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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고】여성 안수 문제,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1. 안타까운 108회 총회의 갈지(之)자 행보 이번 108회 총회에서 여성 사역자 위원회는 여성들에게도 강도사가 될 수 있는 길을 제안하였고, 이를 이의 없이 총회는 받아들였다. 이러한 결정은 우리 총회가 획기적인 방향으로 걸어갈 수 있는 놀라운 진전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는 총회 마지막 날 번복되었다. 없던 일이 되었고, 더 나아가 아예 여성들이 안수에 대해서는 꿈도 꾸지 못하도록 다른 이름의 직책을 만들어주겠다는 것으로 방향을 잡았다. “교육사”, “신학사”라는 이름으로 설교할 수 있게 해주겠다는 것인데, 이는 목사 안수는 아예 가능하지 않도록 못박아 버리는 일로 보여진다. 이러한 갈지자 행보는 더더욱 여성들로 하여금 분노하게 만들고, 교단을 떠나는 일이 가속화될 것이라고 예상된다. 이러한 결정이 아쉬운 것은 여성이 교회에서 잠잠해야 하기 때문에 목사 안수를 줄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도, 정작 “교육사”, “신학사”라는 이름으로 설교할 수 있게 하겠다는 자기모순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2. 교단은 이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구해야 한다 우리 교단의 현행 헌법에서 여성 안수를 허용하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여성 안수에 대해서 논의하는 것은 잘못이 아니다. 종종 여성안수를 주장하려거든 그런 교단으로 떠나가라고 겁박하는 분들이 있다. 그들은 스스로를 칼빈주의자라고 하는데, 칼빈주의의 요체는 무엇보다도 성경이 최고의 기준이며, 그 어느 것도(교단헌법과 교리교과서 등등) 성경과 동등한 권위를 갖지 못하기에, 모든 것이 성경의 판단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칼빈주의자라면 성경의 가르침을 들어서 반박해야지, 교단 헌법으로 겁박한다면 너무 궁색해 보일 뿐이다. 성경만이 우리의 신앙과 행위에 최고의 기준이며, 다른 모든 것은 성경의 판단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 우리 교단의 가장 중요한 원칙이다. 성경 외에는 그 어느 것도 무오(無誤)한 것은 없으며, 실제로 우리 교단의 헌법은 여러 번 수정을 해왔다. 그리고 심지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안에 있는 행위언약이 성경의 가르침에 부합하는지 질문이 들어왔을 때, 왜 신앙고백서를 따르지 않느냐고 정죄하지 않고 성경을 다시 한번 살펴보자고 입장을 정리했다. 여성 안수의 문제는 과연 성경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것이다. 여성에게 안수를 해야 한다는 것은 단순히 시대의 조류를 따르는 것이라고 폄하해 버릴 것이 아니다. 우리가 시대의 조류를 따라서는 안 되고, 성경이 최고의 기준이라고 하는 원칙은 아주 소중하다. 우리는 시대의 조류를 따를 것이 아니라, 성경이 가라고 하는 데까지 가야 하고, 성경이 금한다면 아무리 세상이 바뀌어도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야 한다. 문제는 과연 여성에게 안수하는 문제가 시대 조류에 편승한 것인가이다. 여성에게 안수하자는 주장이 시대의 조류에 편승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사실 과거에는 과거라는 시대의 조류에 따라 여성에게 안수를 하지 않았다는 것을 인정하는 셈이다. 무엇보다도 성경에서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물론 성경은 분명하게 “여성은 교회에서 잠잠하라”(고전 14:34)고 되어 있다. 그렇게 성경이 금하고 있는데, 여성 안수가 어떻게 가능하다는 말인지 쉽게 납득할 수 없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면, 즉 만일 여성이 교회에서 잠잠해야 한다는 이 말씀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분명하게 믿는다면, 지금 당장 여성들이 하고 있는 대부분의 모든 사역들을 교회에서 금지해야 할 것이다. 구역장도 안 되고, 세미나 강사로 세워서도 안되고, 교사도 할 수 없다. 만일 이게 하나님의 뜻이라고 진정으로 믿는다면 말이다. 하지만 이것이 여성으로 하여금 교회 내에서 성직자로 세워질 수 없는 근거 구절로 사용될 수 없다. 왜냐하면 “성경 전체로”(tota scriptura)의 원칙 때문이다. 성경 구절 한두 구절에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 전체의 가르침이 무엇인지를 살펴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성경 전체로의 원칙이 무너지고 성경의 한두 구절에 의존하면, 하나님의 뜻과 위배되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예를 들어,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만을 선택했다고 말하고 있으며, 모압과 암몬 민족은 하나님의 회중에 “영원히” 들어올 수 없다고 되어 있고, 더 나아가 예수님은 오직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에게로만 보냄을 받았다고 말씀하셨다. 이런 말씀들만 보면 이방인들에게 선교를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완전 위배되는 것이 될 것이다. 하지만 성경 전체의 가르침에서 보면 선교가 하나님의 뜻임을 알 수 있다. 심지어 모압 여인인 룻도 하나님의 회중 속으로 들어와 메시야의 조상이 되었다. 그러니까 성경 한두 구절만 보면 안 되는 것이다. 성경 전체의 가르침이 무엇인가를 구해야 하는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신 구속사역이 어떤 변화를 가져왔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그러한 관점 때문에 초대교회 예루살렘 총회는 할례를 이방인들에게 요구할 필요가 없다는 가장 진취적인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이미 하나님은 여성인 드보라와 훌다를 지도자와 선지자로 세웠고, 고린도전서 11장에서는 여성들이 교회내에서 예언(하나님의 뜻을 풀어 가르치는 것)하는 것 자체를 금하지 않고 머리에 두건만 쓴다면 예언할 수 있다고 하였다. 사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구원은 요엘 선지자의 예언을 결국 성취시켰다. 즉 그때가 되면 “내가 내 영을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그들이 예언할 것”이라고 하였는데, 오순절 때 이미 성취되었다. 이제는 여성들도 하나님의 뜻을 풀어 가르칠 수 있게 하신 것이다. 종종 예언과 가르침은 다르다고 반론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고린도전서 14:31에서는 예언의 목적이 가르치고 권면하는 것이라고 분명하게 못박고 있다. “너희는 다 모든 사람으로 ‘배우게’ 하고 모든 사람으로 ‘권면을 받게’ 하기 위하여 하나씩 하나씩 예언할 수 있느니라.” 예수님께서 12제자 중에 여성을 한 명도 세우지 않았다는 사실이 반론의 근거일 수 없다. 물론 예수님께서 여성도 12 제자 가운데 포함시키셨더라면 논란 자체가 정리되었겠지만, 예수님께서 남자들만 제자로 세우셨다는 것이 여성은 안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할 필요가 없다. 사실 따지고 보면 12제자 중에는 사마리아 출신이 한 명도 없고, 더 나아가 이방인도 한 명도 없었다. 그러면 오로지 유대인만 사역자가 될 수 있다는 뜻일까? 한국 사람이 성직자를 하겠다고 하는 것은 잘못이 되는 것일까? 개혁주의의 원조격인 칼뱅도 오로지 남자들만이 사역을 할 수 있다고 보았다는 것도 반론의 근거일 수 없다. 칼뱅은 아주 뛰어난 신학자이지만, 완벽한 사람은 아니었다. 칼뱅의 입장이 모두 다 100% 맞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칼뱅은 성경의 가르침이 비추어보아서 자신의 주장이 잘못되었다면 자신의 주장을 따르지 않아야 한다고까지 말했다. 우리가 칼뱅을 우상화해서는 안 되는 것이고, 항상 성경만이 최종적인 권위가 되어야 한다. 여성 안수를 받아들이면 결국 자유주의를 받아들이게 되지 않을까 우려가 많다. 자유주의를 받아들인 교단들이 주로 여성 안수를 시행하는 것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성 안수를 받아들인 교단이 모두가 다 자유주의화된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미국의 CRC교단, 고신교단의 모교회 격이라고 할 수 있는 화란개혁교회(31조파)도 여성 안수를 수용했다. 또한 한국 내에서도 개혁주의를 표방하는 보수교단인 백석 교단과 여러 개혁 장로교단들도 여성 안수를 받아들이고 있지만, 철저하게 자유주의를 배격하고 있다. 그 동안 이런 식의 반론은 참 많이 있었다. 주5일제 시행하면, CCM 복음송을 받아들이면, 외국과 무역을 하게 되면, 조상제사를 드리지 않으면, 부모님이 주신 머리카락을 자르면, 세상이 망할 것이라는 식의 주장이 많이 있었다. 하지만 찰싹거리는 작은 파도를 보면서, 두려움과 무서움 때문에 한 발자국도 떼지 못하면 결국 도태될 뿐이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과연 무엇이 성경 전체를 통해서 가르쳐주시는 하나님의 뜻인가일 것이다. 물론 우리와 깊은 관계가 있는 미국의 PCA, OPC 교단과 같은 곳에서도 여성 안수는 허용하지 않고 있다. 하지만 PCA, OPC 교단도 머지않은 장래에 여성 안수를 받아들이게 될 것이라고 예상한다. 왜냐하면 모두가 성경의 가르침에 순복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교단이기 때문이다. 성경을 연구하고 또 연구해보면, 여성들에게 잠잠하라고 했던 것이 당시에 있었던 일시적인 명령이었을 뿐이라는 것이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성경을 최고의 권위로 인정하고 받아들인다면, 결국 성경의 가르침을 따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수천 년 동안 여성들이 사역하는 것이 막혀 있었다는 사실도 반론의 근거일 수 없다. 안타깝게도 사람은 객관적 존재가 아니다. 그래서 자신의 환경과 문화의 영향을 받아서 성경을 해석하다 보니, 그 해석이 잘못될 수 있다. 사실 종교개혁자들은 천년이 넘도록 지속되었던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이 잘못된 것이라고 외칠 수 있었다. 아니 그 이전에 이미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중심의 종교가 순 엉터리일 뿐이며 잘못된 것이라고 외치셨다. 역사가 오래 되었다고 항상 옳은 것은 아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의 불변의 원칙은 “개혁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거하여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ecclesia reformata semper reformanda est secundum verbum dei)이다. 항상 하나님의 말씀에 다시 비추어보아서 그동안의 전통이 잘못된 것은 없는지 점검해야 한다. 전통으로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면 안 된다(마 15:3). 사실 초대교회에서도 브리스길라와 같은 여성 사역자가 있었고, 유니아라는 여성(롬 16:7)도 12 사도는 아니었지만 바나바와 같은 또는 비슷한 역할을 했던 사도였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황금의 입이라고 알려진 요한 크리소스톰(350-407)은 유니아에 대해서 “사도가 되는 것은 위대한 일인데, 그 가운데 뛰어난 자였다. 이게 얼마나 놀라운 영예의 노래인가!”라고 했다. 장로나 집사로 세우려면 “한 아내의 남편”이어야 한다는 말은 여성은 안 된다는 뜻으로 보아야 할 필요가 없다. 장로의 자격에 “방탕하다는 비난을 받거나 불순종하는 일이 없는 믿는 자녀를 둔 자라야”한다(딛 1:6)는 구절이 있지만, 결혼하지 않았거나 아직 자녀가 없다고 해서 목사나 장로 임직의 결격 사유로 보지 않는다. 이 표현은 “자녀를 두었을 경우에는”이라는 말이 생략된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 아내의 남편이어야 한다는 말은 “만일 그가 결혼한 남자라면”이라는 전제가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따라서 “한 아내의 남편”이어야 한다는 말을 여성은 안 된다는 뜻으로 확대하는 것은 잘못이다. 이 구절은 결혼 생활에 있어서 성결을 유지해야 한다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아직 교단 내에 여성 안수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다. 초대 교회 할례에 대한 의견이 분분했던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고 하면 그냥 일방적으로 밀어붙일 게 아니라, 서로 겸손하게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구해야 한다. 3. 현행 법으로도 강도사를 줄 수는 있다 부흥하고 성장하는 공동체는 모든 사람이 어떤 방식으로든 더 잘 일할 수 있게 하는 공동체이다. 망할 수밖에 없는 공동체는 대부분의 사람들의 사역을 막고 소수가 가진 그 힘을 행사하는 공동체이다. 광야에서 모세는 이드로의 제안을 받아들여 자신이 가지고 있던 재판권을 천부장, 백부장에게 나누어 주었다. 우리 교단도 여성들이 좀 더 적극적으로 사역에 참여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야 한다. 우선 총회는 여성 사역자들이 강도사 인허를 받을 수 있도록 도우면 좋겠다. 현행 헌법도 여성이 강도사가 되는 것을 명시적으로 금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정치편 제14장에 의하면, 총회가 신학 졸업생을 고시하여 노회가 강도사로 인허하도록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부분은 총회가 결의하고 받아주면 충분히 가능한 것이다. 사실 108회 총회 전에 이에 대한 합의가 어느 정도 이루어졌었다. 108회 총회의 결정이 뒤로 역행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될지 상당히 우려스럽다. 목사 안수의 문제는 총회가 좀 더 심도 있게 성경에 드러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토론해야 한다. 그 옛날 예루살렘 회의를 통해 할례를 시행하지 않아도 된다는 결론을 내렸다. 성경에는 반드시 할례를 시행해야만 한다고 되어 있지만,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이 가져온 관점으로 성경을 이해하면서 할례를 하지 않아도 된다고 결론을 내렸다. 이와 마찬가지로 총회의 역할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토론을 통해 구해야 한다. 현재 우리 교단 내에는 다양한 해석과 의견이 존재한다. 세미나, 토론회, 전문 연구 등을 병행하는 것을 통해, 서로 경청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구해야 한다. 이웃 교단인 백석은 발 빠르게 여성 안수를 허용했고, 엄청난 교단적 발전과 신학교의 발전이 있었다. 사실 많은 여성 사역자들을 이웃 교단에 빼앗긴 것도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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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0-03
  • 동네작은학교 봄학기를 마치고
    2023년도 다문화 아이들과 함께 하는 동네작은학교 봄학기를 마쳤습니다. 초등부4-6학년 아이들이 한학기 동안 노래 교실에서 배운 노래를 불러주었습니다. 꿈꾸지 않으면 사는게 아니라고 별 헤는 맘으로 없는 길 가려네 사랑하지 않으면 사는게 아니라고 설레는 마음으로 낯선길 가려 하네 아름다운 꿈꾸며 살아가는 우리 아무도 가지 않는 길 가는 우리들 누구도 꿈꾸지 못한 우리들의 세상 만들어 가네 배운다는건 꿈을 꾸는 것 가르친다는건 희망을 노래하는 것 배운다는건 꿈을 꾸는 것 가르친다는건 희망을 노래하는 것 우린 알고 있네 우린 알고 있네 배운다는건 가르친다는건 희망을 노래하는 것 아이들이 꿈을 꾸고 교사인 우리들은 희망을 노래하는 것…그런 학교를 꿈꾸며 한학기를 달려 왔습니다. 아이들이 노래를 부르는데 옆에서 지켜보며 가슴이 벅찼습니다. 먼 타국에서 한국 땅을 향해 온 어머니들이 낳은, 다문화 자녀라 불리우는 이 아이들이 꿈을 노래하는 모습에서 룻도 생각나고 나오미도 생각 났습니다. 바울이 키운 영적 아들 디모데도 떠올랐습니다. 그도 이방 아버지와 유대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다문화 출신이었죠. 이류 취급 받고, 제국에서는 주변인 처럼 살아간 저들이 하나님의 나라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한 학기 동안 꿈을 꾸듯 달려 왔습니다. 살아 있음을 느끼며, 없는 길을 만들며 그렇게 시간을 보냈습니다. 한달의 방학을 보내고 여름학기를 또 시작 합니다. 기도해 주시고, 응원해 주시고, 함께 해 주셔서 감사 드립니다. 이들이 주님의 나라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있을 아이들 입니다. 이 아이들을 위해 계속 기도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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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5-15
  • 아버지 자리
    "어버이날 선물" 어버이날인 오늘 막내딸은 늦었다고 아침에 학교태워달라고 눈치 줘서 엄마가 태워줬고 집으로 올쯤 냉면 먹고 싶다해서 아빠가 삶아 먹게했더니 깜짝 이벤트 해 주었습니다. 역삼동까지 가서 사온 어버이날 맞춤케익이라 하면서요. 노래를 듣는데 저는 자꾸 천국가신 어무이 생각나서 울컥했습니다 “아버지 자리” 1. 나는 가난한 농부의 7남매의 막내로 태어났다. 내가 태어날 때 아버지는 45세였다. 줄줄이 딸만 낳다가 느지막하게 형과 나를 3년 터울로 낳았던 아버지는 그제야 어깨에 힘을 줄 수 있었다. 늦게 낳은 막내아들이 결혼 할 때 아버지는 이미 70대 중반이셨다. 워낙 나이차가 많다보니 내게 아버지는 아버지보다 할아버지 같았다. 그 시대 아버지상은 무뚝뚝하고 엄한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래서 밥상 한번쯤은 마당으로 던졌던 것을 자랑삼아 말하던 시대였다. 우리 아버지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난 아버지에게서 단 한 번도 따뜻함, 다정함을 느끼지 못했다. 도리어 아버지는 가까이 하기에는 늘 먼데 계신 분이셨다. 배운 게 없고, 가진 것이 없던 아버지는 고단한 삶 속에서 종종 인상 쓰셨고, 걱정과 염려를 입에 달고 사셨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1년 전, 오래된 옛 집을 허물고 새 집을 지었다. 물론 농협 대출 받았다. 대출 상품은 20년 동안 원금과 이자를 나눠 갚으면 되는 농민들에게 좋은 거였다. 하지만 아버지는 새 집에 사는 기쁨보다 빚으로 인한 염려가 더 크셨다. 일찍부터 철이 든 나는 아버지를 보면서 부인할 수 없는 진리 하나를 깨달았다. 아버지는 염려가 많으시고, 돈이 없는 분이시다. 그래서 아버지의 속을 꽤나 썩인 형과는 달리 나는 착한 아이 코스프레 길을 선택해 속 썩인 일이 거의 없었다. 덕분에 어릴 때가 가장 많이 들은 소리가 ‘착하다’였다. 그때 형성된 착한 아이 이미지는 보름 전, 40년 만에 만난 중학교 동창들에게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2. 세월이 흘러 나도 아버지가 되었다. 아버지 커리어도 어느 듯 30년이 가까워진다. 어느 날, 대학 다니는 막내딸이 용돈을 좀 달라 했다. 아무 생각 없이 선뜩 지갑에서 돈을 꺼내 주는데, 속 깊은 곳에서 울컥거리며 눈시울이 붉어졌다. 왜냐면 내가 경험하지 못한 아버지 상이 내 모습 속에서 보였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공납금이나 학용품 사기 위해서 아버지에게 용돈을 요구하면 언제나 엄마가 대신하여 옆집으로 달려가 돈을 꿔와 주었다. 그렇게 아버지는 가난했고, 고단한 인생길을 사셨다. 하지만 언제나 정직하셨고 진실하셨다. 경우를 벗어난 행동과 남에게 피해 주는 것을 싫어하셨다. 더군다나 인생 후반에는 믿음에도 큰 진전을 가지면서 새벽을 깨우며 항상 기도하셨다. 지금도 새벽예배 후에 소죽을 쇠면서 콧노래로 흥얼거렸던 찬송의 소리가 들린다. ♪ ‘고요한 바다로 저 천국 향할 때 주 내게 순풍 주시니 참 감사합니다.’ 이 찬송을 부를 때마다 아버지의 모습이 떠오른다. 아버지가 없이 살아 온지도 벌써 21년째다. 누나들은 내가 나이가 먹어갈수록 아버지를 가장 많이 닮았다고 한다. 내가 나를 봐도 얼굴이 길어지면서 아버지를 닮아가는 것 같다. 요즘 아내가 나를 보면서 ‘미’라고 소리 내라고 한다. ‘미’라고 소리 내면 입 꼬리가 살짝 올라가 웃는 상이 되기 때문이다. 인상 쓰신 아버지상보다 웃는 아버지상이 보기 좋다. 3. 언제부턴가 엄혹한 사회의 톱니바퀴에 끼인 채 제자리를 맴돌며 점점 주변을 서성이는 아버지들의 늘어나고 있다. 자식을 끔찍하게 생각하면서도 표현할 줄 몰라 함께 있으면 서먹해지는 아버지, 가족들의 대화에 당최 끼지 못해 가정에서조차도 왕따 되어가는 아버지, 아내 없인 금방 폐인이 되어가는 아버지. 그래서일까? 자식들 입장에서 어머니보다 멀리 계신 분이 아버지다. 5월만 되면 평소보다 더 아버지가 그립다. 나 역시 아버지에게 다정다감하지 못한 못난 아들이었다. 또한 딸들에게도 친근하지 못한 아버지였다. 어제 딸의 손을 잡고 결혼식장에 입장하는 친구 목사를 보면서 아버지의 자리를 생각했다. 멋진 아버지로, 친근하면서 웃는 자랑스러운 아버지로 남은 삶을 살기를 다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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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5-15
  • 밀린 숙제를 하다
    오늘은 사랑하는 아내와 결혼한 지 꼭 12,000일 되는 날이었다. 주일 예배를 마친 후 그동안 바쁜 관계로 한동안 보지 못했던, 먼저 간 친구들을 만나러 가려고 길을 나섰다. 먼저 2012년 7월 13일 금요일, 신경직 목사를 먼저 하늘나라로 떠나보낸 지 벌써 올해로 만 11년 하고도 10개월째, 그리고 2017년 3월 17일 금요일, 김선호 목사를 먼저 하늘나라로 떠나 보낸 지 만 6년하고도 2개월째, 두 친구를 보고 싶어서 각각 오산리에 있는 크리스천 메모리얼 파크와 일산동구 설문동에 있는 청아공원을 찾았다. 변함없이 그 자리에 있는 신경직 목사를 보면서 잠시 옛 추억에 잠겨 묵상하고 아내와 사진 한장을 찍고, 나온 후 영산수련원에 새로 생긴 "아리아1968"이라고 하는 베이커리 카페에서 점심겸 커피한 잔과 빵으로 점심을 먹은 후 많이 변한 영산수련원과 오산리 최자실 기념 금식 기도원을 한 바퀴 돌아보았다(트레킹 길로 한 바퀴 도는데 약 30분 정도 걸리더라). 그 옛날 오산리 최자실 기념 금식기도원에서 내가 먼저 40일 금식기도를 끝낸 후 이듬해 사랑하는 아내가 이곳 최자실 기념금식기도원에서 40일 금식기도를 끝낸 적이 있었다. 아내와 나는 그때의 추억을 생각하며, 많이 변한 최자실 기념 금식기도원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면서 청아공원으로 향했다. 청아공원에 도착하여 예전대로 기독교관 1층(내 느낌엔 지하 2층 같은 느낌이지만, 그곳에서는 1층이라고 부르더라)에 위치한 <은혜홀 파> 방으로 들어갔더니 늘 그 자리에 있어야 할 김선호 목사가 보이질 않았다. 결국 사무처로 문의 후 3층의 <믿음홀 다>방으로 아들 예찬 군이 작년에(5주기 때) 옮겼다는 사실을 알았다. <믿음홀 다 A1-02 > 김선호 목사가 새롭게 자리잡고 위치한 방이다. 김선호 목사의 사진을 바라보며, 잠시 옛 추억을 생각하다가 묵상기도를 한 후 아내와 간단하게 사진 한 장을 찍고 청아공원 주변을 잠시 걸었다. 누가 가보라고 해서 온 것도 아니요, 꼭 와야만 했던 것도 아니었으나, 마음속에 이 두 친구를 보고 싶은 마음이 얼마 전부터 자리잡고 있었다. 사람의 인연이란 건, 참으로 무섭다. 끊을래야 쉽게 끊어질 수 있는 것도 아닌 것이 사람의 인연인 것 같다. 특히 "친구"라는 관계는 더욱 그런 것 같다. 차를 몰고 집으로 오면서 아내에게 이 두 친구와 지냈던 학창 시절의 추억을 잠시 이야기 해 주었다. 언젠간 나도 먼저 간 두 친구처럼 저렇게 추모공원에 들어가 자리잡고 앉아 있겠지...그때 잊지 않고 날 찾아줄 친구가 과연 몇이나 될까 생각해 본다. 아무도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면, 악착같이 친구들을 다 떠나보내고 오래 살아 남아야겠지...먼저 간 두 친구는 참 배짱도 좋다. 그렇게 먼저 가 놓고 남아 있는 우리들에게 숙제를 주는 것인가... 오늘 나는 두 친구가 내게 준 숙제를 처리하고 새로운 한 주간을 준비하러 집으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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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5-15
  • 『생활동반자법』, 무엇이 문제인가?
    2023년 4월 26일에 기본소득당 용혜인 국회의원이 새로운 법안을 발의했다. 국회의원이란 그 사람 자체가 곧 입법기관이며 법을 잘 만들라고 국회의원 본인과 보좌관에게 연간 약 8억 원의 세비를 지원하고 있다. 이처럼 많은 세비 지원과 함께 엄청난 특권을 누리는 국회의원은 나라를 위한 좋은 법을 만드는 것이 마땅한 책무이다. 그런데 이번에 용혜인이 발의한 법안을 들여다보면 나라를 위한 법이 아니라 나라를 해치고 가정을 파괴하며 우리의 미래 세대를 망치는 악하기가 이를 데 없는 나쁜 법이다. 용혜인이 발의한 『생활동반자법』이란 도대체 내용이 무엇이며 그 속에 어떤 문제점이 들어있길래 그렇게 심각하단 말인가? 그리고 용혜인은 국회의원으로서 도대체 왜 그런 악법을 발의했단 말인가? “여기 새로운 가족이 있다”라는 슬로건과 함께 용혜인이 발의한 『생활동반자법』의 정식 명칭은 『생활동반자관계에 관한 법률』인데 해당 법안은 기본소득당 용혜인 의원이 대표 발의하고 더불어민주당 강민정, 권인숙, 김두관, 김한규, 유정주, 이수진 의원, 정의당 류호정, 장혜영 의원, 진보당 강성희 의원, 무소속 윤미향 의원이 공동발의에 참여했다. 이 공동발의자들 가운데 정의당 장혜영 의원과 더불어민주당 권인숙 의원은 2020년과 2021년에 각각 차별금지법을 발의한 사람이며 그 법안은 지금도 국회에 계류중이다. 이처럼 그들은 가정을 파괴하는 일에 있어서 다 한통속이다. 『생활동반자법』의 골자는 결혼하지 않아도 성인 2명이 합의해서 동반자 관계가 되면 이들에게 혼인에 준하는 권리와 의무를 부여하는 것인데 이것은 전통적 의미의 가족을 해체하는 것이 목적이다. 이는 더불어민주당 남인순 의원과 정춘숙 의원 두 사람이 2021년에 각각 대표 발의했던 『건강가정기본법 개정안』과 큰 틀에서 별반 다를 바가 없다. 『건강가정기본법 개정안』 역시 혼인·혈연·입양으로 이뤄진 사회의 기본단위인 가족 개념을 삭제하고 다양한 형태의 가정을 인정하자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건강가정기본법 개정안』은 다수 국민의 반대에 막혀 현재 추진하지 못하는 실정이다. 용혜인이 주장하는 가족의 권리를 누리는 방법은 간단하다. 누구든지 가족이 되고 싶은 사람은 결혼하면 된다. 결혼식까지도 필요 없고 단순히 혼인신고만 해도 된다. 만일 결혼과 혼인신고 하는 것이 싫으면 혼자 살든지 마음 맞는 사람끼리 같이 살면 된다. 그런데 결혼을 하지 않은 사람에게 혼인에 준하는 권리와 의무를 부여하겠다는 것은 혼인으로 이루어지는 가족의 개념을 파괴하는 것이며 동성애를 합법화하려는 저의가 엿보인다. 이것은 전통적이고 정상적인 가족 개념과 하나님께서 명하신 결혼제도를 파괴하려는 심각한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 그렇다면 용혜인은 왜 그런 법안을 대표 발의했고 또 여기에 더불어민주당, 정의당, 진보당, 그리고 무소속 의원들까지 합세해서 공동 발의했을까? 용혜인이라는 사람을 따로 연구해보지 않았지만 이런 법안을 발의했다는 사실 한 가지만으로도 그녀는 젠더 이데올로기, 성 혁명 세력의 일원이거나 혹은 그들의 지지와 사주를 받는 자임을 알 수 있다. 성 혁명 세력이란 무엇인가? 그들은 신마르크스주의의 뿌리에서 나온 해체주의자들로서 국가와 교회와 가정이라는 기본 질서를 허무는 자들이다. 그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가정을 허무는 일에 앞장서고 있는데 성 혁명 세력이 사용하는 개념 가운데 “정상 가족 신화”라는 표현이 있다. 그들의 관점에서 전통적이고 정상적인 가족 개념은 타파해야 할 “신화” 혹은 “미신”이다. 그래서 가정을 생명처럼 지키는 교회와 성경은 그들에게 가장 큰 걸림돌이다. 지금 성 혁명 세력은 집요하고도 다양한 방법으로 가정 해체를 추진하고 있는데 몇 가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저들은 우리나라에 이미 개별적 차별금지법이 23개나 존재함에도 동성애 합법화를 포함한 『포괄적차별금지법』 제정을 시도하고 있다. 저들은 『건강가정기본법 개정안』을 통해서 결혼제도를 부정하고 가정을 허물려는 자들이다. 저들은 학생인권조례를 통해서 어린이와 청소년을 조기 성애화하고 유년기부터 성적으로 문란하게 만듦으로 우리의 자녀들을 망치려는 자들이다. 그래서 5년마다 새로 만드는 교과과정에 성 혁명 사상을 집어넣으려고 하다가 우리에게 발각되었고 우리가 사생결단 투쟁해서 바로잡아놓은 상태이다. 금번에 용혜인이 개인적 소신으로 발의했는지 혹은 성 혁명 세력의 지침에 따라 누군가 만들어준 법안에 이름만 올렸는지 명확하지 않으나, 사실이 어떠하든지 『생활동반자법』은 절대로 제정되어서는 안 되는 악법이다. 하나님은 대한민국에 이런 법이 제정되는 것을 절대로 허용하지 않으실 것이며 우리 하나님의 종들은 모두 하나님 편에 서서 이를 막아낼 것이다. (※ 해당 법안은 용혜인 의원이 국회 소통관에서 발의한다고 발표했고 KBS와 여러 매체에서 기사화했으나 막상 의안현황에는 검색되지 않는 것을 보면 적절한 발의 시기를 저울질하고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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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고
    2023-05-07
  • 가짜목사 전성시대
    가짜목사 전성시대 한때 도둑질을 일삼던 사람이 감옥에서 변화를 받아 예수님을 믿었고, 목사까지 되었다는 이야기는 굉장히 센세이셔널하다. 어쩌면 복음의 능력이 지금도 살아있는 것이라는 생생한 증거일 수도 있다. 한때 유명한 연예인이었던 사람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으며, 세상의 영화를 다 버리고 목회자의 길로 들어섰다는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한때 불교의 스님이었던 분이 개종하여 목사가 되었다는 소식도 아주 흥미롭다. 그런 사람들은 당장 인기리에 초청되기도 한다. 늘 아무런 변화가 없는 것 같은 교계에 신선한 충격으로 받아들여진다. 하지만 그 사람이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기도 하고 목사가 되었다고 해서 그 사람의 회심이 진실한 것인지는 쉽게 판단할 수 없다. 믿음은 시간의 검증이 필요하기에, 디모데전서 3:6에서는 직분자를 세울 때 “새로 입교한 자”를 함부로 세우면 안 된다고 경고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 주변에는 성급하게 목사가 되는 길이 열려 있다. 그렇게 양산된 목사들이 사실은 복음의 장애물이 되는 경우를 너무나도 많이 보아왔다. 목사가 되었다던 그 사람은 여전히 도둑질을 멈추지 않는 경우가 있고, 목사가 되었다는 그 연예인은 불륜에 폭력에 온갖 추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목사가 되었다고 하고, 설교를 하기도 하고, 선교 사역을 하기도 하고, 예수님을 믿는다고도 하는데, 그런데 그 신앙이 제대로 된 신앙일까? 바리새인이 철저하게 율법을 지키며 유일신 하나님을 믿는 것 같았지만 주님께서는 가짜 신앙이라고 하신 것처럼, 우리 주변에도 크리스천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지만, 사실은 가짜 성도 가짜 목사일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양의 털을 입은 이리인지 분별하라고 하셨다. 거짓 선지자들이 많이 나올 것이니까 조심하여야 한다고 경고하셨다. 사실 목사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고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하고 있지만, 돈과 탐욕의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에게 하나님이란 그저 이 땅에서 탐욕을 추구하고 돈을 더 많이 버는 데 유용한 도구일 뿐이다. 그래서 기도를 열심히 하면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하고, 신앙생활을 철저히 하면 복을 받는다고 말한다. 그렇게 말하면 신앙이 있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사실은 오병이어 기적의 현장에서 빵을 먹고 배불렀던 무리들과 다르지 않다. 하나님이 한 분이라는 것을 믿는 것은 사탄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인데, 가짜 목사들도 그렇게 믿을 수는 있다. 그래서 분별해야 한다. 가짜 목사의 비리와 행태를 종종 옹호하려는 사람들이 있다. 그래도 같은 영적인 식구니까 감싸고 돌려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그렇게 한다면 세상 사람들에게 우리도 똑같은 부류라는 것을 인정하는 셈이 된다. 교회는 거룩성을 추구해야 한다(고전 5:11-13). 종교개혁자들은 참된 교회의 표지 중의 하나로 권징을 들었는데, 이는 거룩성을 추구하는 일을 해야 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이 시대는 가짜 목사 전성시대이다. 이런 모습을 보는 것은 고통스럽다. 하지만 절망적인 것은 아니다. 이미 주님께서 그럴 것이라고 예언해주셨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안에서 참된 믿음을 지켜나가야 한다. 영이 하나님께 속하였는지 분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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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고
    2023-04-26

실시간 기고 기사

  • Well Dying(good life, good death) 7 --- 의료와 죽음
    Well Dying(good life, good death) 7 -- 의료와 죽음 의료 기술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절이나 지금이나 죽음을 막아내는 것이 의사들의 최우선 과제이다. 그래서 의사들은 최선을 다해서 현대의 발달한 과학과 기술을 이용하여 사람들의 질병을 치료하고 생명을 연장하는 것에 집중한다. 그 노력의 결과로 현대는 의료 기술의 현격한 발달로 인해 건강과 100세 이상의 장수가 가능한 시대를 맞이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윤영호가 지적하는 것처럼 의학과 과학에 집중하는 의료만으로는 신체적·의료적 의미를 넘어서 죽음이 갖는 정서적·영적·사회적 의미에 역점을 두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 단적인 예로서 현대는 과거 자연적으로 맞이하던 임종이 점점 의료화 되고 있으며, 지금은 과거에 비해 죽음이 더욱 낯설게 느껴진다. 곧 그 동안 우리나라 사람들은 젊음과 건강을 바탕으로 성장을 이룩하는 데만 치열하게 매달리고 소원대로 물질적인 부의 확대를 이루어냈다. 그러는 사이에 삶의 외형적 측면은 놀랍도록 확장되었으나 필연적으로 그 뒤에 따라오는 노화나 죽음에 대해서는 외면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물질적인 풍요를 통해 삶을 즐기려는 현대인들에게 죽음은 즐기고 누리는 삶을 방해하는 부정적인 존재가 되어버린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경험적으로 누구나 알고 있는 것처럼 죽음은 언제나 생명과 동행하는 동반자이다. 그러므로 출생과 삶의 질이 한 사람의 인생에서 중요한 것처럼 죽음의 준비와 그 질 또한 매우 중요한 것이다. 이 중요한 죽음을 잘 맞이하고, 죽음을 통해 인생의 의미를 분명하게 갖기 위해서는 죽음에 대한 바른 인식을 갖고 있어야 한다. 그러면 죽음이란 무엇인가? 죽음에 대해서 전요섭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모든 인간은 출생과 함께 죽음 앞에 던져진 단독자이다. 그러므로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살아 있는 사람들은 누구나 예외 없이 죽음을 맞이하는 존재이다. 다만 우리 인간의 유한성으로 인해서 그 날과 그 장소를 정확하게 알지 못할 뿐, 결국 우리 모든 인간은 다 죽는 존재이다. 그러므로 죽음은 인간의 삶 속에 현존하고 있기 때문에 삶은 곧 죽음을 의미한다고 결정적으로 표현하는 사람들도 있는 것이다. 죽음은 인간이 체험해야 될 것 가운데 마지막 것으로써 모든 인간이 두려움과 호기심과 불안을 가지고 예외 없이 거쳐야만 하는 과정이다. 참으로 죽음에 대한 불안은 인간 존재의 근원이며, 궁극적이고 가장 강력하고도 위협적이며 고통스러운 불안인 것이다” 생명을 가진 우리 모두는 현재 삶을 살고 있고 언젠가 때가 되면 죽는다. 하지만 ‘삶이란 무엇인가? 죽음이란 무엇인가?’하고 묻는다면 한마디로 대답하기는 쉽지 않다. 일반적으로 우리들은 한 사람의 이 땅에서의 수명이 다했을 때 그것을 가리켜 죽음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사람은 그 누구도 죽음을 충분하면서도 분명하게 이해하거나 설명하기 어려운 것에 대한 이유를 전요섭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죽음을 체험한 자는 이미 죽음을 설명할 수 있는 존재가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죽음을 안다고 했을 때 그것은 다른 사람의 죽음을 관찰하거나 단순히 주검을 보는 것으로써 이는 매우 피상적인 것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인간의 죽음을 생물학적 측면에서 본다면 호흡과 심장 박동이 정지되고 모든 반사활동이 소실되어 유기체의 생명 유지에 필요한 모든 기능이 영구적으로 정지된 것을 말한다. 곧 생물학적 죽음에 대해서 황기석은 “죽음정의연구위원회는 심장 기능 및 호흡 기능과 뇌 반사의 불가역적 정지 또는 소실이라고 정의했다”고 소개한다. 그리고 사회적이면서 문화적인 측면에서 죽음을 본다면 죽음이라는 현상보다는 그 죽음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를 중요하게 여기게 될 것이다. 그리고 철학, 심리, 종교, 의학 분야에서 죽음을 이해하고 다루는 방식에 차이가 있다. 곧 이이정이 말하는 것처럼 “각 사람의 인격과 삶이 독특한 것처럼, 각기 다른 삶을 산 사람들에게 죽음은 다른 의미로 구성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죽음에 관한 제 이론들을 종합하여 할 사람들의 죽음에 대한 가장 기본적이며 중요한 정의라고 할 수 있는 생물학적 죽음, 심리적 죽음, 의학적 죽음에 대해서 살펴본다면 다음과 같다. 1) 생물학적 죽음 생물학적 죽음에 대해서 이일구는 생물학적 생명 현상과 함께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생물학적으로 생명 현상이란 생명체를 구성하고 있는 세포 내의 원형질이 쉬지 않고 일으키는 연속적인 화학변화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생물학적 죽음이란, 생명체를 구성하고 있는 세포 원형질이 쉬지 않고 일으키는 연속적인 화학 변화의 중단, 곧 생물체가 활동을 멈춘 상태로 물질과 에너지에 대한 통제력이 상실된 상태를 말한다.” 과학적 상식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처럼 유기체는 생명의 시작부터 각종 조직과 세포로 분리되는 과정을 거치게 되고, 죽음에 이르러 세포내의 연속적인 화학변화는 줄어든다. 한 사람의 신체의 세포는 그 누구도 한 순간에 총체적으로 죽는 일이 없고, 각 장기나 조직의 구조적인 특징이나 특성에 따라서 상이한 속도로 죽음이 일어난다. 그러다가 마침내 마지막 세포 하나가 완전히 활동을 멈추는 순간 생물학적으로 죽음은 완결된다. 이처럼 생물학적 죽음이란 이을상이 말하는 것처럼 “유기체인 한 생명의 생명 유지에 필요한 모든 기능의 전체적이고 영구적인 정지”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일반적으로 ‘한 사람이 죽었다’고 정의할 경우에는 가장 기본적으로 이런 생물학적이며 임상적인 신체의 죽음을 의미한다. 곧 생물학에서 말하는 죽음의 정의와 인식에 대해서 “세포 전체가 건강한 상태로부터 생명 현상의 정지에 이르는 전 과정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한 사람의 삶은 생물학적으로만 보아도 그 시작에서부터 죽음이 늘 함께 동행하고 있다고 이야기해도 결코 틀리지 않은 것이다. 이처럼 모든 세포가 생물학적으로 그 활동을 중지하는 죽음이 일어나면 가장 기본적으로 의료진을 통해 몇 가지 의학적 검사(심전도 검사, 의사에 의한 동공의 움직임 확인 등)가 이루어진다. 그 후에 의사를 통해서 가족들과 증인(의료인이나 간병인)이 보는 앞에서 법적으로 죽음이 선포되고, 사망증명서가 발급된다. 생물학적 죽음의 최종 확인은 법적인 것으로 이루어지는데, 법적인 죽음은 의학적 진술에 근거하여 한 사람의 생명이 끝났음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선언하는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2) 심리적 죽음 심리적인 삶과 죽음에 대해서 이이정은 “심리적 삶이란 자아나 주변 세계를 인식하는 것을 의미하고, 심리적인 죽음이란 이러한 인식의 정지, 즉 정신 작용이 정지되었을 때 일어난다. 심리적인 죽음은 종종 나이 많은 노인, 혹은 사고나 알츠하이머병 등으로 뇌의 기능이 심각하게 손상된 사람에게서 발견된다”고 말한다. 곧 임찬란 등이 말하는 것처럼 “심리적 죽음에 대한 정의와 인식의 정도는 나이에 따라 다양한 변화가 나타난다. 특히 죽음에 대한 수용의 정도는 인지적·정서적 성숙도와 상관이 있는 것”이다. 심리적으로 죽은 사람들의 가장 큰 특징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지 못하고, 온전한 정신 활동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가족이나 가까운 사람들에게 많은 고통을 안겨 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 사람의 심리적인 죽음은 생물학적 죽음 이전에 이루어지는 것으로 심리적으로 죽음의 단계에 이르렀다고 해서 꼭 육체적으로 죽은 것은 아니다. 곧 심리적 죽음의 상태는 육체적 생명은 유지되고 있으나 온전한 의식이 없어서 정신 활동이 불가능한 상태이기 때문에 인간으로서의 존재의 의미가 상실된 것이라고 보는 죽음이다. 그러나 한 사람이 한 평생을 열심히 살고 그 후에 정신적인 문제나 뇌의 질병 등으로 인해 심리적인 문제가 발생했다고 해서 죽음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더욱 심사숙고해 보아야 할 많은 문제들을 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때때로 심리적 죽음이라는 단계에 이른 사람들도 주변 환경이나 뇌의 어떤 화학적 작용에 의해서 이전의 기억을 회복하기도 하고, 자신이 누구인지, 그리고 주변에 있는 가족들이나 사람들을 다시 알아보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심리적인 죽음에 이른 사람들은 더욱 사랑하고 보호해 주어야 하며, 무엇보다도 가족들이 더욱 따뜻한 사랑으로 남은 생물학적 생명이 죽음에 이를 때까지 함께 공존해야 할 사회적 책임을 가진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죽음에 대해서 한 사람이 평생에 걸쳐서 심리적으로 어떤 영향을 받으며, 어떻게 살아가는가에 따라서 그 나타나는 현상이 매우 다르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곧 사람들은 평생에 걸쳐서 심리적 성숙과 죽음의 단계에 이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모든 단계에서 죽음에 대한 분명한 인식과 준비가 필요한 것이다. 3) 의학적 죽음 현대는 그 어느 시대보다 의학이 발달하여 최첨단의학을 통해서 인간복제와 줄기 세포 등의 장기 배양을 통해 인간의 생명을 연장 할 수 있다고 주장하며, 그런 연구들이 지속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실제로 현대 의학은 암을 비롯한 많은 질병을 치료함으로 현대인들의 수명을 더욱 연장시켜 주는 긍정적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의학은 질병을 치료함으로 생명을 연장하는 것을 기본으로 하기 때문에 죽음에 대해서는 매우 부정적인 시각을 갖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러면 의학에서 말하는 생명과 죽음은 무엇인가? 이에 대해서 김정우는 “의학적 측면에서 생명이란 호흡하고 심장이 뛰고 뇌가 활동을 하고 모든 세포가 자기가 맡은 신지대사를 원활하게 수행함으로써 하나의 유기체의 역할을 이행하는 현상을 말한다. 그리고 죽음은 일반적으로 호흡과 심장 박동이 정지되고 눈동자가 빛에 대해 반응을 보이는 반사 현상이 소실된 상태, 곧 자신의 의지에 의해서 생명이 존속되거나 유지될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정의를 볼 때에 의학적 관점에서 죽음에 대한 이해는 생물학적 사건으로 취급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생명을 생물학적 관점에서 본다면 하몬의 주장처럼 “모든 인간의 생명은 세포로 이루어진 생체의 각 조직과 생명 유지에 필요한 에너지원을 몸 밖에서 섭취하여 이를 몸 안에 흡수 분배하여 몸 안의 각 조직과 장기를 통괄하고 생체에 특유한 개성을 발전시켜 나가는 것”으로 본 것이다. 그러므로 의학적으로 죽음을 이야기 할 때에는 한 생물의 심장의 박동과 호흡이 영구적으로 멈추었음을 확증하는 말로 사용되는 것이다. 이처럼 의학적인 죽음의 판정 기준은 죽음에 대한 개념의 포인트를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서 변화해 왔다고 할 수 있다. 과거에는 호흡 정지, 심장박동의 정지, 피부색의 변화(청색증), 근육의 이완과 경직이 죽음의 판정을 위한 지침이었다. 사실 한 사람의 죽음을 이야기 할 때에 이처럼 생물학적으로 심장이 멈추고 호흡이 정지된 상태를 이야기 하는 것이 더 이상의 논쟁이나 이의가 없는 상태라고 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현대에 와서는 과학과 기술을 기반으로 한 의학의 발전으로 인해 의학적 죽음의 기준에도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다. 곧 노유자 등이 말하는 것처럼 “현대에 이르러 의학계에서는 심폐소생술의 발달로 호흡이나 심장박동 등의 활동을 연장시킬 수 있는 의료적 기술이 발달했다. 그러므로 더 이상 심장이 멈추었다고 해서 사망했다고 정의할 수 없게 되었다. 이로 인해 의학적 죽음 판정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사람의 죽음을 정의하고 선언하는데 있어서 대부분의 역할은 의학과 의사들이 하고 있기 때문에 현대 의학적인 죽음의 정의는 심폐기능설과 뇌사설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심장과 폐장 그리고 뇌의 활동 정지가 죽음의 판정 기준으로 작용하는 이유는 이 세 기관이 인간의 생명 현상을 특징짓게 하는 데 주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이것에 대해서 이부영은 <의학개론II>(1995)에서 다음과 같이 자세히 설명한다. “먼저, 심폐기능설에 의한 사망은 ‘심장’(心腸)사(heart death)와 폐장(肺腸)사(lung death)로 구분 된다. 심장사는 심장 박동이 멈춘 후 호흡이 정지되는 것을 말하고, 폐장사는 호흡이 먼저 정지되고 다음으로 심장 박동이 정지되는 것을 말한다. 다음으로 뇌사설은 뇌 기능의 영구적인 정지를 인간 죽음의 최종 판단 기준으로 보는 입장이다. 곧 뇌가 완전히 파괴되어 다른 모든 장기의 기능적 중지가 절박하고 불가피한 상태를 말한다.” 문제는 이처럼 한 인간의 생명을 생물학적 관점에서 의료적인 이유를 따라서 이해하고 정의하게 되면 환자가 품위 있게 죽을 권리와 마지막 임종의 시간을 인간으로서 의미 있고 가치 있게 맞이할 수 있는 기회를 의료의 적극적 개입으로 인해 제한할 수 있다는 문제점이 발생하게 된다는 것이다. 특히 말기 질병의 경우 적극적 치료를 주장하는 의료진과 인생의 의미와 목적을 찾으려는 환자나 가족들과 평행선에서 대립하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을 병원에서 종종 목격하는 것이다. 곧 현대에는 병원에서 온갖 의료적 기계 장치와 각종 약물에 의해서 생명을 연장하다가 중환자실에서 가족들과 따뜻한 인사도 나누지 못하고 한 생물체가 아침에 아름다운 꽃을 피웠다가 저녁에 아궁이에 들어가는 것과 같은 비참한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 그러므로 지정의를 가진 인격체로서 우리 인간은 누구나 인생의 임종이 다가온 시점에 이르렀을 때 무조건적이며 무의미한 의료적 행위를 중단하고 자연스럽게 가족들과 사랑을 나누며 죽음을 맞이하도록 해야 한다. 곧 모든 인간은 생물학적 관점의 죽음이 아니라, 인격체로서의 아름답고 의미 있는 죽음을 맞이하도록 목회자들이 목회상담적으로 잘 지도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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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0-19
  • Well dying(good life, good death) 6 -- 다양한 죽음의 얼굴과 나의 소망
    Well dying(good life, good death) 6 -- 다양한 죽음의 얼굴과 나의 소망 출생과 죽음은 한 사람의 삶을 구성하는 가장 고귀한 가치를 지닌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출생은 말 그대로 삶의 시작이며, 죽음은 한 사람의 이 땅에서의 삶의 마무리이다. 그러므로 우리 사람들의 출생이 축하와 축복 속에 이루어지는 것처럼, 마지막 인생의 무대를 내려가는 죽음의 자리 또한 축복이 깃든 고귀한 자리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 실제적인 죽음의 모습은 어떤 양상을 띠는가? 1) 현실성과 실제성이 배제된 장례식 모든 사람의 죽음이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10여년 전까지만 해도 우리 한국 사회 안에서 죽음학이나 죽음과 관련된 연구는 매우 미진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최근 10년 어간에 시중에는 죽음과 관련된 책도 많이 출판되었고, 죽음의 담론도 점점 많아지고 있는 추세이다. 그래서 좋은 죽음과 좋은 삶에 대한 담론이 점점 확산되고 있는 일은 매우 고무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신학교와 교회 안에서는 죽음에 대한 깊은 연구와 준비가 매우 미진하다고 할 수 있다. 실제적 죽음의 문제는 당장 목회의 수적 증가를 기대하는 사람들에게는 대중적 인기를 끌 수 없는 관심밖의 문제로 소외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나라 기독교(개신교)내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죽음에 대한 인식과 연구 혹은 신학교나 교회 내에서의 교육은 사회의 다른 영역이나 다른 종교보다 앞서는 체계를 갖추고 있다고 하기에는 부족한 점이 많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대표적으로 병원 장례식장에서 다양한 장례식(기독교, 타종교, 전통적 장례 등)을 경험하게 되는데, 솔직하게 우리 기독교의 장례식이 고인과 가족들에게 가장 큰 위로와 힘이 된다고 하기에는 많은 부분에서 생각할 점이 있음을 인정하게 된다. 그렇기 실천신학적인 측면에서 우리 한국교회 안에서 죽음에 대한 교육은 매우 미흡한 상황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곧 대부분의 목회자나 성도들의 죽음에 대한 인식은 조직신학 종말론과 인간관을 기초로 한 신학적 담론에 머물러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죽음에 대한 실제적인 이야기는 신학교에서조차 찾아 볼 수 없으며, 교회 제자훈련이나 교육 프로그램 커리큘럼에도 죽음에 관한 것은 거의 다루지 않는 실정이다. 다만 수련회 프로그램에서 관을 이용하거나 유서 쓰기 등을 통해서 소명에 대한 사명감을 강화하는 1회성 이벤트의 도구에 머물러 있는 수준이다. 교회 안에서는 여전히 죽음에 대해서 터부 하고 금기시 하는 가운데 죽음을 설교하고 성도들로 하여금 철저하게 죽음을 바라보며 살아가도록 하는 목회를 유보하고 있는 실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병원에서 자주 목격하는 것은 많은 목회자들이 당장 환자나 그 가족들과의 어려운 관계를 피하기 위해서 죽음을 미화하고 근거가 매우 인위적인 치유의 희망을 통해 위로하기에만 급급해 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아울러 장례식장에서도 현실성 없는 피상적 천국을 외치는 설교를 들을 때면 너무 마음이 공허해 지는 것을 종종 경험하게 된다. 솔직히 죽음을 경험해 보지도 않았고, 시신을 한 번 제대로 보지도 못한 젊은 목사(부목사)들의 형식적인 30분 미만의 입관, 발인예배 설교와 인도는 죽음의 무게를 넘어서기에는 매우 역부족이라는 생각을 종종하게 되는 것이다. 2) 다양한 죽음의 얼굴 실상 ‘죽음’이라는 단어는 모든 사람들에게 참으로 두려운 단어임에 틀림이 없다. 객관적인 실체로서의 죽음도 그렇지만, 막상 나 자신의 문제로 죽음을 마주할 때는 두려움이 더 크게 다가온다. 정도의 차이야 있지만 기독교 신앙을 가진 사람들도 마찬 가지이다. 죽음의 존재를 일대일로 직면해야 할 때는 구원의 확신이 있는 믿음의 사람도 흔들리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죽음을 자신의 문제로, 곧 현실적으로 받아들이고 준비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지금까지 간접적으로 경험한 죽음의 얼굴은 매우 다양하다고 할 수 있다. 죽음이 주는 의미와 가치, 인생의 성과와 가장 크게 느끼는 슬픔의 무게도 가지각색이다. 지금까지 만난 모든 사람들이 죽음 앞에서는 매우 당황하고 긴장하고 불안해 하고, 슬퍼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90세가 넘은 노년의 자연사 앞에서도, 60세 이전의 질병이나 사고로 인한 죽음 앞에서도, 20세 이하의 죽음이나 자살로 인한 죽음은 말할 것도 없고, 모든 죽음은 본인과 가족과 주변 사람들을 매우 당황하고 불안하게 했던 것이다. 지금까지 경험한 죽음 죽에 어렵지 않은 죽음은 없었다. 그러나 어떤 죽음 앞에서는 그 모든 당황과 불안을 어느 순간에 넘어서는 평강과 은혜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나는 병원에서 사역하는 목사로서 많은 죽음을 본다. 앞에서 말했듯이 목사라는 신분으로 인해서 한 사람의 임종 과정에서 가장 깊고 깊은 마지막까지 동행하게 되는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참 감사하고 영광이라고 할 수 있다. 한 사람의 그 내밀한 마지막을 동행할 수 있는 특권은 아무나 누리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병원에서 사역하면서 죽음의 다양한 면면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볼 수 있었다. 삶의 모습이 다양하듯이 죽음의 모습도 각 사람마다 다르다. 어떤 죽음은 주변 사람을 안타깝게 만든다. 끝내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우나 절망과 분노와 투정으로 삶을 마감하는 경우에 그렇다. 반면, 어떤 죽음은 주변 사람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고 영생과 천국의 소망을 확인시켜 주기도 한다. 호스피스 병동에 입원한 환자가 말기암의 처절한 고통 중에서도 평안과 감사로 웃으면서 가족들에게 ‘그 동안 사랑했어. 정말 사랑해, 그 동안 미안했어. 나를 사랑해 줘서 고마워, 내 딸이고 아들이라 너무 고마워’라는 말을 남기면서 인생의 여정을 마감하는 모습은 참으로 감동스럽다. 3) 내가 생각하는 나의 죽음의 모습 사실 처음에는 수많은 타인의 죽음을 직접 목도하면서 가장 먼저 깨달은 것은, 나 자신이 나의 죽음에 대해서는 불확실한 실체로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40대 중반의 나이에 병원 사역을 시작했기 때문에 젊다는 이유로 인해서 죽음에 대한 성찰을 회피함으로 나의 죽음을 부정하고 싶은 마음이었던 것이다. 날마다 보다 나은 삶을 살기 위해서 갑작스럽게 다가올 위기에 대해서 많은 준비를 한다. 그러나 정작 가장 중요한 죽음의 문제는 그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 불안하고 두렵기 때문에 회피하고 거부하고 있었다. 그러나 회피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그러므로 나는 타인의 죽음의 과정에 동참하기 전에 나 자신의 마지막을 정직하게 생각해 보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목사라는 타이틀과 자존심을 접어놓고, 믿음의 사람답게 죽음을 대면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신앙을 근거로 하는 믿음은 죽음의 가능성을 제거하는 힘이 아니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고, 담대하게 나의 죽음을 대면하게 하는 힘이라는 생각에 이르게 된 것이다. 물론 부활의 기적을 일으키신 예수님을 믿는 믿음은 때로 육신으로부터 죽음의 문제를 제거하는 능력이 됨을 확실히 믿는다. 말씀과 기도로 죽을병을 치유 받는 일은 지금도 일어나고 있음을 인정한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렇게 치유를 받은 사람도 결국 언젠가는 죽음을 대면해야 한다는 인간의 유한성에 대한 정직한 직면이다. 아무리 믿음이 좋아도 어느 순간에는 죽음의 문 앞에 서야 한다. 그러므로 나의 죽음이 어떤 모습으로 다가올지 모르겠지만, 가장 좋은 준비는 에녹처럼 늘 주님과 동행하는 것이라 믿는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창 5:24). 주님과 늘 동행하는 삶을 산다면, 만약에 인생을 살다가 어떤 질병으로 인해서 투병의 과정을 거치게 된다고 할지라도 그 믿음이 그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힘이 되기를 소망한다. 하루하루를 나음에 대한 기대와 현실에 대한 절망과 분노로 채우는 것이 아니라, 질병 가운데서도 영원을 바라보는 소망과 감사로 채우고 싶다. 인생의 마지막 길에 나의 믿음의 확실성이 빛을 발하고, 이 땅에 임한 하나님 나라와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이 능력으로 드러나기를 바란다. 아울러 주님과 능 동행하는 삶을 산다면 갑작스러운 죽음도 결코 재앙이 될 수 없을 것이다. 물론 사랑 하는 가족들에게는 이별을 준비할 시간이 주어지지 않기 때문에 큰 놀람과 슬픔과 아쉬움이 될 수 있다는 문제가 있을 것이다. 이 지점이 한 인간으로서 큰 숙제이며 아쉬움이 남는 부분이다. 그러나 평상시에 부활과 영생과 죽음과 삶의 문제를 신앙 안에서 잘 조화를 이루며 살아간다면 가족들도 슬픔 속에서 슬픔과 애도의 시간을 좀 더 빨리 정리하고, 회복과 소망의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나의 마지막의 모습은 우리가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직하게 주님과 동행함으로 이 땅에 이미 임한 하나님 나라를 풍성하게 누리는 것으로 자신의 죽음을 준비하며, 가족들과 죽음과 영생과 부활에 대한 솔직한 대화를 나누는 것이 좋을 것이다. 죽음은 이 세상에서 삶을 살아가는 모든 생명이 결코 피할 수 없는 현실적 문제이기 때문에 그 담론을 가정 안에서부터 실제적으로 충분히 나누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특히 부활과 영생을 믿는 믿음의 가정에서는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의 의미를 통해 자주 죽음의 문제를 다루는 지혜로운 삶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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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고
    2022-10-14
  • Well dying(good life, good death) 5 - 기독교 호스피스 병동 간호사와 사회복지사들의 증언
    Well dying(good life, good death) 5 - 기독교 호스피스 병동 간호사와 사회복지사들의 증언 (*** 이번 글은 좀 깁니다. 그러나 진료의 현장에서 간호사와 사회복지사들이 직접 경험한 생생한 나눔이기에 끝까지 읽어보면 많은 생각을 하게 될 것입니다.) 호스피스 사역을 하면서 일선에서 환자들을 돌보는 간호사들과 많은 대화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 학위 논문을 쓰는 과정에서 한국 기독병원 협회에 소속된 호스피스 병동에서 근무하는 간호사들 중에서 3년 이상의 호스피스 경력을 가진 크리스천 간호사들에게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 질문을 하였다. 왜냐하면 호스피스 전문 간호사들의 생생한 증언이 죽음학 연구의 중요한 이유가 되며, 아울러 한국교회 목회자들에게 큰 도전이 될 수 있을 것이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1) 호스피스에서 근무한 지는 얼마나 되셨나요? ① 3년 미만 ② 3-5년 ③ 5-10년 ④ 10년 이상 2) 다음 중에 기독병원 호스피스 캐어 중에 가장 힘들었던 대상은 누구였나요? ① 불교 신자 ② 기독교 신자 ③ 무교 ④ 가톨릭 신자 ⑤ 기타(이단 등) 종교 신자 3) 다음 중에 호스피스 캐어 중에 가장 힘들었던 대상은 누구였나요? ① 호스피스에서 세례 받은 분 ② 믿은 지 5년 이하인 환자 ③ 집사, 권사, 장로 등의 평신도 직분자 ④ 목사, 선교사 등의 사역자 4) 호스피스에 입원하는 환자들 중에서 목회자들의 모습이 어떠했는가? (주관식, 경험을 진솔하게 기록해 주세요.) 5) 목회자들의 입원 기간의 모습과 죽음의 모습에서 얻은 교훈이 무엇인가? (주관식, 경험을 진솔하게 기록해 주세요.) 이 설문에 대한 대답의 결과는 다음과 같다. 질문1)에 대답한 간호사를 중심으로 한 의료인들 근무 연수는 최소 3년 이상의 것만 취합하였다. 질문2)의 호스피스를 통한 돌봄 중에 가장 힘들었던 환자는 기타(이단 등) 종교 신자, 기독교 신자, 그리고 불교, 가톨릭의 순이었다. 질문3)의 호스피스를 통한 돌봄 중에 가장 힘들었던 기독교 신자의 순서는 목회자, 호스피스 병동에서 세례 받은 자 순으로 나타났다. 끝으로 질문4,5)의 질문에 대한 대답은 그 중에 대표적인 몇 가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 4번 질문에 대한 대답 정리 간호사 A: 죽음 앞에서 심리적 상태와 개인적인 성향에 따라 다르겠지만 대체적으로 예민했고, 캐어 제공자들을 평가하며 때로는 훈계하기도 하고, 특권주의와 같은 생각을 가진 경우도 있었다. 이것은 환자 개인의 특성도 있겠지만 그 주변의 가족, 교인들에 의해 VIP로 대우해 주기를 바라는 데서 오는 의료진들에게 지워지는 부담감이 매우 컸다. 호스피스 대상자로 일반인에 비해 어려운 대상으로 느껴졌다. 간호사 B: 내가 경험한 바에 의하면 목회자들은 호스피스에 입원과 임종시에 평온하기보다는 왠지 더 억울해하고 사소한 것에도 불만이 많아 간호사 및 의료진에게 더 힘든 환자인 경우가 많았다. 특히 선교사역지에서 온 젊은 선교사님들은 호스피스를 받아들일 준비가 안 되었고, 사망 시까지 기적을 바라거나 본인의 질병 상태에 대한 의사들의 진단을 받아들이지 않고 안타깝게 임종을 한 사례가 많았다. 가족관계가 많이 단절 되거나 해결 안 된 선교사님들은 집단치료 및 웃음치료, 환자 및 봉사자와의 친목 등에도 참여율은 없거나 저조했다. 사회복지사 A: 환자의 입장보다는 목회자의 입장에서 신앙적인 부분만 강조하는 것 같은 모습을 통해서 죽음에 임박해서도 목회적 자세를 잃지 않으려는 목회자의 부담감을 많이 느낄 수 있었다. 간호사 C: 실제 사역현장에서 보여 지는 목회자와 환자로서의 목회자의 모습은 상반되는 경우가 있었다. 환자의 입장보다는 목회자로서의 권위를 주장하는 경우가 많았다. 간호사 D: 호스피스에서 20년이 넘는 경력을 가지다 보니 환자들의 모습은 매우 다양하지만, 크게 세 가지로 나누자면, 1)인격이 성숙하여 원만한 가정을 이루며 전반적으로 좋은 삶을 살아왔던 목회자, 2)인격은 미숙하고 권위적이면서 가정에서 폭군처럼 군림하여 전반적으로 원만하지 못했던 목회자, 3)정직하고 믿음은 좋지만 성숙 단계는 아니어서 고집이 세고 남의 말에 경청하지 않고 자신의 신념에 맹목적인 목회자로 생각해 볼 수 있다. 1)인격적으로 성숙한 목회자는 겉과 속이 일치하여 가족들로부터 사랑과 존경을 받고 있었고, 병동에 입원해 있는 동안에도 의료진에게 매사에 협조적이고 원만한 의사소통이 가능하였으며, 하나님의 섭리를 믿고 긍정적인 태도로 호스피스완화돌봄을 받아들여 가족들과 소중한 시간을 잘 보내었고, 임종 시에도 조용하고 평화롭고 화목한 분위기에서 사랑하는 가족들과 함께 아름답게 생을 완성하였다. 2)인격이 미숙한 목회자는 남들에게 비춰지는 자신의 모습이 아무리 성공적이고 대단한 목회나 선교를 하였더라도 폭군처럼 사람들에게 군림하여 그를 잘 아는 사람들에게 진심어린 존경을 받지 못했고 그의 언어적 및 행동적 폭력은 두려움의 대상이었으며 대화가 불가능하였고, 매우 교만한 태도로 그 자신조차도 자신이 뭘 잘못했는지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고 폐쇄적이고 방어적이었다. 그동안 자신이 남을 하나님처럼 판단해 왔으므로 자신도 타인들에게 판단을 받을까 두려워서 공동체에 자신의 질병을 알리지 않으려는 폐쇄성을 보이기도 하였다. 임종 시까지 회개하지 않았을 때는 매우 불안정한 모습을 보였다. 이런 분들에게 호스피스완화 돌봄을 제공하는 것은 매우 힘들었다. 자신만의 독선적 주관을 가지고 소통과 대화를 거부하고 일방적인 지시만을 하고, 모든 이들이 굴복하기를 바라며 요구하므로 가장 힘들었다. 3)믿음은 좋지만 인격적으로 미숙한 목회자는 병이 들었을 때 합리적인 판단보다는 맹신적인 모습으로 의료를 거부하고 기도원을 전전하다가 악화되어 오는 경우들이 많았고, 반면에 어린아이처럼 가족들을 의지하면서 큰 부담을 주는 모습을 보였다. 하나님이 살려 주실 거라는 기적만 바라는 중에는 의료진과 소통이 어려웠고 자신의 주장만 하였으며 상대적으로 말기를 수용하고 가족들의 마음을 헤아리는 시간이 짧아서 아쉬웠다. 가족들이 많이 힘들었지만 임종 시에는 결국 받아들이고 천국을 소망하며 하나님과 가족에게 감사를 전하고 떠났다. (2) 5번 질문에 대한 대답 정리 5번 항목에 대한 대답을 소개 해 보면, 4번에 비해서 훨씬 더 진솔하게 호스피스 담당자로서 목회자들에게 느낀 점을 기술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그 내용을 그대로 소개해 보면 다음과 같다. 간호사 A: 사람에 따라 다르지만 죽음을 수용하고, 천국을 소망하며 오히려 주변 사람들과 가족, 의료진들을 격려하고, 축복하는 분들도 있다. 하지만 목회자이기에 반드시 죽음을 잘 수용해야 하고, 천국을 소망하기에 마지막 삶을 잘 마무리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낮에는 의연한 모습이지만, 밤에는 홀로 고민하고,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모습을 많이 경험했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솔직한 인간적 모습은 하나님 앞에서 있을 때만 표현할 수 있었던 목회자 모습이 안타깝게 느껴지기도 했다. ‘목회자 이기에 어떠해야만 한다’, ‘내가 누구이기에 어떤 대우를 받아야 하고, 어떤 모습을 유지해야 한다’는 그런 압박에서 벗어나 오롯이 하나님 앞에서 한낱 인간임에 지나지 않은 그런 모습으로 정직하게 서야하지 않을까란 생각을 해 보았다. 간호사 B: 사후의 세계에 대한 확신이 있기는 하는가 싶을 정도로 포기하지 않고 내려놓지 못한 모습을 가끔 대하게 되면, 본인이 가장 힘들 때 남한테 상처를 더 준다는 교훈을 얻게 된다. 사회복지사 A: 확실한 것 같았던 믿음이 죽음 앞에서 목회자들조차도 많이 흔들리는 것을 보며 사람은 누구나 죽음 앞에서 신앙을 지키는 것이 어려운 것임을 알게 되었다. 간호사 C: 죽음의 대한 이해가 실제적으로는 깊지 않은 모습이었고, 일반인이 죽음을 대하는 두려워하는 모습은 목회자들도 비슷해 보였다. 죽음은 다른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라 나의 이야기 이며, 누구나 죽음 관에 대한 정립이 필요하고, 오늘 주어진 삶 속에서 소중히 나와 다른 사람을 사랑해야 하겠다는 교훈을 받았다. 간호사 D: 목회자 역시 하나님 앞에서는 인간으로서 동일한 모습이었고, 죽음 앞에서 믿음의 시험을 겪는 모습이었다. 다만 그 과정에서 인격의 성숙도와 신앙의 성숙도에 따라, 얼마나 영적으로 바른 중심을 가지고 전인적으로 삶을 통합하고 조화롭게 살아가는가에 따라 임종 시와 내세의 삶에 대한 태도가 다름을 알 수 있었다. 따라서 목회자이기에 특별한 것이 아니라 목회자나 평신도나 동일하였고, 각 자의 성품이나 인격, 신앙의 성숙도에 따라 입원기간이나 죽음의 모습이 다른 양상을 나타내었다고 할 수 있다. 많은 목회자들 중에서도 인격과 신앙이 일치된 분들의 모습은 자신의 직함이나 성공적인 사역을 내세우지 않았고, 자신의 가족이나 의료진 등 그 누구를 대할 때에도 늘 겸손한 모습으로 상대방을 배려하였고,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는 모습으로 그리스도의 향기를 내뿜으며 찾아오는 사람들에게도 위로와 축복을 전해주는 모습이었다. 자신의 영적인 고뇌와 내적 갈등은 하나님과 단독 대면하여 해결하였기에 자신의 문제로 인해 주위 가족들을 힘들게 하지 않았고, 자신이 이룬 업적들을 내려놓으면서 가족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하나님을 의지하는 모습을 보였다. 늘 자신의 부족함은 없는지 돌아보고 회개하고 하나님의 은혜와 가족들의 헌신과 의료진을 비롯한 주위사람들의 섬김에 감사하는 모습이었고, 같이 입원한 환자와 가족들을 배려하며 복음을 전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증상이 악화되어 힘들고 어려울 때도 영적인 성숙함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잘 견디고 개방적이고 긍정적인 태도로 잘 대처하였으며, 자신을 돌보는 사람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고 오히려 안심시키고 격려하는 모습이었다. 바른 영성은 현실과도 조화롭고 지혜롭게 대처함을 보여주었다. 현실적으로도 잘 인지하고 받아들이며 요행이나 기적만 바라지 않았고,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면서 자신의 죽음 이후의 가족의 삶에 대해 실질적으로 미리 준비하였으며, 호스피스완화의료사역을 위해 후원하거나 생전에 미리 기부하거나 유언을 남기셨다. 이런 분들의 안정된 모습은 환자 본인 자신에게도 도움이 되었을 뿐 아니라 환자를 돌보는 가족들의 삶에도 좋은 영향을 미치며 가장의 말기라는 가족의 위기상황에서도 가족이 서로 단합하며 잘 대응해 나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가족의 체계도 개방적이어서 믿음의 공동체에 도움을 청하고 도움을 받으며 기꺼이 교회 안에서 영적 지지와 함께 실질적인 지지를 받는 모습이었다. 목회자이거나 평신도이거나 누구든지 동일하게 죽음의 과정에서 시험을 받지만 전인적으로 성숙하고 통합된 분들의 반응과 대처 양상은 달랐다. 임종의 과정이나 임종의 순간에 있어서도 성숙된 목회자나 평신도는 죽음 앞에서 부활 신앙을 잘 적용하였고, 믿음의 시험을 잘 감당하여 승리하는 모습을 보여주었고, 가족들에게도 믿음의 확신을 유산으로 남겨주었다.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정직하고 올바른 관계를 맺으며, 영적인 성숙이 자신의 전인적인 삶의 조화와 통합성으로 나타나 주위 사람들에게 귀감이 되었고 품위 있고 아름다운 삶의 완성과 내세에 대한 확신을 보여주었다. 또한 끝까지 삶에 대한 긍정적인 태도를 유지하면서 죽음을 부인하거나 거부하지 않았고, 부활에 대한 믿음으로 죽음조차도 삶의 과정으로 수용하고 영원한 내세를 믿으며, 성숙한 신앙의 모습과 함께 죽음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온전한 믿음과 본을 보여주었다. 죽음이 임박하여 환자들에게 나타나는 영적 현상에서도 신앙과 인격이 성숙된 분들에게는 천국의 모습이나 하나님의 빛을 본다든지 하는 믿음의 영적 보상이나 확신을 강화시켜주는 체험을 하였고, 구원의 확신에 대한 테스트를 받는 동안 주위 사람들에게 영적 지지와 도움을 받아들이고 잘 감당하였으며, 자신의 처지에 대한 불평과 원망이나 남의 탓을 하기보다는 자신을 돌아보고 회개하고 지금까지 하나님의 은혜와 주위 사람들의 도움과 지지에 감사하는 모습이었다. 시험을 이겨내고 체험적인 신앙을 나타내며 구원의 확신과 성경에 있는 말씀이 진실됨을 삶으로 보여주었다. 제가 경험한 환자 중에는 죽음이 임박하여 성경말씀대로 생명의 면류관을 주리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들은 분들도 있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부활의 확신을 가진 분들은 기쁨으로 천국을 들어가시며, 임종 전 까지 남아있는 시간 동안 앞으로 자신과의 사별 이후에도 계속 살아가야 하는 가족들을 위해 격려하고 축복기도를 해 주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결론적으로 호스피스완화간호를 오랫동안 제공해 왔던 간호사로서 말기 질환을 통해 앞서 가신 믿음의 선배님들의 삶과 죽음을 통해 하나님 말씀이 살아 역사하심과 부활의 신앙을 ‘여기서(HERE)-지금(NOW)’ 적용할 수 있는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 호스피스사역을 통해 기독의료인으로서 기독교의 핵심 신앙인 부활의 신앙을 화석화된 관념이 아니라 지금 당장 어디서든지 적용할 수 있는 살아있는 믿음으로 삶 속에서 가르쳐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깊이 감사드린다. 사람은 누구나 끝(죽음)을 보기까지는 끝이 아니기를 바라는 존재이기 때문에 경험해 보지 못한 죽음에 대해 성경적인 종말론적 관점을 갖고 있어도 확실한 자세를 갖기가 매우 어려울 것이다. 곧 상담적 입장에서 본다면 목회자들도 똑같은 사람이기 때문에 죽음을 준비한다는 것이 어렵고, 말기 질병과 죽음 앞에서 당당하기가 쉽지 않은 요소임에는 틀림이 없다. 끝과 죽음은 항상 막연한 존재로 다가오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목회자들에게도 상담적·심리적으로 도움이 많이 필요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결국 자신들이 지식으로 알고 사역으로 전하고 있는 성경의 내용과 자신의 삶에 실제로 적용하는 말씀에 상당한 차이가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죽음이라는 문제는 목회자들조차도 자신들의 삶에서 배제된 주제로 은연중에 멀리하면서 오직 이 땅에서의 삶을 위해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의 반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울러 은연중에 성경의 하나님도 성공과 현세 그리고 살아 있는 자들만의 하나님으로 믿고 있는 것이 아닌가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성경의 하나님은 산 자와 죽은 자 모두의 하나님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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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0-12
  • Well dying(good life, good death) 3
    Well dying(good life, good death) 3 -- 죽음학 연구의 가치 죽음을 가까이에서 접하면서 이 사역이 주는 가장 유익이 무엇일까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얻은 결론은 죽음에 대한 준비와 죽음학 연구는 죽을 때까지 삶의 방법을 생각하게 해 준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삶의 의미와 가치를 깊이 새기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신앙에 대해서 늘 감사하게 되고, 아울러 인생을 영원한 의미와 목적을 따라서 살아가게 해 주는 유익이 있다. 사람들은 죽음에 대해 애써 외면하고 살아간다. 죽음에 대해서 애써 외면하고 싶은 심정인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음은 나와 동떨어진 것이며 죽음을 생각한다는 것은 왠지 불길하다는 생각에 사로잡혀서 살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죽음에 대해서는 의식적으로라도 생각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이것은 가리켜 ‘죽음에 대한 터부’라고 이야기한다. 심지어 기독교 안에서도, 교회 안에서도 죽음을 이야기하면 은혜 없는 목사, 분위기 파악하지 못하는 목사, 능력 없는 목사로 치부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러나 경험적으로 깨닫는 것처럼 그동안 생각조차 하지 않으려 했던 죽음이 내 주위에 있는 사람 중에서 누군가에게, 아니면 나 자신에게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는 불안한 현실이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늘 목격하는 것이지만 실제로 죽음이 자신의 문제가 되는 순간에는 죽음으로 인한 슬픔과 두려움과 아픔이 이성을 완전히 점령해 버린다는 것이다. 우리 인생은 삶과 죽음이 공존하고 있다. 곧 이 둘은 우리의 생명 안에서 분리된 것이 아니라, 하나로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죽음’에 대해 분명한 지식과 의식을 갖고 살아갈 때에 우리들은 자신의 생명과 타인의 생명, 나아가 모든 자연만물에 대해서도 존귀하게 여기고 사랑하게 될 것이다. 현대는 사람들이 죽음을 거부하고, 오직 이 땅에서 잘 살고, 더욱 오래 살아남기 위해서 앞만 보고 달려가는 시대가 되어가고 있다고 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현대는 좋은 죽음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가르쳐 주는 좋은 교회의 역사를 버리고, 교회 조차도 오직 이 땅에서 먹고 사는 삶에 관심을 집중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교회가 좋은 죽음이라는 비전을 잃어버린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어느 시대에나 사람들의 삶은 그 시대의 사상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러면 우리 시대에 가장 만연한 사상은 무엇인가? 그것은 아마도 진화론과 데카르트 철학에 뿌리를 두고 있는 신기계론적 철학과 인간관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현상에 대해서 낸시 피어시는 그의 책 <완전한 진리>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세계 역사상 처음으로 더 높은 도덕적·종교적 진리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 널리 용인되며, 그것을 경청할 만한 소리로 받는 시대이다”라고 주장한다. 계속해서 낸시 피어시는 이런 현상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진화론에 근거를 둔 자연주의 철학에서는 자연이 존재하는 전부라고 믿기 때문에 결국은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생물학적 현상들은 오직 물질적인 원인으로만 설명하는 것이다. 이것이 곧 유물론이다. 그리고 이처럼 자연주의나 유물론을 믿는 자라면 누구나 진화론을 믿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결국 다윈의 진화론은 경험론적 발견이 아니라 자연주의적 세계관에서 추론된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현대인들은 진화론적 세계관과 과학만능주의의 영향을 받아서 삶에서 진정한 의미와 가치를 추구하기보다는 오직 성공과 성장만을 바라보고 달려가고 있다. 그렇지만 인간이라면 누구나 직면해야 할 죽음의 문제는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에 지고 가게 되는 가장 큰 과제이며 대상이다. 그렇기 때문에 죽음을 함께 생각해 보고, 어떻게 하면 죽음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할 것인지를 고민해 보는 것은 인생의 더욱 의미 있고 가치 있게 만들어 줄 것이다. 죽음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면 절망과 무기력에 빠진다. 그러나 반대로 이것을 인생의 도전이라고 받아들이고 반드시 해결해야 할 과제라고 능동적으로 대응한다면 삶의 질이 성장하고 인생을 더욱 풍요롭게 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죽음에 대해서 능동적으로 대처하는 교육과 훈련을 통하여 공포와 불안을 완화시키는 과정을 연습해야 한다. 그래서 유명한 죽음학의 대가 알폰스 디켄(Alfons Deeken)은 죽음에 대한 교육에서 중요한 것이 ‘유머’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는 죽음과 유머가 연결된다는 부분은 참으로 신선하며, 모순되게 보이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결코 모순되지 않는다는 생각을 상기시켜 준다고 주장한다. 죽음을 터부시 하고 오직 현실과 이 땅의 삶에 집중하는 현대인들에게 죽음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다양한 관점에 대한 연구를 통해서 죽음에 대한 바른 인식을 심어주고, 그릇된 성공주의 목회관에 따라서 성장과 성공을 추구하는 교회와 목회자들로 하여금 죽음과 영생 그리고 부활의 신앙을 통해 이 땅에서 주님을 닮은 의미 있고 목적 있는 삶을 살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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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0-09
  • Well dying(good life, good death) 2
    Well dying(good life, good death) 2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끝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는 이것을 그의 마음에 둘지어다.”(전 7:2) 병원 사역 속에서 참 감사한 것은 한 사람의 임종 과정에 동행할 수 있는 기회가 많다는 것이다. 한 사람의 이 땅에서의 마지막, 곧 죽음의 시간과 장소에서 그의 마지막 손을 잡아주는 것은 참으로 의미 있는 일이다. 목사라는 이유로 한 사람의 가장 중요하고도 내밀한 시간에 초청받은 것은 실로 대단한 자격이다. 죽음의 순간을 맞이하는 사람이 가장 힘들어하는 것은 육체적 고통을 넘어서는 정신적 외로움과 두려움, 그리고 영적인 불안과 무서움이라 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시간에 가장 의미 있는 목회적 돌봄이 이루어진다. 한 사람의 임종 과정에 함께하는 것은 사람이 실천할 수 있는 다른 사람에 대한 최고의 섬김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임종 과정에 함께하다 보면 나의 자리, 곧 목회자로 부름을 받은 이 자리가 참으로 귀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한 사람이 인생을 마치는 그 순간에 그의 손을 잡고 둘러선 가족들과 함께 예배를 드릴 때에 진짜 목회를 하고 있다는 느낌, 그리고 하나님의 일에 거룩하게 쓰임받고 있다는 느낌이 마음을 가득 채우는 것을 체험하며 감사가 넘치게 된다. 병원 사역의 특성상 꼭 기독교인만 임종의 지켜주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의 임종에도 가족들의 부탁으로 인해 동참해야 할 때가 많이 있다. 그런데 모든 임종의 순간을 통해서 경험적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은 한 사람의 임종 과정은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의 능력을 확신하는 시간이라는 사실이다. 인간은 분명히 육체를 넘어 영혼을 가진 영적인 존재라는 것, 이 세상의 삶과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것을 죽음의 순간에 분명히 확인 할 수 있는 것이다. 임종 돌봄의 그 순간에 하나님의 강한 임재와 구원의 은혜에 부딪히는 것이다. 그러나 날마다 임재와 은혜를 체험하며, 영적으로 충만하고, 마음에는 슬픔을 넘어서는 기쁨과 소망이 있는 것만은 아니다. 나는 15년 동안 병원에서 200여회의 죽음을 목격했다. 처음 5년간은 열정을 갖고 호스피스와 중환자실에서 일어나는 대부분의 죽음에 다 참여를 하여 영적 돌봄을 제공했다. 그러나 결정적 한 사건 후에 한 동안 슬럼프에 빠지기도 했었다. 바로 10여 년 전에 우리 병원 암병동에 입원 후 호스피스까지 약 4개월간 삶의 마지막 여정을 동행했던 22살 청년의 죽음 이후에 마음이 너무 힘 들어서 한동안 의욕을 잃었던 것이다. 그는 18살 때 대장암에 걸려서 이곳저곳의 병원에서 여러 치료를 받다가 우리 병원 호스피스에서 22살에 이 땅에서의 마지막을 맞이했다. 여러 치료의 후유증으로 인해서 몸이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진 나머지 엄마에게 마지막 인사도 못 나누고 갑작스럽게 떠났다. 그 청년의 죽음을 품에 안고서 한 참을 울었던 기억이 새롭다. 그러면서 전남 해남이 고향이었던 그 청년의 시신을 그의 어머니가 구급차에 태워 운구해서 떠날 때에 하나님을 향해 ‘하나님의 임재와 은혜를 체험하지 못해도 좋으니 이런 죽음은 앞으로 더 이상 안 마주쳤으면 좋겠다’고 마음의 악다구니를 하기도 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 다시 돌아보면 그 사건도 더욱 삶의 의미와 죽음을 생각하게 되는 은혜의 시간이었다고 할 수 있지만, 그 일 후에 거의 1년 정도 임종 돌봄을 할 때마다 엄청난 어려움을 겪었었다. 전통적으로 목회에서 죽음은 가장 중요한 신앙의 주제 중 하나로 다루어졌다. 곧 우리 믿음의 선배들은 목회를 통해서 잘 죽는 법을 배움으로 이 땅에서 잘 사는 법도 배우게 되고, 아울러 분명한 죽음에 대한 준비를 통해서 영원까지 준비하는 복된 삶을 살았던 것이다. 믿음의 선배들은 죽음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 중에 하나이며, 무엇보다도 영생을 위한 시작임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근대 이전까지 교회 공동체에 속한 형제자매들은 다른 성도의 죽음을 통해서 삶과 죽음 그리고 죽음 이후의 영원한 삶에 대해서 많은 것을 배웠다. 이처럼 이전시대 목회자들은 죽음을 포함한 성도들의 삶의 전 영역에서 깊은 준비와 통찰과 실천을 통해서 목회자의 사명을 감당한 것이다. 한 사람의 출생이 고귀하고 아름다운 것처럼 한 사람의 죽음 또한 가장 아름답고 고귀한 것이라는 것을 병원에서의 임상적 경험을 통해서 깨닫게 된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병원에서 원목으로서 호스피스 사역과 말기 암 환자들을 돌보는 영적인 사역을 통해 많은 사람들의 임종을 지켜주면서 깨달은 사실은 많은 성도들, 심지어는 목회자들도 죽음을 부정하는 신념에 사로잡혀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곧 죽은 자도 살리시는 주님께서 자신만은 죽지 않게 하실 것이며, 말기 질병에서도 자신만은 고쳐줄 것이라는 신념으로 임종의 순간까지도 죽음을 부정하는 성도들과 목회자들을 여러 명 목격하였다. 우리는 인생을 사는 동안에 죽음을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 한다. 죽음을 두려워하고 피하려고만 할 것이 아니라, 믿음 안에서 죽음을 직시하고 죽음을 이기신 그리스도를 묵상하며 영생의 소망을 분명하게 가져야 한다. 죽음을 묵상하고 준비하고 영원을 준비하는 것은 기독교 신앙 안에서 가질 수 있는 축복이며 특권이다.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의 확실함을 믿는다면 죽음이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죽음을 넘어 영원과 부활을 소망하는 확실한 믿음이 있어야 한다. 사람은 누구나 한 번은 죽을 수밖에 없다는 보편적 진리 앞에 서 있는 존재이다. 그러나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을지에 대해서 아무도 모르는 상황에 있다. 그러므로 우리 시대에 꼭 회복해야 할 중요한 가치는 죽음 자체의 극복도 중요하지만, 어차피 인간은 누구나 한 번은 죽는 존재이므로 죽음과 과정에 대한 새로운 세계관의 수립과 그 가치관을 따르는 목회적 사역이 필요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인생을 단순히 그 길이로만 평가 하지 말고, 인생의 깊이와 의미로써 평가하면서 죽음에 대해서도 의미와 목적을 갖고서 믿음으로 응대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죽음은 이 땅에서의 삶은 마무리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영원히 사는 새로운 삶으로 들어가는 새로운 시작이다. 그러므로 생의 마지막인 죽음은 하나님께서 주신 아름다운 선물이 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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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0-09
  • Well dying(good life, good death) 1
    Well dying(good life, good death) 1 - 죽음학(생사학) - 가을이다. 어제부터 내리는 비에 기온이 떨어지고 있다. 이 비가 내린 후에 가을의 정취는 더욱 짙어질 것이다. 산마다 단풍이 여름의 초록을 벗고 붉게 타오르겠지. 이 가을에 오랫동안 미루어왔던 일을 한 번 시도해 보려고 한다. 바로 “Well dying(good life, good death)” 제목으로 병원에서의 15년의 사역 경험과 목회상담학 논문을 중심으로 “죽음학(생사학)”에 대한 글들을 써 보는 것이다. 아무래도 논문의 내용이 중심을 이루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논문을 그대로 옮겨올 생각은 없다. 페북의 성격에 맞게 논문의 내용 중에 꼭 필요한 것들과 병원 사역 중에 만난 실제적 이야기, 그리고 죽음학(생사학)과 관련하여 읽었던 여러 책들을 소개해 보고자 하는 것이다. 이유는 독서 모임 ‘세함’에서 <위그노>에 관한 책을 읽으면서 현재 나의 삶의 자리를 돌아볼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그리고 코로나19와 우크라이나 전쟁 등으로 인해서 급변하는 우리의 삶의 자리를 죽음이라는 주제를 통해서 정립해 보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우리는 지금 너무 바쁘다. 하고 싶은 일도 많고, 갖고 싶은 것도 많고, 보고 싶은 것도 너무나 많다. 그래서 정신없이 달려가고 있다. 그런데 실상은 잘 살지도 못하고, 더더욱 잘 죽을 수도 없는 비참하고 억울하고 안타까운 현실의 노예들이 된 것은 아닐까? 위그노들, 개혁자들, 신실한 믿음의 사람들, 삶의 자리를 분명하게 깨달은 사람들의 삶은 분명 달랐다. 무엇보다도 잘 사는 것과 잘 죽는 것에 대해서 분명한 확신이 있었던 것이라 할 것이다. 선교사로서 중국 실크로드 지역에 살다가 건강상의 문제로 인해 우연히 병원 사역에 몸담은 지 15년이 되었다. 그동안 200여 정도 환자들의 임종을 지켜주면서 얻게 된 확신은 잘 죽는 문제는 결국 잘 사는 문제와 연결된다는 것이다. 아울러 믿음 안에서 잘 죽고 잘 살기 위해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분명한 영생의 확신과 자신의 죽음에 대한 인식과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체험적으로 깊이 깨닫게 되었다. 우리 인간의 삶의 매순간은 동시에 죽음이 공존하는,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순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우리 인간은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존재라는 실존의 본래성을 목회자들부터 인정하고 받아들일 때에 우리의 삶을 더욱 의미 있고 행복할 것이다. 아울러 목회자들이 죽음에 대한 분명한 인식을 중심으로 삶의 의미와 목적을 갖고서 사역을 할 때에 교회와 성도들도 행복하고 기쁜 삶을 살며, 영원과 부활을 소망하게 될 것이다. 죽음의 문제를 잘 해결하기 위해서는 죽음에 대한 분명한 인식과 준비가 필요하다. 이 도전적깨달음을 통해서 목회상담학을 공부하던 중에 박사 학위 논문으로 목회자들의 죽음에 대한 인식을 연구한 것이다. 곧 나의 박사학위 논문 주제는 죽음, 그 중에서도 한국교회 목회자들의 죽음에 대한 인식에 대해서 일반목회자, 선교사, 병원 원목의 죽음에 대한 태도와 불안, 삶의 만족도 및 신앙성숙도 비교를 중심으로 설문하여 비교 분석하는 것을 토대로 한 내용이었다. 이 연구를 통해서 가장 먼저 한국교회를 이끌어가는 목회자들의 삶에 변화가 일어나며, 성도들이 바른 믿음 위에 굳게 서고, 아울러 한국교회가 더욱 성숙한 모습으로 변화되는 기회가 되기를 바랐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한국 교회 목회자들의 죽음에 대한 인식을 연구함으로 한국 교회 안에 죽음에 대한 바른 인식을 정립함으로 목회자들과 성도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의미 있는 삶을 살도록 함에 그 목적이 있었다. 무엇보다도 교회를 이끌어가는 목회자들부터 성경적 죽음관에 대한 분명한 인식과 자신의 죽음에 대한 준비를 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성경적 죽음관 위에 형성된 인식의 기초 위에서 이 세상을 바라보고 생명을 바라보는 성경적 세계관을 정립하여 이 시대를 새롭게 조명하는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담당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연구에서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다루었다. 첫째, 목회자들의 죽음의 인식에 대한 문제를 주요 주제로 다루기 때문에 죽음에 관한 많은 이론 중에서 목회자들이 꼭 알아야 할 죽음에 관한 제 이론을 중심으로 이론적 연구를 하였다. 목회자들이 꼭 알아야할 죽음의 인식에 필요한 이론으로는 죽음의 정의, 죽음에 대한 태도, 죽음에 대한 타 종교의 이론, 죽음에 대한 각 학문 분야의 관점 등이 있다. 둘째, 목회자들이 교회와 성도를 바르게 목양하기 위해서는 신학적 기초가 분명하고 튼튼해야 한다. 특히 인간의 죽음은 기독교의 영생과 부활의 신앙과 직결된 문제이기 때문에 성경적 인간론·기독론·종말론을 통해 성경적 기초에 대해서 연구했다. 아울러 죽음은 결국 생명의 문제와 직결된 문제이기 때문에 생명에 대한 성경적 관점에 대해서도 연구했다. 셋째, 한국교회 목회자들(일반목회자, 선교사, 원목)의 죽음에 대한 인식에 대해서 설문을 통해서 알아보았다. 곧 우리 한국교회 목회자들이 가진 죽음에 대한 인식 정도는 어떠하며, 목회자들 상호간에 어떤 차이가 있는가를 알아봄으로써 앞으로 한국의 신학교와 교회가 죽음과 죽음 교육에 대해서 가져야 가치관과 목회상담적 자세에 대해서 연구하였다. 넷째, 한 사람의 죽음과 종말론적 신앙과 삶을 위해서 이 세상 누구보다도 목회자들이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것을 감안하여 죽음과 목회자의 역할에 대해서 논의 부분에서 집중적으로 다루었다. 곧 한 사람의 죽음에 있어서 목회상담자이며 삶의 상담자로서 목회자의 역할과 위치에 대해서 결론적 대안으로 연구한 것이다. 다섯째, 우리 한국교회 목회자들의 죽음에 대한 인식을 연구한 결론을 내리면서 후속 연구를 위한 과제로서 앞으로 한국교회가 죽음준비교육을 체계적으로 실시해야 할 것에 대해서 제언하면서 병원 원목들의 사역에 대해서 고찰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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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0-09
  • Well dying(good life, good death) 4
    Well dying(good life, good death) - 4, 원목사역을 통한 임상적 경험 병원 사역 중에 가장 가슴 아프고, 목회자로서 힘든 일은 동료 목회자들이 과로를 비롯한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 말기 암에 걸려서 입원하는 것이다. 목회사역이 얼마나 힘들고 외로운 길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목회자들이 40대, 혹은 30대나 50대에 말기 암으로 인해 호스피스 병동에 입원을 하게 되면 마음이 참으로 무겁다. 아울러 더욱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은 평생을 목회자의 길을 걸어왔지만 죽음 앞에서 전혀 준비 되지 못한 모습으로 오직 병이 낫기만을 원한다거나 죽음을 부정하고 심지어는 자신이 전했던 복음을 부정할 때이다(그러나 일반적으로 긍정적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가끔 부정적인 경험을 하게 된다). 지난 15년 동안 병원에서 경험한 여러 사건들이 이 글을 쓰게 된 가장 중요한 이유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죽음에 대해 준비되지 못하고, 부정적인 모습 속에서 임종을 맞이한 목회자들, 입술로 전한 말씀과 삶이 괴리된 안타까운 모습의 목회자들, 이 땅에 이미 임한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는 전혀 반응하지 못하고 오직 죽어서 가는 천국만 생각하는 목회자들은 나의 가슴 속에 아픔과 믿음과 사역에 대한 숙제로 남아 있다. ① 목사 A씨: 목사인 A씨는 말기 암으로 인해 임종을 맞으면서 마지막 유언을 “하나님은 안 계시니까 하나님을 믿지 말라”고 남겼던 죽음에 대한 극단적 부정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40대 후반의 나이에 말기 암으로 인한 마음과 육체의 고통 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원망과 실망감, 가족들에 대한 책임감과 사랑, 그리고 이 땅에서 이루지 못한 일에 대한 아쉬움, 무엇보다도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복합적으로 교차하면서 그런 극단적 부정의 상태에 이른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생과 부활의 복음의 믿고 그 복음을 위해 평생을 헌신했던 목회자가 자신의 뜻하지 않은 죽음 앞에서 하나님을 부정하는 모습은 같은 목회자로서 우리가 입으로 전하는 복음의 능력이 무엇이며, 과연 목사가 되었다고 해서 죽음을 넘어 영원을 바라보는 참 믿음이 있는가에 대해 심각하게 질문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② 선교사 B씨: 선교사로 해외에서 사역을 했던 B씨는 젊은 40대의 젊은 나이에 말기 암으로 인해 우리 병원 호스피스 병동에 입원을 하게 되었다. 그분은 또 다른 형태로 죽음을 거부한 경우인데, 날마다 친분이 있는 여러 목사님들을 초청하여 쉬지 않고 예배를 드리는 것을 원했다. 물론 원목인 나에게도 하루에 두세 번씩 꼭 자기를 찾아와 기도해 주고 예배 인도를 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모든 예배와 말씀 그리고 기도는 오직 병이 나을 것이며 다시 회복시켜 더 큰 선교(본인의 표현)를 하게 하실 것이라는 것에 초점을 맞추기를 원했다. 그리고 매일 아침 나에게 묻는 질문은 단 한 가지였다. “목사님, 하나님이 나는 미워하시는지 아무 말씀도 안 하시지만 목사님에게는 말씀하실 것 같은데, 오늘은 하나님이 나를 살려주신다고 말씀 안 하셨나요?” 그분은 임종하는 날까지 죽음을 철저히 배제한 채 그렇게 사는 것만 소망하다가 아무런 죽음에 대한 준비도 없이 임종을 맞이했다. ③ 선교사 C씨: 선교사이며 미혼이었던 50대의 C는 하나님 앞에 섭섭함과 분노로 가득 차 있었다. 그래서 자기 앞에서는 하나님에 대한 어떤 이야기도 하지 말 것이며, 예배를 비롯한 기도조차 하지 못하게 막았다. 독신으로 살면서 평생을 하나님과 복음만을 위해 살았는데 이렇게 모진 질병에 걸리도록 한 하나님이 싫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말씀을 통한 권면과 믿음의 형제들의 방문에 대해서 입을 꼭 다물고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질병과 함께 점점 마음이 닫히면서 급기야 모든 면회와 방문마저 거절함으로 인해 임종의 순간까지 예배를 드리지 못하는 안타까운 일을 경험하였다. 이상의 내용은 병원 사역을 통해 직접 경험한 많은 사례 중에서 대표적으로 목회자(선교사)들과 관련된 몇 가지 사례이다. 병원에서 사역을 하면서 목회자들이라고 해서 꼭 모두가 부활과 영생에 대한 신앙이 분명하며, 죽음에 대한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은 아니라는 중요한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오히려 현대의 과학과 의술을 맹신하면서 성경의 주님은 오직 질병을 치유하고 죽은 자도 살리는 주님, 곧 나에게 이 땅에서 필요한 것을 채워주는 분으로만 인식하고 있는 경우가 많이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실상 죽음의 문제는 어떤 사람이든지 직접적으로 겪어볼 수 없는 문제이기 때문에 도무지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것이다. 이것에 대해서 최재락은 “죽음은 모든 인간이 죽는다는 점에서는 보편적인 사건이지만, 한 개인이 경험하는 죽음의 특성과 상황이라는 측면에서는 특수한 사건이다”라고 말한다. 그래서 정진홍은 실존주의 철학자들은 인간이란 자신의 죽음에 대해 충분히 관심을 갖지 않으면 자신의 삶을 제대로 살기 어렵다고 주장한다고 이야기 한다. 즉 실존적으로 볼 때에 삶과 죽음 사이에는 큰 괴리가 있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죽음이란 피할 수 없는 것으로 생각하고 죽음이 다가오면 두려움 속에서 부정적이며 수동적으로 수용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인간에게 있어서 죽음은 긍정적이고 적극적으로 처리되어야 할 과제라고 할 수 있다. 이것에 대해서 최재락은 “인간의 존엄성은 자기 자신의 삶의 특수성과 죽음의 특수성을 실현시킬 때 가능하다. 곧 인간은 자신의 죽음을 소극적으로 회피하거나 수동적으로 기다리고 받아들여야 하는 대상으로 생각하지 말고, 한 주체로써 적극적인 자세로 죽음을 대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라고 이야기 한다. 하지만 오늘 우리 시대의 특징은 죽음을 터부시하고 두려워하는 현상이 지배적이기 때문에 총체적 죽음의 위기 속에 있는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이것에 대해서 김균진은 “인간의 세계는 생태학적 위기의 차원을 넘어 총체적 죽음의 위기에 처한 것이다. 더 잘살기 위해서 과학을 발전시키고 경제 발전을 추구하면 추구할수록, 그리고 물질 생활이 편리해지고 풍요해 짐에 비례하여 죽음의 위험성이 더 커지고 있다는 말이다”라고 주장한다. 곧 오늘날 우리가 처한 사회적인 분위기는 죽음을 우리 인간의 삶에서 점점 몰아내고 배제하도록 만들고 있다. 그래서 목회자들의 죽음에 대한 인식 연구가 필요한 것이며, 아울러 죽음에 대한 깊은 이해가 필요한 것이다. 그러므로 죽음에 대한 바른 이해의 필요성은 다음과 같이 몇 가지 요소로 설명할 때에 그 의미가 더욱 분명해질 것이다. ① 죽음 앞에 선 인간이 누구나 존중 받으며, 자신의 죽음과 관련된 의료적이며 사회적인 결정에 대해서 자신이 직접 결정하고, 부활과 영생에 관한 소망과 기대 가운데 죽음을 맞이하도록 하는 데 있다. ② 사람들은 죽음에 대한 성경적 깨달음이 있을 때 사람들은 죽음의 건전한 철학을 적극적으로 추구하게 될 것이며, 아울러 삶의 만족도도 매우 높아질 것이다. ③ 목회자들로 하여금 죽음에 대해서 분명한 성경적 관점과 신앙을 갖고서 자신의 죽음을 준비하도록 하는 것이다. ④ 목회자들로 하여금 목회를 하는 중에 임종에 임박한 성도에게 죽음을 잘 맞이하도록 목회상담적으로 도울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죽음은 우리 삶의 한 부분을 늘 차지하고 있었던 존재이기 때문에 무서워하고 피해야 할 존재가 아니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임종을 맞이하는 사람들에 죽음을 잘 맞이할 수 있는 영적인 돌봄의 사역을 해야 한다. 아울러 죽음으로 말미암아 가족 간에 용서와 화해가 일어나고 새로운 천국 소망을 갖도록 하는 사역을 해야 한다. 인간적으로 볼 때에는 최악의 상황이라고 생각되는 죽음을 하나님께서 가장 선하게 사용하셔서 가장 중요한 축복의 순간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죽음을 넘어서는 부활의 신앙이 바로 우리 기독교 복음의 핵심이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진정한 소망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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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0-08
  • 자기 옹호 (Self- Advocacy)
    한국의 이번 대선 결과에서 20,30 세대가 남, 여 간의 성 갈등을 많이 보여준다고 이야기를 한다. 그동안 남성 중심이었던 사회에서 여성들의 권리를 존중하는 움직임이 있으면서 갈등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역사적으로 사람들이 살아가는 사회에는 강자와 약자의 갈등은 늘 있어왔고 대부분의 사회에서의 약자들은 자신의 권리를 누리지 못하고 약자라는 이유로 희생하면서 살아가야 했다. 사회에서 약자에 속하는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어린이, 노인, 여성 그리고 장애인, 극빈자 등이라고 볼 수 있는데 사회가 어려울수록 약자들이 더 어려움을 겪게 된다. 통계에 의하면 코로나19 기간에 여성과 청소년들이 취약함으로 인한 정신적 어려움을 더 많이 경험했다고 한다. 선진 사회가 될수록 우리들은 약자들의 목소리를 더 사회에 반영하려고 하고 그들의 권리도 함께 존중하려고 하는 움직임들이 생겨나게 된다. 호주에서는 최근 신체, 정신 장애인과 원주민들의 목소리를 존중하고 그들이 편안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많은 배려를 하고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사자들은 자신의 권리를 찾고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것이 쉽지가 않다. 일 례로, 한 중년의 남성 장애인은 자신을 돕기 위해서 찾아오는 지원 근로자 (Support Worker)가 자신의 맘대로 일찍 가기도 하고 어떤 때는 일을 오지도 않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에 대해서 한 번도 불평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또 어떤 중증 장애인은 자신들에게 자신이 늘 짐인 것처럼 느껴져서 자신이 섭섭한 것도 이야기를 하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것도 표현하지 않고 늘 참는다고 이야기하는 것을 듣게 된다. 자신의 권리를 찾는 것 그리고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것이 일반 조직 사회에서도 쉬운 일이 아니다. 불의에 대해서 목소리를 내다가 직장에서 퇴사를 당하는 경우도 종종 있기에 불의함을 감내하거나 회피해 버리는 경우도 종종 많다. 일반사람들도 그런데 장애인이나 정신적인 문제를 가진 사람들이 나의 권리를 요구하며 자신의 목소리를 높인다는 것이 이론적으로는 좋으나 실제 상황에서는 쉽지가 않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원하는 요구사항이 어떤 것인지 자신은 어떤 도움이 필요한지 그리고 무엇을 좋아하는지를 표현하지 않으면 특히, 장애인의 경우나 정신적인 질환을 가진 사람들의 권리는 쉽사리 무시되기가 쉽다. 그래서 정신 장애를 가진 사람들을 돕고 장애인을 돕는 기관들에서는 그들이 자신의 권리를 되찾기 위해 ‘자신을 옹호 (self-advocacy)하는 역할을 적극적으로 하라고 한다. 한국에도 지금은 예전과 다르게 많은 시민 단체들이 사회의 불이익을 당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또는 사회 문제들에 대해서 목소리를 높이는 역할들을 하고 있는데 이는 사회에서 중요한 힘을 발휘하게 한다. 자신을 옹호하는 역할은 결국 해당되는 사회적 이슈와 관련된 당사자와 관련인들이 목소리를 내어 하는 수밖에 없다. 자신을 옹호할 수 있는 것도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하나의 권리인데 자신의 뜻을 대변하고 주장하는 권리가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사회적으로 열악한 환경에서 살아가는 많은 약자들은 자신이 처한 나쁜 상황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면서 자신의 권리를 알지도 못하고 사용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사회가 더 약자를 보호하고 존중하기 위해서 왜 자기 옹호가 필요할까? 그것은 개인들이 목소리를 내지 않으면 사회의 그 어떤 것도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사회는 약자들에 대해서 관심이 부족한 편임으로 그들이 자신의 삶에 내려진 결정에 동의하지 않거나 권리가 존중되지 않거나 필요가 충족되지 않았음을 알리는 유일한 방법이 목소리를 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공부를 하고 있는 학생들이 개선이 필요한 부분에 대해서 피드백을 주지 않게 되면 그 학교에서 가르치는 선생님은 모든 것이 정상이고 잘 돌아가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약자들이 자신을 옹호할 수 있도록 자신의 목소리를 높이도록 시도하고 실패하는 것이 전혀 시도하지 않는 것보다 더 낫다고 말해 주며 목소리를 내는 것이 자부심과 자신감을 향상시키는데 도움이 되고 또 비슷한 목소리를 내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음을 알려 주며 동시에 세상의 불의나 변화가 필요한 규칙이나 잘못된 방식이 드러날 수 있도록 함께 ‘자기 옹호’를 적극적으로 격려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런 자기 옹호가 적절하게 사회에서 기능을 하기 위해서는 사람들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책임과 권리를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렇지 못할 때 사람들은 자신의 책임에 눌려 권리를 누리지 못하게 되고 때로는 책임은 회피하면서 권리만 찾게 된다. 호주 사회는 사회 보장제도가 발달된 나라이기에 개인적 권리를 중요시하는 부분이 있다. 그래서 자신의 목소리를 높이고 권리를 주장하는 사람에게 더 많은 혜택이 돌아가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예를 들면, 똑같이 장애인 자녀들 둔 부모님이지만 어떤 부모님은 목소리를 높이고 자기 옹호를 열심히 해서 혜택을 더 다양한 영역에서 받고, 어떤 부모님은 그렇지 못한 경우들이 있다. 필자가 아는 지인은 자녀가 정기적으로 복용해야 하는 비싼 약이 있는데 의료보험 혜택을 받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지인은 몇 년에 걸쳐서 지속적으로 편지를 쓰고 필요성을 정치인들에게 알림으로 인해서 결국 의료 보험 혜택에 자녀의 질병이 들어가게 되어서 지금은 해마다 몇 천 불을 절약하게 되는 결과를 얻게 되었다. 이렇게 자신을 옹호할 수 있는 사람은 결국 힘을 행사하게 되고 자신의 권리를 찾게 되는 일을 경험할 수 있게 된다. 비단 장애인이나 정신 질환을 가진 사람뿐 아니라 소수 민족으로 호주에서 살아가야 하는 한국인 호주인들도 행사할 수 있는 자기 옹호의 부분이 민족적으로 행사하는 것이 필요하다. 사실 많은 영역에서 타문화권 배경을 가지고 있다는 것으로 인해 불이익을 당하고 사회의 복지를 누리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한국인으로서 적극적으로 자기 옹호의 목소리를 높임으로 살아가는 것이 호주 땅에서 권리를 누리며 살아가는 방법이다. 호주기독교대학 대표 (President of Australian College of Christianity) One and One 심리상담소 대표 (CEO of One and One Psychological Counselling Clinic) 호주가정상담협회 회장 (President of Australian Family Counselling Association) 한국인 생명의 전화 이사장 (Chair of Board in Australia Korean Life Line) ACA Registered Supervisor (ACA등록 수퍼바이저), ACA Member Level 3 (ACA정회원) 기독교 상담학 박사 (Doctor of Christian Counselling) 목회상담학 박사 (Doctor of Pastoral Counselling) 고려대학교 국제경영 석사 (MBA of International Business at Korea University)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졸업 (MdiV at Chongshin Theological Seminary) 고려대학교 신문방송학과 졸업 (BA of Mass Communication at Korea University) 총신대학교 신학과 졸업(BA of Theology at Chongshin Univers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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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고
    2022-06-11
  • 바른 결정과 선택
    바른 결정과 선택 인생을 살아오면서 우리는 많은 결정들을 내리고 살아간다. 어떤 학교를 갈 것인가? 누구와 결혼을 할 것인가? 어디에 집을 구할 것인가? 어떤 직업을 가질 것인가? 와 같은 큰 결정들을 내리기도 하고 무엇을 먹을 것인가? 잠을 조금 더 잘 것인가? 어떤 옷을 입을 것인가? 와 같은 작은 결정들을 수도 없이 하면서 일상의 삶을 살아간다. 그런데, 어떤 결정들은 삶의 방향을 완전히 바꾸어 놓게 하기도 하고 어떤 결정들은 처음에는 별 것이 아닌 것 같으나 나중에 그 결정이 큰 결과를 가져오게 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호주라고 하는 곳으로 이민을 가기로 하는 결정은 삶의 방향을 완전히 바꾸어 놓게 하는 결정일 수 있다. 호주에 와서 사는 곳, 친구, 직업 등 삶의 대부분의 것이 완전히 바꿔 지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 어떤 결정은 ‘누군가를 미워하지 않고 용서하기로 한다’ 라는 것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 결정일 수 있지만 용서함으로 인해 오는 마음의 평안이 자신뿐 아니라 가족들과 타인과의 관계 가운데도 영향을 미쳐서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함께 행복해지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한다. 결정과 선택의 중요성을 아는 사람들 중 좀 더 탁월하고 완벽해지고 싶은 성향으로 인해 오히려 결정을 잘 내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렇게 결정을 못 내리는 사람들은 때로 배우자나 타인이 자신을 대신해서 결정을 내려주기를 바라는 경우도 종종 보게 된다. 그럴 때 자신이 면밀한 준비와 조사를 다하고는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결정권은 타인에게 주어버리는 결과를 낳게 된다.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고 바른 선택을 연습하지 않으면 늘 후회와 회피의 삶을 살아가게 되고 때로는 선택의 결과가 주는 고통을 뼈저리게 경험할 수밖에 없게 된다. 다른 사람에게 나의 삶의 선택을 내어주어 버린다면 나의 삶은 자유와 자율성을 상실해 버림으로 더 이상 나의 삶이 아니게 된다. 그러므로 힘들지만 자꾸 선택하고 결정하는 연습을 하고 결정을 할 때 좀 더 나은 결정을 내리도록 노력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바른 선택을 할 수 있을까? 또는 바른 결정을 할 수 있을 까? 이 질문에 쉬운 답은 없지만 몇 가지의 생각을 살펴보고자 한다. 사람들이 어떤 결정을 할 때는 ‘이익 추구’의 관점이 많다. 어떤 결정을 하는 것이 나에게 더 유익이 될 것인가를 생각하고 결정을 내리는 것이다. 필자는 상담을 하면서 종종 내담자의 결정을 돕게 되는데 내담자가 어떤 결정을 하는 것이 자신에게 더 유익된 결과를 가져올 지를 생각하게 할 때가 있다. 이것은 개인의 차원에서 많은 도움이 될 수 있다. 감정적 차원이 아닌 이성적 차원에서 손익을 생각하고 바른 결정을 내리도록 돕기 때문이다. 이것은 자본 주의의 논리와도 비슷하다. 수요와 공급의 원칙에 따라 더 이윤이 남으면 그 일을 하기로 선택하는 것이다. 그런데 한 개인적인 입장에서는 이익을 추구하는 결정을 내리는 것이 합리적일 수 있으나 그것이 개인이나 집단 이기주의로 이어지면 나의 가족의 이익을 위해 나는 어떤 불의한 일도 서슴지 않고 하는 것은 잘못된 길로 가게 될 수 있다. 나의 이익이 타인의 이익이나 모두의 이익이 아닐 때가 많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코로나 사태가 생겼을 때 사람들은 사재기를 하기 시작했는데 사재기를 한 사람에게는 유익이고 안심을 가져다 주는 행동이었지만 필요한 물건을 사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큰 어려움을 주게 되었다. 다수를 위한 결정에 초점을 맞추게 되면 ‘공리 주의’의 관점을 띄게 된다. 공리주의에서는 다수의 유익을 위한 결정을 내리는 것이다. 혼자가 아닌 다수를 위한 결정을 내리는 것은 상당히 합리적일 수 있다. 많은 사람을 유익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거기에는 또 다른 문제가 있을 수 있다. 한 개인의 인권이 다수의 유익을 위해 희생되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무조건 문을 닫아야 한 많은 비즈니스 운영자들은 공리주의를 기반으로 한 결정의 피해자일 수 있다. 다수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정부는 그런 결정을 내렸고 사람들은 그것을 따르고 받아들여야 했으며 누군가는 그런 결정의 결과로 ‘자살’을 선택하는 일도 생겼으니 말이다. 다음으로 사람들이 결정을 내릴 때는 ‘미덕 추구’의 관점이 있다. 어떤 결정이 옳은 것이고 사회의 정의에 가깝다고 여길 수 있는 것인지에 따라 결정하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더 정의롭고 청렴하고 사랑과 자비와 존중과 배려와 같은 덕목이 중요하다. 예를 들면, 이번에 코로나 바이러스가 발병함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직업을 잃어버리고 특히, 임시 비자 소지자들은 더 많은 고통을 겪게 되었는데 많은 한국인 상인들이 유학생들과 워킹 홀리데이 비자를 가진 사람들에게 무료 음식이나 비상용품들을 제공하는 일들이 일어났다. 또한 정부도 어려운 시기에 정부 예산을 다른 것에 쓰지 않고 사람들을 돕는 일에 우선적으로 사용하는 일들이 있는 것은 ‘어려운 시기에 서로를 돕는 것이 옳은 것이라’는 생각들이 사람들에게 있고 그것에 따른 결정을 내렸기 때문이다. 작은 개인의 삶의 결정과 큰 사회적 구조안의 결정과 선택에는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동일하게 모든 결정에는 개인의 가치관 또는 사회적 담론 (social discourse)그리고 그 이면에는 철학적 이슈와 함께 가는 윤리적 부분이 함께 따라간다. 개인 모두가 성인군자처럼 완벽하게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결정을 하면서 살아갈 수는 없지만 적어도 내가 내리는 결정이나 선택이 나 뿐 아닌 타인에게 영향을 줄 수 있는 결정이라면 전체의 유익과 결정이 타인에게 미치는 영향을 생각해 보는 것이 개인과 공동체 전체를 건강하도록 유지하는 것에 필요한 것이라 생각된다. 최근, 코로나로 인한 중국의 위상이 내려간 부분에 대해서 말이 많은 것은 문제가 생겼을 때 중국이 대처한 방법에 대한 윤리적 부분에 대한 책임성의 문제가 크다고 본다. 그들이 내린 결정이 집단 이기 주의의 결정이 아니라 좀 더 큰 사회의 공익을 생각하고 한 사람 한 사람의 인권과 복지를 존중하는 윤리적 결정을 할 수 있었다면 전 세계는 지금 많이 달라져 있을 것이다. 살아가면서 우리가 내리는 결정들이 작은 결정일 수 있지만 ‘나비 효과’처럼 작은 결정이 큰 효과를 가져오는 결정일 수 있다. 그러므로 내가 내리는 결정을 나의 관점에서만 생각하지 말고 조금 더 큰 관점으로 바라보고 살펴봄으로 좀 더 행복한 사회를 만들어 나가도록 기여할 수 있기를 바란다. 호주기독교대학 대표 (President of Australian College of Christianity) One and One 심리상담소 대표 (CEO of One and One Psychological Counselling Clinic) 호주가정상담협회 회장 (President of Australian Family Counselling Association) 한국인 생명의 전화 이사장 (Chair of Board in Australia Korean Life Line) ACA Registered Supervisor (ACA등록 수퍼바이저), ACA Member Level 3 (ACA정회원) 기독교 상담학 박사 (Doctor of Christian Counselling) 목회상담학 박사 (Doctor of Pastoral Counselling) 고려대학교 국제경영 석사 (MBA of International Business at Korea University)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졸업 (MdiV at Chongshin Theological Seminary) 고려대학교 신문방송학과 졸업 (BA of Mass Communication at Korea University) 총신대학교 신학과 졸업(BA of Theology at Chongshin Univers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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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3-29
  • 늘 똑같은 김장환 목사의 움직임
    기사로 나왔기에 올려 본다...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의 배우자 김건희씨의 활동이 지난해 대국민 사과 이후 처음으로 언론에 포착됐다. 김씨가 지난 14일 수행비서 1명과 함께 서울 마포구 극동방송국에서 극동방송 이사장인 김장환 목사를 비공개로 만났다고 15일 <국민일보>가 보도했다. 김씨는 이날 약 3시간 가량 김 목사와 대화를 한 뒤 “김 목사께서 인생의 지혜를 말씀해주셨다. 정기적으로 만나 뵙고 좋은 말씀을 듣고 함께 기도한다. 많은 위로를 받아 스스로를 돌아보는 계기가 되고 있다”고 말했다." ................... 김장환 목사의 움직임이 언제 나오나 했다. 군사정권 시절 맨날 교회에서 "정치와 교회는 분리해야된다. 아니다 구별이 맞다"는 흰소리를 그리하며 대놓고 국가조찬기도회에서 장군을 위해 기도하던 목사들... 노욕이다. 그만큼 누리고 혜택받고 그랬으면 됐지... 아직도 정치에 깊숙히 관계를 맺고 있다. 겉으로는 신앙상담이요 전도라고 하면서 뒤로는 면죄부를 주는 이런 짓거리를 수십년째 해오고 있다. 정신 차리라... 아합의 때에 이세벨의 편에 섰던 자들이 850명이나 있었다. 떵떵거리며 어깨 힘주고 지들끼리 신탁이 어떠니, 계시가 어떠니 떠들고 다녔을거다. 하지만 나중에 하나님의 말씀의 의하면 바알에게 무릎꿇지 않은 자가 7,000 명이 있었다. 별 수 없다. 엘리야가 나서야 전쟁이 시작된다. 야훼의 존재를 드러낼 선지자가 나서야 판이 정리된다. 김장환의 언행은 면죄부 주기며 한국교회에 윤씨 부부를 새끈한 후보로 꽃단장 해주는 작업이다. 온갖 귀신과 점술과 법사들에 둘러싸인 자가 이제는 목사에게 상담까지 받으며 스스로를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잘 돌아보아 대통령이 되고 싶은거지... 지난 날을 회개하며 뒤로 물러설 일은 1도 없다. 어쩜 그리도 정확하게 예상대로 등장하시어 신앙이라는 미백효과로 힘을 보태 주시는지... 원로들이시여 사리분별이 안되면 기도라도 깊이 하셔야죠... 이 세상을 지옥을 만들어 놓고 본인들은 천국에 가시면 행복 하시겠어요? 총신대학교 졸업총신대학신학대학원 졸업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 졸업University of Birmingham, England에서 Interreligious Relations 전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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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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