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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고】여성 안수 문제,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1. 안타까운 108회 총회의 갈지(之)자 행보 이번 108회 총회에서 여성 사역자 위원회는 여성들에게도 강도사가 될 수 있는 길을 제안하였고, 이를 이의 없이 총회는 받아들였다. 이러한 결정은 우리 총회가 획기적인 방향으로 걸어갈 수 있는 놀라운 진전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는 총회 마지막 날 번복되었다. 없던 일이 되었고, 더 나아가 아예 여성들이 안수에 대해서는 꿈도 꾸지 못하도록 다른 이름의 직책을 만들어주겠다는 것으로 방향을 잡았다. “교육사”, “신학사”라는 이름으로 설교할 수 있게 해주겠다는 것인데, 이는 목사 안수는 아예 가능하지 않도록 못박아 버리는 일로 보여진다. 이러한 갈지자 행보는 더더욱 여성들로 하여금 분노하게 만들고, 교단을 떠나는 일이 가속화될 것이라고 예상된다. 이러한 결정이 아쉬운 것은 여성이 교회에서 잠잠해야 하기 때문에 목사 안수를 줄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도, 정작 “교육사”, “신학사”라는 이름으로 설교할 수 있게 하겠다는 자기모순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2. 교단은 이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구해야 한다 우리 교단의 현행 헌법에서 여성 안수를 허용하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여성 안수에 대해서 논의하는 것은 잘못이 아니다. 종종 여성안수를 주장하려거든 그런 교단으로 떠나가라고 겁박하는 분들이 있다. 그들은 스스로를 칼빈주의자라고 하는데, 칼빈주의의 요체는 무엇보다도 성경이 최고의 기준이며, 그 어느 것도(교단헌법과 교리교과서 등등) 성경과 동등한 권위를 갖지 못하기에, 모든 것이 성경의 판단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칼빈주의자라면 성경의 가르침을 들어서 반박해야지, 교단 헌법으로 겁박한다면 너무 궁색해 보일 뿐이다. 성경만이 우리의 신앙과 행위에 최고의 기준이며, 다른 모든 것은 성경의 판단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 우리 교단의 가장 중요한 원칙이다. 성경 외에는 그 어느 것도 무오(無誤)한 것은 없으며, 실제로 우리 교단의 헌법은 여러 번 수정을 해왔다. 그리고 심지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안에 있는 행위언약이 성경의 가르침에 부합하는지 질문이 들어왔을 때, 왜 신앙고백서를 따르지 않느냐고 정죄하지 않고 성경을 다시 한번 살펴보자고 입장을 정리했다. 여성 안수의 문제는 과연 성경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것이다. 여성에게 안수를 해야 한다는 것은 단순히 시대의 조류를 따르는 것이라고 폄하해 버릴 것이 아니다. 우리가 시대의 조류를 따라서는 안 되고, 성경이 최고의 기준이라고 하는 원칙은 아주 소중하다. 우리는 시대의 조류를 따를 것이 아니라, 성경이 가라고 하는 데까지 가야 하고, 성경이 금한다면 아무리 세상이 바뀌어도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야 한다. 문제는 과연 여성에게 안수하는 문제가 시대 조류에 편승한 것인가이다. 여성에게 안수하자는 주장이 시대의 조류에 편승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사실 과거에는 과거라는 시대의 조류에 따라 여성에게 안수를 하지 않았다는 것을 인정하는 셈이다. 무엇보다도 성경에서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물론 성경은 분명하게 “여성은 교회에서 잠잠하라”(고전 14:34)고 되어 있다. 그렇게 성경이 금하고 있는데, 여성 안수가 어떻게 가능하다는 말인지 쉽게 납득할 수 없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면, 즉 만일 여성이 교회에서 잠잠해야 한다는 이 말씀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분명하게 믿는다면, 지금 당장 여성들이 하고 있는 대부분의 모든 사역들을 교회에서 금지해야 할 것이다. 구역장도 안 되고, 세미나 강사로 세워서도 안되고, 교사도 할 수 없다. 만일 이게 하나님의 뜻이라고 진정으로 믿는다면 말이다. 하지만 이것이 여성으로 하여금 교회 내에서 성직자로 세워질 수 없는 근거 구절로 사용될 수 없다. 왜냐하면 “성경 전체로”(tota scriptura)의 원칙 때문이다. 성경 구절 한두 구절에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 전체의 가르침이 무엇인지를 살펴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성경 전체로의 원칙이 무너지고 성경의 한두 구절에 의존하면, 하나님의 뜻과 위배되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예를 들어,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만을 선택했다고 말하고 있으며, 모압과 암몬 민족은 하나님의 회중에 “영원히” 들어올 수 없다고 되어 있고, 더 나아가 예수님은 오직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에게로만 보냄을 받았다고 말씀하셨다. 이런 말씀들만 보면 이방인들에게 선교를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완전 위배되는 것이 될 것이다. 하지만 성경 전체의 가르침에서 보면 선교가 하나님의 뜻임을 알 수 있다. 심지어 모압 여인인 룻도 하나님의 회중 속으로 들어와 메시야의 조상이 되었다. 그러니까 성경 한두 구절만 보면 안 되는 것이다. 성경 전체의 가르침이 무엇인가를 구해야 하는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신 구속사역이 어떤 변화를 가져왔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그러한 관점 때문에 초대교회 예루살렘 총회는 할례를 이방인들에게 요구할 필요가 없다는 가장 진취적인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이미 하나님은 여성인 드보라와 훌다를 지도자와 선지자로 세웠고, 고린도전서 11장에서는 여성들이 교회내에서 예언(하나님의 뜻을 풀어 가르치는 것)하는 것 자체를 금하지 않고 머리에 두건만 쓴다면 예언할 수 있다고 하였다. 사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구원은 요엘 선지자의 예언을 결국 성취시켰다. 즉 그때가 되면 “내가 내 영을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그들이 예언할 것”이라고 하였는데, 오순절 때 이미 성취되었다. 이제는 여성들도 하나님의 뜻을 풀어 가르칠 수 있게 하신 것이다. 종종 예언과 가르침은 다르다고 반론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고린도전서 14:31에서는 예언의 목적이 가르치고 권면하는 것이라고 분명하게 못박고 있다. “너희는 다 모든 사람으로 ‘배우게’ 하고 모든 사람으로 ‘권면을 받게’ 하기 위하여 하나씩 하나씩 예언할 수 있느니라.” 예수님께서 12제자 중에 여성을 한 명도 세우지 않았다는 사실이 반론의 근거일 수 없다. 물론 예수님께서 여성도 12 제자 가운데 포함시키셨더라면 논란 자체가 정리되었겠지만, 예수님께서 남자들만 제자로 세우셨다는 것이 여성은 안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할 필요가 없다. 사실 따지고 보면 12제자 중에는 사마리아 출신이 한 명도 없고, 더 나아가 이방인도 한 명도 없었다. 그러면 오로지 유대인만 사역자가 될 수 있다는 뜻일까? 한국 사람이 성직자를 하겠다고 하는 것은 잘못이 되는 것일까? 개혁주의의 원조격인 칼뱅도 오로지 남자들만이 사역을 할 수 있다고 보았다는 것도 반론의 근거일 수 없다. 칼뱅은 아주 뛰어난 신학자이지만, 완벽한 사람은 아니었다. 칼뱅의 입장이 모두 다 100% 맞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칼뱅은 성경의 가르침이 비추어보아서 자신의 주장이 잘못되었다면 자신의 주장을 따르지 않아야 한다고까지 말했다. 우리가 칼뱅을 우상화해서는 안 되는 것이고, 항상 성경만이 최종적인 권위가 되어야 한다. 여성 안수를 받아들이면 결국 자유주의를 받아들이게 되지 않을까 우려가 많다. 자유주의를 받아들인 교단들이 주로 여성 안수를 시행하는 것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성 안수를 받아들인 교단이 모두가 다 자유주의화된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미국의 CRC교단, 고신교단의 모교회 격이라고 할 수 있는 화란개혁교회(31조파)도 여성 안수를 수용했다. 또한 한국 내에서도 개혁주의를 표방하는 보수교단인 백석 교단과 여러 개혁 장로교단들도 여성 안수를 받아들이고 있지만, 철저하게 자유주의를 배격하고 있다. 그 동안 이런 식의 반론은 참 많이 있었다. 주5일제 시행하면, CCM 복음송을 받아들이면, 외국과 무역을 하게 되면, 조상제사를 드리지 않으면, 부모님이 주신 머리카락을 자르면, 세상이 망할 것이라는 식의 주장이 많이 있었다. 하지만 찰싹거리는 작은 파도를 보면서, 두려움과 무서움 때문에 한 발자국도 떼지 못하면 결국 도태될 뿐이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과연 무엇이 성경 전체를 통해서 가르쳐주시는 하나님의 뜻인가일 것이다. 물론 우리와 깊은 관계가 있는 미국의 PCA, OPC 교단과 같은 곳에서도 여성 안수는 허용하지 않고 있다. 하지만 PCA, OPC 교단도 머지않은 장래에 여성 안수를 받아들이게 될 것이라고 예상한다. 왜냐하면 모두가 성경의 가르침에 순복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교단이기 때문이다. 성경을 연구하고 또 연구해보면, 여성들에게 잠잠하라고 했던 것이 당시에 있었던 일시적인 명령이었을 뿐이라는 것이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성경을 최고의 권위로 인정하고 받아들인다면, 결국 성경의 가르침을 따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수천 년 동안 여성들이 사역하는 것이 막혀 있었다는 사실도 반론의 근거일 수 없다. 안타깝게도 사람은 객관적 존재가 아니다. 그래서 자신의 환경과 문화의 영향을 받아서 성경을 해석하다 보니, 그 해석이 잘못될 수 있다. 사실 종교개혁자들은 천년이 넘도록 지속되었던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이 잘못된 것이라고 외칠 수 있었다. 아니 그 이전에 이미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중심의 종교가 순 엉터리일 뿐이며 잘못된 것이라고 외치셨다. 역사가 오래 되었다고 항상 옳은 것은 아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의 불변의 원칙은 “개혁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거하여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ecclesia reformata semper reformanda est secundum verbum dei)이다. 항상 하나님의 말씀에 다시 비추어보아서 그동안의 전통이 잘못된 것은 없는지 점검해야 한다. 전통으로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면 안 된다(마 15:3). 사실 초대교회에서도 브리스길라와 같은 여성 사역자가 있었고, 유니아라는 여성(롬 16:7)도 12 사도는 아니었지만 바나바와 같은 또는 비슷한 역할을 했던 사도였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황금의 입이라고 알려진 요한 크리소스톰(350-407)은 유니아에 대해서 “사도가 되는 것은 위대한 일인데, 그 가운데 뛰어난 자였다. 이게 얼마나 놀라운 영예의 노래인가!”라고 했다. 장로나 집사로 세우려면 “한 아내의 남편”이어야 한다는 말은 여성은 안 된다는 뜻으로 보아야 할 필요가 없다. 장로의 자격에 “방탕하다는 비난을 받거나 불순종하는 일이 없는 믿는 자녀를 둔 자라야”한다(딛 1:6)는 구절이 있지만, 결혼하지 않았거나 아직 자녀가 없다고 해서 목사나 장로 임직의 결격 사유로 보지 않는다. 이 표현은 “자녀를 두었을 경우에는”이라는 말이 생략된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 아내의 남편이어야 한다는 말은 “만일 그가 결혼한 남자라면”이라는 전제가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따라서 “한 아내의 남편”이어야 한다는 말을 여성은 안 된다는 뜻으로 확대하는 것은 잘못이다. 이 구절은 결혼 생활에 있어서 성결을 유지해야 한다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아직 교단 내에 여성 안수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다. 초대 교회 할례에 대한 의견이 분분했던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고 하면 그냥 일방적으로 밀어붙일 게 아니라, 서로 겸손하게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구해야 한다. 3. 현행 법으로도 강도사를 줄 수는 있다 부흥하고 성장하는 공동체는 모든 사람이 어떤 방식으로든 더 잘 일할 수 있게 하는 공동체이다. 망할 수밖에 없는 공동체는 대부분의 사람들의 사역을 막고 소수가 가진 그 힘을 행사하는 공동체이다. 광야에서 모세는 이드로의 제안을 받아들여 자신이 가지고 있던 재판권을 천부장, 백부장에게 나누어 주었다. 우리 교단도 여성들이 좀 더 적극적으로 사역에 참여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야 한다. 우선 총회는 여성 사역자들이 강도사 인허를 받을 수 있도록 도우면 좋겠다. 현행 헌법도 여성이 강도사가 되는 것을 명시적으로 금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정치편 제14장에 의하면, 총회가 신학 졸업생을 고시하여 노회가 강도사로 인허하도록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부분은 총회가 결의하고 받아주면 충분히 가능한 것이다. 사실 108회 총회 전에 이에 대한 합의가 어느 정도 이루어졌었다. 108회 총회의 결정이 뒤로 역행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될지 상당히 우려스럽다. 목사 안수의 문제는 총회가 좀 더 심도 있게 성경에 드러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토론해야 한다. 그 옛날 예루살렘 회의를 통해 할례를 시행하지 않아도 된다는 결론을 내렸다. 성경에는 반드시 할례를 시행해야만 한다고 되어 있지만,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이 가져온 관점으로 성경을 이해하면서 할례를 하지 않아도 된다고 결론을 내렸다. 이와 마찬가지로 총회의 역할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토론을 통해 구해야 한다. 현재 우리 교단 내에는 다양한 해석과 의견이 존재한다. 세미나, 토론회, 전문 연구 등을 병행하는 것을 통해, 서로 경청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구해야 한다. 이웃 교단인 백석은 발 빠르게 여성 안수를 허용했고, 엄청난 교단적 발전과 신학교의 발전이 있었다. 사실 많은 여성 사역자들을 이웃 교단에 빼앗긴 것도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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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0-03
  • 동네작은학교 봄학기를 마치고
    2023년도 다문화 아이들과 함께 하는 동네작은학교 봄학기를 마쳤습니다. 초등부4-6학년 아이들이 한학기 동안 노래 교실에서 배운 노래를 불러주었습니다. 꿈꾸지 않으면 사는게 아니라고 별 헤는 맘으로 없는 길 가려네 사랑하지 않으면 사는게 아니라고 설레는 마음으로 낯선길 가려 하네 아름다운 꿈꾸며 살아가는 우리 아무도 가지 않는 길 가는 우리들 누구도 꿈꾸지 못한 우리들의 세상 만들어 가네 배운다는건 꿈을 꾸는 것 가르친다는건 희망을 노래하는 것 배운다는건 꿈을 꾸는 것 가르친다는건 희망을 노래하는 것 우린 알고 있네 우린 알고 있네 배운다는건 가르친다는건 희망을 노래하는 것 아이들이 꿈을 꾸고 교사인 우리들은 희망을 노래하는 것…그런 학교를 꿈꾸며 한학기를 달려 왔습니다. 아이들이 노래를 부르는데 옆에서 지켜보며 가슴이 벅찼습니다. 먼 타국에서 한국 땅을 향해 온 어머니들이 낳은, 다문화 자녀라 불리우는 이 아이들이 꿈을 노래하는 모습에서 룻도 생각나고 나오미도 생각 났습니다. 바울이 키운 영적 아들 디모데도 떠올랐습니다. 그도 이방 아버지와 유대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다문화 출신이었죠. 이류 취급 받고, 제국에서는 주변인 처럼 살아간 저들이 하나님의 나라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한 학기 동안 꿈을 꾸듯 달려 왔습니다. 살아 있음을 느끼며, 없는 길을 만들며 그렇게 시간을 보냈습니다. 한달의 방학을 보내고 여름학기를 또 시작 합니다. 기도해 주시고, 응원해 주시고, 함께 해 주셔서 감사 드립니다. 이들이 주님의 나라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있을 아이들 입니다. 이 아이들을 위해 계속 기도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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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5-15
  • 아버지 자리
    "어버이날 선물" 어버이날인 오늘 막내딸은 늦었다고 아침에 학교태워달라고 눈치 줘서 엄마가 태워줬고 집으로 올쯤 냉면 먹고 싶다해서 아빠가 삶아 먹게했더니 깜짝 이벤트 해 주었습니다. 역삼동까지 가서 사온 어버이날 맞춤케익이라 하면서요. 노래를 듣는데 저는 자꾸 천국가신 어무이 생각나서 울컥했습니다 “아버지 자리” 1. 나는 가난한 농부의 7남매의 막내로 태어났다. 내가 태어날 때 아버지는 45세였다. 줄줄이 딸만 낳다가 느지막하게 형과 나를 3년 터울로 낳았던 아버지는 그제야 어깨에 힘을 줄 수 있었다. 늦게 낳은 막내아들이 결혼 할 때 아버지는 이미 70대 중반이셨다. 워낙 나이차가 많다보니 내게 아버지는 아버지보다 할아버지 같았다. 그 시대 아버지상은 무뚝뚝하고 엄한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래서 밥상 한번쯤은 마당으로 던졌던 것을 자랑삼아 말하던 시대였다. 우리 아버지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난 아버지에게서 단 한 번도 따뜻함, 다정함을 느끼지 못했다. 도리어 아버지는 가까이 하기에는 늘 먼데 계신 분이셨다. 배운 게 없고, 가진 것이 없던 아버지는 고단한 삶 속에서 종종 인상 쓰셨고, 걱정과 염려를 입에 달고 사셨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1년 전, 오래된 옛 집을 허물고 새 집을 지었다. 물론 농협 대출 받았다. 대출 상품은 20년 동안 원금과 이자를 나눠 갚으면 되는 농민들에게 좋은 거였다. 하지만 아버지는 새 집에 사는 기쁨보다 빚으로 인한 염려가 더 크셨다. 일찍부터 철이 든 나는 아버지를 보면서 부인할 수 없는 진리 하나를 깨달았다. 아버지는 염려가 많으시고, 돈이 없는 분이시다. 그래서 아버지의 속을 꽤나 썩인 형과는 달리 나는 착한 아이 코스프레 길을 선택해 속 썩인 일이 거의 없었다. 덕분에 어릴 때가 가장 많이 들은 소리가 ‘착하다’였다. 그때 형성된 착한 아이 이미지는 보름 전, 40년 만에 만난 중학교 동창들에게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2. 세월이 흘러 나도 아버지가 되었다. 아버지 커리어도 어느 듯 30년이 가까워진다. 어느 날, 대학 다니는 막내딸이 용돈을 좀 달라 했다. 아무 생각 없이 선뜩 지갑에서 돈을 꺼내 주는데, 속 깊은 곳에서 울컥거리며 눈시울이 붉어졌다. 왜냐면 내가 경험하지 못한 아버지 상이 내 모습 속에서 보였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공납금이나 학용품 사기 위해서 아버지에게 용돈을 요구하면 언제나 엄마가 대신하여 옆집으로 달려가 돈을 꿔와 주었다. 그렇게 아버지는 가난했고, 고단한 인생길을 사셨다. 하지만 언제나 정직하셨고 진실하셨다. 경우를 벗어난 행동과 남에게 피해 주는 것을 싫어하셨다. 더군다나 인생 후반에는 믿음에도 큰 진전을 가지면서 새벽을 깨우며 항상 기도하셨다. 지금도 새벽예배 후에 소죽을 쇠면서 콧노래로 흥얼거렸던 찬송의 소리가 들린다. ♪ ‘고요한 바다로 저 천국 향할 때 주 내게 순풍 주시니 참 감사합니다.’ 이 찬송을 부를 때마다 아버지의 모습이 떠오른다. 아버지가 없이 살아 온지도 벌써 21년째다. 누나들은 내가 나이가 먹어갈수록 아버지를 가장 많이 닮았다고 한다. 내가 나를 봐도 얼굴이 길어지면서 아버지를 닮아가는 것 같다. 요즘 아내가 나를 보면서 ‘미’라고 소리 내라고 한다. ‘미’라고 소리 내면 입 꼬리가 살짝 올라가 웃는 상이 되기 때문이다. 인상 쓰신 아버지상보다 웃는 아버지상이 보기 좋다. 3. 언제부턴가 엄혹한 사회의 톱니바퀴에 끼인 채 제자리를 맴돌며 점점 주변을 서성이는 아버지들의 늘어나고 있다. 자식을 끔찍하게 생각하면서도 표현할 줄 몰라 함께 있으면 서먹해지는 아버지, 가족들의 대화에 당최 끼지 못해 가정에서조차도 왕따 되어가는 아버지, 아내 없인 금방 폐인이 되어가는 아버지. 그래서일까? 자식들 입장에서 어머니보다 멀리 계신 분이 아버지다. 5월만 되면 평소보다 더 아버지가 그립다. 나 역시 아버지에게 다정다감하지 못한 못난 아들이었다. 또한 딸들에게도 친근하지 못한 아버지였다. 어제 딸의 손을 잡고 결혼식장에 입장하는 친구 목사를 보면서 아버지의 자리를 생각했다. 멋진 아버지로, 친근하면서 웃는 자랑스러운 아버지로 남은 삶을 살기를 다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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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5-15
  • 밀린 숙제를 하다
    오늘은 사랑하는 아내와 결혼한 지 꼭 12,000일 되는 날이었다. 주일 예배를 마친 후 그동안 바쁜 관계로 한동안 보지 못했던, 먼저 간 친구들을 만나러 가려고 길을 나섰다. 먼저 2012년 7월 13일 금요일, 신경직 목사를 먼저 하늘나라로 떠나보낸 지 벌써 올해로 만 11년 하고도 10개월째, 그리고 2017년 3월 17일 금요일, 김선호 목사를 먼저 하늘나라로 떠나 보낸 지 만 6년하고도 2개월째, 두 친구를 보고 싶어서 각각 오산리에 있는 크리스천 메모리얼 파크와 일산동구 설문동에 있는 청아공원을 찾았다. 변함없이 그 자리에 있는 신경직 목사를 보면서 잠시 옛 추억에 잠겨 묵상하고 아내와 사진 한장을 찍고, 나온 후 영산수련원에 새로 생긴 "아리아1968"이라고 하는 베이커리 카페에서 점심겸 커피한 잔과 빵으로 점심을 먹은 후 많이 변한 영산수련원과 오산리 최자실 기념 금식 기도원을 한 바퀴 돌아보았다(트레킹 길로 한 바퀴 도는데 약 30분 정도 걸리더라). 그 옛날 오산리 최자실 기념 금식기도원에서 내가 먼저 40일 금식기도를 끝낸 후 이듬해 사랑하는 아내가 이곳 최자실 기념금식기도원에서 40일 금식기도를 끝낸 적이 있었다. 아내와 나는 그때의 추억을 생각하며, 많이 변한 최자실 기념 금식기도원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면서 청아공원으로 향했다. 청아공원에 도착하여 예전대로 기독교관 1층(내 느낌엔 지하 2층 같은 느낌이지만, 그곳에서는 1층이라고 부르더라)에 위치한 <은혜홀 파> 방으로 들어갔더니 늘 그 자리에 있어야 할 김선호 목사가 보이질 않았다. 결국 사무처로 문의 후 3층의 <믿음홀 다>방으로 아들 예찬 군이 작년에(5주기 때) 옮겼다는 사실을 알았다. <믿음홀 다 A1-02 > 김선호 목사가 새롭게 자리잡고 위치한 방이다. 김선호 목사의 사진을 바라보며, 잠시 옛 추억을 생각하다가 묵상기도를 한 후 아내와 간단하게 사진 한 장을 찍고 청아공원 주변을 잠시 걸었다. 누가 가보라고 해서 온 것도 아니요, 꼭 와야만 했던 것도 아니었으나, 마음속에 이 두 친구를 보고 싶은 마음이 얼마 전부터 자리잡고 있었다. 사람의 인연이란 건, 참으로 무섭다. 끊을래야 쉽게 끊어질 수 있는 것도 아닌 것이 사람의 인연인 것 같다. 특히 "친구"라는 관계는 더욱 그런 것 같다. 차를 몰고 집으로 오면서 아내에게 이 두 친구와 지냈던 학창 시절의 추억을 잠시 이야기 해 주었다. 언젠간 나도 먼저 간 두 친구처럼 저렇게 추모공원에 들어가 자리잡고 앉아 있겠지...그때 잊지 않고 날 찾아줄 친구가 과연 몇이나 될까 생각해 본다. 아무도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면, 악착같이 친구들을 다 떠나보내고 오래 살아 남아야겠지...먼저 간 두 친구는 참 배짱도 좋다. 그렇게 먼저 가 놓고 남아 있는 우리들에게 숙제를 주는 것인가... 오늘 나는 두 친구가 내게 준 숙제를 처리하고 새로운 한 주간을 준비하러 집으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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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5-15
  • 『생활동반자법』, 무엇이 문제인가?
    2023년 4월 26일에 기본소득당 용혜인 국회의원이 새로운 법안을 발의했다. 국회의원이란 그 사람 자체가 곧 입법기관이며 법을 잘 만들라고 국회의원 본인과 보좌관에게 연간 약 8억 원의 세비를 지원하고 있다. 이처럼 많은 세비 지원과 함께 엄청난 특권을 누리는 국회의원은 나라를 위한 좋은 법을 만드는 것이 마땅한 책무이다. 그런데 이번에 용혜인이 발의한 법안을 들여다보면 나라를 위한 법이 아니라 나라를 해치고 가정을 파괴하며 우리의 미래 세대를 망치는 악하기가 이를 데 없는 나쁜 법이다. 용혜인이 발의한 『생활동반자법』이란 도대체 내용이 무엇이며 그 속에 어떤 문제점이 들어있길래 그렇게 심각하단 말인가? 그리고 용혜인은 국회의원으로서 도대체 왜 그런 악법을 발의했단 말인가? “여기 새로운 가족이 있다”라는 슬로건과 함께 용혜인이 발의한 『생활동반자법』의 정식 명칭은 『생활동반자관계에 관한 법률』인데 해당 법안은 기본소득당 용혜인 의원이 대표 발의하고 더불어민주당 강민정, 권인숙, 김두관, 김한규, 유정주, 이수진 의원, 정의당 류호정, 장혜영 의원, 진보당 강성희 의원, 무소속 윤미향 의원이 공동발의에 참여했다. 이 공동발의자들 가운데 정의당 장혜영 의원과 더불어민주당 권인숙 의원은 2020년과 2021년에 각각 차별금지법을 발의한 사람이며 그 법안은 지금도 국회에 계류중이다. 이처럼 그들은 가정을 파괴하는 일에 있어서 다 한통속이다. 『생활동반자법』의 골자는 결혼하지 않아도 성인 2명이 합의해서 동반자 관계가 되면 이들에게 혼인에 준하는 권리와 의무를 부여하는 것인데 이것은 전통적 의미의 가족을 해체하는 것이 목적이다. 이는 더불어민주당 남인순 의원과 정춘숙 의원 두 사람이 2021년에 각각 대표 발의했던 『건강가정기본법 개정안』과 큰 틀에서 별반 다를 바가 없다. 『건강가정기본법 개정안』 역시 혼인·혈연·입양으로 이뤄진 사회의 기본단위인 가족 개념을 삭제하고 다양한 형태의 가정을 인정하자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건강가정기본법 개정안』은 다수 국민의 반대에 막혀 현재 추진하지 못하는 실정이다. 용혜인이 주장하는 가족의 권리를 누리는 방법은 간단하다. 누구든지 가족이 되고 싶은 사람은 결혼하면 된다. 결혼식까지도 필요 없고 단순히 혼인신고만 해도 된다. 만일 결혼과 혼인신고 하는 것이 싫으면 혼자 살든지 마음 맞는 사람끼리 같이 살면 된다. 그런데 결혼을 하지 않은 사람에게 혼인에 준하는 권리와 의무를 부여하겠다는 것은 혼인으로 이루어지는 가족의 개념을 파괴하는 것이며 동성애를 합법화하려는 저의가 엿보인다. 이것은 전통적이고 정상적인 가족 개념과 하나님께서 명하신 결혼제도를 파괴하려는 심각한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 그렇다면 용혜인은 왜 그런 법안을 대표 발의했고 또 여기에 더불어민주당, 정의당, 진보당, 그리고 무소속 의원들까지 합세해서 공동 발의했을까? 용혜인이라는 사람을 따로 연구해보지 않았지만 이런 법안을 발의했다는 사실 한 가지만으로도 그녀는 젠더 이데올로기, 성 혁명 세력의 일원이거나 혹은 그들의 지지와 사주를 받는 자임을 알 수 있다. 성 혁명 세력이란 무엇인가? 그들은 신마르크스주의의 뿌리에서 나온 해체주의자들로서 국가와 교회와 가정이라는 기본 질서를 허무는 자들이다. 그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가정을 허무는 일에 앞장서고 있는데 성 혁명 세력이 사용하는 개념 가운데 “정상 가족 신화”라는 표현이 있다. 그들의 관점에서 전통적이고 정상적인 가족 개념은 타파해야 할 “신화” 혹은 “미신”이다. 그래서 가정을 생명처럼 지키는 교회와 성경은 그들에게 가장 큰 걸림돌이다. 지금 성 혁명 세력은 집요하고도 다양한 방법으로 가정 해체를 추진하고 있는데 몇 가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저들은 우리나라에 이미 개별적 차별금지법이 23개나 존재함에도 동성애 합법화를 포함한 『포괄적차별금지법』 제정을 시도하고 있다. 저들은 『건강가정기본법 개정안』을 통해서 결혼제도를 부정하고 가정을 허물려는 자들이다. 저들은 학생인권조례를 통해서 어린이와 청소년을 조기 성애화하고 유년기부터 성적으로 문란하게 만듦으로 우리의 자녀들을 망치려는 자들이다. 그래서 5년마다 새로 만드는 교과과정에 성 혁명 사상을 집어넣으려고 하다가 우리에게 발각되었고 우리가 사생결단 투쟁해서 바로잡아놓은 상태이다. 금번에 용혜인이 개인적 소신으로 발의했는지 혹은 성 혁명 세력의 지침에 따라 누군가 만들어준 법안에 이름만 올렸는지 명확하지 않으나, 사실이 어떠하든지 『생활동반자법』은 절대로 제정되어서는 안 되는 악법이다. 하나님은 대한민국에 이런 법이 제정되는 것을 절대로 허용하지 않으실 것이며 우리 하나님의 종들은 모두 하나님 편에 서서 이를 막아낼 것이다. (※ 해당 법안은 용혜인 의원이 국회 소통관에서 발의한다고 발표했고 KBS와 여러 매체에서 기사화했으나 막상 의안현황에는 검색되지 않는 것을 보면 적절한 발의 시기를 저울질하고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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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고
    2023-05-07
  • 가짜목사 전성시대
    가짜목사 전성시대 한때 도둑질을 일삼던 사람이 감옥에서 변화를 받아 예수님을 믿었고, 목사까지 되었다는 이야기는 굉장히 센세이셔널하다. 어쩌면 복음의 능력이 지금도 살아있는 것이라는 생생한 증거일 수도 있다. 한때 유명한 연예인이었던 사람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으며, 세상의 영화를 다 버리고 목회자의 길로 들어섰다는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한때 불교의 스님이었던 분이 개종하여 목사가 되었다는 소식도 아주 흥미롭다. 그런 사람들은 당장 인기리에 초청되기도 한다. 늘 아무런 변화가 없는 것 같은 교계에 신선한 충격으로 받아들여진다. 하지만 그 사람이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기도 하고 목사가 되었다고 해서 그 사람의 회심이 진실한 것인지는 쉽게 판단할 수 없다. 믿음은 시간의 검증이 필요하기에, 디모데전서 3:6에서는 직분자를 세울 때 “새로 입교한 자”를 함부로 세우면 안 된다고 경고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 주변에는 성급하게 목사가 되는 길이 열려 있다. 그렇게 양산된 목사들이 사실은 복음의 장애물이 되는 경우를 너무나도 많이 보아왔다. 목사가 되었다던 그 사람은 여전히 도둑질을 멈추지 않는 경우가 있고, 목사가 되었다는 그 연예인은 불륜에 폭력에 온갖 추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목사가 되었다고 하고, 설교를 하기도 하고, 선교 사역을 하기도 하고, 예수님을 믿는다고도 하는데, 그런데 그 신앙이 제대로 된 신앙일까? 바리새인이 철저하게 율법을 지키며 유일신 하나님을 믿는 것 같았지만 주님께서는 가짜 신앙이라고 하신 것처럼, 우리 주변에도 크리스천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지만, 사실은 가짜 성도 가짜 목사일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양의 털을 입은 이리인지 분별하라고 하셨다. 거짓 선지자들이 많이 나올 것이니까 조심하여야 한다고 경고하셨다. 사실 목사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고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하고 있지만, 돈과 탐욕의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에게 하나님이란 그저 이 땅에서 탐욕을 추구하고 돈을 더 많이 버는 데 유용한 도구일 뿐이다. 그래서 기도를 열심히 하면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하고, 신앙생활을 철저히 하면 복을 받는다고 말한다. 그렇게 말하면 신앙이 있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사실은 오병이어 기적의 현장에서 빵을 먹고 배불렀던 무리들과 다르지 않다. 하나님이 한 분이라는 것을 믿는 것은 사탄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인데, 가짜 목사들도 그렇게 믿을 수는 있다. 그래서 분별해야 한다. 가짜 목사의 비리와 행태를 종종 옹호하려는 사람들이 있다. 그래도 같은 영적인 식구니까 감싸고 돌려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그렇게 한다면 세상 사람들에게 우리도 똑같은 부류라는 것을 인정하는 셈이 된다. 교회는 거룩성을 추구해야 한다(고전 5:11-13). 종교개혁자들은 참된 교회의 표지 중의 하나로 권징을 들었는데, 이는 거룩성을 추구하는 일을 해야 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이 시대는 가짜 목사 전성시대이다. 이런 모습을 보는 것은 고통스럽다. 하지만 절망적인 것은 아니다. 이미 주님께서 그럴 것이라고 예언해주셨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안에서 참된 믿음을 지켜나가야 한다. 영이 하나님께 속하였는지 분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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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고
    2023-04-26

실시간 기고 기사

  • 한기총 이야기① “사람은 믿어도 목사는 믿지 말라”
    법원에 의해 한기총 대표회장직을 2년 넘게 수행하고 있는 김현성 변호사가 최근 『한국기독교이야기』를 발간했다. 대표회장직을 수행하면서 경험하고 느낀 바를 적은 것이다. 그 중에 일부를 발제, 연제하여 일반인의 시각에서 본 기독교의 민낯을 보고자한다. "사람은 믿어도 목사는 믿지 말라" 필자는 시간이 허락하는 한 면담을 요청해온 목사들을 모두 만나 경청하기로 하고 일단 많은 목사들과 면담했다. 예상했던대로 백가쟁명(百家爭鳴)이었다. 목사들은 각자 당신의 입장에서 한기총의 현황을 설명했고, 당신의 입장에서 문제 제기와 해법을 제시하였다. 비슷한 특징도 발견할 수 있었다. 한기총 목사들은 서로가 서로를 불신하고 있었고, 자신 또는 자신을 포함한 몇몇 사람만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적임자라고 자처하기도 하였다. "사람은 믿어도 목사는 믿지 말라"는 목사도 있었다. 성경 어디에도 목사를 믿으라는 말은 없다고 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인간을 창조하였느니 오히려 인간을 믿는 것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믿는 것과 연결될 수는 있으나 목사를 믿는다는 것은 이단이라는 것이다. 당시에 박장대소(拍掌大笑)했지만 뼈있는 말이었다. 어떤 목사는 한기총에는 "영(靈)적인 사람은 아무도 없고 모두 육(肉)적인 사람밖에 없다"고 했다. 한기총에서 반드시 없어져야 할 '뱀 같은 존재'들이 똬리를 틀고 있다며 이름을 일일이 거명 하기도 하였다. '먹사', '개독교'라는 말까지 서슴없이 써가며 자신을 포함한 목사들을 싸잡아 스스로 비판하는 목사도 있었다. 증경대표회장 중 한 분은 당신이 한기총의 역사 그 자체이며 누구보다도 현황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라고 했다. 필자에게 '어중이떠중이(?)' 다른 사람들을 모두 만날 필요가 없으며 당신말만 듣고 그대로 행하면 칭송받을 것이라며 다른 목사들과 필자의 만남을 경계하기도 하였다. 한편, 이단 논란이 있는 목사에 대해 이단 해제 명목으로 부동산이나 거액의 금품이 오고 갔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실제로 수년 전 이단 해제에 도움을 주겠다는 명목으로 수억을 수수하여 현재 형사재판 중인 사람도 있었다. 가장 신성해야 할 신학 문제에 금품이라니? 충격이었다. 게다가 대표회장 선거에 천문학적 선거비용이 들어 모두가 금권선거라고 개탄하면서도 헤어 나오지 못하는 것 같았다. 충격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공금횡령으로 형사 고발된 한기총 목사들이 적지 않았다. 주로 모금한 각종 성금이나 헌금, 연회비 등을 횡령한 사건들이었고, 실제로 통장의 공금을 횡령한 것이 발각되어 필자가 해임한 목사도 있었다. 지도자급 목사들이 모인 한기총에서 성금 횡령이라니, 상상도 하지 못했다.
    • 오피니언
    • 기고
    2023-01-30
  • Well Dying(good life, good death) 16 - 죽음에 대한 다양한 관점 연구(6)
    Well Dying(good life, good death) 16 - 죽음에 대한 다양한 관점 연구(6) 1. 죽음에 대한 종교적 관점 우리 인간의 가장 큰 특징 중에 하나는 자연이나 현실에 그대로 순응하지 않고 도전한다는 사실이다. 인간의 불굴의 정신이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많은 문명을 이루고 기술과 과학을 발달시킨 원동력이 되었다. 아울러 이러한 사람들의 도전 정신은 죽음 앞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그래서 인류는 여전히 죽음을 넘어서기 위해서 수많은 노력을 경주하고 있다. 특히 인간은 죽음의 불안 속에서 언젠가 이르게 될 끝에서 자신이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한 삶의 의미와 목적을 찾는 존재이다. 이러한 노력 중에 하나가 죽음은 끝이 아니라 죽음 이후에 또 다른 생명이 있다는 종교적 성찰을 들 수 있다. 대부분의 인간 종교에는 사람의 생명은 육체의 죽음을 넘어 영원하다는 믿음과 내세관을 갖고 있다. 종교는 오죠 라즈니쉬가 말하는 것처럼 “죽음과 삶의 의미를 물으면서 불안에 떨고 있는 인간의 불안을 해소하고 참된 인간으로서의 삶을 실현하기 위해서 삶과 죽음에 대해서 여러 성찰과 해석을 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곧 종교의 역할은 살아가는 과정에서 입을 상처를 위로하며 삶에 대한 용기와 희망을 갖도록 한다. 아울러 죽음의 절망 앞에서 연원한 삶에 대한 희망을 주어서 이 땅에서부터 마음의 안정과 평화를 얻도록 하는 역할을 한다. 세계의 많은 종교 중에서도 우리 한국에 전래되어 토착화 된 종교들, 즉 유교, 불교, 도교, 무속종교의 삶과 죽음에 대한 이해는 우리 기독교인들에게도 큰 영향을 끼치고 있는 매우 중요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곧 우리 한국에는 역사 이래로 우리 한민족의 심성에 깊이 뿌리를 내린 무속종교의 기반 위에 유교·불교·도교와 여러 종류의 종교가 공존하고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한국에서 수 백 년 혹은 수 천 년 동안 이어져 오는 가장 대표적인 종교라고 할 수 있는 유교, 불교, 도교, 그리고 무속종교의 죽음관에 대해서 살펴봄으로 목회자들이 목회현장에서 봉착하는 실천신학적 문제들과 아울러 목회자들이 죽음과 사후에 대해서 목회적으로 어떻게 사역할 것인가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하는 것이다. 1.1. 유교적 관점 중국 역사상 가장 혼란기였던 춘추전국시대에 공자를 비롯한 유학자들의 사상을 그 배경으로 하며,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공자에 의해 시작되었다고 믿고 있다. 인본주의 사상을 배경으로 하는 유교는 현재 우리 한국사회를 지탱하는 매우 중요한 가치관의 기초가 된다고 할 수 있다. 유교는 그 특징이 삶에 대해 적극적인 자세를 갖게 하고 내세 지향적이라기보다는 현세 지향적인 성격이 강하다. 곧 유교의 주된 관심사에 대해서 유학주임교수실 편에 보면 “어떻게 하면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가며 인간다운 공동체를 이룰 것인가에 대한 현실적이고 실천적인 제시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유명한 유교의 인(仁)의 원리이다”라고 말한다. 좀 더 구체적으로 유교는 현재까지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가장 크게 영향을 끼치고 있는 종교적인 요소로서, 이러한 유교의 영향력에 대해 곽혜원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한다. "유교는 불교를 국교로 숭상했던 고려를 멸망시키고 새로운 나라인 조선을 건국한 이성개를 비롯한 개국파의 정치적 기조에 따라서 조선왕조 500여 년(1392-1910) 동안 국가 종교의 자리에서 양반들과 정치인들을 중심으로 종교처럼 숭배되어진 사상이다. 곧 유교는 나라를 통치하기 위한 중요한 수단으로서 받아들여졌기 때문에 가난하고 약한 일반 대중의 종교가 아니라 지배 계층의 종교이며 철학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유교는 사상을 넘어 정치적인 필요와 힘에 의해 종교처럼 되었기 때문에 우리 한국인들의 사고방식, 사회구조, 생활양식, 각종의례와 예의범절을 총망라하는 조선시대의 세계관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그러므로 그 영향력이 오늘까지 강하게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죽음관과 관련하여 상장례와 조상제례에 미친 유교의 영향력은 거의 절대적이어서, 조상제례는 조선 후기 이래 마치 국교와도 같이 신봉되었다. 그 이유는 단순히 부모에게 효도를 하는 차원을 넘어서 국가 체제를 유지하고 지배 계층의 권력을 강화하는 정치적 성격을 가졌기 때문이다" 이처럼 조선시대 지배계층은 인(仁)을 주요 사상의 원리로 주장하는 유교를 부모의 죽음 이후에 조상제례를 통해 부모를 늘 기억하게 함과 동시에 국가와 지배계층은 어버이와 같으므로 그렇게 부모를 섬기듯이 최고의 충성을 끝까지 바쳐야 할 것을 주입하는 정치 도구로 사용한 것이다. 이런 맥락을 따라서 조상제례를 중심으로 하는 한국적 유교는 조선시대에는 국교와 같은 자리를 차지하게 되고, 우리 한민족의 사고와 삶에 깊숙이 자리를 잡게 된 것이다. 유교에서 생각하는 죽음관의 기초가 되는 사상을 살펴보면, 첫째, 정영희는 “유교에서는 생과 사의 문제가 천명(天命)에 달려 있다고 보고 삶에 있어서나 죽음에 있어서나 하늘에 맡기는 순천명(順天命)이 자세를 보인다”고 말한다. 이렇게 한 이유는 유교는 현재적 도덕적 질서를 세우는데 우선했기 때문이다. 둘째, 한국종교학회의 연구에서는 “유교는 기철학을 인간 생명에 대한 사상의 기초로 하고 있기 때문에 인간의 영혼불멸설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유교의 죽음관과 내세관의 기초이다”라고 말한다. 유교에서는 인간은 기(氣)와 정선된 물질적인 힘이 결합된 결과로 보아 천지음양의 기가 뭉치면 사람이 되고 흩어지면 귀(鬼)가 된다고 본다. 곧 인간은 정(精), 기(氣), 신(神)의 결합체인 혼백으로 일정 기간 존속하다가 그 기운이 다하면 혼은 양(陽)으로 하늘로 돌아가고 백은 음(陰)으로 돌아가게 되는데, 이것이 곧 죽음이라고 주장한다. 이처럼 유교에서 죽음은 자연 현상의 일부이며, 인생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모든 것이 하늘에 달려 있다는 자연 순응적 태도를 보인다. 그러므로 유교에 대해서 최영갑은 “종교라기보다는 철저하게 현실의 삶을 중요하게 여기며 삶에서의 윤리와 도리를 중요시하는 철학"이라고 주장한다. 계속적으로 "유교에서는 다른 종교와 달리 분명한 내세관이 없으며, 죽음 이후에 대한 깊은 성찰이나 해답을 제시하지 못한다. 그래서 유교에서는 죽음 이후의 혼백의 존재를 믿는 믿음, 특히 조상의 혼백을 믿는 믿음으로 이 땅에서 마땅히 해야 할 효의 연장 선장에서 철저하게 제사를 지내는 의식을 준행할 뿐이다”라고 말한다. 곧 유교에서는 삶 속에 죽음의 자리를 마련해 놓아 제사를 통해 죽은 자가 살아 있는 사람들(후손)의 세계로 돌아와 만나게 된다는 신념을 따르고 있다. 이는 유교에서는 생활 공동체를 살아 있는 사람들만의 것으로 여기지 않고 죽은 자와 더불어 이루는 공동체로 여기는 태도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특별히 제사를 절대적인 사회 규범으로 하는 것은 삶의 공동체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유교의 이러한 제사 문제는 죽음을 소멸이라고 여기지 않는 유교의 특징이 나타난 것으로 우리 한국인들에게는 매우 중요한 문제라는 것은 모두가 주지하는 바와 같다. 이런 현상은 기독교의 추도 예배 등을 통해서 발견하는 것처럼, 여전히 성도들도 조상에 대한 생각과 숭배의 마음, 그리고 제사에 대한 미련이 남아 있다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목회자들은 이 부분에 대해서 분명하게 성경적으로 성도들을 잘 목양해야 할 부분이라고 할 것이다.
    • 오피니언
    • 기고
    2022-12-23
  • Well Dying(good life, good death) 15 - 죽음에 대한 다양한 관점 연구(5)
    Well Dying(good life, good death) 15 - 죽음에 대한 다양한 관점 연구(5) 1. 죽음에 대한 다학제적 관점 1.5. 과학적 관점, 신(新)기계론적 인간관 - 셸리 케이건의 책, 를 중심으로 과학이 죽음을 정의하는 것에 근거를 둔 죽음에 대한 이해에 대해서 최윤배는 철학이나 종교와는 달리 과학이나 의학적 관점에서 죽음에 대한 정의는 아주 단순하며, ‘세속적 죽음 이해’ 혹은 ‘비종교인의 죽음 이해’라고 정의한다. 곧 과학에 있어서 죽음이란 유기체적 생명의 끝, 곧 삶의 끝이다. 그러므로 세속적 죽음 이해에서 죽음이란, 인간은 물질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인격과 개체성의 소멸이다. 이러한 과학적 죽음의 이해, 곧 세속적 죽음의 이해는 자연주의적이며 유물론적인 세계관을 갖고 있는 것이 그 특징이다. 그리고 그 철학적 배경에는 데카르트의 이원론을 따르는 합리주의와 계몽주의의 사상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이것에 대해서 김영규는 자신의 책 <철학판타지, 알도와 떠도는 사원>에서 자세히 기술하고 있는데 그 내용을 요약해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한다. 17세기부터 서양 사람들은 ‘모든 실체는 정신과 물질, 몸과 마음으로 양분 된다’는 데카르트의 이원론을 따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발 더 나아가 인간의 이성을 신과 같이 생각하기 시작했다. 인간의 이성이 신의 창조의 법칙을 찾아냈기 때문에 신이 하던 일도 대신 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곧 중세 천 년 동안 서양 사람들은 신중심주의 속에서 살았는데 과학혁명과 함께 합리주의가 등장하면서 신이 했던 모든 일을 인간 이성이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인간중심주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이런 생각들을 생산주의 혹은 구성주의라고 하며, 세계는 전체가 나라의 기계와 같다는 기계론적 세계관과 따라서 인간이 그것들을 분해하고 조립할 수 도 있다는 환원주의, 그리고 같은 이유에서 인간이 세계의 모든 것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는 생산주의 또는 구성주위가 근대라고 불리는 지난 300여 년 동안 서양을 지배해온 사상이었다. 아울러 사람들은 우리가 사는 이 사회도 이제 이성으로 만들어보자는 생각을 하게 되고, 인간이 신과 같은 이성을 가졌기 때문에 땅 위에 천국을 만들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게 된 것으로 이것이 바로 계몽주의 시작인 것이다. 곧 계몽주의는 이성이라는 빛으로 중세 천 년 동안 신도 만들어주지 못했던 자유, 평등, 박애가 넘치는 새로운 사회를 만들고자 한 것이다. 그리고 그 출발은 매우 성공적으로 나타났다. 1688년에 일어난 영국의 명예혁명과 1776년에 선포된 미국 버지니아 인권선언과 독립선언, 1789년에 일어난 프랑스 대혁명 등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우리가 이미 주지하고 있는 바와 같이 이와 같은 서구의 합리주의와 계몽주의 영향을 따라서 과학적 죽음관은 유물론적이며 자연주의적인 세계관에 기초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과학적 죽음관은 신이나 영혼을 인정하지 않으며, 오직 육체적으로 지금 이 땅에서 살고 있는 인간(육체)만 중요하게 다룬다는 것이 그 특징이다. 이러한 유물론적이며 자연주의적인 지식의 기초 위에서 인간의 과학적 죽음관을 주장하는 대표적인 사람이 현재 예일대의 교수로 있으며 (2013)를 쓴 셸리 케이건이다. 죽음에 대한 접근법에서부터 그 동안의 방법과 다르게 논리와 이성으로 접근하여 설명을 하는 케이건의 죽음 이해는 이원론과 일원론으로 나누고 있는 것 같으나 결국에는 일원론을 주장한다. 이 책의 핵심 주제는, 신(新)기계론적 인간관 및 세계관에 입각한 죽음 이해를 전개하고 있다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신기계론에 영향을 받은 철학적 사고를 통해 인간을 철두철미하게 기계로 간주하고 있다. 곧 이 책은 인간은 우주의 한 부분에 불과한 존재이며, 우주에는 물질이라는 하나의 실재만 있기 때문에 인간도 하나의 물질에 불과할 뿐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최윤배는 “그는 일원론을 다시 물리주의(physicalism)와 유심론(idealism)으로 나누었다. 그러나 그가 주장하는 일원론은 영혼 없는 육체나 또는 육체 없는 영혼을 가졌다고 주장하지만 결국에는 신기계론적 사상을 따라서 인간은 영혼이 없는 육체만의 존재라는 것을 더욱 강조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고 말한다. 과학주의에서 주장하는 인간의 죽음에 대한 이해에 대해서 김균진은 “결국 인간에 대한 이해, 곧 인간관에 의존하는 것이다. 인간을 어떻게 이해하는가에 따라 죽음에 대한 이해가 결정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케이건은 인간에 대해 영어 단어에 기계를 의미하는 ‘machine’을 사용하는데, 정확하게는 “인간은 자유의지를 지닌, 곧 단지 로봇보다는 좀 더 나은 기계에 불과한 존재로 설명한다. 본래 기계와 자유의지는 양립할 수 없는 개념이지만, 인간은 어떤 계기를 통해 자유의지라는 놀라운 능력을 지니게 된 기계”라는 것이다. 이러한 케이건이 이해하는 죽음의 본질과 철학적 배경의 핵심 내용에 대해서 곽혜원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인간을 기계로 바라보는 케이건은 죽음을 점점 낡아져 부품을 교체하다가 결국 고장이 나서 아무 쓸모가 없어진 상태, 모든 기능이 마비되어 버린 상태, 그의 적나라한 표현대로 하자면 결국 컴퓨터가 고장이 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현상으로 인식한다.” 곧 케이건은 이렇게 주장한다. “인간의 육체는 살아서 움직이다가 파괴된다. 결국 이것이 죽음에 관한 전부다.” 그러므로 과학적 죽음 이해는 결국 인간의 인격과 개체성의 소멸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죽음을 신비로 보지 않고 과학으로 보는 것이 과학적 죽음 이해의 가장 큰 특징이다. 결국 이런 사상은 신의 존재마저도 부정하는 결과를 초해하는 것이다. 곧 케이건의 과학주의적인 죽음관에 의하면 신이란 결국 인간의 투사물에 불과할 뿐인 것이다. 아울러 케이건은 인류 최대의 미스터리이자 심오한 철학적 수수께끼로 남아 있는 질문, 곧 ‘사후의 삶은 존재하는가?’는 완전히 말도 안 되는 자기 모순적인 질문이며 착각에 불과한 질문이라고 강조하면서 대답은 ‘아니오’라고 분명하게 말한다. 다르게 표현하면 ‘죽음으로부터 살아남을 수 있는가? 죽고 나서 여전히 생존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도 역시 ‘아니오’라고 대답한다. 곧 죽은 다음에 살아간다는 것은 철저히 자기모순이므로 삶이 끝난 상태에서 삶이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처럼 그는 육체적 죽음 이후에 계속해서 남아 있는 영혼이라는 또 다른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이와 함께 악령의 존재도 인정하지 않는다. 이처럼 영혼과 사후의 삶, 부활을 부정하는 유물론적 죽음 이해를 일관되게 강조하면서 케이건은 죽음이 모든 것이 끝이라고 다음에 인용하는 여러 말을 통해서 확실하게 결론짓는다. "나는 죽음이 나의 진정한 종말이라고 생각한다. 죽음은 나의 끝이자 내 인격의 끝이다. 이는 지극히 단순한 사실이다. 죽음은 그야말로 모든 것의 끝이다”(케이건. p 245). “인간의 육체는 살아서 움직이다가 파괴된다. 결국 이것이 죽음에 관한 전부다”(케이건, 266). “내가 알고 있는 한 내 육체가 죽으면 그걸로 끝이다”(케이건, 294). “내가 죽으면 더 이상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케이건, 295).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케이건과 그의 저서가 지닌 치명적인 문제는 인간의 정신과 영혼을 부정하면서 인간의 정신적이고 영적인 가치 추구를 배격한다는 점이다. 특히 신계론적 생명 이해의 패러다임 속에서 여러 형태의 유전자 조작이 시도되는 사회 분위기가 형성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므로 인간을 기계로 바라보는 신기계론적 인간 이해가 일반인들의 의식 세계에 영향을 미치면 사람들은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잃어버려 영혼과 정신에 대해 무관심하게 되고, 결국 인간만이 지닌 고유한 영성을 상실함으로써 더욱더 물질적인 가치만 지향하는 존재가 될 것이다. 오늘날 배아 복제 및 줄기세포연구, 유전자 조작이 지지를 받는 배경은 신기계죽의적 인간관의 세력 확장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과학에 기반을 둔 세속적 죽음 이해의 관점에서 본다면 영혼이 없는 인간에게 구원의 길이란 전혀 없다고 할 수 있다. 기계와 같은 물리적인 육체만 갖고 있는 인간이 죽음 이후에는 기계가 폐기되듯이 모든 것이 다 폐기되고 남은 것은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죽음 이후에는 남는 것이 전혀 없는 상태, 곧 죽음은 존재의 소멸이기 때문에 구원이나 영생 그리고 부활과 같은 이야기를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과학적 죽음관을 따른다면 모든 인간들은 오직 이 땅에서만 과학과 물질의 혜택을 누리면서 각자의 삶을 성공적으로 살면 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과학주의적 인간 이해와 죽음 이해는 인간의 가치가 오직 물질적인 것에만 부여됨으로 인해서 인간의 정신적이고 영적인 가치 추구는 배격되고 결국에는 인간의 고유한 존엄성마저 파괴될 수 있는 위험이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케이건이 영혼의 존재와 사후의 삶, 부활 신앙을 부정함으로써 많은 그리스도인을 혼란스럽게 할 우려가 매우 크다고 할 것이다. 죽음에 대한 올바른 생각과 태도는 삶에 대해서도 올바른 생각과 태도를 형성하게 한다. 이처럼 죽음에 대한 생각과 태도는 삶에 대한 생각과 태도와 직결되므로 죽음에 대해 바른 이해가 형성되도록 교회와 목회자들이 사회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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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2-23
  • Well Dying(good life, good death) 14 - 죽음에 대한 다양한 관점 연구(4)
    Well Dying(good life, good death) 14 - 죽음에 대한 다양한 관점 연구(4) 1. 죽음에 대한 다학제적 관점 1.4. 법학적 관점 죽어 가는 사람이, 곧 죽음 앞에 홀로 선 고독한 당사자가 자신의 운명을 결정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을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병원에서 호스피스 사역과 많은 임종에 처한 환자들을 돌보면서 경험한 사실은 죽어가는 환자 본인이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 최종적 결정을 한다는 것이 그리 쉬운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마지막에 심폐소생술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 진통제는 얼마나 사용할 것인가? 가족들과 함께 있는 시간을 얼마나 가질 것인가? 등등 환자 본인이 결정할 수 없는 많은 문제들이 있다. 죽음에 처한 자신의 운명을 자신 결정 할 수 없다는 사실로 인해서 죽음 앞에 선 환자들은 더욱 고독하고 육체적 고통과 함께 정신적 고통까지 겪어야 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환자의 사망과 관련하여 그 전후의 전 과정에서 가족 간에 불화하는 일도 많고, 법학적으로도 많은 논란과 문제가 발생할 소지가 충분히 있는 것이다. 아울러 현대의 과학과 의료기술은 이전 시대에는 분명히 죽었을 사람들, 곧 자력으로 호흡을 할 수 없는 사람, 심한 뇌 손상을 입은 사람, 인공호흡기나 인공급식튜브의 도움으로 생명을 유지하는 사람, 장기와 조직의 이식, 그리고 그밖에 다양한 의술을 통해 사람들의 생명을 연장시켰다. 그러나 이이정의 말처럼 “이런 기술들은 인간의 삶은 연장시켰지만 때때로 죽음의 과정에서의 고통의 깊이나 그 정도를 증가시킨 부분이 분명히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어떤 사람에게는 이런 현대 의학과 기술을 이용한 생명의 연장이 정신적·육체적·사회적·경제적으로 더욱 큰 고통만 가중시키는 결과를 가져온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이런 의학과 과학의 발달은 질병 치료와 생명 연장이라는 긍정적인 측면과 함께 분명하게 환자의 의견이나 여러 형편을 고려하지 않은 가운데 단순히 생명 연장으로 이어짐으로 인해 발생하는 법적·도덕적 문제들을 안게 된 것이다. 그 문제에 대해서 죽음에 대해서 일찍부터 연구한 김균진은 “현대의 병원은 환자들에 대한 의무를 수행한다는 이유로 인해서 어쩔 수 없이 환자를 비인격화시키고, 임종에 임박해서도 개인들의 모든 특성과 의지를 무시하며 탈사회화 혹은 탈문화와의 과정에 복종시키는 경향을 가지는 것”이라고 말한다. 곧 현대 의학과 병원의 구조는 죽어가는 사람이 자신의 죽음과 관련된 의료적이며 법적인 어떤 결정을 스스로 할 수 없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병원에서 환자 치료를 위한 최선의 방법이라고는 하지만, 그 모든 과정을 통해서 일어나는 환자의 비인격화, 특히 임종의 과정에서의 비인격화에 대해서 김균진은 다음과 같은 것이 있음을 서술한다.: ①환자는 임종이 다가올수록 평소 자신이 살고 있던 삶의 환경에서 신체적으로 격리된다. ②환자는 평소에 관계를 맺고 있던 사람들과 사회적 관계에서 병실(중환자실 등)로 격리된다. ③환자는 사회적으로 어떤 지위와 위치에 있었든지 간에 임종이 다가올수록 의료진에 의해서 모든 행동과 신체적 활동이 사회적으로 격리된다. ④환자는 인격적으로 오직 임종이 다가온 환자로만 대접 받으며, 모든 인격적 대우를 포기하고 병원의 규칙과 모든 의료적 과정으로 격리 된다. 그리고 임종을 맞이하는 환자 한 사람과 관련된 이런 문제들은 임종에 직면한 환자에게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가족과 사회 공동체 전체의 문제가 될 수 있다. 가족들은 사랑하는 가족의 임종과 관련하여 병원과 의료진의 의사를 거의 따라야 하는 상황으로 내몰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한 사람의 임종과 관련된 현대의 문제는 결국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 전체와 관련된 문제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법학적으로 한 사람의 죽음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갖게 되고 정의를 내리게 된 것은 아무래도 장기 이식과 관련하여 뇌사에 대한 판정의 범위와 시기에 관한 문제가 가장 중요한 문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심장과 폐의 기능이 완전히 멈춘 상태, 그리하여 이미 몸의 많은 세포와 장기가 그 기능을 완전히 멈춘 상태를 죽음의 상태로 인정할 때에는 법률적으로 그렇게 많이 논란이 될 소지가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뇌사의 문제는 신원하가 신학자로서 지적하는 것처럼 “뇌기능은 정지 되었으나 심장이나 폐는 계속 뛰고 있고 다른 장기들도 살아서 활동하고 있는 상태가 지속될 수 있기 때문에 법률적으로 중요한 문제를 많이 포함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문제는 영적인 일을 담당하는 목회자들도 목회상담적 입장에서 좀 더 구체적으로 알고 있어야 할 의학적·법률적 상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1983년 ‘대학의학협회’에 구성된 ‘죽음의정의특별위원회’가 발표한 ‘죽음의정의및뇌사판정기준’을 통해 죽음을 심장 및 호흡 기능과 뇌반사의 불가역적 정지 또는 소실을 의미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후 대한의학협회의 ‘뇌사판정기준’을 더욱 많이 인정하여 1993년에 개정한 ‘뇌사판정기준’이 거의 그대로 장기 이식에 관한 법에서 받아들여졌다. 그리고 1999년에 장기 등 이식에 관한 법률이 제정됨에 따라 심장사와 함께 뇌사 상태를 법률적으로 죽음으로 인정하게 되었다. 뇌사를 검사하기 위해서는 하버드 의과대학의 특별위원회의 보고서에 기초한 하버드 기준이 가장 널리 사용되고 있으며, 대한의사협회(1998, 10)에서 그것을 그대로 인용하며 발표한 뇌사판정 기준은 다음과 같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빛 소리 접촉 윤리적으로 허용되는 한 가장 아픈 자극 등 외부 자극에 대한 무반응 ② 자발적 근육 운동의 부재, 자발적인 호흡의 부재(적어도 한 시간 동안), 인공호흡기를 사용하는 환자는 호흡기를 끈 후 적어도 3분 동안 스스로 호흡할 수 없어야 한다. ③ 빛에 대한 눈동자의 수축의 부재, 눈 깜짝임의 부재, 귓속에 얼음물을 부었을 때 눈의 움직임의 부재, 가볍게 두드렸을 때 근육수축의 부재, 하품이나 말을 할 수 없는 등 뇌 반사와 척추 반사를 포함한 모든 반사의 부재. ④ 적어도 10분 이상 평탄한 뇌파 ⑤ 위의 모든 항목을 24시간 후에 반복 검사해도 같은 결과를 나타낼 것 ⑥ 환자가 저체온증(32.2이하)이 아니고 중추신경계에 영향을 미치는 진정제의 영향하에 있지 않을 것 등이다. 그리고 현재 우리나라에서 법적으로 인정하는 죽음의 확증의 기준 및 확인의 기준은 6세 이상인 자에 대한 뇌사 판정 기준인 「장기이식등에관한법률」의 별표 뇌사판정기준(제16조 제2항 관련)에 따르고 있다. 그 내용과 절차 등은 다음과 같다. ① 선행조건: 원인질환이 확실하고 치료 가능성이 없는 기질적인 뇌병변이 있고, 깊은 혼수상태로서 자발적인 호흡이 없고 인공호흡기로 호흡이 유지되며, 약물 중독(마취제, 수면제, 근육이완제 등에 의한 중독)이나 대사성 또는 내분비성 장애(간성혼수, 요독성 혼수, 저혈당성 뇌증) 등의 가능성이 없어야 하며, 저체온이나 쇼크 상태가 아니어야 한다. ② 뇌사 판정 기준과 판정 절차: 이것은 모두 현대 의학의 발달에 의해 이루어진 것으로 현대 의학적으로 「장기 등 이식에 관한 법률」에 따라서 다음과 같은 증상이 있을 때에 뇌사로 인정을 한다. “외부 자극에 전혀 반응이 없는 깊은 혼수상태, 자발적 호흡이 되살아날 수 없는 상태까지 소실된 상태, 두 눈의 동공이 확대되어 고정되었으며, 뇌간반사가 완전히 소실되어 있는 상태, 자발적 운동 현상이나 경련 등이 나타나지 않는 상태, 무호흡검사 결과 자발 호흡이 유발되지 않으며 자발 호흡이 되살아날 수 없다고 판단된 상태, 이런 모든 판정 결과를 6시간 후에 재인확인 하여도 그 결과가 동일할 때, 재확인 후 뇌파건사를 실시하여 평탄 뇌파가 30분 이상 지속될 때, 그리고 마지막으로 기타 필요하다고 인정되는 대통령령이 정하는 검사에 적합할 때이다.”(장기이식에 관한 법률 뇌사판정기준, 제16조 2항). 이상과 같은 의학적 판단이 이루어졌을 때에 전문 의사 2명 이상과 비 의료인 1명 이상을 포함한 뇌사판정위원회의 과반수의 출석과 출석위원 전원의 찬성으로 뇌사 판정이 확정된다. 그러나 법률적으로 아직 우리나라에서는 뇌사가 죽음으로 완전히 인정된 것은 아니다. 장기 기증자에 한해서 뇌사가 죽음으로 인정된 것일 뿐이며, 뇌사자라 할지라도 장기 기증을 하지 않으면 심장이 완전히 멈출 때까지 인공호흡기를 임의로 떼면 불법이 된다. 우리나라에서는 신원하의 말처럼 “아직까지 뇌사를 장기 이식을 위한 의학적 목적을 제외하고 형법에서는 살인죄의 적용 여부, 민법상 권리 능력 상실 시기의 기점, 부검과 장례 등의 시점과 관련하여 일관되게 심장사를 죽음으로 인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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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2-20
  • Well Dying(good life, good death) 13- 죽음에 대한 다양한 관점 연구(3)
    Well Dying(good life, good death) 13- 죽음에 대한 다양한 관점 연구(3) 1. 죽음에 대한 다학제적 관점 1.3. 의학적 관점 현대는 말 그대로 첨단과학과 첨단의학이 사람들의 삶에 큰 영향을 끼치는 시대라고 할 수 있으며, 이와 같은 의학의 발달은 죽음에 대해서 많은 새로운 경험과 이해의 측면에 변화를 가져왔다. 곧 질병 치료의 현저한 진전이 있는 오늘날, 죽음은 통제될 수 있는 것만이 아니라 정복될 수 있고 지배될 뿐만 아니라 제거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현대 의학적 관점에서 본다면 죽음에 대해서 종교적인 관점에서 설명은 피상적이고 비과학적인 것으로 간주되어 그렇게 설명할 필요나 도움을 받을 필요가 없어졌다고 보게 되는 것이다. 더 나아가 죽음의 과학 기술과 의학의 실패로까지 받아들여지는 상황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죽음에 대한 의학적 관점은 무엇인가? 일반적으로 의학에서는 죽음을 생물학적 사건으로 이해하며, 이는 비인격적이고 기술적인 문제로 인식한다고 이야기 할 수 있다. 황기석이 자신의 책 <의학윤리>에서 정의하는 의학의 죽음은 다음과 같다. “의학에서는 생체액 유동 기능의 불가역적 정지(심장과 폐혈관의 기능 정지), 육체로부터 영혼의 불가역적 이탈(호흡 기능의 정지), 신체적 통합 능력의 불가역적 정지(뇌 기능의 정지), 사회적 상호작용 능력의 불가역적 정지(뇌피질사) 등이 나타날 때 한 생물체를 죽었다고 간주한다.” 그러므로 현대는 의학의 발달과 함께 죽음의 의미와 가치의 궁극적 문제는 다루지 않고 객관적이고 가치중립적인 과학적 탐구에 더욱 매진하게 된 것이다. 곧 과학을 믿고 따르는 의사들은 기계화된 기술을 통한 간접적인 대화를 더 가치 있고 정확한 것으로 간주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은 주지하는 바와 같이 인공호흡기를 비롯한 생명체의 호흡을 인공적으로 유지시켜 줄 수 있는 기계 장치들이 개발되었다. 더 나아가서 장기 이식 수술을 비롯한 이전에는 생각도 할 수 없었던 첨단 치료법이 개발되어서 한 생명체의 죽음을 정의하는 의학적 기준에도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곧 의학적으로 이전에 행하던 것처럼 단순히 심장이 정지하고 호흡을 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른 것이 사망 판단의 기준으로서 가치가 떨어지게 된 것이다. 이제는 보건복지부와 국립암센터(2009)에서 공통적으로 말하는 것처럼 “이런 의학적 발전을 따라서 뇌 기능의 영구적 정지를 인간 죽음의 최종적 판단 기준으로 보는 뇌사설을 주장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현대 사회에 첨예한 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안락사문제, 장기이식 문제, 인간답게 죽을 권리의 문제, 장기 복제나 생명체 복제의 문제들이 사회적 쟁점으로 부가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지금 의학계, 법률계, 그리고 종교계를 중심으로 인간의 죽음에 대한 정의에 대해서 많은 부분에서 첨예한 대립과 함께 많은 논의가 진행 중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의사로서 특히 호스피스 말기 암 환자를 돌보며 의료의 한계와 범위 그리고 역할에 대해서 많은 고민을 하는 윤영호는 의학적 관점의 죽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의견을 덧붙인다. "의학적 죽음은 그 판정 기준과 판정 시기가 문제가 될 수 있는 많은 과제들을 안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 이 문제에 대해서는 의학적, 법률적, 종교적으로 더 많은 논의와 연구가 필요한 분야하고 할 수 있다. 곧 생사를 가르는 결정을 하게 되는 의사들은 윤리의식을 일반인들보다 더 올바르게 나타내야 한다. 특히 죽음과 관련된 의료 현장에서 죽음에 대한 판단을 위해서는 의료윤리의 기본적인 개념을 이해하고 이를 실제적으로 적용할 수 있어야 한다." 무엇보다도 목회자는 목회적 입장에서 의학적 치료와 도움을 받는 것에 대해서 지켜주어야 할 경계선에 대해서 분명한 가치관을 갖고 있어야 한다. 인간의 생명은 단지 분자들의 집합이며, 진화의 과정에서 나타난 우연한 산물은 아니기 때문이다. 곧 목회자들은 우리 인간의 삶을 지켜주어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의학적인 부분에 대해서 모든 부분을 찬성할 수도 없는 입장에 있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죽음의 문제에 직면해 있는 사람들에게 죽음으로 인해 단절되지 않으며 파괴될 수 없는 생명에 대한 절대적인 가치를 발견하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곧 목회자들의 수고와 연구를 통해서 죽음에 대한 의학적 인식의 재구성과 재해석을 통해서 기독교 생명 윤리에 입각한 가치관 정립이 목회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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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2-20
  • Well Dying(good life, good death) 12 --- 죽음에 대한 다양한 관점 연구(2)
    Well Dying(good life, good death) 12 - 죽음에 대한 다양한 관점 연구(2) 1. 죽음에 대한 다학제적 관점 1.2. 심리학적 관점 심리학이 현대인들에게 미치고 있는 영향력에 대해서 박노권은 브라우닝(Browning)의 말을 인용하여 “리프(Philip Rieff)는 프로이드의 심리학적 인간과 칼빈의 종교적 인간 사이의 싸움에서 프로이드가 승리했다고 말하면서 현대 사회의 사람들은 더 이상 종교적 상징에 의해서가 아니라 심리학적 이미지를 갖고서 세상을 구성하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이처럼 현대인들에게 심리학은 성경보다 더 인간의 삶에 도움을 주는 지식으로 인식되고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심리학적 죽음 이해에 대해서 알아보는 것은 현대인들이 가진 죽음에 대한 인식을 이해하기 위해서 매우 중요한 요소라고 할 것이다. 심리학적 죽음 이해는 자신의 인생을 수용하고 죽음을 두려움 없이 직면하여 자아 통합을 이루고 죽음 불안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하는 데 초점이 있다고 정의하면서 이이정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한다. "1950년대까지 죽음은 심리학을 비롯한 거의 모든 분야의 연구로부터 배제 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 이유는 그 이전까지는 행동에 대한 실험적이고 객관적인 연구와 논리적 실증 철학이 심리학의 과학적인 연구들을 주도해 왔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실은 1950년대를 전후로 파이펠을 중심으로 변화되었다. 파이펠을 중심으로 한 일련의 학자들은 죽음이 단순한 생물학적 사건이 아닌 심리적 사회적 측면을 가진다는 점에 주목하였고, 철학·생리학·의학·정신의학· 정신분석·종교·문학 등의 지식을 심리학에 도입하여 다양한 각도에서 죽음을 연구하는 경향을 낳게 되었다. 곧 심리학 분야에서는 죽음을 현재를 살아가는 인간의 삶에 대한 중대한 위협, 위기상황, 스트레스의 원천으로 간주하고 이에 어떻게 적응하고 대처하는가를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다." 이러한 심리학적 죽음의 이해 연구를 위해서 대표적인 심리학자 몇 사람의 주장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심리학적 죽음 이해의 시작으로 프로이트(S. Freud)의 이론을 소개한 김대동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프로이트는 인간의 본능을 리비도(Libido) 라고 부르는 삶의 본능과 싸나토스(Thanatos)라고 하는 죽음의 본능으로 보았다. 그리고 프로이트는 죽음을 최종적인 것이며 유기체의 완전한 소멸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봤다.” 곧 프로이드는 죽음을 도덕적이고 종교적이고 철학적인 문제에서 과학적 탐구의 대상으로 변화시켰고, 생물학적이고 심리학적인 실재로서 죽음을 묘사한 것이다. 아울러 프로이드의 죽음에 대한 이론에 대해서 김선숙은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프로이트는 죽음의 본능을 삶의 본능보다 더 근원적인 것으로 보았으며, 인간의 죽음은 최종적인 것이며, 모든 유기체의 완전한 소멸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곧 인간의 삶의 원초로부터 이미 죽음이라는 것이 어떤 통일된 방식으로 존재하고 있어서 삶의 존재를 무생물의 상태로 충동질하여 끌고 가기 때문에 결국 죽음에 이른다는 의미에서 죽음을 삶의 목적이 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처럼 프로이드는 인간의 삶은 두 본능 사이의 투쟁인데 삶의 원초로부터 이미 죽음이라는 것이 어떤 통일된 방식으로 존재하고 있어 결국 죽음에 이른다고 본 것이다." 그래서 배형기는 “프로이트에 의하면 인간의 생명의 역사란 죽음을 향해서 진행되는 역사가 되고 마는 것이며, 결국은 모든 것이 원점으로 돌아가고 만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프로이트에 따르면 죽음이란 최종적인 것이며 해당하는 유기체의 완전한 소멸을 의미하는 것이 되고 마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곧 프로이트는 죽음은 무기체적인 생명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보며, 기독교에서 말하는 죽음 이후 천국에서 주어지는 삶의 보상에 대한 환상은 가치 없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프로이트가 불신앙과 무종교로 돌아가서 기독교의 권위를 없애려고 했지만, 프로이트의 후학이었던 융(Jung)은 신앙에 대해 관심을 갖고 “인간의 출생이 의미가 있듯이 죽음도 분명한 의미가 있다”고 보았다. 자기실현이 이루어지면 그것이 바로 자신의 죽음으로서 죽음은 자기실현을 의미한다고 하였다. 융의 죽음에 대한 주장에 대해서 조계화외 2인은 “융에 의하면 인간의 삶은 어떤 궁극적 목적을 향한 준비로써 보통 인간은 인생의 상승기를 거쳐 정상에 이르면 거기에 멈추어 서게 되고, 그렇게 하여 자기실현이 이루어지면 그것이 바로 죽음이며, 따라서 죽음은 결국 한 사람의 자기실현을 의미한다는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그렇지만 융은 결국 프로이트가 했던 것처럼 죽음을 도덕적 중립적인 것으로 취급하려고 시도했으며, 결국 죽음은 순수하게 과학적이고 가치중립적인 경험으로 환원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죽음학의 의미와 가치에 있어서 더욱 현대적 의미로 심리학화 하는데 큰 기여를 한 사람은 유명한 정신분석학자 퀴블러-로스(Kübler-Ross. E)이다. 그녀는 “인간을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존재로 이해하면서 죽음을 완성을 향한 하나의 과정이라고 주장하며 개인의 성취를 증대시키기 위해서 죽음을 수용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고 말한다. 곧 그는 죽음이란 삶의 최종적인 것이며, 완성의 순간으로 들어가는 변화의 과정이기 때문에 죽음은 두려워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아름다운 체험이 될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좀 더 그가 말하는 죽음에 대해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죽음은 아기가 태어나는 것처럼, 인간의 존재, 성장과 발달의 자연스러운 한 부분이다. 우리는 죽음을 슬프거나 놀랄만한 일로, 또 병적이거나 두렵거나 참극이거나 파괴적인 것으로 볼 필요가 없다. 그러므로 죽음은 의학에서 말하듯이 정복되어야 할 적이 아니라 우리의 삶의 여행길을 함께 하는 친구이다.” 그리고 의미요법의 창시자 빅터 프랭클은 “죽음은 인간 존재에게 의미를 부여한다”고 말한다. 인간은 스스로 유한성을 인정하고 언제나 의식적으로 죽음이 온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하며, 죽음에 대한 회피는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프랭클은 인간은 불멸하는 존재가 아닌 유한한 존재이기 때문에 지금 우리가 살아가면서 행하는 모든 것들은 특별한 의미를 지니는 것이라는 것을 강조하면서 인생에서 의미를 갖는 것의 중요함을 주장하는 것이다. 이처럼 심리학적 관점에서 죽음의 이해는 인간이 죽음을 어떻게 보고 이해하고 받아들이는가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주제로 다루어지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인간이 처음과 끝이 있는 인간으로서 갖는 근본적 유한성을 깨닫고 죽음에 대한 회피가 아니라, 인간은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더욱 오늘이라고 하는 현실이 가치 있는 것을 알고 살아가야 하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죽음은 생물학적, 심리학적 소멸을 가져오는 것이지만, 그러나 삶은 그런 소멸보다 앞서는 것이므로 오늘 우리 인간에게 주어진 삶을 역사와 문화와 인간관계 등과 연계하여 더욱 잘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할 때에 죽음은 결코 우리 인간의 적으로만 인식 될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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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2-20
  • Well Dying(good life, good death) 11 - 죽음에 대한 다양한 관점 연구
    Well Dying(good life, good death) 11 - 죽음에 대한 다양한 관점 연구 붉은 단풍이 한창이던 11월 중순부터 가을을 타는지, 울적한 마음에 한 동안 쉬었던 Well Dying(good life, good death)에 대한 글을 다시 시작한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12월에는 우리 인간의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치고 있는 철학, 심리학, 그리고 각 종교의 죽음에 대한 관점을 살펴보려고 한다. 그리고 죽음에 대한 성경적 관점을 알아보고, 다음으로 나의 신학적 배경에 근거하여 성경적 관점에서 죽음에 대한 정의를 소개하고자 한다. 역사 이래 사람들은 어떻게든지 죽음을 극복해 보려고 노력하고 있으며, 그 일차적인 모습이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성경 히브리서에서 말씀하는 것처럼 사람에게 한 번 죽은 것은 정한 이치이다. 곧 삶과 마찬가지로 죽음은 인간의 삶을 구성하는 필수 단계이다. 그러므로 단순히 죽음을 부정하고 인간의 힘으로 극복하려고만 할 것이 아니라, 죽음에 대한 분명한 인식과 믿음을 통해서 죽음으로 인한 불안을 떨쳐버리고 영원에 대한 분명한 소망으로 죽음에 응전해야 할 것이다. 모든 인간은 필연적으로 죽음과 대면해야 할 존재이므로 보다 나은 삶을 위해서는 마음속에 죽음에 대한 준비 및 생사관을 정립해야 할 필요가 있다. 생사관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요시노리는 "우주나 생명 전체의 큰 흐름 속에서 자신의 삶과 죽음이 어떤 위치에 있고 또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가에 대한 이해나 생각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죽음에 중점을 두고 현재의 삶의 방식을 생각해 보는 철학적 관점"이라고 이야기 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실제 죽음을 받아들이고 죽어가는 과정에서 각자가 가진 인생관과 죽음관에 따라서 다른 방식으로 죽음을 맞이한다. 그러므로 인간의 삶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며 아주 다양한 영향을 미치는 죽음의 문제는 철학·심리학·의학·종교 등 다양한 학문 분야에서 관심을 갖고 다루고 있는 주제이며, 각 학문 분야의 체계 내에서 고유한 관점에 따라 정의되고 있다. 1. 죽음에 대한 다학제적 관점 인간의 삶에 다양한 의미를 갖고 복잡한 영향을 미치는 죽음의 문제는 철학, 심리학, 종교학, 의학 등 인간의 문제를 다루는 각 학문 분야에서 관심을 갖고 다루는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그리고 각 학문 분야에서 다루는 죽음이 특징에 대해 이이정은 “각 학문 체계 내에서 통용되는 독특한 사고 유형과 접근 방식에 따라 각각 정의되며, 아울러 해석도 각각 다르게 나타난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우리 목회자들이 교회 내에서 죽음에 대한 사역을 위해서 꼭 알고 있으면 매우 유용하게 사용 할 수 있는 철학, 심리학, 그리고 의학 분야에서 죽음을 바라보는 관점에 대한 소개를 하고자 한다. 1.1. 철학적 관점 철학적 관점에서 바라본 죽음은 곧 현재의 삶을 향해서 삶과 죽음의 의미를 질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고대로부터 죽음은 철학자들의 주요한 주제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 누구도 죽음에 대한 명쾌한 정의를 내리고, 사람들에게 분명한 대답을 제시하지는 못했다는 한계를 갖고 있다. 이런 현상에 대해서 정달용은 “오히려 의학에서 죽음을 부정하는 것과 같이 철학과 형이상학에서도 이 죽음의 문제를 주제화 하는 것을 소홀히 하거나 회피해 온 것이 사실이다”라고 이야기한다. 그렇지만 우리가 주지하는 바와 같이 서양 철학에 있어서 인간의 죽음의 문제는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철학의 주요 주제로 논의 되어 왔다. 중요한 것만 간략하게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쾌락주의’라고 알려진 고대 헬라의 에피쿠로스학파의 죽음관에 대해서 정달용은 “죽음은 모든 것의 끝이고 감각도 고통도 없으며 영혼의 원자도 모두 분해되기 때문에 이후의 세계를 무라고 단정한다. 그래서 죽음은 우리가 생존하는 한 우리와 함께 하지 않고, 죽음이 우리에게 다가오는 순간 우리는 이미 존재하지 않는다”고 정의한다. 아울러 강동효는 “에피쿠로스학파에서는 영혼에 대한 형이상학적 사변을 버리고 오직 현재의 삶에만 충실할 것을 당부하면서 죽음을 문제로 삼는 것조차 회피하고자 했다”고 말한다. 둘째, 소크라테스나 플라톤과 같은 고전 형이상학파들은 물질 혹은 신체와 대비되는 영혼, 혹은 물질과 대비되는 정신이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그들은 죽음 후에도 우리 인간의 정신은 다른 형태의 삶이 계속된다는 불멸성의 개념을 주장하였다. 곧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죽음관에 대해서 김귀룡은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소크라테스에게 있어서 죽음이란 육신의 속박과 고통으로부터 정신의 해방과 치유로 보았고, 플라톤은 죽음을 영혼이 신체로부터 불사의 세계로 옮겨가는 일이라고 보았다.” 곧 고전 형이상학파에서는 인간을 정신적 존재로 규정하고 영혼은 육체와 달리 영원하다는 불멸성을 강조하였으며, 당연한 귀결로서 죽음은 그리 대수롭지 않은 문제로 취급하였다. 이와 같은 고전형이상학파의 죽음과은 소크라테스의 죽음에서 확연히 드러났다고 할 수 있다. 셋째, 중세 시대에는 대표적으로 어거스틴과 아퀴나스 등이 기독교적 관점에서 죽음에 대해 성찰하였다. 중세철학의 특징에 대해서 김정우는 영혼이 신과 인간을 이어 주는 중간 매개체가 되고, 이 세상의 육체적 삶이 끝난 후에도 영혼은 지속된다고 믿었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한다. “중세시대에 죽음은 이 세상에서는 불가능한 다른 존재로의 비약과 영생을 가능하게 하는 것으로 두렵기보다는 긍정적인 것으로 간주되었고, 죽음을 준비하는 삶이 바람직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넷째, 근대에 들어 유신론적 세계관이 붕괴되면서 감각적으로 확인되지 않거나, 이성적이고 논리적으로 납득되지 않는 세계를 거부하는 경향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김열규는 “근대철학부터는 내세나 초월계 보다는 자신의 현실적 삶이나 내면적 확신에 바탕을 둔 철학적 작업을 중시하게 되었다. 그리고 동시에 죽음을 철학적 문제에서 배제하려는 경향을 보이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이처럼 근대철학에서는 경험적으로 입증될 수 없는 모든 것은 무의미한 것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죽음은 육체적 영역에 한정되는 생물체의 생물학적 종말이라는 개념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근대철학에서 죽음의 문제를 철학적 관심의 영역에서 배제하고자 하는 이유는 죽음, 특히 ‘나의 죽음’이 검증 가능한 경험의 대상이 되지 못하는데 있다. 우리가 경험하는 것은 다른 사람의 죽음의 외적인 현상, 밖으로부터 이루어진 간접적인 경험일 뿐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외적이고 간접적인 경험은 확실성과 논리의 필연성을 기반으로 하는 철학적 지식의 원천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다섯째, 19세기 실존 철학과 실존주의의 등장과 더불어 죽음의 문제는 다시 철학적 관심의 전면에 등장하게 되었다. 특히 제1,2차 세계 대전을 전후한 암울했던 시대적 상황은 삶의 의미와 더불어 죽음의 문제를 부각시키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전쟁과 급속한 변화의 시대에 살았던 실존주의 철학의 죽음관의 특징에 대해서 최재락은 “실존주의 철학자들은 인간 이해에 있어서 의미있고 중요한 것을 발견 했는데, 한 개인의 삶은 특별한 것이며 따라서 개인의 죽음도 특수하다는 것이다. 곧 죽음은 모든 인간이 죽는다는 점에서는 보편적인 사건이지만, 한 개인이 경험하는 죽음은 특수한 사건인 것이다”라고 말한다. 곧 인간에게 중요한 것은 관찰 가능한 객관적 사실로서의 죽음의 의미가 아니라 삶의 종말로서 죽음이 개인의 현실적인 삶에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가에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진홍은 “실존주의 철학자들은 인간이란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 충분히 관심을 갖지 않으면 자신의 삶을 제대로 살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즉 실존적으로 볼 때 삶과 죽음 사이에는 큰 괴리가 없다는 것”이라고 말한다. 아울러 실존주의에서는 사람들이 추구해야 할 죽음에 대한 철학적 관심의 대상은 외부로부터 관찰되는 죽음이 아니라, 우리가 자신의 죽음과 맺게 되는 관계와 그 관계가 우리의 삶에 미치는 영향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정달용은 “실존주의에서 죽음은 우리가 도달할 종착역이 아니라 우리가 실존으로서의 자기를 자각하는 적극적 계기로서의 의미를 갖게 되므로 인간은 신의 존재와 내세의 존재를 가정하지 않더라도 죽음을 직시함으로써 삶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실존주의를 대표하는 철학자 하이데거는 인간 존재 자체가 죽음을 향한 존재로 보았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상에서 살펴 본 것처럼 철학에서는 죽음을 죽음이 가져다 주는 정서적 불안과 공포를 합리적인 사고를 통해 극복하려는 입장에서 죽음을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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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2-16
  • Well Dying(good life, good death) 10 - 죽음의 의미
    Well Dying(good life, good death) 10 - 죽음의 의미 일반적으로 죽음은 객관적으로 모든 신체적·정신적 기능이 회복될 수 없는 정지를 의미하며, 이것은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사실일 때 인정된다. 그러나 죽음에는 이러한 객관적인 의미뿐만 아니라 각 개인마다 다르게 느끼는 주관적인 의미들이 존재한다. 그러므로 죽음이 갖는 의미에 대해서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그 중요한 죽음의 의미에 대해서 우리는 김명숙의 다음과 같은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삶은 죽음으로 종결되기 때문에 더욱 고귀하며, 생명은 죽음에 의해 사라지기 때문에 더욱 존엄하다. 누구든지 자신의 죽음을 직접 경험할 수는 없지만 아주 가까운 사람의 죽음 등을 통해 죽음과 상실을 경험하게 된다. 죽음에 대한 자각이 깊으면 깊을수록 현실의 삶의 뜻을 반성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 삶의 목적을 주체적으로 다시 묻게 된다. 따라서 죽음을 염두에 둔 생명의 각성은 오히려 사람들을 세속의 속박에서 벗어나 보다 진실한 마음으로 삶에 다가설 수 있게 만든다. 곧 죽음에 대해 가지는 개인의 인식은 세상을 살아가는 가치관의 문제로 정신적 생활의 질과 삶의 태도를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이기도 하다.? 죽음의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의미는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사실과는 다르게 다양한 배경과 맥락을 가진 개인들에 의해 구성되는 것이다. 이런 개인마다 의미를 달리하여 구성된 죽음에 대해서 이이정은 “한 사람의 생각과 감정과 행동에 영향을 미치고, 살아가는 방식과 죽음을 준비하고 맞이하는 방식에도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런 개인적이면서도 다차원적인 죽음의 의미에 대해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의미로서의 죽음 모든 생명체는 반드시 죽는 존재이다. 이것은 피할 수 없는 진실이다. 그러므로 죽음은 우리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명체의 삶을 일시적인 것으로 만들고 영원한 삶의 가능성을 허락하지 않기 때문에 삶에 대한 의미조차도 유한으로 제한한다는 특징이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죽음이 인간의 모든 삶의 의미를 제거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에 대해서 스티븐 케이브는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의 “죽음이 없었더라면 역사도 문화도 그리고 인류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라는 말을 인용하면서, 그러므로 죽음에 맞서는 이야기들의 관점은 인간의 문명을 이해하기에 충분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반드시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의미요법의 창시자 프랭클은 자신이 독일 나치의 수용소에서 겪은 실제 경험을 통해 “의미가 분명한 사람은 히틀러의 수용소 안에서도 살아가는 삶의 모습이 다르고, 죽음에 응대하는 모습도 분명히 달랐다고 이야기 한다. 곧 수용소에 갇힌 사람들이 비록 평범한 사람들이었지만 그 중에서도 의미를 발견한 사람들은 시련을 가치 있는 것으로 만들어갔다”고 말한다. 이처럼 사람은 인격체이기 때문에 죽음 앞에 섰을 때에라도 인생을 의미를 갖고 목적 속에서 살아왔다면 그 죽음조차도 뛰어 넘을 수 있는 진정한 의미의 세계로 나아가게 될 것이다. 곧 인생이 유한하다는 것을 분명하게 인식하게 되면 살아 있는 동안에 죽음 그 너머를 생각하며 더욱 인생을 아름답게 살 것이라는 것이다. 2. 소멸로서의 죽음 많은 사람들이 죽음은 모든 것의 끝, 곧 사람은 한 번 죽으면 모든 것이 소멸된다고 생각한다. 곧 캐이건이 주장하는 것처럼 “사람들은 죽음을 모든 의식 혹은 자기다움의 완전한 정지라고 믿으며, 죽음은 무(無)에로의 소멸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죽음에 대한 이런 생각을 하는 것에 대해서 이이정은 “자신의 눈으로 확인할 수 있고 이성적 논리로 합리성을 확보할 수 있는 실증적 가치만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가진 가치관이다. 곧 이러한 가치관은 인간에 대해서 오관을 통한 체험에 기초를 둔 육체적 물질적 존재로만 전제하고, 죽음을 생물학적 사실로만 인정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죽음을 육체적 물리적 기능의 정지로만 보기 때문에 인간이 죽은 후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 자아의 소멸, 곧 무의 상태가 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소멸로서의 죽음관을 가진 사람들은 죽음의 과정에서 사랑하는 사람, 육체, 재산과 명예, 그리고 지식까지 인생을 살면서 땀 흘려 추구했던 모든 것을 잃고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것으로 인식한다. 캐이건은 그의 책 에서 소멸로서의 죽음의 특징에 대해서 정의하고 있는데, 그 내용을 요약하여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실제적으로 죽음은 사랑하는 사람과 완전히 이별하는 것이다. 죽음은 이승과의 단절이며 이승에서 맺었던 모든 관계와의 단절을 의미한다. 둘째, 죽음은 한 사람이 일생을 통해 쌓은 모든 경험을 상실하게 한다. 한 사람이 학문적 연구나 배움이 아닌 삶을 통해 실제적으로 체득한 모든 지혜가 죽음으로써 완전히 단절되는 것이다. 여기에는 쌓아놓은 명예나 지식까지 포함되는 것이다. 셋째, 죽음으로써 그 동안 쌓은 모든 물질적 재산을 상실하게 된다. 한 사람이 이 땅에 살면서 물질적인 부를 위해서 그토록 열심히 살았던 모든 것이 하루아침에 무로 돌아가는 것이다. 넷째, 모든 꿈과의 단절이다. 사람은 꿈을 먹고 사는 존재이다. 꿈을 상실한 삶은 인생의 의미를 찾을 수 없다. 그런데 죽음은 한 사람이 가졌던 모든 꿈을 다 상실하게 한다.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는 것은 곧 미래가 사라진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꿈을 꾸거나 그것을 실현할 기회조차도 상실한 것이다. 다섯 째, 모든 시간을 상실하여 원래 인간이 가진 유한한 존재의 본질로 돌아가는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출생과 함께 유한한 시간을 부여 받아서 일생을 살아간다. 그런데 죽음이 찾아오는 순간 그 동안 누렸던 모든 시간은 끝이 나는 것이다. 이처럼 죽음을 사람의 오관에만 의지하여 이 땅에서 보이는 것만으로 문제를 삼을 때에 모든 것의 끝이며, 그러므로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3. 변화로서의 죽음 죽음에 대한 이러한 관점은 소멸로서의 죽음관과 완전히 배치되는 것으로서 죽은 후에도 내가 계속 존재할 것이란 믿음을 전제한다. 그러므로 장결철이 말하는 것처럼 “변화로서의 죽음이란 이 세상과는 다른 형태의 존재로의 변화의 과정”이라고 보는 것이다. 곧 변화로서의 죽음관은 인간은 필연적으로 영혼이 있다고 믿는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죽음을 변화의 과정으로 보는 것은 개인이나 사회를 발전시킬 수 있는 역설이 담겨 있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로서의 죽음에 대한 인식의 배경에는 사람의 존재를 육체와 영혼의 결합체로 전제하는 것이다. 곧 육체가 죽음과 더불어 소멸하더라도 영혼은 다른 존재로 불멸한다는 것을 주장하는 견해이다. 2015년 11월 27일자 조선일보 기사에 따르면 지구상의 70억 인구 중에서 ‘영혼’의 존재를 믿는 사람이 약 93퍼센트다. 곧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간의 고귀한 정신 작용은 물리학 법칙으로 환원될 수 없으며 생물학적인 원리로는 설명되기 어렵다고 믿는다. 이것에 대해서 캐이브는 “미국인들 71%가 영혼이 있다고 믿으며, 영국과 독일의 사람들은 60% 정도의 사람들이 영혼의 존재를 믿는다고 나타난다. 그리고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경우는 거의 100%의 사람들이 영혼의 존재를 믿고 있다”고 말한다. 이처럼 영혼의 존재를 믿는 사람들은 죽음에 대해서 변화로의 죽음이라는 견해를 가지며, 곧 변화로서의 죽음관은 종교에서 말하는 천국이나 지옥, 환생 등 죽은 후에도 내세가 존재한다고 믿는 것이라고 말한다. 곧 변화로서의 죽음을 믿는 사람들은 죽음을 다음 단계의 삶을 위해 통과해야 할 관문으로 보기 때문에 죽음은 다음 단계의 삶으로 들어가는 변화의 과정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실제로 병원 사역을 통해 경험하는 것은 죽음을 목전에 둔 말기 환자가 어느 날 의식이 또렷해지면서 가족들을 모두 불러 모으는 경우가 있다. 그리고 가족들을 바라보며 이제 자신은 며칠 후면 주님께서 기다리시고 준비해 두신 천국 본향으로 돌아갈 것이니 나의 죽음 후에도 슬퍼하지 말고 가족 간에 더욱 사랑하며 주님을 잘 믿으면 살 것을 유언으로 남기는 것이다. 이런 모습은 우리가 직접 경험 할 수 없고 이성적으로 다 설명할 수 없는 한계를 갖고 있다. 하지만 분명하게 구주 되신 주님을 만나고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종종 이런 모습을 보이는데, 결국 우리 사람에게는 육체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영혼이 함께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삶은 죽음으로 끝이 나는 것이 아니라, 육체의 죽음을 통해 새로운 생명의 세계 곧 영원한 세계로 들어가는 변화의 과정임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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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1-08
  • Well Dying(good life, good death) 9 - 우리나라의 죽음학의 역사
    Well Dying(good life, good death) 9 - 우리나라의 죽음학의 역사 우리나라의 죽음학에 관한 연구나 사회적인 분위기 그리고 학교에서의 죽음학에 대한 교육적 상황은 어떠한가? 그리고 우리나라의 죽음의 인식에 관한 상황은 어떤가? 서구의 여러 나라들과 비교해 볼 때 우리나라는 죽음에 대한 관심이 매우 낮고, 학문적으로도 이제 막 초기 단계를 벗어나고 있는 수준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현재 우리나라에서 죽음이나 죽음학에 대한 관심이나 연구는 대부분 말기 환자들을 돌보기 위한 방편으로 인식되거나 급증하는 자살 문제와 호스피스 돌봄을 중심으로 하는 의학적 연구가 중심에 있다. 그리고 문학과 철학 분야의 연구가 그 다음을 잇고 있는 상황이다. 우리나라의 죽음학에 대한 그 동안의 연구 상황에 대해서 김선숙은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우리나라 죽음학 연구의 시초는 1978년부터 서강대학교에서 죽음에 대한 강의를 시작하고 <죽음에 대한 심리적 이해>를 출간한 김인자로 이야기 할 수 있다. 그 후 1991년 김옥라에 의해서 ‘삶과 죽음을 생각하는 회’가 결성되어 죽음에 관한 근본적 성찰을 불러일으키기 시작해 지금까지 죽음에 대한 교육, 세미나와 공청회 등을 실시하고 있다. 이어서 1992년에 서혜경의 노인을 위한 죽음 준비의 건강교육 프로그램인 “죽음을 준비하는 건강교육 프로그램에 관한 제언”이 있었고, 1998년 정경숙의 ”발달수준에 따른 아동의 죽음에 대한 개념과 죽음준비교육에 과한 연구“를 통해서 아동의 죽음에 대한 교육의 중요성이 재발견되었다.” 1978년이면 그렇게 늦지 않은 시기에 죽음학에 눈을 뜬 것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에 지속적인 연구가 이어졌다면 매우 고무적인 발전이 이 분야에서 있었을 것이며, 아울러 사회 곳곳에 죽음과 관련된 연구나 교육이 이루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 이후 약 20년 동안 우리나라에서는 죽음학이 더 이상 발전하지 않고 제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던 것이 2000년대를 얼마 남기지 않은 1997년 한림대 철학과의 오진탁교수가 당시부터 급속히 늘어나고 있던 자살의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죽음교육과 생사교육에 근거한 자살예방교육을 전국에서 유일하게 시작함으로 다시 죽음에 대한 담론이 시작되었다. 이어서 2004년에는 ‘생사학연구센터’가 개설되어 죽음학·생사학에 기초한 자살예방 활동을 벌이고 있다. 이에 대해서 곽혜원은 “이처럼 척박한 땅에서 2005년에야 비로소 철학, 종교학, 심리학, 사회학, 의학 등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모여 죽음에 대한 학계와 사회의 분위기를 바꾸어 보고자 ‘한국죽음학회’(회장: 최준식교수)가 창립되었다”고 말한다. 정리하면 1978년 이후 우리나라 죽음학 연구에 선구적 역할을 한 최준식교수와 김균진교수 비롯한 죽음학의 선각자들이 활동하고 있으며, 그 뒤를 이어 원종순의 “죽음을 앞둔 암환자의 돌봄에 관한 연구”(이화여대대학원, 1994), 정영의 “회고 요법이 노인의 죽음 불안, 자아 통합과 생활 만족에 미치는 효과”(카톨릭대대학원, 1994), 한미정의 “대처방식 내외 통제성 자아존중감에 따른 죽음 불안의 발달적 고찰”(서울여대대학원, 2001), 정경숙의 “아동의 보존개념 발달개념 수준과 죽음에 대한 정서 경험 수준이 죽음의 개념과 발달에 미치는 효과”(계명대학교대학원, 2001), 오미나의 “재가 노인과 시설 노인의 자아 존중감 죽음 불안 및 우울에 관한 연구”(영남대학교대학원, 2003) 등을 통해서 죽음학을 연구하였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죽음학에 관한 연구는 아직까지 죽음 자체에 대한 깊은 철학적·심리학적·상담학적·신학적 연구가 매우 미흡한 실정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대부분 죽음을 터부시하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그래도 죽음을 준비해야 하는 노인들을 위한 죽음 준비 교육 프로그램 개발을 위한 연구와 함께 자살이나 호스피스와 같은 사회적 이슈와 관련된 내용이 주 내용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에 근자에 외국의 유명한 학자들의 죽음에 대한 연구를 실은 책이 소개되어 우리 한국 사회에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는데, 대표적으로 셸리 캐이건(Shelly Kagan) 교수의 <죽음이란 무엇인가?>(2013) 라는 책과 스티븐 케이브(Stephen Cave)의 <불멸에 관하여>(2015)를 들 수 있다. 특히 셸리 캐이건 교수의 책은 그가 예일대학에서 17년간 가장 인기 있는 강의를 했다는 부연 설명에 힘을 입어 출판과 함께 여러 언론과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그런데 이 책들은 현대 과학 문명에 깊이 뿌리를 내린 유물론과 자연주의에 기초를 둔 신기계론적 철학을 바탕으로 한 책으로서 결국 우리들로 하여금 더욱 죽음을 멀리하도록 하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여 진다. 왜냐하면 이런 책들은 죽음에 대한 철학적·신학적 준비가 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잘못된 죽음 관을 갖도록 하는 독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죽음학에 관한 연구가 그렇게 깊지 않은 상태에서 이런 과학주의적이며 유물론적 사고에 뿌리를 내린 사조까지 소개됨으로 현대인들은 죽음을 더욱 터부시 하는 문화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게 된 것이다. 그러나 최근 10연 어간에 우리나라에서는 수많은 죽음과 관련된 책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이런 현상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들이 있으나, 가장 긍정적 의견은 드디어 사람들이 죽음을 좀 더 실제적으로 생각하고 이야기 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곧 급변하는 사회 속에서 죽음의 문제를 통해서 삶을 더욱 의미 있게 만들려는 철학을 가진 의사, 철학자, 종교인, 고인의 마지막 유품을 정리해 주는 직업을 가진 사람 등등,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이 자기 분야에서 경험한 죽음의 이야기를 통해서 삶의 질을 높이려는 시도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현재 우리나라의 상황은 사람들의 삶에 필연적으로 찾아오는 죽음에 대한 바른 직면을 더욱 도외시하게 함으로 사람들로 하여금 죽음에 대한 준비 없이 오직 이 땅에서의 성공과 육체만을 위해서 본능적으로 삶을 살도록 하는 문화가 넘치고 있다고 하겠다. 그러므로 우리나라에도 하루 빨리 죽음과 관련하여 우리 삶의 목적과 의미를 연구하는 바른 죽음에 대한 인식이 새롭게 형성되어야 할 것이다. 곧 죽음학에 대한 다학제적이며, 성경적인 연구가 많이 이루어짐으로 인간의 삶과 죽음을 생명에 대한 사랑 안에서 새롭게 조명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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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고
    2022-11-05
  • Well Dying(good life, good death) 8 -- 죽음학의 역사
    Well Dying(good life, good death) 8 -- 죽음학의 역사 ( 언어적으로 죽음학을 의미하는 ‘thanatology’의 접두어 ‘thanato-’는 고대 그리스도의 죽음을 의인화한 신 ‘thanatos’에서 유래했다. 이러한 죽음학은 1908년 노벨생물 화학상 공동 수상자 중 한 사람인 러시아의 생물학자 메치니코프가 1903년 출간한 <인간의 본성>에 ‘죽음학’이라는 용어를 쓰면서 시작되었다.) 누가복음 7장 31-32절에서 예수님께서 당시 사람들을 지적하신 말씀이 오늘 우리시대를 향한 말씀으로 다가온다. “또 이르시되 이 세대의 사람을 무엇으로 비유할까 무엇과 같은가, 비유하건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서로 불러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하여도 너희가 울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질병이나 고통 그리고 죽음과에 관한 문제가 감추고 멀리한다고 해서 우리 인간의 삶에서 완전히 떠나는 것은 아니다. 특히 죽음의 문제는 우리의 인간의 삶과 결코 분리 될 수 없는 실제적인 문제이다. 그러므로 죽음은 우리의 삶에서 늘 인식 되고, 또한 교육을 통해 준비되어야 하며, 아울러 자신의 죽음을 준비해야 할 중요한 삶의 과제라고 할 수 있다. 그렇게 할 때에 삶을 더욱 의미 있고 아름답게 살 수 있게 될 것이며, 무엇보다도 영적으로 인간의 유한함과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갖고 영원과 부활을 바라보며 살아갈 수 있도록 할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죽음에 대해서 더욱 연구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죽음학의 역사에 대해서 알아보는 것은 우리에게 많은 유익을 줄 것이다. 이 항에서는 죽음학의 역사를 통해서 현재 우리가 서 있는 자리가 어디인지 알아보고자 한다. 1. 외국의 죽음학 역사 미국을 비롯한 서구 사회는 우리나라보다 죽음에 관한 연구가 일찍부터 시작되었다. 그리고 우리와 가까운 일본이나 대만도 우리나라보다 죽음학이 훨씬 발전해 있는 상황이다. 이 점에 대해서 대만 학자인 부위훈(傅偉勳, 푸웨이쉰)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한다. “최근 30년간 미국과 유럽 등에서 죽음학에 과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는데, 이것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과학 기술의 급속한 발전, 의학 지식의 발달과 보급, 의약 설비의 완비, 경제생활의 점진적 개선, 생활의 질의 끊임없는 상승과 요구, 대중 매체의 보편화, 오락산업의 발달, 사회 고령화 현상 등으로 인한 자연스러운 결과이다.” 현재 우리가 가장 큰 영향을 받고 있는 미국을 비롯한 독일, 일본, 대만 등의 죽음과 관련된 학문적 연구의 역사에 대해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인간의 죽음을 다루는 죽음학(thanatology)의 태동은 대체적으로 1956년 미국의 헤르만 파이펠(H. Feifel)이 새로운 관점에서 죽음을 보는 운동과 다학문적 접근으로 죽음을 연구할 것을 제창한 <죽음의 의미, The Meaning of Death>를 통해서 죽음 현상을 탐구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부터로 본다. 이에 대해 임기운 등은 “파이펠은 죽음 연구와 교육을 정당화 한 최초의 책을 저술한 학자로 인정되는데, 그 이유는 죽음과 그 과정의 연구가 과학적 탐구, 특히 행동과학자들에게 타당하고 필요한 것임을 최초로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 그 후 1963년 로버트 풀턴(R. Fulton) 교수가 미네소타 대학에서 죽음을 주제로 한 최초의 정규 강좌를 개설하면서 미국에서 죽음학이 발전하는 기틀이 마련되었다”고 말한다. 이렇게 시작된 미국의 죽음학의 이어지는 발전에 대해서 곽혜원은 자신의 책 <존엄한 삶, 존엄한 죽음>에서 다음과 같이 정리하여 소개하고 있다. "1966년에는 죽음학의 실천적 과제를 다루는 죽음 교육 분야의 최초 뉴스레터라고 할 수 있는 <오메가>가 창간됨으로써 죽음 교육의 발전에 커다란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1969년에는 미국 전역의 많은 대학교가 죽음교육 과정을 개설하는 한편 정신의학자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Elisabeth Kübler-Ross)가 <죽음과 죽어감>이라는 저서를 출간하면서 전 세계적으로 많은 사람이 죽음학에 관심을 두는 중요한 계기가 만들어졌다. 특히 그녀는 죽음학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크게 이끌어냄으로써 전 세계적으로 죽음 인식 운동의 확산을 가져왔다. 이러한 성과에 힘입어 1970년대에는 미국의 20여개 대학에서 죽음 관련 교과과정이나 학과가 개설되었고, 죽음교육이 학교 강의실 안팎에서 활발하게 진행되기 시작했다." 둘째, 독일은 몇 백 년에 걸친 풍부한 죽음교육의 전통을 지닌 국가로써 학교 정규교육 이외에도 대부분의 학교에서 종교 수업을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로 나누어 실시하고 있으며, ‘죽음에 대한 준비교육’은 이 수업 중에 다루어지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에 대해 독일인으로써 일본 죽음학의 기틀을 세운 데켄(Deeken.)은 “독일에서는 1980년대 이후 죽음 교육 프로그램이 학교 교과과정에 정식으로 포함되었으며, 모든 학교에서 실시되는 종교 수업과 함께 초등학교 1학년부터 고등학교 4학년까지 13년 동안 학생들의 성장 과정에 맞추어 죽음이라는 주제를 다각적으로 다루는 기회와 시간을 충분히 마련하고 있다. 그리고 교회의 예배를 비롯한 여러 행사와 교육을 통해 죽음에 대한 교육을 실시하고 있기 때문에 신자라면 누구나 교회 공동체를 통해 죽음을 맞이할 준비에 대해 배우면서 사후의 영원한 생명에 대한 소망을 갖는다”고 소개한다. 셋째, 아시아에서는 일본이 죽음학과 관련해 상당히 앞서 가고 있다. 사실 일본은 죽음을 터부시하는 경향이 매우 강해서 죽음학·생사학 연구의 활성화가 어려울 수 있었다. 그런데 한 사람의 선각자, 곧 독일에서 귀화한 세계적 죽음학자로서 일본 죽음학의 대부라고 하는 알폰스 데켄 교수에 의해 죽음학이 괄목할 만큼 발전하게 되었다. 이 부분에 대해서 최준식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한다. “데켄 교수는 1975년 일본 조치 대학에 ‘죽음의 철학’이라는 강좌를 개설한 후 1982년 ‘삶과 죽음을 생각하는 세미나’와 1983년에 ‘삶과 죽음을 생각하는 모임’을 결성하였다. 이를 통해 그는 일본인들에게 죽음학을 소개하고 죽음교육이 일본에 뿌리를 내릴 수 있도록 커다란 공헌을 하였다.” 또한 우리 정부의 장학금을 통해 일본에 가서 죽음학 연수를 한 김옥라는 일본의 죽음학 상황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일본에서는 1999년 웰다잉 교육을 보급하기 위한 ‘죽음교육연구회’가 결성되어 활발한 활동을 벌리고 있으며, 2004년부터 학교 교육에 죽음교육이 포함되었다. 이처럼 일본에서는 죽음교육이 전국의 학교 기관과 다양한 평생교육 시설에서 30년 넘게 시행되고 있다.” 넷째, 대만은 우리와 같은 체면문화와 유교가 중심이 된 국가이기 때문에 죽음에 대한 담론과 연구를 터부시하였기 때문에 죽음학에 대한 연구가 1990년대까지 매우 미진한 상태에 있었다. 그런 대만에서 죽음학에 대한 결정적 변화의 계기가 된 것은 1999년 약 1,500명의 사상자를 낸 대지진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임기운 등이 연구한 것처럼 “대만은 1999년 대지진 후에 정부가 그동안 학자들의 연구와 각종 세미나 정도에 머물던 죽음에 대한 교육을 중고등학교까지 확대하여 실시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만에서 죽음학이 태동된 시기는 1999년 대지진보다 앞선 1993년으로 대만 학자들을 주장한다. 왜냐하면 미국 템플대학교 종교과 교수인 푸웨이쉰(한국식, 부위훈) 교수가 자신의 10년간의 죽음 관련 교육 내용을 바탕으로 <생명의 존엄과 사망의 존엄>이란 출간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 전병술은 “부위훈은 동양 전통 철학(특히 중국 전통의 생명학)의 기초 위에 서양의 죽음학을 결합해 삶과 죽음을 포괄하는 생사학을 제창하였며, 이 책의 출간은 학계에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으며 죽음학 연구의 새로운 지평을 열게 되었다”고 말한다. 다섯째, 미국이나 독일 이외에 근대적 호스피스가 탄생한 영국은 물론 캐나다, 프랑스, 스웨덴, 오스트레일리아 등의 국가에서도 죽음학에 대한 학문적 접근과 그 실천인 죽음교육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아울러 오늘날 서구 사회의 많은 대학이 죽음학을 필수과목으로 책정하고 있으며, 죽음에 관한 많은 연구 문헌이 발행되고 있다. 최근 서구 신학계도 이러한 일반 사회의 흐름에 부응하여 비교적 적극적으로 죽음에 관한 연구와 논의를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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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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