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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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남협의회 제4회 정기총회 개최
    영남협의회 제4회 정기총회가 12월 1일 오전 11시 대구 만촌동에 소재한 호텔인터불고 컨벤션홀에서 있었다. 1부 예배는 장재덕 목사(상임회장)의 인도로 이대봉 장로(상임회장)가 기도 후 김종운 목사(서기)가 사도행전19장 14절부터 20절까지 봉독 후 김문기 장로가 특송했다. 장봉생 목사(은혜로운동행 기도운동본부장)가 ‘너희는 누구냐’란 제목으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흉내만 낼뿐이고 주님은 이러한 자를 모른다고 하신다. 주님이 알아주는 사람이 되어야한다. 귀신도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 되어야한다. 끝까지 주님의 사역을 감당하는 우리가 되어야한다”고 설교했다. 이후 배광식 목사(총회장)의 축도로 예배를 마쳤다. 제2부 인사 격려 축하 순서는 김종혁 목사(사무총장)가 사회했다. 이승희 목사(대표회장)가 “어려운 가운데서도 많이 참석해 주셔서 감사하다. 영남 지역 모임은 늦게 만들어졌다. 협력을 통해 주님의 일을 잘 감당하는 협의회가 되기 바란다”고 인사했다. 소강석 목사(증경총회장)가 “영남인의 기상으로 한국 교회에 크게 앞장서기를 바란다”고 영상으로 격려사하고, 정준모 목사(증경총회장)가 “코로나로 어렵지만 위기는 기회이다. 역할분담과 협력을 통해 큰 역할 감당하는 협의회가 되기를 바란다”고 격려사한 후 권순웅 목사(부총회장)가 “영남 지역의 선배들 중에 탁월한 업적을 이룬 분들이 많았다. 앞으로 좋은 전통을 이어가는 협의회가 되기를 바란다”고 격려사하고, 노병선 장로(부총회장)가 “코로나 상황에도 협의회를 잘 이끌어 온 임원들에게 감사한다. 신임 임원들을 통해 협의회가 크게 발전하기를 바란다”고 격려사 후 오정호 목사(대전 새로남교회)가 “그동안 수고하신 임원들께 감사한다. 나는 영남 사람이다. 영남 협의회가 영적인 낙동강 전선이 되기를 바란다. 우리를 통해 총회 정신이 살아나기를 바란다”고 격려사하고, 한기승 목사(광주중앙교회)가 “어려운 때에 모이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오신 분들을 축복한다”고 격려사 후 배만석 목사(사랑스러운교회)가 “신앙적 의리로 협의회가 존속했다. 영남인의 신앙적 의리를 보여주기 바란다“고 격려사 하고, 김성태 장로(증경부총회장)가 “지역 사회와 총회를 잘 섬기기 바란다. 한 목소리를 내야한다. 미래를 위해 인물을 키워야한다”고 격려사했다. 허 은 목사(총회 서기)가 “영적 전쟁에는 모두가 동참해야한다. 지역과 총회를 섬기는 영남인들이 되기를 바란다”고 축사하고, 고광석 목사(총회 부서기)가 “협의회를 통해 많은 사랑을 받았다. 수고한 전임 임원들을 축복하고 신임 임원들을 격려한다”고 축사한 후 홍석환 장로(총회 회계)가 “하나님께서 주시는 힘으로 사역 잘 감당하는 임원들이 되기를 바란다”고 축사 후 김상현 목사(전국호남협의회 대표회장)가 “협의회끼리 잘 협력해서 총회를 잘 섬기기를 바란다”고 축사하고, 김정훈 목사(전국영남협의회 대표회장)가 “수고하신 전임 임원들에게 감사한다. 신임 회장을 중심으로 큰 사명 감당하시기 바란다”고 축사후 윤두태 목사(서울노회협의회 대표회장)가 “그동안 수고하신 분들을 축하하며, 새로 시작하는 신임원들이 예수님처럼 잘 섬기기를 바란다”고 축사한 후 김동관 목사(서북지역협의회 대표회장)가 “수고하신 직전 대표회장 이승희 목사님을 축복하며 신임 회장님을 격려한다. 예수님을 높이는 공동체가 되기를 바란다”고 축사하고, 서만종 목사(호남지역협의회 대표회장)가 “하나님의 은혜로 주의 종으로 부르심 받았다. 선한 영향력을 끼친 선배들의 뒤를 이어 큰 일 감당하시기를 바란다” 고 축사한 후 임영식 장로(대신대학교 재단이사장)가 “대신대학을 위해 기도 부탁드리며 협의회를 위해 수고하신 분들에게 감사드린다”고 축사하고, 김한욱 목사(새안양교회)가 “대구 출신으로 안양에서 목회하고 있다. 연합회를 축복한다”고 축사했다. 제3부 총회는 이승희 목사(대표회장)의 사회로 개회하여 신구임원을 교체했다. 신임회장 장재덕 목사는 “전임자의 수고를 잘 받아 열심히 충성하겠다”고 인사후 황재열 목사(상임회장)의 기도로 정기총회를 폐회했다.
    • 뉴스
    • 기관
    2022-03-18
  • "주님 때문에 참으로 행복합니다"
    2009년 5월 가정의 달 옥인교회 말씀축제 시간에 저는 처음 예배의 자리에 나왔습니다. 가족으로는 사랑하는 아내와 사랑하는 아들, 사랑하는 딸 네 식구가 불광동에서 행복한 가정을 이루며 살고 있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은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의 삶이 아니라, 무엇에게 홀린 듯한 부끄러운 모습이었습니다. 젊은 시절에는 자유롭게 살 수 있는 세상이 좋았고, 편안하게 지낼 수 있는 친구가 있어 좋았고, 세상적으로도 잘 나가면서 즐겁고 행복한 삶을 사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처럼 즐겁고 행복했던 저에게 시련이 찾아왔습니다. 도박이라는 검은 그림자가 저에게 다가왔습니다. 저는 평상시에 술과 담배는 했었지만, 도박장 근처에는 아예 가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친구로부터 어느 순간에 유혹을 받아 카지노에 첫 발을 내딛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재미도 있었고, 무엇보다 많은 돈을 딸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에 젖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서서히 도박에 중독되어 사업도 직원들에게 맡기고 악의 구렁텅이로 한없이 빠져 들어갔습니다. 가정불화로 인해 사업장에 그 많던 물건들이 점점 줄어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가족들에게, 친척들에게, 피해를 주었습니다. 제가 도박을 하니 가까운 친구들도 점점 제 곁을 떠나갔습니다. 저는 경마와 경륜, 경정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에서 할 수 있는 도박은 다 경험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와중에 아내와의 불화는 끊이지 않았고 결국은 제가 집을 뛰쳐나갔습니다. 집을 나와 혼자 살면서도 도박을 계속 하였고, 시간이 흐르면서 건강에도 이상이 왔습니다. 당뇨가 생기고 간이 나빠지면서 몸은 서서히 망가져가고 있었습니다. 악의 구렁텅이에서 혼자 힘으로 벗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세상을 한탄하고 이렇게 살아서 무엇하나, 더 이상 고통의 삶을 살지 말고 죽자는 생각으로 죽을 자리를 찾을 때 전혀 몸을 돌보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죽을 때 죽더라도 아내와 자식들은 한번 보고 죽자는 생각에 오랜만에 집으로 가보니, 식구들이 이사를 가고 없더군요. 야속한 남편, 부족한 아버지였기에 나도 모르게 이사까지 했나보다 생각하고, 다음날 저녁에 아내의 가게로 가보니 아내가 저를 보고 깜짝 놀라더군요. 아내는 이 못난 남편을 반갑게 맞이하여 줄 수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푸대접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아이들 안부를 물으며 집은 어디로 이사했는지 물어보니 집은 저로 인하여 산동네로 이사를 했다더군요. 아내와 함께 산동네 집으로 가던 길이 얼마나 힘이 들던지 다섯 번이나 쉬고 간신히 좁은 집에 도착했습니다. 그때 저는 망가진 몸으로 걷는 것도 힘이 들었습니다. 건강이 악화되어 불면증에 시달렸으나 집에 돌아오니 잠을 잘 수 있었습니다. 죽으려고 마지막 인사를 하려고 온 제가 염치없이 먹고 자며 지내던 그 어느 날, 딸이 “아빠 나 소원이니 한번만 우리 같이 교회 가보자”고 하더군요. 사랑하는 딸의 이야기를 듣고 ‘그래 한번 가보자’하고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아내와 딸은 모두 옥인교회에 다녔습니다. 주일 아침마다 교회에 가기 바쁜 가족들을 보며 한편으로는 서운한 마음이 들기도 하였지만, 도대체 교회가 어떤 곳이기에 주일 내내 바쁘게 돌아다니는 것이 한 동안 궁금하기도 하였습니다. 처음으로 찾아간 교회에서 찬양과 말씀을 듣던 중에, 처음인데도 제 눈에는 마음에 복받쳐 오르는 눈물이 한없이 차올랐습니다. 또한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며 한없이 울었습니다. 아내가 집에 오면서 말하더군요. 우리 식구가 나를 위하여 3년째 새벽기도를 한다고 했습니다. 그 때 저는 가족들의 마음을 생각하여 그래 나도 새벽기도를 다니자 하고 딸과 아내에게 약속을 했습니다. 다음날 새벽기도 시간에 받은 마음의 감동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날의 예배만으로 끝낼 수는 없었습니다. 제 마음에는 사랑이 넘치는 은혜의 기쁨이 넘쳐났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교회 예배의 모든 예배에 참석했습니다. 젊었을 때는 운동만 하던 제가, 책과는 거리가 멀어 책 한번 읽어본 기억도 없었는데, 글자만 봐도 졸린 저에게 아내가 성경을 읽어보라고 권했습니다. 못이기는 척하며 성경의 첫 장인 창세기를 폈는데 창세기 1장1절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첫 구절부터 감동을 받아 그날부터 성경책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1독을 거침없이 끝냈습니다. 1독을 끝낸 기쁨이란 말로 표현할 수 없었습니다. 삶의 의미가 없었던 저에게 성경은 큰 의미를 안겨주었고, 담임목사님의 설교 말씀은 시들어가는 저에게 생명수와 같았습니다. 모든 것이 성경과 말씀에 있었고, 그 이후로 저는 성경 말씀으로 살기 시작했습니다. 나의 삶을 하나님께 맡기기로 했습니다. 내 인생의 관리자로 예수님을 붙잡았고, 기도로 그리스도를 저의 삶 가운데로 모셨으며, 그리스도가 다스리는 삶을 살아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술과 담배를 끊었습니다. 그렇게 2년이 지나자 건강도 회복되었습니다. 다혈질이며 욱하는 성격도, 나만 알던 이기적인 성격도 변해갔습니다. 한 동안 저러다 말겠지 하던 가족과 친구들이 완전히 변한 제 삶을 보고 “하나님이 계신가보다!” 하더군요. 부모님과 형제들, 아내와 자식들도 이제는 저를 믿어주고 사랑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제는 가족 간에도 대화로 벽을 허물며, 따뜻한 말로 서로 사랑하고 있습니다. 저는 어느 때보다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제가 주님 안에서 변하니 모든 것이 행복합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을 만나서 새로운 삶을 얻은 것이기에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저는 매일 주님의 이름으로 가족들에게 축복기도와 포옹을 해주고 있습니다. 부족한 남편, 못난 아버지였지만 이제는 아내의 좋은 남편, 당당한 아버지로 바로 서기를 원합니다. 10년이 지난 지금도 제 마음에 남아 있는 죄의 쓴 뿌리를 뽑아내기 위하여 눈물로 울부짖으며 기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알지 못하면 모두가 고통 속에 있다는 것을 알기에 복음을 전하기 위한 기도를 간절하게 드립니다. 앞으로도 삶 속에서 더욱 예수님을 전하며 살아가는 인생이 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합니다.
    • 목회
    • 은혜나눔
    2022-03-18
  • 월요병을 극복하는 방법
    2020년부터 COVID19이 세상을 많이 바꾸어 놓았습니다. 많은 생활에 제한을 받으며 온라인으로 업무를 진행하고, 온라인으로 공부도 하고 외식에도 제한이 되고 모임들도 제한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월요병의 증상이 많이 적어졌을 수도 있고, 오히려 어떤 사람들은 더 심하게 느끼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이제는 오랜 락다운 뒤에 정상적인 삶으로 돌아가는 것을 두려워하시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말에 쉬다가 다시 일을 하게 되면 편안하고 좋아야 하는데, 왜 사람들은 ‘월요병’의 증상을 경험하게 되는 것일까요? 사실 월요병은 월요병이 아닙니다. 월요일에는 일을 하느라 월요병을 겪을 여유가 없습니다. 저의 경우는 사실 일요일 저녁 병입니다. 돌이켜 보면 이것의 시작은 학창 시절이었던 것 같습니다. 필자가 학창 시절에는 주초고사라고 하는 것이 있었는데 매주 마다 중요 과목 중 한 과목을 월요일 아침에 시험을 치르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주말에 실컷 놀고 주일 낮에 교회를 갔다 오면 그 후부터 갑자기 걱정, 염려가 밀려오며 우울한 모드로 들어갔던 기억이 있습니다. 필자에게는 학장 시절부터 있었던 ‘일요일 저녁 병’입니다. 이런 것은 왜 오는 것일까요? 일반적으로 평소에 염려, 걱정이 많은 사람들, 다른 말로 하면 불안감의 지수가 높은 사람의 경우에 이런 월요병의 증상을 좀 더 심하게 겪을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위험에 대해서 더 빨리 감지하고 인식하기 때문에 더 빨리 불안해하는 것입니다. 사실 불안감은 미래에 일어날 일을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것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예측함으로 일어나는 반응입니다. 그러므로 무작정 걱정하기 보다는 나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 지를 이미 정확히 알고 있다면 불안감은 훨씬 더 줄어들 수 있습니다. 그러면 월요병을 극복하기 위해 불안을 어떻게 다스릴 수 있을까요? 먼저, 불안은 예측이 불가능할 때 더 많이 느끼는 감정임으로 월요일에 일어날 일에 대해서 예측해 본다면 불안감을 줄일 수 있게 됩니다. 인지 심리학자 김경일 교수는 월요병을 예방하기 위해 미리 생각해 보고 작은 노트에 월요일에 처리해야 할 일들을 기록해 놓는 것이 도움이 된다고 합니다. 분류를 하고 정리를 하면 좀 더 예측 가능해지기 때문에 덜 불안해질 수 있다는 설명입니다. 필자는 그 분의 조언을 따라 월요일에 처리할 일을 미리 기록을 해 보았는데 필자의 경우는 불안감을 오히려 높이는 결과를 경험했습니다. 월요일에 처리해야 할 일을 적다 보니 생각보다 처리해야 할 일이 너무 많은 것을 보고 그 일의 무게에 오히려 압도가 되어서 더 큰 불안감을 느끼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저명한 학자의 조언이라 할 지라도 때로는 모든 사람에게 적절한 것은 아닐 수 있습니다. 자신만의 불안감을 상쇄하는 방법을 발견하는 것이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필자의 경우는 미리 월요일에 해야 할 일을 너무 구체적으로 오랫 동안 생각하는 것보다 잊어버리지 말았으면 하는 일만 작은 쪽지에 기록을 해서 남겨 놓으면 왠지 내가 준비된 느낌이 들어 불안감이 줄어드는 것을 경험하였습니다. 또 한가지는 일요일 저녁에는 마지막 휴일이니까 늦게까지 놀고 잠을 자지 않으면 더 월요병의 증상이 심해지는 것으로 여겨지기에 필자의 경우에는 일요일에는 가능한 스케줄을 많이 만들지 않고, 충분히 쉬고 책을 읽어서 쉬고는 있지만 뭔가 힘들지 않으면서도 창조적인 일을 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지며 훨씬 더 불안감이 줄어드는 것을 경험합니다. 또 한가지 도움이 되는 것은 영적인 경험입니다. 정말로 불안해하고 염려하는 것이 무엇인 지를 정확히 생각을 해 본 후 그 부분을 기도 시간을 통해 하나님께 맡기고 좋은 설교 말씀을 들으면 걱정 사고가 전능한 하나님의 사고로 바뀌면서 불안감이 확 줄어드는 것을 경험합니다. 우리집 네 째는 잠이 없어서 늦게 자는 편인데 가끔은 그것 때문에 피곤이 누적되면 머리가 아플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어제 함께 침대에 잠깐 누웠는데 사람들은 어떻게 잠이 드는 지를 모르겠다고 말하며 잠이 오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잠을 자게 도와주는 기법들을 잠시 설명해 주었는데 그 아이는 자신은 코고는 상상을 하면 어느새 자신이 잠이 들어 있다고 말을 했습니다. 이렇게 자신만이 가지고 있는 불안감을 이겨낼 수 있는 방법들을 기억하고 그것을 잘 사용할 수 있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또한 불안 상쇄 방법 중 또 한 가지는 불안감이 있을 때 그것과 관련된 감정과 생각들을 신뢰할 수 있는 가까운 사람과 나누는 것입니다. 배우자와 같은 가까운 가족 구성원에게 또는 친구에게라도 월요병 불안감의 증상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나누다 보면 그 안에서 공감을 느끼게 되고 나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도 함께 경험하는 것임을 알게 되면서 마음이 편안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때로는 그것을 통해서 카타르 시스가 생겨서 그 다음날을 씩씩하게 맞이할 수 있는 준비된 마음이 일찍부터 생기게 되기도 합니다. 그 외에도 복식호흡을 하는 것, 햇빛을 받으며 산책을 하는 것, 가장 불안한 순간으로 예상되는 상황들에 대해 대처법을 세우는 것과 스스로에게 공감 표현과 격려를 해주는 것 등도 불안감으로부터 마음을 지켜 나가는데 도움이 될 수 있는 방법입니다. ‘월요병’이라고 하는 것을 대할 때 “나는 왜 소심해서 이런 것을 경험하지?” 라고 하기 보다 그런 나의 신체적이고 심리적인 증상을 이해하고 수용하며 공감해 주고 나만의 불안 극복 방법들을 나름대로 적용해 가다 보면 월요병은 병이라고 보다는 월요일을 더 잘 준비하게 하는 ‘전날 준비’가 되어질 수 있을 것입니다. 일요일에 우리는 일시적인 ‘월요병’의 증상이 있을 수 있지만 기억하세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조금씩은 다 가지고 있는 것이기에, 나는 월요병이 있는 병자가 아니라 월요일을 잘 준비하는, 준비성 있는 내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이제 곧 대부분의 사람들이 락다운을 끝내고 제 자리로 돌아가 2021년 말과 2022년을 또 열심히 살게 될 것입니다. 자신을 잘 돌봄으로 용기 있게 새로운 월요일을 맞이하게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해피 뉴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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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고
    2022-03-18
  • 계단
    아직은 계단이 부담스럽지도 않고 두렵지도 않다. 그러나 계단 앞에서 당혹해하고 한숨짓는 어른신들을 본다. 그 분들이 애처롭고 안쓰러운 이유는 언젠가 내게도 그런 날이 올 것이기 때문이다. 상념을 떨치고자 괜히 힘차게 계단을 올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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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3-18
  • 한우 내장탕
    좌석 버스를 기다리는데 '점심특선 낙원내장탕 12,000원' 현수막을 봤다. 확 땡긴다 왜 그럴까? 맛있어 보여서, 내장 탕을 좋아해서, 가격이 합리적이라서, 매장이 크고 깨끗해 보여서? 아니다! 지금 내가 배 고프기 때문이다. 결핍은 채우고자하는 욕구와 욕망을 낳는다. 무엇엔가에 끌려 있다면 먼저 내 마음을 살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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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3-18
  • 사탕 4알
    #1. 매주 수요일 구리시 수택동에 있는 우리교회 원로목사님 사모님이 경영하는 ‘제일사랑어르신복지센터’에 예배 인도하러 간지도 5년째다. 어르신들, 직원들까지 족히 70-80명은 드리는 것 같다. 처음에는 어르신들 앞에서 예배 인도하는 것이 부담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너무 편하고 좋다. 어르신들 부흥회 인도해도 잘 하지 싶다. 매주 말씀을 사모하는 어르신들이 많다. 설교가 끝나면 어르신들은 뜨겁게 박수까지 쳐 주신다. 우리교회서 받지 못한 박수를 그곳에서는 받는다. 예배 후에는 기도해 달라고 아들뻘인 나에게 머리를 조아리는 권사님들도 여럿 계시다. 코로나가 아니면 우리교회 출석하고 싶다고 말하기도 한다. 식사시간에는 선생님들이 정성껏 점심밥을 맛있게 챙겨주신다. 약속이 있어 밥 먹지 않고 가면 어르신들이 왜 밥도 먹지 않고 가냐고 서운해 하시는 분들이 많다. 그래서 웬만하면 꼭 밥을 먹고 나오는 편이다. 식사 후에는 항상 커피타임을 가지면서 도란도란 말씀을 나눠주시는 원장님이신 원로목사님 사모님. 집에서 과일을 준비해 와 대접하는 직원이자 우리교인인 임 집사님 등 모두가 고맙고 감사한 분들이다. 그래서 ‘제일사랑어르신복지센터’ 가는 날이 기쁘고 행복하다. #2. 어르신 중에는 나에게 사탕을 주시는 두 분이 계신다. 두 분 다 아흔을 훌쩍 넘기셨다. 한 분은 구리 딸기원 어느 교회 목사님 어머님이다. 어르신이 주시는 사탕은 호박엿 사탕이다. 연세가 있어서 사탕을 쥐어주시는 손이 차갑고 떨린다. 하지만 그 속에 담긴 정은 뜨겁고 견고하다. 또 한분은 돌다리교회 권사님이다. 권사님이 주시는 사탕은 누룽지사탕이다. 권사님은 예배가 끝나면 나를 빤히 보시다가 눈이 마주치면 주먹 쥔 오른손을 살포시 내민다. 그 손 안에는 항상 누룽지사탕이 들어있다. 개수는 4알이다. 어르신이 쥘 수 있는 맥시멈이 4알이다. 가끔은 3알도 주신다. 딱 한번은 5알을 주셨다. 그 날은 유난히 혈색이 좋아보였고, 찬송소리도 우렁찼던 날이었다. 권사님은 그날 컨디션이 최고였다. 난 어르신이 쥔 사탕 개수를 보면서 그분의 건강을 체크하는 나름의 노하우를 터득했다. 사탕 4알이면 건강이 그럭저럭 하시고, 3알이면 약하신 날이고, 5알이면 정말로 좋으신 날이다. #3. 지난 주 수요일에는 권사님이 보이지 않았다. 직원분이, 지금 많이 약해지셔서 식사도 거의 드시지 못한다고 귀띔해 주었다. 그러면서 전날 있었던 이야기를 해 주었다. 권사님이 전날 센터에 오셨다. 그러나 식사를 거의 드시지 못하자 선생님 중 한 분이 “어르신, 드시지 않으면 천국가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어르신은 더 입을 굳게 다물었다. 권사님은 평소 입버릇처럼 나에게 말했다. “목사님, 나 빨리 천국가고 싶습니다. 빨리 천국 가도록 기도 해 주세요.” 그리고는 종종 예배 때 불렀던 찬송을 혼자 부르시곤 했다. 권사님은 육신이 약해질수록 더 천국을 사모하시는 것 같다. 권사님이 주신 누룽지사탕은 내 책상 한쪽에 수북이 쌓여있다. 사탕 한 알을 까서 입에 물었다. 맛은 있는데 왜 이렇게 눈물이 나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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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3-18
  • 『시험에 관하여』, 김남준 목사 신간
    누구에게나 시험은 찾아옵니다. 모세와 여호수아, 다윗과 세례 요한 그리고 사도 바울에 이르기까지…… 믿음의 사람들은 모두 시험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가늠할 수 없는 시험의 깊이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구조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시험의 때는 위험하지만, 시험을 이길 은혜도 준비되어 있습니다. 당신을 낳으신 하나님 사랑을 의지하여 승리하십시오. 하나님의 품을 파고드는 사람이 이깁니다. “시험의 본질”을 보여 주다 인생에서 시험이 없기를 바라는 것은 현실적이지 않습니다. 세상은 불완전하며 인간 또한 선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시험을 이기는 첫 걸음은 바로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 책은 그리스도인의 삶에 필연적으로 찾아오는 시험이란 과연 무엇이며, 언제 시험에 빠지게 되는지, 시험에 담긴 하나님의 계획은 무엇인지, 성경이 말하는 시험의 본질을 알려줍니다. 시험으로 인해 혼란스럽고 낙심한 신자들에게 자신의 상태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제시하여, 막연한 두려움을 버리고 굳건한 힘과 용기를 얻도록 도울 것입니다. “시험을 이기는 길”을 보여 주다 시험의 본질을 알고,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신자에게 주어진 전부는 아닙니다. 신자에게는 현실을 변화시킬 소망이 있습니다. 이 소망은 우리를 낳으신 하나님을 알고 신뢰하는 데서 시작합니다. 이 책은 시험에 빠진 인간으로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심하게 만드는 질문, ‘하나님은 과연 사람을 시험하시는가?’에 답하며, 신자에게 왜 소망이 있는지, 시험 가운데 특히 요구되는 것이 무엇인지, 시험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실제적인 지혜를 줍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주어진 승리를 기억하고 끝까지 인내하도록 도울 것입니다. “읽기 쉽게 감동을 담아서” 보여 주다 이 책은 시험에 관한 깊은 통찰과 지혜를 담았을 뿐 아니라 모든 신자들이 쉽고 편하게 읽을 수 있도록 짧은 문장, 그림 같은 묘사, 박진감 넘치는 필체로 쓰였습니다. 진리를 선명하게 알려주고 그 진리에 감동하게 하는 이 책은 시험을 피할 수 없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귀한 선물이 될 것입니다. ‣ 추천합니다! 지속되는 시험 가운데 낙심하고 지친 그리스도인 인해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흔들리는 그리스도인 든 주변 신자들을 위로하고 돕기 원하는 그리스도인 시기를 온 구성원이 함께 헤쳐 나가기 원하는 교회 및 단체, 소그룹 리더 본문 중에서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려면 그의 친구를 보라.” 친구는 서로 닮게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오랫동안 지속된 교제 속에서 서로 영향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원리도 이와 같습니다. 완전하신 그분과의 교제 안에서 지속적으로 감화를 받음으로써 온전한 사람이 되어갑니다(빌 2:5-8). 시험은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좋은 방편입니다. 그때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다면 말입니다. 시험과 시련 자체에 사람을 온전하게 하는 힘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들은 수단일 뿐입니다. 시험 속에서 받는 은혜(恩惠)가 그것을 가능하게 합니다. 은혜 없이는 주님의 형상을 본받을 수 없습니다. 말씀 없이는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없고, 기도 없이는 예수님의 마음을 느낄 수 없습니다. 알지도 못하는 것을 어떻게 본받겠으며, 느끼지도 못하는 것을 어떻게 사모하겠습니까? 최고의 행복은 그리스도를 닮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를 위해 시험을 사용하십니다. 거기서 하나님을 만나 변화받게 하십니다. 시험을 당할 때 오래 참아야 합니다. 이 일은 고요한 산속에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일어납니다. 자신이 누구냐고 묻지 마십시오. 사람들 속에 있는 바로 그 사람이 당신입니다. _제2장 인내의 꽃을 피우라 중에서 시험의 때에는 은혜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사탄이 활동할 기회를 얻는 때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시험의 때는 위험합니다. 그때 죄는 자신의 계획을 실행하기 시작합니다. 사탄의 목표는 우리를 영적으로 무장해제시키는 것입니다. 죄와 유혹에 맞서 싸울 힘을 빼앗는 것입니다. 죄와 사탄의 전략은 다음과 같이 진행됩니다. 첫째로, 지성(知性)의 혼란입니다. 이는 생각의 혼란으로 나타납니다. 시험의 때에 제일 먼저 겪는 일입니다. 전에는 명료하고 분명하게 판단할 수 있었는데, 시험에 들면 혼란을 겪습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판단을 내리지 못합니다. 그래서 시험에 든 사람들이 입에 달고 사는 말이 있습니다. “휴우, 나도 잘 모르겠어.” 둘째로, 정서(情緖)의 변화입니다. 침투한 죄는 즉시 정서에 영향을 미칩니다. 생각이 죄에 굴복하면, 거룩한 정서가 사라집니다. 대신 세속적 정서가 일어나 육욕이 번성합니다. 고독과 상처, 미움과 원망 같은 감정들이 생깁니다. 마음은 죄에 친화적이 되고, 죄는 지배력을 갖게 됩니다. 셋째로, 의지(意志)의 변화입니다. 넉넉히 감당하던 섬김도 시험에 들면 힘들게 느껴집니다. 선한 의지의 힘이 약화되었기 때문입니다. 섬김은커녕 예배 출석조차 힘겨워집니다. _제3장 지혜를 구하라 중에서 “무신론자로 사는 게 얼마나 힘든지 몰라서 그래…….” 회심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입니다. 믿음으로 살기가 힘들다고 불평하는 교인들을 만날 때마다 이렇게 혼잣말을 하고는 했습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교회에 다녔습니다. 그러나 15세가 되던 해에 무신론자가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무신론을 주장하는 문학가들과 철학자들의 가르침을 따랐습니다. 그들의 거짓 가르침에 회의를 느끼기 전까지는 신 없이 자유롭게 사는 것이 그렇게 힘든지 몰랐습니다. 아무것도 하기 싫은 사람은 종교도 선택할 수 없습니다. 그 선택도 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자신에 대해 배우십시오. 시험에 대해 알고자 하십시오. 십자가의 은혜가 얼마나 큰지를 생각하십시오. 그리스도인의 자존감은 은혜를 아는 데서 옵니다.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큰지 아는 데서 옵니다. 십자가를 아는 만큼 자신의 존귀함을 깨닫습니다. _제6장 나뉜 마음의 원인을 알라 중에서 시험을 참는 원동력은 사랑입니다. 그 사랑은 은혜를 통해 주어집니다. 사랑 없이 시험을 참을 수 없고, 은혜 없이 고통을 이길 수 없습니다. 시험을 당할 때 은혜를 간구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시험으로부터의 진정한 해방이 무엇입니까? 단지 힘든 상황이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사랑의 교제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험의 때에는 한 가지에만 집중하십시오. 바로 하나님 사랑입니다. 그 사랑에서 미끄러지지 않기를 갈망하십시오. 시험과 시련 속에서 고통보다 더 큰 사랑에 감격하며 살게 해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시험 중에 경건한 두려움을 가지십시오(시 77:7-9). 그것은 하나님의 품으로 파고드는 거룩한 갈망의 증거입니다(시 144:2). 인생의 바다에서 풍랑이 일어날 때, 시험의 물결을 보지 마십시오. 우리를 붙들고 계신 그리스도를 신뢰하십시오. 경건한 두려움과 사랑으로 주님과 화목하십시오. 그 마음으로 기도하기를 힘쓰십시오. 시험을 이길 모든 힘이 오직 거기로부터 나옵니다(시 46:1). 제7장 시험을 참는 자의 행복 중에서 저자 소개 김남준 1993년 열린교회를 개척하여 담임하고 있으며, 총신대학교 신학과 교수로 가르치고 있다. 청소년 시절, 실존적 고민으로 혹독한 방황을 했다. 스물한 살 때 톨스토이를 읽고 기독교에 귀의했다. 아우구스티누스와 조나단 에드워즈, 칼뱅과 존 오웬을 오랜 세월 사숙했다. 인생길에서 방황하는 이들이 기독교에서 진리를 발견하고 사랑함으로 선하고 아름다운 삶을 살게 하는 것이 소원이다. 1997년 이래 기독교 출판문화상을 4회 수상했다(1997, 2003, 2005, 2015). 저서 중 약 40만 부가 판매된 『게으름』은 미국에서 Busy for Self, Lazy for God으로, 중국에서 『懒惰』로 번역 출간되었다. 그 외에도 『죄와 은혜의 지배』, 『신학공부, 나는 이렇게 해왔다』, 『염려에 관하여』, 『다시, 게으름』(이상 생명의말씀사), 『아무도 사랑하고 싶지 않던 밤』(김영사)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 오피니언
    • 책소개
    2022-03-18
  • 성령으로 형제를 대하는 길(갈5:25 – 6:5)
    신앙은 우선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신앙은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그 수준과 색감이 결정되고 열매를 맺는다는 점을 늘 유의해야 합니다. 율법을 주신 중요한 이유도 마음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길을 가르치고, 이웃 사랑의 수준을 더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리고 선명한 색감을 갖기 위함입니다. 본문 5장 19-21절의 ‘육체의 일’은 성적인 문란함(음행 더러운 것 호색)과 관계 속에서 분열(원수 맺음, 분쟁, 시기, 분냄, 이기심, 분열, 당파심, 질투)로 알고 보면 모두 <관계의 죄>입니다. 이어서 기록된 5장 22-23절 성령의 9가지 열매 또한 대부분 이웃과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특징입니다. 사랑, 희락, 화평, 오래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갈5:22-23) 모두 관계 속에서 맺어지는 성령의 열매입니다. 이웃과의 좋은 관계를 위하여 성령으로 살고 성령으로 행하는 것이 필요한데,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제거해야 할 거대한 지뢰가 하나 있습니다. 26절 그것은 ‘헛된 영광’을 구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kenodoxoi 헬라어로는 한 단어입니다. “빈 영광”이라는 뜻입니다. 갈라디아서 말씀 안에서 빈 영광의 의미는 ‘자신이 도달할 수 없는 수준까지 올라가서 의를 성취하려는 태도’를 우선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율법을 다 지켜서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있는 수준까지 누군가 갔으니 나도 갈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우선 할례를 받고 율법을 하나하나 다 지키겠다는 시도를 하는 태도 그것은 헛된 영광을 구하는 모습입니다. 문제는 그러한 헛된 영광을 구하게 되는 과정에서 15절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 경고하며, 그러면 성령의 9가지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서로 비교하고 공격하며 원치 않는 결과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주신 선물인 복음은 경쟁하면서 얻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작은 파이를 하나 놓고 빠른 사람이 먼저 먹어버리는 그런 성격의 선물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높은 정상에 힘 있는 자가 빨리 올라가는 형태로 쟁취해야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 식으로 접근하는 것은 <헛된 영광>을 구하는 것이며 복음을 크게 훼손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앞서가고 성취하여 자신이 남보다 높아지고 인정 받으려는 모습은 헛된 영광을 구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처럼 율법을 잘 지켜서 의를 이루려는 모습으로 살다보면 두 가지 치우친 현상을 겪게 됩니다. 먼저는, 서로 노엽게 하는 것입니다. 26절 prokaleomai 는 ‘화나게 하다. 누군가에게 싸우자고 도전하다’란 뜻으로, 자신에 대한 우월감이 강한 사람은 감당할 수 없는 목표와 생각으로 상대에게 압력을 가하여 상대를 오히려 화나게 만들 수 있습니다. 화나게 하는 사람은 언제나 상대보다 더 나은 경험과 수준이 있다고 자신을 이해하며 곁에 있는 이들을 얕잡아 보다가 예상치 못한 문제를 일으키게 됩니다. 그런 문제를 주로 일으키는 이들이 놀랍게 아버지들일 수 있습니다. 사도는 엡 6:4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parorgizo) 말고 라고 주의를 주었는데, 아버지의 경험과 기준과 높은 생각이 어린 자녀에게 강요로 나타나면 자식을 때로는 화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에베소서와 갈라디아서에서 ‘노엽게 하다’라는 동사가 헬라어로 같은 단어는 아니지만 비슷한 말입니다. 영어로는 to provoke, to wrath 비슷한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이 단어의 반대말은 행복 Happiness입니다. 지적하다가 둘 다 불편한 관계로 인해 불행해집니다. 헛된 영광을 구하는 또 다른 모습은 투기하는 것입니다. phthoneo, envy 부러워하다 상대방을 자신보다 우월하다고 보고 따라가는 모습입니다. 불편한 마음으로 상대의 은사와 재능을 과대 평가하며 자신은 그런 능력이 없다며 자신을 초라하게 여기는 상태입니다. 상대를 노엽게 하는 사람은 지나치게 상대방에게 간섭하려는 경향을 보이는 반면, 시기하고 부러워하는 경우 상대를 아무 비판 없이 받아들이고 맹목적으로 따라가려는 잘못을 범합니다. 이러한 태도는 상대가 어떠하든지 관계 없이 무관심한 방향으로 흐르기 쉽습니다. 그런데 둘 다 헛된 영광에 집착한 모습입니다. 존 스토트 목사님은 이 부분에서 노엽게 하고 시기하는 태도와 정반대는 성령의 열매인 사랑으로 대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랑의 열매를 맺는 이들은 헛된 영광을 구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것을 억제하기 위해 계속해서 성령으로 행하려 애쓴다. 성령께서 그들의 눈을 열어 자신의 죄와 무가치함을 보게 하시고,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 보시기에 얼마나 중요하고 가치 있는 존재인가를 또한 보여 주신다. 그런 사랑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며, 어떻게 하든 그들을 섬길 기회를 찾는다. 요약하면, 기독교적 관계는 경쟁이 아닌 섬김에 의해 지배된다.” 노엽게 하거나 시기하는 관계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성령으로 사랑의 열매를 맺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성령으로 형제를 대하는 첫 번째 방법은 1절, ‘범죄한 형제를 온유한 심령으로 바로 잡으십시오’입니다. 갈라디아교회에서 범죄하듯 잘못한 이들은 헛된 영광을 구하는 이들로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이들을 의미합니다. 이들이 보여준 두 가지 부작용은 너무 빠르고 강하게 비판하며, 부러워하여 관여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사도는 그렇게 하지 말고 온유한 심령으로 관계에 문제를 가지고 오는 이들을 바로잡으라고 했습니다. 온유함은 성령의 열매(엡5:23)입니다. 온유함의 반대는 우월감을 갖거나 자아도취에 빠진 교만한 모습입니다. 하나님께 복종할 수 있는 마음입니다. 누군가 잘못하는 것을 보면 ‘어떻게 그가 그럴 수 있어?’하지만 누구나 그런 현상을 보일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려면 1절하,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자신에게는 문제가 없는지 되돌아 보고, 자신에게도 그런 문제가 있을 수 있고, 앞으로 자신도 그 문제에 빠질 수 있다는 생각을 갖고 범죄한 이를 부드럽게 대하지만, 바로잡으라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는 비복음적인 이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경쟁적이며 문제를 만들어내고 교회를 어렵게 합니다. 그러나 알고 보면 비복음적인 성향이 강한 사람이 있을 뿐 미래에도 완전한 사람은 교회에 한 사람도 없습니다. 비복음적인 행동을 바로잡아주고 십자가의 은혜와 보혈이 교회를 온전하게 하며 새롭게 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해야 합니다. 그러나 온유한 마음으로 그렇게 해야 합니다. 바울이 여러 교회에 편지를 쓴 것은 교회를 바로잡아주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부드럽게 자신의 마음을 전하며 변화를 요청했습니다. 사도는 교회의 잘못을 간과하고 어떻게 해도 구원은 100% 보장되어 있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바울 서신을 읽어보면 온유함으로 상대를 바로 잡으려는 마음으로 설득하고 호소하는 모습으로 가득합니다. 고전 9:19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섬기는 모습으로. 갈 5:16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대안을 제시하며. 엡 5:8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신앙적인 자존감을 세워주며. 빌 4: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믿음>의 확신을 가지고. 몬 1:21 나는 네가 순종할 것을 확신하므로 네게 썼노니 네가 내가 말한 것보다 더 행할 줄을 아노라, 상대를 신뢰하고 존중하며 성령으로 형제를 대하는 두 번째 방법은, 2절 ‘너희가 짐(baros)을 서로 지라’ 헬라어 baros는 ‘무겁고 큰 짐’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사람마다 다 짐이 있는데 결코 가벼워 보이지 않습니다. 서로가 짐을 잘 질 수 있도록 곁에 있는 이들이 더 많이 도와주어야 합니다. 교회에 그런 기능이 있습니다. 강단에서 선포되는 설교 말씀이 좋고 매주 은혜를 받는다 해도 어느 시점에 가면 좌절할 수 있고 기쁨이 사라집니다. 그 이유는 우리 인생의 짐을 교회를 통해 서로 져주는 기능이 살아 있어야 가벼워질 수 있도록 교회는 설계되었는데, 계속 혼자 무거운 짐을 안고 있고, 그 어떤 도움도 받을 수 없는 상황이 이어지면 견디기가 힘이 드는 것입니다. 남의 짐을 져 주는 생활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법을 몸소 실천하며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순종입니다. 10여년 사역 도중 시력이 많이 떨어져서 안식년 허락받아 이곳 저곳에 머물다가 지금은 제주도에서 두 달 쉬고 계신 목사님과 어제 통화를 했습니다. 매 주일 제주도에 개척된 약한 교회를 찾아 가서 예배에 참석하고 있는데, 섬기던 교회에서 익명으로 특별헌금을 보내주셔서, 지금은 주일마다 50만원씩 가져가 재정이 약한 교회에 헌금을 드리며 지원하는 사역을 이어가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자신의 쉼에 초점을 모으고 목회 구상을 해도 충분한데, 목사님이 남의 짐을 져 주는 시간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머물고 계신 선교센터에는 중국인 신학생들이 머물던 곳인데, 목사님을 뵈러 온 지인 목회자가 상황을 보고 적지 않은 헌금을 드리고 안식년을 갖는 목사님도 헌금을 드리는 과정에서 그곳을 떠나려던 관리자인 선교사님이 그곳에 더 머물러 사역을 하기로 했다는 마음의 변화를 말해서 기뻤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13:35)며 서로 돕는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기 원하셨습니다. 서로를 가장 잘 돕기 위해서는 자만심이나 열등감을 버리고 형제를 돕고 사랑하며 살아야 합니다. 모두에게 고마운 사람이 될 수는 없지만, 꼭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들으면 우리는 내가 가진 것으로 도울 수 있고 그렇게 서로를 돕는 관계 속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공동체를 세워갈 수 있습니다. 이것은 율법의 짐을 진 이들에게 볼 수 없는 삶의 태도입니다. 율법의 짐을 진 이들은 자신을 초라하게 여기고 남을 판단하며 도움을 주기 보다는 어떤 원칙에 의해 살아가는 것으로도 숨이 가쁩니다. 그러나 남의 짐을 져 주는 사람은 이웃을 사랑하면서 자신도 행복하고 도움을 받는 이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게 합니다. “율법의 짐 대신 남의 짐을 지면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할 수 있습니다.” 사도는 다시 한 번 헛된 영광을 따라 자신을 과대 평가하는 생각을 바꾸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3절 ‘만일 누가 아무 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라’ 사실 그리스도의 은혜를 생각하지 않고 자신을 너무 과대평가하는 이들은 스스로를 속이는 가운데, 누군가를 도울 기회가 와도 잘 나아가지 못합니다. 형제가 잘못할 때 자신도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면 온유한 마음과 겸손한 모습으로 형제의 약점을 대신 짊어지는 사랑을 베풀 수 있습니다. 남을 업신여기고 연약한 형제의 약점을 사랑으로 대신 짊어지려면 정당한 자기 평가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남의 이야기를 많이 하고 한국 교회를 자주 거론하는 습관을 갖고 있는 이들은 자신의 연약함과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를 늘 놓칩니다. 자신이 부족하고 연약하다는 것을 놓치면서 형제에 대해, 공동체에 대해 너무 예민하거나 무딘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형제를 대하는 길 세 번째 방법은 4절 ‘자기의 일을 살피라’입니다. 그런데 정말 중요한 것은 자기의 일을 살피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남의 상황과 다른 이의 문제가 아니라 내 상황과 내가 해야 할 일을 미루지 않고 잘 감당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지나치게 남의 일에 관심을 많이 갖는 것을 지지하지 않습니다. 3절이 자신의 존재가 어떤 상태인지 늘 점검하라는 말씀이라면, 4절은 각자에게 주어진 일을 살피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가면 내가 할 일에 대해 주님 앞에 답변을 하게 될 것입니다. 내게 주어진 일을 감당했는지 그렇게 하지 않았는지를 주님이 우선 물으실 것이며 나는 그것을 대답해야 하기 때문에 내 일을 잘 감당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선한 일을 많이 하는 은퇴목사님이 계신데, 늘 약한 이들을 도우며 시간을 쏟고 에너지를 집중하시다가 자신이 섬기는 교회 안에서 일어난 문제로 인해 큰 곤욕을 겪고 은퇴하신 것을 본적이 있습니다. 자신이 맡은 교회 일을 등한히 하면서 목회자들에게 지나친 간섭을 하는 것으로 신앙생활의 초점을 모을 수도 있습니다. 먼저는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잘 감당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하면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는 있어도 남에게는 있지 아니하리니’(4절) 이 문장은 해석하기가 어려운데,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 있고 남에게는 없다는 의미로 볼 수 있습니다. 심판대 앞에서 남의 자랑을 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따라서 그리하면 각 사람은 자신의 자랑을 자신에게만 돌릴 것이지 다른 형제들에게 돌리지 아니하리라 그렇게 해석을 하게 되면 경쟁적으로 살면서 자기를 자랑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일을 살핀 후에 다른 사람들 앞에서 허풍떨지 않고 자신의 자랑을 자신의 것으로만 삼으라는 의미가 됩니다. 지금은 모두가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누구는 이렇게 하는데 나는 이 정도 밖에 못하는가? 아니면 내가 이렇게 하는데 누구는 왜 이 정도도 못하는가? 그런 생각과 비교의식이 우리 안에서 자연스럽게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이 때 우리에게 주시는 정말 중요한 말씀이 4절입니다. ‘각 사람은 자기 일을 살펴보십시오. 그러면 자기에게는 자랑거리가 있더라도 남에게까지 자랑할 것은 없을 것입니다’(4절, 새번역) 남들이 어떠하든, 내가 가는 길을 걸어갈 이유가 분명하다는 메시지가 여기에 담겨 있습니다. 율법주의자들은 이러한 부분에서 우월감과 열등감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복음으로 사는 이들은 늘 자유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가치가 남에 의해 결정되지 않고, 하나님이 나를 인정해 주시는 그것에 있습니다. 그러면 만족하며 살아갈 힘이 있습니다. 5절, ‘자기의 짐(phortion)을 질 것이라.’ 남의 짐은 내가 들어주어야 할 무거운 짐으로 여겨지지만, 5절의 자기가 져야 할 짐은 헬라어로 작은 손가방 같이 작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저 사람 얼마나 힘들까 그런 마음을 갖고 누군가를 돕는 자리에 나아가야 하지만, 내 짐에 대해서는 스스로 작게 여기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그 작은 짐을 남에게 맡기지 않고 자신이 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남편이 자기가 큰 짐을 들고 있고 아내가 작은 가방을 들고 걸어갈 때, 건강하고 사랑스런 남편은 몸의 균형을 잡기 위해 자신에게 아내가 든 가방을 달라 해서 들고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좋지 않은 어른은 임신한 며느리가 든 무거운 짐을 보면서도 작은 자신의 짐까지 맡기며 빈손으로 가려고 합니다. 그냥 빈손으로 걸어다니면서도 피곤을 호소할 수 있습니다. 저는 목회하는 일이 너무 무겁고 힘들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주님이 항상 도우시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는 기후 변화와 환경문제, 계속되는 코로나 상황, 다음 세대가 우리가 하는 일을 잇는 문제, 점점 더 이기적으로 바뀌고 있는 사람들의 심성의 어려움 등 정말 많은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갈라디아 교회는 율법주의자들의 경쟁적이고 자기의 거룩을 드러내려는 끝없는 허영의 모습으로 인해 곤란한 지경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문제의 해결점의 시작은 놀랍게도 각각 자기의 크지 않은 짐을 지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각자의 짐이 어마어마하게 크지 않습니다. 그냥 배낭 정도의 짐입니다. 그 짐이 크지 않은 이유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우리 주님께서 져 주시는 은혜 속에 우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인생을 살아내는 것이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가을을 땀 흘려 보내야 하고 겨울을 밀어내며 봄이 올 모든 준비를 우리의 힘으로 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위치에서 우리가 할 일을 하면 하나님은 그것을 귀하게 여기실 것입니다. 두 달란트 받은 사람이 땀 흘려 두 달란트를 남기면 됩니다. 주인은 다섯 달란트를 남긴 자와 비교하지 않으십니다. 한 달란트 받은 자의 잘못까지 거론하며 연대책임을 지라고 책망하지도 않으십니다. 때론 남의 짐을 져야 하지만, 모든 짐을 우리가 다 져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본문 5장 25절에 기록된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하게 되면서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 헛된 영광을 구하지 않으며 건강한 자아 정체성을 가지고 범죄한 이들을 온유한 심령으로 바로잡을 수 있습니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짐을 서로 지는 사랑의 공동체를 얼마든지 이룰 수 있습니다. 성령은 우리가 그렇게 대단하지도 초라하지도 않으며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어진 가치를 정당하게 평가하십니다. 자신을 남과 비교하지 않고 각자의 일을 소홀히 여기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힘을 성령께서 주십니다. 성령은 우리가 질 짐을 가볍게 하십니다. 주님이 책임져 주실 것이고 함께 하시며 도우실 것을 성령은 믿게 하시고 어려움 속에서도 복된 길을 걸어가게 하십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성령으로 형제들을 대하십시오. 겸손한 모습으로, 다른 이들의 짐을 져주는 사랑을 베풀면서, 자신의 일을 신실하게 감당하면서 앞으로 나아가기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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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3-18
  • 인도네시아 이야기 4
    선교사가 되었을 때 마음에 가장 걸렸던 것은 홀어머니를 두고 선교지로 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아들을 하나님께 바치셨고, 목사가 되었을 때 너무 기뻐하셨지만, 선교사가 되어 중국에 간다고 했을 때 “굳이 네가 가야 하니?” 말씀하시며 안타까워하셨다. 자식을 다들 위험하다고 하는 중국에 보내고 싶지 않은 어머니의 인간적인 모습이 이해가 된다. 몇 년이 지난 후부터는 매번 한국 방문 때마다 물으신다. “이제 충분하지 않니?” 믿음직한(?) 장남이 먼 타지에서 고생하는 것이 마음이 쓰이시는 것 같다. 어머니의 평생 소원은 아들이 목회하는 교회에서 매일 철야기도 하시는 것이었다. 그런데 나는 그 소원을 들어드릴 수가 없었다. 스스로 이렇게 위로했다. “어머니도 저렇게 말씀하시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는 이해하시고 응원하실 거야.” 내 기억에 어머니는 여전도사 사역에서 은퇴하신 이후 집에서 주무신 적이 거의 없었다. 매일 교회 지하 1층에 마련된 방에서 권사님들 몇 분과 철야 기도를 하셨다. 물론 밤새 기도하진 못하셨을 것이다. 어머니는 초저녁 잠이 많으시고, 어디서든 잘 주무신다. ^^ 그래도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살려고 몸부림 치는 모습을 하나님은 기뻐하셨을 것이다. 나는 그런 어머니를 보며 자라왔다. 그래서 부족하지만 적당히 타협하지 않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며 살려고 애써왔다. 그리고 감사하게도 지금까지는 그 길을 가고 있는 것 같다. 아, 코로나! 어머니가 위독하시다고 하는데 빨리 돌아갈 수가 없다. 일단 내 손에 여권이 없다. 목회자 비자 발급이 늦어지며, 기존의 단기비자 연장 신청을 위해 이민국에 들어가 있다. 여권을 돌려받고 나서도 쉽게 결정을 내릴 수가 없다. 코로나로 비자를 못 받아 1년 남짓 선교지를 떠나 있다 겨우 다시 들어왔고, 드디어 사역지가 결정되고, 이사를 준비하며 목회자 비자 발급을 위한 프로세스를 진행하고 있다. 그리고 어머니는 지난 몇 달간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시며 좋아졌다 나빠졌다 하셨기에... 망설이다 파송 교회에 상황을 알렸고, 담임 목사님의 “다른 것 생각하지 말고 속히 귀국하라”는 말씀에 용기를 내어 들어왔다. 허락하신다면 임종을 지키고, 최소한의 아들 역할을 할 수 있겠구나 기대하며. 격리 이틀째, 하나님께서 어머니를 부르셨다. 이어지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 인도네시아는 8월부터 방역 강화 국가로 지정되어 격리 중 장례 참석을 위한 외출도 금지되었다고 한다. 지역 보건소, 질병관리청, 행정안전부에 여러 번 문의를 해봐도 예외가 없다고 한다. 장남이 어머니 빈소를 지키지 못한다니… 꿈에도 생각해보지 못한 일이 내게 벌어졌다. 최소한 이건 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래서 장례식장도 해외입국자에 대한 방역 수칙이 까다로운 대학병원이 아니라 일반 장례식장으로 정했는데... 어머니... 죄송해요. 온라인 장례 감사하게도 온라인으로 모든 예배에 참석할 수 있었다. 예배와 장례 중요 절차마다 페이스톡으로 연결해 준 아들 덕에 온라인으로라도 함께할 수 있었다. 하늘의 위로 고통스러운 시간을 끝내시고 하나님 품에 안기셨다는 것, 잠시 헤어지지만 우리 모두 천국에서 다시 만날 소망을 품고 있다는 것. 그래, 더 무엇이 필요한가? 다른 것들이 뭐 그리 중요한가? 잠깐의 이별일 뿐인데. (연락을 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코로나 시국이라 적극적으로 알리지 못했습니다. 기도해 주시는 모든 분들께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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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3-18
  • 서있다
    길을 지나다가 문득 눈에 띄었다. 전에 쓰러져있던 볼링장 광고물이 다시 서있다. 반가왔다. “오늘은 잘 서있네!”하며 마음 속 인사를 했다. 아무도 모르리라. 내가 그 광고물에 마음 주고 있다는 것을. 스쳐지나가는 일상과 사람들이 내게 들어올려면 내 마음 자리를 내주어야한다. 내 마음 자리에는 누가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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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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