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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단상】 부총회장 선거, 축제가 싸움판으로
    지난 4월 25일 오전 11시 참좋은교회(이윤찬 목사 시무)에서 대구교직자협의회 제31회 정기총회가 있었다. 이승희 증경총회장의 개회 예배 설교 후 합심기도 시간에 경북교직자협의회 대표회장 강전우 목사가 ‘총회와 영남지역을 위해서’ 기도할 때 부총회장 자격 문제로 소송이 붙은 총회를 염려하며 간절히 기도했다. 소송 관계자인 부총회장 후보 민찬기 목사나 장봉생 목사의 마음은 어떨지 모르나 총회 회관에서 먼 경상도 지역에서도 현 사태를 매우 안타깝게 여기며 탄식으로 기도하고 있다. 아마 이 사태를 지켜보는 대부분의 총대들의 마음도 편치는 않을 것이라고 본다. 한 사람의 부총회장이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과 물질이 필요하다. 노회와 협의회, 총회 등에서 오래 봉사하며 자신을 알려야한다. 이에 많은 시간이 든다. 그리고 물질로도 많이 섬겨야한다. 그래서 아무나 부총회장이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면에서 시간과 물질로 섬겨온 부총회장 후보들은 모두 총회의 귀한 자산이다. 바람직한 것은 단독 후보로 추대되는 것이지만 어쩔 수 없이 경선이 될 수도 있다. 그러다보면 친했던 사이도 서먹해지거나 “원수” 사이가 될 수 있다. 그래서 곽선희 목사는 운동을 할 때 서로 마주보는 것은 하지 않는다고 했다. 탁구나 테니스나 서로 마주보고 하다보면 감정 싸움이 될 수 있기에 자기는 각자 실력으로 승부하는 볼링을 한다고 말한 것을 들은 적이 있다. 일리 있는 말이다. 오래 세월 총회를 섬겨온 민찬기 목사나 장봉생 목사는 현재 서로를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내리 누르고 이겨야할 경쟁 상대로 보지 않겠는가 말이다. 이런 면에서 선거란 참으로 잔인한 것인지도 모른다. 민찬기 목사 소속 임원회가 민찬기 목사의 후보 자격에 대해 물었을 때 장봉생 목사 소속 노회도 임시노회를 열어 부총회장 출마 자격에 대해 선관위에 질의했다. 선관위가 이 문제를 다룰 때 투표에 처음에는 7:7 동수가 나왔다. 이어 재투표하여 7:8로 세 번 출마는 안된다는 결론을 내렸다. 다 지나간 일이지만 의견이 7대 7로 나뉘었다는 것은 선관위원 내에서도 의견이 팽팽했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 문제를 바로 처리할 것이 아니라 좀더 시간 여유를 두고 처리했다면 좋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있다. 증경총회장단의 의견을 듣는다든지, 실행위원회에서 의견을 구했다면 모양세는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속전속결로 재투표해 7:8로 세 번 출마 불가로 정했다. 그러자 민찬기 목사측에서는 이 문제에 대해 소송을 했고, 소속 노회에서 부총회장 후보로 추천을 받았다. 세상 법정이 이 문제를 어떻게 처리할지는 두고보면 된다. 그런데 성경은 교회 문제를 세상 법정에 끌고가는 것을 경고하고 있다. [고전6:1-7] “1 너희 중에 누가 다른 이와 더불어 다툼이 있는데 구태여 불의한 자들 앞에서 고발하고 성도 앞에서 하지 아니하느냐 2 성도가 세상을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세상도 너희에게 판단을 받겠거든 지극히 작은 일 판단하기를 감당하지 못하겠느냐 3 우리가 천사를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그러하거든 하물며 세상 일이랴 4 그런즉 너희가 세상 사건이 있을 때에 교회에서 경히 여김을 받는 자들을 세우느냐 5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 하여 이 말을 하노니 너희 가운데 그 형제간의 일을 판단할 만한 지혜 있는 자가 이같이 하나도 없느냐 6 형제가 형제와 더불어 고발할 뿐더러 믿지 아니하는 자들 앞에서 하느냐 7 너희가 피차 고발함으로 너희 가운데 이미 뚜렷한 허물이 있나니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 새로이 총회를 섬길 일꾼을 뽑는 총회 선거가 축제가 아니라 세상의 조롱거리가 되고, 사법의 판결을 받아야하는 싸움판이 된 것이 참으로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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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논단
    2024-04-26
  • 취재 기자를 내쫓는 노회들...무엇이 두려운가?
    봄 정기노회가 열리는 계절이다. 서울에서 먼 지방의 몇몇 노회를 취재갔다. 그 중 2개 노회에서 “내쫓김”을 당했다. 이리노회는 북일교회 문제로 회원 호명 때부터 시끄러웠다. 결국 노회원들간에 고성이 오갔다. 이런 가운데 취재하고 있는 기자들에게 나가달라고 "거칠게" 요구했다. 결국 쫓겨날 수 밖에 없었다. 충청노회도 전 총신대총장 김영우 목사 피소건에 대해 다루며 기자들에게 나가달라고 “험악하게” 요구했다. 결국 본당 중이층으로 쫓겨갈 수 밖에 없었다. 기자는 사실을 취재하고 알리기 위해 그 현장에 가 있는 것이다. 북일교회 문제는 대부분의 총회원들이 알고 있을만큼 큰 이슈이다. 당연히 기자들이 가서 취재할 수 밖에 없는 사항이다. 기자는 총회원들의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 대신해서 그 현장에 간 것이다. 그런데 무슨 이유로 기자들을 내쫓는 것인가? 그것이 과연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겠는가? 기자가 보면 안될만큼 감춰야할 문제가 있는가? 사실을 사실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문제해결에 도움이 될 수 있다. 문제 없는 노회는 취재간 기자들을 반기며 좋게 기사를 써서 노회를 잘 홍보해 달라고 부탁한다. 기자로서도 기분좋은 일이다. 반면 문제 있는 노회는 기자를 내쫓는다. 마치 잡상인 취급을 한다. 부득이 기자를 내보낼 필요가 있다면 “정중하게” 요청했으면 한다. 같은 합동측 목사한테 그렇게 함부로 해서 되겠는가? 앞으로도 “문제 있는” 이리노회와 충청노회 “사태 추이”에 대해 예의주시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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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2024-04-03
  • 【북토크】 편협한 꼰대가 되지는 말아야 할텐데....
    자기 생각에 갇혀 사는 사람은 편협한 사람이다. 이런 사람하고는 대화도 되지 않는다. 열린 사고가 필요하다. 남과 어울리기 위해서는 개방해야한다. 죽고 사는 진리의 문제가 아니라면 “그럴수도 있구나”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그러나 그것이 그리 쉽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으로 알고 있다. 편협함 공부를 하면서 문득 깨달은 건, 법률 외에 삶의 모든 기준들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시작한다는 것이다. 그 기준들은 절대불변의 진리가 아니어서 주변사람에게 영향을 받아 생성되기도 하고 타인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세워지기도 한다. 또 삶의 경험이 켜켜이 쌓이면서 조금씩 견고해지고 구체적으로 변하기도 한다. 그렇게 여러 기준들을 만들어 옳고 그름을 평가하는 일은 어쨌거나 사람이 하는 것이란 점에서 언제나 주관적이다. 하지만 우리는 종종 너무 쉽게 각자가 세운 판단 기준이 ‘정답’이라고 착각한다. 사람은 쉽게 타성에 젖으니 자신의 판단 기준과 결론이 절대적인 단 하나의 정답이라 믿으며 자기 우물 안에서 살아간다. 하지만 그 기준에 정답이란 없기에 자신이 바르고 타당한 기준을 세워가며 나이 먹고 있다는 생각도 사실 편협한 ‘착각’에 가깝다. 나이를 먹는 일이 무서운 건 나도 모르는 새 나의 판단이 바르고 타당한 정답이라고 생각하게 되기 때문이다. 특히 어떤 조직에 잘 적응한다는 것은 곧 그 곳의 기준을 잘 습득해 체화한다는 것이기도 하다. 공동체에서 튀는 사람이 되기 싫어서 공동체의 평가 기준을 답습하기도 하고, 나는 다르다 여기며 살아도 어느 날 문득 돌아보면 그 밥에 그 나물처럼 사고하게 되는 것이 현실이다. 자신의 존재를 정당화하기 위해 쉼 없이 자신의 옳고 그름을 고집하기도 하고 자신의 결핍된 부분을 숨기기 위해 고집스러운 기준으로 타인을 깎아 내리기도 한다. 입만 열면 세상 곳곳에 대한 불만을 쏟아 내는 투덜이 스머프 같은 사람이 있었다(입만 열면 남의 흉을 보는 사람도 있었는데 그 결이랑은 또 다르다). ‘이건 이래서 구리고, 저건 저래서 구리고’, ‘그런 사고방식이 말이 되느냐. 말은 그렇지만 속내는 이런 것 아니겠느냐’하는 식으로 언제나 자신 밖의 사람과 상황에 대해 평가만 늘어놓는 사람이었다. 초반에는 그가 솔직하고 유쾌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이 어떤 것. 누군가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는 지 밝히는 것은 꽤나 용기가 필요한 일이고 그 취향과 기준을 고백하는 것이 자신의 약점이 될 수도 있는 데 저렇게 쿨하게 늘어놓다니! 성격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대화의 주된 발언이 자기 자신 밖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한 평가이다 보니 들을수록 의아한 지점이 생겼다. 당신에게 평가할 자격이 있는지, 타인이 당신에게 평가 받아야 할 이유가 있는지, 평가할 자유가 있다고 해도 당신의 평가를 궁금해 하는 사람이 있는지 하는 것이었다. 심지어 그의 평가를 들으면 들을수록 그에 대한 인상 또한 '예리하고 유쾌한 사람이다' 라기 보다 ‘어딘가 모르게 편협하다’, ‘편협함을 자랑하는 태도가 참 멍청하다’까지 이어졌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난 뒤 몇몇 단정적인 말들에서 그가 타인에 대한 평가를 거침없이 내뱉을 수 있었던 까닭을 눈치 첼 수 있었다. 그 모든 것은 자신의 말이 정답이라고 여겨서 가능했던 것 이었다. 자기 말이 정답인 사람 곁에 다른 의견들은 오답처리 되기 마련이다. 그리고 자신의 의견이 오답이 되 는 대화를 좋아라할 사람은 없다. 그렇게 그는 자기주장이 뚜렷한 사람에서 편협한 사람으로 점차 다르게 기억 됐다. 중학생 때 유독 적이 없었던 한 친구가 떠오른다. 말수가 적어서, 자기주장이 강하지 않아서, 호불호가 없어서가 아니라 ‘편견’이 없어서 두루두루 모두와 잘 지내는 친구였다. 그는 어떤 친구들에게도 늘 같은 태도로 화답했다. 편견, 그러니까 그 편협함은 끊임없이 나를 위해 타인을 배척하는 수단이 된다. 진정한 세월의 지혜는 오히려 '편견 없음'에 가까울 거라 생각한다. 타인을 판단하는 가장 괜찮은 기준은 포용이 아닐까? 타인과 자신에 대해 사람은 언제나 ‘알 수 없음’ 한 줌은 가지고 사니까. 견고한 기준은 편협한 생각의 방증일지도 모른다(pp. 178-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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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소개
    2024-03-31
  • 【북토크】 自害가 생존전략이라니....
    나는 상담, 심리 관련 책도 좋아한다. 대학때부터 지금까지 기회 되는대로 읽고 있다. 우연히 보게 된 이 책에서 “자해도 생존방법”이라는 것에 작은 충격을 받았다. 오죽하면 살기 위해 자기 몸에 해를 주는 것인가? 길지 않은 인생을 사는데도 참 힘들다. 세상에 불쌍한 사람들이 참 많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리고 이들과도 더불어 살려면 무엇을 해야하는가 고민하게 된다. 자해하는 게 문제라고 말하며 부모님 권유로 상담실에 온 고등학생 내담자를 만났습니다. 고등학교에 입학한 이후 사소한 일로 친구들과 사이가 멀어졌고 왕따를 당하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학교 가는 게 힘들어서 지각과 결석을 반복하며 적응이 더 어려워졌다고 합니다. 친구들이 자신에 대해 안 좋게 말할까 봐 계속 예민한 상태로 있다 보니 피곤하고, 수업에 집중하기 어려워서 거의 책상에 엎드려 있는다고 합니다. 반대로 온라인에서 만난 학교 밖 친구들과는 관계를 잘 맺고 인기가 많다고 합니다. 웃으면서 인기가 많다고 얘기 하다가 이내 걱정하는 얼굴로, 사실 인기가 많은 이유는 친구들을 잃을까 봐 엄청나게 신경을 쓰면서 친구들 비위를 다 맞춰주기 때문이라고 털어놓았습니다. 학교에서는 왕따니까 밖에서 힘들게 만든 친구들이라도 잃지 않기 위해 친구들이 부르면 거절하지 못하고 모든 모임에 나가고 친구들 말을 들어주고 웃어주느라 에너지가 다 빠진다고 했습니다. 기분이 좋지 않은 날도 즐거운 것처럼 친구들과 놀고, 막상 집에 오면 허무하고 외로운 마음이 든다고 합니다. 혹시나 말실수해서 친구들이 자신을 싫어하게 될까 봐 매번 친구들에게 연락해서 자신이 잘못한 게 없는지 확인 한다고 합니다. 마음이 초조하고 불안한 상태로 가득 차 있다가 가족들의 말 한마디에 갑자기 화를 냅니다. 우울한 기분, 친구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공허한 느낌, 불안감이 뒤섞이면서 마음이 터질 것 같은 상태가 된다고 합니다. 그럴 때 자해를 하게 된다고, 어쩔 수 없이 하게 된다고, 나지막이 말 합니다. 물속에 오래 있을 때 가슴이 답답해지고 숨이 안 쉬어지다가 수면 위로 올라오면 숨이 크게 내쉬어지는 것처럼, 자해하고 나면 숨이 쉬어지고 살 것 같은 기분이 든다고 많은 내담자가 말합니다. 자해는 화가 나는 마음을 표현하는 방법이자 자신이 얼마나 힘든지 다른 사람에게 알리는 수단입니다. 아무런 감각이나 감정을 느끼지 못할 때 무언가를 느끼도록 도와주기도 하고, 사람들에게 도움이 필요하다고 요청하는 방법입니다. ‘자해는 나쁘다, 절대 해서는 안 된다’라는 말이 먼저 튀어나올 수도 있지만, 자해는 누군가에게는 필요한 생존전략이 됩니다(pp. 71-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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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소개
    2024-03-31
  • 【북토크】 문학을 통해 배운 것들
    이 책의 저자는 문학을 통해 배운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세상을 바라볼 때 시선의 위치와 방향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시야가 달라진다는 것,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자리에 서보는 일, 들리지 않는 목소리를 듣고 보이지 않는 존재를 보는 일, 한 편의 소설을 읽고 내 안의 무언가가 완전히 바뀌어버리는 일 또한 가능하다는 것, 인간은 끊임없이 이야기를 만들고 쓰면서 다른 세계를 상상하고 다른 사람이 되는 일을 꿈꾸면서도 끝내 자기 자신일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 이 모든 것을 나는 문학을 통해 배웠으며 이 경험이 나를 바꿨다는, 어쩌면 너무나도 문학도 같은 이야기다” 나는 이 글에 전적으로 동감한다. 그래서 지금도 이 “재미”에 열심히 책을 읽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 책은 직접 문학 작품을 다루지는 않는다. 저자는 넥플릭스, 왓챠, 웨이브 등 여러 OTT에 있는 드라마나 영화를 소재로 이 책 한권을 썼다. 물론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작품도 많다. 내공이 보통이 아니라는 느낌을 갖는다. 나는 이런 글을 쓸 실력이 없어 감탄하면서 봤다. 유홍준 교수는 그의 역작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서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을 했다. 모르면 보이지 않는다. 기회가 되면 이 책의 저자처럼 영화나 드라마에 대한 글도 써보고 싶다. 그럴려면 아들이 가입해 놨지만 안 보고 있는 넥플릭스를 열심히 이용해야 할 것 같다. 할 일이 또 하나 늘었다. 이 또한 새로운 도전이니 기대가 된다. 국어국문학을 전공했다. 서른 줄에 접어든 이후로는 이야기할 일이 거의 없긴 하지만, 피치 못할 이유로 전공을 언급해야 하는 상황이 되면 괜히 머쓱해진다. 직업이 작가이기 때문이다. 작가인데 국어국문학과를 나왔다고 하면 "전공을 살리셨구나!" 같은 말을 듣게 되고 만다. 전공을 살린 것일까? 괜히 골똘해졌다가는 국어학과 국문학의 차이라든가, '과연 어디까지가 문학인가'라는 질문이라든가,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해서 작가가 되면 전공을 살린 것인가 아닌가 같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게 되기 때문에, "그런가요?" 하고 대답한 뒤 얼른 소재를 바꾸는 것이 좋다. 그러지 않으면 "국문과가 굶는 과라던데... " 하는 식의 무례한 농담을 듣게 되어버리고 만다. 이 농담을 들을 때면 미소 비슷한 것도 지을 수 없기 때문에 재빠른 소재 전환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다시 한번 곰곰이 생각해봐도 국문학을 전공했기 때문에 작가가 된 것 같지는 않다. 인과관계가 없는 일로 보인다. 학과 공부가 나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거나 쓸모없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문학이 정말 재미있었기 때문에 열심히 공부했고, 그래서 상당히 많은 영향을 받았다. 문학 작품을 읽고, 문학을 배우고, 듣고, 공부하며 보낸 20대 초반의 몇 년간, 내가 세상을 보는 법은 달라졌다. 이 시절의 경험이 내 삶 전반에 어떤 영향을 미쳤고 또 나의 어떤 부분을 바꿨는지를 전부 말하자면 너무 긴 이야기가 될 것이다. 줄여서 말해보자면, 나는 문학을 통해 이런 것들을 배웠다. 세상을 바라볼 때 시선의 위치와 방향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시야가 달라진다는 것,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자리에 서보는 일, 들리지 않는 목소리를 듣고 보이지 않는 존재를 보는 일, 한 편의 소설을 읽고 내 안의 무언가가 완전히 바뀌어버리는 일 또한 가능하다는 것, 인간은 끊임없이 이야기를 만들고 쓰면서 다른 세계를 상상하고 다른 사람이 되는 일을 꿈꾸면서도 끝내 자기 자신일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 이 모든 것을 나는 문학을 통해 배웠으며 이 경험이 나를 바꿨다는, 어쩌면 너무나도 문학도 같은 이야기다(pp. 139-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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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소개
    2024-03-28
  • 【북토크】 한 대형 교회의 탄생과 몰락
    세상에는 별별 사람들이 있고, 별별 책들이 있다. 이 책도 그 중 하나다. 우연히 읽게 됐다. 읽다보니 재밌어서 끝까지 보게 됐다. 세계 여러 곳의 버려진 건물들에 대한 이야기가 흥미로웠다. 목사 아니랄까봐 그중 교회에 대해 다룬 이야기에 관심이 갔다. 큰 돈으로 지은 교회가 결국 교인들의 이사로 숫자가 줄자 큰 건물 유지에 실패하고 버려진 이야기다. 얼마전 아랫 지방에서 열린 노회를 취재했다. 교회가 매우 컸다. 그런데 외진 곳이라해서 부목사나 여전도사나 부교역자가 한명도 지원하지 않는다고 했다. 지방 작은 동네에 있는 이 큰 교회가 앞으로도 잘 유지가 될 수 있을지 염려스럽다. 인구감소는 절벽이라 지방은 소멸하고 있고 사람들은 먹고 사느라 종교에 관심이 없는데 앞으로 50년 후에도 그 큰 교회가 교회로서 제대로 살아남을 수 있을까?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기적의 도시'는 왜 미국의 살인 수도'가 됐을까-시티감리교교회(GARY CITY METHODIST CHURCH) 미국 인디애나주의 공업 도시 가운데 가장 젊은 도시인 게리Gary는 미시간호 남쪽에 40.46제곱킬로미터쯤 펼쳐진 습지에서 1906년에 태어났다. 시카고에서 고작 64킬로미터 떨어진 곳이다. 게리는 유나이티드스테이츠철강 United States Steal Corporaton(Us스틸)이 낳은 도시다. US스틸은 게리에 시간과 에너지, 비용을 쏟아 최첨단 공장을 짓는 대신 공장 노동자를 위한 마을은 눈에 띄게 무성의하게 계획했다. 예를 들어 게리에서는 시민이 아니라 철강 공장을 중심으로 전력 공급을 조절했기 때문에 가로등이 깜박거리곤 했다. 하지만 게리를 '기적의 도시' 나 '마법 같은 도시', '금세기의 도시'라고 부르며 옹호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금세기의 도시'라는 별칭은 게리의 앞날을 어느 정도 예언했다. 게리는 20세기의 우여곡절에 속수무책으로 휘둘렸고, 도시의 운명은 미국 제조업의 호황과 불황에 따라 요동쳤다. 도시 인구는 유럽 에서 이민자가 쏟아져 들어오고 짐크로Jim Crow법(공공시설에서 백인과 유색 인종을 분리하는 남부 주들의 법률로 1876년부터 1965년까지 시행됐다. 옮긴이)이 시행되는 남부에서 아프리카계 시민이 몰려오며 대거 늘어났다. 그러나 20세기 후반부터는 실업과 소위 백인 탈출white flight(백인 중산층이 도심에서 교외로 탈출하는 현상. 옮긴이) 탓에 인구가 대폭 줄어들었다. 게리의 인구는 1960년에 17만 8000명으로 절정에 달했지만, 오늘날에는 7만 8000명 미만이다. 도시가 이름을 따온 주인공은 엘버트 H. 게리라는 기업 변호사이자 카운티 지방법원 판사다. 그는 US스틸에 융자해준 존 피어폰트 모건의 의견에 따라 기업의 이사회 회장에 임명되며 기업가로 변신했다. 게리는 노동조합과 노동자 권리에 반대하고자 성경을 선택적으로 인용하는 독실한 사람이었다. 자존심이 강하고 유머 감각이라곤 없는 이 도덕주의자는 하얗게 센 머리와 콧수염을 깔끔하게 정리한 모습으로 귀족적 분위기를 풍겼다. 신도시에 게리라는 이름을 붙이자고 제안한 사람도 그였다. 모건이 “물렁뼈 아첨꾼”이라고 맹비난할 만큼 교활한 수완가였던 그는 이사회의 반대를 노련하게 물리쳤다. 사실 이사회는 새 도시에 US스틸 회장 윌리엄 엘리스 코리의 이름을 붙여야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미국 우체국도 신도시의 명칭을 게리로 정하면 메릴랜드주의 게리와 헷갈릴 것이라며 반대했다. 중서부에서 나고 자란 게리는 자신의 이름을 딴 도시가 설립된 후에도 계속 뉴욕에 머물렀지만, 내 마음은 인디애나주 게리에 있다"라고 자주 주장했다. 1920년대에 그는 급증하는 게리 인구에 헌신할 새로운 감리교 교회를 세우는 사업도 열정적으로 후원했다. 교회를 지을 부지를 제공하고 기업 자금 35만 달러를 공사 기금으로 내놓는 안을 승인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4단 건반 어니스트 스키너 파이프 오르간까지 개인적으로 기부했다. 아마 게리는 교회가 재정적으로 자립할 수 있도록 계획되었고, 예배를 보는 본관 외에도 사회적, 교육적 기능과 상업적 기능을 맡은 별관이 들어선다는 데 매력을 느꼈을 것이다. 이 계획은 진보적인 지역 목사 윌리엄 그랜트 시먼 박사가 주도했다. 인디애나 출신으로 보스턴신학교를 졸업하고 인디애나 그린필드의 드포대학교에서 철학을 가르쳤던 시먼은 1916년에 다코타웨슬 리언대학교에서 게리로 왔다. 게리에서 그는 낙천적 성격 덕분에 '서니 짐 Sunny Jim(명랑한 짐. 옮긴이)'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아울러 인종적 관용과 더 커다란 통합을 지지하며 큰 목소리를 냈다. 1924년, 그는 큐클럭스클랜(K.K.K)을 영웅으로 묘사하는 D.W. 그리피스의 영화 <국가의 탄생>이 "인종적 편견을 일으킨다"며 오르페움 극장에서 상영을 중단해달라고 게리 시장 R. O. 존슨을 압박했다. 안타깝게도 그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해 12월, 누군가가 어느 흑인 남성을 공격한 후 휘발유를 들이붓고 불을 질러서 심각한 화상을 입혔다. 가해자는 끝내 체포되지 않았고, 게리에서는 인종차별적 공격이 급증했다. 시먼은 교회가 게리의 모든 공동체를 하나로 모으기를 바랐다. 그러나 수많은 백인 신도의 저항과 인종 차별 탓에 모두를 포용하는 교회를 만들겠다는 그의 꿈은 꺾이고 말았다. 시먼은 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제작한 팸플릿에서 교회에 관한 자신의 비전을 이렇게 설명 했다. "쇠와 철을 만드는 건장한 노동자, 활발하게 영업하는 상업가, 바쁜 여성, 성장하는 아이들은 주일에 한 시간뿐만 아니라 주중에도 매시간 주님의 영향력을 확인하며 그리스도가 살아계신다고 확신합니다. 따라서 시내 교회에서 예배 계획과 포괄적인 목회 활동 계획을 마련했습니다. 교회는 일주일 내내 문을 엽니다. 교회는 청년과 노인을 위해 기독교 교육, 건전한 오락, 매력적이고 순수한 여흥 거리를 제공합니다. 무엇보다도 교회는 도시의 중심부에 기독교의 우애 정신을 불러옵니다" 게리의 시티감리교교회는 고딕 양식을 완벽하게 부활시킨 장중한 작품이자 중서부 최대의 감리교교회였다. 시카고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건축 회사 로앤드볼렌바허Lowe & Bplenbacher가 인디애나 베드퍼드의 석회암을 사용해서 21개월 만에 완공했다. 1926년 10월 3일에 시먼이 첫 예배를 집전했고, 게리에서는 일주일 동안 밤마다 축하 행사가 열렸다. 목사 관저 뒤로 각종 사무실과 체육관, 극장 홀까지 품은 9층짜리 건물이 들어섰다. 교회에서는 강연과 대담, 연극, 스포츠 행사(정규직 직원 여섯 명 중에는 스포츠 감독도 있었다), 공공 행사, 음악 콘서트, 종파를 초월한 공연과 쇼, 심지어 영화 상영까지 이루어졌다. 그런데 1700명쯤 되는 신도 가운데 일부는 교회 건물이 지나치게 가톨릭적이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교회 단지 전체를 관리하는 데 드는 비용은 시먼이 처음에 계산했던 것보다 더 컸다. 유지비 탓에 자금이 계속 부족해졌기 때문에 문제가 심각해졌다. 교회를 다니지 않는 사람도 찾아오게 만들어서 수익을 개선하고자 카페테리아를 만들자는 계획이 제안되었다. 하지만 자기 식당의 손님을 빼앗기고 싶지 않았던 주요 감리교 식당의 주인이 반대하는 바람에 무산되었다. 볼링장을 만드는 계획도 거론된 듯하지만, 실현되지 못했다. 어쨌든 교회가 춤과 저속한 언어를 반대했으니 젊은 노동자들 사이에서 인기가 없을 수밖에 없었다. 고단한 일상에서 벗어나 느긋함을 즐기려는 사람들은 언행을 조심할 필요가 없는 데다 술도 마실 수 있는 무허가 술집에 드나드는 편을 더 좋아했다. 시먼은 1929년에 결국 신도들에게 쫓겨나서 오하이오주 랭커스터 교구로 옮겼다. 그는 게리를 떠나면서도 이곳에는 "진보와 환대라는 진정 서구적인 정신"이 있다며 게리를 여전히 사랑한다고 밝혔다. 그는 1944년에 자동차 사고로 숨졌다. 유언에 따라 시먼의 유해는 그 자신이 설립에 힘을 보탰던 게리의 교회에 묻혔다. 전후 종교 부흥기였던 1950년대에 게리의 시티감리교교회는 무려 3000명이나 되는 신도수를 자랑했다. 백인과 중산층이 대다수였던 교회 신도는 게리의 심각한 인종간 불평등을 반영했다. 게리는 당대 미국 복부에서 인종 차별이 가장 극심한 도시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1960년대로 접어들자 부유한 백인이 교외로 떠나기 시작했다. 철강 산업에서 해외 경쟁이 치열해지고 자동화가 확대되면서 정리해고가 발생하자 도심 범죄율도 증가했다. 결국 교회 신도 숫자가 점차 줄어들었다. 1973년에 교회의 신도는 겨우 320명뿐이었고, 이 중에서 예배에 꾸준히 나오는 사람은 3분의 1에 지나지 않았다. 2년 후, 시티 감리교 교회는 문을 닫았다. 인디애나대학교가 교회와 이웃한 홀 일부를 인수했지만, 교회를 대신할 용도를 찾지 못했다. 게리가 "미국의 살인 수도"라는 부끄러운 이름을 얻은 1993년, 교회는 이미 무너져가는 겉껍질로 변해 있었다. 4년 후에는 화재가 건물 전체를 휩쓸었고, 복구를 향한 희망을 완전히 꺾어놓았다. 2000년대로 들어선 후 한동안은 철거가 유일한 답인 듯했지만, 이제는 공원 조성이라는 가능성이 새로 생겨났다. 이 도심 속 에덴은 러스트벨트에서 가장 고통받은 도시, 가까운 과거는 괴로웠고 미래는 불안한 이 지역에 위안이 되어 줄지도 모른다(pp. 274-2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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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소개
    2024-03-28

실시간 오피니언 기사

  • 【내이야기】 나는 왜 정신과를 찾아 갔는가?
    “혹시 이전에 교통사고를 당한 적이 있나요?” 정신과 의사가 내게 물었다. 1992년 말이거나 1993년 초 나는 정신과를 찾아갔다. 그 당시 살던 집은 양쪽 4차선 도로 옆이었는데 어느날부터 갑자기 차 소음이 너무나 크게 들렸다. 그동안 그 집에 여러해 살면서 그런적이 없었다. 그래서 이상하다싶어 우선 정신과를 찾았던 것이다. 마땅한 진료 과목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정신과 의사는 그 질문 외에도 “혹시 가족 중에 교통사고를 당한 적이 있느냐?”는 것도 물었지만 1983년 아버지가 크게 교통사고를 당하시기도 했지만 그것은 이미 10년 전 일이었다. 결국 별다른 이유를 찾을 수 없어 간단한 약 처방을 받았지만 먹지는 않았다. 하긴 나는 소음에 예민한 편이다. 그래서 기계식 손목시계도 잘 때는 초침 소리가 들리지 않도록 멀리 두고 잤다. 벽시계도 다 무소음으로 구입했다. 그런데 아마도 1993년 4월 군목을 위한 입대를 앞두고 알게모르게 신경이 쓰여 평상시와 같은 집 옆 도로 소음이 더 크게 들렸는지 모르겠다. 이후 군입대해 경북 영천에서 3개월간 군사훈련 받을 때 조용해서 오히려 좋아했던 경험이 있었다. 우리는 흔히 정신과는 “미친”사람이 간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몸이 아프면 병원에 가는 것이 당연하듯 마음과 정신이 아프면 정신과에 가서 상담도 받고 필요하면 약물 처방도 받아야한다. 대학 때 상담과 심리에 관련된 책을 많이 봤다. 그리고 한때 상담학을 전공할려고도 했다. 왜 그랬을까? 내게 풀어야할 숙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아버지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내가 어렸을 때 아버지는 술을 드시면 어머니와 싸우는 주사를 부렸다. 4남매 앞에서도 주사를 부렸다. 그래서 아버지가 술을 드시고 오시는 날엔 집안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때로 그냥 주무시기도 했지만 대부분 애끚은 어머니에게 트집을 잡아 험악한 말과 행동을 하셨다. 이때 큰 누나는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편이었고 나는 무서워 도망갔다. 이것이 지금의 내 “회피성향”을 만들었는지 모른다. 내가 3년전 교회 문제로 교인들과 갈등할 때 옳고 그름을 떠나 7개월만에 관둔 이유도 이 내 성향 때문이다. 내가 관둔다고 했을 때 주변 사람들은 잘못한 것이 없으니 끝까지 싸우라고 했다. 아마 내가 적극적이고 과감했다면 반대편 교인들을 다 내쫓고라도 지금도 목회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내 성향이 아니다. 그래서 내가 포기 했을 때 나와 함께 반대편 교인들과 싸웠던 한 권사는 크게 실망해 나를 외면했다. 지금도 그 권사를 생각하면 미안하고 마음이 아린다. 나는 지금도 어느 싸늘한 밤 부모님의 부부싸움을 피해 도망갔던 동네 놀이터의 그 서늘함을 잊지 못한다. 그것은 자주 내 기억의 수면위로 떠오른다. 결코 치유될 수 없는 마음의 큰 상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은 목회를 그만두고 3년전부터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다. 그러면 아버지와의 사이는 어떻게 되었을까? 진작에 아버지를 용서했다. 신대원 이후인지, 결혼해서 인지 어느때부터 아버지를 이해하고 용서했다. 아버지는 아버지(내게 친할아버지)의 얼굴을 모른다. 태어나신 후 1년도 안되어 할아버지께서 병으로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아버지께는 위로 형과 누나가 한분씩 계셨다. 경기도 광주에서 태어나 생활하셨는데 청상과부가 된 할머니는 억척같이 일하셔서 땅과 소들을 갖고 계셨다. 그런데 어려운 때 간신히 속성으로 초등학교를 졸업한 아버지가 중학교를 보내달라고 하셨는데 할머니는 친척 오빠의 말을 듣고 “땅 파먹고 살면 되지 공부가 무슨 소용 있느냐?”며 중학교를 보내지 않으셨다. 이후 20살에 아버지는 형과 크게 다툰 후 무작정 서울로 상경하셨다고 들었다. 그리고 곧 중매로 결혼해 4남매를 낳으셨다. 할머니께 아들 가르칠 필요가 없다고 하신 친척은 자기 자식들은 다 교육을 시켰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그 친척 어른을 원망한다. 사람이 사람 구실 할려면 배워야하는데 왜 할머니께 아들을 교육 시키라는 말을 하지 않았던가? 그랬다면 할머니는 아버지를 교육시키셨을 것이다. 그러면서 왜 자기는 자기 자식들은 가르쳤는가? 이후 아버지의 삶은 파란만장했다. 세상 물정 모르고 할머니 땅 팔아 사업을 하면서 여러번 망해먹었다. 그럴 때 마다 할머니께도 주사를 부렸다. 머리를 방 벽에 부딪히며 “내 눈을 빼달라”고 할머니에게 소리를 질렀다. 참으로 할머니 입장에서도 기막힌 일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아버지는 배우지 못한 설음을 갖고 사셨다. 그당시 관공서에 가면 대부분이 한자인데 그것을 읽을 수 없어 어려움을 당하셨다. 그래서 결혼하시면서 어머니께 ‘아들을 낳으면 대학까지 공부를 시키고, 딸을 낳으면 고등학교까지 교육을 시키자’고 다짐하셨다. 그래서 그 다짐대로 나와 내 남동생은 대학을 나왔고, 누나들은 고등학교까지 가르쳤다. 어느날부터 나는 이에 대해 아버지께 감사하고 있다. 그런 다짐으로 나를 가르쳐 주셨기에 내가 지금 이렇게 내 역할을 하며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주사부리는 아버지가 싫었다. 그래서 초등학교 때는 아버지가 빨리 죽거나, 어머니가 아버지와 이혼하셨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사춘기가 돼서는 아버지와 목욕을 가지 않았다. 이후 아버지가 큰 교통사고를 당하셔서 1년이 넘게 병원에 계셨지만 병문안도 제대로 가지 않았다. 이 문제로 큰 누나와 싸우기도 했다. 생각해 보면 참으로 안타깝다. 아들에게 있어 아버지는 영웅이고 모델이다. 그런데 내 아버지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그래서 원망했지만 세월이 흐르니 어려서 아버지를 잃은 아버지를 이해하고 용서하게 됐다. 그리고 비록 어머니에게는 주사를 부렸지만 4남매에게는 손찌검 한번 안하신 것도 감사하고, 다짐대로 대학까지 보내주신 것도 감사했다. 그리고 초등학교 때 육성회비를 제때 못내는 아이들은 집으로 돌려보내거나 교실 앞뒤로 보내 벌을 주었는데 빌려서라도 주셔서 절대 그런 일을 당하지 않도록 해주셨던 것도 감사했다. 부목사 때 아내가 먼저 시작한 「치유상담연구원」을 다니면서 상담을 더 공부하며 더 아버지를 용서하게 됐다. 집단상담 치료과정에서 어려서 아버지를 피해 한밤에 놀이터에서 떨고 있을 때 멀리서 주님이 나를 보고 계셨다는 것을 깨닫고 나는 눈물이 났고, 지금 이 대목을 쓰면서도 뜨거운 눈물이 흐른다. 그렇다. 그당시 나는 교회를 다니고 있지 않았지만 주님은 한밤에 추위에 떨고 있던 나를 바라보고 계셨던 것이다. 그래서 초등학교 때 잠시 다니던 교회를 안 다니고 중학교 때 다시 다니면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이 너무나 좋았다. 육신의 아버지는 싫었지만 하나님 아버지는 너무나 좋았다. 그래서 그 "하늘" 아버지가 좋아 고1때 목사가 되겠다고 서원했는지도 모른다. 나는 나이를 먹어가며 또 상담과 심리에 대한 책의 도움으로 아버지를 이해하고 용서하게 됐지만 그래도 집단상담을 통해 큰 도움을 받았다. 상담치유기법에 의해 내 어린 시절로 다시 돌아가 상황을 보고, 또 아버지 입장에서 그 상황을 보면서 책에서 본 것과는 비교되지 않는 치유경험을 했다. 나처럼 “역기능가정”에서 성장하지 않았다면 축복이다. 자신 안에 “성인아이”가 없다면 다행이다. 그러나 세상에 완벽한 가정, 부모가 어디 있겠는가? 우리 몸도 완전히 100% 건강할 수 없듯 마음과 정신도 완벽히 건강하지 못하다. 그렇게 자부하는 사람이 더 위험하다고 본다. 취재가서 모처럼 한성렬 교수님의 강의를 들었다. 「치유상담연구원」에서, 또 한 교수님이 운영하는 「예상」에서 많은 유익을 얻었다. 특별히 한 교수는 목회자 가정에서 성장한 장로로서 목사들의 상황을 잘 이해하고 있다. 요즘같이 목회가 어려운 때 목회자는 번아웃되어 목회를 제대로 감당하기가 어렵다. 또한 원가족에서 생긴 문제로 인해 목회와 가정에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한 교수는 목사들도 상담받아야 한다고 외치는 것이다. 그런데 여전히 기도만하면, 성령충만만 받으면 모든 게 해결된다고 하는 “신령파”도 많이 있다. 그러나 배고프면 음식을 먹어야 배부르듯이 마음의 문제, 심리의 문제 등은 기도와 아울러 상담이 필요하다. 과거에 한번 정신과를 간 이후 나는 정신과를 간 적이 없다. 그러나 나중에 필요하면 정신과를 갈 수도 있고, 앞으로도 필요하면 더 나은 삶을 위해 상담도 받고 싶다. 상담의 유익함을 경험한 자로서 그렇다. 그러나 상담 비용은 매우 비싸다. 요즘 뜨고있는 오은영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에게 상담 받을려면 엄청난 비용을 지불해야하는데도 예약자가 차고 넘친다고 한다. 이것은 정신과를 찾고 상담 받는 것에 대한 오해와 거부감이 많이 사라졌다는 것이며, 한편으로는 그만큼 삶에 치여 마음에 상처 받은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다. 목회자도 예외일수는 없다. 내가 굳이 내 이야기를 쓰는 이유는 경험자로서 상담받는 것이 유익하다는 것과 목회자도 인간인 이상 완전하지 않기에 상담을 받아야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말해주기 위해서이다. 주변에 보면 상담이 필요한 목사들이 많이 보인다. 그런데 정작 당사자는 그 사실을 모르고 있다. 나는 여전히 다양한 책을 통해 내 자신의 마음을 알아가고 치유하며 성숙해가는 과정을 밟고 있다. 더 온전해지고 행복해지기 위해서이다. 그 길에 상담을 받았던 것이 크게 유익했다는 것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싶다. 당신에게도 상담이 필요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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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2023-10-07
  • 【논설】 또 하나의 도너월 논쟁?
    페이스북에 이국진 선배 목사가 “총신 도너월을 없애야 할까요?”란 주제의 유튜브 영상을 올렸다. 곧 총신에 도너월을 할 예정이고, 이 사실을 기사로 작성해 알렸기에 관심을 갖고 봤다. 잘 설명해 주셔서 유익했다. 다음은 유튜브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총신대 종합관 1층 로비에 도너월이 있는데 학생들 중에 이것을 철거해야한다는 주장이 있다는 것이다. 총신대는 작년에 기증자의 이름을 액수별로 구분해 기념하도록 도너월을 만들었다. 그런데 이것은 사람의 이름을 드러내는 것이기에 비성경적이라는 주장이다. 성경적인 근거로 마 6:1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하느니라”를 든다. 이국진 목사는 먼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돌아봐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인간이 드러나지 않아야한다는 주장에는 일단 박수를 보내고 싶다고 했다. 하지만 이국진 목사는 성경 전체의 가르침에 주목해야한다고 말했다. 성경은 선한 일을 행한 자를 기리고 있다. 히브리서도 믿음의 사람들을 열거하며 본 받으라고 말씀한다. 로마서에서도 바울은 선교 동역자들의 이름을 열거하며 감사하고 있다. 고전 11:8에서는 빌립보교회가 자신을 도운 것을 언급하고 있다. 고후 9:2에서도 고린도교회가 재정적 헌신을 할 것이라고 빌립보 교회에 말해 좋은 영향을 끼쳤다고 말했다. 바나바도 전 재산을 드릴 때 무명으로 드리지 않았다. 이런 일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선한 일을 하는 동기 부여가 될 수 있다. 예수님께서도 향유를 부은 여인을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 잊지 말고 기리라고 하셨다. 이어 이국진 목사는 18년간의 미국 유학 경험을 예로 들며 미국교회와 신학교에는 모든 건물과 물품에 기증자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고 했다. 이것은 그동안 교회와 신학교가 유지되기 위해 많은 분들이 헌신한 것을 잊지 않고 기억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런 행태에 대해 미국 교인들은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있다. 오히려 이국진 목사가 이 문제를 제기했을 때 그들은 “참 흥미롭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들에게는 그것이 전혀 문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사실 익명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성경적인 것이라기 보다는 유교적인 사고방식일 수 있다. 그리고 실명이든 익명이든 개인적으로 결정하면 된다. 그런데 익명으로 해도 교만의 여지는 항상 존재한다고 경고했다. 익명을 통해 자기 자신을 더 높일려는 유혹에 빠질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언제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고 있는지 자신을 돌아보는 것이 중요하다. 도너월을 부정한다면 주보에 헌금자 이름을 적는 것도 하지 말아야한다는 주장까지 나갈 수 있다. 이것은 성경적이라고 할 수 없다. 성경은 헌신자들을 기록해 그들을 본받기를 바라고 있다. 그러면서 자신도 총신대에 가서 도너월을 볼 때마다 더 많이 헌신하고 싶다는 동기부여를 받는다고 했다. 그래서 도너월이 많은 사람들에게 선한 동기로 작용했으면 좋겠다고 끝맺었다. 그렇다. 나도 어려운 형편에 도너월에 참여하고자 한 것은 학교를 오가며 도너월을 봤기 때문이다. 거기에 비어있는 많은 자리를 보고 안타까운 마음에 10만원씩 4년 적금을 부어 500만원을 낼 생각을 했던 것이다. 그리고 익명으로 하는 것도 좋겠지만 한편으로 내 이름과 아내의 이름을 새겨 결혼 30주년 기념 선물로 남기고 싶었던 것이다. 마치 남산타워에 올라가면 수많은 자물쇠를 기념물로 걸어놓은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도너월 맞은 편에는 백남조기념홀이 있다. 백남조는 누구인가? 총신대를 위해 자기 재산을 내놓은 부전교회 장로님이 아니던가! 효암 백남조 장로는 총신대 사당동 캠퍼스 조성과 대학인가 등을 위해 힘썼으며 초대 재단이사장부터 제6대 재단 이사장까지 연임하는 등 21년 동안 총신대를 위해 헌신했었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총신대 대강당을 그의 이름으로 명명한 것이다. 참으로 고마운 장로님이 아닐 수 없다. 다행히 여러 사람이 나의 이러한 마음이 담긴 기사를 보고 자기도 해보겠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러면 된 것이다. 별볼일 없는 나를 드러내봤자 누가 알아주겠는가? 모교 총신을 향한 나의 이러한 마음이 한 사람에게라도 공명을 일으켜 그가 조금이라도 학교에 후원하기를 바래서 굳이 기사로 작성했던 것이다. 기회가 되면 총신대 종합관 로비 우측에 비어있는 도너월을 가서 보기 바란다. 그러면 여러분도 나와 같은 마음이 생길 것이다. 이는 총신대학을 나오지 않았더라도 합동측 모든 목사에게 해당되며 합동측 모든 교회와 교인들에게도 해당된다. 드려진 도너월 기금은 앞으로 합동 교단을 이끌어갈 총신신대원 학생들의 전액 장학금을 위한 기금으로 쓰여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매년 68억원이 필요하다. 그에 비하면 내가 드릴 액수는 참으로 부끄러울 뿐이다. 추후 정기적으로 소액이라도 계속해서 보낼 수 있기를 다짐해 본다. 또다른 도너월 논쟁을 잘 다뤄준 이국진 박사 선배께 감사드린다.
    • 오피니언
    • 논단
    2023-10-04
  • 【내이야기】 “형이 왜 기자하는거야?”
    “형, 형이 왜 기자하는 거야?”하고 오랜만에 만난 1년 후배가 물었다. 한국군종목사단장을 역임하고 해군 대령으로 예편해 김포에 규모있는 교회로 부임한 학교, 동아리, 군목 후배였다. 그날은 아직 친구 밑에서 취재부장이라는 직함으로 기자 생활을 하고 있을 때였다. 친구가 군선교사 모임이 있으니 가보라고 해서 갔는데 그만 후배를 만난 것이었다. 후배는 오랫동안 연락이 끊어진 동안 왜 하고 있던 담임목회를 안하고 기자를 하는지 물은 것이다. 잠시 부끄러웠다. 기자라는 신분이 초라해 보였다. 가수 현진영이 노래한 “저 여자가 내 여자여야하고, 저 가정이 내 가정이어야 하는데”같이 “순서 맡는 자리가 내 자리가 되야하고, 박수 받는 자리가 내 자리여야 하는데” 이제는 그런 사람들을 취재하는 기자가 된 것이다. 후배에게 “살다보니 그렇게 됐다”는 식으로 간단히 말하고 헤어졌다. 이후 이 후배를 한 취재현장에서 또 보게 됐다. 그러자 “형, 형 글발이 살아 있던데. 언제부터 그렇게 기사를 잘 썼어?”하고 말했다. 그리고 이때는 시간 여유가 있어 교회를 떠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를 설명했다. 만 나이 39세에 서울 시내 중심가 용산에 있는 동암교회 담임으로 부임했다. 군목 4년, 경기노회 소속 혜성교회에서 부목사 3년, 또 같은 경기노회 소속 승동교회에서 부목사 5년을 보내고 처음 지원한 곳에 설교 한번 하고 부임했다. 이 교회는 함남노회의 중심교회로서 당시 한석지 증경총회장이 원로목사로서 생존해 계셨었다. 공교롭게 내가 교육전도사로 있었던 람원교회가 같은 함남노회라 1992년 목사 안수를 동암교회에서 받았는데 13년만에 담임으로 부임한 것이다. 1992년 한석지 목사님께서 원로로 물러난 이후 이 교회는 12년간 4명의 담임목사를 이런저런 이유로 내쫓았다. 그리고 15년만에 나도 그 대열에 합류했다. 이유라면, 교회가 성장하지 않은 것에 책임을 지라는 것이며, 자기들이 싫어하니 나가라는 것이었다. 내가 부임할 때 정치부장이었던 이호현 목사님(거짓이 아닌 팩트이기에 실명을 거론한다)은 이때도 정치부장을 하고 계셨는데 교회 상황을 알리자 안타까워하시며 개입을 하셨다. 15년 전 내가 동암교회에 부임하기 전 교회를 방문했을 때 “추후 담임목사를 이유없이 내쫓는 경우 노회는 즉각 시무장로를 치리할 것이다”와 같은 대자보가 교회 벽에 붙어 있었다. 그것을 떼어 잘 보관하고 있었는데 어디에 두었는지 잊어버렸다. 전임자는 총신대 역사학과 출신으로 목회를 잘했는데 시무 투표를 1년 연기하자는 말에 그만 1년 만에 사임하게 되어 노회가 깊이 개입해 장로들을 문책할 것이라고 경고했던 것이다. 나는 목사를 습관적으로 내쫓는 이러한 교인들의 악습을 제거하기 위해 각오를 단단히 가졌다. 이호현 목사님은 이 일을 책임맡은 노회장과 부노회장에게 “만약 동암교회 교인들이 말하는 이유로 담임목사가 나가야한다면 함남노회 목사의 80-90%는 다 나가야한다”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주동이된 한 장로는 70이 넘어 시무장로가 아니고, 또 한 장로는 10여년간 교회를 떠나 있다가 잠시 연로한 어머니 때문에 다니고 있는 상태라 이들을 치리한다는 것은 아무 영향력이 없었다. 그리고 이미 4명의 담임목사를 내쫓은 경험들이 있는지라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다. 그래서 분란 7개월만에 모든 것을 내려놓게 됐다. 여기까지 말하자, 후배는 “그때 내게 연락하지, 나도 현역으로 있을 때 이상한 교인들이 있어가지고 다 법적으로 싸워 처리했는데”라고 말했다. 나는 “나는 어려서부터 싸움을 잘 못해. 내가 먼저 죽을 것 같아 그냥 사임한 거야”라고 말하자 “그렇구나, 사람마다 기질이 다르기는 하지”라고 후배가 말했다. 사임 후 이미 교계 기자를 하는 대학동기를 우연히 만나 “발이 넓을테니 갈 교회를 소개해 달라”고 하자, 그 친구가 “너가 기자가 되어 교회를 알아보라”는 말에 덜컥 기자가 됐다. 그래서 나는 자칭 “얼떨결 기자”이다. 기자가 뭔지도, 교계에 기자가 있다는 것도 몰랐던 사람이다. 그런데 이제는 빛과소금뉴스라는 언론사를 운영하고 있다. 그래도 “형, 형이 왜 목회하지 않고 기자하는거야?” 하던 후배가 “형, 형 글발이 살아 있던데. 언제부터 그렇게 기사를 잘 썼어?”하고 말해주니 고맙다.
    • 오피니언
    • 칼럼
    2023-10-04
  • 【단상】 자랑스런 합동 군목
    9318564, 군종 51기인 나의 군번이다. 많은 것들은 잘 망각하는데 이상하게 군번은 세월이 흘러도 잊혀지지 않는다. 나는 총신대에 입학한 1985년에 군종장교사관후보생 선발시험에 합격해 이후 신대원까지 마치고 1993년에 입대했다. 원래는 1992년에 입대해 군종 50기가 되야했는데 병력 수급 조절을 이유로 내 기수 대부분이 1년 대기 발령했다. 덕분에 신대원 졸업 후 목사 안수를 받고 1년간의 여유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지난 6월 1일 군목 예비역과 현역을 아우르는 ‘합동군목회’가 창립됐다. 자료집을 보니 예비역은 군종 6기부터 시작해 77기까지 소천하신 분 포함 254명이다. 현역 군목은 61명이며, 후보생은 이번에 합격한 10명을 포함 84명이다. 나는 현역시절 군입대한 아들을 위해 전화하는 부모님들의 연락을 종종 받았다. 그분들은 자기 자녀가 어려운 군생활을 잔 견디고 신앙생활을 잘 할 수 있게 해달라고 간곡히 부탁했다. 그리고 전역 후 내 큰 아들이 군에 입대했을 때 그 부모님의 마음을 절실히 실감했다. 아들이 입대했을 때 그나마 기댈 수 있는 것이 군목이었다. 그래서 군목 동기를 통해 아들이 입대한 부대의 군목 연락처를 알아내 부탁을 하기도 했다. 군에 군목이 있기에 자녀들의 신앙생활이 유지되고 또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도움을 받을 수 있다. 그런면에서 군목 제도가 있다는 것이 참으로 고마운 일이다. 과거 한 때 군목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았다. “군목도 목사냐?”하는 비아냥거리는 소리도 있었다. 그래서 영관급 군목으로 전역 이후 사역지를 못찾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더이상 그런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타교단 군목들은 어떨지 모르나 우리 합동 교단 소속 군목들은 성실하게 맡은바 소임을 다하고 있다. 그래서 군대내 평가도 좋고 이후 전역해서도 교회로 잘 청빙되고 있다. 1년 직속 후배인 예비역 대령 황00 목사는 현역 시절부터 김포에 있는 모 교회 후임으로 내정돼 전역 후 부임하고 목회를 잘 감당하고 있다. 또한 같은 후배인 최00 목사도 육군 군종실장을 역임하고 대령으로 예편해 서울에 있는 모 교회로 부임하게 된다. 그리고 많은 선후배 군목들이 전역 후 교회에 부임해 목회를 성실하게 잘 감당하고 있다. 아마도 군대에서 지휘관의 특별참모 역할을 하며 많은 부대 교회를 목회한 것이 민간 목회를 할 때 많은 도움이 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특별히 현 총신대학교 총장 박성규 박사는 군종 45기로서 목회도 성실하게 감당하고 총장이 되어 학교발전에 앞장서고 있어 모든 군목들의 자랑이 되고 있다. 예비역 군목 소령 출신으로 군목후보생들에 대한 남다른 관심과 지원으로 국방부가 실시한 올해 군종사관 후보생 모집에 총신대학이 최다의 합격자를 내는 결과를 얻었다. 최종 합격자 26명 가운데 10명의 합격자를 배출했다(학교별 합격자 수는 다음과 같다. 총신대: 10명, 장신대: 6명, 숭실대: 5명, 연세대: 1명, 고신대: 1명, 감신대: 1명, 침신대: 1명, 서울신대: 1명). 이는 학교에서 군종사관 후보생 지원자들에게 시험에 집중할 수 있도록 배려하고 지원한 덕분이라 할 수 있다. 과거 총신대학 총장을 역임했던 정성구 박사는 군종 25기이다. 박성규 총장은 20년 만에 예비역 군목 가운데 2번째로 총신대학 총장이 된 것이라 군목들은 더 기뻐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합동군목회는 작년 12월 15일 첫 모임을 갖고 뜻을 모아 지난 6월 1일 창립예배를 드렸다. 예비역, 현역 군목들이 힘을 모아 군선교 사명을 감당하고 이후 한국교회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한 예비역 군목 선배는 얼마전 “군목은 엘리트”라고 말했다. 총신대학에 들어올 정도의 실력을 갖고 있고, 또 군종사관 후보생 시험에 합격했으니 엘리트라는 것이다. 사실 군목 시절 미국 군종학교 위탁 교육을 비롯해 국내 석사과정 위탁교육을 받거나, 총신대학의 학비 지원 혜택으로 많은 군목들이 Ph.D나 Th.D학위를 받고 있다. 그동안은 그런 생각을 해본적이 없었는데 일면 맞는 말이다. 물론 엘리트 의식으로 자만하는 군목들은 없다. 군복입은 목사로서의 사명을 묵묵히 성실하게 감당하고 있을 뿐이다. 군목으로 단기를 하든 장기를 하든, 현역이든 예비역이든 군목 사역은 잊혀지지 않는 좋은 경험이다. 앞으로도 계속해서 군과 교회에서 좋은 평가를 받고 인정받는 현역과 예비역들이 되기를 바란다. 합동군목회 창립 취지문 “하나님을 위하여, 나라를 위하여” 사랑하는 선후배 동역자 목사님들의 평안을 기원합니다. 목사로서 가장 뜨겁고 순수했던 시절 군선교를 위해 헌신했던 목사님들의 수고와 헌신에 깊은 감사드립니다. 군선교 현장은 다음 세대를 세우는 황금어장이기에 군목이었다는 우리의 정체성은 시간이 흘러도 소중한 추억으로 남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지금 군선교 현장은 타종교의 거센 도전과 인권을 가장한 인본주의의 확산, 사회 전반에 만연한 반기독교 정서로 인해 큰 위기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우리 합동교단은 가장 많은 군목과 군목후보생을 보유하고 있지만 군선교 현장의 변화와 위기에 효율적으로 대응하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이러한 위기 속에서 보다 능동적이고 효과적인 군선교 사역을 감당하기 위해 합동군목회(가칭)를 조직하려고 합니다. 합동군목회는 다음과 같은 역할들을 감당하려고 합니다. 첫째, 예비역 군목들의 풍부한 경험과 자산을 군선교 현장에 유산으로 전수하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예비역과 현역의 유대를 강화함으로써 군선교 위기에 공동으로 대응하고 시대와 상황에 맞는 선교전략을 마련하는 것입니다. 둘째, 현역 군목들의 군종활동을 효과적으로 후원하는 것입니다. 현역 군목들은 선교활동, 교육활동, 교회시설 관리, 전역 후 진로에 큰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이러한 후배들에게 선배의 정신적, 물질적 후원은 현역 군목들의 자질을 향상시켜 더 역량 있는 사역자로 만들 것입니다. 셋째, 군목후보생의 역량을 개발하는 것입니다. 우리 후배들이 어렵게 군목후보생으로 선발되었지만 임관할 때까지 방치되는 것이 현실입니다. 진로에 대한 고민으로 학업을 중단하거나 교회운영, 설교에 대한 경험이 없어 군목이 되었을 때 평가절하되는 안타까운 현상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합동군목회를 통해 유기적인 후보생 관리체계가 유지된다면 군선교 현장에서 시행착오를 예방할 수 있고 유능한 군목을 배출하는데 큰 역할을 감당할 것입니다. 다음 세대가 복음화 되어야 한국교회에 미래가 있습니다. 그래서 군선교는 우리가 포기할 수 없습니다. 이 거룩한 사역에 뜨거운 열정을 갖고 있는 선후배 목사님들의 적극적인 협력과 지원을 부탁드립니다. 2023년 6월 1일 합동군목회 창립준비위원회
    • 오피니언
    • 논단
    2023-10-04
  • 공약을 실천하는 오정호 총회장
    108회 총회가 새로남교회에서 개최된 총회를 시작으로 출발했다. 이제 앞으로 1년간 오정호 총회장이 총회를 어떻게 끌고 갈지 관심있게 지켜보고 있다. 오정호 총회장은 후보 시절 정견발표에서 몇 가지를 약속했다. 그리고 총회 기간에 그 약속들을 지키는 모습을 보여줘 총대들의 신뢰를 얻고 있다. 오정호 총회장은 다음과 같이 약속했다. 1. 정책총회로 세우겠습니다. 개인의 색깔을 드러내기보다, 총회의 발전을 우선하겠습니다. 앞선 107회 총회 때는 권순웅 총회장이 진두지휘해 샬롬 부흥 운동을 이끌며 많은 세미나와 훈련을 했다. 그러나 108회 총회 때 그 세미나와 훈련은 계승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정책을 세워 나가는 정책 총회로 방향을 정했기 때문이다. 2. 금권 선거를 하지 않은 것처럼, 이후에도 결코 이권에 개입하지 않겠습니다. 뒷모습이 아름다운 좋은 직분자가 되겠습니다. 지금까지 해왔던 것처럼, 어려운 동역자를 격려하고, 힘을 주는 사역을 진행하겠습니다. 총회 임원들이 이권에 개입하지 않겠다는 것은 지난 107회기 때도 나왔던 말이다. 그러나 이에 반하는 뒷말도 돌았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실망했다. 금번 회기에는 결코 총회 임원이 이권에 개입하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3. 총회가 화합과 연합과 품격의 중심에 서도록 하겠습니다. 목회자와 모든 성도들이 긍지와 자부심을 가지도록 힘쓰겠습니다. 이번 총회에서 구 충남노회 문제, 성석교회 문제등이 해결됐다. 그리고 선관위원들을 조사처리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었지만 위원장과 심의분과장의 공개 사과로 총대들의 분노를 달래고 일단락했다. 화합과 연합의 기조를 유지하기 위한 특단의 조처라고 본다. 4. 원팀으로 임원회와 상비부와 산하기관과 손에 손잡고 나아가겠습니다. 오정호 총회장은 총회 석상에서 각 상비부가 보고할 때 관계자들을 모두 나오게해 격려하며 감사하고 총대들에게 박수를 보내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우리는 원팀이라는 것을 말과 행동으로 자주 보여줬다. 많은 보고자들이 힘을 얻고 격려를 받았다. 다음의 약속들은 앞으로 어떤 식으로 지켜나갈지 관심있게 볼 사항들이다. 5. 주일학교와 청년들의 손을 잡고 뛰겠습니다. 현존하는 미래세대를 소중한 파트너로 존중하겠습니다. 6. 장로님과 가장 조화롭게 동역의 정신을 실천하겠습니다. 7. 농어촌교회를 포함한 전국교회를 찾아가 함께 예배하고, 목회 현실을 공감하며 함께 울고, 함께 웃는 동역자로 섬기겠습니다. 앞에 약속들을 잘 지켰듯이 이 약속들 또한 잘 지켜나갈 것이라고 기대해본다. 또한 오정호 총회장은 다음과 같은 약속도 했다. 1.총회 연금 · 기금을 살리겠습니다. 총회 소속 목회자의 75%가 국민연금 및 은급재단의 활성화를 노후 문제 해결을 위한 대안으로 꼽아 주셨습니다. 우리 총회 연금은 총회 소속 목회자의 은퇴 준비에 있어 매우 유용한 수단입니다. 기금을 확충하고 연금 가입자 수를 더 확보하고 운용수익을 높여 연 · 기금을 사랑과 나눔으로 살려 은퇴 후의 최소한의 안정된 삶의 기반을 마련하겠습니다. 실제로 오정호 총회장은 총회 때 총회발전기금 중 50억원을 은급기금으로 활용하기로 결정했다. 모든 총대들의 동의하에 총회 연기금을 살리겠다는 약속을 지킨 것이다. 2. 공의로운 재판을 실현하겠습니다. 판결의 부당성, 편파성, 정치성으로 인해 승복하지 않고 결국 국가 법정으로 가서 판결효력 무효 소송으로 가는 경우가 빈번합니다. 공의로운 재판, 교회를 든든히 세우는 재판이 되도록 하겠습니다. 재판 결과를 교회와 당사자가 신뢰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재판국 운영에 많은 발전이 있었지만, 여전히 개선되어야 할 요소가 남아 있습니다. 재판국을 새롭게 하여 신뢰받는 총회가 되도록 하겠습니다. 오정호 총회장은 금번 회기부터 재판 실명제를 도입했다. 판결문에 그 재판에 관여한 사람들의 이름을 남김으로써 그 재판 결과에 책임을 지도록 한 것이다. 요즘은 1000원도 안하는 과자 봉지에도 그 과자를 검수한 사람의 이름이 찍혀있다. 품질에 책임을 지겠다는 자세이다. 재판국은 노회, 교회, 개인에게 중요한 재판을 자신의 이름을 걸고 재판해야할 것이다. 3. 대안(代案)적 목회를 모색하여 목회의 아름다운 동역을 이루겠습니다. 우리나라는 급속하게 고령사회에서 초고령사회로 진입하고 있습니다. 2017년에 이미 고령사회로 진입했고 2025년에는 65세 이상 인구가 20%가 넘는 초고령사회가 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습니다. 고령사회, 인구절벽, 다문화 가족, MZ세대로 인한 사회현상은 우리 사회의 현실이 되었습니다. MZ세대의 탈교회 현상도 우려할 만한 상황입니다. 이제는 변화된 목회환경에 맞는 대안적 목회를 펼쳐야 할 때입니다. 미래지향적인 목회적 대안을 구축함으로 내일이 기대되는 교회가 되도록 하겠습니다. 특히 우리 총회의 정체성 확립과, 목회현장을 건강하게 세우는 일에 집중하겠습니다. 총신과 손을 잡고 목양아카데미를 설치하여 목회자님들의 재교육과 보수교육을 통하여 목회자의 마음이 다시 불타오르도록 돕겠습니다. 온-오프라인 환경을 활용한 목회자의 지속적인 교육과 재충전의 기회를 제공하겠습니다. 최신화되고 전문화된 목양 콘텐츠를 개발하겠습니다. 합동교단의 신학을 밑받침하는 총신의 교수들이 실전 목회를 하고 있는 목사들에게 다양한 재교육 기회를 제공하게 될 것이다. 이를 통해 교수들은 이론의 상아탑에서 벗어날 수 있고, 목사들은 오래 전 배운 것들에 머물지 않고 새로운 것들을 배움으로 목회에 질적 성장이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과거와 달리 총회와 총신은 서로 밀접한 관계이다. 이제 다양한 방법으로 서로 상생하고 윈윈하는 좋은 때가 왔다. 4. 총회와 총신과의 관계를 최상의 수준으로 열어가겠습니다. 그동안 총신이 정치가 난무함으로 상실한 총신의 대내외적 위상을 제고하여 대한민국을 넘어 세계적 개혁신학과 신앙의 요람으로 만드는데 열정을 총동원 하겠습니다. 총회는 총신을 진정성있게 존중하고, 총신은 총회의 결정과 정책에 아멘으로 화답하도록 섬기고, 이끌겠습니다. 오정호 총회장은 총회 때 보고하러 온 화종부 이사장과 박성규 총장을 양 손으로 붙잡고 총신과 총회는 원팀이라는 것을 강조했다. 화종부 이사장은 총신이 총회의 직할신학교라는 것을 분명히 밝혔고, 박성규 총장은 교회를 살리는 불붙은 사역자를 배출해 낼 것이라고 약속했다. 이에 오정호 총회장과 총대들은 총신에 10억 지원금을 가결했다. 5. 복음진리로 우리 총회를 견고하게 세워 우리나라를 지켜내겠습니다. 민족복음화와 세계 선교를 견인하겠습니다. 반성경, 반인륜적인 포괄적 차별금지법과 인권을 빙자한 악법 제정 시도와 문화를 빙자한 성혁명의 가치혼란을 척결하겠습니다. 우리 사회를 뒤흔드는 악성 이단은 물론 무신론적 가치관과 교회에 적대적이며 공격적인 세력의 도전에 대해 단호하게 맞서겠습니다. 교회의 가치를 훼손하고 예배와 전도의 자유를 침해하는 공정과 상식에 어긋난 모든 시도를 무력화시킴으로 한국교회를 지키고 믿음의 세대 계승을 이루는 거룩한 사역을 한국교회 의 모든 교단과 연합기관과 굳게 손잡고 실행하겠습니다. 우리 모두의 자랑인 GMS를 응원하고 격려하는 사역을 힘있게 감당하겠습니다. 그동안도 오정호 총회장은 악법폐지운동과 동성애 반대운동 등에 앞장서 왔다. 이제는 합동 교단을 대표하는 총회장이라는 위치에서 더 강력하게 한국교회와 사회를 지키는 운동을 전개해 나갈 것이라고 기대한다. 오정호 목사는 후보 공약에서 지지와 응원을 간곡히 부탁했다. 개혁신학의 영적 전우애를 간직하신 목사님! 건강한 교회를 세우기 위하여 평생 달려오신 장로님! 지금까지 한결같은 마음으로 저를 도와주신 것처럼 계속 지지해주시고 응원해 주시기를 정중하게 요청 드립니다. 믿어주시고 지지해주셔서 선거혁명을 조금이나마 이룰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정신으로 초지일관 달려 가겠습니다. 목사 오정호는 예수님의 신실한 제자다운 삶의 열매로 증거하기를 늘 기도하며 힘쓰겠습니다. 오정호 총회장은 총회 기간에 여러 약속들을 지켜나가는 모습을 보였다. 남은 약속도 잘 지켜 나가기를 모든 총대와 한국교회가 기대하며 지켜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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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논단
    2023-10-03
  • 108회 총회의 순항과 연착륙을 기대한다
    비행기가 무사히 착륙했다. 인천공항을 출발해 4시간 30분만에 베트남 다낭공항에 도착했다. 우리가 탄 비행기는 베트남 항공으로 기장이 베트남 사람이었는데 이륙과 착륙이 남다르게 부드러웠다. 108회 총회가 다행히도 목요일 오후에 파회했다. 그 다음날 베트남 다낭으로 결혼기념 여행을 가기로 준비를 했기에 총회가 금요일까지 할까봐 신경이 쓰였다. 금요일 오전, 이전과 달리 수많은 사람들이 출국하는 바람에 대기 시간이 길어 가까스로 비행기에 탑승했다. 그리고 모처럼만의 해외여행을 즐겼다. 비행기는 3단계로 운영된다. 이륙과 운항 그리고 착륙. 무거운 비행기가 이륙하기 위해서는 제일 많이 연료가 소비된다. 긴 활주로를 달려 탄력을 받아야하기에 노면의 충격을 가장 많이 받을 때이다. 이륙 이후에는 일정한 고도에 도달하기 위해 40도 정도로 기울어 가파르게 상승한다. 이때 제대로 상승하지 못하면 추락할 수 있다. 비행기는 온 힘을 다해 궤도에 도착하고자 용을 쓴다. 이후 정상 궤도에 오르면 구름 위를 떠 가듯이 운항한다. 가끔 난기류로 비행기가 흔들리기는 하지만 미리 예측 되기에 승객들에게 안내해 별 문제없이 운항은 계속된다. 이때 기장은 자동항법으로 전환하고 이륙 때 생긴 긴장의 끈을 늦춘다. 기내에서는 쉬는 사람, 자는 사람, 대화하는 사람, 책 읽는 사람 등등 다양한 활동이 이루어진다. 그리고 때가 되면 기내식이 제공되기도 한다. 그러다보면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하고 착륙하게 된다. 착륙은 너무나 중요하다. 비행기 운항의 마지막 단계이기 때문이다. 착륙을 제대로 못하면 이륙도, 운항도 아무 소용없다. 이번 비행기 기장의 착륙 실력은 대단했다. 지면에 비행기 바퀴가 부딪히는 충격도 느끼지 못했는데 착륙을 했던 것이다. 숨가빴던 108회 총회를 모두 취재 후 다음 날 비행기를 타면서 총회를 생각했다. 우선 108회 총회를 개회해 무사히 파회까지 했기에 108회 총회는 이륙에 성공했다. 4일간 진행된 총회를 통해 오정호 총회장은 108회 총회를 이륙시키고 정상 궤도에 진입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몇몇 시끄러운 문제들이 있었지만 뚝심으로 그 문제를 처리했다. 그에 대해 문제 제기를 하는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무난하게 총회를 진행했다고 본다. 만약 총회가 시끄러웠다면 오정호 총회장의 108회 총회 이륙에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다. 일부 사람들은 총회 진행에 문제가 있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찬반 논쟁이 있을 때는 양측이 의견을 개진할 시간을 주고 표결에 붙여 문제를 해결했다. 그래서 마지막 날 정치부 헌의안 전부를 해결하고 파회할 수 있었다. 초기에는 회의 진행이 느슨해 이러다가는 금요일날 끝나 베트남 여행에 차질이 나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한낱 기우에 지나지 않았다. 이제 오정호 총회장의 108회 총회는 정상 궤도에 올랐다. 앞으로 내년 총회 때까지 순항하기를 바란다. 1년여 기간에 여러 난기류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오정호 총회장은 “이권에 개입하지 않고 바르게 하겠다”고 공언했다. 총회 임원들이 이권에 개입하면 반드시 문제가 생긴다. 그래서 이것을 알기에 오정호 총회장은 절대 이권에 개입하지 않겠다고 수차례 밝힐 것이다. 그리고 최근 기독신문에 나온 한 대담에서 이렇게 밝혔다. ▲교단 목회자와 성도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부탁드립니다. 제가 총회장에 추대된다고 하니 아내가 후대까지 존경받을 수 있는 총회장이 되도록 힘쓰라고 조언하더군요. 그때 제가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저는 취임할 때보다 이임할 때 칭찬받고 싶습니다. 총회장이 되었다고 바뀌는 게 아니라, 초지일관 처음 다짐을 유지하고 스스로 점검하고 자중하면서 직분을 수행하겠습니다. 많이 도와주시길 바랍니다. ▲이임할 때 돌아보며 흐뭇해할 수 있는 총회장님이 되길 바라고, 새로남교회 성도들이 자랑스러워할 수 있는 총회장님이 되리라고 믿습니다. 후대까지 존경받고, 이임할 때 칭찬 받기 위해서는 그리고 무엇보다 한평생 목회하고 있는 새로남 교우들에게 자랑이 되기 위해서는 임기 1년 동안 많은 일들을 바르게 처리해야한다. 아무 사심없이 공명정대하게 일 처리를 한다면 분명 좋은 결과를 얻을 것이다. 그리고 1년간의 총회 운항을 끝내고 안전하게 착륙한다면 틀림없이 박수 받으며 퇴임하는 총회장이 될 것이다. 그러한 총회장이 되야 총회와 한국교회가 잘 될 수 있다. 108회 총회의 안전한 운항과 부르러운 연착륙을 108회 총회 기장인 오정호 총회장에게 기대하고 부탁하는 바이다.
    • 오피니언
    • 논단
    2023-10-03
  • 【기고】여성 안수 문제,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1. 안타까운 108회 총회의 갈지(之)자 행보 이번 108회 총회에서 여성 사역자 위원회는 여성들에게도 강도사가 될 수 있는 길을 제안하였고, 이를 이의 없이 총회는 받아들였다. 이러한 결정은 우리 총회가 획기적인 방향으로 걸어갈 수 있는 놀라운 진전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는 총회 마지막 날 번복되었다. 없던 일이 되었고, 더 나아가 아예 여성들이 안수에 대해서는 꿈도 꾸지 못하도록 다른 이름의 직책을 만들어주겠다는 것으로 방향을 잡았다. “교육사”, “신학사”라는 이름으로 설교할 수 있게 해주겠다는 것인데, 이는 목사 안수는 아예 가능하지 않도록 못박아 버리는 일로 보여진다. 이러한 갈지자 행보는 더더욱 여성들로 하여금 분노하게 만들고, 교단을 떠나는 일이 가속화될 것이라고 예상된다. 이러한 결정이 아쉬운 것은 여성이 교회에서 잠잠해야 하기 때문에 목사 안수를 줄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도, 정작 “교육사”, “신학사”라는 이름으로 설교할 수 있게 하겠다는 자기모순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2. 교단은 이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구해야 한다 우리 교단의 현행 헌법에서 여성 안수를 허용하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여성 안수에 대해서 논의하는 것은 잘못이 아니다. 종종 여성안수를 주장하려거든 그런 교단으로 떠나가라고 겁박하는 분들이 있다. 그들은 스스로를 칼빈주의자라고 하는데, 칼빈주의의 요체는 무엇보다도 성경이 최고의 기준이며, 그 어느 것도(교단헌법과 교리교과서 등등) 성경과 동등한 권위를 갖지 못하기에, 모든 것이 성경의 판단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칼빈주의자라면 성경의 가르침을 들어서 반박해야지, 교단 헌법으로 겁박한다면 너무 궁색해 보일 뿐이다. 성경만이 우리의 신앙과 행위에 최고의 기준이며, 다른 모든 것은 성경의 판단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 우리 교단의 가장 중요한 원칙이다. 성경 외에는 그 어느 것도 무오(無誤)한 것은 없으며, 실제로 우리 교단의 헌법은 여러 번 수정을 해왔다. 그리고 심지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안에 있는 행위언약이 성경의 가르침에 부합하는지 질문이 들어왔을 때, 왜 신앙고백서를 따르지 않느냐고 정죄하지 않고 성경을 다시 한번 살펴보자고 입장을 정리했다. 여성 안수의 문제는 과연 성경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것이다. 여성에게 안수를 해야 한다는 것은 단순히 시대의 조류를 따르는 것이라고 폄하해 버릴 것이 아니다. 우리가 시대의 조류를 따라서는 안 되고, 성경이 최고의 기준이라고 하는 원칙은 아주 소중하다. 우리는 시대의 조류를 따를 것이 아니라, 성경이 가라고 하는 데까지 가야 하고, 성경이 금한다면 아무리 세상이 바뀌어도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야 한다. 문제는 과연 여성에게 안수하는 문제가 시대 조류에 편승한 것인가이다. 여성에게 안수하자는 주장이 시대의 조류에 편승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사실 과거에는 과거라는 시대의 조류에 따라 여성에게 안수를 하지 않았다는 것을 인정하는 셈이다. 무엇보다도 성경에서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물론 성경은 분명하게 “여성은 교회에서 잠잠하라”(고전 14:34)고 되어 있다. 그렇게 성경이 금하고 있는데, 여성 안수가 어떻게 가능하다는 말인지 쉽게 납득할 수 없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면, 즉 만일 여성이 교회에서 잠잠해야 한다는 이 말씀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분명하게 믿는다면, 지금 당장 여성들이 하고 있는 대부분의 모든 사역들을 교회에서 금지해야 할 것이다. 구역장도 안 되고, 세미나 강사로 세워서도 안되고, 교사도 할 수 없다. 만일 이게 하나님의 뜻이라고 진정으로 믿는다면 말이다. 하지만 이것이 여성으로 하여금 교회 내에서 성직자로 세워질 수 없는 근거 구절로 사용될 수 없다. 왜냐하면 “성경 전체로”(tota scriptura)의 원칙 때문이다. 성경 구절 한두 구절에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 전체의 가르침이 무엇인지를 살펴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성경 전체로의 원칙이 무너지고 성경의 한두 구절에 의존하면, 하나님의 뜻과 위배되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예를 들어,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만을 선택했다고 말하고 있으며, 모압과 암몬 민족은 하나님의 회중에 “영원히” 들어올 수 없다고 되어 있고, 더 나아가 예수님은 오직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에게로만 보냄을 받았다고 말씀하셨다. 이런 말씀들만 보면 이방인들에게 선교를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완전 위배되는 것이 될 것이다. 하지만 성경 전체의 가르침에서 보면 선교가 하나님의 뜻임을 알 수 있다. 심지어 모압 여인인 룻도 하나님의 회중 속으로 들어와 메시야의 조상이 되었다. 그러니까 성경 한두 구절만 보면 안 되는 것이다. 성경 전체의 가르침이 무엇인가를 구해야 하는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신 구속사역이 어떤 변화를 가져왔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그러한 관점 때문에 초대교회 예루살렘 총회는 할례를 이방인들에게 요구할 필요가 없다는 가장 진취적인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이미 하나님은 여성인 드보라와 훌다를 지도자와 선지자로 세웠고, 고린도전서 11장에서는 여성들이 교회내에서 예언(하나님의 뜻을 풀어 가르치는 것)하는 것 자체를 금하지 않고 머리에 두건만 쓴다면 예언할 수 있다고 하였다. 사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구원은 요엘 선지자의 예언을 결국 성취시켰다. 즉 그때가 되면 “내가 내 영을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그들이 예언할 것”이라고 하였는데, 오순절 때 이미 성취되었다. 이제는 여성들도 하나님의 뜻을 풀어 가르칠 수 있게 하신 것이다. 종종 예언과 가르침은 다르다고 반론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고린도전서 14:31에서는 예언의 목적이 가르치고 권면하는 것이라고 분명하게 못박고 있다. “너희는 다 모든 사람으로 ‘배우게’ 하고 모든 사람으로 ‘권면을 받게’ 하기 위하여 하나씩 하나씩 예언할 수 있느니라.” 예수님께서 12제자 중에 여성을 한 명도 세우지 않았다는 사실이 반론의 근거일 수 없다. 물론 예수님께서 여성도 12 제자 가운데 포함시키셨더라면 논란 자체가 정리되었겠지만, 예수님께서 남자들만 제자로 세우셨다는 것이 여성은 안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할 필요가 없다. 사실 따지고 보면 12제자 중에는 사마리아 출신이 한 명도 없고, 더 나아가 이방인도 한 명도 없었다. 그러면 오로지 유대인만 사역자가 될 수 있다는 뜻일까? 한국 사람이 성직자를 하겠다고 하는 것은 잘못이 되는 것일까? 개혁주의의 원조격인 칼뱅도 오로지 남자들만이 사역을 할 수 있다고 보았다는 것도 반론의 근거일 수 없다. 칼뱅은 아주 뛰어난 신학자이지만, 완벽한 사람은 아니었다. 칼뱅의 입장이 모두 다 100% 맞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칼뱅은 성경의 가르침이 비추어보아서 자신의 주장이 잘못되었다면 자신의 주장을 따르지 않아야 한다고까지 말했다. 우리가 칼뱅을 우상화해서는 안 되는 것이고, 항상 성경만이 최종적인 권위가 되어야 한다. 여성 안수를 받아들이면 결국 자유주의를 받아들이게 되지 않을까 우려가 많다. 자유주의를 받아들인 교단들이 주로 여성 안수를 시행하는 것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성 안수를 받아들인 교단이 모두가 다 자유주의화된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미국의 CRC교단, 고신교단의 모교회 격이라고 할 수 있는 화란개혁교회(31조파)도 여성 안수를 수용했다. 또한 한국 내에서도 개혁주의를 표방하는 보수교단인 백석 교단과 여러 개혁 장로교단들도 여성 안수를 받아들이고 있지만, 철저하게 자유주의를 배격하고 있다. 그 동안 이런 식의 반론은 참 많이 있었다. 주5일제 시행하면, CCM 복음송을 받아들이면, 외국과 무역을 하게 되면, 조상제사를 드리지 않으면, 부모님이 주신 머리카락을 자르면, 세상이 망할 것이라는 식의 주장이 많이 있었다. 하지만 찰싹거리는 작은 파도를 보면서, 두려움과 무서움 때문에 한 발자국도 떼지 못하면 결국 도태될 뿐이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과연 무엇이 성경 전체를 통해서 가르쳐주시는 하나님의 뜻인가일 것이다. 물론 우리와 깊은 관계가 있는 미국의 PCA, OPC 교단과 같은 곳에서도 여성 안수는 허용하지 않고 있다. 하지만 PCA, OPC 교단도 머지않은 장래에 여성 안수를 받아들이게 될 것이라고 예상한다. 왜냐하면 모두가 성경의 가르침에 순복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교단이기 때문이다. 성경을 연구하고 또 연구해보면, 여성들에게 잠잠하라고 했던 것이 당시에 있었던 일시적인 명령이었을 뿐이라는 것이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성경을 최고의 권위로 인정하고 받아들인다면, 결국 성경의 가르침을 따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수천 년 동안 여성들이 사역하는 것이 막혀 있었다는 사실도 반론의 근거일 수 없다. 안타깝게도 사람은 객관적 존재가 아니다. 그래서 자신의 환경과 문화의 영향을 받아서 성경을 해석하다 보니, 그 해석이 잘못될 수 있다. 사실 종교개혁자들은 천년이 넘도록 지속되었던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이 잘못된 것이라고 외칠 수 있었다. 아니 그 이전에 이미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중심의 종교가 순 엉터리일 뿐이며 잘못된 것이라고 외치셨다. 역사가 오래 되었다고 항상 옳은 것은 아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의 불변의 원칙은 “개혁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거하여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ecclesia reformata semper reformanda est secundum verbum dei)이다. 항상 하나님의 말씀에 다시 비추어보아서 그동안의 전통이 잘못된 것은 없는지 점검해야 한다. 전통으로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면 안 된다(마 15:3). 사실 초대교회에서도 브리스길라와 같은 여성 사역자가 있었고, 유니아라는 여성(롬 16:7)도 12 사도는 아니었지만 바나바와 같은 또는 비슷한 역할을 했던 사도였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황금의 입이라고 알려진 요한 크리소스톰(350-407)은 유니아에 대해서 “사도가 되는 것은 위대한 일인데, 그 가운데 뛰어난 자였다. 이게 얼마나 놀라운 영예의 노래인가!”라고 했다. 장로나 집사로 세우려면 “한 아내의 남편”이어야 한다는 말은 여성은 안 된다는 뜻으로 보아야 할 필요가 없다. 장로의 자격에 “방탕하다는 비난을 받거나 불순종하는 일이 없는 믿는 자녀를 둔 자라야”한다(딛 1:6)는 구절이 있지만, 결혼하지 않았거나 아직 자녀가 없다고 해서 목사나 장로 임직의 결격 사유로 보지 않는다. 이 표현은 “자녀를 두었을 경우에는”이라는 말이 생략된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 아내의 남편이어야 한다는 말은 “만일 그가 결혼한 남자라면”이라는 전제가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따라서 “한 아내의 남편”이어야 한다는 말을 여성은 안 된다는 뜻으로 확대하는 것은 잘못이다. 이 구절은 결혼 생활에 있어서 성결을 유지해야 한다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아직 교단 내에 여성 안수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다. 초대 교회 할례에 대한 의견이 분분했던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고 하면 그냥 일방적으로 밀어붙일 게 아니라, 서로 겸손하게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구해야 한다. 3. 현행 법으로도 강도사를 줄 수는 있다 부흥하고 성장하는 공동체는 모든 사람이 어떤 방식으로든 더 잘 일할 수 있게 하는 공동체이다. 망할 수밖에 없는 공동체는 대부분의 사람들의 사역을 막고 소수가 가진 그 힘을 행사하는 공동체이다. 광야에서 모세는 이드로의 제안을 받아들여 자신이 가지고 있던 재판권을 천부장, 백부장에게 나누어 주었다. 우리 교단도 여성들이 좀 더 적극적으로 사역에 참여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야 한다. 우선 총회는 여성 사역자들이 강도사 인허를 받을 수 있도록 도우면 좋겠다. 현행 헌법도 여성이 강도사가 되는 것을 명시적으로 금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정치편 제14장에 의하면, 총회가 신학 졸업생을 고시하여 노회가 강도사로 인허하도록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부분은 총회가 결의하고 받아주면 충분히 가능한 것이다. 사실 108회 총회 전에 이에 대한 합의가 어느 정도 이루어졌었다. 108회 총회의 결정이 뒤로 역행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될지 상당히 우려스럽다. 목사 안수의 문제는 총회가 좀 더 심도 있게 성경에 드러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토론해야 한다. 그 옛날 예루살렘 회의를 통해 할례를 시행하지 않아도 된다는 결론을 내렸다. 성경에는 반드시 할례를 시행해야만 한다고 되어 있지만,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이 가져온 관점으로 성경을 이해하면서 할례를 하지 않아도 된다고 결론을 내렸다. 이와 마찬가지로 총회의 역할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토론을 통해 구해야 한다. 현재 우리 교단 내에는 다양한 해석과 의견이 존재한다. 세미나, 토론회, 전문 연구 등을 병행하는 것을 통해, 서로 경청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구해야 한다. 이웃 교단인 백석은 발 빠르게 여성 안수를 허용했고, 엄청난 교단적 발전과 신학교의 발전이 있었다. 사실 많은 여성 사역자들을 이웃 교단에 빼앗긴 것도 사실이다.
    • 오피니언
    • 기고
    2023-10-03
  • 【논평】 어느 원로목사의 일탈과 몰락
    모 신문이 경북지역의 대표적인 어느 교회 원로목사에 대한 기사를 최근 실었다. 주변 사람들에게 크고 작은 돈을 빌리고 갚지 않은 것이 문제가 되어 결국 교회가 어제 10월 1일 주일 오후 공동의회를 열어 원로목사를 해지키로 가결했다. 이 일이 있기 전 대구 지역의 모 언론사 대표가 이에 대한 말을 했었다. 그 원로목사와 잘 아는 사이이기에 일이 더 커지기 전에 수습해 볼려고 하는데 통 연락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런가보다하고 지나갔는데 결국 원로목사 해지라는 불명예를 안게 되었다. 그 원로목사는 교인들이 많지 않았던 교회에 1991년 부임해 큰 부흥을 이루고 2018년 27년간의 목회를 끝으로 원로가 되었다. 그리고 원로예우금 10억을 일시불로 받아 교회에서 더 이상의 금전적인 지원은 없이 원로목사라는 명예를 갖고 있었다. 그런데 그만 5년만에 원로목사 해지라는 초유의 사태를 맞이한 것이다. 대구 지역의 모 기자는 전화 통화에서 “여전히 그 목사님과 통화가 되지 않고 있는 상태라 답답하다”고 하며 이 일로 귀국한 아들 목사와 통화를 해봐야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다른 아들을 통해 10월 4일까지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아버지의 답변을 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과연 그 많은 돈을 이틀 사이에 어떻게 다 처리할 수 있다는 것인지 알 수 없다. 그 원로목사는 일차적으로는 피해자이다. 누군가에게 속아서 금전적인 손해를 봤을 것이다. 이후 그 손해를 메꾸기 위해서 다른 사람의 돈을 끌어들였을 것이다. 그런면에서 가해자이기도 하다. 교회내에서도 교인들에게 약 6억 가량의 돈을 빌렸다고 한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에게 빌리고 갚지 않은 돈도 상당하다고한다. 교회도 이 상황을 파악하고 교회를 보호하기 위해 원로목사 해지라는 극단의 처방을 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를 통해 그 원로목사가 정신을 차렸는지는 알 수 없다. 사태가 이 정도라면 정상적인 사고와 생활은 가능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돈을 갚지 않는다면 그에 대한 법적인 책임도 져야할 것이다. 노년의 삶이 피곤해 졌다. 원로목사 해지라는 극약처방을 통해 그 목사는 그동안 자기가 수고한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 일탈의 결과는 참으로 처참하다. 마치 삼손이 들릴라에 의해 머리카락을 잘리운 것과 같다. 이후 삼손은 블레셋 사람에게 체포되어 눈이 뽑히고 옥에서 맷돌을 돌리는 비참한 처지가 됐다. 그러나 이후 잘린 머리카락이 자라나기 시작했고 그는 죽음을 통해 명예를 회복했다. 이름만 대면 알 수 있는 그 원로목사에게도 이러한 회복의 은혜가 있기를 기원해본다. 그리고 이 초유의 사태가 모두에게 反面敎師의 교훈이 되기를 바란다. 그 누구도 자신하거나 안심할 수 없다.
    • 오피니언
    • 논단
    2023-10-02
  • 【내이야기】부모님의 노년을 함께 함이 은혜라
    “그러면 에미 집으로 이사를 오너라” 어머니께서 전화를 걸어 하신 말씀이다. 갑작스러운 담임목회 사임으로 당장 거처할 집이 문제였다. 2020년 1월부터 있었던 교인과의 갈등을 7월에 마무리하고 10월 노회 때 시무 사면 처리를 한 후 12월 말까지 사택을 비워주기로 했다. 그동안 거처를 마련해야했다. 그런데 언제나 사택을 주는 교회에서만 부목사 사역을 했기에 어떤 식으로 집 문제를 해결해야할지 막막했다. 아내와 이런저런 논의를 했지만 답이 나오지 않았다. 결국 어머니께서 결단하셨다. 어머니는 20여년전 적은 돈으로 전세를 안고 지하1층, 지상 3층, 옥상이 있는 다가구 주택을 구입했다. 큰 교통사고 이후 경제력이 없는 아버지를 대신해 집세를 받아 생활하시기 위해서였다. 지하 1층과 1층은 각각 2가구가, 2 · 3층은 전체를 다 쓰는 구조였다. 어머니는 아버지와 3층에서 사셨는데 2층을 내보내고 우리 식구를 살게 할려고 하셨다. 그러나 2층 세입자가 작은 금액의 반전세로 살고 있기에 나가지 않겠다고해서 할 수 없이 1층의 한 가구를 이사비를 주어 내보내고 부모님께서 그리로 옮기시고 우리 식구는 3층에 살게 됐다. 가까스로 12월 말까지 집 수리를 끝내고 이사했다. 뜻하지 않게 부모님께 얹혀 살면서 연로하신 부모님을 돌보게 됐다. 곧이어 허리가 늘 아프신 어머니께서 병원에 가셔서 X-ray를 찍어보니 척추에 금이 가 있었다. 그래서 의료용 시멘트를 주사하는 시술을 받으시게 됐다. 이어 작년 9월에는 계단에 있는 빗물에 넘어져 구르는 바람에 우측 대퇴부가 두 군대 골절됐다. 마침 107회 총회 취재차 출타한 상황이라 아내와 아들이 병원으로 모시고 가 수술을 받으셨다. 그리고 한달 정도 병원에 입원해 계셨다. 그동안 아버지 간병이 문제였다. 아버지는 1984년 당한 교통사고로 다리 뼈가 으스러져 철심을 박았는데 이후 연로하시자 더 이상 걷지 못하시고 7년째 침대에 누워 대소변을 받아내야했다. 오전에는 간병인이 오지만 저녁에는 없기에 한달 정도를 내가 대소변을 받아내야했다. 이후 어머니가 퇴원하셨는데 그만 올해 3월에 직장암 수술을 받으시고 체력이 급격히 약해지셨다. 그리고 두 주 전에는 아버지께서 폐렴으로 병원에 입원하셨다가 오늘 보름만에 퇴원하셨다. 의사는 아버지가 점점 더 기력이 약해질 것이라고 했다. 어머니는 늘 “늙은 부모 모시느라고 아들이 고생이 많다”고 말씀하신다. 생로병사는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내가 나이를 먹어가듯이 부모님들은 연로해지고 계시다. 80대 중반을 향해 가면서 부모님들의 몸은 연약해질대로 연약해지셨다. 나는 4형제인데 누님들은 다 아랫지방에서 살고 있고, 남동생은 서울에 살지만 직장생활에 메여 있어 그동안도 부모님 가까이 사는 내가 도왔었다. 부모님은 강북구 번동에 사시고 나는 혜화동, 인사동에서 부목사를, 후암동에서 담임목회를 했기에 일이 생기면 수시로 부모님을 찾아뵐 수 있었다. 그리고 다시 부모님과 함께 살면서 부모님의 병수발이나 일상을 돕고 있다. 부모님과 함께 살면서 부모님이 연로해지셨음을 알게 됐다. 그동안은 가끔 뵈서 몰랐는데 가까이서 뵈니 일상을 살아가시는 게 쉽지 않음을 알게 됐다. 그래서 어머니께서 아는 동네분들에게 인사하면 “아들이 함께 살아 든든하겠다”는 말씀들을 하신다. 자식으로서 부모님의 노년을 함께하니 감사한 일이다. 낳으시고 길러주신 부모님께 조금이나마 도움을 드리고 의지가 되니 다행이다. 또한 자식으로서 더더욱 연로해지시는 부모님을 보면서 짠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셨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다. 이제는 같이 살아 늘 대하는 부모님이 언젠가 세상을 떠나신다고 생각하면 아찔하다. 연로하신 부모님을 보살피며 나 또한 언젠가 부모님처럼 연로해질 것이라는 것을 생각하니 부모님과 함께 사는 것이 은혜이다. 어머니는 언젠가 때가 되면 요양원으로 가겠다고 하시지만 나는 그렇게 하고 싶지 않다. 가능하면 사시던 집에서 부모님이 눈을 감으셨으면한다. 갑작스러운 목회 중단으로 부모님과 함께 살면서 부모님의 노년을 함께 할 수 있는 것이 은혜이다. 언젠가 떠나실 부모님과 함께 남은 시간 정을 주고 받으며 사니 감사하다. 어머니의 굽은 등과 마른 몸을 보면 눈물이 난다. 침상에만 계셔서 몸이 굳어지신 아버지를 보면 눈앞이 흐려진다. 그리고 이것이 내 노년의 모습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내가 노년을 보낼 때 내 아들들이 함께, 혹은 가까이 살아준다면 얼마나 좋을까하는 생각을 해본다. 나 또한 나이를 먹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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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2023-10-02
  • 【단상】“남자가 흘리지 말아야 할 것은 눈물만이 아니죠”
    남자 화장실 소변기 앞 눈높이 위치에 있는 “남자가 흘리지 말아야 할 것은 눈물만이 아니죠!”라는 문구를 봤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는 안다. 소변을 볼 때 변기 밖으로 흘리지 말라는 것이다. 안 그러면 화장실에 찌린내가 나기 때문이다. 실제로 가정에서도 이미 남성들은 서서 볼일을 못 보고 앉아서 볼일을 보고 있다. 천하의 배우 최민수도 그 아내에게 굴복해 앉아서 소변을 보고 있다고 한 방송에서 실토했다. 가정 화장실에는 좌변기 하나만 설치 되어 있기에 서서 소변을 보면 밖으로 튀게 되어 아내와 어머니께 잔소리를 듣는다. 그래서 결국 남자들도 여자처럼 앉아서 소변을 보는 경우가 많아졌다. 공중화장실에 가면 “남자가 흘리지 말아야 할 것은 눈물만이 아니죠”라며 소변을 밖으로 흘리지 말라는 경고가 예외없이 붙어 있다. 그런데 그 문구가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 왜 남자의 눈물을 소변과 동등하게 취급하고 있는가? 남자의 눈물은 소변처럼 더럽다는 것인가? 남자는 눈물을 흘리면 안된다는 것인가? 도대체 어떤 인간이 이런 문구를 만들어냈는지 기가 막힌다. 물론 요즘은 그런 것 같지 않지만 어렸을 때 또는 학창 시절에 “남자는 울면 안된다”는 말을 종종 들었다. 그때는 그런가보다 했지만 어느때부터인가 이상하게 생각됐다. 왜 남자는 눈물을 흘리면 안되는가? 남자는 울면 안되는가? 그리고 크리스마스 노래에도 “울면 안 돼 울면 안 돼 산타할아버지는 우는 아이에게 선물을 안 주신데요” 이런 가사가 있는데 어느 날 이 가사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다. 왜 아이가 울면 산타는 선물을 주지 않는가? 이 또한 아이에게도 울지 말 것을 강요하는 것 아닌가? 심지어 “남자는 세 번 운다. 태어났을 때 한 번 울고, 부모가 돌아가셨을 때 한 번 울고, 나라가 망했을 때 한 번 운다”는 말도 있다. 누가 만들었는지 궁금하다. 결국 이 모든 것은 남성들에게 울지 말 것을 강요하는 것이며, 우는 남자는 남자가 아니라는 왜곡된 성차별로도 볼 수 있다. 나는 울고 싶다. 학창 시절 교회 생활하며 기도할 때마다 울부짖었다. 신대원 때 기도 동산에서 울부짖었었다. 그리고 부목사, 담임목회할 때도 울부짖었었다. 그러나 눈물이 메말랐다. 이제는 한 교회를 책임지는 담임목사가 아닌 교계 기자가 되어 교회와 노회, 총회를 취재하면서 보게 되는 많은 안타까운 일들을 놓고 기도해야 하는데 눈물이 메말랐다. 과거처럼 울고 싶다. 통곡하고 싶다. 그래서 “남자가 흘리지 말아야 할 것은 눈물만이 아니죠!”라는 문구가 거슬리는지도 모른다. 그동안 수없이 연속 기사를 썼던 천안중부교회를 위해, 구 충남노회를 위해 그리고 총회를 위해 울고 싶다. 통곡하고 싶다. 주여 은혜를 회복하소서! 눈물을 회복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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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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