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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은퇴목사 위로회, 새에덴교회에서 성대히 개최
    제32회 은퇴목사 위로회가 8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4월 23일 오전 10시 30분 새에덴교회(소강석 목사 시무)에서 열렸다. 개회예배는 은급부 서기 김형헌 장로의 인도로 은급부 회계 송인창 장로가 기도 후 소강석 목사가 딤후 4:6-8을 본문으로 ‘전제와 같이 부어진 삶’이란 제목으로 설교했다. 소강석 목사는 “황영조가 마라톤에서 1등 했을 때 국민 모두가 감격했다. 그는 고통스러웠지만 그 과정을 견디고 승리한 것이다. 전제란 무엇인가? 제사의 마지막 단계로 감사의 표현이다. 바울은 죽을 때까지 전제와 같은 감사의 삶을 살았다. 우리도 끝까지 목사의 직분을 맡은 것에 대해 감사하며 살아야한다”고 말했다. 전 은급부장 김상규 장로에게 감사패를 증정했다. 하양교회 원로 김형국 목사가 “축하받을 만한 분들이 오셨기에 축하의 말씀을 드린다. 과거 어려울 때 믿음의 기초를 든든히 세우는 역할을 하셨기에 축하 받기에 마땅하시다. 영광의 면류관 쓰시기를 바란다”라고, 영도교회 정중헌 목사가 “저도 5월 11일이 되면 원로가 됩니다. 어려운 시기에 수고하셨는데 여생이 편하시기를 바랍니다”라고, 동산교회 남서호 목사가 “믿음과 능력으로 이겨내시고 은퇴하신 분들이 모이셨기에 축하드리는 것이 마땅하다. 은퇴 후의 삶도 아름답게 사시기를 바란다”고, 황등새로남교회 김재규 목사가 “내년에도 건강하셔서 모두 참석하시기를 바란다”고, 수정교회 김기성 목사가 “소금, 현금카드, 지금이 있어야한다. 죄 짓고 112차, 사고나서 119차, 죽어서 장의사차 타지 마시기 바란다. 갈수록 하나님께 영광 돌리시기 바란다”고, 대한교회 원로장로 이재천 장로가 “오늘 행사가 많은 위로가 되시기를 바란다”고, 대성교회 원로장로 동현명 장로가 “귀한 장로님들이 헌신하셔서 은급부가 오늘 행사를 하게 되어 감사드린다. 섬겨주신 새에덴교회에 감사드린다”축사했다. 총회총무 박용규 목사가 “남은 시간이 더 축복되시고 총회를 위해 많이 기도해 주시기를 바란다”고, 은퇴목사회 명예회장 안종만 목사가 “오늘 전국 각지에서 많은 목사님들이 오셔서 감사드린다. 준비하는데 어려움이 있었는데 새에덴교회가 많이 협조해 주셔서 감사드린다”고 인사말했다. 은급부 총무 홍석환 장로가 광고 후 증경총회장 장차남 목사의 축도로 마쳤다. 특강1은 하남교회 방성일 목사가 ‘끝이 아름다운 사람(신 34:6-8)’이란 제목으로, 특강2는 한성교회 도원욱 목사가 ‘칭찬의 힘(잠 27:21)’이란 제목으로 해야하는데 식사 시간이라 두 강사는 인사하는 것으로 강의를 대신해 큰 박수를 받았다. 이어 새에덴교회에서 준비한 도시락을 나누며 애찬의 시간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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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총회
    2024-04-23
  • 문화 선교사, 정원준 목사 찬양 집회
    문화 선교사 정원준 목사는 합동 측 목사로 공군 군목(황병산 포대, 공군 본부, 사천비행단) 전역 후 1999년도에 호주로 건너가 시드니(할렐루야 장로교회)와 멜번(우물교회)에서 한인 목회를 했다. 현재는 문서 선교와 더불어 찬양 작곡을 통해 살아계신 하나님을 전하는 사역을 하고 있다. 또한 멜번 시내에서 아내와 함께 매주 찬양 버스킹을 통해 각국에서 온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전도 사역을 하고 있다 소망인교회 집회 장면 정 목사는 지난 4월 21일 대전 유성에 소재한 소망인교회(한세완 목사 시무) 오후 예배 시간에 설교와 찬양을 통해 전도의 필요함과 순종을 강조했다. 정 목사의 집회를 원하는 분은 이메일 wonjunjeong2003@gmail.com, 카카오톡 David07 로 연락을 주시면 된다. 정 목사는 작년 7월 희망에 대한 책을 출판했다. 책 소개 저자는 호주 최남단섬 타스마니아의 자연에서 배운 인생 수업을 우화라는 판타지 형식을 통해 전달함으로써 따스한 감동을 선사해 준다. 절망, 죽음 그리고 어려운 때일수록 희망의 가치를 되새기게 하는 79편의 이야기 속에서 그 삶이 지혜를 전하는 것은 때론 사람이기도 하고, 우화라는 판타지 형식을 통해 전달된 자연에서 배운 삶이 지혜를 전해 주고 있다. 첫 번째 이야기는 시인과 창문 외 26편으로 구성, 사랑·행복·소망에 대한 자연과의 대화 내용을 소개한다. 두 번째 이야기는 소렐의 고목 외 27편으로 구성, 주로 지혜와 자기 계발에 대한 가르침으로 엮어졌다. 세 번째 이야기는 왜 사는가 외 26편으로 구성, 주로 소망… 자연과의 관계에 대해서 얻어진 지혜를 전한다. 저자 소개 저자는 문화 사역자이면서 우화 작가로서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물들, 즉 해와 달과 별, 창문과 같이 쉽게 지나치기 쉬운 것들을 의인화해 사람들에게 삶의 지혜를 보여 주는 우리 시대의 이야기꾼이다. 이번 작품은 호주 최남단 타스마니아 섬에서 2년여의 시간을 통해 건져 올린 주옥같은 79편의 모음집으로 구성돼 있다. 그는 1999년에 호주 시드니 Hallelujah Presbyterian Church의 초청으로 호주로 건너가 선교 사역을 했으며, 현재 ‘Eternity’라는 밴드 이름으로 가스펠 싱어로 활동하고 있다. 매주 주말에는 120여 개의 종족이 모여 사는 멜번 시티의 중심가에서 버스킹을 통해 각국의 사람들에게 영혼의 노래를 부르며, 또한 그의 작품 중 일부는 영어로 번역돼 사람들에게 읽혀지고 있다. 작품으로는 어른들을 위한 동화 〈행복한 나무〉를 비롯한 고난을 극복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룬 〈나에게는 포기란 없다〉와 삶의 지혜를 수록한 〈호주에서 보내온 희망편지〉등 다수의 작품이 있다. 책 속으로 나는 그동안 자연의 언어를 통해 우리들이 지녀야 할 삶의 자세를 보았다. 먼저, 자연에는 우리가 잊어버렸을지도 모르는 순수한 사랑과 희생이 있었다. 해가 전해 주는 동녘의 편지를 읽고 난 서녘의 붉어진 얼굴…, 노을의 모습에서 사랑의 황홀함을 느낄 수 있었고 ‘군화와 구두’를 통해 탐욕으로 권력을 가질 순 있어도 진정한 사랑은 얻을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음부터는 창문을 통해 바라본 저녁 노을을 아름답다고 말해 주세요’라고 시인에게 부탁하는 창문의 말속에서 남을 배려하는 사랑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굶주린 초원매 새끼들의 먹이가 될 수밖에 없었던 얼룩 다람쥐의 죽음은 희생 속에서 생명이 자라고 죽음 속에서 사랑을 울부짖는 부모의 마음을 알게 해주었다. 그러나 나는 무엇보다도 자연에는 절망에게 빼앗기지 않은 희망이 싹트고 있음을 보았다. 때론 비와 함께 내게 ‘무지개’로 찾아오기도 했고, 가장 고통스러운 것과 가장 달콤한 것을 소유한 ‘꿀벌’의 모습으로 다가오기도 했다. 희망은 동전의 양면과 같이 언제나 절망 뒤에 찾아오는 반가운 손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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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물
    2024-04-22
  • 서울강남노회 정기회, 고문산 목사 노회장 선출
    서울강남노회 제97회 정기회가 4월 22일 오전 9시 30분 노량진에 소재한 강남교회(고문산 목사 시무)에서 모여 고문산 목사를 노회장으로 선출하고 회무를 처리했다. 고문산 목사는 “열심히 하겠다”며 노회원들에게 감사 인사했다. 강남교회는 올해 설립 70주년을 맞이하며 담임목사가 노회장이 되는 겹경사를 맞았다. 아울러 금년 전국장로회연합회 수석부회장으로 출마하는 이해중 장로는 그동안 몸이 아팠는데 건강을 회복해 노회원들과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 개회예배는 부노회장 고문산 목사의 인도로 부노회장 김영홍 장로가 기도, 회계 박종영 장로가 벧전 1:6-9 봉독, 강남교회 찬양대가 찬양했다. 노회장 오재찬 목사가 '가장 귀한 믿음'이라는 제목으로 "베드로 당시 교인들은 불시험으로 많은 어려움을 당하고 있었다. 특히 주님이 함께 하신다는 믿음이 흔들려 어려움을 당하고 있었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들의 믿음이 매우 귀하다고 말하고 있다. 그 믿음은 무엇인가? 기뻐하는 믿음이었다. 그리고 주님을 사랑하는 믿음이었다. 또한 주님 재림에 대한 믿음이었다. 어려운 때이지만 주님 사랑하는 믿음으로 살아가기를 바란다"고 설교 후 증경노회장 장홍기 목사의 축도로 예배를 마쳤다. 성찬예식은 직전노회장 이해상 목사의 집례로 분병, 분잔 후 증경노회장 김창원 목사의 축도로 마쳤다. 공로패 전달 회무는 회원 101명이 참석해 개회 후 총회총무 박용규 목사가 총회연금 가입에 대해 소개하고 노회 개회를 축하한 후 임원 선거, 임원을 교체하고, 직전 임원들에게 공로패 수여, 노회 장소를 제공한 강남교회에 감사패를 전달 후 당회원, 교역자들이 인사했다. 이어 강남교회 정성껏 준비한 애찬을 나누며 친교하고 오후 회무를 진행했다. △노회장 고문산 목사(강남) △부노회장 이재천 목사(아름드리) 강헌식 장로(공항성산) △서기 이기도 목사(사랑양문) △부서기 박은석 목사(은목) △회록서기 손대익 목사(향남성림) △부회록서기 김석중 목사(잘된) △회계 윤경현 장로(강남) △부회계 임호영 장로(양문) 회무 처리 및 기관 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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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22
  • 사랑의쌀나눔운동본부중앙회, 『후원자 및 봉사자 감사의 날』 행사 가져
    (사)사랑의쌀나눔운동본부중앙회가 주최하고, 사랑의빨간밥차 및 봉사단이 주관한 『제13회 후원자 및 봉사자 감사의 날』 행사가 회원 15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4월 20일 오전 10시 계양산 다남 체육공원에서 열려 감사하고 축복하는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이선구 이사장은 “1년 만에 제 얼굴을 보는 분도 계시고 또 급식 현장에서 저를 만나는 분도 계시고 하는데 감사합니다. 제가 매일같이 새벽마다 교회 가서 여러분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또 여러분들에게 건강 주시고 자녀들, 가정에 하시는 사업장 축복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한테 제가 보답할 수 있는 것은 기도밖에 없는 거 같아요. 여러분들 건강 지켜 주시고 또 자녀들과 가정의 사업장에 아주 풍성하게 흔들어 넘치도록 축복해 주시라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한번 4월 말이면 여러분들을 이 자리에 모셔서 대접을 하고, 노래자랑도 하고, 행운권 추첨도 하고, 보물 찾기도 하며 여러분들한테 좋은 선물들도 이렇게 한아름씩 드리는 것으로 보답을 할려고 합니다. 1년에 한번 여러분들한테 그렇게나마 우리 사랑의쌀나눔운동본부 직원들이 감사 인사 하는 날이 오늘입니다”라고 인사말했다. 이어 계양산 둘레길을 걷고 정성껏 준비한 애찬을 나눈 후 나두리 홍보대사의 진행으로 단체별로 노래자랑을 하고 행운권 추첨을 했다. 그리고 마지막 시간에 본부에서 준비한 푸짐한 선물-옷, 신발, 화장품, 건강식품 등등-을 받고 즐거운 발걸음으로 해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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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20
  • 성석교회 편재영 목사 측 교인들 150여명, 총회 방문 요구 사항
    150여명의 성석교회 편재영 목사 측 교인들이 4월 19일 오전 9시부터 또다시 총회를 찾았다. 지난번(4월 12일) 방문해 임원회 결의로 임창일 목사를 성석교회의 대표자로 인정해 대표자 증명서를 발급한 것에 대해 항의해 “취소” 공문을 발급받았는데, 이어 다시 임창일 목사 측 교인들이 지난 4월 15일부터 18일까지 찾아와 항의해 “취소한 것을 취소”했기 때문이다. 편재영 목사 측 교인들은 먼저, 108회 총회 재판국 판결 효력에 대해 소송해 현재 사회법에 계류 중이므로 성석교회에 대표자를 지정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 또한 사회법정에서 판결문을 요구하기에 발급을 원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취소한 것을 취소한 것에 대해 취소하는”공문을 발급해 줄 것을 요구했다. 이는 임창일 목사 측이 총회 공문을 강서 세무소에 제출해 법적인 집행을 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다. 현재 편재영 목사 측 교인들 수십여명은 건축 후 남은 23억 대출을 책임지기 위해 적잖은 액수를 헌금하거나 교회에 빌려준 상태이기에 교인들은 교회 문제에 대해 절박한 상황이다. 교인들은 총회 로비, 3층 사무국, 5층 회의실 등에 분산해 있는 상태이며 또다시 경찰이 출동했다. 임원회는 성석교회 대표자 문제에 대해 보류한 상태이며, 5월 8일 다시 다룰 예정이다. 다음은 편재영 목사 측 주장 전문이다. 성석교회 대표자(담임목사, 당회장)은 편재영 목사이다. 1. 임창일 목사 외 6명이 편재영 목사를 상대로 담임 목사 직무를 수행하여서는 안 된다"라는 가처분 소송을 제기했으나 1심과 2심(서울고등법원. 2022. 11. 1)에서 패소하였으며 편재영 목사가 승소했습니다. 2심 판결에서 "종전 교회의 실체가 편재영 목사 측 교인들로 구성된 교회로서 존속하고 그 재산 또한 편재영 목사 측 교인들 총유로 귀속되었다고 볼 여지가 있다."고 했습니다. 전체 교인 중 2/3가 넘는 896명(71.891%)가 편재영 목사 측에 종전 성석교회 동일성이 유지되고 기에 임창일은 이러한 교회 대표자가 될 수 없으며 절대로 용납할 수 없습니다. 2. 서경노회가 편재영 목사에 대한 면직처분(2014. 7. 22)은 재심에 의해 "서경노회로 환부" 되었습니다. 환부심 재판부인 서경노회 재판국은 1차 면직 사유와 무관한 내용으로 다시 기소하여 재판하여 2차 면직재판의 불법을 자행했습니다. 편재영 목사는 다시 권징조례에 의해 재심을 청원했으며, 제107회 총회 재판국은 "편재영 목사에 대한 1차, 2차 면직판결은 취소한다. 편재영 목사는 성석교회의 담임 목사이며 당회장이다."라는 판결을 제108회 총회에 보고했습니다. 판결 효력은 총회에서 채용, 환부, 특별재판국 설치 중 하나를 결정하여 확정합니다. 그러나 이 세 가지 중 어느 하나를 택하지 않고 조문에 없는 "각하"를 해 총회 재판국 판결대로 확정되었습니다(권징조례 제141조). 결국 편재영 목사의 1, 2차 면직 판결은 취소 되었으며, 현재 담임목사 지위에 있습니다. 3. 제108회 총회 재판국 보고에서 판결이 확정했음에도 총회 행정결정으로 성석교회 공동의회는 "임시당회장 임창일 목사가 주관"하도록 불법 결의를 했습니다. 이미 사법권인 총회 판결로서 성석교회 담임목사는 편재영 목사라는 사실이 확정되었습니다. 총회 재판국 확정 판결을 소송시행세칙이나 총회 행정결정으로 무효화 시킬 수 없습니다. 총회가 "일사부재리 및 일사부재의 원칙에 따라 이후 총회에서 다루지 않기로 가결하다."라는 결정도 지키지 않고 있습니다. 성석교회 대표자(담임목사, 당회장)는 편재영 목사이며, 편재영 목사 이외의 임창일 목사가 대표자 일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총회 본부는 불법적으로 임창일 목사에게 대표자 증명을 발급하여 성석교회를 파괴하려고 합니다. 반드시 시정되어야 합니다. 이 일로 인해 일어나 모든 불상사는 그들에게 책임이 있음을 준엄하게 경고합니다. 임창일의 대표자 증명서는 취소 혹은 철회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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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회
    2024-04-19
  • 인천에 이슬람 사원을 짓겠다는, 구독자 550만명의 한국인 무슬림 유튜버 정체
    최근 550만명의 구독자를 보유한 한국인 무슬림 유튜버가 인천에 이슬람 사원을 짓겠다는 계획을 밝히고 토지 계약서를 공개했다. 여러 방송국에서 이 문제를 다뤘는데 연합뉴스TV는 이에 대한 뉴스를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앵커] 최근 구독자 550만명을 보유한 한국인 무슬림 유튜버가 인천 영종도에 이슬람 사원을 짓겠다고 해 논란입니다. 이미 토지 매매계약을 마친 사실이 뒤늦게 알려지면서 갑론을박이 벌어진 가운데, 땅을 판 전 주인은 계약 해지를 요청했습니다. 한웅희 기자입니다. [기자] 자신을 이슬람 신도라고 소개하는 한 유튜버. 구독자 550만 명을 보유한 이 유튜버는 최근 인천 영종도에 이슬람 예배당 '모스크'를 짓기 위한 땅을 샀다며 토지매매계약서를 공개했습니다. 한국인들을 위한 기도 장소와 선교 방송 스튜디오로 활용할 계획이라며 후원도 요청했습니다. 유튜버가 매매계약을 체결한 땅입니다. 해당 유튜버는 이곳에 20~30평 규모의 작은 이슬람 예배당을 만들겠다는 계획을 밝혔습니다. 이슬람 사원이 생긴다는 소식을 들은 주민들 사이에선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습니다. 종교의 자유를 보장해야 한다는 일부 의견도 있지만, 상당수는 안전 문제 등을 이유로 반대했습니다. [박수현 / 인천 영종국제도시 주민] "여성 인권이라든지 이런 게 차별받는 나라(의 종교)기도 하니까 아이 가진 엄마들이라면 그다지 반갑지는 않은 그런 종교가 아닌가 싶습니다." 부지를 판 전 땅 주인은 "이슬람 사원을 지으려고 하는 줄 몰랐다"며 뒤늦게 부동산에 계약 해지를 요청했습니다. [전 땅 주인 A씨] "계약은 했는데 해약하라고 그랬어요. 부동산에다가. 컨테이너 갖다 놓고 유튜브 방송 한다고 그러더라고 나중에 알아보니깐. 그래서 그것도 안 된다고 (했죠.)" 관할 구청 역시 "해당 부지의 용도상 이슬람 사원을 지을 수 없다"는 해석을 내놨습니다. 해당 유튜버는 현재 외국에 체류 중인 상태로 이달 말쯤 국내에 들어올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취재진은 해당 유튜버에 수차례 연락을 시도했지만 닿지 않았습니다. 한편, 대구에서도 경북대 무슬림 유학생들이 모스크를 건설하려다 주민들의 항의로 완공이 지연되는 등 이슬람 사원을 둘러싼 갈등이 심화되고 있습니다. 그러자 115만명의 구독자를 보유한 ‘뻑가’라는 유튜버가 이 사람에 관련한 동영상을 올렸고 4월 18일 현재 62만명이 이를 시청했다. 내용을 요약하면, 유튜버 다우드 킴(Daud Kim)은 무슬림 관련 동영상으로 인기를 얻자 계속 무슬림 관련 동영상을 올리고 있는데 사생활에 문제가 많다는 것이다. 이후 그는 무슬림으로 개종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후의 사생활도 정상적인 무슬림같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결혼해서 애도 있는데 이혼 당할 처지이다. 그런데 인천 한복판에 이슬람 사원을 짓겠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면서 개인 개좌로 후원을 요청하고 있다. 이에 대해 뻑가는 “본인 이익을 위해 나라를 팔아먹는 행동”이라고 규정하고 있다.무엇보다 그 지역은 종교시설 허가가 어려운 지역이다. 이에 대해 다른 무슬림 개종인인, 360만 팔로워를 가진 문지혜 씨가 문제 제기를 하자 그녀를 저격하고 있다. 끝으로 뻑가는, 아마도 기독교인은 아닌 것 같지만, 이슬람이 얼마나 위험한 종교인가에 대해 지적하고 있다. 이 동영상은 유튜브 알고리즘에 의해 우연히 보게 됐다. 이 사태에 대한 시의 적절한 내용이라 생각해 기사를 만들어 본다(영상에 다소 거친 표현이 있다는 것을 알려드린다). 우리는 이슬람에 대해 “한 편으로 경계하고 한 편으로 사랑”해야한다. 그러기 위해서 총회는 매년 이슬람 대책 세미나를 개최하는 것이다. 관련기사링크: 영남지역 총회이슬람대책세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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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물
    2024-04-19
  • 미목, 『“한국교회의 나아갈 길, 원로의 지혜를 듣는다』 포럼 개최
    미래목회포럼(대표 이동규 목사) 제 20-2차 포럼이 4월 18일 오전 8시 한국프레스센터 매화홀에서 “한국교회의 나아갈 길, 원로의 지혜를 듣는다”란 주제로 열렸다. 중앙위원 김영복 목사의 사회로 이사 설동주 목사가 기도했다. 이동규 대표가 "제가 목회하는 교회에 원로목사님이 계신데 목회에 많은 도움을 받고 있다. 오늘 발제를 통해 많은 유익을 얻기 바란다"고 인사말 했다. 집행위원장 박재신 목사가 “다시금 영성으로 목회를 하고, 내 목회가 아닌 하나님의 목회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때로 윗 세대 목회자들을 원망하지만 그들의 진심어린 목회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다. 또한 은퇴 준비가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한다”고 논찬했다. 이사장 이상대 목사가 “귀한 목사님을 통해 모범적인 사례를 잘 들었다. 저도 은퇴가 4-5년 남았는데 많은 도전을 받았다. 이를 통해 한국교회가 새로워지기를 원한다”고 총평했다. 신촌성결교회 이정익 원로목사는 ‘현재 한국교회의 목회상황 인식, 오늘날 목회에서 극복할 점들, 목회와 은퇴 준비, 은퇴 후 할 일 준비’등의 항목으로 발제했다. 다음은 발제 전문이다. 1. 은퇴자의 변 정신없이 목회하다가 은퇴하고 원로된지 8년차를 맞이하였다. 사역에서 은퇴하는 것은 축복이고 잘 마쳤다는 마음에서 감사함이 있고 무엇보다 은퇴후 쉼과 지유함이 보장되어 여유를 가지게 된 것이 감사하다. 은퇴후 어려운 점이 있다면 현직때보다 처신의 어려움이 동반한다는 것이다. 적절하게 앉고 일어섬과 갈곳과 가지말아야 할 곳을 헤아리는 처신에 대한 지혜가 요구된다. 사역에서 은퇴한 후 떠난 교회에 계속 출석해할지 말아야 할 것인가를 놓고도 지혜로운 처신이 요구된다. 계속 출석해야 한다는 은퇴자들은 성도들이 아직도 나를 좋아할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때문일 것이다. 은퇴후에도 그동안 참여해 오던 각종 모임들에 계속 참여해야 할지 말아야할지 역시 지혜로운 처신이 요구되는 대목이다. 은퇴후 자유함은 주어졌으나 절제된 지혜의 처신이 요청되는 것을 체감한다. 2. 현재 한국교회 목회상황 인식 은퇴하고 객관적인 눈으로 한국교회를 바라보면 현직 목회자들이 모두 열정적으로 목회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 실제적으로 목회자들이 눈물겹도록 열심히 사역에 임하고 있다는 것을 보게 된다. 무엇보다 예배의 다양성이 눈에 뛴다. 코로나 이후 침체된 분위기를 회복하기 위해 무엇보다 예배형태가 다양화 되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설교의 열정도 새롭게 발견한 모습이다. 특히 젊은층 목회자들의 열정적으로 설교하는 모습에 감동을 받는다. 설교는 열정적인 것이 좋다. 청중들도 열정적인 설교를 선호한다. 또한 프로그램을 다양하게 적용하는 모습들이 근래 달라진 모습이라고 보여진다. 각종 자료들이 충분하고 ChatGPT의 출현으로 오늘 목회자들 곁에 새롭고 세련된 비서를 둔 격이 되었다. 오늘 현대의 목회자들은 많은 자료들을 마음껏 활용하는 또 다른 문화속에서 사역하는 시대가 되었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그리고 목회에 신개념이 도입되었다는 것도 눈에 띠는 대목이라 하겠다. 목회자의 이중직 개념이 자연스럽게 일반화되어가고 있고 목회형태의 변화 즉 사회적 목회와 직능목회 그리고 다양한 기능적 목회형태들이 등장하고 있음을 본다. 사회가 무섭게 변화하고 있다는 것과 그 변화에 적절하게 발맞추어 나가는 오늘의 다양한 목회형태를 보게 된다. 3. 오늘의 목회에서 극복할 점들 그렇다고 모든 것이 다 진지하고 긍정적인 순수한 목회는 아니라는 것도 눈에 보인다. 우선 오늘 한국교회에서 교회성장이라는 용어가 사라지고 있다는 점이 지적된다. 이제 한국교회에서 교회성장이라는 말은 구태의연하게 반응하거나 터부시되고 있다. 이같은 의식의 변화는 자연스럽게 전도에 대한 소극적인 태도로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이같은 전도에 대한 소극적인 의식은 오늘 교회에서 전도프로그램의 약화를 가져왔고 전도를 부끄럽게 생각하는 환경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렇다고 오늘 목회자들에게 교회성장에 대한 욕구까지 소멸된 것은 아니다. 오늘 목회자들의 내면에는 교회성장에 대한 욕구가 대단하다. 빨리 교회를 성장시켜야 한다는 강박관념까지 가지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오늘 사회적 분위기와 목회환경에서 교회성장이라는 개념에 대한 소극적 분위기에 모두 사로잡혀 있는 것이 문제라고 생각된다. 이같은 소극적인 태도는 성령의 역사를 기대하지 못할 것이다. 교회성장의 추구는 성령의 역사이자 교회의 생명요소이다. 교회성장은 자리를 채우기 위한 수단이 아니고 성령사역의 본질이자 목회사역의 뜨거운 초점이기 때문이다. 다음은 영성시대에서 지성시대로의 급격한 이동이다. 이는 목회 1세대와 2세대의 성향을 보면 금방 알수 있다. 목회 1세대는 정보와 지식에 약점이 많지만 그러나 1세대들은 영성과 기도와 열정과 헌신으로 교회성장을 이루었고 탄탄한 목회를 이루었던 세대들이다. 그런데 목회를 이어받은 목회 2세대들은 각종 정보와 자료 활용에 익숙하고 지식이 월등하며 대부분 학위를 소지하고 있다. 그럼에도 목회적 자질이나 영성 그리고 열정이나 헌신적인 면에서 1세대들을 능가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오늘의 실상이다. 그 결과 1세대들이 이룬 목회현장을 2세대들은 유지하기도 버거워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또 하나는 본질의 문제이기도 한 하나님 목회가 아닌 내목회를 지향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 묻고 목회원리에 따른 목회가 아닌 수단과 방법이 지나치게 많이 가미된 목회를 이루고 있다는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거기에 경쟁적인 목회를 지향하고 지나치게 홍보와 프로그램에 열중하고 부풀리는 목회와 외형적 목회 즉 교회건축에 올인하거나 인위적으로 부흥을 추구하는 모습들이 나타나고 있는데 이같은 모습들은 모두 하나님을 위한 목회가 아닌 내 목회를 지향하기 때문이라고 해석된다. 이같은 목회가 치명적으로 범하게 되는 오류는 본질을 떠난 비본질적 목회 때문에 성도들이 상처받고 교회를 떠나는 사례들에 대해서 목회자들이 둔감하다는 점이다. 목회가 본질의 궤도를 떠나게 되면 곧바로 갈등이 유발되고 그 갈등으로 인해 상처받고 교회를 떠나는 성도들이 발생된다는 점이다. 그리고 전문화된 목회철학의 부재도 눈에 띤다. 전통적인 음식점에서 수십가지의 음식을 만드는 것은 오늘의 컨셉에 맞지 않는다. 오늘 잘 나가는 음식점들은 전문화된 몇가지 음식들만을 고집한다. 그곳에 분명한 철학이 있다. 전문화를 중시하기 때문이다. 오늘 목회도 이같은 원리가 적용되어야 하는데 아직도 여전히 모든 분야를 모두 터치하려는 목회자들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작지만 그곳에 강점이 있고 우리교회와 내 목회에만 있는 전문적인 측면이 부족한 것이다. 오늘은 특히 강소교회로의 특화된 목회철학이 요청된다. 4. 목회와 은퇴준비 목회사역을 정신없이 수행하다보면 어느덧 은퇴시기를 맞이하게 된다. 이 문제를 깊이 생각하지 않고 지나다 보면 어느날 나에게도 은퇴라는 현실에 직면하게 되는 날이 온다. 근래 목회환경은 매우 열악해져 있다. 특히 목회자들의 은퇴환경은 더 급격하게 변해가고 있다. 그래서 은퇴를 앞두고 목회자들이 내몰리는 경우들이 흔히 나타나고 있다. 교회들은 원로에 대한 예우나 주거문제 그리고 후생문제 등이 부담이 되기 때문일 것이다. 오늘 목회환경이 급격하게 새롭게 재편되어가고 있는 이유중 하나는 신세대 당회원들의 출현으로 그들의 합리적인 사고의 영향이 크게 작용한 결과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목회자들은 수십년 동안 목회사역을 잘 이루어왔어도 마지막 마무리를 잘 해야 모양새도 좋고 그것이 성공적인 마침이 된다. 그 결과 목회자들의 성공적인 은퇴준비가 요청된다. 은퇴준비는 오래전부터 할수록 좋다. 즉 은퇴후 주거문제나 생활대책 등의 준비는 스스로 오래전부터 세워두어야 한다. 정신없이 사역에만 열중하다 보면 어느날 갑자기 다가온 은퇴에 당황하게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다음과 같이 몇가지 준비에 유념하면 좋을 것이다. 할수만 있으면 1년정도 일찍 은퇴하는 구상을 하면 좋을 것이다. 목회자들의 은퇴가 2-3년 남았을 시기가 가장 어려운 목회마무리의 마의 고개가 되기 때문이다. 은퇴 마지막날까지 목회하겠다는 생각은 자기를 위한 철학일 수는 있어도 교회를 위한 철학은 아니다. 교회로서는 목회자의 은퇴시기가 다가오면 하루가 천년같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않된다. 다음은 후임자 선정하는 문제이다. 은퇴자들이 범하기 쉬운 오류중 하나는 후임자는 내가 선정하겠다는 고집이다. 또 한가지 문제는 은퇴자 대우는 이웃교회 수준으로 해 달라는 요구도 극복할 문제이다. 이 두가지 문제는 목회자의 은퇴를 앞두고 교회들이 겪게 되는 한결같은 갈등의 사안들이다. 이 조건들은 평생 쌓아온 목회자의 덕목과 인식을 단번에 허물어 버리는 조건들이 된다. 이 두 문제는 교회에 맡기는 것이 좋고 할수 있다면 측면에소 조언하는 입장에 서 있어야 한다. 그런 문제에 관심을 쏟기 보다는 은퇴를 앞둔 목회자가 최우선으로 해야 할 일은 은퇴 4-5년전부터 급피치를 올려 은퇴싯점에 이르러 내 목회 전체에서 최절정의 환경을 조성하는 일이다. 그렇게 된다면 은퇴에 즈음하여 레임덕은 발생되지 않을 것이고은퇴과정은 너무나 자연스럽고 만족하게 이루어지게 될 것이다. 지혜로운 목회자라면 이 부분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금방 이해하게 될 것이다. 5. 은퇴 후 할일 준비 은퇴를 잘 마쳤어도 남는 것은 또 있다. 그것은 은퇴한 후 할 일을 준비하는 일이다. 은퇴후 준비해야 하는 할일이 몇가지 더 있다. 하나는 정서공간 마련이다. 은퇴후 나 혼자만 머물고 생각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야 한다. 그 공간이 마련되지 않으면 매일 집안에만 머물러 있어야 한다. 그 공간은 자주 다닐 책방이나 도서관 그리고 각종 모임과 대화방 등을 말한다. 이 공간은 필수적으로 준비하여야 하는 공간이다. 두 번째는 만날 사람들을 준비하는 일이다. 은퇴한 후 어울릴 곳이 있어야 하고 대화를 나눌 친한 동료나 이웃이 있어야 한다.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으면 빨리 준비해야 한다. 또 아침을 먹었으면 갈곳을 마련해야 한다. 은퇴후 적어도 몇십년을 보내야 하는데 매일 아침먹고 갈곳이 없다면 큰일이다. 혼자서 고고하게 목회한 분들이 의외로 이 부분이 취약하다. 어울릴 동료가 없고 갈곳에 없고 할 일이 별로 없다. 큰 문제가 아일 수 없다. 매주일 예배드릴 교회를 지정하는 일도 중요하다. 본교회 출석은 고집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 집과 가까운 교회에 지정하고 출석하기로 결정하면 주일날 정처없이 헤메고 다니는 문제는 사라질 것이다. 6. 결론 은퇴해 보니 아쉬움이 많다. 너무 바쁘게 일했다. 임종하는 분을 5분 정도 대면한것이 너무 후회스럽다. 만약 1시간 정도 기도해 주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하는 아쉬움이 있다. 질의 응답 후 김영복 목사의 기도로 포럼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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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18
  • 서만종 목사, 부서기 후보 추천 받아
    서만종 목사(광주단비교회 시무)가 109회 총회 부서기 후보로 추천 받았다. 광주전남노회는 4월 15일 오전 9시 30분 광주산수교회(임춘수 목사 시무)에서 제124회 정기회로 모여 서 목사를 총회 부서기 후보로 만장일치 추천하고 회무를 처리했다. 서 목사는 “선의의 경쟁을 통해 당선이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고, 당선이 되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세로 겸손히 섬기며, 헌법과 규칙과 절차에 따라 직무를 감당하겠다"고 추천 인사말했다. 노회는 서 목사를 축하하며 꽃다발을 전달하고, 당선을 위해 온 노회원이 합심으로 기도했다. 서 목사는, 총회군목부장과 호남협의회 대표회장 등을 역임했고, 현재는 총회전도부 회계직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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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17
  • 김장교 목사, GMS 이사장 후보 추천 받아
    김장교 목사(서성로교회)가 GMS(총회세계선교회) 이사장 후보로 추천 받았다. 김 목사는 4월 9일 대구평리교회(조흥래 목사 시무)에서 열린 대경노회 제194회 정기회에서 만장일치 추천받았다. 김 목사는 “이사장 후보로 추천해 주신 서성로교회와 대경노회에 깊이 감사드린다. 20년 가까이 GMS를 섬겼고, 거룩한 부담감을 갖고 있다. GMS는 섬김과 하나됨, 기도, 격려, 옳음으로 하나가 되는 팀 사역과 연합을 이루어 미션 플랜팅을 만들어가야 한다. 이를 위해 GMS의 모든 사역과 운영 과정을 매뉴얼화해야한다. GMS에 이런 매뉴얼이 없다는 것은 대단히 안타까운 일이다. 그래서 GMS의 모든 사역과 운영 과정을 매뉴얼 작업을 하고자 한다. 또한 이사회와 본부, 그리고 선교사가 하나가 되며 파송과 사역, 은퇴까지 책임을 질 수 있는 종합적인 선교프로그램(Total Life Missionary Program)을 만들어 나아갈 것이다. 그리고 현재 선교사를 파송한 교회를 향한 GMS의 사역이 부족한 부분도 있었다. GMS 이사들을 잘 돌아보고 섬기고자 한다. 아울러 평신도 선교사의 제도적인 보완장치가 필요하다. 이것을 시스템화 시켜야 한다. 선교사들도 일정 기간 재교육 시키고자 한다. 지방에 있는 교단 신학교와 신학대학교를 활용하여 선교사 교육의 시스템도 만들어 가고자 한다. 무엇보다 선교희 후원지가 없는 노마드 선교사들에게 후원 교회를 만들어 가는 일도 하고자 한다"고 후보 추천 인사말을 했다. 김 목사는 총신 83회로 대경노회장, 대신대학교 이사장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 영남협의회 대표회장이다. GMS에서는 부이사장, 회록서기, 감사, 실크로드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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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17
  • 총회이슬람대책세미나, 1차 영남지역 개최
    제108회기 총회이슬람대책세미나가 1차 영남지역을 대상으로 4월 16일 오전 10시 반야월교회(이승희 목사 시무)에서 열렸다. 이 세미나는 이슬람대책위원회(위원장 박의서 목사)가 주최했다. 개회예배는 서기 윤삼중 목사의 인도로 부위원장 서한국 목사가 기도 후 대신대학교 최대해 총장이 사 1:1-9을 본문으로 ‘하나님, 잊지 말게 하옵소서’란 제목으로 설교했다. 최 총장은 “현재 이스라엘과 우리는 많은 시련가운데서도 살아남았다. 그러나 과거 이스라엘은 남북으로 나뉘었는데 하나님을 떠남으로 결국 패망하게 됐다. 하나님을 떠나면 망한다는 것을 역사는 보여주고 있다. 세상의 악에 대해 교회가 침묵하고 있는 것은 매우 우려할 상황이다. 대구에 이슬람 사원이 지어지고 있고, 현재 우리나라에 37만의 무슬림이 있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열심히 자녀들에게 성경을 가르쳐야한다. 우리는 부활 신앙을 갖고 있다. 그러므로 세상 사람들과 다르게 살아야한다. 신자들이 세상풍조를 따라 살아가는 것이 위험하다. 죄 많은 세상에서 우리는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고 살아야한다. 늘 하나님의 말씀을 굳건히 붙잡아 이슬람을 이기며 사는 우리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환영인사, 축사, 격려사 이슬람대책위원장 박의서 목사가 “이슬람의 거짓에 속지 않도록 하고, 그들을 전도의 대상으로 삼아야한다. 그들을 경계하며 사랑해야한다. 강의를 통해 정체성을 확인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고 환영인사, 부총회장 김종혁 목사가 “울산에 이슬람 난민들이 정착했다. 그러나 이맘의 지도에 꼼짝 못하는 것을 봤다. 경계하며 사랑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복음으로 그들에게 나아가야한다”고 축사, 대구노회 증경노회장 이창수 목사가 “영남을 시작으로 이슬람세미나가 시작되어 축하드린다”고 격려사 후 증경총회장 이승희 목사의 축도로 개회예배를 마쳤다. 세미나는 총무 박종국 목사의 사회로 1강은 ‘한국 이슬람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교회의 대안’이라는 제목으로 총신대학교 유해석 교수가 “과거 통일신라, 고려, 조선시대에 이슬람인들이 우리나라에 있었고, 19세기에도 있었으나 이슬람 선교는 미미했다. 이후 6.25 전쟁에 무슬림 국가인 터키 군인들이 참전했다. 현재 많은 무슬림들이 유학생으로 국내에 들어오고 있다. 이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문맹정책으로 이슬람이 왕성했다. 그래서 그들에게 가르쳐야한다. 현재 한국은 저출산, 고령화, 노동 인력 부족이 심각하다. 반면 이민으로, 전투적인 선교로, 자녀를 많이 낳아, 결혼, 난민 유입, 개종을 통해 이슬람이 급증하고 있다. 현재 우리나라에 250개의 모스크가 있다. 이에 대한 한국교회의 대안은 무엇인가? 1. 교회가 건강해야한다. “이슬람 유럽 침공은 기독교의 타락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이다. 따라서 무슬림과 싸우려고 하지 말고 교회의 권위를 회복하고 신앙고백을 회복하고 말씀으로 돌아가라”-루터(‘사면의 능력에 대한 논쟁의 해답들’ 책에서). 2. 이슬람에 대한 지식을 가지라. 3. 자녀에게 신앙을 전수하고 주일학교에 전념하라 4. 다문화시대를 준비해야한다. 5. 선교해야 한다. 현재 많은 무슬림이 기독교로 개종하고 있다. 선교사들과 기독교인들의 헌신적인 삶으로, 꿈이나 병 고침 등의 초과학적 역사로, 이슬람에 대한 회의(懷疑)로 인해서. 결론적으로, 이슬람이 아무리 세상을 흔든다고 해도 하나님의 손 안에 있는 도구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발표했다. 2강은 ‘기독교와 이슬람의 신관념 비교연구-미로슬로브 볼프의 견해에 대한 비평적 평가를 중심으로-’란 제목으로 총신대학교 배춘섭 교수가 “하나님과 알라는 속성, 계시 유형, 구원 방식이 다르다. 그러나 볼프는 하나님이 알라와 동일하다고 주장했다. 이런 오류가 생긴 이유는 그가 하나님과 알라를 비교할 때 동일한 지평선에서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성경과 꾸란도 동일한가? 그러나 김영한 교수는 이슬람은 성령을 피조물로 본다고 지적했다. 알라는 절대적이고 숙명론적인 예정을 한다. 하나님과 알라가 같은 신이라면 계시인 성경과 꾸란은 신에 관한 계시 내용이 같아야 한다. 볼프는 알라의 명칭이 고유명사라기 보다 단순히 보통명사라고 주장한다. 그는 기독교인이 하나님을 알라로 호칭해도 전혀 상관없다고 말한다. 이것은 신관에 내재된 신학적 의미를 제시하기보다는 기능적 접근을 먼저 취한 것이다. 하나님과 알라에 내재된 구원론적 요소와 단순히 동일 신이라는 기능적 역할이 서로 분리될 수 없다. 루터와 칼빈은 이슬람에 대해 논의할 때 하나님과 알라가 다르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 이슬람을 기독교와의 유사성보다 신학적인 관점에서 비연계성과 그 위험성을 주장했다. 하나님과 알라의 속성 차이: 하나님은 성령으로 찾아오셔서 인간과 친밀한 관계를 형성한다. 반면 알라는 상징적으로, 심리적으로 임재한다. 하나님은 인격적으로 계시하나 이슬람은 인간과 직접 소통하지 않는다. 그래서 신의 성품이 인간에게 거의 경험되지 않는다”고 발표했다. 참여자들의 큰 관심 속에 세미나가 진행되었으며 제한된 시간에 매우 유익한 강의를 듣고 모두 이슬람에 대한 새로운 각오를 갖고 폐회했다. 환영사-총회장 오정호 목사 "한편으로 경계하고, 한편으로 사랑하라!" 할렐루야! 성삼위 하나님의 은혜가 총회이슬람대책세미나 및 이슬람 아카데미에 참여하는 모든 분들에게 함께하기를 기원합니다. 세상은 빠른 속도로 변화를 거듭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변화의 흐름은 외형적인 모습뿐만 아니라 사회, 정치, 경제, 과학, 학문 등 세상의 모든 문화의 변혁을 가져옵니다. 세계적으로 이슬람의 성장이 확대되고 있습니다. 이슬람은 사랑과 평화의 종교라는 이미지를 표방하면서 전 세계 뿐만 아니라 한국 안에서도 그 영향력이 커져 가고 있습니다. 이렇게 중요한 때에 108회 총회이슬람대책위원회는 "한편으로 경계하고, 한편으로 사랑하라!"는 주제 아래 무슬림 인구 증가와 함께 드러난 문제들을 거울삼아 한국 사회와 한국교회의 지혜로운 선교적 대응을 위한 기회를 마련하였습니다. 현재 한국교회 내에 이슬람의 문제는 매우 심각한 단계에 처해 있습니다. 선량한 양들을 그릇된 길로 미혹합니다. 교회를 혼란케 하고 교회의 위상을 실추시킵니다. 이는 한국교회가 해결해야 할 당면과제로 이슬람에 대한 철저한 준비와 전략이 필요합니다. 이슬람에 대한 영적 각성과 기독교의 기본교리에 집중하여 신앙교육을 강화하는 한편 무슬림을 선교 대상으로 인식하는 훈련이 필요한 때입니다. 이 총회이슬람대책세미나와 아카데미는 한국사회 속에 급속하게 성장하고 있는 이슬람에 대하여 슬기롭게 대처하는 귀한 기회가 될 것입니다. 이 소중한 시간을 통해 앞으로 한국 교회의 실제적인 이슬람의 전도 전략을 제시하여 우리 교단의 도약의 발판이 되길 소망합니다. 이번 행사를 위해 수고해주신 총회이슬람대책위원회 임원, 총회교육전도국 관계자들 모두에게 하나님의 격려와 위로를 전합니다. 전국 교회와 함께 복음을 강력하게 전파하는 108회 총회이슬람대책위원회가 되길 소망합니다. 감사합니다. Soli Deo Gloria! 교회여 일어나라! 성도여 일어나라! 발간사-이슬람대책위원장 박의서 목사 한국 교회가 든든히 서가는 귀한 걸음이 되기를 108회 총회이슬람대책세미나 및 아카데미에 오신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지금 전 세계는 전쟁과 기근, 테러, 지구 온난화로 인한 천재지변 등이 끊이지 않으며, 우리 사회 역시 정치, 경제, 문화 등 모든 면에서 위기를 겪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 시간에도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사람의 끝이 하나님의 시작이라는 사실입니다. 교회 본연의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여 새로운 패러다임과 정책을 구체적으로 설정하고 준비해야 할 때입니다. 한국 사회는 다양한 인종 종교 문화와 관습을 가진 사람들이 함께 거주하는 다문화 사회로 진입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이념, 종교, 인종, 문화, 편견 등의 이유로 허물지 못하는 벽의 경계가 존재합니다. 지금 한국에는 하나님과 누리는 친밀한 관계와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평안을 그리워하는 무슬림들이 우리 곁에 있습니다. 증오, 복수나 적개심의 댐을 만들기보다는 서로를 향해 다가가 서로의 분명한 자기의식과 객관적인 자세를 가지고 서로를 이어주는 돈독한 관계 회복이 필요합니다. 서로 다른 신념과 문화를 존중하며, 상호 이해와 관용을 바탕으로 함께 살아가야 합니다. 이번에 개최되는 108회 총회이슬람대책세미나 및 이슬람 아카데미는 한국 교회의 이슬람 선교에 대한 방향 설정은 물론 적용 가능한 실천적인 제언을 제공하는 자리입니다. 이번에 강의로 수고해주시는 모든 강사진은 이슬람의 역사와 이슬람에 대한 바른 이해, 다양한 선교 전략적 접근과 개혁신학의 대응전략 등 실제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생생하고 역동적인 노하우를 제시할 것입니다. 한국교회 안에 급증하고 있는 이슬람과 무슬림의 사례를 통해 적용 가능한 구체적인 정보를 제시할 것입니다. 또한 이번 이슬람대책세미나와 아카데미는 이슬람에 대한 대처 방안을 목회자, 성도들, 교단과 사회적 차원으로 다양하게 제시하면서 교육과 예방의 측면을 제시할 것입니다. 한국 교회의 이슬람에 대한 대응과 전략적 접근은 본 교단의 위상을 한층 발돋움하는 발판이 될 것입니다. 아무쪼록 108회 총회이슬람대책위원회의 모든 사역이 이슬람의 거대한 물결로부터 한국 교회가 든든히 서가는 귀한 걸음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총회이슬람대책세미나와 아카데미 모든 사역을 위해 수고해주신 강사님들, 위원님들과 교육전도국장님을 비롯한 직원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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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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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토크】학술지에 실린 근사체험 특징들
    의학과 과학은 사후 세계를 잘 인정할려고 하지 않는다. 사후세계는 종교의 영역이라고 치부한다. 그런데 네덜란드의 심장전문의 핌 반 롬멜 박사는 근사체험을 의학적으로 연구해 인정받은 전문가다. 그는 논문심사가 까다롭기로 유명한, 세계적인 의학전문 학술지 <란셋>에 근사체험을 과학적으로 접근한 논문을 최초로 실은 사람이기도 하다. <란셋>에 발표하면, 세계적인 주목을 받게 되고, 전 세계에 통용되는 새로운 용어를 만들어 내게 된다. 2001년 《란셋>에 핌 반 롬멜 박사의 근사체험 논문 『심장정지 후 다시 살아난 근사체험자』가 실리면서, 근사체험은 학계에서 과학적으로 인정받기 시작했다. 그의 연구는 1988년부터 1992년까지 약 4년 동안 10개 병원에서, 심장이 멈춘 후 기적적으로 소생한 환자 344명을 대상으로 진행되었다. 즉, 의학적으로 '죽었다고 판정되었다가 되살아난 환자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다. 그 결과 18퍼센트에 해당하는 62명의 환자들이 당시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을 기억했고, 이들 중 41명은 근사체험에서 말하는 대표적인 경험을 했다고 증언했다. 다음은 근사체험 사례들의 특징이다. 1. 유체이탈 경험 많은 근사체험자들이 심장이 정지된 후 육체를 이탈해 외부에서 사건을 인식하는 경험을 했다. 이런 근사체험자들은 오래된 옷을 벗듯 육체를 빠져나오고도 그 자신의 정체성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인지 능력, 감정, 그리고 매우 명료한 의식까지 그대로였다. 롬멜 박사의 논문에는 44세의 어느 청색증 환자 사례가 실려 있다. 그는 풀밭에서 뇌사상태가 된 지 30분 만에 발견되었다. 그의 입안에는 의치가 있었고, 간호사는 의치를 뽑아내어 카트 위에 놓았다. 한 시간 반 후에 환자의 심장 박동과 혈압이 되돌아왔지만 여전히 그는 뇌사상태였다. 1주일이 지나자 그는 의식이 돌아와 있었다. 그는 자신을 찾아온 간호사가 자신의 의치를 꺼내 카트 위에 둔 장면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뇌사상태에서 심폐소생술을 받고 있었던 그는 침대 위에 누워 있던 자신을 보았고, 간호사와 의사들이 심폐소생술로 분주하던 장면을 위에서 내려다본 것이다. 게다가 그는 자신이 심폐소생술을 받던 작은 방이 어떻게 생겼는지 구체적으로 묘사했고 그곳에 있었던 사람들의 외양도 상세히 설명할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의 경험에 깊은 인상을 받았고 더 이상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2. 삶의 회고 경험 근사체험자들 중에는 과거에 자신이 어떻게 행동했으며 어떻게 생각했는지까지 한 번에 볼 수 있는 경험을 한 체험자들도 있다. 그런 환자들은 한눈에 자신의 인생 전체를 살펴볼 수 있다. 그러한 경험 가운데는 시공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의식이 회복될 때까지 몇 분밖에 걸리지 않지만 그 짧은 시간 가운데 그들은 자신의 삶 전부를 3차원의 파노라마처럼 볼 수 있다. 다음은 한 사례자의 증언이다. "각각의 사건들은 선한 것인가, 악한 것인가, 인과관계는 어떠한가에 대한 통찰과 함께 이어졌죠. 나 자신의 관점에서 모든 것을 인지할 뿐만 아니라 그 사건에 관련된 다른 모든 사람들의 생각도 알 수 있었어요. 마치 그들의 생각이 내 안에 있는 것처럼요. 내가 한 행동과 생각뿐 아니라 그것이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식으로 영향을 미쳤는지까지 깨닫게 되었어요. 마치 제가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진 것처럼 사물들을 바라볼 수 있었어요. 그리고 그것이 재연되는 동안 내내 사람의 중요성이 강조되었어요. 모든 주제들이 떠오를 만큼 긴 시간이었어요. 하지만 동시에 눈 깜짝할 새 같기도 했죠. 시간과 거리는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았어요. 나는 모든 공간에 동시에 존재하고 있었어요.“ 3. 죽은 이들과의 만남 어떤 근사체험자들은 이미 사망한 지인이나 친지들과 만난 경험을 했다. 그들은 외양으로 그들을 알아볼 수 있었으며, 의사소통도 할 수 있었다. 근사체험을 통해 죽은 자들의 의식과 연결되는 것 또한 가능하다. 어떤 경우는 자신이 전혀 알지 못했던 죽은 자를 만나기도 한다. 한 사례자는 근사체험 동안, 이전에는 알지 못했던 생부를 만난 경험을 고백한다. “심장이 정지된 동안 나는 돌아가신 할머니 외에도, 나를 사랑스럽게 바라보는, 내가 알지 못하는 한 남자를 보았어요. 그 체험이 있은 지 10년 뒤에, 나의 어머니는 돌아가시는 순간에 내게 고백하셨죠. 나는 혼외 정사로 태어난 자식이라고요. 내 아버지는 강제추방당하고 2차 세계대전 때 죽은 유대인이라는 것도 알려 주셨어요. 어머니가 그의 사진을 보여 주었을 때, 나는 그가 10년 전 근사체험 때 보았던 그 남자라는 것을 즉시 알아차렸지요.” 4. 몸으로 되돌아오는 경험 어떤 근사체험자들은 그들이 체험에서 만난 빛이나 죽은 친지와의 말 없는 의사소통을 이해하게 된 후에 머리 정수리를 통해 몸으로 되돌아온다고 증언했다. 친지들의 말 없는 대화 내용은 대개 "아직은 때가 아니다" 또는 "너는 아직 이루어야 할 일이 남아 있다"라는 내용이었다. 그들에게, 의식이 신체로 되돌아오는 경험은 매우 끔찍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그들은 의식을 회복하면서 자신의 신체에 다시 갇힌다는 느낌을 받는다. 질병의 고통과 한계에 다시 머물게 된다는 의미다. 그들은 무조건적인 사랑과 수용에 대한 느낌뿐 아니라 깊은 지식과 앎에 대한 의식의 일부를 다시금 빼앗겼다는 것을 인식하게 된다. "다시 의식을 회복하게 된 순간은 너무나 너무나 끔찍했습니다. 근사체험은 무척 아름다웠기 때문에 다시는 돌아오고 싶지 않았죠. 그곳에 그대로 머물러 있고 싶었어요. 하지만 결국 돌아왔습니다. 그때부터 내 육체의 한계를 짊어지고 삶을 살아간다는 게 매우 어려운 경험이 되어 버렸습니다." 5. 사라진 죽음의 공포 근사체험을 경험한 거의 모든 사람들이 더 이상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갖지 않게 된다. 주변사람들이나 의사로부터 사망선고를 받았을 때조차 의식이 지속된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생명이 없는 육체로부터 분리되지만 인지 능력은 그대로 간직한다는 것을 알게된 것이다. "죽음으로만 증명될 수 있는 그 무엇을 논의하는 것은 내 역량 밖입니다. 그러나 나로서는 그 경험이, 죽음 너머에도 의식이 지속된다는 것을 확신케 해주는 결정적인 경험이었죠. 죽음은 죽음이 아니라 또 다른 형태의 삶입니다. 이 경험은 내게는 축복입니다. 왜냐하면 나는 이제 몸과 정신이 분리된다는 것을 확신하고, 사후세계가 있다는 것을 확실히 알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근사체험자들은 모든 생각과 과거의 사건에 대한 인식과 함께 의식이 지속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인간은 육체 이상의 존재라는 통찰을 얻게 된 것이다(pp. 105-109). 물론 이 근사체험(임사체험)에 대해 부정적인 전문가들도 많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이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기독교적으로 이것을 어떻게 해석하고 설명해야할지 관심 갖고 더 연구해 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더 관심이 있는 분들은 다음의 책을 읽어 보기 바란다. 그런데 왜 책 제목을 이렇게 지었는지는 의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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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19
  • 【북토크】엔도르핀...죽을 때 부어지는 은혜
    제대로 아는 것이 위로가 될 수 있다. 알지 못하면 막연히 두렵고 답답하나 제대로 알면 마음이 편하다. 죽을 때의 고통도 그렇다. 죽을 때 고통스러울 것이라는 불안이 있다. 그런데 죽음에 대한 책을 보다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됐다. 한 의사가 그의 책에서 이렇게 썼다(pp 55-57). 죽음은 누구에게나 두려운 것이고,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합니다. 감정적으로는 가족, 친지, 친구들과 영원히 헤어지게 된다는 이별에 대한 두려움이고 신체적으로는 죽음의 순간이 고통스럽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일 것입니다. 죽음에 대한 감정적인 두려움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주변 사람들과의 많은 대화와 자기 성찰을 통해 이별을 준비하는 정리의 시간을 가짐으로써 조금씩 극복하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고통스럽지 않을까 하는 신체적인 두려움은 막연한 상상에서 비롯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염려는 죽음을 앞둔 마지막 투병 기간 내내 감정을 어둡게 짓누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 죽음의 순간은 전혀 고통스럽지 않다는 전문가들의 의견을 참고한다면 막연히 고통스러울 것이라는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죽음이 다가오면 뇌의 기능이 서서히 사라지면서 의식을 잃어가게 됩니다. 통증이라는 감각을 느끼는 것은 뇌의 기능이 정상일 때 가능한 것이어서 죽음이 가까워져 점차 의식이 사라지는 상태에서 고통스럽다는 감각 자체는 극도로 무뎌지거나 존재하지 않게 됩니다. 또한 죽음에 이르면서 뇌에는 산소 결핍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이것이 신호가 되어 뇌에서는 일종의 방어 기전으로 통증 완화 효과가 있는 아편성 단백질인 엔도르핀을 포함한 각종 신경 전달 물질을 다량으로 분비하여 고통을 억제하고 극도의 안도감을 줍니다. 일부 신경학자에 따르면 죽음의 순간에는 고통은 커녕 이제껏 느껴보지 못한 최고의 행복감과 쾌감을 느낄 것이라고도 합니다. 죽는 순간에 뇌의 기능이 사라지면서 통증을 느끼지 못하게 되고, 몸에서는 아편성 물질인 엔도르핀이 분비되어 고통을 억제하게 된다고 한다. 몸을 만드신 하나님의 놀라운 배려이다. 죽음에 대한 평이한 책이라 읽기가 어렵지 않다. 관심이 있는 분들은 읽어 보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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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16
  • 교역자....사례비를 넘어서는 헌신이 필요하다
    오래전 부교역자 시절 어느 교회에 갔다. 사례를 받아보니 이전 사역지에 비해 너무 적었다. 그래서 정확히 한달이 안되 조금 줄여서 줬나하고 그 교회를 추천한 친구에게 물어보니 그렇게 적을리 없을 거라고 했다. 본인도 교육전도사만해서 부목사 사례가 어느 정도인지는 몰랐던 것이다. 늘 기독신문 광고를 보고 지원해 임지를 정했던 나는 교회에서 얼마의 사례를 주는지 알지 못했다. 지금도 기독신문 교역자 초빙 광고를 보니 예전과 달라진게 없다. “사례는 교회 내규에 따라 지급합니다-면접시 안내”, “사례는 내규에 따릅니다”라고 언급하거나 아예 사례에 대한 내용이 없는 경우가 태반이다. 그래서 나는 담임목회할 때 교역자와 반주자, 지휘자 초빙이 필요한 경우 근무조건과 사례비를 밝혔다. 그래야 상대방도 생각해 보고 지원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면접시 내 부교역자 시절처럼 아예 사례비 언급이 없어 한달이 지나서야 알게 된다든지, 혹은 면접 말미에 밝힌 사례비가 본인이 생각하거나 필요한 것보다 적으면 서로 입장이 곤란해지기 때문이다. 교역자를 초빙하면서 교회에 대한 정보를 차단하는 교회들이 있다. 전화문의도 거절한다. 왜 그런가? 교역자 입장에서 어떤 교회에서 사역하는 가는 매우 중요하다. 그러므로 교회에 대한 정보를 오픈해야한다. 기독신문에 그러한 사항을 다 기재할 수 없으면 교회 홈페이지에라도 지원자가 보고 참고할 수 있도록 교회에 대한 안내, 사례비 등등을 밝히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교역자가 사례비를 밝히면 삯군이라는 논리를 주장하는 분도 있다. 그러나 교역자도 생활을 해야하기에 자기가 받을 사례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돈 이야기만 나오면 무조건 삯군이라고 하지 말았으면 한다. 반면, 요즘 담임목회자들은 부교역자로 인해 고민이 많다고 한다. 부교역자를 뽑을려고 하면 대뜸 사례비를 물어보거나 수요예배, 금요기도회 참석 여부를 물어본다고 한다. 과거에는 상상도 못할 일이다. 나는 신대원 1학년이던 1989년 화곡동에 있는 람원교회에 교육전도사로 갔다. 그당시 교회는 강화도 산쪽에 땅을 가지고 있었다. 해마다 여름이면 그곳을 집회 장소로 사용했기에 교역자들이 일주일간 가서 대형 텐트 설치하는 작업을 했다. 힘들었지만 재밌고 추억에 남는 일이었다. 누구도 불평하지 않고 했다. 그러나 지금 그랬다가는 난리가 날지도 모르겠다. 교역자는 교회를 섬기기 위해 있는 자들이다. 힘들고 어려워도 주님을 생각하며 교회를 섬겨야한다. 그렇다고 교회가 이것을 이용해서는 안된다. 교회도 형편에 맞게 교역자에게 최선의 예우를 할려고 하고, 교역자도 교회를 위해 희생하는 마음으로 섬길 때 주님이 보실 때 기뻐하실 것이라고 생각한다. 교역자는 교회에 지원하기 위해 자신의 모든 정보를 공개한다. 그렇다면 교회도 그에 상응하게 필요한 사례비와 사역 내용 등의 정보를 제공해 서로 조율하는 과정이 있기를 바란다. 그래야 깜깜이 지원이 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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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2023-11-15
  • 【단상】한바탕의 난리부르스, 한장총 상임회장 경선
    날씨가 쌀쌀한데 11월 14일 한국교회100주년기념관 그레이스 홀은 후끈 달아올랐다. 한국장로교총연합회(이하 한장총) 상임회장 경선 때문이었다. 한장총은 한기총, 한교총, 한기연과 함께 교단연합기관이다. 그러나 큰 존재감이 있는 기관은 아니다. 그런데 상임회장 선거가 합동측의 권순웅 목사와 통합측의 김순미 장로의 경선이 되다보니 난리부르스가됐다. 합동측 총대가 20명인데 모두 참석했다. 먼 지방에서도 빠지지 않고 왔다. 이 선거에 자존심이 걸려있기 때문이다. 원래는 관례에 따라 합동측 직전총회장인 권순웅 목사가 상임회장이 되야하는데 갑자기 통합측의 장로가 출마해 경선이 됐기 때문이다. 직전총회장 출신 합동측 목사와 증경장로부총회장 출신 통합측 장로의 대결이다. 이 배후는 지난번 한교총 회기에 권순웅 목사가 대표회장이 되지 못하도록 한 모 목사라고 알려졌다. 합동교단이나 권순웅 목사와 무슨 원수가 졌는지 사사건건 딴지를 거는 사람이다. 결국 합동측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권순웅 목사의 당선을 위해 오정호 총회장을 비롯한 증경총회장들과 모든 총대들이 출석해 한표를 행사했고 결국 100대 67로 이겼다. 교단 대표 기관의 장이 장로가 돼서는 안된다는 다른 교단 총대들의 의견도 반영된 결과라고 본다. 이제 한바탕의 난리부르스가 끝났다. 잠시 복기를 한다면 두 가지를 생각할 수 있다. 첫 번째는, 합동측의 단결력이 돋보였다는 것이다. 교단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온 총대들이 한 마음이 되어 권 목사를 지지함으로써 그 세를 과시하고 당선이라는 결과를 가져왔다. 모두 교단을 위하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나가 됐다. 이날 참석한 합동측 총대들은 자신의 교단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을 보여주었기에 다행이고 감사한다. 또한 총회 총무를 비롯해 총회 직원까지 동원해 전폭적인 지원을 했다. 두 번째는, 통합 교단을 조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일이 다른 교단도 아니고 합동교단에서 갈려나간 통합측에 의해 벌어졌기에 더욱 합동측 총대들은 분개했다. 이들은 앞에서는 악수의 손을 내밀지만 뒤에서는 음모를 꾸미는 자들이었다. 그러므로 앞으로 통합측과 어떤 일을 할 때는 그들이 뒤통수를 칠 수 있다는 것을 늘 염두에 두고 일을 진행해야한다. 지난번 한교총 대표회장 때는 멋모르고 당했지만 이번에는 통하지 않았다. 그러나 앞으로도 통합측은 기회만 되면 어떤 일이라도 꾸밀 수 있기에 이슬람을 대할 때 “사랑하되 경계하라”처럼 그들을 대해야한다. 두 번다시 통합측에 놀아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 한장총 정기총회는 오전 11시에 시작하여 1시가 넘어 끝났다. 경선 선거 때문에 시간이 많이 지체된 것이다. 이때 합동측 목사 장로들은 끝까지 자리를 지키는 단결된 모습을 보여줬다. 반면 통합측 인사 대부분은 선거에서 지자 바람처럼 사라졌다. 본전도 못찾은 경선이었다. 차기 대표회장이 될 권순웅 목사의 상임회장 당선을 축하하며 합동교단의 위상과 한장총의 영향력을 높이는 연합회 활동을 하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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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논단
    2023-11-14
  • 교회세습과 유한양행
    책을 읽다가 유한양행의 설립자 유일한 박사에 대한 것을 보게 됐다. 어렸을 때 가정 상비약으로 가지고 있었던 안티프라민을 만든 제약사가 바로 유한양행이다. 유 박사가 널리 알려지게 된 이유 중 하나는 회사를 전문경영인 체제로 하기 위해 자식들에게 기업을 물려주지 않은 것이다. 또한 그가 죽었을 때 요즘 가치로 7천억의 재산이 있었는데 이것을 모두 유한재단에 기증했다. 그에게는 1남 1녀의 자식들이 있었는데 아들의 딸 즉 손녀에게는 학자금으로 1만 달러를 주고, 딸에게는 유한공고 주변 땅 5천평을 맡길테니 동산으로 꾸며 달라고 유언하고 아들에게는 한푼도 유산으로 남기지 않았다. 요즘 합동측 어느 교회가 교회 세습으로 인해 쑥대밭이 됐다는 소식을 접한다. 교인들이 그렇게도 세습을 반대하는데 목사는 강행하기 위해 온갖 불법을 저지르며 자신의 목회 말년을 망치고 있는 것 같다. 유 박사는 본인이 은퇴하기 전 자신의 혈연, 친척들을 전원 회사에서 해고했다. 가족들 때문에 회사에 파벌이나 알력 다툼이 일어나면 안 된다는 이유였으며, 본인 선에서 정리해야 유한양행을 전문경영인이 이끌어 갈 수 있다고 판단했다고 한다. 하다못해 기업가도 이렇게 하는데 하나님의 교회를 목회하는 목사가 왜 이런가? 혹시 아들 목사가 탁월하다면 교인들도 따랐을지 모르지만 기를 쓰고 반대하는 것을 보면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기업 오너가 자식들에게 경영 세습시키는 것도 문제삼는 이 세상에 아들에게 교회를 물려줄려고 하는 목사들에게 유 박사의 반이라도 닮으라고 말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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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2023-11-13
  • 【단상】 살아있는 자의 소명
    뜬금없이 이른 아침에 “이안류”, “다낭 미케비치 이안류”등을 검색했다. 고 박상은 안양샘병원 원장의 죽음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박 원장은 지난 11월 5일 주일 베트남 다낭 현지 바닷가에서 일행과 물놀이를 하다가 갑작스런 이안류에 의한 불의의 사고로 생명을 잃었다. 이안류(離岸流)는 한두 시간 정도의 짧은 기간에 매우 빠른 속도로 해안에서 바다 쪽으로 흐르는 좁은 표면 해류로 밀려오는 파도와 바람이 해안에 높은 파도를 이루고, 바다로 되돌아가는 물이 소용돌이치는 현상이다. 역조(逆潮), 거꾸로 파도, 립 커런트(영어: rip current 또는 rip)라고 하며 해안에서 바다 방향으로 흐르는 해류로, 역파도, 역물살이라고도 부른다. 폭이 좁고, 물살이 매우 빠르다. 대체적으로 완만한 경사, 넓은 면적을 가진 해변에서 주로 발생하는데, 모래톱이 해안 주변에 많이 만들어져 있으면 이러한 해류가 자주 발생한다. 이 해류는 파도의 특징과 연관이 있다. 파도는 수심이 깊으면 빠르고, 반대로 수심이 낮으면 느려지는 특성이 있다. 깊은 바다에서 빠르게 온 파도는 수심이 얕은 해안가 부근에서는 이 파도가 깨진다. 이 깨짐현상은 이안류 발생의 원인인 역류 현상을 불러 일으킨다. 대한민국 해운대해수욕장에서는 이안류로 인해서 2009년에는 106명, 2008년에는 150명의 구조가 발생했다. 미국인명구조협회는 이안류 때문에 해마다 100여명이 사망한다고 발표했다. 종종 뉴스에서 해수욕장에서 발생하는 이안류로 인한 사고 소식을 접했다. 그런데 이안류는 바다라면 언제 어디에서나 발생할 수 있는 자연 현상이다. 나는 9월 말 아내와 베트남 다낭에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 일정으로 숙소에 구비된 수영장과 그 앞쪽 미케비치 해변에서 놀았다. 이 해변은 백사장에서 대략 50미터 앞까지는 수심이 낮았다. 그래서 많은 외국인들이 그 지점에서 파도를 맞으면서 놀았다. 나는 수영을 못하기에 그들보다 뒤에서 파도를 맞으며 놀았다. 이후 수영장에서 잠시 놀다 혼자 다시 바닷가로 갔는데 그많던 외국인들은 대부분 사라지고 2-3명만이 해변가에 있었다. 다시 바다에 들어가 파도를 맞으며 노는데 이상하게 무섭다는 느낌이 들어 곧 다시 수영장으로 돌아왔던 기억이 있다. 비록 내가 머문 숙소의 바닷가는 아니지만 박 원장은 그 미케비치 해변 어딘가에서 의료선교하러간 일행들과 잠시 물놀이를 하다가 갑자기 생긴 이안류에 희생이 된 것이다. 이안류에 휘말리면 급속하게 바다쪽으로 200-300미터 끌려가게 되고 이때 당황해서 해변가로 수영을 할려고해도 유속으로 인해 나아갈 수 없어 힘이 빠지고 사고로 이어지게 된다고 한다. 나도 파도가 그리 높지 않고 수심이 얕은 그 해변에서 더 멀리 나갔더라면 같은 사고를 당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더군다나 나는 수영을 할줄 모른다. 갑자기 등골이 서늘해진다. 박 원장은 취재 현장에서 한번 본 사이지만 그의 죽음이 계속 떠오르는 것은 내가 갔던 베트남 다낭 미케비치 해변에서 한달 반 후에 사고를 당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박 원장은 65세라 아직 할 일이 많지만 그래도 이미 많은 일을 이루었다. 반면 나는 아직 할 일이 많아 그때 같은 장소에서 그런 사고를 당하지 않고 살아 남았는지 모른다. 살아있는 자에게는 산자로서의 사명과 소명이 있다. 한 사람의 죽음을 떠올리며 내게 주어진 사명의 길을 묵묵히 가야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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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12
  • 신문 창간 2주년, 감사하고 감사합니다!
    오늘은 이 세상에 “빛과소금뉴스”가 만들어진지 2년이 되는 날입니다. 그냥 지나칠 수 없어 감사의 글을 적어 봅니다. 3년전까지는 평범한 목회자였습니다. 만39세에 증경총회장 한석지 목사가 원로로 계신 서울의 중심 용산에 있는 교회에 담임으로 부임했습니다. 그리고 15년 만에 갈등이 생겨 다섯 번째로 나오게 됐습니다. 이후 어쩌다보니 교계 기자의 길로 들어섰습니다. 교계 기자를 하는 학부 때 동기를 졸업 후 그 즈음에 다시 보게 되어 그 친구가 저를 이쪽 길로 인도했습니다. 이후 제 신문사를 만들어 2년간 많은 글을 써왔습니다. 제가 어떤 사람이며 무엇을 지향하는 지는 제가 쓴 기사에서 드러난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분들의 도움과 지지를 통해 여기까지 왔음에 감사드리고 앞으로도 제게 주신 하나님의 새로운 소명을 따라 어둠을 밝히고 긍정적인 것을 드러내는 빛의 역할, 세상을 맛나게 하는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고자 합니다. 많은 분들과 함께 만들어 가는 언론이 되고 싶습니다. 읽을 거리와 볼 거리가 있는 언론이 되고 싶습니다. 모든 분들께 다시한번 감사하고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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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12
  • 한장총 상임회장 선거...합동측을 우롱하는 통합측 모인사의 두번째 음모
    이번 11월 14일에 있을 한국장로교총연합회(이하 한장총) 제41회 정기총회가 상임회장 선거 문제로 시끄럽다. 통상 목사가 하던 상임회장에 장로가 경선으로 나섰기 때문이다. 상임회장은 차기 회장이 되는데 올해 후보로 주다산교회를 담임하는 권순웅 예장 합동측 증경총회장과 영락교회 장로로 예장 통합측 부총회장을 역임한 김순미 장로가 나서 경선중이다. 한장총은 1981년 2월 1일 설립됐으며 그 목적은 “개혁교회의 신앙과 전통을 계승하여 회원 교단간의 친교를 도모하고 공동 관심사를 협의하면서 한국장로교회의 연합과 일치를 위한 공동 사업을 추진하는 기구이다”라고 밝히고 있다. 설립 배경에 대해서는 “분열된 한국장로교회의 일치와 연합을 위해 필요한 뿌리를 확인하는 작업을 통하여 장로교회는 한 형제요 자매라는 인식의 공통 기반을 갖게 되었다. 한국장로교회들은 비록 교단이 갈라져 있으나 서로의 차이점 보다는 공통점이 훨씬 많다는 인식을 공유하게 되었으며, 그 뿌리가 하나라는 사실 확인과 의식이 결속을 가능하게 하였다”고 말한다. 이후 대표회장은 1992년 제10회 총회 때 통합측의 한영제 장로를 제외하고는 모두 목사가 맡았다. 그런데 이번에 31년만에 통합측이 또 다시 장로를 대표회장으로 세우고자 하는 일을 꾸미고 있다. 이것은 관례에 어긋나는 일이며 하필이면 통합측에 의해 또다시 이 일에 재현되고 있어 연합기관을 바라보는 사람들을 씁쓸하게 하고 있다. 참고로 연합기관인 한교총, 한기총, 한교연 모두 대표는 목사이다. 그것도 소문에 의하면 지난번 한국교회총연합(이하 한교총) 대표회장을 합동측 권순웅 목사가 해야하는데 이영훈 목사가 하도록 주도한 인물이 이 일도 주도하고 있다고 한다. 그때 그 일에 대해 강하게 따지지 않고 가만히 있으니까 이번에도 합동교단 증경총회장 권순웅 목사를 “가마니”로 알고 하대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기는 지난번 한교총 대표회장 사태에는 합동측 인사들도 동조했다는 뒷말이 있으니 교단 연합회에서 합동측의 위상은 정말 “합똥”인지도 모른다. 이번에도 만약 통합측이 합동측을 함부로 대한다면 이 일에 대한 책임을 묻고 통합측과는 더 이상의 연합 활동을 하지 않겠다는 중단 선언을 해야한다. “보자보자하니 보자기로 보고, 가만히 있으니 가마니로 본다”는 말이 있다. 지난 108회 총회 선거에서 큰 표차로 낙선한 고영기 총무는 자신이 종로에서 연합활동을 잘 하고 있다고 해서 본 기자는 그렇지 않다는 식의 기사를 쓴적이 있고 이것이 대외업무를 담당하는 고 총무의 책임이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결국 분담금은 많이 내면서도 자기 자리 하나 제대로 챙기지 못하는 것이 합동측 교단의 대외 업무 현실이다. 권순웅 목사와 맞서는 김순미 장로는 재벌가로 총대들에게 상당한 금품을 살포하고 있다는 말이 돌고 있다. 이로인해 경선 결과를 애측하기가 쉽지 않다. 만약 이번에도 권순웅 목사와 합동측이 통합측에 의해 망신을 당한다면 묵과하지 말고 이 문제를 공론화해서 따져야 할 것이다. 그리고 통합측의 잘못을 지적하고 책임을 묻고 연합회 활동 제재를 가해야 하며 그것이 안될시 합동측은 통합측과의 연합활동을 전면 재고하고 중단도 고려해야 할 것이다. 늘 음모를 획책하는 통합측에 경고하며, 늘 어리석게 당하는 합동측의 자성을 촉구한다. 경선 투표를 예의주시할 것이며 좌시하지 않을 것이다.
    • 오피니언
    • 논단
    2023-11-11
  • 【단상】 짧은 인연, 긴 여운
    일주일만에 訃告를 들었다. 안양샘병원 박상은 원장이 지난 11월 5일 베트남 다낭에서 소천했다. 그 전 주일인 10월 29일, 박상은 원장의 큰형되는 박재천 목사의 저서 출간 감사예배를 취재가서 박 원장을 처음 뵈었다. 온화하고 유머있게 순서를 진행하는 것을 보고 좋은 인상을 받았다. 그후 일주일만에 소천 소식을 접한 것이다. 고인은 큰형님의 행사 후 샘병원 팀과 베트남 의료선교 일정 중 불의의 사고를 당했으며, 이후 응급의료팀이 CPR 등을 시도했지만 소생하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자료에 의하면, 박상은 원장은 1958년 생으로, 고려대 의대를 졸업하고 고신대 의대 신장내과 교수, 미국 세인트루이스 의대 생명윤리센터 교환연구원, 미국 미주리주립대 신장내과 교환교수 등을 거쳐 2001년 안양샘병원에 부임했다. 진료부원장, 병원장, 대표원장 등을 거쳐 현재 미션원장에 이르기까지 병원 성장을 이끈 것과 더불어 외국인 근로자 등 소외 이웃을 위한 진료봉사 등 의료적 취약 계층을 돕는 일에도 힘써왔다. 이는 과거 고신대 복음병원 근무 당시 평생을 가난한 환자들을 보살폈던 고 성산 장기려 박사 밑에서 수련을 받으며 영향을 받은 데 따른 것으로, 그는 이후 장 박사의 뜻을 기리는 성산생명윤리연구소 설립에도 참여했다고 한다. 아직 할 일이 많으신데 불의의 사고로 생을 마감했다. 나처럼 우연히 한번 본 사이인데도 이렇게 만감이 교차한데 가족들과 그를 아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이야 어찌 헤아릴 수 있겠는가? 요즘은 취재 가서 동영상을 찍어 기사에 덧붙이는데 이때도 다행히 행사 동영상을 찍어뒀다. 이것이 아마도 온 형제자매들이 함께 한 마지막 시간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날 그 행사를 취재한 기자는 나밖에 없었다. 단톡 등에 광고를 했지만 초청된 나만 왔기 때문이다. 행사를 취재하기 위해 간 기자로서 기사를 작성하고 사진과 동영상을 찍었는데 이것이 그 가족들에게 마지막 순간이라고 생각하니 기자의 일이 참으로 중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앞으로도 어떤 일들을 기록으로 남기고 정리하는 기자의 사명을 잘 감당해야겠다는 다짐을 해본다. 그날 짧은 시간 만났지만 때이른 사별로 인해 긴 여운이 남을 것 같다. 인생의 덧없음과 이것을 극복케 하는 천국의 소망을 생각하며 순간의 만남과 인연을 귀하게 여겨야 할 것이라는 다짐을 해본다. 천국에서 평안하소서! 다음의 글은 박상은 원장과 특별한 관계가 있는 샘병원 원목 김성은 목사가 자신의 페북에 올린 애도의 글들이다. 박상은 미션원장님의 갑작스런 죽음을 애도하며...① 어제 오후 2시30분 베트남 다낭에서 온 급한 전갈. 박상은 미션원장의 부고. 이 무슨 일인가?!! 병원 공식 단기 선교사역팀. 주일 예배 후 오후 예배까지 3시간 정도 시간이 있어서 현지 선교사들과 우리 팀 전체가 바다에 갔다가 원장님만 너울성 파도에 휩쓸린 것으로 연락 받음(바다가 얕고 물결이 잔잔했는데, 원장님만 급하게 깊은데로 빨려들어갔다고, 손쓸 경황이 없었다고...). 2005년 선교사 시절. 환자와 의사로 첫 만남. 그후 건강이 더 안 좋아져서 사역의 변경이 필요 할 때 내가 샘병원에서 치료 받으며 사역할 수 있도록 결정적 역할. 그렇게 만난 시간이 어언 19년. 이번 다낭 단기팀에 나도 함께 하기를 원장님이 원하셨으나 나는 사정상 함께 하지 못하고 단기팀 출발할 때에 잘 다녀오시라고 인사하며 나눈 악수. 그 악수가 마지막 인사가 되었다. 긴급한 샘병원 대책회의를 통해 그 동안 누구보다 선교에 헌신적이셨고 병원의 결의에 따른 공식적 단기 선교사역 중 사고를 당하셨으니 '순교'로, '순교자'로....오늘부터 한 주간 동안 샘병원은 특별 애도의 주간으로. 사모님과 둘째 딸 형제 대표 목사님과 행정부원장님이 06시10분 비행기로 다낭으로 출발. 오늘 12시 30분. 샘누리홀에서 "샘병원공동체, 순교자 박상은미션원장 애도 모임(예배)"을 갖고 다낭 현지와 연락하며, 관계 기관 및 단체와 소통하며 장례식을 진행하기로 함. 어제 2시 30분 비보를 들었을 때 슬픈 마음으로 기도할 때에 이사야 61장 1-6절 말씀을 묵상함. 삼가 조의를 표하며 주님의 위로와 평강을 소망합니다. 박상은 미션원장의 죽음을 애도하며 ② 어제 오후 5시경 베트남 현지에서 입관 및 천국환송(발인) 예배를 드리고 곧바로 화장 시작.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리라. 마지막에 주어진 황금색 작은 관 하나. 슬픔에 잠긴 사모님과 둘째 딸 그리고 소수의 조문객. 그렇게 많은 관계 속에서 열정적으로 일하신 생전의 모습과는 정반대의 참 초라한 모습이지만 그러나 최선을 다해 사신 그 열매는 앞으로 한국과 아프리카와 세계에서 일어나리라 믿습니다. 요한복음 12장 23-25절의 한 알의 밀알에 관한 말씀처럼.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자기 ㅃ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오늘 인민위원회의 사망확인서가 발급되면 유해를 한국으로 ....그 이후 한국에서의 장례식이 진행됩니다. 예상대로 수요일에 도착하면, 곧바로 8일(수)~10일(금)에 안양샘병원 장례식장에서 샘병원장으로 장례 예식이 진행될 예정입니다. 박상은 미션원장을 애도하며 ③ 확정된 장례 일정 지금은 04시 40분. 베트남에서 유해로 돌아오는 원장님과 가족들을 영접하기 위해 병원장님과 G샘병원의 최목사님과 공항으로 가는 길.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 현실 속에 무거운 마음이지만 원장님이 생전에 늘 외치시던 "전생의 비전"-전인치유, 생명사랑, 의료선교- 을 마음에 새겨 본다. 우리가 다 이해 할 수 없는 사건과 아픔과 슬픔을 통해서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창조주를 바라보며...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박상은 장로께서 소천 하셨기에 아래와 같이 부고를 전해 드립니다. 삼가 애도를 표합니다. 고 박상은미션원장 애도 ④ 어제 새벽 유해가 한국에 도착하여 어제 오후 3시부터 장례식이 시작되었다. 어제 저녁 출석하시는 교회 주관으로 임종 후 첫 공식 예배가 드려졌고 오늘 12시30분에 샘병원 직원들이 참석하는 문상예배가 드려진다. 내일 점심 같은 시간에 고인의 형제들로 구성된 '영파선교회'가 주관하는 예배 그리고 토요일 아침 6시30분 발인예배까지 ...한 사람의 죽음 앞에서 사람이, 산 자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을까? 유가족과 함께 있어 주고 함께 울어 주고 때로는 조용히 기다려 주고 다만 하늘의 위로와 평강이 함께 하기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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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09
  • 【칼럼】 소환불응 주홍동 장로....숨는 자가 범인이다(?)
    주홍동 장로가 지난 11월 6일 있었던 총회 임원회의 소환에 불응했다. 범죄 수사관들이 늘 하는 말이 있다. “숨는 자가 범인이다” 그러면 1000만원 게이트의 범인은 주홍동 장로인가? 이날 관계자인 이이복 장로와 이종철 목사는 참석해 자신들의 무죄를 주장했다. 결국 임원회는 2차로 주홍동 장로를 다시 출석시켜 조사하고 이에 응하지 않을 때 국가 사법에 의뢰할 것인지를 결정할 것으로 전해졌다. 1000만원 게이트를 심층 취재한 기독교종합신문 기사에 의하면, 주홍동 장로는 그 돈이 이이복 장로의 돈이라고 했다. 주홍동 장로가 전달한 현금 천만원은 주 장로의 사위가 시무하는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에 있는 'OOO교회(담임 김OO 목사)의 봉투 2개에 나눠서 담겼다고 전해진다. 기자는 이종철 목사를 통해 주 장로가 천만원을 전달하기 위해 늦은 밤 이종철 목사에게 전화했던 녹음을 들었다. 그 녹음에 의하면, 이 돈의 주인이 '이이복 장로'라고 주홍동 장로가 육성으로 확인하고 있었다. 더 나아가 반환하는 확인서의 내용 가운데 『일천만원은 이이복 장로의 돈이며, 이이복 장로에게 반환한다』라고 명확하게 기록되었고, 주 장로가 서명했다. 이 확인서의 서명에 관하여 제108회 총회가 있었던 지난 9월 19일 새로남 교회 그레이스 홀 입구에서 기자가 주 장로에게 "서명을 했다는데 어떻게 된 일이냐?"라고 물었다. 주 장로는 "이종철 목사가 확인서를 작성하라고 요구했지만, 나는 작성하지 않았고, 이 목사가 하고 싶은대로 작성했으며 나는 그냥 서명만 했다. 그래서 그 확인서는 중요하지 않다"라는 취지의 답변을 했다. 이에 기자가 "확인서에 서명하면 그 내용을 동의한 것이 되지 않느냐?"라고 재차 물었지만, "내가 쓴 것이 아니다"는 등의 말로 흐지부지하며 자리를 옮겼다. 위 기사를 보면 주홍동 장로가 확인서에 서명한 내용에 대해 부인하고 있는데 이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서명을 하기 전 내용을 읽어 보지 않았겠는가? 그리고 동의하니까 서명하지 않았겠는가? 도대체 주홍동 장로의 말을 신뢰할 수 없는 지경의 행태이다. 오정호 총회장은 108회 총회를 시작하면서 과거 일로 발목 잡히고, 시간과 재정을 소진하고 싶지 않아 선관위원들이 사과로 이 일을 덮기를 원했다. 그러다 결국 이 문제를 다루기로 했기에 결코 쉽게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 칼을 빼든 이상 끝장을 볼 것이라는 것이 모두의 기대이다. 진작에 사실을 밝히고 용서를 구했다면 쉽게 넘어갈 일이 이제는 돌이킬 수 없을 지경으로 커져버렸다. 주홍동 장로가 진실에 대한 고백을 미룰수록 본인의 책임이 더 커진다는 것을 알아야한다. 총회를 기망한 죄는 결국 사법처리나 영구총대 제명도 불러올 수 있다. 이 사건은 시간이 藥이 아니라 毒이라는 것을 빨리 깨닫고 총회 임원회와 모든 총대, 합동 교단을 농락하지 말고 진실을 밝힐 것을 촉구한다. 사도행전의 아나니아와 삽비라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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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2023-11-09

목회 검색결과

  • 기도와 찬양으로, 감사하며 맡기라
    저는 후암동에서 30년 이상 대성모터스라는 자동차 정비공장을 운영하는 후암교회 이규석 집사입니다. 20여 년 전 제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믿음과 삶의 자세에 변화가 생긴 사연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공장이 도심에 있어 교통이 편리하고 한 장소에서 오랫동안 친절, 신속, 정확, 청결한 서비스를 고객에게 제공하다 보니 단골고객도 많고 주위의 평가도 좋아서 사업이 비교적 잘 되었습니다. 저는 좀 더 넓은 사업장에서 상용차 정비쪽으로도 사업을 확장하고자 원래 운영하던 공장은 공장장에게 맡기고 경기도 이천 지역에 2,000여평의 새로운 공장을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후암동과 경기도 이천을 오고 가며 일을 할 수가 없기에 후암동 공장은 공장장에게 모두 맡기고 업무 보고를 통해 중요한 일만 지시하고 저는 주로 이천 사업장으로 출근을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가족처럼 생각하고 공장을 통째로 맡긴 공장장이 문제를 일으키기 시작하였습니다. 믿었던 공장장은 제게 업무 보고를 제대로 하지 않을 뿐 아니라 술을 마시고 며칠씩 말도 없이 결근을 하거나 심지어는 한창 바쁜 여름 휴가철에 일주일씩 공장을 비운 채 해변가에 놀러가버리는 등 제 마음대로 행동을 하였습니다. 저는 회사 대표로서 그냥 두고 보기에 너무 지나치다 싶어 보다못해 주의를 주었습니다. 그런데 공장장은 잘못을 반성하기는 커녕 이틑날 밤 12시경, 술을 잔뜩 마시고 밤에 내게 전화를 걸어와 ‘지금 공장이 잘 되고 있는 것은 전부 자기 덕분’이며 ‘자기가 없으면 공장은 제대로 운영될 수도 없을 것이다. 따라서 자기에게 공장 지분의 절반의 권한이 있으니 이제부터 공장의 모든 수입을 반반으로 나누자. 그렇지 않으면 본인이 알고 있는 공장의 모든 비밀을 터뜨리겠다’라며 협박을 하였습니다. 가뜩이나 정비공장을 운영하면서 환경이나 소음 등 각종 민원에 시달리기도 하고 새롭게 시작한 공장 일에 정신이 없던 차에 철석같이 믿었던 공장장의 배신과 용서할 수 없는 행동에 저는 무척 당황하기도 했고 심히 화가 났습니다. 공장장 뿐만 아니라 다른 직원들에게 그리고 주의의 모든 사람들에 대해서도 불신감이 쌓이며 극도의 스트레스가 반복되자 제게 갑자기 극심한 두통이 찾아왔습니다. 저는 믿었던 사람들에 대한 배신감에 일에 대한 의욕도 없어지고 만사가 귀찮아져서 출근도 하지 않고 집에서 두문불출하며 며칠씩 두통에 시달리다가 머리가 너무 아파 약국에 들러 약을 처방받았습니다. 하지만 며칠간 약을 복용해도 전혀 차도가 없었고 견디다 못해 약국에 다시 방문하여 좀 더 강력한 진통제를 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제 증상과 그동안의 사정을 다 이야기하자 성경책을 읽고 있던 약사는 제가 원하던 진통제를 처방해주는 대신 자신이 평소 다니고 있는 기도원에 가서 함께 기도를 해보면 어떻겠느냐고 제게 권하였습니다. 약사가 약을 처방해주는 대신 함께 가보자고 권하는 기도원이라면 한 번 가볼까 하는 마음에 저는 무심코 기도원에 동행하게 되었습니다(기도원의 이름은 밝히지 않겠습니다). 약사를 따라 간 기도원에 들어가 개인 기도실 문을 여는 순간 벽에 붙어 있던 말씀이 눈에 확 들어왔습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 온 몸으로 찬양하라. 오늘 일은 감사하고 내일 일은 하나님께 맡기라. 순간, 이 말씀이 내 가슴을 내리치듯이 다가왔습니다. 네가 뭐가 부족해서 욕심을 내어 사업을 확장한다고 네 사업장을 소홀히 하고 직원에게 일을 맡겼느냐? 또한 네가 그토록 믿었던 직원을 원망하고 미워하며 주위의 다른 사람까지도 믿지 못하고 원망을 하는 것이냐? 그리고 뭐가 두려워서 네 사업장을 나가지 않고 네 직원과 사람들을 계속 의심하며 미워하느냐?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저는 그때 그 순간 바로 제 잘못을 깨우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제게 주신 모든 것에 감사할 줄 모르고 오히려 욕심을 내어 내가 스스로 화를 부른 것 같아 그 상황이 몹시 부끄러웠습니다. 더구나 그토록 믿었던 사람을 미워하며 주위의 사람들까지도 원망하고 의심하는 제 자신에게 모든 원인이 있었다고 회개하며 눈물로 기도를 하게 되었습니다. 한참을 그렇게 기도를 드리자 어느 순간, 그렇게 심하던 두통이 바로 나았으며 사람에 대한 원망과 미움도 말끔히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기도원에 다녀온 이후부터 저는 그 때 기도원에서 보았던 그 말씀을 지금까지 마음에 새기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 온 몸으로 찬양하라. 오늘 일은 감사하고 내일 일은 하나님께 맡기라. 주신 것에 감사하지 않고 욕심을 내다 경험한 그때의 사건 이후로 저는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어도 하나님께 감사하며 찬양하는 마음으로 고객의 생명과 안전을 위해 최선의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열심히 일하면서 즐겁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중서울노회 남전도회 연합회 여러 회원님들께 저의 경험을 나눌 수 있게 되어 하나님께 영광과 감사를 드리며 여러 회원님들께도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2022. 8. 28 이규석집사(후암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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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9-18
  • 복음주의와 개혁주의(2)
    II. 개혁주의 복음주의가 이신칭의의 복음을 제대로 전하는 것으로부터 점차 그 범위가 확대되어 절단성을 적용하는 것이 필요했듯이 개혁주의도 처음 사용된 의미에서 후에 범위가 확대되어 개념규정을 다시 해야 할 필요가 생겼다. 1. 개혁파와 개혁신학: 그 역사적 시작 본래 개혁신학은 천주교회를 오직 성경에 근거해서 개혁하자는 종교개혁 사상 중에 처음에는 루터파 사상과 비교하여 좀 더 성경적인 방향의 생각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대개 그 대변자인 쯔빙글리나 칼빈과 그와 생각을 같이 하던 분들의 생각을 지칭하여 개혁파(Reformed)라고 하였다. 그리고 후에는 루터파와 영국 교회(성공회) 사상 일부와 개혁파에서 분리된 알미니안 사상과 비교하여 좀 더 명확하게 이런 방향을 지향해 나간 생각을 개혁파라고 하였다. 이를 우리나라에서는 대개 개혁주의라고 지칭한다. 그러므로 천주교회(the Roman Catholic Church)의 신학과 실천을 개혁하자는 종교개혁(Reformation) 운동 중에서 한편으로는 루터파 교회(Lutheran Church)와 조금 생각을 달리하고, 또 한편으로는 세례파와 견해를 달리하는, 그러다가 자신들의 입장도 개혁파로 인정해 달라는 (그리고 함의상 자신들의 주장으로 개혁파 사상으로 삼자는) 항론파(the Remonstrants, 이를 후에 일반적으로 알미니우스주의라고 언급하게 된다)에 반하여 나름대로 성경에 충실한 사상과 그런 교회를 지향해 가는 것을 개혁파라고 하며, 그런 사상을 가지는 교회를 개혁파 교회라고 한다. 그러므로 프랑스 개혁파 교회들과 그들이 흩어진 유그노의 전통 속에서 나타난 사상, 그리고 스위스의 취리히와 제네바에서 시작되었고 그런 전통을 개혁파라고 한다. 개혁파의 신학이 개혁신학(Reformed theology)이다. 개혁신학을 가진 교회들을 개혁파 교회라고 하고, 그들의 움직임을 개혁파 운동 또는 (칼빈은 이런 용어가 나타나는 것을 싫어했을) 칼빈주의(Calvinism) 운동이라고도 표 현한다. 네덜란드에서는 이를 지향하는 교회를 개혁(파) 교회라고 하였고, 스코틀란드에서는 스코틀란드 교회(the Church of Scotland)라는 장로교회가 형성되었다. 그들이 미국으로 이민 갔을 때 그들의 후예들로 구성된 (Reformed Church in America나 Christian Reformed Church 같은) 개혁교회와 (미국 장로교회와 같은) 장로교회가 따로 존재하게 되었지만, 이들의 신학과 사상은 근본적으로 개혁신학이기에, 이들 모두를 개혁파라고 한다. 우리 나라에 처음 온 선교사의 한 분인 언드우드(Underwood)는 개혁파 교회(RCA)의 신학교인 뉴 브룬스윅(New Brunswick) 신학교 출신이나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서 장로교의 선교 지원을 받아 장로교 선교사로 와서 우리나라에 장로교회가 세워졌다. 그러나 장로교회는 개혁신학을 가진 교회이므로 장로교회와 개혁교회의 구분은 원칙상 없다.1) 2. 개혁 교회 안에 나타난 잘못된 다양성 그런데 세월이 지나가면서 서구의 교회와 그 신학의 변화가 일어났다. 좀 더 성경에 충실해 가려는 좋은 의미의 변화는 모든 사람들이 환영하는 일이다. 그런데 그렇지 않은 이상한 변화들이 온 것이다. 예를 들어서, 프란시스 툴레틴(François Turrettini, 1623–1687) 이후 그의 아들 쟌-알퐁스 툴레틴(Jean- Alphonse Turrettini, 1671–1737)을 비롯한 제네바 교회의 변화와 같은 변화, 처음 성경에 충실한 모습에서 점점 변화해 간 화란 개혁파 교회의 모습, 비슷하게 성경을 온전히 믿는 것을 벗어난 스코틀란드 교회와 같은 것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개혁파 교회 안에 성경을 온전히 믿는 사람들과 성경을 비평적으로 보자는 사람들이 같이 있게 된 것이다. 그래서 교단적으로는 개혁파 교회 안에 있지만 자유주의적 방향을 취해 나가 자유주의의 아버지라 불리는 슐라이어마허(Schleiermacher) 같은 분도 있게 되었고, 그것을 너무 지나치다고 하면서 비판하지만 성경을 온전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보기 보다는 성령께서 역사하시면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고 하면서 하나님 말씀의 신학이라는 역동적 사상을 제창하는 신정통주의 입장을 주장하는 칼 바르트(Karl Barth)와 그에게 찬동하는 분들도 있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독일에서 아주 소수파인 개혁파 교회 안에 정통주의적 개혁신학을 가진 분과 슐라이어마허적 자유주의 사상을 가진 분들과 본래 스위스 사람인 바르트의 영향을 받는 분들이 있게 되었다. 더 소수인 프랑스 개혁 교회에서도 역시 이 세 종류의 사람들이 있게 되었으나 정통 개혁파 사람들은 너무 소수가 되어, 프랑스에서는 “개혁파”하면 정통주의 개혁파가 아닌 사람들을 지칭하는 말로 여겨질 정도가 되었다.2) 마찬가지로 개혁파적인 종교개혁을 이룬 스위스 교회는 개혁파 교회인데, 그 안에 정통파 사람들과 자유주의적 생각을 가진 분들과 바르트와 같은 신정통주의적 입장을 가진 분들이 같이 있게 되었다. 상황은 미국에서도 마찬가지이고, 교단으로 따지면 어디나 그런 결과가 있게 되었다. 그러므로 전 세계 어디를 가든지 개혁파 교회들인 개혁교회와 장로교회 안에 잘못된 의미의 다양한 신학이 있게 되는 매우 안타까운 상황이 나타나게 되었다. 3. 우리가 지향하는 정통파 개혁주의 개혁파 정통주의(Reformed Orthodoxy)라는 말은 일반적으로 루터파 입장을 지지한 분들이 17세기에 루터파 정통주의(Lutheran Orthodoxy)를 확립한 것과 비슷하게, 개혁파 입장을 드러낸 분들이 개혁파 신학자들의 주장에 동의하면서 학문적으로 철저화한 17세기의 개혁파 정통주의를 지칭하는 역사적 용어로 사용된다. 그러므로 천주교회 신학이나 동방정교회 신학과 다르고, 루터파 정통주의와는 다른 신학으로 개혁파 정통주의를 언급한다. 이런 역사적 개혁파 정통신학과 연관하면서 17세기에 있는 그 모습으로만이 아니라, 16세기 개혁파 입장에 충실한 입장을 17세기에 개혁파 정통주의 신학자들이 잘 체계화한 것과 같이 18세기에도 일부가 데까르트의 철학적 입장을 받아들이면서 그런 비판적 태도로 카르테시안(Cartesian) 신학을 추구하여 결국에는 합리주의를 추구하여 19세기의 본격적인 자유주의로 나아가는 상황 속에서도 개혁파 정통주의 입장에 충실한 신학을 유지하며 발전시킨 분들이 있었다. 19세기에 성경 비판적 입장을 가지고 신학을 하는 자유주의를 비판하면서 개혁파 정통주의를 유지하려던 사람들이 있었다. 또한 20세기에도 여전히 그런 입장을 유지한 분들이 있고, 21세기에도 여전히 개혁파 정통신학 입장에서 신학을 하는 분들이 있다. 예전과 같이 대다수가 이런 입장을 취하지 않고 점차 소수가 되어간다는 문제가 있고, 입장이 다른 분들과 대화하면서 일부 철저하지 못하는 입장을 드러내는 분들이 증가하는 모습을 보이지만, 그래도 개혁파 정통주의에 철저히 서서 신학하시는 분들이 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있는 개혁파 정통주의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간단히 정리한다면 다음 같이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3) 4. 개혁파 정통주의의 기본적 주장4) 내용적으로는 개혁파 정통주의는 철저한 “성경주의”(biblicism)를 뜻한다. 우리들이 내세우는 것으로도 그러하고, 다른 신학적 입장을 지닌 분들이 개혁파 정통주의를 그렇게 부르면서 조롱했던 것으로 보아서도 우리들은 성경주의를 지향한다. 단지 우리가 어떤 이들이 우리를 조롱하는 바와 같이 성경을 우상 숭배하듯 하는 성경숭배주의자들이거나 성경을 “종이 교황”으로 만드는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말하는 개혁주의는 신학에서나 교회에서나 일상생활에서도 성경에서 자증하시는 하나님의 가르침을 따르기 원하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적 신학은 ‘바른 신학’이라고 하였고, 성경이 말하는 교회를 ‘바른 교회’라고 하였으며, 성경의 가르침에 따른 생활을 ‘바른 생활’이라고 설명하면서 표현하기도 했다.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성경의 사상에 충실한 신학을 하여 성경에 대해서든지, 하나님에 대해서든지, 그 어떤 주제에 대해서든지 성경이 말하는 바에 철저히 따라 가되, 그 일을 우리의 머리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하는 이성”과 함께 삼위일체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거룩한) 감정”과 “성령님을 따르는 의지”로 하여 전인격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의 인도함을 받아 가려고 하는 것이 개혁주의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전인격적인 작업이고, 전생애적 작업이기에 이런 개혁신학적 작업은 항상 지속되어야 하며, 우리 시대의 교회가 이전 시대의 성경에 신실한 교회들의 모범을 따라서 계속해 그런 방향으로 나아가는 전교회적인 작업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이 일은 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고 성경을 따라서 삼위일체 하나님을 바르게 섬겨가는 교회 공동체가 같이 감당하는 작업이다. 이와 같이 신학은 교회적인 일이다. 그러므로 신학은 한편으로는 모든 지식을 동원해서 하는 매우 이론적인 작업이면서 동시에 우리의 존재 전체가 동원되어 하는 매우 실천적 작업이다. 따라서 17세기 개혁파 정통주의자들은 이 문제를 심각하게 논의한 후에 신학은 매우 이론적이며 동시에 매우 실천적이라는 결론을 내린 바 있다. (1)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강조 먼저 성경에 온전히 따르는 개혁주의의 신학적 특성에 대한 이야기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그렇게도 철저히 따르기 원하는 성경에서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주권(sovereignty of God)에 대한 가르침 받게 된다. 그래서 성경을 철저히 따르는 우리들은 하나님의 전포괄적인 주권을 강조하게 된다. 어떤 분들은 개혁파 사상의 유일한 특성으로 하나님의 전포괄적 주권에 대한 인정을 언급할 정도로 이것은 개혁주의의 가장 큰 특징들 중의 하나이다. 하나님의 주권은 절대적이어서 하나님을 대립하여 서는 것은 그 어떤 것이든지 인정되지 않는다고 선언 하는 것이 개혁주의이다. 코넬리우스 반틸(Cornelius Van Til)이 잘 표현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주권이란 이 세상에 하나님 자신 이외에 어떠한 다른 궁극적 권세도 없으며, 이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거룩하신 계획이 그것을 대적하는 모든 반대를 압도한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이다. (2) 죄에 대한 철저히 성경적인 이해 성경에 철저한 사상에서는 어디서나 “죄”가 심각한 문제로 드러난다. 죄는 하나님의 주권을 침범하면서 인간이 자신의 주권을 주장하며, 하나님의 성품을 공격하고, 하나님께서 내신 법 을 어기고 자신을 주장해 가는 것으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여러 신학 중에서 개혁신학이 죄의 심각성을 가장 강조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인류 최초의 죄를 자신을 주장하여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하나님을 대항하는 것으로 인정하는 일의 철저성에서도 그러한다. 그래서 개혁신학은 다른 건전한 신학과 함께 죄를 그저 “선의 결여”(privatio boni) 정도로 표현하는 어거스틴의 표현 방식이 너무 소극적인 것이라고 비판하면서, 죄는 하나님에 대한 적극적인 반항적 태도요 행위라는 것을 잘 지적한다. 죄는 하나님의 주권을 상대화시켜 보려는 모든 인간의 시도로서 그 어떤 형태의 죄도 다 무시무시한 것이다. 그래서 우리들은 죄를 (천주교회에서와 같이) 대죄(cardinal sins)와 소죄(가벼운 죄, venial sins)를 나누지 않는다. 성경의 가르침을 철저히 따라 생각해 보면 죄는 그 어떤 것이든지 하나님의 주권을 침범해 가는 무시무시한 일이기에 죄인은 누구나 형벌 받아 마땅한 존재다. 인류 최초의 “처음 죄”(the first sin) 때문에 있게 된 "본래적인 죄책"(original guilt) 과 "본래적인 부패성"(original corruption)을 원죄(original sin)라고 부르면서 그것의 심각성을 가장 깊이 의식하는 사상도 철저히 성경을 따르려고 하는 개혁신학적 사상이었다. 물론 원죄는 천주교회도 말하고 루터파도 말하고 알미니우스주의자들도 다 말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심각한 지를 인식하는 정도는 다 다르다. 펠라기우스를 따르는 사람들은 원죄를 부인하여 아담의 죄된 모범이 후대에 죄를 쉽게 지을 수 있는 여지를 만들었지만 그 상태에서도 사람들은 선조들의 잘못된 모범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나님께 순종을 할 수 있었다고 생각하였다. 당시의 거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그것이 잘못된 가르침이라고 하면서 펠라기우스 주의를 이단으로 정죄하였다. 그러나 펠라기우스주의를 반대하는 많은 사람들이 인간의 죄의 부패성을 철저히 인정하지 않은 일이 많았고, 그것이 후대의 잘못된 신학사(新學史)를 만든 것이다.5) 개혁주의는 하나님의 주권을 조금이라도 손상시키는 사상들을 일일이 비판하는, 하나님 주권을 대변하는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 개혁신학의 철저히 성경적인 구원론을 형성한다. (3) 철저히 성경적인 구원론 우리들은 성경이 가르치는 구원에 대한 가르침(우리 신학의 일차적, 근원적, 최종적 근거)과 구원 받은 우리의 경험(우리 신학의 간접적, 보충적 근거)에 비추어 볼 때 누구나가 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 혼자의 힘으로만 이루어진다는 것을 정확히 인식하고 고백 해야 한다. 즉, 성경적으로 생각하고 말하면, “구원 문제에서의 하나님 독력주의(獨力主義, monergism)”를 말해야만 한다. 그런데 그렇지 않은 많은 생각들이 우리 주변에 있는 것을 보게 된다. 그것은 (오래된 신인협력주의[synergism] 사상을 지닌 천주교회에서처럼) 성경만을 철저하게 의존하지 않으려고 하거나, 그것이 아니라면 우리에게 일어난 구원에 대해서 우리식으로 생각하면서 이를 좀 더 “합리주의적”으로 생각하려고 하다가 함정에 빠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개혁신앙을 고백하는 교회에 속한 사람들도 주의하지 않으면 그런 식으로 생각해서 잘못되어 갈 수 있기에 우리들은 항상 주의해야 한다. 개혁파 교회의 역사에서 가장 반어적(反語的)인 상황의 하나는 개혁파 사람들 가운데서 알미니우스주의(Arminianism)가 나왔다는 것이다. 화란 개혁파 교회 안에서 교회의 공식적 가르침에 동의하지 않는 일단의 사람들이 나타났고, 그들의 생각과 사상에 대해서 검토해 보도록 요청 받은 제네바 유학 출신의 야곱 알미니우스(Jacobus Arminius, 1560. 10. 10– 1609. 10. 19)가 내면적으로 그들에게 동의하면서 공식화 되게 된 “항론파”(Remonstrants)가 그의 이름으로, 즉 “알미니우스주의”(Arminianism)로 역사에 남게 된 것이다. 이것에서 보여 지듯이 이런 사상이 정형화 된 것에는 그의 내적인 공헌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형식적으로 개혁파 교회에 속해 있다는 것으로 우리가 참으로 성경적으로 생각하고 사는 것을 보증하지 않음을 잘 보여주는 역사적인 예가 된다.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구원을 잘 배운 후에 생각하기를 어떤 사람은 주께서 선택하셔서 구원하시고, 어떤 사람은 선택하지 않으셔서 구원하지 않았다고 하면 마치 하나님이 공평하지 않은 분 같은 인상을 받으실 수 있으니 하나님을 위해서 하나님을 변호하기 위해 영원 전에 하나님께서 보실 때에 어떤 사람들은 장차 하나님을 믿을 것이니 그 믿음을 미리 보고서, 더 나아가서 그들의 선행을 미리 보고서 선택하시고, 어떤 이들은 그것이 없으니 하나님께서 선택하지 않으셨다는 소위 ‘조건적 선택’(conditional election)을 생각하고 말하기 시작한 것이 알미니우스적 사상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 더 강화시킨 것이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구속[소위 보편 구속, universal atonement]을 이루셔야 하지 않느냐는 생각이었고, 성경에 나타나는 ”모든“이라는 말을 문자적으로 읽다보니 그야말로 그리스도는 문자적으로 모든 사람을 위해 피를 흘리셨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이것을 선포하는 것이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라고 했고, 이런 복음이 선포 될 때에 각기 사람들이 이를 받아들일 수도 있고 안 받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나타난 것이다. 이런 사상에서는 인간은 타락하기는 했어도 전적으로 타락하지는 않아서 복음이 들려 오면 스스로 복음을 선택하고 믿을 수 있을 정도로 타락했다고 생각하기에 이른 것이다. 따라서 복음 선포와 함께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도 그 은혜를 인간이 받을 수도 있고 저항할 수 도 있는 은혜(resistable grace)라고 여긴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을 위해서 보편적인 복음 선포를 위해서 생각하고 말한다고 하면서도 과연 이런 생각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깊이 있게 생각하지 않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피를 흘려주셨어도[보편 구속, universal atonement] 궁극적으로 구원받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보편구원(universal salvation)은 아님] 는 것을 잘 의식하고 말하면서도, 그렇게 말할 때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피가 유효하지 않을 수 있다고 말하게 된다는 것을 잘 의식하지 않은 것이고, 혹시 그것을 의식한다고 해도 그렇게 말해야만 인간의 선택의 책임을 물을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의 효과를 구원의 근거로만 만들고, 유효한 구원으로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개혁파 교회는 그렇게 말할 수 없으니 그리스도께서 피 흘리신 것은 실제적인 구원을 이룬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피흘려 주신 사람들은 반드시 구원받는다. 그리고 우리가 지금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구속을 믿는 것은 우리의 능력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이루신 중생에 의해서 변화되었기에 주님을 믿는 것이다. 죄와 허물로 죽은 사람들은(엡 2:1, 렘 17:5) 스스로 자신의 능력으로 주님을 믿을 수 없는 것이다. 십자가의 유효한 구속이 중생으로 이루어 여기서 나로 믿게 하는 것이다. 십자가 구속에서 나온 이 믿음은 영원 전에(엡 1:3-5) 하나님께서 조건 없이 하신 선택을(로마서 9:11-13 참조) 드러내 준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성경을 따라서 우리의 구원이 철저히 그리스도의 구속으로만 이루어 진 것이라고 믿기에 “오직 그리스도”(Solus Christus)를 강조한다. 그러므로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만 이루어지기에 우리는 “오직 은혜”(Sola Gratia)를 선언한다. 이를 철저히 믿는 믿음으로만 구원받고, 그런 우리들은 오직 믿음으로 산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오직 믿음”(Sola Fide)을 강조한다. 이신칭의를 참으로 바르게 믿어야만 이런 구호들이 말하는 바를 제대로 믿는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우리는 “오직 성경”(Sola Scriptura)에서 배운 것 이기에 “오직 성경”에서 배우고, “오직 성경” 대로 하나님을 경배하며 산다. (4) 개혁주의적 삶에 대한 강조 구원에 대해서 철저히 성경적인 이해를 가진 개혁신학은 구원받은 성도로 사는 삶에 대해서도 철저히 성경의 가르침에 충실한 입장을 제시하고 그것을 강조해 왔다. 여기서 개혁주의가 (초기 근본주의와는 다른) 좁은 의미의 근본주의와 어떻게 다른 지가 확연히 드러나게 된다. 좁은 의미의 근본주의는 성경을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그것을 철저히 믿으려고 하는 점에서는 개혁주의와 같지만, (1) 신앙을 강조하면서 학문에 대한 관심이 적어 반지성주의적(反知性主義的) 형태로 드러나며, (2) 사회와 문화에 대한 관심이 적고 오직 교회 공동체에 대해서만 집중하며, 따라서 (3) 전도 이외에는 이 세상에 대해서 상당히 무관심한 것 같은 인상을 주는 입장이다. 이런 좁은 의미의 근본주의는 성경을 철저히 믿으려고 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개혁파와 의견을 같이 하지만, 앞서 이야기한 3가지 점을 중심으로 상당한 차이를 드러내게 된다. 그래서 성경을 열심히 믿되 안타까운 모습으로 나아가는 근본주의를 성경적으로 수정할 수 있는 바른 대안이 역시 “개혁파 사상과 삶”(이것을 흔히 Calvinism이라고 한다)이 라고 할 수 있다.6) 이것은 과거의 개혁주의가 성경에 충실해서 이점에 있어서 좋은 입장을 잘 견지해 왔다는 것이므로, 우리나라에서 개혁주의를 표방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우리가 과연 개혁파인지를 판가름하게 할 수 있는 중요한 시금석이다. 기본적으로, 구원받은 성도는 이 세상에서의 모든 사회적 문화적 활동에서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를 위해 열심히 살게 된다는 것을 개혁신학은 성경에 근거해서 강조해 왔고 또 늘 그렇게 해야만 한다. 따라서 구원받아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를 위해 이 세상 안에서 사회적 문화적 활동에 힘써 나가는가, 아니면 좁은 의미의 종교적이고 소위 교회적인 일에 집중하므로 이 세상에서의 일에 대해서는 소극적이게 되는가에 따라서 우리가 진정 개혁파적인지, 아닌지가 드러나게 된다. 개혁파 성도는 그가 하는 일상의 모든 일들이 다 하나님 나라의 일이라고 믿으며 참으로 하나님 나라를 드러내기 위해 활동한다. 그 일상의 일의 상당 부분이 직장에서 하는 활동이고, 이 세상 속에서 하는 일이 된다. 그러므로 개혁파적인 이해에 의하면, 이 세상은 우리의 사역의 무대이다. 물론 이 세상은 하나님에게 대해 관심을 가지지 않고, 때로는 상당히 적대적이지만 바로 그 세상에서 그 세상의 사람들을 잘 인도하여 하나님 나라에로 끌어 들이거나, 적어도 그리스도인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가 어떤 것인지는 보도록 하는 것이 구원받은 성도의 삶의 목표이기 때문에 개혁파적인 성도는 이 세상의 삶의 영역에서 매우 적극적인 노력을 하게 된다. 대개 이 세상에서 적극적으로 사는 이 세상 사람들은 (1) 자기 자신들의 유익을 위해서 그리하거나, 아니면 (2) 이 세상에서 귀한 것이라고 여기는 세상적 가치를 위해 열심히 하는 것이지만, 구원받은 개혁파 성도들은 이 두 가지에 대해서 전혀 관심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에서 오직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만을 위해서 열심히 적극적으로 사는 것이다. 그러므로 개혁파 성도는 먼저, 우리들이 과연 자신들의 유익에 대해서, 또한 이 세상의 가치에 대해서 철저하게 관심이 없는지를 점검해야 한다. 우리는 이 세상에 대해서는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어떤 활동을 열심히 하는 것이 자신의 유익을 위하거나 세상적 가치를 추구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개혁파적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전혀 기독교적이지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개혁파 그리스도인들은, 칼빈 때로부터, 철저한 자기 부인(self-denial)을 늘 강조해 왔다. 이것이 없이는 우리의 모든 활동이 개혁파적이지도 않고 기독교적이지도 않은 것이다. 이런 철저한 자기 부인을 토대로 하여 행하는 이 세상의 사회적 문화적 활동에 대한 적극적 관여와 활동은 오로지 하나님 나라를 잘 드러내려는 목적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뜻에 의하면 이 세상이 마땅히 어떻게 되어야 한다는 인식이 성장하면서 매우 자연스럽게 이 세상에서 우리가 감당하는 일들을 좀 더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게 하려고 하게 된다. 일단은 자신의 직업에서 그렇게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려는 노력을 하게 된다. 그래서 개혁파에서는 루터와 함께 우리의 직업을 “소명”(vocatio)으로 의식하면서 하나님 께서 나를 불러서 시키신 일을 가장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게 성령님의 의도대로 하여 가려고 애쓴다. 여기에 개혁파의 진정한 모습이 있다. (5) 폭 넓은 문화 활동과 문화 변혁 활동에 대한 강조 지난 절에서 우리들은 진정한 개혁파 성도는 삶의 영역 전반에서 하나님께서 철저히 순종하려 고 하기에 직업과 관련된 일을 할 때도 그 활동을 하나님께서 부르신 영역에서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 나라를 드러내는 활동으로 해야 한다는 것은 논의했다. 우리 삶의 가장 많은 시간이 직업 활동에 드려지기에 직업에서 하나님 나라를 드러내지 않고, 직업을 통해 하나님을 섬겨 가지 않는 사람은 결국 삶의 대부분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과는 무관한 삶을 사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그런 삶은 성경이 말하는 진정한 하나님 백성의 삶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직업의 영역에서만 하나님을 섬겨 가는 것은 아니다. 우리들은 직업 활동 이외의 영역에서도 하나님을 섬겨가야 한다. 그것의 상당히 중요한 부분이 직업 영역 밖에서의 문화 활동이다. 이것은 흔히 말하는 취미나 특기 등에 해당하는 활동이다. 또한 여가를 어떻게 사용할 것 인가와 관련된 문제이기도 한다. 이 영역은 이 세상도 오늘날 많은 분들이 점점 더 강조하여 가는 영역이다. 이 세상 사람들은 그저 자신이 좋아서, 또는 건강을 위해서, 또는 인간관계를 위해서 이런 활동을 하여 간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 세상 사람들처럼 이런 목적만을 위해서 이런 활동을 해서는 안 된다. 물론 우리들도 여가 시간에 자신이 좋아하는 활동을, 건강을 위해서, 또 사람들과의 사귐을 위해서 할 수 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우리는 이런 활동도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를 위해 해야 하는 것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이런 여가 활동도 우리들은 이 세상의 문화를 변혁시키기 위한 활동의 한 부분으로 해야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 백성들의 문화 변혁 사역은 두 가지 방식으로 진행된다. 하나는 우리가 전문 분야로 하는 직업 영역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고, 또 하나는 직업 이외의 관심 분야의 활동을 통해 이루어진다. 물론 문화 변혁은 주로 전문가들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이 세상에 전문가들만 있고 그들이 생산하는 문화 활동에 동참하는 사람들이 전혀 없다면 실제적인 문화 활동의 유지나 변혁이 잘 이루어 질 수 없다. 그러므로 문화 영역 전반에 대한 우리들의 비전문가적 참여도 전문가들의 활동만큼 중요한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 백성들은 직업 활동 이외의 시간인 여가 시간에 즐기는 활동도 그저 단순히 자신의 유익이나 건강 증진이나 스트레스 해소 등의 목적만을 가지고 해서는 안 된다. 궁극적으로는 이 세상에 과연 어떤 문화가 주도적으로 나타나야 하는 지를 생각하면서 교양인으로 문화생활에 폭 넓게 참여해야 한다. 그러나 한 사람이 모든 문화 영역에 모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는 없으니 그 중의 한 영역을 택하여 지속적으로 참여하다 보면 그 일에 대해 상당히 오랫동안 관심을 가지고 참여하는 아마튜어로서의 연륜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렇게 상당한 시간이 지닌 후에는 이런 분들도 웬만한 전문가의 식견에 가깝게 다가가게 될 것이다. 그런 분들이 상당수 모여서 전문가들의 활동을 누리고 감상하고 비평도 하는 집단이 되어 갈 때 이는 아주 강력한 문화 변혁 그룹이 될 수 있다. 이런 식으로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적이고 하나님 나라적 관점에서 문화에 참여하여 나간다면 이 세상의 문화가 좀더 바른 방향으로 변해 가게 될 것이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상당히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문화 영역에 대해 별 관심을 가지지 않고 살거나, 문화 영역에 대해서 불신자들의 향유와 비슷한 태도를 가지고 문화를 향유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믿지 않는 분들이 여가 시간을 어떻게 보내기를 원하는가 하는 것과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분들이 여가 시간을 어떻게 보내려고 하는가를 비교해 보면 별 차이가 없는 경우들이 많이 있다. 영화를 선택하여 본다고 할 때 불신자의 영화 선택과 신자의 영화 선택에 차이가 별로 없는 것을 발견하곤 한다. 이것은 우리들이 여가를 보내는 영역에서 참으로 성경적 그리스도인답게 생각하며 살아가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주는 대표적인 예가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가를 어떻게 보내야 하는가에 대해서도 하나님 백성답게 생각하며 선택해야 한다. 그것이 진정한 개혁파 성도들답게 사는 중요한 방식이다. 여가는 전혀 허용하지 않는 일중독자(workholic)로 사는 것이나, 여가만을 위해 사는 사람이 잘못된 것일 뿐만 아니라, 직업 활동에서와는 달리 순전히 자아에 몰입하기 위해 여가 활동에 치중하는 것도 기독교적이거나 성경적인 것이 아니다. 부디 우리들 모두가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을 위해 여가도 즐기되, 그 일이 이 세상의 문화를 좀 더 바람직한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하는 일이 되도록 해야 한다.7) 그것이 진정 개혁파 성도다운 모습이다. (6) 성경적 교회에 대한 강조 개혁주의는 항상 이 땅 가운데 성경적 교회를 드러내는 일을 강조해 왔다. 그리스도인은 성경 적 교회를 가시적인 형태로 드러내는 일과 관련하여 다음 몇 가지 특성을 지닌다고 할 수 있 다. 첫째는 그 교회의 모든 것이 성경적이려고 하려는 일에 큰 관심을 지닌다. 교회의 예배 나목회나 행정이나 교육이나 교회와 관련된 모든 일이 성경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둘째는, 따라서 그 성경의 가르침에 근거해서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우셨고, 지금도 통치하시니 하나님이 주관하여 가신다는 것을 확실히 믿는다[교회와 관련된 하나님의 주권과 주도성을 인정 함]. 셋째는, 그 하나님을 믿으니, 열심을 품고 성경이 말하는 교회를 이 땅에 드러내기 위해 열심히 한다는 것이다[열심]. 이 세 가지는 성경에 따른 개혁파적인 교회가 이 땅에 강력하게 나타날 때마다 그 성도들이 나타낸 특성들이다. 따라서 우리들도 교회와 관련해서도 (1) 성경적이려고 해야 하고, (2)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해야 하며, 따라서 (3) 누구보다 열정적이어야 한다. 이 세 가지 가운데 둘째와 세 번째 특성을 먼저 다루고자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과 주도권을 인정하기에 소극적으로, 수동적으로 있는 사람들이 아니다. 하나님의 온전한 주권을 믿는 사람들은 성경의 가르침에 충실하게 하나님을 가장 잘 믿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게 하나님을 가장 잘 믿는 사람이 어떻게 가장 열정적으로 하나님을 믿지 않을 수 있는가? 하나님에 대해서 가장 바른 견해를 가진 사람은 하나님에 대해서 가장 큰 열정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진정한 칼빈주의자들은, 예전에 어떤 교수님이 잘 표현한대로, 열정 칼빈주의자들일 수밖에 없다. 우리가 하나님의 온전한 주권을 믿지 않는다면 우리들은 개혁파 신학을 따르는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하나님과 하나님의 교회 일에 대한 열정이 없다면 그것도 개혁신학에 충실한 것이 아니다. 교회를 주께서 세우시고, 지금도 통치하고 계심을 믿는다면 우리는 열심히 교회를 섬길 수밖에 없다. 그런데 어떻게 하는 것이 진정 열심히 하는 것인지를 규정하는 것이 바로 ‘성경적’이라는 말의 뜻이다. 우리의 교회에 대한 이해도 ‘성경적’이어야 하고, 우리의 교회 섬김도 ‘성경적’이어야 한다. 그 일에 열심을 내야 한다. 진정한 개혁주의자들은 항상 교회 일에 열심인 열정적인 사람들이었다. 이런 점에서 우리들은 참으로 개혁신학의 후예들이다. 천주교회의 잘못된 교회 이해와 교회 섬김 이해를 성경적으로 개혁한 분들이 바로 개혁자들이었으니, 우리도 그 분들의 열심을 가지고 성경이 말하는 교회를 성경적으로 세워 가는 일에 열심을 내어야 한다. 일단 성경이 말하는 대로 “구속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교회”라는 성경적 교회관을 분명히 하는 일로부터 시작한다. 그 성도들이 바로 “그리스도의 몸”이고, “성전”이고, “위에 있는 예루살렘”이고, “진리의 기둥과 터”라는 이해를 분명히 하여8) 다른 잘못된 교회 이해를 극복해야 한 다. 그리고 교회의 예배가 성경적이 되게끔 하며, 성령님 안에서 그리스도의 공로에 근거해서 삼위일체 하나님께 절하는 것이 되게끔 하는 데 모든 힘을 다 기울이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하루아침에 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예배 형식만 고친다고 되는 것이나 사용하는 용어를 조금 바꾼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의식(意識)이 전반적으로 고쳐지지 않으면 안 된다. 진정 삼위일체 하나님께 그 엄위에 부합한 경배를 한다는 의식이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진정 중생한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온전한 의를 가지고서만 엄위하신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다는 의식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하나님께서 내신 예배의 원칙을 잘 배워서, 진정 하나님께 적절한 성경적이며, 영적 예배를 하는 일에 힘쓰게 된다.9) 우리 교회들이 이런 예배를 드리는 참된 개혁파적인 교회이기를 원한다. III. 나가면서: 복음주의의 개혁주의의 바른 관계성 따라서 우리가 말한바 정통파 개혁주의는 ‘복음주의적 개혁주의’라는 것이 분명해졌을 것이다. 이는 슐라이어마허와 같은 자유주의적 개혁파나 바르트와 같은 신정통주의적 개혁파가 아닌, 참으로 정통주의적 개혁파, 복음주의적 개혁파가 우리가 지향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복음주의에는 다양한 신학과 운동들이 다 포함된다. 우리가 배제한 바 있는 비복음주의적 복음주의를 제외하고도, 다양한 생각들이 복음주의 안에 있게 된다. 예를 들어서, 웨슬리를 그의 의도대로 철저히 따르면서 성경을 정확무오한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그가 그 말씀을 듣고 회심한 루터의 갈라디아서 강의에 잘 표현된 이신칭의의 복음을 참으로 믿고, 그런 믿음으로 온 세상을 변화시키기 원하시는 분들은 복음주의자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처럼 웨슬리적 알미니안도 복음주의 안의 한 부분이다. 온 세상에 있어서 20세기에 폭발적인 성장을 이룬 다양한 오순절 교회도 복음주의의 한 부분이다. 또한 미국의 바이블 벨트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에 속하고 있는 세대주의도 복음주의의 한 부분이다. 그러므로 다시 말하지만 복음주의는 성경을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참으로 믿고 실천하며 사는 다양한 그리스도인들 전체를 일컫는 말이다. 현상으로서의 복음주의를 우리는 잘 관찰해야 한다. 또한 1930-40년대에 복음주의가 미국에서 그 모습을 드러낼 때와는 달리 1970년대 이 후로 변화된 복음주의도 일단 이런 복음주의 현상 속에 있다. 코든 콘웰신학교의 데이비드 웰 스 교수께서 잘 분석한 바와 같이 근자의 복음주의는 아주 무의식적으로 세속적 복음주의, 따라서 재구성된 복음주의, 무의식적으로 현대성(modernity)과 후-현대성(post-modernity)으로 기울어진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철두철미 실용주의로 옷 입은 복음주의”로 나타나는 것이다. 이것을 근자의 복음주의의 아이러니라고 할 수 있다. 의식적으로는 세속화와 현대성에 비판해 온 복음주의가 무의식적으로 현대의 문화에 완전히 잠식당한 모습은 그야 말로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웰스가 잘 표현한 것과 같이 근자의 복음주의는 “고전적 복음주의자들이 지은 집 밖에 있는” 것이다.10) 복음주의가 사실 복음주의 밖에 있다니 이 얼마나 이상한 일인가? 우리들은 이런 점을 잘 관찰한 웰스 교수의 탄식을 잘 듣고 그와 함께 탄식하면서, 복음주의가 새롭게 되는 운동을 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복음주의를 참된 복음주의답게 하는 일을 잘 해내 고 있는 데이비드 웰스와 그의 젊은 후임자라고 할 수 있는 리쳐드 린츠는 철저한 개혁파 신학자이다. 그런데 그들은 복음주의자들에게 복음주의를 버리고 개혁주의를 취하라고 하지 않고, 복음주의가 참된 복음주의가 되도록, 우리가 본 받아야 하는 과거의 좋은 예를 제시하면서 그런 방향으로 가도록 촉구한다. 기본적으로 16세기 개혁자들의 예를 따르라는 것이다. 지금 우리시기의 교회와 사회가 필요로 하는 것은 “부흥이 아니라 개혁”이라는 웰스 교수의 외침은11) 바로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복음주의가 참된 복음주의가 되려면 종교 개혁자들의 그 모습을 회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복음주의가 개신교 정통주의(Protestant orthodoxy), 즉 성경적 정통주의로 되돌아 갈 것을 촉구한다.12)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교회에 준 진리를 고백하는 개신교 종교개혁에 뿌리를 둔 교회들이 그리하였 듯이, 이 시대에도 그와 같은 신학(historic Protestantism)이 필요하다고 한다.13) 이런 제안을 하는 웰스의 신학을 다음 같이 정리하여 제시한 바 있다. 그 내용은 철저힌 복음주의적이고, 결국 개혁파적인 것이다. 예를 들어서, (1) 그는 성경이 성령에 의한 영감되었음과 성경의 충족성을 온전히 주장하고,14) (2) 하나님의 거룩성을 가장 잘 드러내면서 변호하며,15) (3) “우리들은 그리스도가 없이는 도무지 용서 받을 수 없는 그런 죄를 저질렀다”고 하면서,16) 그 죄는 하나님께 대한(against God) 범죄이기에 “가장 근본적 문제는 하나님과의 관계의 뒤틀림”이라고 하고,17) 타락한 인간의 전적인 무능력을18) 정확히 보는 성경적 죄 이해에 충실하다. 또한 그는 (4) 그리스도 사역의 충족성을 잘 드러내고, 유일하신 신인(神人, the God-man)이신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나라를 가져오시고 그의 재림으로 그 나라를 극치(極致)에 이르게 하실 분 이시라는 것을 잘 강조한다.19) (5) 그러므로 우리들이 “그리스도의 사역에 무엇인가를 더하는 것은 곧 그리스도의 업적을 손상 시키는” 것이 된다는 것(Christ alone)을 잘 지적하면서,20) 이를 분명히 해야만 “오직 은혜”(sola garatia, grace alone)를 말하는 것임을 분명히 하고,21) (6) 만일에 “중생이 없으면 새로운 삶도, 하나님을 향한 욕구도, 하나님을 아는 가운데 하나님 앞 에서 살 수 있는 역량도 없게 된다”고 주장하며,22) (7) 교회를 구속받은 성도들이라고 하고,23) [어거스틴이나 개혁자들을 따라서] “교회는 하나님의 창조물이고 오직 하나님께서만이 자라게 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24) 그는 또한 (8) 교회의 표지를 개혁파의 3가지 표지로 명확하게 제시하고,25) (9) 완전한 사람과 교회는 이 땅에 없으나(pace perfectionism and pace Donatists) 우리는 끊임없이 회개하면서 은혜에 근거해서, 그저 사회적 교양의 태도(social niceness) 이상의 경건의 삶을 행해 나가야 한다고 강조하고,26) (10) “하나님 앞에서”의 우리의 모습을 직시하면서 회개하고,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자고 권한다.27) 이처럼 웰스는 모든 면에서 참으로 철저한 개혁파 정통신학자이다.28) 이를 보면 그가 참으로 복음주의자이면서 개혁파 신학자라는 것이 아주 분명하지 아니한가? 복음주의를 철저한 복음주의가 되도록 외치고 이끄는 개혁파 신학자의 한 예가 여기 있다. 또한 고든 콘웰에서 그의 후임자라고 할 수 있는 리쳐즈 린츠도 복음주의 신학을 새롭게 하자고 복음주의 신학의 프로레고메논을 제시하면서 요나단 에드워드와 게할더스 보스가 제시했던 구속사적 방법을 따라 현대 복음주의 신학이 새롭게 될 수 있는 길을 제시하기도 했었다.29) 바로 이런 것이 정통파 개혁주의와 복음주의의 바른 관계라고 생각된다. 데이비드 웰스와 린츠가 한 작업을 우리는 우리의 상황 속에서 해야 한다.30) 이것이 어떤 사회에서건 개혁파 사람들이 동료 복음주의자들과 관련하여 해야만 하는 작업이다. 한 복음주의자가 다른 복음주의자들에게 참된 복음주의자들이 되자고 설득하는 것이다. 19세기에 핫지와 워필드가 막 세속화되기 시작하던 미국에서 했던 일, 20세기 말에 웰스와 리쳐드 린츠가 세속화된 미국에 서 했던 일을 우리들이 개혁파 복음주의자들로서 여기 이곳에서 할 수 있었으면 한다. 미주 1) 화란 개혁파 교회와 스코틀란드 장로교회의 교회 운영상 사소한 차이는 있다. 그러나 그것은 정말 사 소한 차이이지 그 두 교회가 서로 다른 사상을 가졌다고 그들은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도르 트 회의와 같은 소위 International Calvinism을 드러내는 국제적 모임에서 다 같이 개혁신학의 이 름으로 같이 모인다. 2) 그래서 악상 프로방스에 있는 아주 좋은 정통 개혁파 신학교는 학교 이름을 개혁파 신학교(Reforemd Seminar)에서 얼마 전에 깔뱅 신학교(Calvin Seminar)로 고칠 정도가 되었다. 3) 상당히 다른 형태로 정리된 것이지만, 이전에 개혁주의의 특성을 제시하려고 했던 필자의 시도로 다 음을 보라. 이승구, “개혁신학의 독특성” (1987), 개혁신학에의 한 탐구 (서울: 웨스트민스터 출판 부, 1995), 91-135; idem, “개혁신학이란 무엇인가?: 개혁신학의 특성들”(2005), 21세기 개혁신학의 방향, 개정판 (서울: CCP, 2018), 15-28. 4) 이하 이 절에서 제시한 것은 당시 편집장이신 현창학 교수님의 요청에 따라서 개혁파 신학의 특성을 규장하기 위해 <합신은 말한다>에 여러 번 연재되었던 것임을 밝힌다. 5) 이 과정에 대한 간단한 설명이기에 이해하기 좋은 진술로 이승구, 진정한 기독교적 위로 (서울: 여 수룬, 1998), 최근판 (서울: 나눔과 섬김, 2015), 83-89.를 보라. 6) 이를 잘 드러낸 것이 역시 Abraham Kuyper, Lectures on Calvinism (Grand Rapids: Eerdmans, 1931)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대한 논의로 다음을 보라. 이승구, “아브라함 카이퍼의 생 애를 통해서 배우는 교훈”. 「교회와 문화」 33 (2014년 여름):119-46; “우리에게 아브라함 카이퍼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장로교회와 신학」 12 (2015): 160-83. 또한 2021년 봄 개혁신학회에서 발제 한 박태현 교수의 논문도 보라. 7) 그 방식에 대한 논의로 다음을 보라. 이승구, “기독교적 문화변혁론”, 한국 교회가 나아 갈 길 (서 울: SFC, 2007), 개정판 (서울: CCP, 2018), 361-84. 8) 이에 대한 상세한 설명으로 이승구, 교회란 무엇인가?(1996), 개정판 (서울: 말씀과 언약, 2020)을 보라. 9) 여기서 말하는 바른 예배에 대한 상세한 설명으로 이승구, 한국 교회가 나아 갈 길, 47-117을 보 라. 10) Wells, Courage to be Protestant, 18. 11) Wells, Losing Our Virtue, 209; Wells, God in the Wasteland (Grand Rapids: Eerdmans, 1994), 227. 12) Wells, Courage to be Protestant, 2, 57f. 13) Wells, Courage to be Protestant, 1을 인용하면서 이승구, 데이비드 웰스와 함께 하는 하루, 74 에서 했던 말이다. 14) Wells, Courage to Be Protestant, 75-84=용기 있는 기독교, 홍병룡 옮김 (서울: 부흥과 개혁사, 2008), 120-32. 웰스는 하워드 마샬의 성경관과 예수님께서 비유에서 말씀하신 이미지 중 일부는 받 아들일 수 없고, 과거에 그런 식의 계시를 주셨지만 “지금은 우리들은 거기서 해방시키신다”는 견해 (I. H. Marshall, Beyond the Bible: Moving from Scripture to Theology [Grand Rapids: Baker, 2004])와 성경이 시간을 초월한 불변적 진리를 담고 있거나 그런 식으로 전달된 것이라는 견 해를 조롱하면서, 성경은 마치 마지막 막은 쓰지 않고 주신 대본 같아서 우리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그것을 보충할 수 있고, 그에 따라 다양한 결과를 낼 수 있다는 라이트의 견해(N. T. Wright, The Last Word [San Francisco: HarperCollins, 2005])를 비판한다(Wells, Courage to Be Protestant, 85-86=용기 있는 기독교, 133-34). 15) Wells, God in the Wasteland (Grand Rapids: Eerdmans,m 1994); Wells, Courage to Be Protestant, 124-33=용기 있는 기독교, 특히 187-200. 16) Wells, Courage to Be Protestant, 236=용기 있는 기독교, 341. 17) Wells, Courage to Be Protestant, 236=용기 있는 기독교, 341. 18) Wells, Courage to Be Protestant, 245=용기 있는 기독교, 352. 그는 이것은 어떤 테크닉을 동 원해도 고칠 수 없는 난제“라고 정확히 지적한다(Wells, Courage to Be Protestant, 245=용기 있 는 기독교, 353). 19) Wells, The Person of Christ (Westchester, Ill.: Crossway Books, 1984), 개정역, 기독론: 그 리스도는 누구인가 (서울: 부흥과 개혁사, 2015); Wells, Courage to Be Protestant, 192-207=용 기 있는 기독교, 281-302. 20) Wells, Courage to Be Protestant, 235=용기 있는 기독교, 339. 21) Wells, Courage to Be Protestant, 235=용기 있는 기독교, 339. 22) Wells, Courage to Be Protestant, 237=용기 있는 기독교, 342. 23) Wells, Courage to Be Protestant, 219=용기 있는 기독교, 317. 24) Wells, Courage to Be Protestant, 243=용기 있는 기독교, 350. 25) Wells, Courage to Be Protestant, 226-41=용기 있는 기독교, 327-48. 26) Cf. Wells, Courage to Be Protestant, 239-41=용기 있는 기독교, 344-48. 27) Wells, Courage to Be Protestant, 246=용기 있는 기독교, 354f. 그는 “하나님 앞에서는 은신처 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정확히 지적한다. 28) 이승구, 데이비드 웰스와 함께 하는 하루, 27-28. 29) Richard L. Lints, The Fabric of Theology: A Prolegomenon to Evangelical Theology (Grand Rapids; Eerdmans, 1993). 30) 그런 시도와 제안들로 이승구, “복음주의와 성경”, 「복음과 상황」 (1992년 9월), 이승구, 개혁신학 탐구, 개정판, 42-52와 2001년 4월 27일 한국복음주의신학회 국제학술대회에서 영어 발제한 다음 논문을 보라. 이승구, “세계 신학계에 대한 한국 복음주의신학의 제언: 사도적, 성경적, 종말 신학에 의 요청”, 21세기 개혁신학의 방향, 개정판 (서울: CCP, 2018), 339-46. 또한 장로교회의 방향을 위한 제안으로 2002년 11월 25일에 열렸던 한국 장로교 신학회 제 1차 논문 발표회에서 발제했던 “21세기 한국 사회 속에서 장로교회의 의미“, 21세기 개혁신학의 방향, 201-37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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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8-10
  • 복음주의와 개혁주의(1)
    복음주의와 개혁주의(1) 어떤 면에서 보면 너무나도 분명한 것인데 상황이 아주 복잡해져서 여러 방식으로 제시되기도 하고, 신학을 처음 하는 학우들이 늘 질문하는 문제의 하나로 “도대체 복음주의와 개혁주의는 어떤 관계에 있느냐?”는 질문이 있다. 이번 학회에서 이 주제로 논의하기로 하였으니, 특히 신학을 처음으로 하는 학우들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라면서, 먼저 복음주의가 무엇인지를 간단히 논의하고, 개혁주의의 특성을 드러낸 후에, 복음주의와 개혁주의의 가장 바람직한 관계성이 무엇인지를 논의해 보기로 한다. I. 복음주의 1. 복음주의의 기원과 다양한 영향들 복음주의는 매우 폭넓은 개념이다. 복음주의는 그저 종교적 운동으로만이 아니라 하나의 사회적 운동으로 이해되야 한다는 것이 거의 보편적 이해이다.1) 기본적으로 천주교회를 개혁하면서 루터가 이신칭의의 복음이 있는 곳은 참된 교회이고, 이신칭의가 드러나지 않는 곳은 잘못된 교회라고 주장하면서 일으킨 운동으로부터 논의를 시작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개혁자들은 이런 입장이 사도들이 가르친 복음에 충실한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독일에서는 종교개혁 때부터 이신칭의를 가르치는 교회를 복음주의 교회라고 일컬어 왔다. 루터파 교회가 복음주의 교회(Evangelishe Kirche)로 지칭된 것이다. 물론 후에 루터파 교회 안에 다양한 신학적 성향들이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18세기 이후에는 독일에서 말하는 복음주의 교회(즉, 루터파 교회)가 모두 다 우리가 조금 후에 말하는 의미에서의 ‘복음주의적’이지 않은 상황이 나타났다. 매우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를 “루터파 교회(에방겔리쉐 카르케)의 아이러니”라고 해보자. 일단 본래적 의미에서는 이신칭의의 복음을 제대로 주장하는 사람들과 그들의 운동이 복음주의였다. (계속해서 독일 상황을 말하자면) 천주교회에 반대하면서 이신칭의를 말하던 루터파 교회와 루터파 정통주의를 추구하던 이들 중 일부 (또는 상당수)가 좀 냉정해져서 엄밀한 루터파(Gnesio-Lutherans)라는 것을 강조하면서,2) 그 안에 복음적 열정이 없게 되는 일이 발생했다. 그런 상황을 죽은 정통(dead orthodoxy)으로 인식하면서, 이신칭의를 비롯한 개신교의 기본적 가르침에 충실하면서도 교리를 배제하면서 성경에만 충실하자고 하는 독일 경건주의의 운동도3) 복음주의에 속하고, 후대의 복음주의를 설명하는 매우 중요한 요인이다.4) 그러므로 독일 상황에서는 루터파 정통주의에 충실하면서 복음의 열정을 지닌 사람들과 루터파 정통주의를 비판하면서 나타난 독일적 경건주의 운동이 복음주의를 형성하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아우구스트 헤르만 프랑케(1663-1727) 등의 노력으로 이루어진 할레대학의 설립과 그 졸업생들의 선교적 노력, 또한 진젠도르프 백작과 함께한 이들, 즉 소위 모라비안 교도로 지칭되는 이들의 성경적 삶의 실천과 선교적 노력은 후대 복음주의 운동의 큰 토대의 하나가 되었다. 영국에서는 역시 종교 개혁에 동의하는 사람들 중에 성경과 개혁된 교회의 모습에 좀 더 충실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청교도”라고 불렸다. 청교도는 기본적으로 영국 국교회를 좀 더 성경적 방향으로 이끌려고 했던 사람들이다. 그 대부분은 영국 국교회로부터의 분열을 원하지 않았고 그 안에서 개혁을 하려고 했었다. 그런데 이런 청교도들은 고치려고 하는 것에 있어서 는 의견의 일치가 있었는데 그들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방향에서는 서로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었다.5) 그래서 후대의 시각에서 보면 매우 다양한 사람들이 청교도들 가운데 있었다. 이 다양성을 가진 사람들을 후대의 용어로 복음주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20세기와 21 세기에 언급되는 복음주의와 16세기 말과 17세기 청교도들 사이에 상당한 유사성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필자는 청교도 운동이 이전 “영국 사회에 존재하고 있던 오늘날의 소위 ‘복음주의 모자이크’와 비슷한” 것이라는 말을 사용한 일도 있다.6) 여기 청교도와 오늘날 복음주의의 특성이 다양성이 잘 드러난다. 대부분의 청교도는 국교회로부터 분리하려고 하지 않았지만 후에 국교회로부터 분리한 분리주의자들도7) 복음주의에 상당히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16세기 영국에는 상당히 중도적이었던 에드먼드 그린달(Edmund Grindal, 1519?-1583) 같은 켄터베리 대주교로부터8) 국교회의 박해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국교회 안에 있기를 원하였던 토마스 카트라이트(Thomas Cartwright, c. 1535–1603)를 비롯한 상당수의 청교도들, 그리고 후에 어쩔 수 없이 국교회 밖으로 밀려난 사람들(dissenters), 특히 1660년 왕정복고 후에 1662년에 있었던 통일령(The Act of Uniformity, 1662) 때문에 일어난 소위 “대축출”(the great ejection) 때에 밀려난 2,000여명의 목사들, 즉 소위 (당시 영 국 국교회의) ‘주류를 따르지 않는 사람들’(the Nonconformists), 그리고 의도적인 분리주의 자들에 이르는 매우 다양한 사람들이 복음주의의 선조들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18세기에 영국 국교회인 성공회로부터 타의반 자의반 분리되어 그들이 옥스퍼드에서 학생 신앙운동을 할 때부터 들었던 별명인 “법식주의자들”(methodists)라는 그 이름 그대로 교단이 된 웨슬리파 사람들인 감리교회(Methodist)의 초기도9) 후대 복음주의에 상당히 영향을 많이 미쳤다고 할 수 있다. 18세기에는 휘필드나 요나단 에드워드 같은 칼빈주의자들과 웨슬리 같은 알미니안주의자들이 영국과 미국에서 힘을 합하여 복음주의적 운동을 했었다고 할 수 있다.10) 현대 복음주의 운동은 이들의 사역에 근거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앞서 언급한 마크 놀의 책 제목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Mark A. Noll, The Rise of Evangelicalism: The Age of Edwards, Whitefield, and the Wesleys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2003). 18세부터 20세기에도 영국 국교회 안에도 복음주의적 성향을 가진 분들이 있었고, 국교회를 떠나게 된 감리교회는 처음에 강력한 복음주의적 모습을 드러내었다.11) 그들은 복음전도, 사회적 구호, 그리고 해외 선교를 강조하면서 <교회선교회>(The Church Missionary Society, 1799)를 만들고, <식민지와 대륙 교회 협회>(The Colonial and Continental Church Society, 1838)를 결성하여 여러 선교와 사회적 활동에 힘썼다.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 “복음주의 운동은 18세기 영국에서 만들어졌다”고 표현하는 경 우도 있다.12) 물론 그것이 16-17세기 청교도들과 연관된 저교회적 태도(low church attitude)와 많은 부분을 공유하고 있음을 인정하면서 그렇게 말하지만 말이다. 당시 복음주의 운동에 참여한 사람들 중에 많은 평신도들이 있었고, 그들 중 상당수가 1790년에서 1830년대에 영국 사회의 중요 인사들로 구성된 영향력 있는 클래프햄 파(the Clapham Sect)에 속해 있었다. 그 들 중에 하원 의원도 많이 있었고 그들은 노예무역을 철폐하는 일을 위해 노력했고, 그 일을 이루었다. 19세기에 영국 복음주의자들은 성공회 안의 천주교적 유산을 강조하던 옥스퍼드 운동 (the Oxford Movement)에 반발하면서 오직 성경에 충실한 모습을 유지하려고 애썼다. 결국 이들이 힘을 합해서 1846년에 런던에서 복음주의 연맹(The Evangelical Alliance)을 형성하였다. 또한 리버플의 주교였던 존 라일 주교(John Charles Ryle, 1816–1900) 같은 이는 복음주의적 주교로 알려져 있다. 20세기 상황에서는 마틴 로이드-존스와 존 스토트가 영국의 복음주의자들을 대변하는 역할을 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이 함께 주도했던 청교도 컨퍼런스(the Puritan Conference)와 같은 모임(1956-1969)이 중요했고,13) 학문적 운동으로는 1944년에 캠브리쥐에 세워진 틴델 하우스, 그보다 영향은 적었지만 옥스퍼드에 세워졌다가 경제적 문제로 지금은 라티머 트러스로로 축소되어 런던에 있는 옥크 힐 컬리쥐로 옮긴 라티머 하우스, 그런 것을 따라 스코틀랜드에 1981년에 논의를 따라 1983년에 세워진 에딘버러의 러더퍼드 하우스 또는 개혁신학을 위한 러더포드 센터(Rutherford Center for Reformed Theology)가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14) 학교로는 영국의 옥크 힐 칼리쥐(Oak Hill Theological College), 2004년에 런던 신학교(London School of Theology)로 이름을 바꾼 1943년에 성경 통신 과정으로 시작된 런던 바이블 컬리쥐 등이 초교파적 복음주의의적 선교 교육 기관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였고, 스코틀랜드의 지금은 에딘버러 신학교(Edinburgh Theological Seminary)로 이름을 바꾼 1843년 11월에 시작된 프리 쳐치 컬리쥐,15) 비교적 근자인 1994년에 Andrew McGowan과 Hector Morrison의 노력으로 세워진 하일랜드 신학교(Highland Theological College)가16) 스코틀랜드에서, 2016년에 연합 신학교(Union School of Theology)로 이름을 바꾸고 젊고 활동성 있는 젊은 학자인 마이클 리브스(Michael Reeves)의 인도 하에 활동하고 있는 웨일즈 복음주의 신학교(Wales Evangelical School of Theology)가 웨일즈에서, 그리고 브리스톨의 트리니티 칼러쥐, 옥스퍼드의 위클리프 홀 등이 성공회 안의 복음주의 교육 기관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다. 또한 1957년에 이안 머레이와 잭 컬럼(Jack Column)이 세운 개혁파 출판사인 <진리의 깃발>(Banner of Truth)이 그 여러 활동으로 스코틀랜드와 영국 뿐 아니라 전세계 복음주의 운동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그와 연관된 이안 머리(Ian Murray)의 큰 영향력을 주목할 만하다. 또한 미국과 우리나라의 IVF에 해당하는 UCCF의 활발한 활동들과17) 복음주의 신학생 모임인 이전에 TSF이던 RTSF(the Religious and Theological Students Fellowship)도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그들을 위한 정기 간행물인 「떼멜리오스」(Themelios)는 학문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이와 더불어, 1967년부터 나오는 「에반젤리칼 타임즈 (Evangelical Times), 「진리의 깃발」(Banner of Truth), 그리고 1929년부터 내고 있는 분기 별 저널인 「복음주의 퀄터리」(Evangelical Quarterly)도 영국 복음주의 운동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2. 복음주의의 다양성 미국에서는 그 이전까지 이민온 집단의 교파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던 미국 사회가 19세기 초부터 사람들의 도시로의 이동이 많아지기 시작하여, 결국 미국 사회를 변혁시킨 사회 구조의 혁명적 변화의 한 부분으로 복음주의 운동이 나타난 것으로 생각하는 시각도 있다.18) 현상으로서의 복음주의를19) 볼 때 무시할 수 없는 시각이다. 이런 현상으로서의 복음주의는 시대별로 다양성을 가지게 되고, 결과적으로 복음주의 다양성을 생각하게 된다. 여러분들이 미국 복음주의의 다양성을 언급했다. 특히 이런 제목으로 편집된 책을 낸 북 침례교 신학교의 도날드 데이톤과 노뜨팍 신학교(North Park Theological Seminary)의 로버트 존스톤이 편집한 책은 그야말로 다양한 복음주의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전천년주의와 관련한 복음주의자들, 오순절 전통의 복음주의, 북미 성결 운동과 관련된 복음주의자들, 흑인 종교와 복음주의 정체성, 그리스도 교회적 복음주의자들, 침례교적 복음주의자들, 자의식적 개혁파 복음주의자들, 그리고 루터파 복음주의자들.20) 심지어 로버트 웨버는 복음주의라는 용어와 연관되는 14개의 다양한 복음주의자들 그룹을 언급하기도 했다.21) 그런데 1960년대 이후에는 복음주의라는 용어와 관련하여 이보다 더한 다양성이 나타나게 되었다. 예를 들어서, 칼 바르트가 1962년에 미국 여행을 하면서 강연한 강연 내용을 『복음주의 신학』으로 낸 것과 같은 것이 이런 다양성의 대표적 양상이다.22) 버나드 램 (Bernard L. Ramm, 1916-1992) 같은 이는 복음주의 신학을 거의 바르트주의 신학으로 생각할 정도이고,23) 유럽에서는 아주 보수적인 그룹을 제외하고서는 대개 그렇게 생각한다. 미국 복음주의에서의 이런 모습을 신정통주의의 위협이라는 말로 헌터는 표현한 일도 있다.24) 그러나 많은 복음주의자들은 이것에 대해서 비판적으로 본다.25) (이 문제는 다음 절에서 복음 주의의 절단선을 논하면서 논하기로 한다.) 더 나아가 포스트모던적 분위기를 철저히 의식하면서 그에 따라서 복음주의와 복음주의 교회와 복음주의 신학을 전체적으로 새롭게 해야 한다는 제안이 이미 1993년에 나온 바 있다.26) 또한 이 제안을 했던 지금은 돌아가신 스탠리 그랜츠(Stanley J. Grenz, 1950–2005)가 그런 입장에서 새로운 조직신학을 『하나님의 공동체를 위한 신학』이라는 제목으로 포괄적인 조직신학 책을 내기도 했다.27) 많은 작업을 하던 그렌츠가 너무 일찍 죽은 것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과연 이와 같이 복음주의가 수정되어도 좋은지를 염려하는 분들이 있을 정도로 80년대 이후로 복음주의는 너무 다양해져 가고 있다. 이렇게 의식적으로 변모하는 것도 심각한 문제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이것은 사람들이 주의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소위 복음주의자들이 무의식적으로 주변의 영향을 받으면서 근 자에 포스트모던적 분위기에 잘 적응해 가고 있는 것은 더 심각한 문제이다.28) 3. 복음주의의 절단선(The Edge of Evangelicalism) 이와 같이 오늘날 ‘복음주의’라고 하면서 너무 다양한 입장이 나타나고 있기에 복음주의의 절단성을 분명히 하는 일이 필요하다는 논의가 나올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서, 미국 복음주의 신학회에서는 성경에 대해서 너무 비평적 입장을 유지하는 일단의 학자들은 복음주의라고 하기 어렵다는 판단이 있기도 했다.29) 근자에는 리쳐드 라이스(Richard Rice),30) 윌리엄 하스커 (William Hasker),31) 클락 피녹(Clark Pinnock),32) 그레고리 보이드(Gregory Boyd),33) 그들과 함께 데이비드 배신저(David Basinger),34) 존 샌더스(John Sanders)35) 등이 주장한 열린 유신론(Open theism)은 복음주의 안에 있다고 하기 어렵다는 선언이 나오기도 했다.36) 물론 이런 선언들에 대해서 반대하면서 복음주의 입장을 넓게 유지하자는 분들도 있기는 하지만 미국 복음주의 신학회에서도 어느 정도의 절단선을 분명히 해야 한다는 논의가 있던 셈이다. 이 모든 것을 보며 특히 20세기 여러 신학적 논쟁이 드러난 상황을 생각하면 복음주의의 절단선으로 최소한 다음과 같은 것은 제시되어야 할 것이다.37) 첫째, 성경의 영감을 온전히 인정하면서 성경을 정확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절대적으로 받아들이는지의 여부. 대개 자신의 입장을 복음주의와 연관시켜 신학적 활동을 하시는 분들은 성경의 권위는 상당히 높게 인정한다. 그러나 단지 성경의 권위를 말한다고해서 그런 모든 사람들이 복음주의라고 하기 어려운 것은, 그렇게 말한 후에 결국 복잡한 논쟁을 일으켜 모든 사람들과 복음 주의 교회를 결국 혼란에 빠뜨리게 하는 일이 많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하는 지의 여부가 매우 중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성경에 영감에 대한 이해가 매우 중요하게 작용한다. 영감의 방식으로는 유기적 영감과 영감의 정도로는 축자영감을 말하는 것이 진정한 복음주의 입장이다. 따라서 성경의 모든 말이 받아쓰기 같은 방식으로 주어졌다는 기계적 영감을 바른 복음주의자들이 주장한 바도 없고, 기본 사상이나 핵심만 영감 했다는 사상 영감은 복음주의의 영감론이 아니다. 성령님께서 인간의 모든 특성을 다 사용하셔서 인간 저자의 모든 기능이 다 사용되므로 인간 저자의 특성이 나타나지만, 인간적 오류가 스며들지 않게 하셨다는 ‘유기적 영감설’이 복음주의적 영감설이다. 또한 영감의 정도 문제와 관련해서 사람들을 배제하고 인간 저자는 그저 도관과 같은 역할을 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복음주의 입장이 아니다. 또한 성경의 일부분만 영감하였다는 부분 영감설이나 역동적 영감설은 주장하는 것도 복음주의 영감론이 아니다. 복음주의 영감론은 성경의 모든 부분이 영감되었다는 것이므로, 결국 ‘글자 하나하나에까지 미치는 영감’[逐字靈感]을 말할 수밖에 없다.38) 이런 ‘유기적 축자 영감’을 말하므로 복음주의자들은 성경은 우리의 믿는 바와 삶과 실천의 모든 문제에 대한 유일무이하고 절대적 원칙이라는 입장을 견지한다. 그러므로 성경을 읽고 실질적으로는 제쳐 놓는 이들은 엄밀하게 복음주의자들이 아니다. 복음주의는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를 모두 성경에서 찾아내고, 모든 결론을 성경에게 이끌어 낸다. 복음주의는 또한 실천의 모든 것도 성경으로부터 이끌어 내고 성경이 최종적 결론을 가지는 것이 복음주의 입장이다. 둘째로, 루터와 칼빈같은 개혁자들이 잘 제시하고 정리한 성경적 이신칭의 사상에 충실한 것이 복음주의 입장이다. 이신칭의의 가르침에 충실하면 복음주의라고 할 수 있지만, 이신 칭의에 충실하지 않으면 그것은 이단적인 것이다. 루터가 말한 바와 같이 이신칭의와 함께 교회가 서고 넘어지기 때문이다. 바울에 대한 세관점을 이런 점에서 매우 심각하게 생각해야 할 것이다. 셋째로, 사도들의 가르친 가르침에 충실한 것이 복음주의이다. 초대 교회에 사도들이 가르친 가르침에 충실한 교회가 정통적 교회였고, 이에서 벗어난 것을 이단으로 하였고, 종교 개혁 시기에 사도적 가르침을 회복해 낸 것이 개혁자들이었으므로 어느 시대든지 1세기 사도들이 가르친 그 가르침이 기준이다. 복음주의는 20세기나 21세기에도 1세기 사도들의 가르침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운동이다. 사도신경이 사도들의 가르침을 잘 요약한 것이나 그것을 성경이 가르친 대로 해석하지 아니하면 그런 교회를 바른 교회라고 하지 않는다. 천주교회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그러나 사도신경조차도 성경적으로 해석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복음주의이다. 미주 1) Cf. Donald Scott, “Evangelicalism as a Social Movement,” available at: http://nationalhumanitiescenter.org/tserve/nineteen/nkeyinfo/nevansoc.htm: “Evangelicalism needs to be understood not only as a religious movement, but also as a social movement.” 2) 이 때 독일에서 비판받던 사람들이 필립 멜랑흐톤과 그를 따르는 소위 “은밀한 칼빈주의자들”(Crypto Calvinists)이었다. 이에 대한 좋은 논의로 Jürgen Diestelmann, “Philippism-Melanchthon and the Consequences: An Observation in the ‘Year of Melanchthon,’” LOGIA - A Journal of Lutheran Theology 6/4 (1996): 3-6, available at: https://web.archive.org/web/20060614173132/http://www.luther-in-bs.de/melaeng.htm. 3) 그런데 이것은 독일 경건주의에 대한 설명이라는 것에 주의해야 한다. 네덜란드에서는 정 통주의와 경건주의가 조화롭게 나타나 “더 나아가는 종교개혁”(Nadere Reformatie)으로 나타 나게 되었다. 그래서 화란 교회사에서 1600년에서 1750년대를 “더 나아가는 종교개 혁”(Nadere Reformatie)의 시기로 언급하곤 한다. Cf. Willem J. van Asselt & Paul H. A. M. Abels, “The Further Reformation,” Herman Selderhuis, ed., Handbook of Dutch Church History (Göttingen: Vandenhoeck & Ruprecht, 2015), 338–41; https://en.wikipedia.org/wiki/Nadere_Reformatie; 주도홍, 『개혁교회 경건주의』 (서울: 도 서출판 대서, 2011)도 보라. 거의 모든 역사가들이 잘 인정하듯이, 화란의 경건주의는 우리가 후론할 영국 청교도들의 영향을 받기도 했다. Anthony Milton, “Puritanism and the Continental Reformed Churches,“ in The Cambridge Companion to Puritanism, eds., John Coffey & Paul C. H. Lim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8), 118– 19. 경건주의가 상황에 따라 다양한 양상으로 나타난 것을 잘 주의해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단순하게 말하 면, 화란의 경우에는 전통주의와 경건주의가 조화롭게 나타나 경건주의를 대변하는 후티우스 (Voetius) 같은 인물이 동시에 개혁파 정통주의의 대변인 중의 하나인 것과 대조해서, 17-18세기 독 일 경우에는 경건주의의 대변인들인 필립 야곱 슈페너(1635-1705)나 아우구스트 헤르만 프랑케 (1663-1727) 등이 루터파 정통주의와 대립적인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 상당히 대조적이다. 4) 거의 모든 역사에서 경건주의가 복음주의의 한 기원으로 언급되고 있음을 보라. Cf. F. Ernest Stoeffler, ed., Continental Pietism and Early American Christianity (Grand Rapids: Eerdmans, 1976); C. John Weborg, “Pietism: Theology in Service of Living Toward God,” in Donald W. Dayton and Robert K. Johnston, eds., The Variety of American Evangelicalism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1991), 161-83; Roger E. Olson, “The Roots of Evangelical Theology in Pietism,” in his The Westminster Handbook to Evangelical Theology (Louisville & London: Westminster John Knox Press, 2004), 10-16. 5) 이점에 대한 지적으로 이승구, “조직신학에서 본 청교도 사상”(2003), 『21세기 개혁신학의 방향』, 최 근판 (서울: CCP, 2018), 65-66와 그에 인용된 여러 저자들을 보라. 6) 이승구, “조직신학에서 본 청교도 사상”, 66. 7) 이런 사람들의 원조는 1567년부터 있었고, 특히 Robert Brown (1550?-1633)이 친구인 Robert Harrison과 함께 1581년에 놀위치에 독립회중(an independent gathered congregation)을 세운 것과1592년에 분리주의적 회중교회(Puritan Separatist)를 세운 것, 이 교회와 여러 회중교회가 암스 테르담으로 간 것, 라이덴으로 간 스크루비 회중교회, Gainsburgh에서 회중교회 목사가 된 John Smyth(1570?-1612)가 1908/1609년경 자신과 교회의 지체들에게 물을 쏟아 영국 최초의 침례교회가 화란 땅에서 형성되어 소위 General Baptist의 시조가 된 것, 라이덴 회중 교회의 일원이었던 Henry Jacob 목사(1563-1624)가 1616년 영국으로 돌아와 Southwark에 세운 회중교회, 이 교회에서 1630 년대에 분리한 일부 신자들이 John Spilsbury를 목사로 세우고 형성된 Particular (or Calvinistic) Baptists 운동이 이런 분리주의적 청교도의 모습의 한 단면이다. 이에 대한 간단한 정리로 앞서 언급 한 이승구, “조직신학에서 본 청교도 사상”, 62-63을 보라. 8) Cf. Patrick Collinson, Archbishop Grindal, 1519-1583: The Struggle for a Reformed Church (J. Cape, 1979). 9) 그런 점에서 오늘날 미국에서나 한국에서나 감리교회가 복음주의적 성격을 버리고 가장 진보적인 교 단이 된 것은 “메토디스트의 아이러니”라고 지칭할 만한 이상한 일이다. 특히 미국 United Methodist Church의 모습이나 한국 감신의 모습을 보면서 이 아이러니를 잘 생각하게 된다. 10) 이들의 사역에 대한 좋은 논구로 다른 많은 책들과 함께 Mark A. Noll, The Rise of Evangelicalism: The Age of Edwards, Whitefield, and the Wesleys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2003)을 보라. 11) 이들을 잘 다룬 것이 스털링 대학교 역사학 교수이시고, 우리 IVF에 해당하는 영국 UCCF 운동의 열심이신 데이비드 베빙턴 교수의 책이다. David W. Bebbington, Evangelicalism in Modern Britain: A History from the 1730s to the 1980s (London: Routledge, 1989). 이 귀한 책에 대 한 이은선 교수님의 번역을 보라. 영국의 복음주의 (서울: 한들, 2009). 어떤 의미에서 이 책은 복 음주의 역사를 잘 규정하는 교과서 같은 책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후대 학자들의 다음 같은 책 제 목을 주목하여 보라. Crawford Gribben, Michael Haykin, Kenneth J. Stewart, eds. Continuities in Evangelical History: Interactions with David Bebbington (Leicester: Inter-Varsity Press, 2009). 12) 그렇게 표현한 대표적인 경우로 다음 고든 멜톤 교수의 글을 보라. J. Gordon Melton, “Anglican Evangelical,” in Encyclopaedia Britannica, available at: https://www.britannica.com/topic/Evangelical-church-Protestantism. 13) 이 때 발제된 글들의 모음으로 D. Martyn Lloyd-Jones & J. I. Packer, ed., Puritan Papers: 1956–1969, 5 vols. (Phillipsburg, NJ: P&R Publishing, 2000–2005)을 보라. 스토트와 로이드 존스의 의견 차이로 말미암은 복음주의자들의 분열에 대한 좋은 설명으로 Ian H. Murray, Lloyd-Jones: Messenger of Grace (Edinburgh: Banner of Truth, 2008), chapters 8-9. 이 분열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같은 의견을 표현하는 저스틴 테일러의 다음 글 도 보라: Justin Taylor, “50 Years Ago Today: The Split Between John Stott and Martyn Lloyd-Jones,” TGC Blogs, posted on OCTOBER 18, 2016, available at: https://www.thegospelcoalition.org/blogs/evangelical-history/50-years-ago-today-the-splitbetween-john-stott-and-martyn-lloyd-jones/ 14) https://www.rcrt.scot/ 1983년부터 10년 동안 초대 원감(Warden)을 하였던 Nigel Cameron 박 사는 주로 생명윤리에 관한 여러 작업을 인도했고, 그 후에는 David Searle 목사가 2003년까지 원감 을 하다가, 소장(Director) 체제로 바꾸어 밥 피올 박사(the Rec. Dr. Bob Fyall)께서 4년 동안 소장 을 하였고, 2008년부터는 제이슨 컬티스 박사(Dr Jason Curtis)가 섬겼고, 한동안 소장 없이 지내다 가 지금은 2019년에 선임된 (하일랜드 신학교의) Andrew T. B. McGowan 교수가 소장으로 있다. 15) Cf. https://ets.ac.uk/about/history-and-heritage/ 16) https://www.htc.uhi.ac.uk/about-us/ 17) Cf. https://www.uccf.org.uk/ 18) 이런 입장을 표현하는 Donald Scott, “Evangelicalism as a Social Movement” 의 논의를 보라. 19) 1980년대 초까지의 미국 복음주의 현상을 사회학적으로 분석한 버지니아 대학교의 사회학 교수인 James Davidson Hunter, American Evangelicalism: Conservative Religion and the Quandary of Modernity (New Brunswick, NJ: Rutgers University Press, 1983)도 보라. 20) Donald W. Dayton and Robert K. Johnston, eds., The Variety of American Evangelicalism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1991). 이 책에서 심지어 1860년 미국 미시간 주 배틀 크릭 (Battle Creek)에서 제임스 화이트(James White), 엘런 화이트(Ellen White), 조셉 베이츠(Joseph Bates), 존 앤드루스(John Andrews) 등에 의해 창립된 안식교회도 이 다양성 안에 넣dj 제시하고 있 다. 21) Robert E. Webber, Common Roots: A Call to Evangelical Maturity (Grand Rapids: Zondervan, 1978), 32. 22) Karl Barth, Evangelical Theology: An Introduction (Grand Rapids: Eerdmans, 1963). 23) Bernard L. Ramm, After Fundamentalism: The Future of Evangelical Theology (San Francisco: Harper & Row, 1983). 24) James Davidson Hunter, Evangelicalism: The Coming Generation (Chicago and London: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87), 25. 25) 특히 버나드 램에 대한 다음 학위 논문들을 보라: Robert L. Jones, “Scripture and Theology: An Analysis of Bernard Ramm's Proposal to Adopt Karl Barth's methodology,” Th. M. diss., Western Conservative Baptist Seminary, 1985; Kenny Regan Pulliam, “A Critique of Bernard Ramm's Doctrine of the Bible,” Ph. D. diss., Bob Jones University, 1986; 그리고 Simon Sze Wang Wat, “Bernard Ramm’s Reception of Karl Barth’s Doctrine of the Word of God,” Ph. D. diss., 2011. 또한 다양한 평가들에 대한 논의로 Phillip R. Thorne, Evangelicalism and Karl Barth: His Reception and Influence in North American Theology (Pittsburgh, PA: Pickwick Publications, 1995)도 보라. 26) Stanley J. Grenz, Revisioning Evengelical Theology: A Fresh Agenda for the 21st Century (Downer Grove, IL: IVP, 1993). 27) Stanley J. Grenz, Theology for the Community of God (Grand Rapids; Eerdmans, 1994). 또 한 Renewing the Center: Evangelical Theology in a Post-Theological Era (Grand Rapids: Baker, 2000)과 John Franke와 함께 낸 Beyond Foundationalism: Shaping Theology in a Postmodern Context (Westminster John Knox Press, 2000)도 보라. 28) 이 문제를 잘 분석하고 명료히 드러낸 데이비드 웰스의 논의를 보라. David Wells, No Place for Truth (Grand Rapids: Eerdmans, 1993), 115, 127; David Wells, Losing Our Virtue (Grand Rapids: Eerdmans, 1998), 61f.; David Wells, Courage to be Protestant (Grand Rapids: Eerdmans, 2008), 48f. 이를 언급하고 있는 이승구, 데이비드 웰스와 함께 하는 하루 (서울: 말씀 과 언약, 2021), 58을 보라. 29) 그 대표적인 예로 1961년 브루스 지도하에 만체스터 대학교에서 학위를 하고(그 학위 논 문은 1967년에 Supplements to Novum Testamentum 18호인 The Use of the Old Testament in St. Matthew's Gospel with Special Reference to the Messianic Hope [Leiden: E. J. Brill., 1967]로 출간된었다), 1962년부터 싼타 바라라(Santa Barbara)에 있는 Westmont College의 신약과 희랍어 교수로 있던 로버트 건드리에 대한 노르만 가이슬러의 비판적 문제 제기 후에 1983년에 복음주의 신학회에서 건드리가 탈퇴한 것을 들 수 있다. Cf. Leslie R. Keylock, "CT Classic: Evangelical Scholars Remove Robert Gundry for His Views on Matthew," Christianity Today (1984. 2. 3): 47, Available: https://www.christianitytoday.com/ct/2003/novemberweb-only/11-17-42.0.html. 본래 the Expositor’s Bible Commentary의 마태복음 주석을 쓰도록 되었던 Robert H. Gundry의 마 태복음 주석 내용을 편집 비평을 사용했다는 이유로 Merrill C. Tenney와 James M. Boice가 받아 들이기 어려워하자, 결국 이 시리즈에 속하지 않고 독립적으로 Matthew: A Commentary on His Literary and Theological Art (Grand Rapids, MI: Eerdmans, 1982)으로 출판된 책에 대한 미 국 복음주의 신학회의 평가였다. 30) Cf. Richard Rice, The Openness of God: The Relationship of Divine Foreknowledge and Human Free Will (Nashville, Tennessee: Review & Herald, 1980). 31) William Hasker, God, Time, and Knowledge (Ithaca, New York: Cornell University Press, 1994); Hasker, Providence, Evil, and the Openness of God (London: Routledge, 2004). 32) Clark Pinnock, A Wideness in God's Mercy: The Finality of Jesus Christ in a World of Religions (Grand Rapids, MI: Zondervan, 1992); idem, The Openness of God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1994): idem, Most Moved Mover: A Theology of God’s Openness (Grand Rapids: Baker, 2000). idem and Robert C Brow, Unbounded Love: A Good News Theology for the Twenty-first Century (Carlisle, UK: Paternoster &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1994). 33) Gregory Boyd, God at War: The Bible & Spiritual Conflict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1997); idem, Satan and the Problem of Evil: Constructing a Trinitarian Warfare Theodicy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2001); idem, Is God to Blame? Beyond pat Answers to the Problem of Evil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2003). 34) Clark Pinnock, Richard Rice, John Sanders, William Hasker & David Bassinger, The Openness of God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1994); David Bassinger, The Case for Freewill Theism: A Philosophical Assessment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1996). 35) Cf. John Sanders, The God who Risks: A Theology of Providence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1996); idem & Chris Hall, Does God have a Future? A Debate on Divine Providence (Grand Rapids: Baker Academic, 2003). 36) 미국 복음주의 신학회는 2001년 11월 16일에 “성경은 하나님께서 미래에 될 모든 결정 들과 도덕적으로 자유로운 주체들의 행동을 포함하여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모든 사건들에 대 한 온전하고, 정확하며, 무오한 지식을 가지신다고 분명히 가르친다고 믿는다”는 결의안을 밤 늦게까지의 토론을 걸쳐 41명이 부재한 상황에서 253명의 찬성과 66명의 반대로 결의하였 다. 이로써 그 동안 복음주의 신학회 내의 몇 회원들이 주장한 하나님의 개방성에 대한 견해 (the “openness of God” view)는 복음주의적 확신 밖에 있는 것이라는 점을 명백히 한 것이 다. 이를 알리는 기사의 예로 Russell D. Moore, “Evangelical Theological Society Rejects ‘Open Theism,’ Affirms God’s Foreknowledge,” Baptist Press, November 20, 2001, available at: https://www.baptistpress.com/resource-library/news/evangelical-theological-societyrejects-open-theism-affirms-gods-foreknowledge/ 이 사건 이후 왜 이렇게 결정해야 하 는 지를 밝힌 서던 뱁티스트 신학교의 부르스 웨어의 글로 다음을 보라. Bruce A. Ware, “Defining Evangelicalism’s Boundaries Theologically: Is Open Theism Evangelical,“ JETS 45/2 (June 2002): 193–212. 이 문제를 다룬 책으로 Garrett Ham, The Evangelical and The Open Theist: Can Open Theism Find Its Place Within the Evangelical Community? (B00L3ROPFA, 2014). 미국복음주의 신학회의 이런 결정에 동의하는 Nick Needham, “The Cutting Edge: Open Theism,” Evangelical Times (November 2002), available at: https://www.evangelical-times.org/articles/open-theism/ 37) 결국 의미는 같지만 복음주의에 대해서 다른 식으로 하나의 규범적 접근을 하면서 다음 세 가지 기 준을 제시한 적도 있다: (1) “복음주의는 성경 자체가 증언하는 성경관을 가진다. (2) 복음주의의 성 경 해석은 복음주의 성경관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는 특성들을 가진다. (3) 복음주의자들은 말씀의 뜻 에 전적으로 순종하면서 바른 실천을 하는 자들이다.”(이승구, “복음주의와 성경”, 「복음과 상황」 1992년 9월호, 이승구, 개혁신학 탐구, 개정판 [수원: 합동신학원 출판부, 2012], 42-52에 재수록, 인용은 43에선 온 것임). 38) 이런 정통적 영감론의 대표적 진술로 B. B. Warfield, The Inspiration and Authority of the Bible, ed., Samuel G. Craig (Philadelphia: Presbyterian and Reformed Publishing Co., 1948)을 보라. 이런 영감론에 대한 자세한 진술로 다음을 보라. 이승구, “정 통주의적 성경관에 따른 영감(靈感)과 무오성(無誤性) 이해: 특히 B. B. 워필드와 E. J. 영을 중심으로”, Origin Research Journal 1/1 (October 2021): 72-97; idem, “워필드 신학의 개혁신학적 특성”. 「교회와 문화」 29 (2012년 8월): 77-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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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8-09
  • 평등법에 나타난 마귀의 간계(엡 6:11-12)-황선우 교수
    (평등법에 대한 설교를 부탁드려 받은 설교 원고입니다. 기꺼이 자료를 주신 교수님께 감사드립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보이지 않는 영이신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역사하심, 일하심을 믿습니다. 그와 동시에 우리는 성경에서 말하듯이 보이지 않지만 악한 영도 이 세상에서 일하고 있음을 믿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에베소서 6장 12절에서 말합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엡 6:12) 이 악의 영들의 우두머리는 사탄이고 사탄은 마귀라고도 불립니다. 요한계시록 12장 9절에서는 “큰 용이 내쫓기는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며 온 천하를 꾀는 자라”(계 12:9) 고 말씀합니다. 이 사탄, 즉 마귀를 온 천하를 꾀는 자라고 말하는데 여기서 “꾀는”의 의미는 속인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뱀으로 나타난 마귀가 최초의 인간들인 아담과 하와에게 나타나 한 것은 무엇입니가? 하나님이 금지한 선악과를 먹으면 하나님과 같이 된다고 속인 것입니다. 마귀가 하는 일은 속이는 것이죠. 오늘 본문 에베소서 6장 11절에서도 마귀의 속임을 대적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엡 6:11) 여기서 “마귀의 간계”가 “마귀의 꽤”, “마귀의 속임수”입니다. 마귀의 간계에 넘어가지 말고 그 속임수에 넘어가지 말고 대적하라고 말합니다. 야고보서 4장 7절에서도 말씀합니다.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복종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약 4:7) 우리가 대적하는 이 마귀의 졸개라 할 수 있는 악한 영들 또한 우리가 대적해야 할 상대임을 오늘 본문 에베소서 6장 12절에서 말한 것입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엡 6:12) 여기서 말하는 것은 뭡니까? 우리가 사람들과 싸울 때가 많지만 사실 우리의 궁극적인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다, 즉 인간들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럼 무엇입니까?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한 영들을 상대함이라” 언뜻 보면 여기서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주관자들” 이 어둔 세상의 통치자들을 말하는 것 같지만 바로 앞에서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했기 때문에 여기서 우리가 싸워야 할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주관자들은 이 세상에 강력한 영향력을 끼치는 악한 영들을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싸워야 할 궁극적인 싸움은 영적싸움입니다. 때로는 겉으로 보기에는 사람과의 싸움처럼 보일 때도 있지만 실제로는 그 사람 안에서 역사하는 악한 영과의 싸움입니다. 이 싸움이 치열합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통해서 일하듯이 마귀도 사람을 통해서 일합니다. 이 세상의 영적전쟁을 적나라하게 펼쳐보면 이는 하나님의 영의 지배를 받는 사람과 마귀의 영의 지배를 받는 사람과의 싸움일 때가 많습니다. 지금 이 시대에 우리나라에서 일어나는 이 영적 전쟁의 대표적인 예는 동성애를 조장하고 동성혼을 합법화하려는 포괄적차별금지법, 평등법과의 싸움입니다. 작년 6월 29일에 포괄적차별금지법이 발의되어서 교회가 앞장서서 반대하고 많은 성도님들의 기도와 노력으로 하나님이 포괄적차별금지법을 막아주신 것을 많은 분들이 기억하고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1년쯤 지난 올해 6월 16일에 24명의 국회의원이 이번에는 평등법이라는 이름으로 포괄적차별금지법과 거의 동일한 법안을 발의했고 이어서 최근 8월 9일에도 13명의 국회의원이 또 다른 평등법을 발의했습니다. 조금 전에 본 요한계시록 12장 9절에서 마귀를 온 천하를 꾀는 자, 속이는 자라고 말했는데 마귀는 너무나 그럴듯한 이름으로 이 세상의 사람들을 속이는 법안을 제정하게 했습니다. 포괄적차별금지, 평등 이러한 말 자체는 얼마나 좋습니까? 이 법안의 이름이 너무 좋아서 이 법안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덮어놓고 좋은 법이라고 생각하기 십상입니다. 마귀의 전형적인 속임수, 오늘 본문 에베소서 6장 11절의 용어로 말하면 마귀의 간계, 아주 간사한 계획입니다. 북미와 유럽에서 포괄적차별금지법으로 교회의 입에 재갈을 물리고 그 사회를 더욱 타락시켜서 재미를 본 마귀가 우리 한국 사회도 같은 전법을 구사하고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 마귀의 간계를 분별하고 대적하지 않고 마귀의 꾀에 넘어가 버리면 이 사회는 더욱 타락하고 교회는 성경대로 말씀을 전할 때 극심한 핍박을 받고 성도들은 신앙의 양심을 갖고 살아가기 어려운 상황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평등법이 어떤 법인지 조금 말씀드리겠습니다. 기본적으로 포괄적차별금지법과 내용상 큰 차이가 없는 법이고 올해 발의된 두 개의 평등법도 대동소이하여 올해 6월 16일에 첫 번째 발의된 평등법에 기반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기독교에서 포괄적차별금지법과 평등법을 반대한다는 것이 차별과 불평등에 찬성한다는 의미는 물론 아닙니다. 우리나라에는 포괄적차별금지법이 아닌 개별적 차별금지법들이 이미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장애인 차별금지법, 여성차별금지법, 인종차별금지법, 연령차별금지법, 고용차별금지법, 고용평등법, 유전자정보차별금지법, 임신차별금지법 등입니다. 이런 차별금지법에 대해서 특별한 이슈가 없는 한 교회에서 반대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포괄적차별금지법과 포괄적차별금지법의 또 다른 이름 평등법을 반대하는 것의 중요한 이유는 이 법이 동성애를 지지할 뿐만 아니라 동성애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지 못하게 함으로 표현의 자유를 심각하게 초래하는 법이기 때문입니다. 구체적으로 평등법의 독소조항들을 보면 평등법 안에 마귀의 간계가 어떻게 내재되어 있는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평등법안 제4조 2항에서는 여러 사유로 인한 차별을 금지하고 있는데 거기에는 성적지향과 성별정체성으로 인한 차별도 금지하고 있습니다. 성적지향은 이성애, 동성애, 양성애 등의 성향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동성애자들은 자신의 성적지향을 동성애라고 말하겠지요. 성별정체성은 자신의 성별에 관한 자신의 인식을 말하는데 평등법 3조 1항에서는 성별의 정의를 이렇게 내립니다. “성별이란 여성, 남성, 그 외에 분류하기 어려운 성을 말한다” 이 정의에서 “그 외에 분류하기 어려운 성”은 제 3의 성을 말하는 것으로 그 예는 트랜스젠더입니다. 트랜스젠더는 생물학적으로는 남자인데 자신이 여성이라고 말하는 사람, 그 반대로 생물학적으로는 여성인데 자신이 남성이라고 말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이러한 트랜스젠더 중에는 성전환수술을 받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성경에는 인간의 성이 남자와 여자 둘 뿐이라고 말하는데 평등법에서는 트랜스젠더와 같은 제3의 성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평등법 4조에 보면 이러한 성적지향이나 성별정체성과 관련한 차별의 예로 괴롭힘을 말합니다. 평등법에서는 그 괴롭힘을 신체적, 정신적 고통을 주는 경우로 정의하고 그 예로 부정적 관념의 표시 등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어떤 동성애자가 목사의 설교 가운데 동성애는 죄라며 부정적으로 말하는 말을 들어서 정신적 고통을 받았다면 이 사람은 자신이 차별받았다고 말할 수 있고 그 목사가 평등법을 어겼다고 고소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1년 전에 포괄적차별금지법에도 이와 같은 내용의 법이 있었는데 평등법에도 동일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에 입각하여 동성애는 죄이고 트랜스젠더는 성경에 없는 성이라고 말하지 못하게 하는 역차별적 법입니다. 표현의 자유를 심각하게 침해하는 법입니다. 성경의 진리를 말하지 못하게 재갈을 물리는 법, 이 법이 통과되면 마귀가 얼마나 좋아할까요? 마귀의 간계가 숨어있는 법입니다. 22페이지 분량의 평등법안을 보면 이 사회전반에 영향을 주려는 의도가 매우 강합니다. 제9조를 읽어드리면 이렇습니다. “국가 및 지방자치단체는 이 법에 반하는(즉 평등법에 반하는) 기존의 법령, 조례와 규칙, 각종 제도 및 정책을 조사, 연구하여 이 법의 취지에 부합하도록 시정하여야 한다” 무슨 말입니까? 기존의 우리사회의 여러 법이나 제도도 이 평등법에 취지에 맞게 다 뜯어 고치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우리나라의 군형법에는 군에서 동성애를 인정하지 않고 처벌하는 법이 있는데 만약에 성적지향과 성별정체성에 따른 차별을 금하는 평등법이 통과되면 이 평등법의 취지에 맞게 군에서 동성애를 처벌하지 않도록 법을 개정해야 함을 말합니다. 또한 이 평등법이 통과되면 성적지향과 성별정체성에 따라 차별하지 않는 취지에 부합하도록 남자와 여자 사이의 결혼만 인정하는 현행 민법을 개정하여 동성간의 결혼도 인정하도록 바꿔야 한다는 것입니다. 남자와 남자, 여자와 여자가 부부가 되는 것을 법적으로 제도화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남자와 여자가 결혼하여 한 가정을 이루는 성경의 창조섭리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반성경적인 가족제도를 합법화하는 법안이 통과되면 마귀가 얼마나 좋아할까요? 우리는 이 포괄적차별금지법 혹은 평등법이 먼저 통과된 서구의 나라들에서 동성간의 결혼을 합법화된 안타까운 예들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가 그 세속화된 서구사회의 전철을 밟아서는 안되겠습니다. 평등법 13조에 보면 여러 이유로 인하여 모집과 채용 등에서 차별을 금지하는데 여기서 여러 이유에는 성적지향과 성별정체성이 포함됩니다. 예를 들면 기독교 기업이 직원을 채용할 때라든지 기독교학교에서 학생을 모집할 때에 동성애자나 트랜스젠더라는 이유로 채용이나 모집을 안 할 수 없게 됩니다. 심지어 교회에서 사역자를 뽑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차별금지법이 통과된 영국에서 2007년에 실제로 있었던 일입니다. 영국성공회의 청소년 사역자 포지션에 지원했다가 불합격한 성공회 사제가 자신이 불합격한 이유는 동성애자였었음을 밝힌 것 때문이었다고 소송을 진행했고 결국 영국 법원은 지원자의 손을 들어준 사건이 있었습니다. 교회가 사역자로 동성애자를 뽑지 않을 자유를 박탈당했다면 기독교 기업이나 기독교 학교의 자유가 침해되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평등법 25조에서는 보건의료 서비스를 제공할 때에도 성별 등을 이유로 차별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있는데 “성별 등을 이유로”라고 말하는 것은 성별 이외에 다양한 이유로 차별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물론 성적지향과 성별정체성이 포함됩니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크리스천 의사에게 성전환 수술을 의뢰했는데 이 의사가 자신의 신앙의 양심상 성전환 수술을 할 수 없다고 한다면 이는 보건의료서비스를 제공함에 있어서 차별한 것으로 간주되고 법적인 제재를 당하는 상황이 발생하게 됩니다. 또한 매우 우려되는 부분이 평등법 29조에서 말하는 교육내용에서의 차별금지입니다. 29조에 따르면 성적지향이나 성별정체성에 관련하여 동성애나 트랜스젠더를 반대하는 내용을 가르치지 못하게 됩니다. 유치원부터 초, 중, 고, 대학교 심지어 신학교에서도 동성애나 동성혼 트랜스젠더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가르칠 수 없게 됩니다. 서구사회에서 학생들에게 어릴 때부터 동성애와 트랜스젠더에 대해서 가르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차별금지법의 교육내용 차별금지 조항 때문입니다. 이는 교육내용에 대한 차별금지가 아니라 교육내용의 자유를 심각하게 침해하는 교육내용에 대한 독재법인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자녀들이 어릴 때부터 학교 공교육을 통해 동성애와 트랜스젠더에 대해서 선택 가능한 하나의 옵션으로 배운다고 생각을 해 보십시오. 생각만 해도 끔찍합니다. 이렇게 끔찍한 법을 통해 이 사회를 무너뜨리려는 것이 마귀의 간계입니다. 평등법에서는 이러한 법들이 실제적으로 잘 작동하기 위해 여러 가지 장치를 마련해 놓았습니다. 33조에 보면 앞에서 말한 차별의 예들에 대해서 그 차별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고소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제 3자인 그 사람을 아는 주위 사람들 고발할 수 있도록 문을 열어 놓았습니다. 또한 차별을 당했다라고 호소하는 피해자를 위해 나라에서 소송지원변호인단을 운영할 수 있다는 조항을 두어 동성애자들이 자신들이 차별을 당했다고 고소, 고발할 때 나라의 세금으로 변호인단의 지원을 받을 수 있게 하는 법까지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리고 차별을 당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어느 누가 차별했다고 고소할 때 고소를 당한 사람이 피해자가 피해를 받지 않았음을 입증해야 승소할 수 있게 해 놓았는데 이는 차별을 당했다고 호소하는 자가 승소하기에 매우 용이하게 한 부분입니다. 예를 들면 목사가 동성애와 트랜스젠더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설교한 것을 듣고 어떤 사람이 정신적인 고통을 받았다고 그 목사를 고소한다면 그 목사는 그 고소한 사람이 괴로움을 갖지 않았다는 것을 입증해야 하는데 그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또한 차별을 했다고 고소, 고발당한 사람이 손해배상액을 내야 하는데 36조를 보면 그 최소 손해배상액이 500만원으로 되어 있습니다. 적지 않은 손해배상액입니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유튜브에 올려진 동성애의 죄에 대한 설교를 듣고 자신이 정신적 고통을 받았다고 설교자를 고소하고 손해배상을 청구하여 법원에서 받아들여지면 그 설교자는 최소 5백만원의 손해배상액을 벌금으로 내야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소송이 집단소송으로 가면 그 액수가 어마어마하게 커집니다. 만약에 100명이 모여 집단으로 그 설교자에게 손해배상을 청구하여 받아들여지면 그 설교자는 5억의 손해배상금을 벌금으로 지불해야 합니다. 표현의 자유, 진리의 선포를 막는 이 평등법은 절대로 제정되어서는 안 되는 법입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평등법은 평등을 위한 법이 아니라 성적지향, 성별정체성과 관련하여 교회의 입에 재갈을 물리고 양심, 사상의 표현을 제한하고 이 사회를 더욱 세속화시키며 하나님의 창조섭리를 정면으로 거스르는 악법입니다. 사람들이 이 악한 법안을 만들었지만 그 뒤에는 마귀의 간계가 있고 그러므로 이 싸움은 영적인 전쟁입니다. 이제 발의된 평등법이 국회에서 통과되지 못하도록 기도해 주시고 주위에 평등법의 실체에 대해 모르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 악한 실체를 알려주셔서 많은 기독교인이건 기독교인이 아니건 이 표현과 신앙의 자유를 심각하게 침해하는 이 법에 실체를 알리시길 바랍니다. 이 법을 통과시키려는 진영에서는 평등법에 찬성여부를 묻는 여론조사를 이용하는데 많은 국민들은 평등법의 실체를 모른 채 이름만 듣고 좋은 법이라 생각하고 찬성한다고 답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표현과 신앙의 자유를 억압할 뿐만 아니라 이 사회의 건강한 질서를 무너뜨리고 우리 자녀들의 교육을 망가뜨리는 이 악법의 실체를 기독교인이건 아니건 상관없이 알려서 전 국민적으로 평등법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갖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서명과 같은 반대의견 표명에도 힘써야 할 것입니다. 이 마지막 때에 공중권세 잡은 마귀의 역사가 강하지만 하나님의 능력은 마귀의 간계를 능히 물리치실 수 있음을 믿으시고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시고 마귀를 대적하여 승리하는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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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7-14
  • 기후위기 시대와 그리스도인의 삼중적 생태 전환
    기후위기 시대와 그리스도인의 삼중적 생태 전환 (본 소논문은 한 세미나에서 발표한 것인데 내용이 너무 시의적절해 파일을 받아 게재한 것입니다. 좋은 논문을 공유허락해준 윤 교수에게 감사합니다. 추후 교수들의 좋은 논문을 종종 게재할 계획입니다.) 지구상 모든 생명체의 생존과 관련된 기후변화는 기후학자나 정책결정자나 환경공학자만 관여할 문제가 아니라, 온 인류가 직면한 문제이다. IPCC가 발간한 일련의 보고서들을 포함한 여러 자료는 우리 시대가 기후변화가 초래할 총체적 재앙에 직면했음을 경고한다. 기후 위기 시대에 교회는 깨어진 창조세계를 치유하시는 하나님의 일에 참여하는 회복과 소망의 공동체로 거듭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생태적 인식전환을 도모해야 한다. 첫째, 그리스도인은 ‘인류세’나 ‘지속가능발전’과 같은 개념에 반영된 인간중심주의에 이의를 제기하고, 생태계와 역사 전체에 일어나는 일이 하나님의 주권에 달렸다는 기독교 섭리적 확신을 표명해야 한다. 기후변화에 대한 무관심이나 과민함 대신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기독교적 확신을 통해, 그리스도인은 위기의 시대에 깨어 있는 선지자로 설 수 있다. 둘째, 그리스도인은 기후위기가 초래할 양극화의 심화로 인해 소외당할 기후약자에 대한 제사장적 관심과 돌봄을 실천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생태적 약자를 존중하고 지탱하면서 동반자적 삶을 일구는 법을 터득하고, 자본주의적 욕망을 거스르는 기독교적 가치에 부합하는 공동체적 삶의 양식을 개발해야 한다. 셋째, 그리스도인은 기후위기 이면에 도사린 부정의와 불평등을 날카롭게 지적하며 의와 평강이라는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현실에 반영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우리는 자신을 자연과 세계에 대한 무한한 책임의식을 지닌 중보적 왕이자 하나님이 주인이신 세상에 잠시 머물면서 다른 손님들을 환대하는 나그네 왕으로 여겨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정의가 다양한 생명의 가치를 존중하고 하나님의 영광으로 향해 올바르게 번성해갈 수 있도록 활동하는 매개가 되어야 한다. 이러한 생태적 인식 전환을 통해서 그리스도인의 관심을 환기하고 기독교적 기후담론을 활성화하고 공동체적 운동을 일으키는 거룩한 생태적 선순환이 한국교회에서 일어나길 바란다. Ⅰ. 들어가는 말 블록버스터 재난 영화에서 CG로 그려진 천재지변이 뉴스 화면과 일상에 실제로 등장하는 일만큼 두려운 게 있을까? 그 공포의 전조와 같은 이상 기후 현상이 세계 각처에서 발생하면서 코로나 사태를 능가하는 불안감이 퍼지고 있다. 이제까지 지구온난화가 초래하는 기후변화는 직접적이고 현실적인 언어보다 모호하고 우화적인 언어 속에 있었다. 기후변화는 북극곰이나 펭귄, 산호초와 꿀벌의 생존을 위협할 뿐 사람 사는 세상과 무관한 것인 양 취급되었다. 애먼 북극곰이 지구온난화의 상징동물 역을 도맡은 것도 그런 탓이 크다. 하지만, 코로나19 사태로 전 세계가 몸살을 앓고 있는 사이 기후위기는 우화 속에서 현실로 뛰쳐나왔다. 우리는 이제껏 경험한 적 없는 이상기후 현상들이 고대 신화 속 괴물처럼 인간의 땅을 짓밟는 현실을 목격하고 있다. 호주 산불(2019-2020), 미국 서부 산불(2021), 중국 남부의 호우 사태(2020), 서유럽 홍수(2021), 시베리아와 캐나다의 고위도 지방에서 관측된 이상고온현상(2021), 초거대 모래폭풍과 황사(2021) 등 기상관측 이래 최초라는 재앙들이 잇달아 발생하고 있다. 바야흐로 기후재난의 시대가 도래하였다. 기후변화에 대한 우화적 어법은 어쩌면 인간이 지닌 언어의 불완전함 탓일 수 있다. 지구 생태계 전체가 얽힌 기후 현상을 제대로 이해해서 짚어낼 인간의 언어가 빈곤하고 초라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기후현상 자체가 인간의 사고와 인식을 훌쩍 넘어서다 보니 그것을 이해하기 위한 언어는 계속 흔들리며 변화했다. ‘지구온난화’(global warming)와 ‘기후변화’(climate change)라는 다분히 과학적이고 중립적인 용어는 ‘기후위기’(climate emergency)라는 절박한 용어로 바뀌더니, 이내 당혹감과 절망감이 완연한 ‘기후재앙’(climate disaster)이 되었다. 기후변화가 굶주린 북극곰이 민가의 쓰레기통을 뒤지는 영상을 TV 모니터 너머로 보던 사람들의 용어라면, 기후위기나 기후재앙은 북극곰을 덮친 비극에서 자신들도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실감한 사람들의 용어이다. 하지만 아직 인간은 ‘끓는 물속의 개구리 증후군’(The Boiled Frog Syndrome)1에 걸린 것처럼 기후변화에 절박한 위기의식을 못 느끼는 듯하다. 실감 나지 않는 위기에 적절한 대응이 뒤따를 리 만무하다. 그럼에도 용어의 변화는 인식의 변화를 가져왔다. 기후변화는 환경 전문가의 난해한 보고서를 벗어나 사회, 경제, 문화, 종교의 모든 영역에서 관심을 끌어내고 있다. 우화적 문법에 갇혔던 담론이 마침내 현실 문법으로 확장되고 있는 셈이다. 기후가 지구상 모든 생명체의 생존과 관련 있는 한, 기후위기 담론은 기후학자나 정책결정자나 환경공학자만 관여할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지구생태계 전체와 온 인류가 직면한 문제이기에 사회과학과 인문학과 신학과 일상의 대화가 덩달아 참여하는 담론장에 올릴 ‘모두의 화제(話題)’이다. 지금 당장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기후변화에 대한 최근의 분석과 예측을 공부하고 위기의 시대를 살아낼 담론과 실천을 고민해야 한다. 기후위기 시대에 교회와 신학은 무지한 공포나 탈속적 신비주의를 조장하기보다 기독교의 신념과 가치에 걸맞은 합리적 담론과 실천적 삶을 제시해야 한다. 이 글에서 논자는 한국교회에 기후위기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고 기후위기 시대를 대처하는 데 필요한 세 가지 생태적 전환을 촉구하고자 한다. Ⅱ. 현실이 된 기후위기 1. 「지구온난화 1.5℃」 특별보고서 지구온난화가 초래하는 기후변화가 중차대한 글로벌 의제로 부상한 것은 1970년대까지 거슬러 간다. 온실가스 배출로 인한 지구온난화 문제가 기후학자들의 입에 오르내리다가 1972년에 개최된 유엔인간환경회의(‘인류 환경에 관한 유엔 제1차 회의’, 일명 ‘스톡홀름 회의’)에서 처음으로 국제 회의에서 진지하게 다뤄졌다. 1979년에 제1차 세계기후회의가 개최되고 10여 년이 지난 1988년에 캐나다 토론토에서 개최된 ‘대기변화에 관한 세계회의’는 기후변화 방지를 위한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는 공동의 인식에 도달했다. 그 결과 유엔환경계획(UNEP)과 세계기상기구(WMO)가 공동으로 주관하는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간 협의체’(Intergovernmental Panel on Climate Change, IPCC)가 설립되었다. IPCC는 1990년부터 2013년까지 다섯 차례의 연구보고서를 발간하였고 2018년에 특별보고서를 작성하여 발표했다.2 오늘날 IPCC 보고서는 기후변화의 추이에 대한 분석과 예측에 관한 가장 과학적인 자료와 긴요한 통찰을 제공한다. IPCC가 1990년에 발간한 1차 보고서는 인간 활동으로 인한 대기 중 온실가스 농도의 급격한 증가로 지구 표면의 온도가 높아지면서 지구온난화를 일으킬 것이라고 예측했다. 1차 보고서의 충격으로 1992년에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열린 유엔환경개발회의(일명 ‘리우회의’)는 처음으로 현세대와 미래세대의 지속가능한 개발을 위해서 지구환경보존을 위한 세계협력의 기본원칙을 채택했고, 1994년에 세계 각국의 기후정책 발전에 결정적인 전환점을 마련한 ‘유엔기후변화협약’(UNFCCC)의 체결에 이르게 된다. 유엔기후변화협약은 각국의 온실가스 배출에 대한 강제성 있는 제약이나 법적 구속력이 없었고, 대신 시행령에 해당하는 의정서를 통해 의무적인 배출량의 제약을 시도했다. 1997년에 체결된 교토의정서(Kyoto Protocol, 정식 명칭은 ‘기후변화에 관한 국제연합 규약의 교토의정서’)는 이산화탄소를 비롯한 여섯 종류의 감축 대상 가스의 배출감소 목표를 지정하고, 2008년부터 2012년까지의 기간에 전체 선진국의 온실가스 배출량을 1990년 기준 5.2% 이하로 감축하는 목표를 제시하였다. 하지만 최다 온실가스 배출국인 미국, 중국, 인도는 협약에서 탈퇴함으로써 국제적 협의의 실효성을 무력화시켰다. 교토의정서 채택 이후에도 기후변화는 인간의 예측을 조롱하며 급격하게 진행되었다. IPCC의 1차 보고서와 2차 보고서는 인간의 활동이 기후변화에 영향을 끼칠 가능성을 입증하면서도 그 심각성을 부각하는 데에는 신중했다. 그럼에도 1차 보고서의 충격으로 리우회의가 열리고 유엔기후변화협약이 체결되었고 2차 보고서는 교토의정서에서 채택되는 성과를 거뒀다. 유엔 기후변화협약과 교토의정서의 채택이 실질적이고 획기적인 전환점을 마련하지 못하는 사이에 IPCC 보고서의 기조도 변했다. IPCC의 3차 보고서와 4차 보고서는 지구온난화와 인간 활동 사이에 분명한 연관성이 있으며 20세기 중반 이후 지구 평균 온도의 상승은 인위적인 온실가스 농도의 증가에서 기인했을 개연성이 매우 높다고 명시하고 인간의 활동이 이런 수준으로 지속되는 한 기후변화는 파국으로 치달을 것이라는 암울한 예측을 내놓았다. IPCC의 5차 보고서(2013)는 지구온난화가 인간의 개입으로 심화한 현상이며 지구온난화의 해결도 인간의 결단과 행동이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거의 단정적으로 내리는 것으로 그 임무를 종결했다. IPCC의 5차 보고서는 교토의정서를 대체하기 위해 2016년에 체결된 파리기후협약(Paris Climate Agreement)에서 채택되었다. 파리기후협약은 2020년 만료되는 교토의정서를 대체하여 2021년부터 적용될 기후변화 대응을 담았는데, 선진국에만 온실가스 감축의무를 부여했던 교토의정서와 달리 195개 당사국 모두에게 구속력 있는 전 지구적 기후 합의안으로 자리 잡았다. 파리협약은 최악의 기후변화 시나리오가 현실화하는 것을 막기 위해 지구의 평균 온도 상승이 1.5℃를 넘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3 2018년 10월에 인천에서 개최된 제48차 IPCC 총회에서 승인되고 채택된 「지구온난화 1.5℃」특별보고서는 충격 그 자체였다. 특별보고서는 현 추세대로 지구온난화가 진행된다면 10년마다 0.2℃씩 증가해서 2050년까지 지구 온도가 1.5℃ 상승하고 2100년에는 4℃ 이상 상승할 것이라고 예견했다. 설령 파리협약을 통해 국가별로 제시된 온실가스 감축 목표대로 진행된다고 할지라도 2100년까지 지구 평균 온도는 2.9℃∼3.4℃ 상승하게 될 것이며 이는 전 지구에 재앙으로 다가올 것으로 전망했다.4 특별보고서는 지구 평균 온도가 1.5℃ 상승하는 경우와 2℃ 상승하는 경우 지구생태계에 미치는 영향을 비교해서 제시하면서 2100년까지 전 지구 평균 온도 상승 폭을 1.5℃로 제한하지 않는다면 인류의 미래를 담보할 수 없다고 경고했다. 특별보고서는 단도직입적으로 대안을 제시한다. 파리기후협약이 대변하는 이전까지의 대응 방식으로는 ‘1.5℃ 제한’이라는 목표를 달성할 수 없으며, 지금보다 훨씬 더 신속하고 획기적인 대처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IPCC의 특별보고서는 2100년까지 지구 온도 4℃ 증가라는 끔찍한 종말 시나리오를 넌지시 보여줌으로써 안일하고 편향된 인식으로 현 상황에 안주하고 현실을 낙관적으로 외면해온 관행에 충격을 가했다. 2021년 8월 6일에 승인된 ‘IPCC 제6차 평가보고서 제1 실무그룹(과학적 기반) 보고서’는 앞서 특별보고서에서 제시했던 ‘지구 평균 기온 상승 1.5℃ 이하 제한’이 현실적으로 달성 불가능하다고 거의 단정적으로 전망한다.5 보고서는 온실가스 배출 추세가 현재와 같이 지속된다면 1.5℃ 상승하는 시점이 특별보고서가 예상했던 것보다 10년 앞당겨진 2021∼2040년이 될 것으로 예상한다. 이 보고서에서 IPCC는 온실가스 배출경로를 예측하는 5개의 시나리오를 제시하면서 온실가스 감축을 철저히 시행하는 최상의 시나리오로도 이 세기의 중반에 지구 기온이 산업화 이전보다 1.6℃에 이를 것으로 예상했다. 최악의 시나리오에 따르면 2100년까지 5.7℃까지 상승할 수 있다고도 보고서는 전망한다. IPCC의 보고서들은 한결같이 기후변화가 초래할 문제를 경고했다. 최근에 나온 두 보고서는 그런 위기가 예상보다 더 빠른 속도로 증폭되고 있으며, 인류가 위기를 앞두고 실효적으로 대처하지 못했음을 질책한다. 전 세계의 전문적 지성이 총동원돼서 작성한 IPCC의 보고서 논조를 반박하거나 부정하는 신뢰할 만한 연구는, 안타깝게도 발견하기 힘들다. 2. 전례 없는 수준의 거대한 재앙 IPCC의 보고서에는 과학적 도표와 그래프들이 가득하다. 그것들은 세상에 기후변화의 실상을 알리는 데 북극곰보다 효과적이지 않아 보인다. 기후변화를 도표와 그래프로 표현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기후라는 문제가 티모시모턴(Timothy Morton)이 ‘하이퍼오브젝트’(hyperobject)6라고 명명한 초거대 실체이기 때문이다. 기후변화는 ‘행성 단위의 공간’과 ‘문명을 넘어서는 시간’ 동안 광범위하고 복잡한 변수들이 얽혀서 발생하기에 인간의 지성이 인과관계를 완벽하게 파악하기 힘들다. 그뿐만 아니라 기후변화는 일상과 건강, 식량과 식수, 산업과 에너지, 고용과 경제, 정치와 경제 등 모든 인간의 삶에 광범위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인간의 행동이나 체제가 제어할 수도 없다. 1784년 아이슬란드의 라키 화산이 폭발하며 분출한 엄청난 화산재로 인해 유럽 지역 온도가 상승하고 각종 질병과 기근과 흉작이 발생하면서 결국 불안해진 유럽 사회에 혁명의 불길이 일어났는데,7 화산폭발과 프랑스 혁명 사이의 인과관계는 당시에 예측하거나 분석하기 불가능했다. 오늘날이라고 별반 다르지 않다. 기후위기에 대한 인간의 인지가 부조화하는 이유는 거대함뿐만 복잡함 탓도 크다. 기후와 같이 거대한 생물학적 체계는 수많은 상호작용이 파악 불가능한 구조로 얽혀있는 ‘피드백 고리’(feedback loop)를 형성한다. 피드백 고리 안에서 개별 현상은 다른 현상을 유발할 뿐만 아니라 시스템 자체에도 영향을 미친다. 다시 말해서 하나의 기상현상이 다른 현상을 촉진하거나 억제할 뿐만 아니라, 기후변화에 대한 인간의 대처가 되먹임을 일으켜 기후 시스템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 피드백 고리 안에서 기후변화는 사회갈등, 경제 불평등 심화, 에너지 위기, 전쟁과 폭동의 위협, 난민 문제, 패권 갈등과 정치지형의 변화, 전염병 대유행, 세계 경제 체제의 변화 등 모든 문제에 작용하고, 이에 대처한 인간의 반작용은 다시 불가해한 연쇄작용을 거쳐 전 세계 기후 시스템에 영향을 미친다.8 복잡다단한 피드백 고리는 기후위기 담론이 특정 전문분야가 독점하는 사안일 수 없다는 사실을 환기해준다. 기후위기를 논하는 담론 테이블에는 거의 모든 문제가 놓인다. 국가 간의 협력을 통한 글로벌 시스템의 개선, 선제 대응의 중요성, 시민사회와 개인의 자발적 협력, 외부적 충격에 대비한 사회적 공공 시스템의 필요성, 탄소제로 관련 기술의 개발, 미디어의 신속하고 정확한 정보 제공, 기후위기 리스크에 대한 정부와 기업의 대처 능력 들은 수많은 층위와 연관을 이루는 논의 중 가장 표면에 드러난 것일 뿐이다. 무엇보다도, 기후변화와 관련해 하이퍼오브젝트나 복잡다단한 피드백 고리 개념은 여러 기후 현상들이 점진적으로 변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작용을 통해 순식간에 임계점(tipping point)에 다다르고 급격한 충격을 가해서 시스템 전체의 붕괴를 가져올 수 있고, 우리는 그런 과정이나 시점을 제대로 예측하기 힘들다는 비관적인 사실을 말해준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기후변화에 대해서는 우리는 간헐적으로 혹은 국지적으로 발현되는 현상을 보면서 뭔가 일어나고 있다는 표면적 징후만 감지할 뿐 그 이면에서 정확히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 하지만, 임계점에 근접할수록 기후재앙은 부정할 수 없게끔 ‘감춰진 미래’에서 ‘드러난 현실’로 우리 앞에 펼쳐질 것이다. 뉴욕매거진의 칼럼니스트인 데이비드 월러스 웰즈(David Wallace-Wells)는 ª2050거주불능지구4(The Uninhabitable Earth)에서 전례가 없는 ‘대량 학살’로 현실화할 기후재난 시나리오를 생생한 필치로 그려준다. 월러스 웰즈는 기후변화에 대한 최근의 연구자료와 통계를 근거로 기후재난 시대의 시나리오를 12가지 항목으로 나눠서 다음과 같이 제시했다.9 ① 살인적인 폭염: 여름 최고기온이 평균 35℃ 이상인 도시가 현재 354개에서 2050년까지 970개로 증가하고, 2100년까지 세계 인구 2분의 1 혹은 4분의 3이 극심한 폭염에 노출되어 온열질환에 시달리게 될 것이다. ② 빈곤과 굶주림: 지구 온도가 1℃ 상승할 때마다 전 세계 곡물 수확량은 10% 감소하는데 4℃ 상승한다면 절반으로 감소한다. 파리기후협약의 목표대로 진행되더라도 2050년경 개발도상국 거주 국민 중 1억 5천만 명이 단백질 부족 상태에 처하는 등 세계는 식량부족 사태에 처하게 될 것이다. ③ 집어삼키는 바다: 파리기후협약의 1.5℃ 상승 목표가 달성되더라도 해수면은 최대 1.8m까지 상승하고 홍수피해는 160∼240% 증가하게 된다. 지구 온도가 4℃ 상승하는 경우 해수면은 최대 2.4m까지 상승하고 대부분의 해안 도시가 물에 잠기면서 세계 지형이 바뀌게 될 것이다. ④ 치솟는 산불: 화염 폭풍 수준의 전례 없는 대형 산불이 지구 곳곳에서 연중 수시로 발생할 것이다. 특히 그린란드나 러시아, 스칸디나비아 등 북극권 화재가 잦아질 것이다. 대형 산불은 이산화탄소 증가와 기온 상승, 산림의 메탄흡수 능력 저하, 해충 확산으로 인한 질병 확산 등 연쇄작용을 일으킬 것이다. ⑤ ‘날씨’가 되어버릴 재난들: 슈퍼 태풍, 대규모 폭우와 홍수, 뇌우 등 생각하지 못한 특수재난이 훨씬 자주 일어나 완전히 새로운 범주의 재난으로 일상적인 날씨처럼 닥칠 것이다. 이로 인해 재난으로부터 재건하고 회복하는 데 필요한 비용과 시간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할 것이다. ⑥ 갈증과 가뭄: 물부족 상황이 심화하고, 담수호와 대수층(지구 지표 아래의 지하수 저장고)의 수량이 고갈될 것이다. 기후변화의 연쇄작용을 물효율성이 저하되면서 수자원을 둘러싼 갈등이 고조될 것이다.10 ⑦ 사체가 쌓이는 바다: 인간이 배출하는 탄소량의 4분의 1 이상을 흡수한 바다의 해양 산성화가 심각하게 악화하고, 전 세계 해양생물 4분의 1을 지탱하는 산호초가 백화 현상으로 파괴될 것이다. 해안 도시는 악취로 뒤덮이고 해양 무산소화로 인해 해양생물 멸종과 어장 파괴가 연 쇄적으로 일어날 것이다. 무엇보다도 해류가 변화하면서 바다 순환 시스템이 붕괴되는 징조가 현저해질 것이다. ⑧ 마실 수 없는 공기: 대기 중 이산화탄소 농도 증가로 어린이의 정신질환 가능성과 성인의 치매 가능성이 가파르게 상승할 것이다. 사막화로 인해 미세먼지가 증가하면서 호흡기 질환 감염률이 비약적으로 상승하게 된다. ⑨ 질병의 전파: 일종의 기후 장부와 같은 영구 동토층이 녹으면서 미지의 박테리아 유출 가능성이 고조되고, 황열병이나 말라리아 발병지역이 이동하면서 전염병의 세계화가 진행될 것이다. ⑩ 무너지는 경제: 화석연료의 힘으로 일으킨 경제성장은 기후변화로 인해 신기루처럼 흩어질 것이다. 현 추세대로 탄소 배출량을 유지한다면 남아시아 국민 8억 명의 생활수준이 급격하게 떨어지게 될 것이다. 기후변화가 전 세계에 초래하는 경제적 손실로 대공황을 넘어서는 경제 대몰락을 겪게 될 것이다. 기후변화는 세계가 지금까지 이뤄놓은 기술혁신의 영향을 현저하게 줄이거나 완전히 상쇄할 것이다. ⑪ 기후분쟁: 메콩강을 둘러싼 중국과 인도차이나반도 국가 사이의 분쟁에서 보이는 것처럼 국가 간의 자원 전쟁 위협이 고조될 것이다. 가정폭력이 늘고 범죄율이 증가하는 등 개인 간의 분노와 폭력도 심화할 것이다. ⑫ 시스템의 붕괴: 기후변화는 후진적 체제 국가나 빈곤국에 치명타를 가하면서 2050년까지 2억 명에서 최대 10억 명까지 기후난민을 발생시킬 것이다. 자본주의 시장이 붕괴하고 부유한 나라와 사람들이 재화와 서비스를 독점하게 될 것이다. 사회 시스템뿐만 아니라 몸의 시스템과 정신의 시스템도 붕괴될 것이다. IPCC 보고서의 차분한 과학적 분석에 비해 월러스 웰즈의 시나리오는 극적으로 과장된 것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유엔환경계획(UNEP)이 발표한 ‘2020년도 배출량 격차보고서’(Emission Gap Report 2020)는 현재 추세대로라면 2100년 이전에 지구 온도가 3.2℃ 상승하리라 예측함으로써11 웰즈의 시나리오가 허황한 것이 아님을 ‘과학적으로’ 뒷받침했다. 이미 세계는 지구 평균 온도가 산업혁명 시기보다 1℃ 상승한 2017년부터 이상기후 현상이 빈번하게 나타나고 있다. 50도에 육박한 북미의 폭염, 중국을 강타한 폭우, 중동지역의 가뭄, 시베리아의 이상고온현상, 호주와 미국서부, 터키와 그리스를 강타한 초대형 산불 등 기상이변이 속출하자, 전 세계 과학자 1만 3800여명이 바이오사이언스에 공동 성명문을 내고 “[기후변화가] 지구 시스템의 중요한 부분과 관련한 임계점에 점점 가까워지거나 이미 넘어섰다는 증거들이 늘어나고 있다”라며 세계 각국 정부에 조속한 대응을 촉구하기도 했다.12 기후 비상 선언처럼 읽히는 성명서에서 객관적인 중립성을 금과옥조로 여기는 과학자들조차 위기의식을 가감 없이 드러낸다는 것은 그만큼 사태가 절박함을 방증한다. 지난 수십 년 동안 기후학자들은 ‘탄광 속 카나리아’와 같은 신세였다. 기후위기론은 조작된 공포나 강박적인 위기 조장이라는 지탄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기후학자들의 경고는 인위적인 기후재앙론에 불과하고 막연한 공포심을 자극해서 이익을 취하는 세력이 있다는 반대론자의 목소리도 만만치 않았다. 지구온난화가 인간 활동의 결과라기보다 지극히 자연적인 현상이며 인류는 이제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변하는 기후조건에 적응할 수 있다는 기후회의론자들이 오히려 사람들의 정서적 지지와 호응을 받았다.13 하지만, 불과 몇 년 사이에 기후붕괴를 경고하는 카나리아의 울음소리가 시끄러울 정도로 늘어났다. 기후위기론을 불편해하던 사람들도 전 세계에서 속출하는 이상기후에 당혹해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기후위기에 대해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급격한 기상현상이 신학적 사유의 동기로 작용하고 종교적 관습의 변화를 불러왔다는 볼프강 베링어의 문명사적 통찰에 귀기울 필요가 있다. 베링어에 따르면, 17세기 소빙하기의 유럽에서 극단적인 기상이변이 발생하고 흉작과 전염병, 폭동과 전쟁이 빈번했을 때, 독일 지역에서 죽음의 예술(아르스 모리엔디, Ars Moriendi)이 유행하고 불안한 사회를 통제하려는 강압적인 법률이 쏟아졌으며, 도덕적 절제를 강조하거나 세속적 삶을 극단적으로 부정하고 유대인 박해나 마녀사냥으로 희생양을 찾는 종교적 광신주의가 등장했다.14 17세기가 지나면서 종교적 사유와 체제가 이상기후가 일으킨 사회적 문제와 국가적 위기를 해결하는 데 무력함을 노출했을 때, 서구사회에서 “사유의 세속화”와 “세계의 탈주술화”가 일어나서 사제와 신학자와 연금술사와 점성술가가 독점했던 담론 주도권이 국가관료와 과학자에게 넘어갔다.15 21세기 인류에게 닥친 기후위기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 거대한 위기는 교회와 그리스도인에게 역사상 유례가 없는 도전을 던지며 새로운 담론과 실천의 대전환을 요구할 것이다. Ⅲ. 그리스도인의 삼중적 생태 전환 1. 하나님의 섭리를 확신하며 깨어 있는 선지자 기후위기 앞에서 사람들은 무관심과 과민함의 극단 사이에서 다양한 반응을 보일 수 있다. 어떤 이들은 과거와 달리 현재 인류가 이룩한 과학기술로 기후변화에 충분히 대처할 수 있다며 애써 낙관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현재의 과학기술이 임박한 기후재난을 해결할 수준으 로 급격하게 발전할 가능성에 회의적이다. 200년 동안 인류의 발전을 이끈 화석연료 중심의 에너지 시스템을 청정에너지 기술로 대체하는 데 얼마나 오랜 시간과 비용이 들지 예측하기조차 힘들다. 인류가 이룬 최첨단 과학기술로도 기후재앙을 통제할 수 없다는 사실이 명확해질 때, 개인과 공동체는 심리적인 아노미 상태를 일으킬 수 있다. 기후위기로 인해 글로벌 경제 시스템이 요동치면서 역사상 가장 풍요로운 시대가 급격히 물러가고 궁핍과 혼돈의 시대가 닥친다면, 편안함에 익숙했던 사회와 개인은 패닉상태에 빠질 것이다. 과민한 두려움 못지않게 강력한 심리적 방어기제는 정서적 무관심과 현실도피이다. 천적이 쫓아오는 위기 상황에서 땅에 머리를 묻고 꼼짝하지 않는 타조처럼, 기후위기의 현실을 외면하고 기술적 판타지나 종교적 판타지로 도피하려는 경향이 얼마든지 나타날 수 있다. 거주가능한 지구형 행성으로 이주를 꿈꾼다거나, 생물학적 조건을 탈피하여 가상현실과 사이버 라이프로의 디지털 전환을 꿈꾸는 포스트휴머니즘이 그런 예이다.16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 하나님의 섭리와 구원을 확신한 나머지 기후위기 문제에 둔감하거나 낙관적인 태도를 가질 수 도 있다. 하지만, 참된 기독교 신앙은 현실과 동떨어진 신비주의로 도피하거나 윤리적 책임성과 사회적 신뢰에 둔감하지 않다. 그리스도인은 기후재앙이 현실로 닥칠 수 있다는 최악의 시나리오를 현실적으로 고려해야 한다. 그러면서도 그리스도인의 시선은 기후변화가 초래할 재앙과 같은 현실의 참혹함에만 고착되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기후위기와 그것이 초래할 총체적 위기 속에서 그리스도인은 기후위기 담론에 뛰어들어 인간중심의 사고에 이의를 제기하고 기후변화를 포함하여 생태계와 역사전체에 일어나는 일에 대한 섭리적 관점과 해석을 제시함으로써 선지자적 소명을 감당해야 한다. 첫째, 기독교 섭리적 관점으로 기후문제를 대한다는 것은 뿌리 깊은 인간 중심적 사고로부터 하나님 중심적 사고로 전환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조영호가 지적하듯, 기후변화는 인간이 일군 문명과 진보의 부산물이기 때문에 인간의 문제이다.17 기후변화에 인간 활동이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친 것인지 정확하게 측정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지구온난화가 인간이 개입된 현상이라는 사실을 부인하긴 힘들다. 어떤 이들은 기후변화가 지구와 인류의 긴 역사 속에서 소위 ‘인류세’(Anthropocene)18에 해당하는 현상이라고까지 말한다. 하지만, 이런 인식이 인간의 무분별한 발전과 자본주의적 욕망이 기후위기를 불러왔다는 자각과 반성을 넘어서, 기후 문제를 인간 스스로 해결해야 하고 또한 해결할 수 있다는 신념으로 이어 진다면 중독을 일으킨 독(毒)으로 해독(解毒)도 하겠다는 무모함이 될 뿐이다. 기후위기를 초래한 인간중심주의라는 거짓 신화는 자본주의 시스템이라는 화로에 인간의 이기심과 욕망의 불씨를 담아둔 채 기후변화를 해결하겠다는 난센스를 재생산해내고 있다. 기후 담론에서 자주 등장하는 ‘지속가능발전’(sustainable development)이란 개념은 기후변화를 바라보는 인간중심적 사고뿐만 아니라 성장과 기득권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자본주의의 탐욕스런 욕망을 고스란히 반영한다. 지속가능발전이란 “현재 세대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미래 세대가 사용할 경제, 사회, 환경 등의 자원을 낭비하거나 여건을 저하시키지 않고 서로 조화와 균형을 이루는” “지속가능성에 기초하여 경제의 성장, 사회의 안정과 통합 및 환경의 보전이 균형을 이루는 발전”을 뜻한다.19 지속가능발전의 사고 틀에서 기후변화와 생태위기는 자본주의적 성장이란 대의의 부수적 문제(collateral damage)에 불과하다. 앞서 살펴본 IPCC의 보고서들은 지속가능발전이 허상이라고 지적한다. 현세대의 필요와 욕구를 충족시키되 미래세대가 사용할 자원을 낭비하지 않는, ‘닭을 잡아먹고도 달걀을 계속 얻을 수 있는’ 신기한 마법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러시아 룰렛 게임’이나 ‘시한폭탄 돌리기’에 빗대는 기후변화를 대처하는 데에 ‘지속가능발전’이란 개념은 사안의 본질을 흐려놓을 뿐이다. 그리스도인은 이러한 인간중심주의에 제동을 걸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목소리가 될 수 있다. 둘째, 그리스도인은 기독교적 기후담론을 통해 기후위기가 인간의 문제이기 이전에 창조와 구속의 역사를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의 과정이라는 확신을 표명해야 한다. 진화론적 인본주의 관점에서 기후는 자연적인 초거대물(natural hyperobject)이지만, 기독교적 관점에서는 신적 초거대물(divine hyperobject)이다. 인간과 인간의 활동이 기후변화의 과정과 결과에 영향을 미칠지라도,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와 구속의 역사를 뛰어넘거나 거스를 수 없다. 어떤 사건이든지, 그것이 설령 재난과 재앙일지라도, 그 일을 통해 하나님은 자신의 왕 되심과 거룩하심과 언약과 사랑을 드러내실 것이다.20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확신을 바탕으로,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막연한 두려움이나 무책임한 무관심이 아닌 ‘현실을 직시하는 '선지자적 경각심’ 으로 기후위기 시대를 대비해야 한다. 교회는 위기와 혼란의 시대마다 곰팡이처럼 퍼졌던 컬트적 사고와 사이비 종말론이 세상을 어지럽히지 않도록 깨어 있어야 한다. 기후위기시대에 기독교적 담론과 실천은 개인과 사회, 신학과 인문학, 독립과 연대, 저항과 공조의 다양한 방식으로 모색될 테지만, 가장 근본적인 정서와 태도에 있어서 ‘두려움으로부터 섭리적 확신으로의 전환’, ‘인간중심적 오만으로부터 선지자적 경각심으로의 전환’이 전제되어야 한다. 2. 자연과 약자를 돌아보는 제사장 인류가 직면한 기후위기 해결이 어려운 까닭은 위기가 자본주의 시스템 자체로부터 기인해서 문명 자체를 포함한 생태계 전체로 퍼졌기 때문이다. 자본주의가 초래한 사회적, 생태적 위기의 대안으로 거론되는 생태친화적 소비, 그린뉴딜 정책, 저탄소녹색경영 등의 신자유주의적 생존전략은 자연과 노동에서 이윤을 추출하는 자본주의의 생리를 벗어날 수 없다는 한계를 지닌다. ‘녹색’ 자본주의니 ‘지속가능한’ 자본주의니 하는 환경친화적 명명만으로 자본주의의 한계를 극복하고 시스템 자체를 바꿀 수없다.21 그런 탓에 기후 전문가들과 환경학자들과 과학자들은 글로벌 체계 전체가 대전환을 맞이하지 않는 한 소용돌이와 같은 기후재앙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을 막을 수 없다고 말한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인간의 활동이 극단적으로 제약될수록 지구의 환경이 개선되는 ‘코로나의 역설’은 기후위기 해결의 딜레마를 극명하게 보여준다.22 지구온난화의 심각성을 경고하는 각계의 외침에도 지지부진했던 각국의 온실가스 감축은 코로나19 사태가 터지고 전 세계가 셧다운 상태에 돌입했을 때 일시적으로 극적인 진전을 보였다. 세계의 공장이라고 불리는 중국의 경제활동이 거의 정지되자 전 세계 탄소배출량이 25% 이상 감소했고, 인도의 수질개선으로 멸종위기종이었던 갠지스강 돌고래가 발견되고, 관광객의 급감으로 최악으로 치닫던 베네치아의 수질이 개선되는 등 세계 곳곳에서 자연의 회복이 관측되었다.23 코로나의 역설은 기후위기의 어두운 부분과 밝은 부분을 동시에 노출했다. 한편으로, 코로나 바이러스의 창궐은 인간의 무분별한 발전으로 생물 다양성이 파괴된 결과로 일어난 사건이라는 점에서 기후변화의 어두운 면이다. 다른 한편으로, 코로나 사태는 전 세계 정부와 산업과 의료와 과학이 일사불란하게 협력하여 공동의 위기에 대처할 수 있음을 보여줬다는 점에서 기후위기 극복의 가능성과 희망을 품게 한다. 하지만 낙관적인 전망은 시기상조이다. 전염병 대유행은 기후변화가 불러올 재앙들 중 하나에 불과하다. 글로벌 시스템이 붕괴할 임계점에 이르면 보호무역주의와 자급자족경제를 강화하는 등 자국 우선주의가 팽배해지고 글로벌 협력의 유대는 쉽게 와해될 가능성이 크다. 코로나19 대유행에서 몇몇 선진국이 백신을 확보하기 위해 보여준 치졸한 행태는 자국중심주의와 국가 이기주의가 얼마나 강력한 집단본능인지 다시 한 번 확인해줬다. 인류가 기후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지속가능한 탈탄소사회로의 급격한 변침의 모멘텀을 조속하게 마련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24 오히려 기후위기는 부정의와 불평으로 인한 양극화를 심화시키면서 우리 사회의 폐부를 깊이 찌를 것이다. 재난은 보편적으로 닥치지만, 그 영향은 차별적으로 미친다. 기후재난 앞에서 가장 치명적인 이들은 사회적 약자이다. 미국의 사회학자 에릭 클라이넨버그(Eric Klinenberg)는 1995년 미국 시카고를 덮친 폭염 사태에서 1인 가구, 노인, 빈곤층, 노숙자 등 사회에서 버림받은 취약계층이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사실에 주목했다.25 클라이넨버그는 폭염과 같은 기상 참변이 불가항력의 자연현상이지만 연령, 성별, 인종, 경제력, 거주지역 등 다양한 사회적, 정치적 요인과 결합하여 ‘총체적인 사회적 사실’26로 나타난다고 통찰했다. IPCC의 4차 보고서도 역시 기후변화의 일차적 희생자가 빈곤국가, 빈곤계층, 어린이와 여성, 일용직과 비정규직 육체노동자, 장애인과 경제적 소외 계층이 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기후위기 시대에 사회적 약자는 곧바로 생태적 약자로 직결되는 셈이다. 기후재앙이 심화하여 수많은 기후빈민과 기후난민이 쏟아져 나올 때 사회와 국가의 대처와 별도로, 교회의 제사장적 돌봄이 어느 때보다 절실하게 필요할 것이다.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기후위기 시대에 자본주의의 내재적 한계로 인해 더 크게 고통받을 기후 약자를 돌봐야 한다. 교회는 근시안적이고 무책임한 자기성장과 물질적 풍요만을 추구하는 자본주의 체제가 보지 못하는 약자들을 찾아야 한다. 세상의 체계 안에 있지만 거기에 속하지 않는 ‘중보적 위치’에 선 교회는 사회와 제도에서 소외당하는 기후 약자를 찾아서 그들의 영적, 심리적, 물질적 어려움을 돌 봐야 한다. 더 나아가 기후위기로 인해 급격하게 그 수요가 폭증할 것으로 예상되는 기후난민에 대한 기독교적 섬김과 선교의 방안을 지금부터 고민하고 대비할 필요가 있다.27 기후위기 시대에 교회는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를 확신하면서도, 영성과 경건의 능력을 발휘하여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제사장적 삶에 힘써야 한다. 자연과 타인(특히 사회적 약자)에 대해서 존중과 섬김의 자세로 서로 지탱하고 반영하고 치유하며 동반자적 관계성을 맺는 삶의 기술을 연마함으로써 기독교적 생태 윤리를 실천해야 한다. 이는 단순히 친환경적 생활방식에 관한 것이 아니라 더 근본적으로 자본주의의 욕망을 제어하지 못하는 삶의 양식과 결별하고 기독교의 가치에 부합하는 삶의 양식을 개발하는 노력으로 이어질 필요가 있다. 더 나아가 자연과 타인과 약자에 대한 제사장적 중보 윤리는 개인, 사회, 국가를 아우르는 전방위적 차원에서 구조적 형성과 공동체적 참여를 도모해야 한다. 개인 윤리의 차원에서 절약과 재활용을 실천하는 친환경적 생활을 습관화하도록 서로 독려하는 한편, 기후변화에 관한 진실을 공유하는 환경세미나를 열고 환경운동단체의 캠페인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며 환경단체들끼리의 연대와 협력을 강화해야 한다.28 더 나아가 환경입법을 지지하는 국민청원 등을 통해 정치적 결단을 촉구하고 국민적 여론을 형성해야 한다.29 3. 하나님 나라의 정의를 갈구하는 순례자 왕 기후변화는 세속주의와 자본주의, 관료주의와 산업화를 통해 세계를 재편한 현대성이 지닌 탐욕과 폭력이 전 지구적 파괴로 귀결된다는 폭로이고 징후이다. 현대성이 자연과 환경에 가장 적대적 파괴를 일으킴에도 불구하고, 현대인은 인간의 횡포와 무차별적 파괴를 정죄할 수 있는 악과 불의의 개념을 고려하지 않는다. 탄소배출권을 거래하듯 분배하는 유엔기후협약에 정의와 평등과 인권에 대한 윤리적 고려가 결여되었다는 비판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 기후정의네트워크가 “유엔 기후 변화협약의 원칙인 공동의 차별화된 책임, 세대 간 형평성, 오염자 부담은 시장 메커니즘을 위해 훼손됐다”라고 지적하는 것 역시 ‘정의’의 관점에서 기후변화의 인식과 해결에 접근해야 한다는 촉구이다.30 기후정의는 기후위기의 이면이자 어쩌면 더 본질적인 측면이다.31 기후위기는 '정의의 부재'라는 세상의 민낯을 점점 더 드러내고 있다. 오늘날 글로벌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불의와 불평등은 이익창출의 유일하고 정당화된 방식이다. 막대한 화석연료를 소비하며 엄청난 양의 온실가스를 배출하는 국가들은 지구상에서 가장 부강한 국가들이다. 그들은 제삼 세계의 자원과 노동력 그리고 미래세대의 생존에 필요한 자원을 희생시켜 자신들의 욕구를 충족해왔다. 기후변화가 초래할 사회경제적 비용은 수익자 부담의 원칙을 따르지 않는다. 부정의하고 불평등한 자원과 이익의 분배 양상이 부담과 위험의 재분배에서 그대로 재현된다. 선진국들이 챙긴 이익에 대한 비용이 개발도상국과 빈곤국가에게 청구되는 것이다. 남반구의 가난한 국가들, 재난에 대한 완충시스템이 미비한 사회, 신에너지 친환경 정책을 수행할 기술과 자본을 갖추지 못한 저개발국, 기후변화에 대응할 수 없는 약소국가들의 가난하고 소외된 국민들이 기후변화의 혹독한 대가를 치를 것이다. 미국이나 중국 등 지구상에서 가장 강력한 국력을 지닌 나라가 기후변화에 적절하게 대응하지 않아 발생한 어마어마한 환경비용이 미래의 모든 인류에게 고스란히 부과된다.32 ‘정의의 부재’로 사람들이 통곡하는 기후위기 시대에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나라의 가치와 방식을 어떻게 드러내고 실현할 것인지 도전받는다. 하나님 나라 서사는 현실도피를 위한 방어기제가 아니다. 하나님 나라를 추구한다는 것은 역사적 삶으로부터 이탈하거나 탈속적이고 신비적 이상주의로 현실을 각색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하나님 나라를 향한 희구는 세상과는 다른 시선으로 역사와 현재를 통찰하고 현실을 위협하는 위기를 극복할 대안적 삶과 대안적 공동체를 일구려는 강력한 의지의 발현이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전초기지로 세상 가운데 서서 의와 평강과 희락의 가치를 다양하고 풍부한 방식으로 구체화하는 삶을 통해 창조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선한 통치에 참여한다는 사실을 선명히 드러내야 한다. 기후위기는 기독교의 본질을 되물으며 그 존재 이유를 위협할 수 있다.33 하지만 기후위기는 복음의 복됨과 교회의 교회다움이 가장 선명하게 드러날 수 있는 상황이다.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재앙과 같은 현실 속에서 인간의 고귀함과 품격을 지키며 서로 섬기고 사랑하며 사는 종말론적 삶의 비법을 나타내 보여야 한다. 교회가 드러내야 하는 삶의 방식은 종말을 사는 나그네 왕의 행보이다. 그리스도인은 이 땅에서 이뤄지는 창조와 구속의 역사에서 하나님이 모든 이야기의 저자이시고 주인이시고 우리는 나그네와 객으로 머물다가 떠나간다고 믿는다. 나그네 된 우리는 다른 피조물을 동일한 손님과 객 으로 겸손과 존중으로 환대하며, 이후에 머물 이들을 유념하고 섬겨야 한다. 종말론적 나그네는 순례자 왕이기도 하다. 자연과 세계에 대한 무한한 책임의식을 지닌 중보적 왕으로서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심부를 좀먹는 불의와 불평등을 외면하지 않는다.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하늘의 의 를 사모하는 만큼 이 땅의 ‘정의’에 민감하고 불의로 고통받는 약자를 잊지 않는다. 정의가 없이는 다양한 생명들의 가치가 존중받으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향해 번성해갈 수 없다. 그리스도인은 정부와 기업의 전문가적 관료주의에게만 맡겨둘 수 없는 기후위기 극복에 하나님 나라의 힘이 필요하다고 믿고, 세상의 불의를 해소하는 정의와 해방의 구속을 구해야 한다. Ⅳ. 나오는 말 기후위기는 우리 시대에 종말의 아포칼립시스처럼 어둡고 우울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예견된 위기는 도래하지 않는다고들 말한다. 비관적 전망이 그대로 실현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 쏟아져나오는 재난 시나리오의 극히 일부만 실현될지라도 인간의 삶은 예전과 같을 수 없게 된다. 기후위기는 실현되지 않을 가능성을 꼽아보는 자위적 외면으로 버틸 문제가 아니다. 하루라도 빨리 현실을 인식하고 머리를 맞대고 대응을 고민해야 한다. 인식이 전환되어야 관심을 일으키고 담론이 펼쳐지고 대안적 운동을 지속할 수 있다. 전례가 없는 수준의 위기 예고 앞에서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여기서 언급한 세 가지 인식과 삶의 전환을 통해서 이전과 전혀 다른 삶의 방식을 일굴 준비를 해야 한다. 즉, 시대의 광기에 휩싸이지 않고 하나님의 섭리적 주권을 확신하는 선지자적 경각심을 통해서, 기후약자들을 향한 제사장적 돌봄과 동반자적 유대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정의를 갈구하며 기후 부정의에 맞서는 나그네 왕의 결단을 통해서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그야말로 회개와 같은 수준의 생태적 전환을 꾀해야한다.34 기후재앙 혹은 기후붕괴의 총체적 위기 상황에서 교회는 하나님의 창조세계가 인간의 탐욕과 폭력으로 멍들고 무너져가는 현실을 애통해하고 거룩한 분노와 애절한 슬픔을 표출해야 한다. 하지만, 교회는 종말론적 경고를 남발하며 두려움의 연기를 피우는 컬트 집단으로서가 아니라 자연과 세상에 대한 무한한 책임감과 소명의식을 품고 깨어진 창조세계에 희년과 같은 치유와 재생의 역사를 일으키시는 하나님의 일에 참여하는 회복과 소망의 공동체로 거듭나야 한다. ---------------------------- 1. 미국 코넬대의 비이커 실험에서, 펄펄 끓는 뜨거운 물에 집어넣은 개구리는 곧바로 뛰쳐나오지만, 서서히 데워지는 물속에 넣은 개구리는 체온을 조절해가면서 머물다가 결국 죽음에 이르렀다는 데에서 유래한 용어이다. 여기서 착안하여 작가 올리비에 클레르크(Olivier Clerc)가 점진적으로 증폭되는 위기를 즉각적으로 인지하거나 적절하게 반응하지 못한 채 나쁜 상황을 맹목적으로 견디는 삶을 가리켜 ‘끓는 물 속의 개구리 증후군’이라고 불렀다. 2. 1차 보고서부터 5차 보고서까지 중요한 내용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자료로, 송재민, “기후변화 과학 및 국제 정책에 대한 고찰: 한계와 대안,” 「신학과철학」 29 (2016), 229를 참고하라. 3. 파리기후변화협정에 대해 간단하고 쉬운 해설은, Greenpeace 홈페이지에 나온 “10분만에 읽는 ‘파리기후변화협정’ A to Z”을 참고하라. https://www.greenpeace.org/korea/update/17235/blog-ce-paris-climate-agreement-a-to-z/ (2021.6.21. 접속). 4. 「지구온난화 1.5℃」 특별보고서의 주요 내용은 기후변화 홍보포털에서 제공하는 요약본을 참고하라.http://www.climate.go.kr/home/cc_data/2019/SR15_SPM_Korean.pdf (2021.6.21.접속). 특별보고서에 대한 간략한 해설은, 곽호철, “「지구온난화 1.5℃」 특별보고서에 나타난 기후위기와 기독교윤리적 대응,” 「대학과 선교」 42 (2019), 174-181을 참고하라. 5. IPCC는 3개의 실무그룹 보고서 및 특별보고서의 핵심 내용을 통합하여 종합보고서를 작성한다. 제1 실무그룹(WG I) 보고서는 기후변화의 과학적 보고서이고, 제2 실무그룹(WG II) 보고서는 기후변화의 영향과 적응 및 취약성에 관한 것이고, 제3 실무그룹(WG III) 보고서는 기후변화 완화에 관한 것이다. 6차 평가보고서(AR6) 제1 실무그룹(WGI) 보고서는https://www.ipcc.ch/report/ar6/wg1/을 참고하라(2021.7.21. 접속). 6. Timothy Morton, Hyperobjects: Philosophy and Ecology after the End of the World (Minn, Ill: Univ of Minnesota Press, 2013). Morton은 하이퍼오브젝트의 예로 블랙홀, 아마존 밀림, 유전(oilfield), 인터넷과 함께 기후변화를 꼽는다. 7. 인류의 역사에 기후가 미친 영향에 관한 연구는 비교적 최근에 수행되었다. 기후와 역사의 관련성에 관한 고전적인 연구로, Hubert H. Lamb, Climate, History and the Modern World, 김종규 역, ª기후와 역사: 기후, 역사, 현대 세계4 (서울: 한울, 2004)를 참고하라. 유사한 연구로, Wolfgang Behringer, A Cultural History of Climate, 안병옥ㆍ이은선 역, ª기후의 문화사4 (서울: 공감in, 2010)가 있다. 기상학자인 Lamb과 달리 역사학자인 Behringer는 기후변화가 문명의 전환에 미친 영향에 관심을 기울인다. 8. 복잡한 피드백 고리의 한 예로 아마존 열대우림의 파괴를 들 수 있다. 아마존 열대우림을 파괴하는 화재는 많은 경우 농경과 목축을 위한 고의적 방화에 기인한다. 아마존 우림 지역에 단기간에 광범위한 콩 재배지를 확보하려고 저지르는 방화는 브라질 정부에 의해서 조장되거나 묵인되었다. 여기에는 복잡한 국제관계가 작용한다. 중국에서 쇠고기 수요가 급증 하면서 사료용 콩 수요가 증가했지만 미중 간 무역 갈등으로 인해 중국이 미국산 대두를 대체할 브라질산 대두의 수입을 대폭 확대한 것이다. ‘브라질의 도널드 트럼프’라고 불리는 극우, 친중 성향의 자이르 보우소나루 대통령이 정권을 잡으면서 상황은 더 악화되었다. 보우소나루 대통령은 환경보호구역 지정 해제, 국립공원과 국영발전소의 민영화, 수력발전소 건설 등 반(反)환경ㆍ친(親)시장 정책을 밀고 나갔고 그 결과 아마존 열대우림의 파괴는 2008년 이후 최대 규모로 진행되고 있다. 강찬수, “미국-중국 무역전쟁이 아마존 열대우림을 파괴한다,” 「중앙일보」 (2019년 5월 25일). https://news.joins.com/article/23478966; BBC 코리아, “아마존 파괴 2008년 이후 최대 규모,” 「BBC」 (2020년 12월 1일). https://www.bbc.com/korean/international-55141679; 박병수, “아마존 열대우림, 한달새 ‘축구장 5만 8천개’ 면적 사라졌다,” 「한겨레」(2021년 5월 10일). https://www.hani.co.kr/arti/international/america/994510.html 들을 참고하라. 9. David Wallace-Wells, The Uninhabitable Earth: Life After Warming, 김재경 역, ª2050 거주불능지구4 (서울: 추수밭, 2021), 60-212. 10. 유럽의 정치지형까지 바꾼 시리아 내전은 다양한 원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지만, 2006년부터 2011년까지 이어진 가뭄과 흉작으로 정치적 사회적 불안 요인이 증가한 이유도 크다. 흉작과 기근으로 이촌향도 현상이 심화하고 민심이 돌아서면서 반정부 시위가 격화되고 유혈진압으로 내전으로 비화하는 악순환의 기점에 기후변화가 자리하고 있다. 11. UNEP 배출격차보고서 2020의 내용은 녹색아카데미 홈페이지에서 볼 수 있다. http://greenacademy.re.kr/archives/8998& http://greenacademy.re.kr/archives/9027 (2021.7.2. 접속) 12. “World Scientists’ Warning of a Climate Emergency 2021” (BioScience, 28 July 2021). https://doi.org/10.1093/biosci/biab079 13. 불과 10년 전에만 해도 기후위기론에 대한 반대가 거셌다. 경제학자이자 칼럼니스트 Hans Labohm은 IPCC를 비롯한 세계 기후학자들이 기후 위기를 과도하게 부풀리는 ‘기우론자’라고 비판하며 기후위기론의 자료나 통계가 허위 내지는 날조된 것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한스 라붐 “지구 온난화 ‘환상과의 싸움” 세계일보 2010년 12월 1일 자 기사 참고). 기후연구 분야의 전문가 중에서도 위기론에 반론을 제기하는 이들이 있다. 기후위기론을 불편해하는 견해에 대해서, Roy W. Spencer, Climate Confusion: How Global Warming Hysteria Leads to Bad Science, Pandering Politicians and Misguided Policies That Hurt the Poor, 이순희 역, ª기후 커넥션: 지구온난화에 관한 어느 기후 과학자의 불편한 고백4 (서울: 비아북, 2008)을 보라. 10년 전과 달리 최근에 기후위기론에 대한 노골적인 비판은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14. Wolfgang Behringer, ª기후의 문화사4, 227. 15. Wolfgang Behringer, ª기후의 문화사4, 264-269. 베링어의 역사 분석은 지나치게 포괄적이고 모호하다는 비판을 받지만, 삶의 모든 영역에 영향을 미치는 글로벌 기후현상이 미치는 사회적, 문화적, 종교적 영향에 대한 통찰은 충분히 주목할 만하다. 16. 포스트휴머니즘이 전제하는 인간과 인간 삶의 조건에 대하여, 윤형철, “포스트코로나 시대의 인간됨과 인간다움의 조건에 관한 단상: 포스트휴머니즘 인간론에 대한 기독교 신학의 답변,” 「조직신학연구」 37 (2021), 31-46을 참고하라. 17. 조영호, “기후변화와 인간, 그리고 윤리”, 「기독교사상」 719 (2018), 19. 18. 지질학상으로 1만 년 전부터 현재까지 신생대 제4기의 지질시대를 홀로세(Holocene)라고 부른다. 인류세(anthropocene)는 현생인류의 활동이 시작된 최근의 시기가 지구의 지질과 기후에 불가역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보고 홀로세와 구별되는 개념으로 고안되었다. 인류세에 대한 합의된 정의는 없으며 인류세의 기점으로 ① 약 6천 년 전 농경시대 ② 17세기 신대륙의 발견 ③ 18세기 산업혁명 ④ 20세기 인구 대폭발 등이 거론된다. 1980년대에 처음 등장한 인류세라는 용어는 ‘인류세 워킹그룹’(Anthropocene Working Group, AWG)을 출범시킨 네덜란드의 대기과학자 파울 크뤼천(Paul Crutzen)에 의해서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졌다. 2000년대 이후 인류세는 지질학의 범위를 넘어 자연과학이나 인문사회학에서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19. 지속가능발전(sustainable development)이란 개념은 1987년 세계환경개발위원회(WCED)가 발표한 브룬트란드 보고서 <우리 공동의 미래>에서 처음 등장한 이후 21세기에 가장 빈번하게 쓰이는 환경 패러다임적 개념이 되었다. World Commission On Environment and Development, Our Common Future (UK: Oxford University Press, 1987), 43을 보라. 논문의 표현은 국내에서 2018년에 제정되어 2020년부터 시행되고 있는 지속가능발전법(법률 제17326호) 제2조의 정의를 따른다. 20. 구약의 재난 사건을 통해 하나님의 자기 계시를 다루는 연구인, 김진수, “기근, 처형, 그리고 회복: 사무엘하 21:1-14에 나타난 하나님의 이미지,” 「성경과 신학」 50 (2009): 179-212를 참고하라. 21. David Travis, “지속 가능한 자본주의?”, in ª기후정의: 기후변화와 환경 파괴에 맞선 반자본주의의 대안4, 이안 앵거스 편 (서울: 이매진, 2012), 155. 22. “코로나의 역설...인간이 멈추자 지구가 건강해졌다”. (2020년 4월 3일자 동아사이언스 기사). https://www.donga.com/news/It/article/all/20200402/100480182/1 (2021.7.2. 접속) 23. “코로나19로 수질 개선...인도서 사라졌던 ‘갠지즈강 돌고래’ 발견” (2020년 4월 24일자. 뉴스펭퀸 기사) https://www.newspenguin.com/news/articleView.html?idxno=1558 (2021.7.2. 접속); “코로나의 역설...관광객 줄자, 60년 만에 맑아진 베네치아 운하” (2020년 3월 18일자 중앙일보 기사) https://news.joins.com/article/23732593 (2021.7.2. 접속) 24. 고재경 외, “코로나19 위기, 기후위기 해결의 새로운 기회,” 「이슈&진단」 412 (2020), 16-18. 이 보고서는 2008-2009년 금융위기가 고탄소 경제에서 저탄소 경제로 전환할 수 있는 기회였는데 전환의 모멘텀으로 만들지 못했다고 분석하고, 코로나19 사태를 기후위기 대비 대전환의 모멘텀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25. Eric Klinenberg, Heat Wave: A Social Autopsy of Disaster in Chicago, 홍경탁 역, ª폭염사회: 폭염은 사회를 어떻게 바꿨나4 (서울: 글항아리, 2018). 26. ‘총체적인 사회적 사실’은 인류학자인 마르셀 모스가 창안한 개념이다. 모스는 법률, 관습, 의례, 신화, 제도 등 서로 분리되어 존재하는 것 같은 요소들이 총체성을 형성한다고 말했다. 개념을 통해 모스는 한 사회를 구성하는 제도나 표상이 통합된 전체를 이루고 있음을 지적하였다. 모스의 사상을 소개하고 해설한 책으로, Bruno Karsenti, ª마르셀 모스, 총체적인 사회적 사실4 (서울: 동문선, 2009)을 참고하라. 27. 장훈태는 다양한 난민 발생 요인 중 자연재해와 같은 환경적 요인을 언급하면서, 환경난민의 경우 국외 난민보다 국내 난민이 더 빈번하고 규모도 훨씬 크다고 지적한다. 장훈태, “세계 난민 문제와 선교,” 「성경과 신학」 77 (2016), 175. 28. 2021년 5월 20일에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를 비롯한 여러 교단과 교계 단체는 “한국교회 2050 탄소중립 선포식”을 열고 기후위기에 대한 공동의 협력과 비상 행동을 다짐했다. 그즈음 기독교환경운동연대도 7주간 기후위기 집중 대응을 위한 그린 엑소더스 캠페인을 추진하면서 교회와 교계에 기후위기에 대한 경각심을 환기하려고 노력했다. 29. 기후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입안된 국내 정책과 법률에 관한 간단한 설명은, 송오식, “기후위기 대응을 위한 바람직한 정책과 제도: 성경적 원리에서 해답을 찾다,” 「종교문화학보」17 (2020), 91-96을 참고하라. 30. 기후정의네트워크, “기후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급진적인 새로운 의제가 필요하다,”in ª기후정의: 기후변화와 환경 파괴에 맞선 반자본주의의 대안4, 이안 앵거스 편 (서울: 이매진, 2012), 253. 기후정의네트워크(Climate Justice Now Network, CJN)는 제삼 세계, 원주민, 여성 그룹, 좌파 운동단체가 주도적으로 참여하며 급진적인 기후운동을 지향한다. 이들은 기후협상이 자본주의가 초래한 부정의를 해소하고 소외된 약자의 권리를 세우는 방향으로 급진적인 변화를 가져와야 한다고 주장한다. 31. 최근 기후변화 담론은 환경과 경제 위주에서 정의로의 전이를 보여준다. 유엔기후변화협약에서도 ‘정의로운 전환’(just transition)이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했다. 기후변화 담론에서 정의로운 전환에 대해서, 조효제, ª탄소 사회의 종말: 인권의 눈으로 기후위기와 팬데믹을 읽다4 (서울:21세기북스, 2020), 263-282.를 참고하라. 32. 2018년 스웨덴 의회당 바깥에서 결석시위를 시작한 그레타 툰베리(Greta Thunberg)는 2019년에 전 세계 2천여 개 도시에서 ‘기후를 위한 학교파업시위’를 주도하면서 다음 세대의 환경운동가로 급부상했다. 2019년 9월 열린 UN 기후행동 정상회의에서 툰베리는 각국 정상들 앞에서 기성세대와 선진강국의 무책임을 질타했다. 스스로 대멸종의 시대에 살아야 하는 세대라고 말한 툰베리는 젊은 세대의 분노와 절망감을 이렇게 대변했다. “지난 30년 동안 과학은 너무도 분명하게 경고했습니다. 정치적 해법을 마련해야 마땅했는데도, 당신들은 방관하기만 했으면서 어떻게 감히(How dare) 여기까지 와서 할 만큼 하고 있다는 말을 내뱉을 수 있습니까?…어떻게 감히 당신들은 이 문제가 ‘일상의 비즈니스’와 같은 몇 가지 기술적 해법으로 해결될 것처럼 말합니까?…당신들은 우리를 실망시키고 있습니다. 젊은 사람들은 당신들의 배신을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미래세대의 눈이 당신들을 주시하고 있습니다. 만약 당신들이 우리를 실망시키기로 결정한다면, 단언컨대 우리는 당신들을 결코 용서하지 않을 겁니다.”(Greta Thunberg의 Speech At The U.N. Climate Action Summit transcript 중에서 발췌인용함). https://www.npr.org/2019/09/23/763452863/transcript-greta-thunbergs-speech-at-the-u-n-climate-action-s ummit (2021.7.23. 접속). 33. 이정배, “기후붕괴 시대의 종교: 생태 맹(盲)에서 해방되는 기독교를 기대한다,” 「기독교사상」 719 (2018), 12. 34. 송준인은 이것을 “생태 정의로의 회심”(conversion to Eco-justice)라고 부른다. 송준인, “생태 정의로의 회심(conversion to Eco-justice),” 「기독신문」 (2021년 4월 6일). https://www.kidok.com/news/articleView.html?idxno=210541 (2021.8.2. 접속). 참고문헌 Behringer, Wolfgang. A Cultural History of Climate. 안병옥⋅이은선 역. ª기후의 문화사4. 서울: 공감in, 2010. Karsenti, Bruno. ª마르셀 모스, 총체적인 사회적 사실4. 서울: 동문선, 2009. Klinenberg, Eric. Heat Wave: A Social Autopsy of Disaster in Chicago. 홍경탁 역. ª폭염사회: 폭염은 사회를 어떻게 바꿨나4. 서울: 글항아리, 2018. Morton, Timothy. Hyperobjects: Philosophy and Ecology after the End of the World. Minn, Ill: Univ of Minnesota Press, 2013. Spencer, Roy W. Climate Confusion: How Global Warming Hysteria Leads to Bad Science, Pandering Politicians and Misguided Policies That Hurt the Poor. 이순희 역. ª기후 커넥션: 지구온난화에 관한 어느 기후 과학자의 불편한 고백4. 서울: 비아북, 2008. Travis, David. “지속 가능한 자본주의?”. In ª기후정의: 기후변화와 환경 파괴에 맞선 반자본주의의 대안4. 이안 앵거스 편. 서울: 이매진, 2012: 148-157. Wallace-Wells, David. The Uninhabitable Earth: Life After Warming. 김재경 역. ª2050 거주불능지구4. 서울: 추수밭, 2021. World Commission On Environment and Development. Our Common Future. UK: Oxford University Press, 1987. 강찬수. “미국-중국 무역전쟁이 아마존 열대우림을 파괴한다.” 「중앙일보」 (2019년 5월 25일). https://news.joins.com/article/23478966. 고재경 외. “코로나19 위기, 기후위기 해결의 새로운 기회.” 「이슈&진단」 412 (2020): 1-25. 곽호철. “「지구온난화 1.5℃」 특별보고서에 나타난 기후위기와 기독교윤리적 대응.” 「대학과 선교」 42 (2019): 171-203. 기후정의네트워크. “기후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급진적인 새로운 의제가 필요하다.” In ª기후정의: 기후변화와 환경 파괴에 맞선 반자본주의의 대안4. 이안 앵거스 편. 서울: 이매진, 2012. 김진수. “기근, 처형, 그리고 회복: 사무엘하 21:1-14에 나타난 하나님의 이미지.” 「성경과 신학」 50 (2009): 179-212. 박병수. “아마존 열대우림, 한달새 ‘축구장 5만 8천개’ 면적 사라졌다.” 「한겨레」 (2021년 5월 10일). https://www.hani.co.kr/arti/international/america/994510.html. 송오식. “기후위기 대응을 위한 바람직한 정책과 제도: 성경적 원리에서 해답을 찾다.” 「종교문화학보」 17 (2020): 87-108. . “기후정의와 성경적 정의.” 「종교문화학보」 18 (2021): 159-185. 송준인. “생태 정의로의 회심(conversion to Eco-justice).” 「기독신문」 (2021년4월 6일). https://www.kidok.com/news/articleView.html?idxno=210541 (2021.8.2. 접속). 송재민. “기후변화 과학 및 국제 정책에 대한 고찰: 한계와 대안.” 「신학과 철학」 29 (2016): 221-246. 윤형철. “포스트코로나 시대의 인간됨과 인간다움의 조건에 관한 단상: 포스트휴머니즘 인간론에 대한 기독교 신학의 답변.” 「조직신학연구」 37(2021): 26-61. 이정배. “기후붕괴 시대의 종교: 생태 맹(盲)에서 해방되는 기독교를 기대한다.” 「기독교사상」 719 (2018): 9-17. 장훈태. “세계 난민 문제와 선교.” 「성경과 신학」 77 (2016): 163-199. 조영호. “기후변화와 인간, 그리고 윤리.” 「기독교사상」 719 (2018): 18-29. 조효제. ª탄소 사회의 종말: 인권의 눈으로 기후위기와 팬데믹을 읽다4. 서울:21세기북스, 2020. 웹사이트 10분만에 읽는 ‘파리기후변화협정’ A to Z. https://www.greenpeace.org/ko- 기후위기 시대와 그리스도인의 삼중적 생태 전환| 117 rea/update/17235/blog-ce-paris-climate-agreement-a-to-z (2021.6.21. 접속) 「지구온난화 1.5℃」 특별보고서의 주요 내용에 대한 기후변화 홍보포털의 요약본. http://www.climate.go.kr/home/cc_data/2019/SR15_SPM_Korean. pdf (2021.6.21. 접속). IPCC 제6차 평가보고서(AR6) 제1 실무그룹(WG I) 보고서. https://www.ipcc.ch/report/ar6/wg1/ (2021.7.21. 접속). BBC 코리아. “아마존 파괴 2008년 이후 최대 규모.” 「BBC」 (2020년 12월 1일). https://www.bbc.com/korean/international-55141679. UNEP 배출격차보고서 2020의 내용을 수록한 녹색아카데미 홈페이지. http://greenacademy.re.kr/archives/8998 & http://greenacademy.re.kr/ar- chives/9027 (2021.7.2. 접속). “World Scientists’ Warning of a Climate Emergency 2021” (BioScience, 28 July 2021). https://doi.org/10.1093/biosci/biab079. Greta Thunberg. “Transcript: Speech At The U.N. Climate Action Summit.” https://www.npr.org/2019/09/23/763452863/transcript-greta-thunbergs-speech-at-the-u-n-climate-action-summit (2021.7.23. 접속) Abstract The Threefold Ecological Transformation of Christians in the Age of Climate Crisis Yoon, Hyung Chul Climate change, which is related to the survival of all living things on the planet, is not a problem that only climatologists, policy makers, or environ-mental engineers are concerned with, but is a problem facing all humankind. Several sources, including a series of reports published by the IPCC, warn that our time is facing the total catastrophe of climate change. In the era of climate crisis, the church must promote the following ecological trans-formation in order to appear as a community of restoration and hope that participates in God’s work of healing the broken creation. First, Christians should challenge the anthropocentrism reflected in concepts such as the ‘anthropocene’ and ‘sustainable development’, and express our conviction that what happens to ecosystems and history as a whole depends on God’s sovereignty. Through Christian conviction of God’s providence instead of indifference or hypersensitivity to climate change, Christians will be able to stand as awake prophets in times of crisis. Second, Christians should practice priestly interest and care for the climate vulnerable, who are apt to be marginalized due to the deepening polarization caused by the climate crisis. Christians must learn to live a life of com-panionship while respecting and supporting the ecologically weak, and develop a communal lifestyle that conforms to Christian values, not capitalist desires. Third, Christians should sharply point out the injustice and inequality behind the climate crisis and strive to reflect the values of the kingdom of God, such as righteousness and peace, in reality. We must see ourselves as an intermediary king with an infinite responsibility for nature and the world, and also a sojourner king who welcomes other guests while staying in the world where God is the Master. We need to be the medium of action so that the justice of the kingdom of God can respect the value of various lives and prosper properly toward the glory of God. Through this threefold ecological transformation, I hope that a holy eco-logical virtuous cycle that arouses collective interest, revitalizes Christian climate discourse, and provokes community movement takes place in the Korean chur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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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7-12
  • 구약성경의 동성애 - 퀴어신학의 구약해석 비판
    구약성경의 동성애1) - 퀴어신학의 구약해석 비판 - 1. 들어가는 말 구약성경에 동성애를 언급한 본문은 창세기 19장 1-11절, 레위기 18장 22절, 20장 13절, 신명기 23장 17-18절, 사사기 19장 16-30절, 열왕기상 14장 22-24절, 15장 11-12절, 22장 43-46절, 열왕기하 23장 7절, 욥기 36장 13-14절, 에스겔 16장 48-50절이다. 이 본문들에 대한 퀴어신학의 구약해석을 잘 보여주는 책은 2006년에 발간된 The Queer Bible Commentary로서 이 책은 Deryn Guest 외 세 명의 퀴어신학자들이 편집하였고 다수의 퀴어신학자들이 참여하여 구약과 신약 66권에 관해 주석한 것이다.2) 필자는 이 글에서 위의 동성애 관련 구약본문들이 동성애에 관하여 무엇을 말하는지 해설하고 동성애를 옹호하기 위하여 본문을 왜곡하여 해석하는 퀴어신학자들의 주요 논지를 비판하고자 한다. 2. 소돔의 동성애 동성애에 관한 구약의 첫 번째 본문은 타락의 상징으로 잘 알려진 소돔의 동성애를 기록한 창세기 19장 1-11절이다. 구약의 첫 번째 책인 창세기에 수많은 동성애자들이 있는 소돔이 기록된 것을 볼 때 동성애의 시작은 고대로 거슬러 올라감을 알 수 있다. 동성애를 뜻하는 영어 단어 ‘sodomy’도 바로 창세기 19장에 기원을 두고 있다. 창세기 19장 1-11절의 내용은 이렇다. 어느 날 사람의 모습(남자)으로 나타난 두 명의 천사가 소돔에 나타나자 소돔에 거주하던 롯이 그들을 자신의 집에 손님으로 맞이하고 음식을 대접한다. 그런데 그 천사들이 자기 전에 소돔의 백성들이 롯의 집을 에워싸고 롯이 맞이한 두 남자를 내어 놓으라고 말한다. 이 때 그 집을 둘러싼 소돔의 백성들을 “노소를 막론 하고 원근에서 다” 모인 소돔인들이라고 기록한 것(창세기 19장 4절)은 소돔 땅에 동성애가 얼마나 편만하게 퍼져있었는지를 보여준다. 개역개정에서 “소돔의 백성들”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안쉐 쏘돔”으로, 직역하면 “소돔의 남자들”을 의미한다. 롯의 집을 둘러싼 소돔인들은 롯에게 말한다. “오늘 밤에 네게 온 사람들이 어디 있느냐 이끌어 내라 우리가 그들을 상관하리라”(창세기 19장 5절). 여기서 “상관하리라”는 말은 히브리어, “야다”로서 그 원뜻은 “알다”(know)인데 이 “야다”가 문맥에 따라 ‘성교’(intercourse) 혹은 ‘동침’을 의미할 수 있다.3) 바로 이 본문에서 ‘성교’의 의미로 쓰였다. 히브리어 “야다”가 ‘성교’ 혹은 ‘동침’의 의미로 쓰인 대표적인 예는 창세기 4장 1절이다.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에서 “동침하매”로 번역된 것이 바로 ‘알다’를 의미하는 히브리어 “야다”이다. 이러한 소돔 사람들의 악한 요구에 롯이 자신의 손님인 이 두 사람들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 것을 말하자 그들은 롯을 밀치고 문을 부수려고 한다. 이 때 사람의 모습으로 온 천사들이 롯을 집 안으로 끌어들이고 천사들의 초자연적 능력으로 문 밖의 소돔인들의 눈을 멀게 하였다. 이 후 소돔 땅은 고모라와 함께 하나님의 유황과 불의 심판을 받게 된다. 3. 죄는 동성애가 아니라 집단 성폭력인가? 소돔인들이 롯에게 손님으로 온 두 사람을 내어놓으라는 요구에 롯은 그들에게 “이런 악을 행하지 말라”고 말한다. Michael Carden은 이와 관련하여 일방적인 성폭력과 합의하에 갖는 동성애를 구분할 것을 주장한다.4) 즉, 창세기 19장은 폭력으로 동성애를 강제하려 한 것을 기록한 것이지만 그렇지 않고 서로 간에 합의하에 동성애를 나누는 것은 악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창세기 19장을 언급한 성경의 다른 본문들을 살펴보면 롯이 말한 소돔 사람들의 악은 단순히 집단 성폭력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동성애를 포함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에스겔 16장 49-50절에서 소돔의 죄를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네 아우 소돔의 죄악은 이러하니 그와 그의 딸들에게 교만함과 음식물의 풍족함과 태평 함이 있음이며 또 그가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도와주지 아니하며 거만하여 가증한 일을 내 앞에서 행하였음이라 그러므로 내가 보고 곧 그들을 없이 하였느니라" 위 본문의 화자인 여호와는 소돔의 여러 가지 죄 중에 “가증한 일”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는다. 창세기 19장 1-11절에서 기록한 소돔의 죄는 다른 죄가 아니라 소돔에 퍼져 있는 동성애와 소돔 남자들이 롯의 집에 방문한 두 사람에게 강제적인 동성애를 요구한 것이다. 창세기 19장에 기록된 소돔의 죄가 동성애와 강제적인 동성애 요구인데 여호와가 소돔의 죄를 나열하면서 창세기 19장에 기록된 소돔의 죄를 생략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그러므로 소돔의 “가증한 일”은 바로 동성애와 그와 관련된 죄를 말하는 것일 것이다. 무엇보다도 여기서 “가증한 일”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토에바”인데 이 단어는 레위기 18장 22절과 20장 13절, 열왕기상 14장 24절에서 동성애를 지칭한다. "너는 여자와 동침함 같이 남자와 동침하지 말라 이는 가증한 일(토에바)이니라 (레 18:22) 누구든지 여인과 동침하듯 남자와 동침하면 둘 다 가증한 일(토에바)을 행함인즉 반 드시 죽일지니 자기의 피가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레 20:13) 그 땅에 또 남색하는 자가 있었고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신 국민 의 모든 가증한 일(토아보트-토에바의 복수형)을 무리가 본받아 행하였더라(왕상 14:24)" 히브리어 “토에바”는 매우 강한 혐오(abhorrence, abomination)를 의미하는 단어로 동성애가 하나님 앞에 매우 혐오스러운 범죄임을 알려준다.5) 물론 구약성경에서 히브리어 “토에바” 가 동성애만을 지칭하는 가증함은 아니다. 가나안 신상(신 7:26), 부정결한 짐승(신 14:3), 악인의 제물(잠 21:27), 율법을 듣지 않고 드리는 기도(잠 28:9), 악행을 저지르면서 드리는 분향(사 1:13), 이웃의 아내와 음행(겔 22:11) 등 여러 가증한 일을 “토에바”로 지칭하였다. 그러나 에스겔 16장 49-50절에서 “토에바”가 소돔의 죄와 관련하여 사용되었기에 소돔의 “가증 한 일”을 동성애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더 선명하게 소돔의 죄가 동성애임을 말해 주는 구절은 신약 유다서 7절이다. "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 도시들도 그들과 같은 행동으로 음란하며 다른 육체를 따 라 가다가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음으로 거울이 되었느니라" 여기서 “다른 육체를 따라”의 의미는 정상적인 이성의 육체가 아닌 동성의 육체를 쫓는 것을 의미한다. 유다서 7절에서는 소돔의 음란한 동성애가 불의 형벌의 원인이었음을 말한다. 결국 소돔의 죄를 언급한 에스겔 16장 49-50절, 유다서 7절, 그리고 동성애를 “가증한 일”(토에바) 로 일컬은 레위기 18장 22절과 20장 13절, 열왕기상 14장 24절을 고려하면 창세기 19장 1-11절의 소돔의 죄는 단순히 강제적인 성폭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동성애를 포함하고 있는 것임을 알 수 있다. 4. 동성애 금지명령 동성애를 율법으로 기록한 구절은 위에서 언급한 레위기 18장 22절과 레위기 20장 13절인데 이 두 구절은 구약에서 동성애를 행하는 죄의 무거움을 말해준다. 레위기 18장은 이집트를 탈출해서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향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가나안의 풍속을 따르지 말 것을 명령한 부분이다. 레위기 18장 22절에서는 가나안의 풍속인 동성애를 따라 행하지 말것을 명령한 것인데 이 명령문은 히브리어 부정어 “로”와 “동침하다”를 의미하는 동사 “샤카브”의 미완료 형이 결합된 구조로 절대적 금지를 나타내는 구문이다. 히브리어 “로”와 미완료 동사의 결합은 히브리어 금지명령 중에서도 영구적 금지를 암시하는 강한 금지명령문으로 십계명의 “-하지 말라”의 계명들이 이 구조를 갖고 있다.6) 히브리어 원문의 문장 순서를 보면 일반적인 금지명령문의 순서와 달리 문장 맨 앞에 “남자와 함께”(히브리어, “베에트 자카르”)가 위치해 있어서 여자가 아닌 “남자와 함께” 동침하는 것의 가증함을 강하게 강조하고 있다. 동성애와 같은 가증한 죄가 가져올 결과에 대해서 레위기 18장 29절에서는 가증한 행위를 한 자는 백성 중에서 끊어질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레위기 20장 13절 역시 동성애가 매우 무거운 죄임을 말해준다. 레위기 20장은 반드시 죽여야 하는 죄의 목록이다. 여기에 속하는 죄로는 자식을 몰렉에게 바치는 인신제사, 접신한 자와 박수무당을 따르는 죄, 부모를 저주하는 죄, 남의 아내와 간음하는 죄, 어머니와 동침하는 죄 등이 속하는데 이 목록 가운데 13절에 동성애가 포함된 것이다. 그러므로 13절 하반절에서는 동성애를 행한 자를 “반드시 죽일지니 자기의 피가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고 기록하고 있다. 위의 두 구절의 구문과 문맥을 통해 살핀 바와 같이 동성애의 죄는 결코 가볍게 지나칠 수 있는 죄가 아니라 매우 무거운 죄이다. 5. 동성애 금지명령은 구약시대와 남자에 한정되는가? 퀴어신학의 주장 중 하나는 동성애를 금하는 레위기 18장 22절과 20장 13절의 두 명령은 구약시대에 한정된 율법이므로 신약시대인 현대에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7) 마치 구약율법 가운데 부정한 돼지고기를 금한 율법(레위기 11장 7-8절)이 신약시대에 더 이상 효력을 미치지 않는 것처럼(마가복음 7장 15-16절) 동성애 금지명령은 신약시대에 더 이상 구속 력을 갖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에 대해서는 구약의 율법을 현대에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히브리서 10장 1절에서 말하듯이 율법은 장차 올 좋은 것의 그림자이다.(“율법은 장 차 올 좋은 일의 그림자일 뿐이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속죄와 관련한 의식법에 관하여는 예수께서 오셔서 희생제물이 되심으로 의식법의 그림자의 실체를 분명히 보여주셨다. 구약에는 속죄와 관련된 율법 외에도 다양한 율법이 기록되었는데 많은 율법은 그림자의 성격을 띠고 있고 그 실체가 명시적으로 드러나 있지 않다. 이럴 때 신약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은 그림자의 율법의 실체를 파악하여 신약시대의 삶의 원리로 적용할 수 있다. 요한일서의 두 구절은 구약의 속죄의 제물은 그림자이고 실체는 예수 그리스도임을 선명하게 말해준다. "그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 이라(요일 2:2)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 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요일 4:10)" 어떤 경우는 신약성경에서 율법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뜻을 직접 설명, 율법과 관련한 하나님의 완전한 뜻을 알려주시기도 한다. 마태복음 5장 17절에서 예수께서 율법을 완전하게 하려 하신다는 것이 이 경우에 속한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 하게 하려 함이라(마 5:17)" 여기서 예수께서 율법을 완전하게 하신다는 말은 어떤 의미인가? 흥미롭게도 예수께서 마태복음 5장 17절을 말씀하신 이후에 일련의 구약의 율법을 인용하면서 율법과 관련된 하나님의 뜻을 더 완전하게 가르치신다. "옛 사람에게 말한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 는 지옥불에 들어가리라(마 5:21-22) 또 간음하지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마 5:27-28) 또 옛 사람에게 말한바 헛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마5:33-34)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 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 며...(마 5:38-39)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 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대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 5:43-44)" 예수께서는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전케 하러 오셨다고 말씀하셨는데 율법을 완전케 하신다는 것은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완전한 뜻을 밝히는 것이었다. 또 다른 경우는 율법이 그림자인 경우가 아니라 실체로 나타난 경우도 있다. 구약의 율법 중 도덕법이 이러한 경우라 할 수 있겠다. 예컨대 “너희는 거룩하라”(레 19:2)는 구약의 율법이지만 실체를 탐구해야하는 그림자로서의 율법이 아니라 곧 바로 신약시대에도 적용될 수 있는 실체적 율법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구약의 이 율법은 가감 없이 신약 성도들이 지켜야 할 신약의 계명으로 기록된다.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전에 알지 못할 때에 따르던 너희 사욕을 본받지 말고 오 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기록되었으 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벧전 1:14-16)" 레위기 19장 18절의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도 그림자로 나타난 경우가 아니라 곧 바로 실체로 나타난 경우이다. 그래서 마태복음 22장 39절에서 예수께서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 중 하나로 말씀하신 이 율법은 로마서 13장 18절에서 신약의 성도들이 지켜야 할 계명으로 기록된다.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 을 다 이루었느니라”(롬 13:8) 구약에서 동성애를 금지한 레위기 18장 22절과 20장 13절의 경우도 구약의 율법이 그림자로서가 아니라 곧 바로 실체로 나타난 경우이다. 그래서 신약의 로마서 1장 26-27절과 같은 구절에서도 동성애가 죄임을 기록한다.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셨으니 곧 그들의 여자들도 순 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그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자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 듯 하매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그들 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들 자신이 받았느니라(롬 1:26-27)" 퀴어신학자 David Stewart는 레위기 18장 22절과 20장 13절의 동성애 금지명령이 문자적으로는 모두 남성의 동성애를 언급하고 있기 때문에 여자 동성애자(lesbian)는 이 율법에 구속을 받지 않는다는 말하는데 이 또한 적절치 못한 해석이다.8) 두 율법에서 모두 남자와 동침하는 것을 언급하고 있지만 이것은 여자와 여자가 동침하는 것은 허용하고 남자와 남자가 동침하는 것은 허용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고대 이스라엘 문화와 문학에서 일반적으로 전제 하듯이 본문의 남성은 남성과 여성을 대표하는 것으로 보는 게 자연스럽다. 예컨대 출애굽기 20장 14절의 제 7 계명, “로 티느아프”(히, 너는 간음하지 말라)의 경우에 사용된 동사, “티느 아프”는 동사 “나아프”의 2인칭 남성단수형인데 여기에 사용된 동사가 남성형이기 때문에 이 계명이 남성에게만 적용되고 여성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고 보지 않는다. 또한 위의 로마서 1 장 26절에서는 여자 동성애(“여자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를 부끄러운 일 로 규정하고 있다. 6. 사사시대의 동성애 구약에는 소돔의 동성애를 기록한 창세기 19장 1-11절 이외에 동성애를 소재로 한 또 하나의 내러티브, 사사기 19장 16-30절이 있다. 사사기 19장 16-30절의 플롯 전개는 창세기 19장 1-11절과 매우 흡사하다. 한 레위인이 그의 첩과 함께 유다 베들레헴에서 에브라임 산지로 가다가 베냐민 지파에 속한 기브아 지역을 지나가게 된다. 이 때 기브아의 한 노인이 이들을 자신의 집으로 맞아들인다. 이때 기브아의 불량배들이 이 노인의 집을 에워싸고 말한다. “네 집에 들어온 사람을 끌어내라 우리가 그와 관계하리라”(22절). 여기서 동사, “관계하리라”는 창세기 19장 5절의 “상관하리라”와 같은 히브리어 동사인 “야다”(알다)이다. 이 노인은 자기 집에 온 손님에게 망령된 일을 하지 말라고 청하며 이 남자 대신 자신의 딸과 손님의 첩을 내어주겠다고 말한다. 결국 손님인 에브라임 사람은 자신의 첩을 그 불량배들에게 내어 주고 그 첩은 밤새도록 그 불량배들에게 윤간을 당하고 새벽에 돌아왔지만 결국 죽게 된다. 이에 에브라임 사람은 그 첩의 시체를 열 두 덩이로 잘라서 이스라엘 각 지파에 보내고 이스라엘 민족은 기브아가 속한 베냐민 지파와 민족전쟁을 벌이게 된다. 7. 동성애-타락의 바로미터 구약의 동성애 관련 두 내러티브가 각각 소돔과 사사시대를 배경으로 한다는 것은 동성애가 한 사회의 타락의 정도를 나타내는 바로미터 역할을 할 수 있음을 말해준다. 소돔은 고모라와 함께 구약에서 타락한 사회의 상징이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제자들을 이스라엘 여러 지역으로 보내면서 만약 누구든지 그들을 영접하지 아니하거든 그 지역에서 나가서 그들의 발의 먼지를 떨어버리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심판 날에 소돔과 고모라 땅이 그 성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라고 말하였다(마 10:15). 예수님의 제자들을 거부하는 지역은 타락의 상징인 소돔과 고모라보다 더 큰 심판을 받을 것을 말한 것으로 예수님의 제자들을 거부하는 죄가 얼마나 큰 지를 말해주는 대목이다. 또한 예수께서는 그가 많은 권능을 행하였지만 회개하지 않은 가버나움에게, 심판 날에 소돔 땅이 가버나움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마 11:23). 타락의 상징인 소돔을 언급하며 가버나움의 완악함을 비판한 말씀이다. 사사시대는 또 어떠한가? 이스라엘의 역사 중 사사시대는 가장 타락한 시대였다. 사사시대의 타락상을 단적으로 말해주는 구절은 사사기의 맨 마지막 절,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이다. 하나님의 뜻과 말씀이 기준이 되지 못하고 자신의 생각이 법이 된 시대, 그래서 이스라엘의 역사 중 가장 타락하고 영적으로 어두웠던 시대가 사사시대이다. 하나님이 타락한 이스라엘 백성을 이웃 민족에게 붙여 심판하고 나면 그제야 하나님을 부르짖고 이에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시고 그들을 구원하신다. 그러나 평화의 시간이 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시 우상숭배에 빠지고 타락하는 것을 반복했던 시대가 사사시대였다. 동성애로 인하여 창세기 19장의 소돔과 사사기 19장의 기브아가 속한 베냐민 지파는 하나님께 큰 심판을 받았다. 소돔 땅에는 하나님께서 유황과 불을 비처럼 내려서 그 지역의 성을 멸하셨고 베냐민 지파는 거의 진멸되어 없어질 위기에 처했다가 600명의 남은 용사가 지파의 씨가 되어 극적으로 회생하게 된다(삿 21장). 구약의 두 개의 동성애 내러티브가 공간적 타락의 상징인 소돔과 시간적 타락의 상징인 사사시대를 배경으로 했음을 볼 때 현재 우리 사회에 동성애가 확산되는 것은 구약의 관점으로 볼 때 매우 우려스러운 일이다. 구약의 관점으로 본다면 동성애의 확산은 영적 어두움이 깊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8. 동성애-개혁의 대상 구약에서 동성애에 대한 부정적인 관점은 남색하는 자(동성애자)의 존재를 허락하지 않고 이스라엘의 개혁적인 왕들이 남색하는 자를 쫓아낸 것에서도 찾을 수 있다. 개역개정 성경에서 “남창” 혹은 “남색하는 자”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카데쉬”로서 성전과 우상 신전에서 동성애를 유혹하던 개혁의 대상이었다. 퀴어신학자 Ken Stone은 “카데쉬” 혹은 복수형, “케데쉼”과 여성형 단수, “케데샤,” 여성형 복수, “케데쇼트”가 열왕기서에서 부정적으로 묘사되기는 했지만 이들이 성적으로 관련되어 있음을 부인한다.9) 그러나 신명기 23장 17-18절에서는 “케데샤”(17절)를 “조나”(히, 창녀, 18절)로 지칭함으로서 “케데샤”가 성적관련성이 있는 단어임을 보여준다. "이스라엘 여자 중에 창기(히, “케데샤”)가 있지 못할 것이요 이스라엘 남자 중에 남창이 있지 못할지니 창기(히, “조나”)가 번 돈과 개 같은 자의 소득은 어떤 서원하는 일로든 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전에 가져오지 말라 이 둘은 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 가증한 것 임이니라(신 23:17-18)" 또한 창세기 38장에 기록된 유다와 다말 이야기에서도 “케데샤”가 “창녀”를 의미하는 단어임을 보여준다. 창세기 38장 15절에서 유다는 얼굴을 가린 다말을 창녀(히, “조나”)로 여겼다고 기록하고 있고 같은 장 21절에서 유다는 그 창녀에게 맡긴 담보물을 찾기 위해 사람들에게 길 곁 에나임에 있던 창녀(히, “케데샤”)가 어디 있느냐고 묻는다. "그가 얼굴을 가리었으므로 유다가 그를 보고 창녀(“조나”)로 여겨(창 38:15)" “그가 그 곳 사람에게 물어 이르되 길 곁 에나임에 있던 창녀(“케데샤”)가 어디 있느 냐 그들이 이르되 여기는 창녀(“케데샤”)가 없느니라”(창 38:21) 이렇게 “케데샤”가 창녀를 의미하기 때문에 이에 상응하는 남성형 “카데쉬”는 개역개정에서 번역하듯이 “남창”, “남색하는 자”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신명기 23장 18절에서는 이 “카데쉬”를 경멸적으로 “개”(히, 켈레브)에 비유했고 이는 남창의 동성애가 얼마나 하나님 앞에 가증스러운 일임을 잘 보여준다. 이상적으로는 이스라엘에 동성애를 행하는 남색하는 자가 없었어야 했지만 현실적으로는 남색하는 자가 존재했다. 열왕기상 14장 24절에는 르호보암 시대에 하나님 앞에 가증한 일을 하는 남색하는 자(카데쉬)가 있었음을 기록한다. "그 땅에 또 남색하는 자가 있었고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신 국민 의 모든 가증한 일을 무리가 본받아 행하였더라" 아사와 여호사밧, 요시야와 같은 왕들은 이러한 남색하는 자들(케데쉼)을 이스라엘 땅에서 쫓아내는 개혁을 단행한 왕들로 기록되어 있다. "아사가 그의 조상 다윗 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여 남색하는 자를 그 땅 에서 쫓아내고 그의 조상들이 지은 모든 우상을 없애고(왕상 15:11-12) 그(여호사밧)가 그의 아버지 아사의 시대에 남아 있던 남색하는 자들을 그 땅에서 쫓 아내었더라(왕상 22:46) 또 여호와의 성전 가운데 남창의 집을 헐었으니 그 곳은 여인이 아세라를 위하여 휘 장을 짜는 처소였더라(왕하 23:7, 요시야의 개혁)" 이렇게 가증스러운, 개혁의 대상이었던 남색하는 자(카데쉬)는 욥기에서 저주의 상징으로 기록된다. 욥기 36장 13-14절에서 엘리후는 경건하지 못한 자들이 남색하는 자과 함께 있게 될 저주를 말한다. "마음이 경건하지 아니한 자들은 분노를 쌓으며 하나님이 속박할지라도 도움을 구하지 아니하나니 그들의 몸은 젊어서 죽으며 그들의 생명은 남창(케데쉼)과 함께 있도다” 9. 다윗과 요나단의 동성애? 다윗과 요나단의 관계는 구약성경에서 우정의 귀감으로 뽑힌다. 그런데 퀴어신학에서는 이 우정의 귀감을 동성애 관계라고 주장한다.10) 하나님의 마음의 합한 사람 다윗이 동성애 자였다면 동성애가 성경의 승인을 받을 수 있는 중요한 근거가 될 수 있겠지만 성경에는 다윗과 요나단을 동성애자로 봐야 할 근거가 없다. 사무엘하 1장 26절과 같은 구절은 다윗과 요나단을 동성애자로 보는 퀴어신학에서 언급하는 대표적인 구절이다.11) "내 형 요나단이여 내가 그대를 애통함은 그대는 내게 심히 아름다움이라 그대가 나 를 사랑함이 기이하여 여인의 사랑보다 더하였도다" 이 말은 요나단이 길보아산에서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다윗이 슬픔 가운데 한 말이다. 이 구절에서 다윗은 요나단의 사랑이 여인의 사랑보다 더하였다고 말한다. 여기서 “사랑”으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아하바”로서 한국어의 “사랑”, 영어의 “love”와 같이 매우 포괄적인 의미를 갖는 단어이다.12) 한국어와 영어에서 동성애와 전혀 상관없는 동성의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표현할 때 “사랑”과 “love"를 사용하듯이 히브리어에서도 동성애와 전혀 상관없는 동성간의 관계를 나타낼 때 ”아하바“를 사용한다.13) 그 예로 아래 두 구절을 들 수 있다. "다윗이 사울에게 이르러 그 앞에 모셔 서매 사울이 그를 크게 사랑하여(아하브) 자기 의 무기를 드는 자로 삼고(삼상 16:21) 솔로몬이 기름 부음을 받고 그의 아버지를 이어 왕이 되었다 함을 두로 왕 히람이 듣고 그의 신하들을 솔로몬에게 보냈으니 이는 히람이 평생에 다윗을 사랑하였음이라(아하브) (왕상 5:1)" 사무엘상 16장 21절과 열왕기상 5장 1절 모두 동성이었던 다윗과 사울, 다윗과 히람의 관계를 사랑(아하브)으로 표현했다. 그러나 이 두 관계 모두 동성애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각각 다윗을 향한 사울의 신임과 다윗을 향한 히람의 정치적 신뢰를 나타낸 것이다.14) 이와 마찬가지로 사무엘하 1장 26절에서 언급한 요나단의 사랑은 요나단과 다윗의 깊은 우정을 말한 것이다. 다윗과 요나단이 동성애를 나누는 관계였다면 성경브리어로 성적 관계를 나타내는 “야다”(알다)가 사용되었을 것이다.15) 그러나 구약에서는 다윗이 요나단이 서로 “알았다”(야다)고 표현한 구절이 없다. 10. 나오는 말 이제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구약성경은 동성애에 관하여 일관되게 부정적인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레위기 18장 22절과 20장 13절에서 밝히는 바와 같이 동성애는 하나님 앞에 가증한 죄이고 죄의 경중을 따지자면 매우 무거운 죄로서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 끊어지고 반드시 죽어야 하는 죄로 기록되어 있다. 동성애와 관련한 구약의 첫 번째 본문인 창세기 19장의 소돔의 죄와 관련하여 퀴어신학에서는 소돔 사람들과 같은 강제적인 성폭력이 아닌 동의하에 이뤄지는 동성애는 죄라고 단정할 수 없다고 하지만 창세기 19장의 소돔의 죄를 해설하는 에스겔 16장 50절과 유다서 7절을 고려할 때 소돔의 죄는 하나님 보시기에 가증한 동성애를 제외하고 논하기 어렵다. 퀴어신학에서는 구약의 동성애 금지명령이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적용되는 법이라고 주장하지만 신약에서도 동성애를 부끄러운 죄로 규정하기 때문에 이 주장은 성립되기 어렵다. 또한 퀴어신학에서 구약의 동성애 금지명령이 남자에게 주어진 것이고 여자 동성애에 관하여 침묵하고 있다고 말하지만 이는 여자 동성애자에게 면죄부를 주는 것이 아니다. 고대 이스라엘 문화와 문학에서 일반적으로 남자가 대표성을 갖기 때문에 동성애 금지명령을 남자에게만 해당하는 것을 읽는 것은 오독에 불과하다. 퀴어신학에서는 구약에서 가증하며 개혁의 대상으로 일컬어지는 카데쉬(남창)의 성적 연관성을 부인하지만 카데쉬에 상응하는 여성형 명상 케데샤가 창녀를 의미하기 때문에 일반적인 성경 번역과 같이 카데쉬를 남창으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 퀴어신학에서는 다윗과 요나단의 우정이 동성애일 것이라 주장하며 동성애의 성경적 토대를 마련하려 하지만 다윗과 요나단의 기사에서는 다윗과 요나단이 동성애 관계임을 말해주는 근거를 찾을 수 없다. 사사기 19장에는 창세기19장의 소돔 이야기와 매우 흡사한 동성애 내러티브가 있다. 타락의 상징 도시 소돔과 타락한 시대의 상징인 사사시대에 비슷한 동성애 이야기가 있다는 것은 한 사회의 타락과 동성애의 밀접한 관련성을 보여준다. 무엇보다도 이렇게 구약에서 타락의 상징이며 죄 중에서도 가증한 죄로 기록된 동성애를 죄로 인정하지 않는 데에 퀴어해석의 오류가 있다. ------------------------------------ 1) 이 글은 저자의 글, “구약성경에 나타난 동성애,” 『개혁주의 입장에서 본 퀴어신학 비판』(서울: 대한 예수교장로회총회), 61-84를 일부 수정한 것이다. 2) Deryn Guest, Robert E Goss, Mona West, Thomas Bohache, (London: SCM Press, 2015). 3) Ludwig Koehler and Walter Baumgartner, “YD‘” The Hebrew and Aramaic Lexicon of the Old Testament I (Leiden: Brill, 2001), 391. 4) Michael Carden, “Genesis,” The Queer Bible Commentary , Kindle ed., Location no. 1437. 5) Ludwig Koehler and Walter Baumgartner, “토에바” The Hebrew and Aramaic Lexicon of the Old Testament II (Leiden: Brill, 2001), 1702-1704. 6) Ronald J. Williams, Williams’ Hebrew Syntax3 rd ed. (Tronto: University of Tronto Press, 2010, 143. 7) David Tabb Stewart, “Leviticus,” The Queer Bible Commentary, Kindle ed., Location no. 2621. 8) David Tabb Stewart, “Leviticus,” The Queer Bible Commentary, Kindle ed., Location no. 2643. 9) Ken Stone, “1 and 2 Kings,”The Queer Bible Commentary, Kindle ed., Location no. 6383. 10) Ken Stone, “1 and 2 Samuel,” The Queer Bible Commentary, Kindle ed., Location no. 6060, 6087, 6097. 11) Ibid., 6053. 12) P. J. J. S. Els, “’hb” in New International Dictionary of Old Testament Theology & Exegesis I, ed. Willem A. Vangemeren (Grand Rapids: Zondervan, 1997), 277-299. 13) Ibid., 293-294. 14) Ibid., 294-295. 15) Ludwig Koehler and Walter Baumgartner, “YD‘, ”The Hebrew and Aramaic Lexicon of the Old Testament I, 3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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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학
    2022-07-12

선교 검색결과

  • 선교동행예배-모잠비크 이희정·아마릴도 실라스 마아이아 선교사 간증
    믿음의 기업 본죽·본아이에프가 주관하는 「선교동행예배」 6월 14일 모임이 오전 10시 40분 양천로에 소재한 본월드미션 센터에서 있었다. 강찬 찬양 사역자의 찬양 인도 후 00국 강00 선교사가 기도한 후 남성 선교사들이 중창했다. 이희정, 아마릴도 실라스 마가이아 부부 선교사가 시 23:1-6을 본문으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란 제목으로 선교 간증했다. 이희정 선교사가 "시23편이 제가 제일 중요하게 여기는 말씀이다. 말씀대로 매순간 하나님께서 저를 인도하셨다. 저희는 40대 중반의 부부로 결혼 10년차이다. 2011년도에 한국에 머물며 아들의 발달치료 과정을 밟았다. 아들은 중증 자폐성 장애가 있다. 남편도 성인병을 앓고 있어 한국에와 치료했고 저도 자궁, 유방 치료를 받았다. 저의 친가 외가는 모두 불신자 가정이었는데 아버지가 복음을 들어 믿게 됐다. 그러나 부모(할아버지, 할머니)의 반대로 교회를 가지 못하고 대신 자식들인 우리를 보냈다. 이후 아버지는 병을 얻고 다시 교회를 다니게 됐다. 이 과정에 친가가 다 믿게 됐다. 그런데 중3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이로 인한 마음의 상처로 10년간 교회를 떠났다. 이후 26살 때 기독교의 꼬투리를 잡을려고 돌아와 결국 다시 신앙으로 돌아오게 됐다. 2008-9년 남아공으로 단기선교를 가서 거기서 남편을 만나 전문인 선교사 훈련을 받고 3년 후 모잠비크로 가게 됐다. 모잠비크는 공산주의의 영향을 받고 있다. 선교지는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오지이다. 10년 사역하는 가운데 마을이 형성됐다. 지역 아이들이 교회를 다니게 되면서 교회가 활성화됐다. 아이를 통해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일을 경험했다. 아이들을 위한 유치원 사역을 하게 됐다. 모잠비크는 9개월간 덥고 습하다. 곤충으로 인해 피부가 가렵고, 물이 깨끗하지 못하다. 불을 피워 밥을 먹고 사는 등 초기에 많이 고달펐다. 당시 한국 선교사들하고 교제하지 못해 외로웠다. 외국인 남편과 사는 것이기에 생기는 어려움도 있다. 여러가지로 힘들었는데 그것이 사역이고 삶이라고 생각하고 버틴 것 같다. 지금에야 그 당시에 ‘눈물의 골짜기’를 보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면서 연약한 믿음을 붙잡아 주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고 있다. 지금은 믿음도 나약한 가운데 있다. 그러나 인도하실 하나님을 붙잡고 살고 있다. 살고 있는 지역에 전기가 없어 많이 힘들었는데 작년에 비로소 전기가 들어왔고, 10년만에 아이들이 청년이 되어 믿음의 리더로 세워졌다. 감사한 사람으로는 남편이며 함께 교제를 했던 다른 선교사였다. 그 선교사도 현지인과 결혼한 여자 선교사였는데 많은 위로가 됐다"고 말했다. 아마릴도 실라스 마가이아 선교사가 "기쁨의 눈물이 난다. 그동안의 사역을 나누게 되어 감사하다. 시37:7말씀으로 살고 있다. 제 삶이 어려워 사역자가 될 상황이 아니었는데 어머니가 늘 신앙으로 인도했다. 과거 코미디언이었다. 그런데 보수를 술로 받아 문제가 있었다. 그러다 방송 코미디언이 될 기회가 왔는데 그때 남아공에서 신학을 공부할 기회도 왔기에 신학공부를 하기로 했다. 이후 어디로 갈지 모르고 가서 전도를 했다. 아버지는 사역을 반대했고 어머니는 지지했다. 열악했지만 열심히 전도했다. 3명의 아이가 자라 교회의 일꾼이 됐다. 이후 한 선교사님이 교회를 지을 수 있는 재료를 주어 건축비도 없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지어졌다. 현지인들은 교회를 통해 도움을 받을 마음으로 오게 된다. 그래서 교회를 짓다가 떠나기도했다. 하지만 사역의 열매는 마을 사람들이 이단을 떠나 신자가 됐다는 것이다. 신자들이 사역의 열매이다. 어머니는 하나님을 신뢰하라고 늘 말씀하셨다. 저는 늘 주님을 신뢰한다"고 말했다. 이어 모잠비크의 평안을 위해서(북부지역에 테러가 빈번함), 무슬림이 많은데 복음화를 위해서, 가족의 건강과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위해서 간절히 합심기도 후 아마릴도 실라스 마가이아 선교사의 축도로 마치고 정성껏 준비한 애찬을 나누며 교제했다. 믿음의 기업 본죽·본아이에프는 이처럼 매주 100여명의 선교사를 위한 예배를 드리고 따뜻한 점심을 제공하며 참석자들에게 죽 교환권을 제공하고 있다. 아울러 선교사들에게 게스트 하우스를 제공하는 등 물심양면으로 선교사역에 동참하는 하나님의 귀한 기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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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6-14
  • 선교동행예배-루마니아 송정렬·전효정 선교사 간증
    믿음의 기업 본죽·본아이에프가 주관하는 「선교동행예배」가 6월 7일 오전 10시 40분 양천로에 소재한 본월드미션 센터에서 있었다. 강찬 찬양 사역자의 찬양 인도 후 00국 김0애 선교사가 기도한 후 브라질 조경미 선교사가 특송했다. 루마니아 송정렬, 전효정 선교사 부부가 고후 2:12-14을 본문으로 ‘개선 행렬에 참가시켜 주신 하나님’이란 제목으로 선교 간증했다. 송정렬 선교사가 “2001년도에 튀르키예에 갔는데 2021년 초에 영구추방 당해 1년 6개월 안식년을 보내고 작년 9월에 루마니아로 가게 됐다. 1989년 군제대 후 중동 이슬람권 선교사로 부르심을 받았다. 이후 이슬람 선교를 준비했다. 최근 중국, 인도에서도 선교사들이 추방당했다. 선교지를 추방당하면 생활의 애환이 생긴다. 상실감이 들었다. 통상 추방 후 5년에 다시 들어갈 수 있는데 저는 영구추방을 당했다. 그래서 튀르키예에 대한 아쉬움과 그리움 그리고 좀 더 조심했어야했는가 하는 생각을 하게된다. 국내에 들어와서도 충격을 받았다. 저는 다행히 파송 교회가 주거를 마련해 주었는데 때로 주거공간이 없는 경우도 있다. 거절감의 상처가 있는데 후원교회가 후원 중단하는 경우도 있다. 한국교회가 추방된 선교사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 상처를 받기도 했는데 본문의 말씀이 큰 위로가 됐다. 추방으로 인해 때로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했다. 그런데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문제로 인해 힘들어 했지만 이후 그들이 바울이 보낸 편지로 회복했을 때 위로받고 감사하며 고린도후서를 쓰게 됐다. 현지에서 20년간 다음세대를 위해 사역했는데 이들이 다음세대 사역을 잘 하고 있다는 것을 전해 듣고 위로가 됐다. 튀르키예는 성경의 배경이 되는 지역이다. 비잔틴을 중심으로 1000년간 기독교 문화가 꽃피웠다가 1071년 이슬람이 들어와 99.8%가 이슬람화 됐다. 그러나 다음세대 사역을 하며 신앙교재를 많이 발간했는데 이를 통해 여전히 선교사역이 진행되고 있음에 감사하다. 현재는 루마니아에서 디아스포라 튀르키예인들에게 사역하고 있다. 동유럽을 중심으로 2백만 명이 넘게 퍼져있다. 이들은 자신들만의 공동체를 구성하고 있으며 이슬람을 믿고 있다. 이로인해 열악한 상황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저희는 루마니아교회와 협력해 이들에게 사역하고 있다. 이를 통해 이제야 추방당한 이유를 알게 됐다. 이슬람은 선행을 통해 천국에 간다고 가르친다. 이들에게 복음을 증거해 절반 이상 아이들이 예수님을 믿어야 천국간다고 고백해 감사했다. 두 딸이 있는데 추방으로 인해 작은 딸이 충격 받아 공황장애와 우울증을 앓고 있는데 심리학을 공부하게 됐다. 그러면서 이것이 자기를 위한 하나님의 응답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어려움을 겪고 공감하는 마음을 갖게 되어 응답이라고 고백하고 있다. 본문 14절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이기게하시고 주님의 향기를 드러내신다고 했다. 승리하신 주님을 바라보면 우리에게 승리의 기쁨을 주실 것이다”라고 말했다. 전효정 선교사가 “남편 따라 튀르키예에 무작정 따라 갔다. 10년 후 한국에 오니 너무 좋아보였다. 그래서 한국에 있고 싶었다. 그때 하나님은 ‘선교지에 있는 것이 너에게 복이라’는 말씀을 주셨다. 그래서 깨닫고 마음을 바꾸어 열심히 사역했다. 이후 다음세대들이 자라 교회 사역하는 것을 보고 너무 감사했다. 그러다 영구추방을 당해 너무나 상실감이 컸다. 그 동안 상담대학원 과정을 하며 국내에서 상담 사역을 하길 원했는데 남편과 함께 선교지 정탐을 가게됐는데 열학한 환경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런데 예배에 참석한 아이들을 볼 때 ‘아이들을 위해 너희를 사용하실 것’이라는 하나님의 마음이 들었다. 이 부르심에 따라 순종하기로 했다. 50살이 되어 루마니아어를 배우는 데 언어가 어려워 많은 어려움이 있다. 이제 ‘나만 믿고 따라오라’는 말을 오히려 남편에게 말하고 루마니아로 가게됐다. 어려웠지만 지금은 너무나 감사하게 사역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사회자의 인도에 따라 간절히 합심기도 후 송정렬 선교사의 축도로 모임을 마치고 2층에 올라가 정성껏 준비한 식사를 나누며 교제했다. 믿음의 기업 본죽·본아이에프는 이처럼 매주 선교사를 위한 예배를 드리고 따뜻한 점심을 제공하며 참석자들에게 죽 교환권을 제공하고 있다. 아울러 선교사들에게 게스트 하우스를 제공하는 등 물심양면으로 선교사역에 동참하는 하나님의 귀한 기업이다. 사역소개 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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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6-07
  • 인도선교편지 - 김계응 · 오금희 선교사
    2020년 1월, 10년째 하는 마을 클럽 대항 축구 사역을 끝내고 잠시 쉬고 오려고 나간 태국에서 팬데믹을 맞았고 본의 아니게 긴 쉼과 재충전의 시간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지난 14년간의 사역을 깊이 돌아보는 시간이었고, 최선을 다한다고 했지만, 무지하고 부족해서 잘못한 것들이 많았고, 후회되는 것들을 어떻게 보충할 수 있을까? 새로운 각오를 두고 곧 들어갈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엄청난 긴 시간을 편안하고 좋은 환경에서 보내게 되었습니다. 선교사가 현장에 없으니 편안한 환경이 가시방석 같고, 이러다가 솥에 서서히 삶아지면서 죽어가는 개구리가 되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이 들었습니다. 나태해지지 않으려고 몸부림을 치며 인도 들어갈 수 있는 비자를 연구했으나 비즈니스 비자와 학생비자 밖에는 길이 없었습니다. 지난 1월 자다 풀 대학 방글라를 배우는 어학코스로 입학허가를 받았고, 우여곡절 끝에 학생비자를 받게 되었습니다. 다시 한번 처음 선교 떠날 때 붙잡은 사도행전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며 새 각오로 입국하였습니다. 이민국을 통과할 때 70 중반의 나이에 학생비자가 이해가 안 되는 이민국 직원이 모든 사람을 다 보내고 우리 부부만 남겨 놓고 수많은 질문 끝에 결국은 입국을 허락했습니다. 할렐루야 공항 문을 나서니 후끈한 찜통더위와 메케한 매연 냄새, 선명하게 들리는 방글라를 들으니 드디어 우리가 있어야 할 곳에 왔다고 하는 안도감과 한편 습기 100%인 더위와 매연과 벌레를 잘 견디어 낼 수 있을까 하는 불안감이 교차하였습니다. 감사하게도 가구가 대강 있는 집을 구하게 되었는데 입주한 지 10일이 지나도록 가스가 연결되지 않아 컵라면을 원 없이 실컷 먹었습니다. 4월 6일 동역하는 최헌주 목사님이 입국하여 8일 사역지 람강가강에 함께 내려갔습니다. 부활절 예배에 1년 만에 성찬과 세례식을 하였습니다. 보노샴너골 섬 사역자로 키우는 "수깐도 다스"가 성경학교에 공부하러 간 동안 홀로 사는 70이 넘은 할머니가 손주를 위해 기도하러 매일 새벽예배에 나오다가 믿음을 고백하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4월 10일(월요일)부터 시작된 청년부 수련회는 "예수님을 알고 예수님을 알리자"라는 제목으로 3일간 진행되는 동안 40여 명의 청년들이 참석하였는데 오전에는 성경 개관에 관한 강의와 오후에는 예배와 찬양과 기도로 성령의 임재를 경험하는 시간이었습니다. 대부분 청년이 드르보바잘 교회의 초창기 때 5~6세부터 과외 학교에서 자라나서 지금은 교회의 든든한 일꾼이 된 청년들입니다. 바라기는 말씀으로 잘 성장해서 도시에 직장을 가지면서 교회를 떠나든지 결혼해서 타지역으로 가더라도 믿음을 가지고 있는 곳에서 선교사의 역할을 감당하는 사람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기쁜 소식은 교회의 안수집사 "산토스 고로이"의 무남독녀 딸인 뿌스폰잘리가 켈커타에 있는 윌리엄 케리 신학교를 졸업하였습니다. 앞으로 1년간은 드루보바잘 교회에서 전도사로 훈련받고 그다음 해 신학 대학원에 공부하러 갈 예정입니다. 주님의 뜻이 있으면 계속 공부시켜 신학대 교수를 만들 계획입니다. 초등학교 4학년 때에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공부를 그만두고 건축 현장에서 노동자로 살면서 배우지 못한 한을 딸이 대신해 주어 산토스 집사의 큰 기쁨이 되는 졸업식이었습니다. 저희는 태국에서 올 때 다 버리고 옷가지와 양념 꼭 필요한 것 몇 개 가지고 왔는데 무게 때문에 된장 고추장을 못 가지고 와서 못내 아쉬웠지만 여기에 오니 마침 한국으로 철수하는 선교사 가정이 있어서 필요한 것을 넘치게 받았습니다. 재적응에 필요한 모든 것을 여러 통로를 통해 공급받으면서 "필요를 채우시는 하나님"을 또 경험하며 이곳에서의 삶을 온전히 하나님께 의탁합니다. 기도하는 것은 건강하여 남에게 짐이 되지 않고 우리 부부가 있는 곳이 하나님의 나라가 되며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시간 동안 이 사람들과 함께 사랑을 가지고 기쁘게 살며, 지금까지의 사역을 잘 정리 정돈하여 아름답게 마무리하고 선한 영향력을 남기고 후회 없이 떠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지금까지 오랜 시간 동안 성실하게 저희를 위해 기도와 물질로 동행하여 주신 분들께 머리 숙여 감사를 드리며~~2023년 4월 인도 콜카타에서 김계은 오금희 선교사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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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4-26
  • 인도 선교 소식
    하나님이여 민족들로 주를 찬송케 하시며 모든 민족으로 주를 찬송케 하소서 (시편 67편 3절)) 세상이 온통 비대면이 일상화되고 디지털 세상이 되었습니다. 사람들과의 관계가 소원해졌고 나라 간의 왕래가 어려워졌습니다. 이러한 시대에 선교의 길이 막히는 것 같으나 하나님의 오묘한 뜻은 그 가운데서 막히지 아니하고 역사하고 계시는 람강가 현장을 보고 드립니다. 저희 부부는 8월 17일 인도 땅에 무사히 들어왔습니다. 지난 3월 켈커타 공항에서 사역지를 눈앞에 두고 입국거부를 당한 뒤, 늘 언제 어떻게 들어갈 수 있을까? 노심초사 염려하였지만, 이번에는 비자도 하나님의 은혜로 어려운 상황 가운데서도 쉽게 받게 되었습니다. 여권에 지난번 입국거부 도장이 찍혀 있어서 이민국을 통과할 때 예상되는 모든 질문에 대답할 말을 철저하게 준비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무 질문도 없이 이민국을 너무 쉽게 통과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이민국 직원의 눈을 가려주신 것 같습니다. 꿈에도 그리던 사역지에 도착하여 보고싶은 얼굴들을 만나고 우리가 떠나 있었던 지난 2년 7개월 간 하나님이 어떻게 인도하셨는지를 우리 눈으로 보고 사역자들의 보고를 듣게 되었습니다. 주일 예배를 드리는데 데보브로또 고로이 목사님이 초신자들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말씀을 쉽게 잘 전하고 있고, 엄마들이 예배당 뒤편까지 그득히 앉아 있는 것을 보니 너무 신기했습니다. 예배 중에 “내가 시작했다” 라고 하나님이 감동을 주셔서 하나님이 시작하셨으니 어떠한 상황에서도 람강가 사역을 끝까지 이루어 가시겠구나 생각하니 감사의 눈물이 한없이 흘렀습니다. 2년 7개월의 시간속에서 교회학교 아동들이 키가 얼마나 많이 자랐는지 몰라보게 되었고 청년이 되어 각자 역할을 감당하고 있는 것이 너무 기특했습니다. 잠 많은 시기인데 새벽기도 나와서 기도 인도도 하고, 어린이 예배에 사회를 보는 청년도 있고, 장년예배에 찬양팀을 만들어 예배인도도 하고, 교회 화장실 청소도 맡아서 깨끗하게 관리해 놓은 것을 보니 멀리서 나마 날마다 머리 박고 간이 절이도록 기도한 것이 하나도 헛되지 않고 하나님이 아름답게 키우셨습니다. 18세 이상 된 청년들은 전도훈련 받고 마을에 새 소식반을 잘 인도하고 있었습니다. 지금은 5곳인데 해마다 늘려 나갈 계획이고 일년마다 장소를 바꾸어서 여러 곳에서 복음의 소식을 전할 계획입니다. 교회가 세워진 후 지난 10여년의 시간 속에서 자녀들을 통해 교회에 출석하게 된 엄마들의 믿음이 많이 자랐습니다. 산토스 안수집사의 지도아래 글자를 아는 엄마들을 주축으로 자기집을 오픈하고 글자를 가르쳐 주면서 말씀과 찬양도 가르치면서 결속력을 다지고 있습니다. 지금 두 팀으로 약 30여명이 모이는데 계속 지도자를 세워 장소를 늘려 나갈 예정입니다. 거의 1년 전부터 새벽기도에 나오는 10여명의 엄마들이 매일 말씀과 기도로 훈련을 받고 있습니다. 새벽예배에 나온 엄마들이 “다시는 죄악의 길로 절대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찬양을 힘차게 부르는 것을 보니 이 힌두 땅에서 하나님이 하셨음을 확신하게 됩니다. 데보브로또 고로이목사님이 주일 장년 예배뿐만 아니라 아동예배를 맡아 성경비디오를 보여주며 말씀을 전하는데, 재미있는 것이 없는 시골에서 아이들이 너무 재미있게 말씀을 배우고 있고 아동 부 예배에 40~50여명이 모이고 매주 새로 오는 아동들이 늘어나고 있어 소망이 보입니다. 주일예배를 마치고 보노샴너골 섬교회에 가보니 아직은 성도들이 많지는 않지만 초창기부터 어린자녀를 데리고 나오던 성도 몇 가정이 이제 그 아이들이 자라 고등학생이 되었고, 아무도 강요하지 않았는데 인도자도 없이 자기네들끼리 모여 새벽예배를 드리고 학교로 간다는 소식을 듣고 감동하였습니다.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그 중에 공부를 뛰어나게 잘하던 “리야스리 사몬또”가 며칠전에 국립 간호대학교에 합격하였습니다. 시골에서 도시에 있는 국립간호대학교를 가는 것은 우리나라에서 의대를 가는 것만큼 어렵습니다. 졸업하면 국립병원에 취직이 되고 평생 연금을 받을 수 있다고 합니다. 섬교회에서 한 명의 희망 샘플이 나옴으로 온 섬에 학부모와 아동들에게 희망이 생겼습니다. 교회가 그 힌두 섬마을에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코로나로 인해 우리가 사역지에 들어가지 못해 모든 것이 정지될 것 같았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상황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일을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교사가 선교지에 있으므로 해야 할 일이 보입니다. 3년 동안 교회 관리를 하지 못해 창문과 문들이 비와 바닷바람에 칠이 군데 군데 벗겨져서 흉측하게 되어 있어 마음이 아프고, 공부 잘하는 아동들은 격려해서 전문직을 가지도록 대학을 보내줘야 하고, 달리는 말에 채찍을 가하듯 잘하고 있는 가운데 격려하며 시너지 역할을 감당하기 원합니다. 이번에는 여행비자로 들어갔지만 장기비자를 받기위해 자다푸르 대학 어학원에 11월에 학생등록을 신청하려 합니다. 내년 1월에 입학허가가 되면 학생비자를 받게 됩니다. 마음은 선교지에서 죽기를 원하지만,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시간까지 생명을 다하려 합니다. 기도제목은 1, 데보브로또 고로이목사님이 함께 교회를 섬길 합당한 아내를 만나도록. 2, 교회가 재정적으로 자립할 수 있도록. 3, 저희 부부가 장기로 체류할 수 있는 비자를 얻도록. 늘 기도와 물질로 후원해 주시는 기도의 동역자님께 무한한 감사의 마음을 전해 드리며 김계응 오금희 선교사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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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외선교
    2023-01-22
  • 만만만 선교운동에 동참합시다!
    총회세계선교회 GMS(이사장 박재신 목사)가 교단과 함께하는 세계선교운동을 실시한다. GMS는 전 세계 97개 나라에서 1433 가정 2579명의 선교사들이 사역하고 있다.(2022년 12월 말 기준) 현재 GMS는 비자발적 철수와 팬데믹, 정년은퇴, 후원 중단과 건강악화로 인한 중도탈락의 이유로 선교사들의 수적인 감소가 진행되고 있다. 사역적으로는 장기전으로 진행되고 있는 전쟁과 내전,정국 불안 등으로 인해 그 지역(우크라이나, 러시아, 미얀마, 아이티 등)에서 사역하고 있는 선교사들이 신분적, 심리적, 경제적, 사역적인 어려움에 처해 있다. 그 외의 지역에서도 세계적인 경제 불황, 금리 인상, 달러화 강세, 물가 급등(아르헨티나, 스리랑카, 튀르키예, 라오스 등)으로 많은 선교사들이 사역의 어려움을 겪고 있다. 또한 팬데믹으로 인한 영향 탓에 한국교회는 수적인 감소와 재정적인 어려움으로 세계선교에 대한 열의가 많이 식고 있다. 이에 교단내의 모든 교회들이 선교에 동참하게 해 교회의 본질을 회복하게 하고, 지상명령의 수행을 위한 도약의 전기를 마련하고자 하는 것이다. 현재 교단 내의 교회수는 1만1262개이다.(2022년 10월 기준)이 가운데 GMS를 통해 선교사를 단독 파송하는 교회는 608곳이고, 선교사를 후원하는 협력교회는 1570교회이다. 파송과 협력을 하는 교회의 합이 2178개로 전체 교단 교회의 19.3%에 불과하다. 우리 교단의 전체 교회 가운데 총회 GMS와 동역하는 교회가 20%도 못 미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일부 교회들이 교단 GMS 선교회가 아닌 선교단체를 돕는다고 할지라도 나머지 80%의 교회들이 세계선교에 동참 혹은 동역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만만만 선교운동의 비전은 GMS선교에 동참하지 못했던 교회들을 동원해 교단 내의 모든 교회들과 함께 세계선교를 하는 것이다. 만만만 운동의 핵심가치는 경제적인 여건으로 인해 세계선교에 동역하지 못했던 교회와 성도들에게 큰 부담을 주지 않고 모두가 함께 동참하도록 하는 데에 있다. 이에 GMS는 교단의 모든 교회들을 세계복음화를 수행하는 선교사명에 동참하도록 하기 위해 만만만 선교운동을 실시하고 있다. 만만만 선교운동은 선교에 참여하지 않고 있는 1만교회, 1만성도가 매월 1만원씩 GMS에 후원금을 내는 운동이다. 만만만 운동의 비전은 GMS 선교에 동참하지 못했던 교단 내의 모든 교회들과 함께 세계선교를 하는 것이다. 후원 링크 http://go.missionfund.org/gms10000 만만만 선교운동의 핵심 가치는 경제적인 여건으로 인해 세계선교에 동역하지 못했던 교회와 성도들에게 큰 부담을 주지 않고 모두가 동참하도록 하는 데 있다. 월 1만원은 한 달에 커피 2잔 정도의 금액으로 모든 교회들이 큰 부담을 갖지 않고 누구나 참여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만만만 선교운동을 통해 모든 교회들이 선교에 동역함으로 교회와 성도들에게 자부심을 주고, 세계선교에 한 부분의 역할을 하도록 함으로 세계선교에 큰 모멘텀을 이루고자 하는 것이다. 만만만 선교 후원금은 선교사들의 긴급 의료발생, 재난, 전쟁, 사고 등을 위한 긴급위기 관리기금, 은퇴 선교사들의 주택과 연금, 후원 부족 선교사와 MK의 복지지원, 선교사 계속교육, 다음세대 훈련 및 파송 지원, 통일 선교와 이주민 선교, 디지털 선교를 위해 사용된다. 모금은 만만만 선교운동의 참여 확산과 모금의 투명성을 위해 기독교 모금단체인 미션펀드를 통해 하게 된다. 박재신 이사장은 "만만만 선교운동은 우리 교단 내 모든 교회들이 GMS와 함께 세계선교에 도약할 수 있게 하는 선교운동으로 농어촌 작은 교회나 개척교회와 성도들이 큰 부담 없이 매월 1만원의 헌금으로 참여해 '우리도 선교를 한다'는 자부심과 긍지를 갖게 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또 “이제는 우리 교단이 교회 수나 역사만이 장자교단으로서의 이유와 자랑이 아니라 예수님의 지상명령이요 교회 본질의 사명인 세계선교에 모든 교회들이 동참하는 것이 자랑이 돼 하나님께서 독노회부터 우리 교단에 주신 선교적 교단의 모습을 회복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의 전환을 이뤄야 한다"라며, "만만만 선교운동은 우리 교단과 한국교회 전체에 큰 부흥을 가져오게 할 것"이라고 밝혔다. (본 기자는 '만만만 선교운동'에 미력이나마 동참하기 위해 이 기사를 만들었으며, 자비로 모든 총대들에게 문자를 보내 홍보토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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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1-05

문화 검색결과

  • 옥수수 파종
    옥수수 파종 옥수수 두 알을 땅을 파고 묻는다. 끝! 어제 10년 같이 산 개를 장사했다. 밤나무 언덕에 땅 파고 사체 넣고 묻는다. 끝! 장례식도 비슷하다. 땅 파고 넣고 묻는다. 끝! 성도의 삶을 땅에 묻힌 밀알이라 했다. 땅에서 썩어 열매 맺는다. 땅에 묻히는 게 영광이다. 흙으로 가려지는게 시작이다. 나머지는 생명을 주관하는 주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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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30
  • 꽃 - 손근식 장로
    한 주간 피우기 위하여 일년을 준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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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4-25
  • 「너 하나님의 사람아」 - 성지순례 후 아내의 고백시
    햇볕 따스한 날 베낭메고 나서며 내가 주를 더욱 알기 원하나이다 설레임 가득품고 하늘을 날던 너 하나님의 사람아 칠흙같은 어둠을 가르고 가난의 기운 가득한 그곳에 죄악된 내발을 하나 더 보태며 이 땅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만나길 원하던 너 하나님의 사람아 척박한 그 땅 새벽녘에 어디선가 들려오던 옆 농가의 닭 울음소리 베드로의 심정으로 무언가를 회개하며 코끝 찡한 눈물을 떠오르는 태양속에 감추던 너 하나님의 사람아 하나 둘 맞잡은 형제 자매 뜨거운 손은 거대한 사랑의 고리가 되어 사막의 모랫바람 뜨거운 불볕조차 꽁꽁 묶어 버리고 때로는 하하호호 때로는 영차영차 천길 바윗길도 호잇짜 뛰어넘던 너 하나님의 사람아 참혹한 십자가를 마주하고 서서 먹먹한 가슴 차오르는 눈물샘을 그 누우셨던 돌단위에 쏟아 붓고는 떨리는 내 작은 입술의 가증한 찬양이 그 거룩함의 극치 앞에 가당치 않지만 오히려 다시 그 십자가로 돌아갈 모순된 용기를 내보던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제 그 땅의 성곽마다 새겨진 이름 그 땅의 골짝마다 새겨진 이름 그 땅의 돌덩이마다 새겨진 그 이름 예수… 가슴속 한켠에 묵직하게 품고 세상속의 예수로 살아내기 원하는 너 하나님의 사람아 그 땅의 주인 그 땅의 통치자 그 땅에 내린 축복의 열매가 너의 베낭에 가득 담겼구나 내가 밟은 땅 내가 가른 하늘 온 우주가 너에게 축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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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2-20
  • 〖시〗 인간연어
    인간연어 나는 인간연어다. 어렸을 때 성장하던 곳을 군목으로 입대하면서 떠났다. 이후 4년만에 전역해 혜화동에서 부목사로 3년, 인사동에서 5년을 보냈다. 그리고 후암동에서 15년간 담임하다 사임하고 부모님 계신 곳으로 돌아왔다. 야구 타자가 3루까지 돌고 홈으로 돌아온 것과 같다. 내가 어린시절을 보냈던 곳이다. 그래서 편하다. 강에서 태어난 연어가 바다에서 생을 살다 다시 강으로돌아온 것과 같다. 주위 곳곳에 내 추억이 살아 있다. 나는 행복한 인간연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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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2-11
  • 이것이 인간사인가? - 손근식 장로
    한장 남았던 달력을 뒤로하고 새로운 하늘과 땅을 만나고 있다. 평화롭고 행복함으로 채워지는 시간들이 되면 좋으련만 세상사 끝없는 다툼과 분쟁의 연속이 미리 들여다 보인다. 이것이 인간사인가? 그렇지 않을 수 도 충분히 있는데 인간의 죄성은 완력을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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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1-11
  • 탐 앤 탐스 인생 - 손근식 장로
    많은 이들이 여기로 와서 탐Tam하고 또and 탐Tam하는 곳이더라. 무엇을 왜...... 다 부질없는 일이라고 깨달았으나 미련을 남겨두고 우리는 또 문을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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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2-30
  • 미적분
    학창 시절 수학은 이해불가였다. 그런데도 고등학교 때 이과 가는 바람에 죽는 줄 알았다. 그나마 다른 과목 때문에 총신대 신학과에 3대1 경쟁을 뚫고 입학했었으니 감사하다. 수학에 미적분이라는게 있나본데 예나 지금이나 이해불가 그래서 지금도 미적미적 거리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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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1-04
  • 피자집에서 빵 터진 위트
    피자집에 걸린 글 5번을 보고서 빵 터졌다. 빵 터지게하는 피자집 답답한 세상에 빵 터질 일, 빵 터질 글이 많았으면 좋겠다. 빵이라도 먹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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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1-02
  • 기대지 마세요
    기대지 마세요 사람에게 기댑니다. 정치가에게 기댑니다. 돈에 기댑니다. 권력에 기댑니다. 명예에 기댑니다. 나 자신에게 기댑니다. 그러나 그러나 기대지 마세요. 주님께만 기댑니다! [사2:22]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셈할 가치가 어디 있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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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1-02
  • 강의창 장로 부부 시
    강의창 장로 시 에벤에셀 참으로 오랜 세월 방황하며 허우적거릴 때 미스바로 모여라 부르는 소리 가야만 된다는 거역할 수 없는 부르심에 제단 앞에 무릎 꿇었습니다. 회개의 눈물은 얼굴에 홍수를 이루고 입술이 열리며 알 수 없는 천국 방언이 쉴새 없이 터져 나왔습니다 이후로부터 모리아 산 이삭의 제물처럼 생(生)과 사(死)를 당신께 맡겼습니다 이제는 달려 갈길 다 가고 여기까지 도우신 기념비를 지워지지 않는 종이에 아로새깁니다 여명(黎明) 밤 새워 진통을 앓던 어둠은 동해에 떠오르는 붉은 태양에 희망의 나래를 펴고 날아든다 그림자 없는 어둠을 헤메이며 밤 새워 토해 내던 역겨운 세월들 하늘 눈물 쏟아 내고 눈이 열렸다 가지 끝에 매달려온 가느다란 빛줄기는 검붉은 심장을 터트리고 여명(黎明)의 호흡으로 벅차 오른다 해당화 이른 아침 이슬 머금은 해당화 장독 항아리 여는 엄마와 눈 맞춤한다 인생살이 고달파도 장독대에 가면 마음의 부자 해당화 꽃향기에 취해 얼굴에 미소 지으며 간장 된장 퍼와서 식구들에게 고운 정 퍼붓던 엄마 엄마의 향기 지금도 내 마음에 피어오른다 홍수임 권사 시 아버지 (1) 이름만 불러도 마음 깊은 곳에서 사랑의 울림이 메아리쳐 옵니다. 밤늦게 귀가할 땐 딸 사랑에 잠 못 이루고 무거운 발걸음으로 마당에 서성이셨다. 딸 발자국 소리 들려오면 모르는 척 방에 들어가 등잔불 끄고 아침이 오면 말없이 일거리 주시며 마음으로 안아주시던 아버지 예수 부활 (4행시) 예수 믿고 구원됨이 복중에 제일 큰 복이요 수확 중에 제일 많은 수확이다 부하게 넘치는 축복으로 하나님 영광을 위해 활용하여 많은 상급으로 선한 사업에 부요하길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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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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