가?” 기가찰 노릇이다. 필자가 40세에 부임한 동암교회는 본당과 중2층에 4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였다. 그러나 교인은 100여명이 남아 있었다. 4차례나 담임목사를 내쫓는 과정에서 교세는 쪼르라 들었고, 주변 평이 좋이 않아 전도는 어려웠으며, 교인들이 대부분 멀리서 오기에 주중 사역이 쉽지 않은 교회였다. 부임해서 15년 만에 5번째로 나오기까지 머리 속에 늘 부흥과 성장을 갈망했다. 질적이든 양적이든 이것이 절실했다. 그러나 필자는 총신대학목회전문대학원에서 교회성장학으로 Th.D학위를 받았지만 교회성장학 박사학위도 소용없었다. 그리고 “평신도를 깨운다”, “두날개”, “알파코스”등등 좋다는 세미나는 다 좇아다녀봤지만 그때 뿐이었다. 담임목회할 때 이 『생명사역 컨퍼런스』에 참석했다면 나도 교인 수 열배의 성장, 재정 12배 성장을 할 수 있었을까? 참으로 이 광고 문구를 보는 사람들의 마음을 혹하게 하는 달콤한 광고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알지 않는가? 세미나를 해도 안된다는 것을 혹시나 1% 또는 잘해야 5%나 될까? 어떤 선배는 이런저런 세미나 좇아다닐 시간에 더 기도하고 연구하라는 조언을 하기도 했다. 요즘은 세미나와 컨퍼런스가 많이 사라졌다. 명맥을 유지하는 것은 “평신도를 깨운다”, “두날개” 정도이다. 그러나 이것도 유행의 끝자락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뭔가 새로운 것이 나와야하는데 현재 보이는 것이 없다. 그런 가운데 『생명사역 컨퍼런스』가 7번째로 한다니 아직은 신생이다. 그러나 다른 것처럼 붐이 되지는 못한 것 같다. 주변에 이 컨퍼런스에 참석했다는 사람을 본적이 없기 때문이다. 프로그램이 소개되어 있지 않기에 3일 동안 무엇을 가르치는지 알지 못하나 해아래 새것이 있겠는가? 권성수 원로 목사는 필자가 신대원 1학년 때인 1989년 부임 초기 교수였다. 자신이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재학시 제출해 A인가 A플러스인가를 받은 영어로된 페이퍼를 복사해 수업했던 기억이 있다. 그러다 이후 교수에서 목회자로 변신했다. 그런가보다 했는데 벌써 세월이 흘러 원로가 됐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선교사나 교수가 담임목회 하는 것을 좋게 보지 않는다. 선교사직이나 교수직이 큰 교회 담임으로 가는 도약대 역할을 하는 걸 많이 봤기 때문이다. 권 원로목사 부임 당시 교인수가 800명이면 대구에서는 큰 교회이다. 교수라는 이력이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제자가 가야할 자리를 교수가 갔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그리고 목회하는 22년 동안 800명에서 8000명으로 성장했다면 이것이 과연 그 주변에서 목회하는 제자들에게 자랑스러운 결과물인가? 그 주변에 권성수 원로목사 같은 스펙 있는 목사는 없을테니 목사로서 경쟁력은 있었을 것이다. 대기업이 중요하지만 중소기업도 필요하다. 그래서 대기업 업종제한을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작은 시장을 살리기 위해 대형 마트도 영업제한을 하는 것이 세상이다. 동네에 대형마트가 들어서면 동네 가게는 타격을 입는다. 필자도 다이소를 간 이후 동네 문구점을 가지 않는다. 그러나 목회에는 이런 제한이 없다. 그저 자기 교회만 잘되면 되는가? 과연 대구동신교회 근처에 있는 교회들은 그 교회를 어떻게 평가할까? 큰 교회로서, 교수 출신 목사로서 근처 교회와 상생하고자 했는가? 아니면 블랙홀처럼 근처 교회에 갈 사람들을 빨아들였는가? 권성수 원로목사는 자기가 만든 『생명사역 컨퍼런스』를 계속하기 위해 『생명사역 컨퍼런스』를 수료한 문대원 목사를 후임자로 결정했다. 몇 안되는 지원자 중 이 컨퍼런스를 수료한 것이 큰 점수 비중을 차지했다. 이 또한 자기가 만든 것이 계속 유지되기 원하는 원로목사의 욕심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한다. 이것은 원로의 또 다른 목회 간섭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왜 외면하는가? 원로라면 교회 사역에서 손을 놓아야하는 것이 맞지 않는가? 목회 사역을 은퇴한 목사가 진행하는 컨퍼런스가 목회 사역을 하는 목사들에게 얼마나 도움이 될까? 부디 이 『생명사역 컨퍼런스』에 참석하는 모든 참석자들의 교회가 모두 대구동신교회처럼 10배의 숫적인 부흥과 14배의 재정적 성장을 이루기를 소원한다. 컨퍼런스 광고 문구가 은연 중 이것을 보장하지 않는가? “대구동신교회는 지난 22년 동안 생명사역을 통해 출석 성도의 수는 800명에서 8,000명으로, 교회 예산은 12배 성장을 이루었습니다” 사족으로, 300명에 등록비 10만원이면 삼일만에 3,000만원으로 큰 수입이다. 교회 예산이 12배 성장하는데 많은 도움이 됐을 것 같다.
    • 오피니언
    • 논단
    2023-03-16
  • 〖독서일지〗 「마흔에게 그림책이 들려준 말」
    필자가 2000년부터 담임으로 나간 2005년까지 승동교회에서 함께 부목사 생활을 했던 목사님의 사모님이 쓰신 책이다. 그 당시 승동교회에는 4명의 부목사가 있었는데 때가 되어 각자의 길로 떠나갔다. 한분은 미국으로, 한분은 개척교회 후 다른 교회 합병하고 담임목회로, 또 나는 15년 담임 후 인터넷 신문사 발행인으로 살고 있다. 그리고 이 책을 쓴 사모님의 목사님은 하나님의 소명을 따르는 길을 가고 있다. 이 책을 두 번 읽었다. 사모이기에 생긴 여러 일들을 그림책을 통해 해결해 가는 이야기가 매력적이다. 일반책이든 그림책이든 그 안에는 우리의 상처를 치유하는 효과가 있다. 일독을 권하고, 담임목회 때 기회가 되면 사모님을 간증 강사나 그림책 강사로 모실려고 했는데 그만 사임하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 기사를 보고, 책 전체를 읽어 본 후 사모님을 강사로 초청하시기를 강추드린다. 최근 저자의 두 번째 책 『사춘기 엄마의 그림책 수업』이 나왔는데 곧 사볼 계획이다. "다시 가드를 올리고" (p 156-164) 그럼에도 다시 걷다 고정순 글·그림, 《가드를 올리고》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감사해요, 주님 뜻을 믿기 때문이죠. 어릴 적 거침없이 불렀던 찬양의 한 소절이다. 그때 저 찬양의 의미를 알았다면 웃으며 부를 수 있었을까? 내가 계획하고 바라던 것들이 무너지고 흔들려도 주님의 뜻을 믿으며 감사할 수 있다고 그렇게 목소리 높여 찬양할 수 있었을까?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감사할 수 있다는 건 치기 어린 고백이었음을 수원 생활을 시작하며 깨닫게 되었다. 당시 우리의 모습과 겹쳐지는 그림책이 있다. 바로 고정순 작가님의 《가드를 올리고》이다. 이 책은 우리의 삶을 링 위에 선 복서의 모습으로, 산을 오르는 여정으로 보여준다. 이 그림책을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수원에서 살아낸 우리 가족의 모습이 보인다. 인생이 우리에게 날리는 주먹에 휘청거리고, 넘어지고, 때론 도망가고 싶었던 그때의 내 모습이 보인다. 다시 가드를 올리고. 링 위에 한 사람이 서 있다. 그는 가벼운 몸짓으로 상대를 바라보며 거침없이 주먹을 휘두른다. 휘두른 주먹을 손쉽게 피한 상대가 사정없이 그에게 주먹을 날린다. 연이어 퍼붓는 주먹 세례에 휘청거리며 주저앉는다. 남편과 결혼하고 나는 하루아침에 사모가 되었다. 모든게 조심스럽고 서툴렀다. 그렇게 사모로 산 지 10년, 나는 완벽하게 그림자로 살고 있었다. 교인 중에 속해 눈에 띄지 않으면서 교인 아닌 교인으로 사는 것이 사모로서 나의 사명인 양 살았다. 남편이 담임 목사가 되면 그때 하고 싶은 일을 시작하면 된다고 나를 다독이면서 아이들과 남편의 완벽한 도우미로 살았다. 그러던 중 남편이 대전에 있는 한 교회에 담임 목사로 와 달라는 청을 받았다. 시간을 내어 온 가족이 교회를 보러 갔다. 대학교 앞에 위치한 교회라 청년도 많고, 재미있게 목회를 할 수 있는 교회였다. 나도 아이들도 우리 교회라며 몇 번을 바라보며 서울로 올라왔다. 그러나 몇 주 후 청빙 취소 통보를 받았다. 이미 부목사로 있던 교회에서는 사표가 수리되었고 온 교인에게 축하 인사를 받았던 터라 우리는 이 소식을 알리지않고 마지막 인사를 드렸다. 대전의 교회를 원망할 사이도 없이 그야말로 벼랑 끝에 서게 된 것이다. 우리를 기다리는 것은 '교회 개척'이라는, 내가 꼭 피하고 싶었던 상황이었다. 바람이 부는 곳에 오르고 싶다던 그림책 속 그는 이제 더 이상 바람 부는 정상을 바라보지 않는다. 한참을 쓰러져 있던 멍든 얼굴의 사내는 지금 자기가 선 곳의 바람을 느낄 수 있게 되었다. 보이지 않는 정상을 바라보며 버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선 그곳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느끼며 다시 가드를 올린다. 시퍼런 멍이 가득한 그의 얼굴에 어느새 미소가 가득하다. 수원에 온지 10년, 우리는 이 길을 포기하지 않고 걸어가고 있다. 쉽게 오를 것 같았던 정상의 모습은 잊어버린 지 오래다. 내가 꿈꾸던 무대에서 강한 주먹을 휘두르며 거침없이 나아가고 싶었다. 하지만 내가 바라던 강한 주먹 대신 쏟아지는 삶의 주먹에 맞고 쓰러져도 다시 일어날 수 있는 힘을 배웠다. 여전히 비틀거리지만 내가 누구인지, 내가 걷고 싶은 길이 어디인지, 나의 소명이 무엇인지 잊지 않는 것. 그것이 나를 다시 일어나게 한다. 쓰러지고 넘어지며 우리는 여전히 링 위에 서 있다. 소명은 의지에서 나오지 않는다. 그것은 듣는 데서부터 출발한다. 소명이란 성취해야 할 어떤 목표가 아니라 이미 주어져 있는 선물이다.(파커 J. 파머, <삶이 내게 말을 걸어올 때》한문화, p. 26.) 마흔의 시간을 통해, 창조된 모습 그대로의 나를 사랑하고 내게 선물로 주신 오늘에 감사하는 것이 나에게 주어진 일이라는 것을, 내가 오늘을 살아가는 모습을 통해 주님의 이름이 드러나는 것이 목회자로서의 본분이며 소명임을 배웠다. 이런 소명을 따르는 삶조차 내 믿음과 내 힘이 아니라 오직 주님의 은혜로 사는 것임을 이제는 안다.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고 있던, '실패한 목회'라는 시선으로 바라보던 우리의 모습이 이제는 우리에게 꼭 맞는 우리만의 길을 걷고 있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흔들림의 시간을 통해 나의 반짝이는 재능이 무엇인지도 알게 되었다. 내세울 만한 특별함이 없기에 무엇이든 꾸준히 했다. 《빨간 나무》를 처음 만나고 그림책을 더 깊이있게 알고 싶었다. 그때는 내가 살고 있는 수원에 그림책과 관련 있는 강의가 지금처럼 많지 않았다. 교육기관의 강의 계획안을 살펴보며 그림책과 관련된 내용이 포함된 강의들을 모두 찾아 듣기 시작했다. 또 무작정 도서관에 가서 어린이 서가에서 시간을 보냈다. 우리 아이들에게 읽어 줄 때와 달리, 오롯이 나의 그림책으로 만났다. 그림책을 찾아볼수록 새로운 그림책은 얼마나 많던지. 정신없이 그림책에 빠져들었다. 그뿐 아니라 어느 한 분야든 책 100권을 읽으면 전문가가 될 수 있다는 말을 기억하며 그림책 관련 이론서와 활용서를 찾아 읽기 시작했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단순하고 효율성 없는 방식이었지만 그 시간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있다. 그저 좋아서 열정 가득한 마음으로 시작한 그림책 사랑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나는 여전히 그림책 관련 이론서를 챙겨 본다. 매달 신간 그림책을 구입해 읽고, 듣고 싶은 그림책 관련 강의를 찾아 수강한다. 때론 무모해 보이는 도전을 했다. 초보 그림책 활동가 시절, 연말이면 여기저기 교육기관의 강사 채용 공고를 챙겨 보고 원서를 냈다. 나 같은 초보 강사에게 강의와 수업을 맡겨주는 기관은 거의 없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원서를 접수하는 것까지가 내가 해야 할 일이라 생각하며 매해 접수를 했다. 그렇게 작성해 놓은 프로그램은 좋은 강의 자료가 되었다. 비록 당장 결과가 없을지라도 나만의 속도로 꾸준히 움직였다. 더디지만 움직이는 만큼 나는 조금씩 자랐다. 가끔 방향을 잃어버릴지라도 포기하지 않았다. 그렇게 지내다 보니 나의 꾸준함은 특별한 재능이 되었다. 넘어지고 또 넘어져도 결국 다시 가드를 올리고 일어났던 그림책 속 주인공처럼, 그저 꾸준히 나도 그렇게 걸어간다. 그림책으로 품었던 처음 마음을 지키며 걸어간다. 깊은 구덩이에 빠져 있는 나에게 손을 내밀어 준 그림책, 그림책이 건네준 위로와 즐거움을 전해 주는 통로이고 싶다던 그 마음을 지키며 걷는다. 이 이야기가 내 마음속에 더 자리 잡은 것은 마지막 장에 나오는 주인공 사내의 모습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기대하는 결말은 주인공이 다시 일어나 상대를 넘어뜨리고 만세를 부르는 장면일 것이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멍이 가득한 얼굴에 다시 가드를 올리고 있다. 가슴 뛰는 일을 하고 자신의 소명을 지키며 살아가는 삶. 이 여정의 끝에 안락하고 편안한 결승점이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곳에서 삶을 시작할 때 10년만 버티면 무엇이 될 수 있을 거라고 기대했다. 우리의 목회도, 그림책 활동도. 하지만 그 시간이 지나도 별반 달라진 것은 없다. 때론 주변 사람들의 응원과 지지 대신, 걱정과 비웃음 을 받으며 걷는다. 시린 바람을 맞으며 아무 변화 없는 시절을 보낸다. 하지만 그 바람 덕에 우리는, 나는 단단해진다. 이제 나의 길에서 성공과 실패라는 단어가 사라졌다. 내가 꿈꾸는 대로 걸어가는 나의 삶이, 우리의 목회가 소중하다. 더 이상 산 위의 삶을 기대하지 않는다. 내가 두 발을 딛고 있는 곳, 그곳이 좁은 길과 골짜기일지라도 감사할 수 있다. 매일 매일 다른 내음과 빛깔로 불어오는 바람 앞에서 미소 지을 수 있다. 화려하고 시선을 사로잡는 아름다운 모습을 부러워했던 내가, 나의 소박한 반짝임에 감사하며 오늘을 산다. 이제는 조금씩 '그리아니하실지라도' 감사하다고 서툰 삶의 모습으로 고백한다. 순간순간 찾아오는 인생의 주먹에 여전히 휘청이고 넘어진다. 그리고 나는 다시 일어나 가드를 올린다. 관련링크:마흔에게 그림책이 들려준 말
    • 오피니언
    • 책소개
    2023-03-10
  • 〖독서일지〗 「미술품 감정과 위작」
    유명한 세 명의 작가 박수근, 이중섭, 김환기의 작품을 여럿 볼 수 있는 책이다. 워낙 유명하다보니 작품가가 비싸 많은 위작이 만들어지고 유통되고 있는데 진짜와 가짜를 분별하는 이야기다. "위작에는 향기가 없으며", "비슷한 것은 가짜이고", "진작은 산처럼 높고 바다처럼 깊다"는 문구로 세 작가의 작품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세상 어디에나 진짜와 가짜가 있다는 것을 그림과 작품을 통해 확인하게 된다. 4만원이나 하는 책을 도서관에서 빌려 보니 좋았다. 책을 둘 곳도 마땅치 않기에 도서관에서 대출해 보는 것이 여러모로 유익하다.
    • 오피니언
    • 책소개
    2023-03-09
  • 【구 충남노회 사태3】사회소송대응시행세칙, 모든 총대의 결정도 뒤집는 절대반지인가?
    총회가 충남노회 정기회 측에 유리한 공문을 발송한 건으로 인해 충남노회가 발칵 뒤집혔다. 충남노회는 작년 9월 107회 총회 현장에서 전 총대의 가결로 폐지됐다. 그런데 6개월만에 무덤을 박차고 부활할려고한다. 올해 주님의 부활절은 4월 9일인데 한달 먼저 부활할려고 한다. 그런데 주님의 부활이 믿는 자에게는 소망이나 반대자에게는 공포였듯이 충남노회 부활도 그러하다. 소수의 윤 목사 측(6개 교회)은 반기지만 다수의 가칭 “충남제일노회” 신설 측(53개 교회)은 치를 떨고 있다. 그간 10년간 겪었던 고통이 되풀이 될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그동안 대부분의 총대들은 폐지된 충남노회가 이후 새로 조직하거나 새로운 지역 노회로 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같이 방향을 결정 지어줬기 때문이다. 처리 방안은 “교회와 목사는 공동의회 결의를 통하여 근처 노회로 가입하도록 한다” 와 “충남노회 소속이었던 당회 중 21개 이상 당회가 총회임원회로 노회 신설을 청원할 시 신설한다”였다. 그런데 난데없이 과거 충남노회의 “정상화”, 재건이라니 어안이 벙벙할 수 밖에 없다. 이 일을 가능케 한 것이 바로 사회소송대응시행세칙이다. 모 신문은 최근 기사에서 “시행세칙이 총회결의보다 상위법이다... 충남노회 정기회측의 법적인 승리”라고 제목을 잡았다. 그리고 이렇게 기사를 작성했다. “이번에 사회소송대응시행세칙을 적용한 것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총회 규칙에 의하면 총회 결의보다 시행세칙이 상위법으로 돼 있어, 사회소송 대응시행 세칙을 적용할 경우 정기회측이 법적 정통성을 갖게 된다. 따라서 지금까지의 진행상황은 소급되어 정기회 측의 주도 아래 노회의 정통성을 이어나가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지난해 충남노회 폐지 총회 결의는 무효가 된다.” 그러면서 이런 결정에 권순웅 총회장이 이전 총회장과 남다른 역할을 했다고 언급했다. “현재의 노회 세력 관계나 지난해 총회의 결의가 본질이 아니다. 사회소송대응시행세칙이라는 상위법이 있음에도 외면한 지난 두 총회장들과 주변 정치세력의 왜곡이 문제가 된 것이고, 그것을 바로 잡자는 것이 권순웅 총회장의 이번 결단인 것이다.” 그러나 모 신문은 다른 시각을 갖고 있다. “충남노회 폐지, 제107회 총회 결의 누가 무효화 시킬 수 있는가?”란 제목으로 “제107회 총회 때 '분쟁노회수습매뉴얼'에 따라 충남노회가 폐지되었다. '분쟁(사고)노회수습매뉴얼'에 의한 제107회 총회 충남노회 폐지 결의가 '사회소송대응시행세칙'에 의해 무효화되지 않는한 여전히 충남노회는 폐지된 상태에서 후속처리를 해야 한다.”고 썼다. 그리고 법원의 판결을 예로 들었다. “충남노회 정기회 측이 천안중부교회 담임목사를 면직처분하자 면직당한 담임목사는 대전지방법원 천안지원에 '면직판결효력정지가처분'(2022카합10112) 소송을 제기했다. 이 소송에서 충남노회 정기회 측은 '사회소송대응시행세칙'이 '분쟁(사고)노회수습매뉴얼'보다 우선하므로 면직이 유효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법원은 이를 인정하지 않고 본안 확정 판결시까지 충남노회 정치회 측의 천안중부교회 담임목사에 대한 면직 효력을 정지했다(대전지방법원 천안지원 2022. 8. 2.자 2022카합10112 결정). 이때 재판부가 충남노회 정기회 측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구체적인 법원 재판부의 법리는 다음과 같다. 채무자는 총회의 분쟁 노회 지정이 중대한 절차상, 내용상 하자가 있어 효력이 없다고 주장하므로 살피건대, ⑤ 총회의 분쟁 노회 수습매뉴얼과 채무자가 주장하는 총회의 '사회소송대응시행세칙이 상호 모순되는 내용이라 볼 수 없는 데다가, 위 세칙이 위 수습 매뉴얼보다 우선하는 효력이 있다고 보기도 어려운 점 등을 종합하면, 채무자가 주장하는 사정만으로 총회의 채무자에 대한 분쟁 노회 판정에 무효 사유에 해당하는 중대한 하자가 있다고 할 수 없고 달리 이를 인정할 근거가 없다(대전지방법원 천안지원 2022. 8. 2.자 2022카합10112 결정문 7-8쪽 참조) 위 결정문에 채무자는 충남노회 정기회 측 대표자 노회장 고영국 목사이다. '사회소송대응시행세칙'이 '분쟁(사고)노회수습매뉴얼'보다 우선하지 않는다는 법원 판단이다.” 결국 사회소송대응시행세칙이 모든 총대의 결정을 뒤집을 수 있는 절대반지가 아니라는 주장이다. 이처럼 105회 총회 때 만들어 두고 그동안 사용하지 않던 사회소송대응시행세칙이 이번 충남노회 부활의 법적 기초가 될 수 있는지는 이같이 논란과 다툼의 여지가 있다. 그런데 이런 혼란의 배후에는 뒷 이야기가 있다. 충남노회폐지후속처리소위원회는 양 측에 노회를 신설할 수 있는 기회를 줬다. 그러나 윤 목사 측은 6개 교회 명단만 제출했기에 노회를 구성해줄 수 없었고, 속회 측 가칭 “충남제일노회”측은 처음에는 22개 당회만 제출 후 실사를 요청했고, 두 번째 때는 마감일인 2월 28일 53개 교회 명단을 내면서 상대측의 악용을 우려해 교회 이름과 목사 이름을 지우고 냈다고 한다. 그래서 소위원회가 받아들이지 않았고 전격적으로 정기회 측의 손을 들어주는 공문을 3월 2일자로 내려보낸 것이다. 소위원회가 가칭 “충남제일노회”측의 사정을 헤아리지 않고 너무 급하게 공문을 내린 것으로 보여진다. 3월 2일자로 공문을 내려보냈다면 이미 사전에 이런 시나리오를 염두에 두고 임원회에 재가를 받았다는 것인데 이것도 석연치가 않다. 과연 소위원회가 노회 신설을 해줄 마음이 있었는지 의구심을 갖게 된다. 그래서 일각에서는 두 번의 기회를 줬다면 한번 더 기회를 줄 수 있지 않았는가하는 아쉬움을 표하기도 한다. 총회에서 내린 3월 2일자 공문으로 총회와 충남노회는 혼란에 빠져들고 있다. 이제라도 총회와 충남노회폐지후속처리소위원회는 잘못된 총회 공문을 무효화해야한다. 분명한 것은 이미 53개 교회가 모인 가칭 “충남제일노회”측은 정기회 측과 다시 재결합을 원치 않는다는 것이다. 싫다는데 억지로 붙여 놓으면 어떤 결과를 낳을지는 뻔하지 않은가? 사회소송대응시행세칙이 모든 총대의 결정도 뒤집는 절대반지가 아니라는 것을 이미 법원이 판결했다는 사실을 알아야한다. 사회소송대응시행세칙 제정안 제1장 총론 제1조 (목적)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임원과 직원을 상대로 한 민사상·형사상 사회소송이 증가함에 따라 총회의 위상과 대외신인도가 하락하고, 업무 수행에 상당한 지장이 초래되고 있다. 이에 본 시행세칙은 권징조례와 대법원 판례를 고려하여 총회 상대 사회소송 대응방안을 만들어서, 총회의 위상과 대외신인도를 제고하고, 업무를 원활하게 수행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제2조 (근거) 본 시행세칙은 다음 각 호에 근거하고 있다. 1. 헌법(정치·권징조례·예배모범 등) 2. 총회규칙, 총회선거관리규정 3. 사회소송제기자에 대한 총회 결의 제3조 (간단하고 신속한 절차) 본 시행세칙에 따른 절차는 간단하고 신속하게 진행한다. 다만, '재판을 받을 권리'의 본질을 침해하지 않기 위하여 의견진술권(방어권)을 1회 이상 보장해준다. 제4조 (정의) ① '교회소송'은 지교회 · 치리회의 재판 · 결정에 대하여 대한예수교장로회헌법·총회 규정·총회결의·노회규정 등에 근거하여 다투는 사건을 의미한다. ② '사회소송'은 법원에 제출하는 민사소송·가처분신청·가압류 신청뿐만 아니라, 검찰청이나 경찰서에 제출하는 고소·진정을 모두 포함하는 의미이며, 사회법소송 또는 사회법정고소도 사회소송과 동일한 의미이다. ③ '사회소송제기자'는 민사소송원고, 가처분신청인, 가압류신청인, 고소인, 진정인을 모두 포함하는 의미이며, 소송제기자도 사회소송제기자와 동일한 의미이다. ④ 사회소송에서 '승소'한 경우란 다음 각 호의 어느 하나를 의미한다. 1. 민사소송에서 원고가 승소 판결을 받은 경우 2. 가처분신청·가압류신청에서 신청인(채권자)이 인용 결정을 받은 경우 3. 고소인의 고소로 피고소인이 유죄(벌금·집행유예·실형)로 처벌된 경우 ⑤ 사회소송에서 패소한 경우란 다음 각 호의 어느 하나를 의미한다. 1. 민사소송에서 원고가 기각 판결, 또는 소각하 결정을 받은 경우 2. 가처분신청·가압류신청에서 신청인(채권자)가 기각 결정, 또는 신청각하 결정을 받은 경우 3. 고소인이 고소했으나 피고소인이 무혐의 처분, 기소유예 처분, 또는 고소각하 처분을 받은 경우 ⑥ '징계'는 행정보류, 공직 정지, 총대권 제한을 모두 포함하는 의미이다. ⑦ 사회법과 국가법은 동일한 의미이며, 사회소송과 국가소송도 동일한 의미이다. 제2장 소송별 대응방법 제5조 (적용범위) ① 본 시행세칙의 적용범위는 다음 각 호와 같다. 1. 총회 결의에 대한 소송 2. 총회 선출직 선거와 관련한 소송 3. 전·현직 총회임원의 직위 · 직무에 대한 소송 4. 총회 재판국 판결에 대한 소송 5. 노회·교회·개인 간 분쟁으로 인한 행정 처리와 관련하여 전·현직 총회 임원과 직원에 대한 소송 6. 총회 직원의 직무에 대한 소송 ② 실질적으로는 전항에 관한 소송이지만 형식적으로는 개인을 상대로 소송한 경우, 본 시행세칙이 적용될 수 있다. 제6조 (사회소송 고지) 사회소송을 당한 자(총회, 그 산하 조직, 또는 개인)는 총회 서기 또는 총무에게 즉시 고지한다. 제7조 (대응방법) ① 다음 각 호의 경우에는 총회 임원회의 결의로 총회 부담으로 총회가 대응한다. 1. 총회 결의에 대한 소송 2. 총회 선출직 선거와 관련한 소송 3. 전·현직 총회 임원의 직위 직무에 대한 소송 ② 총회 재판국 판결에 대한 소송의 경우 소의 이익을 가지는 당사자가 그 부담으로 대응한다. 다만, 소의 이익을 가지는 당사자가 없으면, 총회가 부담하여 대응할 수 있다. 1. 총회 재판국 판결에 대한 소송 2. 노회·교회·개인 간의 분쟁으로 인한 행정 처리와 관련하여 전·현직 총회 임원과 직원에 대한 소송 ③ 총회 전·현 직원의 직무에 대한 소송은 총회 총무가 총회 임원회에 보고하고, 총회 임원회의 결의로 총회의 부담으로 총회가 대응할 수 있다. 제8조 (변상금청구) 전·현직 총회 임원 또는 직원에게 다음 각호의 사유가 인정되는 경우, 총회는 그 자에게 소송비용 등을 변상금으로 청구할 수 있다. 1. 고의적 위법행위 2. 고의적 직무유기행위 3. 중대한 과실행위 제3장 소송제기자에 대한 조치 제9조 (행정보류) ① 총회는 소송제기자 소속 노회에 총회 대응 절차를 통보하고 소속 노회로 하여금 소송제기자를 지도하게 지시한다. ② 총회는 소송접수일로부터 소송제기자의 각종 청원서, 질의서 등 서류를 접수하지 아니한다. ③ 총회는 소송접수일로부터 소송제기자에게 각종 증명서 발급을 중지한다. ④ 소송제기자가 사회소송에서 승소한 경우, 총회는 그에게 행정보류를 하지 아니한다. 제10조 (의견진술권 보장) ① 본 시행세칙에 근거하여 징계를 하려면 대상자에게 의견진술권을 1회 이상 보장해주어야 한다. ②전항을 위하여 대상자는 사회법에 따라 소송한 내용, 이유, 결과 등에 관하여 서면으로 의견서를 기한 내에 제출할 수 있다. ③ 총회 개회가 임박한 경우에는 총회 천서위원회가 대상자에게 의견진술권을 제공하지 아니하고 총회 총대 천서를 제한할 수 있다. 제11조 (징계결정) ① 소송제기자가 목사의 경우, 그 목사는 소제기일로부터 소속 노회의 공직과 총회 총대권이 2년 간 정지된다. ② 소송제기자가 장로의 경우, 그 장로는 소제기일로부터 소속 당회에서의 직무와 노회 총대권이 2년간 정지된다. ③ 총회가 노회나 당회에 소송접수사실을 통보하면, 노회나 당회는 통보를 받은 날로부터 8주내에 권징조례에 따른 조치 결과를 총회에 보고해야 한다. ④ 하회가 제3항을 이행하지 아니하는 경우, 총회는 노회의 총회 총대 파송권을 정지시킨다. 제12조 (권징조례 제76조 후문 해당자) 치리회에서 상소사건이나 소원사건이 계류 중인데 사회소송을 제기한 자에 대하여, 그 치리회는 해당 재판국에 사실을 통보하여 권징조례 제76조 후문에 따라 처리하게 한다. 제13조 (불복방법) 본 시행세칙에 근거하여 노회나 그 산하 조직, 당회가 징계한 경우, 그 대상자는 권징조례에 따라서 고지 받은 날로부터 10일내에 상소할 수 있다. 제14조 (패소시) 제4장 법원 판결에 따른 조치 ① 소송제기자가 패소시, 그 자로 하여금 소송비용 일체를 변상하게 한다. ② 패소한 소송제기자에 대하여 총회 총대권을 정지하고, 권징조례 제35조에 근거하여 추가로 징계하되 다음 각 호 절차를 따른다. 1. 총회 임원회는 총회 총대 2인을 기소위원(고소위원)으로 선정하여 해당 치리회에 재판 안건으로 상정하게 한다. 2. 해당 치리회는 기소장(고소장)을 받은 날로부터 8주내에 처리하여 상회에 보고해야 한다. 3. 해당 치리회가 기한 내 불이행시, 상회가 직접 처결한다. 제15조 (승소시) ① 소송제기자가 승소시, 그 자는 승소판결일로부터 노회나 총회 총대권이 회복된다. ② 해당 재판국 판결 및 관련 결의는 소송제기자가 승소판결을 받은 날로부터 효력이 정지된다. ③ 징계 또는 권징한 치리회(또는 산하 조직)는 절차에 따라 해벌하고, 관련 결의를 변경한다. 다만, 특별한 사유 없이 이런 절차가 3주간 내에 진행되지 아니하는 경우, 해벌된 것으로 간주된다. 제16조 (피선거권) ① 소송제기자가 패소시, 징계는 유흠으로 간주되므로 피선거권의 제한사유에 해당한다. 다만, 그 제한기간은 패소 확정일로부터 2년으로 정한다. ② 소송제기자가 승소 확정시, 해벌된 징계는 무흠으로 간주되므로 피선거권의 제한사유에 해당하지 아니한다. 부칙 1. 본 시행세칙은 제104회 총회 결의로 사회소송대응시행세칙연구위원회에서 제정하여 규칙부 심의를 받은 후 제105회 총회에 보고한 날부터 시행한다. 2. 본 시행세칙은 관련 대한예수교장로회헌법, 총회규칙, 총회선거관리규정, 결의 사항의 변경이 있을 때에 개정하되 총회임원회에서 개정하고 총회규칙부의 심의 후 시행한다. 분쟁(사고) 노회 수습매뉴얼 1. 분쟁이 발생한 노회를 수습하기 위하여 총회의 결의로 수습처리위원회를 구성하여 수습 할 수 있으며, 총회 파회 후에는 총회임원회가 수습처리위원회를 구성할 수 있다. 2. 분쟁(사고)노회에 대한 판정은 노회 임원구성의 양분화와 쌍방 치리, 사회법정 다툼 등을 종합적으로 판단하여 총회 개회 중에는 총회정치부가 결정하며, 총회 파회 후에는 총회임원회가 결정한다. 3. 노회가 분쟁(사고)노회로 판정되면 쌍방의 모든 임원은 권한을 상실하게 되고 수습처리위원회의 위원장이 수습노회를 소집하여 노회장 및 임원을 선출하여 노회를 정상화시킬 때까지 수습처리위원회가 총회 임원회의 지도를 받아서 해 노회의 행정 처리를 대행한다. 4. 분쟁(사고)노회의 총회총대 천서도 제한할 수 있으며, 분쟁(사고)노회로 판정되는 당시의 노회임원 및 분쟁의 당사자들은 수습노회 시 피선거권을 제한할 수 있다. 5. 노회의 수습은 관계자들을 주 안에서 신앙적으로 권유하여 화해에 의한 수습을 위해 우선적으로 노력하되 필요하다면 각종 회의록을 열람할 수 있고, 그 사본을 청구할 수 있다. 수습처리위원회가 업무를 수행하는 중 알게 된 범죄에 대하여는 그 노회나 총회에 추가 고발할 수 있으나 직접 기소는 하지 못한다. 6. 분쟁(사고)노회의 수습처리위원회를 구성할 때는 총회 정치부원과 규칙부원 중 각 1인을 포함시켜야 한다. 7. 수습처리위원회의 활동시한은 차기 총회 때까지로 하되, 총회의 허락으로 연장할 수 있다. 8. 수습처리위원회의 결정이 해 사건과 관련한 총회재판국의 판결과 다를 경우는, 총회가 총회 재판국의 판결을 채용함과 동시에 그 효력을 상실한다. 9. 위와 같은 분쟁(사고)노회 수습처리 절차와 노력에도 불구하고 분쟁(사고)노회로 지정된 날로부터만 2년이 경과하여도 분쟁이 해결되지 않으면 헌법 정치 제 12장 5조에 근거하여 해 노회를 폐지하도록 수습처리위원회가 차기 총회에 청원할 수 있다. 10. 분쟁(사고)노회의 폐지를 총회가 결정하면 해 노회에 소속되었던 지 교회와 목사는 공동의회 결의를 통하여 해당 지역의 노회로 가입하여야하며, 그럴 경우에 가입 청원을 받은 지역노회는 거부할 수 없다. 단, 총회 임원회가 지도 할 수 있다.
    • 오피니언
    • 논단
    2023-0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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