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06(월)

통합검색

검색형태 :
기간 :
직접입력 :
~

뉴스 검색결과

  • 월기총, 창조자연사박물관 탐방 및 인물대전 기획단 출범 감사예배
    월기총 주최로 창조자연사박물관 탐방 및 인물대전 기획단 출범 감사예배가 8월 1일 오전 10시 30분에 시흥시에 소재한 새하늘의교회(박승식 목사 시무) 창조자연사박물관 예루살렘 성전에서 ‘창조적인 체험으로 복음전파 월드선교 인재양성’을 주제로 있었다. 제1부 개회예배는 유수현 선교사의 찬양 후 정도출 목사의 인도로 이종득 장로가 기도한 후 김복례 목사가 요한복음 9장 4절을 봉독하고 박재천 목사가 성시낭독 후 김현자 목사가 찬양율동하고 피종진 목사가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란 제목으로 설교했다. 피종진 목사는 “하나님은 사사시대에 미디안에게 압제당하는 이스라엘을 위해 기드온을 불러 사용하셨다. 또한 하나님은 월기총으로 이 자리에 모인 우리를 통해 일하신다. 주역이 되서 하나님의 일을 잘 감당해 하나님과 사람에게 인정 받기를 바란다"며 "첫째, 하나님께서 창조주이심을 가르쳐 주권자가 하나님이심을 알게 해줘야한다. 둘째, 모든 도우심은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것을 믿어야한다. 셋째,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감당해야한다”고 말했다. 백이삭 목사가 헌금기도 후 윤정순·손찬헌 목사가 헌금특송하고 김영달 목사가 광고 후 피종진 목사의 축도로 예배를 마쳤다. 제2부 환영 인사 및 격려는 정진희 목사의 사회로 꾸미오리찬양선교단(김창숙 목사 외 2명)과 조에스더 목사가 특별찬양한 후 박승식 목사가 “박물관이 세워진지 20년이 지나 건물이 낡았지만 유물은 그 어디보다 많이 있다. 하나님의 섭리로 박물관이 만들어졌다. 다른 자연사 박물관은 진화론에 근거해 만들어졌지만 이곳은 창조론적인 관점에서 박물관이 구성되어 있다. 이것은 한국교회에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라고 생각한다. 창조론의 기초 위에 모든 기독교가 세워져 있다는 것을 학생들에게 잘 가르쳐야한다”고 환영사 한 후 정진희 목사가 “월드기독교총연합회(약칭, 월기총) CWC(Christian World Council) 주최로 열리는 ‘창조자연사박물관 탐방 및 인물대전 기획단 출범 감사예배’에 오신 여러분 감사합니다. 오늘의 주제는 ‘창조적인 체험으로 복음전파 월드선교 인재양성’이며 주제성구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 하시니라(창1:1,20~31절)’입니다. 이 좋은 창조자연사박물관 예루살렘 성전에서 창조적인 CWC한국인물사 기획단 출범식 개최를 감사하며, 오직 창조주 하나님께 찬양과 영광을 돌립니다. 오늘 모임의 목적은 먼저, 다양한 생명의 신비를 느낄 수 있는 국내 최초 창조론 중심의 박물관 탐방을 통해 홍보의 극대화를 위하여 기도하며 취재 보도하여 진화론 교육의 문제를 개선토록하고, 만물에 나타난 하나님의 신성과 자연사 유물을 통해 하나님의 창조를 역사와 과학적으로 증거하고 전파하며, 창조국제적인 월드선교의 인재양성을 목적으로 합니다. 또한 CWC한국인물사는 제1차로 대한민국을 빛낸 인물 (월기총, 한기총, 한교연, 한교총, 국회조찬기도회, 국가조찬기도회, CBMC, 세직선, 한직선, 미래자연사환경학회, 한국창조과학회 등 전.현직 대표와 국내 100대교회(담임, 원로), 100대 신학교와 연대, 이대, 숭실대, 한세대, 나사렛대, 서울한영대 등 미션스쿨 포함(전,현직 총장 및 이사장), 100대 기도원장(평화의동산, 연수원, 수양관 포함) 중에 신청을 선착순으로 받아 각본을 만들어 순회하며, 기도성회와 대담 등을 하고, CWC한국인물사 심사위를 통해 100인을 선정하여 원고를 받고, 문서선교 약정서를 받은 후 정보를 입수 하면서 편찬위를 구성, 세미나와 연합성회 및 인터뷰와 시상식 등을 통해 자료를 보충 편집발행해 국회도서관에 기증, 전국 시도와 학교 등 도서관, 서점 등에 온ㆍ오프라인 보급을 통해 설교, 강의, 논문 등 자료와 창조론 학술정보를 공유하고자합니다“라고 인사말했다. 김춘환 목사가 “인물대전을 통해 후손들에게 선조의 좋은 신앙 유산을 잘 남기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며 격려한다"고 격려사하고, 김종수 목사가 “귀한 모임 시간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힘을 다해 충성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격려사하고, 김복만 목사가 “88올림픽 때 이것을 기념해 부산에서 울산까지 마라톤을 했었다. 앞으로 구국기도회를 열고자한다"고 인사말했다. 3부 축사와 특별기도는 이관호 목사의 사회로 최태선 목사가 “창조주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은 피조물을 경배한다. 창조박물관을 통해 창조 신앙을 굳건히 갖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축사하고, 박영수 목사가 "창1:1을 보여주는 것이 이곳 창조자연사박물관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코로나로 어렵더라도 열심히 복음을 전하자"고 축사하고, 김종구 장로가 "월기총을 위해 정, 김 목사님이 많은 수고를 하셨다. 세상에서 큰 일을 감당하는 월기총 되기를 바란다"고 축사한 후 박갑출 교수가 "그동안 정부를 위해 많은 발언을 해왔다. 복음을 전하는 일을 더 잘 감당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란다"고 축사 후 이 수 교수가 성시낭독했다. ‘국가와 교회를 위하여’ 정지현 목사가, ‘창조자연사박물관 탐방과 홍보를 위하여’ 김겸손 목사가, ‘CWC한국인물사 편찬위 기획단 출범을 위하여’ 임재천 대표가 특별기도했다. 제4부 설명회 시간에 박승식 목사와 실무진이 창조자연사박물관 및 창조국제기독학교에 대해 설명회를 갖고 박승식 목사가 정성껏 대접한 중식 후 모든 모임을 마쳤다. 자연사 박물관
    • 뉴스
    • 기관
    2022-08-01
  • 총신신대원 원우회, 한기승 목사 학력위조관련 성명서 발표
    총신신대원 제41대 원우회는 8월 1일 107회 총회 부총회장 후보 한기승 목사의 학력위조와 관련한 성명서를 발표했다. 성명서에서 원우회는 첫번째로, 한기승 목사가 학력위조 서류를 제출했다고 지적했다. 한 목사는 2009년 총회신학원의 목회전문과정을 졸업했음에도 불구하고 선관위에 제출한 후보등록 서류에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M.div.equiv)'을 졸업했다고 기재했다. 이것은 “명백한 학력위조이기에 사회법으로도 강하게 처벌하는 심각한 문제”라고 지적했다. 두번째로, 원우회는 선관위가 이를 제대로 심사하지 않고 한기승 목사에게 후보 자격을 부여한 것은 잘못이라고 지적했다. "제출된 서류의 사실 여부를 확인하는 것이 선관위의 고유임무이다. 그러나 선관위는 한기승 목사가 제출한 서류의 사실 여부를 제대로 검증하지 않았고 이는 결국 선관위가 부실하게 서류 검토를 했다"는 것이 된다고 주장했다. 끝으로, 원우회는 이 일과 관련해 선관위가 공정한 심사와 처분을 할 것을 요구했다. “현 선관위원장인 소강석 목사를 포함한 선관위원들에게 선관위로서의 공정한 심사를 요한다... 한기승 목사의 학력 위조에 대해 선관위의 공정한 처분을 요구하는 바이다” 그동안 교계 언론들이 한기승 목사의 학력위조문제를 계속해서 제기했음에도 불구하고 눈 하나 깜짝하고 있지 않는 선관위가 과연 원우회의 성명서에 어떻게 대응할지 모두가 예의주시하고 있다. 다음은 성명서 전문이다. 부총회장 후보로 출마한 한기승 목사에 대한 선관위의 공정한 처분을 요구한다. 22년 부총회장 선거 후보로 출마한 한기승 목사의 학력위조 사건과 관련하여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원우회는 선관위의 공정한 심사를 요구한다. 2022년 7월 22일 총회선거관리위원회(이하 '선관위')는 107회 목사부총회장 비롯한 총회선거 후보자를 확정하였다. 후보로 확정된 한기승 목사는 2009년 총회신학원의 목회전문과정을 졸업했음에도 불구하고 선관위에 제출한 후보등록 서류에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M.div.equiv)'을 졸업하였다고 기재하였다. 후보등록 당시 한기승 목사의 교회 홈페이지 역시 위와 같이 명시되어 있었다. (현재 수정되었음) 이는 명백한 학력위조이다. 또한 허위로 서류를 제출하였기에 선거법 위반에 해당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관위(위원장 : 소강석 목사)는 한기승 목사에게 입후보 자격을 부여하였다. 학력 위조는 공문서 및 사문서 위조와 허위사실 유포죄에 해당하며 형사적인 처벌을 받을 수 있는 심각한 사안이다. 사회적으로도 학력위조는 결코 가벼운 문제가 아니다. 일반 사회에서도 그러한데, 하나님의 공의를 선포하는 기독교계에서 이런 학력위조의 위법을 묵인한다는 것은 결코 있어서는 안 될 일이다. 현재 선관위는 한기승 목사에 대해 이 내용을 문제 삼지 않고 있다. 선관위는 '그동안 이에 대해 상대후보가 이의 제기를 하지 않았기에' 조사하지 않은 것이라는 입장이다. 하지만 상대방의 이의 제기 여부와 상관없이 제출된 서류의 사실 여부를 확인하는 것이 선관위의 고유임무이다. 선관위는 한기승 목사가 제출한 서류의 사실 여부를 제대로 검증하지 않았고 이는 결국 선관위가 부실하게 서류 검토를 했다는 것이 된다. 현 선관위원장인 소강석 목사를 포함한 선관위원들에게 선관위로서의 공정한 심사를 요한다. 또한 선관위의 총회 선거와 관련된 모든 과정을 공의롭게 처리하겠다고 한 다짐이 결코 부끄러워지지 않기를 바라며, 한기승 목사의 학력 위조에 대해 선관위의 공정한 처분을 요구하는 바이다. 2022년 8월 1일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총회신학원 제 41대 리멤버원우회
    • 뉴스
    • 총회
    2022-08-01
  • 심의분과의 검토부실, 선관위의 직무태만.. 그 책임은?
    선관위가 제대로 일을 하고 있는지에 대한 비판과 의구심이 커지고 있다. 선관위가 허위학력 기재 의심이 되는 한기승 목사를 후보로 확정하고 이것이 문제라고 교계언론이 지적해도 마이동풍이기 때문이다.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선거규정 제18조 (등록서류)를 보면 입후보자는 이력서와 총회신학원(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및 교단합동당시 인정된 교단 신학교) 졸업증명서를 제출해야한다. 심의분과에서 한기승 목사의 이 두가지만 비교하면 서로 다르다는 것을 금방알 수 있다. 하지만 이를 심사해야할 심의분과는 이것을 문제삼지 않고 통과시켰다. 심의분과의 업무는 다음과 같다. 제5조 (분과위원회 조직 및 임무) : 분과 위원은 본 위원회에서 선정한다. 1. 심의분과(총5명; 목사3명, 장로2명): 입후보자의 등록 서류 및 자격유무 일체를 심의하여 위원회에 보고한다. 심의분과는 입후보자의 등록 서류를 심의해야한다. 그런데 어떻게 이력서와 졸업증명서 내용이 다른데 이것을 문제삼지 않고 통과시켰는가? 첫단추가 잘못 꿰졌다. 그런데 이후 전체 선관위 모임에서도 이 문제는 거론되지 않고 결국 한기승 목사가 후보로 확정됐다. 제22조(심사 방식) 1. 1차(심의분과 심사) ① 본 규정에 근거한 입후보자의 자격, 규제, 이의 제기 등의 일체를 심의한다. 2. 2차 (전체회의 심사) ① 심의분과의 결과 보고서가 접수되면 위원장은 15일 이내 전체회의를 소집한다. ② 전체회의 심사 시 필요에 따라 입후보자에 대해 직접 사실 확인과 소명서 제출 등으로 사실 확인할 수 있다. ③ 후보자 최종확정은 전체위원 2/3이상 출석과 출석위원 과반수 찬성으로 의결한다. 단, 법에 저촉되는 경우에는 예외로 한다. 결국 1차 책임은 후보자의 서류를 제대로 검토하지 않은 심의분과에 있고, 2차 책임은 이를 제대로 확인하지 않은 선관위(위원장 소강석 목사) 전체회의에 있다. 지금이라도 이 문제를 바로잡지 않으면 추후 벌어질 모든 사태에 대한 책임을 감당해야할 것이다. 사족으로 선관위원장 소강석 목사는 한기승 목사와 같은 학력을 기재하고 있는데 이것도 바르게 정정해야한다. 총회신학원 목회전문과정으로... 홍길동이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했듯이 왜 총회에서 특혜를 주어 1년만 수업하고 총신신학대학원과 동등한 "자격"을 주었는데 총회신학원 목회전문과정을 총신대신학대학원이라고 바꿔 쓰며 무시하는가!
    • 뉴스
    • 총회
    2022-07-30
  • 총회신학원 학위 문제, 결론은 ‘졸업증명서’
    필자가 총신신대원에 입학한 1989년도에는 신대원에 다양한 과정이 있었다. 문교부 정식학위가 있는 M. Div., 문교부 정식 학위가 없는 Diploma외에 연수원, 연구원 등이었다. 이로인해 많은 갈등이 있었다. 과정이 다르다보니 생긴 갈등이었다. 내년도 2023년 총신신대원 모집요강을 보면 일반전형으로 343명을 모집하는데 모두 목회학석사(M.Div.)가 주어지며 입학자격은 대학졸업(예정)자이다. 이제 더 이상 학위과정으로 인한 갈등은 없으리라고 본다. 그런데 과거 정규과정 외 졸업자와 편목과정자 그리고 특별수업과정을 통해 합동교단과 함께 하게 된 분들의 학위문제가 여전히 논쟁거리다. 이번에 부총회장에 입후보한 한기승 목사는 선관위 제출 서류와 광주중앙교회홈페이지에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졸업(M. Div. Equiv.)이라고 기재했다. 이에 여러 언론들이 학력위조라고 지적하자 현재는 총신대학교 총회신학원 졸업(M.Div., Equiv.)으로 변경했다. 그러나 이 또한 문제이다. 그러자 누군가 2004년 9월에 열린 제89회 총회 결의를 언급했다. 제89회 총회결의 수도노회장 이만길씨가 제출한 총회신학원 운영에 관한 헌의건은 수도노회 안대로 하기로 하다 ① 총회신학원은 총신운영이사회와는 별도로 총회가 직영하여야 한다. ② 총회장은 노회가 추천하여 위탁한 학생들을 총신 총장에게 위탁하여 교육하며, 총회 신학원에 총신 신대원과 동등한 자격을 부여하여, 졸업식 및 강도사 고시도 총신 신대원 졸업생과 동등하게 하고 목사 청빙 시에도 총신 신대원생으로 기록하도록 하다. 이 결의에 근거해 한기승 목사가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졸업(M. Div. Equiv.)이라고 표기해도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결의를 잘 살펴볼 필요가 있다. 1번의 결의는 '총회신학원'은 총신대학교와 완전히 별개의 기관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총회신학원 졸업자는 총신신대원 학위를 가질 수 없는 것이다. 2번의 결의는 아무리 총회의 결의라고 하더라도 사회에서는 '학력세탁'이라는 비난을 들을 수 있는 상식에 맞지 않는 결의라서 논란이 있을 수 밖에 없을 것으로 보인다. 종교 내부 문제가 아닌 실정법을 뛰어넘는 총회결의는 오히려 총회가 세상의 비난의 대상이 될 수 있기에 그 당시 이에 대해 강한 문제 제기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제라도 과거에 교단 총회가 반사회적 결의를 한 사실에 대하여 부끄러워 해야한다. 그리고 학위 논란이 계속될 경우에 총회에서 이 부분을 재 결의하여 학력위조나 학력세탁이라는 오명을 쓰는 총회가 되지 않도록 노력할 필요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어려운 입학시험을 치루고 총신신대원에 입학해 3년간 공부한 사람과 1년 혹은 더 짧은 기간 공부한 사람이 어떻게 동등한 학위를 가질 수 있단 말인가? 이것은 불가한 일이다. 이에 대해 뭐라고 왈가왈부해도 중요한 것은 공식 문서로 판가름난다. 총회신학원 과정을 한 사람은 졸업장이나 졸업증서를 보면 총회신학원이라고 표시된다. 이것이 공식적인 최종 판단이다. 결국 총회결의는 교육부 학위문제까지 해결해주는 결정이 아닌 것이다. 만약 교육부 학위 판단을 무시하고 학위를 변경하면 결국 사법부에 가서 패소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한기승 목사를 학력위조라고 하는 것이며 이후 행보가 어려울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 필자는 1989년에 소수 밖에 없던 신대원 M.Div 과정을 했다. 그리고 1992년에 신대원을 졸업하고 30년이 지났다. 이후 Th.M과 Th.D를 했지만 목회에 어려움을 겪었다. 반면 M.Div과정이 아닌 졸업생들 중에 큰 목회를 하는 분들이 많다. 학위가 목회를 보장하는 것이 아니다. 목회만 잘 하면 되지 학위과정이 무슨 큰 의미가 있는가? 오히려 교육부 정식 학위가 없어도 목회를 잘 하고 있다면 그것이 은혜고 자랑아니겠는가? 과거 신정아 가짜 학위 사건으로 학위 논란이 전국을 휩쓸었고 수많은 사람들의 가짜 학위가 드러나 사회문제가 됐다. 예나 지금이나 학위에 대한 허망한 욕심은 화를 부를 수 있다.
    • 뉴스
    • 총회
    2022-07-29
  • 『동방번개의 정체와 상담』 출판 감사예배
    이단 전문가 진용식 목사가 저술한 동방번개의 정체와 상담 출판 감사예배가 한국기독교 이단상담소 협회 주최로 7월 28일 오후 2시 총신대학교 제2종합관 카펠라홀에서 있었다. 예배는 전남상담소장 김종한 목사의 사회로 고신 이대위원장 서영국 목사가 기도 후 서울상담소장 이덕술 목사가 마가복음 6장 17절부터 29절까지 봉독한 후 상록교회 한지혜 집사가 특주했다. 전 총신대 부총장 심상법 교수가 '다원화 시대에 다시보는 세례 요한'이란 제목으로 "기독교는 '오직'의 종교로 타협할 수 없다. 신자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실천해야하는데 이단은 오직 신앙에 다른 것을 결합시켜 하나님 사랑이 아닌 교주 사랑, 이웃 사랑이 아니라 이웃 갈취와 파괴를 한다. 다원화 시대라도 관용이라는 이름으로 이단의 주장을 받아들여서는 안된다. 마가는 전도자가 고난 받는다는 것을 세례요한의 죽음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본문을 통한 첫번째 교훈은, 진리와 의에 대해 열심을 가져야한다는 것이다. 세례 요한은 헤롯왕의 죄를 지적하다가 감옥에 갇히게 됐다. 이단에 빠진 사람을 건져내는 것은 목숨을 걸어야하는 위험한 사역으로 선교의 최전선에 있는 것이다. 두번째 교훈은, 세례 요한은 자신의 사명을 다했다는 것이다. 비록 그는 참수로 생을 마감했지만 행13:25에 있는대로 그는 달려갈 길을 마쳤다. 그가 당한 순교는 신앙의 면류관이었다. 이단 사역이 어려워도 주신 귀한 사명 잘 감당하기 바란다"고 설교했다. 한국기독교 이단상담소협회장 진용식 목사가 "축하해 주신 모든 분들에게 감사드린다. 동방번개관련 책이 이미 국내에 여러 권이 소개됐다. 그들은 예수님이 중국으로 이미 재림했다고 한다. 중국이 단속하자 교주는 미국으로 도망갔고 많은 신자들이 제주도로 이주해왔다. 이들은 신천지와 같은 방식으로 세력을 넓히고 있다. 이미 한국교회에도 많이 침투해 있다. 제가 쓴 이 책이 이단 방지에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고 저자 인사말하고, 부산장신대 탁지일 교수가 "이단은 사회에도 악영향을 주고 있다. 신천지는 과거 코로나가 확산되는 주범이었다. 현재 중국계 이단이 많이 유입되고 활동하고 있다. 이들은 사람을 신격화하고 반사회적이며 비윤리적인 방법으로 포교하고 신도를 통제한다. 흑룡강성은 중국 이단의 발원지이다. 이곳에 중국동포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는데 중국과의 교류를 통해 이단들이 우리나라에 들어오게 된다. 이들은 신천지 모략 포교를 훨씬 능가하는 포교 전략을 갖고 있다. 이 책은 이에 대한 좋은 정보와 대처 방법을 제공하기에 매우 유익하다"고 서평했다. 합동이대위 위원장 서한국 목사가 "이 책의 출간은 매우 귀한 일이다. 책을 저술하느라 진 목사가 많이 고생했겠지만 이 책은 이단을 예방하고 이단에 빠진 자를 건져내는데 큰 유익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축사하고, 중국 어문선교회 1호 선교사인 차피터 목사가 "중국에서 전능신교가 생겨 많은 활동을 하고 있다. 1990년에 생긴 이 이단은 가장 사악한 집단으로 가정이 해체되고 부모와 자녀가 생이별을 하고 있다. 이 집단은 이미 12년전 중국에 의해 이단으로 판정을 받았는데 한국에 들어와 난민신청을 통해 장기 거주를 하며 한국인들을 포교하고 있다. 이 책이 전능신교를 막는데 큰 역할을 하리라고 기대한다"고 축사하고, 인기총 이대위원장 주기수 목사가 "진 목사님은 이단 예방을 위해 많은 일을 하고 계신 귀한 분이시다. 교회는 진리를 위해 수고했고 순교했다. 전능신교는 중국에서 성공한 사이비 종교이다. 이 책이 이 이단을 예방하는데 변증서 역할을 할 것"이라고 축사했다. 이어 축하 꽃다발을 전달하고, 이단예방활동에 앞장선 서한국 목사에게 감사패를 전달했다. 광주상담소장 강신유 교수가 광고 후 예장고신증경총회장 이용호 목사가 축도함으로 출판감사예배를 마쳤다.
    • 뉴스
    • 기관
    2022-07-28
  • 오정호 목사 소환, 피고발인은 고달프다
    제 107회 부총회장에 입후보한 오정호 목사가 한기승 목사와 전남제일노회가 선관위에 고발한 불법선거 "주장" 건들로 인해 후보등록이 보류된 채, 이에 대해 해명하기 위해 27일 소환됐다. 오 목사는 당일 오전 10시 50분경에 총회에 도착해 응원하러온 노회장과 총무와 잠시 1층 카페에 머물다 기도한 후 4층 회의실로 올라갔다. 심의분과 위원들과 인사 후 위원 중 1명이 기도한 후 기자들은 퇴실했다. 현 상황이 선거에 매우 예민하기에 여러 기자들이 취재하러 왔다. 그러나 비공개로 진행됐기에 어떤 이야기들이 오고갔는지는 모른다. 해명은 오전 11시 30분경에 시작해서 12시 50분경 끝날 때까지 긴 시간 동안 점심도 못먹고 진행됐다. 이후 선관위원회에서 어떻게 이 일을 처리할지는 모른다. 그러나 소환 당사자인 오정호 목사에게는 평생 잊지 못할 날이 될 것이다. 소명을 끝내고 돌아가는 오 목사는 처음과 달리 기운 빠져 무척 피곤해 보였다. 사회에 고소, 고발 때로 무고가 난무하는 일은 상대방을 피곤하게 만들고 이미지에 타격을 입히기 위함이다. 그면에 있어 한기승 목사와 전남제일노회는 원하는 것을 얻었다. 그러나 두 후보간 총회를 위한 정책 대결로 ‘진검승부’를 하기 원했던 대다수 총대들에게 오늘 일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는 그 누구도 모른다. 그러나 당하는 사람에게 측은지심이 생기는 것은 인지상정이리라. 그래서 선빵을 날릴 때는 그 이후를 많이 생각해야한다.
    • 뉴스
    • 총회
    2022-07-27
  • 총회준비위원회, 전체회의 및 워크샵 개최
    제107회 총회준비위원회 제2차 전체회의 및 워크샵이 7월 26일 오후 2시부터 27일 오전까지 주다산교회(권순웅 목사 시무)에서 1박 2일로 진행된다. 권순웅 목사는 107회 총회가 열릴 주다산교회 시설에 대해 설명했다. "본당은 2000명이 수용 가능하고 각 층의 시설을 다양하게 활용하며 인근에 있는 주차장을 임시로 사용하기로 했다. 코로나로 인해 총회 진행에 어려움이 없도록 기도해 주기 바란다"고 말했다. 아울러 107회 총회의 방향에 대한 계획을 발표했다. 1.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헌법과 규칙의 소리를 들으며 전국총대의 소리를 듣고자한다. 2. 107회 총회는 총회의 직무에 따라 할 것이며 샬롬부흥운동을 진행할 것이다. 3. 모든 일을 소통을 통해 발전을 도모하고 지도 하고자 한다. 총신대 문제도 재단이사와 총회가 소통하면 잘 될 것이라고 기대한다. 4. 다음세대운동본부를 상설기구로 만들고자한다. 5. 중소형 교회가 전도활성화 될 수 있도록 섬기겠다. 6. 샬롬부흥운동의 목회와 다음세대운동에 적용하며 1000개 교회 10만 샬롬 축복 전도셀 운동을 하겠다. 끝으로 107회기 총회준비위원들은 샬롬부흥의 Team Sprit으로 샬롬부흥의 Visionary Leadership을 가지고 비전을 보고, 비전을 갖고, 비전을 나누면서 샬롬부흥 총회의 Servant Leadership을 발휘해 줄 것을 부탁했다. 이후 총회 장소로 활용할 교회 각층을 돌아보고 총회 기간 빌려 사용할 주차장을 둘러본 후 식사교제를 하고 이후의 시간을 진행했다. 앞서 1부 예배는 서기 진용훈 목사의 인도로 부위원장 정채혁 장로가 기도 후 회계 이해중 장로가 사도행전11장 25절부터 26절까지 봉독한 후 위원장 김진하 목사가 '작은 예수로 살고 싶다'는 제목으로 설교했다. 김 목사는 "예수님의 제자들은 실패자였다. 예수님 사후 그들을 두려워했고 숨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찾아오셔서 평강을 주셨다. 예수님은 참으로 속도 없는 분이시다. 격려는 '파라클레오'로 어려움을 당한 자를 찾아가 용기와 힘을 준다는 뜻이다. 예수님은 언제나 찾아오시고 위로와 격려를 주시는 분이시다. 우리가 이러한 예수님을 본받아 작은 예수가 될 때 이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 수 있다. 우리가 작은 예수가 될 때 천국이 이 땅에 이루어질 것이다. 바나바는 바울을 안디옥에 데려와 교인들을 가르쳤고 이때 신자들이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게 됐다. '쟁이'라는 말에는 전문가라는 뜻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쟁이'가 되야한다. 그런데 때로 정치를 하게 되면 변질이 되는 경우가 있다. 언제나 우리에게서 예수님의 향기가 나는 작은 예수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총회준비와 진행을 위해' 자문위원장 배만석 목사가, '교단의 발전과 부흥을 위해' 기도위원장 김오용 목사가, '총회임원과 총준위를 위해' 부자문위원장 김봉중 장로가 특별기도했다. 이어 총무 이도형 목사가 광고 후 부총회장 권순웅 목사가 위촉장을 수여하고 부위원장 장봉생 목사의 축도로 예배를 마쳤다. 간절히 기도하는 참석자들
    • 뉴스
    • 총회
    2022-07-26
  • 허위사실 공표죄에 해당하는 학력위조를 눈감은 선관위, 허위사실 유포도 눈감을까?
    선관위의 후보 심의와 확정 절차에서 심각한 하자가 있음이 밝혀진 상황에서 향후 행보에 따라 선관위가 선거관리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편향된 정치를 하는 것이라는 비난을 면키 어려워 보인다. 임시회가 무산된 자리에서 서대전 노회 관계자에 의하면, 전남제일 노회가 제출한 고발장에 허위사실이 포함되어 있다고 한다. 오정호 목사가 선관위에 소명하는 자리에서 이 부분을 명확하게 밝힐 것으로 알려졌다. 본지는 소명이 끝난 후 이에 대해 상황이 확인되는 대로 다시 보도할 것이다. 이는 이미 확인된 학력위조와 함께 오히려 더 큰 파장을 일으킬 것으로 예측된다. 이미 선관위의 졸속 선거관리로 확인된 학력위조 서류 심사의 내용을 다시 짚어 보아야 한다. 오늘 MBC 보도에 의하면, 학력위조하여 선거에 이용하게 되면 허위사실공표죄에 해당한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공직선거법은 학력을 기재하는 방식을 엄격히 규제하고 있는데 정규학력만을 대상으로 졸업이나 수료 당시 학교명을 정확히 기재하도록 강재하고 있다. 이를 어길 경우 5년 이하의 징역이나 3천만원이하의 벌금에 처하는 허위사실공표죄를 적용하도록 하고 있다” ('한양대 졸업?, 한양대 평생교육원 이수?' 논란 - https://news.v.daum.net/v/20220726211719404?x_trkm=t) 그런데 사회법을 뛰어넘어 거룩함을 따르는 총회의 선관위의 행보는 도무지 납득할 수가 없다. 한기승 목사의 학력위조와 학력위조 서류제출이 여러 매체의 보도와 증거자료까지 공개되었음에도, 선관위는 상대진영의 ‘이의 제기가 없다’는 황당한 이유로 서류 심의조차 없이 후보로 확정하였다. 선관위는 왜 심사하지 않고 서둘러 한기승 후보를 확정하였는지 심히 의아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정상적이지 않은 방식을 동원해 졸속으로 처리한 것은 편향된 정치적 행위가 아닌지 의구심을 지울 수 없다. 이는 선관위의 본질적인 임무가 제출된 서류를 검사하고 후보자격을 갖추었는지를 심사하는 것임을 망각한 것이다. 한기승 목사는 언론의 보도가 나오자 홈페이지의 학력을 바꿈으로써, 자신이 학력을 위조해 왔음을 자인하였다. 그런데 정작 심사해야 하는 선관위는 눈을 감은 것이었다. 변경 후 학력 소개 반면 오정호 목사의 경우 선거관리규정에 명시된 자격심의는 없이, 선거법 위반 고발건만 다루면서 후보등록 확정 자체를 보류하였다. 전남제일노회는 오정호 목사의 자격에 대한 이의신청을 한 것이 아니라, 선거법을 위반하였다고 고발을 한 것이다. 이는 후보자격을 심의하여 후보등록 절차를 진행하는 것과 후보로서 선거법을 위반한 건을 다루는 것을 구분하지 못함으로 발생한 문제이다. 제23조 (이의신청 및 등록취소) 1. 입후보자의 기본 자격에 대한 이의신청은 등록마감일 후 10일 이내에 신청하여야 하며, 위원회는 10일 이내 심의하여 발표한다. 그러므로 선관위는 선거법 위반 고발 사건을 다루기 전에 자격심의를 먼저 하여야 한다. 절차와 규정에 따라 선거관리를 하지 않으면 법적 하자에 의해 심각한 상황에 직면할 수도 있다. 또한 서대전노회 관계자는 전남제일노회가 제출한 고발장에는 명백한 허위사실이 적시되어 있다고 했다. 그 내용은 이러하다. 만일 이 사실을 명확하게 입증하지 못하면, 아래 선거관리 규정 위반이 된다. 제29조 (규제 및 시벌) 1. 허위사실 유포자와 금품(金品)요구 및 수수(授受)자는 향후 10년간 총회 총대 및 총회 공직을 제한한다. 전남제일노회는 이미 총회결의 위반(거리제한 결의 위반, 본 신문 기사 참조)으로 천서제한 대상이라는 의견들이 지배적인 상황인데, 고발 내용 중에 허위사실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 확인된다면, 선거관리 규정에 따라 전남제일노회는 10년간 천서금지될 수 있어 선관위가 제대로 심의할지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 뉴스
    • 총회
    2022-07-26
  • 오정호 목사, 암으로 사모 소천한 목사 조문했다고 고발당해
    제107회기 부총회장 입후보자 오정호 목사가 총회로부터 소환당한다. 지난 7월 18일 부총회장 후보 한기승 목사가 소속된 전남제일노회에서 임시회로 모여 오정호 목사를 선관위에 고발키로 하고 총회에 서류를 접수했기 때문이다. 7월 27일 오전 11시까지 총회에 와서 고발건에 대한 소명서를 제출해야하고 심의분과에서 답변해야한다. 총회를 위해, 한국교회를 위해 부총회장에 나선 오정호 목사의 심정은 무엇일까? 아마도 몹시도 착잡할 것이다. 박근혜 전대통령이 “내가 이럴려고 대통령이 됐나!”라고 탄식했듯이 “내가 고발당해 소환 조사 받을려고 부총회장에 나섰나!”라는 심정일수도 있다. 한기승 목사와 전남제일노회는(비록 전남제일노회가 고발했지만 결국 한기승 목사가 고발한 것이나 다름없기에 ‘한기승 목사와 전남제일노회’를 같이 언급한다) 총 22건으로 오 목사를 고발했다. 그중에 참으로 경악할 일이 있기에 이 글을 쓸 수 밖에 없다. 21번째 고소건에 보면 애사 조화 홍보로, 선거규정 제6장 제28조 1항 위반이라고 적혀있다. 합동기독신문 발행인 최00 목사의 사모가 혈액암으로 향년 60세의 일기로 6월 22일 황망히 소천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조문했고 조의금을 보냈다. 이때 오정호 목사도 장로수련회를 마치고 귀가하는 길에 한강성심병원 장례식장을 찾아 진심어린 조문을 했다. 한기승 목사와 전남제일노회는 이것을 문제 삼았다. "은행계좌로 조의금을 송금할 수 있었는데 직접 찾아와 조문했다" "새로남교회 오정호 이름으로 조화를 보냈다. 이는 상가에 조문하러 오는 많은 목사와 장로들에게 오정호 이름을 각인시켜 선거에 자신을 홍보하기 위한 행위로 사전 선거운동이다" "그리고 이것을 부정하면 사진을 제공하겠다" 이 고발건을 보고 필자는 장탄식을 했다. 졸지에 아내를 잃은 최 목사를 직접 조문한 것이 무슨 큰 죄인가? 과연 오 목사가 선거운동을 하기 위해 그 장례식장을 찾았을까?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는 속담이 있듯이 상대방을 의심의 눈초리로 보니 이런 인간의 도리도 선거 운동을 위한 수단으로 보이는 것 같다. 그리고 조화문제도 그렇다. 대형 교회는 기본적으로 장례가 나면 조화를 보내게 돼있다. 아마도 오 목사는 최 목사의 장례 소식을 접하고 비서실에도 알렸을 것이다. 그러면 당연히 장례를 담당하는 부서에서는 오정호 목사의 이름으로 조화를 보내게 되는 것이다. 어찌 이것이 "오정호 목사의 이름을 각인시켜 선거에 자신을 홍보하기 위한 행위"로 보이는가? 성경은 이에 대해 무엇이라 말하는가?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롬12:15). 오정호 목사는 졸지에 아내를 잃은 최 목사와 함께 울기 위해 부고 문자를 받고 강원도에서 서울의 빈소로 시간을 내어 일부러 찾아간 것이다. 그런데 어찌 이것이 자기를 홍보하기 위한 수단이란 말인가? 이렇게 생각한다면 인간이기를 포기한 모습이 아닐 수 없다. 그깟 부총회장이 무엇이길래 인간의 도리를 망각하고 사전 선거운동이라고 고발하는가? 선거법이 이렇다면 개정이 필요하다. 선지동산 총신대학과 신학대학원의 교훈은 무엇인가? '신자가 되라', '학자가 되라', '성자가 되라', '전도자가 되라', '목자가 되라' 그러나 이제 하나를 더 첨부해야한다. '인간이 되라' 오정호 목사는 "우는 자들과 함께 울기 위해 조문 갔다는 이유"로, "인간의 도리를 했다는 잘못"으로 고발당했고 이에 대해 해명하러 총회에 불려가야한다. 아마도 상대측 한기승 목사나 전남제일노회는 쾌재를 부르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모든 어이없는 상황을 모든 총대들이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한다.
    • 뉴스
    • 총회
    2022-07-23
  • 한기승 목사, 교회 홈페이지 학력 변경..학력 위조 시인한 꼴
    오늘 7월 23일, 한기승 목사의 광주중앙교회 홈페이지내 담임목사 소개면의 학력이 변경된 것으로 확인됐다. 이전에는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졸업(M.Div., Equiv.)으로 표기하다가 현재는 총신대학교 총회신학원 졸업(M.Div., Equiv.)으로 변경했다. 변경 전 학력 소개 이것은 본인 스스로가 그동안 학력위조를 했다는 것을 자인하는 것이다. 법학 박사로서 학력위조가 얼마나 심각한 범죄인가를 모르지 않았을텐데 그동안 버젓이 위조된 학력을 게시하다가 언론이 이에 대해 지적하자 부랴부랴 변경한 것으로 보인다. 학력 위조는 역사적, 실체적 사실을 거짓으로 표기한 것으로 업무방해나 사문서 위조 및 동 행사 등에 해당하여 형사적인 처벌을 받을 수 도 있는 심각한 사안이다. 그런데 변경한 내용도 문제다. 총신대학교에 총신대학교 총회신학원은 없다. 총회신학원 목회전문과정 이라고 기재해야한다. 이 또한 명백한 학력 위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관위는 이것을 문제 삼지 않고 있다. 선관위는 제출된 서류를 받아 제대로 검증하지 않았고 ‘그동안 이에 대해 상대방측이 이의제기를 하지 않았기에’ 조사하지 않은 것이라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하지만 선관위는 제출된 서류의 사실여부를 확인하는 것이 임무이다. 결국 선관위가 부실하게 서류 검토를 했다는 것이 드러난다. 이제 선관위는 한기승 목사의 등록서류를 공개하고 재검토해야한다. 그렇지 않으면 선관위의 공정성이 심각하게 위협받게 된다. 이번 선관위원장은 한기승 목사의 절친 소강석 직전총회장이다. 그러므로 불필요한 오해를 막기 위해서라도 엄격하게 진행하지 않으면 이후 벌어지는 모든 사태의 책임은 결국 소강석 선관위원장에게로 향하게 되어있다.
    • 뉴스
    • 총회
    2022-07-23

오피니언 검색결과

  • 【북토크】 절판 앞에서....책이란 무엇인가?
    과거 취미란에 ‘독서’를 쓰는 것이 유행이었다. ‘클래식 음악 듣기, 영화 감상’등도.. 독서가 취미인 나로서는 책이 있다는 것이 축복이다. 책을 쓰는 작가, 출판하는 출판사에게 늘 고마운 마음을 갖고 산다. 책이 없는 세상은 매우 심심할 것이다. 다행히 어려서부터 책 사는 것을 좋아했고 지금도 책 읽는 것을 좋아한다. 이 책은 책에 대한 책이다. 그런데 어떤 책을 읽다 소개 되어 읽었는데 2006년에 발간된 책이라 소개된 책 중에는 ‘절판’된 책들이 많았다. 책에도 수명이 있고 유행이 있다. 무수한 책들이 만들어지고 사라진다. 죽을 때까지 다 볼 수 없는 책을 읽는 것이 취미인 것이 감사하다! (기사 화면에 이 책 '빠삐용의 책읽기' 사진을 실을려고 교보문고를 검색해 보니 이 책도 절판됐다. 다행히 도서관에 있어 빌려보게 된 것이다). 칼날 위에 서 있는 사랑 어떤 사람들에게 사랑이 가장 고결한 단어라면, 어떤 사람들에게는 금기어입니다. 믿을 수 없으시다고요? 유희처럼, 하룻밤 욕망 해소처럼 가볍게 사랑을 즐기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을 하는 매 순간마다 목숨을 걸어야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오스네 사이에르스타드 장편소설 『카불의 책장수』를 읽다보면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촌에는 참 다양한 삶들이 부대끼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아프가니스탄 여인들에게 '사랑'은 금기어입니다. 그들이 지하에서 펴내는 시집에 사랑을 표현하려면 피어린 절규가 담기지 않을 수 없습니다. '손을 주세요, 사랑하는 이여, 그리고 우리 함께 초원에 숨어요. 사랑하거나 칼 아래 쓰러지거나 둘 중 하나.' 이곳에 사는 여인들은 묻는 말에 대답하거나 요리를 칭찬하는 말에 답례를 표하기는 하지만, 외방인 앞에서 절대로 먼저 대화를 시작하는 법이 없습니다. 부모 몰래 금지된 사랑을 나누다 들키면 죽음입니다. 사랑은 언제나 칼날 위에 서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 나라에서 적용되던 이슬람 율법은 한없이 너그러우면서 동시에 비정한 부분이 있습니다. 그 율법을 비켜가기 위해 그녀들은 란다이(landay)라고 불리는 시를 읊습니다. 란다이는 "비명이나 칼로 찌르는 것처럼" 짧고 율동적이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한반도에서의 삶을 살아가면서 동시에 지구의 다른 쪽을 생각하는 이유는 무엇보다 균형 잡힌 시각을 갖춘 인간이 되고 싶기 때문입니다. 균형이 교양이고, 그것이 문화적 경쟁력이기도 합니다. 이 책의 저자는 노르웨이 출신 여성 종군기자입니다. 2001년에 9·11 테러가 있었고, 그해 10월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 정권을 테러 비호세력으로 지목하면서 대대적인 공습을 때립니다. 2002년 봄 사이에르스타드는 카불에서 책장수로 살아가는 술탄 칸의 집에 3개월 동안 머무릅니다. 이 책은 그때 목격한 것을 소설로 쓴 것입니다. 이 소설은 정치적 격변과 국가재건, 그리고 근본주의 이슬람 문화 밑에서 학대받는 여성 문제, 빈곤 문제를 소설 형식으 로 묘사합니다. 폐허가 된 카불의 방 네 칸짜리 아파트에서 술탄 칸은 홀어머니와 아내 둘, 그리고 아이 다섯과 동생, 사촌 두어 명을 데리고 삽니다. 가혹한 시련은 언제나 곁에 있습니다. 등장인물들은 일을 하고, 돈을 모으고, 저잣거리에서 장을 보고, 요리를 하고, 혼례를 준비하고, 혼례를 치르고, 경찰서와 감옥을 왕래하며 갈등하고 기뻐하고 슬퍼합니다. 국민의 4분의 3이 읽지도 쓰지도 못하는 나라에서 책장수의 가족이란 원래가 드문 경우지만, 주인공 술탄 칸은 30여 년 간 서적 판매업에 종사했습니다. 무엇보다 문학과 책을 사랑했습니다. 공산주의자, 무자헤딘, 탈레반 같은 여러 정권의 하수인들은 차례로 쳐들어와서 책을 불태웁니다. 자신도 체포되어 감옥에 갇히곤 했습니다. 그러나 책에 대한 열정을 굽히지 않습니다. 책을 숨기고, 감옥에서 살아나오고, 서점을 다시 세웁니다. 아이들 교육을 위해 교과서를 출판하려고 하고, 부르카를 감옥이라 규정하며 여성의 권리를 부르짖습니다. 그러나...... 술탄 칸은 집안에서는 누구보다 억압적인 또 다른 가부장일 뿐입니다. 전통의 고수와 근대화 사이에 끊임없이 혼란을 겪어온 그들의 역사는 멀지 않은 과거에 있었던 한국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독자들은 마치 증기탕에서 부르카를 뒤집어 쓴 느낌을 받을 것입니다. 부르카가 얼마나 머리를 죄고 두통을 일으키는지, 얼마나 밀폐된 공간인지, 얼마나 공기가 부족한지, 얼마나 금방 땀이 삐질삐질 나게 하는지에 대한 얘기입니다. 책을 덮고서 우리는 비로소 시원한 공기에 감사하고, 그것을 공유해야 한 다는 사명감을 느낍니다. 이 소설은 아프가니스탄 출신의 미국인 청년이 탈레반 치하에서 친구에게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아프간을 찾는다는 내용의 『연을 쫓는 아이』란 베스트셀러에 필적합니다.(※1996년 9월 탈레반은 연날리기를 금지했었습니다.)(pp. 93-96).
    • 오피니언
    • 책소개
    2024-05-06
  • 【북토크】 글을 잘 쓰는 구체적인 방법
    글쓰는 것은 나의 오래된 관심사항이다. 기회 되는대로 글쓰기에 대한 책을 읽는다. 이 책도 그러한 관심에서 봤다. 유익하다. 특별히 이문재 교수는 글쓰기에 대해 매우 잘 설명하고 있어 전문을 게재한다. 잘 읽어보면 많은 유익을 얻을 것이다. 이문재 (시인, 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교수) 정확해야 아름다울 수 있다 왜 저널리즘적 글쓰기인가? 글쓰기의 장르는 매우 다양합니다. 사적인 글쓰기/공적인 글쓰기, 사적인 글쓰기: 일기, (자서전) 편지, 이메일, 공적인 글쓰기: 시와 소설, 희곡, 에세이, 기행문 등 문학적 글쓰기, 기사, 칼럼 등 저널리즘적 글쓰기, 광고 문안, 연설문, 안내문, 보고서, 기획서, 청원서 등등. 글쓰기는 더 이상 문인, 저널리스트 등 몇몇 전문가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미디어 환경이 급속하게 변화하는 것과 아울러, '문자시대는 가고 영상 시대가 도래했다고들 말하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세히 들여다 봅시다. 영상 이미지 역시 최종적으로는 문자 언어로 번역되어야 이해와 소통이 가능합니다. 인터넷과 휴대전화와 같은 뉴 미디어 역시 문자 언어에 상당 부분 빚지고 있습니다. 인간이 언어를 버리지 않는 한 인간이 이야기를 포기하지 않는 한 문자 문화는 영원할 것입니다. 언어는 대중의 합의에 의해 정착되고, 또 동시에 대중에 의해 변화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언어에 일정한 규범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역설적이게도 언어가 대중(언중)에 의해 생성소멸하고 유통되고 기록(저장)되기 때문에 보다 정확한 말하기와 쓰기가 필요한 것입니다. 문자 시대는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문자는 영상 혹은 구술 문화에 의해 위축되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문자 시대를 능동적으로, 그리고 당당하게 영위하는 교양인들은 그리 많지 않아 보입니다. 교양인이라면, 적어도 대학교를 졸업한 교양인이라면 전공을 불문하고 정확한 글쓰기 능력을 보유하고 있어야 합니다. 거듭 강조하지만, 우리의 개별적 삶은 듣고 말하고 읽고 쓰는 행위의 연속입니다. 이 중에서 쓰는 행위가 가장 논리적이고 또 정확해야 합니다. 글쓰기의 일차적 목표는 자신이 생각한 대로 쓰는 것입니다. 하지만 생각한 것을 그대로 쓰기란 거의 불가능합니다(무의식이 개입하기 때문입니다). 우선 생각 자체가 정돈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신의 생각을 정돈하지 않고 글을 쓰는 것은, 설계도도 없이 집을 짓는 경우와 다르지 않습니다. 생각이 잘 정돈되었다 하더라도, 그것을 정확히 표현(건축으로 치면 시공 능력)할 수 없다면 글쓰기는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저널리즘적 글쓰기가 갖고 있는 몇 가지 미덕 우리가 저널리즘적 글쓰기(기사 쓰기)에 관심을 갖는 이유는, 저널리즘적 글쓰기가 정확한 사실에 바탕해, 정확하게 표현하는 글쓰기의 모범이기 때문입니다. 저널리즘적 글쓰기에도 다양한 장르가 있지만, 자기 주장이 강하게 드러나는 칼럼(사설)이든, 쓰는 이의 관점이 가능한 한 배제되는(이른바 '객관적'이라는 스트레이트 기사에 이르기까지 저널리즘적 글쓰기는 무엇보다도 정확성이 강조됩니다. 저널리즘적 글쓰기는 사실을 정확하게 표현하고 전달하는 데 가장 적합한 글쓰기 방법입니다. 저널리즘적 글쓰기에서 아름다움은 미덕이 아닙니다. 미사여구는 정확한 사실을 전달하는 데 있어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화려한 수사는 사실(fact)을 표현하는 데 있어 장애물일 수도 있습니다. 저널리즘적 글쓰기를 주목해야 하는 두 번째 이유는 다른 글쓰기와 달리 취재와 구성이 전제되기 때문입니다. 물론 소설이나 드라마 시나리오를 쓸 때에도 취재 과정이 없지 않습니다. 하지만 저널리즘에서처럼 구체적인 현장(인물)과 정확한 사실이 필요하지는 않습니다. 저널리즘에서 활용하는 다양한 취재기법은 우리가 다른 장르의 글쓰기를 할 때 얼마든지 응용할 수 있습니다. 기획서나 평가 보고서를 작성할 때에도, 홈페이지나 블로그를 꾸밀 때에도 저널리즘의 취재기법을 동원하면 글이 훨씬 입체적이고 풍성해집니다. 셋째, 저널리즘적 글쓰기는 사건이나 사고, 사태나 현상 등 사회적 관심사에 대한 새로운 접근 방법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정확하고 심층적인 보도 못지않게, 남과 다른 시각에서 분석하려는 태도 역시 저널리즘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넷째, 저널리즘적 글쓰기는 독자 대중의 알 권리를 기본으로 하지만, 인물이나 사건 사고, 사태 등에 대한 독자의 기본적 궁금증을 풀어주는 기능을 갖고 있습니다. 저널리즘적 글쓰기는 여론의 흐름에 민감하게 반응하기 때문에, 사회 변화와 그 변화의 방향성을 파악하는 데 시야를 넓히고 시력을 키울 수 있습니다. 다섯째, 저널리즘적 글쓰기는 표현뿐 아니라 전달에 큰 비중을 둡니다. 다시 말해 아무리 새로운 지식과 정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독자(수용자)에게 전달되고 소통(커뮤니케이션)되지 않는다면 저널리즘적 글쓰기는 존재 이유가 사라지고 맙니다. 우리의 일상적 삶은 우리가 저널리스트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끊임없이 정보를 송신하고 수신하는 환경 속에서 진행됩니다. 송신자이면서 수신자인 우리가 소통 능력을 키우지 못한다면, 그 삶은 심리적으로, 그리고 사회적으로 심각한 문제를 야기합니다. 소통 능력이 있는 시민들로 구성된 사회가 건강한 사회입니다. 마지막으로, 미디어 환경이 급변하면서, 우리는 저마다 '1인 미디어'의 주인공이 될 수 있습니다. 블로그에 이어, 사용자 제작 컨텐츠(UCC, User-created content)라는 용어가 일상적으로 쓰이고 있듯이, 우리는 저마다 저널리스트가 될 수 있습니다. 자기 의견과 주장이 분명하다면, 그 사람은 어디에 있든, 그 의견과 주장을 어떤 미디어를 통해 전달하든 이미 저널리스트인것입니다. 지식정보사회를 살아가면서 단순한 지식 정보 소비자에 머물지 않고, 지식과 정보를 주체적으로 해석하고, 동시에 지식과 정보, 의견을 개성적으로 생산하고 소통하기 위해 우리는 저널리즘적 글쓰기에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저널리즘적 글쓰기를 체득하면, 보고서뿐 아니라 한 권의 책을 집필할 때에도 시간과 노력을 효과적으로 운영할 수 있습니다. 한 편의 기사와 한 권의 논픽션의 구조와 글쓰기 방법은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기사, 노력한 만큼 잘 쓸 수 있다. 1. 저널리즘적 글쓰기의 유형: 스트레이트 기사, 인터뷰 기사, 스케치 • 분석 및 해설 기사(feature story), 르포르타쥬, 칼럼, 논설 등 2. 기사를 잘 쓰기 위한 몇 가지 방법: 1) 주제를 분명하게 설정합니다. 주제를 한 문장으로 만들 수 있다면, 절반은 성공한 것입니다. 가령 '누가 한국을 움직이는가'라고 하면 각 분야에서한국을 이끄는 영향력 있는 인물을 선정하는 기획일 것입니다. 기사의 주제는 분명한 계기가 있어야 하며, 독자에게 유익한 정보가 되어야 합니다. 정보성이 부족하다면 흥미를 끌 수 있는 방법을 마련해야 합니다. 2) 주제를 뒷받침할 자료와 전문가, 현장(사례), 관련 기사를 찾습니다. 주제가 정해졌다면 가장 먼저 관련 기사를 검색해야 합니다. 한창 취재하다가 비슷한 기사가 몇 년 전에 나온 사실을 알고 포기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관련 기사를 검토하다 보면, 주제를 바꾸거나, 취재 영역에 변화를 줄 수 있습니다. 3) 구성을 어떻게 할 것인가. ◎역피라미드형: 전문(요약)중요한 사실-흥미 있는 이야기 순으로 구성합니다. 1900년대 초 미국의 AP통신이 개발한 기사 구조로 스트레이트 기사에서 흔히 사용합니다. ◎피라미드형: 도입-중요한 사실-서스펜스 형성-클라이맥스 순입니다. 피라미드형은 피처 기사에서 자주씁니다. 독자의 관심을 계속 끌고 갈 수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문학적이고 연대기적인 서술 방식입니다. ◎혼합형: 클라이맥스(요약)-서론-본론 결론 순. 4) 1), 2), 3)이 충분하게 준비되었다면, 기사 작성에 들어갑니다. • 간결하게 써야 합니다. 국내 신문은 일반적으로 5행 이상(65~75자)을 넘지 않도록 하고 있습니다. 단문을 쓰라는 것입니다. • 가능하면 구어체를 씁니다. 이야기하듯이 쓰라는 것입니다. ·주어와 술어를 분명히 합니다. • 매력적인 언어를 찾습니다. ・쉽게 씁니다. 좋은 기사의 첫째 조건은 쉬운 문장입니다. 이상은 언론학 입문서에서 가장 일반적으로 권장하는 지침입니다. 필자가 경험한 바에 따르면, 기사를 잘 쓰기 위해서는 다음 몇 가지를 유념 해야합니다. 먼저, 앞에서 말한 대로 기사의 주제를 한 문장으로 압축하십시오. 이것이 나중에 기사 제목이 될 수 있을 뿐 아니라, 기획과 취재의 매 단계에서 판단 기준이 됩니다. '민물낚시, 환경오염 주범'이라는 기획 기사를 준비한다면, 바다낚시의 오염 문제에 관한 자료는 읽을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둘째, 기획과 취재 단계에서 기사의 첫 문장, 즉 리드를 구상하십시오. 첫 문장이 결정되지 않으면 기사를 쓰기 어렵습니다. 취재를 충분하게 해놓고서도 첫 문장, 즉 도입부를 어떻게 시작할 것인지 결정하지 못해 전전긍긍하는 기자들이 제법 많습니다. 어디 기사뿐인가요. 모든 종류의 글쓰기가 첫 문장 에서 좌우됩니다. 오죽하면, 작가들이 "첫 문장은 신의 선물이다" 라고 말하겠습니까. 필자는 기자 생활을 하는 동안, 기획이 정해지면 그때부터 제목과 첫 문장을 구상하기 시작했습니다. 짧은 시를 쓸 때에도, 산문이나 논문을 쓸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셋째, 복잡한 사안을 취재할 경우, 취재한 내용을 주위 동료나 가까운 이들에게 이야기하는 것이 좋습니다. 흥미로운 인물을 인터뷰했을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야기를 하는 동안, 취재한 내용을 정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상대방의 반응을 체크할 수 있습니다. 가령 상대방으로부터 더 취재해야 할 부분, 더 강조해야 할 부분 등 의외의 아이디어를 얻을 수도 있습니다. 넷째, 관련 서적을 찾으십시오. 인터넷 검색은 참고자료일 뿐입니다. 가장 새롭고 신뢰할 만한 정보와 자료는 책에 다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십시오. 필자는 특집 기사를 쓸 경우, 기사 검색을 한 다음 대형 서적으로 달려가곤 했습니다. 관련 서적 한두 권만 읽으면, 그 분야의 권위자가 누구인지, 그 분야와 관련된 최신 이론은 무엇인지 장악할 수 있습니다. 열심히 취재해서 기사를 썼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어떤 책에 다 나와 있는 내용인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다섯째, 소설을 많이 읽고 영화, TV 드라마를 자주 보십시오. 소설은 어휘력을 풍부하게 해줄 뿐 아니라, 인간과 사회를 이해하는 시각을 갖게 해줍니다. 문학 분야가 아니더라도 베스트셀러 책은 따라 읽어야 합니다. 관객이 많이 드는 영화와 시청률이 높은 드라마도 놓치지 않아야 합니다. 베스트셀러 책과 영화, 드라마에서 한 줄 인용하면서, 혹은 등장인물을 끌고 들어가면서 기사를 시작하면 독자들의 눈길을 더 많이, 또 오래 붙잡을 수 있습니다. 기사의 궁극 목표는 좀 더 많은 독자들이 읽도록 하는 것입니다. 여섯째, 늘 기사만 생각하십시오. 기자는 늘 기사만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자동차를 운전하거나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 심지어 가족이나 친구와 대화를 나눌 때에도 기사를 생각해야 합니다. 카페 옆자리에서 얻어들은 한 마디가 대형 기사로 발전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찬반양론이 팽팽한 기사일 경우, 가족이나 친구들의 의견을 청취해보면, 취재나 기사 작성에 적지 않은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기사는 혼자 쓰는 것이 아닙니다. 기사가 아니라 다른 장르의 글을 쓸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보고 읽고 느끼고 생각한 만큼 글은 달라집니다. 개성적 글쓰기를 위한 기초체력 다지기 정확한 문장이 관건입니다. 정확하지 않은 문장은 특히 저널리즘에서 문장이 아닙니다. 시나 소설과 같은 문학 작품에서도 정확성이 우선입니다. 아름다운 문장은 그 다음입니다. 정확한 문장을 구사하지 못하는 작가는 아름다운 문장, 개성적인 글을 쓰기 어렵습니다. 정확하고 개성적인 쓰기를 위해서는 '기초체력'이 필요합니다. 글쓰기를 위한 기초체력을 다지는 필자의 체험적 방법론을 소개합니다. 1. '나쁜 버릇'부터 찾는다 어떤 글이든 좋습니다. 자기가 쓴 글을 분석 대상으로 삼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면, 자주 나타나는 단어나 표현이 발견됩니다. 사람마다 특유의 말투(말버릇)나 몸짓이 있듯이 글에도 특유의 '버릇'이 나옵니다. 예컨대, 어떤 사람은 '~것이다'라는 종결어미를 자주 씁니다. '~것이다'는 가능하면 쓰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자신의 글 버릇을 찾아내는 눈을 가지고 있다면 가능성이있습니다. 다음으로, 수식어가 많은 문장, 접속사가 많은 문장, 나열이 많은 문장이 나쁜 문장입니다. 자기 글에서 나쁜 점을 발견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이미 글을 잘 쓰는 사람입니다. 자기 글에서 문제점을 발견할 수 있는 수준까지 빨리 올라가야 합니다. 자기 글의 문제점을 발견할 수 있다면, 그 문제점만 제거해도 글쓰기는 순식간에 한 단계 업그레이드됩니다. 자기 글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 모른다면, 정말 큰 문제입니다. 정신 바짝 차리고, 자기 글을 들여다보십시오. 자기가 쓴 글들을 '원수가 보내온 편지'라고 생각하고 여러 차례 읽어보십시오. 버릇이 발견될 때까지 읽으십시오. 2. 자기가 좋아하는 글을 찾아라 자기가 쓰고 싶은 글을 쓰는 기자나 작가의 글을 집중적으로 읽으십시오. 글쓰기의 모델을 하나 설정하는 것입니다. 가수가 되고 싶어하는 청소년들은 반드시 좋아하는 가수가 있습니다. 운동을 좋아하는 청소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소설가 지망생은 필사하고 싶은 선배 소설가가 한둘은 꼭 있습니다. 좋은 기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글을 그대로 베껴 쓰십시오(필사). 외우면 더 좋습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글을 적극 모방해보십시오. 그 과정에서 글쓰기 수준이 몰라보게 향상됩니다.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알 수 있는 국내 소설가 대부분이 선배 작가의 소설을 필사하면서 습작기를 거쳤습니다. 추천하고 싶은 필자 '모델'은 문인 이외에, 혹은 문인이면서 매체에 자주 기고하는 분들입니다. 제가 추천하고 싶은 분들은 도정일(문학평론가), 김종철(<녹색평론> 발행인), 고종석(소설가 겸 언론인), 김훈(소설가 겸 언론인). 배병삼(정치학 및 동양학), 한형조(동양철학), 송호근(사회학), 고미숙(문학평론가), 정혜신(정신과 전문의) 등입니다. 이외에도 좋은 필자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3. 새롭지 않으면 쓰지 말라 저널리즘의 생명은 새로움입니다. 새롭지 않으면 뉴스가 아닙니다. 저널리즘이 아니라도 그렇습니다. 모든 글쓰기는 새로워야 합니다. 사실이나 의견에서 새로워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표현이라도 새로워야 합니다. 새롭지 않다면 신기하거나(의외성) 흥미로워야 합니다. 새로움, 의외성, 흥미, 이 세가지 중 한 가지도 만족시키지 못한다면 글을 쓸 이유가 없습니다. 4. 자세히 관찰하라 관찰은 모든 글쓰기의 스타트 라인입니다. 사물이든 사건이든 인물이든자 세히 관찰하지 않고서는 정확한 글쓰기가 불가능합니다. 관찰이 부정확하면 사실관계가 흔들립니다. 정확히 보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우리의 오감 가운데, 시각이 특히 부정확합니다. 주변 환경에 따라 착시 현상이 얼마나 자주 일어나는지 상기해보십시오. 관찰은 단지 시각에 한정되지 않습니다. 많이, 그리고 정확히 느끼는 것도 관찰의 범주에 들어갑니다. 책읽기, 영화 감상, 미술 감상 등도 관찰입니다. 관찰은 대상에 대한 집중입니다. 자신을 완전히 비우고(선입견을 버리고, 현상학적으로 말하자면 판단을 중지하고) 대상에 몰입했다가, 다시 대상으로 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상상력은 이 관찰 단계에서 나옵니다. 관찰 훈련의 첫 단계는 자기가 본 것으로 소리 내어 말해보는 것입니다. 관찰 대상이 인물이라면, 머리 모양과 색깔, 길이에서부터 이목구비를 거쳐 구두까지 관찰하면서 하나하나 말해보십시오. 컴퓨터나 텔레비전, 화분, 식탁, 자동차 실내 등 늘 마주치는 대상을 하나 정해서 소리 내어 하나하나 관찰해보십시오. 그동안 전혀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일 것입니다. 그것이 발견입니다. 낯익은 것에서 낯선 것을 찾을 수 있다면, 바로 그것이 최고의 글쓰기 재료입니다. 5. 메모하고, 메모하고 또 메모하라 기억력이 남다르다고 해도, 메모를 따라갈 수는 없습니다. 뛰어난 작가는 물론이고 예술가, 심지어 기업의 CEO들도 메모를 자주 합니다. 뭔가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메모광입니다. 인간이 하루에 접하는 새로운 정보(자극)는 수십만 개가 넘는다고 합니다. 밤에 잠자리에 누워 하루를 돌이켜보십시오. '오늘 내가 새로 느낀 것, 새로 발견한 것'을 떠올려보십시오. 거의 없을 것입니다. 주머니 혹은 핸드백에 작은 수첩과 필기구를 반드시 챙기십시오. 수첩과 필기구를 챙기는 습관이 들었다면, 글쓰기를 위한 가장 필수적인 요건을 갖춘 것입니다. 저는 화장실에도 연필과 포스트잇을 갖다 놓습니다. 주머니에 메모지와 볼펜이 없으면 산책도 하지 못할 만큼 습관이 되어 있습니다. 참신한 아이디어는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하루에도 수천 번 새로운 생각이 떠오릅니다. 하지만 그것이 글쓰기로 이어지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좋은 글은 메모지에서 나옵니다. 메모지가 '상상력 발전소'입니다. 개성적인 글쓰기를 위한 세부 지침 1. 나로부터 시작하라 저널리즘적 글쓰기, 특히 스트레이트 기사에서 '나'는 차가운 전달자입니다. 스트레이트 기사에는 글쓰는 사람의 주관이 개입해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1990년대 이후, 활자매체의 기사는 연성화하고 있습니다. 피처 기사, 칼럼 등은 대단히 주관적이고 개성적인 문체를 구사합니다. 기사작성 연습을 하고 싶다면 굳이 멀리 갈 필요가 없습니다. '나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자서전을 써 보거나, 자기가 자기를 인터뷰하는 것입니다. 가족이나 친구를 소개하는 글도 좋은 훈련이 됩니다. 자기가 사는 마을(아파트)을 취재해 사진과 곁들여 기사를 써보는 것도 훌륭한 저널리즘적 글쓰기입니다. 시나 소설을 쓰기 원한다면 더욱 그렇습니다. '나'의 이야기를 쓰십시오. 문학적 글쓰기를 방해하는 가장 큰 요소 가운데 하나가 글쓰기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그렇다면 자기 자신에서 출발하십시오. 나에 대해, 나의 가족과 친구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은 바로 나입니다. 잘 알고 있는 소재를 글로 쓸 때, 글쓰기에 대한 두려움은 현저하게 줄어듭니다. '나'에 대한 글쓰기는 자기 삶을 성찰하는 진지한 계기를 제공합니다. 내가 어디에서 왔고, 또 어디에 있으며, 어디로 갈 것인가. 이 같은 인문학적 질문을 던지게 하는 것은 글쓰기 말고 거의 없습니다. 2. 반복하지 말라 반복은 강조할 때 말고는 피해야 합니다. 반복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표현의 반복과 내용의 반복이 그것입니다. 같은 단어, 같은 표현을 반복하지 마십시오. 사실을 왜곡하지 않는 범위에서 유의어를 쓰십시오. '그녀는 아름다운 숄을 두르고, 아름다운 가방을 들었으며, 아름다운 마을에 산다. 이 문장에서 '아름다운'은 반복될 뿐만 아니라, 정확하지도 않습니다. 글쓰기의 가장 큰 장애물 가운데 하나가 내용의 반복입니다. 중언부언하지 마십시오. 같은 내용(견해, 정보, 지식......)이 반복되면 독자는 냉정하게, 즉각 눈을 돌립니다. 친구와 이야기할 때를 떠올려보십시오. 어제 한 얘기를 오늘 하면 친구는 즉각 이렇게 나옵니다. "그거, 어제 들은 얘기야." 글쓰기도 마찬가지입니다. 3. 한 문장에는 하나의 정보만 담아라 이것은 문장을 짧게 쓰는 비결이기도 합니다. 한 문장에는 하나의 정보, 한문단에도 하나의 정보군을 담는 것입니다. 한 문장에 두 개 이상의 정보를 담는 순간, 문장은 길어집니다. 한 문단에 두 개 이상의 정보군을 담으면, 복잡해지기 때문에 독자가 이해하기 힘들어집니다. 아침에 집에서 나와 학교, 또는 사무실에 도착하기까지의 과정을 '한 문장, 하나의 정보' 원칙에 따라 글로 써보십시오. 처음에는 대단히 힘들 것입니다. 하지만 몇 번 고쳐 쓰다보면, 문장을 짧게 쓰는 방법을 스스로 터득할수 있을 것입니다. 4. 접속사를 쓰지 말라 통학 또는 통근 과정을 '한 문장, 하나의 정보' 원칙에 따라 쓰다 보면, 수시로 접속사가 끼어들 것입니다. 접속사 없이 쓰려고 애써보십시오. 최근에 읽은 소설 가운데 접속사가 거의 ('전혀' 라고 해도 크게 틀리지 않다) 없는 소설이 있습니다. 김훈의 장편소설 <남한산성>인데, 접속사에 유의하며 읽어보십시오. 매우 흥미로운 글읽기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접속사는 글 쓰는 이의 마음속에 있어야 합니다. 특히 연결형, 나열형 접속사를 피하십시오. 5. 나누고 묶어주어라 기사를 쓸 경우, 다양한 정보를 한꺼번에 제공해야 할 때가 자주 있습니다. 그럴 때는 유사한 것끼리 묶어줘야 독자가 편하게 읽을 수 있습니다. 음식 종류를 소개한다면, 국적별 혹은 재료별, 계절별 등으로 나누어 묶어줍니다. 6. 병치할 때 조심하라 같은 기능을 가진 단어, 구, 절 등이 나란히 놓일 때 자주 오류가 나타납니다. '사과와 큰 배' '철수는 중학생이고 영희는 공부를 잘한다'와 같은 문장이 의외로 많습니다. '사과'라는 단어와 '큰 배'라는 구는 병치하면 안 됩니다. 단어는 단어끼리, 구는 구끼리 병치하십시오. '사과와 배' '작은 사과와 큰 배'가 적확한 표현입니다. 앞의 문장은 '철수는 중학생이고, 영희는 초등학생이다로 써야 합니다. '중학생' (단어)과 '공부를 잘한다' (구)가 나란히 놓이면 대단히 어색합니다. '30-3-30 법칙'을 명심한다 언론인들은 30-3-30 법칙'을 자주 언급합니다. 여기서 30. 3. 30은 각각 30초, 3분, 30분을 일컫습니다. 독자들이 기사를 읽을 때, 처음 30초 동안은 제목이나 부제, 사진, 그래픽 요소, 기사의 도입부 등을 살펴본다는 것입니다. 독자들은 처음 30초 안에 기사를 읽을 것인지 말 것인지를 결정합니다. 만일 읽기로 마음먹었다면 다음 3분 동안 기사의 도입부를 읽습니다. 그리고 도입부가 흥미롭다면 30분 동안 기사를 끝까지 읽는다는 것입니다. 기자와 편집자는 처음 30초를 3분으로 늘리고, 다시 3분을 30분으로 늘리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것입니다. 기사만 그런 것은 아닙니다. 모든 글이 제목과 도입부에서 결정납니다. 시처럼 짧은 글에서도 제목이나 첫 연이 진부하면 독자들은 눈을 돌려버립니다. 소설은 굳이 설명이 필요 없습니다. 보고서나 논문도 마찬가지입니다. '30-3-30 법칙'은 첫 문장에 목숨을 걸라는 저널리즘적 글쓰기의 핵심을 압축하고 있는 법칙입니다. 이문재. 1959년 경기도 김포에서 태어나 경희대에서 국어국문학을 전공하고,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시사저널 취재부장, 문학동네 편집주간을 역임했고, 현재 <시사IN> 편집위원, <문학동네〉 편집위원, 〈녹색평론〉 편집자문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교수로 재직 중이다. 김달진문학상, 시와시학 젊은 시인상, 소월시문학상, 지훈문학상, 노작문학상을 수상하였으며, 시집으로 《내 젖은 구두 벗어 해에게 보여줄 때》, 《산책시편》, 《마음의 오지》, 《제국호텔> 등이 있다(pp.197-212).
    • 오피니언
    • 책소개
    2024-05-03
  • “흥청망청” 108회 선관위... 명분없는 돈 낭비
    본 기사는 교회발전연구소 대표 이능규 목사에게 모 인사가 108회 선관위(위원장 권순웅 목사)에 대해 제보한 내용을 바탕으로 작성한 기사임을 밝힌다. 제보 내용에 따르면 선관위가 불필요한 돈을 낭비하고 있다. 제108회기 선관위는 공정선거감시단 해외 활동에 이미 많은 경비를 집행했다. ▲전국장로회연합회 임역원수련회(일본) : 고정식, 손정호, 김삼주, 신덕수, 한기영(750만원 집행) ▲농어촌교역자부부수양회(다낭) : 권순웅, 신덕수, 지동빈, 임종환, 최병도(613만원 집행) ▲전국교역자하기수양회(필리핀) : 전웅구, 김상원, 유병희, 한기영, 이상돈(599만5천원 예산). 이때 위원장 권순웅 목사와 서기 한기영 목사가 강사를 맡았다고 한다. 현재 바뀐 선거규정에 따라 후보자는 행사에 참석할 수 없다. 그런데 선관위 공정선거감시단은 누구를 감시하기 위해 해외 행사에 동행하는 것인가? 제보자는 “돈**”이라는 격한 표현을 사용했다. 또한 선관위는 민찬기 목사가 제기한 가처분 신청 소송에 대응하기 위해 변호사비로 5천 5백만원을 지출했다. 선관위원들이 1차 투표해 7대7로 나왔다면 의견이 팽팽하다는 것인데 굳이 다시 투표해 7대8로 만든 것이 화근이다. 증경총회장단이나 실행위원회에 넘겨 자문을 구했다면 굳이 총회 돈을 지출할 소송에 휘말리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것이 중론이다. 현재 감사부는 107회기 선거관리위원회(위원장 배광식 목사)에 대해 특별재정감사를 하고 있다. 어제는 서기와 회계를, 오늘은 위원장과 심의분과장을 부른다. 안건은 선관위가 재정을 과잉지출했다는 것이다. 모 선관위원은 자기들은 비용을 아껴서 사용했다고 주장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기에 특별재정감사를 받는 것이다. 앞으로 108회기 선관위도 감사부에 의해 특별재정감사를 받지 말란 법이 어디 있겠는가? 이 악순환을 끊어야한다. 선관위의 근본적인 개혁이 필요한 때다.
    • 오피니언
    • 칼럼
    2024-05-03
  • 【북토크】 가수 장기하의 깨달음
    가수 장기하를 좋아한다. 노래가 재미있기 때문이다. 그의 대중적인 첫 노래 “싸구려 커피”, “달이 떠오른다, 가자” 등은 신선했다. 읽을 책들을 검색하다 보니 그가 몇 년 전에 쓴 것이 있어 대출해서 봤다. 부담없이 재미있게 읽었다. 첫 장인 ‘안경과 왼손’은 주어진 환경을 담담히 받아들이고 돌아본 후 감사하는 내용이다. 읽어볼만해 전문을 소개한다. 안경과 왼손 얼마 전 안경을 잃어버렸다. 매우 아끼는 안경이었다. 아니, 아낀다는 표현으로도 모자란다. 이삼 년 전 그 안경을 산 이후로는 오직 그것만 써왔던 것이다. 그런데 어느날 아침 갑자기 사라져버렸다. 있을 만한 곳을 전부 다 여러 번씩 싹싹 뒤져봤지만 찾지 못했다. 결국 예전에 썼던 다른 안경을 쓰고 집을 나설 수밖에 없었다. 약속 장소로 가는 길, 이삼 일 전에 읽었던 무라카미 하루키 에세이의 한 구절을 떠올렸다. "형체 있는 것은 아무리 애써도 언젠가, 어디선가 사라져 없어지는 법이다. 그것이 사람이건 물건이건." 마음을 털어버렸다. 그래, 그 안경이랑은 여기 까지였나보지 뭐. 나는 국소성 이긴장증이라는 병을 가지고 있다. 해괴해 보이는 이름이지만 의미는 간단하다. '국소성'이란 특정 부위에 나타남을, '이'는 이상함을, '긴장'은 말 그대로 긴장을 뜻한다. 한마디로 특정 부위가 이상하게 긴장된다는 얘기다. 이 병명에서 가장 중요한 글자는 '이'다. '이'자가 들어간 병을 선고받는다는 것은 말하자면 이런 상황이다. 몸이 안 좋다. 병원을 찾아가 묻는다. "선생님, 저 왜 아픈건가요?" 의사가 답한다. "그러게요. 이상하네요." 그렇다. 내 병은 원인도 치료법도 알려지지 않은 희귀병이다. 이 병이 처음 생긴 것은 대략 십오년 전쯤으로, 군악대 시험을 준비하던 시절이었다. 당시 나는 '눈뜨고코베인'이라는 록밴드에서 드러머로 활동하고 있었다. 가수가 되겠다는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저 드럼 하나로 먹고살 수 있을 정도로 연주를 잘하는 사람, 즉 프로 드러머가 되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그 외의 진로는 상상조차 하지 않았다. 학교 공부는 최소한으로 하고 드럼 연습과 밴드 활동 위주로 생활했다. 그러다보니 군복무를 시작도 하지 않은 채 대학 오 년 차를 맞았고, 더이상은 입대를 미룰 수 없게 되었다. 내 선택은 당연히 군악대였다. 군대에 있는 동안 손발이 녹슬면 큰일 아닌가. 일반 부대는 절대로 안 된다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군악대는 록 연주만 잘한다고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클래식 타악, 특히 행진곡풍의 연주에 능통해야 했다. 자신은 있었다. 이미 연습이라면 많이 해온 터였기 때문이다. 좀 다른 장르의 연주라고 해서 못 해낼 것은 없다고 생각했고, 시험을 대비해 맹연습에 돌입했다. 이삼 개월쯤 지났을 때 복병이 나타났다. 연습만 하려고 하면 내 의지와 관계없이 왼손이 꽉 쥐이는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드럼 연주의 기본은 그립이다. 누가 툭 치면 놓쳐버릴 듯 살며시 스틱을 잡고 부드러운 움직임을 만들어야 빠르고 정확한 연주를 할 수 있다. 그런데 자꾸 나도 모르게 스틱을 힘껏 잡게 되고 그것을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이 반복되다보니 미쳐버릴 노릇이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연습하다 너무 답답하고 화가 나서 소리를 지르며 스틱을 집어던진 것도 한두 번이 아니다. 결국 군악대는 포기했다. 치료법도 알 수 없고 상태가 호전될 기미도 보이지 않으니 어쩔 수가 없었다. 더욱 중요한 것은, 프로 드러머의 꿈도 함께 버렸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게 그리 절망스러운 단념은 아니었다. 내 생각의 흐름은 이랬다. '하긴 군악대의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 연주하는 게, 내가 멋있는 음악을 하는 데는 오히려 해가 될지도 몰라. 멋있는 음악이라... 그래, 생각해보면 프로 드러머가 되는 것 자체가 멋있는 음악을 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 수도 있겠네. 연주로 먹고살려면 돈 되는 음악을 해야 하는데, 내가 지금 멋있다고 생각하는 우리나라 음악 중에 돈 되는 게 하나라도 있나? 그리고 나는 우리 밴드 음악이 제일 멋있는데 그걸로 돈을 벌어본 적도 없잖아? 애초에 음악으로 돈을 벌겠다는 생각 자체가 문제였어!' 나는 홀가분한 기분으로 프로 연주자가 아닌, 돈은 안 돼도 '멋있는 음악을 하는 뮤지션이 되겠다고 마음 먹었다. 그리고 일반 부대에 입대했다. 제대한 후 나는 그 '멋있는' 뮤지션이 되는 일을 실행에 옮겼다. 파트타임 일자리를 구한 상태에서, 내가 싱어송라이터로서 이끄는 새 밴드 '장기하와 얼굴들'을 시작한 것이다. 최소한의 돈과 최대한의 시간을 확보해 자유롭게 음악활동을 하겠다는 생각이었다. 곡은 군복무중 짬짬이 만들어뒀었다. 물론 큰 인기를 얻으리라는 기대는 전혀 없이 만든 노래들이었다. 눈앞에 있는 관객들만은 확실히 재밌게 해주겠다는 생각이 다였다. 그런데 터졌다. 소위 '대박'이었다. 활동을 시작하고 일 년이 지나기도 전에 전 국민적 히트곡을 보유한 밴드가 된 것이다. 모든 것이 거짓말처럼 순조로웠다. 한 가지만 빼고 말이다. 왼손에 힘이 들어가는 증상이 기타를 연주할 때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처음에 이 증상이 신기했던 건 유독 드럼 연주를 할 때만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다른 일을 할 때는 아무런 불편이 없었다. 물론 기타 연주를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군복무중에도 생활관에 비치된 통기타를 치며 노래를 만들었고, '장기하와 얼굴들' 첫 싱글을 녹음할 때도 기타는 내가 다쳤으며, 밴드 활동 초기에는 공연을 할 때도 절반 정도의 곡에서는 내가 기타를 잡았다. 그런데 급격하게 치솟는 인기를 실감하며 공연을 이어가던 어느 날, 기타를 연주할 때도 왼손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결국 기타도 포기했다. 이번 단념은 군악대 때와는 달리 좀 절망스러웠다. 공연에서 기타를 연주하지 않기로 했음은 물론이고, 평소에 혼자 치는 것도 거의 못하게 됐다. 늘 자유자재로 하던 기본적인 플레이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게 되니 짜증이 치밀었다. 자연히 심심풀이로 기타를 잡는 일이 점점 줄어들었다. 중학교 때 이후로 그때까지 줄곧 기타는 나의 가장 좋은 취미 중 하나였다. 집에 있을 때면 침대에 누워 기타를 배에 얹고 아무렇게나 퉁겼다. 그러면서 멜로디를 이리저리 흥얼거리다보면 이따금씩 노래가 만들어지곤 했다. 그런 일상이 하루아침에 송두리째 날아가버렸다. 게다가 이번에는 증상이 연주에만 국한돼 나타난 것이 아니라 일상 전반으로 퍼져나갔다. 곧 타자를 치는 것도, 단추를 잠그는 것도, 왼손을 써야 하는 어떠한 일도 예전만큼 쉽게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로부터 십 년이 흘렀다. 그런데 그 십 년을 돌이켜보면, 이 병이 내게 나쁜 일만은 아니었다. 사실 병에게 엎드려 절하고 싶을 지경이다. 프로 드러머의 길을 포기함으로써 결국 '장기하와 얼굴들'을 시작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기타 연주를 포기한 것 역시 내게 두 가지 커다란 선물을 가져다주었기 때문이다. 첫째는 새 기타리스트 하세가와 요헤이 형을 영입한 것, 둘째는 내가 무대에서 악기 없이 자유롭게 퍼포먼스를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두 가지가 없었다면 '장기하와 얼굴들’의 활동이 내게 가져다준 희열은 말도 안 되게 줄어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세월이 지나면서 증상도 아주 조금씩 좋아져 이제는 거의 다 나았다. 지금도 약간의 느낌이 남아 있긴 하지만, 일상에서 그것을 의식하게 되는 일은 드물다. 기타와 드럼도 취미 정도로는 다시 연주할 수 있게 되었다. 그간 연습을 안 했으니 남들 앞에 뽐낼 만한 연주력은 당연히 아니지만, 사실 이제는 그런 능력이 필요하지도 않다. 싱어송라이터로서 좋은 연주자들과 함께할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다. 무엇보다, 증상이 가장 심했을 때를 떠 올리면 집에서 혼자 재밌게 연주할 수 있는 것만 해도 감지덕지다. 지금도 이 병의 원인은 의학적으로 밝혀지지 않은 듯하고, 물론 나도 아직 정확히 어떤 일이 벌어진 것인지 알지 못한다. 다만 이렇게 추측할 뿐이다. 내가 나 스스로에게 과도한 것을 강요했고, 몸이 그만두라는 신호를 보냈다. 나는 그것을 무시하지 않고 충분히 쉬게 해주었으며, 그랬더니 시간을 두고 차츰 회복되었다. "형체 있는 것은 아무리 애써도 언젠가, 어디선가 사라져 없어지는 법이다. 그것이 사람이건 물건이건? 그리고 형체가 없긴 하지만 능력도 마찬가지다. 어제까지 당연히 할 수 있었던 일을 오늘 갑자기 못하게 될 수도 있다. 나는 그럴 때마다 무척 괴롭긴 했지만, 결국 다 순순히 받아들였다. 이 능력은 여기까지인가보다, 하고. 그리고 새로운 상황에 맞춰 새로운 계획을 세웠다. 그러고 나면 그전에는 상상도 못했던 다른 길이 열리곤 했던 것이다. 안경은 며칠 뒤에 소파 밑에서 찾았다. 전날 술에 취해 소파에서 잠들었고, 안경을 아무렇게나 내팽개치는 과정에서 소파 아래로 들어간 모양이었다. 거실에서 잠드는 일이 거의 없다보니 그곳을 찾아볼 생각은 하지 못했던 것이다. 먼지 구덩이 속에 얌전히 놓인 안경을 발견한 순간, 그야말로 날아갈 듯한 기분이었다. 아무리 많이 아끼는 안경이라 해도, 물건 하나로 그렇게까지 기쁠 수 있다싶었다. 모르긴 해도, 깨끗이 포기했었기 때문일 거다(pp. 17-24).
    • 오피니언
    • 책소개
    2024-05-02
  • 【단상】 부총회장 선거, 축제가 싸움판으로
    지난 4월 25일 오전 11시 참좋은교회(이윤찬 목사 시무)에서 대구교직자협의회 제31회 정기총회가 있었다. 이승희 증경총회장의 개회 예배 설교 후 합심기도 시간에 경북교직자협의회 대표회장 강전우 목사가 ‘총회와 영남지역을 위해서’ 기도할 때 부총회장 자격 문제로 소송이 붙은 총회를 염려하며 간절히 기도했다. 소송 관계자인 부총회장 후보 민찬기 목사나 장봉생 목사의 마음은 어떨지 모르나 총회 회관에서 먼 경상도 지역에서도 현 사태를 매우 안타깝게 여기며 탄식으로 기도하고 있다. 아마 이 사태를 지켜보는 대부분의 총대들의 마음도 편치는 않을 것이라고 본다. 한 사람의 부총회장이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과 물질이 필요하다. 노회와 협의회, 총회 등에서 오래 봉사하며 자신을 알려야한다. 이에 많은 시간이 든다. 그리고 물질로도 많이 섬겨야한다. 그래서 아무나 부총회장이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면에서 시간과 물질로 섬겨온 부총회장 후보들은 모두 총회의 귀한 자산이다. 바람직한 것은 단독 후보로 추대되는 것이지만 어쩔 수 없이 경선이 될 수도 있다. 그러다보면 친했던 사이도 서먹해지거나 “원수” 사이가 될 수 있다. 그래서 곽선희 목사는 운동을 할 때 서로 마주보는 것은 하지 않는다고 했다. 탁구나 테니스나 서로 마주보고 하다보면 감정 싸움이 될 수 있기에 자기는 각자 실력으로 승부하는 볼링을 한다고 말한 것을 들은 적이 있다. 일리 있는 말이다. 오래 세월 총회를 섬겨온 민찬기 목사나 장봉생 목사는 현재 서로를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내리 누르고 이겨야할 경쟁 상대로 보지 않겠는가 말이다. 이런 면에서 선거란 참으로 잔인한 것인지도 모른다. 민찬기 목사 소속 임원회가 민찬기 목사의 후보 자격에 대해 물었을 때 장봉생 목사 소속 노회도 임시노회를 열어 부총회장 출마 자격에 대해 선관위에 질의했다. 선관위가 이 문제를 다룰 때 투표에 처음에는 7:7 동수가 나왔다. 이어 재투표하여 7:8로 세 번 출마는 안된다는 결론을 내렸다. 다 지나간 일이지만 의견이 7대 7로 나뉘었다는 것은 선관위원 내에서도 의견이 팽팽했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 문제를 바로 처리할 것이 아니라 좀더 시간 여유를 두고 처리했다면 좋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있다. 증경총회장단의 의견을 듣는다든지, 실행위원회에서 의견을 구했다면 모양세는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속전속결로 재투표해 7:8로 세 번 출마 불가로 정했다. 그러자 민찬기 목사측에서는 이 문제에 대해 소송을 했고, 소속 노회에서 부총회장 후보로 추천을 받았다. 세상 법정이 이 문제를 어떻게 처리할지는 두고보면 된다. 그런데 성경은 교회 문제를 세상 법정에 끌고가는 것을 경고하고 있다. [고전6:1-7] “1 너희 중에 누가 다른 이와 더불어 다툼이 있는데 구태여 불의한 자들 앞에서 고발하고 성도 앞에서 하지 아니하느냐 2 성도가 세상을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세상도 너희에게 판단을 받겠거든 지극히 작은 일 판단하기를 감당하지 못하겠느냐 3 우리가 천사를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그러하거든 하물며 세상 일이랴 4 그런즉 너희가 세상 사건이 있을 때에 교회에서 경히 여김을 받는 자들을 세우느냐 5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 하여 이 말을 하노니 너희 가운데 그 형제간의 일을 판단할 만한 지혜 있는 자가 이같이 하나도 없느냐 6 형제가 형제와 더불어 고발할 뿐더러 믿지 아니하는 자들 앞에서 하느냐 7 너희가 피차 고발함으로 너희 가운데 이미 뚜렷한 허물이 있나니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 새로이 총회를 섬길 일꾼을 뽑는 총회 선거가 축제가 아니라 세상의 조롱거리가 되고, 사법의 판결을 받아야하는 싸움판이 된 것이 참으로 안타깝다.
    • 오피니언
    • 논단
    2024-04-26
  • 취재 기자를 내쫓는 노회들...무엇이 두려운가?
    봄 정기노회가 열리는 계절이다. 서울에서 먼 지방의 몇몇 노회를 취재갔다. 그 중 2개 노회에서 “내쫓김”을 당했다. 이리노회는 북일교회 문제로 회원 호명 때부터 시끄러웠다. 결국 노회원들간에 고성이 오갔다. 이런 가운데 취재하고 있는 기자들에게 나가달라고 "거칠게" 요구했다. 결국 쫓겨날 수 밖에 없었다. 충청노회도 전 총신대총장 김영우 목사 피소건에 대해 다루며 기자들에게 나가달라고 “험악하게” 요구했다. 결국 본당 중이층으로 쫓겨갈 수 밖에 없었다. 기자는 사실을 취재하고 알리기 위해 그 현장에 가 있는 것이다. 북일교회 문제는 대부분의 총회원들이 알고 있을만큼 큰 이슈이다. 당연히 기자들이 가서 취재할 수 밖에 없는 사항이다. 기자는 총회원들의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 대신해서 그 현장에 간 것이다. 그런데 무슨 이유로 기자들을 내쫓는 것인가? 그것이 과연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겠는가? 기자가 보면 안될만큼 감춰야할 문제가 있는가? 사실을 사실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문제해결에 도움이 될 수 있다. 문제 없는 노회는 취재간 기자들을 반기며 좋게 기사를 써서 노회를 잘 홍보해 달라고 부탁한다. 기자로서도 기분좋은 일이다. 반면 문제 있는 노회는 기자를 내쫓는다. 마치 잡상인 취급을 한다. 부득이 기자를 내보낼 필요가 있다면 “정중하게” 요청했으면 한다. 같은 합동측 목사한테 그렇게 함부로 해서 되겠는가? 앞으로도 “문제 있는” 이리노회와 충청노회 “사태 추이”에 대해 예의주시할 것이다.
    • 오피니언
    • 칼럼
    2024-04-03
  • 【북토크】 편협한 꼰대가 되지는 말아야 할텐데....
    자기 생각에 갇혀 사는 사람은 편협한 사람이다. 이런 사람하고는 대화도 되지 않는다. 열린 사고가 필요하다. 남과 어울리기 위해서는 개방해야한다. 죽고 사는 진리의 문제가 아니라면 “그럴수도 있구나”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그러나 그것이 그리 쉽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으로 알고 있다. 편협함 공부를 하면서 문득 깨달은 건, 법률 외에 삶의 모든 기준들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시작한다는 것이다. 그 기준들은 절대불변의 진리가 아니어서 주변사람에게 영향을 받아 생성되기도 하고 타인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세워지기도 한다. 또 삶의 경험이 켜켜이 쌓이면서 조금씩 견고해지고 구체적으로 변하기도 한다. 그렇게 여러 기준들을 만들어 옳고 그름을 평가하는 일은 어쨌거나 사람이 하는 것이란 점에서 언제나 주관적이다. 하지만 우리는 종종 너무 쉽게 각자가 세운 판단 기준이 ‘정답’이라고 착각한다. 사람은 쉽게 타성에 젖으니 자신의 판단 기준과 결론이 절대적인 단 하나의 정답이라 믿으며 자기 우물 안에서 살아간다. 하지만 그 기준에 정답이란 없기에 자신이 바르고 타당한 기준을 세워가며 나이 먹고 있다는 생각도 사실 편협한 ‘착각’에 가깝다. 나이를 먹는 일이 무서운 건 나도 모르는 새 나의 판단이 바르고 타당한 정답이라고 생각하게 되기 때문이다. 특히 어떤 조직에 잘 적응한다는 것은 곧 그 곳의 기준을 잘 습득해 체화한다는 것이기도 하다. 공동체에서 튀는 사람이 되기 싫어서 공동체의 평가 기준을 답습하기도 하고, 나는 다르다 여기며 살아도 어느 날 문득 돌아보면 그 밥에 그 나물처럼 사고하게 되는 것이 현실이다. 자신의 존재를 정당화하기 위해 쉼 없이 자신의 옳고 그름을 고집하기도 하고 자신의 결핍된 부분을 숨기기 위해 고집스러운 기준으로 타인을 깎아 내리기도 한다. 입만 열면 세상 곳곳에 대한 불만을 쏟아 내는 투덜이 스머프 같은 사람이 있었다(입만 열면 남의 흉을 보는 사람도 있었는데 그 결이랑은 또 다르다). ‘이건 이래서 구리고, 저건 저래서 구리고’, ‘그런 사고방식이 말이 되느냐. 말은 그렇지만 속내는 이런 것 아니겠느냐’하는 식으로 언제나 자신 밖의 사람과 상황에 대해 평가만 늘어놓는 사람이었다. 초반에는 그가 솔직하고 유쾌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이 어떤 것. 누군가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는 지 밝히는 것은 꽤나 용기가 필요한 일이고 그 취향과 기준을 고백하는 것이 자신의 약점이 될 수도 있는 데 저렇게 쿨하게 늘어놓다니! 성격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대화의 주된 발언이 자기 자신 밖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한 평가이다 보니 들을수록 의아한 지점이 생겼다. 당신에게 평가할 자격이 있는지, 타인이 당신에게 평가 받아야 할 이유가 있는지, 평가할 자유가 있다고 해도 당신의 평가를 궁금해 하는 사람이 있는지 하는 것이었다. 심지어 그의 평가를 들으면 들을수록 그에 대한 인상 또한 '예리하고 유쾌한 사람이다' 라기 보다 ‘어딘가 모르게 편협하다’, ‘편협함을 자랑하는 태도가 참 멍청하다’까지 이어졌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난 뒤 몇몇 단정적인 말들에서 그가 타인에 대한 평가를 거침없이 내뱉을 수 있었던 까닭을 눈치 첼 수 있었다. 그 모든 것은 자신의 말이 정답이라고 여겨서 가능했던 것 이었다. 자기 말이 정답인 사람 곁에 다른 의견들은 오답처리 되기 마련이다. 그리고 자신의 의견이 오답이 되 는 대화를 좋아라할 사람은 없다. 그렇게 그는 자기주장이 뚜렷한 사람에서 편협한 사람으로 점차 다르게 기억 됐다. 중학생 때 유독 적이 없었던 한 친구가 떠오른다. 말수가 적어서, 자기주장이 강하지 않아서, 호불호가 없어서가 아니라 ‘편견’이 없어서 두루두루 모두와 잘 지내는 친구였다. 그는 어떤 친구들에게도 늘 같은 태도로 화답했다. 편견, 그러니까 그 편협함은 끊임없이 나를 위해 타인을 배척하는 수단이 된다. 진정한 세월의 지혜는 오히려 '편견 없음'에 가까울 거라 생각한다. 타인을 판단하는 가장 괜찮은 기준은 포용이 아닐까? 타인과 자신에 대해 사람은 언제나 ‘알 수 없음’ 한 줌은 가지고 사니까. 견고한 기준은 편협한 생각의 방증일지도 모른다(pp. 178-181).
    • 오피니언
    • 책소개
    2024-03-31
  • 【북토크】 自害가 생존전략이라니....
    나는 상담, 심리 관련 책도 좋아한다. 대학때부터 지금까지 기회 되는대로 읽고 있다. 우연히 보게 된 이 책에서 “자해도 생존방법”이라는 것에 작은 충격을 받았다. 오죽하면 살기 위해 자기 몸에 해를 주는 것인가? 길지 않은 인생을 사는데도 참 힘들다. 세상에 불쌍한 사람들이 참 많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리고 이들과도 더불어 살려면 무엇을 해야하는가 고민하게 된다. 자해하는 게 문제라고 말하며 부모님 권유로 상담실에 온 고등학생 내담자를 만났습니다. 고등학교에 입학한 이후 사소한 일로 친구들과 사이가 멀어졌고 왕따를 당하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학교 가는 게 힘들어서 지각과 결석을 반복하며 적응이 더 어려워졌다고 합니다. 친구들이 자신에 대해 안 좋게 말할까 봐 계속 예민한 상태로 있다 보니 피곤하고, 수업에 집중하기 어려워서 거의 책상에 엎드려 있는다고 합니다. 반대로 온라인에서 만난 학교 밖 친구들과는 관계를 잘 맺고 인기가 많다고 합니다. 웃으면서 인기가 많다고 얘기 하다가 이내 걱정하는 얼굴로, 사실 인기가 많은 이유는 친구들을 잃을까 봐 엄청나게 신경을 쓰면서 친구들 비위를 다 맞춰주기 때문이라고 털어놓았습니다. 학교에서는 왕따니까 밖에서 힘들게 만든 친구들이라도 잃지 않기 위해 친구들이 부르면 거절하지 못하고 모든 모임에 나가고 친구들 말을 들어주고 웃어주느라 에너지가 다 빠진다고 했습니다. 기분이 좋지 않은 날도 즐거운 것처럼 친구들과 놀고, 막상 집에 오면 허무하고 외로운 마음이 든다고 합니다. 혹시나 말실수해서 친구들이 자신을 싫어하게 될까 봐 매번 친구들에게 연락해서 자신이 잘못한 게 없는지 확인 한다고 합니다. 마음이 초조하고 불안한 상태로 가득 차 있다가 가족들의 말 한마디에 갑자기 화를 냅니다. 우울한 기분, 친구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공허한 느낌, 불안감이 뒤섞이면서 마음이 터질 것 같은 상태가 된다고 합니다. 그럴 때 자해를 하게 된다고, 어쩔 수 없이 하게 된다고, 나지막이 말 합니다. 물속에 오래 있을 때 가슴이 답답해지고 숨이 안 쉬어지다가 수면 위로 올라오면 숨이 크게 내쉬어지는 것처럼, 자해하고 나면 숨이 쉬어지고 살 것 같은 기분이 든다고 많은 내담자가 말합니다. 자해는 화가 나는 마음을 표현하는 방법이자 자신이 얼마나 힘든지 다른 사람에게 알리는 수단입니다. 아무런 감각이나 감정을 느끼지 못할 때 무언가를 느끼도록 도와주기도 하고, 사람들에게 도움이 필요하다고 요청하는 방법입니다. ‘자해는 나쁘다, 절대 해서는 안 된다’라는 말이 먼저 튀어나올 수도 있지만, 자해는 누군가에게는 필요한 생존전략이 됩니다(pp. 71-72).
    • 오피니언
    • 책소개
    2024-03-31
  • 【북토크】 문학을 통해 배운 것들
    이 책의 저자는 문학을 통해 배운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세상을 바라볼 때 시선의 위치와 방향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시야가 달라진다는 것,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자리에 서보는 일, 들리지 않는 목소리를 듣고 보이지 않는 존재를 보는 일, 한 편의 소설을 읽고 내 안의 무언가가 완전히 바뀌어버리는 일 또한 가능하다는 것, 인간은 끊임없이 이야기를 만들고 쓰면서 다른 세계를 상상하고 다른 사람이 되는 일을 꿈꾸면서도 끝내 자기 자신일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 이 모든 것을 나는 문학을 통해 배웠으며 이 경험이 나를 바꿨다는, 어쩌면 너무나도 문학도 같은 이야기다” 나는 이 글에 전적으로 동감한다. 그래서 지금도 이 “재미”에 열심히 책을 읽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 책은 직접 문학 작품을 다루지는 않는다. 저자는 넥플릭스, 왓챠, 웨이브 등 여러 OTT에 있는 드라마나 영화를 소재로 이 책 한권을 썼다. 물론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작품도 많다. 내공이 보통이 아니라는 느낌을 갖는다. 나는 이런 글을 쓸 실력이 없어 감탄하면서 봤다. 유홍준 교수는 그의 역작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서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을 했다. 모르면 보이지 않는다. 기회가 되면 이 책의 저자처럼 영화나 드라마에 대한 글도 써보고 싶다. 그럴려면 아들이 가입해 놨지만 안 보고 있는 넥플릭스를 열심히 이용해야 할 것 같다. 할 일이 또 하나 늘었다. 이 또한 새로운 도전이니 기대가 된다. 국어국문학을 전공했다. 서른 줄에 접어든 이후로는 이야기할 일이 거의 없긴 하지만, 피치 못할 이유로 전공을 언급해야 하는 상황이 되면 괜히 머쓱해진다. 직업이 작가이기 때문이다. 작가인데 국어국문학과를 나왔다고 하면 "전공을 살리셨구나!" 같은 말을 듣게 되고 만다. 전공을 살린 것일까? 괜히 골똘해졌다가는 국어학과 국문학의 차이라든가, '과연 어디까지가 문학인가'라는 질문이라든가,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해서 작가가 되면 전공을 살린 것인가 아닌가 같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게 되기 때문에, "그런가요?" 하고 대답한 뒤 얼른 소재를 바꾸는 것이 좋다. 그러지 않으면 "국문과가 굶는 과라던데... " 하는 식의 무례한 농담을 듣게 되어버리고 만다. 이 농담을 들을 때면 미소 비슷한 것도 지을 수 없기 때문에 재빠른 소재 전환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다시 한번 곰곰이 생각해봐도 국문학을 전공했기 때문에 작가가 된 것 같지는 않다. 인과관계가 없는 일로 보인다. 학과 공부가 나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거나 쓸모없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문학이 정말 재미있었기 때문에 열심히 공부했고, 그래서 상당히 많은 영향을 받았다. 문학 작품을 읽고, 문학을 배우고, 듣고, 공부하며 보낸 20대 초반의 몇 년간, 내가 세상을 보는 법은 달라졌다. 이 시절의 경험이 내 삶 전반에 어떤 영향을 미쳤고 또 나의 어떤 부분을 바꿨는지를 전부 말하자면 너무 긴 이야기가 될 것이다. 줄여서 말해보자면, 나는 문학을 통해 이런 것들을 배웠다. 세상을 바라볼 때 시선의 위치와 방향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시야가 달라진다는 것,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자리에 서보는 일, 들리지 않는 목소리를 듣고 보이지 않는 존재를 보는 일, 한 편의 소설을 읽고 내 안의 무언가가 완전히 바뀌어버리는 일 또한 가능하다는 것, 인간은 끊임없이 이야기를 만들고 쓰면서 다른 세계를 상상하고 다른 사람이 되는 일을 꿈꾸면서도 끝내 자기 자신일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 이 모든 것을 나는 문학을 통해 배웠으며 이 경험이 나를 바꿨다는, 어쩌면 너무나도 문학도 같은 이야기다(pp. 139-141).
    • 오피니언
    • 책소개
    2024-03-28
  • 【북토크】 한 대형 교회의 탄생과 몰락
    세상에는 별별 사람들이 있고, 별별 책들이 있다. 이 책도 그 중 하나다. 우연히 읽게 됐다. 읽다보니 재밌어서 끝까지 보게 됐다. 세계 여러 곳의 버려진 건물들에 대한 이야기가 흥미로웠다. 목사 아니랄까봐 그중 교회에 대해 다룬 이야기에 관심이 갔다. 큰 돈으로 지은 교회가 결국 교인들의 이사로 숫자가 줄자 큰 건물 유지에 실패하고 버려진 이야기다. 얼마전 아랫 지방에서 열린 노회를 취재했다. 교회가 매우 컸다. 그런데 외진 곳이라해서 부목사나 여전도사나 부교역자가 한명도 지원하지 않는다고 했다. 지방 작은 동네에 있는 이 큰 교회가 앞으로도 잘 유지가 될 수 있을지 염려스럽다. 인구감소는 절벽이라 지방은 소멸하고 있고 사람들은 먹고 사느라 종교에 관심이 없는데 앞으로 50년 후에도 그 큰 교회가 교회로서 제대로 살아남을 수 있을까?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기적의 도시'는 왜 미국의 살인 수도'가 됐을까-시티감리교교회(GARY CITY METHODIST CHURCH) 미국 인디애나주의 공업 도시 가운데 가장 젊은 도시인 게리Gary는 미시간호 남쪽에 40.46제곱킬로미터쯤 펼쳐진 습지에서 1906년에 태어났다. 시카고에서 고작 64킬로미터 떨어진 곳이다. 게리는 유나이티드스테이츠철강 United States Steal Corporaton(Us스틸)이 낳은 도시다. US스틸은 게리에 시간과 에너지, 비용을 쏟아 최첨단 공장을 짓는 대신 공장 노동자를 위한 마을은 눈에 띄게 무성의하게 계획했다. 예를 들어 게리에서는 시민이 아니라 철강 공장을 중심으로 전력 공급을 조절했기 때문에 가로등이 깜박거리곤 했다. 하지만 게리를 '기적의 도시' 나 '마법 같은 도시', '금세기의 도시'라고 부르며 옹호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금세기의 도시'라는 별칭은 게리의 앞날을 어느 정도 예언했다. 게리는 20세기의 우여곡절에 속수무책으로 휘둘렸고, 도시의 운명은 미국 제조업의 호황과 불황에 따라 요동쳤다. 도시 인구는 유럽 에서 이민자가 쏟아져 들어오고 짐크로Jim Crow법(공공시설에서 백인과 유색 인종을 분리하는 남부 주들의 법률로 1876년부터 1965년까지 시행됐다. 옮긴이)이 시행되는 남부에서 아프리카계 시민이 몰려오며 대거 늘어났다. 그러나 20세기 후반부터는 실업과 소위 백인 탈출white flight(백인 중산층이 도심에서 교외로 탈출하는 현상. 옮긴이) 탓에 인구가 대폭 줄어들었다. 게리의 인구는 1960년에 17만 8000명으로 절정에 달했지만, 오늘날에는 7만 8000명 미만이다. 도시가 이름을 따온 주인공은 엘버트 H. 게리라는 기업 변호사이자 카운티 지방법원 판사다. 그는 US스틸에 융자해준 존 피어폰트 모건의 의견에 따라 기업의 이사회 회장에 임명되며 기업가로 변신했다. 게리는 노동조합과 노동자 권리에 반대하고자 성경을 선택적으로 인용하는 독실한 사람이었다. 자존심이 강하고 유머 감각이라곤 없는 이 도덕주의자는 하얗게 센 머리와 콧수염을 깔끔하게 정리한 모습으로 귀족적 분위기를 풍겼다. 신도시에 게리라는 이름을 붙이자고 제안한 사람도 그였다. 모건이 “물렁뼈 아첨꾼”이라고 맹비난할 만큼 교활한 수완가였던 그는 이사회의 반대를 노련하게 물리쳤다. 사실 이사회는 새 도시에 US스틸 회장 윌리엄 엘리스 코리의 이름을 붙여야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미국 우체국도 신도시의 명칭을 게리로 정하면 메릴랜드주의 게리와 헷갈릴 것이라며 반대했다. 중서부에서 나고 자란 게리는 자신의 이름을 딴 도시가 설립된 후에도 계속 뉴욕에 머물렀지만, 내 마음은 인디애나주 게리에 있다"라고 자주 주장했다. 1920년대에 그는 급증하는 게리 인구에 헌신할 새로운 감리교 교회를 세우는 사업도 열정적으로 후원했다. 교회를 지을 부지를 제공하고 기업 자금 35만 달러를 공사 기금으로 내놓는 안을 승인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4단 건반 어니스트 스키너 파이프 오르간까지 개인적으로 기부했다. 아마 게리는 교회가 재정적으로 자립할 수 있도록 계획되었고, 예배를 보는 본관 외에도 사회적, 교육적 기능과 상업적 기능을 맡은 별관이 들어선다는 데 매력을 느꼈을 것이다. 이 계획은 진보적인 지역 목사 윌리엄 그랜트 시먼 박사가 주도했다. 인디애나 출신으로 보스턴신학교를 졸업하고 인디애나 그린필드의 드포대학교에서 철학을 가르쳤던 시먼은 1916년에 다코타웨슬 리언대학교에서 게리로 왔다. 게리에서 그는 낙천적 성격 덕분에 '서니 짐 Sunny Jim(명랑한 짐. 옮긴이)'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아울러 인종적 관용과 더 커다란 통합을 지지하며 큰 목소리를 냈다. 1924년, 그는 큐클럭스클랜(K.K.K)을 영웅으로 묘사하는 D.W. 그리피스의 영화 <국가의 탄생>이 "인종적 편견을 일으킨다"며 오르페움 극장에서 상영을 중단해달라고 게리 시장 R. O. 존슨을 압박했다. 안타깝게도 그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해 12월, 누군가가 어느 흑인 남성을 공격한 후 휘발유를 들이붓고 불을 질러서 심각한 화상을 입혔다. 가해자는 끝내 체포되지 않았고, 게리에서는 인종차별적 공격이 급증했다. 시먼은 교회가 게리의 모든 공동체를 하나로 모으기를 바랐다. 그러나 수많은 백인 신도의 저항과 인종 차별 탓에 모두를 포용하는 교회를 만들겠다는 그의 꿈은 꺾이고 말았다. 시먼은 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제작한 팸플릿에서 교회에 관한 자신의 비전을 이렇게 설명 했다. "쇠와 철을 만드는 건장한 노동자, 활발하게 영업하는 상업가, 바쁜 여성, 성장하는 아이들은 주일에 한 시간뿐만 아니라 주중에도 매시간 주님의 영향력을 확인하며 그리스도가 살아계신다고 확신합니다. 따라서 시내 교회에서 예배 계획과 포괄적인 목회 활동 계획을 마련했습니다. 교회는 일주일 내내 문을 엽니다. 교회는 청년과 노인을 위해 기독교 교육, 건전한 오락, 매력적이고 순수한 여흥 거리를 제공합니다. 무엇보다도 교회는 도시의 중심부에 기독교의 우애 정신을 불러옵니다" 게리의 시티감리교교회는 고딕 양식을 완벽하게 부활시킨 장중한 작품이자 중서부 최대의 감리교교회였다. 시카고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건축 회사 로앤드볼렌바허Lowe & Bplenbacher가 인디애나 베드퍼드의 석회암을 사용해서 21개월 만에 완공했다. 1926년 10월 3일에 시먼이 첫 예배를 집전했고, 게리에서는 일주일 동안 밤마다 축하 행사가 열렸다. 목사 관저 뒤로 각종 사무실과 체육관, 극장 홀까지 품은 9층짜리 건물이 들어섰다. 교회에서는 강연과 대담, 연극, 스포츠 행사(정규직 직원 여섯 명 중에는 스포츠 감독도 있었다), 공공 행사, 음악 콘서트, 종파를 초월한 공연과 쇼, 심지어 영화 상영까지 이루어졌다. 그런데 1700명쯤 되는 신도 가운데 일부는 교회 건물이 지나치게 가톨릭적이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교회 단지 전체를 관리하는 데 드는 비용은 시먼이 처음에 계산했던 것보다 더 컸다. 유지비 탓에 자금이 계속 부족해졌기 때문에 문제가 심각해졌다. 교회를 다니지 않는 사람도 찾아오게 만들어서 수익을 개선하고자 카페테리아를 만들자는 계획이 제안되었다. 하지만 자기 식당의 손님을 빼앗기고 싶지 않았던 주요 감리교 식당의 주인이 반대하는 바람에 무산되었다. 볼링장을 만드는 계획도 거론된 듯하지만, 실현되지 못했다. 어쨌든 교회가 춤과 저속한 언어를 반대했으니 젊은 노동자들 사이에서 인기가 없을 수밖에 없었다. 고단한 일상에서 벗어나 느긋함을 즐기려는 사람들은 언행을 조심할 필요가 없는 데다 술도 마실 수 있는 무허가 술집에 드나드는 편을 더 좋아했다. 시먼은 1929년에 결국 신도들에게 쫓겨나서 오하이오주 랭커스터 교구로 옮겼다. 그는 게리를 떠나면서도 이곳에는 "진보와 환대라는 진정 서구적인 정신"이 있다며 게리를 여전히 사랑한다고 밝혔다. 그는 1944년에 자동차 사고로 숨졌다. 유언에 따라 시먼의 유해는 그 자신이 설립에 힘을 보탰던 게리의 교회에 묻혔다. 전후 종교 부흥기였던 1950년대에 게리의 시티감리교교회는 무려 3000명이나 되는 신도수를 자랑했다. 백인과 중산층이 대다수였던 교회 신도는 게리의 심각한 인종간 불평등을 반영했다. 게리는 당대 미국 복부에서 인종 차별이 가장 극심한 도시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1960년대로 접어들자 부유한 백인이 교외로 떠나기 시작했다. 철강 산업에서 해외 경쟁이 치열해지고 자동화가 확대되면서 정리해고가 발생하자 도심 범죄율도 증가했다. 결국 교회 신도 숫자가 점차 줄어들었다. 1973년에 교회의 신도는 겨우 320명뿐이었고, 이 중에서 예배에 꾸준히 나오는 사람은 3분의 1에 지나지 않았다. 2년 후, 시티 감리교 교회는 문을 닫았다. 인디애나대학교가 교회와 이웃한 홀 일부를 인수했지만, 교회를 대신할 용도를 찾지 못했다. 게리가 "미국의 살인 수도"라는 부끄러운 이름을 얻은 1993년, 교회는 이미 무너져가는 겉껍질로 변해 있었다. 4년 후에는 화재가 건물 전체를 휩쓸었고, 복구를 향한 희망을 완전히 꺾어놓았다. 2000년대로 들어선 후 한동안은 철거가 유일한 답인 듯했지만, 이제는 공원 조성이라는 가능성이 새로 생겨났다. 이 도심 속 에덴은 러스트벨트에서 가장 고통받은 도시, 가까운 과거는 괴로웠고 미래는 불안한 이 지역에 위안이 되어 줄지도 모른다(pp. 274-282).
    • 오피니언
    • 책소개
    2024-03-28

목회 검색결과

  • 기도와 찬양으로, 감사하며 맡기라
    저는 후암동에서 30년 이상 대성모터스라는 자동차 정비공장을 운영하는 후암교회 이규석 집사입니다. 20여 년 전 제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믿음과 삶의 자세에 변화가 생긴 사연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공장이 도심에 있어 교통이 편리하고 한 장소에서 오랫동안 친절, 신속, 정확, 청결한 서비스를 고객에게 제공하다 보니 단골고객도 많고 주위의 평가도 좋아서 사업이 비교적 잘 되었습니다. 저는 좀 더 넓은 사업장에서 상용차 정비쪽으로도 사업을 확장하고자 원래 운영하던 공장은 공장장에게 맡기고 경기도 이천 지역에 2,000여평의 새로운 공장을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후암동과 경기도 이천을 오고 가며 일을 할 수가 없기에 후암동 공장은 공장장에게 모두 맡기고 업무 보고를 통해 중요한 일만 지시하고 저는 주로 이천 사업장으로 출근을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가족처럼 생각하고 공장을 통째로 맡긴 공장장이 문제를 일으키기 시작하였습니다. 믿었던 공장장은 제게 업무 보고를 제대로 하지 않을 뿐 아니라 술을 마시고 며칠씩 말도 없이 결근을 하거나 심지어는 한창 바쁜 여름 휴가철에 일주일씩 공장을 비운 채 해변가에 놀러가버리는 등 제 마음대로 행동을 하였습니다. 저는 회사 대표로서 그냥 두고 보기에 너무 지나치다 싶어 보다못해 주의를 주었습니다. 그런데 공장장은 잘못을 반성하기는 커녕 이틑날 밤 12시경, 술을 잔뜩 마시고 밤에 내게 전화를 걸어와 ‘지금 공장이 잘 되고 있는 것은 전부 자기 덕분’이며 ‘자기가 없으면 공장은 제대로 운영될 수도 없을 것이다. 따라서 자기에게 공장 지분의 절반의 권한이 있으니 이제부터 공장의 모든 수입을 반반으로 나누자. 그렇지 않으면 본인이 알고 있는 공장의 모든 비밀을 터뜨리겠다’라며 협박을 하였습니다. 가뜩이나 정비공장을 운영하면서 환경이나 소음 등 각종 민원에 시달리기도 하고 새롭게 시작한 공장 일에 정신이 없던 차에 철석같이 믿었던 공장장의 배신과 용서할 수 없는 행동에 저는 무척 당황하기도 했고 심히 화가 났습니다. 공장장 뿐만 아니라 다른 직원들에게 그리고 주의의 모든 사람들에 대해서도 불신감이 쌓이며 극도의 스트레스가 반복되자 제게 갑자기 극심한 두통이 찾아왔습니다. 저는 믿었던 사람들에 대한 배신감에 일에 대한 의욕도 없어지고 만사가 귀찮아져서 출근도 하지 않고 집에서 두문불출하며 며칠씩 두통에 시달리다가 머리가 너무 아파 약국에 들러 약을 처방받았습니다. 하지만 며칠간 약을 복용해도 전혀 차도가 없었고 견디다 못해 약국에 다시 방문하여 좀 더 강력한 진통제를 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제 증상과 그동안의 사정을 다 이야기하자 성경책을 읽고 있던 약사는 제가 원하던 진통제를 처방해주는 대신 자신이 평소 다니고 있는 기도원에 가서 함께 기도를 해보면 어떻겠느냐고 제게 권하였습니다. 약사가 약을 처방해주는 대신 함께 가보자고 권하는 기도원이라면 한 번 가볼까 하는 마음에 저는 무심코 기도원에 동행하게 되었습니다(기도원의 이름은 밝히지 않겠습니다). 약사를 따라 간 기도원에 들어가 개인 기도실 문을 여는 순간 벽에 붙어 있던 말씀이 눈에 확 들어왔습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 온 몸으로 찬양하라. 오늘 일은 감사하고 내일 일은 하나님께 맡기라. 순간, 이 말씀이 내 가슴을 내리치듯이 다가왔습니다. 네가 뭐가 부족해서 욕심을 내어 사업을 확장한다고 네 사업장을 소홀히 하고 직원에게 일을 맡겼느냐? 또한 네가 그토록 믿었던 직원을 원망하고 미워하며 주위의 다른 사람까지도 믿지 못하고 원망을 하는 것이냐? 그리고 뭐가 두려워서 네 사업장을 나가지 않고 네 직원과 사람들을 계속 의심하며 미워하느냐?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저는 그때 그 순간 바로 제 잘못을 깨우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제게 주신 모든 것에 감사할 줄 모르고 오히려 욕심을 내어 내가 스스로 화를 부른 것 같아 그 상황이 몹시 부끄러웠습니다. 더구나 그토록 믿었던 사람을 미워하며 주위의 사람들까지도 원망하고 의심하는 제 자신에게 모든 원인이 있었다고 회개하며 눈물로 기도를 하게 되었습니다. 한참을 그렇게 기도를 드리자 어느 순간, 그렇게 심하던 두통이 바로 나았으며 사람에 대한 원망과 미움도 말끔히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기도원에 다녀온 이후부터 저는 그 때 기도원에서 보았던 그 말씀을 지금까지 마음에 새기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 온 몸으로 찬양하라. 오늘 일은 감사하고 내일 일은 하나님께 맡기라. 주신 것에 감사하지 않고 욕심을 내다 경험한 그때의 사건 이후로 저는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어도 하나님께 감사하며 찬양하는 마음으로 고객의 생명과 안전을 위해 최선의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열심히 일하면서 즐겁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중서울노회 남전도회 연합회 여러 회원님들께 저의 경험을 나눌 수 있게 되어 하나님께 영광과 감사를 드리며 여러 회원님들께도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2022. 8. 28 이규석집사(후암교회)
    • 목회
    • 은혜나눔
    2022-09-18
  • 복음주의와 개혁주의(2)
    II. 개혁주의 복음주의가 이신칭의의 복음을 제대로 전하는 것으로부터 점차 그 범위가 확대되어 절단성을 적용하는 것이 필요했듯이 개혁주의도 처음 사용된 의미에서 후에 범위가 확대되어 개념규정을 다시 해야 할 필요가 생겼다. 1. 개혁파와 개혁신학: 그 역사적 시작 본래 개혁신학은 천주교회를 오직 성경에 근거해서 개혁하자는 종교개혁 사상 중에 처음에는 루터파 사상과 비교하여 좀 더 성경적인 방향의 생각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대개 그 대변자인 쯔빙글리나 칼빈과 그와 생각을 같이 하던 분들의 생각을 지칭하여 개혁파(Reformed)라고 하였다. 그리고 후에는 루터파와 영국 교회(성공회) 사상 일부와 개혁파에서 분리된 알미니안 사상과 비교하여 좀 더 명확하게 이런 방향을 지향해 나간 생각을 개혁파라고 하였다. 이를 우리나라에서는 대개 개혁주의라고 지칭한다. 그러므로 천주교회(the Roman Catholic Church)의 신학과 실천을 개혁하자는 종교개혁(Reformation) 운동 중에서 한편으로는 루터파 교회(Lutheran Church)와 조금 생각을 달리하고, 또 한편으로는 세례파와 견해를 달리하는, 그러다가 자신들의 입장도 개혁파로 인정해 달라는 (그리고 함의상 자신들의 주장으로 개혁파 사상으로 삼자는) 항론파(the Remonstrants, 이를 후에 일반적으로 알미니우스주의라고 언급하게 된다)에 반하여 나름대로 성경에 충실한 사상과 그런 교회를 지향해 가는 것을 개혁파라고 하며, 그런 사상을 가지는 교회를 개혁파 교회라고 한다. 그러므로 프랑스 개혁파 교회들과 그들이 흩어진 유그노의 전통 속에서 나타난 사상, 그리고 스위스의 취리히와 제네바에서 시작되었고 그런 전통을 개혁파라고 한다. 개혁파의 신학이 개혁신학(Reformed theology)이다. 개혁신학을 가진 교회들을 개혁파 교회라고 하고, 그들의 움직임을 개혁파 운동 또는 (칼빈은 이런 용어가 나타나는 것을 싫어했을) 칼빈주의(Calvinism) 운동이라고도 표 현한다. 네덜란드에서는 이를 지향하는 교회를 개혁(파) 교회라고 하였고, 스코틀란드에서는 스코틀란드 교회(the Church of Scotland)라는 장로교회가 형성되었다. 그들이 미국으로 이민 갔을 때 그들의 후예들로 구성된 (Reformed Church in America나 Christian Reformed Church 같은) 개혁교회와 (미국 장로교회와 같은) 장로교회가 따로 존재하게 되었지만, 이들의 신학과 사상은 근본적으로 개혁신학이기에, 이들 모두를 개혁파라고 한다. 우리 나라에 처음 온 선교사의 한 분인 언드우드(Underwood)는 개혁파 교회(RCA)의 신학교인 뉴 브룬스윅(New Brunswick) 신학교 출신이나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서 장로교의 선교 지원을 받아 장로교 선교사로 와서 우리나라에 장로교회가 세워졌다. 그러나 장로교회는 개혁신학을 가진 교회이므로 장로교회와 개혁교회의 구분은 원칙상 없다.1) 2. 개혁 교회 안에 나타난 잘못된 다양성 그런데 세월이 지나가면서 서구의 교회와 그 신학의 변화가 일어났다. 좀 더 성경에 충실해 가려는 좋은 의미의 변화는 모든 사람들이 환영하는 일이다. 그런데 그렇지 않은 이상한 변화들이 온 것이다. 예를 들어서, 프란시스 툴레틴(François Turrettini, 1623–1687) 이후 그의 아들 쟌-알퐁스 툴레틴(Jean- Alphonse Turrettini, 1671–1737)을 비롯한 제네바 교회의 변화와 같은 변화, 처음 성경에 충실한 모습에서 점점 변화해 간 화란 개혁파 교회의 모습, 비슷하게 성경을 온전히 믿는 것을 벗어난 스코틀란드 교회와 같은 것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개혁파 교회 안에 성경을 온전히 믿는 사람들과 성경을 비평적으로 보자는 사람들이 같이 있게 된 것이다. 그래서 교단적으로는 개혁파 교회 안에 있지만 자유주의적 방향을 취해 나가 자유주의의 아버지라 불리는 슐라이어마허(Schleiermacher) 같은 분도 있게 되었고, 그것을 너무 지나치다고 하면서 비판하지만 성경을 온전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보기 보다는 성령께서 역사하시면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고 하면서 하나님 말씀의 신학이라는 역동적 사상을 제창하는 신정통주의 입장을 주장하는 칼 바르트(Karl Barth)와 그에게 찬동하는 분들도 있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독일에서 아주 소수파인 개혁파 교회 안에 정통주의적 개혁신학을 가진 분과 슐라이어마허적 자유주의 사상을 가진 분들과 본래 스위스 사람인 바르트의 영향을 받는 분들이 있게 되었다. 더 소수인 프랑스 개혁 교회에서도 역시 이 세 종류의 사람들이 있게 되었으나 정통 개혁파 사람들은 너무 소수가 되어, 프랑스에서는 “개혁파”하면 정통주의 개혁파가 아닌 사람들을 지칭하는 말로 여겨질 정도가 되었다.2) 마찬가지로 개혁파적인 종교개혁을 이룬 스위스 교회는 개혁파 교회인데, 그 안에 정통파 사람들과 자유주의적 생각을 가진 분들과 바르트와 같은 신정통주의적 입장을 가진 분들이 같이 있게 되었다. 상황은 미국에서도 마찬가지이고, 교단으로 따지면 어디나 그런 결과가 있게 되었다. 그러므로 전 세계 어디를 가든지 개혁파 교회들인 개혁교회와 장로교회 안에 잘못된 의미의 다양한 신학이 있게 되는 매우 안타까운 상황이 나타나게 되었다. 3. 우리가 지향하는 정통파 개혁주의 개혁파 정통주의(Reformed Orthodoxy)라는 말은 일반적으로 루터파 입장을 지지한 분들이 17세기에 루터파 정통주의(Lutheran Orthodoxy)를 확립한 것과 비슷하게, 개혁파 입장을 드러낸 분들이 개혁파 신학자들의 주장에 동의하면서 학문적으로 철저화한 17세기의 개혁파 정통주의를 지칭하는 역사적 용어로 사용된다. 그러므로 천주교회 신학이나 동방정교회 신학과 다르고, 루터파 정통주의와는 다른 신학으로 개혁파 정통주의를 언급한다. 이런 역사적 개혁파 정통신학과 연관하면서 17세기에 있는 그 모습으로만이 아니라, 16세기 개혁파 입장에 충실한 입장을 17세기에 개혁파 정통주의 신학자들이 잘 체계화한 것과 같이 18세기에도 일부가 데까르트의 철학적 입장을 받아들이면서 그런 비판적 태도로 카르테시안(Cartesian) 신학을 추구하여 결국에는 합리주의를 추구하여 19세기의 본격적인 자유주의로 나아가는 상황 속에서도 개혁파 정통주의 입장에 충실한 신학을 유지하며 발전시킨 분들이 있었다. 19세기에 성경 비판적 입장을 가지고 신학을 하는 자유주의를 비판하면서 개혁파 정통주의를 유지하려던 사람들이 있었다. 또한 20세기에도 여전히 그런 입장을 유지한 분들이 있고, 21세기에도 여전히 개혁파 정통신학 입장에서 신학을 하는 분들이 있다. 예전과 같이 대다수가 이런 입장을 취하지 않고 점차 소수가 되어간다는 문제가 있고, 입장이 다른 분들과 대화하면서 일부 철저하지 못하는 입장을 드러내는 분들이 증가하는 모습을 보이지만, 그래도 개혁파 정통주의에 철저히 서서 신학하시는 분들이 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있는 개혁파 정통주의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간단히 정리한다면 다음 같이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3) 4. 개혁파 정통주의의 기본적 주장4) 내용적으로는 개혁파 정통주의는 철저한 “성경주의”(biblicism)를 뜻한다. 우리들이 내세우는 것으로도 그러하고, 다른 신학적 입장을 지닌 분들이 개혁파 정통주의를 그렇게 부르면서 조롱했던 것으로 보아서도 우리들은 성경주의를 지향한다. 단지 우리가 어떤 이들이 우리를 조롱하는 바와 같이 성경을 우상 숭배하듯 하는 성경숭배주의자들이거나 성경을 “종이 교황”으로 만드는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말하는 개혁주의는 신학에서나 교회에서나 일상생활에서도 성경에서 자증하시는 하나님의 가르침을 따르기 원하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적 신학은 ‘바른 신학’이라고 하였고, 성경이 말하는 교회를 ‘바른 교회’라고 하였으며, 성경의 가르침에 따른 생활을 ‘바른 생활’이라고 설명하면서 표현하기도 했다.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성경의 사상에 충실한 신학을 하여 성경에 대해서든지, 하나님에 대해서든지, 그 어떤 주제에 대해서든지 성경이 말하는 바에 철저히 따라 가되, 그 일을 우리의 머리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하는 이성”과 함께 삼위일체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거룩한) 감정”과 “성령님을 따르는 의지”로 하여 전인격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의 인도함을 받아 가려고 하는 것이 개혁주의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전인격적인 작업이고, 전생애적 작업이기에 이런 개혁신학적 작업은 항상 지속되어야 하며, 우리 시대의 교회가 이전 시대의 성경에 신실한 교회들의 모범을 따라서 계속해 그런 방향으로 나아가는 전교회적인 작업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이 일은 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고 성경을 따라서 삼위일체 하나님을 바르게 섬겨가는 교회 공동체가 같이 감당하는 작업이다. 이와 같이 신학은 교회적인 일이다. 그러므로 신학은 한편으로는 모든 지식을 동원해서 하는 매우 이론적인 작업이면서 동시에 우리의 존재 전체가 동원되어 하는 매우 실천적 작업이다. 따라서 17세기 개혁파 정통주의자들은 이 문제를 심각하게 논의한 후에 신학은 매우 이론적이며 동시에 매우 실천적이라는 결론을 내린 바 있다. (1)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강조 먼저 성경에 온전히 따르는 개혁주의의 신학적 특성에 대한 이야기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그렇게도 철저히 따르기 원하는 성경에서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주권(sovereignty of God)에 대한 가르침 받게 된다. 그래서 성경을 철저히 따르는 우리들은 하나님의 전포괄적인 주권을 강조하게 된다. 어떤 분들은 개혁파 사상의 유일한 특성으로 하나님의 전포괄적 주권에 대한 인정을 언급할 정도로 이것은 개혁주의의 가장 큰 특징들 중의 하나이다. 하나님의 주권은 절대적이어서 하나님을 대립하여 서는 것은 그 어떤 것이든지 인정되지 않는다고 선언 하는 것이 개혁주의이다. 코넬리우스 반틸(Cornelius Van Til)이 잘 표현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주권이란 이 세상에 하나님 자신 이외에 어떠한 다른 궁극적 권세도 없으며, 이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거룩하신 계획이 그것을 대적하는 모든 반대를 압도한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이다. (2) 죄에 대한 철저히 성경적인 이해 성경에 철저한 사상에서는 어디서나 “죄”가 심각한 문제로 드러난다. 죄는 하나님의 주권을 침범하면서 인간이 자신의 주권을 주장하며, 하나님의 성품을 공격하고, 하나님께서 내신 법 을 어기고 자신을 주장해 가는 것으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여러 신학 중에서 개혁신학이 죄의 심각성을 가장 강조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인류 최초의 죄를 자신을 주장하여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하나님을 대항하는 것으로 인정하는 일의 철저성에서도 그러한다. 그래서 개혁신학은 다른 건전한 신학과 함께 죄를 그저 “선의 결여”(privatio boni) 정도로 표현하는 어거스틴의 표현 방식이 너무 소극적인 것이라고 비판하면서, 죄는 하나님에 대한 적극적인 반항적 태도요 행위라는 것을 잘 지적한다. 죄는 하나님의 주권을 상대화시켜 보려는 모든 인간의 시도로서 그 어떤 형태의 죄도 다 무시무시한 것이다. 그래서 우리들은 죄를 (천주교회에서와 같이) 대죄(cardinal sins)와 소죄(가벼운 죄, venial sins)를 나누지 않는다. 성경의 가르침을 철저히 따라 생각해 보면 죄는 그 어떤 것이든지 하나님의 주권을 침범해 가는 무시무시한 일이기에 죄인은 누구나 형벌 받아 마땅한 존재다. 인류 최초의 “처음 죄”(the first sin) 때문에 있게 된 "본래적인 죄책"(original guilt) 과 "본래적인 부패성"(original corruption)을 원죄(original sin)라고 부르면서 그것의 심각성을 가장 깊이 의식하는 사상도 철저히 성경을 따르려고 하는 개혁신학적 사상이었다. 물론 원죄는 천주교회도 말하고 루터파도 말하고 알미니우스주의자들도 다 말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심각한 지를 인식하는 정도는 다 다르다. 펠라기우스를 따르는 사람들은 원죄를 부인하여 아담의 죄된 모범이 후대에 죄를 쉽게 지을 수 있는 여지를 만들었지만 그 상태에서도 사람들은 선조들의 잘못된 모범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나님께 순종을 할 수 있었다고 생각하였다. 당시의 거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그것이 잘못된 가르침이라고 하면서 펠라기우스 주의를 이단으로 정죄하였다. 그러나 펠라기우스주의를 반대하는 많은 사람들이 인간의 죄의 부패성을 철저히 인정하지 않은 일이 많았고, 그것이 후대의 잘못된 신학사(新學史)를 만든 것이다.5) 개혁주의는 하나님의 주권을 조금이라도 손상시키는 사상들을 일일이 비판하는, 하나님 주권을 대변하는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 개혁신학의 철저히 성경적인 구원론을 형성한다. (3) 철저히 성경적인 구원론 우리들은 성경이 가르치는 구원에 대한 가르침(우리 신학의 일차적, 근원적, 최종적 근거)과 구원 받은 우리의 경험(우리 신학의 간접적, 보충적 근거)에 비추어 볼 때 누구나가 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 혼자의 힘으로만 이루어진다는 것을 정확히 인식하고 고백 해야 한다. 즉, 성경적으로 생각하고 말하면, “구원 문제에서의 하나님 독력주의(獨力主義, monergism)”를 말해야만 한다. 그런데 그렇지 않은 많은 생각들이 우리 주변에 있는 것을 보게 된다. 그것은 (오래된 신인협력주의[synergism] 사상을 지닌 천주교회에서처럼) 성경만을 철저하게 의존하지 않으려고 하거나, 그것이 아니라면 우리에게 일어난 구원에 대해서 우리식으로 생각하면서 이를 좀 더 “합리주의적”으로 생각하려고 하다가 함정에 빠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개혁신앙을 고백하는 교회에 속한 사람들도 주의하지 않으면 그런 식으로 생각해서 잘못되어 갈 수 있기에 우리들은 항상 주의해야 한다. 개혁파 교회의 역사에서 가장 반어적(反語的)인 상황의 하나는 개혁파 사람들 가운데서 알미니우스주의(Arminianism)가 나왔다는 것이다. 화란 개혁파 교회 안에서 교회의 공식적 가르침에 동의하지 않는 일단의 사람들이 나타났고, 그들의 생각과 사상에 대해서 검토해 보도록 요청 받은 제네바 유학 출신의 야곱 알미니우스(Jacobus Arminius, 1560. 10. 10– 1609. 10. 19)가 내면적으로 그들에게 동의하면서 공식화 되게 된 “항론파”(Remonstrants)가 그의 이름으로, 즉 “알미니우스주의”(Arminianism)로 역사에 남게 된 것이다. 이것에서 보여 지듯이 이런 사상이 정형화 된 것에는 그의 내적인 공헌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형식적으로 개혁파 교회에 속해 있다는 것으로 우리가 참으로 성경적으로 생각하고 사는 것을 보증하지 않음을 잘 보여주는 역사적인 예가 된다.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구원을 잘 배운 후에 생각하기를 어떤 사람은 주께서 선택하셔서 구원하시고, 어떤 사람은 선택하지 않으셔서 구원하지 않았다고 하면 마치 하나님이 공평하지 않은 분 같은 인상을 받으실 수 있으니 하나님을 위해서 하나님을 변호하기 위해 영원 전에 하나님께서 보실 때에 어떤 사람들은 장차 하나님을 믿을 것이니 그 믿음을 미리 보고서, 더 나아가서 그들의 선행을 미리 보고서 선택하시고, 어떤 이들은 그것이 없으니 하나님께서 선택하지 않으셨다는 소위 ‘조건적 선택’(conditional election)을 생각하고 말하기 시작한 것이 알미니우스적 사상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 더 강화시킨 것이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구속[소위 보편 구속, universal atonement]을 이루셔야 하지 않느냐는 생각이었고, 성경에 나타나는 ”모든“이라는 말을 문자적으로 읽다보니 그야말로 그리스도는 문자적으로 모든 사람을 위해 피를 흘리셨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이것을 선포하는 것이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라고 했고, 이런 복음이 선포 될 때에 각기 사람들이 이를 받아들일 수도 있고 안 받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나타난 것이다. 이런 사상에서는 인간은 타락하기는 했어도 전적으로 타락하지는 않아서 복음이 들려 오면 스스로 복음을 선택하고 믿을 수 있을 정도로 타락했다고 생각하기에 이른 것이다. 따라서 복음 선포와 함께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도 그 은혜를 인간이 받을 수도 있고 저항할 수 도 있는 은혜(resistable grace)라고 여긴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을 위해서 보편적인 복음 선포를 위해서 생각하고 말한다고 하면서도 과연 이런 생각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깊이 있게 생각하지 않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피를 흘려주셨어도[보편 구속, universal atonement] 궁극적으로 구원받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보편구원(universal salvation)은 아님] 는 것을 잘 의식하고 말하면서도, 그렇게 말할 때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피가 유효하지 않을 수 있다고 말하게 된다는 것을 잘 의식하지 않은 것이고, 혹시 그것을 의식한다고 해도 그렇게 말해야만 인간의 선택의 책임을 물을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의 효과를 구원의 근거로만 만들고, 유효한 구원으로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개혁파 교회는 그렇게 말할 수 없으니 그리스도께서 피 흘리신 것은 실제적인 구원을 이룬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피흘려 주신 사람들은 반드시 구원받는다. 그리고 우리가 지금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구속을 믿는 것은 우리의 능력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이루신 중생에 의해서 변화되었기에 주님을 믿는 것이다. 죄와 허물로 죽은 사람들은(엡 2:1, 렘 17:5) 스스로 자신의 능력으로 주님을 믿을 수 없는 것이다. 십자가의 유효한 구속이 중생으로 이루어 여기서 나로 믿게 하는 것이다. 십자가 구속에서 나온 이 믿음은 영원 전에(엡 1:3-5) 하나님께서 조건 없이 하신 선택을(로마서 9:11-13 참조) 드러내 준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성경을 따라서 우리의 구원이 철저히 그리스도의 구속으로만 이루어 진 것이라고 믿기에 “오직 그리스도”(Solus Christus)를 강조한다. 그러므로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만 이루어지기에 우리는 “오직 은혜”(Sola Gratia)를 선언한다. 이를 철저히 믿는 믿음으로만 구원받고, 그런 우리들은 오직 믿음으로 산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오직 믿음”(Sola Fide)을 강조한다. 이신칭의를 참으로 바르게 믿어야만 이런 구호들이 말하는 바를 제대로 믿는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우리는 “오직 성경”(Sola Scriptura)에서 배운 것 이기에 “오직 성경”에서 배우고, “오직 성경” 대로 하나님을 경배하며 산다. (4) 개혁주의적 삶에 대한 강조 구원에 대해서 철저히 성경적인 이해를 가진 개혁신학은 구원받은 성도로 사는 삶에 대해서도 철저히 성경의 가르침에 충실한 입장을 제시하고 그것을 강조해 왔다. 여기서 개혁주의가 (초기 근본주의와는 다른) 좁은 의미의 근본주의와 어떻게 다른 지가 확연히 드러나게 된다. 좁은 의미의 근본주의는 성경을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그것을 철저히 믿으려고 하는 점에서는 개혁주의와 같지만, (1) 신앙을 강조하면서 학문에 대한 관심이 적어 반지성주의적(反知性主義的) 형태로 드러나며, (2) 사회와 문화에 대한 관심이 적고 오직 교회 공동체에 대해서만 집중하며, 따라서 (3) 전도 이외에는 이 세상에 대해서 상당히 무관심한 것 같은 인상을 주는 입장이다. 이런 좁은 의미의 근본주의는 성경을 철저히 믿으려고 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개혁파와 의견을 같이 하지만, 앞서 이야기한 3가지 점을 중심으로 상당한 차이를 드러내게 된다. 그래서 성경을 열심히 믿되 안타까운 모습으로 나아가는 근본주의를 성경적으로 수정할 수 있는 바른 대안이 역시 “개혁파 사상과 삶”(이것을 흔히 Calvinism이라고 한다)이 라고 할 수 있다.6) 이것은 과거의 개혁주의가 성경에 충실해서 이점에 있어서 좋은 입장을 잘 견지해 왔다는 것이므로, 우리나라에서 개혁주의를 표방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우리가 과연 개혁파인지를 판가름하게 할 수 있는 중요한 시금석이다. 기본적으로, 구원받은 성도는 이 세상에서의 모든 사회적 문화적 활동에서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를 위해 열심히 살게 된다는 것을 개혁신학은 성경에 근거해서 강조해 왔고 또 늘 그렇게 해야만 한다. 따라서 구원받아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를 위해 이 세상 안에서 사회적 문화적 활동에 힘써 나가는가, 아니면 좁은 의미의 종교적이고 소위 교회적인 일에 집중하므로 이 세상에서의 일에 대해서는 소극적이게 되는가에 따라서 우리가 진정 개혁파적인지, 아닌지가 드러나게 된다. 개혁파 성도는 그가 하는 일상의 모든 일들이 다 하나님 나라의 일이라고 믿으며 참으로 하나님 나라를 드러내기 위해 활동한다. 그 일상의 일의 상당 부분이 직장에서 하는 활동이고, 이 세상 속에서 하는 일이 된다. 그러므로 개혁파적인 이해에 의하면, 이 세상은 우리의 사역의 무대이다. 물론 이 세상은 하나님에게 대해 관심을 가지지 않고, 때로는 상당히 적대적이지만 바로 그 세상에서 그 세상의 사람들을 잘 인도하여 하나님 나라에로 끌어 들이거나, 적어도 그리스도인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가 어떤 것인지는 보도록 하는 것이 구원받은 성도의 삶의 목표이기 때문에 개혁파적인 성도는 이 세상의 삶의 영역에서 매우 적극적인 노력을 하게 된다. 대개 이 세상에서 적극적으로 사는 이 세상 사람들은 (1) 자기 자신들의 유익을 위해서 그리하거나, 아니면 (2) 이 세상에서 귀한 것이라고 여기는 세상적 가치를 위해 열심히 하는 것이지만, 구원받은 개혁파 성도들은 이 두 가지에 대해서 전혀 관심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에서 오직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만을 위해서 열심히 적극적으로 사는 것이다. 그러므로 개혁파 성도는 먼저, 우리들이 과연 자신들의 유익에 대해서, 또한 이 세상의 가치에 대해서 철저하게 관심이 없는지를 점검해야 한다. 우리는 이 세상에 대해서는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어떤 활동을 열심히 하는 것이 자신의 유익을 위하거나 세상적 가치를 추구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개혁파적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전혀 기독교적이지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개혁파 그리스도인들은, 칼빈 때로부터, 철저한 자기 부인(self-denial)을 늘 강조해 왔다. 이것이 없이는 우리의 모든 활동이 개혁파적이지도 않고 기독교적이지도 않은 것이다. 이런 철저한 자기 부인을 토대로 하여 행하는 이 세상의 사회적 문화적 활동에 대한 적극적 관여와 활동은 오로지 하나님 나라를 잘 드러내려는 목적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뜻에 의하면 이 세상이 마땅히 어떻게 되어야 한다는 인식이 성장하면서 매우 자연스럽게 이 세상에서 우리가 감당하는 일들을 좀 더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게 하려고 하게 된다. 일단은 자신의 직업에서 그렇게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려는 노력을 하게 된다. 그래서 개혁파에서는 루터와 함께 우리의 직업을 “소명”(vocatio)으로 의식하면서 하나님 께서 나를 불러서 시키신 일을 가장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게 성령님의 의도대로 하여 가려고 애쓴다. 여기에 개혁파의 진정한 모습이 있다. (5) 폭 넓은 문화 활동과 문화 변혁 활동에 대한 강조 지난 절에서 우리들은 진정한 개혁파 성도는 삶의 영역 전반에서 하나님께서 철저히 순종하려 고 하기에 직업과 관련된 일을 할 때도 그 활동을 하나님께서 부르신 영역에서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 나라를 드러내는 활동으로 해야 한다는 것은 논의했다. 우리 삶의 가장 많은 시간이 직업 활동에 드려지기에 직업에서 하나님 나라를 드러내지 않고, 직업을 통해 하나님을 섬겨 가지 않는 사람은 결국 삶의 대부분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과는 무관한 삶을 사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그런 삶은 성경이 말하는 진정한 하나님 백성의 삶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직업의 영역에서만 하나님을 섬겨 가는 것은 아니다. 우리들은 직업 활동 이외의 영역에서도 하나님을 섬겨가야 한다. 그것의 상당히 중요한 부분이 직업 영역 밖에서의 문화 활동이다. 이것은 흔히 말하는 취미나 특기 등에 해당하는 활동이다. 또한 여가를 어떻게 사용할 것 인가와 관련된 문제이기도 한다. 이 영역은 이 세상도 오늘날 많은 분들이 점점 더 강조하여 가는 영역이다. 이 세상 사람들은 그저 자신이 좋아서, 또는 건강을 위해서, 또는 인간관계를 위해서 이런 활동을 하여 간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 세상 사람들처럼 이런 목적만을 위해서 이런 활동을 해서는 안 된다. 물론 우리들도 여가 시간에 자신이 좋아하는 활동을, 건강을 위해서, 또 사람들과의 사귐을 위해서 할 수 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우리는 이런 활동도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를 위해 해야 하는 것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이런 여가 활동도 우리들은 이 세상의 문화를 변혁시키기 위한 활동의 한 부분으로 해야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 백성들의 문화 변혁 사역은 두 가지 방식으로 진행된다. 하나는 우리가 전문 분야로 하는 직업 영역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고, 또 하나는 직업 이외의 관심 분야의 활동을 통해 이루어진다. 물론 문화 변혁은 주로 전문가들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이 세상에 전문가들만 있고 그들이 생산하는 문화 활동에 동참하는 사람들이 전혀 없다면 실제적인 문화 활동의 유지나 변혁이 잘 이루어 질 수 없다. 그러므로 문화 영역 전반에 대한 우리들의 비전문가적 참여도 전문가들의 활동만큼 중요한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 백성들은 직업 활동 이외의 시간인 여가 시간에 즐기는 활동도 그저 단순히 자신의 유익이나 건강 증진이나 스트레스 해소 등의 목적만을 가지고 해서는 안 된다. 궁극적으로는 이 세상에 과연 어떤 문화가 주도적으로 나타나야 하는 지를 생각하면서 교양인으로 문화생활에 폭 넓게 참여해야 한다. 그러나 한 사람이 모든 문화 영역에 모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는 없으니 그 중의 한 영역을 택하여 지속적으로 참여하다 보면 그 일에 대해 상당히 오랫동안 관심을 가지고 참여하는 아마튜어로서의 연륜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렇게 상당한 시간이 지닌 후에는 이런 분들도 웬만한 전문가의 식견에 가깝게 다가가게 될 것이다. 그런 분들이 상당수 모여서 전문가들의 활동을 누리고 감상하고 비평도 하는 집단이 되어 갈 때 이는 아주 강력한 문화 변혁 그룹이 될 수 있다. 이런 식으로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적이고 하나님 나라적 관점에서 문화에 참여하여 나간다면 이 세상의 문화가 좀더 바른 방향으로 변해 가게 될 것이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상당히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문화 영역에 대해 별 관심을 가지지 않고 살거나, 문화 영역에 대해서 불신자들의 향유와 비슷한 태도를 가지고 문화를 향유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믿지 않는 분들이 여가 시간을 어떻게 보내기를 원하는가 하는 것과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분들이 여가 시간을 어떻게 보내려고 하는가를 비교해 보면 별 차이가 없는 경우들이 많이 있다. 영화를 선택하여 본다고 할 때 불신자의 영화 선택과 신자의 영화 선택에 차이가 별로 없는 것을 발견하곤 한다. 이것은 우리들이 여가를 보내는 영역에서 참으로 성경적 그리스도인답게 생각하며 살아가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주는 대표적인 예가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가를 어떻게 보내야 하는가에 대해서도 하나님 백성답게 생각하며 선택해야 한다. 그것이 진정한 개혁파 성도들답게 사는 중요한 방식이다. 여가는 전혀 허용하지 않는 일중독자(workholic)로 사는 것이나, 여가만을 위해 사는 사람이 잘못된 것일 뿐만 아니라, 직업 활동에서와는 달리 순전히 자아에 몰입하기 위해 여가 활동에 치중하는 것도 기독교적이거나 성경적인 것이 아니다. 부디 우리들 모두가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을 위해 여가도 즐기되, 그 일이 이 세상의 문화를 좀 더 바람직한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하는 일이 되도록 해야 한다.7) 그것이 진정 개혁파 성도다운 모습이다. (6) 성경적 교회에 대한 강조 개혁주의는 항상 이 땅 가운데 성경적 교회를 드러내는 일을 강조해 왔다. 그리스도인은 성경 적 교회를 가시적인 형태로 드러내는 일과 관련하여 다음 몇 가지 특성을 지닌다고 할 수 있 다. 첫째는 그 교회의 모든 것이 성경적이려고 하려는 일에 큰 관심을 지닌다. 교회의 예배 나목회나 행정이나 교육이나 교회와 관련된 모든 일이 성경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둘째는, 따라서 그 성경의 가르침에 근거해서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우셨고, 지금도 통치하시니 하나님이 주관하여 가신다는 것을 확실히 믿는다[교회와 관련된 하나님의 주권과 주도성을 인정 함]. 셋째는, 그 하나님을 믿으니, 열심을 품고 성경이 말하는 교회를 이 땅에 드러내기 위해 열심히 한다는 것이다[열심]. 이 세 가지는 성경에 따른 개혁파적인 교회가 이 땅에 강력하게 나타날 때마다 그 성도들이 나타낸 특성들이다. 따라서 우리들도 교회와 관련해서도 (1) 성경적이려고 해야 하고, (2)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해야 하며, 따라서 (3) 누구보다 열정적이어야 한다. 이 세 가지 가운데 둘째와 세 번째 특성을 먼저 다루고자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과 주도권을 인정하기에 소극적으로, 수동적으로 있는 사람들이 아니다. 하나님의 온전한 주권을 믿는 사람들은 성경의 가르침에 충실하게 하나님을 가장 잘 믿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게 하나님을 가장 잘 믿는 사람이 어떻게 가장 열정적으로 하나님을 믿지 않을 수 있는가? 하나님에 대해서 가장 바른 견해를 가진 사람은 하나님에 대해서 가장 큰 열정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진정한 칼빈주의자들은, 예전에 어떤 교수님이 잘 표현한대로, 열정 칼빈주의자들일 수밖에 없다. 우리가 하나님의 온전한 주권을 믿지 않는다면 우리들은 개혁파 신학을 따르는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하나님과 하나님의 교회 일에 대한 열정이 없다면 그것도 개혁신학에 충실한 것이 아니다. 교회를 주께서 세우시고, 지금도 통치하고 계심을 믿는다면 우리는 열심히 교회를 섬길 수밖에 없다. 그런데 어떻게 하는 것이 진정 열심히 하는 것인지를 규정하는 것이 바로 ‘성경적’이라는 말의 뜻이다. 우리의 교회에 대한 이해도 ‘성경적’이어야 하고, 우리의 교회 섬김도 ‘성경적’이어야 한다. 그 일에 열심을 내야 한다. 진정한 개혁주의자들은 항상 교회 일에 열심인 열정적인 사람들이었다. 이런 점에서 우리들은 참으로 개혁신학의 후예들이다. 천주교회의 잘못된 교회 이해와 교회 섬김 이해를 성경적으로 개혁한 분들이 바로 개혁자들이었으니, 우리도 그 분들의 열심을 가지고 성경이 말하는 교회를 성경적으로 세워 가는 일에 열심을 내어야 한다. 일단 성경이 말하는 대로 “구속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교회”라는 성경적 교회관을 분명히 하는 일로부터 시작한다. 그 성도들이 바로 “그리스도의 몸”이고, “성전”이고, “위에 있는 예루살렘”이고, “진리의 기둥과 터”라는 이해를 분명히 하여8) 다른 잘못된 교회 이해를 극복해야 한 다. 그리고 교회의 예배가 성경적이 되게끔 하며, 성령님 안에서 그리스도의 공로에 근거해서 삼위일체 하나님께 절하는 것이 되게끔 하는 데 모든 힘을 다 기울이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하루아침에 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예배 형식만 고친다고 되는 것이나 사용하는 용어를 조금 바꾼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의식(意識)이 전반적으로 고쳐지지 않으면 안 된다. 진정 삼위일체 하나님께 그 엄위에 부합한 경배를 한다는 의식이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진정 중생한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온전한 의를 가지고서만 엄위하신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다는 의식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하나님께서 내신 예배의 원칙을 잘 배워서, 진정 하나님께 적절한 성경적이며, 영적 예배를 하는 일에 힘쓰게 된다.9) 우리 교회들이 이런 예배를 드리는 참된 개혁파적인 교회이기를 원한다. III. 나가면서: 복음주의의 개혁주의의 바른 관계성 따라서 우리가 말한바 정통파 개혁주의는 ‘복음주의적 개혁주의’라는 것이 분명해졌을 것이다. 이는 슐라이어마허와 같은 자유주의적 개혁파나 바르트와 같은 신정통주의적 개혁파가 아닌, 참으로 정통주의적 개혁파, 복음주의적 개혁파가 우리가 지향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복음주의에는 다양한 신학과 운동들이 다 포함된다. 우리가 배제한 바 있는 비복음주의적 복음주의를 제외하고도, 다양한 생각들이 복음주의 안에 있게 된다. 예를 들어서, 웨슬리를 그의 의도대로 철저히 따르면서 성경을 정확무오한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그가 그 말씀을 듣고 회심한 루터의 갈라디아서 강의에 잘 표현된 이신칭의의 복음을 참으로 믿고, 그런 믿음으로 온 세상을 변화시키기 원하시는 분들은 복음주의자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처럼 웨슬리적 알미니안도 복음주의 안의 한 부분이다. 온 세상에 있어서 20세기에 폭발적인 성장을 이룬 다양한 오순절 교회도 복음주의의 한 부분이다. 또한 미국의 바이블 벨트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에 속하고 있는 세대주의도 복음주의의 한 부분이다. 그러므로 다시 말하지만 복음주의는 성경을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참으로 믿고 실천하며 사는 다양한 그리스도인들 전체를 일컫는 말이다. 현상으로서의 복음주의를 우리는 잘 관찰해야 한다. 또한 1930-40년대에 복음주의가 미국에서 그 모습을 드러낼 때와는 달리 1970년대 이 후로 변화된 복음주의도 일단 이런 복음주의 현상 속에 있다. 코든 콘웰신학교의 데이비드 웰 스 교수께서 잘 분석한 바와 같이 근자의 복음주의는 아주 무의식적으로 세속적 복음주의, 따라서 재구성된 복음주의, 무의식적으로 현대성(modernity)과 후-현대성(post-modernity)으로 기울어진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철두철미 실용주의로 옷 입은 복음주의”로 나타나는 것이다. 이것을 근자의 복음주의의 아이러니라고 할 수 있다. 의식적으로는 세속화와 현대성에 비판해 온 복음주의가 무의식적으로 현대의 문화에 완전히 잠식당한 모습은 그야 말로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웰스가 잘 표현한 것과 같이 근자의 복음주의는 “고전적 복음주의자들이 지은 집 밖에 있는” 것이다.10) 복음주의가 사실 복음주의 밖에 있다니 이 얼마나 이상한 일인가? 우리들은 이런 점을 잘 관찰한 웰스 교수의 탄식을 잘 듣고 그와 함께 탄식하면서, 복음주의가 새롭게 되는 운동을 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복음주의를 참된 복음주의답게 하는 일을 잘 해내 고 있는 데이비드 웰스와 그의 젊은 후임자라고 할 수 있는 리쳐드 린츠는 철저한 개혁파 신학자이다. 그런데 그들은 복음주의자들에게 복음주의를 버리고 개혁주의를 취하라고 하지 않고, 복음주의가 참된 복음주의가 되도록, 우리가 본 받아야 하는 과거의 좋은 예를 제시하면서 그런 방향으로 가도록 촉구한다. 기본적으로 16세기 개혁자들의 예를 따르라는 것이다. 지금 우리시기의 교회와 사회가 필요로 하는 것은 “부흥이 아니라 개혁”이라는 웰스 교수의 외침은11) 바로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복음주의가 참된 복음주의가 되려면 종교 개혁자들의 그 모습을 회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복음주의가 개신교 정통주의(Protestant orthodoxy), 즉 성경적 정통주의로 되돌아 갈 것을 촉구한다.12)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교회에 준 진리를 고백하는 개신교 종교개혁에 뿌리를 둔 교회들이 그리하였 듯이, 이 시대에도 그와 같은 신학(historic Protestantism)이 필요하다고 한다.13) 이런 제안을 하는 웰스의 신학을 다음 같이 정리하여 제시한 바 있다. 그 내용은 철저힌 복음주의적이고, 결국 개혁파적인 것이다. 예를 들어서, (1) 그는 성경이 성령에 의한 영감되었음과 성경의 충족성을 온전히 주장하고,14) (2) 하나님의 거룩성을 가장 잘 드러내면서 변호하며,15) (3) “우리들은 그리스도가 없이는 도무지 용서 받을 수 없는 그런 죄를 저질렀다”고 하면서,16) 그 죄는 하나님께 대한(against God) 범죄이기에 “가장 근본적 문제는 하나님과의 관계의 뒤틀림”이라고 하고,17) 타락한 인간의 전적인 무능력을18) 정확히 보는 성경적 죄 이해에 충실하다. 또한 그는 (4) 그리스도 사역의 충족성을 잘 드러내고, 유일하신 신인(神人, the God-man)이신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나라를 가져오시고 그의 재림으로 그 나라를 극치(極致)에 이르게 하실 분 이시라는 것을 잘 강조한다.19) (5) 그러므로 우리들이 “그리스도의 사역에 무엇인가를 더하는 것은 곧 그리스도의 업적을 손상 시키는” 것이 된다는 것(Christ alone)을 잘 지적하면서,20) 이를 분명히 해야만 “오직 은혜”(sola garatia, grace alone)를 말하는 것임을 분명히 하고,21) (6) 만일에 “중생이 없으면 새로운 삶도, 하나님을 향한 욕구도, 하나님을 아는 가운데 하나님 앞 에서 살 수 있는 역량도 없게 된다”고 주장하며,22) (7) 교회를 구속받은 성도들이라고 하고,23) [어거스틴이나 개혁자들을 따라서] “교회는 하나님의 창조물이고 오직 하나님께서만이 자라게 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24) 그는 또한 (8) 교회의 표지를 개혁파의 3가지 표지로 명확하게 제시하고,25) (9) 완전한 사람과 교회는 이 땅에 없으나(pace perfectionism and pace Donatists) 우리는 끊임없이 회개하면서 은혜에 근거해서, 그저 사회적 교양의 태도(social niceness) 이상의 경건의 삶을 행해 나가야 한다고 강조하고,26) (10) “하나님 앞에서”의 우리의 모습을 직시하면서 회개하고,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자고 권한다.27) 이처럼 웰스는 모든 면에서 참으로 철저한 개혁파 정통신학자이다.28) 이를 보면 그가 참으로 복음주의자이면서 개혁파 신학자라는 것이 아주 분명하지 아니한가? 복음주의를 철저한 복음주의가 되도록 외치고 이끄는 개혁파 신학자의 한 예가 여기 있다. 또한 고든 콘웰에서 그의 후임자라고 할 수 있는 리쳐즈 린츠도 복음주의 신학을 새롭게 하자고 복음주의 신학의 프로레고메논을 제시하면서 요나단 에드워드와 게할더스 보스가 제시했던 구속사적 방법을 따라 현대 복음주의 신학이 새롭게 될 수 있는 길을 제시하기도 했었다.29) 바로 이런 것이 정통파 개혁주의와 복음주의의 바른 관계라고 생각된다. 데이비드 웰스와 린츠가 한 작업을 우리는 우리의 상황 속에서 해야 한다.30) 이것이 어떤 사회에서건 개혁파 사람들이 동료 복음주의자들과 관련하여 해야만 하는 작업이다. 한 복음주의자가 다른 복음주의자들에게 참된 복음주의자들이 되자고 설득하는 것이다. 19세기에 핫지와 워필드가 막 세속화되기 시작하던 미국에서 했던 일, 20세기 말에 웰스와 리쳐드 린츠가 세속화된 미국에 서 했던 일을 우리들이 개혁파 복음주의자들로서 여기 이곳에서 할 수 있었으면 한다. 미주 1) 화란 개혁파 교회와 스코틀란드 장로교회의 교회 운영상 사소한 차이는 있다. 그러나 그것은 정말 사 소한 차이이지 그 두 교회가 서로 다른 사상을 가졌다고 그들은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도르 트 회의와 같은 소위 International Calvinism을 드러내는 국제적 모임에서 다 같이 개혁신학의 이 름으로 같이 모인다. 2) 그래서 악상 프로방스에 있는 아주 좋은 정통 개혁파 신학교는 학교 이름을 개혁파 신학교(Reforemd Seminar)에서 얼마 전에 깔뱅 신학교(Calvin Seminar)로 고칠 정도가 되었다. 3) 상당히 다른 형태로 정리된 것이지만, 이전에 개혁주의의 특성을 제시하려고 했던 필자의 시도로 다 음을 보라. 이승구, “개혁신학의 독특성” (1987), 개혁신학에의 한 탐구 (서울: 웨스트민스터 출판 부, 1995), 91-135; idem, “개혁신학이란 무엇인가?: 개혁신학의 특성들”(2005), 21세기 개혁신학의 방향, 개정판 (서울: CCP, 2018), 15-28. 4) 이하 이 절에서 제시한 것은 당시 편집장이신 현창학 교수님의 요청에 따라서 개혁파 신학의 특성을 규장하기 위해 <합신은 말한다>에 여러 번 연재되었던 것임을 밝힌다. 5) 이 과정에 대한 간단한 설명이기에 이해하기 좋은 진술로 이승구, 진정한 기독교적 위로 (서울: 여 수룬, 1998), 최근판 (서울: 나눔과 섬김, 2015), 83-89.를 보라. 6) 이를 잘 드러낸 것이 역시 Abraham Kuyper, Lectures on Calvinism (Grand Rapids: Eerdmans, 1931)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대한 논의로 다음을 보라. 이승구, “아브라함 카이퍼의 생 애를 통해서 배우는 교훈”. 「교회와 문화」 33 (2014년 여름):119-46; “우리에게 아브라함 카이퍼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장로교회와 신학」 12 (2015): 160-83. 또한 2021년 봄 개혁신학회에서 발제 한 박태현 교수의 논문도 보라. 7) 그 방식에 대한 논의로 다음을 보라. 이승구, “기독교적 문화변혁론”, 한국 교회가 나아 갈 길 (서 울: SFC, 2007), 개정판 (서울: CCP, 2018), 361-84. 8) 이에 대한 상세한 설명으로 이승구, 교회란 무엇인가?(1996), 개정판 (서울: 말씀과 언약, 2020)을 보라. 9) 여기서 말하는 바른 예배에 대한 상세한 설명으로 이승구, 한국 교회가 나아 갈 길, 47-117을 보 라. 10) Wells, Courage to be Protestant, 18. 11) Wells, Losing Our Virtue, 209; Wells, God in the Wasteland (Grand Rapids: Eerdmans, 1994), 227. 12) Wells, Courage to be Protestant, 2, 57f. 13) Wells, Courage to be Protestant, 1을 인용하면서 이승구, 데이비드 웰스와 함께 하는 하루, 74 에서 했던 말이다. 14) Wells, Courage to Be Protestant, 75-84=용기 있는 기독교, 홍병룡 옮김 (서울: 부흥과 개혁사, 2008), 120-32. 웰스는 하워드 마샬의 성경관과 예수님께서 비유에서 말씀하신 이미지 중 일부는 받 아들일 수 없고, 과거에 그런 식의 계시를 주셨지만 “지금은 우리들은 거기서 해방시키신다”는 견해 (I. H. Marshall, Beyond the Bible: Moving from Scripture to Theology [Grand Rapids: Baker, 2004])와 성경이 시간을 초월한 불변적 진리를 담고 있거나 그런 식으로 전달된 것이라는 견 해를 조롱하면서, 성경은 마치 마지막 막은 쓰지 않고 주신 대본 같아서 우리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그것을 보충할 수 있고, 그에 따라 다양한 결과를 낼 수 있다는 라이트의 견해(N. T. Wright, The Last Word [San Francisco: HarperCollins, 2005])를 비판한다(Wells, Courage to Be Protestant, 85-86=용기 있는 기독교, 133-34). 15) Wells, God in the Wasteland (Grand Rapids: Eerdmans,m 1994); Wells, Courage to Be Protestant, 124-33=용기 있는 기독교, 특히 187-200. 16) Wells, Courage to Be Protestant, 236=용기 있는 기독교, 341. 17) Wells, Courage to Be Protestant, 236=용기 있는 기독교, 341. 18) Wells, Courage to Be Protestant, 245=용기 있는 기독교, 352. 그는 이것은 어떤 테크닉을 동 원해도 고칠 수 없는 난제“라고 정확히 지적한다(Wells, Courage to Be Protestant, 245=용기 있 는 기독교, 353). 19) Wells, The Person of Christ (Westchester, Ill.: Crossway Books, 1984), 개정역, 기독론: 그 리스도는 누구인가 (서울: 부흥과 개혁사, 2015); Wells, Courage to Be Protestant, 192-207=용 기 있는 기독교, 281-302. 20) Wells, Courage to Be Protestant, 235=용기 있는 기독교, 339. 21) Wells, Courage to Be Protestant, 235=용기 있는 기독교, 339. 22) Wells, Courage to Be Protestant, 237=용기 있는 기독교, 342. 23) Wells, Courage to Be Protestant, 219=용기 있는 기독교, 317. 24) Wells, Courage to Be Protestant, 243=용기 있는 기독교, 350. 25) Wells, Courage to Be Protestant, 226-41=용기 있는 기독교, 327-48. 26) Cf. Wells, Courage to Be Protestant, 239-41=용기 있는 기독교, 344-48. 27) Wells, Courage to Be Protestant, 246=용기 있는 기독교, 354f. 그는 “하나님 앞에서는 은신처 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정확히 지적한다. 28) 이승구, 데이비드 웰스와 함께 하는 하루, 27-28. 29) Richard L. Lints, The Fabric of Theology: A Prolegomenon to Evangelical Theology (Grand Rapids; Eerdmans, 1993). 30) 그런 시도와 제안들로 이승구, “복음주의와 성경”, 「복음과 상황」 (1992년 9월), 이승구, 개혁신학 탐구, 개정판, 42-52와 2001년 4월 27일 한국복음주의신학회 국제학술대회에서 영어 발제한 다음 논문을 보라. 이승구, “세계 신학계에 대한 한국 복음주의신학의 제언: 사도적, 성경적, 종말 신학에 의 요청”, 21세기 개혁신학의 방향, 개정판 (서울: CCP, 2018), 339-46. 또한 장로교회의 방향을 위한 제안으로 2002년 11월 25일에 열렸던 한국 장로교 신학회 제 1차 논문 발표회에서 발제했던 “21세기 한국 사회 속에서 장로교회의 의미“, 21세기 개혁신학의 방향, 201-37도 보라.
    • 목회
    • 신학
    2022-08-10
  • 복음주의와 개혁주의(1)
    복음주의와 개혁주의(1) 어떤 면에서 보면 너무나도 분명한 것인데 상황이 아주 복잡해져서 여러 방식으로 제시되기도 하고, 신학을 처음 하는 학우들이 늘 질문하는 문제의 하나로 “도대체 복음주의와 개혁주의는 어떤 관계에 있느냐?”는 질문이 있다. 이번 학회에서 이 주제로 논의하기로 하였으니, 특히 신학을 처음으로 하는 학우들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라면서, 먼저 복음주의가 무엇인지를 간단히 논의하고, 개혁주의의 특성을 드러낸 후에, 복음주의와 개혁주의의 가장 바람직한 관계성이 무엇인지를 논의해 보기로 한다. I. 복음주의 1. 복음주의의 기원과 다양한 영향들 복음주의는 매우 폭넓은 개념이다. 복음주의는 그저 종교적 운동으로만이 아니라 하나의 사회적 운동으로 이해되야 한다는 것이 거의 보편적 이해이다.1) 기본적으로 천주교회를 개혁하면서 루터가 이신칭의의 복음이 있는 곳은 참된 교회이고, 이신칭의가 드러나지 않는 곳은 잘못된 교회라고 주장하면서 일으킨 운동으로부터 논의를 시작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개혁자들은 이런 입장이 사도들이 가르친 복음에 충실한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독일에서는 종교개혁 때부터 이신칭의를 가르치는 교회를 복음주의 교회라고 일컬어 왔다. 루터파 교회가 복음주의 교회(Evangelishe Kirche)로 지칭된 것이다. 물론 후에 루터파 교회 안에 다양한 신학적 성향들이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18세기 이후에는 독일에서 말하는 복음주의 교회(즉, 루터파 교회)가 모두 다 우리가 조금 후에 말하는 의미에서의 ‘복음주의적’이지 않은 상황이 나타났다. 매우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를 “루터파 교회(에방겔리쉐 카르케)의 아이러니”라고 해보자. 일단 본래적 의미에서는 이신칭의의 복음을 제대로 주장하는 사람들과 그들의 운동이 복음주의였다. (계속해서 독일 상황을 말하자면) 천주교회에 반대하면서 이신칭의를 말하던 루터파 교회와 루터파 정통주의를 추구하던 이들 중 일부 (또는 상당수)가 좀 냉정해져서 엄밀한 루터파(Gnesio-Lutherans)라는 것을 강조하면서,2) 그 안에 복음적 열정이 없게 되는 일이 발생했다. 그런 상황을 죽은 정통(dead orthodoxy)으로 인식하면서, 이신칭의를 비롯한 개신교의 기본적 가르침에 충실하면서도 교리를 배제하면서 성경에만 충실하자고 하는 독일 경건주의의 운동도3) 복음주의에 속하고, 후대의 복음주의를 설명하는 매우 중요한 요인이다.4) 그러므로 독일 상황에서는 루터파 정통주의에 충실하면서 복음의 열정을 지닌 사람들과 루터파 정통주의를 비판하면서 나타난 독일적 경건주의 운동이 복음주의를 형성하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아우구스트 헤르만 프랑케(1663-1727) 등의 노력으로 이루어진 할레대학의 설립과 그 졸업생들의 선교적 노력, 또한 진젠도르프 백작과 함께한 이들, 즉 소위 모라비안 교도로 지칭되는 이들의 성경적 삶의 실천과 선교적 노력은 후대 복음주의 운동의 큰 토대의 하나가 되었다. 영국에서는 역시 종교 개혁에 동의하는 사람들 중에 성경과 개혁된 교회의 모습에 좀 더 충실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청교도”라고 불렸다. 청교도는 기본적으로 영국 국교회를 좀 더 성경적 방향으로 이끌려고 했던 사람들이다. 그 대부분은 영국 국교회로부터의 분열을 원하지 않았고 그 안에서 개혁을 하려고 했었다. 그런데 이런 청교도들은 고치려고 하는 것에 있어서 는 의견의 일치가 있었는데 그들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방향에서는 서로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었다.5) 그래서 후대의 시각에서 보면 매우 다양한 사람들이 청교도들 가운데 있었다. 이 다양성을 가진 사람들을 후대의 용어로 복음주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20세기와 21 세기에 언급되는 복음주의와 16세기 말과 17세기 청교도들 사이에 상당한 유사성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필자는 청교도 운동이 이전 “영국 사회에 존재하고 있던 오늘날의 소위 ‘복음주의 모자이크’와 비슷한” 것이라는 말을 사용한 일도 있다.6) 여기 청교도와 오늘날 복음주의의 특성이 다양성이 잘 드러난다. 대부분의 청교도는 국교회로부터 분리하려고 하지 않았지만 후에 국교회로부터 분리한 분리주의자들도7) 복음주의에 상당히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16세기 영국에는 상당히 중도적이었던 에드먼드 그린달(Edmund Grindal, 1519?-1583) 같은 켄터베리 대주교로부터8) 국교회의 박해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국교회 안에 있기를 원하였던 토마스 카트라이트(Thomas Cartwright, c. 1535–1603)를 비롯한 상당수의 청교도들, 그리고 후에 어쩔 수 없이 국교회 밖으로 밀려난 사람들(dissenters), 특히 1660년 왕정복고 후에 1662년에 있었던 통일령(The Act of Uniformity, 1662) 때문에 일어난 소위 “대축출”(the great ejection) 때에 밀려난 2,000여명의 목사들, 즉 소위 (당시 영 국 국교회의) ‘주류를 따르지 않는 사람들’(the Nonconformists), 그리고 의도적인 분리주의 자들에 이르는 매우 다양한 사람들이 복음주의의 선조들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18세기에 영국 국교회인 성공회로부터 타의반 자의반 분리되어 그들이 옥스퍼드에서 학생 신앙운동을 할 때부터 들었던 별명인 “법식주의자들”(methodists)라는 그 이름 그대로 교단이 된 웨슬리파 사람들인 감리교회(Methodist)의 초기도9) 후대 복음주의에 상당히 영향을 많이 미쳤다고 할 수 있다. 18세기에는 휘필드나 요나단 에드워드 같은 칼빈주의자들과 웨슬리 같은 알미니안주의자들이 영국과 미국에서 힘을 합하여 복음주의적 운동을 했었다고 할 수 있다.10) 현대 복음주의 운동은 이들의 사역에 근거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앞서 언급한 마크 놀의 책 제목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Mark A. Noll, The Rise of Evangelicalism: The Age of Edwards, Whitefield, and the Wesleys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2003). 18세부터 20세기에도 영국 국교회 안에도 복음주의적 성향을 가진 분들이 있었고, 국교회를 떠나게 된 감리교회는 처음에 강력한 복음주의적 모습을 드러내었다.11) 그들은 복음전도, 사회적 구호, 그리고 해외 선교를 강조하면서 <교회선교회>(The Church Missionary Society, 1799)를 만들고, <식민지와 대륙 교회 협회>(The Colonial and Continental Church Society, 1838)를 결성하여 여러 선교와 사회적 활동에 힘썼다.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 “복음주의 운동은 18세기 영국에서 만들어졌다”고 표현하는 경 우도 있다.12) 물론 그것이 16-17세기 청교도들과 연관된 저교회적 태도(low church attitude)와 많은 부분을 공유하고 있음을 인정하면서 그렇게 말하지만 말이다. 당시 복음주의 운동에 참여한 사람들 중에 많은 평신도들이 있었고, 그들 중 상당수가 1790년에서 1830년대에 영국 사회의 중요 인사들로 구성된 영향력 있는 클래프햄 파(the Clapham Sect)에 속해 있었다. 그 들 중에 하원 의원도 많이 있었고 그들은 노예무역을 철폐하는 일을 위해 노력했고, 그 일을 이루었다. 19세기에 영국 복음주의자들은 성공회 안의 천주교적 유산을 강조하던 옥스퍼드 운동 (the Oxford Movement)에 반발하면서 오직 성경에 충실한 모습을 유지하려고 애썼다. 결국 이들이 힘을 합해서 1846년에 런던에서 복음주의 연맹(The Evangelical Alliance)을 형성하였다. 또한 리버플의 주교였던 존 라일 주교(John Charles Ryle, 1816–1900) 같은 이는 복음주의적 주교로 알려져 있다. 20세기 상황에서는 마틴 로이드-존스와 존 스토트가 영국의 복음주의자들을 대변하는 역할을 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이 함께 주도했던 청교도 컨퍼런스(the Puritan Conference)와 같은 모임(1956-1969)이 중요했고,13) 학문적 운동으로는 1944년에 캠브리쥐에 세워진 틴델 하우스, 그보다 영향은 적었지만 옥스퍼드에 세워졌다가 경제적 문제로 지금은 라티머 트러스로로 축소되어 런던에 있는 옥크 힐 컬리쥐로 옮긴 라티머 하우스, 그런 것을 따라 스코틀랜드에 1981년에 논의를 따라 1983년에 세워진 에딘버러의 러더퍼드 하우스 또는 개혁신학을 위한 러더포드 센터(Rutherford Center for Reformed Theology)가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14) 학교로는 영국의 옥크 힐 칼리쥐(Oak Hill Theological College), 2004년에 런던 신학교(London School of Theology)로 이름을 바꾼 1943년에 성경 통신 과정으로 시작된 런던 바이블 컬리쥐 등이 초교파적 복음주의의적 선교 교육 기관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였고, 스코틀랜드의 지금은 에딘버러 신학교(Edinburgh Theological Seminary)로 이름을 바꾼 1843년 11월에 시작된 프리 쳐치 컬리쥐,15) 비교적 근자인 1994년에 Andrew McGowan과 Hector Morrison의 노력으로 세워진 하일랜드 신학교(Highland Theological College)가16) 스코틀랜드에서, 2016년에 연합 신학교(Union School of Theology)로 이름을 바꾸고 젊고 활동성 있는 젊은 학자인 마이클 리브스(Michael Reeves)의 인도 하에 활동하고 있는 웨일즈 복음주의 신학교(Wales Evangelical School of Theology)가 웨일즈에서, 그리고 브리스톨의 트리니티 칼러쥐, 옥스퍼드의 위클리프 홀 등이 성공회 안의 복음주의 교육 기관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다. 또한 1957년에 이안 머레이와 잭 컬럼(Jack Column)이 세운 개혁파 출판사인 <진리의 깃발>(Banner of Truth)이 그 여러 활동으로 스코틀랜드와 영국 뿐 아니라 전세계 복음주의 운동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그와 연관된 이안 머리(Ian Murray)의 큰 영향력을 주목할 만하다. 또한 미국과 우리나라의 IVF에 해당하는 UCCF의 활발한 활동들과17) 복음주의 신학생 모임인 이전에 TSF이던 RTSF(the Religious and Theological Students Fellowship)도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그들을 위한 정기 간행물인 「떼멜리오스」(Themelios)는 학문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이와 더불어, 1967년부터 나오는 「에반젤리칼 타임즈 (Evangelical Times), 「진리의 깃발」(Banner of Truth), 그리고 1929년부터 내고 있는 분기 별 저널인 「복음주의 퀄터리」(Evangelical Quarterly)도 영국 복음주의 운동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2. 복음주의의 다양성 미국에서는 그 이전까지 이민온 집단의 교파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던 미국 사회가 19세기 초부터 사람들의 도시로의 이동이 많아지기 시작하여, 결국 미국 사회를 변혁시킨 사회 구조의 혁명적 변화의 한 부분으로 복음주의 운동이 나타난 것으로 생각하는 시각도 있다.18) 현상으로서의 복음주의를19) 볼 때 무시할 수 없는 시각이다. 이런 현상으로서의 복음주의는 시대별로 다양성을 가지게 되고, 결과적으로 복음주의 다양성을 생각하게 된다. 여러분들이 미국 복음주의의 다양성을 언급했다. 특히 이런 제목으로 편집된 책을 낸 북 침례교 신학교의 도날드 데이톤과 노뜨팍 신학교(North Park Theological Seminary)의 로버트 존스톤이 편집한 책은 그야말로 다양한 복음주의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전천년주의와 관련한 복음주의자들, 오순절 전통의 복음주의, 북미 성결 운동과 관련된 복음주의자들, 흑인 종교와 복음주의 정체성, 그리스도 교회적 복음주의자들, 침례교적 복음주의자들, 자의식적 개혁파 복음주의자들, 그리고 루터파 복음주의자들.20) 심지어 로버트 웨버는 복음주의라는 용어와 연관되는 14개의 다양한 복음주의자들 그룹을 언급하기도 했다.21) 그런데 1960년대 이후에는 복음주의라는 용어와 관련하여 이보다 더한 다양성이 나타나게 되었다. 예를 들어서, 칼 바르트가 1962년에 미국 여행을 하면서 강연한 강연 내용을 『복음주의 신학』으로 낸 것과 같은 것이 이런 다양성의 대표적 양상이다.22) 버나드 램 (Bernard L. Ramm, 1916-1992) 같은 이는 복음주의 신학을 거의 바르트주의 신학으로 생각할 정도이고,23) 유럽에서는 아주 보수적인 그룹을 제외하고서는 대개 그렇게 생각한다. 미국 복음주의에서의 이런 모습을 신정통주의의 위협이라는 말로 헌터는 표현한 일도 있다.24) 그러나 많은 복음주의자들은 이것에 대해서 비판적으로 본다.25) (이 문제는 다음 절에서 복음 주의의 절단선을 논하면서 논하기로 한다.) 더 나아가 포스트모던적 분위기를 철저히 의식하면서 그에 따라서 복음주의와 복음주의 교회와 복음주의 신학을 전체적으로 새롭게 해야 한다는 제안이 이미 1993년에 나온 바 있다.26) 또한 이 제안을 했던 지금은 돌아가신 스탠리 그랜츠(Stanley J. Grenz, 1950–2005)가 그런 입장에서 새로운 조직신학을 『하나님의 공동체를 위한 신학』이라는 제목으로 포괄적인 조직신학 책을 내기도 했다.27) 많은 작업을 하던 그렌츠가 너무 일찍 죽은 것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과연 이와 같이 복음주의가 수정되어도 좋은지를 염려하는 분들이 있을 정도로 80년대 이후로 복음주의는 너무 다양해져 가고 있다. 이렇게 의식적으로 변모하는 것도 심각한 문제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이것은 사람들이 주의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소위 복음주의자들이 무의식적으로 주변의 영향을 받으면서 근 자에 포스트모던적 분위기에 잘 적응해 가고 있는 것은 더 심각한 문제이다.28) 3. 복음주의의 절단선(The Edge of Evangelicalism) 이와 같이 오늘날 ‘복음주의’라고 하면서 너무 다양한 입장이 나타나고 있기에 복음주의의 절단성을 분명히 하는 일이 필요하다는 논의가 나올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서, 미국 복음주의 신학회에서는 성경에 대해서 너무 비평적 입장을 유지하는 일단의 학자들은 복음주의라고 하기 어렵다는 판단이 있기도 했다.29) 근자에는 리쳐드 라이스(Richard Rice),30) 윌리엄 하스커 (William Hasker),31) 클락 피녹(Clark Pinnock),32) 그레고리 보이드(Gregory Boyd),33) 그들과 함께 데이비드 배신저(David Basinger),34) 존 샌더스(John Sanders)35) 등이 주장한 열린 유신론(Open theism)은 복음주의 안에 있다고 하기 어렵다는 선언이 나오기도 했다.36) 물론 이런 선언들에 대해서 반대하면서 복음주의 입장을 넓게 유지하자는 분들도 있기는 하지만 미국 복음주의 신학회에서도 어느 정도의 절단선을 분명히 해야 한다는 논의가 있던 셈이다. 이 모든 것을 보며 특히 20세기 여러 신학적 논쟁이 드러난 상황을 생각하면 복음주의의 절단선으로 최소한 다음과 같은 것은 제시되어야 할 것이다.37) 첫째, 성경의 영감을 온전히 인정하면서 성경을 정확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절대적으로 받아들이는지의 여부. 대개 자신의 입장을 복음주의와 연관시켜 신학적 활동을 하시는 분들은 성경의 권위는 상당히 높게 인정한다. 그러나 단지 성경의 권위를 말한다고해서 그런 모든 사람들이 복음주의라고 하기 어려운 것은, 그렇게 말한 후에 결국 복잡한 논쟁을 일으켜 모든 사람들과 복음 주의 교회를 결국 혼란에 빠뜨리게 하는 일이 많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하는 지의 여부가 매우 중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성경에 영감에 대한 이해가 매우 중요하게 작용한다. 영감의 방식으로는 유기적 영감과 영감의 정도로는 축자영감을 말하는 것이 진정한 복음주의 입장이다. 따라서 성경의 모든 말이 받아쓰기 같은 방식으로 주어졌다는 기계적 영감을 바른 복음주의자들이 주장한 바도 없고, 기본 사상이나 핵심만 영감 했다는 사상 영감은 복음주의의 영감론이 아니다. 성령님께서 인간의 모든 특성을 다 사용하셔서 인간 저자의 모든 기능이 다 사용되므로 인간 저자의 특성이 나타나지만, 인간적 오류가 스며들지 않게 하셨다는 ‘유기적 영감설’이 복음주의적 영감설이다. 또한 영감의 정도 문제와 관련해서 사람들을 배제하고 인간 저자는 그저 도관과 같은 역할을 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복음주의 입장이 아니다. 또한 성경의 일부분만 영감하였다는 부분 영감설이나 역동적 영감설은 주장하는 것도 복음주의 영감론이 아니다. 복음주의 영감론은 성경의 모든 부분이 영감되었다는 것이므로, 결국 ‘글자 하나하나에까지 미치는 영감’[逐字靈感]을 말할 수밖에 없다.38) 이런 ‘유기적 축자 영감’을 말하므로 복음주의자들은 성경은 우리의 믿는 바와 삶과 실천의 모든 문제에 대한 유일무이하고 절대적 원칙이라는 입장을 견지한다. 그러므로 성경을 읽고 실질적으로는 제쳐 놓는 이들은 엄밀하게 복음주의자들이 아니다. 복음주의는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를 모두 성경에서 찾아내고, 모든 결론을 성경에게 이끌어 낸다. 복음주의는 또한 실천의 모든 것도 성경으로부터 이끌어 내고 성경이 최종적 결론을 가지는 것이 복음주의 입장이다. 둘째로, 루터와 칼빈같은 개혁자들이 잘 제시하고 정리한 성경적 이신칭의 사상에 충실한 것이 복음주의 입장이다. 이신칭의의 가르침에 충실하면 복음주의라고 할 수 있지만, 이신 칭의에 충실하지 않으면 그것은 이단적인 것이다. 루터가 말한 바와 같이 이신칭의와 함께 교회가 서고 넘어지기 때문이다. 바울에 대한 세관점을 이런 점에서 매우 심각하게 생각해야 할 것이다. 셋째로, 사도들의 가르친 가르침에 충실한 것이 복음주의이다. 초대 교회에 사도들이 가르친 가르침에 충실한 교회가 정통적 교회였고, 이에서 벗어난 것을 이단으로 하였고, 종교 개혁 시기에 사도적 가르침을 회복해 낸 것이 개혁자들이었으므로 어느 시대든지 1세기 사도들이 가르친 그 가르침이 기준이다. 복음주의는 20세기나 21세기에도 1세기 사도들의 가르침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운동이다. 사도신경이 사도들의 가르침을 잘 요약한 것이나 그것을 성경이 가르친 대로 해석하지 아니하면 그런 교회를 바른 교회라고 하지 않는다. 천주교회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그러나 사도신경조차도 성경적으로 해석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복음주의이다. 미주 1) Cf. Donald Scott, “Evangelicalism as a Social Movement,” available at: http://nationalhumanitiescenter.org/tserve/nineteen/nkeyinfo/nevansoc.htm: “Evangelicalism needs to be understood not only as a religious movement, but also as a social movement.” 2) 이 때 독일에서 비판받던 사람들이 필립 멜랑흐톤과 그를 따르는 소위 “은밀한 칼빈주의자들”(Crypto Calvinists)이었다. 이에 대한 좋은 논의로 Jürgen Diestelmann, “Philippism-Melanchthon and the Consequences: An Observation in the ‘Year of Melanchthon,’” LOGIA - A Journal of Lutheran Theology 6/4 (1996): 3-6, available at: https://web.archive.org/web/20060614173132/http://www.luther-in-bs.de/melaeng.htm. 3) 그런데 이것은 독일 경건주의에 대한 설명이라는 것에 주의해야 한다. 네덜란드에서는 정 통주의와 경건주의가 조화롭게 나타나 “더 나아가는 종교개혁”(Nadere Reformatie)으로 나타 나게 되었다. 그래서 화란 교회사에서 1600년에서 1750년대를 “더 나아가는 종교개 혁”(Nadere Reformatie)의 시기로 언급하곤 한다. Cf. Willem J. van Asselt & Paul H. A. M. Abels, “The Further Reformation,” Herman Selderhuis, ed., Handbook of Dutch Church History (Göttingen: Vandenhoeck & Ruprecht, 2015), 338–41; https://en.wikipedia.org/wiki/Nadere_Reformatie; 주도홍, 『개혁교회 경건주의』 (서울: 도 서출판 대서, 2011)도 보라. 거의 모든 역사가들이 잘 인정하듯이, 화란의 경건주의는 우리가 후론할 영국 청교도들의 영향을 받기도 했다. Anthony Milton, “Puritanism and the Continental Reformed Churches,“ in The Cambridge Companion to Puritanism, eds., John Coffey & Paul C. H. Lim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8), 118– 19. 경건주의가 상황에 따라 다양한 양상으로 나타난 것을 잘 주의해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단순하게 말하 면, 화란의 경우에는 전통주의와 경건주의가 조화롭게 나타나 경건주의를 대변하는 후티우스 (Voetius) 같은 인물이 동시에 개혁파 정통주의의 대변인 중의 하나인 것과 대조해서, 17-18세기 독 일 경우에는 경건주의의 대변인들인 필립 야곱 슈페너(1635-1705)나 아우구스트 헤르만 프랑케 (1663-1727) 등이 루터파 정통주의와 대립적인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 상당히 대조적이다. 4) 거의 모든 역사에서 경건주의가 복음주의의 한 기원으로 언급되고 있음을 보라. Cf. F. Ernest Stoeffler, ed., Continental Pietism and Early American Christianity (Grand Rapids: Eerdmans, 1976); C. John Weborg, “Pietism: Theology in Service of Living Toward God,” in Donald W. Dayton and Robert K. Johnston, eds., The Variety of American Evangelicalism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1991), 161-83; Roger E. Olson, “The Roots of Evangelical Theology in Pietism,” in his The Westminster Handbook to Evangelical Theology (Louisville & London: Westminster John Knox Press, 2004), 10-16. 5) 이점에 대한 지적으로 이승구, “조직신학에서 본 청교도 사상”(2003), 『21세기 개혁신학의 방향』, 최 근판 (서울: CCP, 2018), 65-66와 그에 인용된 여러 저자들을 보라. 6) 이승구, “조직신학에서 본 청교도 사상”, 66. 7) 이런 사람들의 원조는 1567년부터 있었고, 특히 Robert Brown (1550?-1633)이 친구인 Robert Harrison과 함께 1581년에 놀위치에 독립회중(an independent gathered congregation)을 세운 것과1592년에 분리주의적 회중교회(Puritan Separatist)를 세운 것, 이 교회와 여러 회중교회가 암스 테르담으로 간 것, 라이덴으로 간 스크루비 회중교회, Gainsburgh에서 회중교회 목사가 된 John Smyth(1570?-1612)가 1908/1609년경 자신과 교회의 지체들에게 물을 쏟아 영국 최초의 침례교회가 화란 땅에서 형성되어 소위 General Baptist의 시조가 된 것, 라이덴 회중 교회의 일원이었던 Henry Jacob 목사(1563-1624)가 1616년 영국으로 돌아와 Southwark에 세운 회중교회, 이 교회에서 1630 년대에 분리한 일부 신자들이 John Spilsbury를 목사로 세우고 형성된 Particular (or Calvinistic) Baptists 운동이 이런 분리주의적 청교도의 모습의 한 단면이다. 이에 대한 간단한 정리로 앞서 언급 한 이승구, “조직신학에서 본 청교도 사상”, 62-63을 보라. 8) Cf. Patrick Collinson, Archbishop Grindal, 1519-1583: The Struggle for a Reformed Church (J. Cape, 1979). 9) 그런 점에서 오늘날 미국에서나 한국에서나 감리교회가 복음주의적 성격을 버리고 가장 진보적인 교 단이 된 것은 “메토디스트의 아이러니”라고 지칭할 만한 이상한 일이다. 특히 미국 United Methodist Church의 모습이나 한국 감신의 모습을 보면서 이 아이러니를 잘 생각하게 된다. 10) 이들의 사역에 대한 좋은 논구로 다른 많은 책들과 함께 Mark A. Noll, The Rise of Evangelicalism: The Age of Edwards, Whitefield, and the Wesleys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2003)을 보라. 11) 이들을 잘 다룬 것이 스털링 대학교 역사학 교수이시고, 우리 IVF에 해당하는 영국 UCCF 운동의 열심이신 데이비드 베빙턴 교수의 책이다. David W. Bebbington, Evangelicalism in Modern Britain: A History from the 1730s to the 1980s (London: Routledge, 1989). 이 귀한 책에 대 한 이은선 교수님의 번역을 보라. 영국의 복음주의 (서울: 한들, 2009). 어떤 의미에서 이 책은 복 음주의 역사를 잘 규정하는 교과서 같은 책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후대 학자들의 다음 같은 책 제 목을 주목하여 보라. Crawford Gribben, Michael Haykin, Kenneth J. Stewart, eds. Continuities in Evangelical History: Interactions with David Bebbington (Leicester: Inter-Varsity Press, 2009). 12) 그렇게 표현한 대표적인 경우로 다음 고든 멜톤 교수의 글을 보라. J. Gordon Melton, “Anglican Evangelical,” in Encyclopaedia Britannica, available at: https://www.britannica.com/topic/Evangelical-church-Protestantism. 13) 이 때 발제된 글들의 모음으로 D. Martyn Lloyd-Jones & J. I. Packer, ed., Puritan Papers: 1956–1969, 5 vols. (Phillipsburg, NJ: P&R Publishing, 2000–2005)을 보라. 스토트와 로이드 존스의 의견 차이로 말미암은 복음주의자들의 분열에 대한 좋은 설명으로 Ian H. Murray, Lloyd-Jones: Messenger of Grace (Edinburgh: Banner of Truth, 2008), chapters 8-9. 이 분열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같은 의견을 표현하는 저스틴 테일러의 다음 글 도 보라: Justin Taylor, “50 Years Ago Today: The Split Between John Stott and Martyn Lloyd-Jones,” TGC Blogs, posted on OCTOBER 18, 2016, available at: https://www.thegospelcoalition.org/blogs/evangelical-history/50-years-ago-today-the-splitbetween-john-stott-and-martyn-lloyd-jones/ 14) https://www.rcrt.scot/ 1983년부터 10년 동안 초대 원감(Warden)을 하였던 Nigel Cameron 박 사는 주로 생명윤리에 관한 여러 작업을 인도했고, 그 후에는 David Searle 목사가 2003년까지 원감 을 하다가, 소장(Director) 체제로 바꾸어 밥 피올 박사(the Rec. Dr. Bob Fyall)께서 4년 동안 소장 을 하였고, 2008년부터는 제이슨 컬티스 박사(Dr Jason Curtis)가 섬겼고, 한동안 소장 없이 지내다 가 지금은 2019년에 선임된 (하일랜드 신학교의) Andrew T. B. McGowan 교수가 소장으로 있다. 15) Cf. https://ets.ac.uk/about/history-and-heritage/ 16) https://www.htc.uhi.ac.uk/about-us/ 17) Cf. https://www.uccf.org.uk/ 18) 이런 입장을 표현하는 Donald Scott, “Evangelicalism as a Social Movement” 의 논의를 보라. 19) 1980년대 초까지의 미국 복음주의 현상을 사회학적으로 분석한 버지니아 대학교의 사회학 교수인 James Davidson Hunter, American Evangelicalism: Conservative Religion and the Quandary of Modernity (New Brunswick, NJ: Rutgers University Press, 1983)도 보라. 20) Donald W. Dayton and Robert K. Johnston, eds., The Variety of American Evangelicalism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1991). 이 책에서 심지어 1860년 미국 미시간 주 배틀 크릭 (Battle Creek)에서 제임스 화이트(James White), 엘런 화이트(Ellen White), 조셉 베이츠(Joseph Bates), 존 앤드루스(John Andrews) 등에 의해 창립된 안식교회도 이 다양성 안에 넣dj 제시하고 있 다. 21) Robert E. Webber, Common Roots: A Call to Evangelical Maturity (Grand Rapids: Zondervan, 1978), 32. 22) Karl Barth, Evangelical Theology: An Introduction (Grand Rapids: Eerdmans, 1963). 23) Bernard L. Ramm, After Fundamentalism: The Future of Evangelical Theology (San Francisco: Harper & Row, 1983). 24) James Davidson Hunter, Evangelicalism: The Coming Generation (Chicago and London: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87), 25. 25) 특히 버나드 램에 대한 다음 학위 논문들을 보라: Robert L. Jones, “Scripture and Theology: An Analysis of Bernard Ramm's Proposal to Adopt Karl Barth's methodology,” Th. M. diss., Western Conservative Baptist Seminary, 1985; Kenny Regan Pulliam, “A Critique of Bernard Ramm's Doctrine of the Bible,” Ph. D. diss., Bob Jones University, 1986; 그리고 Simon Sze Wang Wat, “Bernard Ramm’s Reception of Karl Barth’s Doctrine of the Word of God,” Ph. D. diss., 2011. 또한 다양한 평가들에 대한 논의로 Phillip R. Thorne, Evangelicalism and Karl Barth: His Reception and Influence in North American Theology (Pittsburgh, PA: Pickwick Publications, 1995)도 보라. 26) Stanley J. Grenz, Revisioning Evengelical Theology: A Fresh Agenda for the 21st Century (Downer Grove, IL: IVP, 1993). 27) Stanley J. Grenz, Theology for the Community of God (Grand Rapids; Eerdmans, 1994). 또 한 Renewing the Center: Evangelical Theology in a Post-Theological Era (Grand Rapids: Baker, 2000)과 John Franke와 함께 낸 Beyond Foundationalism: Shaping Theology in a Postmodern Context (Westminster John Knox Press, 2000)도 보라. 28) 이 문제를 잘 분석하고 명료히 드러낸 데이비드 웰스의 논의를 보라. David Wells, No Place for Truth (Grand Rapids: Eerdmans, 1993), 115, 127; David Wells, Losing Our Virtue (Grand Rapids: Eerdmans, 1998), 61f.; David Wells, Courage to be Protestant (Grand Rapids: Eerdmans, 2008), 48f. 이를 언급하고 있는 이승구, 데이비드 웰스와 함께 하는 하루 (서울: 말씀 과 언약, 2021), 58을 보라. 29) 그 대표적인 예로 1961년 브루스 지도하에 만체스터 대학교에서 학위를 하고(그 학위 논 문은 1967년에 Supplements to Novum Testamentum 18호인 The Use of the Old Testament in St. Matthew's Gospel with Special Reference to the Messianic Hope [Leiden: E. J. Brill., 1967]로 출간된었다), 1962년부터 싼타 바라라(Santa Barbara)에 있는 Westmont College의 신약과 희랍어 교수로 있던 로버트 건드리에 대한 노르만 가이슬러의 비판적 문제 제기 후에 1983년에 복음주의 신학회에서 건드리가 탈퇴한 것을 들 수 있다. Cf. Leslie R. Keylock, "CT Classic: Evangelical Scholars Remove Robert Gundry for His Views on Matthew," Christianity Today (1984. 2. 3): 47, Available: https://www.christianitytoday.com/ct/2003/novemberweb-only/11-17-42.0.html. 본래 the Expositor’s Bible Commentary의 마태복음 주석을 쓰도록 되었던 Robert H. Gundry의 마 태복음 주석 내용을 편집 비평을 사용했다는 이유로 Merrill C. Tenney와 James M. Boice가 받아 들이기 어려워하자, 결국 이 시리즈에 속하지 않고 독립적으로 Matthew: A Commentary on His Literary and Theological Art (Grand Rapids, MI: Eerdmans, 1982)으로 출판된 책에 대한 미 국 복음주의 신학회의 평가였다. 30) Cf. Richard Rice, The Openness of God: The Relationship of Divine Foreknowledge and Human Free Will (Nashville, Tennessee: Review & Herald, 1980). 31) William Hasker, God, Time, and Knowledge (Ithaca, New York: Cornell University Press, 1994); Hasker, Providence, Evil, and the Openness of God (London: Routledge, 2004). 32) Clark Pinnock, A Wideness in God's Mercy: The Finality of Jesus Christ in a World of Religions (Grand Rapids, MI: Zondervan, 1992); idem, The Openness of God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1994): idem, Most Moved Mover: A Theology of God’s Openness (Grand Rapids: Baker, 2000). idem and Robert C Brow, Unbounded Love: A Good News Theology for the Twenty-first Century (Carlisle, UK: Paternoster &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1994). 33) Gregory Boyd, God at War: The Bible & Spiritual Conflict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1997); idem, Satan and the Problem of Evil: Constructing a Trinitarian Warfare Theodicy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2001); idem, Is God to Blame? Beyond pat Answers to the Problem of Evil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2003). 34) Clark Pinnock, Richard Rice, John Sanders, William Hasker & David Bassinger, The Openness of God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1994); David Bassinger, The Case for Freewill Theism: A Philosophical Assessment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1996). 35) Cf. John Sanders, The God who Risks: A Theology of Providence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1996); idem & Chris Hall, Does God have a Future? A Debate on Divine Providence (Grand Rapids: Baker Academic, 2003). 36) 미국 복음주의 신학회는 2001년 11월 16일에 “성경은 하나님께서 미래에 될 모든 결정 들과 도덕적으로 자유로운 주체들의 행동을 포함하여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모든 사건들에 대 한 온전하고, 정확하며, 무오한 지식을 가지신다고 분명히 가르친다고 믿는다”는 결의안을 밤 늦게까지의 토론을 걸쳐 41명이 부재한 상황에서 253명의 찬성과 66명의 반대로 결의하였 다. 이로써 그 동안 복음주의 신학회 내의 몇 회원들이 주장한 하나님의 개방성에 대한 견해 (the “openness of God” view)는 복음주의적 확신 밖에 있는 것이라는 점을 명백히 한 것이 다. 이를 알리는 기사의 예로 Russell D. Moore, “Evangelical Theological Society Rejects ‘Open Theism,’ Affirms God’s Foreknowledge,” Baptist Press, November 20, 2001, available at: https://www.baptistpress.com/resource-library/news/evangelical-theological-societyrejects-open-theism-affirms-gods-foreknowledge/ 이 사건 이후 왜 이렇게 결정해야 하 는 지를 밝힌 서던 뱁티스트 신학교의 부르스 웨어의 글로 다음을 보라. Bruce A. Ware, “Defining Evangelicalism’s Boundaries Theologically: Is Open Theism Evangelical,“ JETS 45/2 (June 2002): 193–212. 이 문제를 다룬 책으로 Garrett Ham, The Evangelical and The Open Theist: Can Open Theism Find Its Place Within the Evangelical Community? (B00L3ROPFA, 2014). 미국복음주의 신학회의 이런 결정에 동의하는 Nick Needham, “The Cutting Edge: Open Theism,” Evangelical Times (November 2002), available at: https://www.evangelical-times.org/articles/open-theism/ 37) 결국 의미는 같지만 복음주의에 대해서 다른 식으로 하나의 규범적 접근을 하면서 다음 세 가지 기 준을 제시한 적도 있다: (1) “복음주의는 성경 자체가 증언하는 성경관을 가진다. (2) 복음주의의 성 경 해석은 복음주의 성경관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는 특성들을 가진다. (3) 복음주의자들은 말씀의 뜻 에 전적으로 순종하면서 바른 실천을 하는 자들이다.”(이승구, “복음주의와 성경”, 「복음과 상황」 1992년 9월호, 이승구, 개혁신학 탐구, 개정판 [수원: 합동신학원 출판부, 2012], 42-52에 재수록, 인용은 43에선 온 것임). 38) 이런 정통적 영감론의 대표적 진술로 B. B. Warfield, The Inspiration and Authority of the Bible, ed., Samuel G. Craig (Philadelphia: Presbyterian and Reformed Publishing Co., 1948)을 보라. 이런 영감론에 대한 자세한 진술로 다음을 보라. 이승구, “정 통주의적 성경관에 따른 영감(靈感)과 무오성(無誤性) 이해: 특히 B. B. 워필드와 E. J. 영을 중심으로”, Origin Research Journal 1/1 (October 2021): 72-97; idem, “워필드 신학의 개혁신학적 특성”. 「교회와 문화」 29 (2012년 8월): 77-110.
    • 목회
    • 신학
    2022-08-09
  • 평등법에 나타난 마귀의 간계(엡 6:11-12)-황선우 교수
    (평등법에 대한 설교를 부탁드려 받은 설교 원고입니다. 기꺼이 자료를 주신 교수님께 감사드립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보이지 않는 영이신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역사하심, 일하심을 믿습니다. 그와 동시에 우리는 성경에서 말하듯이 보이지 않지만 악한 영도 이 세상에서 일하고 있음을 믿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에베소서 6장 12절에서 말합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엡 6:12) 이 악의 영들의 우두머리는 사탄이고 사탄은 마귀라고도 불립니다. 요한계시록 12장 9절에서는 “큰 용이 내쫓기는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며 온 천하를 꾀는 자라”(계 12:9) 고 말씀합니다. 이 사탄, 즉 마귀를 온 천하를 꾀는 자라고 말하는데 여기서 “꾀는”의 의미는 속인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뱀으로 나타난 마귀가 최초의 인간들인 아담과 하와에게 나타나 한 것은 무엇입니가? 하나님이 금지한 선악과를 먹으면 하나님과 같이 된다고 속인 것입니다. 마귀가 하는 일은 속이는 것이죠. 오늘 본문 에베소서 6장 11절에서도 마귀의 속임을 대적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엡 6:11) 여기서 “마귀의 간계”가 “마귀의 꽤”, “마귀의 속임수”입니다. 마귀의 간계에 넘어가지 말고 그 속임수에 넘어가지 말고 대적하라고 말합니다. 야고보서 4장 7절에서도 말씀합니다.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복종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약 4:7) 우리가 대적하는 이 마귀의 졸개라 할 수 있는 악한 영들 또한 우리가 대적해야 할 상대임을 오늘 본문 에베소서 6장 12절에서 말한 것입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엡 6:12) 여기서 말하는 것은 뭡니까? 우리가 사람들과 싸울 때가 많지만 사실 우리의 궁극적인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다, 즉 인간들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럼 무엇입니까?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한 영들을 상대함이라” 언뜻 보면 여기서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주관자들” 이 어둔 세상의 통치자들을 말하는 것 같지만 바로 앞에서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했기 때문에 여기서 우리가 싸워야 할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주관자들은 이 세상에 강력한 영향력을 끼치는 악한 영들을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싸워야 할 궁극적인 싸움은 영적싸움입니다. 때로는 겉으로 보기에는 사람과의 싸움처럼 보일 때도 있지만 실제로는 그 사람 안에서 역사하는 악한 영과의 싸움입니다. 이 싸움이 치열합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통해서 일하듯이 마귀도 사람을 통해서 일합니다. 이 세상의 영적전쟁을 적나라하게 펼쳐보면 이는 하나님의 영의 지배를 받는 사람과 마귀의 영의 지배를 받는 사람과의 싸움일 때가 많습니다. 지금 이 시대에 우리나라에서 일어나는 이 영적 전쟁의 대표적인 예는 동성애를 조장하고 동성혼을 합법화하려는 포괄적차별금지법, 평등법과의 싸움입니다. 작년 6월 29일에 포괄적차별금지법이 발의되어서 교회가 앞장서서 반대하고 많은 성도님들의 기도와 노력으로 하나님이 포괄적차별금지법을 막아주신 것을 많은 분들이 기억하고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1년쯤 지난 올해 6월 16일에 24명의 국회의원이 이번에는 평등법이라는 이름으로 포괄적차별금지법과 거의 동일한 법안을 발의했고 이어서 최근 8월 9일에도 13명의 국회의원이 또 다른 평등법을 발의했습니다. 조금 전에 본 요한계시록 12장 9절에서 마귀를 온 천하를 꾀는 자, 속이는 자라고 말했는데 마귀는 너무나 그럴듯한 이름으로 이 세상의 사람들을 속이는 법안을 제정하게 했습니다. 포괄적차별금지, 평등 이러한 말 자체는 얼마나 좋습니까? 이 법안의 이름이 너무 좋아서 이 법안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덮어놓고 좋은 법이라고 생각하기 십상입니다. 마귀의 전형적인 속임수, 오늘 본문 에베소서 6장 11절의 용어로 말하면 마귀의 간계, 아주 간사한 계획입니다. 북미와 유럽에서 포괄적차별금지법으로 교회의 입에 재갈을 물리고 그 사회를 더욱 타락시켜서 재미를 본 마귀가 우리 한국 사회도 같은 전법을 구사하고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 마귀의 간계를 분별하고 대적하지 않고 마귀의 꾀에 넘어가 버리면 이 사회는 더욱 타락하고 교회는 성경대로 말씀을 전할 때 극심한 핍박을 받고 성도들은 신앙의 양심을 갖고 살아가기 어려운 상황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평등법이 어떤 법인지 조금 말씀드리겠습니다. 기본적으로 포괄적차별금지법과 내용상 큰 차이가 없는 법이고 올해 발의된 두 개의 평등법도 대동소이하여 올해 6월 16일에 첫 번째 발의된 평등법에 기반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기독교에서 포괄적차별금지법과 평등법을 반대한다는 것이 차별과 불평등에 찬성한다는 의미는 물론 아닙니다. 우리나라에는 포괄적차별금지법이 아닌 개별적 차별금지법들이 이미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장애인 차별금지법, 여성차별금지법, 인종차별금지법, 연령차별금지법, 고용차별금지법, 고용평등법, 유전자정보차별금지법, 임신차별금지법 등입니다. 이런 차별금지법에 대해서 특별한 이슈가 없는 한 교회에서 반대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포괄적차별금지법과 포괄적차별금지법의 또 다른 이름 평등법을 반대하는 것의 중요한 이유는 이 법이 동성애를 지지할 뿐만 아니라 동성애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지 못하게 함으로 표현의 자유를 심각하게 초래하는 법이기 때문입니다. 구체적으로 평등법의 독소조항들을 보면 평등법 안에 마귀의 간계가 어떻게 내재되어 있는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평등법안 제4조 2항에서는 여러 사유로 인한 차별을 금지하고 있는데 거기에는 성적지향과 성별정체성으로 인한 차별도 금지하고 있습니다. 성적지향은 이성애, 동성애, 양성애 등의 성향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동성애자들은 자신의 성적지향을 동성애라고 말하겠지요. 성별정체성은 자신의 성별에 관한 자신의 인식을 말하는데 평등법 3조 1항에서는 성별의 정의를 이렇게 내립니다. “성별이란 여성, 남성, 그 외에 분류하기 어려운 성을 말한다” 이 정의에서 “그 외에 분류하기 어려운 성”은 제 3의 성을 말하는 것으로 그 예는 트랜스젠더입니다. 트랜스젠더는 생물학적으로는 남자인데 자신이 여성이라고 말하는 사람, 그 반대로 생물학적으로는 여성인데 자신이 남성이라고 말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이러한 트랜스젠더 중에는 성전환수술을 받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성경에는 인간의 성이 남자와 여자 둘 뿐이라고 말하는데 평등법에서는 트랜스젠더와 같은 제3의 성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평등법 4조에 보면 이러한 성적지향이나 성별정체성과 관련한 차별의 예로 괴롭힘을 말합니다. 평등법에서는 그 괴롭힘을 신체적, 정신적 고통을 주는 경우로 정의하고 그 예로 부정적 관념의 표시 등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어떤 동성애자가 목사의 설교 가운데 동성애는 죄라며 부정적으로 말하는 말을 들어서 정신적 고통을 받았다면 이 사람은 자신이 차별받았다고 말할 수 있고 그 목사가 평등법을 어겼다고 고소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1년 전에 포괄적차별금지법에도 이와 같은 내용의 법이 있었는데 평등법에도 동일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에 입각하여 동성애는 죄이고 트랜스젠더는 성경에 없는 성이라고 말하지 못하게 하는 역차별적 법입니다. 표현의 자유를 심각하게 침해하는 법입니다. 성경의 진리를 말하지 못하게 재갈을 물리는 법, 이 법이 통과되면 마귀가 얼마나 좋아할까요? 마귀의 간계가 숨어있는 법입니다. 22페이지 분량의 평등법안을 보면 이 사회전반에 영향을 주려는 의도가 매우 강합니다. 제9조를 읽어드리면 이렇습니다. “국가 및 지방자치단체는 이 법에 반하는(즉 평등법에 반하는) 기존의 법령, 조례와 규칙, 각종 제도 및 정책을 조사, 연구하여 이 법의 취지에 부합하도록 시정하여야 한다” 무슨 말입니까? 기존의 우리사회의 여러 법이나 제도도 이 평등법에 취지에 맞게 다 뜯어 고치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우리나라의 군형법에는 군에서 동성애를 인정하지 않고 처벌하는 법이 있는데 만약에 성적지향과 성별정체성에 따른 차별을 금하는 평등법이 통과되면 이 평등법의 취지에 맞게 군에서 동성애를 처벌하지 않도록 법을 개정해야 함을 말합니다. 또한 이 평등법이 통과되면 성적지향과 성별정체성에 따라 차별하지 않는 취지에 부합하도록 남자와 여자 사이의 결혼만 인정하는 현행 민법을 개정하여 동성간의 결혼도 인정하도록 바꿔야 한다는 것입니다. 남자와 남자, 여자와 여자가 부부가 되는 것을 법적으로 제도화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남자와 여자가 결혼하여 한 가정을 이루는 성경의 창조섭리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반성경적인 가족제도를 합법화하는 법안이 통과되면 마귀가 얼마나 좋아할까요? 우리는 이 포괄적차별금지법 혹은 평등법이 먼저 통과된 서구의 나라들에서 동성간의 결혼을 합법화된 안타까운 예들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가 그 세속화된 서구사회의 전철을 밟아서는 안되겠습니다. 평등법 13조에 보면 여러 이유로 인하여 모집과 채용 등에서 차별을 금지하는데 여기서 여러 이유에는 성적지향과 성별정체성이 포함됩니다. 예를 들면 기독교 기업이 직원을 채용할 때라든지 기독교학교에서 학생을 모집할 때에 동성애자나 트랜스젠더라는 이유로 채용이나 모집을 안 할 수 없게 됩니다. 심지어 교회에서 사역자를 뽑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차별금지법이 통과된 영국에서 2007년에 실제로 있었던 일입니다. 영국성공회의 청소년 사역자 포지션에 지원했다가 불합격한 성공회 사제가 자신이 불합격한 이유는 동성애자였었음을 밝힌 것 때문이었다고 소송을 진행했고 결국 영국 법원은 지원자의 손을 들어준 사건이 있었습니다. 교회가 사역자로 동성애자를 뽑지 않을 자유를 박탈당했다면 기독교 기업이나 기독교 학교의 자유가 침해되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평등법 25조에서는 보건의료 서비스를 제공할 때에도 성별 등을 이유로 차별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있는데 “성별 등을 이유로”라고 말하는 것은 성별 이외에 다양한 이유로 차별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물론 성적지향과 성별정체성이 포함됩니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크리스천 의사에게 성전환 수술을 의뢰했는데 이 의사가 자신의 신앙의 양심상 성전환 수술을 할 수 없다고 한다면 이는 보건의료서비스를 제공함에 있어서 차별한 것으로 간주되고 법적인 제재를 당하는 상황이 발생하게 됩니다. 또한 매우 우려되는 부분이 평등법 29조에서 말하는 교육내용에서의 차별금지입니다. 29조에 따르면 성적지향이나 성별정체성에 관련하여 동성애나 트랜스젠더를 반대하는 내용을 가르치지 못하게 됩니다. 유치원부터 초, 중, 고, 대학교 심지어 신학교에서도 동성애나 동성혼 트랜스젠더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가르칠 수 없게 됩니다. 서구사회에서 학생들에게 어릴 때부터 동성애와 트랜스젠더에 대해서 가르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차별금지법의 교육내용 차별금지 조항 때문입니다. 이는 교육내용에 대한 차별금지가 아니라 교육내용의 자유를 심각하게 침해하는 교육내용에 대한 독재법인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자녀들이 어릴 때부터 학교 공교육을 통해 동성애와 트랜스젠더에 대해서 선택 가능한 하나의 옵션으로 배운다고 생각을 해 보십시오. 생각만 해도 끔찍합니다. 이렇게 끔찍한 법을 통해 이 사회를 무너뜨리려는 것이 마귀의 간계입니다. 평등법에서는 이러한 법들이 실제적으로 잘 작동하기 위해 여러 가지 장치를 마련해 놓았습니다. 33조에 보면 앞에서 말한 차별의 예들에 대해서 그 차별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고소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제 3자인 그 사람을 아는 주위 사람들 고발할 수 있도록 문을 열어 놓았습니다. 또한 차별을 당했다라고 호소하는 피해자를 위해 나라에서 소송지원변호인단을 운영할 수 있다는 조항을 두어 동성애자들이 자신들이 차별을 당했다고 고소, 고발할 때 나라의 세금으로 변호인단의 지원을 받을 수 있게 하는 법까지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리고 차별을 당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어느 누가 차별했다고 고소할 때 고소를 당한 사람이 피해자가 피해를 받지 않았음을 입증해야 승소할 수 있게 해 놓았는데 이는 차별을 당했다고 호소하는 자가 승소하기에 매우 용이하게 한 부분입니다. 예를 들면 목사가 동성애와 트랜스젠더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설교한 것을 듣고 어떤 사람이 정신적인 고통을 받았다고 그 목사를 고소한다면 그 목사는 그 고소한 사람이 괴로움을 갖지 않았다는 것을 입증해야 하는데 그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또한 차별을 했다고 고소, 고발당한 사람이 손해배상액을 내야 하는데 36조를 보면 그 최소 손해배상액이 500만원으로 되어 있습니다. 적지 않은 손해배상액입니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유튜브에 올려진 동성애의 죄에 대한 설교를 듣고 자신이 정신적 고통을 받았다고 설교자를 고소하고 손해배상을 청구하여 법원에서 받아들여지면 그 설교자는 최소 5백만원의 손해배상액을 벌금으로 내야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소송이 집단소송으로 가면 그 액수가 어마어마하게 커집니다. 만약에 100명이 모여 집단으로 그 설교자에게 손해배상을 청구하여 받아들여지면 그 설교자는 5억의 손해배상금을 벌금으로 지불해야 합니다. 표현의 자유, 진리의 선포를 막는 이 평등법은 절대로 제정되어서는 안 되는 법입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평등법은 평등을 위한 법이 아니라 성적지향, 성별정체성과 관련하여 교회의 입에 재갈을 물리고 양심, 사상의 표현을 제한하고 이 사회를 더욱 세속화시키며 하나님의 창조섭리를 정면으로 거스르는 악법입니다. 사람들이 이 악한 법안을 만들었지만 그 뒤에는 마귀의 간계가 있고 그러므로 이 싸움은 영적인 전쟁입니다. 이제 발의된 평등법이 국회에서 통과되지 못하도록 기도해 주시고 주위에 평등법의 실체에 대해 모르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 악한 실체를 알려주셔서 많은 기독교인이건 기독교인이 아니건 이 표현과 신앙의 자유를 심각하게 침해하는 이 법에 실체를 알리시길 바랍니다. 이 법을 통과시키려는 진영에서는 평등법에 찬성여부를 묻는 여론조사를 이용하는데 많은 국민들은 평등법의 실체를 모른 채 이름만 듣고 좋은 법이라 생각하고 찬성한다고 답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표현과 신앙의 자유를 억압할 뿐만 아니라 이 사회의 건강한 질서를 무너뜨리고 우리 자녀들의 교육을 망가뜨리는 이 악법의 실체를 기독교인이건 아니건 상관없이 알려서 전 국민적으로 평등법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갖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서명과 같은 반대의견 표명에도 힘써야 할 것입니다. 이 마지막 때에 공중권세 잡은 마귀의 역사가 강하지만 하나님의 능력은 마귀의 간계를 능히 물리치실 수 있음을 믿으시고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시고 마귀를 대적하여 승리하는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목회
    • 설교
    2022-07-14
  • 기후위기 시대와 그리스도인의 삼중적 생태 전환
    기후위기 시대와 그리스도인의 삼중적 생태 전환 (본 소논문은 한 세미나에서 발표한 것인데 내용이 너무 시의적절해 파일을 받아 게재한 것입니다. 좋은 논문을 공유허락해준 윤 교수에게 감사합니다. 추후 교수들의 좋은 논문을 종종 게재할 계획입니다.) 지구상 모든 생명체의 생존과 관련된 기후변화는 기후학자나 정책결정자나 환경공학자만 관여할 문제가 아니라, 온 인류가 직면한 문제이다. IPCC가 발간한 일련의 보고서들을 포함한 여러 자료는 우리 시대가 기후변화가 초래할 총체적 재앙에 직면했음을 경고한다. 기후 위기 시대에 교회는 깨어진 창조세계를 치유하시는 하나님의 일에 참여하는 회복과 소망의 공동체로 거듭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생태적 인식전환을 도모해야 한다. 첫째, 그리스도인은 ‘인류세’나 ‘지속가능발전’과 같은 개념에 반영된 인간중심주의에 이의를 제기하고, 생태계와 역사 전체에 일어나는 일이 하나님의 주권에 달렸다는 기독교 섭리적 확신을 표명해야 한다. 기후변화에 대한 무관심이나 과민함 대신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기독교적 확신을 통해, 그리스도인은 위기의 시대에 깨어 있는 선지자로 설 수 있다. 둘째, 그리스도인은 기후위기가 초래할 양극화의 심화로 인해 소외당할 기후약자에 대한 제사장적 관심과 돌봄을 실천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생태적 약자를 존중하고 지탱하면서 동반자적 삶을 일구는 법을 터득하고, 자본주의적 욕망을 거스르는 기독교적 가치에 부합하는 공동체적 삶의 양식을 개발해야 한다. 셋째, 그리스도인은 기후위기 이면에 도사린 부정의와 불평등을 날카롭게 지적하며 의와 평강이라는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현실에 반영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우리는 자신을 자연과 세계에 대한 무한한 책임의식을 지닌 중보적 왕이자 하나님이 주인이신 세상에 잠시 머물면서 다른 손님들을 환대하는 나그네 왕으로 여겨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정의가 다양한 생명의 가치를 존중하고 하나님의 영광으로 향해 올바르게 번성해갈 수 있도록 활동하는 매개가 되어야 한다. 이러한 생태적 인식 전환을 통해서 그리스도인의 관심을 환기하고 기독교적 기후담론을 활성화하고 공동체적 운동을 일으키는 거룩한 생태적 선순환이 한국교회에서 일어나길 바란다. Ⅰ. 들어가는 말 블록버스터 재난 영화에서 CG로 그려진 천재지변이 뉴스 화면과 일상에 실제로 등장하는 일만큼 두려운 게 있을까? 그 공포의 전조와 같은 이상 기후 현상이 세계 각처에서 발생하면서 코로나 사태를 능가하는 불안감이 퍼지고 있다. 이제까지 지구온난화가 초래하는 기후변화는 직접적이고 현실적인 언어보다 모호하고 우화적인 언어 속에 있었다. 기후변화는 북극곰이나 펭귄, 산호초와 꿀벌의 생존을 위협할 뿐 사람 사는 세상과 무관한 것인 양 취급되었다. 애먼 북극곰이 지구온난화의 상징동물 역을 도맡은 것도 그런 탓이 크다. 하지만, 코로나19 사태로 전 세계가 몸살을 앓고 있는 사이 기후위기는 우화 속에서 현실로 뛰쳐나왔다. 우리는 이제껏 경험한 적 없는 이상기후 현상들이 고대 신화 속 괴물처럼 인간의 땅을 짓밟는 현실을 목격하고 있다. 호주 산불(2019-2020), 미국 서부 산불(2021), 중국 남부의 호우 사태(2020), 서유럽 홍수(2021), 시베리아와 캐나다의 고위도 지방에서 관측된 이상고온현상(2021), 초거대 모래폭풍과 황사(2021) 등 기상관측 이래 최초라는 재앙들이 잇달아 발생하고 있다. 바야흐로 기후재난의 시대가 도래하였다. 기후변화에 대한 우화적 어법은 어쩌면 인간이 지닌 언어의 불완전함 탓일 수 있다. 지구 생태계 전체가 얽힌 기후 현상을 제대로 이해해서 짚어낼 인간의 언어가 빈곤하고 초라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기후현상 자체가 인간의 사고와 인식을 훌쩍 넘어서다 보니 그것을 이해하기 위한 언어는 계속 흔들리며 변화했다. ‘지구온난화’(global warming)와 ‘기후변화’(climate change)라는 다분히 과학적이고 중립적인 용어는 ‘기후위기’(climate emergency)라는 절박한 용어로 바뀌더니, 이내 당혹감과 절망감이 완연한 ‘기후재앙’(climate disaster)이 되었다. 기후변화가 굶주린 북극곰이 민가의 쓰레기통을 뒤지는 영상을 TV 모니터 너머로 보던 사람들의 용어라면, 기후위기나 기후재앙은 북극곰을 덮친 비극에서 자신들도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실감한 사람들의 용어이다. 하지만 아직 인간은 ‘끓는 물속의 개구리 증후군’(The Boiled Frog Syndrome)1에 걸린 것처럼 기후변화에 절박한 위기의식을 못 느끼는 듯하다. 실감 나지 않는 위기에 적절한 대응이 뒤따를 리 만무하다. 그럼에도 용어의 변화는 인식의 변화를 가져왔다. 기후변화는 환경 전문가의 난해한 보고서를 벗어나 사회, 경제, 문화, 종교의 모든 영역에서 관심을 끌어내고 있다. 우화적 문법에 갇혔던 담론이 마침내 현실 문법으로 확장되고 있는 셈이다. 기후가 지구상 모든 생명체의 생존과 관련 있는 한, 기후위기 담론은 기후학자나 정책결정자나 환경공학자만 관여할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지구생태계 전체와 온 인류가 직면한 문제이기에 사회과학과 인문학과 신학과 일상의 대화가 덩달아 참여하는 담론장에 올릴 ‘모두의 화제(話題)’이다. 지금 당장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기후변화에 대한 최근의 분석과 예측을 공부하고 위기의 시대를 살아낼 담론과 실천을 고민해야 한다. 기후위기 시대에 교회와 신학은 무지한 공포나 탈속적 신비주의를 조장하기보다 기독교의 신념과 가치에 걸맞은 합리적 담론과 실천적 삶을 제시해야 한다. 이 글에서 논자는 한국교회에 기후위기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고 기후위기 시대를 대처하는 데 필요한 세 가지 생태적 전환을 촉구하고자 한다. Ⅱ. 현실이 된 기후위기 1. 「지구온난화 1.5℃」 특별보고서 지구온난화가 초래하는 기후변화가 중차대한 글로벌 의제로 부상한 것은 1970년대까지 거슬러 간다. 온실가스 배출로 인한 지구온난화 문제가 기후학자들의 입에 오르내리다가 1972년에 개최된 유엔인간환경회의(‘인류 환경에 관한 유엔 제1차 회의’, 일명 ‘스톡홀름 회의’)에서 처음으로 국제 회의에서 진지하게 다뤄졌다. 1979년에 제1차 세계기후회의가 개최되고 10여 년이 지난 1988년에 캐나다 토론토에서 개최된 ‘대기변화에 관한 세계회의’는 기후변화 방지를 위한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는 공동의 인식에 도달했다. 그 결과 유엔환경계획(UNEP)과 세계기상기구(WMO)가 공동으로 주관하는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간 협의체’(Intergovernmental Panel on Climate Change, IPCC)가 설립되었다. IPCC는 1990년부터 2013년까지 다섯 차례의 연구보고서를 발간하였고 2018년에 특별보고서를 작성하여 발표했다.2 오늘날 IPCC 보고서는 기후변화의 추이에 대한 분석과 예측에 관한 가장 과학적인 자료와 긴요한 통찰을 제공한다. IPCC가 1990년에 발간한 1차 보고서는 인간 활동으로 인한 대기 중 온실가스 농도의 급격한 증가로 지구 표면의 온도가 높아지면서 지구온난화를 일으킬 것이라고 예측했다. 1차 보고서의 충격으로 1992년에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열린 유엔환경개발회의(일명 ‘리우회의’)는 처음으로 현세대와 미래세대의 지속가능한 개발을 위해서 지구환경보존을 위한 세계협력의 기본원칙을 채택했고, 1994년에 세계 각국의 기후정책 발전에 결정적인 전환점을 마련한 ‘유엔기후변화협약’(UNFCCC)의 체결에 이르게 된다. 유엔기후변화협약은 각국의 온실가스 배출에 대한 강제성 있는 제약이나 법적 구속력이 없었고, 대신 시행령에 해당하는 의정서를 통해 의무적인 배출량의 제약을 시도했다. 1997년에 체결된 교토의정서(Kyoto Protocol, 정식 명칭은 ‘기후변화에 관한 국제연합 규약의 교토의정서’)는 이산화탄소를 비롯한 여섯 종류의 감축 대상 가스의 배출감소 목표를 지정하고, 2008년부터 2012년까지의 기간에 전체 선진국의 온실가스 배출량을 1990년 기준 5.2% 이하로 감축하는 목표를 제시하였다. 하지만 최다 온실가스 배출국인 미국, 중국, 인도는 협약에서 탈퇴함으로써 국제적 협의의 실효성을 무력화시켰다. 교토의정서 채택 이후에도 기후변화는 인간의 예측을 조롱하며 급격하게 진행되었다. IPCC의 1차 보고서와 2차 보고서는 인간의 활동이 기후변화에 영향을 끼칠 가능성을 입증하면서도 그 심각성을 부각하는 데에는 신중했다. 그럼에도 1차 보고서의 충격으로 리우회의가 열리고 유엔기후변화협약이 체결되었고 2차 보고서는 교토의정서에서 채택되는 성과를 거뒀다. 유엔 기후변화협약과 교토의정서의 채택이 실질적이고 획기적인 전환점을 마련하지 못하는 사이에 IPCC 보고서의 기조도 변했다. IPCC의 3차 보고서와 4차 보고서는 지구온난화와 인간 활동 사이에 분명한 연관성이 있으며 20세기 중반 이후 지구 평균 온도의 상승은 인위적인 온실가스 농도의 증가에서 기인했을 개연성이 매우 높다고 명시하고 인간의 활동이 이런 수준으로 지속되는 한 기후변화는 파국으로 치달을 것이라는 암울한 예측을 내놓았다. IPCC의 5차 보고서(2013)는 지구온난화가 인간의 개입으로 심화한 현상이며 지구온난화의 해결도 인간의 결단과 행동이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거의 단정적으로 내리는 것으로 그 임무를 종결했다. IPCC의 5차 보고서는 교토의정서를 대체하기 위해 2016년에 체결된 파리기후협약(Paris Climate Agreement)에서 채택되었다. 파리기후협약은 2020년 만료되는 교토의정서를 대체하여 2021년부터 적용될 기후변화 대응을 담았는데, 선진국에만 온실가스 감축의무를 부여했던 교토의정서와 달리 195개 당사국 모두에게 구속력 있는 전 지구적 기후 합의안으로 자리 잡았다. 파리협약은 최악의 기후변화 시나리오가 현실화하는 것을 막기 위해 지구의 평균 온도 상승이 1.5℃를 넘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3 2018년 10월에 인천에서 개최된 제48차 IPCC 총회에서 승인되고 채택된 「지구온난화 1.5℃」특별보고서는 충격 그 자체였다. 특별보고서는 현 추세대로 지구온난화가 진행된다면 10년마다 0.2℃씩 증가해서 2050년까지 지구 온도가 1.5℃ 상승하고 2100년에는 4℃ 이상 상승할 것이라고 예견했다. 설령 파리협약을 통해 국가별로 제시된 온실가스 감축 목표대로 진행된다고 할지라도 2100년까지 지구 평균 온도는 2.9℃∼3.4℃ 상승하게 될 것이며 이는 전 지구에 재앙으로 다가올 것으로 전망했다.4 특별보고서는 지구 평균 온도가 1.5℃ 상승하는 경우와 2℃ 상승하는 경우 지구생태계에 미치는 영향을 비교해서 제시하면서 2100년까지 전 지구 평균 온도 상승 폭을 1.5℃로 제한하지 않는다면 인류의 미래를 담보할 수 없다고 경고했다. 특별보고서는 단도직입적으로 대안을 제시한다. 파리기후협약이 대변하는 이전까지의 대응 방식으로는 ‘1.5℃ 제한’이라는 목표를 달성할 수 없으며, 지금보다 훨씬 더 신속하고 획기적인 대처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IPCC의 특별보고서는 2100년까지 지구 온도 4℃ 증가라는 끔찍한 종말 시나리오를 넌지시 보여줌으로써 안일하고 편향된 인식으로 현 상황에 안주하고 현실을 낙관적으로 외면해온 관행에 충격을 가했다. 2021년 8월 6일에 승인된 ‘IPCC 제6차 평가보고서 제1 실무그룹(과학적 기반) 보고서’는 앞서 특별보고서에서 제시했던 ‘지구 평균 기온 상승 1.5℃ 이하 제한’이 현실적으로 달성 불가능하다고 거의 단정적으로 전망한다.5 보고서는 온실가스 배출 추세가 현재와 같이 지속된다면 1.5℃ 상승하는 시점이 특별보고서가 예상했던 것보다 10년 앞당겨진 2021∼2040년이 될 것으로 예상한다. 이 보고서에서 IPCC는 온실가스 배출경로를 예측하는 5개의 시나리오를 제시하면서 온실가스 감축을 철저히 시행하는 최상의 시나리오로도 이 세기의 중반에 지구 기온이 산업화 이전보다 1.6℃에 이를 것으로 예상했다. 최악의 시나리오에 따르면 2100년까지 5.7℃까지 상승할 수 있다고도 보고서는 전망한다. IPCC의 보고서들은 한결같이 기후변화가 초래할 문제를 경고했다. 최근에 나온 두 보고서는 그런 위기가 예상보다 더 빠른 속도로 증폭되고 있으며, 인류가 위기를 앞두고 실효적으로 대처하지 못했음을 질책한다. 전 세계의 전문적 지성이 총동원돼서 작성한 IPCC의 보고서 논조를 반박하거나 부정하는 신뢰할 만한 연구는, 안타깝게도 발견하기 힘들다. 2. 전례 없는 수준의 거대한 재앙 IPCC의 보고서에는 과학적 도표와 그래프들이 가득하다. 그것들은 세상에 기후변화의 실상을 알리는 데 북극곰보다 효과적이지 않아 보인다. 기후변화를 도표와 그래프로 표현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기후라는 문제가 티모시모턴(Timothy Morton)이 ‘하이퍼오브젝트’(hyperobject)6라고 명명한 초거대 실체이기 때문이다. 기후변화는 ‘행성 단위의 공간’과 ‘문명을 넘어서는 시간’ 동안 광범위하고 복잡한 변수들이 얽혀서 발생하기에 인간의 지성이 인과관계를 완벽하게 파악하기 힘들다. 그뿐만 아니라 기후변화는 일상과 건강, 식량과 식수, 산업과 에너지, 고용과 경제, 정치와 경제 등 모든 인간의 삶에 광범위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인간의 행동이나 체제가 제어할 수도 없다. 1784년 아이슬란드의 라키 화산이 폭발하며 분출한 엄청난 화산재로 인해 유럽 지역 온도가 상승하고 각종 질병과 기근과 흉작이 발생하면서 결국 불안해진 유럽 사회에 혁명의 불길이 일어났는데,7 화산폭발과 프랑스 혁명 사이의 인과관계는 당시에 예측하거나 분석하기 불가능했다. 오늘날이라고 별반 다르지 않다. 기후위기에 대한 인간의 인지가 부조화하는 이유는 거대함뿐만 복잡함 탓도 크다. 기후와 같이 거대한 생물학적 체계는 수많은 상호작용이 파악 불가능한 구조로 얽혀있는 ‘피드백 고리’(feedback loop)를 형성한다. 피드백 고리 안에서 개별 현상은 다른 현상을 유발할 뿐만 아니라 시스템 자체에도 영향을 미친다. 다시 말해서 하나의 기상현상이 다른 현상을 촉진하거나 억제할 뿐만 아니라, 기후변화에 대한 인간의 대처가 되먹임을 일으켜 기후 시스템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 피드백 고리 안에서 기후변화는 사회갈등, 경제 불평등 심화, 에너지 위기, 전쟁과 폭동의 위협, 난민 문제, 패권 갈등과 정치지형의 변화, 전염병 대유행, 세계 경제 체제의 변화 등 모든 문제에 작용하고, 이에 대처한 인간의 반작용은 다시 불가해한 연쇄작용을 거쳐 전 세계 기후 시스템에 영향을 미친다.8 복잡다단한 피드백 고리는 기후위기 담론이 특정 전문분야가 독점하는 사안일 수 없다는 사실을 환기해준다. 기후위기를 논하는 담론 테이블에는 거의 모든 문제가 놓인다. 국가 간의 협력을 통한 글로벌 시스템의 개선, 선제 대응의 중요성, 시민사회와 개인의 자발적 협력, 외부적 충격에 대비한 사회적 공공 시스템의 필요성, 탄소제로 관련 기술의 개발, 미디어의 신속하고 정확한 정보 제공, 기후위기 리스크에 대한 정부와 기업의 대처 능력 들은 수많은 층위와 연관을 이루는 논의 중 가장 표면에 드러난 것일 뿐이다. 무엇보다도, 기후변화와 관련해 하이퍼오브젝트나 복잡다단한 피드백 고리 개념은 여러 기후 현상들이 점진적으로 변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작용을 통해 순식간에 임계점(tipping point)에 다다르고 급격한 충격을 가해서 시스템 전체의 붕괴를 가져올 수 있고, 우리는 그런 과정이나 시점을 제대로 예측하기 힘들다는 비관적인 사실을 말해준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기후변화에 대해서는 우리는 간헐적으로 혹은 국지적으로 발현되는 현상을 보면서 뭔가 일어나고 있다는 표면적 징후만 감지할 뿐 그 이면에서 정확히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 하지만, 임계점에 근접할수록 기후재앙은 부정할 수 없게끔 ‘감춰진 미래’에서 ‘드러난 현실’로 우리 앞에 펼쳐질 것이다. 뉴욕매거진의 칼럼니스트인 데이비드 월러스 웰즈(David Wallace-Wells)는 ª2050거주불능지구4(The Uninhabitable Earth)에서 전례가 없는 ‘대량 학살’로 현실화할 기후재난 시나리오를 생생한 필치로 그려준다. 월러스 웰즈는 기후변화에 대한 최근의 연구자료와 통계를 근거로 기후재난 시대의 시나리오를 12가지 항목으로 나눠서 다음과 같이 제시했다.9 ① 살인적인 폭염: 여름 최고기온이 평균 35℃ 이상인 도시가 현재 354개에서 2050년까지 970개로 증가하고, 2100년까지 세계 인구 2분의 1 혹은 4분의 3이 극심한 폭염에 노출되어 온열질환에 시달리게 될 것이다. ② 빈곤과 굶주림: 지구 온도가 1℃ 상승할 때마다 전 세계 곡물 수확량은 10% 감소하는데 4℃ 상승한다면 절반으로 감소한다. 파리기후협약의 목표대로 진행되더라도 2050년경 개발도상국 거주 국민 중 1억 5천만 명이 단백질 부족 상태에 처하는 등 세계는 식량부족 사태에 처하게 될 것이다. ③ 집어삼키는 바다: 파리기후협약의 1.5℃ 상승 목표가 달성되더라도 해수면은 최대 1.8m까지 상승하고 홍수피해는 160∼240% 증가하게 된다. 지구 온도가 4℃ 상승하는 경우 해수면은 최대 2.4m까지 상승하고 대부분의 해안 도시가 물에 잠기면서 세계 지형이 바뀌게 될 것이다. ④ 치솟는 산불: 화염 폭풍 수준의 전례 없는 대형 산불이 지구 곳곳에서 연중 수시로 발생할 것이다. 특히 그린란드나 러시아, 스칸디나비아 등 북극권 화재가 잦아질 것이다. 대형 산불은 이산화탄소 증가와 기온 상승, 산림의 메탄흡수 능력 저하, 해충 확산으로 인한 질병 확산 등 연쇄작용을 일으킬 것이다. ⑤ ‘날씨’가 되어버릴 재난들: 슈퍼 태풍, 대규모 폭우와 홍수, 뇌우 등 생각하지 못한 특수재난이 훨씬 자주 일어나 완전히 새로운 범주의 재난으로 일상적인 날씨처럼 닥칠 것이다. 이로 인해 재난으로부터 재건하고 회복하는 데 필요한 비용과 시간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할 것이다. ⑥ 갈증과 가뭄: 물부족 상황이 심화하고, 담수호와 대수층(지구 지표 아래의 지하수 저장고)의 수량이 고갈될 것이다. 기후변화의 연쇄작용을 물효율성이 저하되면서 수자원을 둘러싼 갈등이 고조될 것이다.10 ⑦ 사체가 쌓이는 바다: 인간이 배출하는 탄소량의 4분의 1 이상을 흡수한 바다의 해양 산성화가 심각하게 악화하고, 전 세계 해양생물 4분의 1을 지탱하는 산호초가 백화 현상으로 파괴될 것이다. 해안 도시는 악취로 뒤덮이고 해양 무산소화로 인해 해양생물 멸종과 어장 파괴가 연 쇄적으로 일어날 것이다. 무엇보다도 해류가 변화하면서 바다 순환 시스템이 붕괴되는 징조가 현저해질 것이다. ⑧ 마실 수 없는 공기: 대기 중 이산화탄소 농도 증가로 어린이의 정신질환 가능성과 성인의 치매 가능성이 가파르게 상승할 것이다. 사막화로 인해 미세먼지가 증가하면서 호흡기 질환 감염률이 비약적으로 상승하게 된다. ⑨ 질병의 전파: 일종의 기후 장부와 같은 영구 동토층이 녹으면서 미지의 박테리아 유출 가능성이 고조되고, 황열병이나 말라리아 발병지역이 이동하면서 전염병의 세계화가 진행될 것이다. ⑩ 무너지는 경제: 화석연료의 힘으로 일으킨 경제성장은 기후변화로 인해 신기루처럼 흩어질 것이다. 현 추세대로 탄소 배출량을 유지한다면 남아시아 국민 8억 명의 생활수준이 급격하게 떨어지게 될 것이다. 기후변화가 전 세계에 초래하는 경제적 손실로 대공황을 넘어서는 경제 대몰락을 겪게 될 것이다. 기후변화는 세계가 지금까지 이뤄놓은 기술혁신의 영향을 현저하게 줄이거나 완전히 상쇄할 것이다. ⑪ 기후분쟁: 메콩강을 둘러싼 중국과 인도차이나반도 국가 사이의 분쟁에서 보이는 것처럼 국가 간의 자원 전쟁 위협이 고조될 것이다. 가정폭력이 늘고 범죄율이 증가하는 등 개인 간의 분노와 폭력도 심화할 것이다. ⑫ 시스템의 붕괴: 기후변화는 후진적 체제 국가나 빈곤국에 치명타를 가하면서 2050년까지 2억 명에서 최대 10억 명까지 기후난민을 발생시킬 것이다. 자본주의 시장이 붕괴하고 부유한 나라와 사람들이 재화와 서비스를 독점하게 될 것이다. 사회 시스템뿐만 아니라 몸의 시스템과 정신의 시스템도 붕괴될 것이다. IPCC 보고서의 차분한 과학적 분석에 비해 월러스 웰즈의 시나리오는 극적으로 과장된 것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유엔환경계획(UNEP)이 발표한 ‘2020년도 배출량 격차보고서’(Emission Gap Report 2020)는 현재 추세대로라면 2100년 이전에 지구 온도가 3.2℃ 상승하리라 예측함으로써11 웰즈의 시나리오가 허황한 것이 아님을 ‘과학적으로’ 뒷받침했다. 이미 세계는 지구 평균 온도가 산업혁명 시기보다 1℃ 상승한 2017년부터 이상기후 현상이 빈번하게 나타나고 있다. 50도에 육박한 북미의 폭염, 중국을 강타한 폭우, 중동지역의 가뭄, 시베리아의 이상고온현상, 호주와 미국서부, 터키와 그리스를 강타한 초대형 산불 등 기상이변이 속출하자, 전 세계 과학자 1만 3800여명이 바이오사이언스에 공동 성명문을 내고 “[기후변화가] 지구 시스템의 중요한 부분과 관련한 임계점에 점점 가까워지거나 이미 넘어섰다는 증거들이 늘어나고 있다”라며 세계 각국 정부에 조속한 대응을 촉구하기도 했다.12 기후 비상 선언처럼 읽히는 성명서에서 객관적인 중립성을 금과옥조로 여기는 과학자들조차 위기의식을 가감 없이 드러낸다는 것은 그만큼 사태가 절박함을 방증한다. 지난 수십 년 동안 기후학자들은 ‘탄광 속 카나리아’와 같은 신세였다. 기후위기론은 조작된 공포나 강박적인 위기 조장이라는 지탄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기후학자들의 경고는 인위적인 기후재앙론에 불과하고 막연한 공포심을 자극해서 이익을 취하는 세력이 있다는 반대론자의 목소리도 만만치 않았다. 지구온난화가 인간 활동의 결과라기보다 지극히 자연적인 현상이며 인류는 이제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변하는 기후조건에 적응할 수 있다는 기후회의론자들이 오히려 사람들의 정서적 지지와 호응을 받았다.13 하지만, 불과 몇 년 사이에 기후붕괴를 경고하는 카나리아의 울음소리가 시끄러울 정도로 늘어났다. 기후위기론을 불편해하던 사람들도 전 세계에서 속출하는 이상기후에 당혹해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기후위기에 대해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급격한 기상현상이 신학적 사유의 동기로 작용하고 종교적 관습의 변화를 불러왔다는 볼프강 베링어의 문명사적 통찰에 귀기울 필요가 있다. 베링어에 따르면, 17세기 소빙하기의 유럽에서 극단적인 기상이변이 발생하고 흉작과 전염병, 폭동과 전쟁이 빈번했을 때, 독일 지역에서 죽음의 예술(아르스 모리엔디, Ars Moriendi)이 유행하고 불안한 사회를 통제하려는 강압적인 법률이 쏟아졌으며, 도덕적 절제를 강조하거나 세속적 삶을 극단적으로 부정하고 유대인 박해나 마녀사냥으로 희생양을 찾는 종교적 광신주의가 등장했다.14 17세기가 지나면서 종교적 사유와 체제가 이상기후가 일으킨 사회적 문제와 국가적 위기를 해결하는 데 무력함을 노출했을 때, 서구사회에서 “사유의 세속화”와 “세계의 탈주술화”가 일어나서 사제와 신학자와 연금술사와 점성술가가 독점했던 담론 주도권이 국가관료와 과학자에게 넘어갔다.15 21세기 인류에게 닥친 기후위기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 거대한 위기는 교회와 그리스도인에게 역사상 유례가 없는 도전을 던지며 새로운 담론과 실천의 대전환을 요구할 것이다. Ⅲ. 그리스도인의 삼중적 생태 전환 1. 하나님의 섭리를 확신하며 깨어 있는 선지자 기후위기 앞에서 사람들은 무관심과 과민함의 극단 사이에서 다양한 반응을 보일 수 있다. 어떤 이들은 과거와 달리 현재 인류가 이룩한 과학기술로 기후변화에 충분히 대처할 수 있다며 애써 낙관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현재의 과학기술이 임박한 기후재난을 해결할 수준으 로 급격하게 발전할 가능성에 회의적이다. 200년 동안 인류의 발전을 이끈 화석연료 중심의 에너지 시스템을 청정에너지 기술로 대체하는 데 얼마나 오랜 시간과 비용이 들지 예측하기조차 힘들다. 인류가 이룬 최첨단 과학기술로도 기후재앙을 통제할 수 없다는 사실이 명확해질 때, 개인과 공동체는 심리적인 아노미 상태를 일으킬 수 있다. 기후위기로 인해 글로벌 경제 시스템이 요동치면서 역사상 가장 풍요로운 시대가 급격히 물러가고 궁핍과 혼돈의 시대가 닥친다면, 편안함에 익숙했던 사회와 개인은 패닉상태에 빠질 것이다. 과민한 두려움 못지않게 강력한 심리적 방어기제는 정서적 무관심과 현실도피이다. 천적이 쫓아오는 위기 상황에서 땅에 머리를 묻고 꼼짝하지 않는 타조처럼, 기후위기의 현실을 외면하고 기술적 판타지나 종교적 판타지로 도피하려는 경향이 얼마든지 나타날 수 있다. 거주가능한 지구형 행성으로 이주를 꿈꾼다거나, 생물학적 조건을 탈피하여 가상현실과 사이버 라이프로의 디지털 전환을 꿈꾸는 포스트휴머니즘이 그런 예이다.16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 하나님의 섭리와 구원을 확신한 나머지 기후위기 문제에 둔감하거나 낙관적인 태도를 가질 수 도 있다. 하지만, 참된 기독교 신앙은 현실과 동떨어진 신비주의로 도피하거나 윤리적 책임성과 사회적 신뢰에 둔감하지 않다. 그리스도인은 기후재앙이 현실로 닥칠 수 있다는 최악의 시나리오를 현실적으로 고려해야 한다. 그러면서도 그리스도인의 시선은 기후변화가 초래할 재앙과 같은 현실의 참혹함에만 고착되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기후위기와 그것이 초래할 총체적 위기 속에서 그리스도인은 기후위기 담론에 뛰어들어 인간중심의 사고에 이의를 제기하고 기후변화를 포함하여 생태계와 역사전체에 일어나는 일에 대한 섭리적 관점과 해석을 제시함으로써 선지자적 소명을 감당해야 한다. 첫째, 기독교 섭리적 관점으로 기후문제를 대한다는 것은 뿌리 깊은 인간 중심적 사고로부터 하나님 중심적 사고로 전환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조영호가 지적하듯, 기후변화는 인간이 일군 문명과 진보의 부산물이기 때문에 인간의 문제이다.17 기후변화에 인간 활동이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친 것인지 정확하게 측정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지구온난화가 인간이 개입된 현상이라는 사실을 부인하긴 힘들다. 어떤 이들은 기후변화가 지구와 인류의 긴 역사 속에서 소위 ‘인류세’(Anthropocene)18에 해당하는 현상이라고까지 말한다. 하지만, 이런 인식이 인간의 무분별한 발전과 자본주의적 욕망이 기후위기를 불러왔다는 자각과 반성을 넘어서, 기후 문제를 인간 스스로 해결해야 하고 또한 해결할 수 있다는 신념으로 이어 진다면 중독을 일으킨 독(毒)으로 해독(解毒)도 하겠다는 무모함이 될 뿐이다. 기후위기를 초래한 인간중심주의라는 거짓 신화는 자본주의 시스템이라는 화로에 인간의 이기심과 욕망의 불씨를 담아둔 채 기후변화를 해결하겠다는 난센스를 재생산해내고 있다. 기후 담론에서 자주 등장하는 ‘지속가능발전’(sustainable development)이란 개념은 기후변화를 바라보는 인간중심적 사고뿐만 아니라 성장과 기득권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자본주의의 탐욕스런 욕망을 고스란히 반영한다. 지속가능발전이란 “현재 세대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미래 세대가 사용할 경제, 사회, 환경 등의 자원을 낭비하거나 여건을 저하시키지 않고 서로 조화와 균형을 이루는” “지속가능성에 기초하여 경제의 성장, 사회의 안정과 통합 및 환경의 보전이 균형을 이루는 발전”을 뜻한다.19 지속가능발전의 사고 틀에서 기후변화와 생태위기는 자본주의적 성장이란 대의의 부수적 문제(collateral damage)에 불과하다. 앞서 살펴본 IPCC의 보고서들은 지속가능발전이 허상이라고 지적한다. 현세대의 필요와 욕구를 충족시키되 미래세대가 사용할 자원을 낭비하지 않는, ‘닭을 잡아먹고도 달걀을 계속 얻을 수 있는’ 신기한 마법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러시아 룰렛 게임’이나 ‘시한폭탄 돌리기’에 빗대는 기후변화를 대처하는 데에 ‘지속가능발전’이란 개념은 사안의 본질을 흐려놓을 뿐이다. 그리스도인은 이러한 인간중심주의에 제동을 걸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목소리가 될 수 있다. 둘째, 그리스도인은 기독교적 기후담론을 통해 기후위기가 인간의 문제이기 이전에 창조와 구속의 역사를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의 과정이라는 확신을 표명해야 한다. 진화론적 인본주의 관점에서 기후는 자연적인 초거대물(natural hyperobject)이지만, 기독교적 관점에서는 신적 초거대물(divine hyperobject)이다. 인간과 인간의 활동이 기후변화의 과정과 결과에 영향을 미칠지라도,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와 구속의 역사를 뛰어넘거나 거스를 수 없다. 어떤 사건이든지, 그것이 설령 재난과 재앙일지라도, 그 일을 통해 하나님은 자신의 왕 되심과 거룩하심과 언약과 사랑을 드러내실 것이다.20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확신을 바탕으로,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막연한 두려움이나 무책임한 무관심이 아닌 ‘현실을 직시하는 '선지자적 경각심’ 으로 기후위기 시대를 대비해야 한다. 교회는 위기와 혼란의 시대마다 곰팡이처럼 퍼졌던 컬트적 사고와 사이비 종말론이 세상을 어지럽히지 않도록 깨어 있어야 한다. 기후위기시대에 기독교적 담론과 실천은 개인과 사회, 신학과 인문학, 독립과 연대, 저항과 공조의 다양한 방식으로 모색될 테지만, 가장 근본적인 정서와 태도에 있어서 ‘두려움으로부터 섭리적 확신으로의 전환’, ‘인간중심적 오만으로부터 선지자적 경각심으로의 전환’이 전제되어야 한다. 2. 자연과 약자를 돌아보는 제사장 인류가 직면한 기후위기 해결이 어려운 까닭은 위기가 자본주의 시스템 자체로부터 기인해서 문명 자체를 포함한 생태계 전체로 퍼졌기 때문이다. 자본주의가 초래한 사회적, 생태적 위기의 대안으로 거론되는 생태친화적 소비, 그린뉴딜 정책, 저탄소녹색경영 등의 신자유주의적 생존전략은 자연과 노동에서 이윤을 추출하는 자본주의의 생리를 벗어날 수 없다는 한계를 지닌다. ‘녹색’ 자본주의니 ‘지속가능한’ 자본주의니 하는 환경친화적 명명만으로 자본주의의 한계를 극복하고 시스템 자체를 바꿀 수없다.21 그런 탓에 기후 전문가들과 환경학자들과 과학자들은 글로벌 체계 전체가 대전환을 맞이하지 않는 한 소용돌이와 같은 기후재앙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을 막을 수 없다고 말한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인간의 활동이 극단적으로 제약될수록 지구의 환경이 개선되는 ‘코로나의 역설’은 기후위기 해결의 딜레마를 극명하게 보여준다.22 지구온난화의 심각성을 경고하는 각계의 외침에도 지지부진했던 각국의 온실가스 감축은 코로나19 사태가 터지고 전 세계가 셧다운 상태에 돌입했을 때 일시적으로 극적인 진전을 보였다. 세계의 공장이라고 불리는 중국의 경제활동이 거의 정지되자 전 세계 탄소배출량이 25% 이상 감소했고, 인도의 수질개선으로 멸종위기종이었던 갠지스강 돌고래가 발견되고, 관광객의 급감으로 최악으로 치닫던 베네치아의 수질이 개선되는 등 세계 곳곳에서 자연의 회복이 관측되었다.23 코로나의 역설은 기후위기의 어두운 부분과 밝은 부분을 동시에 노출했다. 한편으로, 코로나 바이러스의 창궐은 인간의 무분별한 발전으로 생물 다양성이 파괴된 결과로 일어난 사건이라는 점에서 기후변화의 어두운 면이다. 다른 한편으로, 코로나 사태는 전 세계 정부와 산업과 의료와 과학이 일사불란하게 협력하여 공동의 위기에 대처할 수 있음을 보여줬다는 점에서 기후위기 극복의 가능성과 희망을 품게 한다. 하지만 낙관적인 전망은 시기상조이다. 전염병 대유행은 기후변화가 불러올 재앙들 중 하나에 불과하다. 글로벌 시스템이 붕괴할 임계점에 이르면 보호무역주의와 자급자족경제를 강화하는 등 자국 우선주의가 팽배해지고 글로벌 협력의 유대는 쉽게 와해될 가능성이 크다. 코로나19 대유행에서 몇몇 선진국이 백신을 확보하기 위해 보여준 치졸한 행태는 자국중심주의와 국가 이기주의가 얼마나 강력한 집단본능인지 다시 한 번 확인해줬다. 인류가 기후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지속가능한 탈탄소사회로의 급격한 변침의 모멘텀을 조속하게 마련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24 오히려 기후위기는 부정의와 불평으로 인한 양극화를 심화시키면서 우리 사회의 폐부를 깊이 찌를 것이다. 재난은 보편적으로 닥치지만, 그 영향은 차별적으로 미친다. 기후재난 앞에서 가장 치명적인 이들은 사회적 약자이다. 미국의 사회학자 에릭 클라이넨버그(Eric Klinenberg)는 1995년 미국 시카고를 덮친 폭염 사태에서 1인 가구, 노인, 빈곤층, 노숙자 등 사회에서 버림받은 취약계층이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사실에 주목했다.25 클라이넨버그는 폭염과 같은 기상 참변이 불가항력의 자연현상이지만 연령, 성별, 인종, 경제력, 거주지역 등 다양한 사회적, 정치적 요인과 결합하여 ‘총체적인 사회적 사실’26로 나타난다고 통찰했다. IPCC의 4차 보고서도 역시 기후변화의 일차적 희생자가 빈곤국가, 빈곤계층, 어린이와 여성, 일용직과 비정규직 육체노동자, 장애인과 경제적 소외 계층이 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기후위기 시대에 사회적 약자는 곧바로 생태적 약자로 직결되는 셈이다. 기후재앙이 심화하여 수많은 기후빈민과 기후난민이 쏟아져 나올 때 사회와 국가의 대처와 별도로, 교회의 제사장적 돌봄이 어느 때보다 절실하게 필요할 것이다.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기후위기 시대에 자본주의의 내재적 한계로 인해 더 크게 고통받을 기후 약자를 돌봐야 한다. 교회는 근시안적이고 무책임한 자기성장과 물질적 풍요만을 추구하는 자본주의 체제가 보지 못하는 약자들을 찾아야 한다. 세상의 체계 안에 있지만 거기에 속하지 않는 ‘중보적 위치’에 선 교회는 사회와 제도에서 소외당하는 기후 약자를 찾아서 그들의 영적, 심리적, 물질적 어려움을 돌 봐야 한다. 더 나아가 기후위기로 인해 급격하게 그 수요가 폭증할 것으로 예상되는 기후난민에 대한 기독교적 섬김과 선교의 방안을 지금부터 고민하고 대비할 필요가 있다.27 기후위기 시대에 교회는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를 확신하면서도, 영성과 경건의 능력을 발휘하여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제사장적 삶에 힘써야 한다. 자연과 타인(특히 사회적 약자)에 대해서 존중과 섬김의 자세로 서로 지탱하고 반영하고 치유하며 동반자적 관계성을 맺는 삶의 기술을 연마함으로써 기독교적 생태 윤리를 실천해야 한다. 이는 단순히 친환경적 생활방식에 관한 것이 아니라 더 근본적으로 자본주의의 욕망을 제어하지 못하는 삶의 양식과 결별하고 기독교의 가치에 부합하는 삶의 양식을 개발하는 노력으로 이어질 필요가 있다. 더 나아가 자연과 타인과 약자에 대한 제사장적 중보 윤리는 개인, 사회, 국가를 아우르는 전방위적 차원에서 구조적 형성과 공동체적 참여를 도모해야 한다. 개인 윤리의 차원에서 절약과 재활용을 실천하는 친환경적 생활을 습관화하도록 서로 독려하는 한편, 기후변화에 관한 진실을 공유하는 환경세미나를 열고 환경운동단체의 캠페인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며 환경단체들끼리의 연대와 협력을 강화해야 한다.28 더 나아가 환경입법을 지지하는 국민청원 등을 통해 정치적 결단을 촉구하고 국민적 여론을 형성해야 한다.29 3. 하나님 나라의 정의를 갈구하는 순례자 왕 기후변화는 세속주의와 자본주의, 관료주의와 산업화를 통해 세계를 재편한 현대성이 지닌 탐욕과 폭력이 전 지구적 파괴로 귀결된다는 폭로이고 징후이다. 현대성이 자연과 환경에 가장 적대적 파괴를 일으킴에도 불구하고, 현대인은 인간의 횡포와 무차별적 파괴를 정죄할 수 있는 악과 불의의 개념을 고려하지 않는다. 탄소배출권을 거래하듯 분배하는 유엔기후협약에 정의와 평등과 인권에 대한 윤리적 고려가 결여되었다는 비판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 기후정의네트워크가 “유엔 기후 변화협약의 원칙인 공동의 차별화된 책임, 세대 간 형평성, 오염자 부담은 시장 메커니즘을 위해 훼손됐다”라고 지적하는 것 역시 ‘정의’의 관점에서 기후변화의 인식과 해결에 접근해야 한다는 촉구이다.30 기후정의는 기후위기의 이면이자 어쩌면 더 본질적인 측면이다.31 기후위기는 '정의의 부재'라는 세상의 민낯을 점점 더 드러내고 있다. 오늘날 글로벌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불의와 불평등은 이익창출의 유일하고 정당화된 방식이다. 막대한 화석연료를 소비하며 엄청난 양의 온실가스를 배출하는 국가들은 지구상에서 가장 부강한 국가들이다. 그들은 제삼 세계의 자원과 노동력 그리고 미래세대의 생존에 필요한 자원을 희생시켜 자신들의 욕구를 충족해왔다. 기후변화가 초래할 사회경제적 비용은 수익자 부담의 원칙을 따르지 않는다. 부정의하고 불평등한 자원과 이익의 분배 양상이 부담과 위험의 재분배에서 그대로 재현된다. 선진국들이 챙긴 이익에 대한 비용이 개발도상국과 빈곤국가에게 청구되는 것이다. 남반구의 가난한 국가들, 재난에 대한 완충시스템이 미비한 사회, 신에너지 친환경 정책을 수행할 기술과 자본을 갖추지 못한 저개발국, 기후변화에 대응할 수 없는 약소국가들의 가난하고 소외된 국민들이 기후변화의 혹독한 대가를 치를 것이다. 미국이나 중국 등 지구상에서 가장 강력한 국력을 지닌 나라가 기후변화에 적절하게 대응하지 않아 발생한 어마어마한 환경비용이 미래의 모든 인류에게 고스란히 부과된다.32 ‘정의의 부재’로 사람들이 통곡하는 기후위기 시대에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나라의 가치와 방식을 어떻게 드러내고 실현할 것인지 도전받는다. 하나님 나라 서사는 현실도피를 위한 방어기제가 아니다. 하나님 나라를 추구한다는 것은 역사적 삶으로부터 이탈하거나 탈속적이고 신비적 이상주의로 현실을 각색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하나님 나라를 향한 희구는 세상과는 다른 시선으로 역사와 현재를 통찰하고 현실을 위협하는 위기를 극복할 대안적 삶과 대안적 공동체를 일구려는 강력한 의지의 발현이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전초기지로 세상 가운데 서서 의와 평강과 희락의 가치를 다양하고 풍부한 방식으로 구체화하는 삶을 통해 창조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선한 통치에 참여한다는 사실을 선명히 드러내야 한다. 기후위기는 기독교의 본질을 되물으며 그 존재 이유를 위협할 수 있다.33 하지만 기후위기는 복음의 복됨과 교회의 교회다움이 가장 선명하게 드러날 수 있는 상황이다.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재앙과 같은 현실 속에서 인간의 고귀함과 품격을 지키며 서로 섬기고 사랑하며 사는 종말론적 삶의 비법을 나타내 보여야 한다. 교회가 드러내야 하는 삶의 방식은 종말을 사는 나그네 왕의 행보이다. 그리스도인은 이 땅에서 이뤄지는 창조와 구속의 역사에서 하나님이 모든 이야기의 저자이시고 주인이시고 우리는 나그네와 객으로 머물다가 떠나간다고 믿는다. 나그네 된 우리는 다른 피조물을 동일한 손님과 객 으로 겸손과 존중으로 환대하며, 이후에 머물 이들을 유념하고 섬겨야 한다. 종말론적 나그네는 순례자 왕이기도 하다. 자연과 세계에 대한 무한한 책임의식을 지닌 중보적 왕으로서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심부를 좀먹는 불의와 불평등을 외면하지 않는다.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하늘의 의 를 사모하는 만큼 이 땅의 ‘정의’에 민감하고 불의로 고통받는 약자를 잊지 않는다. 정의가 없이는 다양한 생명들의 가치가 존중받으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향해 번성해갈 수 없다. 그리스도인은 정부와 기업의 전문가적 관료주의에게만 맡겨둘 수 없는 기후위기 극복에 하나님 나라의 힘이 필요하다고 믿고, 세상의 불의를 해소하는 정의와 해방의 구속을 구해야 한다. Ⅳ. 나오는 말 기후위기는 우리 시대에 종말의 아포칼립시스처럼 어둡고 우울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예견된 위기는 도래하지 않는다고들 말한다. 비관적 전망이 그대로 실현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 쏟아져나오는 재난 시나리오의 극히 일부만 실현될지라도 인간의 삶은 예전과 같을 수 없게 된다. 기후위기는 실현되지 않을 가능성을 꼽아보는 자위적 외면으로 버틸 문제가 아니다. 하루라도 빨리 현실을 인식하고 머리를 맞대고 대응을 고민해야 한다. 인식이 전환되어야 관심을 일으키고 담론이 펼쳐지고 대안적 운동을 지속할 수 있다. 전례가 없는 수준의 위기 예고 앞에서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여기서 언급한 세 가지 인식과 삶의 전환을 통해서 이전과 전혀 다른 삶의 방식을 일굴 준비를 해야 한다. 즉, 시대의 광기에 휩싸이지 않고 하나님의 섭리적 주권을 확신하는 선지자적 경각심을 통해서, 기후약자들을 향한 제사장적 돌봄과 동반자적 유대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정의를 갈구하며 기후 부정의에 맞서는 나그네 왕의 결단을 통해서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그야말로 회개와 같은 수준의 생태적 전환을 꾀해야한다.34 기후재앙 혹은 기후붕괴의 총체적 위기 상황에서 교회는 하나님의 창조세계가 인간의 탐욕과 폭력으로 멍들고 무너져가는 현실을 애통해하고 거룩한 분노와 애절한 슬픔을 표출해야 한다. 하지만, 교회는 종말론적 경고를 남발하며 두려움의 연기를 피우는 컬트 집단으로서가 아니라 자연과 세상에 대한 무한한 책임감과 소명의식을 품고 깨어진 창조세계에 희년과 같은 치유와 재생의 역사를 일으키시는 하나님의 일에 참여하는 회복과 소망의 공동체로 거듭나야 한다. ---------------------------- 1. 미국 코넬대의 비이커 실험에서, 펄펄 끓는 뜨거운 물에 집어넣은 개구리는 곧바로 뛰쳐나오지만, 서서히 데워지는 물속에 넣은 개구리는 체온을 조절해가면서 머물다가 결국 죽음에 이르렀다는 데에서 유래한 용어이다. 여기서 착안하여 작가 올리비에 클레르크(Olivier Clerc)가 점진적으로 증폭되는 위기를 즉각적으로 인지하거나 적절하게 반응하지 못한 채 나쁜 상황을 맹목적으로 견디는 삶을 가리켜 ‘끓는 물 속의 개구리 증후군’이라고 불렀다. 2. 1차 보고서부터 5차 보고서까지 중요한 내용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자료로, 송재민, “기후변화 과학 및 국제 정책에 대한 고찰: 한계와 대안,” 「신학과철학」 29 (2016), 229를 참고하라. 3. 파리기후변화협정에 대해 간단하고 쉬운 해설은, Greenpeace 홈페이지에 나온 “10분만에 읽는 ‘파리기후변화협정’ A to Z”을 참고하라. https://www.greenpeace.org/korea/update/17235/blog-ce-paris-climate-agreement-a-to-z/ (2021.6.21. 접속). 4. 「지구온난화 1.5℃」 특별보고서의 주요 내용은 기후변화 홍보포털에서 제공하는 요약본을 참고하라.http://www.climate.go.kr/home/cc_data/2019/SR15_SPM_Korean.pdf (2021.6.21.접속). 특별보고서에 대한 간략한 해설은, 곽호철, “「지구온난화 1.5℃」 특별보고서에 나타난 기후위기와 기독교윤리적 대응,” 「대학과 선교」 42 (2019), 174-181을 참고하라. 5. IPCC는 3개의 실무그룹 보고서 및 특별보고서의 핵심 내용을 통합하여 종합보고서를 작성한다. 제1 실무그룹(WG I) 보고서는 기후변화의 과학적 보고서이고, 제2 실무그룹(WG II) 보고서는 기후변화의 영향과 적응 및 취약성에 관한 것이고, 제3 실무그룹(WG III) 보고서는 기후변화 완화에 관한 것이다. 6차 평가보고서(AR6) 제1 실무그룹(WGI) 보고서는https://www.ipcc.ch/report/ar6/wg1/을 참고하라(2021.7.21. 접속). 6. Timothy Morton, Hyperobjects: Philosophy and Ecology after the End of the World (Minn, Ill: Univ of Minnesota Press, 2013). Morton은 하이퍼오브젝트의 예로 블랙홀, 아마존 밀림, 유전(oilfield), 인터넷과 함께 기후변화를 꼽는다. 7. 인류의 역사에 기후가 미친 영향에 관한 연구는 비교적 최근에 수행되었다. 기후와 역사의 관련성에 관한 고전적인 연구로, Hubert H. Lamb, Climate, History and the Modern World, 김종규 역, ª기후와 역사: 기후, 역사, 현대 세계4 (서울: 한울, 2004)를 참고하라. 유사한 연구로, Wolfgang Behringer, A Cultural History of Climate, 안병옥ㆍ이은선 역, ª기후의 문화사4 (서울: 공감in, 2010)가 있다. 기상학자인 Lamb과 달리 역사학자인 Behringer는 기후변화가 문명의 전환에 미친 영향에 관심을 기울인다. 8. 복잡한 피드백 고리의 한 예로 아마존 열대우림의 파괴를 들 수 있다. 아마존 열대우림을 파괴하는 화재는 많은 경우 농경과 목축을 위한 고의적 방화에 기인한다. 아마존 우림 지역에 단기간에 광범위한 콩 재배지를 확보하려고 저지르는 방화는 브라질 정부에 의해서 조장되거나 묵인되었다. 여기에는 복잡한 국제관계가 작용한다. 중국에서 쇠고기 수요가 급증 하면서 사료용 콩 수요가 증가했지만 미중 간 무역 갈등으로 인해 중국이 미국산 대두를 대체할 브라질산 대두의 수입을 대폭 확대한 것이다. ‘브라질의 도널드 트럼프’라고 불리는 극우, 친중 성향의 자이르 보우소나루 대통령이 정권을 잡으면서 상황은 더 악화되었다. 보우소나루 대통령은 환경보호구역 지정 해제, 국립공원과 국영발전소의 민영화, 수력발전소 건설 등 반(反)환경ㆍ친(親)시장 정책을 밀고 나갔고 그 결과 아마존 열대우림의 파괴는 2008년 이후 최대 규모로 진행되고 있다. 강찬수, “미국-중국 무역전쟁이 아마존 열대우림을 파괴한다,” 「중앙일보」 (2019년 5월 25일). https://news.joins.com/article/23478966; BBC 코리아, “아마존 파괴 2008년 이후 최대 규모,” 「BBC」 (2020년 12월 1일). https://www.bbc.com/korean/international-55141679; 박병수, “아마존 열대우림, 한달새 ‘축구장 5만 8천개’ 면적 사라졌다,” 「한겨레」(2021년 5월 10일). https://www.hani.co.kr/arti/international/america/994510.html 들을 참고하라. 9. David Wallace-Wells, The Uninhabitable Earth: Life After Warming, 김재경 역, ª2050 거주불능지구4 (서울: 추수밭, 2021), 60-212. 10. 유럽의 정치지형까지 바꾼 시리아 내전은 다양한 원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지만, 2006년부터 2011년까지 이어진 가뭄과 흉작으로 정치적 사회적 불안 요인이 증가한 이유도 크다. 흉작과 기근으로 이촌향도 현상이 심화하고 민심이 돌아서면서 반정부 시위가 격화되고 유혈진압으로 내전으로 비화하는 악순환의 기점에 기후변화가 자리하고 있다. 11. UNEP 배출격차보고서 2020의 내용은 녹색아카데미 홈페이지에서 볼 수 있다. http://greenacademy.re.kr/archives/8998& http://greenacademy.re.kr/archives/9027 (2021.7.2. 접속) 12. “World Scientists’ Warning of a Climate Emergency 2021” (BioScience, 28 July 2021). https://doi.org/10.1093/biosci/biab079 13. 불과 10년 전에만 해도 기후위기론에 대한 반대가 거셌다. 경제학자이자 칼럼니스트 Hans Labohm은 IPCC를 비롯한 세계 기후학자들이 기후 위기를 과도하게 부풀리는 ‘기우론자’라고 비판하며 기후위기론의 자료나 통계가 허위 내지는 날조된 것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한스 라붐 “지구 온난화 ‘환상과의 싸움” 세계일보 2010년 12월 1일 자 기사 참고). 기후연구 분야의 전문가 중에서도 위기론에 반론을 제기하는 이들이 있다. 기후위기론을 불편해하는 견해에 대해서, Roy W. Spencer, Climate Confusion: How Global Warming Hysteria Leads to Bad Science, Pandering Politicians and Misguided Policies That Hurt the Poor, 이순희 역, ª기후 커넥션: 지구온난화에 관한 어느 기후 과학자의 불편한 고백4 (서울: 비아북, 2008)을 보라. 10년 전과 달리 최근에 기후위기론에 대한 노골적인 비판은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14. Wolfgang Behringer, ª기후의 문화사4, 227. 15. Wolfgang Behringer, ª기후의 문화사4, 264-269. 베링어의 역사 분석은 지나치게 포괄적이고 모호하다는 비판을 받지만, 삶의 모든 영역에 영향을 미치는 글로벌 기후현상이 미치는 사회적, 문화적, 종교적 영향에 대한 통찰은 충분히 주목할 만하다. 16. 포스트휴머니즘이 전제하는 인간과 인간 삶의 조건에 대하여, 윤형철, “포스트코로나 시대의 인간됨과 인간다움의 조건에 관한 단상: 포스트휴머니즘 인간론에 대한 기독교 신학의 답변,” 「조직신학연구」 37 (2021), 31-46을 참고하라. 17. 조영호, “기후변화와 인간, 그리고 윤리”, 「기독교사상」 719 (2018), 19. 18. 지질학상으로 1만 년 전부터 현재까지 신생대 제4기의 지질시대를 홀로세(Holocene)라고 부른다. 인류세(anthropocene)는 현생인류의 활동이 시작된 최근의 시기가 지구의 지질과 기후에 불가역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보고 홀로세와 구별되는 개념으로 고안되었다. 인류세에 대한 합의된 정의는 없으며 인류세의 기점으로 ① 약 6천 년 전 농경시대 ② 17세기 신대륙의 발견 ③ 18세기 산업혁명 ④ 20세기 인구 대폭발 등이 거론된다. 1980년대에 처음 등장한 인류세라는 용어는 ‘인류세 워킹그룹’(Anthropocene Working Group, AWG)을 출범시킨 네덜란드의 대기과학자 파울 크뤼천(Paul Crutzen)에 의해서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졌다. 2000년대 이후 인류세는 지질학의 범위를 넘어 자연과학이나 인문사회학에서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19. 지속가능발전(sustainable development)이란 개념은 1987년 세계환경개발위원회(WCED)가 발표한 브룬트란드 보고서 <우리 공동의 미래>에서 처음 등장한 이후 21세기에 가장 빈번하게 쓰이는 환경 패러다임적 개념이 되었다. World Commission On Environment and Development, Our Common Future (UK: Oxford University Press, 1987), 43을 보라. 논문의 표현은 국내에서 2018년에 제정되어 2020년부터 시행되고 있는 지속가능발전법(법률 제17326호) 제2조의 정의를 따른다. 20. 구약의 재난 사건을 통해 하나님의 자기 계시를 다루는 연구인, 김진수, “기근, 처형, 그리고 회복: 사무엘하 21:1-14에 나타난 하나님의 이미지,” 「성경과 신학」 50 (2009): 179-212를 참고하라. 21. David Travis, “지속 가능한 자본주의?”, in ª기후정의: 기후변화와 환경 파괴에 맞선 반자본주의의 대안4, 이안 앵거스 편 (서울: 이매진, 2012), 155. 22. “코로나의 역설...인간이 멈추자 지구가 건강해졌다”. (2020년 4월 3일자 동아사이언스 기사). https://www.donga.com/news/It/article/all/20200402/100480182/1 (2021.7.2. 접속) 23. “코로나19로 수질 개선...인도서 사라졌던 ‘갠지즈강 돌고래’ 발견” (2020년 4월 24일자. 뉴스펭퀸 기사) https://www.newspenguin.com/news/articleView.html?idxno=1558 (2021.7.2. 접속); “코로나의 역설...관광객 줄자, 60년 만에 맑아진 베네치아 운하” (2020년 3월 18일자 중앙일보 기사) https://news.joins.com/article/23732593 (2021.7.2. 접속) 24. 고재경 외, “코로나19 위기, 기후위기 해결의 새로운 기회,” 「이슈&진단」 412 (2020), 16-18. 이 보고서는 2008-2009년 금융위기가 고탄소 경제에서 저탄소 경제로 전환할 수 있는 기회였는데 전환의 모멘텀으로 만들지 못했다고 분석하고, 코로나19 사태를 기후위기 대비 대전환의 모멘텀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25. Eric Klinenberg, Heat Wave: A Social Autopsy of Disaster in Chicago, 홍경탁 역, ª폭염사회: 폭염은 사회를 어떻게 바꿨나4 (서울: 글항아리, 2018). 26. ‘총체적인 사회적 사실’은 인류학자인 마르셀 모스가 창안한 개념이다. 모스는 법률, 관습, 의례, 신화, 제도 등 서로 분리되어 존재하는 것 같은 요소들이 총체성을 형성한다고 말했다. 개념을 통해 모스는 한 사회를 구성하는 제도나 표상이 통합된 전체를 이루고 있음을 지적하였다. 모스의 사상을 소개하고 해설한 책으로, Bruno Karsenti, ª마르셀 모스, 총체적인 사회적 사실4 (서울: 동문선, 2009)을 참고하라. 27. 장훈태는 다양한 난민 발생 요인 중 자연재해와 같은 환경적 요인을 언급하면서, 환경난민의 경우 국외 난민보다 국내 난민이 더 빈번하고 규모도 훨씬 크다고 지적한다. 장훈태, “세계 난민 문제와 선교,” 「성경과 신학」 77 (2016), 175. 28. 2021년 5월 20일에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를 비롯한 여러 교단과 교계 단체는 “한국교회 2050 탄소중립 선포식”을 열고 기후위기에 대한 공동의 협력과 비상 행동을 다짐했다. 그즈음 기독교환경운동연대도 7주간 기후위기 집중 대응을 위한 그린 엑소더스 캠페인을 추진하면서 교회와 교계에 기후위기에 대한 경각심을 환기하려고 노력했다. 29. 기후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입안된 국내 정책과 법률에 관한 간단한 설명은, 송오식, “기후위기 대응을 위한 바람직한 정책과 제도: 성경적 원리에서 해답을 찾다,” 「종교문화학보」17 (2020), 91-96을 참고하라. 30. 기후정의네트워크, “기후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급진적인 새로운 의제가 필요하다,”in ª기후정의: 기후변화와 환경 파괴에 맞선 반자본주의의 대안4, 이안 앵거스 편 (서울: 이매진, 2012), 253. 기후정의네트워크(Climate Justice Now Network, CJN)는 제삼 세계, 원주민, 여성 그룹, 좌파 운동단체가 주도적으로 참여하며 급진적인 기후운동을 지향한다. 이들은 기후협상이 자본주의가 초래한 부정의를 해소하고 소외된 약자의 권리를 세우는 방향으로 급진적인 변화를 가져와야 한다고 주장한다. 31. 최근 기후변화 담론은 환경과 경제 위주에서 정의로의 전이를 보여준다. 유엔기후변화협약에서도 ‘정의로운 전환’(just transition)이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했다. 기후변화 담론에서 정의로운 전환에 대해서, 조효제, ª탄소 사회의 종말: 인권의 눈으로 기후위기와 팬데믹을 읽다4 (서울:21세기북스, 2020), 263-282.를 참고하라. 32. 2018년 스웨덴 의회당 바깥에서 결석시위를 시작한 그레타 툰베리(Greta Thunberg)는 2019년에 전 세계 2천여 개 도시에서 ‘기후를 위한 학교파업시위’를 주도하면서 다음 세대의 환경운동가로 급부상했다. 2019년 9월 열린 UN 기후행동 정상회의에서 툰베리는 각국 정상들 앞에서 기성세대와 선진강국의 무책임을 질타했다. 스스로 대멸종의 시대에 살아야 하는 세대라고 말한 툰베리는 젊은 세대의 분노와 절망감을 이렇게 대변했다. “지난 30년 동안 과학은 너무도 분명하게 경고했습니다. 정치적 해법을 마련해야 마땅했는데도, 당신들은 방관하기만 했으면서 어떻게 감히(How dare) 여기까지 와서 할 만큼 하고 있다는 말을 내뱉을 수 있습니까?…어떻게 감히 당신들은 이 문제가 ‘일상의 비즈니스’와 같은 몇 가지 기술적 해법으로 해결될 것처럼 말합니까?…당신들은 우리를 실망시키고 있습니다. 젊은 사람들은 당신들의 배신을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미래세대의 눈이 당신들을 주시하고 있습니다. 만약 당신들이 우리를 실망시키기로 결정한다면, 단언컨대 우리는 당신들을 결코 용서하지 않을 겁니다.”(Greta Thunberg의 Speech At The U.N. Climate Action Summit transcript 중에서 발췌인용함). https://www.npr.org/2019/09/23/763452863/transcript-greta-thunbergs-speech-at-the-u-n-climate-action-s ummit (2021.7.23. 접속). 33. 이정배, “기후붕괴 시대의 종교: 생태 맹(盲)에서 해방되는 기독교를 기대한다,” 「기독교사상」 719 (2018), 12. 34. 송준인은 이것을 “생태 정의로의 회심”(conversion to Eco-justice)라고 부른다. 송준인, “생태 정의로의 회심(conversion to Eco-justice),” 「기독신문」 (2021년 4월 6일). https://www.kidok.com/news/articleView.html?idxno=210541 (2021.8.2. 접속). 참고문헌 Behringer, Wolfgang. A Cultural History of Climate. 안병옥⋅이은선 역. ª기후의 문화사4. 서울: 공감in, 2010. Karsenti, Bruno. ª마르셀 모스, 총체적인 사회적 사실4. 서울: 동문선, 2009. Klinenberg, Eric. Heat Wave: A Social Autopsy of Disaster in Chicago. 홍경탁 역. ª폭염사회: 폭염은 사회를 어떻게 바꿨나4. 서울: 글항아리, 2018. Morton, Timothy. Hyperobjects: Philosophy and Ecology after the End of the World. Minn, Ill: Univ of Minnesota Press, 2013. Spencer, Roy W. Climate Confusion: How Global Warming Hysteria Leads to Bad Science, Pandering Politicians and Misguided Policies That Hurt the Poor. 이순희 역. ª기후 커넥션: 지구온난화에 관한 어느 기후 과학자의 불편한 고백4. 서울: 비아북, 2008. Travis, David. “지속 가능한 자본주의?”. In ª기후정의: 기후변화와 환경 파괴에 맞선 반자본주의의 대안4. 이안 앵거스 편. 서울: 이매진, 2012: 148-157. Wallace-Wells, David. The Uninhabitable Earth: Life After Warming. 김재경 역. ª2050 거주불능지구4. 서울: 추수밭, 2021. World Commission On Environment and Development. Our Common Future. UK: Oxford University Press, 1987. 강찬수. “미국-중국 무역전쟁이 아마존 열대우림을 파괴한다.” 「중앙일보」 (2019년 5월 25일). https://news.joins.com/article/23478966. 고재경 외. “코로나19 위기, 기후위기 해결의 새로운 기회.” 「이슈&진단」 412 (2020): 1-25. 곽호철. “「지구온난화 1.5℃」 특별보고서에 나타난 기후위기와 기독교윤리적 대응.” 「대학과 선교」 42 (2019): 171-203. 기후정의네트워크. “기후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급진적인 새로운 의제가 필요하다.” In ª기후정의: 기후변화와 환경 파괴에 맞선 반자본주의의 대안4. 이안 앵거스 편. 서울: 이매진, 2012. 김진수. “기근, 처형, 그리고 회복: 사무엘하 21:1-14에 나타난 하나님의 이미지.” 「성경과 신학」 50 (2009): 179-212. 박병수. “아마존 열대우림, 한달새 ‘축구장 5만 8천개’ 면적 사라졌다.” 「한겨레」 (2021년 5월 10일). https://www.hani.co.kr/arti/international/america/994510.html. 송오식. “기후위기 대응을 위한 바람직한 정책과 제도: 성경적 원리에서 해답을 찾다.” 「종교문화학보」 17 (2020): 87-108. . “기후정의와 성경적 정의.” 「종교문화학보」 18 (2021): 159-185. 송준인. “생태 정의로의 회심(conversion to Eco-justice).” 「기독신문」 (2021년4월 6일). https://www.kidok.com/news/articleView.html?idxno=210541 (2021.8.2. 접속). 송재민. “기후변화 과학 및 국제 정책에 대한 고찰: 한계와 대안.” 「신학과 철학」 29 (2016): 221-246. 윤형철. “포스트코로나 시대의 인간됨과 인간다움의 조건에 관한 단상: 포스트휴머니즘 인간론에 대한 기독교 신학의 답변.” 「조직신학연구」 37(2021): 26-61. 이정배. “기후붕괴 시대의 종교: 생태 맹(盲)에서 해방되는 기독교를 기대한다.” 「기독교사상」 719 (2018): 9-17. 장훈태. “세계 난민 문제와 선교.” 「성경과 신학」 77 (2016): 163-199. 조영호. “기후변화와 인간, 그리고 윤리.” 「기독교사상」 719 (2018): 18-29. 조효제. ª탄소 사회의 종말: 인권의 눈으로 기후위기와 팬데믹을 읽다4. 서울:21세기북스, 2020. 웹사이트 10분만에 읽는 ‘파리기후변화협정’ A to Z. https://www.greenpeace.org/ko- 기후위기 시대와 그리스도인의 삼중적 생태 전환| 117 rea/update/17235/blog-ce-paris-climate-agreement-a-to-z (2021.6.21. 접속) 「지구온난화 1.5℃」 특별보고서의 주요 내용에 대한 기후변화 홍보포털의 요약본. http://www.climate.go.kr/home/cc_data/2019/SR15_SPM_Korean. pdf (2021.6.21. 접속). IPCC 제6차 평가보고서(AR6) 제1 실무그룹(WG I) 보고서. https://www.ipcc.ch/report/ar6/wg1/ (2021.7.21. 접속). BBC 코리아. “아마존 파괴 2008년 이후 최대 규모.” 「BBC」 (2020년 12월 1일). https://www.bbc.com/korean/international-55141679. UNEP 배출격차보고서 2020의 내용을 수록한 녹색아카데미 홈페이지. http://greenacademy.re.kr/archives/8998 & http://greenacademy.re.kr/ar- chives/9027 (2021.7.2. 접속). “World Scientists’ Warning of a Climate Emergency 2021” (BioScience, 28 July 2021). https://doi.org/10.1093/biosci/biab079. Greta Thunberg. “Transcript: Speech At The U.N. Climate Action Summit.” https://www.npr.org/2019/09/23/763452863/transcript-greta-thunbergs-speech-at-the-u-n-climate-action-summit (2021.7.23. 접속) Abstract The Threefold Ecological Transformation of Christians in the Age of Climate Crisis Yoon, Hyung Chul Climate change, which is related to the survival of all living things on the planet, is not a problem that only climatologists, policy makers, or environ-mental engineers are concerned with, but is a problem facing all humankind. Several sources, including a series of reports published by the IPCC, warn that our time is facing the total catastrophe of climate change. In the era of climate crisis, the church must promote the following ecological trans-formation in order to appear as a community of restoration and hope that participates in God’s work of healing the broken creation. First, Christians should challenge the anthropocentrism reflected in concepts such as the ‘anthropocene’ and ‘sustainable development’, and express our conviction that what happens to ecosystems and history as a whole depends on God’s sovereignty. Through Christian conviction of God’s providence instead of indifference or hypersensitivity to climate change, Christians will be able to stand as awake prophets in times of crisis. Second, Christians should practice priestly interest and care for the climate vulnerable, who are apt to be marginalized due to the deepening polarization caused by the climate crisis. Christians must learn to live a life of com-panionship while respecting and supporting the ecologically weak, and develop a communal lifestyle that conforms to Christian values, not capitalist desires. Third, Christians should sharply point out the injustice and inequality behind the climate crisis and strive to reflect the values of the kingdom of God, such as righteousness and peace, in reality. We must see ourselves as an intermediary king with an infinite responsibility for nature and the world, and also a sojourner king who welcomes other guests while staying in the world where God is the Master. We need to be the medium of action so that the justice of the kingdom of God can respect the value of various lives and prosper properly toward the glory of God. Through this threefold ecological transformation, I hope that a holy eco-logical virtuous cycle that arouses collective interest, revitalizes Christian climate discourse, and provokes community movement takes place in the Korean church.
    • 목회
    • 신학
    2022-07-12
  • 구약성경의 동성애 - 퀴어신학의 구약해석 비판
    구약성경의 동성애1) - 퀴어신학의 구약해석 비판 - 1. 들어가는 말 구약성경에 동성애를 언급한 본문은 창세기 19장 1-11절, 레위기 18장 22절, 20장 13절, 신명기 23장 17-18절, 사사기 19장 16-30절, 열왕기상 14장 22-24절, 15장 11-12절, 22장 43-46절, 열왕기하 23장 7절, 욥기 36장 13-14절, 에스겔 16장 48-50절이다. 이 본문들에 대한 퀴어신학의 구약해석을 잘 보여주는 책은 2006년에 발간된 The Queer Bible Commentary로서 이 책은 Deryn Guest 외 세 명의 퀴어신학자들이 편집하였고 다수의 퀴어신학자들이 참여하여 구약과 신약 66권에 관해 주석한 것이다.2) 필자는 이 글에서 위의 동성애 관련 구약본문들이 동성애에 관하여 무엇을 말하는지 해설하고 동성애를 옹호하기 위하여 본문을 왜곡하여 해석하는 퀴어신학자들의 주요 논지를 비판하고자 한다. 2. 소돔의 동성애 동성애에 관한 구약의 첫 번째 본문은 타락의 상징으로 잘 알려진 소돔의 동성애를 기록한 창세기 19장 1-11절이다. 구약의 첫 번째 책인 창세기에 수많은 동성애자들이 있는 소돔이 기록된 것을 볼 때 동성애의 시작은 고대로 거슬러 올라감을 알 수 있다. 동성애를 뜻하는 영어 단어 ‘sodomy’도 바로 창세기 19장에 기원을 두고 있다. 창세기 19장 1-11절의 내용은 이렇다. 어느 날 사람의 모습(남자)으로 나타난 두 명의 천사가 소돔에 나타나자 소돔에 거주하던 롯이 그들을 자신의 집에 손님으로 맞이하고 음식을 대접한다. 그런데 그 천사들이 자기 전에 소돔의 백성들이 롯의 집을 에워싸고 롯이 맞이한 두 남자를 내어 놓으라고 말한다. 이 때 그 집을 둘러싼 소돔의 백성들을 “노소를 막론 하고 원근에서 다” 모인 소돔인들이라고 기록한 것(창세기 19장 4절)은 소돔 땅에 동성애가 얼마나 편만하게 퍼져있었는지를 보여준다. 개역개정에서 “소돔의 백성들”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안쉐 쏘돔”으로, 직역하면 “소돔의 남자들”을 의미한다. 롯의 집을 둘러싼 소돔인들은 롯에게 말한다. “오늘 밤에 네게 온 사람들이 어디 있느냐 이끌어 내라 우리가 그들을 상관하리라”(창세기 19장 5절). 여기서 “상관하리라”는 말은 히브리어, “야다”로서 그 원뜻은 “알다”(know)인데 이 “야다”가 문맥에 따라 ‘성교’(intercourse) 혹은 ‘동침’을 의미할 수 있다.3) 바로 이 본문에서 ‘성교’의 의미로 쓰였다. 히브리어 “야다”가 ‘성교’ 혹은 ‘동침’의 의미로 쓰인 대표적인 예는 창세기 4장 1절이다.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에서 “동침하매”로 번역된 것이 바로 ‘알다’를 의미하는 히브리어 “야다”이다. 이러한 소돔 사람들의 악한 요구에 롯이 자신의 손님인 이 두 사람들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 것을 말하자 그들은 롯을 밀치고 문을 부수려고 한다. 이 때 사람의 모습으로 온 천사들이 롯을 집 안으로 끌어들이고 천사들의 초자연적 능력으로 문 밖의 소돔인들의 눈을 멀게 하였다. 이 후 소돔 땅은 고모라와 함께 하나님의 유황과 불의 심판을 받게 된다. 3. 죄는 동성애가 아니라 집단 성폭력인가? 소돔인들이 롯에게 손님으로 온 두 사람을 내어놓으라는 요구에 롯은 그들에게 “이런 악을 행하지 말라”고 말한다. Michael Carden은 이와 관련하여 일방적인 성폭력과 합의하에 갖는 동성애를 구분할 것을 주장한다.4) 즉, 창세기 19장은 폭력으로 동성애를 강제하려 한 것을 기록한 것이지만 그렇지 않고 서로 간에 합의하에 동성애를 나누는 것은 악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창세기 19장을 언급한 성경의 다른 본문들을 살펴보면 롯이 말한 소돔 사람들의 악은 단순히 집단 성폭력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동성애를 포함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에스겔 16장 49-50절에서 소돔의 죄를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네 아우 소돔의 죄악은 이러하니 그와 그의 딸들에게 교만함과 음식물의 풍족함과 태평 함이 있음이며 또 그가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도와주지 아니하며 거만하여 가증한 일을 내 앞에서 행하였음이라 그러므로 내가 보고 곧 그들을 없이 하였느니라" 위 본문의 화자인 여호와는 소돔의 여러 가지 죄 중에 “가증한 일”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는다. 창세기 19장 1-11절에서 기록한 소돔의 죄는 다른 죄가 아니라 소돔에 퍼져 있는 동성애와 소돔 남자들이 롯의 집에 방문한 두 사람에게 강제적인 동성애를 요구한 것이다. 창세기 19장에 기록된 소돔의 죄가 동성애와 강제적인 동성애 요구인데 여호와가 소돔의 죄를 나열하면서 창세기 19장에 기록된 소돔의 죄를 생략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그러므로 소돔의 “가증한 일”은 바로 동성애와 그와 관련된 죄를 말하는 것일 것이다. 무엇보다도 여기서 “가증한 일”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토에바”인데 이 단어는 레위기 18장 22절과 20장 13절, 열왕기상 14장 24절에서 동성애를 지칭한다. "너는 여자와 동침함 같이 남자와 동침하지 말라 이는 가증한 일(토에바)이니라 (레 18:22) 누구든지 여인과 동침하듯 남자와 동침하면 둘 다 가증한 일(토에바)을 행함인즉 반 드시 죽일지니 자기의 피가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레 20:13) 그 땅에 또 남색하는 자가 있었고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신 국민 의 모든 가증한 일(토아보트-토에바의 복수형)을 무리가 본받아 행하였더라(왕상 14:24)" 히브리어 “토에바”는 매우 강한 혐오(abhorrence, abomination)를 의미하는 단어로 동성애가 하나님 앞에 매우 혐오스러운 범죄임을 알려준다.5) 물론 구약성경에서 히브리어 “토에바” 가 동성애만을 지칭하는 가증함은 아니다. 가나안 신상(신 7:26), 부정결한 짐승(신 14:3), 악인의 제물(잠 21:27), 율법을 듣지 않고 드리는 기도(잠 28:9), 악행을 저지르면서 드리는 분향(사 1:13), 이웃의 아내와 음행(겔 22:11) 등 여러 가증한 일을 “토에바”로 지칭하였다. 그러나 에스겔 16장 49-50절에서 “토에바”가 소돔의 죄와 관련하여 사용되었기에 소돔의 “가증 한 일”을 동성애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더 선명하게 소돔의 죄가 동성애임을 말해 주는 구절은 신약 유다서 7절이다. "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 도시들도 그들과 같은 행동으로 음란하며 다른 육체를 따 라 가다가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음으로 거울이 되었느니라" 여기서 “다른 육체를 따라”의 의미는 정상적인 이성의 육체가 아닌 동성의 육체를 쫓는 것을 의미한다. 유다서 7절에서는 소돔의 음란한 동성애가 불의 형벌의 원인이었음을 말한다. 결국 소돔의 죄를 언급한 에스겔 16장 49-50절, 유다서 7절, 그리고 동성애를 “가증한 일”(토에바) 로 일컬은 레위기 18장 22절과 20장 13절, 열왕기상 14장 24절을 고려하면 창세기 19장 1-11절의 소돔의 죄는 단순히 강제적인 성폭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동성애를 포함하고 있는 것임을 알 수 있다. 4. 동성애 금지명령 동성애를 율법으로 기록한 구절은 위에서 언급한 레위기 18장 22절과 레위기 20장 13절인데 이 두 구절은 구약에서 동성애를 행하는 죄의 무거움을 말해준다. 레위기 18장은 이집트를 탈출해서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향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가나안의 풍속을 따르지 말 것을 명령한 부분이다. 레위기 18장 22절에서는 가나안의 풍속인 동성애를 따라 행하지 말것을 명령한 것인데 이 명령문은 히브리어 부정어 “로”와 “동침하다”를 의미하는 동사 “샤카브”의 미완료 형이 결합된 구조로 절대적 금지를 나타내는 구문이다. 히브리어 “로”와 미완료 동사의 결합은 히브리어 금지명령 중에서도 영구적 금지를 암시하는 강한 금지명령문으로 십계명의 “-하지 말라”의 계명들이 이 구조를 갖고 있다.6) 히브리어 원문의 문장 순서를 보면 일반적인 금지명령문의 순서와 달리 문장 맨 앞에 “남자와 함께”(히브리어, “베에트 자카르”)가 위치해 있어서 여자가 아닌 “남자와 함께” 동침하는 것의 가증함을 강하게 강조하고 있다. 동성애와 같은 가증한 죄가 가져올 결과에 대해서 레위기 18장 29절에서는 가증한 행위를 한 자는 백성 중에서 끊어질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레위기 20장 13절 역시 동성애가 매우 무거운 죄임을 말해준다. 레위기 20장은 반드시 죽여야 하는 죄의 목록이다. 여기에 속하는 죄로는 자식을 몰렉에게 바치는 인신제사, 접신한 자와 박수무당을 따르는 죄, 부모를 저주하는 죄, 남의 아내와 간음하는 죄, 어머니와 동침하는 죄 등이 속하는데 이 목록 가운데 13절에 동성애가 포함된 것이다. 그러므로 13절 하반절에서는 동성애를 행한 자를 “반드시 죽일지니 자기의 피가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고 기록하고 있다. 위의 두 구절의 구문과 문맥을 통해 살핀 바와 같이 동성애의 죄는 결코 가볍게 지나칠 수 있는 죄가 아니라 매우 무거운 죄이다. 5. 동성애 금지명령은 구약시대와 남자에 한정되는가? 퀴어신학의 주장 중 하나는 동성애를 금하는 레위기 18장 22절과 20장 13절의 두 명령은 구약시대에 한정된 율법이므로 신약시대인 현대에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7) 마치 구약율법 가운데 부정한 돼지고기를 금한 율법(레위기 11장 7-8절)이 신약시대에 더 이상 효력을 미치지 않는 것처럼(마가복음 7장 15-16절) 동성애 금지명령은 신약시대에 더 이상 구속 력을 갖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에 대해서는 구약의 율법을 현대에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히브리서 10장 1절에서 말하듯이 율법은 장차 올 좋은 것의 그림자이다.(“율법은 장 차 올 좋은 일의 그림자일 뿐이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속죄와 관련한 의식법에 관하여는 예수께서 오셔서 희생제물이 되심으로 의식법의 그림자의 실체를 분명히 보여주셨다. 구약에는 속죄와 관련된 율법 외에도 다양한 율법이 기록되었는데 많은 율법은 그림자의 성격을 띠고 있고 그 실체가 명시적으로 드러나 있지 않다. 이럴 때 신약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은 그림자의 율법의 실체를 파악하여 신약시대의 삶의 원리로 적용할 수 있다. 요한일서의 두 구절은 구약의 속죄의 제물은 그림자이고 실체는 예수 그리스도임을 선명하게 말해준다. "그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 이라(요일 2:2)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 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요일 4:10)" 어떤 경우는 신약성경에서 율법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뜻을 직접 설명, 율법과 관련한 하나님의 완전한 뜻을 알려주시기도 한다. 마태복음 5장 17절에서 예수께서 율법을 완전하게 하려 하신다는 것이 이 경우에 속한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 하게 하려 함이라(마 5:17)" 여기서 예수께서 율법을 완전하게 하신다는 말은 어떤 의미인가? 흥미롭게도 예수께서 마태복음 5장 17절을 말씀하신 이후에 일련의 구약의 율법을 인용하면서 율법과 관련된 하나님의 뜻을 더 완전하게 가르치신다. "옛 사람에게 말한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 는 지옥불에 들어가리라(마 5:21-22) 또 간음하지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마 5:27-28) 또 옛 사람에게 말한바 헛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마5:33-34)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 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 며...(마 5:38-39)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 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대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 5:43-44)" 예수께서는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전케 하러 오셨다고 말씀하셨는데 율법을 완전케 하신다는 것은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완전한 뜻을 밝히는 것이었다. 또 다른 경우는 율법이 그림자인 경우가 아니라 실체로 나타난 경우도 있다. 구약의 율법 중 도덕법이 이러한 경우라 할 수 있겠다. 예컨대 “너희는 거룩하라”(레 19:2)는 구약의 율법이지만 실체를 탐구해야하는 그림자로서의 율법이 아니라 곧 바로 신약시대에도 적용될 수 있는 실체적 율법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구약의 이 율법은 가감 없이 신약 성도들이 지켜야 할 신약의 계명으로 기록된다.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전에 알지 못할 때에 따르던 너희 사욕을 본받지 말고 오 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기록되었으 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벧전 1:14-16)" 레위기 19장 18절의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도 그림자로 나타난 경우가 아니라 곧 바로 실체로 나타난 경우이다. 그래서 마태복음 22장 39절에서 예수께서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 중 하나로 말씀하신 이 율법은 로마서 13장 18절에서 신약의 성도들이 지켜야 할 계명으로 기록된다.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 을 다 이루었느니라”(롬 13:8) 구약에서 동성애를 금지한 레위기 18장 22절과 20장 13절의 경우도 구약의 율법이 그림자로서가 아니라 곧 바로 실체로 나타난 경우이다. 그래서 신약의 로마서 1장 26-27절과 같은 구절에서도 동성애가 죄임을 기록한다.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셨으니 곧 그들의 여자들도 순 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그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자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 듯 하매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그들 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들 자신이 받았느니라(롬 1:26-27)" 퀴어신학자 David Stewart는 레위기 18장 22절과 20장 13절의 동성애 금지명령이 문자적으로는 모두 남성의 동성애를 언급하고 있기 때문에 여자 동성애자(lesbian)는 이 율법에 구속을 받지 않는다는 말하는데 이 또한 적절치 못한 해석이다.8) 두 율법에서 모두 남자와 동침하는 것을 언급하고 있지만 이것은 여자와 여자가 동침하는 것은 허용하고 남자와 남자가 동침하는 것은 허용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고대 이스라엘 문화와 문학에서 일반적으로 전제 하듯이 본문의 남성은 남성과 여성을 대표하는 것으로 보는 게 자연스럽다. 예컨대 출애굽기 20장 14절의 제 7 계명, “로 티느아프”(히, 너는 간음하지 말라)의 경우에 사용된 동사, “티느 아프”는 동사 “나아프”의 2인칭 남성단수형인데 여기에 사용된 동사가 남성형이기 때문에 이 계명이 남성에게만 적용되고 여성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고 보지 않는다. 또한 위의 로마서 1 장 26절에서는 여자 동성애(“여자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를 부끄러운 일 로 규정하고 있다. 6. 사사시대의 동성애 구약에는 소돔의 동성애를 기록한 창세기 19장 1-11절 이외에 동성애를 소재로 한 또 하나의 내러티브, 사사기 19장 16-30절이 있다. 사사기 19장 16-30절의 플롯 전개는 창세기 19장 1-11절과 매우 흡사하다. 한 레위인이 그의 첩과 함께 유다 베들레헴에서 에브라임 산지로 가다가 베냐민 지파에 속한 기브아 지역을 지나가게 된다. 이 때 기브아의 한 노인이 이들을 자신의 집으로 맞아들인다. 이때 기브아의 불량배들이 이 노인의 집을 에워싸고 말한다. “네 집에 들어온 사람을 끌어내라 우리가 그와 관계하리라”(22절). 여기서 동사, “관계하리라”는 창세기 19장 5절의 “상관하리라”와 같은 히브리어 동사인 “야다”(알다)이다. 이 노인은 자기 집에 온 손님에게 망령된 일을 하지 말라고 청하며 이 남자 대신 자신의 딸과 손님의 첩을 내어주겠다고 말한다. 결국 손님인 에브라임 사람은 자신의 첩을 그 불량배들에게 내어 주고 그 첩은 밤새도록 그 불량배들에게 윤간을 당하고 새벽에 돌아왔지만 결국 죽게 된다. 이에 에브라임 사람은 그 첩의 시체를 열 두 덩이로 잘라서 이스라엘 각 지파에 보내고 이스라엘 민족은 기브아가 속한 베냐민 지파와 민족전쟁을 벌이게 된다. 7. 동성애-타락의 바로미터 구약의 동성애 관련 두 내러티브가 각각 소돔과 사사시대를 배경으로 한다는 것은 동성애가 한 사회의 타락의 정도를 나타내는 바로미터 역할을 할 수 있음을 말해준다. 소돔은 고모라와 함께 구약에서 타락한 사회의 상징이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제자들을 이스라엘 여러 지역으로 보내면서 만약 누구든지 그들을 영접하지 아니하거든 그 지역에서 나가서 그들의 발의 먼지를 떨어버리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심판 날에 소돔과 고모라 땅이 그 성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라고 말하였다(마 10:15). 예수님의 제자들을 거부하는 지역은 타락의 상징인 소돔과 고모라보다 더 큰 심판을 받을 것을 말한 것으로 예수님의 제자들을 거부하는 죄가 얼마나 큰 지를 말해주는 대목이다. 또한 예수께서는 그가 많은 권능을 행하였지만 회개하지 않은 가버나움에게, 심판 날에 소돔 땅이 가버나움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마 11:23). 타락의 상징인 소돔을 언급하며 가버나움의 완악함을 비판한 말씀이다. 사사시대는 또 어떠한가? 이스라엘의 역사 중 사사시대는 가장 타락한 시대였다. 사사시대의 타락상을 단적으로 말해주는 구절은 사사기의 맨 마지막 절,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이다. 하나님의 뜻과 말씀이 기준이 되지 못하고 자신의 생각이 법이 된 시대, 그래서 이스라엘의 역사 중 가장 타락하고 영적으로 어두웠던 시대가 사사시대이다. 하나님이 타락한 이스라엘 백성을 이웃 민족에게 붙여 심판하고 나면 그제야 하나님을 부르짖고 이에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시고 그들을 구원하신다. 그러나 평화의 시간이 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시 우상숭배에 빠지고 타락하는 것을 반복했던 시대가 사사시대였다. 동성애로 인하여 창세기 19장의 소돔과 사사기 19장의 기브아가 속한 베냐민 지파는 하나님께 큰 심판을 받았다. 소돔 땅에는 하나님께서 유황과 불을 비처럼 내려서 그 지역의 성을 멸하셨고 베냐민 지파는 거의 진멸되어 없어질 위기에 처했다가 600명의 남은 용사가 지파의 씨가 되어 극적으로 회생하게 된다(삿 21장). 구약의 두 개의 동성애 내러티브가 공간적 타락의 상징인 소돔과 시간적 타락의 상징인 사사시대를 배경으로 했음을 볼 때 현재 우리 사회에 동성애가 확산되는 것은 구약의 관점으로 볼 때 매우 우려스러운 일이다. 구약의 관점으로 본다면 동성애의 확산은 영적 어두움이 깊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8. 동성애-개혁의 대상 구약에서 동성애에 대한 부정적인 관점은 남색하는 자(동성애자)의 존재를 허락하지 않고 이스라엘의 개혁적인 왕들이 남색하는 자를 쫓아낸 것에서도 찾을 수 있다. 개역개정 성경에서 “남창” 혹은 “남색하는 자”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카데쉬”로서 성전과 우상 신전에서 동성애를 유혹하던 개혁의 대상이었다. 퀴어신학자 Ken Stone은 “카데쉬” 혹은 복수형, “케데쉼”과 여성형 단수, “케데샤,” 여성형 복수, “케데쇼트”가 열왕기서에서 부정적으로 묘사되기는 했지만 이들이 성적으로 관련되어 있음을 부인한다.9) 그러나 신명기 23장 17-18절에서는 “케데샤”(17절)를 “조나”(히, 창녀, 18절)로 지칭함으로서 “케데샤”가 성적관련성이 있는 단어임을 보여준다. "이스라엘 여자 중에 창기(히, “케데샤”)가 있지 못할 것이요 이스라엘 남자 중에 남창이 있지 못할지니 창기(히, “조나”)가 번 돈과 개 같은 자의 소득은 어떤 서원하는 일로든 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전에 가져오지 말라 이 둘은 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 가증한 것 임이니라(신 23:17-18)" 또한 창세기 38장에 기록된 유다와 다말 이야기에서도 “케데샤”가 “창녀”를 의미하는 단어임을 보여준다. 창세기 38장 15절에서 유다는 얼굴을 가린 다말을 창녀(히, “조나”)로 여겼다고 기록하고 있고 같은 장 21절에서 유다는 그 창녀에게 맡긴 담보물을 찾기 위해 사람들에게 길 곁 에나임에 있던 창녀(히, “케데샤”)가 어디 있느냐고 묻는다. "그가 얼굴을 가리었으므로 유다가 그를 보고 창녀(“조나”)로 여겨(창 38:15)" “그가 그 곳 사람에게 물어 이르되 길 곁 에나임에 있던 창녀(“케데샤”)가 어디 있느 냐 그들이 이르되 여기는 창녀(“케데샤”)가 없느니라”(창 38:21) 이렇게 “케데샤”가 창녀를 의미하기 때문에 이에 상응하는 남성형 “카데쉬”는 개역개정에서 번역하듯이 “남창”, “남색하는 자”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신명기 23장 18절에서는 이 “카데쉬”를 경멸적으로 “개”(히, 켈레브)에 비유했고 이는 남창의 동성애가 얼마나 하나님 앞에 가증스러운 일임을 잘 보여준다. 이상적으로는 이스라엘에 동성애를 행하는 남색하는 자가 없었어야 했지만 현실적으로는 남색하는 자가 존재했다. 열왕기상 14장 24절에는 르호보암 시대에 하나님 앞에 가증한 일을 하는 남색하는 자(카데쉬)가 있었음을 기록한다. "그 땅에 또 남색하는 자가 있었고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신 국민 의 모든 가증한 일을 무리가 본받아 행하였더라" 아사와 여호사밧, 요시야와 같은 왕들은 이러한 남색하는 자들(케데쉼)을 이스라엘 땅에서 쫓아내는 개혁을 단행한 왕들로 기록되어 있다. "아사가 그의 조상 다윗 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여 남색하는 자를 그 땅 에서 쫓아내고 그의 조상들이 지은 모든 우상을 없애고(왕상 15:11-12) 그(여호사밧)가 그의 아버지 아사의 시대에 남아 있던 남색하는 자들을 그 땅에서 쫓 아내었더라(왕상 22:46) 또 여호와의 성전 가운데 남창의 집을 헐었으니 그 곳은 여인이 아세라를 위하여 휘 장을 짜는 처소였더라(왕하 23:7, 요시야의 개혁)" 이렇게 가증스러운, 개혁의 대상이었던 남색하는 자(카데쉬)는 욥기에서 저주의 상징으로 기록된다. 욥기 36장 13-14절에서 엘리후는 경건하지 못한 자들이 남색하는 자과 함께 있게 될 저주를 말한다. "마음이 경건하지 아니한 자들은 분노를 쌓으며 하나님이 속박할지라도 도움을 구하지 아니하나니 그들의 몸은 젊어서 죽으며 그들의 생명은 남창(케데쉼)과 함께 있도다” 9. 다윗과 요나단의 동성애? 다윗과 요나단의 관계는 구약성경에서 우정의 귀감으로 뽑힌다. 그런데 퀴어신학에서는 이 우정의 귀감을 동성애 관계라고 주장한다.10) 하나님의 마음의 합한 사람 다윗이 동성애 자였다면 동성애가 성경의 승인을 받을 수 있는 중요한 근거가 될 수 있겠지만 성경에는 다윗과 요나단을 동성애자로 봐야 할 근거가 없다. 사무엘하 1장 26절과 같은 구절은 다윗과 요나단을 동성애자로 보는 퀴어신학에서 언급하는 대표적인 구절이다.11) "내 형 요나단이여 내가 그대를 애통함은 그대는 내게 심히 아름다움이라 그대가 나 를 사랑함이 기이하여 여인의 사랑보다 더하였도다" 이 말은 요나단이 길보아산에서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다윗이 슬픔 가운데 한 말이다. 이 구절에서 다윗은 요나단의 사랑이 여인의 사랑보다 더하였다고 말한다. 여기서 “사랑”으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아하바”로서 한국어의 “사랑”, 영어의 “love”와 같이 매우 포괄적인 의미를 갖는 단어이다.12) 한국어와 영어에서 동성애와 전혀 상관없는 동성의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표현할 때 “사랑”과 “love"를 사용하듯이 히브리어에서도 동성애와 전혀 상관없는 동성간의 관계를 나타낼 때 ”아하바“를 사용한다.13) 그 예로 아래 두 구절을 들 수 있다. "다윗이 사울에게 이르러 그 앞에 모셔 서매 사울이 그를 크게 사랑하여(아하브) 자기 의 무기를 드는 자로 삼고(삼상 16:21) 솔로몬이 기름 부음을 받고 그의 아버지를 이어 왕이 되었다 함을 두로 왕 히람이 듣고 그의 신하들을 솔로몬에게 보냈으니 이는 히람이 평생에 다윗을 사랑하였음이라(아하브) (왕상 5:1)" 사무엘상 16장 21절과 열왕기상 5장 1절 모두 동성이었던 다윗과 사울, 다윗과 히람의 관계를 사랑(아하브)으로 표현했다. 그러나 이 두 관계 모두 동성애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각각 다윗을 향한 사울의 신임과 다윗을 향한 히람의 정치적 신뢰를 나타낸 것이다.14) 이와 마찬가지로 사무엘하 1장 26절에서 언급한 요나단의 사랑은 요나단과 다윗의 깊은 우정을 말한 것이다. 다윗과 요나단이 동성애를 나누는 관계였다면 성경브리어로 성적 관계를 나타내는 “야다”(알다)가 사용되었을 것이다.15) 그러나 구약에서는 다윗이 요나단이 서로 “알았다”(야다)고 표현한 구절이 없다. 10. 나오는 말 이제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구약성경은 동성애에 관하여 일관되게 부정적인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레위기 18장 22절과 20장 13절에서 밝히는 바와 같이 동성애는 하나님 앞에 가증한 죄이고 죄의 경중을 따지자면 매우 무거운 죄로서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 끊어지고 반드시 죽어야 하는 죄로 기록되어 있다. 동성애와 관련한 구약의 첫 번째 본문인 창세기 19장의 소돔의 죄와 관련하여 퀴어신학에서는 소돔 사람들과 같은 강제적인 성폭력이 아닌 동의하에 이뤄지는 동성애는 죄라고 단정할 수 없다고 하지만 창세기 19장의 소돔의 죄를 해설하는 에스겔 16장 50절과 유다서 7절을 고려할 때 소돔의 죄는 하나님 보시기에 가증한 동성애를 제외하고 논하기 어렵다. 퀴어신학에서는 구약의 동성애 금지명령이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적용되는 법이라고 주장하지만 신약에서도 동성애를 부끄러운 죄로 규정하기 때문에 이 주장은 성립되기 어렵다. 또한 퀴어신학에서 구약의 동성애 금지명령이 남자에게 주어진 것이고 여자 동성애에 관하여 침묵하고 있다고 말하지만 이는 여자 동성애자에게 면죄부를 주는 것이 아니다. 고대 이스라엘 문화와 문학에서 일반적으로 남자가 대표성을 갖기 때문에 동성애 금지명령을 남자에게만 해당하는 것을 읽는 것은 오독에 불과하다. 퀴어신학에서는 구약에서 가증하며 개혁의 대상으로 일컬어지는 카데쉬(남창)의 성적 연관성을 부인하지만 카데쉬에 상응하는 여성형 명상 케데샤가 창녀를 의미하기 때문에 일반적인 성경 번역과 같이 카데쉬를 남창으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 퀴어신학에서는 다윗과 요나단의 우정이 동성애일 것이라 주장하며 동성애의 성경적 토대를 마련하려 하지만 다윗과 요나단의 기사에서는 다윗과 요나단이 동성애 관계임을 말해주는 근거를 찾을 수 없다. 사사기 19장에는 창세기19장의 소돔 이야기와 매우 흡사한 동성애 내러티브가 있다. 타락의 상징 도시 소돔과 타락한 시대의 상징인 사사시대에 비슷한 동성애 이야기가 있다는 것은 한 사회의 타락과 동성애의 밀접한 관련성을 보여준다. 무엇보다도 이렇게 구약에서 타락의 상징이며 죄 중에서도 가증한 죄로 기록된 동성애를 죄로 인정하지 않는 데에 퀴어해석의 오류가 있다. ------------------------------------ 1) 이 글은 저자의 글, “구약성경에 나타난 동성애,” 『개혁주의 입장에서 본 퀴어신학 비판』(서울: 대한 예수교장로회총회), 61-84를 일부 수정한 것이다. 2) Deryn Guest, Robert E Goss, Mona West, Thomas Bohache, (London: SCM Press, 2015). 3) Ludwig Koehler and Walter Baumgartner, “YD‘” The Hebrew and Aramaic Lexicon of the Old Testament I (Leiden: Brill, 2001), 391. 4) Michael Carden, “Genesis,” The Queer Bible Commentary , Kindle ed., Location no. 1437. 5) Ludwig Koehler and Walter Baumgartner, “토에바” The Hebrew and Aramaic Lexicon of the Old Testament II (Leiden: Brill, 2001), 1702-1704. 6) Ronald J. Williams, Williams’ Hebrew Syntax3 rd ed. (Tronto: University of Tronto Press, 2010, 143. 7) David Tabb Stewart, “Leviticus,” The Queer Bible Commentary, Kindle ed., Location no. 2621. 8) David Tabb Stewart, “Leviticus,” The Queer Bible Commentary, Kindle ed., Location no. 2643. 9) Ken Stone, “1 and 2 Kings,”The Queer Bible Commentary, Kindle ed., Location no. 6383. 10) Ken Stone, “1 and 2 Samuel,” The Queer Bible Commentary, Kindle ed., Location no. 6060, 6087, 6097. 11) Ibid., 6053. 12) P. J. J. S. Els, “’hb” in New International Dictionary of Old Testament Theology & Exegesis I, ed. Willem A. Vangemeren (Grand Rapids: Zondervan, 1997), 277-299. 13) Ibid., 293-294. 14) Ibid., 294-295. 15) Ludwig Koehler and Walter Baumgartner, “YD‘, ”The Hebrew and Aramaic Lexicon of the Old Testament I, 391.
    • 목회
    • 신학
    2022-07-12

선교 검색결과

  • 선교동행예배-모잠비크 이희정·아마릴도 실라스 마아이아 선교사 간증
    믿음의 기업 본죽·본아이에프가 주관하는 「선교동행예배」 6월 14일 모임이 오전 10시 40분 양천로에 소재한 본월드미션 센터에서 있었다. 강찬 찬양 사역자의 찬양 인도 후 00국 강00 선교사가 기도한 후 남성 선교사들이 중창했다. 이희정, 아마릴도 실라스 마가이아 부부 선교사가 시 23:1-6을 본문으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란 제목으로 선교 간증했다. 이희정 선교사가 "시23편이 제가 제일 중요하게 여기는 말씀이다. 말씀대로 매순간 하나님께서 저를 인도하셨다. 저희는 40대 중반의 부부로 결혼 10년차이다. 2011년도에 한국에 머물며 아들의 발달치료 과정을 밟았다. 아들은 중증 자폐성 장애가 있다. 남편도 성인병을 앓고 있어 한국에와 치료했고 저도 자궁, 유방 치료를 받았다. 저의 친가 외가는 모두 불신자 가정이었는데 아버지가 복음을 들어 믿게 됐다. 그러나 부모(할아버지, 할머니)의 반대로 교회를 가지 못하고 대신 자식들인 우리를 보냈다. 이후 아버지는 병을 얻고 다시 교회를 다니게 됐다. 이 과정에 친가가 다 믿게 됐다. 그런데 중3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이로 인한 마음의 상처로 10년간 교회를 떠났다. 이후 26살 때 기독교의 꼬투리를 잡을려고 돌아와 결국 다시 신앙으로 돌아오게 됐다. 2008-9년 남아공으로 단기선교를 가서 거기서 남편을 만나 전문인 선교사 훈련을 받고 3년 후 모잠비크로 가게 됐다. 모잠비크는 공산주의의 영향을 받고 있다. 선교지는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오지이다. 10년 사역하는 가운데 마을이 형성됐다. 지역 아이들이 교회를 다니게 되면서 교회가 활성화됐다. 아이를 통해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일을 경험했다. 아이들을 위한 유치원 사역을 하게 됐다. 모잠비크는 9개월간 덥고 습하다. 곤충으로 인해 피부가 가렵고, 물이 깨끗하지 못하다. 불을 피워 밥을 먹고 사는 등 초기에 많이 고달펐다. 당시 한국 선교사들하고 교제하지 못해 외로웠다. 외국인 남편과 사는 것이기에 생기는 어려움도 있다. 여러가지로 힘들었는데 그것이 사역이고 삶이라고 생각하고 버틴 것 같다. 지금에야 그 당시에 ‘눈물의 골짜기’를 보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면서 연약한 믿음을 붙잡아 주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고 있다. 지금은 믿음도 나약한 가운데 있다. 그러나 인도하실 하나님을 붙잡고 살고 있다. 살고 있는 지역에 전기가 없어 많이 힘들었는데 작년에 비로소 전기가 들어왔고, 10년만에 아이들이 청년이 되어 믿음의 리더로 세워졌다. 감사한 사람으로는 남편이며 함께 교제를 했던 다른 선교사였다. 그 선교사도 현지인과 결혼한 여자 선교사였는데 많은 위로가 됐다"고 말했다. 아마릴도 실라스 마가이아 선교사가 "기쁨의 눈물이 난다. 그동안의 사역을 나누게 되어 감사하다. 시37:7말씀으로 살고 있다. 제 삶이 어려워 사역자가 될 상황이 아니었는데 어머니가 늘 신앙으로 인도했다. 과거 코미디언이었다. 그런데 보수를 술로 받아 문제가 있었다. 그러다 방송 코미디언이 될 기회가 왔는데 그때 남아공에서 신학을 공부할 기회도 왔기에 신학공부를 하기로 했다. 이후 어디로 갈지 모르고 가서 전도를 했다. 아버지는 사역을 반대했고 어머니는 지지했다. 열악했지만 열심히 전도했다. 3명의 아이가 자라 교회의 일꾼이 됐다. 이후 한 선교사님이 교회를 지을 수 있는 재료를 주어 건축비도 없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지어졌다. 현지인들은 교회를 통해 도움을 받을 마음으로 오게 된다. 그래서 교회를 짓다가 떠나기도했다. 하지만 사역의 열매는 마을 사람들이 이단을 떠나 신자가 됐다는 것이다. 신자들이 사역의 열매이다. 어머니는 하나님을 신뢰하라고 늘 말씀하셨다. 저는 늘 주님을 신뢰한다"고 말했다. 이어 모잠비크의 평안을 위해서(북부지역에 테러가 빈번함), 무슬림이 많은데 복음화를 위해서, 가족의 건강과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위해서 간절히 합심기도 후 아마릴도 실라스 마가이아 선교사의 축도로 마치고 정성껏 준비한 애찬을 나누며 교제했다. 믿음의 기업 본죽·본아이에프는 이처럼 매주 100여명의 선교사를 위한 예배를 드리고 따뜻한 점심을 제공하며 참석자들에게 죽 교환권을 제공하고 있다. 아울러 선교사들에게 게스트 하우스를 제공하는 등 물심양면으로 선교사역에 동참하는 하나님의 귀한 기업이다.
    • 선교
    • 국외선교
    2023-06-14
  • 선교동행예배-루마니아 송정렬·전효정 선교사 간증
    믿음의 기업 본죽·본아이에프가 주관하는 「선교동행예배」가 6월 7일 오전 10시 40분 양천로에 소재한 본월드미션 센터에서 있었다. 강찬 찬양 사역자의 찬양 인도 후 00국 김0애 선교사가 기도한 후 브라질 조경미 선교사가 특송했다. 루마니아 송정렬, 전효정 선교사 부부가 고후 2:12-14을 본문으로 ‘개선 행렬에 참가시켜 주신 하나님’이란 제목으로 선교 간증했다. 송정렬 선교사가 “2001년도에 튀르키예에 갔는데 2021년 초에 영구추방 당해 1년 6개월 안식년을 보내고 작년 9월에 루마니아로 가게 됐다. 1989년 군제대 후 중동 이슬람권 선교사로 부르심을 받았다. 이후 이슬람 선교를 준비했다. 최근 중국, 인도에서도 선교사들이 추방당했다. 선교지를 추방당하면 생활의 애환이 생긴다. 상실감이 들었다. 통상 추방 후 5년에 다시 들어갈 수 있는데 저는 영구추방을 당했다. 그래서 튀르키예에 대한 아쉬움과 그리움 그리고 좀 더 조심했어야했는가 하는 생각을 하게된다. 국내에 들어와서도 충격을 받았다. 저는 다행히 파송 교회가 주거를 마련해 주었는데 때로 주거공간이 없는 경우도 있다. 거절감의 상처가 있는데 후원교회가 후원 중단하는 경우도 있다. 한국교회가 추방된 선교사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 상처를 받기도 했는데 본문의 말씀이 큰 위로가 됐다. 추방으로 인해 때로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했다. 그런데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문제로 인해 힘들어 했지만 이후 그들이 바울이 보낸 편지로 회복했을 때 위로받고 감사하며 고린도후서를 쓰게 됐다. 현지에서 20년간 다음세대를 위해 사역했는데 이들이 다음세대 사역을 잘 하고 있다는 것을 전해 듣고 위로가 됐다. 튀르키예는 성경의 배경이 되는 지역이다. 비잔틴을 중심으로 1000년간 기독교 문화가 꽃피웠다가 1071년 이슬람이 들어와 99.8%가 이슬람화 됐다. 그러나 다음세대 사역을 하며 신앙교재를 많이 발간했는데 이를 통해 여전히 선교사역이 진행되고 있음에 감사하다. 현재는 루마니아에서 디아스포라 튀르키예인들에게 사역하고 있다. 동유럽을 중심으로 2백만 명이 넘게 퍼져있다. 이들은 자신들만의 공동체를 구성하고 있으며 이슬람을 믿고 있다. 이로인해 열악한 상황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저희는 루마니아교회와 협력해 이들에게 사역하고 있다. 이를 통해 이제야 추방당한 이유를 알게 됐다. 이슬람은 선행을 통해 천국에 간다고 가르친다. 이들에게 복음을 증거해 절반 이상 아이들이 예수님을 믿어야 천국간다고 고백해 감사했다. 두 딸이 있는데 추방으로 인해 작은 딸이 충격 받아 공황장애와 우울증을 앓고 있는데 심리학을 공부하게 됐다. 그러면서 이것이 자기를 위한 하나님의 응답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어려움을 겪고 공감하는 마음을 갖게 되어 응답이라고 고백하고 있다. 본문 14절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이기게하시고 주님의 향기를 드러내신다고 했다. 승리하신 주님을 바라보면 우리에게 승리의 기쁨을 주실 것이다”라고 말했다. 전효정 선교사가 “남편 따라 튀르키예에 무작정 따라 갔다. 10년 후 한국에 오니 너무 좋아보였다. 그래서 한국에 있고 싶었다. 그때 하나님은 ‘선교지에 있는 것이 너에게 복이라’는 말씀을 주셨다. 그래서 깨닫고 마음을 바꾸어 열심히 사역했다. 이후 다음세대들이 자라 교회 사역하는 것을 보고 너무 감사했다. 그러다 영구추방을 당해 너무나 상실감이 컸다. 그 동안 상담대학원 과정을 하며 국내에서 상담 사역을 하길 원했는데 남편과 함께 선교지 정탐을 가게됐는데 열학한 환경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런데 예배에 참석한 아이들을 볼 때 ‘아이들을 위해 너희를 사용하실 것’이라는 하나님의 마음이 들었다. 이 부르심에 따라 순종하기로 했다. 50살이 되어 루마니아어를 배우는 데 언어가 어려워 많은 어려움이 있다. 이제 ‘나만 믿고 따라오라’는 말을 오히려 남편에게 말하고 루마니아로 가게됐다. 어려웠지만 지금은 너무나 감사하게 사역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사회자의 인도에 따라 간절히 합심기도 후 송정렬 선교사의 축도로 모임을 마치고 2층에 올라가 정성껏 준비한 식사를 나누며 교제했다. 믿음의 기업 본죽·본아이에프는 이처럼 매주 선교사를 위한 예배를 드리고 따뜻한 점심을 제공하며 참석자들에게 죽 교환권을 제공하고 있다. 아울러 선교사들에게 게스트 하우스를 제공하는 등 물심양면으로 선교사역에 동참하는 하나님의 귀한 기업이다. 사역소개 영상
    • 선교
    • 국외선교
    2023-06-07
  • 인도선교편지 - 김계응 · 오금희 선교사
    2020년 1월, 10년째 하는 마을 클럽 대항 축구 사역을 끝내고 잠시 쉬고 오려고 나간 태국에서 팬데믹을 맞았고 본의 아니게 긴 쉼과 재충전의 시간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지난 14년간의 사역을 깊이 돌아보는 시간이었고, 최선을 다한다고 했지만, 무지하고 부족해서 잘못한 것들이 많았고, 후회되는 것들을 어떻게 보충할 수 있을까? 새로운 각오를 두고 곧 들어갈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엄청난 긴 시간을 편안하고 좋은 환경에서 보내게 되었습니다. 선교사가 현장에 없으니 편안한 환경이 가시방석 같고, 이러다가 솥에 서서히 삶아지면서 죽어가는 개구리가 되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이 들었습니다. 나태해지지 않으려고 몸부림을 치며 인도 들어갈 수 있는 비자를 연구했으나 비즈니스 비자와 학생비자 밖에는 길이 없었습니다. 지난 1월 자다 풀 대학 방글라를 배우는 어학코스로 입학허가를 받았고, 우여곡절 끝에 학생비자를 받게 되었습니다. 다시 한번 처음 선교 떠날 때 붙잡은 사도행전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며 새 각오로 입국하였습니다. 이민국을 통과할 때 70 중반의 나이에 학생비자가 이해가 안 되는 이민국 직원이 모든 사람을 다 보내고 우리 부부만 남겨 놓고 수많은 질문 끝에 결국은 입국을 허락했습니다. 할렐루야 공항 문을 나서니 후끈한 찜통더위와 메케한 매연 냄새, 선명하게 들리는 방글라를 들으니 드디어 우리가 있어야 할 곳에 왔다고 하는 안도감과 한편 습기 100%인 더위와 매연과 벌레를 잘 견디어 낼 수 있을까 하는 불안감이 교차하였습니다. 감사하게도 가구가 대강 있는 집을 구하게 되었는데 입주한 지 10일이 지나도록 가스가 연결되지 않아 컵라면을 원 없이 실컷 먹었습니다. 4월 6일 동역하는 최헌주 목사님이 입국하여 8일 사역지 람강가강에 함께 내려갔습니다. 부활절 예배에 1년 만에 성찬과 세례식을 하였습니다. 보노샴너골 섬 사역자로 키우는 "수깐도 다스"가 성경학교에 공부하러 간 동안 홀로 사는 70이 넘은 할머니가 손주를 위해 기도하러 매일 새벽예배에 나오다가 믿음을 고백하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4월 10일(월요일)부터 시작된 청년부 수련회는 "예수님을 알고 예수님을 알리자"라는 제목으로 3일간 진행되는 동안 40여 명의 청년들이 참석하였는데 오전에는 성경 개관에 관한 강의와 오후에는 예배와 찬양과 기도로 성령의 임재를 경험하는 시간이었습니다. 대부분 청년이 드르보바잘 교회의 초창기 때 5~6세부터 과외 학교에서 자라나서 지금은 교회의 든든한 일꾼이 된 청년들입니다. 바라기는 말씀으로 잘 성장해서 도시에 직장을 가지면서 교회를 떠나든지 결혼해서 타지역으로 가더라도 믿음을 가지고 있는 곳에서 선교사의 역할을 감당하는 사람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기쁜 소식은 교회의 안수집사 "산토스 고로이"의 무남독녀 딸인 뿌스폰잘리가 켈커타에 있는 윌리엄 케리 신학교를 졸업하였습니다. 앞으로 1년간은 드루보바잘 교회에서 전도사로 훈련받고 그다음 해 신학 대학원에 공부하러 갈 예정입니다. 주님의 뜻이 있으면 계속 공부시켜 신학대 교수를 만들 계획입니다. 초등학교 4학년 때에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공부를 그만두고 건축 현장에서 노동자로 살면서 배우지 못한 한을 딸이 대신해 주어 산토스 집사의 큰 기쁨이 되는 졸업식이었습니다. 저희는 태국에서 올 때 다 버리고 옷가지와 양념 꼭 필요한 것 몇 개 가지고 왔는데 무게 때문에 된장 고추장을 못 가지고 와서 못내 아쉬웠지만 여기에 오니 마침 한국으로 철수하는 선교사 가정이 있어서 필요한 것을 넘치게 받았습니다. 재적응에 필요한 모든 것을 여러 통로를 통해 공급받으면서 "필요를 채우시는 하나님"을 또 경험하며 이곳에서의 삶을 온전히 하나님께 의탁합니다. 기도하는 것은 건강하여 남에게 짐이 되지 않고 우리 부부가 있는 곳이 하나님의 나라가 되며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시간 동안 이 사람들과 함께 사랑을 가지고 기쁘게 살며, 지금까지의 사역을 잘 정리 정돈하여 아름답게 마무리하고 선한 영향력을 남기고 후회 없이 떠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지금까지 오랜 시간 동안 성실하게 저희를 위해 기도와 물질로 동행하여 주신 분들께 머리 숙여 감사를 드리며~~2023년 4월 인도 콜카타에서 김계은 오금희 선교사 올림
    • 선교
    • 국외선교
    2023-04-26
  • 인도 선교 소식
    하나님이여 민족들로 주를 찬송케 하시며 모든 민족으로 주를 찬송케 하소서 (시편 67편 3절)) 세상이 온통 비대면이 일상화되고 디지털 세상이 되었습니다. 사람들과의 관계가 소원해졌고 나라 간의 왕래가 어려워졌습니다. 이러한 시대에 선교의 길이 막히는 것 같으나 하나님의 오묘한 뜻은 그 가운데서 막히지 아니하고 역사하고 계시는 람강가 현장을 보고 드립니다. 저희 부부는 8월 17일 인도 땅에 무사히 들어왔습니다. 지난 3월 켈커타 공항에서 사역지를 눈앞에 두고 입국거부를 당한 뒤, 늘 언제 어떻게 들어갈 수 있을까? 노심초사 염려하였지만, 이번에는 비자도 하나님의 은혜로 어려운 상황 가운데서도 쉽게 받게 되었습니다. 여권에 지난번 입국거부 도장이 찍혀 있어서 이민국을 통과할 때 예상되는 모든 질문에 대답할 말을 철저하게 준비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무 질문도 없이 이민국을 너무 쉽게 통과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이민국 직원의 눈을 가려주신 것 같습니다. 꿈에도 그리던 사역지에 도착하여 보고싶은 얼굴들을 만나고 우리가 떠나 있었던 지난 2년 7개월 간 하나님이 어떻게 인도하셨는지를 우리 눈으로 보고 사역자들의 보고를 듣게 되었습니다. 주일 예배를 드리는데 데보브로또 고로이 목사님이 초신자들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말씀을 쉽게 잘 전하고 있고, 엄마들이 예배당 뒤편까지 그득히 앉아 있는 것을 보니 너무 신기했습니다. 예배 중에 “내가 시작했다” 라고 하나님이 감동을 주셔서 하나님이 시작하셨으니 어떠한 상황에서도 람강가 사역을 끝까지 이루어 가시겠구나 생각하니 감사의 눈물이 한없이 흘렀습니다. 2년 7개월의 시간속에서 교회학교 아동들이 키가 얼마나 많이 자랐는지 몰라보게 되었고 청년이 되어 각자 역할을 감당하고 있는 것이 너무 기특했습니다. 잠 많은 시기인데 새벽기도 나와서 기도 인도도 하고, 어린이 예배에 사회를 보는 청년도 있고, 장년예배에 찬양팀을 만들어 예배인도도 하고, 교회 화장실 청소도 맡아서 깨끗하게 관리해 놓은 것을 보니 멀리서 나마 날마다 머리 박고 간이 절이도록 기도한 것이 하나도 헛되지 않고 하나님이 아름답게 키우셨습니다. 18세 이상 된 청년들은 전도훈련 받고 마을에 새 소식반을 잘 인도하고 있었습니다. 지금은 5곳인데 해마다 늘려 나갈 계획이고 일년마다 장소를 바꾸어서 여러 곳에서 복음의 소식을 전할 계획입니다. 교회가 세워진 후 지난 10여년의 시간 속에서 자녀들을 통해 교회에 출석하게 된 엄마들의 믿음이 많이 자랐습니다. 산토스 안수집사의 지도아래 글자를 아는 엄마들을 주축으로 자기집을 오픈하고 글자를 가르쳐 주면서 말씀과 찬양도 가르치면서 결속력을 다지고 있습니다. 지금 두 팀으로 약 30여명이 모이는데 계속 지도자를 세워 장소를 늘려 나갈 예정입니다. 거의 1년 전부터 새벽기도에 나오는 10여명의 엄마들이 매일 말씀과 기도로 훈련을 받고 있습니다. 새벽예배에 나온 엄마들이 “다시는 죄악의 길로 절대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찬양을 힘차게 부르는 것을 보니 이 힌두 땅에서 하나님이 하셨음을 확신하게 됩니다. 데보브로또 고로이목사님이 주일 장년 예배뿐만 아니라 아동예배를 맡아 성경비디오를 보여주며 말씀을 전하는데, 재미있는 것이 없는 시골에서 아이들이 너무 재미있게 말씀을 배우고 있고 아동 부 예배에 40~50여명이 모이고 매주 새로 오는 아동들이 늘어나고 있어 소망이 보입니다. 주일예배를 마치고 보노샴너골 섬교회에 가보니 아직은 성도들이 많지는 않지만 초창기부터 어린자녀를 데리고 나오던 성도 몇 가정이 이제 그 아이들이 자라 고등학생이 되었고, 아무도 강요하지 않았는데 인도자도 없이 자기네들끼리 모여 새벽예배를 드리고 학교로 간다는 소식을 듣고 감동하였습니다.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그 중에 공부를 뛰어나게 잘하던 “리야스리 사몬또”가 며칠전에 국립 간호대학교에 합격하였습니다. 시골에서 도시에 있는 국립간호대학교를 가는 것은 우리나라에서 의대를 가는 것만큼 어렵습니다. 졸업하면 국립병원에 취직이 되고 평생 연금을 받을 수 있다고 합니다. 섬교회에서 한 명의 희망 샘플이 나옴으로 온 섬에 학부모와 아동들에게 희망이 생겼습니다. 교회가 그 힌두 섬마을에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코로나로 인해 우리가 사역지에 들어가지 못해 모든 것이 정지될 것 같았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상황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일을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교사가 선교지에 있으므로 해야 할 일이 보입니다. 3년 동안 교회 관리를 하지 못해 창문과 문들이 비와 바닷바람에 칠이 군데 군데 벗겨져서 흉측하게 되어 있어 마음이 아프고, 공부 잘하는 아동들은 격려해서 전문직을 가지도록 대학을 보내줘야 하고, 달리는 말에 채찍을 가하듯 잘하고 있는 가운데 격려하며 시너지 역할을 감당하기 원합니다. 이번에는 여행비자로 들어갔지만 장기비자를 받기위해 자다푸르 대학 어학원에 11월에 학생등록을 신청하려 합니다. 내년 1월에 입학허가가 되면 학생비자를 받게 됩니다. 마음은 선교지에서 죽기를 원하지만,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시간까지 생명을 다하려 합니다. 기도제목은 1, 데보브로또 고로이목사님이 함께 교회를 섬길 합당한 아내를 만나도록. 2, 교회가 재정적으로 자립할 수 있도록. 3, 저희 부부가 장기로 체류할 수 있는 비자를 얻도록. 늘 기도와 물질로 후원해 주시는 기도의 동역자님께 무한한 감사의 마음을 전해 드리며 김계응 오금희 선교사 올림
    • 선교
    • 국외선교
    2023-01-22
  • 만만만 선교운동에 동참합시다!
    총회세계선교회 GMS(이사장 박재신 목사)가 교단과 함께하는 세계선교운동을 실시한다. GMS는 전 세계 97개 나라에서 1433 가정 2579명의 선교사들이 사역하고 있다.(2022년 12월 말 기준) 현재 GMS는 비자발적 철수와 팬데믹, 정년은퇴, 후원 중단과 건강악화로 인한 중도탈락의 이유로 선교사들의 수적인 감소가 진행되고 있다. 사역적으로는 장기전으로 진행되고 있는 전쟁과 내전,정국 불안 등으로 인해 그 지역(우크라이나, 러시아, 미얀마, 아이티 등)에서 사역하고 있는 선교사들이 신분적, 심리적, 경제적, 사역적인 어려움에 처해 있다. 그 외의 지역에서도 세계적인 경제 불황, 금리 인상, 달러화 강세, 물가 급등(아르헨티나, 스리랑카, 튀르키예, 라오스 등)으로 많은 선교사들이 사역의 어려움을 겪고 있다. 또한 팬데믹으로 인한 영향 탓에 한국교회는 수적인 감소와 재정적인 어려움으로 세계선교에 대한 열의가 많이 식고 있다. 이에 교단내의 모든 교회들이 선교에 동참하게 해 교회의 본질을 회복하게 하고, 지상명령의 수행을 위한 도약의 전기를 마련하고자 하는 것이다. 현재 교단 내의 교회수는 1만1262개이다.(2022년 10월 기준)이 가운데 GMS를 통해 선교사를 단독 파송하는 교회는 608곳이고, 선교사를 후원하는 협력교회는 1570교회이다. 파송과 협력을 하는 교회의 합이 2178개로 전체 교단 교회의 19.3%에 불과하다. 우리 교단의 전체 교회 가운데 총회 GMS와 동역하는 교회가 20%도 못 미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일부 교회들이 교단 GMS 선교회가 아닌 선교단체를 돕는다고 할지라도 나머지 80%의 교회들이 세계선교에 동참 혹은 동역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만만만 선교운동의 비전은 GMS선교에 동참하지 못했던 교회들을 동원해 교단 내의 모든 교회들과 함께 세계선교를 하는 것이다. 만만만 운동의 핵심가치는 경제적인 여건으로 인해 세계선교에 동역하지 못했던 교회와 성도들에게 큰 부담을 주지 않고 모두가 함께 동참하도록 하는 데에 있다. 이에 GMS는 교단의 모든 교회들을 세계복음화를 수행하는 선교사명에 동참하도록 하기 위해 만만만 선교운동을 실시하고 있다. 만만만 선교운동은 선교에 참여하지 않고 있는 1만교회, 1만성도가 매월 1만원씩 GMS에 후원금을 내는 운동이다. 만만만 운동의 비전은 GMS 선교에 동참하지 못했던 교단 내의 모든 교회들과 함께 세계선교를 하는 것이다. 후원 링크 http://go.missionfund.org/gms10000 만만만 선교운동의 핵심 가치는 경제적인 여건으로 인해 세계선교에 동역하지 못했던 교회와 성도들에게 큰 부담을 주지 않고 모두가 동참하도록 하는 데 있다. 월 1만원은 한 달에 커피 2잔 정도의 금액으로 모든 교회들이 큰 부담을 갖지 않고 누구나 참여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만만만 선교운동을 통해 모든 교회들이 선교에 동역함으로 교회와 성도들에게 자부심을 주고, 세계선교에 한 부분의 역할을 하도록 함으로 세계선교에 큰 모멘텀을 이루고자 하는 것이다. 만만만 선교 후원금은 선교사들의 긴급 의료발생, 재난, 전쟁, 사고 등을 위한 긴급위기 관리기금, 은퇴 선교사들의 주택과 연금, 후원 부족 선교사와 MK의 복지지원, 선교사 계속교육, 다음세대 훈련 및 파송 지원, 통일 선교와 이주민 선교, 디지털 선교를 위해 사용된다. 모금은 만만만 선교운동의 참여 확산과 모금의 투명성을 위해 기독교 모금단체인 미션펀드를 통해 하게 된다. 박재신 이사장은 "만만만 선교운동은 우리 교단 내 모든 교회들이 GMS와 함께 세계선교에 도약할 수 있게 하는 선교운동으로 농어촌 작은 교회나 개척교회와 성도들이 큰 부담 없이 매월 1만원의 헌금으로 참여해 '우리도 선교를 한다'는 자부심과 긍지를 갖게 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또 “이제는 우리 교단이 교회 수나 역사만이 장자교단으로서의 이유와 자랑이 아니라 예수님의 지상명령이요 교회 본질의 사명인 세계선교에 모든 교회들이 동참하는 것이 자랑이 돼 하나님께서 독노회부터 우리 교단에 주신 선교적 교단의 모습을 회복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의 전환을 이뤄야 한다"라며, "만만만 선교운동은 우리 교단과 한국교회 전체에 큰 부흥을 가져오게 할 것"이라고 밝혔다. (본 기자는 '만만만 선교운동'에 미력이나마 동참하기 위해 이 기사를 만들었으며, 자비로 모든 총대들에게 문자를 보내 홍보토록 하겠습니다)
    • 선교
    • 국외선교
    2023-01-05

문화 검색결과

  • 옥수수 파종
    옥수수 파종 옥수수 두 알을 땅을 파고 묻는다. 끝! 어제 10년 같이 산 개를 장사했다. 밤나무 언덕에 땅 파고 사체 넣고 묻는다. 끝! 장례식도 비슷하다. 땅 파고 넣고 묻는다. 끝! 성도의 삶을 땅에 묻힌 밀알이라 했다. 땅에서 썩어 열매 맺는다. 땅에 묻히는 게 영광이다. 흙으로 가려지는게 시작이다. 나머지는 생명을 주관하는 주의 몫이다.
    • 문화
    • 포토에세이
    2024-03-30
  • 꽃 - 손근식 장로
    한 주간 피우기 위하여 일년을 준비하다...
    • 문화
    • 포토에세이
    2023-04-25
  • 「너 하나님의 사람아」 - 성지순례 후 아내의 고백시
    햇볕 따스한 날 베낭메고 나서며 내가 주를 더욱 알기 원하나이다 설레임 가득품고 하늘을 날던 너 하나님의 사람아 칠흙같은 어둠을 가르고 가난의 기운 가득한 그곳에 죄악된 내발을 하나 더 보태며 이 땅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만나길 원하던 너 하나님의 사람아 척박한 그 땅 새벽녘에 어디선가 들려오던 옆 농가의 닭 울음소리 베드로의 심정으로 무언가를 회개하며 코끝 찡한 눈물을 떠오르는 태양속에 감추던 너 하나님의 사람아 하나 둘 맞잡은 형제 자매 뜨거운 손은 거대한 사랑의 고리가 되어 사막의 모랫바람 뜨거운 불볕조차 꽁꽁 묶어 버리고 때로는 하하호호 때로는 영차영차 천길 바윗길도 호잇짜 뛰어넘던 너 하나님의 사람아 참혹한 십자가를 마주하고 서서 먹먹한 가슴 차오르는 눈물샘을 그 누우셨던 돌단위에 쏟아 붓고는 떨리는 내 작은 입술의 가증한 찬양이 그 거룩함의 극치 앞에 가당치 않지만 오히려 다시 그 십자가로 돌아갈 모순된 용기를 내보던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제 그 땅의 성곽마다 새겨진 이름 그 땅의 골짝마다 새겨진 이름 그 땅의 돌덩이마다 새겨진 그 이름 예수… 가슴속 한켠에 묵직하게 품고 세상속의 예수로 살아내기 원하는 너 하나님의 사람아 그 땅의 주인 그 땅의 통치자 그 땅에 내린 축복의 열매가 너의 베낭에 가득 담겼구나 내가 밟은 땅 내가 가른 하늘 온 우주가 너에게 축복이었다
    • 문화
    • 포토에세이
    2023-02-20
  • 〖시〗 인간연어
    인간연어 나는 인간연어다. 어렸을 때 성장하던 곳을 군목으로 입대하면서 떠났다. 이후 4년만에 전역해 혜화동에서 부목사로 3년, 인사동에서 5년을 보냈다. 그리고 후암동에서 15년간 담임하다 사임하고 부모님 계신 곳으로 돌아왔다. 야구 타자가 3루까지 돌고 홈으로 돌아온 것과 같다. 내가 어린시절을 보냈던 곳이다. 그래서 편하다. 강에서 태어난 연어가 바다에서 생을 살다 다시 강으로돌아온 것과 같다. 주위 곳곳에 내 추억이 살아 있다. 나는 행복한 인간연어다.
    • 문화
    • 포토에세이
    2023-02-11
  • 이것이 인간사인가? - 손근식 장로
    한장 남았던 달력을 뒤로하고 새로운 하늘과 땅을 만나고 있다. 평화롭고 행복함으로 채워지는 시간들이 되면 좋으련만 세상사 끝없는 다툼과 분쟁의 연속이 미리 들여다 보인다. 이것이 인간사인가? 그렇지 않을 수 도 충분히 있는데 인간의 죄성은 완력을 부른다.
    • 문화
    • 포토에세이
    2023-01-11
  • 탐 앤 탐스 인생 - 손근식 장로
    많은 이들이 여기로 와서 탐Tam하고 또and 탐Tam하는 곳이더라. 무엇을 왜...... 다 부질없는 일이라고 깨달았으나 미련을 남겨두고 우리는 또 문을 나선다.
    • 문화
    • 포토에세이
    2022-12-30
  • 미적분
    학창 시절 수학은 이해불가였다. 그런데도 고등학교 때 이과 가는 바람에 죽는 줄 알았다. 그나마 다른 과목 때문에 총신대 신학과에 3대1 경쟁을 뚫고 입학했었으니 감사하다. 수학에 미적분이라는게 있나본데 예나 지금이나 이해불가 그래서 지금도 미적미적 거리나 보다.
    • 문화
    • 포토에세이
    2022-11-04
  • 피자집에서 빵 터진 위트
    피자집에 걸린 글 5번을 보고서 빵 터졌다. 빵 터지게하는 피자집 답답한 세상에 빵 터질 일, 빵 터질 글이 많았으면 좋겠다. 빵이라도 먹어야겠다.
    • 문화
    • 포토에세이
    2022-11-02
  • 기대지 마세요
    기대지 마세요 사람에게 기댑니다. 정치가에게 기댑니다. 돈에 기댑니다. 권력에 기댑니다. 명예에 기댑니다. 나 자신에게 기댑니다. 그러나 그러나 기대지 마세요. 주님께만 기댑니다! [사2:22]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셈할 가치가 어디 있느냐
    • 문화
    • 포토에세이
    2022-11-02
  • 강의창 장로 부부 시
    강의창 장로 시 에벤에셀 참으로 오랜 세월 방황하며 허우적거릴 때 미스바로 모여라 부르는 소리 가야만 된다는 거역할 수 없는 부르심에 제단 앞에 무릎 꿇었습니다. 회개의 눈물은 얼굴에 홍수를 이루고 입술이 열리며 알 수 없는 천국 방언이 쉴새 없이 터져 나왔습니다 이후로부터 모리아 산 이삭의 제물처럼 생(生)과 사(死)를 당신께 맡겼습니다 이제는 달려 갈길 다 가고 여기까지 도우신 기념비를 지워지지 않는 종이에 아로새깁니다 여명(黎明) 밤 새워 진통을 앓던 어둠은 동해에 떠오르는 붉은 태양에 희망의 나래를 펴고 날아든다 그림자 없는 어둠을 헤메이며 밤 새워 토해 내던 역겨운 세월들 하늘 눈물 쏟아 내고 눈이 열렸다 가지 끝에 매달려온 가느다란 빛줄기는 검붉은 심장을 터트리고 여명(黎明)의 호흡으로 벅차 오른다 해당화 이른 아침 이슬 머금은 해당화 장독 항아리 여는 엄마와 눈 맞춤한다 인생살이 고달파도 장독대에 가면 마음의 부자 해당화 꽃향기에 취해 얼굴에 미소 지으며 간장 된장 퍼와서 식구들에게 고운 정 퍼붓던 엄마 엄마의 향기 지금도 내 마음에 피어오른다 홍수임 권사 시 아버지 (1) 이름만 불러도 마음 깊은 곳에서 사랑의 울림이 메아리쳐 옵니다. 밤늦게 귀가할 땐 딸 사랑에 잠 못 이루고 무거운 발걸음으로 마당에 서성이셨다. 딸 발자국 소리 들려오면 모르는 척 방에 들어가 등잔불 끄고 아침이 오면 말없이 일거리 주시며 마음으로 안아주시던 아버지 예수 부활 (4행시) 예수 믿고 구원됨이 복중에 제일 큰 복이요 수확 중에 제일 많은 수확이다 부하게 넘치는 축복으로 하나님 영광을 위해 활용하여 많은 상급으로 선한 사업에 부요하길 원합니다.
    • 문화
    • 포토에세이
    2022-10-28
비밀번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